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호라이즌스, 새로운 지평을 향한 여정 - 명왕성을 처음으로 탐사한 사람들의 이야기
앨런 스턴.데이비드 그린스푼 지음, 김승욱 옮김, 황정아 해제 / 푸른숲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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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년 7월 14일.

 이 날은 태양계 탐사에 있어서 정말 뜻깊은 날이다. 왜냐하면 이 날, 비로소 인류가 태양계에 있는 행성 모두를 탐사했기 때문이다. 그 마지막 행성은 아쉽게도 지금은 그 지위를 잃어버린 명왕성. 그러나 이 별은 오직 명왕성 탐사만을 목적으로 한 뉴호라이즌스 호가 지구를 떠날 때까지만 해도 행성의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명왕성이 퇴출된 날은 뉴호라이즌스 호가 발사되는 날이었다. 어쨌든 우주 탐사에 관심 있는 이들에겐 잊을 수 없는 이벤트임은 분명하다. 아무래도 명왕성 탐사를 떠난 뉴호라이즌스 호에 대한 관심이 커질 수밖에 없다. 누가 어떻게 그 프로젝트를 준비했고 성공시켰는지 그 과정이 궁금해지는 것이다. 그런 이들에게 정말 좋은 책이 하나 나왔다. 그 프로젝트를 처음 입안했고 마침내 성공까지 시킨 앨런 스틴이 쓴 '뉴호라이즌스, 새로운 지평을 향한 여정'이 번역되어 나온 것이다. 



 앨런 스턴이 명왕성 탐사 계획을 추진한 것은 무려 1987년부터다. 그는 86년에 터진 비극적인 사건, 즉 첼린저 호가 공중 폭발된 사건에서 큰 충격을 받고 자기 삶 전체를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진다. 당시 NASA는 금성으로 보낼 마젤란 호 계획과 목성으로 보낼 갈릴레오 호 계획이 추진 중이었는데 아무도 명왕성 탐사는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거기에 생각이 미친 그는 자신이라도 나서서 명왕성 탐사 계획을 진행시켜야겠다고 생각했고 여론의 지지를 얻기 위해 뛰어난 학자들을 섭외하는 것에 나섰다. 그  때, NASA의 행성 탐사 계획은 여론의 지지도에 따라 많이 영향 받았기 때문이다. 앨런 스틴이 원하는 명석한 두뇌들이 많이 참여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왕성 탐사 계획은 늘 다른 행성 탐사 계획에 뒤쳐졌다. 너무나 멀고 크기도 작아 탐사에 별 이익이 없다고 여겨졌던 까닭이다. 앨런 스틴의 팀은 그렇지 않다는 걸 열심히 설득했고(그 이유는 책에서 아주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다.) 드디어 2001년 마침내 10년 평가 팀에 선정되어 명왕성 탐사 로켓을 설계, 제작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NASA의 예산은 한정되어 있었고 그 비용으로 어떻게 저 태양계 외곽에 위치한 명왕성까지 가게 할 수 있을 것인가가 큰 화두로 떠올랐다. 그들은 결국 보이저 호 무게의 약 절반인 350KG의 우주선을 만드는 것(실제 우주선의 무게는 400KG이 넘었지만)과 가급적 착륙이 아닌 지나가면서 탐사를 하는 것으로 결정을 한다. 여기에 앨런과 같은 팀은 로버트 파커 박사가 경로에 대해 아주 혁신적인 제안을 한다. 무게가 많이 줄어든 탓에 로켓이 목성까지 곧장 날아가는 것이 어려웠는데(목성의 중력을 이용해야 명왕성까지 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걸 가능하게 만드는 방법을 생각해 낸 것이다. 그건 먼저 로켓의 방향을 태양 쪽으로 돌려 금성과 지구의 중력을 이용해 목성까지 날아가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2006년 1월에 지구를 떠난 뉴호라이즌스 호는 많은 우여곡절 속에서 태어난 것이었다.


 '뉴호라이즌스, 새로운 지평을 향한 여정'은 그런 과정을 소상히 담는다. 소재가 소재이니만큼 어려운 말들이 잔뜩 나올 것 같겠지만 책은 이대로 영화로 만들어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될 정도로 이해가 쉽고 흥미진진하다. 우주 탐사가 어떻게 이뤄지는지, 그리고 명왕성에 대해 많이 알고 싶었다면 이 책만큼 그 기대를 충족시켜 주는 책은 또 없는 것 같다. 한 사람이 자신의 꿈을 실현시켜 나가는 장대한 드라마로도 읽힐 수 있기에 이런 논픽션을 좋아하는 이들에게도 꽤 좋은 선물이 되리라 믿는다.



뉴호라이즌스가 찍은 명왕성의 사진. 

인류는 이렇게 선명한 명왕성의 모습을 뉴호라이즌스 호 덕분에 처음 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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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디 - 우리 몸 안내서
빌 브라이슨 지음, 이한음 옮김 / 까치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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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기는 기회다'라는 말이 있다. 내 생각엔 몸에 대해서도 꽤 해당되는 말인 듯하다. 공기가 없어져봐야 그 소중함을 깨닫는 것처럼 우리의 몸 역시 아픔이라는 위기가 닥쳐오고 나서야 비로소 신경을 쓰고 관심을 쏟게 되니까 말이다. 다음엔 더 안정적이고 좋은 몸이 될 수 있도록. 


 여전히 진행중이며 언제 끝날지도 도저히 알 수 없는 코로나 19 사태는 적어도 내게 있어서는 건강의 소중함과 더불어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몸에 대해 잘 알아야겠다는 생각을 거듭 상기시켜 준, 그런 면에서 고마운 기회였다. 거기에 마침 좋은 안내자가 출현하기도 했다. '거의 모든 것의 역사'로 지루해 보이기만 했던 일상이란 세계의 모든 구석 구석이 저마다 깊은 내막이 서려 있음을 알려 이전과 전혀 다른 새로운 눈으로 나를 둘러싼 세계를 보게 만들었던 작가, 빌 브라이슨이 자신의 저력을 십분 발휘하여 몸에 대해 쓴 책을 들고 나왔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바디 : 우리 몸 안내서'란 책이다.


 하얀 색의 담백한 표지로 된 이 책은 내게 이제 곧 몸 속 여행을 떠나는 잠수정으로 보였다. 

 작가에 대한 신뢰가 차고도 넘쳤기에 나는 당장 하얀 잠수정의 승선 티켓을 끊었다. 푸짐한 몸집에 어울리는 푸근한 미소로 날 맞이하는 작가는 오늘의 가이드를 맡았다는 설명과 함께 악수를 정중히 청하더니 날 전망이 가장 좋은 일등석으로 안내했다. 그리고 기대하라는 뜻으로 살짝 윙크를 보낸 다음 운전석에 앉아서 시동을 걸고 천천히 잠수정을 우리의 몸 안으로 이동시켰다. 이윽고 그가 설명을 하려고 운전석 옆의 마이크 스위치를 켜는 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내 두 눈 앞으로 사람을 이루고 있는 원소들이 영화 '스타워즈'에서 한 솔로의 팰콘이 워프를 할 때 그러하듯 무수한 빛 알갱이가 되어 쏟아져 내렸다. 나는 집중을 위해 심호흡을 한 번 크게 하고 그가 설명하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기 위해 눈과 귀를 한껏 열었다.


 



 그렇게 나는 주석과 참조 문헌 목록 그리고 역자 후기를 빼면 장장 517 페이지에 이르는 인체 탐험 여행을 시작했다.  사람을 만드는 방법을 시작으로 '피부와 털'을 지나 '결말(여기서 결말이란 책의 결론 같은 것이 아니라 죽음, 노화, 폐경 등 우리 몸이 만날 수 있는 종말적인 상황에 대한 것을 이른다.)'에 이르기까지 도합 23 곳을 거치는 일정이었다. 아무래도 의학적인 건 어렵다는 선입견이 있어서 몸에 대한 것 역시 그 분야에 속하는 지라 머리 깨나 아픈 여행이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없진 않았다. 그러나 정말 문자 그대로 기우였다. 어려운 건 하나도 없었고 어찌나 설명을 잘 하는지 뭐든 다 귀에 쏙쏙 들어와 박혔던 것이다. 여전히 그는 박학다식했고 뇌, 머리, 입, 목, 심장, 신경, 소화기관 등등 그 어디에서건 그것에 대한 정보들을 이걸 어찌 다 알고 있을까 하는 말이 입에서 절로 나올 정도로 엄청나게 쏟아내었다. 


 당신은 뼈가 호르몬을 생산한다는 걸 알고 있었는가? 우리는 뼈가 단순히 몸을 지탱하는 정도의 일만 하고 있는 줄 알지만 그렇지 않았다. 뼈는 우리가 상상한 것 이상으로 많은 일을 하고 있었다. 혈구를 생산하는 것은 물론 화학물질을 저장도 하고 소리 또한 전달했다. 당신이 듣는 자기 목소리는 실은 모두 귀가 아니라 자신의 머리뼈가 울리면서 나는 소리인 것이다. 여기에 더하여 뼈는 오스테오칼신 호르몬까지 생산하는데 이것은 기억과 활력을 증진시킬 뿐만 아니라 남성의 생식력 증진에 기분 조절까지 하고 있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저 멍하시 서 있기만 하는 것처럼 보였던 뼈는 알고보니 그야말로 다재다능한 일꾼이었던 것이다. 또한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은 뒤로 오래도록 품었던 의문도 이 책 덕분에 풀리게 되었다. 그 의문은 바로 마들렌 과자에 관한 것이다. 소설에서 주인공 마르셀이 우연히 맡은 마들렌 과자 냄새 때문에 오래도록 잊고 있었던 유년 시절의 일을 갑자기 기억해내는 장면이 있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프랑스 판 표지.



 바로 후각이 기억을 불러 일으킨 것인데 나는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 무척 궁금했다. 그걸 책을 통해 마침내 알게 된 것이다. 신기하게도 후각은 오감 중 유일하게 시상하부를 거치지 않는다고 한다. 후각을 통해 취득한 정보는 곧장 후각 겉질로 가게 되는데, 그 후각 겉질은 기억 생성을 담당하는 해마 바로 가까이에 있다. 따라서 특별한 냄새는 과거에 그것을 맡았던 때의 기억을 홀연히 소환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 말한 것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나 또한 자주 혼동해서 썼던 심근경색과 심장정지의 차이점을 이 책을 통해 분명히 확인한 것과 같이 기존의 알았던 것도 새롭게 제대로 알게 되는 경우도 많았다. 추운 날이면 어김없이 줄줄 흐르는 콧물처럼 아주 일상적인 몸의 반응 또한 허파에서 나오는 따뜻한 공기와 콧구멍으로 들어오는 차가운 공기가 만나 응축되는 바람에 나오는 것이란 걸 체득하게 되었다.  사람이 달릴 때 다른 유인원들과 달리 머리가 흔들리지 않는 건 우리 머리 뒤쪽에 인간에게만 있는 목덜미 인대 덕분이라는 것도.


 이러다 보니 나는 자연스럽게 두 가지를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몸에 대해서 아는 건 불과 1%도 안된다는 것과 몸이라는 것이 이토록 많은 정보가 알알이 깃들어 있을 정도로 거의 우주에 맞먹을만큼 참으로 경이로는 장소라는 걸. 그는 다시 한 번 해내었다. '거의 모든 것의 역사'로 세계를 보는 내 눈을 일신(一新)했던 것처럼 '바디 : 우리 몸 안내서'를 통해 내 몸을 바라보는 내 눈을 일신(一新)한 것이다.


 덕분에 이제 내 눈엔 내 몸이 더이상 단순한 유기체로 보이지 않는다. 

 빌 브라이슨이 어떤 하나의 조직을 설명할 때, 그 조직만 말하지 않고 그와 관련된 건 뭐든, 질병과 그것을 전문적으로 연구한 사람이나 그 업적까지 통합하여 설명하듯(이 점은 과학자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 간 '거의 모든 것의 역사'와 비슷하다.) 내 몸 또한 그렇게 해야 그 전모가 제대로 밝혀질 수 있을 정도로 모든 조직이 내 몸은 모든 조직이 긴밀한 상호 작용 속에서 유기적으로 잘 통합된 총체(總體)였으니까. 마치 직립보행을 하게 되었기 때문에 인간의 머리와 목을 비롯한 많은 부위가 다른 영장류와 달라졌으며 두뇌를 활용하느라 몸에 더 많은 열이 발현하기에 다른 포유류와 달리 인간만이 피부에 털이 없게 되었듯이 말이다. 내 몸의 그 어떤 부분도 고립된 채로 남아 있는 게 없었고 아무리 미미한 것이라 하더라도 아무런 이유없이 존재하는 것도 없었다. 다 진화 과정 속에서 필요에 의해 형성된 것이었다. 왜 있는지 모를 속눈썹조차 실은 인류가 광범위한 상호 협력을 위한 방향으로 진화한 탓에 서로의 감정을 더 잘 전달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건 이 책을 통해 정말 처음 알았다.


 달리 보면, 달리 이해하게 된다. 

 똑같이 빌 브라이슨도 몸을 달리 보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거기서 일어나는 갖가지 양상들을 달리 헤아리도록 이끌었다. 통증이나 열 같은 부정적인 현상 또한 어떤 조직의 파손이라기 보다는 보존을 위해 뭔가 하고 있거나 해야 한다는 신호로 더 받아들여야 옳았다. 그 시야가 비단 몸에만 국한되는 것도 아니었다. 나와 다른 타자 또한 달리 가늠하게 만들었다. 왜냐하면 몸에 대해 알면 알수록 몸을 가지고 사람들을 이리저리 나누는 게 부질없어 보이는 까닭이다.


 특히 피부가 그렇다. 피부는 인종 차별을 낳는 대표적인 요인이다. 그러나 책에 따르면 우리의 피부색이란 자연적으로 결정된 게 아니라 농경 사회가 됨에 따라 임의적으로 가지게 된 것에 불과하다. 사람은 몸에 여러가지 좋은 일을 하는 비타민 D를 필수적으로 섭취해야 했는데 농경 생활을 하게 됨에따라 그 전에 채취나 수렵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비타민 D의 양이 자연히 적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농경 사회를 했던 인류들은 밝은 피부색을 갖게 되었다. 그것이 햇빛과 만나 더 많은 비타민 D를 만들어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피부색은 내가 사는 곳에 따라 가지게 된 것에 불과했다. 이런 걸 가지고 인종차별을 하다니,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가! 다시는 'BLACK LIVES MATTER!'라는 구호를 외치게 만든 사건들이 일어나선 안 될 것이다.



 [인류는 어떤 몸을 가졌던 다 같은 몸을 가진 동등한 하나라는 뜻으로 찍어 본 사진]



 이처럼 몸에 대해 산더미와 같은 정보를 담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몸이 가진 수수께끼가 완전히 다 풀린 것은 아니다. 아직도 밝히지 못한 미지의 영역이 우리 몸엔 여전히 많이 남아있는 것이다. 나이가 든 사람이라면 누구든 언젠가 근심거리가 되는 나이가 들수록 털이 점점 더 많이 빠지는 이유는 물론이고 주걱턱이 고민인 사람이라면 분명 한 번은 의문을 품어봄 직한, 왜 인간만이 턱을 가지고 있는가에 대한 것조차 규명되지 않았다. 우리 몸엔 인간이 탐침이 닿지 못하는 심연이 즐비하지만 그래도 이만큼이라도 알게 된 게 어디인가 하는 생각도 든다. 빌 브라이슨의 말에 따르면 인류가 자신의 몸 안에 무엇이 있는지 해부를 통해 본격적으로 들여다보기 시작한 것은 르네상스 시대가 지나고 나서라니까 말이다. 미국 드라마 제목 때문에 우리에게도 꽤 낯익을, 오래도록 의학의 기본 교재로 자리잡았던 '그레이의 해부학'이 출간 된 것도 겨우 1861년이다(그레이 혼자 쓴 것이 아니라 카터와 같이 썼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그런데 그레이가 째째한 인사라 카터에게 수익을 제대로 챙겨주지 않았을 거라는 소개가 재밌었다. 의학 분야에서 훌륭한 업적을 이뤘지만 인성이 좋지 못해 그걸 망치는 학자들도 많았다. 지성이 인성을 보증하지 않는다는 걸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된다.). 브라이슨의 책에 저장된 방대한 양의 지식들 대부분은 인류가 기껏해야 200년 남짓한 시간에 다 밝혀낸 것이란 의미다. 그러니 낙관하게 된다. 그 심연도 언젠가 밝혀질 것이라고. 그것도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빨리. 그렇게 되면 우린 더욱 더 내 몸과 타인들을 달리 보고 헤아리게 되리라.


 가득 심취해서 들었더니 어느새 종착역에 와 있었다. 이만한 분량의 책을 어쩌면 이렇게도 빨리 읽어버릴 수 있었을까? 내가 한 일인데도 믿기지 않아 난 멀뚱한 눈으로 빌 브라이슨이 조용이 미소짓고 있는 얼굴만 쳐다 보았다. 오른손으로 내 어깨를 두드리며 어떻게 여행은 만족하셨는지 몯는 브라이슨에게 난 오른 손 엄지손가락을 올리며 좋았다고 연신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내 배를 둥그렇게 쓰다듬었다. 지적 포만감으로 그득하다는 의미로. 부디 브라이슨이 자기 배를 놀리는 것으로 오해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경험한 사람은 다 알 것이다. 지적 쾌감만큼 사람을 중독시키는 것도 또 없다는 걸. 한 번 그걸 제대로 맛보게 되면 끝없이 갈구하게 마련이다. 계속해서 충족되기를. 여기엔 한계효용체감의 법칙이 작동하지 않는다. 어디 또 나를 놀라게 할 새로운 지식 없나 하면서 부릅 뜬 눈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리게 만드는 지독한 허기만 존재할 뿐. 물론 거기에도 간조(干潮)의 시간은 어김없이 닥쳐온다. 책이 그 충족을 채워주지 못해 지적 쾌감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버리는 때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바디 : 우리 몸의 안내서'는 그렇지 않다. 오직 만조(滿潮)의 시간만 있을 뿐이다. 혹시 당신도 나처럼 지적 쾌감을 추구하고 있었다면 기꺼이 이 책을 추천한다. 페이지마다 가득 밀려와 나의 내부를 채우는 몸에 대한 새로운 지식들 속에서 당신도 분명 나와 똑같은 걸 경험하게 되리라. 그걸 사도 바울이 고린도후서에서 말한 것을 살짝 바꿔 이렇게도 말해보련다.


 '그런즉 누구든지 '바디 : 우리 몸의 안내서'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내가 빌 브라이슨에게 할 수 있는 최고의 찬사다. 그가 내 배를 쓰다듬는 걸 오해하여 불쾌하였다면 제발 이것으로 용서해주기를. 

 당신의 다음 가이드도 받고 싶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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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죄의 죄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92
하야미 가즈마사 지음, 박승후 옮김 / 비채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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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구 선수 출신이라는 독특한 이력을 지닌 일본 작가, 하야미 가즈마사. 이번에 그가 쓴 '무죄의 죄'가 출간되었다. 68회 일본추리작가협회상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입소문만으로 50만부가 팔렸다고 한다. 이만하면 비평과 대중적 인기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았다고 해도 그리 과언은 아닌 듯하다. 제목에서 이 소설은 미스터리 장르에 속한다는 걸 은근히 내비치고 있는데 온전히 거기에만 할애되어 있는 건 아니다. 절반은 삶이 지는 씁슬한 비애감과 다소의 뭉클함이 느껴지는, 인간 드라마라고 부를만한 것이 차지하고 있다. 나는 이 소설을 그 둘의 교집합으로 이해하며 그 각각이 하나의 질문을 근간으로 하여 구축되어 있다고 본다.


 그 질문이란, 하나는 '태어났으니 살아야 하나?'이고 다른 하나는 '사형제도는 과연 존치할만한 것인가?'이다. 

전자의 질문은 인간 드라마 부분이, 후자의 질문은 미스터리 부분이 해답을 찾아간다.



 책은 모두 네 개의 부분으로 이뤄져 있다. 시작의 프롤로그와 끝의 에필로그 그리고 본편이 되는 1부('사건 전야')와 2부('판결 이후')다. 

 소설의 중심인물은 이제 24세가 된 여성, 다나카 유키노. 그는 방화로 임산부와 그녀의 쌍둥이 두 딸을 살해한 죄로 사형을 언도받은 사형수다. 시작에서 우리는 그녀가 막 사형 집행을 당할 순간에 있음을 본다. 프롤로그에선 법정에서 피고인은 인생을 건 연기를 한다는 생각으로 취미로 재판 방청을 즐기다 급기야 교도관까지 된 여성 사도야마의 눈으로 다나카 유키노와 그녀가 저지른 사건 정황이 소개된다. 소설을 마무리하는 에필로그도 그녀가 화자를 맡는다. 다나카 유키노의 사건은 단순한 것으로 취급되었다. 그녀는 자신을 버린 남자 게이스케를 집요하게 스토킹 했으며, 


거기서 우리는 다나카 유키노가 범죄를 저지르기 전에 자신을 버린 남자 게이스케를 집요하게 스토킹 했으며 열일곱 살에 호스티스로 일한 어머니의 사생아로 태어나 새아버지에게서 학대를 받았고 강도 치사로 아동자립지원시설에 입소한 전력이 있다는 걸 듣게 된다. 그런 불우한 과거와 끔찍한 범죄 때문에 사회는 그녀를 서슴없이 '괴물'로 부르고 사람들은 너무나 쉽게 '저런 쓰레기는 빨리 죽여야 해'(p. 27)'라고 말한다. 그렇게 이 사건도, 사람도 사도야마가 술집에서 들었던 어떤 낯선 남자의 말처럼 '딱 그래 보이네'(p. 33)하는 한 문장으로 모두 정리되는 것처럼 보였다. 처음에는.


'사건 전야'라는 제목을 가진 1부는 이런 생각이 오해에 불과하다는 걸 깨닫는 여정이다.

여기서는 마치 미나토 가나에의 소설처럼 다나카 유키노와 관계가 있는 주변 인물들의 육성 고백을 통해 하나하나 계단을 올라가듯 유키노라는 인물과 그 범행의 진실을 보여준다. 열일곱 살에 호스티스로 일했다는 것 때문에 무책임한 엄마로 낙인찍힌 유키노의 어머니 히카루는 '단 한 사람에게라도 큰 사랑을 받으면 그 아이는 제대로 된 삶을 살 수 있다'는 말로 히카루가 유키노를 낙태하는 걸 그만두게 한 산부인과 의사 단게의 고백으로 오히려 자식에게 책임을 다하려고 애쓴 정반대의 인물로 밝혀지고 법정에서 '태어나서 죄송합니다'란 말로 모두를 놀라게 한 유키노 역시 배다른 언니 요코의 고백을 통해 백 살까지 살기를 꿈꿨던 천진난만하고 착한 소녀에 불과헸다는 게 드러난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유키노가 프롤로그에서 봤던 것과 전혀 다른 존재였다는 것, 그렇게 사람도, 사건도 모두 '딱 그래 보이네'라는 말로 단정이 결단코 불가능한 복잡한 이면이 배여있음을 알게된다. 그녀는 당연히 사형을 받아야 할 죄를 저지른 게 아니라 어쩌면 정말로 아무 죄 없이, 제목처럼 무죄라는 죄 때문에 거기 갇혀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사실 또한.


 '판결 이후'라는 제목을 가진 2부는 그런 무죄의 죄 때문에 갇혀 있는 유키노를 사형에서 구하기 위한 여정이다.

 1부, 요코의 기억에서 잠깐 소개된 유키노의 어릴 적 친구 단게 쇼와 신이치가 여기서 주역을 맡는다. 다나카 유키노를 버린 게이스케의 친구로 등장해 게이스케와 다나카 유키노의 관계가 세간에 알려진 것과 전혀 다르다는 것을 보여준 핫타 사토리 또한 등장한다. 1부가 인간 드라마적 성격이 강하다면 2부는 미스터리 성격이 강하다. 여기서 다나카 유키노가 진범이 아닐 수 있다는 가능성이 제기되기 때문이다. 친구였지만 다나카 유키노가 이기적인 외할머니 다나카 미치코에게 끌려가 강제로 이별한 뒤로 오래도록 못 봤지만 단게 쇼가 매스컴이 묘사하고 있는 다나카 유키노의 모습을 전혀 믿지 않았던 것은 기억 속 그녀가 진짜 모습이라고 신뢰하기 때문이다. 그는 다나카 유키노와 아무런 개인적 접점이 없는 이들이 자기식대로 편집하고 해석하며 덧칠한 일반론을 따르기 보다는 소중한 추억을 함께 나웠던 어린 마음 속에 와 닿았던 그녀의 말과 마음을 따른다. 지극히 개인적인 것에 기대어 커다란 먹구름으로 자라난 세간의 정의(定義)를 관통하는 것이다. 그건 신이치, 핫타도 마찬가지다. 이쯤에서 우리는 왜 작가가 하필이면 주변 인물들의 눈을 통해서 다나카 유키노라는 인물상을 구성해 나가고 있는지 그 이유를 짐작한다. 바로 그 개인적인 접점이 중요하다는 걸. 단게와 요코, 핫타와 쇼 그리고 신이치와 같이 내가 판단하려는 상대와 함께 한 눅진한 경험이 없다면 남들이 일으키는 풍문에 따라 덮어놓고 판단해선 안된다는 걸 강조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작가가 왜 한 챕터를 시작할 때 다나카 유키노에게 사형을 언도한 판결문의 한 부분을 제목으로 인용하는 이유 또한 알게 된다.

그 판결문은 '딱 그래 보이네'에 따라 형성된 일반론의 집약이다. 그러나 그 아래의 내용들은 그걸 차례로 배반한다. 우리는 아주 잘 알게 된다. 판결문은 아무런 진실을 담고 있지 않으며 오직 편견과 무지 그리고 오해와 무책임의 덩어리라는 것을. 이런 것을 근거로 내려지는 사형을 우리는 과연 정당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여기서 두 번째 질문, '사형은 과연 존치할만한 것인가?'의 대답이 자연스럽게 나오게 된다. 그걸 내리는 판사는 피고와 아무런 개인적인 접점이 없다. 오직 제출된 증거와 변론만이 전부다. 판관은 그래야 객관적일 수 있다고 말하겠지만 만일 그 근거가 되는 것들이 다나카 유키노의 경우처럼 잘못되었다면? 사형은 형법이 가진 최고의 형벌이므로 그것을 언도하는데 있어선 그 무게에 걸맞는 신중함이 요구된다. 원죄, 즉 자신이 짓지도 않은 죄 때문에 사형을 당하는 일이 없도록 하려면 피고의 모든 인격과 삶을 철저히 검증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우리는 그것을 할 수 없다. 경우에 따라선 쇼와 신이치처럼 아주 개인적이거나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경험이 있고서야 비로소 알 수 있는 진실된 초상도 있기 때문이다. 


 소설이 시작을 여는 사도야마도 그렇고, 쇼와 신이치도 그렇고, 블로그를 통해 개인적으로 사건의 진실을 알리고 있는 핫타도 그렇고 계속 편지라는 형태의 개인적인 글로 다나카 유키노와 관계를 맺게하는 이유가 뭘까? 매스컴 앞에선 오직 괴물의 면모만 보였던 다나카 유키노가 참된 자신의 모습을 비로소 열어보이는 것도 그런 개인적인 편지들인데 과연 그 이유는 뭘까? 굳이 답할 필요가 있을까 싶다.


진실은 급하게 먹어선 도저히 알 수가 없고 마치 뜸을 들여야 밥이 익는 것처럼 깊고도 오래된 경험의 공유가 있고서야 마침내 드러난다는 말 외엔.


우리는 그렇기에 섣부른 추정이 불러 올 화를 막기 위해서라도 사형제도를 폐지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인간이 가진 한계로 인해서 무죄의 죄가 언제든 생길 수 있으므로...


이건 비단 사형 문제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삶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이로써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은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우리는 자신의 삶을 사랑하지 않아서 어서 빨리 죽고싶다는 열망밖에 없는 다나카 유키노를 만난다. 그녀는 왜 그런 절망만을 안게 되었던가? 그녀는 단게가 말했던 것처럼 단 한 사람이라도 자신을 사랑해주었으면 이러지 않았을 것이라 한다. 그런데 우리는 그녀를 위해 헌신하는 쇼와 신이치, 핫타를 본다. 전면에 나서지 않았지만 늘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요코와 오조네 리코도 본다. 그녀의 바람은 충족되었다. 그러나 자신의 의지만 있으면 살 방도가 열릴 수 있는데도 유키노는 그러지 않는다. 이유는 단 하나다. 그러한 것들이 그녀에게 전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린 왕자에선 '사막이 아름다운 건 어딘가 보이지 않는 우물이 있기 때문이야'라고 말했지만 유키노에게 보이는 건 사막 뿐이었다. 편지를 통해 작은 반딧불 같은 희망이 보이기도 했지만 그건 사막을 밝히기엔 너무나 모자라 보였다. 적어도 그녀에게는. 그래서 걸음을 멈춰버린 것이다. 만일 그 작은 반딧불을 그저 미력하다고 여기지 않고 더 큰 것으로 봤었다면 어땠을까? 그것을 곧 적만한 어둠이 올 것이라는 황혼이 아니라 밝은 아침이 찾아오리라는 여명의 빛으로 인지했었다면 결말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그녀는 왜 쇼와 신이치가 그랬던 것처럼 어린 시절에 가장 좋은 추억을 공유했던 친구들을 신뢰하지 않았을까? 그녀는 왜 사회가 멋대로 만든 규정을 스스로 받아들여버렸을까? 너무 단순한 판단인지도 모르겠지만 사회가 다나카 유키노를 바라봤던 것처럼 유키노 역시 삶을 그렇게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난 생각한다.


삶에 정말 도움이 되는 진실들은 그저 감처럼 툭 떨어지지 않는다. 앞서도 말했듯 깊고도 오랜 숙성이 필요하다. 물론 나는 한 사람의 인생을 이렇다 저렇다 평가할만한 깜냥은 안된다. 자격도 없다. 다만 이런 말만 남겨두고 싶을 뿐이다. 어쩌면 절망은 우리의 성급함이 자아낼지도 모른다는 것. 조금은 긴 호흡으로 삶을 바라봐야 한다는 것. 사형에 대한 것도, 우리가 만나는 허다한 사람과 사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처음 만나보는 작가, 하야미 가즈마사의 '무죄의 죄'는 이런 문장들로 응집될 파문들을 계속 일으키는 작품이었다. 마지막 페이지를 넘긴 다음에도 오래도록.


이 소설엔 놀라운 반전이 있고, 그 반전이 충분히 납득되도록 단서도 다 깔아두고 있는데 스포일러가 되기에 그 부분에 대한 것은 일절 밝히지 않는 것으로 한다. 이걸 쓰는 이유는 그런 반전 때문에 미스터리 물로써도 꽤 읽을만한 작품이라는 걸 알리기 위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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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적 1~2 세트 - 전2권
스티븐 킹.피터 스트라우브 지음, 김순희 옮김 / 황금가지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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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디어 스티븐 킹의 '부적'을 읽었다. 

 스티븐 킹의 이름이 가장 화려하게 빛났던 80년대의 대표작. 예전에 나왔으나 절판되어 뒤늦게 스티븐 킹의 소설들을 좋아하게 된 나로서는 못 보게 되어 아쉬음이 컸었는데 이렇게 황금가지에서 새롭게 발간한 것이다. 표지 디자인도 모두 2권을 오렌지와 하얀색으로 대비시켰는데 깔끔해서 마음에 든다. 물론 '부적'은 스티븐 킹 혼자 쓴 것은 아니고 '고스트 스토리'로 유명한 작가 피터 스트라우브와 같이 썼다. 스티븐 킹이 다른 작가와 협업을 한 것은 이 작품이 처음. 함께 쓰게 된 사연은 이렇다고 한다. 1977년, 스티븐 킹은 가족을 데리고 영국의 런던으로 건너 간 적이 있다. 거기서 피터 스트라우브 부부를 처음 만났는데 서로 마음이 맞아 곧 아주 친해졌고 가족끼리 자주 만나 놀았다고 한다. '부적'에 주인공 잭 가족과 잭 아버지 친구인 모건 가족이 여름마다 시브룩 섬에서 함께 어울렸다고 나오는데, 이건 스티븐 킹과 피터 스트라우브의 가족이 서로 어울려 놀았던 것에서 따온 것 같다. 그러나 함께 '부적'을 쓰자는 이야기는 런던에서 나오지 않았다. 석 달 후 스티븐 킹 가족은 다시 미국으로 이사했는데, 이번엔 피터 스트라우브가 스티븐 킹을 찾아서 가족을 모두 데리고 그곳으로 건너갔다. 두 작가의 우정이 얼마나 커졌는지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그 미국에서 둘은 같이 '부적'을 쓰기로 한다.



 

[어쩌면 너무나 친해서 서로를 자신의 분신으로 여겼기에

 '트위너'란 존재를 상상할 수 있었던 건 아니었을까?]




 '부적'은 '다크 타워'와 더불어 스티븐 킹의 가장 대표적인 환상 소설이라 할 수 있다. 둘이 비슷한 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다크 타워'도 현실과 평행 차원의 다른 세계를 넘나드는 이야기인데, '부적' 역시 그러하니까.(어쩌면 그래서 스티븐 킹은 이 둘의 세계를 합쳐버린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중에 밝히겠지만 '부적'에는 '다크 타워'의 주인공 건슬링어의 트위너가 등장하기도 한다.) '부적'에는 '테러토리'라는 세계가 등장한다. 지구와 다른 차원의 곳으로 여왕이 있고 귀족이 있는 중세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장소다. 거기엔 평행 차원의 세계가 그러하듯이 지구에 사는 인간들과 똑같은 인간들이 존재하는데, 그런 이들을 '트위너'라 부른다. 쉽게 말해, 우리와 똑같지만 VERSION만 다른, 일종의 복사본인 것이다.(평행세계론이 그러하듯이, 지구의 인간과 트위너는 운명을 같이 한다. 어떤 때는 무의식적으로 둘이 같은 말을 하기도 하는데, 당신도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리고 있다면 테러토리의 트위너가 말하고 있기 때문인 지도 모른다. 그런데 여기에도 예외가 있다. 아주 희박한 것인데 테러토리의 트위너가 죽었어도 아무 영향을 안 받는 존재가 있는 것이다. 잭 소여가 그러하다. 그래서 그는 특별하다. 이건 결말에서 아주 중요한 사항이 된다. 왜 아무나 부적을 가질 수 없는 지와 관련하여) 당연하게도 아무나 이동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아주 소수의 사람만 그럴 수 있는데 어떤 이는 그 능력을 이용해 두 세계만이 아니라 평행 세계 전체를 지배하려는 야욕을 부리기도 한다.




 물론 우리의 주인공 잭 소여도 그 중 하나다. 

 소설의 시작에서 그의 삶은 외롭고 힘들다. 잭 소여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아빠와 엄마인데, 아빠는 죽고 엄마는 암에 걸렸기 때문이다. 잭은 지금 엄마와 아르카디아 해변에 있는 알람브라 호텔(스티븐 킹의 소설 '토미노커'에도 나오는 곳이다.)에 있다. 엄마가 데리고 왔는데 그 이유는 아빠의 친구이자 동업자인 모건이 엄마에게 남편이 세운 회사 경영권을 포기하라고 무섭게 강요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삼중고 속에서 우울의 밀물에 쓸려다니기만 하던 어느 날, 그는 우연히 스피디 파커란 흑인 노인(바로 이 사람이 '다크 타워의 주인공 건슬링어의 트위너다.)을 만난다. 잭을 한사코 '방랑자 잭'이라 부르는 그 노인은 '테러토리'와 엄마에 대한 놀라운 비밀을 들려주며 엄마를 구하고 싶으면 '테러토리'로 건너 가 부적을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 부적이란 엄청난 힘을 가진 물건으로, 이 '부적' 때문에 불순한 무리들이 평행 세계 전체 정복이라는 야욕을 가지는 것이다.



[미국 판 인물 소개 삽화로 나온 잭 소여의 일러스트]




 이러한 이동을 위해 스피디 노인은 암녹색 액체가 든 병을 준다. 이걸 마시면 순식간에 테러토리로 갈 수 있다는 것이다(이 액체 때문에 차원 이동 능력이 없는 트위너나 일반인도 테러토리와 지구 사이를 왕래할 수 있다. 그래서 테러토리의 트위너들이 모건의 명령을 받아 잭을 잡기 위해 지구로 오기도 한다. 그 때 그들은 꼭 지구에 있는 자신의 분신들에 빙의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면서 노인은 말한다. 뛰어난 사람은 액체의 도움 없이 마음의 힘만으로도 갈 수 있지만. 처음 이걸 읽었을 땐 복선인 줄 몰랐다. 놀랍게도 정말 그런 걸 할 수 있는 이들이 있었다. 그가 바로 잭의 아버지였다. 그리고 아빠의 친구, 모건. 둘은 '테러토리'를 알고 있었고 자유로이 왕래했다. 모건의 '테러토리' 트위너는 여왕마저 위협할 정도의 막강한 권력을 가진 귀족. 그는 여왕이 아주 깊은 병을 앓자 그걸 기회로 테러토리를 자신의 것으로 삼으려 한다. 그러니까 잭의 '테러토리'에서의 여정도 몹시 위험한 것이다. 모건과 그의 부하들 트위너가 '테로토리'를 장악한 상태이니. 물론 저자를 생각한다면 자연스러운 전개가 아닐 수 없다. 공포의 제왕 스티븐 킹의 이름 아래 핑크 만발  폭신폭신한 로드 무비를 기대했단 말인가!


 곳곳에서 불길함과 음산함 그리고 죽음의 위햡이 도사리는 여정은 잭에겐 미안하지만 '테러토리'만의 것은 아니다. 지구의 여행은 그보다 더 비참하고 음험하다. 때로 잭은 지구에서 테러토리로 탈출하기도 한다. 우연히 히치하이킹을 한 차의 운전자가 소아성애자로 밝혀지는가 하면 고작 12살의 몸으로 오랫동안(잭이 작품 속에서 집을 떠나 여행하는 기간은 무려 6개월이다!) 정처없이 방황하다 보니 경찰에게 부랑자로 체포 당하는 일까지 벌어진다. 2권에서 우리는 더욱 분명히 확인하게 된다. 아이들에게 있어 미국이란 나라가 '테러토리' 보다 더 가혹하기만 한 곳이란 걸. '부적'에서 잭 소여를 영혼의 한 방울까지 끝도 없이 착취(오틀리 주점)할 뿐만 아니라 목숨마저 잃어버릴 지도 모를 정도로 내모는 곳(선라이트)은 다름아닌 미국인 것이다.


 이런 점에 눈길이 가다보면 이 책이 발표된 연도가 자못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이 책이 발표된 것은 1984년. 한 마디로 80년대 초에 집필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사정을 의식하면 소설의 인물들과 여러 장치들이 꽤 재미난 의미를 갖는다. 뉴잉글랜드에서 켈리포니아에 이르는 현실 미국 속 잭의 행로는 더욱 그렇다. 어떤 의미가 나타나기에 사족이 이렇게 긴가 하고 타박하실 분들을 위해 미리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이렇다. '부적'은 80년대 레이건 행정부에 의해 이뤄진 레이거노믹스에 대한 신랄하고 무자비한 비판이다. 그 행정부를 낳은 신보수주의에 대한 가장 통렬한 공격이다. '부적'은 단순한 환상소설이 아니다. 그러한 외관을 가지고 있지만 실은 그 속에 거침없는 현실 사회 비판의 칼날을 간직하고 있다. 그가 왜 주인공에게 톰 소여의 이름과 같은 잭 소여란 이름을 주었는가 그리고 왜 여정을 그 톰 소여가 나왔던 '허클베리 핀'의 여정을 오마쥬하듯 비슷하게 형성했는가 하는 것도 다 그와 관련있다. 이 작품을 그저 재미를 위한 대중 소설로 생각하고 허투루 보지 말았으면 좋겠다. 이는 설정에 꽤 공을 들인 작품이다. 공포 소설의 두 대가가 협력하여 제대로 시너지 효과가 발생한 소설인 것이다.


[84년 초판본 커버. 아마도 부적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듯.]



 왜 이리 호들갑인가? 또 나무라실 것 같다. 이제 그 이유를 당신의 시간을 절약한다는 의미에서 최대한 간략하게 설명해 보겠다.


 80년대 초반 미국 경제는 중요한 변화의 기로에 서 있었다. 그동안 미국 경제의 중추를 떠받치던 러스트 벨트가 몰락하고 플로리다와 켈리포니아가 새로운 강자로 부흥한 것이다. 당시 미국은 점점 성장해 나가는 그들을 선 벨트(SUN BELT)라 불렀다. 그 때의 켈리포니아 인구는 뉴욕의 인구를 초월할 정도로 컸었다. 이제 아셨을 것이다. 잭의 여정은 이 변화의 흐름을 그대로 답보하고 있다는 것을. 잭 소여는 그렇게 러스트 벨트에서 선 벨트로 나아가는 것이다. 잭 소여가 부적을 얻기 위한 최종 목적지 아긴코트 호텔은 바로 켈리포니아에 있다.


 1권에서 모건의 오른팔인 오스먼드에게 채찍을 맞고 테러토리에서 지구로 돌아 온 잭은 거기서부터 현실 미국의 여정을 시작한다. 처음 만나는 곳은 뉴욕 주 서부에 있는 오틀리 주점이다. 잭은 거기서 싸구려 임금을 받으며 열심히 일을 하지만 주인 스모키 업다이크에게서 사람 대접은 조금도 못 받는다. 쥐꼬리만한 임금마저 탈탈 털릴 정도로 착취나 당할 뿐이다. 그 오틀리 주점을 가면서 잭이 보는 광경이 인상적이다.


 공장 유리창은 거의 다 깨졌고 시내에도 유리창에 널빤지를 덧대어 놓은 집들이 있었다. 울타리 친 콘크리트 마당에 산더미 같은 쓰레기가 쌓여 있고 종이 쓰레기도 펄럭거리고 있었다. 고급주택들도 관리를 제대로 안 한 듯 돌출현관이 주저앉아 있거나 페인트도 여러 군데 벗겨져 있었다. 팔 수도 없는 자동차들로 가득한 중고차 전시장의 주인들일지도 몰랐다.(1권, p. 260)




['부적' 미국판 커버 중 일부]



 한 마디로 몰락할 대로 몰락한 폐허의 풍경이다. 그런데 이 시기 미국의 러스트 벨트에선 흔한 풍경이었다. 제조업의 몰락으로 버려진 공장들, 실업으로 생존 위기로 내몰린 블루 칼라 노동자들이 지천으로 깔려 있었다. 오틀리 주점에서의 잭 소여는 이런 노동자들을 대변하고 있다. 잭은 거기서 탈출했지만 사정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그는 다른 이들이 배척부터 하는 부랑자가 될 뿐이다. 여기서 그는 테러토리에서 만나 함께 지구로 온 늑대인간 울프와 함께 하는데, 이 울프의 외모 때문에 그들은 사람들에게 더욱 따돌림을 당한다. 이러한 상황은 레이건에 의해 자신과 다른 타자에 대한 배척을 기조로 삼았던 신보수주의가 자국의 하층민에게 보여준 모습이기도 하다. 레이건에게 압도적인 지지를 보냈던 미국의 중산층들은 하층민을 위한 복지 예산을 줄이는 것을 대대적으로 환영했다. 허클페리 핀의 후예와도 같은 이런 부랑자들은 오직 격리와 통제의 대상일 뿐이었다. 잭 소여와 울프도 그렇게 된다. 그들은 경찰에게 체포되어 판사에 의해 그런 아이들을 전문적으로 관리하는 '선라이트'로 보내진다. 오직 복종만을 강요하며 그 뜻을 따르지 않으면 살인도 서슴치 않는 선라이트는 가드너란 인물이 독재하는데, 이 가드너란 인물이 정말로 재밌다.


 소설은 가드너를 배우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정말 잘 생겼으며 언변이 화려하고 기독교 광신도로 묘사한다. 가드너의 특징을 곰곰이 따지다보면 생각나는 인물이 하나 있다. 바로 그 때의 미국 대통령인 레이건. 너무 나간 추측 아니냐고? 결코 그렇지 않은 걸. 일단 소설에서 가드너에 대해 말할 때 배우라는 단어를 자주 쓰는데 이건 분명 레이건을 떠올리게 하려는 것이다. 거기다 그가 다스리는 곳의 이름은 선라이트다. 아시다시피 레이건은 러스트 벨트가 아니라 선 벨트인 켈리포니아의 압도적인 지지로 대통령의 자리에 올랐다. 작가들이 하필이면 선라이트란 이름을 지었던 건 이런 사실을 상기시키기 위함이 확실하다. 거기다 레이건은 모건의 오른팔이다. 모건하면 얼른 떠오르는 J. P 모건은 레이건 정부 때 영향력을 가장 많이 확장하였다. 거의 레이건이 모건의 오른팔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모건을 기업가로 묘사한 것도 이와 관련 있을 것이다.


 자, 이만하면 가드너의 모델이 사실은 레이건이라는 게 어느 정도 납득되실 것이다. 

 이걸 염두에 두고 읽으면 2권은 정말 재밌어진다. 그리고 놀라게 된다. '부적'이 너무나 신랄하게 당대의 미국을 비판하고 있다는 것에. 그 때의 미국은 자신과 다른 사람은 물론 자신보다 못한 사람들도 전혀 존중하거나 배려하지 않는 게 주류의 흐름이었다. 선라이트에 수용된 수많은 아이들처럼 격리와 배척의 대상일 뿐이었다. '부적'은 그것에 대한 매서운 비판이다. 소설이 레이건을 악하게 묘사하는 것에 비하면 이 정도 표현은 애교에 불과하다. 이렇게 다름을 차별의 이유로 삼는 미국에 대해 정신차리라는 뜻으로 작가들은 잭 소여를 '단독자'로 설정했다. 그는 무리의 일부분이 아니라 그 어느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고유한 존재인 것이다. 부적이 가진 엄청난 치유와 구원의 힘은 오직 단독자에게만 허락된다. 당시의 미국은 자신들이 어떤 범주를 미리 설정하고 모든 개인을 거기에 따라 정의내리고 분류했지만 작가들은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지 잭의 친구 '울프'를 통해 선명하게 보여준다. 거기서 울프는 우리가 아는 늑대와 달라도 너무 다르게 자신을 위해 다른 짐승을 함부로 살육하는 자가 아니라 자기보다 약한 자들을 온 힘을 다하여 끝까지 보호하는 자로 나오는 것이다. 그는 그런 헌신을 무엇보다 중요한 명예로 생각하고 결국 그 명예를 위해 자신의 목숨마저 바친다. 이런 울프의 묘사와 희생 앞에서 우리가 달리 무엇을 말할 수 있으랴. 부적이 가진 힘의 원천은 바로 울프와 같은 태도에 있다는 말 말고는.


[이 역시 '부적' 미국판 커버]



 간략하게 설명한다고 했는데 말이 너무 넘쳤다. '부적' 탓이다. 할 말이 너무 많은 책인 것이다(난 지금 울프와 더불어 잭의 소중한 동료가 되는 어릴 적 친구 리처드를 만나게 되는 테이어 학교에 대한 얘기를 의도적으로 생략했다. 선라이트가 있던 인디애나 주와 더불어 테이어 학교가 있는 일리노이 주는 러스트 벨트를 이루는 중요한 한 축이다. 그러므로 테이어 학교를 엘리트를 양성하는 사립 학교로 설정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유독 거기에만 모건을 따르는 트위너들이 기존의 인간들을 대체하는 장면 묘사가 나오는 것도 그렇고. 이런 것들에 대해서도 상세히 언급하고 싶었지만 글의 길이 때문에 그만뒀다. 하일라이트의 중요한 무대인 아긴코트 호텔도 그렇고. 이 장소가 소설에서 가지는 의미에 비하면 한 문장으로 그친다는 건 정말 너무한 처사이다. 흑흑.) 그 때문인지 봉준호의 영화 '기생충'처럼 다 읽고 나서도 그 내용을 몇 번이나 곱씹게 된다. 그러다 내가 원래 생각했던 것과 다른 의미가 있다는 걸 깨닫고 깜짝 놀라기도 한다. 피터 스트라우브는 우리에게 생소하니까 예외로 치고 많이 알려진 스티븐 킹은 때로 재미는 있지만 깊이는 없는 작가로 생각하곤 하는데 '부적'만 읽어도 확실히 알 수 있을 것이다. 그건 오해에 불과하다는 것을.


 아마도 이번에 '부적'이 세롭게 발간된 것은 워너브라더스가 공전의 히트를 친 '그것'에 이어 다음 스티븐 킹 원작 소설의 영화로 '부적'을 제작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소설의 많은 팬들이 영화로 만들어지길 오랫동안 바라고 있었다. 나 역시 어떻게 만들어질지 너무나 궁금하다. 특히나 후반에 모건과 잭 소여가 대결하는 장면의 영상 묘사가 정말 기대된다. 그 때의 모건 움직임 때문에 나는 더욱 모건을 자본의 상징이라 여기게 되었다. 자본이야말로 어디에나 순식간에 존재했다가도 홀연히 사라질 수 있으니까. 모건이 J. P 모건의 이름에서 따왔다는 생각도 한층 더 굳어졌고.


 이야기가 또 삼천포로 빠졌는데 여하튼 바라건대 이 소설에 잔뜩 들어간 레이건 정부 시절 미국에 대한 가열찬 비판들도 그대로 들어갔으면 좋겠다. 그러면 정말 엄청 흥미롭게 될 것 같다. 지금의 미국 또한 그 때의 미국과 그리 다르지 않으므로. '부적'은 지금 트럼프 정부 미국 상황에 대한 비판으로 읽어도 여지없이 통용된다. 레이건의 말년을 생각하면 가드너 최후에 대한 묘사는 더욱 섬뜩하게 다가온다. 두 작가 중 누군가 예언자가 아닐까 생각될 정도로. 어쩌면 둘 다일 수도.


 어쨌든 추천이다. 꼭 한 번 읽어보시길 바란다. 재미라는 감성도, 깊이라는 지성도 다 만족시키는 소설이니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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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광기 그리고 죽음의 이야기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90
오라시오 키로가 지음, 엄지영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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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으로 만나 보는 우루과이 작가, 오라시오 키로가가 1917년에 발표한 단편집 ‘사랑 광기 그리고 죽음의 이야기’를 읽었다. 생각해 보니, 사랑 광기 그리고 죽음엔 공통점이 하나 있다. 내가 어찌 할 도리가 없는 존재라는 것. 그들 모두는 한 번 빠지면 쉽게 헤어나올 수 없는 수렁이다. 거의 블랙홀과 맞먹는 압도적인 중력으로 날 붙잡아 마냥 끌고 가기만 한다. 그러므로 사랑, 광기, 죽음은 하나의 표지판이다. 내가 주인으로 군림할 수 있는 땅은 여기까지라는 걸 알려주는. 그 너머는 타인의 땅이다. 제 아무리 용을 써도 내 힘이 결코 미칠 수 없는  곳. 사랑 광기, 죽음은 나의 부재로 완성되는 장소다. 여기 실린 소설에 나오는 ‘사람을 자살하게 만드는 배’와 같이.

 

 그런데 이상도 하지. 사랑과 광기는 죽음에 맞서 자기 존재를 증명하는 가장 강력한 방법이다. 우리가 보기엔 사랑은 능동이고 광기는 수동적인 상태로 다르지만 소설에선 그렇지 않다. 사랑마저 넓은 범주의 광기로 묘사한다. 첫 단편 ‘사랑의 계절’에서 주인공 네벨은 리디아를 보고 한 눈에 반한다. 다음에 이어지는 ‘엘 솔리타리오’에서도 아내는 남편이 세공하는 보석을 보곤 한 순간에 매혹된다. ‘이졸데의 죽음’이나 ‘음울한 눈동자’도 그러하다. 이성으론 그 이유를 도저히 간파할 수 없는 사로잡힘이 사랑의 촉발인 것이다. 작가는 이걸 반복적으로 묘사한다. 여기서 우리는 광기 또한 사로잡힘에서 발아하는 걸 기억한다. 더구나 소설 속 사랑은 일방통행로만 달리는 열정의 착란에서 비롯되어 의혹과 혼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표류하다 끝내, 두 편 정도의 예외가 있긴 하지만,  환멸 아니면 비통에 이른다. 광기 또한 이와 유사한 여정을 보여주지 않던가. 이처럼 작가에게 사랑과 광기는 샴쌍둥이인 것이다.

 

 그가 사랑과 광기를 중요한 두 축으로 소설을 형성하는 것은 그가 대면하고 있는 세계의 속성 때문이다. 절대군주인 죽음이 자신의 권력을 무자비하게 휘두르고 있는 곳인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모든 계산과 예측을 넘어서 있다. 밤마다 베고 자는 베개가 언제든 내게 죽음을 가져올 수 있으며(깃털 베개) 잠깐 한 눈을 팔았을 뿐인데 무엇보다 지키고 싶었던 막내 딸이 골육에게 무참히 도륙당하는(목 없는 닭) 세상인 것이다. 이런 상황에 처한다면 아무래도 우리는 거의 부재에 가까운 자신의 왜소함을 의식할 수밖에 없다. 작가 또한 가까이서 많은 죽음을 겪으면서 똑같은 걸 느꼈을 것이다. 나는 나를 주장할 수 없는, 나의 취약함을 끝도 없이 상기하게 만드는 장소에 나를 내어주어야만 한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그래도 살아야 한다면 이 삶의 시간을 어찌 지속시켜야 하나? 난 이 단편집에 실린 소설들이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나름대로 추구하고 있다고 여겼다.

 

 그러자 눈에 들어오는 이들이 있었다. 사랑이나 광기와 같은 열정의 힘을 빌려서라도 무덤과 사막만을 약속하는 삶을 뚜벅뚜벅 관통해나가려는 존재들이. 가시철조망을 두려움 없이 뛰어넘는 황소(가시철조망)나 우물 안을 벗어나 모두가 두려워하는 숲으로 뛰어들어 진정한 사냥을 하고 비로소 자신의 진짜 모습을 찾은 개, 야구아이 아니면 우물에 뛰어들겠다는 협박으로 비로소 외삼촌에게 대등한 존재임을 인정받은 아이(우리가 처음 피운 담배)처럼. 그들을 통해 비로소 깨달았다. 우리의 존재를 제대로 증명하는 길은 바로 용기란 걸.

 

 그건 그러지 못하는 이들이 있었기에 한층 더 선명하게 다가왔다. 백치처럼 아예 모든 것을 놓아버리거나 겁먹고 뒷걸음치기 바쁜 존재들 말이다. 그들 대부분은 용기를 감행하는 타자에게 자신을 동화하는 것으로 자신이 갇혀 있는 유배지를 탈출하려 해 보지만 결코 소심한 구경꾼의 운명을 벗어나지 못한다. 여기서 나는 더욱 보게 되었다. 그 위에 작가가 찍어놓은 투명한 방점들을. 뭐든 시도가, 행동하는 게 중요하다는 걸 암시하는. 

 

 당연히 여기엔 위험이 뒤따른다. 어떤 때는 ‘천연 꿀’에 나오는 것처럼 그 시도가 죽음을 초래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작가는 ‘멘수들’에 나오는 벌목꾼 카예, ‘강에서 나무를 건져 올리는 이들’에서 원주민 칸디유 그리고 ‘음울한 눈동자’에서 사피올라가 화자에게 한 얘기들을 통해 분명히 전한다. 결과에 연연하지 말고 일단 뛰어들라고. 온전한 내 선택과 결단으로.

 

 ‘뇌막염 환자와 그녀를 따라다니는 그림자’에서 두 사람을 이어준 건 무엇이었나? 그림자에 불과한 보잘 것 없는 자신의 존재 가치와 다만 착란에 의한 사랑 고백이라는 걸 다 알면서도 거기에 굴하지 않고 용기를 내어 자신의 마음을 고백한 것이 아니었던가. 이는 모든 걸 마약에만 의지하다 죽어서도 두개골 안을 벗어나지 못하는 ‘내 손으로 만든 지옥’의 인물과 자신이 광견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한사코 부정하며 모든 걸 남의 탓으로 돌리다 마침내 끔찍한 범행마저 저질러버린 ‘광견병에 걸린 개’의 주인공과 얼마나 다른가. 이들은 모두 자신이 정말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정신적으로 표류하면서 협소한 자신의 세계를 도저히 벗어날 수 없었던 ‘표류’에 나오는 파올리노의 분신들인 것이다. 

 

 우리는 안다. 삶이란 언젠가는 끝나야 하는 연극인 것을. 그렇다고 그 종막만을 생각하며 시곗바늘만 초조하게 바라보거나 어차피 허무하게 끝날 거 뭐하러 의미를 만들려 애쓸까 하는 생각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이미 무덤 속에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소설에서 보여주는 자기 세계에 갇혀 끝없이 맴도는 장면들은 그걸 비유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기왕에 태어나 지속이라는 정언명령을 따를 수밖에 없다면 아주 사소한 배역이 주어졌다고 해도 거기에 굴하지 않고 계속해서 뭔가를 시도하며 현재라는 순간에 충실해야 한다. 작가의 혜안대로 진실로 생생한 삶이라는 걸 느껴볼 수 있는 눈부신 스포트라이트는 바로 거기서 창출되는 것이니까. 나 아닌 다른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같은 죽음이라 하더라도 영웅과 비겁자의 것이 다르듯이, 삶의 의미가 달라진다면 죽음의 의미 또한 달라질 것이다. 그렇기에 삶은 죽음을 통해 완성된다고 말하는 것이겠지. 이 책 덕분에 살면서 늘 염두에 둬야 할 한 문장을 얻게 되었다. ‘다가올 무한을 근심하지 말고 지금의 유한을 사랑하라!’ 기억하고 또 기억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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