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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그레의 다섯번째 작품과 여섯번째 작품이 드디어 나왔습니다.  

   

                     

 

   만일 매그레 시리즈를 시즌으로 나누는 것이 가능하다고 한다면, 다섯번째 작품 '누런 개'는 바야흐로 시즌 2의 출발점이 되는 작품이라 할 만한 것 같습니다. 그 만큼 '누런 개'는 그 이전의 작품과 구별된다는 것인데요. 거기다 그렇게 구별되는 점들이 또한 뒤이어 이어질 작품들이 보이는 일련의 경향들 까지 보여주고 있기에 '그 시작'이라고도 할수 있을 것 같습니다. '누런 개'가 도대체 어떤 것을 보여주길래 감히 이렇게까지 말할 수 있는 것인가 말씀하실 것 같습니다. 그것을 제대로 설명하기 위해 앞서 네 작품이 무엇을 보여주려 하였나를 밝혀 거꾸로 '누런 개'가 가지는 차별성을 드러내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라 여겨지는군요. 그렇게 이 페이퍼를 뭣보다 하나의 또 다른 시작이라 할 만한 '누런 개'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한 일종의 팁 같은 것으로 이해해 주셨으면 바랄 나위가 없겠습니다. 

   

    일단, 데뷔작 '수상한 라트비아인' 부터 네번째 작품 '라 프로비당스호의 마부' 까지 일련의 시즌으로 묶을 수 있다라고 말했는데 도대체 그 근거는 무엇인가? 라고 당연히 물으실 것 같습니다. 이 페이퍼는 일종의 팁이고 가급적 읽는 이의 시간을 많이 빼앗지 않으면서 핵심만 전달하고자 하는 것이 목적이기에 그렇게 앞 서 나온 네 작품에 가장 먼저 등장하는 공간들에 집중하여 이 네 작품이 어떤 일련의 주제들을 이어오고 있었는가를 드러냄으로서 그것이 '누런 개'와 어떻게 단절되는지 간단히 밝히는 것으로 마무리를 하겠습니다. 

 

   편의상 시즌 1로 몪은 매그레의 네 작품에서 첫 공간의 모습은 모두 중요합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점에서 그렇습니다.  첫째는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주제를 집약해서 보여준다는 점이고 둘째는 네 작품이 커다란 하나의 주제를 형성하기 위하여 이어지는 단계적인 흐름이라는 점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바로 '수상한 라트비아인'에서 부터 시작해보죠. 

  


 이 작품에서 첫 공간은 바로 파리의 북역(GARE DU NOD)입니다. 

 
 “거대한 유리 지붕으로 덮여 있음에도 플랫폼에는 난데없는 돌풍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지붕에서 떨어진 유리 몇 장이 선로 사이에서 박살이 나 있었다. 전기는 끊겼다 통했다 했고, 사람들은 저마다 옷깃을 추어올린 채 움츠린 자세였다.(p.13)” 파리 북역의 묘사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파리 전성기의 역사적 상징이자 파리 최대의 역으로 역시나 수많은 사람들이 오고갑니다. 심농은 특히 이별하는 모자와 초조하게 기다리는 여인을 묘사한 뒤 다시 한 번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거대한 역 모습을 이와 같이 묘사합니다. "이윽고 기차의 노란 불빛이 멀리서 반짝였다. 잠시 후 짐꾼들의 외침과 개표구로 치닫는 여행객들의 어지러운 발소리로 일대가 혼란에 휩싸였다.(p.14)" 이렇게 처음 등장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오고가는 북역의 모습은 그야말로 흘러들어오는 혼종된 이데올로기와 수많은 이민자의 물결로 인해 정체성의 혼돈을 겪고 있는 프랑스의 축소판과도 같은 모습입니다. 바로 그러한 역 한가운데 눈을 부릎뜨고 매그레가 홀로 서 있는 것입니다. 심농은 그 많은 사람들의 오고가는 무리가운데서도 전혀 존재감을 잃지않는 매그레를 특히 강조합니다. 그러한 거대한 존재로서 매그레는 스쳐가는 사람들 하나하나를 면밀하게 살펴보고 있습니다. 작별과 기다림의 순간은 보내는 어머니와 기다리는 여인의 모습으로 병치되어 그렇게 또 '수상한 라트비아인'의 주요 테마이기도 한 '정체성 바꾸기'를 은밀히 드러냅니다. 사실 오고가는 거대한 사람들의 물결 자체가 자신이 선택할 겨를도 없이 거대한 이데올로기에 휩쓸려 가던 프랑스인 나아가서는 유럽인들을 그대로 묘사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런 와중에서 매그레만이 홀로 그들의 모습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지켜보고 있습니다. 마치 심농이 '수상한 라트비아'인을 통해 한 인간의 삶을 오롯이 담아내는 걸 상징이라도 하고 있는 것 처럼... 이렇게 처음 등장하는 파리 북역의 모습은 '수상한 라트비아인'에서 심농이 하고자하는 말들을 그대로 집약시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건 다음 작품 '갈레씨, 홀로 죽다'에서 처음 등장하는 생파르조 역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매그레가 사건의 전보를 받고 존재하는지 조차 몰랐던 작은 생파르조역으로 갔을 때는 파리로 스페인 국왕이 방문하러 오고 있었습니다. 그 국왕을 경호하느라 모든 형사들이 파리 북역으로 파견되는 바람에 매그레는 홀로 그 역으로 와야 했습니다.  심농은 이렇게 처음 작품에 나왔던 파리 북역을 다시 등장시켜 이 생파르조 역이 가지고 있는 존재의 왜소함을  강조합니다. 매일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파리 북역과 존재하는지 조차 몰랐던 생파르조의 모습은 너무도 대조적입니다. 더구나 심농은 모든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스페인 국왕과 누구하나 관심가지지 않는 갈레씨의 죽음을 또 그렇게 대비시켜 보여줍니다. 그렇게 '갈레씨'의 '생파르조역'은 그야말로 갈레씨를 의인화시켜 놓은 공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매그레가 있는지 조차 모르는 그 역으로 있는지 조차 몰랐던 한 사람의 죽음을 조사하기 위해 그것도 홀로 온다는 것은 파리 북역에서 거길 오고가는 수많은 사람들 중 그 누구도 타인의 삶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지만 매그레만은 가졌던 것과 똑같은 의미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이 작품을 통해 아니 매그레 시리즈 전체를 통해 심농이 하고자 하는 것은 명확히 드러납니다. 당시 유럽의 혼란한 상황과 경제적 궁핍으로 점점 잃어만가는 타인의 삶에 대한 관심을 그만이라도 꿋꿋하게 지켜나가겠다는 일종의 결의에 찬 표현이기도 합니다. 더구나 이것은 점점 왜소해져만 가던 한 개인의 삶을 있는 그대로 되살려 그 자체로 온전한 개인의 삶의 가치를 다시 회복시키는 길이기도 했습니다.  

  

                                                                          

 

  '생폴리앵에 지다'의 노이샨츠역은 어떤가요? 

   그곳은 그냥 지나치는 역입니다. 네델란드와 독일의 국경에 위치하고 있는 그 역은 매일 노동자들을 태운 통근 열차가 바쁘게 지나가지만 국경을 넘는 통관 절차 때문에 잠시 머무를 뿐 내리는 사람은 거의 없는 그런 역입니다. 그렇게 잠시 머무는, 이내 버려지는 역이죠. 그래서 흔히 움직이는 열차를 세월에 비유하듯이 그렇게 세월 속에 잠시 머무르다 잊혀진 혹은 그대로 묻혀진 역의 느낌이 강한 곳입니다. 매그레는 바로 여기서 문제의 남자를 만나죠. 그리고 그 남자를 통해 바로 이 노이샨츠역 처럼 어느 세월엔가 존재했었으나 이제는 묻혀졌던 한 사건의 전모를 결국 알게 됩니다. 여기서 진정한 범죄는 과거에 일어납니다. 그렇게 한 개인의 죽음을 통해 무관심속에 버려졌던 타인의 삶을 온전히 복원해낸다는 것은 갈레씨와 똑같습니다만 갈레씨는 현재의 죽음이고 생폴리앵은 과거의 죽음이라는 점만이 다릅니다. 아무래도 현재에는 부재하는 죽음이라서 그런지 첫 장면에 등장하는 노이샨츠의 존재감도 생파르조 역보다 더욱 옅어졌습니다. 이제는 아무도 머무르지 않는 역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누구나 다 서둘러 떠나려고만 드는 그 역은 그렇게 '생폴리앵에 지다'에서 그 과거의 죽음으로 달아나려고만 하는 등장인물들이 의인화된 공간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생폴리앵에 지다'에서의 노이샨츠 역도 그 소설에서 심농이 하고자 했던 얘기를 집약시켜 놓은 공간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심농은 모두 기차역에서 출발했습니다만 이 작품에선 그러지 않습니다. 이 작품은 기차와 자동차에 의해 상대적으로 교통 수단으로써의 중요성은 덜해진,그렇게 시대에 뒤쳐진 '운하'가 그 첫 공간으로 등장합니다. 여기서 '마부'가 나오는 이유는 바로 그 운하를 바지선이 타고 흐르기 위해서는 두 필의 말이 둑방에서 그것을 끌고가야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여기엔 또 하나 시대에 뒤쳐진 존재, 자동차에 의해 시대의 뒤안길로 밀려난 '마부'가 등장합니다. 처음 등장한 공간에 대해서만 초점을 맞추어 생각해보면 '라 프로비당스 호의 마부'는 그야말로 기묘합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오로지 시대에 밀려난 그렇게 '부재한' 것들로만 채워져있기 때문입니다. 사건의 주 무대가 되는 화려한 요트 조차 이름이 '서던크로스'입니다. 아시다시피 남십자성은 유럽에서는 볼 수 없는 별자리죠. 그렇게 또 '부재'를 표상하는 존재입니다. 심농은 왜 그랬을까요? 왜 유독 이 작품에 그렇게 부재한 이미지들로만 채우고 있을까요? 그가 단순히 오래동안 배를 통해 여행을 했으며 그렇게 친숙한 세계였기 때문에 배경으로 삼은 것이다라는 설명은 제게 부족해 보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저를 납득시킬만한 이유를 찾아야했고 그것이 바로 '생폴리앵에 지다'에서 나온 '과거의 죽음'과 그로 부터 유일하게 자유롭지 못했던 하나의 존재였습니다. 저는 앞서 '생폴리앵에 지다'를 심농 자신의 참회록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생폴리앵에 지다'에 나오는 과거의 죽음을 그 자신도 겪었기 때문이죠. 그는 거기서 달아나려고 했던 사람의 하나라고 여겼습니다. 매그레는 바로 심농 자신을 고발하기 위한 존재였죠. 그 자신의 참회를 위해서 말이죠.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것으로는 그에게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심농은 여기에 아예 그 존재로 하여금 자신에게 보복을 가하도록 합니다. 그가 당했던 아픔을 그 자신도 겪도록 합니다. 그래서 '라 프로비당스'는 그야마로 자학의 산물입니다. 어떤 의미에선 진정으로 과거로 부터 자유롭게 위해 스스로 복부에다 깊이 칼을 찌르는 '할복'의 감행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그는 존재를 지우려 합니다. 아마도 그러한 욕망이 반영된 결과가 그렇게 부재하는 이미지들로 넘쳐나는 첫 공간이 나타나게 된 이유가 아닐까 감히 상상해 봅니다. 때문에 그에게 보복을 가하는 그렇게 작품 끝까지 끈질기게 얽히고 섥히는 배의 이름에다 '라 프로비당스' 즉 '신의 섭리'라는 이름을 붙여 준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러나 아직도 이 네 작품에 드러난 첫 공간이 가지는 의미를 밝히기엔 부족합니다. 저는 여기에 또 다른 한 가지가 있다고 앞서 얘기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모든 첫 공간의 묘사가 하나의 거대한 흐름에 따른 일련의 단계 같은 것이었다고 말입니다. 첫 번째 작품 파리 북역에서 네 번째 라 프로비당스까지 우리는 공간이 점차로 줄어들다가 결국엔 사라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거대하고 사람의 무리로 가득했던 북역의 공간이 점점 사람이 사라지고 공간이 줄어들더니 급기야는 아예 머무르지 않는 곳이 되고 결국엔 역 조차 사라지는 오로지 부재가 충만한 공간으로 되어버리는 것을 목격하게 됩니다. 이것은 분명 일종의 연쇄로 보이니 여기엔 어떤 의도가 있는 게 아닐까요? 그는 왜 그렇게 공간을 지워나갈까요? '라 프로비당스 호의 마부'에서 공간의 의미는 단적으로 드러납니다. 심농은 거기서 공간을 한 '인간이 안식을 얻을 수 있는 곳'으로 정의해 보여줍니다. '서던 크로스'는 심농 자신의 분신이기도 한 램스 경의 유일한 안식처였죠.  바지선 '라 프로비당스호'의 조그만 마굿간도 그 누군가의 그러한 유일의 안식처였습니다. 그런데 결말에 가면 그 모든 공간이 사라지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렇게 처음 공간이 점점 사라졌듯이 램스 경의 서던 크로스도 바지선 '라 프로비당스 호'도 사라지는 것입니다. 램스 경은 계몽시대 이래로 퇴락해 버린 귀족 계급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이라 그의 사라짐은 이제 전통적 의미에서의 유럽은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리고 신의 섭리라는 뜻을 가진 라 프로비당스호가 비워짐은 그렇게 신의 섭리가 더 이상은 작동하지 않는 유럽을 가리키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렇게 심농은 죄의 원인이 되었던 자도 그 죄를 심판한 신도 모두 사라지게 만듭니다. 전통적 의미의 모든 가치가 사라진 공간. 이제는 전혀 낯설게 되어버린 공간. 그것이 바로 심농이 바라보던 당시의 유럽이었습니다. 생각해보면 '수상한 라트비아인' '갈레씨' '생폴리앵에 지다'도 모두 '라 프로비당스호' 처럼 '바뀌어버리는 시대, 바뀌어버리는 사람들'에 대한 얘기였습니다. 그렇게 그는 꾸준히 하나의 얘기를 다르게 변주해가며 해왔던 것이죠. 그리고 그것을 '라 프로비당스호'에서 최종적으로 결론을 내린 것입니다. 모든 게 달라져 버렸습니다. 이제 안식을 얻을 곳은 그 어디도 없습니다. 이것이 심농이 내린 최종적 결론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왜 입니까? 안식이란 그리고 무슨 의미입니까? 편안하다는 것은 다른 말로 내일을 예측할 수 있다는 말일 것입니다. 우리는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보아서 유추해낼 수 있습니다. 그러니 변하지 않을 일상에 안도감을 느끼고 편안해 질 수 있는 것이죠. 그런데 내일을 전혀 예측할 수 없다면, 그렇게 자기가 속한 이 세상이 도대체 어떻게 변해갈지 가늠조차 할 수 없다면 아마도 불안해지는 것은 당연하리라 봅니다. 심농이 최종적 결론을 그렇게 내린 이유도 바로 이것 때문이었습니다. 시대의 공기가 완전히 달라져 버렸기 때문에 아무것도 예측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러한 예측불가능성에 대한 불안을 가져다준 명확한 존재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점점 세력을 더해가는 파시즘의 존재였습니다. 그는 뭔가가 꿈틀대고 서서히 촉수를 뻗쳐오고 있음을 느낀 것 입니다. 비슷한 것을 동시대를 살았던 조지 오웰도 느끼고 있었습니다. 이제 세상은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달라질 지 도무지 알 수 없다. 그 불안은 그렇게 유럽 전체를 서서히 물들이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현재를 심농의 매그레 초기의 네 작품은 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현재를 담아내는 것을 '라 프로비당스호'로 종결한 심농은 이제 새로운 작품 '누런 개'에서 부터는 그가 추적하는 그 불안의 정체를 보다 명확하게 드러내려 합니다. 심농을 의사에 비유하면 이전의 네 작품은 일종의 환부의 관찰이 될 것이고 '누런 개' 부터는 일종의 진단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저는 '누런 개'가 그 진단으로써의 '시즌 2'의 시작이라고 감히 판단해 봅니다. 그리고 그 추적의 과정을 더 없이 흥미로운 마음으로 음미해 볼 생각입니다. 

 

   심농은 30년대가 가진 시대의 '대기'를 여실히 담아내고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그 때와 지금의 우리와는 그리 별로 멀어보이지 않습니다.  파시즘에 대한 두려움과 똑같이 우리는 지금 신자유주의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시대는 점점 예측불가능하고 이전에는 도저히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았던 온갖 부조리한 일들도 비일비재하게 일어납니다. 고귀한 전통적 가치들은 자본에 의해 사라진지 오래이고 사람들은 당시의 유럽 산업자본가들이 그랬듯이 타인들을 그저 이용가능한 도구로만 여깁니다. 한진중공업 사태을 비롯 기득권들로 부터의 온갖 억압과 폭력이 자행되는 현장에서 30년대의 유럽을 연상하는 게 그리 불가능한 일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니 매그레를 읽는다는 것은 지금 우리의 현재를 읽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렇게 우리의 현재를 제대로 바라보기 위해서라도 시즌2로 이어지는 매그레의 추적을 같이 할 가치는 충분하다고 감히 끝맺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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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분야의 주목할만한 신간 도서를 보내주세요

 

  어느새 또 5월의 신간을 추천하는 시간이 닥쳐왔군요. 

  아직 선정된 책중 단 한권도 리뷰를 쓰지 못한 시점인데 

  정말 제가 마치 헤라클레스가 태양을 향해 쏘았던 그 화살에 매달린 것 처럼 

  눈깜짝할 속도로 여기로 날아오고 말았네요. 

 

  신간 추천 페이퍼를 작성하기 위해서 신간들을 훑어봤습니다. 

  5월 한 달동안 어마어마한 신간들이 출간되었더군요. 

  신간 평가단을 하면서 처음으로 새로나온 책들을 훑어보게되었는데 

  그렇게 많은 책들이 정말 소리 소문도 없이 나오고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우리나라가 세계 출판 시장 3위라는 말이 새삼 실감 났습니다  . 

  그 많고 많은 신간들 중에 이번달만큼 주목 신간을 고르기가 힘든 달도 없는 것 같군요. 

  아무튼 그 중에서 제가 주목한 신간들은 이렇습니다 . 

 

    

 

 

 

 

 

 

 

  일단, 뭐랄까요. 제 어린시절에 가장 충격을 주었던 그런 의미에서 정신적 스승이라고나 할까요. 하여간 그러한 분들의 신간들이 드디어 나왔길래 반가운 마음에 먼저 소개하려 합니다 . 

 '화성의 타임슬립'은 필립 K 딕의 걸작선 중 가장 첫번째로 나온 책입니다.  이렇게 멋진 디자인으로 진정한 의미의 걸작선이 나오다니 일단 딕의 팬으로서 감격입니다. 저는 어릴 때 말하자면 도서관 키드였는데요. 거기서 딕의 '사기꾼 로봇(THE IMPOSTER)'를 처음 만났습니다. 주위 사람 모두가 주인공을 외계인이 보낸 자살 폭탄 로봇으로 의심하는데 주인공은 끝까지 자신이 진짜 사람이라고 주장하죠. 당연히 독자들은 그의 입장에 서서 주위 사람들의 무지를 안타까워 하는데 그런데 결국 밝혀지는 진실이란... 문자 그대로 충격에 빠졌던 작품이었습니다. 한동안 어린 마음에 제 자신도 그러한 로봇이 아닐까 의심스러워했을 정도로... 그 때는 딕의 작품들이 아직 우리나라에 유명하지 않아서 제가 읽어볼 수 있던 단편도 딱 그 하나 뿐이었죠. 그 뒤 차츰 그의 소설들이 영화화되면서 주요 작품들도 번역되더니 드디어 완전한 의미의 걸작선으로 발간되었네요. 반갑고기쁘기 그지 없습니다.(전 이미 국내에 나온 딕의 소설들을 다 구매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중복 소장을 하게 되었지만 말이죠. ㅠ ㅠ) 아서 G 클라크도 그러한 의미에서 딕과 동일한 정신적 스승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그의 책 '유년기의 끝'이 제게 아주 많은 영향을 미쳤죠. 그런 의미에서 아서 G 클라크의 단편집들이 나오는 것은 제게 아주 반가운 일입니다. 첫번째 두 권이 나오고 이번에 나오기까지 거의 1년 넘게 걸렸지만 말이죠(아서 G 클라크도 할 말이 많지만 추천 페이퍼에 그걸 다 쓰면 두 권 얘기만으로도 엄청 길게 쓸 것 같아서 클라크는 이 정도로만 언급하는게 좋을 것 같네요ㅠ ㅠ) 

 

  황석영 작가가 또 이렇게 새로운 소설을 들고 찾아왔군요 

  부끄럽게도 저의 인연은 '심청'에서 멈춰져있습니다. 그 후의 작품들이 아직 공백으로 남아있는 터라 그것을 건너 뛰고 새로이 나온 책부터 읽는다는게 왠지 조심스럽지만 황석영 작가의 말중에 이런 말이 있더군요 

 "지금의  세계는 우리와 더불어 살아온 도깨비를 끝없이 살해한 과정이었다. 나는 이들 우리 속의 정령을 불러내어 그이들의 마음으로 질문을 해보고 싶었다. 내 속에 그게 정말 아직도 살아 있는 거냐?" 이 말이 왠지 마음을 울려 읽어보고 싶어졌습니다. 다시금 '손님' 때의 그 황석영 작가를 볼 수 있을 지 모르겠습니다. 

 

 

  특히나 하드보일드 소설들에 있어서 탐정들(혹은 형사들)은 자주 작가들의 분신들로 평가받곤 합니다. 탐정들(혹은 형사들)은 그렇게 그야말로 작가들의 신념과 세상에 대한 분노를 육화시켜 놓은 인물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어떻게 탐정들(혹은 형사들)을 창조시켰는지에 대해 듣는다는 것은 작가들이 그의 작품들에 어떤 의미를 주고자 하는지 혹은 그의 작품들에 대해 어떤 태도들을 가지고 있는지 알아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할 것 같습니다. 굳이 그런 것을 제외하더라도 좋아하는 시리즈의 주인공이 어떻게 해서 창조되었는가 하는 궁금증을 해소시키고 싶은 것은 팬심으로서도 당연한 일이겠지요. 아무튼 작품의 보다 깊은 이해를 위해서나 팬으로서나 어차피 제가 좋아하는 작가들이 무진장 나와 있어서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무작정 닥치는대로 읽고 싶은 그런 책이기도 합니다. 

  

 

  

살만 루슈디의 새 소설도 나왔습니다. 

2008년에 나온 이 소설은 액면만 보면 출생의 비밀이 얽힌 인도의 무굴제국을 배경으로 한 옛 이야기 같지만 살만 루슈디 자신은 이 책에 관해서 말하길 자신의 책중 가장 재해석이 많이 될 작품으로 매년 끊임없이 읽을 것이 요구되는 소설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제임스 조이스가 자신의 소설 '율리시스'를 두고 했던 말과 비슷한데 그는 여기다 조이스 처럼 그 어떤 수수께끼들을 숨겨놓은 것일까요? 퍼즐러 추리소설을 좋아하는 분들이시라면 한번쯤 도전해보고 싶은 작품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저의 신간 추천은 여기까지입니다. 

 이제 빨리 남은 숙제들 마치러 가야겠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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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차 싶었다. 매그레 시리즈와 ‘NORDIC NOIR’와의 관계를 쓴다고 말은 했는데 웬걸, 막상 착수하고 보니 예상밖으로 만만치가 않았던 것이다. 국내에서 참조할 만한 자료도 거의 없었다. 헉! 하지만 이미 뱉은 말을 물릴 수도 없고, 할 수 없이 전적으로 내 지식에만 기반 해서 쓰자고해도 딸리는 내공으로 벅찰 게 분명하고. 자, 진퇴양난. 하지만 '이왕 뽑은 칼 썩은 무라도 잘라야하는 게 도리가 아니겠는가!' 하는 웬 사극조의 목소리가 자꾸만 심금을 경련시키길 래 결국은 임진왜란 당시 충주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치고 몰려오는 왜군을 바라보는 신립의 마음으로 모니터를 마주하고 앉았다. 

   순간 가득한 백색의 공포... 도대체 무슨 말로 첫 시작을 해야 할 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이미 머릿속으로 쓰려고 헤아렸던 말들은 모니터를 마주한 순간 바람에 민들레 홀씨가 날리듯 휙 사라져버리고 말았으니. 새삼 심농이 부러웠다. 심농은 저널리스트 시절 그 날의 칼럼을 1시간 만에 흭 휙 써냈다고 하던데. 그렇게 써놓고도 스스로 퇴사할 때까지 오래도록 신문사에 남아있었던 걸 보면 분명 칼럼의 질이 떨어지지 않은 게 틀림없다. 아, 그런 속성의 기술이 내게 있다면 좋을 텐데... 그런 건 있을 턱이 없으니 이렇게 심농 신에게 가호나 빌 수밖에.
   심농 님, 나를 굽어 살펴서 이 지난한 싸움을 잘 치르게 해 주소서...

   해서 나는 결국 칼을 빼들었으니, 이제는 본격적으로 심농과 NORDIC NOIR와의 관계를 재주껏 살펴보려한다. 두구두구둥~(입소리로 효과음을 내고 있는 중임.)

   애초에 이런 기획을 하게 된 동기부터 말하는 게 순서겠지? 그래, 왜 이런 스스로에게도 부치는 기획을 하게 되었느냐 하면 그것은 매그레가 다름 아니라 1930년대에 탄생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나라에 소개되기엔 그 연식이 너무 오래되었다는 데 있었다. 물론 오래되었다고 해서 무슨 문제가 있는 건 아니다. 이 보다 훨씬 더 연식이 오래된 ‘셜록 홈즈’나 ‘아르센 뤼팽’도 이미 우리나라에 전집이 나온 판이니. 나 역시 셜록 홈즈는 이미 전집으로만 두 세트를, 뤼팽도 전집으로 가지고 있는 형편이니. 그러니 정작 문제는 오래되기도 했지만 매그레가 그다지 우리나라에서는 유명하지 않다는데 있다고 해야겠다. 지금까지 그 어마어마한 시리즈 중 겨우 세 권만 번역되었을 정도로 매그레의 지명도는 턱없이 낮다. 바로 가까운 일본만 해도 매그레가 얼마나 유명했던지(물론 일본에서는 ‘매그레’가 아예 TV드라마로도 만들어졌다. 거기서 매그레 부인역을 했던 사토미 토모는 심농 스스로 매그레 부인을 맡았던 연기자 중 최고라는 상찬까지 받기도했다.) 아오야마 고쇼의 만화 ‘명탐정 코난’에서는 중요한 조연 캐릭터 이름으로도 버젖이 나오는데 우리나라에서 방영될 때는 세상에! 그게 '콜롬보'란 이름으로 확 바꿔버릴 만큼 턱없이 지명도가 낮은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 오래된 데다 더구나 별로 유명하지도 않은 매그레를 왜 하필 지금에 와서 읽어야 하는가 라는 의문이 당연히 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매그레가 여전히 동시대적으로도 의미가 있다는 걸 설득하기 위해 지금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이른바 ‘NORDIC NOIR’와의 상관관계를 밝혀보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매그레와 ‘NORDIC NOIR’가 결국은 일란성 쌍둥이이며 지금 ‘NORDIC NOIR’가 널리 읽히고 있다면 당연히 매그레도 널리 읽힐 수 있다는 걸 밝혀보고 싶은 것이다.


   근데 아까부터 자꾸 NORDIC NOIR, NORDIC NOIR 하는 데 그게 대체 뭐냐고? 

  아, 참 그걸 미리 말해놓는다는 걸 까먹고 말았군. 실례. 지금부터 설명 들어가겠다. ‘NORDIC’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북유럽 특히 스칸디나비아반도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나온다. NOIR는 뭐, 프랑스 말로 '검다'는 뜻이고 구체적으로는 헐리우드에서 1930년대 생산된 범죄 영화의 특징이기도 한, 낮은 조명으로 음습하고 어두운 도시적 초상을 그려내던 영화들을 장르적 범주로 묶어서 부르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NORDIC NOIR’는 스칸디나비아 반도를 중심으로 출간된 ‘우울한’ 범죄 소설을 묶어서 부르는 말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NOIR'란, 거기서 나온 소설들이 처음부터 작정하고 그런 소설을 펴냈다는 말은 아니고 비평계에서 보니 그 반도에서 나오는 범죄 소설들이 모두 공통적으로 가지는 특성들이 있는데 그게 바로 느와르 적이었다는 의미로 붙여진 말이다. 이 말은 최근 스티그 라르손의 밀레니엄 시리즈가 헐리우드에 의해 영화화가 됨으로써 그로 인해 그동안 소개되었던 일련의 스칸디나비아반도의 범죄소설에 대해 언론이 새삼 다시금 조명을 받게 됨으로서 태어난 이름이다. 물론 이러한 관심이 비단 지금에 이르러서야 태어난 것은 아니다. 이미 90년대 초반 헤닝 만켈의 데뷔작 ‘얼굴 없는 살인자’가 나왔을 때부터 당시로서는 새로운 작품 분위기와 범죄 소설로서는 이례적인 사회를 해부하는 깊이 있는 시선 때문에 세계적인 비평적 관심을 받은 바 있었다. 그래도 그 때는 한 작가가 이루어낸 독특한 분위기 정도로만 여겨졌었는데 이 후 노르웨이의 카린 포숨, 아이슬란드의 아날두르 인드리다손 그리고 지금은 스티그 라르손의 밀레니엄 시리즈까지 스칸디나비아 반도 여러 나라의 다양한 작가 군들이 그와 비슷한 색깔의 작품들을 연속적으로 내어놓음으로써 이렇게 ‘NORDIC NOIR’라는 명칭으로 불리울 만큼 하나의 새로운 경향으로 자리잡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뭐, 이들이 얼마나 많은 영향을 미쳤는지는 그들의 이력에 따라다니는 굵직굵직한 세계적 수상경력이나 현재 미국 언론을 중심으로 불타오르고 있는 지속적인 관심만 봐도 충분할 것 같고 여기선 당신의 시간을 조금이라도 덜 뺏기 위해 다만 이들과 심농의 매그레가 어떤 상관관계를 이루고 있는지만 살펴보려 한다.



   우선 ‘NORDIC NOIR’가 보여주는 공통된 특징들이다.  

   과연, 어떤 것들이 있을까? 먼저 주인공의 모습이다. ‘NORDIC NOIR’에 있어서 주인공들의 모습은 비슷한 점이 참 많다. 일단 주인공의 직업이 모두 형사다(스티그 라르손의 경우엔 예외적으로 저널리스트지만.). 그리고 아주 고독한 존재들이다. 이들은 업무상 관계를 제외하고는 어떤 사회적 관계로 부터도 단절되어 있다. 제대로 된 가정조차 이루고 있지 않은 게 대부분이다. 마치 그들은 어디에서도 발붙일 수 없는 그렇게 계속 떠돌 수밖에 없는 존재들로 보인다. 더구나 이들에게 개인적 관계란 언제나 상처를 동반한 것들뿐이다. 범죄로 인해 사회가 고통 받는 것과 똑같이 그들은 그들만의 개인적 관계들로 상처를 받는다. 그것은 현재적 상처이기도 하지만 오랫동안 가슴 속에 묵혀진 과거의 상처들도 있다. 아니 사실은 그 과거의 상처 때문에 현재적 상처들이 나온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근원적 고통이며 오래된 과거라는 점 때문에 그들로서는 도저히 어쩔 수 없는, 그렇게 능동적 개입이 불가능한 절대적 고통이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그저 아픔을 느끼는 것 말고는 다른 게 없다. 그들은 그렇게 치유할 수 없는 환부를 가진 불치병 환자들로 현재를 살아간다. 환자들에게 환부란 자신의 모든 것을 삼켜드는 일종의 블랙홀이다. 늘 자신의 환부를 바라볼 수 밖에 없는 자는 그렇게 주위를 둘러 볼 여유를 잘 가지지 못한다. 그렇게 과거의 상처는 현재의 관계마저 파탄을 불러온다. 


   이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작가가 아마도 아이슬란드의 ‘아날두르 인드리다손’일 것이다. 그의 캐릭터 에를렌두르 형사는 애정 없는 결혼생활을 이어가다 끝에 아내와 이혼을 했고 이미 장성한 자녀들마저 소원한 관계로 지낸다. 거기다 그는 경찰이지만 자식들은 모두 마약상용자로 사회 속 패배자로 살아간다. 에를렌두르는 자녀들이 그렇게 된 게 모두 자신의 탓으로 여기지만 그렇다고 그가 그들을 위해 뭔가를 하는 것도 아니다. 에를렌두르와 그의 가족들은 다만 하나의 평행선을 이루며 살아갈 뿐이다. 그러다 범죄가 발생하고 그렇게 하나의 사체가 문득 떠오르는 것과 동시에 평행선을 이루며 살아가던 자신의 딸에게서 도와달라는 요청이 훌쩍 날아온다. 이 둘은 언제나 에를렌두르에게 동시에 도착한다. 에를렌두르가 수사하는 범죄들은 대부분 아주 오래된 세월 깊숙이 묻혀있던 것들이다. 그것은 마치 에를렌두르와 자식들간의 관계와도 같다. 어떻게 보면 떠오른 범죄는 그들의 오래도록 해묵은 상처가 비로소 그 존재를 열어 보이는 것과도 같다. 그렇게 에를렌두르에게 있어 범죄의 수사란 사실은 그들이 가진 상처를 되돌아보는 것이다. 대부분 삶의 깊은 아픔과 질곡들이 배여있는 범죄들이 에를렌두르에게 있어서는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계기로 작용해 결국엔 새롭이 딸과의 관계를 정립해나가는 원동력이 되어준다. 그렇게 에를렌두르에게 있어 수사란 사실은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며 그것을 개선하기 위한 일종의 깨달음을 향한 여정이었던 셈이다. 이렇게 ‘NORDIC NOIR’의 범죄 수사란 대부분 사건의 해결에 초점을 맞추기 보다는 그것으로 인해 드러난 상처(만켈이나 포숨에 있어서는 사회가 은닉한 갈등이고 인드리다손에게 있어서는 주인공 자신이 억누르고 있었던 고통이다)에 초점을 맞춘다. 그래서 결국 수사를 하지만 그것은 단순한 범죄가 아니라 그것으로 수면 위로 떠올라버린 인간의 삶 그 자체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NORDIC NOIR’의 주인공들은 수사관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고독한 산책자’라고 해야 더 어울린다. 산책자가 주위의 풍경들을 보면서 스스로를 돌이켜보듯이 그렇게 그들 역시도 수사를 하면서 오히려 삶 자체를 관조하는 것이니까 말이다. 이것은 그대로 심농의 매그레가 보여주는 것과 같다. 매그레의 경우도 늘 범죄가 수사를 개시하게 하지만 정작 그가 발견하게 되는 것은 그 범죄 뒤에 숨어있는, ‘생플리앵에 지다’에 나오는 목 매달린 자들과도 같이, 목에 걸린 밧줄처럼 죄어오는 '생(生)'이 가져다주는 고통으로 질식할 것만 같은 그 '삶' 자체이니까 말이다.


   ‘NORDIC NOIR’에서 또 하나의 공통점을 든다면 사건이 언제나 협소한 공간속에서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렇게 ‘NORDIC NOIR’에서는 대부분 사건들이 고립되고 작은 마을에서 일어난다. 유독 그렇게 사건적 공간을 선택하는 까닭은 그것이 그 자체로 하나의 완결된 세계로 보여졌으면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곳은 현실의 공간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하나의 은유적 공간에 가깝다. 작가들이 이렇게 공간들을 하나의 은유로 바라보게끔 하는 것은 사실 그들이 그 공간을 통하여 현재 그 사회가 가지고 있는 사회적 모순이나 갈등들을 깔때기 처럼 집약시켜서 표현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들에게 있어 사건이 일어나는 장소는 그냥 현실적 공간이 아니라 작가가 속한 현재 사회의 모든 모순과 갈등들이 전면적으로 표출되는 광장이 되는 것이다. 

   그러한 특성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 바로 헤닝 만켈의 ‘얼굴 없는 살인자’이다. 아주 작은 마을에서 벌어지는 살인 사건을 수사하면서 정작 형사 쿠르트 발란더가 보게 되는 것은 그 마을에 아주 깊숙하게 각인된 뿌리 깊은 타자에 대한 혐오증이다. 만켈은 이렇게 발란더가 그 마을에서 목격하게 되는 외국인혐오증을 통해 당시 스웨덴 사회에서 점차 성장하고 있던 파시즘의 징후를 예리하게 보여준다. 그렇게 '얼굴없는 살인자'에서의 작고 고립된 마을은 그대로 현재 스웨덴 사회로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그 마을은 일종의 반영이며 프로이드식으로 말하자면 자아가 그렇게 감히 드러낼 수 없는 욕망을 마음 한 구석 은밀한 곳에 감추어 놓듯이, 스웨덴 사회가 밖으로 드러낼 수 없었던 그렇게 가장 은밀한 곳에다 은폐시키고 싶었던 '이드'가 표출된 공간이라 할 수 있다. 공포영화에서 그렇게 드러낼 수 없는 욕망이 종종 '괴물' '연쇄살인마'로 드러나듯이 해닝 만켈을 비롯한 'NORDIC NOIR'에서는 저렇게 하나의 공간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현재 밀레니엄으로 상종가를 치고 있는 스티그 라르손에게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심농의 매그레 역시 마찬가지다

   특히 지금 나온 ‘갈레씨, 홀로 죽다’ ‘생폴리앵에 지다’를 보면 무엇보다 시작하는 부분이 모두 거의 존재하는지 조차 모르는 이름 모를 작은 역이라는 사실은 흥미롭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생폴리앵에 지다’의 ‘노이샨츠역’은 네델란드와 독일의 국경지대에 있고 늘 양쪽 나라 노동자들을 태운 통근열차가 지나다니는데도 그저 국경을 넘느라 잠깐 머물 뿐인 그렇게 아무도 머무르지 않는 그저 스쳐지나가는 역으로 나온다. 매그레 역시 언제나 ‘NORDIC NOIR’처럼 이렇게 어딘가 묻혀진, 작은 공간에다 자신의 소설적 영역을 제한하는 것이다. 물론 그 역시 이렇게 제한하는 건 그 공간이 공간 나름의 분위기로 하나의 개성을 가지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심농은 언젠가 한 인터뷰에서 자신은 ‘나무’라는 일반명사화된 걸 그리기 보다는 ‘나의 나무’식으로 개별적인 사물을 그리는 것을 더 좋아한다고 말했다. 이것은 일종의 키에르케고어가 ‘신 앞에서의 단독자’라고 말했던 그 ‘단독자’하고도 같으며 가라타니 고진이 말했던 일반성으로 도저히 포획되지 않는 그 자체로 고유한 단독성 하고도 통하는 개념이다. 그렇게 하나의 고유성을 가진 존재. 무엇이든지 대체 불가능한 독자적 존재. 심농은 그러한 것을 그리는 걸 좋아했으며 그건 공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그는 그렇게 공간이 그 자체로 하나의 생명, 그 어느 것으로든 대체 불가능한 고유한 생명을 지니게끔 한다. 그리고 거기에 작품 전체의 주제랄까 분위기랄까 하는 것들을 집어넣는 것이다. 그래서 협소한 공간이라는 점에서 ‘NORDIC NOIR’와 매그레는 닮았지만 공간으로 드러내고자 하는 것은 조금은 차이가 난다고 말할 수 있다. ‘NORDIC NOIR’는 사회가 어디엔가 감추고 있는 모순과 갈등들을 보다 집약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공간을 제한하지만 매그레는 오로지 그 어떤 일반성의 잣대로도 잴 수 없는 그만의 고유한 개별적인 공간으로 만들기 위해 공간을 제한한다. ‘NORDIC NOIR’는 협소한 공간을 통해서 사회를 돌아보게 하지만 매그레는 그 공간 자체를 그가 작품에 담고자하는, 그 어떤 보편성으로 묶일 수 없는 하나의 단일한 인간의 삶 자체를 의인화한 것으로 만들려 한다. 그렇게 그는 아주 고유한 개별적인 공간에다 그와 똑같이 단독자 자체로 온전한 단 하나의 인간적 삶을 담으려하는 것이다. 둘은 이렇게 차이가 나지만 사실 이것은 결국은 똑같은 곳을 지향하고 있는 그 둘이 도달하는데 있어서 걸리는 일종의 '거리적'차이에 불과하다. 그러니까 'NORDIC NOIR'와 매그레 둘 다 궁극적으로는 인간의 삶을 담으려 한다는건 마찬가지지만, 'NORDIC NOIR'는 그것을 사회를 경유하여 그 사회가 가진 모순과 갈등의 결과로써의 인간의 삶을 보여줌으로써 삶이 가진 비극의 원인마저도 아울러 명확히 보여주려하는 반면, 매그레는 하나의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인간의 삶 그 자체로 곧장 뛰어듦으로써 그 어떤 보편적 잣대로도 가늠할 수 없는 고유한 개인을 중심으로 시작해서 서서히 그 원인으로써 배경에 서 있는 사회적 원인들을 아울러 포착하려 한다는 그런 정도의 차이밖에는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어느 골목을 먼저 들어가느냐 정도의 차이만 있지 사실 그 둘이 담고자 하는 것 그리고 그 것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 있어서는 똑같다고 할 수 있다.


   쓰다 보니 어느새 내가 생각했던 ‘NORDIC NOIR’의 공통적인 특징들을 다 말해버렸다. 그러니까 여기서 다시 정리하자면 ‘NORDIC NOIR’가 가지고 있는 공통된 특징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는 주인공들이 사회적 관계망을 거의 맺지 않는다. 그렇게 고독한 존재라는 점. 둘째는 사건은 언제나 협소한 공간에서 일어나고 그것은 늘 당시 사회가 직면한 문제들을 은유한 공간이라는 점이다. 셋째 ‘NORDIC NOIR’가 정작 주목하는 것은 범죄의 해결이 아니라 그 범죄 뒤에 가려진 비극적인 삶의 모습이며 그리고 그 비극을 잉태하고 지속시키는 사회적 고통이라는 점이다. 그 외에 더 많이 있겠지만 대략적으로 크게 이 세 가지를 꼽을 수 있을 듯하다. 물론 이것은 사이사이 가필해왔던 대로 매그레가 가지고 있는 특징들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정작 문제는 왜 이러한 특징을 가진 ‘NORDIC NOIR’가 새삼 이렇게 거센 주목을 받고 있는가 하는 것이리라. 

  그래야만 매그레의 동시대적 가치가 진정으로 설득력을 가질 수 있을 테니까. 왜 ‘NORDIC NOIR’는 지금 인기가 있을까? 물론 그것은 소설이 정말 재밌어서 그런 것 일수도 있다. 하지만 물론 스티그 라르손의 ‘밀레니엄’이 그런 재미를 보여주긴 하지만 이것은 ‘NORDIC NOIR’에서 다소 이례적인 재미라고 할 만하다. 대부분 ‘NORDIC NOIR’는 눈에 번쩍 뛸만한 사건이 일어나지도 않고 전개는 느리고 단조롭다. 그들의 수사는 전혀 극적이지 않으며 많은 탐문과 이리저리 얽혀드는 과거의 실타래들은 자주 소설적 쾌락을 주기 보다는 마음속으로 침잠하도록 이끈다. 즉, 여기서는 현재 영미 미스터리 소설들을 읽을 때 맛볼 수 있는 쾌감들은 모두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대부분 이 소설들을 좋아하고 높이 평가하는 사람들은 소설이 주는 재미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보여주는 삶을 헤아리는 깊이있는 시선과 그로부터 오는 묵직한 울림 때문이다. 그렇게 NORDIC NOIR’는 '즐김'의 소설들이 아니라 차라리 '관조'의 소설들이라 해야한다. 비유하자면 NORDIC NOIR’를 읽는 것은 ‘수사반장’을 보는 것이 아니라 ‘인간극장’을 보는 것과 같다. 외피만 범죄 소설이란 걸 둘러썼을 뿐이지 그것이 천착하는 것은 고래로 순수 문학이 계속해서 천착해왔던 것과 동일하기 때문이다. 바로 '인간의 삶' 자체 말이다. 앞서 ‘NORDIC NOIR’의 주인공들은 고독한 산책자와도 같다고 했는데 이와 같은 이유로 독자들 역시 바로 그들과 같은 자리에 있게 된다. 그렇게 독자들은 그들과 같이 걷고 그들이 보는 것을 같이 보고 더불어 음미하는 것이다. 소설이 보여주는 삶의 모습들을 통해서 산책을 했을 때와 같이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지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정확히 ‘NORDIC NOIR’가 주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NORDIC NOIR’에서 독자들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이해할 수 있는 머리가 아니라 공감할 수 있는 감성이다. 독자들과 작품들은 비애감으로 같이 묶이고 동정과 연민으로서 서로를 위로한다. 이 위로의 호소, 위안을 부르짖는 손길, 이것이 ‘NORDIC NOIR’의 모든 것이다. 그리고 나는 심농의 ‘매그레’ 또한 그렇다고 생각한다. 이 모든 ‘NORDIC NOIR’에 대해 내가 했던 말들이 그대로 ‘매그레’에 대해서도 똑같이 말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새삼 사람들이 이런 삶에 대한 공감, 연민, 위안에 귀를 기울이는 까닭은 무엇인가?  

  여기서 우리는 ‘NORDIC NOIR’가 나왔던 나라들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그러니까 ‘NORDIC NOIR’가 나왔던, 그 스칸디나비아의 나라들은 어떠한 나라들인가? 전 세계적으로 가장 성공적인 복지국가를 이루었다고 인정받은 나라들, 국민들 또한 자신들이 세계에서 가장 행복하다며 기꺼이 말하는 나라들이 아닌가!(해마다 가장 국민들 스스로 가장 행복하다고 여기는 나라들 순위를 매기는 데 스칸디나비아의 나라들은 늘 상위권을 차지한다. 반면 가장 자본주의가 발달한 미국은 늘 꼴찌다.) 그런데 그런 나라들에서 나오는 ‘NORDIC NOIR’는 그 어떤 나라의 같은 장르소설들 보다도 어둡고 우울하다. 그리고 내보이는 전망 또한 암울하기 그지없다. 당연히 사람들은 호기심을 가질 수 밖에 없다. 그렇게 살기 좋아 보이는 나라들에서 나오는 소설들이 왜 하나같이 이렇게 어둡기 만한 것일까? 그런 사람들의 의문 앞에서 ‘NORDIC NOIR’는 당당히 고발하는 것이다. 그렇게 가장 성공적인 복지국가로, 사람들이 스스로 만들 수 있는 유토피아에 그래도 가장 근접한 나라들로 인정받고 있지만 그건 그저 보기좋은 가면에 불과하다고. 사회의 온갖 병폐와 고통들은 그대로 방치되고 있으며 그저 보이지 않도록 덮고만 있을 뿐이라고 말이다. 오히려 ‘NORDIC NOIR’는 복지국가를 형성하기 위해 그토록 통제하고 억지로 봉합하려 들었던 국가 때문에 개인의 고통만 더욱 더 늘었을 뿐이라고 말한다. 여기의 대표적인 징후로 헤닝 만켈이 ‘얼굴 없는 살인자’에서 드러냈듯이 ‘NORDIC NOIR’는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 점점 성장하고 있는 ‘파시즘’을 보여주는 것이다. 만켈의 소설에선 외국인 혐오증으로 나타나는 파시즘은 이 소설이 출간될 당시 현실 스웨덴에서도 그 세력을 차츰 넓혀나가고 있던 참이었다. 그렇게 헤닝 만켈의 소설은 그 파시즘에 대한 문학적 고발이었고 그것은 그대로 지금의 스티그 라르손의 ‘밀레니엄’에 이르기까지 면면히 흘러오고 있는 중이다. 이들에게 있어 파시즘은 개인을 짓누르고 억압하는 거대한 권력의 또 다른 이름이다. 따라서 이들이 한 개인의 삶에 집착하는 이유도 바로 그러한 거대한 권력에 의해 쉽게 짓밟히고 무시될 수 있는 한 개인을 그 자체로서 복원하고 거기에 저항하고자 함인 것이다. 이 점에서 그 무엇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개인이라는 단독성에 집착하는 매그레와 전적으로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NORDIC NOIR’에는 국가 혹은 사회의 거대한 손 때문에 ‘내몰린 자들에 대한 연민’이 있고 그렇게 그들의 편에 서서 그들을 위로하고 그들을 내 몬 손들을 같이 비난하고 성토하는 모습이 있다. 그래서 어디든 거대한 권력이 작동하는 곳이면, 그렇게 국가든 자본이든 이데올로기든 거대한 권력에 의해 개인이 고통을 당하고 희생되는 곳이면 ‘NORDIC NOIR’의 생생한 목소리는 호소력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아마도 바로 이와 같은 이유로 현재 미국에서도 광범위한 관심을 받고 있는 게 아닐까 한다. 즉 지금 미국 역시도 ‘NORDIC NOIR’가 나왔던 그 때의 스칸디나비아 반도와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서브프라임은 그토록 미국이 추구했던 신자유주의가 그냥 허울 좋은, 거짓 이데올로기였음을 여실히 증명했다. 거기다 9/11 사태는 미국이 지금껏 추구해온 세계의 경찰로서의 위치에 심각한 의문을 가지도록 만들었다. 그렇게 경제적 위기와 정치적 타격은 새삼 미국인들로 하여금 문득 자기가 딛고 서 있는 대지가 정말 제대로 된 땅인지 의심하도록 만들었다. 그렇게 미국인들은 지금 혼돈에 처해있고 그 가운데 미국이 생산한 장밋빛 청사진에 가려져 그동안 제대로 보지 못했던 갈등과 고통들을 새삼 바라보게 된 것이다. 아마도 그러한 혼돈, 그 가운데 새삼 각인되게 된 상처들로 인해 그들은 다시금 2차 대전 후 때처럼 자신들의 삶을 되돌아보게 된 계기를 가지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비슷한 상황에서 태어난 ‘NORDIC NOIR’의 호소에 무의식적으로 반응하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즉 ‘NORDIC NOIR’는 개인보다 더 큰 것들이면 무엇이든 그것이 할퀴고 간 커다란 현재의 상처에서 태어난 것이고 그 상처를 먹고 자라나는 나무이다. 그런데 이는 누누히 말해왔듯, 심농의 매그레 역시도 같다. 매그레가 태어났고 성장을 해가던 프랑스의 시대적 상황을 고려하면 더욱 더 그렇다. 매그레가 태어났던 당시의 프랑스도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상황과 그리 다르지 않았었다. 당시 프랑스는 독일에서 거대하게 뿌리를 내려가던 히틀러의 나치즘을 바로 마주하고 있었고 내부적으로는 점점 거세어지는 파시즘의 영향으로 일대 혼돈을 맞이하고 있는 중이었다. 게다가 미국의 공황과 더불어 열악해진 경제적 상황은 더욱 더 프랑스 개인에게 힘들고 비참한 삶을 강요했던 것이다. 영화사적으로도 중요하게 평가받는 1930년대의 프랑스 영화의 일련의 경향들을 보여주는 시적 리얼리즘은 바로 그 같은 상황에 대한 반응이었다. '시적 리얼리즘'은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휘말려버린 한 개인이 겪는 좌절이나 고통들을 있는 그대로 흔히 그려내곤 했는데 그건 당시 프랑스 사람들이 스스로 생각했던 바로 자신의 모습이기도 했다. 영화가 그렇게 시대적 상황에 '시적 리얼리즘'으로 반응했다면 거기에 심농의 ‘매그레’는 문학적으로 반응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심농의 ‘매그레’는 정확히 헤닝 만켈이 당시의 스웨덴에서 보았던 그것에 대한 반응과 똑같은 반응의 산물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외연을 확장한다면 지금 우리나라의 모습 또한 매그레의 프랑스나 만켈이나 라르손의 스웨덴과 별로 다를 바 없다. 극심한 신자유주의는 내내 인간을 거대한 경쟁의 물결 속으로 내몰고 있으며 여기에 점점 현격해지는 양극화로 인한 경제적 빈곤까지 더해져 사람들 스스로 자신의 가치를 심히 절하시키고 있는 현실인 것이다. 무엇보다 세계 최고의 자살률이 이것을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게 내몰린 자들의 비참함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그들의 손을 잡아주고 어깨를 토닥여주던 매그레와 'NORDIC NOIR'는 지금 그러한 자들의 슬픔이 점점 만연해지고 있는 우리나라에서도 역시 그러한 존재가 되어줄 것으로 믿는다.


   결론적으로 지금의 ‘NORDIC NOIR’와 심농의 매그레는 그리 다르지 않다. 많은 부분에 있어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 그 둘은 또 그렇게 모두 비슷한 시대적 상황을 배경으로 두려움과 불안에 의한 그리고 저항을 위한 반응이었다. 그렇다면 지금 ‘NORDIC NOIR’가 현재 동시대의 참모습을 알려주는 목소리로서 많은 이들이 귀를 기울이고 있다면 심농의 매그레 역시도 그러한 호소력을 지금 우리들에게 줄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매그레는 시대에 뒤떨어진 그저 그 때의 추억으로 자신의 생명을 늘려갈 뿐인 유물이 아니라 지금도 우리 곁에서 살아 숨 쉬고 때로는 연민과 위안을 나눌 수 있는 동반자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지금 세 권을 읽어본 현재 나는 이것을 확신할 수 있었고 그래서 이렇게 두서없이 마구 써내려 왔지만 과연 어느 정도 당신에게도 설득력을 가질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한 가지 이러한 매그레의 진정한 가치를 음미하기 위해선 앞서도 말했듯이 공감할 수 있는 감성이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진정 공감을 위한 감성을 가지기 위해선 사실 시간이 필요하다. ‘NORDIC NOIR’의 소설의 진행이 느린 그 진정한 이유가 뭘까? 그것은 그 곳들이 대체적으로 밤이 길기 때문이다. 그들의 삶에서 밤이란 ‘더불어’의 시간이 아니라 늘 온전한 개인만의 시간이다. 그들은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고 희미한 조명 아래서 혼자의 시간을 갖는다. ‘NORDIC NOIR’는 주로 그 시간을 위해 태어난 존재들이다. 밤이 긴 만큼 사유의 시간도 길어지고 그만큼 속도도 느려진다. ‘NORDIC NOIR’의 전개 속도는 바로 그와 보조를 맞추기 위함이라 할 수있다. 그래서 천천히 소설을 통해 한 인물을 읽듯이 스스로의 삶을 돌아볼 여유도 가지게 되는 것이다. 매그레를 진정으로 이해하기 위해선 바로 그러한 시간들이 우리에게도 정말 필요하다고 본다. 이것은 되도록 혼자인 시간에 천천히 삼켜야 하는 소설이다. 매그레의 문장들은 간결하고 빠르지만 그 심플한 매무새에 담겨있는 것은 오래 숙성시켜야 비로소 맛볼 수 있는 와인과도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치 어떤 강박증과고 같이 늘 뭔가에 그저 빨리 도달해야만 하는 우리들에게 너무 무리한 주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히려 그런 우리들이기에 이렇게 조금쯤은 멈추어 서서 주위를 돌아보게 만드는 이러한 소설들이 더욱 더 필요한 것은 아닐까? 그러니 오래도록 천천히 읽어라! 오랜만에 도시를 벗어나 어느 한적한 산책길을 걷듯이 그렇게. 내가 정말 해주고 싶은 말은 이것이다. 그러면 매그레야 말로 당신의 가장 좋은 벗이 되어 줄 것이다. 여기에 대해 카린 포숨이 했던 말을 인용함으로써 글을 맺을까 한다.

   “오늘날은 뭐든지 빨라야 되고 시간을 들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즉석 식품이나 분말 코코아, 인스턴트 커피 처럼 말이다. 하지만 산다는 건 늘 시간을 들여야 하는 일이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에게 시간을 들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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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퍼남매맘 2011-07-11 15: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르메스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마지막 말 좋네요. 시간을 들인다는 것.
 

   

 

 

    

 

 

 

 

 

 

   나는 지금 전설의 시작을 손에 들고 있다. 

   이 첫문장을 쓰기 위해 얼마나 많은 문장들을 썼다가 지웠는지 모른다. '타인의 목'을 읽고 매그레의 매력에 빠졌고 더 많은 매그레의 작품을 보게되기를 기다린지가 벌써 십여년을 훌쩍 넘었다. 그래서 다시금 찾아온 매그레가 너무도 반갑고 또한 이 매그레가 세계문학사에 남긴 커다란 족적에도 걸맞게 첫문장을 시작하고 싶었다. 하지만 좀처럼 따라와주지 않는 머리. 영국의 시인 워즈워드는 당신이 알고 있는 언어의 크기가 바로 당신이 가진 세계의 크기라고 말했었는데 아... 내 세계가 이다지도 협소했단 말인가... 

   아무튼, 손바닥에 침을 뱉어 그것을 튀겨 방향을 정하는 심정으로 일단 첫문장을 저렇게 써두고, 오매불망 십여년의 기다림이 결실을 맺어 이제 뚜렷한 존재감으로 이것이 꿈이 아님을 말하는 매그레 시리즈의 데뷔작 '수상한 라트비아인'을 넘겨본다. 

  혹시 유명한 명탐정들이 어떻게 등장하는지 생각해 본 적이 있으신지? 

  우리네 시대의 유명한 탐정들이라면 대표적으로 코난 도일의 셜록 홈즈, 아가사 크리스티의 엘큘 포와로 그리고 엘러리 퀸의 엘러리 퀸이 될 것인데 이들은 모두 소설 속 등장인물의 눈에 보여지는 것으로 처음 등장한다는 데 공통점이 있다. 그렇게 그들은 보여지는 대상, 관찰가능한 대상으로서 처음 나타난다. 물론 이것은 '퍼즐러' 그러니까 수수께끼의 해결이 주가 되는 추리소설에 있어서는 어쩔 수 없는 구성이기도 하다. 대부분 이러한 소설들은 거의 초인적인 두뇌 능력으로서 독자들에게 자신들의 매력을 어필하기에 그렇게 천재적인 자신들의 능력을 과시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사고과정을 숨길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독자들은 그들의 머리속으로 들어갈 수 없고 그저 바깥으로 물러난 구경꾼이 되어 명탐정이 펼쳐보이는 화려한 추리쇼를 구경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게 독자들은 명탐정에 종속적이며 그런 위치에서 독자들은 명탐정이 보여주는 세계에 대한 해석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밖에는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다. '퍼즐러'의 추리소설에서 독자들이 명탐정을 통해 바라보는 것은 '세계'이다. 이에 관해 세계적인 경제학자이기도 한 에른스트 만델이 자신이 좋아했던 추리소설들을 심층적으로 분석한 책 '즐거운 살인'에서 왜 하필이면 근대 이후에 '퍼즐러' 추리소설들이 널리 인기를 얻게 되었을까 파헤친 적이 있는데, 거기서 그는 그러한 추리소설들의 인기가 사실은 근대 이후의 혁신적인 교통과 통신의 발달로 세계가 급격히 팽창하게 됨으로서 이제 세계가 한 개인의 이해가능한 범위를 완전히 넘어서버렸다는 것과 관련이 있다고 말한다. 즉 이렇게 독자 개인의 이해영역을 넘어서버린 세계를 그래도 자신의 이해영역 안으로 끌어들이고 싶다는 무의식적 욕구가 바로 셜록 홈즈를 비롯한 수많은 명탐정의 인기를 불러왔다는 것이다. 만델의 말 그대로 '퍼즐러' 추리소설에서 독자들이 바라보는 것은 인간이 아닌 '세계'다. 그리고 거기서 명탐정의 수수께끼 해결은 불가해한 세계를 이해가능한 것으로 만들어주는 일에 다름아니다. 때문에 '퍼즐러' 추리소설들은 급격히 팽창하는 세계로 인해 불안해하던 독자들에게 안정감을 준다. 그래서 세계가 불안해지면 불안해질 수록 사람들은 마치 종교를 찾듯이(어떤 작가는 이러한 독자들의 열광을 메시아에 대한 열광과 흡사하다고도 말했다.) 추리소설들을 찾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흔히 '추리소설의 황금기'라고 불리는 1920년대에서 30년대를 생각하면 저절로 수긍이 될 것이다. 1차대전으로 야기된 사회적 혼란들과 공황 그리고 파시즘의 성장... 이렇게 세계 정세가 급변하던 시대였던 것이다. 

 

   심농의 매그레 데뷔작, '수상한 라트비아인'은 1931년 그러니까 그 황금기에 태어난 작품이다. 하지만 '퍼즐러'와는 전혀 다른 길을 걷는다. 그리고 그 길은 아무도 가지 않았던 그야말로 전인미답의 길이었기에 독보적이었다. 매그레가 가지는 그 독특성은 바로 매그레의 첫등장에서 부터 잘 나타난다. 

  매그레의 첫 등장은 이렇다. 

  기동 수사대의 매그레 반장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거무튀튀하니 굵직한 연통으로 천장과 연결되어 집무실 한복판을 차지하고 있는 주철 난로의 소음이 왠지 약해지고 있는 느낌이었다. 

  이렇게 매그레는 시작부터 전면에 나타난다. 그는 누군의 눈에 보여지는 대상이 아니다. 문장에서 잘 드러나듯이 바라보는 사람은 바로 그인 것이다. 그는 고개를 번쩍 들고 바라본다. 그는 더이상 객체가 아니다. 그는 바라보는 주체이다. 뒤이은 문장에서 그는 자신의 사무실 세계를 바라본다. 그리고 소음이 약해지고 있는 느낌이라고 말한다. 독자는 이제 '퍼즐러'에서 하듯이 탐정의 바깥에 있지 않다. 독자는 이제 탐정을 매개로 세계와 관계를 맺지 않는다. 그는 바로 탐정의 내부로 들어가며  바로 그와 혼연일체가 되어 세계와 관계를 맺는다. 그렇게 구경꾼이 아니라 매그레와 더불어 참여자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문장의 마지막 '느낌이었다.'라는 말처럼 보는 게 아니라 느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퍼즐러' 추리소설에서 있어서 독자에게 가장 중요했던 기관은 '눈'이었다. 독자들은 혹시라도 단서를 놓치지 않을까 싶어 잔뜩 눈에다 힘을 주어야 했다. 하지만 매그레가 새롭게 열어보이는 이 신천지에서는 더이상 '눈'은 중요한 기관이 아니다. 매그레에 의해서 이제 세계는 해석이 아닌 '이해'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해'의 가장 근원적인 정의라고 한다면 '타인의 자리에 서 보는 것'이 될 것이다. 완벽한 이해란 이해의 대상이 되어보지 않으면 불가능할테니까.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 대상의 자리에 서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때문에 우리는 오로지 상상력의 힘으로만 그 자리에 서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상상력의 원천이 되는 것이 바로 '느끼는 것' 즉 감성이다. 

  이렇게 그들의 FIRST LOOK에서는 그들이 독자에게 주고자 하는 것, 독자들이 그들에게 바라고자 하는 것들이 명확히 다른 것임을 똑똑히 드러낸다. 퍼즐러의 추리소설에서는 독자들이 점점 자신의 이해가능한 영역을 넘어 커져만 가는 세계에 대한 불안감을 해소시키기 위해서 그것들을 찾았다. 그렇다면 매그레의 경우엔 독자들이 무엇을 원했던 것일까? 매그레 시리즈는 전 세계 50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었고 5억권 이상 팔려나갔다고 한다.(이것은 심농 전체의 소설을 통합한 수치인지라 정확하지 않지만 심농에게 있어서 매그레 이외의 다른 작품들은 거의 매그레 만한 인기가 없었기 때문에 아마 그 중8 ~90%는 분명 매그레의 것이리라. 그렇게 감하고 본다고 해도 역시 어마어마한 판매량임엔 틀림없다.) 그러니까 정말로 많은 독자들이 국경을 넘어 시대를 넘어 매그레를 찾은 셈이다. 그렇다면 과연 그들은 매그레에서 무엇을 보았고 무엇을 얻었기 때문에 그토록 사랑했던 것일까? 물론 매그레는 '퍼즐러'가 주었던 것을 주지 않는다. 독자는 그의 소설에서 구경꾼이 아니라 참여자가 된다. 매그레와 함께 보고 느끼고 세상과 사람들을 경험하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서 그들은 언제나 예외없이 세상에서 소외되고 운명 앞에서 나약한 비참한 삶을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심농은 한 인간에서 자신이 매그레를 통해 보여주고 싶은 것은 어디까지나 '한 인간의 삶'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는 그 인간의 삶을 보다 더 잘 보여주기 위해 그 자신이 매그레와 언제나 일체가 되려고 노력한다고도 했다. 그렇게 심농은 한 인간의 삶을 독자들에게 펼쳐보이는 데 있어 아주 공을 들인다. 그래서인지 독자들은 그가 세공한 그 인간의 삶을 들여다 보면서 어쩐지 그가 꼭 그만의 삶은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 사람들의 삶은 아무리 다양하다고 해도 어느정도는 보편성을 띠게 마련이다. 그래서 한 인간의 삶을 제대로 잘 구현하면 독자들은 어느 누구든 그의 삶에서 자신의 삶과 닮은 부분을 발견하게 된다. 소설에는 그런 호소력이 있다. 신경숙 작가의 '엄마를 부탁해'가 어느 특정한 주인공 개인의 엄마의 일을 그리고 있지만 그것을 읽은 사람들은 자신의 엄마를 떠올리는 것 처럼 말이다. 따라서 매그레를 읽는 독자들은 거기 구현된 한 인간의 삶이 사실은 자신의 삶과 그리 다르지 않음을 깨닫는다. 자신이 자신의 삶을 살면서 남몰래 느꼈던 비애감이나 우울들이 그렇게 다른 누군가에게 투영된 흔적을 본다. 그리고 독자는 생각한다. 그래 나만이 이런 아픔을 가지고 사는 것이 아니었구나, 이 세상에 다른 누구도 나와 똑같은 고민 나와 똑같은 아픔을 느끼며 살고 있었구나 하는 걸. 더우기 매그레는 그러한 한 인간의 삶에 깊은 이해와 연민의 시선마저 던진다. 매그레는 절대 법대로 처벌하는 법이 없다. 그가 한 인간의 비극적인 생을 마주할 때 그는 절대로 경찰관으로 행동하지 않는다. 그는 다만 보통의 인간으로서, 그 비극적인 삶의 모습을 가까이서 바라보고 이해한 그냥 평범한 사람으로서 행동한다. 상처입은 아기사슴을 그저 가슴에 안아줄 뿐이 어린 아이 처럼... 매그레는 그렇게 위안을 준다. '힘들었지?'하며 떨리는 어깨를 토닥여준다. 바로 그러한 것을 매그레가 주기 때문에 지금도 그렇게 많은 독자들이 이 세상 어디에선가 여전히 매그레를 벗하고 있는 것이다. 

 

  매그레는 단순한 추리소설이 아니다. 당신이 여기서 읽는 것은 그냥 그저 그런 남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당신이 여기서 읽는 것은 바로 당신 자신의 이야기이다. 매그레의 첫 등장은 바로 이것을 우리에게 분명히 알려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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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분야의 주목할만한 신간 도서를 보내주세요

 

   시간이 정말 빨리 흐르는듯 하다.  

   신간평가단 시작을 바로 엊그제한 것만 같은데 벌써 두번째 신간 추천이 돌아왔다. 

   거기다 벌써 내일이 추천 마감일이다. 얼른 밀린 리뷰 올리고 4월 신간들을 검색한다. 

   이번엔 제법 읽고 싶은 책들이 많이 눈에 띈다. 이것도 손에 들어보고 저것도 손에 들어보고 

   하다가 결국 이 다섯 권을 선택했다. 

    

   그, 첫번째는 

    

  콜럼 토빈의 '브루클린'이다. 

  콜럼 토빈 하면 역시 헨리 제임스의 전기 형식을 띤 소설  '거 장'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실제 헨리 제임스가 썼다고  해도 무방할 만큼 그의 내면을 정말 훌륭하게 복원해 내었다는 평가를 받았던 작품이다. 그만큼 콜럼 토빈은 심리적 통찰에 있어서 대가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브루클린'은 이민자를 다룬다. 이민자라면 무엇보다도 낯선 언어와 낯선 곳 그리고 낯선 문화에 대한 심리적 방황이 주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이민자의 내면을 그리는 데 있어 콜럼 토빈 만큼 제격인 작가는 또 없을 것이다. 그래서 이 소설이 정말 기대가 된다. 숀탠이 그림책 '도착'에서 기형적인 문양과 그림으로서 이민자의 내면 풍경을 그려냈듯이 콜럼 토빈은 어떤 언어로서 그 내면의 풍경을 펼쳐보일지 정말 기대가 된다.

 

 

  

  하인라인의 이 소설은 사실 아주 옛날에 해문 SF 문고로 한번 출간된 적이 있었다. 그 때는 제목이 '우주방랑도시'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새로운 별로 떠난 우주 이민 선단이 그만 세월이 너무도 오래 흘러 이제 거기 사람들중 아무도 자기가 있는 곳이 우주선인 줄 알지 못하고 그저 하나의 세계인양 살아간다는 이야기다. 그렇게 그들은 고향도 목적도 잊은 우주의 고아가 된 것이다. 최근에 나왔던 SF 영화 '팬도럼'도 공식적으로 밝혔는지는 모르겠는데 사실은 여기서 모티브를 따온 영화이다. 발간 당시는 별로 영향을 미치지 못했으나 영화 '팬도럼'에서 보듯이 최근 서서히 그 영향력을 미쳐가고 있다. 어린 시절 추억속의 책이기도 하여 추천해 본다.

 

 

 

 1987년 부커상 수상작이다. 

 작품의 명성은 익히 들어왔었는데 드디어 확인할 기회가 생겼다. 종군기자이며 역사가였던 한 여성의 임종 직전에서 시작되는 이 소설은 그렇게 생애를 돌아보는 그녀의 회고담으로 채워져있다. 사실을 발굴하는 역사가의 글쓰기와 허구를 재현하는 소설가로서의 글쓰기가 씨줄과 날줄이 되어 얼기설기 엮어지는 가운데 한 여성의 질곡스런 삶이 고스란히 담겨져 나온다. 모던라이브러리편집부가 20세기 여성소설 100선 중의 하나로 꼽은 작품이기도 해서 더욱 더 읽고 싶은 작품이다.

 

 

 

 

 

  레미제라블을 읽은 이후로 프랑스 대혁명에 관한 소설들은 언제나 관심의 대상이었다. 아나톨 프랑스의 이 소설도 그렇게 프랑스 대혁명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한 영혼이 혁명과정중에서 점점 비정한 냉혈한으로 변모해가는 과정을 그린다. 인간을 전혀 신뢰하지 않았던 지독한 회의주의자 아나톨 프랑스가 신분을 넘어 인간의 가치를 널리 부르짖었던 프랑스 대혁명을 어떻게 바라보았을지 정말 궁금하다.

 

 

 

 

                  

   경향신문에서 이 책에 대한 소개를 보았을 때 부터 읽고 싶었던 소설이다. '제노비스 신드롬'을 낳았던 그 제노비스 살인사건을 다룬 소설이라니 호기심이 동하지 않을 수 없다. 무엇보다 점점 방관자들이 많아져만 가는 듯한 요즘을 생각하면 더더욱 읽어보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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