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페션 - 두 개의 고백 하나의 진실
제시 버튼 지음, 이나경 옮김 / 비채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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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부심. 사랑의 시작엔 그런 것이 있다. 

 갑자기 상대가 환하게 보이고 거기에 내 날개를 접고 앉아 고이 쉬고 싶다는 마음이 든다. 강렬히. 그건 마치 거대한 풍랑 속에서 이리 치이고 저리 떠밀리다 간신히 찾아낸 등대 불빛과도 같다. 그 끝모를 고독과 불안에서 헤어나 마침내 안주할 땅을 찾았다는 밝고도 따스한 반가움. 더이상 지치고 아픈 영혼을 받아줄 곳을 찾아 문전 걸식하지 않고 뿌리내릴 곳을 찾았으니 어찌 환희로 눈부시지 않을 수 있으랴. 그러나 때로 눈부심이 지나치면 눈이 멀게 된다. 사랑하는 대상에 어떻게든 붙어있으려고 애쓰다 보면 정작 사랑하는 나는 사라진다. 사랑은 빛을 받는만큼 주는 것도 필요로 한다. 두 사람이 대등하게 상대에 대하여 마땅히 해야 할 책임을 다하지 않으면 사랑은 불균형으로 삐걱거리다 결국 멈추게 된다. 나라는 주체가 너라는 대상에게 오롯이 함몰되어선 안되는 것이다. 나로 제대로 설 수 있어야 사랑 또한 지속된다. 포함되기 보다는 포용하는 나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 나가 되어서 늘 상대를 위하여 애쓰는 것. 사랑은 그 여정 전체에 비로소 붙일 수 있는 이름이다. 종결의 명사가 아니라 진행의 동사인 것이다. 이런 사랑은 엄마가 아이에게 하는 사랑과 참 많이 닮아보인다. 그래서 사람들이 모성을 가장 순수한 사랑의 상징으로 여기는 것인지도 모른다. 뜬금 없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이렇게 사랑, 모성 얘기를 꺼냈던 것은 이번에 나온 영국 작가 제시 버튼의 소설, '컨페션'이 바로 그것에 관한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소설은 두 개의 시간대를 중심으로 번갈아가며 전개된다. 

 하나는 1980년에서 83년으로, 여기서는 앨리스라는 여성이 주연을 맡는다. 다른 하나는 2017년으로 로즈라는 여성이 주역이 된다. 소설의 처음은 앨리스가 연다. 스무 살의 그녀는 서른 여섯의 작가 콘스턴트 홀든을 우연히 만난다. 첫 눈에 호감을 느낀 앨리스는 도서관에서 홀든이 쓴 '밀랍 심장'을 읽고 선 매혹되어 버린다. 그녀는 코니(콘스턴트 홀든)를 사랑하게 되는데, 그건 마치 이제 막 세상 밖으로 나온 것마냥 어디로 가야하며 무엇을 해야할지 전혀 모르고 있는 자신과 전혀 다르게 코니는 확고하게 자기 삶이라는 것을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힘으로 세상에 자신만의 고유한 색채를 세상에 뚜렷하게 새기면서 뚜벅뚜벅 걸어나가고 있음에서 오는 강함이 눈부신 빛이 되어 그녀를 사로잡고 만 것이다. 


 여기서 잠시 책의 표지를 본다. 거기엔 초록 토끼가 그려져 있다.




 이는 코니가 나중에 쓸 작품, '초록 토끼'를 나타낸 것이다. 하지만 이것만 의미하는 건 아닌 것 같다. 생각해 보면, 앨리스라는 이름과 토끼를 통해 떠오르는 작품이 있다. 바로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다. 그 작품에서 앨리스는 갑작스런 토끼의 출현으로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삶의 모험을 하게 된다. 이 소설의 앨리스도 마찬가지다. 코니가 그 토끼였던 셈이다.


 무대는 바뀌어 이제 2017년이다. 두 번째의 주인공 로즈가 등장한다. 그녀는 아주 어릴적부터 부재하고 있는 엄마를 자신만의 허구로 덧칠하는 버릇이 있었다. 그 덧칠은 엄마를 향한 강렬한 그리움의 또다른 표현이었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충족되지 않는 그리움에 지쳐 열네 살에 이르자 엄마라는 존재를 지워버리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그런다고 해서 상실감이 치유되진 않았다. 그는 자신의 삶이 늘 뭔가 부족하게 여겨졌고 그 탓에 타자에게 더 매달리는 존재가 되고 말았다. 


 타인의 시선 속에서, 나는 행복을 볼 수 있었다. 행복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내 행복보다는 타인의 행복을 훨씬 더 강렬하게 맛볼 수 있는 느낌이다. 무엇이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지 말할 수는 없을 테지만, 끊임없이 발전하려 노력하는 데 지쳤다. 내가 가진 숱한 시시한 자아 사이에서 최고의 자아를 찾으려 노력하는 것도.(...) 나는 내 안에서 실패하는 자아나 잠재적 자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p. 38 ~ 9)

 단적으로 그녀는 자신을 이렇게 정의한다.


 내 바위를 찾으면 거기 딱 붙어 떨어지지 않는 부류였다.(p. 71)

 이건 엘리스가 코니에게 가지는 마음과 비슷하다. 둘은 자신의 허한 부분을 타자에게 매달리는 것으로 채우려 한다는 점에서 유사성을 가진다. 닮은 존재였기 때문인지 작가는 로즈에게도 똑같이 초록 토끼를 선사한다. 엘리스가 '밀랍 심장'을 읽고 업힐 대상을 발견했던 것처럼 로즈 역시 딱 두 권밖에 쓰지 않았다는 코니의 마지막 소설 '초록 토끼'를 통해 비로소 자신이 안길 수 있는 엄마를 찾아낼 실마리를 발견하는 것이다. 아버지의 고백을 통해 '초록 토끼'의 작가가 엄마와 밀접한 관계였으며 실종된 이유도 알고 있을 것이란 걸 알게 된 로즈는 신분을 속여 코니의 집에서 가사도우미로 일하려고 한다. 이 때, 그녀의 나이는 서른 네살. 앨리스보다 14년은 더 많지만 상황은 별 다를 바가 없다. 9년 동안 사귄 남자 친구가 있고 이미 남자 집에서도 결혼한 것이나 마찬가지로 대접받지만 마음 속의 공허는 지워지지 않는다. 남자 친구 집에서도 자신을 가족이 아니라 손님으로 여긴다. 산다는 느낌 보다는 억지로 잘 살고 있다고 연기만 하고 있을 뿐 실은 서서히 질식해가고 있는 느낌이 강하다. 인스타그램 스타로 스타일 유행을 선도하는 친구 켈리는 그걸 벗어나기 위해 아이를 가지라고 종용하지만 로즈는 남자 친구 조가 아이의 아빠로 영 미덥지 못하다. 결국 로즈에게 수렁에 빠진 자신을 건져내줄 수 있는 존재는 오직 코니 하나였다. 그녀는 초록 토끼를 찾아갈 수밖에 없었다.



 [루이스 캐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삽화 ]



 이제 여기서 중요한 사실 하나를 밝혀야겠다. 이미 눈치채셨을 지도 모르겠다. 앨리스가 바로 로즈의 엄마라는 사실을(두둥!). 이걸 깨달으면 우리는 두 가지 의문을 품게 된다. 하나는 그토록 열렬히 사랑하던 코니와 앨리스는 어떻게 되었길래 엘리스가 다른 남자 사이에 로즈라는 아이를 낳게 되었나이고 다른 하나는 왜 앨리스는 아이를 두고 사라져버렸는가이다. '컨페션'은 그 미스터리를 1980년대의 앨리스와 2017년의 로즈 이야기로 병행하여 풀어나가며 닮았지만 후반에선 서로 다른 선택을 했던 그녀들의 여정을 통하여 주제라고 할 수 있는 사랑과 주체의 역학 관계를 시나브로 세공한다.


 앨리스와 로즈의 여정은 정말 닮았다. 한 권의 책으로 여정을 시작하는 것도 그렇고 그렇게 코니라는 삶에 온전히 뛰어든 순간이 한창 코니의 작품이 형성되고 있는 상황이라는 것도 그렇다. 물론 앨리스의 얘기에선 코니의 작품이 헐리우드 영화로 만들어지는 중이며 로즈의 얘기에선 코니가 몇 십년만에 새로운 책을 집필 중이라는 차이가 있긴 하지만 말이다. 어쨌든 둘 다 코니의 주체성이 한껏 발현된 현장이다. 코니에게 소설 쓰기란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는 일이다. 그녀는 소설을 쓸 때 홀로 고독하게 작업하며 온전히 자신만으로 채워진 세계를 그 누구도 방해하지 못하도록 한다. 그것이 설령 앨리스라고 해도. 그녀는 집필에 방해가 되기에 아이까지 가지지 않으려는 사람이다. 


 나는 어머니가 되고 싶지 않아, 엘. 그럴 시간이 없어.(p. 114)

 그렇기에 그녀의 작품은 그야말로 고유한 주체성이 눈부신 빛을 뿜어내는 장소가 되는 것이다. 그 때문일까? 앨리스와 로즈 둘 다, 그 장소에서 섣불리 자신의 주체성을 드러내지 못한다. 앨리스는 그렇게 하면 위기가 도래할 것이라 믿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앨리스는 자율성이나 자신감, 요구를 조금이라도 표현하면 자기 입지가 위태로워질 것이라 느꼈다.(p. 161)


  로즈는 진정한 자신을 죽이고 어린 시절에 엄마에게 했던 것처럼 아예 로라라는 허구의 자신을 만들어버린다. 

 

 내 정체성의 실을 풀어 새로 짜내는 과정이 자연스럽게 일어났다. 나 자신을 버리고 커다란 구멍에 단어와 판타지를 쏟아붓는 일이 어떻게 이토록 쉬울까?(p. 185)

 그렇지만 로즈의 이 '허구 만들기'가 서로 닮은 여정을 걸어온 앨리스와 로즈의 운명을 갈라놓는다. 앨리스는 미국에서 영화를 만들어지는 동안 내내 소외되어 있었다. 그녀는 그것에 단 한 번도 주체로 참여하지 못하고 구경꾼이나 다름없는 존재로 있었다. 이러한 앨리스의 수동성은 코니의 친구 화가 샤라가 그녀를 그릴 때 단적으로 대표된다. 그녀는 영국에 있었을 때와 똑같이 움직이지 못하는 모델이 되는 것이다. 그 앨리스를 보면서 샤라는 의미심장하게도 인어를 그린다. 바다와 육지 사이에 걸쳐서 사람과 물고기의 어정쩡한 중간 형태로 남아있는 그녀를. 


 [안데르센의 동화 '인어공주'의 삽화]



 작가가 여기서 인어를 끌어들이는 것은 그녀의 여정이 변했다는 걸 알려주기 위함이다. 여행을 시작할 때 앨리스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주체였다. 코니에게 매혹되긴 했지만 그래도 남자 친구와 예전 직장을 정리한 것은 그녀의 결단이었다. 능동적으로 첫발을 내딛었던 여행이 어느새 한없이 수동적인 것으로 변질되고 만 것이다. 인어는 거기에 딱 알맞는 상징이다. 안데르센 동화에서 인어 또한 자신의 언어를 전할 수 있는 목소리를 잃어버리는 존재가 되니까 말이다. 그와 동일하게 앨리스도 자기만의 이야기를 전할 수 없다. 샤라의 붓 앞에 섰을 때처럼 다만 누가 자신을 봐주길 기다릴 뿐이다. 자신이 누군가를 품고 인도하기 보다는 누군가 자신을 안고 데려가주길 바랄 뿐이다. 


 하지만 로즈는 비록 허구이긴 해도 스스로를 구성하고 전달한다. 자기가 직접 쓴 스토리를 자신조차 믿을 정도의 현실로 만든다(그녀는 소설 마지막에서 코스타리카로 떠나는데 그렇게 함으로써 거짓으로 꾸몄던 이력인 코스타리카 여행을 진실로 만든다.). 그런 면에서 로즈는 코니와 마찬가지다. 삶을 그려나가는 작가인 것이다. 그렇게 로즈 또한 주체성을 은은한 수준이긴 해도 확실히 빛내고 있었다. 이는 코니가 새로운 소설, '변심'을 쓰는 과정에서 확연히 나타난다. 앨리스는 소외되어 있었지만 로즈는 코니와 대등하게 대화하는 관계로 참여하는 것이다. 그녀는 코니에게 묻고 대답을 이끌어내며 자신만의 견해를 내놓기까지 한다. 


 분명 이 차이가 둘의 미래를 갈라놓았을 것이다. 앨리스는 정말로 인어가 되어버린다. 샤라가 그토록 원하는 엄마까지 되었지만 여전히 사랑을 주기 보다는 받는 것을 더 원한 나머지 안데르센 동화 속 인어의 마지막이 그랬던 것처럼 거품이 터지듯 사라지는 것이다. 그러나 로즈는 다르다. 그녀 역시 아이를 임신했지만 그래도 남자 친구 조와 다시 합치지 않는다. 그녀는 홀로 버티며 낙태를 한 뒤에도 적극적으로 오늘을 살아간다. 앨리스는 아이만 남고 엄마는 사라졌지만, 로즈는 아이가 사라지고 엄마만 남았다. 그렇게 전자는 소멸하고 후자는 항존한다. 앨리스가 인어의 이미지라면 로즈는 로즈버드의 이미지다.(아예 직접적으로 로즈를 '로즈버드'라고 부르기도 한다.) 오손 웰즈가 감독한 영화 '시민 케인'에서 '로즈버드'는 시간이 아무리 많이 흐르고 삶의 자리가 달라졌어요 사라지지 않고 언제까지나 마음 중앙에 변항없이 남는 것을 상징한다. 그러고 보면 로즈는 그야말로 로즈버드인 것이다.



[영화 '시민케인'에 등장한 '로즈버드'의 모습]



 로즈는 어떻게 그런 존재가 될 수 있었을까? 바로 여기서 작가는 책임을 제시한다. 이것이 수동적인 존재를 능동적인 주체로 만들어주는 뼈대라고.


 여기서 의문이 하나 들 수 있다. '앨리스가 임신을 하고 아이를 낳은 것은 주체성을 발휘한 선택이 아닌가?'이다. 대답하자면 아니다. 앨리스가 엄마가 된 것은 주체화(主體化)에서 비롯된 결단이 아니었다. 진실은 도피의 일환이었고 코니가 여배우 바버라와 바람을 핀 것에 대한 복수였다. 앨리스는 코니가 바버라에게 매혹당했다고 여겼는데 그건 바버라가 코니 보다 더 빛나는 존재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토록 눈부신 사람이었기 때문에 자기가 코니에게 그랬듯 코니 역시 바버라에게 홀렸다고 생각했고 샤라가 그토록 바라는 엄마가 되면 자기도 바버라만큼 눈부신 존재가 되어 코니의 마음을 다시 자기에게로 돌려놓을 수 있으리라 믿었다. 이런 식으로 앨리스는 계속 욕망의 수동적인 대상이 되는 걸 택했다. 그것이 어려워지면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보다 그냥 달아나버렸다. 코니의 바람으로 상처를 받자 사랑하지도 않는 샤라의 남편 (달아날 때조차 앨리스는 혼자서 못하고 자신을 데려갈 사람을 필요로 한다.)을 유혹하여 멕시코의 해변으로 떠나버렸던 것처럼. 앨리스는 코니의 존재감에 위축되어 자신을 작다고 여기거나 소외되어 있다고 느낄 때마다 수영장이나 바다처럼 언제나  가까이 있게 되는데, 아마도 그건 삼켜진다는 이미지 때문이 아닐까 싶다. 나라는 주체가 지워지는. 그러므로 그녀가 다시 한 번 바다로 갔다는 것은 현재 마주한 고난을 스스로 짊어져야 할 책임이 버거워서 회피했다는 암시이기도 하다. 코니의 다음과 같은 말 그대로다.


 "당신은 책임과 마주하는 족족 달아났어. 가까워지면 달아났지. 아버지에게서, 내게서, 맷에게서 달아났어. 살면서 또 누구에게서 달아났는지는 아무도 모르지.내겐 절대로 말하지 않았으니. 그리고 당신이 또 그럴거라는 예감이 들어."(p.467 ~ 8)

 코니의 예언은 적중했다. 앨리스는 아이를 책임져야했을 때 달아나버렸으니까. 안데르센의 인어공주는 왕자가 먼저 자신을 알아봐주기만을 기다리다가 끝내 거품이 되어 사라졌다. 앨리스도 그렇게 되었다. 수동적인 예속 상태에 안주하는 한, 기다리는 건 사랑의 상실과 나란 존재의 소멸 뿐이다. 로즈는 전혀 다른 길을 걸었다. 홀로 자신을 책임지려했고(로즈와 조가 공동 투자한, 그러나 단 한 번도 축제 장소엔 가보지 못하고 내내 부모님 집 앞에 주차되어 있는 부리토 트럭은 로즈의 상황을 비유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자신이 아닌 조에게 매인 존재였으니까. 시간이 지날수록 마냥 녹만 쓸 뿐인 트럭을 조는 로즈가 독립적 주체가 되자 자신의 오랜 망집에서 놓아준다. 처분해버린 것이다. 결국 그 돈은 로즈의 자립을 위한 자본이 된다.) 아이에 대해서도 그렇게 했다. 로즈의 중절 수술은 엄마가 되는 두렵고 낯선 모험의 여정을 회피한 것이 아니다. 코니의 고백(컨페션)을 통해 앨리스가 어쩌다 자신을 포기하게 되었는지를 듣고 양육에 있어 자기 역량을 깊이 고려하여 그렇게 한 것이다. 부족한 자신이 아이에 대해 짊어져야 하는 책임을 다한 것이다. 남자 친구 조가 책임지지도 못하면서 마냥 부리토 트럭을 붙잡고만 있다가 로즈에게 상처를 입힌 것과 달리 말이다. 그러고보면 앨리스에게 있어 로즈 또한 부리토 트럭인 셈이다. 코니는 로즈가 조와 헤어졌을 때, 이런 조언을 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날 때 진정한 자신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는 거예요.(p. 276)

 하지만 이 말이 사랑과의 결별이 주체로 만든다는 걸 뜻하는 건 아니다. 이건 역량의 문제다. 자신의 역량을 넘어서는 사랑에 마냥 매달리다 거기에 압도된 나머지 무분별하게 타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일을 하지말라는 조언이다. 앨리스의 패착처럼. 역량은 자기 한계를 아는 것인데 그건 독립적인 주체로 제대로 섰을 때라야 알 수 있다. 그제서야 자신이라는 영역의 경계가 선명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주체는 책임을 다하는 것으로 형성된다. 타자에 대한 의존으로 매몰되지 않고 온전한 자신을 드러내며 나도 대등한 버팀목이 되어 관계를 당당히 떠받치는 책임. 로즈가 코니의 집에서 그랬듯이 말이다. 책임은 주체를 가동시키는 높은 옥탄가의 연료인 것이다. 


 사랑을 얼마나 오래 지켜낼 수 있는가 또한 주체의 성장과 관련이 있다. 위에서 '사랑과 주체의 역학 관계'란 말을 한 것은 이 때문이다. 이것은 정비례 관계다. 타인의 등에 업혀 사랑을 존속시키려 하는 것은 오래가지 못한다. 사랑도 서로의 책임을 통해 항상 충전되어야 하는데 기대거나 매달리기만 하는 사랑은 착취이기 때문이다. 오직 남에게 의존하지 않고 오롯이 자기 두 발로 서서 그것을 위해 내가 먼저 무엇을 얼마만큼 할 수 있는가 하는 역량을 거듭 헤아리는 자만이 사랑 또한 오래 보존한다. 로즈의 마지막 장면은 자못 뭉클하다. 로즈는 어릴 때 자신을 두고 저주라고 말했던 코니의 배웅을 받으며 코스타리카로 떠난다. 소설에서 코니는 단 한 번도 남을 배웅한 적이 없다. 그런 코니가 떠나는 로즈를 오래도록 지켜볼만큼 그녀는 성장했고 앨리스가 그토록 바랐던 눈부신 빛을 얻은 것이다. 이제 우리는 알게 된다. 사랑의 눈부심 속에서 눈이 멀지 않으려면 빛을 받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 줄 수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그것이 '컨페션'이란 초록 토끼가 궁극적으로 우릴 데려가는 곳이다. 거기서 우리는 되새겨야 한다. 독립적인 주체가 되지 않고서는 사랑도 할 수 없으며, 사랑은 향유가 아니라 책임에서 비로소 개화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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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세계사의 시간은 거꾸로 흐르는가 - 격변하는 현대 사회의 다섯 가지 위기
마르쿠스 가브리엘 지음, 오노 가즈모토 엮음, 김윤경 옮김 / 타인의사유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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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신실재론은 포스트 모더니즘 이후 생겨난 철학의 새로운 사조이다. 

사실 포스트 모더니즘 이후로 철학의 영토에 있어서 주목할만한 신선한 흐름은 별로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다 2006년, 퀑탱 메이야수가 '유한성 이후'란 책을 발표했고 그걸 시작으로 포스트 모더니즘으로 인해 더욱 부각된 실재와 가상의 경계가 모호해진 것에 대해 반발하는 움직임이 일어났고 그걸 사람들은 '사변적 실재론'이라 불렀다. 이후, 퀑탱 메이야수가 했던 것과 다른 방향으로 마우리치오 페라리스와 마르쿠스 가브리엘의 실재론적 복권의 시도가 있었으니 그걸 두고 '신실재론'이라 이름하였다. 신실재론은 실상과 가상, 진리와 허구의 구별이 점차 사라지고 그동안 옳고 그름의 문제는 오직 해석의 영역에 불과하다는 주장이 팽배했던 시대에 반기를 들고 옳고 그름은 엄연히 존재하며 반드시 가를 수 있다는 목소리를 내는 것이다. 특히나 이러한 신실재론은 인터넷의 발달한 지금 시대에 강한 문제를 제기한다. 인터넷은 언뜻 보면 민주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방대한 정보들은 자연적으로 생성되는 게 아니라 누군가의 손길을 거쳐 유포된다. 현재 우리나라 포털 메인에 올라오는 뉴스들만 봐도 알 수 있다. 한국에서 매일 수많은 뉴스가 생산되지만 포털의 메인엔 언제나 포털이 선정한 것만 노출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포털 메인의 뉴스만 보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여론은 포털의 입맛에 따라 형성된다. 한 마디로 포털이 여론 몰이할 수 있는 의제를 게이트키핑하며 권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이다. 신실재론은 이러한 흐름에 제동을 걸려고 한다. 인터넷이 은폐하고 있는 비민주적인 면모를 교정하여 미디어를 민주적인 디바이스로 새롭게 창출하는 것이다. 그런 고로 신실재론은 현재의 상황과 긴밀하게 연동하는 현재진행형 철학이라고 하겠다. 이런 신실재론의 대표적 학자 한 사람이 앞서 말한 마르쿠스 가브리엘이다. 1980년생인 그는 젊은 나이에 신실재론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고 지금은 독일 본 대학 석좌교수로 있다. 사상 최연소라고 한다.


이번에 나온 '왜 세계사의 시간은 거꾸로 흐르는가?'는 신실재론 입장에서 지금의 사회를 비판하는 책이라 할 수 있다.




그는 현 시대를 단적으로 세계사의 시간이 거꾸로 있다고 정의하는데, 그건 지금 세계가 보여주고 있는 모습이 그야말로 19세기로 돌아가려는 열망으로 가득차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19세기는 국민국가가 가장 달콤한 떡고물을 무던히 먹었던 시기다. 그는 총 다섯 가지 분야에서 이러한 퇴행이 감지된다고 하는데, 그건 차례로 가치, 민주주의, 자본주의, 테크놀로지 그리고 표상이다. 220 페이지 남짓 되는 이 작은 책은 그걸 한 챕터씩 할애하여 설명한다. 복잡하거나 난해하게 말하지 않고 철학에 문외한이라 하더라도 별 어려움이 없도록 쉽게 설명하고 있다. 신실재론의 기본적인 철학 태도나 그러한 시야로 바라본 현대의 모습이 궁금하였다면 볼만한 책이다. 신실재론은 어디까지나 보편적인 진리, 선이 존재한다고 믿으므로 이러한 시각으로 곳곳에서 다양성과 상대주의가 넘쳐나 때로는 정말 그른 것으로 생각되는 것에도 제대로 비난할 수 없는 상황에 빠질 때, 그걸 어떻게 분명하게 판단하고 옳고 그른 것을 가려낼 수 있는지 도움이 된다. 다시 말해 신실재론은 다양성과 상대주의가 희석시키고 있는 윤리적 차원을 다시금 보다 명징하게 복원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자본주의의 위기 진단에서 그가 한 주장이 주목을 끈다. 지금의 자본주의는 이윤을 위해 윤리를 쉽게 무시하는데 가브리엘은 공면역주의를 주장한다. 기업을 포함한 사회의 목표를 수입의 증가가 아닌 도덕의 진보, 즉 인간성의 향상에 맞추는 것이다. 그것의 실현을 위한 구체적 내용은 아직 부재하지만, 빈익빈부익부가 날로 심화되는 상황에서 자본 소유의 고저에 따라 비인간화가 많이 발생하는 요즘을 보면 꽤 귀기울일만한 주장이 아닌가 생각한다. 


마지막 표상은 신실재론에 있어서 정말 중요한 것인데, 지금까지 철학은 표상을 어디까지나 인간과 상호 연결된 것으로 생각해왔다. 

이건 쇼펜하우어의 말이 대표적인데, 그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 세계는 나의 표상이다.' 이렇게 표상이 홀로 객관적이지 않고 칸트가 말했듯 인간의 주관과 연결되어 형성되다보니, 어느덧 표상을 매개하는 미디어가 더 커다란 권력을 가지게 되었다. 이 매체의 과도한 권력에서 과학의 역할 역시 과장되게 된 것이다. 신실재론은 이러한 과학중심주의, 즉 과학만이 실재를 표상할 수 있다는 믿음을 '자연주의'라 부르며 비판한다. 신실재론은 과학만이 실재를 표상할 특권을 가지고 있다고 여기지 않으며 그들이 보는 건 많은 현실로 이뤄진 의미장의 한 부분일 뿐이라고 말한다. 가브리엘은 하나의 사물에 수많은 현실이 존재할 수 있고 보고 있는 인간과 완전히 독립된 현실, 즉 실재도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다고 말한다. 또한 그는 물리적인 것만 아니라 우리의 감정이나 상상력 또한 모두 현실이라 말한다. 그 모든 현실이 모여 의미장이 되는 것이며 그렇다고 하나의 현실이 되는 건 아니라고 강조한다. 신실재론이 민주주의를 주장하는 건 이래서다. 의미장을 구성하는 수많은 현실은 그 어디에도 권력에 의한 위계질서가 없다. 이것은 다만 대등한 배열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것의 순서를 부여하는 특수한 콘셉트의 '의도'가 있을 뿐이다. 예를 들어 설명하자면 3개의 정육면체가 눈앞에 있다고 한다면 보통 사람에게 그것이 몇 개냐고 물으면 3개라고 대답하겠지만 양자역학을 하는 하이젠베르크는 원자의 수를 세어 엄청나게 많은 수를 말할 것이다. 이 둘 중에 누가 옳다고 말할 수는 없다. 모두 자신만의 특별한 콘셉트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 콘셉트가 '몇 개'라는 의미를 생산했다. 그러므로 가브리엘은 의미란 의도에서 나온다고 말한다. 그리고 현실은 그 의도에 의미장이 응답한 것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GAFA(구글,아마존,페이스북,애플)은 인터넷 표상을 독점하고 유일무이한 현실을 양산하여 소비할 것을 강요하고 있다. 우리는 그들의 독재를 용납하는데, 그건 우리가 그들이 생산한 정보를 공짜로 누리고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브리엘은 전혀 다른 관점을 제시한다. 오히려 우리가 GAFA를 위해 무상 노동을 제공하고 있다고. 쉬운 예로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이 있기 전에 우리는 사진을 그렇게 열심히 찍지 않았다. 맛있는 먹을 것을 앞에 두고 카메라부터 들이대지 않았다. 여행에서도 풍경을 음미하는 게 먼저였다. 하지만 이젠 그러지 않는다. 사진이 먼저고 감각과 생각은 나중이다.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혹은 인스타그램에 올리기 위해서. 그렇게 우리는 그들의 광고 수익을 증대하기 위한 노동을 자발적으로 무상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우리를 가브리엘은 '디지털 프롤레타리아'라고 부른다. 그는 이제 GAFA를 위한 우리의 노동에 보상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를테면 GAFA에게 그 노동의 대가에 따른 세금을 매겨 그걸 기본소득의 재원으로 삼는 것이다. 가브리엘은 기본소득이 윤리적으로 도래에야 하는 제도로 본다. 이런 식으로 가브리엘은 자꾸만 거꾸로 가고 있는 세계사의 시간을 어떻게 하면 되돌릴 수 있는지 설명한다. 어떤 부분은 물론 설명이 빈약하다고 여길 것이다. 그러나 '디지털 프롤레타리아'처럼 뇌를 신선하게 자극하는 새로운 관점들은 확실히 이 책의 독서를 흥미롭게 만든다. 부담없이 벗해볼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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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나무 아래 - 시체가 묻혀 있다
가지이 모토지로 지음, 이현욱 외 옮김 / 위북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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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은 평탄하지 않다. 그건 눈을 따갑게 만드는 먼지들이 풀풀 날리며 자꾸만 발에 채이는 자갈돌도 많은 거친 길이다. 이마를 환하게 만드는 눈부신 빛보다 차마 마주하고 싶은 어둠이 더욱 짙게 드리워져 있다. 삶은 그렇다. 바랐던 꿈은 어느새 보이지 않는 저 멀리로 홀연히 사라지고 원치 않는 옷을 입고 있고 싶지 않은 자리에 식물처럼 붙박혀 이렇게 살아도 괜찮은가만 곱씹다가 물러갈 때가 되면 후회 속에 사라진다. 삶이란 정말로 벚꽃나무 아래 시체가 묻혀 있는 것과 같다. 잠깐 누리는 화려함은 오랜 번민과 절망 그리고 고통을 거름삼아 피어나는 것이다. 7년간 지하 속에 날다가 고작 7일만 바깥 세상에 나와 울다가 최후를 맞는 매미와 같이.


 가지이 모토지로의 글은 봄에 읽기에 어울리지 않는다. 비 오는 처연한 봄밤이라면 어울릴 것 같다. 찬바람 씽씽 부는 늦가을이나 겨울밤에 읽기엔 더욱 제격이다. 그의 글들을 모은 책이 나왔다. 제목은 일본 소설을 즐겨 읽었다면 아주 낯익을 문장이기도 할, '벚꽃나무 아래 시체가 묻혀 있다'이다. 



 낮 보다는 밤을, 밝음 보다는 어둠을, 희망 보다는 절망을 찬양했던 작가.

 

이런 모든 것이 햇빛이 비추는 풍경을 만들어낸다. 그곳에는 감정의 이완, 신경의 둔화, 이성의 기만이 존재한다. 이것이 햇빛이 상징하는 행복의 내용이다. 아직도 이 세상이 생각하는 행복이 이것들을 조건으로 생각하는 것처럼...('겨울 파리' p.121)


생명력 넘치는 여름만을 원하는 이들에게 실은 더 중요한 게 살을 에이며 몸을 움츠리게 만드는 겨울이라고 알려주는 작가. 


  이 골짜기에서 나를 즐겁게 하는 건 아무것도 없어. 휘파람새와 박새도 하얀 햇빛을 새파랗게 물들이는 나무의 새싹도 단지 그것만으로는 몽롱한 이미지에 불과하지. 나에게는 슬프고도 잔인한 사건이 필요해. 그런 균형이 있어야 내 이미지가 명확해지거든. 내 마음은 악귀처럼 우울하게 메말라 있어. 내 마음속 우울함이 완성될 때만 내 마음은 온화해지지.('벚꽃나무 아래'중에서 p. 200)


그가 바로 가지이 모토지로다. 기형도 시인은 자신의 시 속에 이런 구절을 남긴 바 있다. 

 '나의 영혼은 검은 페이지가 대부분이다. 그러니 누가 나를 펼쳐 볼 것인가'


 가지이 모토지로의 글도 그렇다. 다른 이라면 한창 다가 올 인생에 대한 이런 저런 희망으로 가득 차 있었을 스무 살에 폐결핵에 걸려 늘 그 병을 그림자처럼 짊어지고 살았던 작가. 나이가 들수록 요양을 위해 이 여관 저 여관을 전전해야 했고 대부분의 시간을 침대나 다다미에 놓은 이불 속에서 누워 보내야 했던 작가.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건 폐병으로 죽은 사람들의 이야기 뿐이고 그렇게 자기도 언젠가 가리라는 것을 늘 절감하며 살아야했던 작가. 그런 작가가 새로 돋는 새싹 보다 곧 쓰러질 고목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는 건 자연스러운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가 우울을 옷으로 삼고 비애를 자신의 거처로 삼았더라도 삶을 쉽게 포기하려 했던 건 아니다. '겨울 파리'라는 단편이 잘 보여주듯, 그럴지라도 삶이 허락하는 모든 순간을 가장 치열하게 살아야 한다고 강조했고 그걸 자기 스스로 실천했다. 그는 증명하고자했다. 모든 이들이 기피하는 고통이야말로 진정으로 우릴 더 높은 차원으로 고양시키는 의미있는 경험임을. 그것이 바로 시체 위에서 태어나 더없이 화려한 자태를 뽐내는 벚꽃나무란 이미지의 참된 의미가 아닐까 생각한다. 내가 겪고 있는 아픔과 좌절을 위로하고 새롭게 보도록 이끌어주는 작가. 그러므로 가지이 모토지로의 글은 벗할 가치가 분명히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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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워크
스티븐 킹 지음, 공보경 옮김 / 황금가지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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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망각의 함에 가장 먼저 던져지는 건 패배의 기억이다. 

 특히나 그 주체가 패권을 가진 국가라면. 미국이 베트남 전쟁을 치를 때, 그들은 북 베트남을 얕잡아 보았다. 국력의 수준이 골리앗과 다윗이었으니 당연했다. 그랬기애 패전은 더욱 쓰라린 상처였다. 그들은 그 기억을 서둘러 잊고자 했다. 애써 없던 일로 치부하고 미래만 바라보기로 했다. 경마장의 말처럼 그저 앞만보고 질주하기. 과거에 발목을 잡히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다고 치부하면서. 이것이 배트남 패전 이후의 미국 분위기였다. 스티븐 킹이 리처드 바크만이란 이름으로 발표한 '로드워크'는 그러한 시대적 분위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소설의 첫 문장이 그걸 잘 보여준다.


 베트남 전쟁은 끝났고 미국은 다시 앞으로 나아갔다.(p. 11)


 주인공은 도스 바튼.

 '블루 리본'이란 세탁 공장에서 일하는 그는 현재 커다란 위기에 봉착해 있다. 고속도로 확장 공사 때문에 자신의 직장도, 집도 옮겨야 할 상황에 빠진 것이다. 그 둘 모두는 그가 정말 사랑한 것이었다. 물론 회사는 지금 다른 사람에 넘어가 오직 자본의 이윤만 추구하는 속된 곳이 되어버렸지만. 과거의 회사는 그런 곳이 아니었다. 직원을 부하가 아니라 함께 성장하는 동료로 여겼던 사장이 운영했던 그곳은 인간미로 넘치던 공간이었다. 그건 회사만이 아니다. 주인공이 살고 있는 마을 또한 누구 집에 숫가락이 몇 개인지 다 알 정도로 친하게 지냈고 이웃 사이의 다정함이 넘실거리던 곳이었다. 그런데 그 모두가 변했다. 회사는 돈에 팔렸고 마을은 도로 확장 공사로 이제 지도에서 지워지려 한다. 바튼이 아는 마을 사람들은 모두 떠났다. 마을에 남은 건 오직 바튼 집 하나 뿐이다. 그러나 바튼은 옮길 마음이 없다. 그 집은 그에게 너무나 소중한 곳이기 때문이다. 처음 가정을 이루어 온갖 애환의 기억이 긴 두루마리처럼 집 전체를 감싸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무엇보다 뇌종양으로 어이없이 이별하고만 아들의 추억이 뿌리내린 장소인 것이다. 그는 그걸 포기하지 않으려 한다. 집을 옮기는 건 죽은 아들과의 인연을 송두리째 버리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런 그를 주위의 누구도 인정해주지 않는다. 쇼핑몰에서 만난 부하 직원 비니가 바튼에게 말한 것처럼 다들 그가 미쳤다고 여길 뿐이다. 심지어 같은 아픔을 공유하고 있는 아내 매리조차도.


 매리는 말한다. '과거애 발목 잡혀선 안된다'고. 

 그는 퇴거 기한이 코 앞까지 닥쳐왔는데도 이사할 생각을 하지 않는 남편을 떠나면서 오히려 해방감을 느낀다. 그는 바튼에게 말한다. 이제 자신은 과거에서 자유로워졌고 새 삶을 살 것이라고. 그녀는 바튼에게도 그러라고 말한다. 홀로 된 바튼은 실직까지 당하여 매일 집에서 시간을 보낸다. 그가 하는 일이라곤 딱 두 가지다. 하나는 그걸 장만하기 위하여 아내와 엄청 노력했던 추억이 서려 있는 테이블 TV로 오래된 옛날 영화를 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매일 밤마다 자동차를 몰고 나가 다른 차가 아무리 클랙션을 울려도 상관하지 않고 제한 속도를 훨씬 초과하여 도로를 폭주하는 것이다. 이건 그대로 그의 마음 속에 일어나고 있는 갈등 상황을 비유하고 있다. 아들을 기억하기 위해 언제까지나 집에 머무르고 싶지만 한 편으론 자신을 오롯이 삼켜버린 과거의 비극적인 기억에서 빠져나와 새롭게 나아가야 한다는 것도 안다. 스스로 화염병을 만들어 공사 현장을 붙태우면서까지 저항해 보지만 그 모든 몸부림 또한 바다에 빈 병을 던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무의미하다는 것만 되새긴다.




 그런 그 앞에 두 명의 여자가 나타난다. 

 하나는 밤마다 달리는 고속도로에서 도와준 히치하이커 소녀이고 다른 하나는 슈퍼마켓에서 보게 된 한 여인이다. 히치하이커 소녀, 올리비아도 바튼처럼 비루한 현실에 절망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안주하지 않고 어딘가에 다른 미래가 열릴 것이라는 희망으로 라스베이거스로 가려한다. 그 곳이 그녀의 마지막 희망이며 거기에서도 긍정적인 것을 찾지 못하면 그걸로 끝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바튼은 그녀가 자신과 너무나 닮았다고 여긴다. 그렇기에 자신과 다르게 그래도 아직 희망을 갖고 변화를 위해 노력하는 그녀를 대견하게 여기고 기꺼이 많은 도움을 주려 한다. 어쩌면 그녀를 통해 밤마다 고속도로를 폭주족처럼 달리면서도 여전히 집으로 돌아오고야마는, 그렇게 이루지 못하는 꿈을 대리충족 하려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라스베이거스에서 올리비아도 자신이 원하는 바를 얻지 못했고 바튼은 또 한 번의 씁쓸함만 더 맛볼 뿐이다. 슈퍼마켓에서 본 여자의 이름은 모른다. 그녀는 갑자기 발작을 일으키더니 쓰려져 그대로 죽어버렸다. 어떤 의미도 부여할 수 없는 다만 죽음이었다. 바튼은 그 여자의 죽음에서 삶을 감싸고 있는 허무의 심연을 본다. 자신이 과거에 함몰되어 있든, 내일을 향해 변화를 향유하든 그 무엇을 선택해도 그대로 무채색의 암흑으로 칠해버릴 공허를.


 그래서 그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의미를 남기려 한다. 

 어차피 언제든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는 렉킹볼을 맞아야 하는 운명이라면 그것에 머리가 깨어지기 전까진 최선을 다해 자기 존재의 증명을 하겠다는 것이다. 그는 그 증명을 위해 과거를 택한다. 남들이 기피하는 과거에 나서서 발목을 내어주고 자신과 같은 자들을 대변하는 존재가 되려 한다. 한 곳만 보고 달려가는 이들은 결코 보지 않는 이들을 위해 자신을 산화해서라도 그들을 보게 만드리라 작정한다. 바튼은 그렇게 성장하고 자신의 절정을 향해 나아간다. 이러한 바튼의 발걸음은 동시에 상처를 헤아리기 보다는 어설픈 봉합으로 서둘러 잊어버리기에 급급한 미국에게 강한 비판이 된다. 전쟁은 필연적으로 비극을 양산한다. 참전한 이들은 누구든 영혼을 깊이 옥죄는 고통의 멍에를 짊어지게 된다. 이들은 집이란 곳이 정말 필요하다. 그 상처를 딛고 다시 일어서기 위해서라도. 그러나 패전 후의 미국은 그렇게 해주지 못했다. 발전이란 환영을 위해 도로 확장 공사로 있던 집들도 없애버리고 그들을 더욱 올리비아와 같은 집 없는 떠돌이 히치하이커로 만들었을 뿐이다. 라스베이거스에서의 올리비아는 그런 미국의 훗날을 보여주는 것과 같다. 절망과 환멸의 계속된 집적만이 있을 뿐인 것이다. 


 그래서 바튼은 최후의 버튼을 누른다. 

 그렇게 되기 전에 자신이 남을 비추는 빛이 되어 우리가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를 다들 스스로 되새길 수 있도록.


 이처럼 스티븐 킹의 '로드워크'는 패전 후 미국인 영혼에 깊은 탐침을 드리우는 작품이다. 

 가장 비판적이지만 또 가장 사려깊게 오늘의 미국이 어떤 문제를 가지고 있는가를 모색한다. 1983년에 나온 '부적'은 레이거노믹스에 대한 신랄한 비판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로드워크'는 1981년에 발표되었다. '부적'이 괜히 그랬던 게 아닌 것이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스티븐 킹을 그저 선정적인 소재로 재밌는 작품을 쓰는 작가로만 여긴다. 그런 이들에게 '로드워크'는 결코 거기에만 그치는 작가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좋은 사례가 될 것이다. '부적'과 더불어 '로드워크'는 그가 얼마나 동시대의 문제에 민감하여 그것을 자신의 작품으로 대화하기를 애쓰는가를 감응하게 하여 그가 여전히 거장의 반열에 있는 이유를 짐작하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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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1-04-21 0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느 나라나 안 좋은 건 빨리 잊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하는 듯해요 어떤 시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도 있는데, 전쟁은 더 그렇겠습니다 그런 일을 겪지 않았지만, 한번이라도 겪으면 힘들 듯합니다 바튼은 아들을 잊고 싶지 않아서 집을 떠나지 않는군요 그런 일은 한국에도 있었을 법하기도 하네요

스티븐 킹이 다른 이름으로 낸 소설이군요


희선
 



예전부터 읽고 싶은 책이었다. 로저 에커치의 '잃어버린 밤에 대하여'는...

원래는 돌베개에서 '밤의 문화사'란 제목으로 나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처음 그 제목을 보았을 때 끌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때는 일로, 공부로 허다하게 밤일 지새웠던 시기였다.

밤에 많이 깨어있다 보니 밤에 관심을 가지는 건 당연한 일. 그런 밤의 문화사를, 그것도 무려 20년 동안 연구한 것을 바탕으로 알려준다는데 어떻게 노크 한 번 안 할 수 있을 것인가?

하지만 너무 바쁜 일상을 보내다 보니 그런 마음조차 어느덧 잊고 이 책의 존재를 다시 떠올리게 된 건 우연히 이렇게 다른 제목, 다른 모습으로 출간된 걸 보고나서였다.

출판사도 바뀌어 있었다. 바뀐 제목은 '잃어버린 밤에 대하여'였는데, 원래 제목은 'AT DAY'S CLOSE'라서 낮이 저물 때라는 뜻이니 이걸 번역한 건 아니다.

아무래도 '밤의 문화사'가 보다 낭만적인 느낌의 제목인 '잃어버린 밤에 대하여'로 바뀐 것은 행여나 '밤문화사'로 오해할 소지가 있어서가 아니었을까 추측해 본다.(물론 농담입니다^^)



 


 

 저자는 '인간 역사의 절반은 전반적으로 무시되어왔다'고 말한다. 물론 거기서 말하는 절반은 '밤'을 뜻한다.

저자의 말 그대로 밤은 역사의 시선에서 소외되어 있었다. 미시사 분야가 왕성하게 활동했을 때에도 '밤'은 그다지 주목 받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인류 역사에서 허다한 밤들은 오직 낮 동안의 계속된 노동으로 고단한 몸을 쉬게 만드는 수면으로 꽉 차 있었을테니까 말이다. 그렇게 많은 시대 동안 권력도, 돈도 없는 보통의 서민이나 노예들에게 밤이란 낮의 보충일 뿐이었다. 하지만 이런 내 생각이야말로 무지의 장막 속에 있다는 걸 이 책은 말해주고 있다. 그런 밤들에서도 오늘날 우리가 충분히 귀기울여 들을만한 문화들이 만들어지고 향유되었던 것이다. 그걸 저자는 스칸디나비아 반도를 비롯하여 세계 각지로 직접 답사하면서 20년에 걸쳐 모은 편지나 일기, 법정기록, 속담, 시, 정기간행물 등 온갖 기록물들을 바탕으로 증명하고 설명한다.


 한낮 못지 않게 밤 또한 문화의 강을 유유히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나 저자는 수면 형태의 역사에 대해서도 설명하고 있다고 한다. 한 마디로 잠의 역사라 할 만 한데, 우리가 자는 형태도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인위적으로 조정된 것이라니 흥미롭다. 어쨌든 오래도록 읽어야겠다고 생각만 하고 있었던 책을 이번 기회엔 꼭 읽어볼 작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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