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현관
요코야마 히데오 지음, 최고은 옮김 / 검은숲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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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다림이 길었다. 무려 7년이라니! 

 개인적으로 사회파 미스터리의 정점이라고 생각하는 요코야마 히데오의 '64'. 이 소설은 자신의 이해관계에만 지나치게 골몰한 나머지 타인의 비극을 한낱 자신을 위한 수단 정도로 취급하는 세태에 경종을 울리는 작품이었다. 짜임새와 만듦새에 거장의 아우라가 물씬 느껴졌기에 얼른 다음 작품을 만나길 고대했는데 7년이 지나 이제야 나온 것이다.


 제목은 '빛의 현관'

 제목에서 어느 정도 암시가 되는 것처럼 이 소설의 주된 소재는 '집'이다. 주인공인 아오세 미노루는 건축가다. 거품 경제 시절, 무척 잘나갔던 그는 흠모하던 여인과 결혼까지 하여 예쁜 딸 하나까지 두어 남부럽지 않은 가정을 이루었지만 그 경제가 붕괴하자 그도 함께 몰락해 버렸다. 거기에다 성공 가도를 달리던 과거의 잔향 속에 매몰되어 자존심만 부린 탓에 이혼까지 당하고 말았다.



 현재 그는 혼자다. 그에겐 집이 없다. 

 한 곳에 언제나 거주할 수 있는 집은 아오세가 세상에서 가장 바라는 것이었다. 그것도 아주 오래된 소망. 어릴 때도 그는 집이 없었다. 댐 건설을 위해 콘크리트 틀 만드는 일을 하는 아버지 때문에 일본 각지에 흩어져 있는 댐 건설 현장을 찾아 떠돌아다녀야했다. 그런 아오세에게 아버지는 거대한 자연과 새를 만나게 함으로써 머무르지 못한다고 해서 의미없는 삶은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려 했지만 그것도 아오세 마음에 또아리 틀고 있는 강한 정주의 욕망을 허물진 못했다. 건축가가 된 것도, 아내 유카리와 완벽한 가정을 형성하고자 한 것도 따지고 보면  그 욕망의 일환이었다. 하지만 그에겐 집이 허락되지 않았다. 저녁마다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온 자신을 따스하게 맞아 줄 '빛의 현관'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 아오세에게 유키노 가족이 의뢰해 온다.


 "전부 맡기겠습니다. 아오세 씨가 살고 싶은 집을 지어주세요."(p. 12)라는 말과 함께.


 유카리가 바라던 집을 지어주지 못했다는 죄책감까지 가지고 있던 아오세는 혼신의 힘을 다해 정말로 자신이 원하는 집을 만든다. 아버지와 함께 살았던 시절의 향수를 불러 일으키는 북향의 빛(노스라이트)으로 가족의 삶을 부드럽게 감싸는 그런 집을. 이러한 아오세의 진심어린 노력이 통한 것일까? 사람들이 선호하지 않는 북향의 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높은 평가를 받아 뛰어난 건축물을 소개하는 '200선'에 'Y주택('Y'는 아마도 요시노의 이니셜이리라)'이란 이름으로 선정되기까지 한다. 


 소설은 아오세가 다른 부부에게서 주택 설계 의뢰를 맡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 부부가 아오세를 지명한 건, 'Y주택' 때문이었다. 그런데 나중에 아오세는 'Y주택'에 아무도 살지 않는 것을 알게 된다. 아니, 곧 월셋집을 정리하고 이사할 것이라 말했던 요시노가 아예 단 하루도 거기서 살지 않았다는 것을. 지금 자신이 일하고 있는 설계사무소의 소장이자 대학교 친구인 오카지마와 함께 시나노모이와케에 있는 그 집을 직접 찾아가봤지만 있는 건 오직 나치의 탄압을 피해 일본으로 망명했던 독일의 건축가 브루노 타우트가 디자인한 것으로 보이는 의자 하나 뿐이었다.


 이 사실은 아오세에게 커다란 충격을 준다.  'Y주택' 그에게 단순한 집이 아니었다. 

 자기 소망의 구현이었고 유카리와 이루지 못한 집에 대한 대리 보상이었다. 천지 사방에 자기 몸 하나 깃들 곳 없는 그가 비록 타인을 위한 것이긴 하지만 그래도 남겨 놓은 둥지였다. 생떽쥐베리의 '어린 왕자'에 나오는 오아시스처럼, 그 집이 어딘가 존재한다는 생각만으로 외롭고 남루한 현실을 견디게 만드는. 

 

 그런데 그 집마저 버려졌다니. 이건 그에게 두 개의 사실을 환기시킨다. 

 하나는 물론 자신의 잘못으로 유카리와의 집을 상실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어릴 때 키웠던 구관조 '구로'가 사라진 것이다. 아버지가 죽은 규타로를 대신해 사왔던 '구로'. 그 새도 어느날 둥지를 버리고 사라졌다. 그와 함께 아버지도 구로를 찾으로 나갔다 목숨을 잃었다. 상실, 상실, 상실. 그렇게 그는 늘 놓치고 버려짐의 파도 속에 허우적대고 있는 것 같았으리라. 발 디딜 곳 하나 없이. 그래서 알아야했다. 요시노 가족이 왜  'Y주택'을 버렸는지를. 유랑과 상실만 반복하는 궤적의 종지부를 찍기 위해서라도.


 요코야마 히데오라는 이름에 우리가 기대하는 미스터리는 여기서 작동한다. 실마리는 브루노 타우트의 의자다. 


브루노 타우트(1880 ~ 1938)


 의자의 출처를 쫓다 브루노 타우트의 삶까지 알게된 아오세는 지금까지 일부러 그 건축가를 피해왔다는 걸 자각한다. 히데오는 그 이유를 소설에서 직접적으로 밝히진 않는다. 그러나 아오세의 심리를 잘 표현해 놓았기 때문에 독자들은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다. 그건 브루노 타우트의 삶이 아오세의 것과 닮아있는 동시에 그의 아버지를 연상시키기 때문이라는 걸. 그는 정든 고향을 떠나 낯선 나라에서 살아야했다. 그 뒤로도 계속 떠돌아다녔고 결국 타국에서 죽었다. 아오세의 아버지가 그랬듯이. 타우트에겐 집이 없었다. 아오세가 그렇듯이.


 그러므로 히데오가 하필이면 브루노 타우트의 의자를 가져와 아오세로 하여금 대면하게 한 것은 더이상 회피하지 말고 직시하란 뜻이었을 것이다. 아버지에 대한 것도, 아내 유카리와 그의 딸 히나코에 대한 것도. 자기가 놓아버린 모든 것들을.


 그는 내버려 두었다. 가까이 다가가고자 하는 마음은 굴뚝 같았으나 용기가 없어 늘 저만치 떨어져 있는 것을 선택했다. 자기가 나서서 자신만의 집을 직접 만들기 보다는 남의 집을 통해 대리 충족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그러나 그런 걸로는 집을 가질 수 없었다. 달라져야했다. 자신이 걸어온 삶을 직시하고 거기 놓여 있는 과오를 바로잡기 위해 뛰어들어야했다. 타우트의 의자는 그 출발을 위한 신호였다. 의자를 보고나서 아오세가 요시노를 추적하는 것도 그 때문이리라. 의자라는 소품을 배치한 것도 무관하지 않다. 홀로 있는 의자란 무엇보다 묵상을 위한 장소가 아니던가.


 '빛의 현관'은 단적으로 집을 상실한 아오세가 다시 그 현관을 찾아가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요시노 일가의 실종 미스터리는 그 귀환의 주된 안내자 역할을 하는데,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 물음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다. 그 물음이란 하나는 '어떻게 하면 그 집을 되찾을 수 있는가?'로 이건 태도와 관련이 있다. 다른 하나는 '집이란 진정 무엇인가?'로 작품이 전하고자 하는 주제에 대한 것이다. 태도에 대해선 이미 말했다. 바로 직시(直示)요 돌입(突入)이다. 아오세가 자기 발로 직접 뛰며 요시노 일가의 미스터리를 뒤쫓는 것 자체에 이건 선명하게 투영되어 있는 것이다. 하지만 보다 중요한 게 하나 더 있다. 바로 누군가에 기대서 하는 게 아니라 자기 손과 발로 직접 하는 것이다. 이것은 히데오가 아오세가 미스터리를 추적하는 과정을 묘사하는 것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처음에 아오세가 오카지마와 더불어 'Y주택'을 찾아갔을 때처럼 누군가와 같이 그 일을 했을 때는 제대로 된 진실을 알 수 없었다. 그가 그걸 얻을 수 있었을 때는 오직 혼자 했을 때였다. 


 '빛의 현관'은 찾아왔다고 해서 저절로 열리지 않는다. 홀로 자기 손으로 직접 열어야 비로소 열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면 집이란 나의 외부에 있는 존재로 여기기 쉽다. 저기 어딘가에 내가 꿈꾸는 집이 있고 그걸 발견하는 것이 관건인 문제로 말이다. 그러나 히데오는 소설을 통해 분명하게 말한다. 집이란 그런 것이 아니라고.


 어리둥절할 당신을 위해 히데오는 여기서 또 한 사람의 이야기를 길잡이로 초대한다. 그것이 바로 오카지마다.

 나는 이 사람에 대한 이야기 또한 요시노 일가 못지 않게 소설의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여기는 까닭은 아오세가 실존했던 건축가 브루노 타우트를 매개로 요시노라는 존재에 다가갈 수 있었던 것과 똑같이 오카지마에 대해서도 화가 후지미야 하루코를 매개로 그 존재의 본질에 다가가게끔 히데오가 설계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오세가 요시노의 아버지를 쉽게 용서할 수 있었던 것은 타우트의 의자를 통하여 그의 삶을 깊이 들여다봤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아오세가 오카지마라는 인간을 진정으로 이해하게 된 것은 그가 공모전 출품을 위해 열심히 준비한 후지미야 하루코 기념관의 스케치를 들여다보게 되었을 때였다.


 오카지마가 그토록 공모전에 힘을 쓴 것은 아오세처럼 자기도 세상에 자신이 존재했다는 걸 증명할 수 있는 집을 남기고 싶어서였다. 그도 아오세와 똑같았다. 그 역시 집이라는 둥지가 없는 자였던 것이다. 아오세는 현재의 오카지마가 잘난 척하기 바쁘고 허세나 곧잘 부리던 과거 모습과 너무 달라져 있다는 걸 알고 놀란다. 그 이유는 소설의 후반부에서 알게 되는데, 그 또한 가족이 이미 붕괴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아오세와 전혀 다른 선택을 한다. 어딘가 더 좋은 집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현재 주어진 집을 더 좋게 만드는 것에 충실하기로 한 것이다.(이렇게 다소 모호하게 쓴 것은 여기와 연관된 스포일러를 피하기 위해서이니 양해해주시길.)


 바로 이 오카지마의 선택에 소설의 주제가 나타나 있다. '진정한 집은 무엇인가?'에 대한 히데오의 대답이 말이다. 어쩌면 브루노 타우트와 후지미야 하루코가 가지는 공통점에서 이미 눈치챘을 수도 있겠다. 둘 다 조국을 떠나 타향에서 살았지만 그 타향 또한 얼마든지 집이라 여기고 누구보다 충실하게 자기 삶을 살아간 이들이었으니까. 이처럼 타우트와 하루코는 단적으로 보여준다. 집은 공간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마음의 문제라는 것을.


 이와 관련하여 요코야마 히데오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상기시킨다. 전작 '64'의 표현을 빌리자면 집은 단순한 기호가 아니라는 것을. 거주 보다 투자의 대상이 된 지 오래라 그런지 우리는 종종 집에 대한 아주 중요한 것을 잊곤 한다. 그냥 공간이 아니라 누군가가 사는 소중한 장소라는 것을. 집은 삶의 현장이고 그 속에서 오랜 시간 어우러지며 영글어지는 경험의 총체(總體)다. 


 예전에 아주 유명했던 왕가위 감독의 영화 '아비정전'에선 등장인물이 사는 방을 아주 중요하게 취급한다. 그의 방에 들어가는 건 곧 그라는 존재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과 같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말이다. 히데오가 집을 통해 보여주는 것도 이와 다르지 않다. 집이란 곧 사는 사람의 존재인 것이다. 오카지마의 기념관 구상이 쟁쟁한 경쟁자들을 제치고 화가 유족의 마음을 움직이고 지지를 이끌어낼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기념관에 찾아온 관객들이 그 방문을 통해 하루코라는 존재를 깊이 경험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기 때문이었다. 아오세 역시 'Y주택'을 성공시킬 수 있었던 건, 거기에 북향 깊이 스며든 아버지와의 추억과 당신에 대한 그리움을 간직하고 있는 자신의 마음을 한껏 담아냈기 때문이었다. 타우트는 머나 먼 일본에서 애초에 자신이 건축을 통해 하려고 했던 것을 평범한 일본인들을 대상으로 계속 함으로써 마음을 이어나갔고 하루코는 세상의 그 어떤 관심도 필요로 하지 않고 오직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는 한 사람을 위해 몇 백점이나 되는 그림을 그림으로써 누구보다 크고 굳건한 자신의 집을 가질 수 있었다.


 집은 그런 마음들에서 비로소 존재했다. 오직 그런 마음의 터전 위에서라야 진정한 집은 온전히 건축될 수 있었다. '빛의 현관'에서 뻗어나오는 들어오는 이를 소중히 감싸는 따스한 빛은 무엇보다도 그 사람을 위하는 애틋한 마음의 열기였다.


 집을 그저 집이라는 기호로 보는 이에겐 집은 결코 제 존재를 드러내지 않았다. 먼저 사람을 깊이 들여다보고 그를 위한 마음으로 집을 지으려는 이에게만 집은 기꺼이 자신의 두 팔을 벌렸다. 이는 전작 '64'에서 이어지는 것이기도 하다. 그 소설에서 진짜 비극은 서로 타인의 삶을 알 필요를 느끼지 않는 단순한 기호로만 봤던 것에서 창출되었기 때문이다.


 사건을 쫓아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는 그들에게 사건이 어디서 일어났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시골 경찰, 시골 홍보담당관. 그들의 눈에는 그렇게 비칠 뿐이다. 단순한 기호다. 상대에 대해 알려는 마음도 없고, 그럴 필요도 느끼지 못한다. ('64' P. 566)


 놀랍게도 이러한 기자들의 행태는 '빛의 현관'에서 그대로 재연되고 있다. 오카지마를 파국으로 내몬 신문 기자의 모습이 그러한데, 오카지마에 대해선 제대로 알려고 하지도 않고 오직 자신의 예단을 정당화 하는 정보만 취사 선택한다는 점이 이와 똑같다. '빛의 현관'엔 사물을 그저 기호로 보지 않는 이들이 많이 등장한다. 타우드와 하루코는 물론이고 기념관을 단순한 기념관이 아니라 하루코라는 존재 자체라고 보았던 오카지마도 그렇고 북향의 빛을 그저 기호가 아니라 아버지에게서 뻗어나오는 빛으로 여겼던 아오세도 그렇고 구관조 '구로'를 한낱 기호로써의 새가 아니라 아오세라고 여겼던 그의 아버지도 그렇고. 사정이 이러하니 어떻게 깨닫지 않을 수 있을까? 집은 곧 삶이요, 마음이라는 것을.

 그러므로 아오세는 새로운 고객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이야기를 통해 그들을 더 깊이 이해하고 그 마음을 조금이라도 더 오롯이 헤아릴 수 있도록.

  '고객님 가족만을 위한 집을 지읍시다. 더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십시오'(p. 471)


 이처럼 '빛의 현관'은 '64'에서 경찰 조직을 가지고 보다 방대한 규모로 세공했던 주제를 '집'이라는 존재로 보다 한정해선 더 집중시키고 또한 '집'이라는 것이 다른 어떤 곳보다 살아가는 존재를 더 깊이 실감할 수 있는 장소인만큼 훨씬 더 선명하게 부각시키는 작업이다. 이쯤에서 나는 의문이 든다. 그는 왜 '64'에서도 그렇고 '빛의 현관'에서도 그렇고 타자를 헤아린다는 것에 대하여 천착하는 것일까? 역시나 그건 '원전 사태'의 여파가 아닐까 생각한다. 내가 소설에서 버려진 'Y주택'을 보고 떠올렸던 것은 어느 다큐멘터리에서 본 원전 사태 이후 후쿠시마에 버려진 집들이었다. 


[원전 사태 4년 후의 후쿠시마 풍경 중에서]


 어쩌면 히데오도 같은 풍경을 보고서 이런 집에 빛을 다시 가져다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하는 고민에서 '빛의 현관'이 시작된 것은 아니었을까? 

 그래서일까? 아오세가 거품 경제의 붕괴로 모든 걸 잃어버렸던 것도 '원전 사태' 재난의 비유로 보인다. 이러한 현재의 아오세들에게 소설은 전하려 한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 마지막 문장이 둥지를 지을 재료를 입에 꼭 물고 날아가는 제비를 묘사한 것을 보면 더욱 그렇다.


 그러나 예전과 같은 방법으론 그럴 수 없다. 거품 경제 시절에 아오세와 오카지마가 그랬던 것처럼 타인의 삶을 그저 이윤과 교환 가능한 단순한 기호로 보는 한은 말이다. 집의 진정한 부활은 오직 타인의 삶을 내 삶처럼 소중히 여기고 그 마음에 무엇이 있는지 먼저 귀 기울여 깊이 듣고 헤아릴 때 도래한다. '빛의 현관'은 이 교훈을 독자의 마음에 차분하면서도 세심하게 각인시키는 여정이다. 너무나 따스하고 부드러워서 고양이 털처럼 뺨에 비비고 싶은 현관의 빛은 무작정 남에게서 받으려 할 때가 아니라 내가 먼저 주려할 때 생성된다는 걸.


 봄의 따스함을 절로 그리워하게 만드는 영하의 겨울을 견디고 있는 처지라 그런지 더욱 살갑게 다가오는 말이다. 시린 손을 홀로 아무리 비벼봤자 온기는 조금도 피어나지 않는다. 누군가의 손을 보듬고 애정으로 감싸줄 때라야 온기는 비로소 찾아온다. 밤늦게 찾아올지도 모를 객손을 위해 계속 현관의 등을 켜두는 것과도 같이 그런 온기를 먼저 나서서 나눠주는 손이 세상에 점점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을 끝으로 남기며 글을 마친다.



 덧붙여, '빛의 현관'은 위에서도 말했듯이 전작인 '64'와 주제가 이어지고 있으므로 같이 읽어보면 더 좋을 것 같다. 혹시 도움이 될까 하여 7년 전에 쓴 '64'에 대한 리뷰를 여기에 링크해 본다.


https://blog.aladin.co.kr/748481184/6441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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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를 버리다 -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할 때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가오 옌 그림, 김난주 옮김 / 비채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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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양이를 버리다'는 고양이에 대한 얘기가 아니라 '아버지에대해 이야기 할 때'라는 부제가 잘 보여주듯 실은 무라카미 하루키가 자기 아버지에 대해 쓴 책이다. 그는 여기에 자신의 기억과 스스로 조사한 것을 바탕으로 하여 아버지의 삶을 사실적으로 담아놓고 있는데, 그 시작은 하루키 자신에게 인상적으로 남아있는 두 개의 기억으로 연다. 그 기억이란 하나는 아버지와 같이 바닷가에 고양이를 버리러 갔던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아버지가 매일 아침을 집에 있는 불단 앞에서 불경을 외는 것으로 시작했던 것이다. 이 둘은 개인적으로 말하기 어려웠던 아버지의 삶을 간신히 언어의 형태로 구체화할 수 있도록 해 주었는데, 읽어보면 어째서 그게 가능했는지 짐작하게 된다.



[배경은 VAN DER GRAAF GENERATOR의 'H TO HE WHO AM THE ONLY ONE' LP 안쪽 면]



  '버려진 고양이'와 '불경'은 알고보니 하루키 아버지의 삶을 단적으로 집약해 보여 줄 수 있는 상징이었던 것이다. 하루키가 '버려진 고양이'로 책의 시작을 여는 건, 자기 아버지의 삶이 그 고양이와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고양이는 자의가 아니라 타의로 자신이 원하지 않는 곳에 버려졌다. 이와 똑같이 하루키의 아버지 또한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 수 없었다. 하이쿠 짓기를 좋아하는 소박한 문학 청년이었던 아버지는 교토의 유명한 절의 주지라는 집안에서 차남으로 태어난 탓에 스스로 선택하지는 않았던 승려의 길을 걸어야했으며 그 길조차 일본 제국주의가 중국과 벌인 전쟁(마침 그 때 그는 세이닌 전문학교에 입학하여 징병을 4년 유예할 수 있었으나 실수로 정식 행정 절차를 밟지 않는 바람에 그대로 전쟁터로 끌려가야 했다.)때문에 접어야했다.


 거기다 그는 정말로 버려진 고양이기도 했다. 어릴 때, 동자승이 되기 위해 부모를 떠나 어느 절로 가게 되었던 것이다. 이런 사실들이 하루키로 하여금 버려진 고양이에서 아버지를 떠올리게 했을 것이다. 하루키는 그 고양이가 특히 가장 인상적인 기억으로 남게 되었던 것은, 고양이를 버린 뒤에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왔음에도 불구하고 고양이가 먼저 집에 도착해 자기들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과 그렇게 집으로 돌아온 고양이를 아버지가 보았을 때 안도의 표정을 지었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어쩌면 그 때의 하루키 아버지도 고양이를 자신의 분신 같은 것으로 생각했을지 모르겠다. 가문과 시대라는 거대한 격량 속에 휘말려 어디로 쓸려 가는지 조차 모르고 살아왔지만 그래도 언젠가는 저 고양이처럼 내가 있어야 할 곳에 정확히 있을 수 있겠지 하는 희망 같은 걸 발견하고 안도의 표정을 지었던 건 아니었을까?





  사람은 누구나 자기 삶의 주인이 되고 싶어한다. 

 자신이 원하고 설정한 모양대로 꾸려가길 원한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 없다. 위에 인용한 그림은 이 책의 일러스트레이터 가오 옌이 그린 것인데 나는 이것이 가오 옌의 이 책에 대한 독후감 같은 것으로 보인다. 우리 모두는 사실 하루키 아버지처럼 저토록 거대한 광야 같은 삶에서 오직 작은 상자 하나에만 의지한 채, 안도할 수 있는 곳을 평생 찾아다니는 존재이니까 말이다. 아마도 가오 옌이 비둘기를 그려 놓은 것은 성경에 나오는 노아 이야기에서 영감 받았을 것이다. 그 이야기에서 비둘기는 노아가 불안 속에 찾았던 육지가 어딘가 확실히 있다는 걸 알려주는 존재였으니까 말이다. 어쩌면 이 책을 쓴 하루키의 진짜 목적 또한 그의 아버지가 아침마다 읊었던 불경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아버지가 그렇게 매일 아침 불경을 읊었던 것은 자신이 참여한 전쟁에서 고통당한 모든 이들을 기억하고 위로하기 위해서였다. 하루키의 이 책 또한 그렇다. 아버지를 기억하기 위해서이며 전쟁과 아들 때문에 자신의 꿈을 접어야했던 아버지가 그래도 자기 삶에 대하여 안도하는 마음으로 떠났기를 간구하는 기도의 마음 또한 뭉근하게 어려있으니까.





 그렇지만 온전히 아버지만을 위해 이 글을 쓴 건 아닌 것으로 보인다. 

 이건 하루키 마음에 가책으로 자리잡고 있는 응어리를 풀어내는 것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그는 아버지와 몇 십년 동안이나 말 한 마디 제대로 섞지 않았던 소원한 관계였다고 털어놓고 있다. 원래 하루키 아버지는 대학원에 진학하여 학문에 정진하고자 했다. 그는 공부를 좋아했고 잘했다. 그러나 잦은 전쟁의 출전으로 공부를 계속 하기엔 이미 나이를 너무 많이 먹었고 얼마 안 가 하루키도 태어나는 바람에 그 꿈을 포기해야했다. 다시 한 번 그는 원하지 않았던 자리에 서 있어야 했으며 이젠 그 자리를 계속 지키고 있어야했다. 그리하여 아버지는 자신이 못 다 이룬 걸 하루키를 통해 대신 이루고자 했다. 세상이 많은 아버지가 그러하듯이. 그러나 외동인 하루키는 공부에 별 관심이 없었다. 그의 아버지는 이토록 평화로운 세상에서 마음껏 공부할 수 있는데 왜 면학에 힘쓰지 않는가 하고 안타까움을 표했지만 하루키는 상관하지 않았다. 


 아마도 우리는 모두, 각자 세대의 공기를 숨쉬며 그 고유한 중력을 짊어지고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틀의 경향 안에서 성장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좋고 나쁘고를 떠나 그것이 자연의 섭리다.(p. 62)


 하지만 그런 아버지의 모습은 가책이 되었다. 아버지의 소망을 이뤄주지 못하는 죄책감으로 자리잡은 것이다. 그는 최근까지 오랫동안 자주 학교에서 시험 치는 꿈을 꿨다고 한다. 시험 치는 동안 아버지가 원하는 성적을 받지 못할까봐 잔뜩 두려워했다고 한다. 아마도 그렇게 퇴적된 죄책감이 아버지와의 관계를 소원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아버지의 꿈을 이뤄주지 못하는 아들은 그것이 자신에게도 상처가 되기에 거리를 벌리는 법이다. 여하튼 이처럼 하루키 또한 그의 아버지와 똑같이 바라는 삶을 온전히 영위할 수 없는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아버지가 죽은 뒤 5년이 지나서 비로소 그의 삶을 자세하게 들여다 본 하루키는 그의 아버지에게서 동료 의식 같은 걸 얻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자신이나 아버지나 원하는 걸 쉽사리 허락하지 않는 삶이라는 광막한 바다 위를 그래도 가고자 하는 곳에 닿기 위해 늘 힘겹게 분투하고 있는 외로운 존재라는, 한 인간으로서의 동료애를.





 결국 이러한 과정을 통해 하루키는 특정한 아버지가 아니라 아버지가 걸어온 길에서 인간의 삶 자체에 진하게 서려있는 보편적인 궤적을 보았던 것이며 그러한 보편성의 인식을 통하여 아버지나 자신이나 삶을 억누르고 있다고 여겼던 한계들이 진실은 삶의 필수불가결한 한 부분이었음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내가 이 개인적인 글에서 가장 말하고 싶었던 것은 딱 한 가지 뿐이다. 딱 한 가지 당연한 사실이다. 나는 한 평범한 인간의, 한 평범한 아들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 그것은 아주 당연한 사실이다. 그러나 차분하게 그 사실을 파헤쳐가면 갈수록 실은 그것이 하나의 우연한 사실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이 명확해진다. 우리는 결국, 어쩌다 우연으로 생겨난 하나의 사실을 유일무이한 사실로 간주하며 살아있을 뿐이 아닐까.(p.93)


 그렇다면 이러한 평범한 이의 이야기를 하루키가 애써 했어야 할 이유는 무엇일까? 개인적인 추모로도 족할 글을 굳이 한 권의 책으로 만들었어야 했던 까닭은 어디에 있는 걸까? 나는 이런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다음에 그는 빗방울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한 사람이란 광활한 대지를 향해 내리는 방대한 빗방울의, 이름 없고 교환 가능한 빗방울에 지나지 않지만 그 한 방울의 빗물에는 한 방울의 빗물 나름의 생각과 역사 그리고 계승의 책무가 있음을.


 그러니까 하루키는 계승의 책무를 이행하기 위해 이 책을 쓰고 있다. 마치 '보라, 여기 한 인간이 이렇게 살고 있었다!'고 우리들에게 전하는 것이다. 이 책에서 우리가 보는 건 보편가능한 역사가 아니라 유일무이한 역사다. 하루키 아버지의 삶은 다른 이로 대체 불가능하다. 전쟁 중에도 하이쿠를 짓고 아무런 소란을 피우지 않고 그저 눈을 감고 조용히 참수당한 중국인 포로에 대해 다른 어떤 이보다 깊은 경의를 품고 있는 모습은 오직 그만의 것이다. 또한 하루키는 책에서 몇 번이나 언급하지 않았던가? 우연히 벌어진 일일지 몰라도 만일 아버지가 원하는 대로 삶이 되어갔다면 자신이 존재할 수 없었음을. 우리가 보는 건, 이 책을 통해 깊이 음미하고 있는 건 우연이 정형한 평범한 이의 그렇고 그런 기성품이 아니다. 다른 누구의 것이 될 수 없는 고유한 단독자의 초상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물어야 한다. 어떻게 보편성 속에서 이러한 고유한 특수성이 태어날 수 있었는가? 그 때 우리 눈에 들어오는 건, 하루키 아버지가 당했던 여러 고난들이다. 접어야 했던 꿈의 상실이다. 삶에 존재했었던 그 스스로 결코 메울 수 없었던 깊은 우물들이다. 그런 우물을 하루키 또한 가지고 있었다. 이제 알아차린다. 이러한 우물들이 대체불가능한 나라는 고유한 한 사람을 빚어내는 것이라고. 






 나는 이것이 이 책의 마지막에 '사라진 새끼 고양이 이야기'가 나오는 연유가 아닐까 한다. 

 이 책에서 개인적으로 버려진 고양이 이상으로 가장 깊은 인상을 받았고 많은 여운이 남았던 대목이기도 하다.  소나무 높은 곳으로 홀로 올라갔던 새끼 고양이는 혼자 힘으로 도저히 내려갈 수 없어서 밤새 무서워하며 울다가 아침에 깨어나보니 홀연히 사라짐으로 인해 하루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걸 가지고 별도의 단편을 쓸 정도로. 그러고 보면 말하기 어렵고 막연하기만 했던 아버지의 삶을 비로소 문자라는 형태로 소환할 수 있도록 해 준 두 개의 기억 역시 부재와 고통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톨스토이의 유명한 문장인 '행복한 가정은 모두 엇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불행한 이유가 다 제각각이다'가 잘 보여주는 것처럼 삶에 있어서 우리가 그토록 기피하고자 애쓰는 부정적인 것들이야말로 진정 교환 불가능한 나만의 고유한 단독성을 만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림처럼 우리에겐 저마다 사라진 새끼 고양이가 존재하는 소나무가 한 그루쯤은 있을 것이다. 그로 인해 삶은 무엇이며 나는 누구인가를 곱씹게 만들었던 계기들이. 더러 우리들은 그런 게 없었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며 그런 기억이 떠오를 때마다 얼른 망각의 휴지통으로 던져버리지만 하루키는 오히려 그런 기억들을 더 소중히 여기고 찬찬히 살펴봐야 한다고 말한다. 자신이 이 책에서 아버지와 자신의 삶을 그렇게 더듬어 찾아내었던 것처럼. 바로 그것이 노아에게 육지가 있다는 걸 알려준 비둘기가 되어 내가 나로서 존재하고 그것만으로 안도하며 기댈 수 있는 소나무를 찾게 해 줄지도 모르니까.


 이런 이유로 '고양이를 버리다'는 내게 삶에서 겪는 부정적인 것들을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르게 헤아릴 수 있는 시야를 열어준 책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제 곧 부재의 계절, 겨울이다. 그런데 겨울을 관통하지 않고서는 봄만이 가지는 고유한 따스함과 아름다움을 느낄 수 없다. 그러므로 이런 계절에 '고양이를 버리다'를 읽는 건 제법 어울리는 일인 듯하다. 삶의 겨울을 소중히 보듬게 만들어주는 책이니까. 그러면 마냥 아리기만 할 것이라 여겨서 선뜻 손댈 수 없었던 차가운 눈밭 속에 매몰된 기억들도 발굴해선 그 어딘가에서 오늘의 나를 만든 진정한 밀알을 찾아낼지도 모른다. 그렇게 나를 더 이해하게 되면 그만큼 삶에 대해서도 더 관대해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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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01 11:4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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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랑의 달
나기라 유 지음, 정수윤 옮김 / 은행나무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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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전 노래 중에 엄정화가 부른 '하늘만이 허락한 사랑'이란 노래가 있었다. 세상 사람들이 용납하지 못하는 사랑을 하는 이의 입장에서 부르는 노래로, 그래도 우리 사랑은 하늘만은 허락하리라는 애절함이 담겨 있다. 일본 작가 나가라 유의 '유량의 달'을 읽으며 이 노래가 언뜻 떠올랐다. 왜냐하면 소설 속 사랑도 하늘만이 허락할 사랑이기 때문이다. 





 주인공의 이름은 가나이 사라사. 여성이다. 그녀는 어릴 적 완벽한 가정에서 살았다. 부유해서가 아니다. 자유로웠기 때문이다. 사라사가 저녁으로 아이스크림을 먹고 싶다고 해도 야단치지 않고, 말리지 않고 원하는 대로 해주는 집. 반대와 간섭은 없고, 존중과 배려만이 존재하는 집. 자신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봐주며 설사 세상이 이해하지 못할 개성이라도 해도 그것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게 응원해 주는 집. 그녀는 그런 곳에 있었다. 그러나 호사다마라 했던가. 때이른 아버지의 죽음으로 그 집은 산산조각 나버리고 주인공은 이모 집에 얹혀 살게 된다. 그 때부터 사라사 삶엔 짙은 그늘이 드리운다. 이모네 집은 자기 집과 정반대의 곳이었기 때문이다. 개성을 훈육으로 몰개성으로 만들어비리는 집. 자유는 없었다. 답답함만이 가득했던 그 곳에서 사라사를 죽고 싶을만큼 고통스럽게 만들었던 건 이종 사촌 오빠가 밤마다 나쁜 짓을 하러 자신의 방을 찾아왔기 때문이다. 그 때가 아홉살이었다. 그녀는 집에 들어가기 싫어 놀이터에서 친구들과 놀았다. 그러다 늘 놀이터에 나와서 어린 소녀들을 얌전히 훔쳐보던 후미란 대학생과 알게 되었다. 후미의 집에 놀러간 사라사는 후미가 예전 부모님처럼 자신의 개성을 온전히 존중해주자 마치 다시 예전의 그 집을 찾은 것만 같아서 그 곳에 살고싶어진다. 그렇게 두 달 동안 후미 집에서 살았다. 그 사실을 전혀 모르는 이모네 가족은 실종신고를 냈고 나중에 후미는 소아성애자에다 유괴범이 되어 경찰에 체포된다. 사라사는 사회가 생각하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고 알리고 싶지만 아이의 말에 귀기울여 주는 어른은 하나도 없었다. 그렇게 후미 없이 산 지 15년 뒤, 예전의 개성을 소진하고 사람들 생각에 자신을 맞추며 살아가던 사라사 앞에 우연히 후미가 다시 나타난다. 그녀는 어린 시절의 집이 없어진 이후로 늘 그 어디에도머물지 못하고 소설의 제목처럼 유랑하며 살아왔다. 후미를 다시 본 순간, 사라사는 깨닫게 된다. 자신이 유량을 끝내고 진정으로 정박할 수 있는 곳은 바로 후미라는 걸. 그러나 세상의 눈이 무섭다. 사회는 아직도 사라사의 유괴 사건을 기억하고 있다. 진실을 모르는 그들의 시선에서 자신들의 사랑은 허락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라사는 후미에게로 이끌리는 마음을 어찌할 수 없다. 과연 이 사랑은 어떻게 될까? 하늘만이 허락할 이 사랑은 어떤 결말을 맺게 될까?


 소아성애자와의 사랑이라는 꽤나 충격적인 소재를 가지고 있는 '유랑의 달'은 소재의 불편함만 넘길 수 있다면 꽤 읽어볼만한 소설이다. 사라사의 심리 표현이 너무나 섬세하게 잘 되어있어 독자의 공감을 잘 이끌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해선 안되는 사람을 사랑한다는 내용의 이야기가 아니라 어디에도 마음을 둘 수가 없어 표류하는 이가 간신히 자신의 거주할 수 있는 곳을 찾아가는 이야기로, 그런 유랑의 심리라면 우리 역시 살면서 종종 가지기 때문이다. 나가라 유는 처음 만나게 된 작가인데 문장이 좋았다. 그 때문에 더욱 이 소설이 파격적인 소재에도 불구하고 인기를 끌어 마침내 2020년 서점 대상 1위라는 영예까지 차지하게 된 것이 아닐까 싶다. 서점 대상은 대중성이 담보된 상으로 알고 있다. 그만큼 소재가 가지는 한계를 세심한 심리 묘사와 이야기 전개로 제대로 돌파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걸 보면 작가의 능력이 상당한 것 같다. 그의 다른 작품도 만나보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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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호라이즌스, 새로운 지평을 향한 여정 - 명왕성을 처음으로 탐사한 사람들의 이야기
앨런 스턴.데이비드 그린스푼 지음, 김승욱 옮김, 황정아 해제 / 푸른숲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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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년 7월 14일.

 이 날은 태양계 탐사에 있어서 정말 뜻깊은 날이다. 왜냐하면 이 날, 비로소 인류가 태양계에 있는 행성 모두를 탐사했기 때문이다. 그 마지막 행성은 아쉽게도 지금은 그 지위를 잃어버린 명왕성. 그러나 이 별은 오직 명왕성 탐사만을 목적으로 한 뉴호라이즌스 호가 지구를 떠날 때까지만 해도 행성의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명왕성이 퇴출된 날은 뉴호라이즌스 호가 발사되는 날이었다. 어쨌든 우주 탐사에 관심 있는 이들에겐 잊을 수 없는 이벤트임은 분명하다. 아무래도 명왕성 탐사를 떠난 뉴호라이즌스 호에 대한 관심이 커질 수밖에 없다. 누가 어떻게 그 프로젝트를 준비했고 성공시켰는지 그 과정이 궁금해지는 것이다. 그런 이들에게 정말 좋은 책이 하나 나왔다. 그 프로젝트를 처음 입안했고 마침내 성공까지 시킨 앨런 스틴이 쓴 '뉴호라이즌스, 새로운 지평을 향한 여정'이 번역되어 나온 것이다. 



 앨런 스턴이 명왕성 탐사 계획을 추진한 것은 무려 1987년부터다. 그는 86년에 터진 비극적인 사건, 즉 첼린저 호가 공중 폭발된 사건에서 큰 충격을 받고 자기 삶 전체를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진다. 당시 NASA는 금성으로 보낼 마젤란 호 계획과 목성으로 보낼 갈릴레오 호 계획이 추진 중이었는데 아무도 명왕성 탐사는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거기에 생각이 미친 그는 자신이라도 나서서 명왕성 탐사 계획을 진행시켜야겠다고 생각했고 여론의 지지를 얻기 위해 뛰어난 학자들을 섭외하는 것에 나섰다. 그  때, NASA의 행성 탐사 계획은 여론의 지지도에 따라 많이 영향 받았기 때문이다. 앨런 스틴이 원하는 명석한 두뇌들이 많이 참여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왕성 탐사 계획은 늘 다른 행성 탐사 계획에 뒤쳐졌다. 너무나 멀고 크기도 작아 탐사에 별 이익이 없다고 여겨졌던 까닭이다. 앨런 스틴의 팀은 그렇지 않다는 걸 열심히 설득했고(그 이유는 책에서 아주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다.) 드디어 2001년 마침내 10년 평가 팀에 선정되어 명왕성 탐사 로켓을 설계, 제작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NASA의 예산은 한정되어 있었고 그 비용으로 어떻게 저 태양계 외곽에 위치한 명왕성까지 가게 할 수 있을 것인가가 큰 화두로 떠올랐다. 그들은 결국 보이저 호 무게의 약 절반인 350KG의 우주선을 만드는 것(실제 우주선의 무게는 400KG이 넘었지만)과 가급적 착륙이 아닌 지나가면서 탐사를 하는 것으로 결정을 한다. 여기에 앨런과 같은 팀은 로버트 파커 박사가 경로에 대해 아주 혁신적인 제안을 한다. 무게가 많이 줄어든 탓에 로켓이 목성까지 곧장 날아가는 것이 어려웠는데(목성의 중력을 이용해야 명왕성까지 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걸 가능하게 만드는 방법을 생각해 낸 것이다. 그건 먼저 로켓의 방향을 태양 쪽으로 돌려 금성과 지구의 중력을 이용해 목성까지 날아가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2006년 1월에 지구를 떠난 뉴호라이즌스 호는 많은 우여곡절 속에서 태어난 것이었다.


 '뉴호라이즌스, 새로운 지평을 향한 여정'은 그런 과정을 소상히 담는다. 소재가 소재이니만큼 어려운 말들이 잔뜩 나올 것 같겠지만 책은 이대로 영화로 만들어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될 정도로 이해가 쉽고 흥미진진하다. 우주 탐사가 어떻게 이뤄지는지, 그리고 명왕성에 대해 많이 알고 싶었다면 이 책만큼 그 기대를 충족시켜 주는 책은 또 없는 것 같다. 한 사람이 자신의 꿈을 실현시켜 나가는 장대한 드라마로도 읽힐 수 있기에 이런 논픽션을 좋아하는 이들에게도 꽤 좋은 선물이 되리라 믿는다.



뉴호라이즌스가 찍은 명왕성의 사진. 

인류는 이렇게 선명한 명왕성의 모습을 뉴호라이즌스 호 덕분에 처음 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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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디 - 우리 몸 안내서
빌 브라이슨 지음, 이한음 옮김 / 까치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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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기는 기회다'라는 말이 있다. 내 생각엔 몸에 대해서도 꽤 해당되는 말인 듯하다. 공기가 없어져봐야 그 소중함을 깨닫는 것처럼 우리의 몸 역시 아픔이라는 위기가 닥쳐오고 나서야 비로소 신경을 쓰고 관심을 쏟게 되니까 말이다. 다음엔 더 안정적이고 좋은 몸이 될 수 있도록. 


 여전히 진행중이며 언제 끝날지도 도저히 알 수 없는 코로나 19 사태는 적어도 내게 있어서는 건강의 소중함과 더불어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몸에 대해 잘 알아야겠다는 생각을 거듭 상기시켜 준, 그런 면에서 고마운 기회였다. 거기에 마침 좋은 안내자가 출현하기도 했다. '거의 모든 것의 역사'로 지루해 보이기만 했던 일상이란 세계의 모든 구석 구석이 저마다 깊은 내막이 서려 있음을 알려 이전과 전혀 다른 새로운 눈으로 나를 둘러싼 세계를 보게 만들었던 작가, 빌 브라이슨이 자신의 저력을 십분 발휘하여 몸에 대해 쓴 책을 들고 나왔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바디 : 우리 몸 안내서'란 책이다.


 하얀 색의 담백한 표지로 된 이 책은 내게 이제 곧 몸 속 여행을 떠나는 잠수정으로 보였다. 

 작가에 대한 신뢰가 차고도 넘쳤기에 나는 당장 하얀 잠수정의 승선 티켓을 끊었다. 푸짐한 몸집에 어울리는 푸근한 미소로 날 맞이하는 작가는 오늘의 가이드를 맡았다는 설명과 함께 악수를 정중히 청하더니 날 전망이 가장 좋은 일등석으로 안내했다. 그리고 기대하라는 뜻으로 살짝 윙크를 보낸 다음 운전석에 앉아서 시동을 걸고 천천히 잠수정을 우리의 몸 안으로 이동시켰다. 이윽고 그가 설명을 하려고 운전석 옆의 마이크 스위치를 켜는 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내 두 눈 앞으로 사람을 이루고 있는 원소들이 영화 '스타워즈'에서 한 솔로의 팰콘이 워프를 할 때 그러하듯 무수한 빛 알갱이가 되어 쏟아져 내렸다. 나는 집중을 위해 심호흡을 한 번 크게 하고 그가 설명하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기 위해 눈과 귀를 한껏 열었다.


 



 그렇게 나는 주석과 참조 문헌 목록 그리고 역자 후기를 빼면 장장 517 페이지에 이르는 인체 탐험 여행을 시작했다.  사람을 만드는 방법을 시작으로 '피부와 털'을 지나 '결말(여기서 결말이란 책의 결론 같은 것이 아니라 죽음, 노화, 폐경 등 우리 몸이 만날 수 있는 종말적인 상황에 대한 것을 이른다.)'에 이르기까지 도합 23 곳을 거치는 일정이었다. 아무래도 의학적인 건 어렵다는 선입견이 있어서 몸에 대한 것 역시 그 분야에 속하는 지라 머리 깨나 아픈 여행이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없진 않았다. 그러나 정말 문자 그대로 기우였다. 어려운 건 하나도 없었고 어찌나 설명을 잘 하는지 뭐든 다 귀에 쏙쏙 들어와 박혔던 것이다. 여전히 그는 박학다식했고 뇌, 머리, 입, 목, 심장, 신경, 소화기관 등등 그 어디에서건 그것에 대한 정보들을 이걸 어찌 다 알고 있을까 하는 말이 입에서 절로 나올 정도로 엄청나게 쏟아내었다. 


 당신은 뼈가 호르몬을 생산한다는 걸 알고 있었는가? 우리는 뼈가 단순히 몸을 지탱하는 정도의 일만 하고 있는 줄 알지만 그렇지 않았다. 뼈는 우리가 상상한 것 이상으로 많은 일을 하고 있었다. 혈구를 생산하는 것은 물론 화학물질을 저장도 하고 소리 또한 전달했다. 당신이 듣는 자기 목소리는 실은 모두 귀가 아니라 자신의 머리뼈가 울리면서 나는 소리인 것이다. 여기에 더하여 뼈는 오스테오칼신 호르몬까지 생산하는데 이것은 기억과 활력을 증진시킬 뿐만 아니라 남성의 생식력 증진에 기분 조절까지 하고 있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저 멍하시 서 있기만 하는 것처럼 보였던 뼈는 알고보니 그야말로 다재다능한 일꾼이었던 것이다. 또한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은 뒤로 오래도록 품었던 의문도 이 책 덕분에 풀리게 되었다. 그 의문은 바로 마들렌 과자에 관한 것이다. 소설에서 주인공 마르셀이 우연히 맡은 마들렌 과자 냄새 때문에 오래도록 잊고 있었던 유년 시절의 일을 갑자기 기억해내는 장면이 있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프랑스 판 표지.



 바로 후각이 기억을 불러 일으킨 것인데 나는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 무척 궁금했다. 그걸 책을 통해 마침내 알게 된 것이다. 신기하게도 후각은 오감 중 유일하게 시상하부를 거치지 않는다고 한다. 후각을 통해 취득한 정보는 곧장 후각 겉질로 가게 되는데, 그 후각 겉질은 기억 생성을 담당하는 해마 바로 가까이에 있다. 따라서 특별한 냄새는 과거에 그것을 맡았던 때의 기억을 홀연히 소환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 말한 것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나 또한 자주 혼동해서 썼던 심근경색과 심장정지의 차이점을 이 책을 통해 분명히 확인한 것과 같이 기존의 알았던 것도 새롭게 제대로 알게 되는 경우도 많았다. 추운 날이면 어김없이 줄줄 흐르는 콧물처럼 아주 일상적인 몸의 반응 또한 허파에서 나오는 따뜻한 공기와 콧구멍으로 들어오는 차가운 공기가 만나 응축되는 바람에 나오는 것이란 걸 체득하게 되었다.  사람이 달릴 때 다른 유인원들과 달리 머리가 흔들리지 않는 건 우리 머리 뒤쪽에 인간에게만 있는 목덜미 인대 덕분이라는 것도.


 이러다 보니 나는 자연스럽게 두 가지를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몸에 대해서 아는 건 불과 1%도 안된다는 것과 몸이라는 것이 이토록 많은 정보가 알알이 깃들어 있을 정도로 거의 우주에 맞먹을만큼 참으로 경이로는 장소라는 걸. 그는 다시 한 번 해내었다. '거의 모든 것의 역사'로 세계를 보는 내 눈을 일신(一新)했던 것처럼 '바디 : 우리 몸 안내서'를 통해 내 몸을 바라보는 내 눈을 일신(一新)한 것이다.


 덕분에 이제 내 눈엔 내 몸이 더이상 단순한 유기체로 보이지 않는다. 

 빌 브라이슨이 어떤 하나의 조직을 설명할 때, 그 조직만 말하지 않고 그와 관련된 건 뭐든, 질병과 그것을 전문적으로 연구한 사람이나 그 업적까지 통합하여 설명하듯(이 점은 과학자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 간 '거의 모든 것의 역사'와 비슷하다.) 내 몸 또한 그렇게 해야 그 전모가 제대로 밝혀질 수 있을 정도로 모든 조직이 내 몸은 모든 조직이 긴밀한 상호 작용 속에서 유기적으로 잘 통합된 총체(總體)였으니까. 마치 직립보행을 하게 되었기 때문에 인간의 머리와 목을 비롯한 많은 부위가 다른 영장류와 달라졌으며 두뇌를 활용하느라 몸에 더 많은 열이 발현하기에 다른 포유류와 달리 인간만이 피부에 털이 없게 되었듯이 말이다. 내 몸의 그 어떤 부분도 고립된 채로 남아 있는 게 없었고 아무리 미미한 것이라 하더라도 아무런 이유없이 존재하는 것도 없었다. 다 진화 과정 속에서 필요에 의해 형성된 것이었다. 왜 있는지 모를 속눈썹조차 실은 인류가 광범위한 상호 협력을 위한 방향으로 진화한 탓에 서로의 감정을 더 잘 전달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건 이 책을 통해 정말 처음 알았다.


 달리 보면, 달리 이해하게 된다. 

 똑같이 빌 브라이슨도 몸을 달리 보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거기서 일어나는 갖가지 양상들을 달리 헤아리도록 이끌었다. 통증이나 열 같은 부정적인 현상 또한 어떤 조직의 파손이라기 보다는 보존을 위해 뭔가 하고 있거나 해야 한다는 신호로 더 받아들여야 옳았다. 그 시야가 비단 몸에만 국한되는 것도 아니었다. 나와 다른 타자 또한 달리 가늠하게 만들었다. 왜냐하면 몸에 대해 알면 알수록 몸을 가지고 사람들을 이리저리 나누는 게 부질없어 보이는 까닭이다.


 특히 피부가 그렇다. 피부는 인종 차별을 낳는 대표적인 요인이다. 그러나 책에 따르면 우리의 피부색이란 자연적으로 결정된 게 아니라 농경 사회가 됨에 따라 임의적으로 가지게 된 것에 불과하다. 사람은 몸에 여러가지 좋은 일을 하는 비타민 D를 필수적으로 섭취해야 했는데 농경 생활을 하게 됨에따라 그 전에 채취나 수렵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비타민 D의 양이 자연히 적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농경 사회를 했던 인류들은 밝은 피부색을 갖게 되었다. 그것이 햇빛과 만나 더 많은 비타민 D를 만들어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피부색은 내가 사는 곳에 따라 가지게 된 것에 불과했다. 이런 걸 가지고 인종차별을 하다니,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가! 다시는 'BLACK LIVES MATTER!'라는 구호를 외치게 만든 사건들이 일어나선 안 될 것이다.



 [인류는 어떤 몸을 가졌던 다 같은 몸을 가진 동등한 하나라는 뜻으로 찍어 본 사진]



 이처럼 몸에 대해 산더미와 같은 정보를 담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몸이 가진 수수께끼가 완전히 다 풀린 것은 아니다. 아직도 밝히지 못한 미지의 영역이 우리 몸엔 여전히 많이 남아있는 것이다. 나이가 든 사람이라면 누구든 언젠가 근심거리가 되는 나이가 들수록 털이 점점 더 많이 빠지는 이유는 물론이고 주걱턱이 고민인 사람이라면 분명 한 번은 의문을 품어봄 직한, 왜 인간만이 턱을 가지고 있는가에 대한 것조차 규명되지 않았다. 우리 몸엔 인간이 탐침이 닿지 못하는 심연이 즐비하지만 그래도 이만큼이라도 알게 된 게 어디인가 하는 생각도 든다. 빌 브라이슨의 말에 따르면 인류가 자신의 몸 안에 무엇이 있는지 해부를 통해 본격적으로 들여다보기 시작한 것은 르네상스 시대가 지나고 나서라니까 말이다. 미국 드라마 제목 때문에 우리에게도 꽤 낯익을, 오래도록 의학의 기본 교재로 자리잡았던 '그레이의 해부학'이 출간 된 것도 겨우 1861년이다(그레이 혼자 쓴 것이 아니라 카터와 같이 썼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그런데 그레이가 째째한 인사라 카터에게 수익을 제대로 챙겨주지 않았을 거라는 소개가 재밌었다. 의학 분야에서 훌륭한 업적을 이뤘지만 인성이 좋지 못해 그걸 망치는 학자들도 많았다. 지성이 인성을 보증하지 않는다는 걸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된다.). 브라이슨의 책에 저장된 방대한 양의 지식들 대부분은 인류가 기껏해야 200년 남짓한 시간에 다 밝혀낸 것이란 의미다. 그러니 낙관하게 된다. 그 심연도 언젠가 밝혀질 것이라고. 그것도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빨리. 그렇게 되면 우린 더욱 더 내 몸과 타인들을 달리 보고 헤아리게 되리라.


 가득 심취해서 들었더니 어느새 종착역에 와 있었다. 이만한 분량의 책을 어쩌면 이렇게도 빨리 읽어버릴 수 있었을까? 내가 한 일인데도 믿기지 않아 난 멀뚱한 눈으로 빌 브라이슨이 조용이 미소짓고 있는 얼굴만 쳐다 보았다. 오른손으로 내 어깨를 두드리며 어떻게 여행은 만족하셨는지 몯는 브라이슨에게 난 오른 손 엄지손가락을 올리며 좋았다고 연신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내 배를 둥그렇게 쓰다듬었다. 지적 포만감으로 그득하다는 의미로. 부디 브라이슨이 자기 배를 놀리는 것으로 오해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경험한 사람은 다 알 것이다. 지적 쾌감만큼 사람을 중독시키는 것도 또 없다는 걸. 한 번 그걸 제대로 맛보게 되면 끝없이 갈구하게 마련이다. 계속해서 충족되기를. 여기엔 한계효용체감의 법칙이 작동하지 않는다. 어디 또 나를 놀라게 할 새로운 지식 없나 하면서 부릅 뜬 눈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리게 만드는 지독한 허기만 존재할 뿐. 물론 거기에도 간조(干潮)의 시간은 어김없이 닥쳐온다. 책이 그 충족을 채워주지 못해 지적 쾌감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버리는 때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바디 : 우리 몸의 안내서'는 그렇지 않다. 오직 만조(滿潮)의 시간만 있을 뿐이다. 혹시 당신도 나처럼 지적 쾌감을 추구하고 있었다면 기꺼이 이 책을 추천한다. 페이지마다 가득 밀려와 나의 내부를 채우는 몸에 대한 새로운 지식들 속에서 당신도 분명 나와 똑같은 걸 경험하게 되리라. 그걸 사도 바울이 고린도후서에서 말한 것을 살짝 바꿔 이렇게도 말해보련다.


 '그런즉 누구든지 '바디 : 우리 몸의 안내서'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내가 빌 브라이슨에게 할 수 있는 최고의 찬사다. 그가 내 배를 쓰다듬는 걸 오해하여 불쾌하였다면 제발 이것으로 용서해주기를. 

 당신의 다음 가이드도 받고 싶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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