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성'을 봤습니다. 스포일러 많습니다. 영화를 보실 분은 읽지말아 주세요. 이 영화는 스포일을 당하면 영화에서 가장 핵심 장면 중 하나인 후반이 의미없게 됩니다. 제가 보기에 이 영화는 오직 그것만을 향해 일직선으로 나아가는 이야기입니다. 종구의 혼돈을 관객의 혼돈으로 만드는 것. 그래서 믿음과 의심 앞에서 불안하게 흔들릴 수밖에 없는 인간의 약한 부분을 절감토록 하는 것. 그것이 목적인 것 같습니다. 그러니 그것을 온전히 느끼고 싶다면 스포일러를 무조건, 모조리 피하시라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그럼,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나홍진 감독의 데뷔작이자, 출세작인 '추격자'와의 유사성이었습니다.

 '곡성'은 여러 면에서 '추격자'와 비슷합니다. 일단 주인공 종구(곽도원 분). '추격자'에서 포주인 주인공 중호(어쩐지 이름마저 비슷하게 느껴지네요)처럼 여성들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종구는 장모와 아내 그리고 딸로 이루어진 가족 내에서 유일한 남자입니다. 종구의 직업은 경찰. 중호도 전직 경찰이었지요. 사건에 개입되는 방식도 유사합니다. '곡성'의 첫 장면은 아침 일찍 갑자기 걸려온 전화로 인해 종구가 사건 현장으로 호출되는 장면입니다. 그는 그렇게 사건에 발을 디디게 됩니다. '추격자'에서도 중호가 직접 사건에 뛰어들게 되었던 것은 '4885'라는 전화번호 때문이었죠. 주인공 자신이 정말 마주해야 하는 사건이 다가오는 방식도 비슷합니다. 모두 소문이 먼저였습니다.


종구는 동료 경찰이 말해준, 지금 동네에 떠돌고 있다는 일본 외지인에 대한 흉흉한 소문을 먼저 들었었죠. 중호 역시 '추격자'에서 자신이 데리고 있는 여자로부터 사건의 진짜 내막에 대한 소문을 먼저 듣게됩니다. 그 전까지 중호는 여자들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돈을 떼먹고 도망갔다고 생각했습니다. 첫 반응도 똑같습니다. 종구도, 중호도 처음엔 믿지 않습니다. 소문의 당사자와 첫 대면이 우연이라는 것도 겹칩니다. 종구는 일가족이 몰살된 사건 현장이자 불타버린 집터에서 사건을 모두 목격했다고 말하는 무명을 찾다가 느닷없이 조우하고, '추격자'의 중호도 자신이 미끼로 보낸 미진을 찾다가 자기가 살해한 집주인을 찾아온 부부를 살해하고 어디론가 떠나던 범인 지영민과 갑작스런 차추돌로 만나게 됩니다.



 '미끼'란 말이 나왔으니까 하는 말인데, 이미 '추격자'에서 미끼는 나와 있었습니다. 중호는 4885란 번호를 쓰는 사람이 자신의 여자를 납치해 팔아버렸다고 생각하고 그 자를 잡기 위해 미진을 미끼로 씁니다. '곡성'에서 종구의 딸 이름은 '효진'인데, 아이의 상태가 괴이하게 되자 도움을 청해 찾아온 무당 일광(황정민 분)은 아이가 미끼에 걸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효진은 중호가 사건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게 되는 미끼이기도 합니다. 사실 종구는 효진이 아니었다면 그렇게까지 사건에 뛰어들지 않았을 겁니다. 영화는 초반에 종구가 얼마나 겁많고 소심한 지를 여러 장면을 통해 보여주니까요. '곡성'의 마지막에서 무명은 종구에게 놈이 원하는 것은 가족들의 피를 말리려는 것이라고 말하는데, 그런 면에서도 효진은 피를 말리기 위한 미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광도 종구에게 "미끼를 통째로 삼켜버렸구만'이란 말을 하죠. 


 재밌는 것은 미끼가 되는 존재들도 비슷하게 표현된다는 점입니다. 일단 이름이 미진과 효진으로 비슷하고, 둘 다 미끼가 될 때 몸에 열이 나 아팠습니다. '추격자'에서 미진은 자신의 몸 상태가 좋지 않다고 호소하며 남자를 만날 수 없다고 했지만 중호가 억지로 보냈죠. '곡성'에서도 효진이 완전히 달라지기 직전 종구에게 아픔을 호소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리고 모두 그 호소는 의미 없게 됩니다.



 범인의 존재도 그러합니다. 단적으로 말해 추격자의 '지영민'과 '곡성'의 일본인은 적그리스도 적인 면모를 가지고 있습니다. 지영민은 한 때 교회의 신자였으며 지금 살고 있는 곳은 원래 교회 집사 부부의 집이었습니다. 지영민은 자신이 살해한 이들을 모두 그 집 정원에 매장하는데, 영화는 그 때까지 계속 예수상을 조각하는 지영민의 모습이나, 그가 살고 있는 동네의 밤이 십자가로 뒤덮인 장면 등을 통해 지영민을 기독교와 연결시켜 갑니다.(지영민의 골방에 붙어있던 그림과 일본인의 숨겨진 방 벽에 붙어 있던 사진들도 유사한 장면입니다.) 그런 면에서 지영민을 이렇게 해석할 여지도 갖게 합니다. 지영민이 사실은 적그리스도고, 그는 살인으로 복음을 전파하고 있으며 정원에 매장된 시신들은 모두 자신의 신도인 셈이라고.


 이렇게 보면 '곡성'의 일본인과 정말 유사하죠. 마지막 장면에 얼핏 보이는 일본인 손바닥에 난 성흔, 카메라로 자신이 파멸시킨 영혼들을 속박하는 것 등. 그렇게 그 역시 '추격자'의 지영민처럼 신도를 모으고 있었던 셈입니다. 일광이 말하는 '살'로 표현되는 저주가 그의 복음이었다고 할 수 있겠죠.  이것은 일광의 굿 장면을 통해 더욱 전면적으로 형상화되었습니다. 결국 살이 향한 곳이 다름아닌 효진의 영이라고 생각할 때, 일광의 굿은 굿이 아니라 예배처럼 보이기도 하니까요. 일단 그가 입은 옷이 전통 무복은 아니죠. 하얀 색이 많은 것이 목사들이 예배할 때 흔히 입는 옷을 연상시키기도 합니다. 제 착각일까요? 더구나 말이 전혀 없고(우리나라 굿은 응답 과정이 있으니까요) 시끄러운 음악과 현란하면서 과장된 몸 동작은 부흥회 같기도 하고, 염소 도살 같은 것은 구약의 번제를 떠올리게 합니다. 거기다 효진 방의 제단 위에 놓인 소도 있지요. 그 소도 구약 때 번제에 사용되던 대표적인 동물이었습니다. 특히나 일본인이 되살린 시체가 있습니다. 이것은 명백히 예수의 나사로를 뜻하고 있습니다. 예수가 죽음에서 나사로를 되살렸듯 일본인이 되살린 것이죠. 하지만 일본인이 되살린 나사로는 삶이 아니라 죽음을 가져 옵니다. 동일한 행위, 정반대의 결과. 일본인이 가진 의미가 보다 명확해지는 순간이죠.


 이런 면에서 '곡성'은 '추격자'에서 이미 드러나고 있었던 기독교적인 종말론 분위기가 더욱 확대되고 뚜렷하게 표현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것을 수긍한다면 감독이 첫 작품부터 관객에게 하고 싶었던 말을 지금도 반복하는 것이며 다만 이번엔 좀 다른 방식을 취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네요. '추격자'와 '황해'에서 거듭되었던 감독의 말은, 물론 어디까지나 제 생각입니다만, 지옥이 바로 우리 발 밑까지 와 있으며 거기서 우리를 구원할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추격자는 그래도 중호가 희생자의 아이를 떠맡으면서 희망의 싹이라도 보였지만 '황해'는 그조차 없습니다. '황해'의 주인공을 우리는 구원을 위해 별 짓 다하는 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합니다. 주인공 이름이 무엇보다 여기에 대한 증거가 아닐까요? 구남. 그대로 구원(영화에선 아내로 표상되었죠.)을 구하는 남자로 해석될 수도 있으니까요. 그렇게 천신만고라는 말이 결코 비유가 아닐만큼 그는 갖은 구원을 향한 갖은 노력을 다하지만 얻는 것은 구원이 이미 상실되었다는 사실과 자신의 초라한 죽음 뿐이었죠. 결국 그는 돌아가지 못하고 황해가 그의 무덤이 됩니다.


 저는 '곡성'에서 종구가 일본인을 잡기 위해 높은 절벽으로 올라가는 장면이 눈에 띄더군요. '황해'에서도 구남이 추운 겨울날에 높은 산을 오른 적이 있습니다. 그냥 하는 생각으로 들어주셨으면 하는데, 이것은 바벨탑의 은유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종종 인간의 능력은 '바벨탑'처럼 얼마나 높은 곳까지 오를 수 있는가로 그 우수성을 표현하기도 했었죠. 그리스 신화의 이카루스처럼 말이죠. 의미심장하게도 종구가 그 곳에 올랐을 때, 카메라는 흔들려 불안하게 그를 잡습니다. 비상 보다는 추락의 위험을 더 전해주기 위해서 말이죠. '황해'에서도 구남이 산으로 올랐던 것은 달아나기 위해서였습니다. 총상마저 입어 그 높은 곳은 죽음의 접경이기도 했습니다.



 '곡성'도 마찬가지입니다. 종구의 몸은 비틀거리기까지 해서 더욱 추락의 위험을 가중시킵니다. 같이 간 친구들이 말리기까지 하죠. 인간의 위대함의 증거가 되었던 가장 높은 곳이 이제는 가장 위험한 곳이 되었습니다. 아무리 높은 곳으로 올라도 구원은 커녕 불안만 가중될 뿐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올라간 자들의 눈에 보이지 않지만 일본인이 바로 아래 있습니다. 이제 곧 지옥을 열 지도 모를 그 존재가, 바로 발 아래 보이지 않게 매달려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보기엔 '곡성'의 주제를 집약해 보여주는 장면이 아닐까 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 어디를 가든 이 지옥으로부터 달아날 수 없다는 것. 비록 눈에 보이지 않을 지라도 그것은 바로 우리 발 밑까지 와 있다는 것. 바로 그렇기 때문에 '곡성'에선 주로 가족이 거주하는 집이 파괴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적어도 지금까지 이렇게 영화 본편에서 한 가족이 살던 집이 파괴당하는 장면은 감독의 영화에서 없었습니다. '추격자'는 나중에 간접적으로 전해 들을 뿐이었죠. '황해'에서도 가족이 생계와 불륜으로 붕괴되긴 했지만 완전 파괴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곡성'은 시작부터 가족 몰살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바로 앞 장면인 종구의 가족이 모두 모여 아침을 먹는 모습에 더욱 대조됩니다. 원래 종구는 아침을 먹지 않고 사건 현장으로 거려 했습니다. 그러나 장모가 이런 말로 그를 붙잡습니다. "사람이 죽었어도, 산 사람은 먹어야 한다."


 '추격자'와 '황해'까지는 그렇게 별개의 것이 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럴 수 없습니다. 시대가 불안할수록 종종 가족은, 그들이 거주하는 집은 유일한 피난처로 생각됩니다. 그러나 이제 그럴 수 없습니다. 가족은 몰살당하고, 그 집은 전소됩니다. 그렇다면 이제 어디에 의지해야 하나? 남은 것은 신 밖에 없습니다. '곡성'은 감독의 작품 중, 처음으로 신이 우리 앞에 현현하는 영화이기도 합니다. 마치 마지노선이 무너져버린 것처럼 신이 전면적으로 개입하게 됩니다. 신이 거하는 장소가 두 번 잡히는데(감독은 성당의 모습을 똑같이 보여 단독자 신이 거하는 장소의 유일성을 강조합니다.), 외관은 언제나 요괴가 출몰하는 어스름의 시간대에 낮게 웅크려 있고, 그 내부는 어둡고 비어있습니다.(외관의 모습은 마지막 장면에서 신이라고 할 수 있는 무명이 앉은 모습과 비슷합니다.) 신부는 작고 초라한 몰골이고, 부제 역시 그리 믿음직스럽지 못합니다. 신인 무명 역시 종구의 비극을 막아주지 못합니다.



 종구에게 종말이 닥쳐온 순간, 신은 무력하게 어두운 담벼락에 쪼그리고 앉아있을 뿐입니다.(무명을 신으로 생각하는 이유 중 하나는 그가 영화에서 가장 먼저 경계를 넘는 자라는 것. 그리고 '금어초'로 경계를 만드는 자라는 것 때문입니다. 경계를 초월하고 짓는 것은 신의 대표적인 속성이죠. 그녀가 종구에게 '아이의 아비가 죄를 지어', '의심' 운운 한 것도 그녀가 신이라는 것을 드러냅니다. '아이의 아비'는 성경에서 흔히 나오는 표현 방식이고, 죄와 믿음은 종교에서 신의 권위를 위해 가장 강조하는 것들이죠. '욥기'에서 왜 자신이 이런 고통을 당해야 하냐고 욥이 묻자 전혀 알 수 없는 대답을 하여 욥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던 신처럼 무명 역시 그렇게 대답합니다. 종구는 그 뜻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당연합니다. 신의 대답은 인간의 이해를 위해서가 아니라 신의 권위를 드러내는 데 더 맞춰져 있기 때문입니다. '욥'에서 신이 자신에게 불가능한 것은 없다는 말로 대답을 대신하는 것처럼.) 하지만 그 신조차 무력합니다. 손까지 잡았는데도 종구의 비극을 막지 못합니다. 무기력하게 쪼그리고 앉은 모습이 우리가 영화에서 마지막 보는 신의 모습입니다. 그것은 곧 어둠에 먹힐 것 같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없습니다. 영화 초반의 유모차와 마지막 효진의 모습에서 미래마저 없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남은 것은 이 끔찍한 지옥으로서의 현재. 종구는 언제가 효진에게 했던, 이제는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되어버린 말을 무의식적으로 반복하면서(아마도 이름이 종구인 것은 이런 중얼거림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는 마지막 장면의 그를 나타내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끝내 어둠 속으로 사라집니다. 


 그 독백은 지금 우리의 모습과 닮았을 지 모릅니다. 장모가 처음 그에게 했던 말. '산 자는 산 자고, 죽은 자는 죽은 자다'. 그 말의 본질은 '아직 우리는 죽지 않았으니 괜찮다. 우리는 그것을 피해 나갈 수 있다.'는 말일 겁니다. '세월호'나 '강남역 무차별 살인' 같은 타인의 비극을 보아도 그게 적어도 내게 닥친 것은 아니니까 무심할 수 있는 마음의 본질에도 놓여 있는 말이죠. 하지만 '적어도 나는 아닐 거야, 난 그렇지 않을 거야' 하는 말은 종구의 마지막 독백처럼 허황된 주문에 불과합니다. 지옥은 벌써 우리 발 아래 와 있고, 언제라도 우리를 삼키려 노려보고 있기 때문이죠.


 이것이 바로 영화 초반에 언급된, 그리고 마지막에 다시 한 번 반복되는 누가 복음이 인용된 진짜 의미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꼭 만져봐야 아느냐란 그 말은 직접 당해봐야 꼭 알겠느냐?'로도 얼마든지 해석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놀라고, 무서움에 사로잡혀서,

 유령을 보고 있는 줄로 생각하였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너희는 당황하느냐?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을 품느냐?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

 유령은 살과 뼈가 없지만,

 너희가 보다시피, 나는 살과 뼈가 있다."
  - 누가 복음 24장: 37~39절


 이 세상에서 우리가 조우하는 비극들 중에 우리와 무관한 것은 없다. '곡성'은 그것을 보여주려는 영화가 아니었을까요? 그랬기에, 영화 초반 그 비극으로부터 멀어져 있는 것처럼만 보였던 종구가 결국엔 같은 운명을 걷게 되었음을 보여주는 게 아닐까요? 영화 초반, 종구는 사건 현장에 가장 늦게 오고, 와서도 멍하니 구경만 했습니다. 카메라는 현장에서 멀찍하게 벗어난 종구나 화면 구석으로 밀려난 종구를 많이 보여주죠. 그렇게 멀리, 얼마든지 구경꾼이 될 수 있는 그였습니다만 사건의 당사자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파출소 정전 장면은 그래서 더 인상적입니다. '버섯 때문이래' 하면서 소문을 전혀 믿지 않았던 종구가 느닷없이 현관 유리창 바로 앞에 나타난 나신의 여인을 목격하니까요. 문자 그대로 그것은 엄습입니다. 예측할 수 없고 그래서 막을 수도 없습니다. 일광의 말처럼 이유도 없습니다. 종구는 이유를 찾고자 하지만 신의 대답은 아무 이유도 없다는 사실만 밝혀줄 뿐입니다. 그러니 더욱 어떤 비극도 나와 별개일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 어떤 타인의 비극이든 무심해서는 안되며 나의 비극인 것처럼 여겨야 하는 것입니다. '곡성'이 말하는 것은 달아날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나만이 피할 수 있고, 안심할 수 있는 문제란 없다는 뜻입니다.


 타인의 비극에 대한 둔감과 망각이  결국은 우리 파멸의 열쇠일 수 있다는 것. 그것을 영화는 잘 보여주는 듯 합니다. 세월호 참사 이후, 너무나 공감할 수밖에 없는 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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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다구리 2016-05-27 08: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는 무섭고 의미잡기가 어려운 줄만 알았는데, 그렇게도 볼 수 있다는 점.. 대단하시네요. 욥기의 주제와 관련시킨 점에 뭔가 머리를 둔기로 맞은 기분이었습니다. 최근 <욥의 노래>라는 민음사의 시집에서 비슷한 해석을 읽었는데, <곡성>이란 영화도 그런 해석이 가능하다는 것이 놀랐습니다. 이 블로그를 여기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83467498 도서평에 소개할께요.^^

ICE-9 2016-06-09 23:59   좋아요 0 | URL
페라리님, 댓글이 많이 늦었네요. 좋게 봐주셔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어요. 곡성의 마지막에서 종구와 무명의 대면은 제게 꼭 욥과 하나님의 대면처럼 보이더군요. 욥이 그 때 신에게 자신의 고통에 대한 이유를 물었듯이, 종구도 무명에게 그런 것을 묻는 것 같았어요. 욥기를 다룬 시집이 있다니,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꼭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2016-05-30 01: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6-10 00: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녀고양이 2016-07-26 14: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를 그저께 되어서야 한 번 보고,
어제 안 되겠어서 한 번 더 보았답니다..... 참 어려운 영화예요.

댓글을 하두 늦게 달아서 헤르메스님이 확인이나 하실 수 있으실지, ^^, 의심과 두려움, 공포로 인해 악으로 빠지는 인간의 나약함과 그것을 흡수하여 점점 세력이 커지는 ˝악˝의 본질에 관한 이야기로 이해했습니다. 살아남고자 하는 인간의 본성으로 인해 우리는 지나치게 자주 의심과 두려움으로 빠지는데, 신은 그저 ˝하지 마˝ 라고 하시더군요.
 
소설 주목 신간 작성 후 본 글에 먼댓글 남겨 주세요.

 마감이 오늘이라 시간이 없는 고로각설하고 바로 추천으로 들어간다.


 MOST WANTED


 1. 페터 바이스 - 저항의 미학














 3월의 신간 중 단연 눈에 들어오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독일 작가 페터 바이스의 대작 '저항의 미학'!

 바이스는 82년에 죽었는데 저항의 미학 3권은 81년에 나왔다. 한 마디로 그의 말년을 불태운 작품으로 사실 그가 82년에 작고한 것도 이 삼부작을 쓰는데 너무 심혈을 기울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때문에 평가도 아주 높아서 70년대와 80년대를 통틀어 독일어로 쓰여진 가장 중요한 작품 중 하나로 손꼽힌다. 이 작품은 주로 유럽을 좀먹어가던 파시즘과 거기에 대한 사회주의 저항을 그리고 있는데 원래 페터 바이스 자체가 그런 단체에 참여해 활동하다 나치 세력이 점점 강해지자 스웨덴으로 달아나 죽을 때까지 평생 거기에 머무른 전력이 있는만큼 더없이 생생한 시대 묘사로 유명하다. 


 소설은 십대에 만난 세 인물을 중심으로 그리고 있는데 그것은 각각 페터 바이스의 정치와 문학 그리고 예술을 나타낸다고 한다. 그만큼 자전적이면서 세 영역에 대한 바이스 자신의 자의식이 깊게 투영된 작품이다. 그런 의미에서 가장 험난한 시대, 오로지 이상 하나만 믿고 자신의 길을 뚜벅뚜벅 걸어갔던 개인의 투쟁에 대한 초상을 이 소설만큼 역력하게 드러낸 것도 또 없을 것 같다. 내가 보기엔 지금 우리나라도 나치가 한창 창궐한 무렵의 독일만큼이나 어둡고 절망적이다. 달없는 밤, 갈길 몰라 헤매고 있는데 저만치 누군가 조용히 들고가는 초롱불을 보았을 때와 같이 희망과 의지를 얻기 위해 벗해보고 싶다. 그도 그럴 것이 바이스가 제목으로 '저항의 미학'으로 한 것은 체제가 아무리 강력하게 억압하더라도 예술 안에서 사회에 대한 이해와 정치 행동을 위한 새로운 모델을 반드시 찾을 수 있다는 신념의 표현이라 한다. 그도 나만큼이나 희망과 의지를 가져다 줄 뭔가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니 더욱 함께해 보고 싶다. 


  2. 아머 - 개미전쟁, 존 스타클리


 평생 단 두 작품만 남겼다는 존 스타클리의 작품이라니. 그것만으로도 '아머 - 개미전쟁'이 읽고 싶다.

 엇! 그런데 이 소설 설정이 참 낯익다. 일단 '아머 -개미 전쟁'은 거대 개미의 모습을 한 외계 생명체가 지배하고 있다는 행성 밴시에서 그 행성을 점령하기 위해 신체 능력을 업그레이드시키는 강화복을 입고 투입된 군인들이 거대 개미와 싸우는 이야기다. 그런데 최근 일본에서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어 방영되기도 한 만화 테라포마스가 이와 비슷한 것이다.


 이 만화에서는 인류가 화성 개척을 위하여 인류가 생존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 먼저 이끼와 바퀴벌레를 풀어 놓는데(이끼는 비슷하게 화성 개척을 소재로 했던 영화 '레드 플레닛'에서도 나온 바 있다.) 그만 바퀴벌레가 이상 진화를 하여 인류만한 크기로 거대해지고 지능마저 겸비해선 신체능력 또한 인간을 넘어서 인류에게 아주 위협적인 존재가 되어 버린다. 그런데 화성에서 건너온 정체불명의 바이러스 때문에 지구가 위기에 빠진다. 백신을 만들려면 반드시 오염되지 않은 샘플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오직 화성에서만 얻을 수 있다. 그러나 화성은 앞서도 얘기했듯이 무시무시한 능력을 가진 바퀴벌레들이 지배하고 있는 상황.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구는 백신 수색팀을 투입하는데 1차로 갔던 지구 수색팀은 무참히 살육당하고 만다. 때문에 지구는 전과 같은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다양한 동물의 DNA를 이용하여 그 동물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능력자들을 육성, 그런 그들로만 구성된 수색대를 2차로 화성에 보낸다. 그리하여 화성에선 지구와 바퀴벌레 간의 처절한 살육전이 펄쳐진다.


 어떻게? 정말 비슷하지 않은가? 그런데 '아머 - 개미전쟁'은 1984년(그렇다!! 무려 32년 전 작품인 것이다. 한 마디로 고전이랄 수 있겠다.), 테라포마스는 2013년에 나왔다. 그렇다면 테라포마스가 '아머 - 개미전쟁'을 심하게 말하면 창조적 재활용을 했거나 덜 심하게 말하면 커다란 영향을 받은 것이 분명해 보인다. 솔로몬이 말했듯 정녕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은 없는 것 같다. 이런 이유로 '테라포마스'가 얼마나 재활용했는지 알기위해서라도 '아머 - 개미전쟁'이 읽고 싶다. 밀리터리 사이언스 픽션의 걸작이라고 하니 더욱 그렇다.


 SO SO ...


 3. 추락하는 모든 것들의 소음 - 후안 가브리엘 바스케스


 20세기 말의 콜롬비아를 그리고 있다고 하니 큰 관심이 생긴다. 바야흐로 마약왕 파블로 에스코바르가 잔혹하기 그지 없는 폭력으로 콜롬비아 전체를 지배하던 시대. 문자 그대로 헬 콜롬비아. 한 번은 그 시대를 클로즈 업한 이야기를 보고 싶었다. 이제 그 기회가 온 것 같다.










 4. 크리피 - 마에카와 유타카


  2011년 일본 미스터리 대상 신인상 부문 수상작이라고 한다.

 하지만 정작 이 소설을 정말 읽고 싶게 만드는 것은 그런 사실이 아니다.

 오직 단 하나, 이 소설이 곧 개봉될 구로사와 기요시의 영화 '크리피'의 원작이라는 사실 때문에 너무도 읽고 싶다. 구로사와 기요시는 내가 좋아하는 감독이다. 그의 공포 영화는 영화감독으로서의 그만의 독특한 자의식이 담겨 있어 좋아한다. 하지만 그는 그동안 자신의 공포 영화를 집대성한 2007년 작 '절규'를 끝으로 더이상 공포영화를 찍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정말로 공포영화 세계를 떠나 있었다. 무려 10년 가까이 지나서 그는 다시금 공포영화세계로 돌아온 것이다. 그런 그가 처음 선택한 작품이니 아무래도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전에 미나토 가나에의 '속죄'를 원작으로 드라마로 작업했던 2012년의 동명 작품은 분명히 2011년 3.11 이후, 일본의 속죄를 요청하고 있었다. 그것은 '절규'의 죄의 기억과 그대로 이어지는 것이기도 했다. 그렇게 기요시는 기억에서 속죄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런 그가 모처럼 돌아와 다시 만든 공포영화 '크리피'에선 또 어디로 나아갔을지 궁금하다. 그 때문에라도 원작을 읽어보고 싶다. 물론 기요시의 공포영화에로의 귀환을 환영하는 의미도 있다. 더구나 먼저 읽어보신 분들이 무섭다고 하시니 더 읽고프다.


 아래는 기요시의 '크리피' 예고편

 

 

 5. 생사의 강 - 차이쥔

 

 그동안 블루오션으로 남아있었던 중국 미스터리들이 연이어 소개되고 있다.

 최근 몇 작품을 읽었는데 마음에 들었기에 기대감이 높아졌다. 차이쥔은 사회파 미스터리 작가라고 하는데 '생사의 강'은 전생과 윤회 같은 것들을 다룬다고 한다. 소재가 사회파랑 잘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데 중국에서 천만부 넘게 팔렸다고 하니 도대체 어떻게 소재와 주제를 엮었기에 그만한 성공을 거두었을까 심히 궁금해진다.

 거기다 이 작품의 목차를 보니 중국의 저승관이 자세히 펼쳐지는 것 같다. 본디 각 나라의 저승관에 관심이 많았던 터이기도 해서 매우 관심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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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군 이래 최대 불황이라면서, 4월에 아주 핫한 아이템들이 마구 출판되는군요.

 모두의 눈과 귀를 번쩍 뜨게 할 아이템은 단연 이것이 아닐까 싶은데요.

 이데아 총서로 나왔다가 어느새 절판되어 많은 이들로 하여금 헌책방을 전전하게 만들었던 그것!

 그렇습니다. 토머스 핀천의 '브이를 찾아서'가 드디어 간행된다는군요.




 간행된다, 안된다 그동안 참 설왕설래 하더니 민음사가 드디어 작정한 모양입니다.

 이 작품을 바라기 하느라 한없이 늘어나기만 하는 독자들의 목을 보호 차원으로다가...

 이제 더이상 애태우지 않아도 되겠군요. 고마워요, 민음사^^


 이에 질세라 문학동네도 사건 하나 크게 터뜨렸습니다.

 타임지가 가장 선정적인 문학 베스트 10중 하나로 꼽기도 했던 존 업다이크의 커플들이 나오네요.



 와우~! 

 이 작품까지 나오면 그렇지 않아도 봄바람에 더욱 죽어나가는 솔로들의 폐가 한층 더 타들어가겠군요.

 아니, 그 반대일까요?^^ 하하.


 그러나 당신이 SF의 팬이라면 이것은 그저 예고편에 불과합니다.

 드디어... 5년만에 그 작품이 찾아옵니다.

 열린책들, SF, 5년 하면 딱 하나밖에 없죠.

 맞습니다. 그것!! 댄 시먼스의 엔디미온이 마침내 우리 앞으로 찾아온 것입니다.

 거짓말 하나도 안 보태고 눈물이 앞을 가리네요. 얼마나 기다렸던가요?

 그 기다림에 보상이라도 하듯, 우와아아아!! 엔디미온의 각성까지 다 나온다네요. 대에에에에바아아악!!!!!!!

 이렇게 하여 우리는 드디어 히페리온 사가의 완전체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입니까?

 4월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겁니까? 설마 세상이 종말하기라도 하나요?

 어떻게 단번에 이런 대박 아이템들이 주루루...


 네? 정말 무슨 일이 일어난다구요?

 정말? 진짜? 어떤 일이 일어난다는 거죠?


 그건, 오늘이 무슨 날인지 생각해보면 안다구요?


 아... 네, 그렇군요...

 오늘...


 여러분은 이미 아시고 계셨죠?

 하하, 만우절이라 책 가지고 한 번 장난쳐 봤습니다. 알라딘에 어울리는 농담으로...^^

 정말 속아셨더래도 돌은 던지지 마세요. 심장이 약하답니다.

 하지만 다음엔 이 거짓말들이 진짜가 되길 빌며, 양치기 소년은 이제 그만 물러가렵니다.

 그런데 문학동네 세계문학 시리즈에 제5 도살장이 발간 예정이라고 되어 있던데..

 커트 보네것이 새로 번역되어 나오나 봅니다. 그렇다면 '제일 버드' 좀 꼭 내어주세요.

 제가 읽은 커트 보네것 소설 중에 가장 웃긴 작품이었는데 꼭 다시 보고 싶습니다.

 가능하다면 데뷔작인 자동피아노도... 굽신굽신...

 (문학동네 관계자 분이 이 글을 읽을지는 모르겠지만)

 아, 이거 기승전구걸이군요.


 세상에 왜 이리 읽고 싶은 책이 많은 거죠?

 책에는 정녕 불혹이 불가능한 것 같습니다. 하아...


 아, 그리고 표지 출처는 바로 여기입니다. http://bookcover.github.io/index.html

 여러분도 재미로 여러분만의 표지 만들어 보세요^^


 마지막으로 오늘에 어울릴만한 노래 하나 첨부합니다.


 신데렐라의 Nobody's Fool ^^



I'm not your fool
Nobody's fool
Nobody's foooool
I'm no fooool
Nobody's fool
Nobody's fool
Never again no no!!!


여러분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 같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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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4-05 01: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4-05 23: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준석, 안철수 때문에 마냥 갑갑하기만 했었는데

 이런 후보가 있었구나.

 저번에 안심번호로 후보 경선 투표 왔을 때 이 사람을 잘 몰라서 난 이동학을 찍었었는데...

 한 사람의 인격이라는 건, 원래 사소한 것에서 그 진실이 드러나는 법...

 하여, 나는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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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3-30 00: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3-30 01: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드라마 '시그널'이 오늘로 끝났다. 아니, 이젠 어제인가?

 원래 '싸인' 때부터 관심을 가졌던 김은희 작가였지만, 보다 더 이 드라마를 특별히 챙겨 보게 만든 것은 우연히 예고편에서 본 이재한(조진웅 역)의 다음과 같은 대사 때문이었다.


"거기도 그럽니까? 돈 있고, 빽 있으면 무슨 개망나니 짓을 해도 잘 먹고 잘 살아요? 그래도 20년이 지났는데, 뭐라도 달라졌겠죠?"


 왜 이렇게나 이 대사가 마음을 울렸을까? 분명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는 자각 때문이리라.

 그것을 타파하고픈 변화의 갈구, 목소리에 실린 절박함이 느껴져 1화 방영때부터 각잡고 지켜보게 되었다.


 한 마디로 좋은 드라마다. 이제 겨우 3월이지만 올해 최고의 드라마라고도 부르고 싶다.


 포스터 역시도 역대급! 정말 마음에 든다.


 아무래도 시그널은 세월호 참사에 대한 드라마적 대답이 아닐까 싶다.

 박해영과 이재한이 무전을 주고 받으며 한결 같이 하는 말, "포기하지 않으면 바뀔 수 있다"는 것은 그대로 세월호 참사에 대한 우리의 간절한 바람이기도 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전 끝까지 갑니다."


 라는 이재한 형사의 말이 뭉클한 것도 제발 그렇게 되어 세월호 참사의 진실이 온전히 드러났으면 하는 우리의 간구가 더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설정 또한 세월호 참사를 많이 반영하고 있다.

 (여기서부터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혹시 드라마 보실 분들은 여기서 멈춰주세요.)


 일단 1화에서 부터 15년이 넘도록 경찰서 앞에서 자기 딸을 유괴 살해한 범인을 잡아달라며 1인 시위를 하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은 그대로 세월호 참사의 유가족과 겹친다.



 과거의 이재한 형사와 현재의 박해영 경위를 이어주는 매개체가 하필이면 무전기라는 것도 그러하다.



 이는 세월호 참사 당시 우리의 눈물을 많이도 쏟게 했던 아이들의 핸드폰을 많이 연상시킨다.

 배터리가 닳은 무전기로 통신할 수 있게 했던 것은 어디까지나 결코 사건을 이대로 미제로 남겨둘 수 없다는 이재한 형사의 절박함이었다. 세월호 참사 때 아이들이 부모에게 보낸 문자에 담겨진 것도 그런 절박함과 다르지 않았다.

 더구나 이 무전기는 1화에서 유류품 상태로 박해영 경위에게 발견된다. 죽은 자가 남긴, 정작 그 장본인은 아직도 찾지 못한 그런 자의 유류품으로. 산자와 만나는 것이다.

 팽목항에서 아이들의 유류품으로 나온 핸드폰들과 똑같이 말이다. 이런 유사성으로 드라마의 무전기는 세월호 아이들의 핸드폰을 은유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드라마에서 과거와의 무선은 언제나 11시 23분에 일어난다.



 이 시간도 그대로 세월호 참사를 반영한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날, 11시 23분.

 정확히 모든 공영 방송에서 공히 '세월호 승객 전원 구조'가 보도되었던 것이다.



 물론 이것은 오보였다.

 그런데 드라마에서 과거와의 무선은 소중한 이들을 지키고 싶다는, 그것을 위해서 과거를 바꾸고 싶다는 절박함에서 일어난다.(결국 미제로 남겨두지 않겠다는 이재한 형사의 의지도 그런 마음의 연장이다.)

 이는 11시 23분에 일제히 전국으로 보도된 그 오보를, 과거가 바뀌어 그것이 사실 보도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것과 이어진다.

 11시 23분은 비극적인 과거를 바꿔, 소중한 이들을 지키고 싶다는 절박함의 시간이다.

 드라마에서나, 현실에서나.


 또한, 마지막 화에서 결정적인 증거로 제시되는 빨간 목도리도 세월호 참사를 반영한다.

 한 장면이 인상깊었다.

 이재한 형사가 쓰레기 하치장에서 열심히 빨간 목도리를 찾고 있는데 박스 줍는 할머니가 그 목도리를 목에 두르고 나타난다.  그런데 그 두른 모습, 가만히 보면 세월호를 잊지 말자는 노란 리본과 비슷해 보이지는 않는가?




 왜 하필이면 결정적인 증거가 목도리인 것일까? 그것이 세월호 리본을 상기시키기 위해서라고 말한다면 너무 나간 해석일까? 하지만 이재한이 미국에서 받은 증거 사진에 담겨진 빨간 목도리의 모습이라든지,


(이것을 거꾸로 놓고 보면 세월호 리본과 비슷하다)

 

 할머니가 두른 모습을 보면 그렇게 확대 해석인 것 같지는 않다. 

 더구나 이 빨간 목도리는 박해영의 형 박선우가 죽었을 때 그를 죽인 경찰이 가지고 간 것이다.



 말이 나왔으니까 말인데, 박선우는 그야말로 세월호 참사 때 죽은 아이들을 상징하고 있다.

 밀양 여중생 성폭행 사건과 세월호 참사는 이렇게 만난다.

 그것이 아무도 지켜주지 않아서 일어난 비극이라는 점과

 하필이면 그것을 주도했던 것이 경찰이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특히나 박선우의 경우, 그를 죽인 경찰은 그대로 세월호 참사 때 아이들이 수장되는 것을 방관한 해경을 나타내고 있다. 경찰이 고등학생을 살인한다는 설정이 그냥 나온 것 같지는 않다. 해경을 연상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말이다. 다시 말해, 경찰이 죽인 박선우는 해경이 죽인 세월호 참사 아이들이다. 빨간 목도리는 바로 그 방에서 발견되었다. 이 희생자와 현장 때문에 빨간 목도리는 세월호 리본으로 보인다.



 여기에 박선우를 죽인 경찰을 찾아온 이재한 형사가 하는 말이 더욱 이런 해석을 가능하게 만든다.

 "그 아이는 어딘가 자신을 지켜 줄 어른이 있다고 생각했어. 그 어른을 찾았던 거야. 자기 가족을 지키려고."


 어른... 자신들이 언제 익사할지 모르는데도 수수방관하고 있는 해경들을 보면서 세월호의 아이들 역시 애타게 찾지 않았을까? 자신들을 지켜줄 어른을...

 그런 마음이 선우에게도 있었고, 때문에 선우는 그대로 세월호의 아이들이라고 생각되는 것이다.

 더구나 자신으로 인해 붕괴된 가정을 예전 그대로의 모습으로 지키고 싶다는 선우의 열망은 세월호의 아이들 역시도 가지고 있었으리라.


 이렇게 드라마 '시그널'은 설정과 주제 모두에서 강력하게 세월호 참사를 환기하고 있으며 보는 우리들에게 포기하지 말 것을, 미제로 남겨두지 말 것을 호소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재한 형사의 절박함이, 비분강개가 내게 더욱 와닿았는 지도 모르겠다. 지금 우리의 마음도 그와 다르지 않기에.

 그래서 더욱 작가는 이재한 형사의 뚝심을 두드러지게 했는 지도 모르겠다. 그가 하나의 푯대가 되어 포기하려 하고 마음 다잡지 못하는 우리들이 보고 따라올 수 있도록.

 마지막 화에 나온 차수현 경위가 이재한 형사와 자신의 옛 사진을 바라볼 때 배경에 있었던 빨간 등대는 그런 의미가 아닐까? 또 그 장면은 팽목항을 연상시키기도 했다.

 팽목항에서 유가족이 아이들을 찾고 싶어하는 마음과 차수현 경위가 이재한 형사를 찾고 싶은 마음이 너무도 닮아 있었기에...


 다시 보면 훨씬 더 상세하게 잡아낼 수 있을 것 같다. 언젠가 시간이 허락한다면 꼭 다시 보고 싶다.

 드라마 '시그널'은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작품이다.

 더우기 세월호 참사에 대한 드라마적 응답은 처음이 아니던가!


 그건 그렇고 결말 부분,

 역시나 김은희 작가의 작품답게 한껏 열려있다. 예상은 했었다. '싸인'도, '유령'도 그랬으니까.

 그래도 이재한 형사가 나오는 마지막 장면은 너무 모호해서 마치 시즌 2를 염두에 둔 것처럼도 보인다.

 (나오려나? 나오면 정말 좋겠지만...)

 

 나는 이재한 형사가 가지고 있었던 무전기 때문에 이게 혹 김은희 작가의 특기인 언해피 엔딩이 아닐까 생각되기도 했었다. 무전기에 불이 들어오지 않았다면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겠지만 불이 들어왔던 것이다.

 그리고 그 전에 절대 자신이 있는 요양병원으로 오지말라고 했던 문자.

 이것은 분명 미래의 누군가가 알려줬을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무선이 이뤄진다는 말.

 그런데 그렇게 되려면 이재한 형사가 가지고 있는 무전기가 미래의 누군가에게 들어가야만 가능하다.

 과거와의 무선은 어디까지나 이재한 형사의 무전기로만 이뤄지기 때문이다.

 그게 가능하려면 오직 하나밖엔 없다.

 과거에 그랬듯이 이재한 형사가 죽어야만 가능하다. 과거가 바뀐 후, 15년동안 이재한 형사가 계속 무전기를 가지고 있는 장면에서 보듯 이재한 형사가 살아있을 경우 박해영은 무전기를 가지지 못한다. 무전기는 늘 이재한 형사에게만 있다.

 아니나 다를까 지금 요양 병원엔 장의원이 보낸 조폭들이 이재한 형사를 수색하고 있다.

 (이 부분에서 장의원의 도시 재개발 비리를 인터넷으로 폭로한 것도 세월호 참사를 연상시킨다. 오프라인 언론이 침묵한 세월호 참사의 진실을 주로 많이 말했던 것은 인터넷이었으니까.)


 이런 이유로 그 때, 이재한은 납치되어 실종되거나 죽었고 뒤늦게 도착한 차수현과 박해영이 무전기만 수습한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왜 요양 병원에 오지말라고 한 것일까? 휘말릴 수 있기 때문에?

 어쨌든 썩 편한 결말은 아니다.

 

김은희 작가답게 연애엔 별 배려가 없다. 

(이래서 공중파는 아예 생각 안했는 지도)

흑...보면 볼수록 불쌍한 차수현 경위...

하긴, 이재한 첫사랑도 그렇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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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6-03-13 2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그널에 홀릭해서, 금토를 기다렸는데..... 어제 끝났네요.
시그널 시즌 2를 논의 중이라는데, 나왔으면 좋겠다 싶기도 하고, 열린 결말이었으면 좋겠다 싶기도 하고.

작가가 전달하고 싶었던 ˝포기하지 않고 정의를 위해 변화를 시도해야 한다.˝ 라는 메시지는 잘 다가왔으니까요.
우리, 포기하지 말아요. 쪼옥~

ICE-9 2016-03-13 23:24   좋아요 0 | URL
물론입니다. 이재한 형사를 따라서 절대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갈 겁니다^^
시즌 2도 포기하지 말고 제발 나와주세요... 치지직... 치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