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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브 키터리지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지음, 권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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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크로스비'로 가는 길 

 회의론자로도 유명한 영국의 철학자 데이비드 흄은 '귀납법'을 두고 그것은 인간이 하루하루를 생존하기 위해 만들어낸 '발명품'이라고 얘기했다. 그러니까 어제도 있었고 오늘도 있었으니 내일도 있을 것이라는 이 단순한 논리는 정말은 내일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길지 전혀 알 수 없다는 그 막연한 두려움을 과거의 사실을 통해 애써 잊어보려는 작위적 환상에 다름 아니라는 것이다. 아니나다를까 마치 이러한 흄의 말을 방증이라도 하듯, 후일 버트란드 러셀은 귀납법이 가진 오류를 이렇게 말한다. '어제도 먹이를 주었고 오늘도 먹이를 주었다고 해서 닭은 내일도 주인이 먹이를 줄 것이라 기대하겠지만 내일은 주인이 그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 버릴지도 모른다' 

 인생은 변화무상하다.

 헤라클레이토스의 말대로 우리는 두 번 다시 같은 강물에 발을 담글 수 없다. 내일 일을 전혀 모르는 우리에겐 삶이란 문은 계속 불확실성으로 열려있다. 톨스토이의 우화에도 나오지 않았던가?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라는 신의 물음에 그것은 바로 '미래를 아는 능력'이라고!

 삶에 내재된 미래의 불확실성은 인간에게 자신의 유한성을 자각하도록 만든다. 문제는 그 유한성을 직면했을 때의 반응이다. 그것은 스페인의 철학자 우나무노의 말마따나 유한성의 자각이 무한성의 동경을 낳아 그렇게 종교적이 되도록 만들 수 있다. 그러나 한 편으론 네델란드의 철학자 반 퍼슨의 말처럼 오히려 그 무한성을 애써 잊도록 만들수도 있다. '오컴의 면도날'과도 같이 불가해한 것은 그저 무시해 버리는 것이다.

 2009년의 퓰리처 수상작이기도 한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올리브 키터리지' 또한 삶의 불확실성을 마주한 사람들의 반응을 담고 있는 소설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문득 드는 의문이 있다. 이런 삶의 불확실성이란 우리네 삶에서 어떻게 나타나는 것일까?

  삶의 불확실성이 인간의 유한성을 자각시키는 건 바로 그 불가해함에 있다. 앞서 톨스토이의 우화에서 나타나듯이 그것은 인간이 알 수 있는 영역 밖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무한성'과 연결되기도 한다. 철학자들은 일찌기 이 무한성에 대해 사유했었다. 하이데거에 이르러서는 그 '무한성'이 바로 '타자'라는 존재 자체가 된다. 즉, 우리가 내일 내가 어떻게 될 지 도저히 알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내 앞에 나타나는 타자에 대해서도 우리는 도저히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속은 모른다'라는 속담도 있듯이 타자란 마주한 우리에게 있어 완전히 불가해한 영역 속에 있다는 것이다. 레비나스 역시 '타자의 얼굴'이야 말로 우리를 무한성에게로 인도하는 체험이라고 말했을 정도로 말이다. 

 하이데거와 레비나스의 말이 옳다고 한다면 우리가 늘 마주하게 되는 사람들의 얼굴이란 그거 하나 하나가 우리에게 있어 유한성을 자각시키는 무한성의 체험이 된다. 그들의 얼굴은 우리에게 우리의 세계란 것이 그저 하나의 단일한 개체에 불과한 것임을 끊임없이 환기시킨다. 그 환기 속에서 우리는 앞에서 얘기한 것과 같이 단순하게 말해서 두 가지 반응중의 하나를 하게 된다. 즉, 나의 유한성을 자각하고 타자를 받아들이게 되거나 아니면 타자를 무시하여 내 세계를 온전히 지키는 것이다.   

 바로, 이 소설 '올리브 키터리지'도 그와 같은 것을 담고 있다. 아마도 이 소설이 단순히 주인공의 이름인 이유도 어쩌면 그것을 강조해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닐까 싶다. 그렇게 소설은 한 개인의 내면에 집중해 그녀가 수없이 마주치는 타자와의 순간들 속에서 어떻게 반응하고 변해가는 지를 보여주려 한다.  리뷰란 일종의 '복기'이지 않을까 싶다. 그렇게 텍스트라는 물리적 경계 안에서 작가가 걸어간 길을 차근차근 밟아가면서 작가가 이리저리 의도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깔아 놓은 사유의 편린들을 찾아다니며 헤아려 보는 것 말이다. 그렇게 나도 그저 따라가 보려 한다. 그려면서 되도록 작가가 우리들에게 보여주려 했던 것을 충실히 재현하려 한다.


 2. 스트라우트가 걸어간 길을 그대로 따라가며... 

 여기, 올리브 키터리지가 있다. 

 키터리지는 오랜 교편 생활을 뒤로하고 이제는 은퇴하여 여유롭게 인생의 황혼기를 보내고 있는 여인이다. 그녀는 조금 독선적인 성격으로, 남의 말을 들으려 하거나 남의 마음을 헤아리거나 하지 않는다. 오랜 교사 생활에서 늘 아이들을 판단해 왔던 경험 탓에 사람들을 만나면 습관적으로 한 눈에 파악하려든다. 그래서 어쩐지 그 시선이 차갑게 느껴지고 주눅마저 들게 한다. 그녀의 성격, 그녀가 타인을 받아들이는 태도에서 보여지듯, 그녀는 인생이 늘 확실하다고 생각하며 그만큼 항구적이라고 여긴다. 묵묵히 제자리를 지키면서 누구에게나 늘 미소를 지어보이는 남편 헨리처럼 말이다. 아마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가 그녀에게 하필이면 '수학교사'라는 직업을 주었던 것도 그러한 올리브의 인생관을 강조하기 위해서였으리라... 

 올리브 키터리지를 가장 먼저 얘기하는 것은 이 책의 제목이 바로 그녀의 이름이라서가 아니라 사실은 이 소설 전부가 바로 올리브 키터리지의 소우주이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에는 그녀의 남편 헨리로 부터 시작해서 많은 인물들이 각자의 속마음들을 드러내고 있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이 모든 이야기들에게서 어떤 연속성이 느껴진다. 앞에서 일어났던 일을 뒤에서 받아서는 다시 또 다음으로 넘겨주는, 뭐랄까 마치 바톤을 주고 받는 릴레이 경주를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그런데 이 모든 이야기들의 연쇄 작용들은 사실 올리브 키터리지의 변화와 상응하고 있다. 그렇게 이 소설은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 같던 올리브 키터리지가 어떻게 변화를 맞아들이게 되었는가에 그 초점을 맞추면서 진행된다.

 

  2 - 1 : '약국'과 '밀물' 

   여러 개의 에피소드들로 이루어진 이 소설은 남편 헨리가 중심이 되는 '약국'으로 부터 시작해 올리브가 변화를 최종적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강'으로 끝난다. 헨리가 처음에 나오는 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고 보여진다. 하나는 헨리와 올리브가 살고 있는 해안가의 마을 '크로스비'의 성격을 미리 알려주기 위함이다. 헨리는 마치 그 마을 '크로스비'를 인격화한 모습과도 같다. '크로스비'는 해안가에 위치하고 있다. 그것은 육지와 바다의 경계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인데, 여기서 육지와 바다의 이미지는 이 소설에서 아주 중요한 이미지이다. 나중에 상세히 말하겠지만 여기서는 그저 육지는 고정적인 삶의 모습을,  바다는 '타자'와도 같이 어떤 불가해한 것이며, 그렇게 변화를 일으키는 것을 의미하는 이미지라는 정도로만 얘기해 두자. 그 경계에 서 있다는 것은 언제나 그 두 가지가 끊임없이 교차하거나 서로 싸우고 있다는 걸 뜻한다. 해안가의 모래사장이 늘 밀물과 썰물이 넘나드는 것 처럼. 그렇게 경계에 서 있는 해안가 마을 크로스비에 사는 주민들 또한 늘 마음 한 구석엔 다른 마음을 품고 있는 존재로 그려진다. 대표적으로 약국에 새로이 들어온 종업원 데니즈 때문에 불현듯 불륜의 유혹에 시달리는 헨리와 뒤늦게 깨달은 데이즈에 대한 사랑으로 갈등하는 하먼이다. 데니즈와 데이즈. 이 두 여자는 이름도 비슷하지만 둘 다 모두 헨리와 하먼에게 그들이 걸어온 시간속에 쌓아왔던 안정된 세계로 부터 벗어나 새로이 낯선 변화속으로 뛰어들기를 갈망하게 되는 계기가 되는 것도 같다. 하지만 '경계에 서 있는 마을'답게 그들이 쉽게 그러지 못하도록 붙잡고 육지로 이끄는 중력이 있다. 그것은 세월이며 그 세월동안 차곡차곡 가꾸어 온 삶이며, 그 삶을 같이 꾸려온 '동반자'이다. 헨리에겐 올리브가, 하먼에겐 보니가 마치 깃대 처럼 그들을 매어 붙든다. 그렇게 헨리와 하먼은 간절히 바다를 꿈꾸지만 그들의 염원은 깃대에 매달린 깃발처럼 그저 한 곳에서 나부낄 뿐이다. 그렇게 그들은 경계에 서 있는 자들이 된다. 

 여기서 굳이 헨리와 하먼을 인용하는 까닭은 결국 이 둘의 에피소드는 일종의 반복이며 사실은 또 다른 자아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약국'에서 헨리와 데니즈의 관계는  '굶주림'에서의 하먼과 데이지의 관계로 반복된다. 그렇게 그들은 새로운 변화에 직면한다. 남은 건 그들의 선택 뿐이다. 거기에 한 사람의 죽음이 끼어든다. 그것도 같다. 여기서 타인의 죽음은 영원히 이대로일 것 같았던 삶에 대한 인식이 그렇게 고정적이지 않음을 깨닫게 되는 더욱 더 확실한 계기로 작용한다. 이 계기들은 주인공들이 좀 더 쉽게 받아들이기 위해 의도된 장치들이다.(의도는 이미 반복에 개입되어 있으니까, 이 장치들 또한 의도로 보아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 결국 하먼은 데이지를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는 거기서 개심술 수술 뒤에 살아서 깨어날지 죽어서 깨어날지 모른다고 말했던 머크 루핀을 떠올린다. 여기서 보듯, 하먼으로 하여금 그 변화를 받아들이게 만들었던 것은 바로 삶의 불확실성이었다. 하지만 같은 걸 깨달았던 헨리는 그렇지 못했다. 너무 늙어버렸다는 자조적인 변명을 해대면서 데니즈에 대한 미련으로 조금씩 흔들리긴 하지만 결국 '올리브'란 깃대에 매어달리는 인생을 택해버리고 만다. 헨리가 그야말로 크로스비를 인격화한 인물이라고 본다면 이 선택은 왠지 수긍이 간다. 크로스비는 아주 유래가 깊은 마을로 그 기나긴 세월동안 이렇다 할 변화없이 그저 세월속에 웅크려 왔었던 마을이니까. 그렇게 오래도록 늘 바다를 동경하면서도 그 동경을 속으로 삭이면서 버텨왔던 마을이니까. 그런데 그렇게 헨리가 안주하기를 선택하는 순간 스트라우트가 깔아놓은 또 하나의 의미가 드러나게 된다. 그것은 바로 올리브 키터리지다. 우리는 헨리의 눈을 통해 올리브 키터리지의 단단한 인간성을 본다. 유악한 헨리의 눈인지라 그 단단함은 더욱 강조되어 나타난다. 그녀는 헨리가 속한 소우주의 중심이었고 어마어마한 인력으로 헨리를 끌어당기고 있었다. 그런데 그 인력은 사실 헨리 자신의 어머니로 부터 그대로 이어져온 인력이다. 올리브는 자신의 시어머니 플린을 싫어하지만 사실 우리가 보기에 플린과 올리브는 그리 다르지 않아 보인다. 사람들도 헨리가 올리브와 같이 사는 건 자신의 어머니에 너무 익숙해져 버렸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결국 그 오래도록 길들여져 버린 인력 탓에 헨리는 갈망을 속으로 삭이게 되는 것이다. 작가가 '약국'을 통해 보여주고 싶었던 또 하나의 것이 바로 이것이다. 올리브 키터리지가 등대처럼 높고 강인한 중심이라는 것이다... 그것도 아주 오래 이어져온... 하지만 이제 작가는 이 단단한 올리브 키터리지의 자아를 서서히 깨뜨려 갈 것이다. 

 마치 그런 작가의 의도를 보여주기라도 하듯 두 번째의 단편 제목이 '밀물'이라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바로 여기서 앞에 '크로스비'의 마을을 설명하면서 단순하게 얘기했던 바다가 가지는 이미지의 의미가 확연히 드러난다. 소설에서 바다가 전면으로 등장하는 에피소드는 이것 밖에 없다. 여기서 오래도록 고향을 떠났다가 자살을 결심하고 다시 고향을 찾아온 케빈이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그는 올리브 키터리지를 만나게 되고 그들은 각자의 부모에 대해서 그리고 그들이 물려받은 유전적 성향에 대해서 대화를 나눈다. '유전적으로 결정되어졌다'는 것에서 드러나듯이 그들은 똑같이 고정불변의 삶이라는 심연에 갇혀있는 존재들이다. 앞서 헨리 역시도 그가 떠나지 못했던 건 사실은 '어머니의 우주'였음이 드러났다. 어쩌면 케빈은 그렇게 헨리의 또 다른 모습인지도 모른다. 유전이라는 감옥에 갇혀 아무 변화도 만들어 낼 수 없었던 케빈이 끝내 다다른 종착역은 자살이었다. 그런데 의미심장하게도 케빈과 올리브는 바다를 바라보며 얘기를 나눈다. 자살의 결심은 삶이라는 육지의 끝에 서 있다는 것으로 해석 할수도 있으리라. 기이하게도 올리브 역시도 계속 자살한 아버지를 얘기한다. '약국'에서 보던 올리브의 모습과는 너무도 대조적이라 독자들이 의아하게 여길 정도로 생경하기까지 하다. 어쩌면 그들이 그런 얘기를 하는 것은 바다를 바로 마주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렇게 작가가 보여주는 바다의 이미지는 있는 그대로 어떤 변화이다. 그리고 제목인 '밀물'에서 드러나듯이 그러한 바다가 몰려옴은 바로 '변화를 받아들임' 것임을 보여준다. 가장 고정적인 삶을 살아왔다고 할 수 있는 두 인물이 바다 앞에서 죽음을 읊조리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여기서 작가가 바다를 묘사하는 방식 역시 주목을 끈다. 그녀는 바다를 소용돌이 치는 아주 변화무상한 모습으로 묘사한다. 바다는 그렇게 한점의 고정적인 모습도 가지지 않는 곳으로 그려진다. 더구나 그런 변화무상한 모습은 케빈이 구하게 되는 패티가 입고 있는 치마의 휘몰아치는 모습으로 까지 강조된다. 그렇게 케빈은 결국 패티를 구하게 된다. 그가 힘차게 잡고 있는 패티의 팔뚝은 바로 밀물처럼 밀려드는 변화를 받아들였다는 것을 뜻하는 듯 하다. 그리고 작가는 아울러 패티의 팔이 강하게 그를 붙들었다는 것으로 케빈이 결코 자살하지 않을 것임을 암시한다. 

 앞의 두 에피소드를 일부러 길게 얘기한 것은 이 두 에피소드가 올리브 키터리지를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부분들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삶에 있어서 변화를 받아들이는 태도와 변화를 상징하는 바다의 이미지이다. 이건 이 소설에서 일종의 기초작업이라 할 수 있다. 작가는 이렇게 기초 작업을 다진 다음, 이제 본격적으로 올리브 키터리지의 그 단단했던 삶이 어떻게 허물어지고 변화를 받아들이게 되는지를 보여주려 한다.

 

 2 - 2 : '피아노 연주자'에서 '다른 길' 까지 

 '피아노 연주자'에서 안젤라 오미라는 올리브 키터리지의 현재의 삶과 유사하다. 그녀가 입고 있는 옷 만큼이나, 그녀가 연주하는 래퍼토리 만큼이나 그녀의 삶은 완벽한 하나의 경계를 구축하고 있다. 그런데 결말에 가서 그녀가 느닷없이 뺨을 맞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것은 뒤이은 '작은 기쁨'에서 올리브 키터리지가 마음에 들지 않는 '앤'을 며느리로 맞게되는 것으로 이어진다. 영원히 자신의 품에서 있을 줄만 알았던 크리스토퍼가 어느날 자신이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앤'과 결혼한다는 것은 오미라가 뺨을 맞는 충격과 맞먹었을 것이다. 이건 그녀가 오미라처럼 완벽히 통제하고 있었다고 여겨지던 그녀의 삶에 균열을 일으키는 계기가 된다. 오미라는 다시 그 경계안에 안주하지만 올리브 키터리지는 그렇지 않다. 그녀는 '앤'의 물건을 훔쳐가는 것으로 변화를 일으킨다. 이게 시작이다. 올리브의 훔치는 행위 즉, 일종의 범죄는 이 소설에서 올리브가 둘러쓰고 있는 단단한 삶의 외피에 균열을 일으키는 행위를 의미한다. 즉, '범죄'에 내포된 의미 그대로다. 사회가 규정해놓은 질서를 유린하고 넘나드는 것이 바로 범죄의 본질 이니까. 여기서 시작된 균열의 조짐은 훨씬 뒤의 에피소드인 '불안'에서 최종적으로 완성된다. 다음에 헨리의 또 다른 분신이라고 할 수 있는 하먼이 등장하는 '굶주림'이 나온다. 그리고 바로 헨리와 올리브가 결정적으로 (정신적으로)갈라지게 되는'다른 길'이 등장한다. 

 여기서, 이 에피소드들이 분명한 의도하에 배치되었음이 드러난다. 작가는 앞의 두 에피소드로 기초 공사를 끝낸 다음, '피아노 연주자'에서 '다른 길'까지, 올리브의 세계가 붕괴되어가는 과정을 차례대로 보여준다. 우리는 여기서 바다의 이미지를 주목해야 한다. 바다는 '굶주림'에서 또 다시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굶주림'은 마리나 카페에서 시작한다. 바닷가에 위치한 카페이자 '밀물'에서 케빈이 변화를 받아들였던 바로 그 곳이다. '굶주림'의 시작이 바로 마리나 카페라는 건 의미심장하다. 바로 그곳에서 그 역시 자신의 삶에 변화를 받아들이게 될 커플을 만나게 된다. 그가 애정을 가지게 되는 데이즈가 사는 곳 역시 바닷가에 위치한 '휴가용' 별장(얼마나 세심한 설정인가)이다. 이렇게 바다가 전면으로 나서면서 하먼 역시 케빈처럼 헨리와는 다르게 변화를 받아들인다. 이러한 바다의 이미지가 가진 의미는 뒤이은 '다른 길'에서 헨리와 올리브가 결정적으로 서로로 부터 떨어져 나가는 곳이 바로 하필이면 '바다 위'라는 것에서 전면적으로 드러난다. 

 이만큼 이르면 우리는 작가가 의도한 바다의 이미지를 무시하기가 정말 어려워지게 된다. 그렇게 바다는 변화를 의미하고 바다를 마주한 사람들은 그 변화를 받아들인다. 헨리 역시 바다 위에서 올리브와 결별하지 않는가! 그렇게 바다 위에서 올리브 역시도 이제 지금의 세계가 예전과는 달라져 버렸다는 것을 절감한다. 크리스토퍼는 자신에게서 멀리 떠나가 버렸고 헨리 역시 이제는 멀어져 버렸다. 그 바다 위에서 올리브는 "내 할머니라고 해서 내가 꼭 당신을 사랑하란 법은 없잖아요."라고 했던 한 아이의 말을 떠올리게 된다.

 

 2 - 3 : '겨울 음악회' 부터 '불안' 까지 

  '겨울음악회' 부터 '불안'까지 이제 그녀는 아주 밑바닥까지 떨어진다. 마치 늪에서 헤어나려면 그 밑바닥까지 내려가봐야 한다는 말을 보여주기라도 하듯이. '다른 길'에서 올리브가 느끼는 헨리와 이제는 결별했음에 대한 예감은 '겨울 음악회'에서 제인의 남편 '밥'의 외도에 대한 의심으로 이어진다. 밥의 외도로 의심되어지는 장소가 '마이애미'에서 드러나듯이 밥 역시 헨리처럼 바다를 통해 변화를 마주한 것이 암시된다. 밥이 그러한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던 것은 '음악당 지붕이 언제 무너질 지 모른다'라는 말에서 드러나듯 삶의 예측 불가능성 때문이었다. 제인은 밥의 고백을 듣고도 그의 곁에 머물러 있으리라 생각한다. 이건 헨리와 완전히 떨어져 버렸음을 예감한 뒤의 올리브 마음을 간접적으로 대변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미 살 날이 머지 않았는데 책망하느라 흘려보내기 싫기 때문이라고 제인은 그렇게 한 이유를 밝힌다. 헨리와 밥의 고백은 그녀들의 삶에 변화의 계기를 줄 수 있었지만 그녀들은 이제 그러기엔 너무도 늙어버렸음을 탓하며 자신의 껍질 속으로 들어가 버리는 것이다. 그 짧은 여생 동안 남은 건 서로 밖에 없다고 자위하며... 그런데 그것은 '약국'에서 헨리가 데니즈를 포기했었던 바로 그 이유이기도 하다. 

 작가는 '겨울이야기'에서 헨리가 했던 것을 올리브로 하여금 반복하게 만든다. 그렇게 헨리가 데니즈가 포기하며 걸었던 길을 올리브도 똑같이 걷도록 만든다. 물론 의도적이다. 그렇게 포기했었던 헨리는 결국 뇌졸중으로 쓰러져 요양원에서 지내는 신세가 되었다. 그 누구도 받아들이지 않고 완전히 자신만의 세계에 고립된 것이다. 헨리의 결심을 올리브가 반복했다는 것은 올리브 역시 헨리와 비슷한 길을 걸을 것이라 암시한다. 그렇게 뒤이어 '튤립'의 에피소드가 나온다. '튤립'은 소설에서 가장 육지 이미지를 드러내고 있다. 올리브가 가꾸는 정원의 '튤립'은 더욱 더 육지적인 그렇게 '고정적인 삶'이라는 이미지를 부여한다. 그런데 이 가장 육지적인 이미지를 가진 제목의 에피소드가 시작되는 곳이 인상적이다. 자녀의 범죄 때문에 자신의 집에 고립되어 살고 있는 라킨 부부로 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그야먈로 육지 이미지를 그대로 형상화한 듯한 모습이다. 그리고 이 고립된 라킨 부부는 올리브의 현재 모습이기도 하다. 심지어 라킨 부부는 한 집에서 일층과 이층으로 서로 따로 떨어져 지내고 있는 형편이다. 이 에피소드 내내 우리가 보게되는 것은 홀로 고립된 올리브이다. 헨리마저 뇌졸중으로 쓰러져 요양원에서 지낸다. 육지의 이미지를 나타내는 것을 제목으로 하고 있는 단편이 보여주고 있는 게 오로지 고립이란 것은 의미심장하다. 그녀는 거기서 가장 밑바닥으로 떨어진다. 자기 보다 더 고립된 라킨 부부에서 위안 받으려다 오히려 조롱까지 당하면서 말이다. 그것을 강조하기라도 하듯 작가는 '강위에 뿌연 안개가 걸려 있어 물을 잘 알아볼 수 없었다.'고 묘사한다. 변화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순간 그녀는 가장 고립된 밑바닥으로 떨어졌고 거기에서 그녀가 듣게되는 건 욕 뿐이었다. 물로 상징된 변화의 이미지와 육지로 상징된 고립의 이미지가 선명히 대조를 이루며 드러나는 장면이다.

 그래도 그녀는 그 뒤의 에피소드의 제목인 '여행바구니' 처럼 희망을 가지려 애쓴다. 그리고 희망은 두번째 결혼으로 뉴욕으로 이사한 아들의 부름으로 나타난다. 올리브는 희망에 차서 뉴욕으로 떠난다.(떠남은 그 이전 에피소드인 '병속의 배'에서 드러난다. 하지만 결국 배는 아무 곳으로 떠나지 못했다. 거기에서 드러나듯이 이는 뒤이은 '불안'에서 올리브의 여행이 아무런 결과를 얻게되지 못하리란 걸 암시한다.) 하지만 결국 올리브가 마주하게 된 것은 '여행바구니'가 그저 부질없는 희망에 불과했듯이 아들과의 완전한 결별 뿐이다. 그녀는 이제 절감한다. 그녀에게 남은 것이 하나도 없음을... '불안'의 끝장면이 떠나려는 '공항'이라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그것은 이제 그녀에게 떠나는 것 밖에는 남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다. 그런데 어떤 떠남일까? 단순히 크로스비... 그녀의 삶이 온전히 있을 수 있었던 그 곳으로? 아니다. 작가는 여기서 그 떠남이 바로 그러한 그녀의 삶에서 떠나는 것임을 보여준다. 그것은 바로 '변화를 받아들이는 삶으로의 떠남'이다. 마치 그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그녀는 그녀의 인생에서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던 보안요원의 말을 과감히 무시하는 일종의 '공무집행방해'라는 범죄를 저지르는 것을 보여준다. 

 

 2 - 4 : '범죄자' 와 '강' 

 그리고 이 범죄의 단초는 이제 목사의 딸로 태어나 엄격한 도덕적 질서를 강요받아오던 레베카가 처음으로 물건을 도둑질하는 범죄를 저지르는 '범죄자'의 에피소드로 이어진다. '범죄자'란 규정된 사회적 질서를 가로지르는 자를 말한다. 그것은 일종의 경계를 넘나듬이고 올리브가 '불안'의 끝에서 했던 것도 바로 이 넘나듬이었다. 레베카는 이제 그것을 확장시킨다. 이 단편의 말미에 레베카의 집이 경찰차의 사이렌 '소리'(우리는 여기서 '불안'에서 끊임없이 올리브를 괴롭히던 소리를 떠올린다.)로 가득차는 것은 바로 이제 올리브와 레베카가 단단히 서 있던 육지가 완전히 유린되고 있음을 상징한다.(레베카의 과거 역시 올리브의 세계 만큼이나 고정적이고 획일적이었음을 우리는 그녀의 고백을 통해 알 수 있다.) 

 뒤이어 이 소설의 마지막 에피소드 '강' 이 나타난다. 소설에서 물의 이미지를 차용한 두 번째의 제목이다. '밀물'에서 자살까지 각오했던 케빈이 다시 '패티'라는 변화를 받아들였듯이, 밑바닥까지 떨어져버린 올리브, 자신에게 아무것도 남지않았음을 깨달아버린 올리브가 이제 변화를 받아들이게 되리라는 것이 제목에서 부터 감지된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는 규칙적으로 바닷가 산책로를 따라 달리기를 한다. 헨리도 떠나고 없는 지금 그녀는 여전히 혼자다. 그런 그녀가 이제는 매일 바다를 마주하고 달리고 있다. 산책로, 달리기, 바다... 이 에피소드에서 움직이는 이미지들이 넘쳐나는 게 인상적이다. 그것은 그녀가 이제 세상과 자신을 고정적인 것으로 보지 않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과연 그것을 증명하기라도 하듯이 그녀는 바로 그 산책로에서 그녀와 인연이 될 잭 케니스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이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을 올리브는 하게 된다. 일찌기 경멸해 왔었고 거기다 산책로에서 구해준 것을 인연으로 데이트 비슷한 자리에서 알게 된 바 대로, 자신이 정말 싫어하는 부시에게 표를 던진 공화당주의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올리브는 그를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 변화가 전혀 낯설지 않다. 앞서 얘기한 대로 작가가 아주 공을 들여 세심하게 올리브가 그러한 변화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차근차근 준비해 왔기 때문이다. 특히 그것이 잘 드러나는 것이 '불안'의 에피소드가 아닐까 한다. 그녀는 아들의 집에서 세입자로 인해 한때 자신 역시 어떤 변화를 받아들이려 했었던 과거를 떠올린다. 그것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그 과거의 기억으로 부터 이어지는 소리를 매일 들으며 그녀는 괴로워한다. 여기서 어쩐지 헤세의 '데미안'에서 그 자신의 껍질을 깨고 나오려는 아브락사스가 연상되기도 한다. 그렇게 그 소리는 기억의 환기이자 변화를 받아들이라는 일종의 신탁 같은 것으로 보인다. '불안'에서 '범죄자' 그리고 '강'으로 연결되는 에피소드는 보기에 따라 어쩌면 그리 자연스럽게 연결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서 '강'에서 나타나는 올리브의 변화가 그저 속절없이 늙어감에 대한 일종의 타협이라고 여겨질 수도 있다. 하지만 '불안'에서 끊임없이 울려나오는 이 '소리'는  그 때부터 이미 올리브가 변화의 고통을 짊어지고 있는 것임을 미리 감지하도록 만든다. 그래서 '강'에서의 그 변화가 타협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올리브 스스로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려는 것임을 알 수 있게 만든다. '범죄자'에서 레베카가 자신의 의지로 가출하듯이 말이다. 그리고 이 모든 건 작가가 의도적으로 배치해 놓은 장치들 덕분에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3.  또 다른 시작 

 '강'에서 변한 올리브 키터리지의 모습 처럼 그렇게 자신의 단단하고도 완고한 껍질을 깨고 변화를 받아들이듯 타인을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이 소설을 통해 작가가 보여주려 하는 것이다. 작가가 타자의 얼굴로 체현되는 무한성에의 체험을 통해 자신을 열고 타자를 받아들이는 것을 더 소중하게 여긴다는 것은 달리 말 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더우기 주제를 위해 일련의 의도를 가지고 세심하게 아로 새긴 암시와 상징들은 이 소설 전체가 구조적으로도 완벽한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는 걸 느끼게 만든다. 

 사실 지금까지 이렇게 에피소드들을  하나 하나 자세히 분석해 왔던 것도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가 뚜렷한 주제의식을 가지고 얼마나 체계적으로 그것을 아주 작은 부분에 이르기까지 세밀하게 엮었는지 드러내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물론 이것에 내가 얼마나 성공했는지는 미지수이다. 아무튼, 내가 이런 식으로 리뷰를 쓰게 된 것은 어떤 안타까움 때문이었다. 이 소설에 대한 리뷰를 많이 읽었지만 문장의 아름다움이나 공감의 깊이 그리고 전체적인 분위기에 대한 상찬은 많은데도 막상 이 소설이 독자들로 하여금 그러한 공감을 이끌어 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얼마나 체계적으로 세밀하게 연출되어 있는지, 그 하나 하나의 에피소드들에 담긴 설정, 묘사들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그렇게 쓰여졌는지 구체적으로 알려주는 글은 보이지 않았다. 읽어 보면 스트라우트가 이 소설을 꽤 공을 들여 세공했다는 게 느껴지는데 거기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게 안타까웠다. 그래서 내가 느낀 작가가 기울인 노력의 흔적들을 찾아 밝혀 보이고 싶었던 것이다. 오직 영화에만 왜 하필이면 굳이 저렇게 장면을 찍었을까 궁금증이 있으랴? 문학도 영화처럼 결국은 작가의 연출이고 보면 왜 작가가 그렇게 설정이나 연출을 했는지 궁금해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한국 문학은 그래도 세세히 일러주는 평론이라도 있을 수 있지만 외국소설의 경우에는 그나마도 없는 형편인지라 아마도 이런 리뷰만이 소설을 읽다가 생긴 궁금점들을 유일하게 해소할 수 있는 통로일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으로 리뷰를 썼다. 혹시나 소설을 읽고 '좋다. 훌륭하다. 하지만 왜 좋고 훌륭한지는 모르겠다.'라고 의문이 들었던 사람들 중에서 서정적인 감상으로만 그치지 않고 나처럼 뭔가 세세한 짚어보기가 필요했던 사람들이 있을지 몰라서... 그렇게 이 리뷰를 소설 '올리브 키터리지'의 더욱 더 자세한 논의를 위한 대화의 시작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 같다. '대화'라는 건 타인을 받아들이는 가장 전형적인 관계이기도 하다. 그렇게 대화를 통해 타인을 받아들이는 것 역시 '올리브 키터리지'로 부터 느꼈던 것을 내면화하는 복기의 과정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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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웃레이지 - Outrage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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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웃레이지를 보면서 떠오른 말이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조직과 인간' 

이것은 앤서니 버지스의 '시계태엽의 오렌지'가 우리나라에서 처음 출간되어졌을 때 붙여진 제목이었습니다. 아마도 스탠리 큐브릭의 동명 영화가 상영금지되었기 때문에 같은 제목을 붙일 수 없어서 그런 제목을 붙인 것으로 기억되는데, 정말 이 말 만큼 이 영화의 핵심을 보여주는 말은 없다고 생각되더군요.

처음 영화는 이제 부터 이야기의 중심이 될 야쿠자 조직이 얼마나 강고한 조직인가 부터 보여줍니다. 그것도 부하 - 중간 보스 - 최고 보스 이렇게 계급을 구분해서 차례 차례 말이죠. 

이것은 서열이 확실한 조직이라는 것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그 서열을 보여주는 장면들은
지극히 계산적으로 화면속의 담는 공간을 차차 줄여나갑니다. 부하들이 있는 텅 빈 공간에서
중간 보스들이 모여서 식사하는 장면 그리고 뒤이어 나오는 것은 바로 최고 권력자 보스 한
사람의 클로즈 업... 이렇게 말이죠. 이것은 관객에게 지금 이 조직의 권력이 누구에게 있는가
를 자연스럽게 알려주기 위함이죠. 

뒤이어 열을 지어 도로를 다니는 벤츠의 행렬은 바로 그 조직의 강고함을 더욱 더 강조하기
위한 것이고 그렇게 한 대의 벤츠가 화면에 꽉 차 있을 때 '아웃레이지'란 제목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뒤이어 보스의 근심 - 중간보스 하나가 자신의 조직에 속하지 않는 보스와 어울려서 걱정이라고 오른팔에게 말하는 장면 - 이 나옵니다. 오른팔은 그 둘이 의형제라서 그런가보다고 대답하죠. 

관객에게 견고한 조직을 먼저 보여주었던 것이 바로 이 배신의 정도가 어느정도 의미가 있는가를 알려주기 위해서였다는 게 드러나는 순간, 거기에 또 의형제라는 게 끼어들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아주 익숙한 장르적 컨벤션을 발견하게되고 때문에 이 영화가 좀 진부한 주제를 다루는 게 아닌가 의심하게 되죠.

아무튼, 마치 댓구를 이루듯 강고한 '조직'과 '배신, 의형제'라는 아주 인간적인 동기들이
나란히 등장하게 되는데 다케시는 바로 뒤이어 보스의 말을 통해 이 둘이 어떤 관계임을
바로 보여줍니다. 보스는 이렇게 말하죠. "아무리 의형제라도 조직을 위해선 용납할 수 없다."고 바로 여기서 이 둘의 관계가 상호 대치적인 관계, 그러니까 하나가 다른 하나를 배제시키지 않고서는 존재할 수 없는 관계라는 게 단적으로 드러납니다.

기타노 다케시는 조직과 인간의 이러한 상호 대치적인 관계를 보여주기 위해 구조적으로 장면들을 설계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한 장면 한 장면 무심하게 지나가는 듯 하면서도 은밀하게 배여든 계산은 바로 이 조직과 인간의 대립 관계가 이 영화의 핵심적 테마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사실 이 영화의 전체 줄거리는 이렇게 통제하려는 조직과 어떻게든 그 조직을 뚫고 개인적인 이해관계를 관철시키는 인간의 대립이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우리가 너무도 익히 보아왔던 장르적컨벤션에 불과합니다. 진부한 이야기의 지루한 동어 반복에 불과한 이야기에 이토록 기타노 다케시가 공을 들였단 말인가 하고 의아해질 무렵 바로 여기서 다케시의 장르적 비틈이 일어납니다.

종종 익숙한 장르적 컨벤션에서 배신은 의형제라는 보다 더 고귀한 도덕적 가치로 인해 관객에게 정당화되곤 했었죠. 하지만 아웃레이지에서는 다릅니다. 다케시는 의형제를 순진하게 믿었던 관객들을 비웃습니다. 그렇게 의형제라는 게 사실은  그 중간 보스가 이익을 모두 가로채기 위해 상대편을 이용하기 위한 가장에 지나지 않았고 앞서 나왔던 조직의 안위를 염려했던 보스 역시도 사실은 그 중간보스의 수입을 가로채려는 핑계에 지나지 않았다는 걸 보여줌으로서 말이죠.

여기에서 우리는 다케시의 냉소를 봅니다.

그리고 그 냉소와 더불어 이렇게 말합니다.
'조직이 인간의 욕망을 통제하기 위해 내세우는 '조직의 논리'라는 것이 사실은 '그 조직의 최고 위치에 있는 자' 개인의 이익 추구에 지나지 않으며 우리가 종종 타인의 협력을 구하거나 이용하기 위해 내세우는 일종의 휴머니즘적 논리도 사실은 자신의 주머니를 보다 배불리기 위한 미끼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이죠.

그런데 여기서 또 하나 언급해야 할 것은,
기타노 다케시의 냉소가 이제는 세상을 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쩌면 이 영화가 다케시의 새로운 한걸음을 위한 전환점이진 않을까 생각하게 되기도 합니다. 이 영화는 사실 보다보면 '소나티네'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최고 보스가 중간 보스의 영업권을 차지하기 위해 죽음으로 내몬다는 내용은 바로 소나티네와 똑같죠. 그 밖에도 많은 공통점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이 영화는 소나티네의 변주가 아닐까 생각하게 만듭니다.
하지만 '유희'의 장면은 완전히 배제되었습니다. 아마도 그것은 이미 '키쿠지로의 여름'에서 변주되었기 때문에 그런 것 같습니다. 곁가지로 말합니다만, 소나티네는 그 이후의 모든 작품, 그러니까 '브라더'까지 이어지는 모든 작품의 일종의 원형이 되는 작품으로 저에겐 여겨집니다. (물론 소나티네는 3X4-10월 에서 나왔습니다만...)

그런데 이 영화(아웃레이지) 이전의 작품들은 모두 개인의 내면에 맞추어져 있었습니다.
뭐랄까 '도대체 이 삶이라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이라 할까요.
영화가 자주 선택의 기로에 선 다케시의 얼굴을 클로즈업해서 보여주는 이유도 아마 그런것이 아니었을까 생각됩니다. 하지만 이 영화 '아웃레이지'에서는 그 질문이 사라졌습니다.
대신 '정말 얼마나 막되먹은 세상인가!'하는 새삼스러운 회한이 있습니다. 다케시가 영화에서 자주 장르적 컨벤션을 비틀어 보여주는 것도 그만큼 달라진 세상에 대해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의형제가 사실은 협잡이고 조직의 안위를 걱정하는 보스는 사실 자기 배 채울 일 밖에 생각하지 않고 손가락을 갖다 바치는 사죄는 조롱에 지나지 않고 윗분들 모르게 커미션을 떼먹는 건 당연한 일이고... 그렇게 말이죠...


빙 돌아왔습니다만, 다시 본 얘기로 돌아가서...
이 영화의 핵심은 조직과 인간은 대립 관계가 아니라 애초부터 조직이라는 것은 아예 존재하지 않으며 그것은 단지 개인의 이익 추구를 가리기 위한 기만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바로 한 아프리카 국가의 '대사관'이 '비밀 카지노'로 운영되는 이야기가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주죠. 사실 대사관 에피소드는 영화에 그렇게 필요불가결한 부분이 아닙니다. 아마도 분명히 다케시는 영화의 주제를 위해 일부러 대사관을 넣었을 것입니다. 대사관으로 상징되는 국가라는 외피속에 있는 것이 바로 '카지노'라는 지극히 개인의 이익 추구의 장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렇게 아프리카의 대사가 개인적인 이익 추구에만 전념했던 중간 보스를 삽으로 파묻는 장면은
아마도 다케시가 '조직의 이익' 운운하는 자들에게 보내는 가장 뼈있는 냉소일 것입니다.
다케시의 진언대로 조직 자체는 하나의 환상에 불과합니다.
있는 것은 오로지 개인의 이익 추구 뿐이지요.
 
하지만 순진하게 '조직의 이익'이라는 거짓말에 속는 어리석은 이들도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기무라'와 그 부하들, 그리고 '다케시'와 그 부하들 입니다. 그들이 모두 죽는 것은 바로 이 거짓말에 속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기무라는 살아남습니다만,) 그들이 처벌받은 것이 오로지 조직의 이념 같은 것을 순진하게 믿고 따랐기 때문이란 건 변함이 없습니다.

여기서 '조직의 이념'이란 '것은 보스에 대한 충성', '의리' 같은 것으로 나타납니다. 이것은 일종의 이데올로기로 사실은 보스의 이익 추구에 자발적으로 헌신토록 만드려는 도구 같은 것이죠.
'기무라와 그 부하들'과 '다케시와 그 부하들'의 유사성은 기무라 부하 하나가 달아나다 기차안에서 죽는 장면이 다케시의 부하 '미즈노'의 죽는 장면으로 반복된다는 것에서 단적으로 드러납니다. 모두 죽기전에 내연의 여자를 찾았고, 가는 도중에 살해되죠. 다케시는 이걸 일부러 반복한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그걸 반복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바로 그 둘이 사실은 동일하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죠. 이 때문에 결말 부분 다케시는 바로 기무라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입니다.

아무튼 결국 순진하게 믿었던 이들은 모두 죽고 오로지 약삭빠른 놈만 살아남습니다.
조직의 이익이니 이념이니 하는 것들은 모조리 버리고 오로지 개인적 이익 추구에만 전념했던 사람들만 말이죠. 세상은 이제 그런 사람들만 살아남아 있습니다. 마지막 장면은 그런 그들이 모두 한 자리에 모이는 것으로 끝이나죠.

'아웃레이지'는 세상으로 향한 다케시의 첫 시선으로 보여집니다.
그 시선 속에서 그는 차가운 웃음을 짓습니다. 허탈한 체념이 짙게 배인 그런 웃음을 말이죠.
그는 이 영화에 그 시선 속에 들어온 세상의 참모습을 담고자 합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말로 꾸며도 가득한 것은 오로지 이기적인 인간의 욕망 뿐이라는 그런 진실을 말이죠...

듣기에 2부가 또 나온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세상의 현상태에 관한 이야기는 사실 이 영화로도 충분합니다. 그럼 그 뒤의 얘기는 무엇일까요? 혹시 그런 세상을 모조리 깨부수는 어떤 상상적 복수는 아닐까 감히 추측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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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렌델 펭귄클래식 53
존 가드너 지음, 김전유경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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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렌델은 매혹적입니다..
 하지만 난해합니다..
 씌여진 문장 하나하나는 마치 동 터오는 아침 햇살을 흠뻑 머금은
 이슬 처럼 영롱하건만, 전체를 놓고보면 그 하나하나가 무슨 의미가
 있는지 잘 알 수가 없습니다.
 어쩐지 온통 수수께끼로 가득찬 암호문을 받아든 셜록 홈즈가 된 것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렌델은 마치 사이렌의 노래소리와도 같아서
 스스로 미로일 것 알면서도 기꺼이 그 곳에서 헤메이게 만드는군요.
 그것도 열정적으로...

 문득 정신을 차리면, 난 가드너가 촘촘히 짜 놓은 거미줄 같은
 그렌델이라는 '미로' 속에 갇혀있었습니다.
 여러 개의 출구로 보이는 듯한 길들이 각각 자신만의 가능성을 가지고
 저의 앞에 유혹적으로 열려있더군요

 저는 얼른 걸음을 떼기가 어려웠습니다. 자칫 하다가는 영원히 의미를 잃고
 헤매이게 될 것을 알기에...
 그 엄습하는 두려움 으로 테세우스를 미궁 속에서 건져내었던 아리아드네의 실을
 찾습니다.

 여러 번 서성이는 걸음 속에서 불현듯 어둔 밤, 등대불에 우연히 포착된 어선과도 같이
 그런 실 같은 것을 잡았음을 느꼈습니다.
 이제 저는 걸음을 뗍니다. 그것이 이 미로속에서 날 빠져나가게 해 줄 것이라 기대하며...
 

 내가 잡은 아리아드네의 실은 바로 '시(詩)'입니다.
 그렌델로 하여금 매혹시켜버렸던 셰이퍼가 읊조리던 바로 그 '시'...
 
 그런데 시란 무엇입니까?
 저는 여기서 하이데거를 떠올립니다. 하이데거는 시를 '진리의 현현'이라고 했습니다.
 하이데거는 존재와 존재자를 구별지었고 존재란 참 진리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하지만 이 존재는 존재자들에게 가려 잘 드러나지 않는데, 그 존재가 유일하게 드러날 수
 있는 것이 바로 '시'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존재는 동일성을 지향하는 존재자들 너머 오로지 타자의 영역에서만 드러날 수
 있는데 그렇게 '시'라는 것 역시 절대적으로 타자의 영역에 있기 때문이죠.
 시는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 같아서 유한한 의미망으로 가둬둘 수 없기 때문이죠.
 완전히 파악했다고 하더라도 언제나 미끌어지듯 빠져나가는 작은 물고기 같은 것들이 있기
 마련입니다.(소설 그렌델에서 그의 어미가 '물고기를 조심하라'고 하는 것도 어쩌면 그런
 의미가 아니었을까요?)

 하나의 의미로 규정할 수 없는 것. 마치 고운 모래처럼 손에 쥐면 쥘 수록 빠져나가는 것
 하이데거는 존재자의 특성을 동일성으로 보았기 때문에 바로 이 시의 특징 때문에 오로지
 존재가 자신을 드러낼 수 있다고 보았던 것 같습니다.
 이런 생각은 나중의 철학자들에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를테면 레비나스와 줄리아 크리스테바
 같은 사람들이죠. 줄리아 크리스테바는 특히 이런 시의 기능에 집중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이렇게 말하죠.(빈곤한 기억력 탓에 정확성을 담보하기는 어렵습니다.)
 '시란 정체성을 동일화시키려는 외부의 강요로 부터 벗어나려는 언어적 투쟁이다.'라고...

 저는 바로 이것이 그렌델을 매혹시켰던 이유가 아니었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렌델은 인간의 기준에서 타자입니다.
 그건 존재론적으로 결정된 것이라 숙명적입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는 인간의 언어를 할 줄 압니다. 그건 인간과 교감할 수 있다는
 걸 의미하고 그래서 그건 그에게 유혹이 됩니다.
 그렌델은 고독합니다. 어미와 함께 자신의 종족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자입니다.
 고독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권태.
 그런데 얼마 떨어지지 않는 곳에 인간의 무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에겐 인간과
 교감할 수 있는 능력이 있구요.  농구 골대가 너무 높으면 아무도 공을 던지지 않지만
 낮으면 누구나 던져보려는 유혹을 가지듯이 그건 엄청난 유혹이죠.
 하지만 그도 압니다. 그가 절대로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것을...
 그리고 숙명적으로 결정되어진 것을 영원히 바꾸지 못하리라는 것도...

 그래서 그는 서성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그에겐 두 개의 세계가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는 인간에게 있어 완벽히 타자인 용의 세계. 그리고 다른 하나는 인간 세계이죠.
 그것은 공간적으로도 완벽히 구분됩니다. 용의 세계는 동굴로 표상되고 인간 세계는
 연회장으로 표상됩니다. 동굴은 지극히 개인적인 공간이고 연회장은 더불어 같이 있는
 공간이죠.
 용은 모든 걸 체념하고 자신만의 동굴에 기거하라고 말합니다.
 이는 곧 '너 자신을 고립시키고 너만의 정체성 속에 머물러라. 그렇게 널 인간에게
 있어 완벽하게 타자의 영역에 두고 너 자신을 불가해한 것으로 만들어라'라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용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로 구별되는 이 경계는 자신만의 주체성과
 타자와 동일하려는 욕구 사이의 경계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렌델에게 이것이 양자택일적으로 선택이 강요된다는 것입니다.
 바로 용의 말이 이것을 잘 대변해주고 있죠.
 "가치있는 것을 찾아서 그것을 지켜라."라고
 그는 영겁의 시간 속에서 모든 존재자들은 우연일 수 밖에 없으니 너무 타자들에게
 연연해하지 말라고 설득합니다.
 물론 그렌델은 이 용의 말이 이성적으로 납득됩니다. 하지만 늦었습니다.
 그는 셰이퍼의 '시'를 이미 들어버렸으니까요.

 셰이퍼의 시를 듣고 그는 이렇게 독백합니다.
 '그는 대체 무엇이었을까? 그자는 세상을 바꿔놓았고, 과거를 그 그 두껍고도 비틀어진
  뿌리까지 송두리째 들어내어 변화시켰다.'라고...

 저는 여기서 그렌델이 바로 줄리아 크리스테바가 말했던 시의 힘을 느꼈다고
 생각했습니다. 외부로 부터 양자택일적으로 강요되어지는 선택으로 부터 스스로를
 미끌어지게 하고 탈주시키는 그 힘을...
 양 자 어느쪽에도 속하지 않으면서 또 모두에게 속할수도 있는 그리고 그 둘을 오히려
 초월할 수도 있는 그런 힘을 말이죠...

 그래서, 그렌델은 이제 스스로 시를 씁니다.
 셰이퍼가 하프를 켜며 그의 입을 통해 시를 말하듯이...
 그렌델은 그 자신의 이빨과 손으로 사지를 찟고 낭자한 선혈을 내뿜는
 잔혹의 시를 쓰는 것이죠.

 그러니까, 그렌델의 인간 사냥은 일종의 인간이라는 타자와의 소통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그는 셰이퍼의 시에 오르내리게 됨으로서
 인간의 역사에 편입되게 되는 것이죠.

 이 기이한 교감 방식...
 제 생각엔 이것이야 말로 가드너의 '그렌델'이 줄 수 있는 최고의 매혹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왜 그렌델이 셰이퍼의 죽음 이후 속절없이 최후를 맞이하는가가
 이해됩니다. 바로, 셰이퍼로 상징되어지는 '시'가 소멸했기 때문입니다.
 셰이퍼의 최후를 보면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한 시대의 종말이다.
  이제 다시 우리는 혼자다. 버림받은 채로...'

 시가 있음으로 해서 그렌델은 자신에게 주어진 정체성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타자들과 교통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셰이퍼의 죽음과
 더불어 시는 소멸했고 그는 인간에게 있어 완벽한 타자로만 남게되죠.
 물론 시가 사라진 이상 그는 더이상 하이데거가 말하는 영원히 불가해한 존재인
 타자가 아닙니다. 그는 이미 인간에게 포획된 타자이고 따라서 그는 동일화의
 욕구를 가진 존재자들에게 살해당할 수 밖에 없는 존재자가 된 것입니다.
 존재자들은 동일화시키지 못하는 대상은 그냥 소멸시켜 버리기 때문입니다.

  이게 제가 가진 '아리아드네의 실'입니다.
 시를 통해 그렌델의 의미를 생각해 보는 게 얼마나 설득적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물론 저는 아직 출구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여전히 그렌델은 어마어마한 미로로 남아있습니다.
 하지만 그 숨겨져있는 무궁무진함... 걸을 수록 새롭게 변화하는 그 의미들 때문에
 앞으로도 계속 또 다른 가느다란 실을 찾아 헤메이게 될 것만 같은 예감입니다.
 움베르토 에코도 말했듯이 좋은 텍스트는 언제나 여러 개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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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레이] 킥 애스 - 아웃케이스 없음
매튜 본 감독, 니콜라스 케이지 외 출연 / 플래니스 엔터테인먼트 / 2010년 11월
평점 :
품절


마크 밀러의 원작도 매튜 본의 영화도 본질적으로는 이런 질문에서 출발한다고 보여집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도대체 왜 슈퍼히어로물을 보는(혹은 읽는)걸까?”
여기서 마크 밀러와 매튜 본의 대답을 말하기 전에 생각나는 ‘마팔다’로 유명한 아르헨티나의 만화가 뀌노의 한 만화를 인용하고 싶습니다.



뀌노는 현대인의 우울한 초상을 담은 4컷 만화를 많이 그렸는데, 이런 만화가 하나 있습니다.

거대한 회사라는 조직에서 일하는 한 우울한 사무원이 주인공인데

그는 일하다 가끔 스스로 자괴감이 들 때마다 화장실로 향합니다.

거기 아무도 없는 화장실에서 거울을 마주보며 그는 누군가의 사진을

자기 얼굴에 갖다 댑니다. 그 사진의 주인공은 바로 ‘체 게바라’이죠.

그렇게 그는 거울을 통해 ‘체 게바라’가 된 자신의 얼굴을 보며 한 번

호탕하게 웃고는 다시 아무 의미도 없는 일을 반복하기 위하여

자기 자리로 돌아갑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체 게바라’의 사진을 얼굴에 쓰는 것이

자신이 자기 삶에 가져다줄 수 있는 유일한 위안이었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바로 이 뀌노의 ‘체 게바라’ 가면 쓰기 행위와

사람들이 슈퍼히어로 장르물을 보는 이유가 결국은 같다는 것이

마크 밀러와 매튜 본이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무래도(이것은 비단 이 영화만은 아니라 모든 슈퍼히어로물에서

다 그렇습니다만) 영화속에서 자주 거울을 바라보는 장면이 나오는 이유일 것입니다.

그렇게 변신과 코스튬플레이는 바로 그와 같이 삶의 무의미성에 짓눌려버린

현대인들의 소박한 자기 위안 행위라는 것이죠.



하지만 이건 결국 그 출발점이 동일하다는 것 뿐이고 사실,
이 소박한 자기 위안적 행위에 대한 가치 판단에 있어서는
두 사람이 극명하게 대립하고 있습니다.



일단 영화의 시작 부분에서 차이가 드러납니다.

영화의 시작은 높은 빌딩의 옥상에서 슈퍼히어로로 코스튬을 한 사람이

거기서 뛰어내리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그는 의기양양하게 ‘왜 사람들이 자신의 인생에 특별한 계기를 만들기 위해

용기를 내지 않는 것인가!’ 선언하면서 뛰어내리죠.

그가 추락하는 도중 날개를 펴자 사람들은 진짜 히어로가 나타난 줄 알고

박수를 칩니다. 하지만 결국 그는 그대로 추락사하고 말지요.

여기서 마크 밀러는 그것이 바로 신문에서 ‘킥 애스’에 대한 것을 읽고

따라하다 죽은 것이라고 말을 합니다. 해서, 원작의 끝부분에 그는 다시 등장하는데,

시점은 영화 처음의 뛰어내리기 바로 전 빌딩의 옥상으로 오르는 모습입니다.

역시나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그는 사람들에게 곧 자신에 대한 기사를 읽게될 것이라

선언합니다. 하지만 그는 그대로 추락해서 죽어버렸죠.



하지만 매튜 본은 그자가 정신병력으로 인해 현실과 상상을 구분하지 못해서

죽은 것이라고 말을 합니다. 그렇게 매튜 본은 현실과 상상의 경계를 명확하게

구분짓고 시작합니다. 이것만 봐서는 매튜 본도 마크 밀러와 비슷해 보입니다.

하지만 영화가 전개되어질수록 그가 추구하는 것은 슈퍼히어로를 통한 대리충족

입니다.(그것이 아마도 힛걸의 비중을 원작보다 꽤 많이 다룬 이유일 것입니다.)

결국 마지막에 가서는 처음의 빌딩 옥상에서의 추락 상황과 유사한 상황을 만들고

거기서 추락이 아니라 비상하는 걸 보여줍니다.(원작에는 없는 부분입니다.)

슈퍼히어로를 통한 대리만족의 최종 완성판 같은 모습으로 말입니다.



이렇게 마크 밀러와 매튜 본은 시작은 동일하였으나 도착한 곳은 서로 달랐습니다. 마크 밀러는 ‘킥 애스’를 통해 오시이 마모루나 안노 히데야키 처럼

만화에 빠져 있는 사람들을 현실로 다시 내동댕이치려 하지만, 매튜 본은 오히려 그들을 위로하고 그들의 꿈을 간접적이나마 실현시켜주려 합니다.



원작에서 드러나듯이, 마크 밀러에게 ‘가면쓰기’는 데이브가 왕가슴을 보며 자위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는 행위입니다. 자위의 끝이 결국 허무한 것처럼, 데이브 역시 그렇게 험란한 전투를 거쳤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일상은 아무것도 변한 게 없습니다. 아니, 더 처참합니다.

데이브의 마지막은 이렇습니다. 케이티에게 용기있게 자신이 게이가 아니라고 고백했다가 냉정하게 차이고 심지어 그녀는 친구 흑인에게 그를 구타하라고까지 합니다..

그렇게 얻어맞고 집으로 돌아온 밤, 데이브에게 케이티의 친구가 보낸 사진 하나가

핸드폰으로 전송되는데, 그건 케이티가 그 흑인과 관계를 맺고 있는 사진이었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은 독백을 남기며 원작에서 사라지게 됩니다.

그것도 아주 작은 칸막이 안에 담겨 닫힌 문 뒤에서…

“나는 내 삶에서 이 이상 낙담한 적이 없었다.

나는 부끄럽지만 인정해야겠다.

그것으로 인해 완전히 무너져버려 며칠 밤을 울며 지샜다는 것을…”



마크 밀러는 데이브에게 가차없는 ‘no happy ending‘을 선사했습니다.

그리고 그건 거기까지 데이브에게 감정이입되어 함께 온 독자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대리만족을 느낄 여지를 전혀 주지 않습니다.

남는 건 다만 허무함과 씁쓸함.
그것은 마치 가면을 벗고 화장실에서 나와

다시 자신의 책상으로 돌아가 정해진 일을 해야만 하는


만화속 인물이 느꼈을 씁쓸한 감정과도 같습니다.
그렇게 마크 밀러는 ‘킥 애스’를 통해 슈퍼히어로물이라는 것이 결국은

자위 행위와 다를 게 없다는 걸 보여줍니다.

이것은 바로 빅 대디의 최후의 장면에서도 그대로 드러납니다.

영화와 원작이 가장 차이가 나는 점이 바로 빅 대디의 설정일 것입니다.

영화는 억울하게 희생당한 아내의 복수를 위해 ‘빅 대디’가 되었다는 설정이지만

원작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레드 미스트의 간계로 데이브와 함께 붙잡힌 ‘빅 대디’.

마피아들은 그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 고문을 합니다.

도대체 왜 무엇 때문에 자신들을 그렇게 괴롭혔는가 알기 위해서이죠.

결국 빅 대디는 그의 최후에 이르러 자신에 대해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합니다.

“나는 은퇴한 전직 경찰 같은게 아니야 난 회계사였어

신용회사를 위해 숫자 세는게 고작이었지

거기다 나를 정말 증오하는 아내랑 결혼했었지. 당신 같으면 그런 삶에 만족하겠어?

나는 내 친구도 싫었고 삶 자체가 싫었다. 그래서 딸애를 데리고 도망쳤어.

그녀를 완전히 새롭게 만들어 주려고…”

“난 만화광일 뿐이야. 데이브, 자네와 마찬가지지.

민디는 아무것도 모르고 죽었지만, 난 그저 또 다른 한 명의 후레자식에 지나지 않아.”

“제길! 그럼 너 같은 만화광이 왜 우리를 뒤쫓았던 거냐?

정말 이해가 안 가는군. 왜 하필이면 내 부하들을 골랐던 거냐구? 이 자식아!”

“간단해. 우리에겐 악당이 필요했으니까?”

“뭐?”

“난 민디에게 정말 살아 숨쉬는 삶을 주고 싶었다.

민디가 아메리칸 아이돌이나 보면서 자라는 걸 원치 않았어..

나는 민디가 뭔가 다른 특별한 것이 되길 원했다.”

그리고 이것을 마지막으로 그 역시 원작에서 사라집니다.



이와 같은 데이브와 빅 대디의 마지막 모습의 유사성은

(데이브는 케이티를 잃었고, 빅 대디는 민디를 잃었습니다.)

마크 밀러가 사실은 빅 대디와 데이브를 일종의 같은 연장선상에 놓은 인물로

설정하였음을 드러내 줍니다.(어쩌면 빅 대디는 데이브의 미래 모습인지도 모릅니다.)

둘 다 그렇게 자기 위안적 행위에 불과한 것을 자기 본질로 체화시키려 하다가

처벌을 받는 것이죠.(아마도 그것이 데이브가 고문을 당할 때 거기에 전기 고문을

받는 이유이고 같은 의미에서 ‘설계’한 빅 대디는 머리에 처형을 당하는 것일 겁니다.)

마크 밀러는 이렇게 슈퍼히어로물의 한계를 명확히 긋고 싶어합니다.

환상은 환상일 뿐이고 환상과 현실을 혼동해 그것에게 위안 이상의 것을 받으려

해서는 안된다고 말입니다.

이떻게 보면 슈퍼히어로물을 쓰는 작가로서 그는 꽤 자학적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어쩌면 WANTED나 OLD MAN LOGAN 처럼, 슈퍼히어로 보다 슈퍼빌란에게

더 끌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지막에 레드 미스트가 하는 대사 ‘WAIT UNTIL THEY GET A LOAD OF ME’는 바로

죠커의 유명한 대사이기도 하죠.)



하지만, 매튜 본은 다릅니다.

영화엔 더 이상 원작에서 보여지던 처절함은 없습니다. 오히려 슈퍼히어로물의

장르적 쾌감으로 충만합니다. 그것도 아주 완성도 높게…

그렇게 매튜 본은 우리들에게 슈퍼히어로물을 통한 대리충족을 듬뿍 느끼게 해줍니다.

원작에서 데이브나 ‘빅 대디’의 가면은 무참히 찢겨 나갑니다. 고문을 당하는 순간

데이브의 가면은 반쯤 찢겨져 나갔고, 빅 대디는 가면이 벗겨져 얼굴이 엉망인 상태에서

처형됩니다. 마크 밀러는 이렇게 그들의 가면을 벗겨 가면을 벗은 그들이 현실에서 얼마

나 초라하고 무력한지 보여주려 합니다. 끝까지 가면을 벗지 않는 존재는 처음부터 슈퍼

히어로로 자라온 민디 정도죠.

하지마 매튜 본은 그 누구의 가면도 벗기지 않습니다. 빅 대디 역시 최후의 순간에도

그 가면을 벗지 않죠. 매튜 본은 그렇게 슈퍼 히어로를 끝까지 슈퍼 히어로로 남겨두려

합니다. 그렇게 우리들이 느끼고 싶은 슈퍼 히어로를 통한 대리만족을 보존시켜 주려

하려는 것이죠.



이상, 간략하게 마크 밀러의 원작과 매튜 본의 영화가 어떻게 다른가를 얘기했습니다만

섣불리 뭐가 더 옳다고 말 할 수는 없겠죠.



여기서 다시 뀌노의 1칸 짜리 만화 하나를 인용하려 합니다.

그 만화는 극장 내부를 묘사하고 있는데, 거기엔 지금 찰리 채플린이

주연한 모던 타임즈에서 유명한 장면중 하나인 구두끈을 스파게티 처럼 먹는

찰리 채플린의 모습이 나오고 있는 중입니다. 뀌노는 그것을 바라보는 관객층을 묘사해

보여줍니다. 맨 위층의 100달러 로얄석의 관객들은 너무 웃기다며 마구 웃습니다.

하지만 맨 아래 거의 바닥의 1달러의 관객들은 그것이 자기 얘기 같아서 씁쓸한 표정입

니다. 뀌노는 이렇게 같은 작품이더라도 자기가 처한 사회적 위치에 따라서 느껴지는 바가

다르다는 것을 함축적으로 보여주었습니다.


이와 똑같이 마크 밀러의 원작을 더 선호하든, 매튜 본의 원작을 더 선호하든,

그것은 보는 사람에게 달린 일 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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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트 로커 - The Hurt Locker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이 영화는 일단 너무나 잘 만들어졌습니다.

다른 건 다 제쳐두고서라도 132분이라는 긴 러닝 타임을 내내

잔뜩 긴장한 채 보게 만드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죠.



그러면서도 일순 당혹감을 느끼는 건,

흔히 ‘전쟁 영화’라고 했을 때 우리가 떠올릴 수 있는 것,

그러니까 대규모 전투라든지 아니면 전쟁으로 인해 인간성이 황페화 된 것이라든지

그것도 아니면 동료 병사들간의 진한 휴머니즘 같은…

것들이 전혀 나오지 않는다는 거겠죠.

거기다 이 영화는 이라크전을 소재로 삼으면서도

이라크전 자체에 대해서는 아무런 발언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캐슬린 비글로우의 ‘허트 로커’는 전쟁 영화가 아니라

단순히 ‘전쟁’만을 빌려온 ‘액션’영화라는 게 더 맞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제 생각에 이 영화는

만일, 전쟁 영화가 전쟁의 본질을 보여주는 영화라고 정의를 내린다면

가장 전쟁 영화다운 전쟁 영화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니까 이 영화 만큼 전쟁의 본질을 잘 보여주는 영화가 없다는 것이죠.

아니, 보여주기 보다는 관객으로 하여금 생생하게 체험하게 해 준다는 점에서

아주 뛰어나다고 보여집니다.



그렇게 <허트 로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관객이 직접 전쟁의 현장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리들리 스콧의 ‘블랙호크다운’을 떠 올릴 수 있습니다.

그 영화도 그냥 관객으로 하여금 그 현장에 직접 뛰어들게 했지요.

하지만 그 영화는 그 하나의 사건이 어떻게 전개되는지 그 시간적 추이를

다 보여줍니다. 그렇게 전체적인 사건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역시

전쟁을 객관화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죠.

하지만 <허트 로커>에는 그나마도 없습니다.

<허트 로커>엔 오직 조각 조각난 단편만이 있습니다.

더구나 그 단편들마저 그리 잘 연결이 되지 않습니다.



이건 폭발물 처리반 EOD의 실제 처지와도 같습니다.

언제 어디서 나타나서 그들을 출동하게 만들지 모르는

폭발물들에게(특히 급조된 IED 같은 것들은 더더욱) ‘인과’라는게

있을리가 없을 테니까요.

이와 똑같이 전쟁에 참여하는 모두도 그저 자신이 속한

지금-여기의 상황만 알 뿐, 전쟁의 전체적인 모습은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전쟁에 참여하는 자들에게 ‘시야의 한계’는 절대적입니다.

<허트 로커>에서 병사들이 망원 렌즈를 통해서야

비로소 사물을 식별할 수 있는 것 처럼 말이죠.



게다가 캐서린 비글로우는 내러티브를 구성하는 것도

관객이 EOD와 동일한 체험을 갖도록 하기 위해서인지

주로 ‘출동-해체’의 과정으로 이루어 놓았습니다.

관객은 그들과 똑같이 아무런 사전 설명없이 느닷없이 폭발물이

있는 장소로 안내되고 그들의 시야와 똑같이 제한된 시야 속에서

사방이 한껏 열려진 장소에서 어디서 날아올지 모르는 총알과

어디서 튀어나와 폭발할지 모르는 공포를 느껴야 합니다.

(관객은 자주 등장인물의 주관적 시점을 공유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건 해체된 이후에도 아무런 설명이 없습니다.



마치 “대체 내가 왜 이걸 해야하지?”

라는 의문이 군인에게 허용되지 않듯이

“대체 제가 왜 저러는거야?”

라는 의문이 관객에겐 허용되지 않습니다.

여기에 사유의 틈은 낄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영화의 마지막에

“어떻게 그렇게 목숨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고

덤빌 수 있느냐?”에 질문에 “나도 모르겠다.”라는 대답은

그야말로 이 영화에서는 정확한 것입니다.



전쟁이 요구하는 것은

질문과 생각이 아니라

오로지 상황이 닥쳤을 때 요구되는 반응을 위한

반사신경일 뿐이니까요.

그것이 바로 엘드리지가 군의관 앞에서 했던

“제가 요즘 생각하고 있는 것은 이것 뿐입니다.

이렇게 방아쇠를 당기면 톰은 살아요.

안 당기면 그는 죽어요. 이것 뿐이에요.”

말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그가 살인이라는 것에 머뭇거리지 않고

전쟁이 요구하는 대로 반사신경처럼 행했다면

지금 그가 가지는 죄책감도 가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엘드리지가 그렇지 못했던 것은

바로 이 전쟁이란 것에 그다지 중독되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엘드리지는 영화 초반에 샌본에게 이라크에서 잔디 사업을 하면

크게 히트할 것이라는 말을 합니다. 그에겐 이 전쟁에서 벗어났을 때

그렇게 보통의 삶으로 돌아갔을 때 하려는 계획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제임스는 그가 해체한 폭탄의 숫자에서 드러나듯이

전쟁에 너무도 중독된 나머지, 전장이 아니고는

그가 살아있다는 느낌을 가질 수 없습니다.



때문에, 영화의 가장 앞부분에 나오는

“전쟁은 마약이다.”라는 말은 마약에 깔려있는 중독성이야 말로

가장 전쟁의 본질을 잘 요약해 주는 말임과 동시에 캐서린 비글로우가

<허트 로커>를 통해 말하고 싶은 핵심적인 주제입니다.

하지만 캐서린 비글로우는 그것을 보여주는데 그치지 않고

관객으로 하여금 체험하고 느끼게 하는 것 까지 나아갑니다.



‘중독’에는 아무런 이성적 판단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중독엔 오로지 그것을 충족시키기 위한 행위만 요구되어질 뿐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게, 불을 켜면 침을 흘리는 ‘파블로프의 개’ 처럼

자극이 있으면 단순히 반응할 수 밖에 없는 즉각적인 반사신경적 행위와

같습니다. 중독은 ‘의지’와 ‘가치판단’을 뛰어넘는 영역에 있습니다.

아마도 그 때문에, 중독이 더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의문이 없어지고 생각이 없어지고 감정도 메말라

점점 자극과 반응만이 전부인 일차원적 동물로 퇴화되어 가는 것일테죠.

그리고 이건 그대로 전쟁에 참여하고 있는 자들에게도 적용됩니다.

영화는 자주 임무를 수행하는 병사들 뿐만 아니라 주위에서 무심히

지켜보고 있는 군중들도 자주 보여줍니다. 하지만 곧 코 앞에서 폭탄이

터져 사람들이 죽어나갈지 모르는데도 그들의 얼굴엔 전혀 어떤 표정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그저 무심한 표정만이 전부입니다.

후반의 ‘인간 폭탄’은 그러한 중독된 상태에서의 인간성 부재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장면일 것입니다.



영화에서 머무르는 날짜를 카운트 하는 게 아니라

본국으로 돌아갈 날짜를 카운트 하는 것도 의미심장 합니다.

마치 이 카운트는 중독중의 사람이 그것을 끊기 위해 얼마 만큼

참았나 헤아리기 위해 날짜를 카운트하는 것과도 비슷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담배 같은 것을 끊을 때,

‘오늘이 끊은 지 며칠이나 되었지?”하는 것 처럼 말이죠.



거기다, 단순히 출동-해체’의 과정으로만 이루어진 이 영화는

점점 출동하는 대원들 앞에 더 더 강력한 폭탄을 준비합니다.

처음엔 대전차포 로켓 하나이던 것이 여러 개가 되고

급기야는 자살 폭탄에 인간 폭탄까지 등장하게 됩니다.

처음엔 여유있게 대처하던 EOD 대원들도 이제는 말수가 없어지고

미래에 대한 계획 보다는 단지 살아남기 위한 본능만이 남아 있게

됩니다. 이렇게 영화는 전쟁이 일종의 중독성을 가지고 있다면

참여하는 사람들은 왜 중독되는가에 대해 그 이유를 보여줍니다.

그건 바로 전쟁이 마약이 주는 체험과도 같이, 평범한 일상이 제공할 수

없는 극단적 체험을 하게 하기 때문이라고…

극단적인 체험은 일종의 ‘경이’를 느끼는 감정과도 비슷해서

거기서 인간은 아무런 사고와 판단을 할 수 없고 그저 그것에 짓눌릴 뿐이니까요.



<허트 로커>는 전쟁에 대해 아무것도 얘기하지 않는 것 처럼 하면서

사실은 관객으로 하여금 절절하게 전쟁이 가지고 있는 무시무시한

중독성을 정말 잘 느끼도록 해 주는 영화입니다.

전작 'K-19 위도우메이커' 의 후반부에서 리암 니슨은 재판정에 선

해리슨 포드를 위해 이런 옹호 발언을 합니다.

“당신들은 그 때 그 자리에 없었지만 나는 거기서 모든 걸 지켜봤습니다.

그 자리에 없었다면 당신들은 함장님을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함장님을 판단할 수 있는 건 그 때 그 자리에 있었던 우리들 뿐입니다.

그런 우리들이 보기에 함장님은 우리가 보았던 가장 위대한 함장이었습니다.”

<허트 로커>는 바로 이러한 리암 니슨의 말이 잘 어울리는 영화입니다.

그렇게 전쟁 속에 던져진 자가 어떤 느낌을 가지는가?에 대해서

가장 가까이 던져진 자에게 다가가 느끼게끔 해주는…





마침, 영화 얘기가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허트 로커>는

'K-19 위도우메이커' 와 어쩐지 좀 유사성이 느껴집니다. 리더가 교체되는 것도 그렇고

교체된 리더와 종래 있었던 구성원들과의 불화도 그렇고 거기다 엘드리지에게

“네가 할 수 있는 것이 되어라.”라고 상담해주는 군의관은

하필이면 에서 원자로 사고가 일어났을 때 그것을 수리하기 위해

가장 먼저 들어간 ‘크리스찬 카마고’였다는 것도 그렇고…

하지만, 결론은 전혀 다릅니다.

의 결론은, 마지막 그러니까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K-19’ 사건이

있은 지 25년이 지나 그제서야 그 때 동료들을 위해 희생된 동료들에 대한

추모가 허용되었을 때, 바로 그 자리에서 행한 해리슨 포드의 추모사에서

잘 드러나듯이 일종의 ‘동료애’ 입니다 하지만 <허트 로커>는 이와 정반대에

있습니다(특히나 제임스를 해리슨 포드로 보면 이 차이는 더욱 더 극명하게

벌어집니다.) 여기엔 남자들만의 끈적한 유대감도 없고, 유일하게 휴머니즘으로

보였던 행위들도 허무한 비웃음거리로 돌아올 뿐입니다. 남은 건 다만 점점

깊어지는 고독뿐이죠.

물론 고독은 중독된자의 유일한 동반자입니다만…



그리고 가장 중독된 자 제임스는 전작 <폭풍 속으로>의 패트릭 스웨이지의

또 다른 버전이기도 합니다. <폭풍 속으로>에서 패트릭 스웨이지는 익스트림

스포츠에 중독되어 그것의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대통령 가면을 쓰고 은행을 터는

리더였습니다. 영화 <폭풍 속으로>는 마지막에 그가 50년에 한 번 찾아온다는

거대한 파도를 타기 위해 그 파도 앞으로 서핑보드를 타고 헤엄쳐 들어가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허트 로커>에서 제임스가 다시 전장으로 돌아와 폭탄을 해체하러

가는 모습이 그와 똑같이 찍혔더군요.

어쩌면 그것을 통해 패트릭 스웨이지가 그 파도 속에서 사라졌듯이,

제임스도 결국 가장 자기가 좋아한 현장에서 사라져벼렸음을 암시하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촬영감독을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네요.

이 영화의 촬영감독은 Barry Ackroyd 입니다.

아마도 켄 로치 감독의 영화들을 많이 보신 분들이라면

꽤 낯 익은 이름이죠.
이 촬영감독의 커리어가 바로 켄 로치의 유명한 명작
‘RIFF-RAFF’와 더불어 시작했을 뿐만 아니라 그 외 ‘레이닝 스톤’
‘레이디버드 레이디 버드’ ‘칼라송’ ‘빵과 장미’ ‘내 이름은 죠’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등
수 많은 영화들을 켄 로치와 함께 만들었으니까요.
물론 이 말은 폴 그린그래스의 ‘플라이트 93’이 나왔을 때 해야만 했을 말이었겠지만요.
아님, 가장 최근의 ‘그린 존’ 에서라든가… 아무튼 너무나 반가운 이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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