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
마리 유키코 지음, 김은모 옮김 / 작가정신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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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의 아미타빌, 일본의 주온. 모두 특정한 공간이 가득한 공포를 자아낸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예로부터 공간은 다 동일하지 않았다. 어떤 공간은 신성한 힘이 있다고 여겨졌고 또 어떤 공간은 아주 사악한 힘이 깃들어져 있다고 믿어졌다. 그건 지금도 변함이 없다. 현재 도시에 떠도는 괴담들 역시 어떤 공간을 무대로 한 것이 많으니까 말이다. 인간의 악의를 제한없이 재현하여 독자로 하여금 불쾌감을 유발시키는, 이른바 '이야미스' 장르에 있어서 가장 두각을 나타내는 일본의 여성 작가 마리 유키코. 그녀가 이번에는 모처럼 이야미스 장르를 떠나 아미타빌이나 주온처럼 공간을 무대로 한 호러 연작집을 들고 나왔다. 제목은 '이사'. 일본에선 2013년에 발표된 책이다.




  모두 여섯 편이 단편이 실려 있는데 제목이 '이사'인 것은 그 내용이 다들 이사와 관련있기 때문이다. 

 첫 단편, '문'에선 자신이 살고 있는 집이 살인마가 살던 곳이라는 걸 알게된 여성이 이사를 위해 어떤 집을 방문하여 살펴보다가 숨겨진 문을 찾아내는 이야기가 나오고 두 번째 '수납장'은 남편 없이 홀로 외동딸을 키우는 여성 일러스트레이터가 한창 이사 준비를 하다 수납장에서 딸 아이가 그린 그림을 발견하게 되는 이야기이며 세 번째 '책상'은 이사짐 센터 업체에서 전화 접수 업무를 갓 맡은 주부가 자기가 쓰는 책상에서 전에 일하던 여성이 써 놓은 편지를 찾아내는 이야기이며 네 번째 '상자'는 직장에서 사무실 이사를 했는데 유독 자기 짐만 잃어버려 커다란 곤란을 겪는 한 정규직 여성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으며 다섯 번째 '벽'은 어린 시절의 가정 폭력으로 불우한 기억을 가지고 있는 남자가 자기 동료 또한 지금 살고 있는 집의 벽을 통해 옆집의 심각한 가정폭력을 알게되었는 걸 듣게 되는 이야기이며 마지막 '끈'은 이야기의 무대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이제 막 새집으로 이사 온, 이사를 참 좋아하는 여인이 다시 한 번 첫 번째 단편에 나왔던 '문'을 발견하는 이야기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이 책의 제목으로 '이사'만큼 어울리는 것도 또 없을 듯하다.


  마리 유키코로서는 처음 도전하는 호러장르일텐데, 결과는 첫 시도 치고는 꽤 괜찮게 나왔다.

'이야미스' 장르를 쓸 때, 마리 유키코는 주로 묘사를 건조하게 했는데 이건 '이사'에서도 그리 달라지지 않았다. 그러니까 잔혹하거나 충격적인 장면 묘사를 통하여 무서움을 전달하지 않고 별다른 자극없이 무덤덤한 기술로 독자를 슬쩍 호러의 장소로 데려간다는 뜻이다. 여기 실린 소설의 공포 대부분은 반전을 통해서 온다. 평범한 공간이 삽시간에 죽음의 공간이 되고 여기가 무서움의 장소인 줄 알았는데 사실은 전혀 다른 곳이었다는 게 별안간 독자 앞에 일어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사'는 소재만 그런 것이 아니라 독자의 정신마저 '이사'시키고 있다고 하겠다. 이러한 전환, 전복이 꽤 깔끔하고 앞서 세세한 단서를 두어 설득력있게 이뤄지기 때문에 나는 '이사'를 호러 소설로도 꽤 괜찮다고 한 것이다. 거기다 '상자' 같은 단편에선 마리 유키코만의 장기인 '이야미스'또한 가득 맛볼 수 있었기에 더욱 만족했다.


  한 가지 이 책의 매력으로 빼놓을 수 없는 게 있다. 바로 '작품 해설'이다.

  보통 작품 해설은 해설이기 때문에 독자는 그것이 객관적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간단히 말해 허구가 아니라고 말이다. 소설의 작품 해설은 바로 그러한 독자의 사고 습관을 멋지게 이용하고 있다. 해설에서 소설 속 이야기가 모두 실화인 것처럼 설명하여 독자로 하여금 픽션인줄로만 알았던 소설 속 이야기가 진실일 수도 있다는 오리무중에 빠뜨리는 것이다. 거기다 해설하는 사람의 이름까지, 분명 이 소설을 읽었다면 눈치채지 않을 수 없는, 모든 소설에 꼭 등장하는 이름인 '아오시마'로 하여 마지막 문장에서 살짝 소름마저 일으키고 있다. 이런 점 때문에 난 작품 해설이 정말 해설인지 의심스럽다. 어쩌면 이 작품 해설까지 마리 유키코가 쓰지 않았을까 싶고, 그래서 여기에 실린 단편은 여섯이 아니라 실은 일곱으로 봐야하지 않나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다. 여하튼 이처럼 독특한 작품 해설까지 포함하여 '이사'에 실린 모든 단편들은 마리 유키코의 책이 늘 그랬듯이 벗할만한 매력이 있다. 가볍게 괴담의 세계에 발을 담그고 싶으시다면 얼른 손에 한 번 들어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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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9-30 01:2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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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킹 지음, 이은선 옮김 / 황금가지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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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에 발표된, 스티븐 킹의 '인스티튜트'가 드디어 출간되었다. 


 작년에 이 책이 미국에서 나왔을 때, 입소문이 좋아서 우리나라에도 나오길 기다렸던 작품인데 기대한 것보다 빨리 나와서 더 반가웠다. '인스티튜트'는 단순하게 시설이라는 뜻으로 스티븐 킹은 이 작품에서 영화로도 만들어졌던 샤이닝의 후속작인 '닥터 슬립'에서 한 번 다뤘던 초능력자 이야기를 다시 한 번 구현하고 있다. 그건 총 2권에 걸쳐 펼쳐지는데, 난 그 중 1권을 읽고 이 리뷰를 쓰고 있다.



 먼저 총평부터 하자면 근래 읽은 스티븐 킹 작품 중에서 가장 재미있는 것 중 하나였다. 전체적인 느낌은 '닥터슬립'과 '쇼생크 탈출'을 섞어놓은 듯한 느낌이다. 이걸 하나씩 설명하자면 먼저 이 소설이 두 명의 인물을 주축으로 하고 있다는 것부터 말해야 할 것 같다. 하나는 소설의 포문을 여는 인물로 전직 경찰인 팀 제이미슨이고 다른 하나는 아닌 밤 중에 홍두깨처럼 정체를 알 수 없는 이들의 손에 납치되어 '시설'에 감금된, 초능력을 가진 열 두살의 소년 루크 엘리스다. 1권이 끝날 때까지 이 둘은 만나지 않는다. 그러나 1권의 마지막 장면을 보면 2권에서 이 둘이 만나고 루크가 팀 제이미슨의 보호를 받을 것은 명백해 보인다. 이러한 팀과 루크의 관계는 '닥터 슬립'에서 팀의 말대로 '서로 등을 긁어주는' 조력 관계였던 대니와 아브라를 떠올리게 한다. 거기다 그들을 위협하는 '닥터 슬립'의 트루낫 역시 이 소설 '시설'과 유사하게 '스팀' 착취라는 그들의 목적을 위해 초능력이 있는 어린 아이들을 납치, 감금한다. 원래 루크는 잠재적 염력 보유자인 TK로 분류되어 시설에 수용되었지만 나중엔 TP인 텔레파시 능력도 가지게 되는데 이 또한 뛰어난 텔레파시 능력이라 할 수 있는 샤이닝을 지녔던 아브라를 생각나게 만든다. 이런 까닭으로 난 '닥터 슬립'을 연상했고 '쇼생크 탈출'을 생각했던 건 '인스티튜트' 1권 후반의 이야기는 끝도 없이 아이들의 인권을 유린하고 결국엔 폐기 처분되고 말 것이라는 걸 깨닫게 된 루크가 IQ 수치 자체가 무의미한, 누구보다 뛰어난 천재적인 두뇌로 전략을 짜고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을 움직여 '시설'을 탈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읽어보시면 이런 궁금증이 하나 드실지 모르겠다.

 왜 스티븐 킹은 소설의 시작을 하필이면 팀 제이미슨으로 한 것일까? 사실 팀은 1권에서 비중이 그리 크지 않으며 이야기의 순서를 바꿔서 루크가 듀프레이에 왔을 때 1권 앞부분에 나온 그의 이야기를 시작해도 별로 어색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렇게 팀의 얘기로 시작했다가 뚝 단절하고 갑자기 인물과 배경을 확 바꿔서 루크의 이야기를 하는 게 더 어색해 보이는데, 스티븐 킹은 왜 이런 인상을 주는 위험마저 무릅쓰면서 지금과 같은 구성을 취한 것일까? 난 여기에 이래야만 하는 이유가 있으며 그것이 이 소설, '인스티튜트'가 말하고자 하는 것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일단 소설의 핵심이 되는 '인스티튜트', 즉 '시설'에 대한 얘기부터 해보자. 스티븐 킹은 2장 '똘똘이'에서 루크가 시설에 납치, 수용되는 과정을 그린다. 루크는 앞서 말했듯 엄청난 천재로 이미 한 해의 등록금이 하버드대와 맞먹는 영재 전문 교육학교 브로더릭에서도 손꼽히는 존재다. 그는 겨우 열 두 살의 나이로 미국의 SAT 시험을 우수한 성적으로 통과한다.


저희 학교에는 영재들이 있습니다. 사실 브로더릭 재학생의 50퍼센트 이상이 영재죠. 하지만 그 아이들에게는 한계가 있습니다. 루크는 달라요. 로크는 포괄적이에요. 한 분야에서만 그런 게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그렇습니다.(P. 81)


 

 스티븐 킹은 루크의 비범한 면을 주로 학교라는 것과 관련하여 많이 보여주는데, 이건 사실 나중에 나오는 '시설(인스티튜트)'가 독자들에게 일종의 교육 기관처럼 연상되도록 하는 교묘한 장치라고 할 수 있다. 사실 그 시설에 납치, 수용된 이들은 모두 학교를 다녀야 하는 나이의 어린 아이들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시설'은 오늘날 미국 교육이 가진 현실을 보여주기 위한 공간이라고도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스티븐 킹은 루크가 다녔던 학교, 브로더릭에서 유난히 학생의 뛰어난 능력을 강조하며 그것이 사회를 이끌어나가야 한다는 걸 은연 중에 내비치고 또 루크가 SAT를 치르는 날, 성적이 나쁘게 나온 여학생이 깊은 슬픔에 빠져 나온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러한 건 모두 미국 교육이 현재 추구하고 있는 수월성 교육의 대표적인 특징이기 때문이다. 높은 성취만을 강조하며 개인의 능력에 따른 차별을 당연시 하는 것. 스티븐 킹은 '시설'에서 아이들에게 행해지는 모든 것을 통하여 현재 미국이 하고 있는 수월성 교육이라는 미명하에 이뤄지는 것들의 진실한 초상은 바로 이것이 아니냐고 비판하는 것이다. 시설의 운영자 식스비 부인을 비롯하여 그 곳의 관리자와 직원들을 아이들의 인권을 조금도 인정하지 않는다. 모두 자신들의 목적을 위한 도구로만 생각하며 그것을 위해서라면 목숨을 잃게 만드는 폭력까지 서슴없이 자행한다. 수월성 교육이 능력과 성적이 낮은 학생들을 무시하듯, '시설' 또한 자신들이 원하는 기준에 아이들이 도달하지 못하면 폐기해버린다. 


 그는 실험대상이었고 그들 모두 마찬가지겠지만 급이 낮은 TP와 TK, 그러니까 분홍색들만 추가로 검사를 받았다. 이유가 뭘까? 그들의 가치가 떨어지기 때문일까? 일이 잘못되면 더 쉽게 폐기처분할 수 있기 때문일까? 확인할 방법은 없었지만 루크가 보기에는 가능성 있는 얘기였다.(……) 그는 알 수 없었다. 점들이 사라졌고 아이리스도 사라졌고 점들은 다시 돌아올 지 몰라도 아이리스는 그렇지 않다는 것만 알 수 있을 따름이었다. 아이리스는 뒤 건물로 넘어갔고 그들은 이제 다시는 그녀를 만날 수 없었다.(P. 281 ~ 2)



  이러한 '시설'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어른과 아이들의 대립이다. 아이들을 '뒷 건물'로 보내서 자신들의 목적(이건 1권 후반부에서 밝혀진다.)에 보다 유용하게 쓰기 위한 수단으로만 생각하는 '시설'의 어른들은 오직 아이들을 통제할 뿐이며 자신들이 세운 질서에 복종할 것만 강제한다. 그들은 아이들에게 자신을 나라에 봉사하기 위해 군인처럼 징집당한 것이며 오늘의 희생으로 나라가 크게 도움을 받을 거라는 둥, 여기서의 생활은 포스터로 '천국에서 보내는 또 다른 하루'라는 둥 듣기 좋은 말을 해대지만 아이들은 속지 않는다. 자신들이 당하고 있는 폭언과 폭행, 바깥 사정을 하나도 알 수 없는 고립과 내용물을 알 수 없는 약물 투입에 대한 공포는 그 어떤 좋은 말로도 포장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저들이 우리는 납치한 거냐고? 맞아. 우리가 초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냐고? 맞아. 저들이 우리를 어떻게 찾았느냐고? 그건 몰라. 하지만 엄청난 작전일거야. 여기가 이렇게 엄청난 걸 보면. 수용소잖아. 의사도 있고 기술자도 있고 자칭 관리인이라는 사람도 있고... 숲속에 박혀 있는 소규모 병원이나 다름없어.”

(………)

 “도대체 말이 안 돼. 미국에서 이게 가능하다고?” 루크가 말했다.

 “여긴 미국이 아니야. ‘시설’ 왕국이지. 점심 먹으러 식당에 가면 창밖을 내다봐, 엘리스. (·········) 여기처럼 초록색으로 된 콘크리트블록 건물이. 나무에 섞여서 잘 안보이게 하려는 수작이겠지. 거기가 뒤 건물이야. 모든 시험과 주사 투여가 끝난 아이들이 가는 곳.”

 “거기에 가면 어떻게 되는데?”

 이번에는 칼리샤가 대답했다.

 “우리도 몰라.”(p. 151 ~ 2)


 잘생긴데다 시설에 가장 많은 반항을 하여 '시설'에 수용된 여자 아이들에게 많은 흠모를 받는 니키는 이 흐름에 가장 대표적인 존재다. 이러한 니키로 인해 어른과 아이들의 대립 전선은 더욱 선명해지며 어른의 나쁜 면은 한층 더 부각된다. 그 어른들은 입으로 아무리 좋은 말을 내뱉어도 그저 아이들에게 끔찍한 악몽만 선사하는 존재다.


 프리실라가 다시 그의 뺨을 때렸다. 이제 귀가 더 세게 울렸고 루크는 울음을 터뜨렸다.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 시설이 악몽인 줄 알았더니, 몸의 절반이 빠져나간 채로 아무것도 안 보이는 카드에서 뭐가 보이느냐는 질문을 받고 모르겠다고 대답하면 뺨을 맞는 지금 이 상황이 진짜 악몽이었다.(p. 270)

 

 바로 여기서 우리는 소설 처음에 나온 팀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초반에 팀과 팀이 뜻하지 않게 하게 되었던 여행 중에 같이 했던 어른들은 '시설'의 어른들과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시설'의 어른들은 초능력을 부려서 더욱 자신들과 다른 타자인 아이들을 무조건 통제하려 들지만 팀과 초반에 나온 어른들은 타자를 통제하지 않는다. 기꺼이 자신의 곁을 내주어 격리하거나 차별하지도 않는다. 그런 어른들 사이에서 팀은 목적지를 정하지 않은 채 여행을 한다. 그 때, 그 때 인생이 흘러가는 대로 발걸음을 옮길 뿐인 여정은 '뒷 건물'이라는 목적지가 명백하게 정해진 '시설'과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여기서 나는 스티븐 킹이 포스터 문구를 통해 인용한 '천국에서 보내는 또 다른 하루'가 얼마나 재치있게 도입한 장치인지 감탄하게 된다. 아마도 소설 초반에서 팀이 노숙자 할머니 애니에게 보인 모습이 아니었다면 난 이 문구를 그냥 단순하게 시설이 아이들에게 하는 흔한 선전문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니었다. 바로 이 문구 자체에 스티븐 킹이 소설을 통해 하고자 하는 말이 집약되어 있었다. ​'천국에서 보내는 또 다른 하루'는 영어로 'ANOTHER DAY IN PARADISE'다. 어딘가 낯익게 느껴진다면 그건 당신이 필 콜린스의 동명 노래를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냥 제목이 같아서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니다. 스티븐 킹은 분명히 이 노래를 생각하고 그 문구를 가져왔다. 그걸 어떻게 알 수 있냐고? 팀이 노숙자 할머니 애니와 만나는 장면 때문이다. 필 콜린스의 노래 또한 한 남자와 그에게 도움을 구하는 노숙자 여인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그런데 노랫 속 주인공 남성은 도움을 호소하는 노숙자 여인을 무시한다. 휘파람을 불면서 아무 말도 못 들었고 자긴 거기 없다는 척을 하며 황급히 떠나버린다. 이런 남자의 모습은 아이들에게 오직 도구의 모습만 볼 뿐 그 외의 것은 깡그리 무시해버렸던 '시설' 어른들의 모습과 판박이다. 그러나 팀은 다르다. 그는 마을에서조차 사람들이 가까이 다가가려 하지 않는 노숙자 할머니에게 기꺼이 다가가 말을 건네고 함께 있어 주는 것이다. 그는 필 콜린스 노래 가사처럼 그녀 얼굴의 주름을 보고 그녀가 있는 곳을 본다. 필 콜린스가 이렇게 보고 곁에 있어 준다면 천국일 거라고 노래했던 타자를 향한 전폭적인 열림. 그걸 팀은 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열려 있고 노숙자 할머니가 열심히 뜨고 있는 거대한 목도리처럼 서로 연결하는 존재다. 그러한 그는 우연의 섭리로 닿게 된 듀프레이 마을에서 야경꾼이 된다. 야경꾼은 마을 순찰을 돌지만 정식 경찰은 아니다. 경찰과 일반인의 경계에 서 있는 존재지만 바로 그 때문에 모두를 연결하며 포용할 수 있는 존재다. 


 야경꾼 자체가 디지털 시대의 아날로그 일자리거든요. 적어도 듀프레이에서는요.(P. 51)


 이러한 팀의 모습은 확고한 상하 관계로 이뤄진 조직의 위계 질서 속에서 타자에 대해선 통제와 관리만이 존재하는 '시설'과 달라도 너무 다르다. 소설 '닥터 슬립'에서 타인을 통제하는 것에만 몰두했던 '트루낫'과 타인이 가진 고통과 고뇌의 자신을 전부 열었던 '알콜 중독자 협회'가 그토록 달랐듯이.


 그런데 앞서 '시설'은 아이들에게 오직 악몽만 주고 있다고 말했다. 그건 이번 BLACK LIVES MATTER!' 시위에서 알 수 있었던 것처럼 트럼프 행정부 들어 더욱 노골화된 미국의 현실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런 악몽을 더이상 안겨주지 않으려면 과연 어떻게 해야 할까에 대한 해답은 분명해진다. 굳이 말할 필요가 있을까? 팀의 길을 따르는 것이란 걸.


 '인스티튜트' 1권은 확실히 재밌다. 첫 장을 넘긴 순간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한달음에 읽어버릴 수 있을 정도로 몰입감도 넘친다. 그렇지만 재미만이 이 책이 가진 전부는 아니다. 이야기 속에 교묘하게 배치된, '천국에서 보내는 또 다른 하루'와 같은 여러 세부 장치들을 헤아리다 보면 지금까지 리뷰를 써 온 바대로 이 소설이 현재 미국 사회에 보내는 강렬한 메시지 또한 지니고 있음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그는 미국이 '시설'처럼 위험한 길을 가고 있다고 말한다. '샤이닝'에서 타인을 통제하려는 욕망이 너무 넘친 나머지 자신의 가족마저 살해하려고 들었던(죽음은 절대적 통제 상태이니까 말이다.) 잭 토런스의 저주가 미국 사회 대기에 넘실대고 있음을 목도한 것이다. 스티븐 킹은 '닥터 슬립'에서 했던 것처럼 다시 한 번 잭 토런스라는 저주의 유령을 퇴마하려 한다. 닥터 슬립의 대니와 아브라를 통해 했던 것처럼 팀과 루크의 협업을 통해서.


 과연 이 협업이 루크를 납치하기 위해서 부모마저 눈 깜짝하지 않고 비정하게 살해해버리는 살인 집단을 거느리고 오랫동안 아이들을 납치 살해하고도 노출되지 않을 정도로 전모가 짐작되지 않는 '시설'의 위협에 맞서 성공할 수 있을 것인지 얼른 2권을 통해 확인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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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미래의 달까지 얼마나 걸릴까?
N. K. 제미신 지음, 이나경 옮김 / 황금가지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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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 세대 SF 작가들 중 가장 신뢰하고 기대하고 있는 작가인 N. K 제미신의 새로운 책이 나왔다.

 놀랍게도 이번엔 단편집이다.

 제목은 '검은 미래의 달까지 얼마나 걸릴까?'. 

이 단편집은 현재 그녀의 유일한 단편집으로 서른 살에 이르러 작가가 되기로 결심한 그녀가 거의 초기 시절이라고 할만한 2004년부터 2018년까지 여러 매체에 발표한 22개의 단편이 실려있다. 한 마디로 그녀가 작가로 첫 발자국을 떼고나서 오늘에 이르는 전 여정이 한 권의 책에 집약되어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장편에 있어서 그녀의 재능이 얼마나 뛰어난가 하는 것은 이전에 나온 <부서진 대지 3부작> 중 두 편을 통해서 충분히 경험한 바이기에(그녀는 이 3부작으로 한 편도 받기 힘들다는 SF계에 있어서 가장 유명한 상인 휴고 상을 3년 연속 수상했다.) 단편도 과연 잘 쓸까 궁금했던 터이기에 특별히 더 반가웠던 단편집이었다. 더구나 그녀는 책머리에서 이 단편집에 특별한 의미까지 부여하고 있었다. '작가로서 그리고 운동가로서 성장한 과정을 기록한 연대기'라고 말이다. 말하자면 이 단편집은 작가인 그녀에게 있어 성장 과정을 낱낱이 보여주는 나무의 나이테와도 같은 존재라는 것이니 N. K 제미신을 좋아하는 이로써 어떻게 부푼 기대를 안고 페이지를 넘기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난 당장 저마다 독특한 색채로 빛나고 있는 22개 단편들의 성운 속으로 뛰어들었다.




 시작을 여는 것은 2018년에 발표한 '남아서 싸우는 사람들'이다. 

 이 단편이 맨 앞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아마도 제미신이 이 단편집을 통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 단편에 집약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단편은 여성 SF 작가로 너무나 유명한 어슐러 르 귄의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에 대한 작가 자신의 '모방이자 반응(p.12)'인 작품인데 여기엔 두 세계를 굳건하게 가르고 있는 장벽을 허물었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한 한 남자와 그의 딸이 등장한다. 남자를 처형한 이들은 사회복지사로 불리는데, 그들은 그렇게 장벽을 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자기 세계의 사람들을 보호하는 것이라 굳게 믿고 있다. 하지만 죽은 남자의 딸은 그 사실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녀는 사회복지사들에게 이렇게 소리친다.


 "내가 복수할 거야.(...) 당신들이 아빠를 죽인 것처럼, 내가 당신들을 죽일 거야. (...) 감히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감히 어떻게."(p. 29)


 특별히 이 부분을 인용하는 것은 이러한 설정, 즉 한 쪽엔 보호 혹은 진보란 이름으로 나누고 가두는 이들이 있고 다른 한 쪽엔 그들이 설정한 벽을 뛰어넘어 어떻게든 가로지르고 서로 연결하려는 이들이라는 양분된 구도가 여기에 실린 거의 모든 단편에 걸쳐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단편집, '검은 미래의 달까지 얼마나 걸릴까?'는 구획과 횡단의 투쟁 연대기다.


 어느 도시에서나 그러하듯이 적은 자연에 없어서는 안 될 본질이다. 우리가 겪는 변화의 과정을 막을 수 없듯, 적도 완전히 종식시킬 수 없다. 나는 적의 아주 작은 일부만 다치게 했을 뿐이다. 그러나 그 부분을 망가진 채 돌려보냈다는 것도 아주 잘 알고 있다. 좋다. 최후의 결전 때가 온다면 놈은 다시 내게 달려들기 전에 한 번 더 생각해 볼 것이다.

내게. 우리에게. 그렇다.(p. 59)


 그렇다고 해서 이 투쟁이 승패를 가르고자 함은 아니다. 누가 승리하고 누가 패배하는가 하는 건 작가가 추구하는 바가 아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작가에게 있어 적은 변화를 통해 성장하기 위한 계기의 제공자일 뿐, 근절의 대상은 아니기 때문이다. 작가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로 고정된 정체성에 머무르지 않고 부단히 변화하는 가운데 성장하는 것이다. 식물처럼 하나의 장소에 머무르지 않는 것, 늘 구획된 경계를 넘어 끊임없이 탈주하는 것이야 말로 작가가 이 단편집에서 구현하고자 하는 정체성이다. 


 이것을 위해 작가는 두 가지 모티브를 특별히 많이 사용한다. 

 하나는 꿈이고 다른 하나는 조리하는 것이다.

 꿈은 두 번재 단편인 '위대한 도시의 탄생'을 비롯하여 '수면 마법사'까지 자주 등장한다.(개인적으로 이 단편집에서 가장 좋아하는 '트로이 소녀(세계관이 너무나 마음에 들어 작가가 장편으로도 만들어주길 바랐지만 책머리에서 작가는 단편으로 끝내겠다고 해놓아서 참 아쉬웠다.)'는 이러한 꿈의 테마가 가장 한껏 재현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이 단편은 가상 현실 같은 곳에서 오직 생각이란 형태로 존재하는 프로그램들의 추격전을 그리고 있는데, 이들은 흔히 말하는 전뇌 공간 속에만 머무르지 않고 현실 인간에게 다운로드 되어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오로지 자신을 지키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던 이 프로그램들은 한 어린 소녀 프로그램을 통하여 변화야말로 자신을 지키는 궁극의 길이라는 걸 깨닫게 된다.) 이 단편집에서 꿈은 한 마디로 대지와 정반대에 있는 영토이다. 현실과 비현실, 중력과 무중력으로 대비되는 장소인 것이다. 그렇기에 꿈은 무엇이든 하나로 고정시키려는 지상이 허락하지 않은 정체성의 추구를 가능하게 한다. 자신이 정말 되고 싶은 정체성을 찾거나 현실에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타자의 마음을 헤아리게 되기도 한다. 끌어당기는 중력도, 고정시키는 영토도 없어서 오로지 물 흐르듯 부유하거나 유영할 수밖에 없는 꿈은 바로 그런 차원에서 오직 변화만이 존재하는 곳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꿈을 통해 자신의 참된 정체성을 구현해 나간다는 점에서 작가는 변화 속에 주어지는 다양한 경험 속에 자신을 내맡기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자신을 찾아가는 길이라는 걸 알려주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조리(요리)의 의미는 무엇인가? 꿈이 내적인 차원의 것이라면 조리는 외적인 차원의 것이다. 왜냐하면 조리는 타자와의 관계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연금술사'는 조리사의 이야기다. 그는 처음에 기이한 고객의 레시피 대로 음식을 만들지만 후반에 가선 자기만의 레시피를 개발하여 음식을 만든다. 이러한 주제는 나중에 '퀴진 드 메므아'라는 단편에서 다시 한 번 반복된다. 남이 만든 레시피가 아니라 자기가 만든 레시피 대로 음식을 만든다는 것을 그대로 진정한 자기 자신이 되는 이야기이지만 여기서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작가가 왜 하필 조리라는 소재를 가지고 왔는가 하는데 있다. 바로 거기서 난 이 조리가 타자와의 관계에 대한 외적인 차원에 속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조리란 각각 개별적인 재료들을 훌륭한 맛을 위해 서로 공존하는 가운데 가장 조화를 이루도록 만드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그 어느 하나도 쉽게 배척되지 않는다. 또한 재료를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이 가장 뛰어난 음식을 만들 수 있는 것처럼 가장 작은 재료 하나에도 나를 헤아리는 것만큼의 깊은 헤아림이 필요하다. 바로 이러한 조리사의 자세가 작가는 타자를 대하는 나의 기본적인 태도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건 흑인이자 여성으로서 SF 소설계에서 쉽게 지워졌었던 자전적 경험의 반영이기도 하다. 작가에 따르면 자신이 소설을 쓸 때조차 암묵적으로 백인 남성 주인공을 상정하고 쓰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사회적 약자일수록 쉽게 무시된다는 건 우리 역시 익히 보아왔던 바다. 그것이 최근 미국에서 'BLACK LIVES MATTER' 시위도 불러일으키지 않았던가! 그러므로 작가는 여러 단편을 통하여 강조하는 것이다. 조리를 할 때와 같이 가장 작고 보잘 것 없는 재료에 대해서도 존중하는 마음과 세심하게 배려하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이처럼 구획과 횡단의 투쟁기는 종반엔 변화와 공존에 이르는 여정이었다.


 제미신의 역량은 단편에서도 여전했다. 어떤 단편들은 장편보다 자신이 생각하고 추구하는 바가 더 농밀하게 구현되어 있기도 했다. 그녀가 차례대로 세워 놓은 22개의 표지판을 통과하면서 왜 이 단편집을 그녀가 성장의 연대기로 생각하는지 잘 알 수 있었고 '부서진 대지 3부작'의 성공 역시 그냥 나무에서 떨어진 게 아니라는 걸 실감했다. 덕분에 나는 앞으로도 한동안 제미신의 블랙홀에서 빠져나올 수 없을 듯하다. 그러고 보니 부서진 대지 3부작도 이제 '석조 하늘' 하나만 남은 상황. 얼른 그 작품과 만나게 되기를 바라는 한편, 과연 이 다음의 성장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무척 궁금해진다. 부디 빨리 확인할 수 있게 되기를!


 참 제목인 '검은 미래의 달까지 얼마나 걸릴까'는 이 단편집에 나오지 않는다. 사실 이 제목은 단편이 아니라 2013년에 발표한 에세이의 것이라고 한다. 검은 미래의 달은 흑인이자 여성인 자신의 정체성을 반영한 존재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런 검은 미래가 하얀 미래와 동등하고 달이 태양과 대등하게 되는 공존과 조화의 시대에 다다르는 것이 부디 오래 걸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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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도키오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89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문승준 옮김 / 비채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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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가시노 게이고의 '아들 도키오'를 읽었다. 

 최근에 발표한 작품은 아니고 2005년에 발표한 작품이다. 예전에 창해 출판사에서 발간한 적이 있는데, 이번에 비채에서 나온 건 번역자가 다르다. 다시 말해 새로 번역한 책이다. 우리나라에서 꽤나 팔린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때문에 우린 히가시노 게이고가 미스터리만이 아니라 인간미가 따스하게 흐르는 휴머니즘 소설에도 일가견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아들 도키오'는 그 전조(前兆)라고 해도 좋다. 사실 현재의 어떤 존재가 시간 이동을 통해 과거의 누군가를 치유한다는 기본 설정부터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과 유사하다. 분명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이 보여준 기적은 '아들 도키오'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이 소설엔 프롤로그가 있다. 주인공 미야모토 다쿠미는 발병하면 뇌신경이 차례차례 죽어버리는 무섭고 희귀한 유전병인 그레고리우스 증후군에 걸린 레이코와 그 사실을 잘 알면서도 결혼한다. 자신의 유전병을 물려줄 수 없기에 아이는 낳지 않겠다는 레이코의 말에도 아이를 무척 좋아하는 다쿠미였지만 그녀의 마음을 헤아려 동의한다. 그러나 레이코는 뜻하지 않게 임신해 버리고 지우려고 하는 그녀에게 미야모토는 과거에 어떤 청년에 자신에게 들려주었던 '내일만이 미래가 아냐'라는 말을 떠올리고 어떤 아이가 태어나더라도 후회하지 않고 진심으로 사랑하며 행복해지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설득하여 결국 아들 도키오를 태어난다. 그러나 건강하게 잘 자라나던 도키오는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 끝내 그 증후군에 걸리고 만다. 시간이 흘러 이제 완전히 의식을 잃어버린 도키오를 보면서 미야모토는 20년도 더 전에 자신이 아들과 만났다는 사실을 기억해낸다. 그걸 마지막으로 프롤로그는 끝나고 우리는 20년 전의 젊은 미야모토 다쿠미를 만난다. 그런데 그의 모습은 현재와 너무나 다르다. 상대방의 어떤 결점도 사랑으로 다 받아들이며 늘 자신보다 남의 마음을 헤아리고 배려하던 모습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결국 혼자일 뿐이야'라는 말을 철저히 신봉하며 한없이 타인을 불신하는 가운데 미래에 대한 아무 희망도 없이 살고 있는 것이다. 그 다쿠미가 어느 날, 자신의 친척이라 주장하는 한 낯선 청년을 만난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도 자기보다 자신을 더 잘 알고 있는 그가 당혹스럽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느껴지는 묘한 친근감 때문에 다쿠미는 갈 곳이 없다고 말하는 그와 같이 지내게 된다.


 그 낯선 청년의 진짜 정체는 여기까지 글을 읽으신 분들이라면 쉽게 눈치챘을 것이다. 맞다. 아들 도키오다. 미래의 다쿠미가 아들을 보면서도 과거에 그와 만났다는 사실을 이내 떠올리지 못했던 것은 과거에 도키오가 다른 사람의 몸을 빌려 다쿠미 앞에 나타났기 때문이다. 소설은 도키오에게 의식을 완전히 잃게 되면 유전병의 영향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영혼이 되어 시간을 자유자재로 이동할 뿐만 아니라 타인의 몸에도 빙의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는 것으로 묘사한다. 소설은 다쿠미의 입장에서 진행되기에 자신이 알고 있는 것과 완전히 정반대인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서 아들 도키오가 받은 충격과 실망에 대해서는 알려주지 않는다. 어쨌든 도키오는 그런 아버지의 모습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낳은 상처를 찾아 치유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인다. 사실 다쿠미에겐 커다란 상처가 있었다. 아주 어릴 때, 생모와 이별하여 양부모 손에서 컸는데 처음엔 사랑을 다해 길러주었던 그 부모도 나중에 가서는 잔뜩 실망스러운 모습만 보여주었던 것이다. '결국 혼자일 뿐이야'는 외간 여자와 바람이나 피고 돈만 밝히는 남자로 전락해 버린 양아버지가 자주 하던 말버릇이었다.


 다쿠미는 현재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고통을 아주 어릴 때 자신을 버린 생모 탓이라 여기고 가득 원망한다. 마치 왕가위의 영화 '아비정전'에서 자신을 버린 어머니를 원망하던 장국영처럼... 아들 도키오는 그런 다쿠미와 생모를 화해시키려 중한 병으로 누워있다는 그녀, 도조 준코의 집까지 찾아가게 해보았지만 쉽지가 않다. 


 "그렇잖아. 이쪽은 가난한다는 이유로 버려졌다고. 버림받고, 관계없는 집에서 자른 끝에 결국 무엇 하나 남지 않았어. 그런데 버린 쪽은 가난한 다른 사람을 위해 열심히 살았다니. 열심히 살아 감사를 받고 있다니. 하느님 취급이잖아. 아이를 버린 여자가 말이야. (...) 정말 웃기네. 내 생애 최고로 웃기는 일이야."(p. 190)


 그런데 다쿠미의 여자 친구인 지즈루가 갑자기 사라진다. 

 처음엔 그냥 단순히 다쿠미에게 실망하여 집에 돌아오지 않는 것으로 알았는데 오카베란 남자와 같이 사라졌을 뿐만 아니라 그 둘을 뒤쫓고 있는 수상한 녀석들이 잔뜩 있다는 것도 알게 된다. 소설 중반은 그렇게 다쿠미와 도키오가 사라진 지즈루를 찾아나서면서 깊이 엮이게 되는 미스터리한 사건과 도조 준코가 헤어질 때 건네준 누군가의 습작인 것 같은 만화책을 단서로 단 한 번도 정체가 밝혀지지 않았던 다쿠미의 생부를 찾아가는 이야기로 이뤄진다. 독자가 히가시노 게이고에게 바라는 장르적 재미는 바로 이 부분에서 충족되는데, 이건 다쿠미 역시 마찬가지다. 다쿠미 또한 그 여정을 통하여 늘 원망했었던 불우한 출생의 사정을 이해하고 거기서 파생된 대충 오늘만 수습하며 무책임하게 살던 현재의 모습에서 벗어날 결심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어떤 과정을 거쳐 나타나는 지는 소설을 통해 직접 확인하시는 게 좋겠다. 아울러 다쿠미가 어떻게 현재의 아내인 레이코와 처음 만나게 되었는가 하는 것도. 또 거기에 도키오가 어떤 결정적인 역할을 했는지 또한. 이런 식으로 히가시노 게이고는 정말 마지막까지 독자의 흥미를 지속시킨다.


 이 소설을 통해 히가시노 게이고가 전하고자 하는 바는 도키오가 아버지 다쿠미의 멱살을 잡아 흔들면서 했던 말에 집약해서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좋아하는 사람이 살아 있다고 확신할 수 있으면 죽음 직전까지도 꿈을 꿀 수 있다는 말이라고. 당신 아버지에게 어머니는 미래였어. 인간은 어떤 때라도 미래를 느낄 수 있어. 아무리 짧은 인생이어도, 설령 한 순간이라 해도 살아 있다는 실감만 있으면 미래는 있어. 잘 들어. 내일만이 미래가 아냐. 그건 마음 속에 있어. 그것만 있으면 사람은 행복해질 수 있어. 그걸 알았기에 당신 어머니는 당신을 낳은 거야. 그런데 당신은 뭐야. 불평만 하고. 스스로 무엇 하나 쟁취하려 하지도 않아. 당신이 미래를 느끼지 못하는 건 누구 탓도 아냐. 당신 탓이야. 당신이 바보라서."(p. 396)


 그렇게 말한 뒤, 도키오는 자신은 태어나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희귀한 유전병인 그레고리우스 증후군에 걸려 의식마저 깡그리 잃어버린 도키오가 말이다. 어떤 삶이든 지속할 가치가 있다. 미래라는 빛은 바깥 환경에서 자신에게 비춰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비춰나가는 것이다. 이런 말들이 마음 깊이 절로 선명하게 각인되는 순간이다.


 '아들 도키오'가 발표된 때는 일본이 한창 '잃어버린 10년'이란 말을 외치고 있던 시기였다. 버블 붕괴의 후유증이 일본 사회를 그레고리우스 증후군에 걸린 것마냥 마비시켜 나가고 있었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거품에 대한 대비는 전혀 없이 그것이 주는 달콤한 꿀에 대한 탐닉만 존재했던 과거에 대한 원망과 미래의 가능성을 현실에 대한 불안으로 압살시켜 갔던 다쿠미의 분신이 비일비재하는 상황이었다. 아마도 히가시노 게이고는 그런 다쿠미들에게 자신의 소설을 통해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위로와 응원을 전하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과거의 다쿠미 시간대를 하필이면 제2차 오일쇼크가 터졌던 즈음으로 설정했던 건 아닐까 싶다.(이건 소설에서 스타워즈(그러니까 75년에 처음 발표된 영화말이다.)가 상영된지 4년이 지났다고 한 것에서 유추한 것이다.) 1치 오일쇼크에서 커다란 곤경을 겪었던 일본은 그 때의 교훈으로 2차 오일쇼크는 성공적으로 넘길 수 있었다. 그래서 거품 경제로 이어지는 80년대의 호황까지 이뤄냈다. 비록 붕괴라는 비극으로 마침표를 찍기는 했지만 젊은 다쿠미의 시간을 그 때로 정한 것은 이런 사실을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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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에 대하여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도리스 레싱 지음, 김승욱 옮김 / 비채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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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양이에 대하여'는 제목 그대로 '금색 공책'으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도리스 레싱이 고양이에 대하여 쓴 책이다. 발표된 해는 2002년. 

어린 시절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삶을 거쳐갔던 고양이들에 대해 직접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 아주 사실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고양이 집사 7년 차로 동반자에 대한 예의랄까 호기심이랄까 아무튼 그런 이유로 고양이에 대한 책을 이것 저것 많이 읽어보았는데, 그런 내게 있어 이 책은 단언컨대 고양이에 대한 책 중에 최고다. 이토록 고양이에 대해 인격적으로 다루면서 또 어느 순간 마음을 뭉클하게 만드는 책이 또 있을까 싶다. 감히 고양이 집사라면 꼭 읽어야 할 필독서가 아닌가 한다. 정보의 차원이 아니라 고양이와 함께 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제대로 깨닫게 만들기 때문이다.



 일련된 서사가 있는 건 아니다. 앞서도 말했듯 기록이다. 책의 대부분은 '금색 공책'을 세상에 막 발표했던 1962년. 런던에서 살 때 길렀던 두 마리의 암컷 고양이, 회색 고양이와 검은 고양이에 할애되어 있다. 시작의 포문은 어린 시절을 보냈던 아프리카의 짐바브웨에서 길렀던 고양이들이 연다. 이 부분엔 고양이 집사에게 참 충격적인 게 많다. 야생 고양이가 집 주위의 언덕을 차지할까봐 어린 도리스 레싱이 고양이만 보면 총을 쏘아대는 것이라든지, 집 안에 고양이가 너무 불어나 고양이를 측은하게 여기는 어머니가 집을 비운 사이에 아버지가 무려 40마리에 이르는 고양이를 살육하는 것이라든지 하는 것들이 나온다. 여기서는 야생 고양이의 존재가 강조되고 그것을 통제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에서 오는 공포가 은연 중 배여있는데 이것이 당시의 짐바브웨가 영국의 식민지였다는 사실과 연결되면서 단순히 고양이에 대한 얘기만은 아니라는 걸 느끼게 만든다. 문득 그녀의 이름을 세상에 처음 알렸던 데뷔작 '풀잎은 노래한다'와 두 번째 작품인 '마사 퀘스트'가 떠오르는 것이다.


 문명과 야만(어디까지나 관습대로 편의상 구분한 것이다.)의 경계인 식민지에서 살았던 자전적 경험 때문에 도리스 레싱은 문명과 야만은 충돌하며 서로 도저히 융합할 수 없는 간극이 존재한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았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문명은 통제에 대한 강박으로 자주 폭력적인 수단을 동원한다는 것도. 문명이 겉으로는 폭력을 배척하고 있지만 사실 그 폭력이야말로 유일하게 문명의 존립 수단이라는 것도. 이런 구도가 고양이와 인간 사이에도 그대로 통용된다. 그러니까 고양이란 문명의 타자, 야만 혹은 자연을 상징하는 존재인 것이다. 어린 시절의 도리스 레싱은 집이라는 문명의 안전을 위하여 야생 고양이가 나타나면 바로 22구경 엽총을 들고 쏘았다. 그건 레싱의 어머니가 집에 기어들면 닥치는 대로 잡았던 뱀이나 흰개미와 마찬가지였다. 수가 너무 불어나 안정이 위험해질 것 같으면 새끼 고양이라고 해도 가차없이 물에 빠뜨려 죽였다. 그녀 자신이 말한다. 그 때는 고양이가 들어설 자리가 전혀 없었다고.


 그녀가 고양이를 자기 곁에 거둘 수 있게 된 것은 작가가 되고 나서 였다. 자신이 어떻게 하여 작가가 되기로 하였는가에 대한 자전적인 경험이 물씬 배인 '마사 퀘스트'에 따르면 도리스 레싱은 자신이 속한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과 위선을 깨달은 후, 작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문명이 허용하지 않는 자신이 내부에 간직한 타자성을 문명의 폭력에 순응하여 제거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긍정하여 양성시키기 위해 그녀는 작가가 되었던 것이다. 문명에 식민화된 자아가 아니라 자신만의 고유한 영토인 자아를 지향하기 위하여.


 겨우 20여 페이지에 이르는 첫 단락을 설명하느라 말이 너무 길어졌는데 그건 단순하게 말한다면 이걸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고양이에 대하여'는 고양이에 대한 책이기도 하지만 도리스 레싱 자신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는 것. 여기에 담긴 고양이에 대한 얘기들은 자신이 지금껏 써온 작품들의 세계와 전혀 무관하지 않으며 그 세계를 보다 깊이 혹은 색다르게 헤아리는 하나의 통로가 되어주기도 한다는 것. 그렇게 우리는 첫 단락을 읽으면서 '풀잎은 노래한다'와 '마사 퀘스트'를 떠올렸듯이, 암컷 고양이에 대한 중성화 수술의 필요와 새끼를 낳지 않은 회색 고양이와 낳은 검은 고양이의 대비를 보면서 완전히 낯선 타자인 아이를 낳은 공포를 그린 '다섯째 아이'나 다섯 공책 속에서 서로 다르게 존재했던 안나 울프를 그린 '금색 공책'을 떠올릴지 모른다. 너무 나간 판단일지 모르지만 내게 자연이 부여한 모성과 회색 고양이보다 열등한 위치라는 한계 속에서 새끼를 키우고 가르치는 암컷 고양이로서의 의무를 다하는 검은 고양이는 네 권의 공책 속 안나 울프로 보였고 도도하게 자신의 자유를 구가하며 주체성을 뽐내는 회색 고양이는 '금색 공책'의 안나 울프로 보였다. 이 정도의 설명만으로 만족할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이렇게 말하고 싶다. 설령 고양이에 대해 아무런 관심이 없더라도 작가로서의 도리스 레싱이 궁금하다면 꼭 한 번 읽어보면 좋을 것이라고. 물론 그 전에 그녀의 대표작들을 읽어보았다면 말이지만.


 '고양이에 대하여'는 고양이를 좋아하는 사람도, 고양이는 좋아하지는 않지만 도리스 레싱에겐 관심이 많은 사람도 놓칠 수 없는 책임엔 틀림없다. 30km나 되는 낯선 땅을 주린 배를 움켜쥐고 오직 생존하고자 하는 열망으로 갖가지 고난을 넘어 마침내 집으로 돌아온 고양이라든가 자신의 새끼들을 구하고자 작가의 집을 몇 번이나 반복해서 찾아왔으며 갑자기 쏟아진 폭우로 몰살당할 위험에 처했으나 그래도 작가에게 간신히 목숨을 구한 고양이라든가 또 커다란 아픔을 겪은 뒤, 불편한 몸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두 번째의 기회를 잡기 위해 새로이 세계에 편입되려 노력하는 루퍼스의 이야기처럼 때로는 가슴을 뭉클하게 만들고 또 때로는 내 삶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는 것들이 스며들어 있기에 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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