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를 위한다는 착각 - 종말론적 환경주의는 어떻게 지구를 망치는가
마이클 셸런버거 지음, 노정태 옮김 / 부키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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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도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도는 것임을 증명하고 있는 코페르니쿠스의 모습을 보고 있는 중세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환경 연구자이자 환경 보호 활동가인 마이클 셀런버거의 '지구를 위한다는 착각'(원제는 'APOCALYPSE NEVER')을 읽고 있을 때 말이다. 오래도록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돈다고 믿었던 중세 사람들에게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 입증은 그동안 자신이 알고 믿었던 모든 것이 송두리째 전복되는 느낌이었을 것이다. 나 또한 정녕 그랬다. 알고 보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지구 환경 보호와 관련한 내용들은 낯익은 것이다. 내 경험에만 비추어 봐도 유년 시절에 읽은 그림책으로도 만났고 중, 고등학교 정규 교육에서 꼭 빠지지 않는 부분(이건 요즘도 그렇다.)이었을 뿐만 아니라 책이나 영화 그리고 언론 보도로 해마다 허다하게 접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한 마디로 결코 무지할 수가 없는 주제란 뜻이다. 


 익숙한 내용을 반복적으로 접하다 보면 다 안다고 생각하기 쉽다. 내가 그랬다. 이 책의 페이지를 처음 넘길 때만 해도 달리 새로운 내용이 있을까 싶었다. 커다란 착각이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잘 안다고 자부했던 모든 것들이 실은 제대로 아는 게 아니었다는 걸. 익숙한 골목을 한 번 더 산책하는 것과 같다고 여겼던 이 책의 독서는 곳곳에서 불쑥 불쑥 튀어나오는 충격적인 진실을 통해 그동안 내가 안다고 여겼던 것들이 실은 그저 특정한 목적을 위해 의도된 결론의 무비판적 수용이거나 왜곡 또는 과잉 해석에 대한 무분별한 신뢰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도록 이끌었다. 그러므로 정녕 지구 환경 보호에 관계된 내 인식의 지축은 크게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천동설에서 지동설로의 변화에 버금가는 요동(搖動)으로 말이다. 그러니 어찌 내가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의 서문에서 쓴 바와 같이, '지구를 위한다는 착각'이란 책이 내게 코페르니쿠스적 전회(轉回)를 일으켰다고 말하지 않을 수 있으랴. 


 이런 인식의 여정을 마르크스는 '모든 견고한 것들이 대기 속으로 녹아 사라진다'는 인상적인 문장으로 표현한 바 있다. 나 또한 그렇게 사라졌다. 지구 환경 보호란 주제와 관련하여 내가 상식처럼 간주했던 모든 것들이 말이다. 그렇다고 무지의 상태로 돌아간 건 아니니 오해하지 말기를. 정확히 말하자면 그간 지구 환경 보호 문제에 대하여 참된 진실을 보지 못하게 했던 색안경이 치워진 것이니까 말이다. 그런고로 제대로 볼 수 있게 되었고 그 투명함으로 보다 넓게 시야에 담을 수 있게 되었다고 해야하리라. 그동안 환경 보호 문제에 있어 부정적인 것으로만 여겨왔던 것들을 긍정적인 가능성을 한껏 잠재한 존재들로 보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전에는 미처 시선을 두지 못했던 곳들까지 아울러 고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변신'을 쓴 소설가 프란츠 카프카는 독서의 의미를 기존의 지식과 생각을 그저 옳다고 여겨 꽁꽁 얼어버린 바다처럼 되어버린 영혼에 신선한 충격을 줘서 새로운 지적 시야를 획득하도록 하는데 있다고 한 바 있다. 그래서 그는 책은 도끼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비로소 그 말의 의미를 오롯이 이해할 수 있었다. '지구를 위한다는 착각'이야말로 내게 그런 도끼였으니까.



 마이클 셀런버거는 이 책의 저자로 꽤 신뢰할만한 존재이다. 무려 30년을 환경 보호 운동에 종사했고 2008년엔 '타임'지로부터 환경 영웅으로 선정된 바 있으니까 말이다. 그는 서두를 여는 환경 종말론자들이 대표하듯이 환경 보호 문제 있어서 날로 거세지는 부정적 경향과 반인간주의에서 탈피하고자 이 책을 썼다. 한 마디로 시선의 변화를 주고자 한 것이다. 함몰된 그곳에서 빠져나와 달라진 눈으로 세상과 자신을 볼 수 있도록. 


 이 책은 그 목적을 잘 이룰 수 있도록 제법 영리하게 구성되어 있다. 모두 12장으로 이뤄져, 세 단계로 나뉘어 한 단계씩 저자가 전하고자 하는 주제로 다가가도록 설계되어 있는 것이다. 1단계인 1장은 서론 격으로 저자가 책을 집필할 정도로 강한 문제의식을 느꼈던 종말론적 환경주의가 얼마나 오해와 오류로 범벅되어 있는지 밝힌다. 2단계라 할 수 있는 2장에서 9장까지는 종말론적 환경주의로 나아가게 만드는 각종 환경 보호에 대하여 부정적인 인식을 낳는 대표적인 것들을 가져와선 그 이면에 자리잡은 잘 알려지지 않는 과학적 사실들을 드러내어 진정한 환경 보호를 위해선 시선을 이동하여 그 명암을 총체적으로 고찰할 필요가 있다는 걸 알려준다. 이처럼 2단계가 우리가 보호하는 대상에 대하여 시선의 변화를 요청하여 새롭게 보기로 이끈다면 10장부터 12장까지 3단계는 그것을 보호하는 주체까지 연장하여 인간 자신도 그 바라봄에 있어서 시선의 옮김이 필요하며 이를 매개로 이 책의 궁극적 목적인 종말론적 비관과 반인간주의에서의 탈주로 자연스럽게 인도하고 있다. 아무래도 이런 일반적인 설명만으론 잘 이해되지 않을 것 같기에 아래에서 각 장의 내용들을 보다 상세하게 소개해 보도록 한다.


 앞서도 말했듯 저자는 1장에서 영국의 '종말 저항' 단체의 활동을 접점으로 하여 현 사회에 광범위하게 유통되고 있는 '종말론적 환경주의'(환경 문제를 이대로 방치하면 그리 멀지 않은 미래에 인류는 종말한다는 믿음)가 내세우는 근거들이 얼마나 많은 오류로 점철되어 있는지 밝혀나간다. 그런 근거들은 우리에게도 익숙한 것들이다. 우리 역시 세계 곳곳에서 자주 일어나는 산불들과 점점 많아지고 대형화되는 폭우와 폭풍을 보면서 온실 효과로 인한 기상 이변 탓이라고 듣고 믿지 않았던가. 그러나 저자는 단언한다. 종말론적 환경주의에 속한 학자들과 이에 동조하는 언론들은 우리가 현재 보고 있는 기상 현상들이 이례적인 것이라 말하지만 역사적 통계와 비교해 보면 별로 특이할 것이 없는 것임을. 그들이 주장한 기상 이변은 때로 계산을 잘못 하였거나 수치를 과잉 해석한 것에 지나지 않을 때가 많았고 설령 실제 기후 변화로 인정할 수 있는 것들이 있다고 하여도 언감생심 종말을 가져온다고 말할 수 없는 수준의 것이라 할 수 있었다. 저자는 그 근거로 2019년까지 이뤄진 최신 과학 연구 결과까지 동원하여 제시한다. 이러한 저자의 설명을 듣노라면 종말을 부르짖는 환경운동가들이 어쩌면 답을 미리 정해놓고 거기에 맞춰 현실을 재단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떨치지 않을 수가 없다.


 이러한 의혹들은 뒤이어 나오는 2장부터 9장 사이의 내용으로 더욱 커진다. 거기서 저자는 우리에게도 아주 익숙한 주제들을 다룬다. 2019년 세간의 주목을 끌었던 아마존 열대우림의 파괴, 바다에 떠다니는 플라스틱이 해류를 따라 몰려들어 마치 거대한 섬을 이룬 것만 같은 '태평양의 거대한 쓰레기 지대(Great Pacific Garbage Patch)'의 충격적인 모습, 나 또한 읽었던 엘리자베스 콜버트의 책, '여섯 번째 대멸종'이 음울하게 예견했었던 생물다양성의 거듭된 감소, 늘 서구 사회가 제 3세계의 가난한 나라들에게 가하는 횡포라고 여기고 있었던 저임금 노동 문제, 온실 효과를 불러오는 탄소 배출량을 줄이기 위해 하루 빨리 탈출해야한다고 생각했었던 석유 문제, 내 주위에도 제법 있는 환경 보호를 위해 채식주의를 선택한 사람들(이 때문에 난 육식을 할 때마다 종종 남모를 죄책감을 가지기도 했다.), 거기다 2011년 3둴 11일 발생한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잘 보여주었듯이 원자력은 위험한 물건이니 절대적으로 지지했던 탈원전 정책과 이러한 흐름으로 비롯될 에너지 부족 문제와 친환경이라는 두 가지 문제들 동시에 해결해 줄 신재생 에너지 같은 것들이다. 환경 문제에 관심이 있었다면 한 번은 꼭 보고 들었을 것들이 8장에 걸쳐 망라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소재는 익숙한 것이었을지언정 내용은 결코 낯익지 않다. 아니, 완전히 새로운 정보들로 가득차 있다. 


 이를테면 아마존 열대 우림은 나 역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처럼 생태계에 필요한 산소를 대량으로 공급하여 지구의 허파라고 불린다는 걸 종종 들어온 편이다. 그런데 실상은 달랐다. 아마존의 숲들이 산소를 대량으로 생산하는 것은 맞지만 식물들은 자신이 생산한 산소의 60%를 호흡으로 즉시 소비하기 때문에 허파라는 이름에 어울릴 정도로 산소를 지구에 공급하지는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머지 40%조차 아마존에 존재하는 여러 바이오매스들이 분해해버리기 때문에 실제로 아마존이 지구에 공급하는 산소는 거의 제로에 가까웠다. 이것은 정말 몰랐던 사실이다. 나는 어쩌다 아마존 열대 우림이 지구의 허파라고 믿게 되었을까? 새삼 나는 이 믿음의 근거를 따져보게 되었고 그 결과 그 근거에 대해서는 제대로 아는 게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냥 학자들이, 언론들이 그렇게 말하니까 그렇구나 하고 여겼을 뿐이었던 것이다. 


 이건 플라스틱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우리 아파트에선 일요일마다 재활용 쓰레기를 버리는데, 그 때마다 상자 한 가득 나오는 플라스틱 쓰레기 때문에 근심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잔뜩 모여져 있는 플라스틱 쓰레기를 볼 때마다 저절로 태평양의 거대한 쓰레기 지대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지구에게 너무 미안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이것에 대해 너무 우려할 필요는 없다고 전한다. 왜냐하면 가장 심각한 해양 오염을 낳는다는 폴리스티렌조차 수 십년 정도의 짧은 기간 안에 햇빛에 의하여 분해되기(p. 126) 때문이다. 우리는 플라스틱이 영구적으로 존재한다고 들어왔지만 과학적으로 그건 불가능했다. 비록 시간이 걸리긴 해도 확실히 분해되는 존재였던 것이다. 더구나 플라스틱이 환경에 해악을 끼치기만 하는 존재도 아니었다. 역사적으로 보자면 플라스틱으로 희생된 생물 보다 바닷거북의 등껍질이나 코끼리의 상아 등 플라스틱으로 대체될 수 있어서 멸종의 위험에서 벗어난 생물의 수가 훨씬 더 많았다. 플라스틱은 환경 보호에 긍정적인 효과도 가져오는 존재였던 것이다. 이렇게 플라스틱도 새롭게 보게 되었는데 물론 이 역시 이 책을 통해 처음 가능해진 것이다.


 이어서 등장하는 생물다양성 감소 문제는 또 어떠한가? 지구는 지금까지 다섯 차례의 대멸종을 겪어왔고 이제 무엇보다 인간이 원인이 된 여섯번째 멸종을 목전에 두고 있다는 종말론적 환경론자의 주장 또한 진실과 많이 달랐다. 인류는 생물의 서식지를 보호하는 데 실패하고 있기는커녕 1993년 발표된 생물다양성협약에 힘입어 점점 더 많이 성공하고 있었다. 2019년 현재 지구상의 보호 지역 면적을 모두 합치면 아프리카 대륙보다 더 크다고 한다.(p. 154) 저자는 정작 심각한 문제는 따로 있다고 지적한다. 각 동물의 개체 수와 전체 서식지가 줄어들고 있는 바로 그것이다. 이런 상황은 대부분 아프리카의 콩고와 같은 제 3세계의 가난한 나라들에게서 일어나는데 거기 사는 사람들이 오직 먹고 살기 위해 동물의 서식지를 침범하는 까닭이다. 이 사실을 아는 선진국의 환경운동가들은 서식지를 보호한다는 명목 하에 해당 나라에 압력을 넣어 사람들을 내쫓는 것에만 매진한다. 그런데 결과는 동물들에게 더 안좋게 나타난다. 언제 굶어죽을지 모르는 자신의 삶은 무시하고 야생 동물의 삶만 중시하는 환경운동가들 모습에 잔뜩 분노하여 그걸 보호 받는 동물들에게 풀기 때문이다. 저자는 서식지 보호를 빌미로 오직 사람들을 추방하는 것에만 급급한 환경운동가들의 행태는 그 나라 사람들이 처한 삶의 현장을 전혀 들여다 보지 않았기 때문으로 정말 서식지를 보호하고 싶다면 사람들을 가난에서 구제부터 해주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환경 보존 과학자인 세라 소여의 다음과 같은 말은 이처럼 환경 보호의 탈을 쓴 새로운 식민주의가 횡행하는 오늘날의 현실에서 꽤 의미심장하게 들린다.


 '지구 위애서 이 생물종이 사라지게 할 수는 없어.' 그런데 생각을 해 봐야죠. 이렇게 큰 사회, 정치, 경제 비용을 인간쪽에서 감당하면서까지 이 종을 지켜야 하는 걸까? 아니면 이렇게 말해 볼 수도 있어요. '우리는 이 종을 지키고 싶어. 하지만 이 지역에서 우선 처리해야 할 일이 과연 그것뿐일까?'(p. 175)


 정말 무엇부터 해야 할 것인가는 바로 다음 장에서 드러난다. 거기서는 이젠 제법 유명해진 제 3세계 나라들의 저임금 문제를 다루는데, 물론 저임금 자체는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사안이긴 해도 이렇게나마 산업화가 이뤄지고 부가 유입되어 사람들의 경제적 조건이 나아지니 환경의 보호 또한 좋아졌던 것이다. 저자는 그걸 인도네시아 여성인 수파르티의 삶을 통해 설득력있게 제시한다. 우리는 흔히 산업화와 환경 보호는 물과 기름처럼 서로 어울릴 수 없는 존재라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달랐다. 공장이 지어지고 보다 많은 수입으로 기존의 생활 연료로 쓰던 나무를 더이상 사용하지 않자 숲이 되살아났던 것이다. 우리 중 누군가는 아직도 음식과 난방을 위해 나무를 사용하는 데가 있냐면서 놀랄지도 모르지만 책에 따르면 전 세계적으로 무려 25억의 인구가 여전히 나무를 연료로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그만큼 날마다 벌목은 이뤄지고 숲은 줄어드는 것이다. 거기서 보호받아야 할 생물들까지 쫓겨나는 건 말할 것도 없다. 그러므로 저자가 주장했듯, 경제적 여건을 향상시켜 주는 것이야말로 환경 보호를 위한 진정한 최우선 과제인 것이다. 그의 말대로 공장이 숲을 살렸다. 산업화와 환경 보호는 실상 공생관계였던 것이다. 둘을 오로지 적대적 관계로 여겼던 내겐 또 한 번의 적잖은 충격이었다.


 하지만 마이크 타이슨의 핵주먹과 맞먹는 지적 충격은 아직도 몇 발 더 남아 있었다. 우선 오랫동안 환경 보호의 적이라고 여겼던 석유가 사실은 고래를 멸종에서 구한 장본인이라는 것도 그 중 하나였다. 포경 산업이 고래를 남획하여 멸종 사태로 몰아갔다는 게 지금까지의 내 상식이었다. 그러나 이 책은 포경 산업이 사양 산업이 된 것은 석유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걸 선명하게 밝히고 있었다. 기술의 발전으로 석유를 통해 고래에서만 얻을 수 있는 것들의 대체제(심지어 품질도 더 좋은)를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 있게 되자 그만큼 고래를 포획할 필요가 없게 되었던 것이다. 저자가 이 얘기를 하는 것은 석유가 고래의 것들을 기술 향상으로 대체한 것처럼 에너지 전환 문제야말로 환경 보호를 위한 가장 효능있는 방법이란 걸 알려주기 위해서다.


 천연 가스를 긍정하는 것도 그래서다. 최근 천연 가스는 환경에 악영향을 끼치는 존재로 떠올랐다. 그 천연 가스를 채굴하기 위해 사용하는 프래킹, 즉 수압파쇄법 때문이었다. 천연 가스를 프래킹할 때 발생하는 메탄이 기후에 석탄 보다 더 안 좋은 영향을 미친다고 환경운동가들은 주장했다. 하지만 저자가 내놓는 과학적 조사 결과는 이와 전혀 다르다. 일례로 대기 오염 유발과 사망의 관계만 놓고 본다면 석탄이 천연가스보다 8배나 더 많은 인명 손실을 야기시키고 있다.(p. 251) 더하여 고압의 물로 지층을 파쇄하는 천연 가스 채굴 방법은 산을 통째로 깎아 채굴하는 석탄보다 환경 파괴도 훨씬 덜하다. 에너지 전환은 분명 이러한 긍정적 효과를 일으킨다. 저자는 여기서 '에너지 밀도'를 중시한다. 에너지 밀도는 보다 적은 사회경제적 비용으로 보다 많은 효율을 낼수록 높아진다. 여기의 사회경제적 비용이란 에너지 생산을 위해 차지하는 면적, 들어가는 자원 등을 뜻한다. 그러므로 에너지 밀도가 높을수록 환경 보호에도 좋다. 생태계에 더 작은 영향을 미치고 더 적은 자원을 소모하여 탄소배출량을 줄이기 때문이다. 에너지 전환이란 단적으로 에너지 밀도가 낮은 것을 높을 것으로 바꾸는 걸 의미한다.


 그런 면에서 그는 요즘 각광받고 있는 신재생 에너지를 못 미더워한다. 태양력, 풍력 할 것 없이 아직 기술 발달의 진전이 없어 에너지 밀도가 높지 않기 때문이다. 일례로 현재 태양광 기술로 댐 하나의 수력 발전에 맞먹는 전기를 생산하려면 텍사스 주만한 크기의 면적이 필요하다고 한다. 풍력 발전도 마찬가지다. 강원도나 제주도에서 볼 수 있는 그건 거대한 몸체를 가졌지만 생산하는 전기량은 얼마되지 않는다. 이처럼 그것을 만들고 유지하는 데 비용이 더 들어가 탄소배출량은 오히려 증가하는 것이다. 더우기 풍력발전기는 주위 조류 생태계에도 악영향을 미친다. 날개에 희생당하는 새와 곤충이 많은 것이다. 거의 당위에 가깝게 신재생 에너지를 지지했던 나로서는 이러한 부정적 측면은 상당한 충격이었다. 이런 내용은 오직 이 책을 통해서만 알게 되었으므로 난 더욱 이 방면에 대해 도대체 내가 알고 있는 게 무엇인가 재고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하튼 저자는 석탄, 석유, 천연가스, 원자력 순으로 갈수록 에너지 밀도가 높아지며 그러므로 현재의 탄소배출량을 확연히 줄이기 위해선 원자력 발전에 중점을 두는 것이 최적의 대안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원자력이 안전할 뿐만 아니라 환경에 미치는 영향 또한 매우 낮은 본질적인 이유를 알 수 있다. 바로 연료의 에너지 밀도가 대단히 높기 때문이다. 원자를 쪼개서 열을 발생시키는 핵분열 방식은 불을 붙여 분자를 화학적으로 분해하는 방식보다 연료가 훨씬 적게 든다. 코카콜라 캔 하나 분량의 우라늄만 있으면 한 사람이 평생 펑펑 쓰고 남을 에너지를 제공할 수 있다.(p.311)


 체르노빌 사태와 후쿠시마 원전 사고로 인해 나를 비롯힌 많은 이들이 원자력을 오롯이 부정의 대상으로 바라보지만 놀랍게도 저자는 여기에 더 주력해야한다고 말하고 있다. 내가 이 책에서 맞은 최고의 강펀치였다. 비록 독일, 대만 그리고 우리나라 이렇게 전 세계에서 딱 세 국가만 탈원전을 공식적으로 표방하며 추진하고 있지만 이번에 일어난 일본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해양 방류 문제와 관련하여 전 세계가 표명했듯이 원자력은 한 번 터지면 거의 회복불가능한 수준의 피해를 입히기 때문에 여전히 강한 의심의 대상이다. 그러나 저자는 미국의 스리마일섬 원전 사고를 포함하여 체르노빌 사태부터 후쿠시마 원전 사고까지 원자력 발전과 관련된 것은 알려진 것과 실상 많이 다르다고 한다. 그는 체르노빌과 후쿠시마 원전 사고의 전문가인 제리의 말을 빌어 분명히 전한다. 체르노빌 사태가 가져온 악영향은 과대 평가된 감이 있고 후쿠시마 원전 사고 또한 그렇게 우려할만한 부정적 영향은 나타나지 않았다고 말이다. "후쿠시마에서도 원전 사고로 누출된 방사능에 노출되어 죽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p. 309)"고 그는 말했다. 이쯤되면 아득한 혼돈이다. 내가 지금까지 옳다고 여겼던 것과 완전히 정반대의 것을, 그것도 그 방면의 전문가가 말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그동안 원자력에 대한 부정적인 내용들을 하도 많이 보고 들어왔기에 원자력을 자연 보호의 희망이라고까지 말하는 그를 어디까지 신뢰해야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가 직접 발로 뛰며 조사하고 인터뷰한 것을 근거로 제시하기에 덮어놓고 틀렸다고 치부할 수도 없다. 육식에 대한 것도 그렇다. 책에서 육식은 원자력보다 먼저 나오지만 석유와 연결지어 말하면 더 매끄럽게 들릴 것 같아서 일부러 육식 부분을 원자력 뒤로 돌렸다. 우리는 육식 습관이 환경 보호에 좋지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그린피스는 오래 전부터 육식 습관이 지구 환경에 위험하다고 강조해왔으며 세계적인 행동주의 철학자 제러미 리프킨조차 자신의 책 '육식의 종말'에서 다음과 같이 경고한 바 있다.


 "육식을 위한 가축의 사료로 미국 곡물의 70%가 쓰이고 있고 아프리카의 기근이 그 곳의 농지가 서구 세계에 사료 제공을 위한 목초지로 바뀌는 것에서 비롯되는 걸 볼 때 육식 습관을 그만두지 않으면 미래의 지구에게 커다란 위기를 초래할 것이다."


 예전에 유럽 여행을 갔을 때 레스토랑마다 채식주의자들을 위한 비건 메뉴판이 따로 존재하는 것을 보고 채식주의가 하나의 보편적인 경향으로 자리잡고 있다는 걸 깨달은 뒤로 나 또한 '육식의 종말'을 읽었을 땐 채식주의자가 되어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원체 의지박약이라서 그렇게 되진 못했는데 이제 보니 괜한 짓을 한 것 같다. 저자에 의하면 인류는 이미 2000년에 육류 생산을 위해 사용하는 토지의 총면적이 정점을 찍었고 이후로는 계속 줄어들고 있을 뿐 아니라 령 전 세계인이 채식주의자(비건)이 되어 2050년까지 인류가 동물성 식품과 제품을 완전히 끊고 목초지를 전부 숲으로 되돌린다고 해도 그 효과는 전체 탄소 배출량 가운데 10퍼센트 줄이는데 머문다고 하니까 말이다. 한 마디로 육식이 미치는 악영향은 미미하며 식습관을 바꾼다고 해서 종말론적 환경주의가 우려하는 기후 변화도 막을 순 없다는 것이다. 물론 육식을 거부하는 것엔 한 가지 이유가 더 있다. '동물을 먹는다는 것에 대하여'를 쓴 조너선 새프런 포어의 경우처럼 가축들이 공장에서 대량으로 비인도주의적인 방식에 따라 도축되는 것에 저항하고자 함이다. 그러나 여기서도 저자는 충격을 선사한다. 이건 이전엔 전혀 생각해 보지 못했던 것, 바로 시선의 전환을 통해서다. 사람의 입장이 아니라 가축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이다. 동물 복시 전문가인 템플 그랜딘의 말을 빌어 그는 이야기한다. 가축의 입장에선 평온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정말 중요한데 그건 야생에 있을 때보다 사육장에 있을 때 더 용이하다. 방목이라고 해서 가축에게 좋은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정말로 신경써야 할 것은 공간이 아니라 '습하지 않도록 하고 깨끗하게 돌보는 것'(p. 283)이기 때문이다. 


 이건 내게 있어 정말 충격이란 말이 어울릴 정도로 신선한 사고의 전환인데 그러고 보니 왜 우리는 단 한 번도 동물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지 않았을까? 그 입장에 서보지도 않았으면서 무턱대고 자연적인 것이 인공적인 것보다 좋다고 여겨버렸던 것일까? 여기에 저자는 환경운동가일수록 더욱 잘 빠져들게 되는 자연에 대한 맹신을 지적한다. 어쩌면 당신 또한 나처럼 깊게 자리잡고 있을 지 모를 뭐든 자연적인 것이 인공적인 것보다 낫다는 검증되지 않은 믿음을 말이다. 이것으로 그는 우리에게 한계지워진 시야가 있다는 것을 뚜렷하게 알린다. 보고 있으면서도 보지 못하는 인지의 사각 지대가 존재한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저자는 그걸 1장부터 9장까지 누누이 알려왔다. 선진국의 환경운동가들은 제 3세계 가난한 나라 사람들의 실제 삶을 보지 못하는 청맹과니였고 '종말 저항' 활동가들은 종말을 막는데 헌신하고 있다는 신념에 너무 눈이 먼 나머지 다른 이들의 불편과 고통을 보지 못했다. 나 또한 원자력 사고가 몰고 온 부정적인 모습만 보느라 원자력의 긍정적인 면은 아예 들여다 보려는 의지도 가지지 않는 어리석음을 저질렀으며 아마존의 숲이든, 플라스틱이든, 산업화든, 육식이든, 석유든, 신재생 에너지든 할 것 없이 죄다 한 면만 보고서 전부를 다 안다고 착각했다. 이 책이 비판하는 환경운동가들의 우매함은 곧 나의 우매함이었다. 나는 이제 그간 내가 알고 믿고 있던 것들에 오해와 편협한 부분들이 있음을 주시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 눈이 생겼다. 이 책이 가져다 준 것이다. 보지 못했던 하지만 정말 봐야할 곳들을 제대로 보게 만드는 눈을 말이다. 굳어진 편견으로 꽁꽁 언 바다와도 같은 내 의식을 이처럼 도끼로 내리치듯 깡그리 부수고 새로운 측면을 보다 넓게 조망할 수 있는 눈을 선사해주었으니 어떻게 이 책을 도끼라고 부르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런데 그건 비단 자연 혹은 사회라는 대상에만 한정된 것은 아니었다. 바로 우리 인간에게도 엄밀히 해당되는 것이었다. 이어지는 10장부터 12장까지의 내용이 그러하다. 그 전까지의 이야기가 '보호 대상이 되는 객체'에 대한 이야기였다면 이제부터는 '보호하는 주체'에 대한 이야기다. 그 주체들은 자신이 내세우는 신념처럼 정말로 환경 보호를 위한 순수한 동기로 행동하고 있는 것일까? 예전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이젠 아니다. 저자가 인도하는 손길에 따라 새로이 얻게 된 눈으로 오늘날 벌어지는 환경 운동의 드러나지 않은 이면을 바라보니 전혀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신념은 도구이거나 위장일 뿐, 그 중심엔 이해관계가 자리잡고 있었다. 


 일례로 환경이나 기후 보호 활동가들의 운영자금은 많은 부분 그들이 대항하는 화석 연료 기업에서 나왔다. 그 대표적인 기업 중 하나인 엑손모빌은 자신의 입장을 대변하는 기후 변화 회의론자들에겐 고작 1,300만 달러를 후원했으나 환경보호기금과 천연자원보호협회엔 무려 3억 8400만 달러를 후원(p. 413)했던 것이다. 사정이 이러하다 보니 환경이나 기후 보호 활동가들은 화석 연료 기업을 위해 은밀히 움직이는 경우도 있었다. 대표적으로 그들이 주도한 탈원전 운동이 그것이다. 원자력 발전소가 적게 지어지면 지어질수록 이익을 얻는 건 화석 연료 기업들이었다. 그렇게 돈을 받은 활동가들과 기업들의 이해관계가 일치했고 탈원전 운동은 대중들의 원자력 반감에 힘입어 기업에게 실제적인 이익을 가져다 줄 수 있었다. 이런 일들은 비일비재하게 일어났다. 저자는 이러한 민낯을 가감없이 드러내 독자들에게 분명하게 밝힌다. 아무리 이념과 신념들이 점철된 환경 보호 운동이라고 하더라도 거기엔 무엇보다 인간이 있음을 보라고 말이다. 우리처럼 눈 앞의 이익에 연약하여 신념 또한 얼마든지 던져버릴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


 예전 대학에서 과학사회학을 배울 때가 생각난다. 그 때 교수님은 과학사회학은 아무리 엄밀한 과학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다루는 것은 바로 평범한 사람이라는 걸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자신이 얻고자 하는 것을 위해 과학의 권위마저 도구로 사용하는 '정치(politics)'가 있음을 말이다. 환경 보호 운동도 이와 같다. 따라서 그들이 내세우는 당위와 신념에 눈이 멀어 그들의 주장과 행동을 무턱대고 신봉해서는 안된다. 사람인 이상 그들 역시 볼 수 없는 곳이 있고 알면서도 일부러 안 보는 곳도 있다. 정확한 검증과 합리적 비판이 당연히 필요한 것이다. 


 이해관계는 이해관계일 뿐이다. 그 사람의 이념이나 지지 정당이 무엇이냐에 따라 똑같은 행위를 두고 판단이 달라질 수 없다.(p. 440)


 물론 이러한 사실은 나에 대해서도 그대로 해당된다. 나 역시 내가 알고 믿고 생각하고 있는 것에 대하여, 또 내가 바라보고 있는 타인들에 대하여 언제나 검증과 비판의 칼날을 들이밀어야 한다. 11장인 '힘 있는 자들이 가장 좋은 해결책에 반대한다'는 그것을 잘 보여준다. 자신이 지금 하는 행동을 객관적으로 성찰하지 않을 경우 기후 변화에 맞서 뭔가 하려고 모였으나 온갖 호화 탈것에 수행원도 잔뜩 대동하여 흥청망청 파티까지 여는 바람에 오히려 막대한 양의 화석 연료를 허공에 뿌려버렸던 유명 영화 배우를 비롯한 셀레브리티들이나 신재생 에너지 요트로 대양 횡단을 한다면서 수행원들은 비행기를 타고 오게 해 탄소배출량만 한껏 더 증가시킨 유명한 스웨덴의 십대 소녀 환경운동가 그레타 툰베리처럼 언제 위선적인 행동을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더하여 이중잣대의 위험도 있다. 저자는 1인당 국민 소득은 1인당 에너지 소비와 거의 정확하게 정비례한다(p. 448)고 한다. 그 말은 소득 수준이 높은 선진국이 낮은 후진국 보다 에너지 소비량이 훨씬 많고 그만큼 탄소배출량도 많다는 뜻이다. 하지만 선진국의 환경운동가들은 오직 제 3세계 가난한 나라들에게만 희생을 강요한다. 기후 변화를 막겠다며 산업화를 저해하고 화력 발전을 하겠다고 하면 자금 지원을 끊어버리겠다고 위협한다. 그러면서도 대부분 중산층 이상의 출신인 그들은 발달된 문명이 주는 혜택을 가득 누리면서 에너지를 원없이 소비한다. 전형적인 이중잣대의 모습인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모습을 거울에 비출 줄 모른다. 자기가 지금 무슨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지 정직하게 객관적으로 판단하지 못한다. 보고 싶은 곳만 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그들은 맬서스의 이론을 이용하여 '구명보트의 윤리학'을 실현하려 한다. 인원이 한정되어 있으니 구명보트를 유지하기 위해 불필요한 사람은 과감히 버리자는 것이다. 가축에게마저 인도적일 것을 요구하는 그들이 같은 인간에겐 이처럼 비인도적인 일을 서슴없이 자행한다. 버려지는 건 제 3세계 가난한 나라 사람들 뿐이고 자신은 결코 구명보트에서 밀려나지 않을 걸 잘 아는 탓이다. 


 이처럼 시선의 변화로 자신에게 제대로 된 검증과 비판의 기회를 부여하지 못하면 아무리 좋은 이념으로 무장하였다고 하더라도 괴물이 된다. 그런데 이러한 외골수가 자기만이 옳다는 신념으로 무장까지 하면 더욱 무시무시한 괴수가 된다. 그것이 바로 저자가 가장 우려를 표명하는 환경 종말론자들이다. 저자 스스로 언급했듯 종말론적 환경주의는 거의 종교적 열망 상태에 다다라 '종말 저항' 활동가들이 잘 보여주었듯이 공감과 협력을 이끌어내는 대화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자는 환경 보호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이런 광신도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시선의 변화를 요청하는 것이다. 보고 싶은 곳만 보려는 마음을 억누르고 볼 수 없었던 부분을 되도록 보려고 노력하여 보다 깊고 넓은 시야로 대상과 자신 모두를 객관적으로 검증과 비판 가능한 상태로 만들기 위하여. 그래야 대화가 이뤄지고 서로에 대한 공감 속에서 지구 환경의 보다 나은 상태로 변화하기 위한 상호 협력이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나와 다른 생각을 가졌다고 하여 내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그렇기 때문에 어쩌면 내게 있을 잘못을 찾아내거나 나는 생각하지 못한 좋은 대안을 창출할 수 있으므로 더 적극적으로 포용하는 것. 이것이 바로 저자가 지향하는 환경 휴머니즘의 구체적인 모습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성주의를 넘어서 휴머니즘을 다시 포용해야 한다. 인간의 특수성을 긍정하고 인류 문명과 인류 자체를 증오하는 맬서스주의와 환경 종말론에 맞서야 한다.(p. 540)


 이것을 통해 그는 환경 보호 담론 안에서 온갖 형태로 양산되어 있는 이분법적 구도를 혁파하려 한다. 자연과 기술 사이, 번영과 자연 보호 사이, 선진국과 후진국 사이, 원자력과 탈원전 사이, 환경 종말론과 환경 휴머니즘 사이를. 철학자 로저 스크루턴이 말했던 대로 서로 합의하고 공유할 수 있는 정의의 관념에 따라 갈등을 해결하며 협력을 통해 삶을 풍요롭게 만들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을 모색할 수 있도록. 그걸 위헤 저자는 양립 불가를 외친 자들 사이에서 서로 양립 가능한 지점을 찾아내 보여주는 것이다. 시선의 변화가 보다 쉽도록. 이것이 '지구를 위한다는 착각'을 끝까지 완독한 뒤에 가지게 된 전체적인 인상이다. 그리고 그런 그의 작업은 꽤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 앞서도 말했듯 나조차 부정적인 것으로만 여겼던 것들을 긍정적인 존재로 포용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그러자 보여지는 가능성의 폭이 확장되면서 그만큼 더 나아지리라는 희망도 많이 생겼다. 환경 보호에 대한 관심도 다시 생겼다. 거기에 대해선 늘 듣던 얘기 또 듣네 하는 느낌만 있었는데 이 책을 통해 내가 모르는 게 정말 많다는 걸 확연히 깨닫고 보니 다양한 측면에서 더 깊게 파고들어 봐야겠다는 의지가 불끈 샘솟은 것이다.


 그러고 보니 환경 종말론자와 환경 휴머니즘을 근본적으로 구분하는 것은 현재와 미래의 세상을 부정적으로 보느냐 아니면 긍정적으로 보느냐에 있었다. 고통과 상실이 필연적으로 따라다니는 삶인 데다 사람은 기쁜 것보다 슬픈 것을 훨씬 더 오래 기억하는 법이라 부정적으로 보는 것에 더 끌리는 건 사실이다. 그래서 저자는 애써 일부러 의지를 들여서라도 긍정하는 태도를 가질 필요가 있다고 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 또한 이에 동의한다. 환경 종말론자들이 그러하듯 부정적 인식이 퇴적된 절망 속에서 나 좋자고 타인의 삶을 함부로 망가뜨리기보다는 서로를 긍정하는 가운데 협력하여 닥친 문제를 점진적이나마 하나씩 해결하는 것으로 희망을 창출하는 것이 훨씬 더 나아 보이니까. 적어도 저자의 긍정적인 태도가 나만큼은 낙관 속에서 환경 보호 문제에 다시금 깊은 관심을 가지도록 변화시키지 않았는가 말이다. 문득 나와 타인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걸 깨닫는다. 그건 알고 보면 아주 보잘것없는 마음가짐일지 모르지만 루이 암스트롱이 달에 첫발을 디딜 때 말했던 것처럼 어쩌면 장차 인류의 위대한 도약이 될 변화까지 나아갈지도 모른다. 올바른 행로라면 불빛에 이끌리는 반딧불이와도 같이 많은 이들의 발자국들이 그 뒤를 따라 모여들 테니까. 저자의 이 책이 그런 불빛이 되었으면 좋겠다. 무수한 저마다 마음속에서 강요와 배척이 아니라 대화와 협력을 통해 당면한 환경 문제의 해결을 염원하는 반딧불이들이 거대한 흐름을 이루며 날아오를 수 있도록.




#지구를위한다는착각 #지구를위한다는착각리뷰대회 #마이클셀런버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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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집이 대가를 치를 것이다
스테프 차 지음, 이나경 옮김 / 황금가지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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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전에 미국을 뜨겁게 달궜던 'Black Lives Matter'는 미국에서 인종차별을 여전히 활발한 진행형이라는 사실을 전 세계 사람들이 알도록 하였다. 특히 그 시위는 과거의 사건을 다시금 기억하게 만들었는데, 그건 1992년에 6일 동안 벌어졌던 'LA 폭동'이다. 흑인 로드니 킹을 경찰 여럿이 집단 구타한 것에서 촉발된 그 폭동은 LA 전역을 걷잡을 수 없는 혼돈과 공포의 도가니로 몰고 갔다. 이것은 그대로 인종차별이 미국 사회를 쉽게 붕괴시킬 수 있는 방아쇠가 될 수 있다는 걸 너무나 잘 보여주었지만 적어도 지금의 미국 사회 모습을 보자면 아직도 그들은 그 사건에서 아무런 교휸을 배우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그것은 'LA 폭동'을 충분히 되새겨보지 못했기에 그런 것일수도 있다. 그것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무엇을 남겼고 또 그와 같은 일이 재발하지 않기 위해선 무슨 일을 해야할 것인지에 대해 제대로 성찰하지 않아서 말이다. 그렇다면 소설을 통해 과거의 그 때로 다시 한 번 돌아가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마침 그런 기회를 가져다 준 작품을 하나 만났다. 제목은 '너의 집이 대가를 치를 것이다'. 제목부터 뭔가 오싹한 기운이 풍겨오는 이 소설은 놀랍게도 한국계 미국인 작가의 스릴러 소설이다. 작가의 이름은 스테프 차.




 현재 LA에 거주하고 있는 이 작가는 그곳을 배경으로 한국계 미국인 사립탐정 주니퍼 송이 활약하는 작품으로 2013년에 데뷔했으며 '너의 집이 대가를 치를 것이다'는 2015년까지 주니퍼 송 시리즈 3부작을 완료한 그녀가 2019년에 발표한 소설이다. LA 폭동이 일어나기 1년 전에 같은 도시에서 발생한 '라타샤 할린스 살인 사건'을 모티브로 하고 있는 이 작품은 그 사건의 가해자와 피해자가 무려 29년이 지난 뒤 다시 한 번 서로 얽혀드는  상황을 통해 증오와 용서의 상관 관계를 그려나간다. 라타샤 할린스 사건은 일명 두순자 사건으로도 알려져 있다. 그건 15세의 라타샤 할린스를 총으로 쏘아 죽인 사람이 바로 한인 두순자였기 때문이다. 라타샤는 두순자가 운영하는 가게에 우유를 사러 왔다가 절도를 의심한 두순자에 붙잡혔고 억울하게 도둑 누명을 쓴 것에 격분하여 자신보다 몸집이 훨씬 작은 두순자를 네 차례 가격했다. 그리고 쓰러진 두순자를 내버려두고 가게를 나가려다 뒤에서 두순자가 쏜 총에 맞아 숨졌다. 이것은 그렇지 않아도 평소 자신들을 잠재적 범죄자 취급하는 한인에게 안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던 흑인들(이것은 스파이크 리가 89년에 발표한 영화 '똑바로 살아라'에도 묘사되고 있다.)에게 대대적인 분노의 불길을 일으켰고 결국 LA 폭동 때 한인 가게들이 대거 약탈당하는 결과로 나타났다. 


 스테프 차는 그 고통스런 기억을 다시 불러온다. 두 인물을 매개로 하여. 하나는 흑인 숀이고 다른 하나는 한인 그레이스다. 숀에겐 빛과도 같았던 누나가 있었다. 이름은 에이바. 피아노를 너무나 잘 치고 활달하며 자주적인 그녀는 소극적인 숀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하지만 그런 누나는 사촌 레이 대신 우유를 사러 한인 가게에 들렀다가 한인 여자가 쏜 총에 그만 목숨을 잃고 말았다. 맞다. 에이바가 바로 라타샤인 것이다. 소설은 29년 뒤의 시간으로 넘어간다. 하지만 2019년의 LA도 91년의 LA와 별로 다를 바가 없다. 그것을 보여주듯 에이바와 비슷한 나이의 평범한 고등학생 흑인 알폰소 쿠리얼이 그것도 자기 집 뒷마당에서 경찰에게 총을 맞아 숨진 것이다. 그저 현관문 열쇠가 없어 뒷문으로 들어가려던 것 뿐인데 범죄자로 오인 받아 사살당한 것이다. 에이바가 살해당한 상황과 똑같이.


 그렇지 않아도 알폰소 쿠리얼의 억울한 죽음에 대해 경찰에게 책임을 묻는 시위에 나온 사람들은 91년에 죽은 에이바의 이름을 외친다. 그들은 아직도 그녀의 이름을 잊지 않았다. 그 후로도 계속 그녀와 똑같은 억울한 죽음들이 이어져 왔으므로. 그것이 계기가 되었던 것일까? 그 시위 현장에 같이 동참했었던 한인 그레이스의 엄마 이본이 장을 보러 나왔다가 그레이스가 보는 앞에서 한 괴한에게 총격을 당한다. 간신히 목숨은 건졌지만 생명은 여전히 위험한 상황. 이 사건으로 그레이스는 엄마 과거에 대한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된다. 그건 바로 에이바를 쏴 죽인 한인 여자가 자기 엄마라는 사실. 경찰은 29년 전 사건의 보복이라고 생각하고 용의자를 찾아 나선다.



 [스테프 차의 모습과 미국 원서 표지]



 에이바의 죽음으로 한 때 많이 방황하며 갱의 일원이 되어 범죄에 손을 대기도 했던 숀. 하지만 사랑하는 여인이 생겨 지금은 정신차리고 간신히 얻은 가정을 어떻게든 지키기 위해 평범히 살아가고 있다. 그런 그의 일상이 이본에 대한 저격으로 위협받게 되었다. 경찰이 의심의 눈초리를 자신과 가족에게 보내고 있는 것이다. 특히 얼마 전 감옥에서 출소한 사촌 레이가 문제였다. 자신과 달리 레이는 여전히 마음을 잡지 못하고 범법과 합법 사이에서 위태롭게 살아가고 있었다. 그에겐 아내와 아들 대릴, 딸 다샤도 있었지만 감옥에 있는 동안 남편으로서도, 아버지로서도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는 것으로 인한 위축된 자존감 때문에 불안하게 흔들린다. 숀은 이본이 에이바를 죽인 바로 그 여자이며 최근 총에 맞았다는 걸 듣자마자 혹시 레이가 그런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이렇게 피해자는 어느덧 가해자가 되었고 가해자는 피해자가 되었다. 이런 자리바꿈은 흥미롭긴 해도 사실 좀 위험한 설정이긴 하다. 제대로 묘사하지 않으면 독자에게 꽤 작위적이란 느낌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작가는 설득력 있는 전개로 그런 위험에서 벗어났다. 충분히 가능한 상황이라고 납득시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미스터리 소설로서의 제 역할도 잊지 않는다. 과연 이본을 쏜 사람은 누구인가에 대한 의문은 끝까지 밀고 가는 것이다. 그것을 위한 반전도 마련되어 있다. 거기다 그 반전은 작가가 소설을 통해 주려 하는 메세지와 상승 작용을 일으키도록 연출되어 있다. 아무래도 실제 사건을 모델로 했기 때문인지 작가가 공을 들인 게 역력해 보인다. LA 특유의 분위기는 물론 주요 캐릭터의 묘사도 좋고 이야기 흐름도 유려하게 흘러가기 때문이다. 이러는 가운데 작가는 차별은 어느 누구의 전유물도 아니라는 걸 슬쩍 내세운다. 차별은 어떤 인종이든, 계급이든, 국적이든 행해질 수 있다고. 타인을 불신하게 만드는 우리 자신이 가지고 있는 편견에서 자유롭지 못한다면 말이다. 그레이스가 한 유투버 기자가 쳐 놓은 함정에 빠져 자신도 모르게 흑인에 대해 가지고 있던 편견을 드러내버렸던 장면이 대표적인 예다. 그렇지 않아도 행동경제학은 인간이 어떤 행위를 선택할 때 이성적 판단 보다 자기 내부에  알게 모르게 형성된 편견이 더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고 말한 바 있다. 무관심과 무책임한 증오 속에 축적된 편견이 언젠가는 우리 모두를 불살라버릴 성냥개비가 되는 것이다. 그런 것에서 벗어나 상대방이 가진 있는 그대로의 얼굴을 보려고 하는 것. 파멸의 화염을 막는 소방수의 물줄기는 거기에서 분출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그레이스가 대릴의 손을 맞잡고 자신의 엄마에 대해 알려주는 장면처럼. 이러한 노력들이 현재도 여전히 인종차별의 형태로 횡행하고 있는 적개심의 바다를 가르는 기적이라는 것을 '너의 집이 대가를 치를 것이다'는 몰입감 넘치는 이야기로 선명하게 알려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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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문
이선영 지음 / 비채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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잣나무가 울울하고 산세가 험하지 않아서 산행하기에 적합한 청우산에서 심하게 부패한 여성 변사체 하나가 발견됩니다. 이선영 작가의 신작 미스터리 소설, '지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시신의 상태를 보아하니 실족사로 보이는 정황. 하지만 얼마 전에 서울에서 사람을 보이는 대로 너무 믿었다가 세게 뒤통수를 맞아 좌천까지 당해 이곳의 지방 관할로 내려온 형사 백규민은 시신 근처에 신발이 없다는 점 때문에 사인을 의심합니다. 과연 떨어졌으리라 생각되는 지점엔 죽은 여자의 신발이 나란히 놓여 있었고 그 안엔 유서가 들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유서는 이렇게 쓰여 있었죠.


 '증오하면서 사랑한다'(p. 25)


 한편, 장면이 바뀌어 서울의 한 대학에서 강사로 일하고 있는 여성, 윤의현에게 경찰에서 전화가 걸려옵니다. 그녀가 얼마전에 실종 신고를 한 동생 오기현의 시체를 찾았다고 말이죠. 시신이 정말 동생이 맞는지 확인하러 간 자리에서 만난 규민에게 윤의현은 이렇게 묻습니다.

 

 '자살이 맞는 건가요?(p.30)


  자꾸만 자살에 대해 의혹을 제기하는 윤의현 때문에 그렇지 않아도 보이는 대로 믿었다가 큰 낭패를 본 적이 있는 규민은 의현에게 개인적으로 끌리는 것도 있어서 사건 종결을 뒤로 미루게 됩니다. 


 이것을 기점으로 소설은 두 개의 이야기를 나란히 병행하면서 전개합니다. 하나는 물론 오기현 죽음에 대한 미스터리를 푸는 것이구요, 다른 하나는 윤의현이 강사로 일하는 대학에서 발생한, 이민흠이란 교수가 예나 여학생을 성추행한 사건에 대한 것입니다. 전자는 백규민이 주역을 맡고 후자엔 윤의현이 당담합니다. 한때 윤의현은 이민흠의 편에 서서 학내 성추행 사건을 덮으려 했습니다. 그런데 그동안 무슨 심경의 변화가 일어났던 것인지 이번엔 예나를 직접 찾아가 시사 방송에 나가도록 권유하고 이러한 공론화를 통해 사건 때문에 휴직 중이던 이만흠이 아무렇지 않게 교직으로 복귀하는 걸 막으려 합니다. 처음엔 이 둘이 너무나 다른 사건이므로 왜 작가가 이렇게 병행하는지 의문이 듭니다만, 놀랍게도 후반에 가면 이 둘은 하나로 모여지게 됩니다. 그것도 아귀가 딱 맞게. 전혀 다른 사건 같았던 것들이 알고 보니 하나의 사건이 가진 서로 다른 얼굴이었다는 걸 확인하는 것도 미스터리 작품을 통해 얻게되는 재미 중의 하나가 아닐까 합니다. 그런 재미를 이 소설, '지문'을 충분히 만끽하게 하는 것이죠.






 그런데 백규민이 마주한 미스터리는 간단하지 않습니다. 일단 오기현의 삶 자체가 복잡합니다. 이 글을 읽는 당신도 읽으면서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끼셨을 겁니다. '친자매인 것 같은데 왜 언니와 동생의 성이 서로 다르지?'하고 말이죠. 둘은 친자매가 맞습니다. 그런데 둘의 부모가 오기현이 아주 어릴 때 이혼을 했죠. 어머니가 기현을 데려갔고 지금의 아버지, 오창기와 재혼했습니다. 그래서 성이 다른 것이죠. 한편 오창기는 꽃새미 화원을 소유한 부자로, 그가 사는 동네 사람과 경찰마저도 굽신굽신하는 유지입니다. 그러나 안좋은 소문이 돕니다. 오창기가 오기현을 학창 시절부터 학대했다는 것이죠. 그걸 확인해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바로 꽃새미 화원에서 일하는 신명호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줌 싼다고 맞고, 운다고 맞고, 처먹는다고 맞고(p. 104)


 그런데 이렇게 말한 신명호 또한 오창기가 지속적으로 괴롭혀 온 사람 중 하나였습니다. 그는 스무 살 이후로 오창기에 의해 꽃새미 화원에 갇혀 누추한 거처에서 아무 보수도 받지 못하고 몇 십년을 화원에서 일했습니다. 얼마 전 세간을 충격 속에 빠뜨렸던 염전 노예와 마찬가지인 신세였던 것입니다. 신명호는 오기현이 학대 당할 때마다 오창기를 막으려했는데 그 때마다 오창기는 약물 주사를 놓아 무력화시켰습니다. 물론 주위엔 신명호가 정신에 문제가 있어 정기적으로 주사를 맞아야 한다고 말해두었구요. 이런 식으로 오창기의 범죄는 오랫동안 은페되어왔고 아무래도 그것이 기현의 죽음과 많은 관련이 있어 보였습니다.


 자, 이것으로 소설에 대한 대략적인 소개는 다 한 것 같습니다. 과연, 오기현 죽음의 진실은 무엇일까요? 그리고 윤의현은 왜 나중에 가서 갑자기 예나를 위해 이만흠을 막으려 하는 것일까요? 앞서도 말했듯이 이 둘의 해답은 놀랍게도 정확히 하나로 모여지게 됩니다.


 이선영 작가의 '지문'은 근래 읽은 한국산 미스터리 중 가장 만족감이 컸던 작품 중 하나였습니다. 사실 소재가 그리 신선하지 않다는 건 인정합니다. 그러나 익숙한 소재를 작가는 능수능란한 솜씨로 신선한 요리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지문'은 스릴러처럼도 보이지만 아마도 정통 추리 소설에 가깝다고 해야할 것 같습니다. 이른바 범인을 찾아가는 'WHODUNEIT' 장르 말이죠. 이런 후더닛 장르에선 엘러리 퀸이 그랬듯 얼마나 독자와 공정한 게임을 하느냐가 작품의 성공을 결정하는 관건입니다. 공정한 게임은 작가가 작품 곳곳에 범인을 추측할 수 있는 단서를 제시하여 주의 깊은 독자라면 작가가 밝히기 전에 알아차릴 수 있도록 하여야 인정됩니다. 그런 면에서 이 소설은 충분히 공정하다고 하겠습니다. 만일 읽고 그렇지 않다는 생각이 드신다면 다시 한 번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전 두 번 읽어보니 단서가 여러 곳에서 나와 있었다는 걸 깨닫게 되더군요. 스포일러가 되기에 그것이 뭔지 밝힐 수 없어서 아쉽군요. '아니! 이런 것도 단서였어?'할만한 것들이 있는데 말이죠.


 이 소설엔 반전이 무려 두 개나 있습니다. 하나는 물론 범인에 관한 것이죠. 분명 단서를 놓치셨다면 전혀 예상 밖의 인물일 겁니다. 다른 하나는 두번째 의문 - 윤의현은 왜 나중에 가서 갑자기 예나를 위해 이만흠을 막으려 하는 것일까? - 연관된 것인데 이 반전은 저도 정말 놀랐습니다. 사실 전 범인은 예상했는데 이건 정말 전혀 예상 못했습니다. 작가의 재주가 아주 대단하다고 진심으로 느꼈습니다. 어쨌든 그래서 한 점의 거짓도 없이 가장 만족스런 한국 미스터리 소설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되더군요. 두 개의 반전이 독자에게 가져다 줄 충격을 위해서 작가는 서술 트릭을 썼습니다. 아가사 크리스티가 '애크로이드 살인 사건'에서 썼던 방법말이죠. 이 소설을 재밌게 읽으셨다면 '지문'도 분명 만족하실 겁니다.


 좋은 얘기만 마구 쓴 것인지도 모르겠는데, 척박한 한국 미스터리 소설의 풍토에서 오랜만에 이토록 마음에 쏙 드는 작품을 만나고 보니 없는 말, 있는 말 마구 지어내서라도 한껏 응원하고 싶은 심정입니다. 그러니 과한 칭찬에 눈살이 다소 찌푸려지더라도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주시면 고맙겠네요. 여하튼 이선영 작가의 다음 미스터리 작품이 정말 기다려집니다. 그 때도 지금처럼 열화와 같은 응원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면 좋겠어요. 후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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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1-05-03 0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여러 사람이 보고 쓴 글 봤습니다 책을 본 게 아니고 글을 봤다니... 제목인 ‘지문’은 뭘까 싶네요 그건 책을 봐야 알겠지요


희선

초딩 2021-06-04 2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피에 젖은 땅 - 스탈린과 히틀러 사이의 유럽 걸작 논픽션 22
티머시 스나이더 지음, 함규진 옮김 / 글항아리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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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를 아는 것에 있어선 종결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리 널리 알려져 있고 많이 연구된 것이라 하더라도 섣불리 이걸로 충분해 하면서 흙을 덮어선 안된다는 것을 말이다. 미국 예일대 역사 교수로 있는 티머시 스나이더의 ‘피에 젖은 땅’을 읽은 탓이다. 예전부터 아우슈비츠 수용소 학살로 대표되는 홀로코스트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해선 꽤 많이 읽었다. 물론 이 책에서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는 '블러드랜드', 즉 동유럽에 대해서도 익히 보았다. 그러나 이 책은 지금까지 과연 내가 뭘 알고 있었나 의문을 갖도록 만들었다. 무려 800여 페이지에 이르는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처음 듣는 내용들이 끝도 없이 쏟아졌던 것이다. 당연했다. 저자의 시선이 향하는 눈높이가 이전에 나온 책들과 달랐던 것이다. 여지껏 내가 만난 동유럽을 다룬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한 책들은 초점이 위에 있었다. 전쟁을 지도한 사람, 그 아래서 전략을 수립하고 전술로 수행한 사람 그리고 그들이 벌였던 전투. 이러한 군사적인 게 중심이었다. 그러나 이 책은 시야를 아래로 향하고 있었다. 이전엔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던, 전쟁에 휘말려 억울하게 목숨을 빼앗긴 사람들을. 그는 말했다. 이 책은 희생자들 스스로의 목소리를 소환할 것이며, 그들의 친구와 가족의 목소리 또한 울리게(p. 19) 할 거라고.



 그렇게 하자, 새로운 사실들의 대륙이 열렸다. 누가 어디서 어떻게 이겼느냐에 관한 지식만 갖고 있던 나는 이 책을 통해 처음 만나게 된 사실의 얼굴들을 확인하면서 충격과 당혹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학살로 인한 희생자의 규모는 내 생각 이상으로 아주 막대했고 그 학살을 수행하는 방법의 잔인성 또한 상상을 초월했다. 임산부나 아이들은 물론이고 심지어 아기까지 무참히 살육했다니! 더우기 천명도 아니고 만명 단위로 곳곳에서 굶겨 죽이거나 총살하거나 가스실로 보내 죽이는 것을 보고 절로 저자도 물었던 물음을 나 또한 할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그토록 많은 사람이 폭력적인 최후를 맞게 할 수 있는가(있었는가)?'(p. 682). 그것도 같은 인간이.


 티머시 스나이더의 '블러드랜드'는 그 의문의 대답을 찾는 궤적이다. 도대체 어떻게 단지 나와 다르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한 사람에게 인간의 얼굴을 오롯이 지워버릴 수 있었는가?

 그 추적은 다음과 같은 기준에 따라 전개된다.


 1) 과거의 어떤 사건도 역사적 이해를 초월할 수 없다. 또는 역사 탐구의 범위를 벗어날 수 없다는 점을 고수할 것.

 2) 당시 사람들이 선택할 수 있는 대안이 확실히 있었는지에 대해 숙고할 것.

 3) 다수의 민간인 및 전쟁포로를 학살한 스탈린과 나치의 정책을 시기순으로 정연히 따져볼 것. 이는 제국의 지정학에서가 아니라 희생자의 지리학에서 구성되는 문제다.(p. 21)


 정확히 소련이 처음 집단화 정책을 시작했던 1933년부터 '프라하의 봄'이 일어났던 1968년까지 모두 11개의 시기로 구분하여 블러드랜드에 일어났던 일을 담는다. 시작은 1933년, 소련이 열었다. 이것도 이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된 사실이었다. 홀로코스트는 오직 독일만 자행한 줄 알았는데 '독소전쟁'에서 대적했던 소련 또한 어마어마한 규모의 학살을 저질렀던 것이다. 그것도 독일보다 먼저. 소련은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기 전에 세 번이나 대대적으로 그러한 일을 감행했다. 1차는 집단화에 반발하고 저항하는 농민의 의지를 꺾기 위해서였고, 2차는 당시 실시한 계획경제의 성공을 국제 사회에 선전하고자 수출 목표를 여건 상 불가능한데도 무리하게 달성하기 위해서였다. 그로인해 전자에선 많은 이들이 정든 고향에서 강제추방 되었고 결론이 지어진 3인으로 구성된 '트로이카' 재판에 넘겨져 사형을 당했다. 후자에선 오직 목표 수치를 맞추기 위해 특히나 곡창 지대로 유명한 우크라이나에서 강제적으로 굶김을 당했다. 애초에 소련의 사회주의는 농민의 계급적 해방과 자유를 위한 것이었지만 오직 지도자 스탈린의 무오류성을 입증하기 위해 평범한 농민들마저 당국의 손에 의해 계급의 적인 '부농'으로 둔갑되어 처형되었고 살던 곳에 머무를 자유와 내가 생산한 것을 먹을 자유마저 박탈당했던 것이다. 여기서부터 이미 소련은 만인을 위한 사회주의가 아니었다. 오직 스탈린 하나만을 위한 사회주의였다. 이건 뒤이은 1938년과 1939년에 일어난 3차 학살에서 더욱 확실하게 증명되었다. 스탈린은 5개년 계획이 자신이 바라는만큼의 성과를 내지 못하자 그 이유를 블러드랜드에 거주하는 소수 민족 탓으로 돌려버렸다. 자기가 잘못해서가 아니라 소수 민족이 소련의 적과 결탁하여 방해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무려 25만 명이 소수 민족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목숨을 잃었다.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는 마르크스주의자의 주장은 이제 통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사회경제적 계급이 아닌 명목상의 개인적 정체성이나 문화적 연관성 때문에 유죄가 되었다.(p. 195)

 초기 소련은 박해받는 인종과 민족에게 기꺼이 자신의 문을 열어주는 나라였다. 그렇게 '일체의 차별을 철폐한 다문화 국가'(p. 171)로 다른 체제보다 우월하다는 걸 내세우기까지 했다. 그런데 이젠 뻔뻔해져 있었다. 소련이 직접 민족 말살 정책을 실시한 건 내부적으로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그러나 스탈린은 상관하지 않았다. 이미 민초들의 반응 같은 건 그에게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까마득한 저 아래에 있었다. 같은 인간이지만 스탈린이란 개인과 블러드랜드에 사는 평범한 개인의 차이란 실로 엄청났다. 




 여기에 서쪽으로 스탈린만한 권력을 가진 또 한 명의 개인이 있었다. 바로 독일의 히틀러다. 그 또한 염원하는 제국을 만든 위대한 지도자란 미래의 광휘에 눈이 멀어 아래의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자다. 그에게 인간이란 설령 자국민이라 하여도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그가 인간을 판단하는 관점은 오직 하나 유용성이었다. 거기에 유대인은 독일 제국 건설에 하나도 도움이 안 되는 걸림돌로 보였다. 그는 그걸 유럽에서 치워버려야겠다고 결심했다. 원래는 아프리카에 있는 마다가스카르 섬에 모조리 격리시켜버릴 계획이었으나 여의치 않자 일단 폴란드를 다른 유럽 유대인들을 최종 제거 전에 모아두는 집단거주지로 삼고자(p. 202) 소련과 불가침협약을 맺은 뒤 침공한다. 원래 사회주의는 반파시즘을 천명하고 있기에 소련은 독일 나치와 손을 잡아서는 안되었지만 바로 눈 앞으로 당도한 영토 확장의 유혹은 스탈린에게 너무나 달콤했다. 소련은 불가침협약과 동시에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을 맺었고 리투아니아를 차지했다. 스탈린의 눈에 블러드랜드의 인민은 더이상 사회주의를 함께 건설하는 동료가 아니었다. 히틀러와 똑같이 오직 자신의 위상을 드높일 소모품에 지나지 않았다. 그 둘의 오만하고 비정한 시선 아래에서 수많은 이들이 게토로 강제 추방 되거나 목숨을 잃었다. 때로는 단지 유대인이란 이유로 나치 독일에 의해 공개적으로 또 때로는 다만 지식인이란 이유로 소련에 의해 은밀하게.


 히틀러와 스탈린, 두 개인에겐 야망이 있었다. 미국과 어깨를 견주는 강대국의 지도자가 되는 게 꿈이었다. 그런데 영국이 문제였다. 제국이 되려면 국토의 식량과 자원이 한정된 이상 바깥의 것들을 가져올 수 있는 해외 통로가 필수적이었다. 그러나 막강한 해군력으로 해상을 장악하고 있는 영국 때문에 그건 불가능했다. 어떻게 바다로 세계 시장과 안정되게 연결되지 않고서도 번영을 구가하며 그를 통해 자신의 지배권을 영구히 확보할 것인가가 화두가 되었다. 그렇게 되려면 경제적으로 자급자족이 가능한 광대한 영토가 필수적(p. 283)이었다. 히틀러의 눈에 마침 그런 나라가 보였다. 바로 소련이었다. 거기 있는 슬라브 민족을 모조리 제거하고 독일인을 이주시키면 전쟁으로 인한 자국의 불만을 잠재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엄청난 규모의 식량과 자원 창고를 얻을 수 있을 터였다. 히틀러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선 오늘의 막역한 동지라도 얼마든지 적으로 삼을 수 있었다. 그는 1941년 6월 22일, 소련을 침략하는 '바르바로사 작전'을 실행한다. 이른바 '독소전쟁'이 개전된 것이다.


 하지만 언제나 일이 계획한 대로 흘러가진 않는다. 속도가 문제였다. 당초 계획은 12주 안(p. 302)에 전쟁을 끝낼 작정이었지만 그렇게 되지 않고 질질 늘어졌다. 원체 용의주도하지 못했던 나치 독일은 이런 상황의 대비책을 전혀 세워두지 않았고 당연하게도 독일군이 먹을 식량은 매우 부족해졌다. 이에 독일은 1933년에 소련이 우크라이나에서 했던 일을 반복했다. 자기들의 식량을 확보하기 위해 소련이 구축한 집단화를 그대로 이어받아 거기에 사람들을 몰아넣고 강제적으로 굶겨죽인 것이다. 레닌그라드가 가장 심한 피해를 입었다. 독일은 도시 주변에 지뢰를 매설하여 탈출로를 봉쇄하고 그 안의 시민들이 굶어죽을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결국 포위가 끝나는 1944년까지 무려 100만명의 주민이 목숨을 잃었다(p. 309) 이런 무자비함은 민간인에게만 행해지지 않았다. 소련인 전쟁 포로 또한 그 대상이었다. '독소전쟁' 동안 나치 독일이 만든 포로수용서는 오직 한 가지 목적만을 가지고 있었다. 그건 수용된 포로들의 삶을 끝장내버리는 것(p. 316)이었다.


 이러한 처사는 나치 독일이 인간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그걸 티머시 스나이더는 이렇게 전하고 있다.


그것은 특정 인간들은 없애버려야 할 식충일 뿐이며 슬라브인, 유대인, 아시아인들과 그 밖에 소련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인간 이하의 존재로, 소모품보다 못한 것들이라는 논리였다.(p. 319)


 이 논리는 독일인에게 한 번도 반박당하지 않았다. 대놓고 과오라고 말하는 목소리는 없었다. 다들 얌전히 추종했고 수족처럼 움직였다. 더러는 하달받은 목표량보다 더 많이 살상하는 이들도 있었다. 마치 히틀러가 머리가 되고 각 독일인들은 저마다 손 발 몸통 등이 되어 거대한 육체를 이룬 듯했다. 토머스 홉스가 국가를 비유한 성경 속 괴수 리바이어던을 묘사했던 그대로. 가히 '전체주의'라 부르지 않을 수 없는 형상이었다. 소련도 다르지 않았다. 블러드랜드는 두 전체주의의 거인들에게 무참히 짓이겨지고 있었고 육체의 부분이 되지 못하는 타자들은 죽음만이 허용되었다.




 애초에 이 거인을 태어나게 한 것은 공동체를 위한 이념이었다. 하지만 이제 거인은 이념이 아니라 꼭대기에 자리잡은 한 개인의 욕망으로 움직였다. 그가 원하는 건 모두가 원하는 것이었다. 누가 이롭고 방해가 되는가에 대한 그의 규정 역시 모두의 규정이 되었다. 지금의 시선으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나치 독일의 '마지막 해결책'은 그래서 가능했다. 나치 독일은 패전의 기미가 짙어지자 더욱 유대인 대량학살에 박차를 가했다. 본래 패전의 가능성이 높아지면 훗날에 살길을 도모하고자 관대함을 보이기 마련인데 나치 독일은 거꾸로 나아갔던 것이다. 패색이 차츰 짙어질 때마다 마치 기를 쓰듯 한 명이라도 더 유대인을 학살했다. 이런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은 히틀러의 망상 때문이었다. 그는 독일이 패할 것을 알았지만 유대인을 한 명이라도 더 죽이면 그만큼 승리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지 않아도 폴란드엔 베우제츠, 트레블린카, 소비부르에서 수용소를 빙자한 학살 공장이 운영되고 있었지만 그건 식량 부족 문제에 대처하기 위해서였고 때때로 노동력 수급을 위해 멈춰서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 온전히 대량 학살 그 자체만을 위한 수용소가 만들어졌다. 그것이 바로 그 유명한 아우슈비츠 수용소다. 단 한 사람의 부조리한 망집이 탄생시킨, 오직 폴란드 외의 유대인 학살만이 목적인 장소. 유대인들은 수용소에 도착하자마자 마치 컨베이어 벨트에 올라탄 것처럼 그대로 가스실로 보내졌다.(우리는 유대인이 수용소에 얼마간 있다가 살해된 것으로 알고 있지만 저자에 따르면 실상은 그렇지 않다고 한다. 노동력을 제공할 수 있는 유대인들만이 수용소에서 생활했고 그렇지 않은 이들은 모두 바로 처형되었다고 한다.(p. 676))


 어쩌면 광기라고 할 수밖에 없는 이 학살 때문에 유독 '아우슈비츠 수용소'만이 우리 뇌리에 각인되었고 오직 그곳만이 존재한다고 여기게 되어버렸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별안간 출현한 것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나치 독일이 해왔던 것의 연장선 상에 있었고 그 정점에 달한 것이라 봐야 옳았다. 또한 앞서 말한 것처럼 소련도 엄연히 독일과 대등할 정도로 대량 학살의 집행자였다. 그러나 우리에게 그런 이미지가 없는 것은 소련은 비밀리에 움직였다는 것과 스탈린이 끝까지 가야 직성이 풀리는 히틀러와 달리 필요할 때 자제할 줄 알았기(p. 686) 때문이다. 이러한 둘의 성향 차이가 결국 둘의 운명을 갈랐을지 모른다. 스탈린 역시 제국을 꿈꿨으나 이건 확장 보다는 바야흐로 점점 거세지는 서양 제국에 맞서 자기의 체제를 수호하려는 게 일차적인 목적이었다. 그는 지키는 것에 강박적이었다. 이것이 전후 폴란드를 비롯한 블러드랜드의 사람들에게 암울한 운명의 장막을 드리웠다. 폴란드의 유대인 공산주의자가 대표하듯이, 체제에 조금이라도 위협이 될 것 같으면 설령 같은 이념의 헌신자라고 할 지라도 제거해 버렸던 것이다. 히틀러는 자기 생애에 구상한 유토피아를 이룩하지 못하는 걸 걱정했지만 스탈린은 누군가 자기의 자리를 빼앗지 않을까를 염려했다. 전체주의가 하나의 거대한 개인이라는 비유는 여기서도 연유한다. 나치 독일도, 소련도 한 개인의 성향에 따라 서로 다른 길을 걸었으니까 말이다.


 내가 글에서 개인을 자주 호명하는 것은 티머시 스나이더의 이 책 또한 그런 개인을 역사의 무대 위로 복원하고자 하는 것에 동조해서다. 물론 그가 데려오고자 하는 건, 지금까지 역사의 어둠 속에 내버려졌던 개인이다. 두 전체주의 체제 사이에 끼여 번갈아가며 억울하게 희생된 이들. 당시 역사의 가장 커다란 피해자였던 그들은 이름조차 한 번 호명되지 못하고 망각의 흙더미 아래 묻혀있었다. 티머시 스나이더는 그 흙을 모두 걷어내고 바깥에 얼굴을 드러내어 이름을 불러주려 한다.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김춘수의 시, '꽃'이 말하듯이 호명은 부르는 대상에게 유의미한 실존을 가져다 준다. 그는 그렇게 되살리고 싶은 것이다. 사람들의 기억 속에 꼭꼭 새겨두기 위하여. 비극적인 역사는 망각과 억압에서 반복되기 때문이다.


 역사가 없어지면, 숫자는 부풀려지고 기억은 억눌려지면, 공포스런 상황이 찾아온다.(p. 714)

 그가 책 곳곳에서 필요할 때마다 희생자 한 명의 이름을 호명하면서 그 혹은 그녀의 삶을 삽입하는 것도 그런 까닭이다. 티머시 스나이더는 이것을 통해 지금까지 역사 서술에서 재현의 중심을 차지했던 가해자 개인들에 맞서 희생자 개인을 대조시킨다. 이는 내가 보기에 서로 대등한 개인으로 부각시키려는 의도이다.(나 또한 그래서 히틀러와 스탈린의 개인성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글을 썼다.) 마땅히 그들에게도 히틀러, 스탈린에 대해 쏟는 것만큼 관심을 분여해야한다는 뜻으로. 문득 궁금해진다. 그가 이토록 개인적인 차원을 부각시키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어쩌면 그가 그것을 통해 블러드랜드의 비극을 저지할 대안을 슬쩍 내놓고 있는 건 아닐까? 이렇게 추측하는 건, 하나가 지배하는 거대한 몸체에 달라붙어 각자가 가진 고유한 얼굴을 포기하지 않았다면 전체주의가 자행한 비극을 막을 수 있었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것에 생각이 미쳐서다. 


 개인의 위상이 한없이 작아질 수밖에 없는 전쟁이라서 그런 것은 아니다. 티머시 스나이더가 정확히 지적하는 대로 장차 히틀러와 스탈린의 전체주의로 자라날 싹은 이미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돋아나 있었다. 그 전쟁은 당시 유럽인들에게 미증유의 것이었다. 난생 처음 겪어보는 총력전으로 전투원과 비전투원의 구별은 물론, 경제와 정치, 국가와 시민 사회의 구별이 더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참전한 모든 국가는 전대미문의 규모로 임했으며 그 압도적인 동원과 조직 속에서 개인의 의미는 미미해졌다. 뿐만 아니라 예전엔 포로로 잡히면 부모나 형제에게 몸값을 받아 풀려날 수 있어서 군인 보단 개인으로 존재할 수 있었지만 이젠 그런 거래 없이 오직 패배한 부대의 일부분이 되어 1차 세계대전 때 처음 생긴 포로수용소에 이름이 아니라 번호로 불리면서 속박되었다. 더구나 이 때 개발된 독가스는 얼굴을 확인하기도 전에 많은 군인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해버렸다. 여기서부터 사람은 수치로 기록되었다. 규모가 그랬던 것만큼 개인 하나를 식별할만한 여유도, 이유도 없었다. 개인은 그렇게 고유의 가치를 잃고 자기보다 훨씬 더 큰 것의 부분이 되어갔다. 전쟁의 성격이 사회 전체의 전면적 동원으로 달라져버렸기에 이제 유럽의 국가들은 사람들을 필요할 때마다 차출할 수 있도록 애국심이든 민족주의든 이념이든 뭐든 다 이용해서 일원으로 만들었고 거기에 발맞춰 개인들은 자신보다 자기가 속한 전체를 더 중요하게 여기도록 설득되거나 선동되었다. 이것은 흘러흘러 마침내 전체주의를 낳았다. 또한 개인이 지닌 고유한 본질 보다 외피를 중시하는 것은 타인 또한 아주 사소한 이유로도 자신과 같은 인간으로 보지 않도록 이끌고 말았다. 


 한 마디로 각 개인 간의 거리가 모두 없어진 것이다. 한 몸이 되어 머리의 존재가 생각하는 대로 생각했고 욕망하는 대로 욕망했다. 이제 그들의 눈은 자신의 눈이 아니라 달라붙은 몸의 눈으로 보았고 다른 몸의 인간들은 인간이 아니라 그냥 다른 몸이 되었다. 너무 단순한 결론인지도 모르겠지만, 근본적으로 블러드랜드의 참혹한 비극은 개인이 전체와 분리되지 못하여 일어난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비극을 또 언제든 양산할 수 있는 몸을 파훼하는 방법은 간격을 형성하는 데 있다. 분리와 거리두기로 개인의 고유성을 복원하고 보존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 개인으로 하여금 달라붙었던 몸의 생각과 시각의 복제에서 벗어나도록 하고 자신만의 독립적인 사고와 시선으로 다른 인간을 대등하게 바라보게 하는 것이다. 여기엔 더이상 그 어떤 외부적 규정의 간섭이 없다. 오직 서로 함께 경험하면서 생성된 자신만의 견해가 있을 뿐이다. 직접 보고 느낀 것으로 층층이 이뤄져서 웬만하면 흔들리지 않는. 이러면 아무리 힘있는 자가 자신의 규정을 강요해도 저항할 수 있는 자유가 생길 것이다. 우리는 이 자유를 누려보지 못한 이들의 모습을 책 후반에서 확인한다. 전쟁 후, 블러드랜드의 폴란드 유대인 공산주의자들은 스탈린이 자신에게 어떤 꼬리표를 갖다 붙일까 전전긍긍하며 그 규정에서 벗어나려고 스탈린의 손가락이 가리키자마자 충성의 증명으로 같은 유대인들을 핍박했다. 점령자들이 바뀔 때마다 카멜레온처럼 색깔을 바꿔 이쪽 저쪽에 달라붙기 바빴던 부역자들도 있었다. 모두 너무 오랫동안 달라붙어 있어서 독립의 기회가 찾아왔을 때조자 그걸 붙잡을 용기를 못냈던 이들이었다. 그렇다고 그들의 안전이 언제까지나 보장되진 못했다. 몰로토프처럼 제 아무리 높은 자리에 있어도 조석변개하는 스탈린의 규정 앞에선 자신을 지킬 수 없었다. 이것이 궁극의 운명이라면 처음부터 그 길을 걷지 않는 도리밖에는 없을 것 같다.


 그러므로 티머시 스나이더는 개인에 집중한다. 그 모든 사람들은 그 어떤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절대무이(絶代無二)의 주체들이며 단순히 희생자라는 범주에 넣어 뭉뚱그려서 말해선 안된다고 말이다.


  희생자들은 사람이었다. 그들과 진정으로 동일시되고 싶다면, 그들의 죽음만 볼 게 아니라 그들의 삶을 봐야 한다.(p. 703)

 그래서 그가 사이 사이에 살아있는 희생자 개인의 삶을 누벼놓았던 것이다. 그들이 겪은 비극과 느낀 참혹함을 감정적으로 공명까지 할 수 있도록 생생하게. 우리는 그것을 통해 단지 희생자의 리스트 속 한 줄로 남아 있는 존재가 아니라 우리와 똑같이 가족을 사랑하며 소박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으로 보게 된다. 그렇게 하여 더욱 그들의 삶을 무참하게 끝장낸 비정한 폭력이 어디서 연유한 것인가를 곱씹게 만들고 다시는 그와 같은 죽음을 초래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인간에게서 인간의 얼굴을 지워 사물로 만드는 일을 경계할 것이라 다짐케 한다. 그리고 나와 다르다고 해서 상대에게서 인간성을 벗겨내기 전에 그가 아무리 불가해하더라도 헤아림의 노력을 거두지 않고 대화를 시도해야 하는 것 또한. 물론 귀찮고 어려운 일이다. 그래도 이 한 걸음이 모이고 쌓인다면 블러드랜드의 비극이 다시 반복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다른 인간을 인간 이하의 존재라고 부르는 사람이 있다면, 그 자신이 인간 이하다.(...) 그런 유혹에 굴복해 다른 사람들을 인간이 아니라고 규정하는 일은 나치의 입장으로 한 발짝 다가가는 것이다. 물러서는 일이 아니고 말이다. 다른 사람들을 이해 불가능하다고 보는 것은 이해를 포기하는 일, 다시 말해 역사를 버리는 일이다.(p. 703)

 티머시 스나이더의 안내를 따라 여기까지 이르고 보니, 역사를 알아가는 것이 단순한 과거의 복기가 아니라 언제든 재발할 수 있는 과거의 참상을 막는 노력이기도 하다는 걸 선연히 깨닫는다. 더구나 블러드랜드에서 비극을 가져온 것은 현재도 횡행하고 있기에 그가 재현한 역사와 그를 통한 가르침에 귀 기울이는 건 더욱 긴요한 일이다. 얼마 전 미국에서 있었던 'BLACK LIVES MATTER!' 사건이나 최근 단지 아시아 여성이란 이유로 총격이나 구타를 가한 사건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은가. 그렇지 않아도 어떤 이들은 요즘 들어 우익화가 날로 심화되고 타자에 대한 적대가 늘어가는 유럽을 보며 흡사 제2차 세계대전이 벌어지기 전 같다고 말하기도 한다. 블러드랜드의 비극은 생각하는 것만큼 멀리 있지 않다. 사이드미러에 쓰인 글대로 정말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면 요즘 세상은 나와 다른 이들에 대한 차별과 적대를 조장하는 가짜 뉴스들로 가득하다. 여기에 현혹되지 않고 자신의 머리로 생각하며 타자에게 먼저 공존을 위한 대화를 건네는 작지만 더없이 소중한 노력들이 필요한 때다. 바실리 그로스만이 등장 인물의 입을 빌려 한 다음과 같은 말이 모두의 입에서 울려나올 때까지.


  "사람이다. 그들도 사람인 것이다. 이제 우리 모두가 사람임을 알았다.(p. 6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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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1-05-03 0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쟁 때는 사람이 사람으로 보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어딘가에서 전쟁 때 사람을 죽이고 싶은 사람은 죽인다고 한 말을 보기도 했는데... 그런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겠지요 전쟁을 겪고 충격을 받은 사람이 많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숫자가 아닌 사람을 봐야 할 텐데... 이건 전쟁 때만 그래야 하는 건 아닌 듯합니다


희선

희선 2021-05-12 0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일로이 님... 우수작 축하합니다 기쁘시겠습니다


희선
 
여행자
울리히 알렉산더 보슈비츠 지음, 전은경 옮김 / 비채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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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저 타고난 정체성 하나 때문에 일상의 모든 순간이 공포로 바뀌어 버리는 일이 인류 역사에는 반드시 존재한다. 만일 당신이 흑인 노예 제도가 횡행하던 미국의 남부에서 흑인으로 태어났다면 그랬을 것이다. 자녀나 형제 혹은 부모가 다른 농장에 노예로 팔려가도 무력하게 바라만 보아야했을 것이며 동작이 조금만 굼떠도 등으로 쏟아지는 채찍 세례를 감내해야했을 것이며 그렇다고 대거리는 물론이고 백인의 눈을 감히 쳐다봤거나 사소한 말실수 하나라도 했다간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우린 그걸 옥타비아 버틀러의 '킨'을 통해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다. 물론 일본이 무단 통치할 때 태어난 소년과 소녀 또한 일본군에 의해 언제 강제 징용이나 위안부로 끌려갈지 모르는 무시무시한 일상이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나치 독일 시절의 유태인 또한 마찬가지이리라. 1930년대에 그들이 독일을 통치하자 거기 사는 유태인은 삽시간에 독일인이 아니라 다만 유태인이 되어버렸다. 1차 세계 대전 때 유태인들은 유태인이 아니라 독일인으로 독일을 위해 군인이 되어 그 참혹한 서부전선에서 싸웠지만 그런 사실들은 하나도 인정되지 않았다. 나치에게 중요했던 건 유태인이 뭘 했느냐가 아니었다. 그냥 유태인으로 태어났다는 것만 중요했다. 바퀴벌레를 잡을 때 우리는 성별이나 지위 고하를 따지지 않는다. 나치에게 유태인이 그랬다. 유태인으로 태어났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청소 대상이었고 체포되는 족족 그들은 강제수용소로 끌려갔다.


 울리히 알렉산더 보슈비츠의 소설, '여행자'는 바로 그런 일상을 담는다.



 1930년대, 나치 독일이 자국 내 유태인이 외국으로 달아나지 못하도록 국경을 모조리 폐쇄해버린 시기를 배경으로 하는 그 소설에서 우리는 질버만이라는 유태인과 동행한다. 그는 1차 세계 대전 때 독일을 위해 독일 군인으로 서부전선에서 용감히 싸웠다. 그 때 동료 군인이었던 베커와 함께 꽤 벌이가 잘 되는 사업체도 운영 중이다. 질버만은 베커와 함께 역에서 자기가 타고 갈 기차를 기다리는 모습으로 처음 등장한다. 그 때 그는 그저 도박 중독에 빠져 사업 운영에 차질을 빚고 있는 베커를 탐탁지 않아하는 생각만 하고 있었다. 앞으로 자신이 타게 될 기차에서 영원히 벗어나지 못하는 운명이 되리라는 걸 조금도 예감하지 못한 채.


 물론 그는 바보가 아니다. 공공연히 유태인이라고 말할 수 없는 일상이 되었다는 건 뼈져리게 알고 있다. 곳곳에서 유태인이란 이유 하나만으로 체포되는 걸 허다하게 보았으니까 그러지 않을 수 없었다. 다행히 자신은 아리안인으로 보이는 외모라 그러한 기습적인 체포에선 살짝 비켜나 있었다. 하지만 그 외모 때문에 당시 평범한 독일인들이 얼마나 유태인을 혐오하고 있었는지에 대해선 가득 체험하고 있었다. 외모만 보고 자신을 그저 아리안인이라고 여긴 독일인들이 평소 자신이 가지고 있는 유태인에 대한 생각들을 숨기지 않고 토해냈기 때문이다. 그런 사정이니 아무래도 질버만 또한 독일을 떠날 것을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지 않아도 프랑스 파리에 있는 아들에게 자신과 아내를 위한 비자 발급을 부탁한 상태다. 그러나 아들은 그걸 쉽사리 구하지 못하고 있고 급기야 질버만의 집이 유태인 체포를 위해 돌아다니는 청년단원들의 습격을 받는다. 이제 집에 있을 수도 없는 상황. 그렇게 질버만은 계속 기차를 타고 떠돌아다니는 신세가 된다. 제목처럼 '여행자'가 된 것이다. 


 베를린에서 함부르크,

 함부르크에서 베를린,

 베를린에서 도르트문트,

 도르트문트에서 아헨,

 아헨에서 도르트문트,

 이런 식으로 계속할 수 있을 거야. 나는 이제 여행자다. 끝없이 계속 움직이는 여행자.

 나는 이미 이주했어.

 독일 철도로 이주한 거지.(p. 214)

 

 그러나 낭만적인 느낌은 전혀 아니다. 그가 여행하는 건 원해서가 아니라 그 어디에서도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아서 그런 것이니까. 그는 단 하룻밤도 몸을 편히 의탁할 수 있는 집이 없는 존재요, 맘 놓고 발들 디딜 수 있는 땅이 없는 존재다. 단골로 이용했던 호텔은 유태인이라 더이상 방을 내줄 수 없다고 하고 아내가 피신한 아내 오빠 또한 아내를 만나기 위해 단 하루만이라도 재워달라는 질버만의 간구를 차갑게 거절한다. 간신히 국경을 넘어 벨기에까지 갔지만 거기서도 벨기에 경찰은 망명을 요청하는 질버만을 묵살하고 독일로 다시 돌려보낸다. 인간 관계도 마찬가지다. 믿었던 친구 베커는 자신은 당원이고 질버만은 유태인이라는 점을 악용하여 헐값에 사업을 양도 받는다. 이제 자신의 자랑이던 사업에서마저 쫓겨난 것이다. 그는 지금까지 살면서 이뤘던 모든 것을 잃었다. 가정, 사업, 친구, 평판 그 모두를. 단지 유태인이란 이유 하나로. 어디서든 그를 맞이하는 건 냉혹한 차단의 손바닥 뿐이다. 


 그야말로 그는 인간 영역에서 순전히 배제된, 호모 사케르가 된 것이다. 독일엔 인권을 위한 법이 있지만 질버만을 위한 건 아니다. 기차에서 만난, 처음으로 연애 감정까지 느끼게 만들었던 한 여인과의 대화에서 그 사실은 잘 드러난다. 그는 자신을 시민이라고 끝까지 주장하며 시민의 윤리를 도저히 저버릴 수 없다고 하지만 독일인의 눈에 그는 더이상 시민이 아니다. 


 "어쨌든 난 아웃사이더가 아닙니다. 버릇을 고칠 순 없어요. 나는 시민으로 태어났고 시민으로 죽을 겁니다. 도주하긴 하지만 시민이에요. 그건 확실합니다."(p. 281)


 그를 죽여도 살인죄로 처벌되지 않는 호모 사케르에 불과하다. 조르지오 아감벤을 통해 호모 사케르란 말을 처음 들었을 땐, 그것의 의미가 잘 와닿지 않았다. '여행자'를 읽고서야 비로소 호모 사케르적 상황을 선명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선명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작가, 울리히 알렉산더 보슈비츠는 자기가 직접 겪었던 자전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이 소설을 집필했으니까 말이다. 그만큼 상황도 현실적이고 묘사도 생생하다. 무엇보다 이 소설의 압권인 것은 등장인물의 심리 묘사다. 목숨마저 위태로운 상황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산적인 손해를 보는 건 싫어하는 그야말로 소시민의 심리가 잘 그려져 있다. 질버만의 내면 고백을 읽다보면 그냥 내 눈 앞에 질버만이라는 사람이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것 같은 기분마저 들 것이다. 그렇게나 구체적으로 또 피부에 와닿게 주인공과 그를 둘러싼 상황을 재현하고 있으므로 우리는 이야기에 깊이 빠질 수밖에 없고(이 소설은 정말 몰입감이 대단해서 중간에 그만두는 게 도저히 불가능하다.) 그것을 통해 작가가 독자에게 전달하고 싶어하는 사실, 나치 독일 치하에서 유태인이 어떤 일을 겪었는가(그야말로 호모 사케르란 말 말고는 달리 표현할 말이 불가능한)에 대해 여실히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행자'는 고발 소설이자 역사 소설이다. 후자에 대해선 픽션이지만 이 소설만큼 나치 독일 시절의 유태인 상황을 생생하게 체득시켜 주는 것은 또 없기에 아무래도 난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프리모 레비가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의 유태인들의 삶을 밀도 높게 그려내고 있는 것과 똑같이 동시대 독일에서의 유태인 삶을 그려내고 있으니까.


 그리고 프리모 레비의 소설만큼 이 소설도 정치와 우리의 삶이 전혀 무관하지 않으며 어떤 정치 현실을 만드느냐에 우리 일상의 명암이 결정된다는 것도 확연하게 깨닫도록 한다. 질버만은 자기보고 유태인이라고 말하는 사람에게 한결같이 이렇게 항변한다. "난 독일인이야. 세계 대전 때는 독일 군인으로 서부전선에서 싸웠던 사람이라고!" 그에게 정말 중요했던 정체성은 유태인이 아니라 독일인이었다. 그는 아리아인 여인과 결혼했고 종교 또한 기독교였다. 유태인은 그에게 그냥 공기와 같은 것이었다. 필수적이라는 말이 아니라 존재하지만 자기 삶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뜻에서. 그렇게 그는 나치가 아니었으면 유태인이라는 사실에 전혀 신경쓰지 않고 살 것이었다. 그것이 설마 자신의 목숨까지 잃게 만드리라고는 가장 무서운 악몽에서조차 나오지 않을 장면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되었다. 나치가 독일을 장악하는 바람에.


 그는 호텔 로비에서 한가로이 앉아있는 이들을 보며 이런 생각을 한다.


  그래, 너희 외국인들이 여기 앉아 있구나. 질버만은 생각에 잠겼다. 평온한 사람들의 집을 습격해서 감옥이나 강제수용소로 보내는 게 너희에게는 평범한 일상이 아니겠지. 너희 고국에서는 신임투표할 때 감독관이 옆에 기관총을 두는 일도 없을 거야. 하지만 여기 우리에게 그런 일이 일어나면 너희는 그저 독특하다고 생각할 뿐이야. 사람들이 너희에게는 아무 짓도 하지 않으니까. 내게는 위험으로 가득한 원시림이 되어가는 이 호텔도 너희에게는 안락한 공간이라서, 평소대로 아무 생각 없이 지내면 돼. 그러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가면, 너희는 제3제국에서도 잘 먹고 잘 지낼 수 있다고 말하겠지(p. 52 ~ 53)


 질버만도 그런 외국인이었을 것이다. 어떤 계층이, 이웃이 비민주적인 처사로 낙인이 찍혀 사라질 때 무심했을 것이다. 자신의 평온한 일상은 전혀 침해받지 않았으니까. 어쩌면 그것이 사업상의 이익을 더 많이 가져다주어 모른 척 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하나 둘 내버려 두다 보면 어둠의 수면은 차츰 차츰 차 올라서 결국 자기마저 삼켜지게 된다. 견제와 균형의 원리가 지켜지지 않는 독재의 권력 앞에선 그 어떤 일상의 평온도 아주 얇은 유리로 보호되고 있을 뿐이니까. 지금도 벌어지는 미얀마 국민이 처한 일상이 그걸 너무나 잘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그 미얀마를 통해, 또 소설 '여행자'를 통해 우리는 뼈가 저리도록 깨달아야 한다. 누구나 '질버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별안간 자신이 호모 사케르가 되고 모든 일상이 파멸과 죽음의 암흑으로 돌변할 수 있다는 것을.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의(국경을 초월하자는 의미에서 사회란 말을 일부러 빼버렸다.) 가장 작고 약한 자가 당하는 비민주적이고 불합리한 처사에 무심해선 안되면 오로지 사익 추구를 위해 권력을 잡으려는 이들을 경계하고 배제시키려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정치에 대한 관심과 참여는 결코 내 일상과 유리된 일이 아니다. 오히려 내 일상의 평온을 보호하고 보장하기 위한 근본이 되는 움직임이다. 소설 '여행자'는 이러한 각성을 역에 도착하는 거대한 열차의 존재감으로 도래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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