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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폴로의 눈 바벨의 도서관 8
길버트 키스 체스터턴 지음, 최재경 옮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기획 / 바다출판사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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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이 책에 있는 이야기들은 1933년 부터 1934년에 씌여진 것들이다.  나는 그것들이 스티븐슨과 체스터튼, 폰 스턴버그의 초기 필름들로 부터 유래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이렇게 보르헤스의 첫 소설집 '불한당들의 세계사'의 제1판 서문에서도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길버트 키스 체스터튼은 보르헤스에게 많은 영향을 준 작가라고 할 수 있다. 말년에 그러니까 69세 때 했던 어떤 인터뷰에서도 그는 그 때까지 늘 자주 읽게되고 은혜를 느낀다는 작가로 체스터튼을 꼽기도 했다. 이렇듯 보르헤스에게 있어 체스터튼은 보르헤스의 삶에서 뗄레야 뗄 수 없는, 창작 활동에 있어서의 일종의 동반자 같은 존재였다. 보르헤스 소설의 주요한 특징이라 일컬어지는 '탐정소설 기법'은 바로 이 체스터튼에게서 이어받은 것이었다. 보르헤스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체스터튼으로 부터 플롯을 기하학적 도표로 축약시키는 방법과 범죄자는 창조적인 예술가지만 탐정은 단지 비평가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배웠다"라고.  

 보르헤스는 체스터튼의 '브라운 신부'가 등장하는 탐정소설들이 특히 사건들에 초자연적인 특성을 부여하고 있다는 데 주목했다. 체스터튼의 탐정소설에 등장하는 사건들은 얼른 인간의 이성으로 헤아리기 힘들 것 같은 초자연적이고 불가사의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체스터튼은 브라운 신부의 지혜와 기지로 결국은 그것들 모두가 이성적으로 해결 가능한 것임을 보여준다. 하지만 보르헤스에게 체스터턴이 펼쳐보이는 초자연적인 사건들은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그것은 이성의 가느다란 빛으로는 헤아리기 어려운 신비의 미로를 연상시켰고 그 내밀한 혼돈의 미로를 오로지 이성의 빛만 의지하고 탐색할 수 밖에 없는 게 인간이라는 것에 보르헤스는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생각했다. 이 세계 자체가 하나의 미로이고, 그 미로 속을 어딘가 존재하는 진실을 찾아 떠도는 것이 바로 삶이라고... 

 이렇게 체스터튼의 '사건의 초자연적인 성격'과 그 안에서 진실을 추구하는 과정으로서의 '탐정' 기법은 보르헤스에게 있어 소설의 근간을 이루게 되었다. 하지만 체스터튼이 결국 이성으로 모든 초자연적인 것들을 이해가능한 것으로 만들었던 것과는 달리 보르헤스는 그의 단편 '원형의 폐허들'에서 잘 드러나듯이 이성은 겹겹으로 이루어진 초현실 속에서 그저 헤메이는게 고작이며 어쩌다 찾은 출구도 또 하나의 미로로 들어가는 입구에 불과하고 그렇게 인간은 마치 그의 소설 '바벨의 도서관'에서 어딘가에 있다고 전해지는 전설의 책을 찾아 헤메이듯이 영원히 하나의 진실을 찾아 헤메일 운명이라고 봄으로서 체스터튼과는 차별성을 두었다. 

  보르헤스의 '바벨의 도서관'에 대한 오마쥬라 할 수있는 닥터 후 시리즈의 '도서관' 에피소드  中

  이렇듯, 그의 영감과 소설적 세계관의 근간을 이루는 체스터튼의 작품들을 그것도 보르헤스가 특별히 고르고 고른 작품들을 통해 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건 보르헤스의 영감의 원천을 탐색하는 소중한 기회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 '아폴로의 눈'을 읽는다는 것엔 이중의 이득이 있다. 하나는 보르헤스에게 영향을 주었던 체스터튼 소설의 특징들이 무엇인지 살펴 볼 수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것을 통해 보르헤스의 작품 세계가 어떤지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보르헤스가 특별히 꼽은 체스터튼의 단편들은 이것이다. 

계시록의 세 기병
이상한 발소리
이스라엘 가우의 명예
아폴로의 눈
이르수 박사의 결투 

 앞서 보르헤스가 체스터튼의 사건들이 모두 초현실적인 것에 주목했다고 했는데 이 단편들은 그야말로 그런 것에 충실하다. 첫째 단편, '계시록의 세 기병'은 왕국에게 위협이 되는 한 저항시인을 사형시키려는 장군이 그의 시를 사랑한 왕자가 시인을 사면하려고 전령을 파견하자 그 전령을 죽여서 사면을 막고자 한 병사를 급파한다. 그런데, 결국 그 전령을 죽이는데는 성공했지만 시인은 사면되어버리는 기이한 사건이 벌어진다.  둘째 단편 '이상한 발소리'는 이른바 VVIP만 들어갈 수 있는 폐쇄된 한 호텔에서 은식기가 모두 사라지는 사건이 벌어진다. 그런데 종업원 중 한 명이 우연히 그날 쓰러져 일을 못했으니 분명 한 명 부족했어야 할텐데, 종업원들이 그 날 다 있었다는게 드러나면서 미스터리가 된다. 셋째 단편 '이스라엘 가우의 명예'는 체스터튼의 이러한 초현실적 성격이 가장 많이 드러나는 작품으로 미스터리하게 사라진 영주를 찾기 위해 글렌가일 성으로 들어간 브라운 신부의 일행이 여기저기 굴러다니는 세팅되지 않은 보석들과 촛대없는 한 무더기의 양초들 그리고 가루째 쌓여있는 코담배 가루들, 찢겨져나간 성화들 등등의 성안의 기이한 현장을 보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넷째 단편 '아폴로의 눈'에서는 이단 종교에 빠져버린 한 여자의 미스터리한 추락사를 다룬다. 그녀는 누군가에 의해 엘리베이터 통로로 추락했는데 그 시간 모두의 알리바이가 입증되어 그녀는 거기 혼자 있었다는 게 밝혀진다. 하지만 자살은 아니다. 그럼 누가 대체 어떻게 한 것일까? 다섯째 단편은 '이르수 박사의 결투'는 공개적으로 이르수 박사에게 결투를 요청한 단단한 체구의 사나이가 결투 하루 전 날 미스터리하게 사라져버린 사건을 다룬다. 여기서 두 개의 단편은 사실 그 사건의 신비로움 보다 오히려 해결 방법 때문에 보르헤스의 주목을 끈 것이다. 그건 바로 '이상한 발소리'와 '이르수 박사의 결투'다. 이 정도의 차이는 있다고 해도 분명 이 단편집을 통해 우리는 보르헤스가 주목했던 체스터튼의 '사건의 초현실적인 특성'이 어떤 것인지 충분히 맛볼 수 있다. 

 앞서 체스터튼과 보르헤스의 비교를 들면서 체스터튼의 특징은 그러한 이성적으로는 얼른 파악하기 힘든 초현실적인 사건들을 브라운 신부의 기지로 이성적으로 해명하는 것에 있다고 말했다. 그대로 이 모든 사건들은 브라운 신부의 탁월한 추리로 다 파헤쳐지는데 그 단서가 되는 것들이 아주 소소한 것들이라 특히 주목을 끈다. 이러한 점이 분명히 드러나는 단편이 바로 '이상한 발소리'이다. 이 단편은 호텔에 우연히 쓰러져 사경을 헤메는 종업원을 위해 불려온 브라운 신부가 그에 대한 보고서를 쓰다가 우연히 바깥에서 듣게된 발소리로 사건의 전모를 파악해 나가는 이야기이다. 발소리 하나 만으로 사건의 전모를 파악해 나간다고 하니 얼른 해리 캐멀먼의 '9마일은 너무 멀다'라는 단편이 떠오른다. 해리 캐멀먼의 그 단편 역시 우연히 듣게 된, 제목이기도 한 '9마일은 너무 멀다'라는 한 문장만으로 벌어진 사건의 전모를 파악해 나간다. 이처럼 하나의 작은 단서가 큰 사건을 해결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은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의 유기적인 질서 속에 움직인다는 뉴튼식의 물리학적 세계관이 짙게 투영된 결과이겠지만 체스터튼이라면 얘기가 좀 다르다. 그에겐 다른 이유가 있다. 그건 바로 보르헤스가 서문에서도 말했듯이, 체스터튼이 무엇보다 '사물에 대해서 두려움을 느끼는 비밀스러운 사람(P. 7)'이었기 때문이다. 

 사물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은 아무래도 조그만 사물의 변화에도 민감할 수 밖에 없다. 그들의 예민한 감각은 보통 사람들 이상으로 주위의 사물들을 파악할 것이다. 브라운 신부의 해결 방식이 아주 사소한 단서로 시작된다는 것은 바로 그러한 체스터튼의 개인적 자질이 반영된 결과였다. 그리고 이 사물에 대한 예민한 감각은 그야말로 '혼돈 속을 정처없이 유랑하면서도 오로지 진실 추구의 열정으로 끝까지 걸음을 계속하는 탐색 과정속의 인간'을 자신의 소설 속 원형으로 삼았던 보르헤스의 주목을 끌 수 밖에 없었다. 출구를 찾아 미로를 헤매는 사람은 아무래도 자기가 지금 있는 그 곳의 주위 사물들이 어떠한 상태인지 예민하게 파악할 수 밖에 없을테니까 말이다. 그는 자기가 지금 서 있는 이 곳이 예전에 한 번 온 곳은 아닌지를 알기 위해 아주 미세한 부분까지도 관찰하고 대조할 것이다. 그처럼 주위 사물에 대한 예민한 감각은 '탐색 과정으로서의 문학'에 찬착하는 보르헤스에게 있어 하나의 주요한 방법이 된다. 결국 이것은 무수한 텍스트... 원전이 존재하지 않는 허구의 텍스트들일지라도 세심하게 파헤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의 소설들은 글들에 관한 글들이다. 그것은 그가 바라보는 세상이 그의 세계관을 특징짓는 말이기도 한 '바벨의 도서관' 처럼 오로지 '글'로만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보르헤스가 늘 가까이 하고 애착을 가졌던 체스터튼의 단편들 중에서 그가 특별히 고른 단편집 '아폴로의 눈'은 이렇게 보르헤스가 체스터튼에게 어떤 영향을 받았고 그것을 자신의 작품에서 어떻게 독자적으로 살려내었는지 살펴볼 수 있게 하는 유익한 시간을 갖게 한다. 체스터튼의 '브라운 신부' 단편들도 매력적이지만 보르헤스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관심있게 읽어볼 가치가 있는 사랑스러운 단편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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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의 침묵 블랙 캣(Black Cat) 11
아날두르 인드리다손 지음, 이미정 옮김 / 영림카디널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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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슬란드... 

  이 책을 읽기전 '그래, 그런 나라도 있었지...'하는 생각을 했었다. 미국인들이 주로 휴가를 즐기는 나라중의 하나로 면적은 우리나라와 비슷한데, 인구는 30만명 정도 밖에 안된다. 

                       혹시 위치를 모르실 분들을 위해 지도를 펼쳐보자면 바로 여기에 있다. 

겨우 30만명이 조금 넘는 사람이 사는 나라의 범죄 소설이라...별다른 사건이 있을가 싶었다. 그런데 아마 나만 그런 생각을 한 것은 아닌 것 같다. 작가가 영국 '가디언지'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는 걸 보면... (인드리다손 소개할 때 흔히 인용되는 말이지만 다시 인용해 본다.)

 처음에는 아이슬란드에서 아무 일도 안 일어나기 때문에 쓸 소재가 없을 거란 얘기를 많이 들었다. 이 곳 사람들은 누구를 쏴 죽이거나 하지는 않는다. 여기는 LA가 아니니까. 하지만 글을 쓸 소재는 풍부하다는 게 밝혀졌다. 사람들은 범죄소설의 소재가 단순히 범죄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걸 모른다

 마지막 말이 가슴에 울렸다. 범죄소설의 소재가 단순히 범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라는 말에... 그래서 '저주받은 피'를 읽었다. 그런데 아뿔사! 나는 '저주받은 피'의 첫장을 넘긴 그 날, '저주받은 피' '무덤의 침묵' '목소리'까지 지금까지 우리나라에 나온 인드리다손의 책들을 한걸음에 모두 읽고 말았다. 아니, 읽을 수 밖에 없었다. 인드리다손의 소설들은 마치 나를 범죄 소설의 새로운 대륙으로 인도하고 있는 것 같았으니까! 인드리다손의 말 그대로였다. 범죄소설의 소재는 단순히 범죄에 국한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소설을 읽는 우리들 역시 범죄의 해결에서 오는 쾌감만을 찾는 건 아닐 것이다. 장르를 불문하고 문학을 읽는 이유는 단 한 가지. 문학을 통해 얻는 정신적 고양감 때문이 아닐까 한다. 그건 단순한 쾌락과는 다르고 고양되는 이유 또한 참 많이 다양하지만 분명한 건, 문학이 우리에게 그것을 준다는 것이다. 문학은 읽는 자를 보다 더 높은 차원으로 올려준다. 우리는 거기서 존재의 이유나 삶의 의미들을 스스로 체득하거나 아니면 정말 절실했던 위안들을 받을 수 있다. 우리가 문학에 고귀한 위치를 허락하는 건 그 때문이다. 그런데 장르 문학은 오로지 쾌감만 전해준다고 순수 문학은 늘 비웃곤 했다. '단순한 트릭 풀기. 범인 찾기가 뭐 그리 대수냐고!' 순수문학은 장르문학들을 질타했다. 어른들은 그렇게 장르문학에 빠진 아이들을 걱정했고 늘 사회문제적 범죄가 있을 때마다 그런 문학이 영혼들을 병들게 한다고 떠들었다. 고급문학과 저급문학으로 나눠 우월과 저열로 평가하는 건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아도르노가 자주 하던 것이었지만 그리고 뒤이은 포스트모더니즘으로 그런 차별이 부당하다며 비난도 많이 받았지만 (더구나 보르헤스는 탐정소설적 기법을 자신의 가장 중요한 소설 기법으로까지 삼고 있지 않은가!) 어느새 나도 그런 것에 길들여져 버렸는지 그만 장르문학을 읽을 때는 그런 것을 찾지 않게 되고 말았다. 그러다, 인드리다손의 책들을 만났다. 그저 흔한 범죄소설 정도로만 생각했었는데, 이렇게 한동안 그 여운에서 헤어나오지 못할 만큼 묵직한 정서적 충격을 받을 줄은 정말 예상 못했었다. 그래서 나는 마치 신대륙을 발견한듯한 기분이었다. '그래, 범죄소설도 이런 것이 가능하구나, 가능했어!'라고 몇 번을 감탄했는지... 

 인드리다손의 소설들은 앞서 순수문학이 장르문학에 행했던 비난에 대한 제대로 된 공박이 될 것이다. 인드리다손의 소설들은 조이스 캐롤 오츠의 소설과 그 격을 같이 한다. 만일 당신이 '멀베이니 가족'이나 '사토장이의 딸'을 읽고 '이게 문학이야!'라고 했다면 그와 똑같이 인드리다손의 '무덤의 침묵'을 읽고 외쳐될 게 틀림없다. 그만큼 인드리다손의 소설들은 장르성을 초월하여 순수 문학적 가치로도 인정받을 자격이 충분히 있는 소설이다. 

 인드리다손의 소설을 읽을 때 주의할 점이 있다. 그것은 발간 순서대로 꼭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나라에 발간된 책을 중심으로 말하자면, 반드시 저주받은 피, 무덤의 침묵, 목소리의 순서대로 읽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 모든 소설은 주인공인 수사관 에를렌두르의 자아의 성장 과정과 아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프랑스 감독 프랑수아 트뤼포가 만든 바 있었던 '앙트완 두아넬' 연작과도 같기 때문이다. '앙트완 두아넬' 연작은 트뤼포가 앙트완 두아넬이 실제 성장하는 과정에 맞추어 연속적으로 만든 영화들을 뜻한다. 데뷔작이기도 한 '400번의 구타'에서의 앙트완 두아넬이 청년이 되고 어른이 될 때마다 트뤼포는 그를 주인공으로 영화를 만들었고 각 나이대마다 가장 중요했을 삶의 모습들을 거기에 담았다. 이처럼 인드리다손의 소설들도 모두 에를렌두르 연작이라 할 만하다. 이 소설들은 한 마디로 정확히 어떤 한 시기 마다 에를렌두르에게 있어 가장 절실했던 물음들의 대답이라 할 만하다. 

 소설마다 우리의 주인공 에를렌두르는 언제나 고뇌에 빠진다. 그건 사건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딸 에바 때문이다. 그는 어릴 때 일어났던 사건 때문에 늘 한 겨울의 영혼을 가진 사람이다. 그의 내면엔 오로지 그 사건이 일어났을 때 처럼 가득 휘몰아치는 눈보라로 가득하다. 그렇게 그는 자신의 고통이 너무 컸던 나머지 타인을 받아들일 줄 몰랐다. 그래서 결혼은 불행했고 결국 이혼으로 막을 내렸다. 그 불행한 결혼에서 태어난 아이들이 둘 있었다. 애초부터 타인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에를렌두르는 아내 뿐만이 아니라 자식들과도 소원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아이들은 상처를 받았고 끝내는 자신의 인생을 망쳐버리는데까지 이르렀다. 에를렌두르는 에바가 그렇게 마약중독자에다 구제할 길 없는 실패한 인생을 사는 건 다 자기 책임이라고 느낀다. 하지만 그는 얼어붙은 영혼으로 인해 도대체 자기가 에바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른다. 에바에게 아버지로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에를렌두르에겐 그것이 늘 고민이다. 에바가 그저 평범한 인생으로 살아주었으면 좋으련만 저렇게 엉망인 삶을 살고있으니 에를렌두르의 고민이 깊어지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소설은 각 시기마다의 에를렌두르의 그 고민과 함께 한다. 

 그렇게 처음 작품 '저주받은 피'는 에바가 자기랑 같이 지내게 되고 거기다 아기까지 임신함으로서 새삼 깨닫게되는 아버지라는 존재의 의미와 아버지로서의 자각에 대응하는 작품이다. 두번째 이 소설 '무덤의 침묵'은 그 자각에서 이어지는 그러니까 아버지로서 가족에게 어떻게 행해야 하는지 그 '마음가짐'에 대한 대응이다. 마지막으로 '목소리' 역시 '무덤의 침묵'과 이어지는 이야기로 끝까지 가족을 지켜간다는 것이 무엇인지 체득하는 과정이다. 간단히 말해, '저주받은 피'가 아버지로서의 인식, 다시 말해 칸트식으로 해서 '순수이성비판'에 해당한다면, '무덤의 침묵'과 '목소리'는 아버지로서 마땅히 해야 할 도리, 그러니까 칸트식으로는 '실천이성비판'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겠다. 칸트의 3대 비판서 중 마지막 비판서, '판단력 비판'에 해당하는 작품 역시 나왔을지 모르지만 애석하게도 한국에선 더이상 인드리다손의 작품이 발간되지 않는다고 하니 확인해 볼 방법은 없을 것 같다. 

   '무덤의 침묵' 영어판 표지

'무덤의 침묵' 시작은 이렇다. 우연히 발견된 뼈 하나로 인해 공사장에서 아주 오래된 유골이 드러나게 되고 에를렌두르 수사반장은 이 유골을 조사하는 임무를 맡는다. 유골의 주인이 누구이고 어떻게 해서 그렇게 묻혀있는가를 밝혀내는 일이다. 그런데 유골이 드러남과 동시에 그는 딸 에바로 부터 제발 도와달라는 전화를 받는다. 

 이렇게 유골의 드러남과 도움을 요청하는 에바의 호소가 동시에 일어난다는 것은 에를렌두르에게 있어 두 사건이 전혀 별개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이 두 사건이 지금 에를렌두르에게 있어 가장 절박한 고민 즉, 에를렌두르가 앞으로 에바에게 어떻게 해야할지에 대한 나름의 성찰적 과정이 되리라는 것의 암시이다. 그는 아직도 에바를 대하는 게 서투르기 그지없을 뿐만 아니라 아버지라는 인식은 가졌지만 과연 그 아버지로서 어떻게 하는 것이 올바른 것인지 갈피도 못 잡고 있기 때문이다. 유골의 부름은 바로 그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이제 시작되었음을 뜻한다. 

 인드리다손의 소설 답게 이 유골 또한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것이다. '저주받은 피'에서 처럼 아주 오랜 세월 동안 묻혀져 있던 기억이 갑작스레 현실에 출현하는 것이다. '저주받은 피'에서는 그것이 오래전에 저지른 죄에 대한 처벌로 나타났다. 하지만 이 소설 '무덤의 침묵'에서는 과거의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게 만드려는 일종의 의지로 나타난다. 그래서인지 인드리다손은 전작 '저주받은 피'에서는 그나마 느슨하게라도 유지되고 있던 미스터리로서의 성격을 과감히 포기하고 처음부터 그 유골의 얘기를 병행해 나간다.

 때문에, 이 소설엔 과거와 현재라는 두 개의 시간이 존재한다. 유골에 의해 시작된 수사과정으로서의 현재와 그 유골이 간직한 기억이라는 과거이다. 

  유골이 간직한 기억은 고통스럽다. 여기엔 아주 오래도록 남편에게 구타를 비롯한 온갖 학대를 받아왔던 한 여자의 고통이 각인되어 있다. 그녀는 남편으로 부터 벗어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 했으나 결국 수포로 돌아가고 남편은 이제 그녀가 조금이라도 반항하면 자식들을 죽여버릴 것이라 협박한다. 그래서 그녀는 모든 저항을 포기하고 어떠한 남편의 학대도 묵묵히 참아낸다. 오로지 자기 자식들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서... 

 한편, 병행되는 현재의 시간은 에를렌두르를 중심으로 움직인다. 그는 유골이 누구이며 어떻게 거기에 묻혀있는가를 파헤치는 것과 동시에 에바도 보살펴야한다. 유골이 나타남과 동시에 에바가 에를렌두르에게 도움을 호소해왔기 때문이다. 에바를 겨우 찾아내었으나 임신중이었던 에바는 다시 마약을 복용하는 바람에 유산을 하고 그만 의식불명의 상태에 빠져버린다. 깨어나지 못하는 참혹한 상태의 에바 앞에서 에를렌두르는 그녀를 그렇게 만든 게 바로 자기 책임이라는 것을 비통하게 자각한다. 

 그런데 그 자각은 에를렌두르가 유골이 환기시킨 과거 속의 그녀가 아니라 바로 그녀를 학대한 남편과 별 반 다르지 않다라는 사실의 확인이다. 인드리다손은 그렇게 그녀를 마구잡이로 때리고 학대했던 그리무르와 에를렌두르가 사실은 같은 존재임을 바로 그리무르의 과거를 통해 드러낸다. 에를렌두르가 가족들에게 소원했던 이유는 어린 시절 눈보라 속에서 동생을 끝까지 지켜주지 못했던 죄책감 때문이었다. 그 죄책감은 타인을 자신의 내부로 들이는 것을 거부했고 그는 그것으로 동생을 포기한 죗값을 받는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자신을 벌하기 위해 했던 행동들은 오히려 더 큰 비극만을 낳고 말았다. 자신의 자식들이 모두 엉망인 인생을 살도록 만들어버렸기 때문이다. 특히나 그토록 원하던 아이마저 잃고 의식불명에 빠져버린 에바의 존재는 그에게 현재의 자신이 얼마나 추악한지 바라보게 만드는 거울과도 같다. 그가 에바를 바라볼 때 마다 비쳐지는 건 자신이 결국은 그리무르였구나 하는 뼈아픈 자각 뿐이다. 

 그리무르도 그랬다. 그가 그의 아내와 가족을 그토록 학대했던 이유는 그 역시 어린시절 그런 학대를 받고 자라났기 때문이었다. 그는 어릴 때 입양되었는데 그를 거둬들였던 부부는 그리 좋은 부부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는 가족이란 게 어떤 것인가를 그들의 학대를 통해 배웠다. 그 외 다른 것으로는 가족이란 걸 느껴보지 못했기에 그가 가족을 그렇게 학대한 것은 어쩌면 그가 아는 전부라서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그렇게 그는 과거의 상처로 괴물이 되어버렸다. 에를렌두르가  과거의 상처로 가정을 져버렸듯이... 

 과거의 상처로 빠져나오지 못한 자들로서 그리무르와 에를렌두르는 함께 서 있다. 하지만 에를렌두르는 과거속의 자신의 자식들을 지키기 위해 아무리 무서운 학대도 감내해야 했던 한 여자, 어머니의 존재를 알게된다. 그녀 역시 과거의 상처를 간직한 자였고, 현재 역시 어마어마한 고통을 당하고 있으나 그녀는 단 한번도 자식들을 포기하지 않았다. 미래 역시 전혀 희망이 없는데도 그녀는 오로지 자기 자식들을 지키는 것에 온 삶을 걸었다. 그녀 인생에 그녀는 아예 없었다. 오로지 자식들의 생명을 지키는 것. 그리무르의 폭력에서 아이들을 구하는 것 그것이 전부였다. 

 유골이 보여주는 과거의 존재는 이제 에를렌두르에게 있어 하나의 해답이 된다. 에를렌두르도 그녀처럼 에바를 끝까지 지켜줘야 한다는 해답이다. 그의 과거의 상처가 어떤 것이든 상관없이 지금 현재 그의 눈 앞에 도움을 전적으로 의지해 오고 있는 에바를 위해 헌신하라는 것이 바로 유골이 환기시킨 과거의 명령이었다. 소설의 마지막에 에를렌두르는 첫째 딸 미켈리나에게 그녀 어머니의 이름을 묻는다. 그녀의 이름을 묻는다는 것은 에를렌두르가 바로 그 명령을 따르겠다는 결심의 표출이기도 하다. 이것을 환기시키기라도 하는 것 처럼 그 이름을 듣게되는 순간 의식을 잃었던 에바가 깨어난다.

 소설 속에서 단 한번도 언급되지 않았던 그 이름은 소설을 내내 읽어가던 독자들에게 까지 큰 감동을 준다. 그렇게 이름 하나 없이 내내 자신이 아니라 타인을 위해서 살았던, 제목 그대로 '무덤의 침묵' 처럼 자신의 인생에 대해 그 무엇하나 주장하지 않고 오로지 타인을 지켜주기 위해 스스로 그림자가 되기로 작정한 그 영혼이 마치 처음으로 그 이름을 통해 존재를 드러내는 것 같은 기분에... 

  장 지오노의 '나무를 심는 사람'이 한 영혼이 얼마나 위대한 일을 할 수 있는지 보여줬던 것 처럼 인드리다손의 '무덤의 침묵'도 그만큼 영혼의 고결하고도 위대한 희생을 보여주고 있다. 에를렌두르는 여기서 그가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해답을 찾는다. 아니, 사실은 우리 모두가 다시금 내가 속한 가족에 대해 생각해 보고 내가 그 가족들에게 어떻게 해야 할 지에 대한 해답을 찾은 것이라 해야 할 것이다.  

 돌이켜 생각하면, 유골의 신원을 몰랐을 때 수사반이 거기에 붙인 별명이 흥미롭다. 처음 발견된 장소 때문에 붙여진 별명으로 그것은 바로 '밀레니엄 맨'이었다. 밀레니엄은 지나간 천년의 끝이자 새로운 천년의 시작을 뜻하기도 한다. 과거의 고통을 딛고 새로운 희망을 시작하는 에를렌두르와 혹 어쩌면 우리들 모두에게도 너무 잘 어울리는 이름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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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탐정은 환영받지 못한다 밀리언셀러 클럽 73
P.D. 제임스 지음, 이옥진 옮김 / 황금가지 / 2007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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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D 제임스는 작가적 지명도에 비해 우리나라에선 너무 무시되는 감이 있다. 알라딘을 검색해 봐도 그녀의 작품은 그나마 구할 수 있는 게 이 소설과 동서미스터리로 나온 '검은 탑'뿐이다. 2006년 그녀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영화 '칠드런 오브 맨'이 우리나라에 소개되기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원작은 커녕 그녀의 다른 작품마저 나오지 않고 있다. 

  

 위 그림에서 보듯 PD JAMES의 해외에서의 평가는 이러한데, 왜 이렇게 그녀는 국내에서 무시되고 있는 것일까? 팬으로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그런지 지금 쓰고 있는 이 책에 애착이 많다. 그나마 제대로 된 번역으로 만나볼 수 있는 그녀의 유일한 작품이기도 하고 말이다. 그런데 이 책 역시도 그저 흔한 미스터리로 치부되고 그나마 평가도 그리 호의적이지 않은 것 같다. 모처럼 만나볼 수 있는 P.D 제임스의 작품이 이런 평가를 받고있다 보니 이 작품을 위해 정말 두 팔 걷고 나서지 않을 수가 없게된다. 

 버니 프라이드가 죽은 아침 코딜리아는 베이커루 지하철 노선이 고장을 일으킨 탓에 람베스 노스 역에 발이 묶여 사무실에 삼십 분 늦게 도착했다.(p.11) 

 소설은 이렇게 시작한다. 레이먼드 카버는 '소설의 승패는 모두 첫 문장에 달려 있다.'라고 흔히 말하곤 했는데, 내겐 이 소설의 첫 문장이 성공적으로 보인다. 독자의 눈길을 확 잡아당길 뿐만 아니라 삼십 분 일찍 도착했다면 버니를 살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라는 암시가 은밀히 깔려있기 때문이다. 사실, 이 삼십분 때문에 코딜리아의 인생은 확 달라져 버린 것이다. 그렇게 어떤 운명을 결정하는 것이 세상의 작은 우연이라는, 삶이 가진 어떤 아이러니한 속성마저 드러내고 있는 것 같다.   

  이렇게 코딜리아는 아침에 출근하자마자 사립탐정 사무실을 공동경영하고 있는 버니 프라이드가 죽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그가 언제 죽었는지는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소설의 첫 문장은 그가 그 30분내에 결정했음을 암시하는듯 하다.) 그는 유서를 남겼는데, 그것은 그가 암에 걸렸기 때문에 병으로 죽기 전에 자기가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렸다는 것이었다. 그는 코딜리아에게 등록되지 않는 권총 한 자루도 남긴다. 버니의 죽음에 미스터리한 점은 없다. 하지만 버니의 죽음으로 코딜리아는 그동안 자기가 속해있던 버니를 중심으로 움직이던 세계속에서 완전히 추방되어 버린다. 살고 있는 집도, 단골 가게도 그리고 늘 해오던 사립탐정 일 조차도 이제는 예전과 완전히 달라져 버린다. 집에선 쫓겨나고 단골 가게는 환영하지 않으며 사립탐정 일에 대해선 만나는 사람마다 "여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일"이라며 그만두기를 권하는 것이다.

 버니가 죽자 모든 게 달라졌다. 

 그렇게 그녀는 이제 자신이 여자라는 걸 곳곳에서 만나는 사람마다 확실히 자각하게 된다. "여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일"이란 말은 이 소설의 원제이기도 하지만 코딜리아가 만나는 사람마다 그녀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그녀에게 그녀가 여자라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물론 이것은 작가의 의도이다. 문제는 버니가 죽고 나서 그녀가 겪는 일이라는 것이다. 버니의 죽음으로 그녀는 완전히 버니를 중심으로 돌아가던 세상에서 이탈해 혼자가 되었다. 혼자가 되어 이제 세상을 마주해야 하는 그녀에게 세상은 그녀가 여자라는 사실을 자꾸만 자각시킨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중반 부분, 그녀가 의뢰로 인해 케임브릿지에 갔을 때 그녀는 새삼 아버지를 떠올리게 된다. 강압적이고 무책임했던 아버지는 그녀를 내내 자기 곁에다 가두어 두었다. 코델리아는 아버지가 아니었으면 자기도 이 자유로운 도시의 일원이 되었을 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 곳으로 가는 것을 차단시켰고 그녀는 그렇게 아버지를 중심으로 도는 삶을 살았다. 그리고 바로 버니를 중심으로 도는 세상으로 들어간 것이다. 그러니까 코델리아는 태어나서 남성을 중심으로 한 세상에서 벗어나본 적이 없는 인생이다. 그녀의 어머니는 그녀를 낳고 한 시간 안에 죽었다. 그녀는 모성이란 걸 경험해 보지 못했다. 이건 그녀가 남자가 중심인 세상에서 남자가 부여한 인격체로 살았다는 의미도 된다. 그것을 대표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바로 버니에게 배운 탐정의 기술이다. 

 그녀는 그렇게 아버지와 버니라는 남자 중심의 사회에서 남성이 부여하는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왔다. 그런데 이제 아버지에 이어 버니까지 죽어버린 것이다. 그렇게 그녀는 남성을 중심으로 한 세상에서 떨어져 나왔고 이제 스스로 자신만의 정체성을 만들어가야할 과제를 떠안은 것이다. 의미심장한 것은 버니가 그녀에게 남근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권총을 남겼다는 것이다. 코델리아는 그것이 자신을 남성의 세계에 묶어두려는 구속임을 자각하고 있다. 그래서 본능적으로 그것을 지니는 것을 두려워하게 된다. 

 하지만 그녀는 사립탐정이란 직업은 계속 유지하려 든다. 그건 버니가 물려준 것이지만 권총처럼 두려워하지 않는다. 물론 자기 자신이 제일 잘 하는 일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건 사립탐정이 가진 본질이 '관찰자'이기 때문이다. 사립탐정의 본질은 바로 '변화의 목도'에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잘 정의했듯 사립탐정이 하는 일이란 끝내 자기가 알았던 것들이 모두 변질되어 버렸음을 확인하는 것에 다름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남성의 세상에서 떨어져나와 이제 스스로의 정체성을 확립해야 하는 코델리아에게 있어 사립탐정은 그 무엇보다 자신에게 적합한 일이 된다. 작가 제임스는 흥미롭게도 겨우 그녀와 한 시간 밖에는 세상에서 함께 하지못한 어머니가 그것이 그녀에게 정말 어울리는 일이라는 것을 계속 말하고 있다고 상상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여준다. 부재한 모성이지만, 부성과는 다른 모성으로 부터 받는 상상으로서의 위안은 그녀에게 남성적 세계에서 부여되는 의미가 아니라 여성적 세계에서 부여되는 의미로 사립탐정 직업이 가지는 의미가 새롭게 바뀌었다는 걸 드러내 준다. 

 이제 새로이 의미를 찾은 사립탐정은 코델리아에게 남의 비밀을 파헤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정체성을 되찾는 탐색의 과정이 된다. 그레이엄 터너에 따르면 인간의 인식은 언제나 이분법적이라서 하나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 대상 자체로서는 불가능하고 언제나 그 반대되는 것을 통해서 밖에는 못한다고 한다. 그러니까 인간은 어둠을 통해 그 반대되는 빛을 정의하고 천국을 통해 그 반대되는 지옥을 정의한다는 것이다. 이건 코델리아에게도 그래도 적용된다. 그녀가 새롭게 자각하는, 아니면 세상이 끊임없이 그녀에게 자각시키는 '여성'으로서의 새로운 자신만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하여 그녀가 우선적으로 관찰해야 하는 일은 바로 남성 세계의 진실이다. 때문에 작가는 사려깊게도 그녀의 첫 임무가 바로 아버지가 아들의 자살 원인을 파악하는 의뢰로 시작하게 만든다. 

 굳이, 프로이드의 오디이푸스를 언급하지 않아도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남성적 세계의 가장 근본적인 모습이라 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자살'이 반복되고 있음을 본다. 버니의 자살이 의뢰인의 아들 마크의 자살로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소설을 읽으면 버니와 마크의 상징에 있어서의 공통점이 드러난다. 그 공통점은 바로 진짜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버니의 의미와 의뢰인 아버지 로널드 칼렌더와의 관계에서 마크의 의미이다. 버니는 아버지의 연쇄이지만 사실 그 연속이라 볼 때 아들의 위치를 차지한다고 볼 수도 있다. 그렇게 버니와 마크를 다 아들의 위치에 놓아두면 이들의 공통점은 보다 분명해진다. 케임브릿지 일화에서 보듯이 코델리아의 아버지는 완전히 그녀의 인생을 쥐고 흔들었던 독재자였지만 버니는 코델리아를 하나의 인격체로서 존중해준다. 따라서 그만큼 아버지에 비해 덜 남성적이다. 마크도 그렇다. 아주 냉혹하고 자신의 업적을 위해서는 인간성 따위도 내던져 버릴 수 있는 아버지에 비해 마크는 아주 도덕적인 아들이다. 즉, 그만큼 덜 남성적이다. 말하자면 버니와 마크는 완화된 혹은 약화된 남성성이다. 그런데 그들은 모두 죽었다. 하나는 자살이고 하나는 타살, 즉 살해된 것이다. 작가는 일부러 이들의 죽음 원인을 다르게 했다. 그 이유는 버니와 마크가 공히 약화된 남성성을 가지고 있어도 그 차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버니에 비해 마크는 훨씬 더 여성적인 것(마크가 여장을 한 채 발견된 것이 이것을 명확하게 드러내고 있다.)에 가깝다는 것이 소설 속에서 드러난다. 결국 이것이 마크가 살해를 당한 주된 이유인 것이다.

 아들의 죽음의 반복을 원형적으로 바라보면 여기에 종교적 은유가 깔려있음을 보게 된다. 즉, 작가는 '아들의 죽음'을 통해 기독교에 있어서의 하나님과 예수의 관계를 가져오고 있다는 것이다. 그건 서양문화에서 가장 바탕이 되는 것이 바로 기독교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코델리아가 관찰하는 그 남성성의 근본에는 바로 기독교의 남성적 하나님이 놓여있다. 그 하나님과 예수의 은유적 관계가 바로 소설속에서는 칼렌더와 마크의 관계로 나타난다. 냉혹한 야훼와 자애로운 예수의 이미지로 말이다. 그런데 자연을 사랑하며 아주 도덕적인 예수 마크는 결국 죽임을 당한다. 그가 보다 더 여성적이라는 이유로... 결국 칼렌더에게 야훼의 이미지가 겹쳐진다는 것은 코델리아에게 있어 남성적인 것은 결코 받아들여져야 하지 않을 것, 그렇게 근본 부터 뒤엎고 다시 새로이 시작해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그녀는 다른 대안을 찾는다. 

 그것은 바로 '여성으로서의 신'이다. 우리는 이 소설에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만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 또한 반복되고 있음을 본다. 코델리아가 상상적으로 의지하는 어머니와 마크의 진짜 어머니가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코델리아가 애초부터 여성임을 자각하지 못했을 때 그렇게 남성적인 세계에 완전히 함몰되어 있었을 때, 그 어머니는 부재했었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그녀가 남성의 세계에서 멀어지고 점점 더 여성으로서의 자아를 되찾아가자 부재했던 어머니의 존재가 점점 현실적인 존재가 되고 결국에는 그녀 앞에 최종적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이렇게 어머니. '아버지로서의 신'에 완전히 대칭되는 '어머니로서의 신'이 코델리아의 자각과 더불어 현실적인 존재가 되어가는 것은 참으로 흥미롭다. 코델리아가 점점 더 여성으로서의 자신에 대한 자각이 커짐에 따라 남성성으로서의 신이 얼마나 무자비하고 비윤리적인 존재인가가 드러나는 것도 흥미롭다. 결국 이 모든 것에 작가 제임스가 이 소설을 통해 제시하는 대안이 있지 않을까 한다. 즉, 남성성으로서의 신의 자리에 새로이 여성성으로서의 신을 정립 대체하자는 것이다. 

 그리고 그 '여성성으로서의 신'은 소설 속에서 코델리아의 아버지와 그녀의 관계, 컬렌더와 마크의 관계로 나타났듯이 더이상 서열로 이루어지는 권력관계가 아니다. 그것은 소설의 후반부에 코델리아와 마크의 진짜 엄마의 관계로 극적으로 드러나듯이 '연대감이 기반이 된 동등한 관계'이다. 

 그렇게 작가 제임스는 새로이 정립해야 할 '여성성으로서의 신'은 무엇보다 어떤 권력도 서열도 없는 오로지 동등한 인격끼리의 관계여야 하며 연대감만이 이 관계를 이어주는 유일한 기반임을 적극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이건 이 소설을 통해 제임스가 말하려는 진짜 주제이기도 하다. 

 이렇게 이 소설 '여탐정은 환영받지 못한다(사실 이 제목은 제임스가 근본적으로 말하고 싶은 주제와 너무 어울리지 않는다. 원제인 '여성에게 어울리지 않는 일'이 보다 더 적합하리라 생각된다.)' 그냥 평범한 미스터리로 치부해 버릴 수 없다. 그냥 미스터리로 치부해 버리는 것은 제임스가 소설 속에 면밀하게 깔아놓은 장치들을 완전히 깡그리 무시하는 처사가 될 것이다. 이것은 그야말로 페미니즘 소설이다. 이 남성적 세계를 대체할 '여성적 신'이라는 대안 그리고 그 관계의 모습과 기반까지 아울러 다 들어있기 때문이다. 아가사 크리스티의 '애크로이드 살인 사건' 이후로 우리는 미스터리가 그저 훌훌 읽기만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배웠다. 피에르 바야르에 따르면 미스터리 소설이야 말로 독자가 신경을 집중하고 내러티브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서 독자적으로 의미까지 세울 수 있는 멋진 장르라고 한다. 이 소설 역시 피에르 바야르가 말했던 것을 받을 자격이 있다. 이 풍부한 페미니즘의 의미가 이대로 묻히는 건 너무나 아깝다. 제대로 음미할 것을 권하고 싶다. 아울러 제임스의 다른 소설도 많이 국내에 소개되었으면 한다. 이 소설에서 보듯이 이대로 무시되기엔 너무나 아까운 작가다.

 PS. 일단 가급적 스포일러를 줄이려 많이 노력했습니다. 그것 때문에 충분히 논의하지 못하고 건너 뛴 곳도 있을 정도로 말이죠. 하지만 저도 모르게 노출된 부분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혹시 스포일러를 보았다면 양해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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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18
미나토 가나에 지음, 김선영 옮김 / 비채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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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소문이 굉장하길래 읽어 본 이 소설은, 

놀랍게도 제목 그대로 1인칭 고백으로만 이루어져 있는 소설이었다.  전체적으로 총 여섯 장으로 이루어진 이 소설은 각각 종교적인 부제를 가지고 있으며 모든 장이 화자를 달리하면서 1인칭 고백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상당히 이례적이고 독특한 스타일이라 여겨졌다. 얼른 짐 톤슨의 '내 안의 살인마(킬러 인사이드 미)'가 떠올랐다. 그 소설 처럼 이 소설 역시 한 살인마의 내면 고백으로 이루어진 소설이 아닐까 생각했다. 하지만 각 장마다 화자가 다르니 그건 아니지 싶었다. 읽어보니 이 소설은 그것과 아예 달랐다.                                                                                    

 '내 안의 살인마' 역시도 미나토 가나에의 '고백'처럼 분명히 한 개인의 내면을 남김없이 보여준다. 그 내면은 결국은 괴물이 되어버린 한 인간의 내면이다. 따라서 여기엔 별다른 미스터리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저 이 사람이 '왜, 어떻게 괴물이 되었나?'하는 그 괴물의 형성과정을 관찰해 볼 수 있을 뿐이다. 그렇게 그것은 일종의 다큐멘터리이고 우리는 미스터리에서 읽을 때 기대하는 어떤 쾌감을 맛보기가 어렵다. 하지만 미나토 가나에의 '고백'은 그 점에서 완전히 반대다. 여기선 내면의 탐색 같은 것은 오히려 부차적인 것에 불과하다. 각 등장인물들이 행하는 고백의 주된 역할은 오로지 미스터리의 한 요소가 되는 것이다. 그 각각이 범죄이자 단서이며 추적이자 해결이 되는 것이다. 마치 전형적인 미스터리 소설에서 지문을 모조리 생략하고 오로지 대사만으로 이루어져 있는 형태다. 그렇게 모든 고백은 최종적으로 '복수'가 이루어지는 하나의 과정 안으로 편입된다. 그것도 유기적으로. 그래서 '내 안의 살인마'와는 달리 여기서 독자는 '복수의 완성'에서 비롯되는 짜릿한 미스터리적 쾌감을 얻게 되는 것이다. 

 거기다 1인칭의 고백은 읽는 독자에게 상당한 흡인력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 귓가에 전하는 것 처럼 들리므로 3인칭의 객관적 시점이 가져다 줄 수 있는 상상의 거리감을 단번에 좁혀버린다. 귓속말은 우리도 모르게 온 신경을 거기에 집중하도록 만든다. 자연히 그렇게 된다. 그렇게 좁혀진 거리감은 우리를 더욱 소설의 내용에 집중하게 만든다. 더우기 마치 일기를 읽는 것 처럼 내밀한 내면을 훔쳐보는 듯한 기분은 남의 것을 엿보고 싶은 은밀한 관음증적 욕망까지 충족시켜주므로 우리는 더욱 더 소설 속 화자가 하는 말에 빨려들어갈 수 밖에는 없다. 나 역시도 그랬지만 이 책은 일단 1장의 시작에서 모리구치의 고백을 듣는 순간, 중간에서 그만두기가 무척 힘이든다. 등장인물들의 말들이 마치 지구가 달을 잡고 있듯이 대단한 인력으로 우리의 신경을 끌어당기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내처 끝까지 읽게 된다. 결말을 보고나서야 겨우 인력에서 헤어나고 우리는 그제야 작품을 음미할 여유를 가지게 된다. 그만큼 이 책의 몰입도는 상당하다. 앞서도 말했듯, 내용이 아니라 형식에서 이미 우리에게 몰입을 부추기도록 설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데뷔작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능숙하고도 정교한 기교가 아닌가 싶다. 

소설은 한 해를 마치고 종업식이 거행되는 한 교실을 배경으로 종업식날 으례히 따르게 마련인 선생님의 마지막 인사와 당부로 시작되고 있었다. 

 어느 학교에서나 볼 수 있는 그지없이 평범한 풍경. 이 속에서 담담히 자신의 말을 이어나가는 모리구치 선생님의 말로 소설의 1장, '성직자'는 시작된다. 하지만 모리구치의 평범한 선생님의 말에서 서서히 자신의 딸 마나미를 지금 있는 학교에서 사고로 잃었던 일로 이어지면서 고백이 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자기 딸은 사고가 아니라 살해당했으며 그 범인들은 지금 이 말을 듣고 있는 우리 반에 있다는 충격적 발언이 터져나온다. 

               영화 '고백'의 포스터  

 고백을 듣는다는 것은 그렇게 편한 일만은 아니다. 물론 일기를 훔쳐보는 것 역시 고백을 듣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으나 고백을 듣는 것은 일기를 몰래 보는 것보다 훨씬 불편한 일이다. 왜냐하면 일기를 몰래 보는 것은 '나'라는 주체를 감출 수 있지만 고백을 들을 때는 내가 전면에 드러나기 때문이다. 나의 존재가 은폐되는 것과 노출되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그것은 보거나 들은 고백을 없던 일로 되돌릴 수 있느냐 없느냐를 가늠하는 잣대이기 때문이다. 몰래 일기를 보았을 때 오로지 관음증적 쾌감만을 얻을 수 있는 건 그 고백을 보았다는 사실을 모른척 되돌릴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설에서 처럼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고 고백을 들으면 더이상 그 고백을 모른척 할 수가 없다. 그런데 고백은 듣는 이에게 어느정도 말하는 자의 책임을 나눠주게 마련이다. 나는 고백을 들은 이상 책임을 느끼게 된다. 왜냐하면 고백은 듣는 이에게 선택을 강요하니까. 그렇게 노출된 나는 결국 두 가지중의 하나를 선택 할 수 밖에 없다. 공감하거나 무시하거나... '공감'은 물론 책임을 나누어 받아야 하는 부담이 생기고 '무시'는 관계의 파괴를 가져올 위험이 있다. 어느 것 하나 섣불리 선택하기 어려운 항목일 수 밖에 없다. 그렇다고 물릴 수도 없다. 이미 내가 들어버렸다는 사실을 말하는 자와 듣는 자 모두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고백은 피할 수 없는 강요된 초대이다. 고백을 듣는 순간 당신은 어쩔 수 없이 난감한 그 자리로 끌려들어가게 된다. 더구나 던져진 공을 받는 것 처럼 일방적이다. 당신은 다시 고백한 자에게 그 공을 던질 수 없다. 그렇게 일단 초대된 이상 당신의 자의의 여지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때문에 아직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된 자들에게는 고백 자체가 하나의 폭력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결국 모리구치의 고백은 그렇게 잔잔한 수면 위에 내던진 거대한 바윗돌 처럼 엄청난 파문을 일으키며 안온했던 아이들의 일상을 폭력적으로 유린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정작 방아쇠를 당겨버린 모리구치 자신은 그것으로 사라진다. 문제는 여기서 시작된다. 고백의 폭력은 고백을 한 자에게 완전히 묶어두는 것인데, 정작 그 주체가 사라져버린 것이다. 미나토 가나에의 '고백'이 가진 독특하면서도 진기한 측면이다. 정작 응답해주어야 할 그 대상이 사라지다니! 지금까지 고백을 주제로 한 소설에서 이런 모습을 보았던 적이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기묘한 구성이다. 

 당연히 아이들은 혼란스러워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제2장 순교자에서 미즈호가 모리구치에게 이런 원망을 하는 것도 어쩌면 당연할 것 같다. 

  저는 그런 선생님이 약간 무책임하다고 생각해요. 자기 손으로 벌하는 일을 택했다면 제대로 책임을 지고 그 후에 두 소년이 어찌 되는지도 지켜보아야 하지 않았을까요? (p. 59) 

   그런데 그 고백의 주체가 사라짐으로 인해 신기한 현상이 일어난다. 보여주어야 할 대상이 사라짐으로 인해 생겨난 공백이 이제 아이들 스스로 자기만의 방식으로 거기에 응답하도록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마치 정답을 알려줄 사람이 사라지는 바람에 저마다 자기가 정답이라고 외치는 꼴이랄까? 그렇게 2장 순교자에서 5장 신봉자까지, 미즈호 나오키 나오키의 엄마 그리고 와타나베는 자기 방식대로 거기에 응답한다. 그렇게 자기만의 방식으로 대답하니 거기에 드러나는 건 온전히 자기의 모습 뿐이다. 마치 모리구치의 고백이 큐피트의 화살이 되어 나르시스의 가슴으로 날아가 꽂힌 것 같다. 그렇게 모리구치의 고백은 스스로를 온전히 비추는 거울이 되어버리고 사람들은 나르시스가 된 듯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타자를 자기 속에 묶어두는 고백의 폭력이 완전히 거꾸로 작용해버린다. 모리구치의 고백으로 그들은 오히려 그들 내부에 묶여버리는 것이다. 

 기이하게도 1장과 2장에서 5장은 그야말로 별개이다. 모리구치의 고백은 그저 발단에 불과했을 뿐, 그들을 더욱 사로잡는 건 모리구치의 고백이 아니라 그들 자신이 가진 문제일 뿐이다. 거기서 모리구치의 고백은 어떤 계기로 작용한다. 그러니까 그들이 고질적으로 가지고 있는 문제에 더욱 더 매달리게 되는 계기 말이다. 마치 고백의 폭력적인 힘이 그들 스스로 문제를 감춰놓기 위해 씌워 놓았던 외피를 찢어버린 것 같다. 그렇게 고백의 폭력적인 힘으로 그들은 벌거벗듯이 노출된다. 그리고 스스로를 해부하고 그들의 가장 본질적인 문제가 무엇인지 끝내 찾게된다. 미나토 가나에는 그들이 끝내 찾게되는 본질을 살짝 종교의 외피를 씌워 각 장의 제목으로 붙여 놓았다. 각 장에서 그들 스스로 겪게 되는 결말은 어쩌면 그래서 그들에게 진정한 해방의 모습인지도 모른다. 

 소설의 결말까지 거침없이 페이지가 넘어가는 엔터테인먼트적으로 완벽한 이 소설에서 '고백의 폭력성과 그 주체의 사라짐으로 인해 나타나는 역설적 고백의 힘'이나 말하고 있는 이 리뷰는 이상하게 여겨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미나토 가나에의 '고백'은 미스터리적 쾌감을 듬뿍 맛볼 수 있지만 아무래도 그것만 말하기엔 부족하다고 느껴졌으니까. 이 소설엔 '고백'이 개인에게 미치는 가능한 효과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꽤 풍부한 여지가 존재하는 것 같다. 나름 거기에 천착하며 이렇게 리뷰를 써 내려 왔지만 얼마나 성공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이 리뷰를 읽고 오히려 미나코 가나에의 '고백'을 멀리하는 계기가 되지나 말았으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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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 슬립 레이먼드 챈들러 선집 1
레이먼드 챈들러 지음, 박현주 옮김 / 북하우스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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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타의 매'의 샘 스페이드 나 '빅 슬립'의 필립 말로 같은 하드보일드 장르의 사립탐정들은 일단 슈퍼히어로가 아니다. 그리고 홈즈나 엘큘 포와로 처럼 그리 명석한 두뇌도 없다. 

그들이 내세울만한 건 오로지 튼튼한 다리와 끈기 그리고 두둑한 배짱 정도? 그렇게 그들은 아무리 작은 단서라도 있으면 어디든지 찾아가고 제대로 사태를 파악할 때 까지 몇 번이고 몇 번이고 탐문과 추적을 계속한다. 하지만 그런 과정 역시 그리 쉬운 건 아니다. 끊임없이 사람들을 만나고 누적된 반복과 지루하리만큼 긴 시간이 필요하다는 건 문제도 아니다. 그들을 진짜 힘들게 하는 건 바로 그들에게 아무런 권한이나 권위가 없다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내어 보일 뱃지도, 경찰수첩 같은 것도 없다. 따라서 그들은 언제나 문전박대를 감수해야만 하며 그나마 사람들에게 유일하게 기대할 수 있는 건 오로지 '선의' 이거나 아니면 슬며시 손바닥에 쥐어주는 '돈의 힘' 뿐이다. 

 하지만 그나마도 경찰에겐 통하지 않는다. 경찰은 같은 범죄자를 쫓고 있어도 그를 협력자로 여기지 않는다. 그를 따돌리거나 적대시할 뿐. 그렇게 그는 언제나 핵심정보에서 배제되고 방해물 취급을 받거나 어떤 땐 용의자가 되기도 한다. 

 힘도 지혜도 내세울 권위도... 사립탐정은 하나도 가지고 있지 않다. 

 거기다 그는 언제나 혼자다. 

 고독은 그가 가지고 다니는 권총만큼이나 뗄레야 뗄 수 없는 동반자다. 그가 믿을 것은 오로지 자신의 의지와 육체 뿐이다. 그래서 그가 집요하고 끈기가 있는 것은 그가 할 수 있는 것이 오로지 그것 밖에는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게 그는 가진 것 하나 없이 홀로이다. 마치 자신을 벽처럼 둘러싼 세상 속에서.... 

 세상은 콘크리트 벽처럼 단단하다. 너무나 단단해서 사립탐정이 비집고 들어갈만한 틈 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로...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차이나 타운'

 사립탐정은 세계라는 벽 앞에서 단독자이며, 마주한 세계는 그렇게 바로 그의 한계로서 존재한다.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영화 "차이나 타운"은 이러한 세상 앞에서의 단독자로서 사립탐정이 가지는 한계를 정말 잘 보여주고 있다. 결국 영화가 끝날 때까지 주인공인 사립탐정이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도 없었다. 사건을 해결하지도 못했고, 사랑하는 이의 죽음도 막지 못했다. 거기다 사랑하는 이를 죽인 범인조차 고발하지 못한다. 그는 아무 것도 바꾸지 못했고 그가 가진 건 오로지 자신의 무력함과 가득한 비참함 뿐이다. 사립탐정으로서 그가 유일하게 할 수 있었던 일은 단지 세상의 진실을 확인한 것 뿐이었다. 대낮의 밝은 세상이 숨기고 있었던 어둡고 치욕스런 진실을... 그것을 보게 된 것 뿐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할 수 있었던 것도 없었다. 세상은 그가 알거나 말거나 아무 상관하지 않았고 자기가 구르고 싶은대로 굴러갔다. 그는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무심히 스쳐 지나가는 거대한 공룡 같은 세상 옆에서 그저 지켜보기만 하는 구경꾼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그 공룡의 발 아래 짓밟히는 가여운 영혼들을 목격한다. 그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마구 짓밟고 지나가는 세상이 더럽고 치사하고 잘못되었다는 걸 알지만, 그렇게 짓밟히는 자들에게 안타까운 연민이 들고 뭔가 돕고 싶다는 마음이 가득하지만, 결국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자기 힘으론 저 거대한 공룡 같은 세상의 발가락 하나 들어 올릴 수 없다는 무력감이 가득 찬다. 그런 비참한 심정으로 거리를 바라보고 있는 탐정 제이크에게 친구는 이렇게 말한다. 

 "잊어버려, 제이크. 여기는 차이나 타운이잖아." 

 차이나 타운. 그건 단단하고도 거대한 세상의 한 이름이다. 사립탐정이 아무리 진실을 알아도 끄덕하지 않는.. 그런 세상을 상징하는 일종의 라벨이다. 거기서 사립탐정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그저 지켜보는 것. 즉, '관찰자'가 되는 것 뿐이고 그건 바로 사립탐정의 '레종 데뜨르'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 한계. 그 지켜볼 수 밖에는 없다는 그 한계가 오히려 사립탐정에게는 역설의 신념을 가지게 한다. 마치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 처럼, 세상을 마주한 단독자, 세상의 추악한 진실을 목도한 자로서의 사립탐정에게 개인적인 도덕적 신념을 관철시키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건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르겠다. 이미 세상이 감추고 싶었던 그 이면의 추악한 진실을 보아 버렸으니, 어떻게 그것을 깡그리 잊고 세상과 한데 섞여 살아갈 수가 있을 것인가? 보는 게 달라지면 생각이 달라지고, 생각이 달라지면 행동이 달라지는 법인데... 

 내세울 능력도 머리도 권위도 없는 가난한 사립탐정에게 그의 타협없는 자신만의 도덕적 신념은 그나마 자신을 자신답게 지탱하게 해 줄 유일한 것인지도 모른다. 관찰자로서의 사립탐정이 세상의 추악한 진실을 보기는 하였으나 바꿀 수는 없는 그 한계 때문에 그나마 추악한 이면을 보게 된자로서 가지게 되는 책임이 그러한 도덕적 신념을 관철시키는 것으로 나타나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진실을 아는 자는 그 책임 또한 느끼기 마련이지만 세상 앞에서의 자신의 무능은 그를 좌절시킨다. 그렇다고 이미 본 것을 안 봤다고 할 수도 없으니 책임을 거부할 수도 없는 일. 그러한 조건 위에서 사립탐정이 그나마 자기 책임을 다할 수 있는 일은 남들이 뭐래도 세상이 아무리 부정해도 끝까지 자신의 도덕적 신념을 지키는 일 밖에는 없지 않을까? 어쩌면 그렇게 도덕적 신념이란 사립탐정의 본질 자체가 아닐까? 그렇게 보면, 사립탐정이란 마치 구약성경에 나오는 선지자들과도 같다. 악에 찌든 세상을 홀로 떠돌며 세상의 타락을 목청껏 외쳤던 고독한 선지자들 말이다. 그렇게 어두운 시대 아주 작은 빛이 나마 되고자 했었던 사람들 말이다.

시대가 너무 어두우면, 사람들은 자그마한 빛이나마 찾고 싶어지는 법이다. 

 더쉴 해미트의 사립탐정 '샘 스페이드'가 최초로 그의 모습을 드러내던 1930년대의 미국은 이른바 '대공황기'였고 그야말로 한 치 앞도 분간하기 힘든 칠흙 같은 밤이었다. 조금의 돈만 준다면 대놓고 사람들에게 총질하던 무렵이었고, 조금의 돈만 준다면 기꺼이 법률도 도덕도 내던져버릴 수 있었던 무렵이었다. 시장, 판사 같은 저 사회 지도층에서 부터 마피아의 똘마니 같은 저 하위 계층까지 모든 사람들이 오로지 몇 푼의 돈을 위해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명예를 헌신짝 처럼 집어던져 버리고 기꺼이 괴물이 되기를 택했다. 샘 스페이드는 바로 그 무렵에 나왔다. 

 그건 여기 '빅 슬립'의 필립 말로도 마찬가지였다... 

 시대가 아무리 그렇게 어두워도 모든 사람들이 돈에 자신의 영혼을 팔아넘겨도 사립탐정은 전혀 상관하지 않는다. 그저 꿋꿋하고 당당하게 자신만의 도덕적 신념을 관철시켜 나갈뿐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환호할 수 밖에 없었다. 시대의 거대한 어둠에 비하면 아주 미약하기 그지없는 빛이었다 해도, 애타게 빛을 바라던 사람들에겐 그야말로 눈부신 태양과도 같았으니까! 그래서 그들은 그 빛으로 몰려들 수 밖에 없었다. 그 사람들은 그런데 어떤 사람들이었나? 

 몇 푼 안 되는 돈에 자신의 영혼을, 명예를 팔아넘기는 일에 점점 더 부끄러움을 느꼈던 사람들이었고 사람답게 살고 싶다는 열망으로 조금의 희망이라도 찾고 싶어 헤메던 사람들이었다. 그렇게 그들은 빛을 필요로 했었다. 어떻게 보면 사립탐정은 바로 이 사람들의 구원을 향한 열망이 요청한 존재일 수도 있다. 더쉴 해미트의 샘 스페이드도 레이먼드 챈들러의 필립 말로우도 그렇게 그 시대의 좀 더 인간답게 살고 싶었던 사람들이 요청한 존재였고 조금의 희망이라도 바랬던 사람들의 부름에 대한 응답이었다. 그들의 타협하지 않는 도덕적 신념은 세상에 마구 휩쓸릴 수 밖에 없었던 사람들 앞에 홀연히 떠오른 구원의 빛이었다. 

 해서, 사립탐정은 아무리 어둡고 비정한 시대의 현실 속을 걸어도 그 존재 자체가 인간에겐 구원의 가능성이 있다는 징표가 된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 눈 앞에 사립탐정이 나타났다는 것은 바로 나만이 이 치욕에서 벗어나 좀 더 사람답게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의 확인이기 때문이다. 나말고 또 다른 누군가도 나처럼 이 세상의 현실에 절망과 그렇게 속절없이 타협하는 자신에게 부끄러움을 느끼고 그렇게 살지 않으려 애쓰고 있다는 무언의 신호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사립탐정은 아무리 홀로 거닐어도, 우리는 그의 존재 자체로 인해 맺어지고 함께하게 된다. 이 광막한 어둠의 장막 아래 어디에선가 홀로 자신의 신념을 관철시키며 우뚝 걸어가고 있는 사립탐정을 응원하고 있을 그 누군가와 말이다. 

 "한 알의 밀알이 떨어져 섞지 아니하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고 했던가... 그 말처럼 사립탐정은 홀로 섞고 우리들은 그의 고뇌와 비통을 함께 하며 자라난다. 그리고 그렇게 고뇌하고 희망이 있는 한 아무리 암흑같은 시대라도 변화 역시 찾아올 것이다.  

 당신은 지금 이 책을 읽고 있는가? 

 그렇다면 당신 역시 우리들의 동료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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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1-02-12 0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등 당첨되신거 축하드립니다. 이벤트 결과 덕분에 헤르메스님 서재를 알게 되었네요^^

ICE-9 2011-02-12 00:42   좋아요 0 | URL
CYRUS님도 축하드립니다. 그리고 이렇게 구석진 서재 첫 댓글이네요^ ^

starover 2011-02-12 1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전에는 '빅 슬립'이라는 소설을 잘 알 수 없었지만..... 헤르메스 님의 멋진 리뷰 덕분에 레이먼드 챈들러의 작품에 관심이 가네요. 수상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삽하나 2011-02-15 0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조만간 알라딘에서 놀랍니다 ㅋㅋ
그런 의미에서 자주가는 서재 추가. 꾸욱. ㅇㅅㅇ

ICE-9 2011-02-15 18:31   좋아요 0 | URL
앗! 삽하나님이다.
여기서 보니 왠지 더 반가운데요.^ ^
자주가는 서재로 등록해줘서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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