캣퍼슨
크리스틴 루페니언 지음, 하윤숙 옮김 / 비채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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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리스틴 루페니언의 ‘캣퍼슨 단편집이다

 표제작인 ‘캣퍼슨 포함하여 모두 12편의 단편이 여기에 실려 있다무엇보다 표지가 눈길을 끈다한창 키스를 나누고 있는 남녀의 입을 클로즈업한 일러스트다



 독자는  표지에서 무엇을 짐작할  있을까

 E.L 제임스의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처럼 야한 소설틀린  아니다. ‘캣퍼슨 문득 2000년에 HBO에서 방영한 드라마 ‘섹스   시티 처음 보았을 때의 느낌 혹은 놀라움을 생각나게 했으니까그러나  소설은 그걸 추구하고 있지 않다 보다는 관심과 사랑에 어리고 있는 폭력을  많이 다룬다표지의 키스 또한 마찬가지다사실 이건  번째에 실린 ‘  유어 게임에서 주인공인 열두  소녀 제시카에게  어른 노숙자가 갑자기 달려들어  키스를 표현한 것이니까 말이다.(이게 정말 그런 것인지 확인한 것은 아니다다만  생각으로  번째 단편에서      키스가 내내 주인공을   들게  정도로 두려움을 남기기 때문이다.)  마디로 야한 낭만적인 사랑 이야기가 아니다.

 사랑의 이면에 깃든 폭력성에 초점을 맞춘 어두운 사랑 이야기다.


  날개에 실린 작가에 대한 소개글을 보니 그녀는 자신을 ‘스티븐 킹을 읽으며 자란 아이라고 밝혔다고 한다그래서 그런지 스티븐 킹의 흔적이 보인다. ‘  유어 게임 그렇고(후반에 충격적인 내용이 있다.) ‘정어리 그렇고( 역시 마찬가지!) ‘성냥갑 증후군 그렇다.( 또한 마지막이 섬뜩하다.) 스티븐 킹적인 분위기를 좋아한다면 ‘캣퍼슨’ 역시 마음에  것이라 생각한다.


 ‘캣퍼슨 등장하는 주인공 여성들은 연약하다는 공통점이 있다

 자신에게 닥쳐온 난관을 스스로  해결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캣퍼슨에선 처음엔 동경했으나 만나면 만날수록 실망만 안기는 자기보다 한참 연상인 남자와 헤어지고 싶은데도 그러지 못해 고민하는 여성이 주인공이다결국 그녀는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알고 있는 친구가 무작정 주인공인 척하고 보낸 결별의 문자 덕분에  남자와 헤어지게 된다 번째 단편의 주인공 제시카 역시 어른인데다 찰스 맨슨을 신봉하는 위험한 남자라는  알면서도 자정에  둘이 만나자는  남자의 유혹을 쉽게 뿌리치지 못한다. ‘풀장의 소년에선 자신의 욕망을 스스로 정립하지 못하는 여성들이 등장하며 ‘성냥갑 증후군에서도 자신의 진짜 고통이 어디에서 연유하고 있는지 직접 헤아리지 못하고 오직 남성의 권위에 기대어 규정하는 여성이 출연한다아마도 이토록 자주 보이는 여성들의 수동성은 현재 사회의 여성이 차지하고 있는 위치에 대한 반영으로 보인다그렇게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가 제한한 영역 안에서 관심과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노골적으로 또는 은밀하게 이뤄지는 폭력을 그리는 것이 바로 단편집 ‘캣퍼슨 것이다그녀의 소설이 발표 당시 미국에서 미투 운동과 관련하여 뜨거운 논쟁을 일으켰다고 하는데 그것도 이런 폭력성을 두드러지게 그렸기 때문일 것이다어떤 분들에겐 주인공 여성들의 행태가 답답하고 자주 스티븐  식의 판타지적인 해결법을 제시하는  불만으로 다가올  같다그러나 내게는 그만큼 지금 여성을 가두고 있는 현실적인 한계에서 벗어나기가 어렵다는 것의 방증으로 보인다.





  해결의 어려움은 어디서 연유하는가?

 나는 그것을  보여주고 있는 단편들이 ‘나쁜 아이 ‘좋은 남자라고 생각한다. ‘나쁜 아이에선 최근 여자친구와 헤어지고 우연히 자신의 집에 동거하게  남자에 대해 처음엔  뜻이 없었다가 그를 관객으로  자신들의 연기에 심취한 나머지 거기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자꾸만  남자에 대한 지배욕을 키워만 가는 남녀 커플이 등장한다. ‘좋은 남자에선 자신을 여성들에게 ‘좋은 남자라고 여기는그러나 여성들이 그다지 성적으로 끌리지 않는 외모를 지닌 남성이 주인공이다.


   단편에서 두드러지는  ‘연기(performance)’

 ‘나쁜 아이 커플도, ‘좋은 남자 주인공도 모두 자신이 남에게 어떻게 보일지 끊임없이 신경쓰면서 자기 검열을 한다커플은 처음부터 그러고 싶어서 그런  아니었다하다보니 거기에 중독된 것일 뿐이다. ‘좋은 남자 주인공 또한 나중에 스스로 고백하는 것처럼 본성이 그랬던  아니다부족한 외모를 가진 그가 원하는 연애를 하기 위해선 그런 남자인   필요가 있었기에 스스로 속일 정도로 충실하게 연기했을 뿐이다.


  아무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았어그는 그녀들에게 그렇게 말하려 애쓴다그저 나를 봐주고  모습 그대로 사랑해주길 바란 것뿐이야문제는 모두  착각이었다는 거지나는 좋은 사람인  가장했고 이후에는 멈출 수가 없었어.(p. 274)


 그들은 연기했고  연기에 중독되어 버렸다 그렇게 되었는가

  연기가 바로 자기 인정의 기반이 되었기 때문이다. ‘나쁜 아이 커플도, ‘좋은 남자 주인공도 털어놓는다자신들의 연기를 통해 점점  커지는 자신의 존재감이 중독이라는 궤도에서 이탈하지 못하게 만들었다고자신의 존재감에 대한 가없는 과시와 그것을 통한 자기 긍정의 욕구가 있었을 뿐이다연극의 연기는 관객을 중심에 두지만  연기에선 정반대다그들은 연기를 통해 자신들이 참여자를 끌어들인 관객인 상대방을 오직 자기 만족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시키고 있으니까 말이다이런 타자에 대한 태도가 현재 여성들을 두려움에 젖게 만들고 연약하게 몰아가는 남성 중심 사회의 근본에 있지 않은가 묻고 있는 것이다.


 ‘성냥갑 증후군에서 드러나는 전문가라고 자부하는 남성들의 여성들이 가진 고통의 규정이나 ‘무는 여자(Biter)’에서 어릴 때부터 자주 물었던 여성을 그걸 부끄러운 병으로 규정하고 치료하려 했던 세상의 모습에 비추어   그러하다이는 여성의 히스테리를 정신병의 일종으로 치부했던 초기 정신 의학의 행태와 유사한데 물론 이런 남성 중심 사회의 처방은 아무 효력이 없는 것으로 입증된다. ‘성냥갑 증후군 여성이 가진 고통의 근본은 실재할 뿐만 아니라 남성에 의해 전혀 근절되지 않으며 ‘무는 여자’ 역시도 고의적인 남성의 폭력에 어릴 때부터 독립적인 자기 정체성의 주장이기도 했던 ‘무는  폭발하듯 발현되니까 말이다결국 나를 위해 타인을 도구로 쉽게 전락시키는 사회 혹은 문화의 근본 태도가 바뀌어야 한다는  역설하는 것이다.


 이렇게 ‘캣퍼슨 여성에게 폭력적인 현실을 스케치하면서  폭력이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또한 짚어가는 작품이다그러니 표지로 지레짐작해선 곤란하며 작가의 자전적인 경험이 아닐까 싶어질 정도로 심리 묘사도 뛰어나 가볍게 읽으면서 오늘 우리 사회의 여성과 남성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해 볼만한 좋은 작품이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덧붙여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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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해 기억해 모중석 스릴러 클럽 48
섀넌 커크 지음, 김지현 옮김 / 비채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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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을 볼모로 잡는 범죄인 유괴 혹은 납치는 스릴러 장르에선거의 클리셰라   있을 정도로 흔하다

 이 정도로 흔하게   다른 범죄보다  생생한 현장감으로 독자를 작품에  몰입시킬  있기 때문이다과거에 벌어진 사건이 아니라 지금 진행중인 사건인데다 더하여 마치 시한폭탄의 타이머처럼 정해진 시간 내에 무고한 이의 목숨을 구해야 하는 일이라 읽고 있는 이로썬 이야기에 흠뻑 빠질 수밖에 없다그러나 한계효용체감의 법칙은 독서에도 적용되어서너무 많이 접하다보면 한껏 올라간 낯익음 때문에 아무래도 식상함을 느끼게 된다그래서 이런 식상함이 어느덧 보편적인 현상이 되어가면 장르는 ‘비틀기라는  시도하게 된다사람들에게 익숙한 장르의 틀을 슬쩍 바꾸어 그걸로 새로운 느낌을 갖게 하여 작품의 신선도를 높이는 것이다공포영화에서 ‘스크림  대표적인 사례라  만하다물론 유괴납치물에 있어서도 이러한 비틀기는 이뤄졌다최근의 가장 대표적인 예는 길리언 플린의 ‘나를 찾아줘  것이다그리고 여기   편의 비틀기를 시도한 작품이 있다.





바로 변호사 출신의 미국 여성 작가 섀넌 커크의 ‘복수해 기억해.


 원래 제목은 ‘Method 15/33’. 사실은 소설 속에서 납치된 주인공이 탈출하기 위해 스스로 계획하는 작전의 이름으로 이것만 가지고선 독자에게 작품의 내용이라든가 분위기라든가 하는   전달되지 못한다고 생각한 것인지 그걸 보다 선명하게 전하려고 ‘복수해 기억해 바꾼  같다아마도 이런 제목을 만든 이가 GOD 팬인  같다그들의 노래 중에 ‘사랑해 그리고 기억해 있는데 여기서 영감을 얻은  아닐까 한다실은 제목을 보자마자 얼른  뇌리 속에서 ‘사랑해 그리고 기억해 노래가 BGM처럼 흐르기에 하는 말이다다시 말해 오로지 나만의 추리에 불과하니 너무 신뢰하실  없다는 뜻이다.



 이야기가 삼천포로 빠졌다다시 본론으로 돌아가보자.

 그래서 어떤 비틀기가  소설에서 이뤄지고 있는가?


 납치물(유괴납치물로 계속 쓰려니  힘들어서 이렇게 그냥 납치물로 퉁치려 한다.) 범죄자의 능동성과 납치감금된 자의 수동성이 극명하게 대립하는 장르이다권력의 뜻으로  사람에게 원하지 않는 일을 시키게 하거나 있고 싶지 않은 자리에 억지로 머무르게 만드는 힘이라고 말하기도 하듯이납치물에서 피해자는 옴짝달짝   없는 그의 육체만큼 존재가 한없는 수동성의 냉기로 빙결된다반대로 가해자는 피해자의 일상을 완전히 장악하여 자기 뜻대로 얼마든지   있기에 능동성이 태양처럼 훨훨 불타오른다피해자의 생사여탈권마저 갖고 있으니까 말이다납치를 다루는 대부분의 스릴러 소설에서 가해자가 자신을 종종 신이라 운운하는 것도  때문이다앞서 말한 ‘비틀기 바로  관계에 가해진다 마디로 우리에게 익숙한 가해자의 능동성과 피해자의 수동성을 전복시켜버리는 것이다.


 복수해 기억해 시작부터 우리가 지금 만나고 있는 납치 소설이 앞으로 전혀 다르게 펼쳐질 거라는  확실히 각인시킨다 괴한에게 납치당하는  여섯  소녀의 리사 일랜드는 공포에 떨기는 커녕 아무 것도 보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자신이 지금 어떤 경로를 통해 끌려가고 있는 것인지 시각을 제외한 다른 감각을 사용하여 냉철하게 최대한 정보를 모으고 판단하는 것이다그녀는 자신이 죽게   따위엔 아무 관심이 없다그녀에게 관심 있는 것은 오직 제목처럼 이런 고통을 안겨주는 상대에 대한 자비없는 복수 뿐이다 순간의 도래를 위해 리사는 괴한을 속이기 위해 최대한 순종하는 연기를 한다그러면서 상대의 목숨을 끊고 탈출을 도와주는 주위의 물건들을 번호를 붙여가며 하나하나 모은다 모든 것은 자신이 수립한 작전 계획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이뤄진다바로  작전명이 ’15/33’ 것이다.


 걸크러쉬라는 말이 있다원래는 여자가 반할 정도로 멋진 여자를 뜻하는 말이지만 최근 대중 문화에선 남성들을 압도할 만큼의 강한 면모를 보여주는 여성이 나오는 작품(여성 ‘테이큰이라고 불러도 좋을 이시영 주연의 영화 ‘언니처럼) 자주 쓰인다그렇다면 ‘복수해 기억해’ 또한 ‘걸크러쉬그것도 아주  걸크러쉬라 하지 않을  없다그런 의미에서 ‘복수해 기억해 주인공 리사 일랜드는 스릴러 소설에 한정하여 가장 대표적인 걸크러쉬라 할만한 사라 패러츠키의 여자 사립탐정 캐릭터 V.I. 워쇼스키의 계승자라  만하다그런데  전복성은 주인공에게만 한정되지 않는다.


  소설은  명의 시점으로 번갈아가며 전개되는데 명은 주인공 리사 일랜드이고 다른  명은 리사 전에 납치된 소녀인 도로시 사건을 추적하는 FBI 수사관 로저 리우이다보통의 납치물에선 범죄자를 뒤쫓는 형사가 주인공이고  역시 가해자만큼이나 한껏 능동성으로 무장하고 아주 강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형편인데, ‘복수해 기억해에선 전혀 그렇지 않다원래는 코미디언이 되고 싶었던 꿈조차 이루지 못한 남자( 꿈은 아내가 대신 이뤄 그녀는 현재 미국 전역을 돌며 코미디 순회 공연을 하고 있다.)인데다 사건에 이리저리 끌려다닐  이렇다  활약도 별로 없으며 존재감 또한 엷은 것이다작가는 이런 존재에게 이야기의  축을 기꺼이 담당하도록 하고 있는데이건 아마도 자신의 작품이 지금까지 나온 납치물과 얼마나 차이를 갖고 있는가를 독자에게 부각시키려는 의도에서 나온  같다.


 이건 위에서 말한 장르 비틀기 원하는  하나의 효과 때문이 아닌가 한다

 비틀기는 단순히 작품의 신선도를 유지하기 위해서 쓰이지만은 않는다 목적엔  하나가  있는데 그건 브레히트가 말한 ‘소외 효과 불릴  있는 것이다. ‘소외 효과 흔히 ‘낯설게 하기 풀이할  있는 말로 클리셰처럼 굳어진 장르 규칙에 변칙을 가져다 그것에 익숙한 관객들에게  익숙함에 따라 굳어진 자신의 생각취향가치관들을 낯섦음의 효과 속에서   되돌아 보는 계기를 갖게 한다이것이 비틀기가 가진  하나의 목적이다우리가 지금 갖고 있는 믿음내리고 있는 판단들이 과연 정당한가 아닌가를 돌이켜 보는 시간 말이다사람들이 가진 대부분의 가치관이란 누군가 의도적으로 형성한 문화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으므로 언제나 비슷한 모습으로 그런 가치관을 점점  굳어지게만 했던 문화 자체를 비틀어 문화를 넘어  자신마저 달리   있는 눈을 가져다 주려는 것이다내가 너무 무리하게 설명하고 있어  이해가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복수해 기억해 비틀기 또한 그런 연장선 상에 있다.


 무엇보다 리사를 납치한 목적이 되는 범죄 그렇다

 그녀가 납치된  임신했기 때문이었다 여섯인데 임산부라고 충격받지 마시길 보다  충격적인  있으니까그들이 리사를 납치한  리사 때문이 아니라 리사가 잉태한 아이 때문이었다알고보니 범죄자들은 리사처럼 어린 임산부를 납치하여 아이를 꺼낸다음 아이가 없는 부모들에게 매매하는 자들이었던 것이다얼마 전에 개봉한 영화 ‘청년 경찰에서도 이와 비슷한 범죄가 나왔던  같다또한 드라마로도 만들어진 캐나다 작가 마가렛 애트우드의 ‘시녀 이야기 생각난다실은  ‘시녀 이야기 작가가 이런 설정을 만드는데 영향을   아닐까 싶기도 하다. ‘시녀 이야기 배경으로 하는 세상에서 여성이 가진 의미는 오직 아이의 출산에 한정되기 때문이다여성에게 번식과 같은 동물적인 의미만 갖도록 하는  여성을 수동적인 존재로 만드는 가장 전형적이면서 대표적인 행위라  만하다작가는 그동안 이런저런 작품들에서 구현된 여성의 수동성을 보다 선명하게 전복시키기 위하여 형사도범죄도 그렇게 설정한  아닐까 싶다.(원래는 ‘틀림없다 썼었는데 너무 단정짓는  아닌가 싶어서 이렇게   물러선다으음….)


 결론이다


 주인공에형사에범죄에 이런 전복성이 넘치는 ‘복수해 기억해 분명 읽어볼만한 작품이다재미에 관해선 달리 설명할 필요가 없다가열찬 복수 이야기만큼 짜릿하게 흥분시키는   있을까재미만이 아니라  하나의 골인 지점을 두고 좌고우면 하지 않고 달려나가는작품이 가진 에너지 때문에   소설을 추천하고 싶다대화 보다는 대립이포용 보다는 차별이 횡행하는 것엔 분명 타자를 전혀 달리   있는 기회를 갖지 못했던 익숙함의 중력에 많이 붙들려 있었던 것도 크게 작용을 하고 있으리라 생각하고 있기도 하니까그러니  기회를 위해서라도 꽈배기처럼 이전의 납치물을 한껏 비틀어버린  소설을 당신의 배갯머리 옆에 살며시 놓아두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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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고의 시간들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 은행나무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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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간은 평등하다. 누구에게도 조건을 따지지 않고 골고루 영위할 수 있게 해 준다. 모두가 저마다 소유한 시간 속에선 주인인 것이다. 세계란 알고보면 개별적인 시간들의 집합이다. 성당에 있는 모자이크 그림처럼 작고 다양한 개체들의 시간이 한데 모여 전체적인 풍경을 이룬다. 그런 풍경을 역사라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왜 우리는 자주 어떤 이들만이 역사를 주도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일까? 그건 마치 모자이크 그림의 어떤 한 조각만을 딱 떼어내 보고는 그걸 가지고 그림 전체를 해석하는 것과 같은 어리석은 일이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건 한 권의 책 때문이다.


 올해 노벨문학상을 탄 폴란드 작가 올가 토카르추크가 쓴 '태고의 시간들'이란 소설이 바로 그것이다.





 이 소설은 수 많은 존재들의 시간들로 이뤄져 있다. 거기엔 사람만 있지 않다. 개나 집 같은 사물의 시간도 포함되고 저 천상에 있는 성모와 천사의 시간도 포함되며 이승의 건너편에 위치하는 유령들의 시간도 포함된다. 다시 말해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들의 시간이 여기에 다 있는 것이다. 이것이 이 소설의 첫인상을 무척 독특하게 만든다. 소설도 역사와 다르지 않아서 중심과 주변이 엄연히 존재한다. 대부분 소설의 스포트라이트는 주인공과 사람에게 머무른다. 조연이 주연만큼의 비중을 차지하는 일은 거의 없다. 그러나 이 소설은 모두 평등하다. 다들 자기만의 시간 속에서 주인인 것과 똑같이. 하물며 사람 아닌 온갖 존재들도 그렇다. 소설은 인간 중심주의를 비롯하여 모든 중심주의에서 벗어나 변방에 있는 존재들까지 모두 중심으로 만든다. 하나의 존재가 이끌어가는 선이 아니라 그 모든 존재가 얽히고설켜 자아내는 다양한 결을 최대한 담으려 하고 가급적 작가의 의도를 배제한 채로 투명하게 독자에게 드러내려 한다. 마치 문명이 만든 인간의 편견을 모조리 벗겨내어 모든 존재가 태고적일 때 가졌던 순수한 모습 그대로를 보이려는 것처럼.


 그 흐름 속에서 우리는 태고와 그것을 둘러싼 예슈코틀레와 고시치나에츠 마을과 백강과 흑강을 마주하고 상속자 포피엘스키의 성과 크워스커가 은둔한 숲을 거닐며 그 세계에 참여하고 있는 수많은 존재들의 시간들을 유영한다. 이 시간들은 러시아가 1차 세계대전에 참여한 1914년부터 2차 세게대전을 지나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섰던 실제 폴란드 역사 시간과 중첩된다. 우리는 이렇게 겹쳐진 실제 폴란드 역사 시간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왜냐하면 그 시간들이 하나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1차와 2차 세계대전과 공산주의 정권 모두 타자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것들이니까 말이다. 이들은 이분법에 빠져 있다. 나와 타자가 나뉘고, 나가 될 수 없는 타자는 모두 적으로 간주한다. 우린 실제 역사에서 그런 시간들이 인류에게 얼마나 커다란 피해를 가져왔는지 잘 알고 있다. '태고의 시간들'은 그런 과오의 성찰에서 태어났다. 적어도 내겐 그렇게 보인다. 무엇보다 소설의 중심을 이루는 태고라는 마을을 작가가 이렇게 위치하도록 한 걸 보면 말이다.


 태고는 두 개의 강, 그리고 이 두 강의 뒤엉킨 욕망이 만들어낸 세 번째 강의 강변에 자리하고 있다. 방앗간 기슭에서 흑강과 백강이 합쳐진 이 세 번째 강은 '강'이라 부른다. 강은 고요하고 충만하게 흘러간다.(p. 7)


 태고는 헤겔 식으로 말하자면 종합 명제(synthese) 자리에 위치한다. 그것은 나와 반대된다고 배척하지 않으며 모두를 포용한다. 이처럼 마을엔 숲으로 상징되는 신화적인 공간과 마을로 대변되는 문명적인 공간이 존재한다. 그런데 소설은 포용이 사라진 세계가 가져오는 비극으로 시작한다. 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어 남편 미하우가 러시아 군대로 차출되면서 게노베파와 이뤘던 가정이 허물어지는 것이다. 그 즈음 마을에서 가장 밑바닥의 처지에 있다고 할 수 있는 크워스카 역시 임신한 자신을 어디에서도 받아주지 않아 숲에서 홀로 출산하게 된다. 이런 식으로 소설은 문명이 작위적으로 일으킨 분열의 시간을 마을의 존재들이 어떻게 관통하고 있는지 하나하나 차례로 보여준다. 어떤 이는 문명을 버리고 신화(크워스카)나 광기(플로렌틴카)에게 자신을 맡기고 또 어떤 이들은 자신의 힘에 의지하며 문명을 더욱 굳건하게 구축한다(보스키 영감, 교구신부). 이토록 다양한 시도들을 작가는 자신의 판단을 하나도 첨부하지 않으면서 그저 스펙트럼처럼 펼쳐 보여주기만 한다. 판단은 독자의 몫으로 남겨두고서.


 그렇다고 등장하는 모든 존재들을 일면적으로 묘사하는 건 아니다. 이 소설에 대해 내가 특히 놀랐던 것이 바로 이 점인데, 모든 존재들을 하나같이 다양한 면모를 가진 것으로 그리고 있는 것이다. 남편을 그리워 하면서도 자신의 방앗간에 일하러 온 젊은 청년 엘리에게 자꾸만 이끌리는 자신을 괴로워하는 게노베파는 물론이고 크워스카의 딸로 신화적인 공간에서 태어나 그것을 충분히 경험했으나 문명의 유혹에 쉽게 굴복해 버린 루타 또한 그러하며 독일이 폴란드 점령 당시, 그 점령군으로 온 독일인 쿠르트마저 학살자 면모 못지않게 인간적인 면모 또한 있는 것으로 재현한다. 이만큼 다변화 하는 묘사를 보다보면 작가가 독자로 하여금 어떤 대상이든 간에 단 하나의 규정적인 시각을 가지는 것을 애써 피하려 한다는 게 느껴진다. 이 감은 그리 틀리지 않아서 사실 작가는 작품 속에서 자주 경계를 넘나드는 게 중요하며 긍정할만한 행위라는 걸 보여주고 있으니까 말이다.


 게노베파가 한 남편의 아내라는 사회가 그어놓은 울타리를 넘어 엘리를 사랑하는 것이나, 루타와 게노베파의 아들 이지도르가 서로가 위치한 신화와 문명의 경계를 넘어 서로 좋아하는 것이나 상속자 포피엘스키가 당시 사회의 편견을 넘어 폴란드 말을 전혀 할 줄 모르는 유대인 랍비가 선물한 게임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는 것이나 다 그렇다. 물론 이건 대표적으로 거론한 예에 불과하다. 소설에서 흔히 보게 되는 월담 행위들이 긍정적이라는 것은 전혀 그런 것을 시도하지 않는 이들이 보여주는 모습과 대비되어 드러난다. 앞서 언급한 보스키 영감과 그의 아들이자 훗날 게노베파의 딸 미시아의 남편이 되는 파부아 그리고 익사자 유령인 물까마귀가 여기에 속한다. 자기 혼자만의 영역에 강하게 머무르고자 하는 이들은 하나같이 타인의 영역에 대하여 관심이 별로 없으며 보다 자신의 영역을 확장하고자 하나 더욱 협소한 장소에 머무르게 될 뿐이다. 물까마귀는 그 대표적인 예다. 그는 다른 죽은 영혼들과 달리 결코 천상으로 오르지 못하며 늘 자신이 익사한 개울에만 거처하는 것이다.


 익사자는 영혼들이 떠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고, 죽음을 맞는 이런 장소가 따로 있다는 것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영혼을 쫓아가려 애썼지만, 그들은 익사자 물까마귀와는 다른 법칙을 따르는 존재였다. 익사자가 관심을 끌기 위해 아무리 몸부림쳐도 그들은 쳐다보지도, 귀 기울이지도 않았다.(p. 204)


 이런 식의 대조를 통해 우리는 월담, 즉 나의 시간을 벗어나 타인의 시간에 관심을 기울이며 기꺼이 거기로 건너가 서로의 시간을 같이 공유하는 것의 중요성을 더욱 깨닫게 된다. 바로 그런 시간들이 많아졌다면 죄없는 플로렌틴카를 쿠르트가 무참히 학살한 것과 같은 비극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참사를 가져온 동기는 모두 물까마귀처럼 타인의 시간에 무관심하며 오직 자신의 시간만이 중요하다는 확신이 가져온 것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소설이 단지 타인의 시간을 건너보기만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이 제대로 된 응시가 되기 위해선   그 바탕에 필요한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이 바로 '연민'이다.


 연민은 소설에서 미시아의 수호 천사에 대해 얘기할 때 처음 등장한다.


 천사들만이 갖는 특별한 감정, 즉 애정 어린 연민이 미시아의 천사에게도 차오른다. 이것은 천사들에게 허락된 오직 하나뿐인 감정이다.(p. 15)


 연민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에 대해 소설은 정확하게 보여주지 않는다. 다만 소설에 나타난 여러가지 정황으로 추정하건데, 나와 너가 다르지 않고 너의 일이 곧 나의 일이라는 강한 연대 의식을 연민으로 상정하는 것 같다. 이런 연대 의식은 우리 모두가 공동 운명에 처해있기 때문에 발현되는데, 그것은 소설이 대표적으로 이반 무크타의 세상 해석을 통해 잘 보여준 바 대로 우리 모두가 우연 속에 태어나 필멸할 운명이며 후세에 아무 것도 남기지 못할 존재이기 때문이다. 무크타의 영향을 받아 이지도르가 해석한 세상의 모습 그대로.


 이지도르가 목격한 모든 것의 속성은 일시적이었다. 겉은 알록달록한 껍데기에 싸여 있지만, 모든 것은 몰락과 부패, 파멸 속으로 융합되었다.(p. 178)


 이반 무크타는 이러한 무신론에 기반한 허무주의 때문에 타인을 건너다 보면서도 아무런 연민을 가지지 않는다. 존재의 의미가 없기 때문에 타인마저 단순히 기계적으로 결합 가능하거나 그러지 못할 존재로 볼 뿐이며 그걸 보여주기 위해 이지도르 앞에서 수간까지 감행한다. 이것으로 작가는 연민이 천사처럼 본능적으로 주어지는 게 아니라는 걸 강조한다. 천사와 달리 인간에게 있어 연민은 결단을 통해 형성되는 의지의 산물인 것이다. 미시아의 행로도, 문명의 늪 속에 푹 빠졌다가 그것의 독기를 느끼고 하나의 거대한 숲으로써 신화적 공간의 분위기가 다분한 브라질로 떠나는 루타의 여정도, 게임을 통해 삶의 의미라는 것이 그 어디에도 기대지 않고 홀로 만들어가는 것임을 자각하게 되는 상속자 포피엘스키의 과정도 이것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연민은 이 삶의 끝에 허무의 심연이 도사리고 있다는 걸 잘 알지만 그것으로 체념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기 때문에 더욱 지금 주어진 이 시간을 충실히 경작하겠다는 다짐이며 그런 시간을 나 아닌 당신 역시 같이 머리에 힘겹게 지고 있으니 같은 처지의 사람끼리 잘해 보자는 위로이며 응원인 것이다. 그토록 플로렌틴카에게서 원망을 많이 받았던 달이 오히려 그녀에게 따스한 위로를 해주려 했던 것처럼.


 이러한 연민이 만들어내는 삶의 모습은 무엇보다 미시아가 전쟁에서 돌아온 아버지 미하우에게서 받았던 커피 그라인더에게서 잘 나타난다. 그라인더는 단적으로 모든 것을 자기 내부에 제 것처럼 받아들이는 존재다.


 다른 사물들이 그러하듯 그라인더는 세상의 모든 혼란을 자신의 내부로 흡수한다. 폭격당한 기차의 풍경, 고여 있는 핏물, 매년 다른 바람이 불어와 창문을 두드리는 버려진 폐가가 그라인더 속에 저장된다. 그라인더는 차갑게 식어버린 인체의 따뜻함과 익숙한 것을 내팽개칠 수밖에 없는 절망을 자신 안으로 빨아들인다. 사람들이 그라인더에 손을 갖다 댈 때마다 각자의 손길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감정과 생각들이 담겨 있다. 어느 사물들처럼 그라인더 또한 특별한 능력으로 이 모든 걸 흡수한다. 일시적인 것들, 덧없이 지나가는 것들을 자기 안에 붙잡아두려는 것이다.(p. 53)


 이는 게임의 천착을 통해 각성하게 된 상속자 포피엘스키가 말년에 보여주는 모습과 많이 유사하다.


 "아버지는 아예 작은 실험실을 마련하셨어요. 어떤 일을 하든지 자신을 송두리째 내던지고, 그 일에 절대적인 가치를 부여하는 분이셨으니까요.(...) 아버지는 신발 밑창과 부츠가 마치 인류를 구원하는 물건이라도 되는 듯 여기셨어요.(p. 318)


 아무리 부정적인 것이라도 내치지 않으며 다른 이들 눈에 아무리 하찮게 보이는 것이라도 중요하게 여기고 정성을 다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 그라인더와 포피엘스키는 허무의 숙명 속에서 나와 남을 구분하여 그 격리와 차별로 삶의 의미를 구현하려는 문명이 오직 전쟁과 학살이라는 파국을 가져온 것과 달리 미하우가 딸 미시아의 행복을 위해 헌신적으로 만든 집이 시간이 갈수록 더 많은 이들의 터전이 되듯이 세상에 가장 많은 긍정적인 의미를 만들어낸다. 

 이는 다음과 같은 상속자 포피엘스키의 딸이 하는 말에서 확인된다.


 하긴 어쩌면 정상적인 가정마다 그런 사람이  명씩은 있을지도 모르겠네요우리 안에 있는 모든 광기의 단면들을 홀로 짊어지고 있는 누군가가요그가 일종의 안전 밸브처럼 정상적인 상태를 유지해주는 걸수도.(p. 320)


  놀랍게도 작가는 이런 존재들로 인해 세상이 구원받고 있다고까지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 어찌하랴? 연민을 강조하는 작가의 말에 설득될 밖에. 물론 이건 작가가 명시한 것이 아니라 내용을 통해서 내가 추리한 것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어쨌든 난 작가의 이러한 말이 이 시간 참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무엇보다 지금의 세상은 2차 대전 중의 폴란드와 다를 바 없이 타인에 대한 차별과 적대가 횡행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자신만 옳다고 주장하는 말들이 여기저기서 난무하고 타인의 삶을 함부로 깎아내리고 잘 알지도 못하면서 혐오의 말부터 내뱉는 일들이 주위에서 현저하게 일어난다. 최근엔 한 연예인이 악플에 시달리다 못해 비극적인 선택을 해버린 일도 있었고 말이다. 우리에게 연민이 있었다면 마주하지 않을 수도 있었던 비극이었다. 그러니 더욱 올가 토카르추크가 드러내지 않고 살며시 내미는 말에 고개를 크게 끄덕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작가는 미시아의 입을 빌려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세상은 인간에게 결코 우호적이지 않다그러므로 우리가   있는 자신과 가까운 사람들이 함께 숨을  있는 껍데기를 찾아내서 안에서 자유로워질 때까지 버텨내는 것이다.(p. 345 ~ 346)


 맞다. 세상은 우리에게 절대 우호적이지 않다.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한 '3포'를 넘어 내 집 마련과 인간 관계도 포기하는 '5포'란 말이 나오더니 지금은 꿈과 희망까지 포기한 '7포 세대'란 말마저 공공연히 나오는 현실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외로움과 비관, 불안과 고통은 점철되기만 한다. 이런 우리에게 오늘을 버틸 수 있게 만드는 껍데기만큼 필요한 것도 또 없다. 작가는 같은 운명 속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서로에게 껍데기가 되어주자고 말한다. 그것도 자신이 먼저 껍데기가 되어주라고 말이다. '태고의 시간들'을 통해서 그것이 우리 모두를 살릴 수 있는 길이라는 걸 깊이 깨닫게 된 나는 작가의 말에 따르고자 한다. 그래서 이제라도 단단한 껍데기가 되어주기 위해 나 역시 그라인더처럼 연민 속에서 남의 아픔을 내 아픔처럼 여기며 한껏 포용하리라 다짐해 본다. 부디 '태고의 시간들'이 많은 이들에게 전해져서 이러한 연민의 시간에 참여하여 배제된 차별과 혐오로 불편한 하루를 보내는 사람들이 많이 적어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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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냥개자리 빌리암 비스팅 시리즈
예른 리르 호르스트 지음, 이동윤 옮김 / 엘릭시르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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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릴러 소설을 좋아하는 저로서는, 새롭고 유능한 스릴러 작가를 알게 되는 건 커다란 기쁨 중 하나입니다. 이제 또 한 명의 작가를 그 리스트에 추가해야겠네요. 바로 예른 리르 호르스트란 작가입니다. 산유국으로 복지국가로 유명한 이웃 스웨덴 사람들마저 자주 취업자리를 알아본다는 노르웨이 출신이에요. 노르웨이하면 노르딕 느와르의 거장 중 하나인 요 네스뵈가 있는 나라이기도 하죠. 그래서 그런가, 읽으면서 요 네스뵈의 작품을 떠올리게 됩니다. 아마도 주인공이 같은 경찰이라서 그런가 봅니다. 그러나 이 소설의 주인공 빌리암 비스팅은 요 네스뵈의 해리 홀레만큼 뛰어난 형사이긴 하지만 한없이 외롭거나 위태롭진 않습니다. 둘 다 아내는 없지만 결정적인 차이점으로 비스팅에겐 리네란 딸이 있다는 것입니다. 가족을 이루는 것의 힘겨움을 보여주는 해리 홀레와 딸에게 인정받는 아버지라는 자리를 어엿하게 유지하는 비스팅은 달라도 너무 다르죠. 그런 점이 요 네스뵈의 작품들과 차이점을 뚜렷하게 보여주며 작품의 분위기 또한 한결 더 차분하게 만듭니다. 해리 홀레 시리즈가 '고독'을 강조하고 있다면 호르스트의 비스팅은 '협력' 혹은 '연대'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이번에 소개된 소설인 '사냥개 자리'에서 형사인 아버지 비스팅과 기자인 딸 리네가 함께 수사를 하고 있으니까요. 지금까지 수많은 스릴러 소설을 읽었습니다만 이렇게 하나의 사건을 가족이 함께 수사하는 건 처음 보았으므로 더욱 흥미롭게 다가온 작품이었습니다.




 줄거리는 대략 이러합니다. 노르웨이 최고의 민완 형사 빌리암 비스팅. 어려운 사건을 여럿 해결한 공로로 TV 출연까지 하면서 유명인사가 되었지만 최근 그에게 최초로 명성을 안겨다 주었던 17년 전에 일어난 '세실리아 린데 실종 사건'의 핵심 증거가 위조되었다는 것이 그 증거로 체포된 진범의 변호사에 의해 제기됩니다. 언론의 무차별적인 공세 속에서 뚜렷한 증거는 없었지만 비스팅은 문책을 받고 정직을 당하게 됩니다. 자신의 억울함을 풀기보다 그 당시 진범의 알리바이를 제대로 파헤치지 못했다는 미진함 때문에 그는 다시 한 번 과거 사건을 수사해 보기로 합니다. 그런데 그 즈음, 살인 사건이 하나 일어납니다. 피해자는 50대 남자였는데 리네는 그 사건을 취재하다가 자신만이 발겨한 단서를 찾아내 그것을 쫗다가 그만 범인과 마주쳐 공격을 당합니다. 이렇게 비스팅은 비스팅대로, 리네는 리네대로 서로에게 닥친 사건을 추적해 가는데, 놀랍게도 두 사건이 연결되어 있다는 걸 알게 됩니다. 과연 그 사건들은 어떻게 연결되어 있을까요? 그리고 비스팅은 과연 증거를 조작했다는 혐의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여기에 대한 해답은 뜻밖의 반전과 함께 우리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여러가지 신선하게 여겨지는 시도로 가득한 이 소설은 과연 처음부터 끝까지 흥미롭게 읽힙니다. 주인공 비스팅은 밖으론 냉철한 판단력과 뛰어난 수사 능력을 지닌 민완 형사로 보이지만 안으론 지금 곁에 있는 여자 친구와 소원해지는 바람에 고독해 하고 살인과 같은 비극 속에 사라져간 이들에게 경찰로서 과연 본분을 다했는지 거듭 반추하는 따스한 인간미가 흐르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이건 딸 리네 또한 다르지 않습니다. 모두 사회적 자아 이면에 고유한 자신만의 내면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독자가 여실히 느낄 수 있도록 캐릭터 정형을 참 잘했습니다. 거기다 사건을 풀어나가는 과정도 과연 경찰 출신 작가답게 무리한 설정 하나없이 얽힌 실타래를 차근차근 자연스럽게 풀어나갑니다. 전개가 뒤로 갈수록 뜨거워지는 요 네스뵈와 다르게 예른 리르 호르스트는 독자를 조용히 침전시킵니다. 그 속에서 소설이 묻고자 하는 질문, 과연 정의에 복무하는 경찰의 본분은 무엇이며 그걸 어떻게 지켜나가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되지요. 주저리 주저리 말했지만 '사냥개 자리'는 한 마디로 읽어 볼 만한 작품입니다. 독특한 맛을 주면서도 깊이 있는 이야기의 스릴러를 찾으셨다면 노르웨이에서 불현듯 찾아온 이 손님을 한 번 맞이해 보는 것도 좋을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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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9-11-14 0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 네스뵈는 노르웨이를 대표하는 작가가 되었네요 노르웨이 작가가 요 네스뵈만 있는 건 아닐 테지만... 뭉크도 노르웨이에서 태어났다는 말 본 것 같기도 해요 이 소설에 나오는 빌리암 비스팅은 해리 홀레와는 다른 형사기도 하군요 형사는 거의 가정이 괜찮지 않기도 하죠 그런 사람이 없는 건 아닐 텐데, 왜 소설에서는 거의 그렇게 그리는지 모르겠습니다 형사라는 일이라는 걸 생각하게 하는군요


희선

헤르메스 2019-11-15 21:27   좋아요 1 | URL
오! 희선님 정말 오랜만이에요. 벌써 11월, 그동안 어떻게 잘 지내셨는지 모르겠네요. 너무나 반가워 이렇게 인삿말부터 올립니다. 요 네스뵈에 대해서만 말한다면 그에게 해리 홀레는 우리 모두가 지고 있는 실존적 고민을 대신해서 풀어가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런 설정을 하고 있다고 보여집니다. 비스팅은 그런 책임을 주인공 하나에게 지우는 게 아니라 연대하여 짊어지게 한다는 점에서 제겐 참 흥미롭게 다가왔습니다^^
 
와일드 시드
옥타비아 버틀러 지음, 조호근 옮김 / 비채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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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초의 흑인 여성 SF 작가인 옥타비아 버틀러의 가장 대표작인 와일드 시드 발간되었다.

 사실 이번이 처음 출간은 아니다지금은 절판되었는데예전에 오멜라스에서 ‘야생종이란 제목으로 발간된 적이 있다아마도 그것이 장편으론 처음으로 소개된 옥타비아 버틀러의 작품이 아닐까 생각한다요즘 ‘82년생 김지영이란 영화가 개봉되어 페미니즘에 대한 관심이 더욱 뜨거워졌는데, ‘와일드 시드 말로 페미니즘적인 시각에서 읽어볼만한 소설이라 생각된다제목인 ‘와일드 시드(야생종)’마저도 어떤 사회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것에 지배되거나 길들여지지 않는 존재를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아냥우는 자기 능력을 완벽하게 제어할  알지요.”

 “그래자기 능력의 한도 내에서는하지만  여자는 야생종이야제어하기 힘들지 여자를 제어하는  지쳤다.”(p. 355)





 주인공은 여성인 아냥우. 그녀가 바로 야생종이다.

 ‘와일드 시드 1976년에 발표된 ‘패턴마스터’(그녀의  작품이기도 하다.) 시작한 ‘PATTERNIST 시리즈'  네번  작품으로  시리즈답게 역시나 특별한 능력을 지닌 인물들이 등장한다물론 아냥우도   하나다소설은 작품 내내 그녀와 대척점을 이루는 도로의 눈을 통해 독자들 앞에 아냥우가 얼마나 특별하며 신비한 능력을 지니고 있는지 소개한다일단 그녀는 놀라운 치유 능력이 있으며 성별은 물론 동물까지 신체를 자유롭게 변신시킬  있는데다  백년이 흘러도 늙지 않는 불사의 몸이기도 하다 정도라면 거의 ‘DEMI-GOD이라 불러도 손색없을  하다도로 또한 아냥우만큼이나 놀라운 능력을 소유하고 있는데그는 사람의 마음을 조종하며 타인의 신체를 마음대로 강탈할  있다자신의 존재를 가급적 드러내지 않고 뒤에서 때로는 아버지로때로는 어머니로  때로는 주술사 할머니로 자식들을 낳고 보호하는 것에만 치중하느라 누구도 알아보지 못했던 아냥우를 유일하게 알아보는  또한 도로다그렇게 소설은 도로가 아냥우를 찾아내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아냥우는 자신을 알아봤을 뿐만 아니라 진정한 자유를 가져다주겠다는 도로를 사랑하게 되지만 이내 그가 상종해선 안되는 악과도 같은 존재라는  깨닫고 반목하게 된다그렇게 17세기 말의 아프리카에서부터 미국에서 남북전쟁이 일어난 19세기 중반까지 도로와 아냥우가 이루는 대립과 갈등의 과정을 담아내고 있는 소설이 바로 ‘와일드 시드.


 아냥우와 도로가 가지고 있는 특별한 능력의 성격과  소설의 시작이 하필이면 노예무역이 시작된 17세기 말이라는 점이며 끝나는 시점 또한 노예 해방 정책 때문에 벌어진 남북전쟁임을 감안한다면  소설이 독자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무엇보다 지배와 종속의 문제라는 것이 드러난다일단 도로만 봐도 그러하다그는 무려 수천년을 살아왔는데 그가 그토록 오래   있었던 것은 죽을 때가 되면 젊고 건강한 타인의 신체를 마음대로  것으로 삼았기 때문이다그는 타자의 의사에 상관없이 자기 뜻대로 지배할  있는 사람이다이런 면에서 도로는 권력과 지배의 화신이라고 봐도 무방하다하지만 아냥우는 정반대의 사람이다그는 문제가 생기면  쪽에서 먼저 희생하거나 변화하는 존재다아냥우는 절대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거나 능력을 자랑하지 않는다 보다는 그늘에 숨어서 타인을 위해 자기 능력을 쓰는 사람이다그녀가 가진 변신의 능력은 이러한 아냥우의 성격이 그대로 집약된 것이나 마찬가지다도로는 타자의 신체를 취해서까지 절대 자신을 변화시키지 않는 사람이지만 아냥우는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자신을 바꿀  있는 존재이니까 말이다소설에서 아냥우는 도로에게서  벗어나지 못하는데 그건 자기 때문이 아니라 오직 다른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아냥우는 그야말로 타인에게 헌신하는 사랑을 대표하는 모성 상징이라  만하다.


 이러한 아냥우의 자질 때문에 독자인 우리 눈에는 도로보다 아냥우가 훨씬  인간답게 보인다.

 이처럼 아냥우가 도로보다  인간적으로 보인다는 사실이 중요하다왜냐하면 노예무역이 처음 시작되던 17세기 말에 서양 문명은 노예무역을 정당화하기 위해 아프리카의 흑인을 문명의 혜택을 통해 인간으로 만들어야 하는 ‘비인간으로 바라봤기 때문이다옥타비아 버틀러가  소설에서 도로와 아냥우를 나란히 두고 ‘누가  인간다운가?’하고 묻는 것은 헤겔마저 순순히 인정했던  담론을 정면으로 비판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거기다 도로가 지배하는 공동체는 도로가 마음대로 남의 아내를 취할 뿐만 아니라 아버지와 딸을시아버지와 며느리를 오직 우수한 혈통을 만만든다는 이유로 내키는 대로 교배(소설에 나오는 표현을 그대로 쓴다.)시키는 아주 비윤리적이며 비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준다도로는 아내로 삼은 아냥우마저 자기 아들과 결혼시키려 한다그러자 아냥우는 이렇게 거세게 항의한다.


 “ 잘못된  잘못된 거야장소에 따라 바뀌는 일도 있지만 이건 그런 문제가 아니야당신 일족이 짐승의 젖을 마셔서 자기 몸을 더럽히려 한다면 그냥 모른 척하겠어수치를 겪는 것은  사람들이니까하지만 지금은 나에게 수치스러운 짓을 하라고그들보다  끔찍한 인간이 되라고 명령하는 거잖아어떻게 나한테 이럴수가 있어도로 나라 자체가 저주받을 거야당신 일족의 작물이 말라 죽을 거라고!”(p. 239)


  항의가 17세기 말뿐이 아니라 여전히 여러가지 편리한 이유를 갖다대며 인종적인 편견과 차별을 유지하고 있는 오늘날의 사회에 대한 것이라 생각해도 그리 틀리진 않을 것이다.


 이렇듯 와일드 시드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타인이란 존재를 제멋대로 주무르려고 하는 차별에 대해 날서린 비판의 시선을 보내고 있는 작품이다그런 차별을 온갖 이유로 정당화하며 오직 거기에 순응할 것을 강요하는 사회라면 당당하게 탈주를 감행하는 야생종이 되라고 말이다그건 사회가 흔히 비정상으로 분류하듯이 우리가 두려워해야  존재가 아니다오히려 그런 편견을 조장하고 그것을 통해 권력을 누리려는 자들보다 훨씬  인간다운 존재들이다이런 점에서 ‘와일드 시드 진정으로 인간답기 위해 우리는 어떤 길을 걸어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작품이라고도   있다.

  소설의 마지막에서 도로가 끝내 인간이 되지못하고 홀로 괴물로 남게 되는 것도 이런 취지에서 나온게 아닐까 생각한다


  지금까지  소설을 인종차별에 근거해서 얘기했지만 이는 실은 여성차별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아냥우가 여성이라는 점도 그렇지만 그녀가 도로와의 관계에서 아내가 되어 하는 것들이나 도로의 공동체에서 여성들이 차지하고 있는 입지가 그걸  보여준다 글의 처음에서  소설을 페미니즘적으로 볼만한 작품이라고  것도 그래서다사실 인종차별과 여성차별은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멋대로 타인을 재단하고 함부로   있다는 생각들이 알고 보면 인종차별과 여성차별을 만들어내는 것이니까 말이다차별을 만들고 조장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근본엔 사람으로 인정받고자 하는 몸부림이 있다타인의 인정을 다른 이를 무시하고 배척하는 것을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이다하지만 도로처럼 그렇게 하면 할수록 정작 인간의 얼굴을 잃어버릴 뿐이다그들은 사람이 되고자 다른 이들의 얼굴에 괴물의 가면을 씌우지만 그들의 얼굴이 괴물이 되어가는  모르고 있다.


 그런 식으론 아무리 애를 써도 도로(徒努)  뿐이다.

 여기서 도로(徒努) 일이 잘못되어 처음으로 되돌아가는  뜻한다물론 옥타비아 버틀러가  도로라는 말을 알고 이름으로 썼을 리는 없지만도로에겐  적절한 이름이 아닐까 한다외롭지 않기 위해 그토록 노력했는데 마지막에 가선 결국 도로(徒努외롭게 되어버렸으니까 말이다.


 그런 도로가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제부터 어떻게 하면 나의 인간다움을 진정으로 인정받을  있는지 모색해봐야겠다. ‘와일드 시드에서 아냥우가 걸어간 길은 거기에 아주 좋은 모델이 되어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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