꽃잎처럼 떨어지다
박경범 지음 / 니즈커뮤니케이션 / 2007년 8월
평점 :
품절



인기여배우의 죽음을 다룬 소설
꽃잎처럼떨어지다

밭 밑에 짓이겨진 꽃잎을 두고
우리는 꽃줄기가 너무 약했다고만 탓할 수 있는가?
한 인기여배우의 일대기가 그녀가 태어난 1980년도 당시의 세태를 그리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끼있는 아이로 자라 고교생 때부터 연극배우와 학생복 모델을 하던 주인공 박혜영은 순수한 이미지의 여배우로 자리 잡는다.
그러나 가정 형편으로 돈이 필요해 대박을 기대하고 노출연기를 한 영화가 실패하자 좌절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세파에 스러지는 꽃잎과 같이 생을 지고 만다.
그녀의 죽음이 단지 그녀의 우울함과 나약함이 아니라 이 세상 구조의 모순 때문이라는 것을 말하려는 작가는, 밭 밑에 짓이겨진 꽃잎을 두고 우리는 과연 꽃줄기가 너무 약했다고만 탓할 수 있는 것이냐고 묻는다. 
그녀를 파국으로 몬 영화가 제작되기까지의 모든 과정이 권력층과 부유층의 욕심과 허영이 빚어낸 필연적 사건임을 파헤친다. 이제까지 순수한 예술인의 세계로만 알았던 문학과 영화의 세계가 그러한 추악한 권력놀음이었다는 것은 고정관념에 젖어 있던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기에 충분하다. 물론 이 작품은 다큐멘터리 기사가 아니고 하나의 소설에 불과한 만큼 그것이 있을 법한 진실이냐 아니냐 하는 것은 전적으로 독자의 자유로운 판단에 달려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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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오울프 1 - 베오울프와 괴물 그렌델
박경림 지음 / 해토 / 2007년 11월
평점 :
절판


고전의 대중화가 고전의 왜곡이 되어서는 안 된다


- 영화 베오울프의 원작과의 차이를 말합니다 


고전의 대중화를 가져온 영화예술


오늘날 인간사회의 문화를 선도하는 예술장르는 무엇일까. 여러 의견이 있을 수 있지만 어느 모로 보나 영화야말로 대중을 향한 강력한 파급력(波及力)으로서 타 장르의 추종을 불허한다고 하겠습니다.
특히나 영화의 힘을 더욱 느끼게 되는 것은 일상을 소재로 한 잔잔한 실사극(實事劇) 영화보다도, 현실에서 보기 어려운 웅장한 장면을 보여주는 블록버스터에서입니다. 더군다나 그 장면이 인류가 수천년 동안 상상만 해왔던 신화나 영웅의 이야기라면 관객의 호기심은 극에 달합니다.
옛적에 한 두 명의 시인이 마치 저 혼자 보았듯이 사람들에게 읊어줌으로써 청중들로 하여금 마음속에 동경하게 하였던 이야기들이 이제는 직접 관객 앞에 재현되어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실로 경이로운 변화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제는 고전이 주는 교훈과 깨우침을 굳이 글이나 진지한 사색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도 기꺼이 받아들일 여건이 되었음은 진정 반가운 일입니다. 


영화제작을 위하여 변형된 내용으로 고전이 알려져


그런데 그러한 감격적인 변화도 마냥 좋게만 생각할 수는 없는 면이 있습니다.
얼마 전에 영화 트로이를 보면서 여러 주인공들의 행위와 관계가 원전(原典)과 다르게 임의로 바뀐 것을 보고 당혹한 바 있었습니다.
이럴 때 원전의 내용을 기대하며 찾아간 관객은 일단은 감독의 자의(恣意)를 탓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정해진 시간 내의 상영을 위한 여러 장면의 축약, 관객이 원작을 알고 있는가의 여부와는 무관하게 흥행을 고려한 극적 긴장의 가공, 세트제작과 톱스타기용에 따른 제작비의 효율성 제고 등, 감독의 자의에 의한 것이라고만은 볼 수 없는 불가피한 사정이 영화제작에는 따랐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물론 과거의 영화에서는 그러한 시도가 적었고 스토리전반의 균형적인 요약이 주류였지만, 근래 들어 원작의 과감한 변주(變奏)는 상례(常例)가 되었고 이번에 관람한 베오울프 또한 바로 그 범주(範疇)에 속합니다.
문제는 영화를 접하는 많은 대중이 원전을 거치지 않고 영화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애초부터 이것은 원작과는 무관하게 단지 흥미와 볼거리만을 위한 영화라고 밝히면서 관객에게 위락을 제공한다면 상관없겠으나 관객이 그 영화의 내용이 오랫동안 인류가 가치를 존숭(尊崇)했던 고전이라는 선입감을 가진 채 관람하였을 때는 그 역효과가 없지 않을 것입니다.
베오울프의 이야기는 영어권에서는 이미 널리 알려진 이야기이므로 영화에서의 변주가 나름대로 의미가 있겠지만, 원전의 내용이 보편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우리문화권에서 원전의 소화를 거치지 않고 변형된 이야기만을 두고 우리가 고전이라고 받아들이기는 어색합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영화 베오울프와 원전과의 다른 점을 충분히 알려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봅니다.


영화 베오울프가 원전과 다른 주요 내용들 


그렌델은 원래 털투성이 괴물로 알려졌지만 영화에서는 에이리언 등 기존의 우주괴기영화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끈적끈적한 괴물로 나옵니다. 이것부터 할리우드 제작진의 취향이 나타난다고 보겠습니다.
흐로스갈왕이 덴마크의 왕이고 베오울프가 외국 예이츠의 출신인 것은 맞지만 영화에서 베오울프가 흐로스갈왕의 자리를 물려받는 것은 매우 비약적인 변형입니다.
베오울프는 덴마크에서 공을 세운 뒤 다시 자기의 나라로 돌아옵니다. 고국의 왕 히엘락(영화에는 언급되지 않습니다)은 베오울프의 외삼촌입니다. 후에 히엘락이 전쟁에서 죽고 그 아들이 이어받았지만 아들마저 스웨덴 군대에게 죽고 말아 베오울프가 왕이 됩니다. 그리고 베오울프는 히엘락의 왕비였던 히드와 결혼하는데(원전자체에 언급된 것은 아니고 배경자료입니다.) 영화에서는 흐로스갈의 왕비였던 웨알데아와 결혼하는 것으로 나옵니다. 물론 원전에서도 웨알데아가 용감한 베오울프를 사모하는 분위기는 감지되지만 그것으로 그치고 베오울프는 상을 받고는 덴마크를 떠나고 마는 것입니다.
베오울프는 그렌델의 팔을 뽑은 후 나중에 확실히 죽인 증거로 목을 가져옵니다. 그런데 원전에서도 그렌델의 어미를 확실히 죽인 증거는 가져오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그렌델의 어미는 남자 해석가들로서는 죽이기 아까운 매력적인 캐릭터인 듯합니다.
영화에서는 놀랍게도 베오울프가 그녀의 유혹에 빠져 타협하고는 사람들에게는 죽였다고 거짓말을 하는 것으로 나옵니다. 그래서 그렇게 죽였다고 기록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물의 마녀’가, 자기를 잉태시켜주면 최고의 왕으로 세워주겠다고 하여 베오울프는 그것을 받아들이고 마는 것으로 설정되어있습니다.
실제로 원전에서는 베오울프가 고국 예이츠로 돌아간 후 우연치 않은 일이 계속 발생하여 결국 왕이 되고 맙니다, 그리고 50년을 가장 훌륭한 왕으로 있게 됩니다. 
영화에서는 후에 기독교 성직자가 된 운훠스에 딸린 하인이, 베오울프가 물의 마녀와 타협하며 준 증표인 黃金龍盞을 훔쳐와서, 그녀와의 협정이 깨지고 화룡이 나타나 베오울프의 왕국(영화에서는 덴마크지만 원전에서는 예이츠)을 습격하는데, 운훠스라는 인물이 초반에 베오울프를 질투하다가 자기의 보검을 빌려주는 것은 같지만 원전에서는 운훠스는 그 이후로는 나오지 앉습니다. 게다가 기독교 성직자는 전혀 無根이며 원전의 분위기는 기독교 신앙을 기정사실로 합니다. 다만 왕비의 아름다움을 칭찬할 때 여신과 같다는 비유를 하곤 하여 일리아드와 오디세이 시대의 다신교 영향이 남아있습니다.
영화만을 알고 원전에 대한 분석이 없을 때에는 영화에 강조되는 인간의 불완전성과 인간내부의 악마성 묘사에 경도된 나머지 원전은 마치 흑과 백의 단순한 선악구도로 나뉘었던 것으로 치부하려 할지모릅니다.
그러나 원전에서도 화룡이 나타난 것을 두고 베오울프는 자신이 무언가 오래된 진리를 거스른 것이 있기 때문일 거라고 자책합니다. 그리고 영화에서는 생략되었지만 예이츠와 스웨덴의 갈등과 전쟁이 묘사되면서, 싸울 수밖에 없는 인간의 본질을 비극적으로 표현합니다. 영화에서 베오울프가 만난 프리지아의 휜 왕은 원전에서는 궁중시인이 읊는 삽화이야기에 나오는데 원전의 배경시대보다 더 옛날의 인물이라 베오울프와는 만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원전에서는 화룡의 습격은 한 백성이 우연히 용의 소굴에 들어가 보물을 훔친 사건으로 비롯됩니다.
쉽게 찾아지지 않으면서도 영화의 비약해석 중 백미인 것은 마지막의 장례식장면에 다시 나타나는 ‘물의 마녀’입니다. 영화만으로 보면 그저 속편의 여지를 남겨두려는 의도이거나 안젤리나졸리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더 보게 해주는 서비스로 보면 그만입니다.
베오울프 원전에서는 머리를 땋은 예이츠의 노파가 베오울프의 장례식에 나타나 장송의 노래를 부릅니다. 그 여인의 사연을 추정하자면 베오울프를 사모했던 여자 주술사(呪術師) 정도로 보면 평범한 상상이지만 영화에서는 그 머리 땋은 여인이 바로 ‘물의 마녀’ 즉 그렌델의 어미가 되는 것입니다.
실로 ‘끔찍한’ 비약적 해석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물론 그렇게 영화의 의도를 해석하는 필자의 비약일수도 있겠지만, 머리 땋은 여인의 캐릭터는 ‘물의 마녀’가 처음 나타날 때부터 강조되어, 길게 땋은 머리는 괴물짐승의 꼬리와 같은 묘한 분위를 자아내는 것입니다.
마지막의 장례식에서 원전은 베오울프의 장례식에 높은 화장대(火葬臺)를 쌓고 무덤을 세우는 방식이지만 영화에서는 배 위에 뉘어 물 위에 장사지내는 방식으로 나옵니다. 배 위에 장사지내는 것은 원전에도 나오는 것으로서 다만 전반부의 덴마크왕들에게 해당되며 화장은 하지 않고 멀리 물 밖으로 보내는 식입니다.


‘정본’ 베오울프 영화의 탄생을 소망하며


이와 같이 베오울프가 젊은 시절에 그렌델을 만나고 늙은 후에 화룡을 만나는, 1, 2부로 나뉜 이원적인 이야기를 단번의 스토리로 압축하는 중에, 영화 속의 한 인물이 원전의 두 인물을 겸하든가 하는 식으로 인물도 압축이 되었습니다.
화룡의 동작은 너무도 재빠른 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비슷한 영상을 보여주는 공룡영화도 이미 예전의 공룡백만년의 느린 동작에서 주라기공원의 재빠른 동작으로 바뀐 후라서 그런 현상이겠습니다.
아쉬운 것은 왜 베오울프 같은 좋은 소재가 이전의 시절에는 제작되지 않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번의 영화 이전에 베오울프가 영화로 제작된 것은 1999년 이후 비교적 규모가 작은 영화 두 편이 알려져 있을 뿐입니다.
정말로 베오울프가 영화 벤허와 쿼바디스의 시절에 만들어졌다면 그 당시 할리우드의 순수한 열정으로 지금보다 베오울프의 비장한 영웅담을 진지하고 멋지게 그려내지 않았을까 하는 것입니다. 영화의 공중전은 박진감을 높이려는 것이었겠지만 비현실적입니다. 화룡이 한번 불을 뿜으면 지상의 한도시도 불에 타는데 많은 군사들이 출동하는 것도 무리가 있습니다. 날고 있는 용과 싸울 수는 없으니 인간이 용의 소굴에 들어가 싸워야 합니다. 만약에 벤허와 쿼바디스의 시절에 영화가 만들어졌다면 베오울프가 화룡이 소굴에 들어가 쉴 때 굴속에서 격투를 벌이는 장면이 나왔을 것이며 그 스케일과 박진감은 덜했을지 몰라도 영웅적인 비장함은 한층 더 실감나게 보여주었을 것입니다.  
현대의 영화예술은 어차피 수백년이 흐르고 나면 역시 하나하나 귀중한 문화재로 남을 것입니다. 그러면 손꼽히는 고전의 이야기 또한 가장 그 내용을 잘 표현한, 영화로서의 정본(正本)이 있어야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의 베오울프는 아무리 봐도 정본은 아닙니다. 이미 한번 좋은 정본영화를 만들 시절은 놓쳤지만 그래도 영화예술적 열정이 있는 누군가 언젠가는 해야 할 일이라고 봅니다.
그런 면에서, 순수한 영웅의 선악대결을 그리기에 이미 진력이 나서 어찌해서라도 구실을 찾아내 비틀려고 애쓰는 현재의 할리우드 분위기에 물들지 않은 제작진이 더욱 가능성이 있다고 봅니다. 베오울프와 화룡의 이야기는 괴물의 봉준호 감독, 디워의 심형래 감독이 한번 시도해볼만한 소재라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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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베오울프...또 하나 기억되는 도전
    from 까칠맨의 버럭질! 2007-11-18 01:27 
    오늘도 어김없이...영화관으로...ㅋㅋ 주말에 별일 없으면 일산 윈스턴돔 CGV에서 영화를 본다. 마눌이 회사에서 지원을 다 해줘서 막 본다...헐헐... 베오울프를 봤다. 디지털3D로 상영되는 것을 과감하게 골라...네이뇬에서 어떤지 검색도 해보고 다른 블로거들의 의견도 들었고.... 일단 봐도 무방힐 듯 해서... 안젤리나 졸리의 누드 모습이 나온다고 하여 화제였고 난 도 슬쩍...흐흐흐 난 실사와 3D 애니가 결합된 영화인 줄 알았는데..완전..
 
 
까칠맨 2007-11-18 0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그렇군요..저도 써핑하다가 원작이 그렇다는 것을 알았는데...쉽게 잘 이해했습니다 ^_^ 원작을 읽어봐야겠군요...트랙백 걸고 갑니다.꾸벅...

藝術人 2016-03-08 23:37   좋아요 0 | URL
지금 도서출판 미래지향 출판의 정본이 있습니다.

독서가 2007-11-18 08: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예. 영화의줄거리를 그냥따라가면서 쓴소설은 읽을가치가없을것입니다. 원전에 바탕한 소설이라야 읽은 보람이 있습니다.

藝術人 2008-02-06 08: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대 댓글이 잘안되네.
 
베오울프 2 - 베오울프와 화룡
박경림 지음 / 해토 / 2007년 11월
평점 :
품절


 

이 시대에 진정 베오울프의 원전소설이

있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




- 선악의 구도가 해체된 베오울프는 베오울프가 아니다.




오늘날 인간사회의 문화를 선도하는 장르는 무엇인가. 여러 의견이 있을 수 있지만 어느 모로 보나 영화야말로 대중을 향한 파급효과로서는 타 장르의 추종을 불허한다고 볼 수 있다.

오래 전 한 두 명의 시인이 마치 저 혼자 보았듯 읊어줌으로써 청중들로 하여금 그 위대한 이야기를 동경하게 했던 영웅담들은 이제는 직접 관객 앞에 재현되어 보이고 있다.

얼마 전에 영화 트로이를 보면서 여러 주인공들의 행위와 관계가 原典과 다르게 임의로 바뀐 것을 보고 당혹한 바 있었다. 그것은 정해진 시간 내의 상영을 위한 여러 장면의 축약, 흥행을 고려한 극적 긴장의 加功, 세트제작과 톱스타기용에 따른 제작비의 효율성 提高 등 감독의 恣意에 의한 것이라고는 볼 수 없는 불가피한 사정이 영화제작에는 따랐을 것으로 思料된다. 그나마 다행스러웠던 것은 비록 등장인물들의 갈등관계설정이 바뀌었다고 해도 원전의 대강의 틀은 유지되었다는 것이다.

문제는 영화를 접하는 많은 대중이 원전을 거치지 않고 영화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애초부터 흥미와 볼거리를 위한 영화라고 솔직히 밝히면서 대중에게 위락을 제공한다면 상관이 없겠으나 관객이 오랫동안 인류가 그 가치를 尊崇했던 고전이라는 선입감을 지닌 채 관람하였을 때는 그 역효과의 영향이 없기 어려울 것이다.

이러한 문화혼돈의 시대에 아직도 문학이라는 방법으로 고전의 가치를 이어줄 길이 있음은 다행스러운 것이다. 그러기에 문학은 할 수 있는 한 인간이 추구할 올바른 가치를 어떤 외부적 요소에 영향 받지 않고 표현하며 堅持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해야할 문학이 역으로 외부의 비본질적인 樣相에 초점을 맞춘다는 것은 우려될만한 일로서 비단 문학의 위기가 심심찮게 거론되는 우리 한국에만 있는 현상이 아님도 알 수가 있다.

J.R.톨킨이 말했듯이 베오울프의 주제는 '암흑의 힘과 싸워야 하는 인간의 운명'이다. 원전이 지극히 난해하여 베오울프를 崇慕한 여러 작가들이 있는 그대로의 해석을 포기하고 변형된 아류(亞流)의 창작을 통해 창작욕의 대리충족을 한 바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변형 또한 원전의 주제를 지키는 범위 내에서 있어야 한다. 더군다나 원전의 이름을 그대로 따오는 경우에 있어서 원전주제의 왜곡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른바 현대적으로 각색되고 큰 뼈대에 있어서는 원전을 그대로 따라가고 있다하여도 그 큰 뼈대는 단순히 등장인물의 이름과 그 배경을 가지고만 말해질 것이 아니다. 암흑의 힘과 싸워야 하는 인간을 묘사하는 작품이 ‘선/악의 구도가 해체되고’ ‘누가 인간이고 누가 괴물인가’ 헷갈리는 허무주의로 변형되고 만다면 보통의 문제가 아니다.

이러한 현상은 돌발적인 것이 아니라 근래 세계의 영화감독과 소설가 등 다수의 창작가들이, 限定된 시야에서 善者然하고 賢者然하는 稚氣어린 수정주의적 사상으로 무장되어, 진리에 대한 허무주의적 태도를 주류화했던 경향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화룡의 행패를 맞아 이것은 아마도 오래된 진리를 거스른 탓이리라고 괴로워한 주인공 베오울프였다. 그 이름을 빌어 ‘옛 법칙’을 어기는 행태를 베오울프의 원저자가 알게 된다면 실로 痛歎해 마지않을 일이다. 고전의 주제를 알지 못하거나 혹은 반대하는 자들이 그 고전의 이름을 빌어 그 정신을 왜곡하는 일은 있지 말아야 할 것이다

물론 서양은 이미 천여 년간 익숙한 사상(그러한 사상을 바탕으로 근세에 최대의 번영을 이뤄냈지만)에 싫증이 날 법도 하여 그러한 각종의 자유로운 해석을 즐기고 싶어지는 상황을 이해할 만도 하다. 그러나 우리가 그러한 경향을 멋모르고 따라서, 미처 원전의 주제에 대한 제대로 된 해석의 底邊도 없는 상태에서 왜곡된 주제를 오래된 가치와 혼동하여 받아들일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은 베오울프의 주제 그대로를 읽고 소화하여 시대정신의 양식으로 삼아야할 때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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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무드 - 유대 오천년의 지혜
마빈 토케이어 지음, 박경범 엮음 / 백만문화사 / 2007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탈무드의 귀', '탈무드의 마음' 등으로 분류되는 이제까지의 탈무드는 독자가 그 취지를 얼른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러나 사랑, 처세, 도덕 등등 우리의 생활과 직접 연관되는 주제에 관한 탈무드의 지혜를 곧바로 볼수 있게 한 이책은 이제까지의 수많은 탈무드와는 구별되는 것으로서 탈무드를 엄숙한 경전이 아닌 우리곁의 세상살이 길잡이로 바꾸어주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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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인 2019-04-23 2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그렇군요 획기적입니다.
 
잃어버린 세대
박경범 지음 / 경성라인 / 2000년 1월
평점 :
절판


소송직전까지 가다 중지한 ‘태극기 휘날리며’


검토결과 상당량의 장면을 차용했다는 심증은 충분하나 해당사항들이 그리 기발하고 특별한 것이 아니라서 객관적 입증이 어려울 것이란 의견들에 따라 법률적인 소송은 취소한 상태입니다. 단지 문화예술애호가들의 관점에서 판단되어져야 할 것입니다.
다음은 소장의 기초였는데 공개장소에 맞게 조금 바꿔서 올립니다.


본인은 1998년 6월부터 11월까지 월간지 ‘한국논단’에 6??25 전쟁 경험자의 구술을 토대로 한 한국 현대사의 배경소설 <잃어버린 세대>를 매월 200자 원고지 200매 가량 씩 分載하였고 1999년 10월 출판사 ‘경성라인’과 출판 계약하여 2000년 1월 출판한 바 있습니다.
본인은 2000년에서 2001년 중에 前 정치인 이○○씨가 대표로 있는 ‘○○○○민족회의’ 사무실에 시국관련 기고문 투고와 관련해서 여러 차례 방문한 바 있었고 그 당시 같은 사무실에 있었던 ○○○(010-○○○○○○○○) 현 ○○○○○○○○○○연맹 회장으로부터 6??25 전쟁 소재로 영화제작을 기획하는데 자료를 구하는 곳이 있다며 <잃어버린 세대>를 원작으로 추천할까 한다는 제안을 받아 同 서책을 기왕에 사무실에 증정한 것들 외에 추가로 2권을 구하여 주었습니다.
당시 ‘네오필름’이라는 기획사에서 <暴風>이란 가제의 6?25소재 영화를 기획한 자료가 있는데(첨부) 기획의도와 주제는 의욕적으로 구상했지만 구체적인 장면 등이 설정되지 않아 어려움을 겪는 상황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후 기대했던 소식은 오지 않았고 본인은 작품판매로는 생활수입이 되지 않았으므로 각종 집필용역 등을 하며 지내왔습니다.
그러던 중 2002년 후반부터 한국전쟁을 새롭게 해석한 영화가 제작된다는 소식을 들었고 그것은 본인의 작품이 추구하는 것과 유사했기 때문에 관심을 두고 개봉을 기다렸습니다.
개봉 후 얼마 안 되어 영화를 본 결과 소설 <잃어버린 세대>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에서 많은 유사점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본인 또한 고전이나 유명저작자의 작품을 집필활동에 참고한 적이 있었고 작품창작이란 어차피 비슷한 연관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라는 일반론에도 수긍하는 입장이었기에 <태극기 휘날리며>와 <잃어버린 세대>의 유사성을 단지 작자의 주관적 해석이 아닐까 스스로 의심하며 지내왔습니다. 그리고 도용 부분이 상당히 윤색되었기 때문에 원저작물과의 연관성을 입증하기기 쉽지 않으리라는 것도 대응을 어렵게 했습니다.
그러다 지난 4월 시민단체 및 사회활동으로 잘 알고 지내던 한 지인(○○○ 010-○○○○○○○○)에게 이 문제를 상의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인으로부터 <태극기 휘날리며>가 <잃어버린 세대>의 장면을 절취한 것이 사실로 보여진다는, 객관적 입장에서의 조언을 듣고 확신을 갖게 된 것입니다. 


알려지다시피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는 국내 영화사상 최고흥행기록을 세웠으며 본인의 관람 소감도 연출력의 우수함에 공감하는 바입니다. 이렇게 당연히 한국 영화사의 기념비적인 작품이 될 것임에도 불구하고 석연치 않은 면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수차례에 걸친 매스컴의 보도에서도 이 영화의 원작은 물론 시나리오 집필자도 공개되지 않는 것입니다. ‘각본 강제규’라는 ‘책임자 명시’만이 있을 뿐인데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같은 모든 방면의 천재가 그렇게 쉽게 세상에 나오지는 않는다는 것이 본인의 생각입니다. 보도에서는 단지 유물발견 현장을 보이는 방송 다큐멘타리에서 아이디어를 따왔다고 하지만 그것은 시작과 끝부분일 뿐이고 정작 이야기의 줄기를 이루는 장면들에 대해서는 아무 언급이 없습니다.
물론 <잃어버린 세대>와 <태극기 휘날리며>의 총체적인 줄거리는 다릅니다. 하지만 영화제작을 위한 각색에서 어려운 것은 주제설정과 장면의 삽입이지 줄거리 바꾸기는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것으로서 전혀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그 주요 유사부분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 정식징집대상이 아닌 주인공들이 종로에서 전쟁을 맞는다.
영화 속의 진태는 이미 20대 후반쯤으로 보이고 진석은 이미 학생이라서 두 형제 모두 정식 입대연령은 아니다. 그러나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예기치 않은 참전을 하게 된다.
<잃어버린 세대>에서도 주인공인 고등학생 기영이 국민방위군에 입대하여 훈련에 참가하고 거기서 이미 징집연령을 넘긴 인호를 만나 많은 이야기를 나눈다. 즉 두 작품 모두 학생과 20대 후반의 두 군인이 등장한다.


- 아내(배우자)에 치우치지 않은 가족사랑을 강조한다.
잃어버린세대의 후반부에서는 주인공이 많은 이념과 사랑문제의 갈등을 경험하고 결국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이 궁극적 지향점임을 깨닫는다. 영화의 단골메뉴인 남녀사랑에 앞서 형제애를 강조한 것은 같은 맥락이다.  


- 아군이 포위되어 장교들은 계급장을 떼며 전전긍긍한다.
이것은 보편적인 전쟁기록에 있는 것이지만 공통된다.


- 곤경에 빠진 아군을 구하기 위해 언덕위의 적의 기관총 사수에게 접근하여 수류탄을 터뜨린다.
전형적이면서도 극적인 전쟁영웅의 모습이다.


- 주인공은 군대와 함께 전진한다.
북으로 전진하는 것이 일치한다.


- 팽팽한 긴장의 백병전이 있다.
<잃어버린 세대>에는 백병전에 대한 묘사가 강조되어있다.


- 야전병원이 나온다.
주인공(<태극기 휘날리며>의 진석, <잃어버린 세대>의 기영)은 야전병원에 입원한 다시 참전한다.


- 참전 후 집에 돌아와 이제는 가족이 함께 살자고 한다.
<태극기 휘날리며>의 마지막 장면 '이제 우리(가족)도 함께 살자'는 <잃어버린 세대>의 주인공이 전장에서 돌아왔을 때 가족이 하는 말과 같다.

 


물론 이들 여러 사항들은 전쟁의 이야기라면 보편적인 것으로서 그다지 기발하거나 특기할 것은 아니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태극기 휘날리며가 한동안 멀어졌던 6?25 소재를 다시 부각시킨 것으로서 과거의 동일소재 영화와는 달리 신세대에게 어필하는 전쟁묘사를 기도한 것인데 근래 이십년 가까이 6?25를 소재로 한 젊은 작가의 소설은 거의 없었던 중에 본인은 60~70년대의 반공이데올로기 일변도, 80년대의 <태백산맥>, <남부군>과 같은 수정주의식 해석을 떠나 (게재 잡지의 성격상 표면적으로는 반공을 내세우는 것 같지만) 이념을 모르는 순진한 젊은이가 전쟁을 만나 고뇌하고 성장하는 과정을 그려 신세대적인 한국전쟁의 해석을 시도한 것입니다. <태극기 휘날리며>가 본인의 작품에서 많은 장면을 차용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본인의 문학실적홍보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고 오히려 본인의 작품창작의도를 묻히고 말게 할 소지가 있음으로 해서, 본인은 <태극기 휘날리며>의 무단도용으로 인해 저작권의 피해를 보았습니다.


이미 분명히 밝혀진 원작을 토대로 영화가 제작되었을 때 감독의 의도대로 영화가 얼마나 원작과 달라지는가를 몇몇 예를 두고 비교해 보면, 영화에서 차용하는 것은 문학작품의 겉껍데기(줄거리)가 아닌 장면과 주제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다음의 예로 드는 작품들의 원작과 영화와의 차이를 보면 <태극기 휘날리며>와 <잃어버린 세대>의 유사성은 결코 덜하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트로이 신화를 원작으로 한 영화 <트로이>에서 아킬레스와 파트로클로스는 사촌지간으로나옵니다. 그러나 원작에서 두 사람은 친구일 뿐입니다. <잃어버린 세대>의 두 ‘의형제’가 <태극기 휘날리며>에서는 친형제로 변하는 것과 같습니다.
영화 <트로이>에서 아킬레스는 트로이성 잠입을 위한 목마에 숨어들어가 성 안에서 자기가 사랑한 트로이의 왕녀 브리세아스를 찾아다닙니다. 그러나 원작에서는 아킬레스는 목마작전시에는 이미 죽었고 아네네의 왕 메넬라오스가 목마에서 나와 트로이왕자 파리스에게 빼앗긴 자신의 아내 왕비 헬레네를 찾아다닙니다. 그 외에도 많은 원작의 장면들이 인물을 바꾸거나 하면서 차용되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소설 <아더왕의 죽음>을 원작으로 한 영화로 오래 전에 제작된 <엑스칼리버>가 있고 최근에 개봉된 <킹 아더>가있습니다. 같은 원작이지만 신화적인 스토리를 충실히 구현한 <엑스칼리버>와, 리얼리즘적으로 당시를 구현하면서도 할리우드식 영웅주의를 나타낸 <킹 아더>가 얼마나 판이하게 다른가는 그대로 드러납니다.
영문학의 고전 <베오울프>를 토대로 제작되어 근래 방영된 영화 <전사 베오울프> 또한 괴물 그렌델의 모친을 유혹적인 여인으로 그리는 등 많은 변형을 가합니다.
가장 가까운 예는 최근 방영되는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은 <난중일기>라는 너무나도 알려진 이야기를 토대로 제작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해당 드라마에서는 굳이 현대의 작품인 김훈의 <칼의 노래>와 김탁환의 <불멸>을 원작이라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줄거리는 다 같아도 장면삽입을 위하여 현대작가의 원작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물론 해당작가들이 이미 대중적 지명도나 문단의 인정을 받고 있기 때문에 드라마 제작진에서는 단순한 장면차용도 무단으로 하기 어려웠던 고충이 있었음을 알 수 있고 원작의 공개가 드라마 홍보에 유리할 수도 있음을 감안했을 것입니다.
제작과정에서 많은 참고를 하고 장면차용을 하면서도 원작자가 무명이라는 이유로, 기타 원작을 밝히면 흥행에 도움이 안 된다는 이유로 적당히 얼버무리고 윤색하여 원작의 흔적을 없애려는 의도는 문화의 균형발전을 위하여 올바르지 못합니다. 이 사건의 문제가 힘없는 무명저작자(저작활동으로 경제적 수익을 바라지 않는 아마추어와는 다릅니다.)의 작품에 대한 유명저작자의 무단도용 풍조에 대하여 경종을 울리는 계기가 될 것을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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