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식스 카운티는 할런 코벤의 고향이지만 정작 에식스 카운티의 주민들은 코벤을 별로 좋아할 것 같지는 않다.

 아무리 그가 쓰는 족족 베스트셀러가 되는 유명작가라고 해도 말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코벤의 소설들이 에식스 카운티의 부동산 가격을 떨어뜨리는데

 아주 커다란 일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뭐, 확실하게 증명된 사실은 아니다.)

 아니면 적어도 많은 이들에게 에식스 카운티는 살기에 별로 좋지 않은 곳이란 인상을 심어주고 있으니까 말이다.

 

 아마도 많은 분들은 이 사실을 의심스러워하며 내게 증명을 요구할 것이다.

 그럼, 나는 그 근거를 이렇게 말하며 내세울 것이다.

 2005년에 나온 '결백' 부터 지금 나온 '용서할 수 없는'까지 에식스 카운티를 무대로 쓰여진 일련의 코벤 소설들을 한 번 떠올려 보라고... 너무 어이없을 정도로 단순한 근거 같은가? 하지만 당신도 읽어보면 이 근거만으로도 충분하다 생각할 것이다.

 

 

 

 

 2005년에 나온 '결백' 부터 시작해 지금의 '용서할 수 없는'까지 내내 공간적 배경이 에식스 카운티로 동일하므로 내 개인적으로는 '에식스 카운티 크로니클'이라고 부른다. 굳이 크로니클이라 붙이는 이유는 공간적 배경도 동일하지만 등장인물들까지 다른 작품에 겹쳐서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혹시 '아들의 방(2008)'에 나왔던 가족을 만들어 정착한다는 것에 두려움을 느꼈던 검사가 기억나시는지? 그의 이름은 '코프'인데 사실 그는 '아들의 방' 바로 전작인 2007년에 나온 'THE WOODS'의 주인공이었다. 그 작품을 읽으면 코프 검사가 왜 결혼을 두려워하는지 단적으로 알게 되는데 (그래서 사실은 '아들의 방'보다 먼저 번역되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아마도 그랬다면 '아들의 방'은 더욱 풍부하게 독해되었을테니까) 때문에 '아들의 방'에서 코프 검사가 보여주는 모습은 사실 그가 'THE WOODS'를 거치면서 성장했으며 '아들의 방'의 주제와 관련하여 어떤 치유의 단계에까지 이르렀음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물론 '아들의 방'에서 범인을 추적했던 형사 로렌 뮤즈 역시 이 작품에 코프의 협력자로 그대로 등장한다.(아니, 그녀는 이미 '결백'에서 부터 계속 나오고 있다.) 사실 그 때문에 ''THE WOODS'와 '아들의 방'은 강한 연작성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건 이번에 나온 '용서할 수 없는'도 마찬가지다. 이 작품 역시 바로 전작이 되는 '아들의 방'과 등장인물 몇 명을 공유한다. 물론 코프 검사와 뮤즈는 나오지 않는다.(뮤즈가 사라지고 그녀의 역할을 웬디 타인스가 이어받게 된 것에서 이 '용서할 수 없는'이 이전 작품들과는 다르게 코벤이 바라보고자 하는 작품임이 드러난다.) 이번에 겹치기 출연을 하는 등장인물은 '아들의 방'에서 여형사 뮤즈를 괴롭혔던 그러다 결국 된통 당했던 프랭크 트레몬트 형사와 변호사로서의 일과 가정 사이에서 고민하는 여주인공 티아에게 이렇게 단호하게 충고했던 기계처럼 냉정하지만 그래서 능력이 뛰어난 변호사 해스터 크림스타인이다.

 

  "당신은 내가 이룩한 업적을 존경했다고 했죠? 헤스터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네"

  "난 가족을 갖지 않기로 선택한 거에요. 그 점도 존경하나요?"

  "그건 존경하느냐 안 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요."

  "사실이에요. 그리고 그건 당신의 선택도 마찬가지죠. 난 변호사로서의 경력을 선택했고 이 업계를 벗어나지 않았어요. 따라서 지금은 경력이 쌓인 만큼 윗자리에 올라선 거고요. 하지만 말년에 가서는 잘생긴 의사 남편과 토끼 같은 자식들이 기다리는 안락한 집으로 돌아갈 순 없겠죠.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어요? ( 아들의 방, P. 35)

 

 왜 하필 이 둘이 '용서할 수 없는'에 또 나오게 된 것일까? 그건 물로 코벤이 이 작품을 통해 다루려는 주제와 상관있다.

 

 이렇게 사실은 그의 '에식스 카운티 크로니클'은 같은 배경과 공유하는 등장인물들을 통하여 주제에 조금씩 변화를 줘가면서 이끌어가는 시리즈이다. 프랑수아 트뤼포의 '앙트완 드와넬 연작'을 생각하면 더 쉽게 이해가 갈 것이다. '400번의 구타'에서 시작해 '앙트완과 클라네' '도둑맞은 키스' '침대와 탁자' 그리고 '달아난 사랑'으로 이어지는 이 연작 시리즈는 '400번의 구타'에 출연하여 '앙트완 드와넬'을 연기했던 배우 장 피에르 레오의 실제 나이에 맞춰 진행된 성장 이야기다. 말하자면 앙트완 드와넬의 삶 자체를 실제 나이대로 담아낸 여정이라 할 수 있는데 바로 그 드와넬의 위치를 에식스 카운티가 차지하고 있는 것이 코벤의 이 시리즈인 것이다. 그래서 '크로니클'이라 불러도 무방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프랑수아 트뤼포의 '앙트완 드와넬 연작'의 주연배우 장 피에르 레오 : 세월의 차이가 확연히 느껴진다.  

 

  그건 그렇고 아직 코벤이 왜 에식스 카운티의 주민들로 부터 환영받지 못한다고 생각하는지 거기에 대한 말은 하지 않았는데 그건 이렇다. 이 '에식스 카운티 크로니클'에서 코벤이 보여주는 인물들의 모습 때문이다. 단적으로 표현하자면, 보는 이들로 하여금 내내 '보이는 게 전부는 아니다'라고 거듭 상기시켜주기에 그렇다. 그렇게 사랑해서 결혼했고 오래도록 알고 지내와 다 안다고 생각했던 아내나 남편들이 겉보기와는 다르게 사실 아무도 모르는 비밀이나 남들에게 절대 들켜서는 안되는 오래전 과거에 범죄를 저지른 존재임이 드러나고 그들의 이웃 또한 평상시에는 더 없이 친근하고 완벽하게 이상적인 가정을 이루고 사는 듯 보였지만 어느 순간 갑자기 마치 이제까지의 모습이 깡그리 거짓이었다는 듯이 이루 말할 수 없는 공격적 악의와 상상을 뛰어넘는 범죄로 범벅이 된 모습을 보여준다. 한 마디로 에식스 카운티는 곧이 곧대로 믿고 살다간 언제 어느 때 밤길을 걷다가 뒤통수를 맞게될 지 모를 그런 예측불가능으로 넘쳐나는 공간인 것이다. 그러니 누가 감히 이 에식스 카운티에 정착하려 들겠는가? 여기서 만나 사랑에 빠지는 연인, 혹은 한 울타리를 사이에 두고 살아야 하는 이웃 모두를 '혹시나' 하는 의혹과 '어쩌면' 하는 불신의 눈으로 계속 바라보아야 하는데...  그러니 당연히 부동산 가격은 하루가 멀다하고 하락할 수 밖에!

 

  아마도 에식스 카운티의 주민들은 할런 코벤의 신작을 읽을 때마다 틀림없이 "이런, 또!" 하는 기분으로 책을 부르르 움켜쥐었을 것이다. 에식스 카운티에 베포된 '용서할 수 없는'은 또 얼마나 주민들의 악력 테스트용이 되었을까? 때로 운명은 아무리 책이라 하더라도 가혹할 때가 있는 것 같다.

 

 

  주민들이야 읽다가 분노로 쓰러지든 말든 코벤은 에식스 카운티를 한결같이 이렇게 그린다. 그 어떤 문마다 그 문 안에 무엇이 있을지 모르는 예측불가능한 비밀들이 무한히 움트고 있는 곳. 그래서 웃으며 인사하다가도 헤어지면 바로 내 등에다 칼을 맞을 수도 있는 곳. 한 마디로 만연된 예측 불가능으로 인해 생존을 위해서는 불신과 의혹이 자기 존재의 한 부분이 될 수 밖에 없는 곳이다. 거기서는 아무리 안정되어 보이는 현재라 하더라도 끝없이 의심과 불신을 가져야만 살아남는다. 유원지에 흔히 있는 거울의 미로에 들어간 것과도 같이 보여지는 모두를 순전히 믿다간 영원히 헤어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늘 남과 세계를 의혹의 눈으로 바라본다는 것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피곤한 일이다. 행동경제학을 창시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으며 이제는 우리에게도 유명해진 '생각에 대한 생각'을 쓴 심리학자 대니얼 카너먼에 따르면 애초부터 우리의 정신은 여지없이 게으른 존재라고 한다. 즉 원래 우리 정신이란 자체가 따지고 드는 것을 귀찮게 여기도록 만들어졌다는 의미다. 그러니 의심하는 건 피곤한 일이다. 아무리 생존을 위한 필수불가결한 일이라 하더라도 그렇다. 하긴 직업도 마찬가지이지 않은가? 생존을 위해 필수불가결한 일이지만 늘 우리는 거기로 부터 해방되기를 꿈꾼다. 사유란 것도 마찬가지다. 그냥 관두고 싶어진다. 무턱대고 보이는 대로 믿고 싶어진다. 사람들에게 자주 혀를 치게 만드는 '냄비 현상'이 자주 일어나는 이유도 결정적으로 이 때문이다. 우리는 쉽게 끓어올랐다가 쉽게 식는다. 정치에 대한 분노도 마찬가지다. 관심도 분노도 지속적인 사유를 먹고 살아야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우리의 사유란 지속되기에 힘이 든다. 흔히 한국인들은 '무임승차 욕구'가 강하다는 핀잔을 듣는다. 그냥 누리려고만 할 뿐 그것을 가져오기 위해 정작 나서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과연 그걸 한국인들만의 특유한 현상이라 치부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어차피 인간이란 게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다. 이걸 인정해야 한다. 그걸 마치 없는 듯 부정하고 오로지 정신 승리로 이겨낼 수 있다고 말하기 때문에 어쩌면 내내 자기 꼬리를 무려고 달리는 강아지처럼 제자리만 맴돌고 있는지도 모른다. 여기서 나는 마치 인간에게 자연적으로 주어진 본성을 극복해야 할 존재인 것 처럼 말했는데 아무래도 그것은 칸트를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칸트가 진정한 인간다움을 '자유'에서 찾았을 때 그가 상정했던 자유는 이런 모습이었다. 동물적인 본능에서 자유로워 지는 것. 편하니까 그러고 싶은 것. 귀찮으니까 그만두고 싶은 것. 따지고 보면 동물적 본능에 다름아니다. 그래서 칸트는 거기에 인간다움이 없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행해야 하니까 하는' 것에서 자유가 있다고 보았다. 그러니까 편해서 그만두는 것이 아니라 편함에도 불구하고 사유함을 멈추지 않는 것이 진정한 자유라고 본 것이다. 칸트는 하지만 거기에 쉽게 굴복하는 인간을 또한 인정했기에 본격적으로 윤리를 말하는 실천 이성을 얘기하기 전에 그 보다 훨씬 두터운 '순수 이성'을 썼던 것이다. 사람들은 그렇다. '정신 승리'만 외치는 것에는 쉬이 귀를 열지 않는다. 지금 현실적 모습을 충분히 인정한 상태에서 솟아난 대안에 더 귀를 기울인다. 코벤이 '용서할 수 없는'에서 하는 것은 그런 것이다.

 

 바로 그 때문에 여기에 문이 또한 존재한다.

 

 

 여기의 문은 닫혀있다. 하지만 여기에 닫혀진 문은 그냥 닫혀진 문이 아니다. 그건 바로 내가 '닫아둔 문' 이다.

 이 차이가 중요하다. 이것이 결정적으로 '용서할 수 없는'이 가지는 독특성이기 때문이다. 다소 무모하게 말하자면 이전까지의 작품들은 '닫혀진 문'에 관한 얘기였다고 할 수 있다. 문들이 모두 닫혀져 있었기에 예측 불가능성을 가져왔고 그 때문에 사람들은 의혹과 불신에 젖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런 얘기였다. 하지만 '용서할 수 없는' 은 다른 질문을 시도하는 작품이다. 이 소설은 묻는다. 과연 그 문은 닫혀져 있던 것이냐고?

 

 그건 어쩌면 당신 스스로 일부러 닫아둔 문이지 아니었느냐고?

 

 그래서 코벤은 이 소설에서 문을 중요한 모티브로 가져온다.

 그건 소설의 첫문장에서 바로 드러난다.

 

 '그 빨간색 문을 열면 내 인생이 끝장날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p.6)'

 

 그동안 에식스 카운티 크로니클에서 문은 여러가지 의미를 가져왔다. 그 대부분은 그 뒷편에 뭐가 있는 지 모르는 예측 불가능성을 상징이었다. 바로 그 예측 불가능성을 가져오는 주요한 원인이 또한 비밀이었는데 그것이 비밀이 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대부분 깊이 감추어야 할 비밀이란 게 남들에게 결코 보여서는 안되는 어두운 욕망이거나 남들보다 더 많이 가지고 더 위에 오르기 위해서는 경쟁이 되는 상대방의 경각심을 최대한 허물어 뜨려야 하기 때문에 숨겨야 하는 욕망이었기 때문이다. 문은 바로 그것에 대한 비유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코벤은 이 소설에서 문에게 새로운 세번째 의미를 부여한다. 그것은 물론 우리가 사유하기의 귀찮음 때문에 닫아둔 문의 모습이다. 과연 그 문은 그저 닫혀져 있기만 했던가? 혹시 내가 거기에 참여함으로 귀찮게 되지 않기 위해 일부러 닫혀있는 것처럼 꾸미고 닫아둔 것은 아니었던가 묻기 위해서이다. 그렇게 이 소설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의혹과 불신을 전혀 다른 차원에서 접근한다. 외부로 부터 불러일으켜진 의혹과 불신이 아니라 나 자신이 포기해버린 의혹과 불신을 얘기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동안의 에식스 카운티 크로니클의 소설들은 의혹과 불신을 없앤 진정한 관계는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을 천착했다. 하지만 이 소설은 전혀 다른 것을 말한다. 즉 의혹과 불신이야 말로 사실은 우리가 내내 가지고 있어야 할 것들이 아닌가 하고 말이다. 그래서 이 소설의 원제 또한 사로잡히다라는 뜻의 'CAUGHT' 가 된 게 아닌가 싶다. 코벤 스스로 그렇게 의혹과 불신에 사로잡힌 상태야 말로 진실과 거짓을 구별할 수 없는 정보들이 날마다 산더미처럼 쌓여가는 이 현대 사회에서 그나마 제대로 관계를 구축할 수 있는 이상적 형태가 아닐까 보고있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생각이 할런 코벤으로 하여금 '에식스 카운티 크로니클'의 첫 테이프를 끊었던 2005년의 '결백'을 다시 쓰게 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 사실 이 '용서할 수 없는'은 '결백'을 다시 쓴, 일종의 '리-라이팅(RE-WRIGHTING)' 작품이다. 거기에 대한 근거는 이렇게 저렇게 많이 말 할 수 있지만 그랬다간 스포일러가 될 수 있기에 그냥 이 정도로만 말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또한 바로 이런 이유로 인해 이 '에식스 카운티'를 무대로 한 소설들은 처음부터 차례대로 읽어야 한다. (또! 강조하지만 그래서 'THE WOODS'가 빨리 나와주어야 한다.) 무엇보다 코벤의 이 에식스 카운티 크로니클은 그저 단순한 스릴러로만 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는 어쩌면 프랑스의 발자크가 '인간 희극'을 쓰며 했던 것 또는 에밀 졸라가 '루공-마카르 총서'를 쓰면서 했던 것을 지금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특정한 한 사회를 중심에 두고 그 한정된 시공간에서 인물들을 넘나들며 현대라는 보편이 무엇인지 모든 각도에서 담아내는 것. 그렇게 이 '에식스 카운티 크로니클'은 최근에 이르러 주목받고 있는 또 하나의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인 '로컬리티(locality)'의 여정이다.


 그 여정 속에서 유독 그가 담아내려 하는 것은 바로 '불안'이다. 안 그래도 하이데거가 현대를 살아가는 존재들의 근본적이 정서라고도 말한 바 있지만 그렇게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스마트 폰 처럼 늘 지니고 사는 것이다. 할런 코벤은 그 불안과 의혹을 계속해서 정면으로 다루고 있다. 이 크로니클을 통해서 그것을 사유하고 극복 가능한 대안을 추적한다. 그래서 크로니클의 각 작품들은 그 때 그 때마다 코벤이 도달한 종착지라고 할 수 있다. 그 때 '결백'은 단순히 말하자면 레비나스가 말했던 '환대'에 대하여 말하고 있었다. 불안을 끊는 방법은 '내게 다가 온 타자를 있는 그대로 믿어주고 다만 포용하는 것 밖에는 없다'라고. 맷 헌터의 과거와 아내의 현재가 서로 겹쳐지며 코벤은 그것을 정말 잘 보여주었다. 하지만 여정이 계속된다는 건 그 종착지 역시 늘 수정되기 마련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밤에 쓴 글을 아침에 읽어도 남부끄러움을 느끼는 게 사람이듯이 시간이 흐르면 보는 눈이 달라지고 때로는 그 그 사유가 깊어지고 폭이 넓어지면서 전혀 보지 못했던 것을 새로이 보게되기도 한다. 물론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코벤에게도 그런 일이 일어났던 것 같다. 그러니까 그에게 문득 이런 의문이 생겼던 것이다. "그런데, 그 타자란 어떤 타자인가? 우리는 보여지는 그대로를 믿을 수 있는가?" 지금처럼 많은 이들이 정보의 생산과 유통에 접근이 용이하다는 건 그만큼 거짓과 왜곡이 가능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지금 우리가 얻는 정보란 대개의 경우 많은 타인들을 매개로 이루어진다. 인터넷과 스마트 폰이 발달한 요즘의 현대인들은 그만큼 사이보그라고 해도 좋다. 이제 신체의 일부가 되어버린 그 기계들로 인해 우리의 신경망은 아주 멀리까지 뻗을 수 있게 되었고 인식할 수 있는 영역은 많이 확장되었지만 그만큼 나의 눈이 아니라 무수한 타인들에 의해 필터까 끼워진 채 보게되었다. 원본은 파악불가능하고 그만큼 진실을 가늠하기도 어려워졌다. 이번에 나온 '용서할 수 없는'은 바로 이러한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결백'에서 말했던 '환대'가 제대로 이루어지게 하려면 무엇이 필요한지 그 조건들을 탐색하는 것이다.

 


  '용서할 수 없는'이 새로운 '결백'이라는 것은 무엇보다 주인공이 되는 '용서할 수 없는' 댄 머서와 '결백'의 맷 헌터가 동일한 과거(역시나 스포일러상 여기까지만 말한다.)를 가지고 있음에서 드러난다. 왜 그 과거가 동일하게 반복되는 것인가? 바로 여기에 '용서할 수 없는'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 있다. 또한 바로 그 이유로 '아들의 방'에서 하필이면 프랭크 트레몬트와 해스터가 '용서할 수 없는'에 다시금 캐스팅 된다. 그 핵심으로 들어가기 위하여 무엇보다 프랭크 트레몬트에게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아들의 방'에서 어떤 형사였는가? 여기서 또 중요한 것은 할런 코벤이 '아들의 방'과 '용서할 수 없는'에 쓰고 있는 동일한 모티브이다. 그건 역시 '보이는 대로 믿는다'이다. '아들의 방'에서 범죄자는 자신이 살해한 사람의 신분을 숨기려 시체를 위장한다. 그래서 사실은 평범한 주부지만 거리의 창녀처럼 보이도록 한다. 그것으로 동기를 숨기고 경찰의 추적을 피하려는 것이다. 여기에 프랭크 트레몬트가 걸려든다. 발견된 시체를 그저 창녀로만 여기고 별다른 수사없이 우연히 일어난 살인으로 단정지어버리는 것이다. 그렇게 깊이 생각하기 귀찮으니까 무턱대고 믿는 것. 흔히 일어나는 보통 사람들의 마음 작용을 무엇보다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이기에 또 그로 인해 엄청난 실수를 하기 때문에 코벤은 다시금 '용서할 수 없는'에 기용한 것이다. 왜냐하면 앞서도 말했듯이 '용서할 수 없는' 역시 비슷한 모티브를 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용서할 수 없는'에서 주로 이루어지는 것은 위장된 시체를 위장된 모습만 보고 창녀라 믿는 것과 똑 같은 것이다. 그렇게 여주인공 고발 전문 리포터 웬디 타인스는 댄 머서가 어떤 인간인지 자세히 알려하지 않은 채 자기가 본 그 모습만 믿고 소아성애자로 고발해 버리고 사람들은 그 보도된 모습만 보고 그의 삶을 가차없이 파괴해 버린다. 이것은 댄 머서 하나로 그치지 않는다. 웬디 타인스 역시도 댄 머서와 똑같은 꼴을 당하게 되는데 그 또한 사람들이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그저 나타난 것만 무턱대고 믿었기 때문이다.  소아성애자로 부터 자기 딸을 희생당했기 때문에 소아성애자에게 증오를 품고 있는 에드 그레이슨도 마찬가지다. 이것은 '아들의 방'에서 보여준 프랭크 트레몬트의 모습 그대로이지 않은가? 이렇게 할런 코벤은 보여지는 현상이 주는 실체의 장악력을 계속해서 우리에게 되새김질 시킨다. 사실은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사용하고 있는 사고적 버릇을 돌이켜 생각하도록 만들게 함이다.

 그런데 정작 이 모든 것의 원본이 되는 프랭크 트레몬트는 이 소설에서 조금 변화를 보인다. 마치 전작에서 어떤 교훈을 크게 얻기라도 한듯이. 그러고보면 그 깨우침을 가져다 준 형사의 이름이 '뮤즈'인 것도 참 교묘한 설정이다. 뮤즈란 그리스의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가져다 주는 존재로 흔히 칭송받던 신의 이름이었으니까. 정말 그 깨달음의 경지로 인도되었는지 프랭크 트레몬트는 소설에서 한 창녀의 죽음과 실종되어 버린 아이를 비교한다. 여기서 코벤이 다시금 창녀의 시체를 언급하는 것은 '아들의 방'에서 프랭크 트레몬트가 보여주었던 모습을 환기시키기 위함이다. 그랬던 그가 그 5 페이지 뒤에 이르는 성찰에 이를 정도로 변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바로 그 트레몬트의 자각이 이 소설이 정말 말하고픈 핵심이다.

 그 5 페이지 뒤에 이루어지는 성찰은 바로 이것이다.

 하지만 그게 죽은 창녀와 헤일리 맥웨이드의 차이일지도 몰랐다. 피부색이나 제정상태나 어떤 집에 사느냐가 아니라 항상 관심을 가져주는 사람이 있는지, 슬픔에 젖은 남겨진 가족이 있는지, 예전 상태로는 도저히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어머니와 아버지가 있는지의 여부가 그 차이를 결정하는 법이다.('용서할 수 없는'  P. 163)

  여기서 중요해지는 것이 바로 트레몬트와 같이 동반 겹치기 출연을 하고 있는 변호사 헤스터 크림스타인이다. 코벤은 작은 조연에 불과하지만 그녀의 첫 등장을 아주 주의깊게 설정했는데 이러한 용의주도함이 바로 이 인물이 사실은 코벤이 이 책에서 보여주고 싶었던 주제를 집약하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성공한 변호사이자 많은 이들로 부터 이기기 위해서라면 도덕 관념 따위 집어던져 버리는 평가까지 받는 크림스타인은 텔레비젼 법정 리얼리티 쇼의 진행자로 소설에서 첫 등장한다. 이는 이 소설의 여 주인공 웬디 타인스가 TV 리포터라는 점에서 비슷하고 그래서 의미심장해 보이는 설정인데 거기서 재판장으로 연기하는 크림스타인은 의뢰된 사건을 실제 재판처럼 다룬다. 그런데 거기서 보여주는 모습은 웬디 타인스와 전혀 반대이다. 웬디 타인스는 댄 머서에 관련된 인터넷 제보, 그리고 그와 관련해 자신이 본 모습 그대로를 믿었지만 헤터스 크림스타인은 그렇지 않다. 그녀는 그 맥락을 이해하려 하고 누구로 부터 보여진 사실이 아니라 그녀가 알아낸 객관적 사실에 맞추어 판단을 내린다. 마치 크로키 하듯이 쓱 지나간 이 장면은 나중에 에드 그레이슨을 변호할 때 더욱 확장되어 드러난다. 그녀는 경찰이 제시한 증거가 아무리 정황상 타당해 보여도 오히려 그 '정황상'을 의심의 근거로 여기며 끝까지 제대로 된 객관적 진실이 드러날 때 까지 파헤치기를 포기하지 않는다.

 

 코벤은 정말 감탄할만한 전개로 이 내용을 상세히 보여준다. 그러는 이유는 물론 단 하나다. 이것이 바로 핵심이기 때문이다.  바로 형사 트레몬트가 지나가는 말처럼 말했던 '결정적인 차이는 항상 관심을 가져주는 존재의 있고 없고에 있다' 이것 말이다. 크림스타인이 보여주는 모습은 바로 이 말을 그대로 행동으로 옮긴 것이나 마찬가지다. 코벤은 왜 이러한 자세를 중요하게 여기는가. 그것은 물론 대니얼 카너먼의 말대로 우리는 사유하기를 귀찮아하며 그래서 쉽게 보여지는 현실에 타협해 버리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냥 귀찮으니까 믿고 싶어하는 것이다. 하지만 소설에서 댄 머서와 웬디 타인스가 겪는 비극에서 보여지듯이 그 귀찮음이 불러오는 타협은 거기에 그치지 않고 남의 인생 또한 너무도 쉽게 파괴해 버린다. 이것은 그대로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이기도 하다. 하나의 동영상이 유포되면 사람들이 사실 관계를 제대로 따져보지도 않고 단죄하고 결국은 그것이 보여지는 것과 아주 많이 달랐다는 것을 또한 우리는 얼마나 자주 듣게 되는가. 남는 건 그저 막말을 들을대로 들은 사건의 당사자의 치유할 길 없는 마음의 상처뿐이다.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건 모두 우리가 보여지는 것에서 객관적 거리를 유지하려들지 않기 때문에 일어난다. 객관적 거리란 그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려는 노력에 다름아니고 그건 또한 그 맥락을 살펴 타자의 처지를 이해하려는 노력이기에 나 자신의 사유의 적극적인 참여를 필요로 한다. 하지만 우리의 본능은 그것을 피하려 든다. 눈에 보이지 않는 멀리 있는 아프리카인들은 도우면서도 막상 우리 눈 앞에 현실적으로 나타나는 아프리카인은 피하게 되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다. 그의 현존 자체가, 보여지는 얼굴 자체가 우리에게 참여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바로 그 존재에 대한 사유의 참여를. 하지만 그건 단순한 사유의 참여만은 아니다. 사유란 어디까지나 타자의 존재를 고려하고 그에 맞춰 배려를 하는 것이기 때문에 현재 그의 처지에 대한 책임도 어느정도 나눠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사유란 책임을 나눠받는 일이다. 환경에 대해 사유하는 것을 생각해보라. 현 환경에 대해 사유를 하게되면 자연히 그 보호의 당위를 생각하게 되고 거기에서 내가 할 것을 떠올려 보게 된다. 사유란 그런 것이다. 그렇게 책임을 떠 안는 것이기 때문에 사실은 귀찮은 것이다. 그런데 사유란 바로 그 이유로 해서 타인을 구원하는 행위가 된다. 책임이란 나의 중심이 아니라 바로 그 타인을 중심에 놓고 생각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 바로 이런 이유로 해서 '관심 가지기'는 이 소설에서 중요한 테마가 되고 그러한 관심을 가지기 위해 코벤은 의혹과 불신을 내내 가지고 있는 것이 더 낫지 않나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결국 바로 그러한 태도 때문에 웬디 타인스와 헤터스 크림스타인은 결정적으로 사람들은 구원한다.

 

  여기서 다시금 저 앞에서 인용한 이 소설의 첫 문장으로 돌아가보면 이제야 그 문장이 왜 하필이면 그렇게 쓰였어야 했는지 이해하게 된다. 그 첫 문장의 핵심은 이것이었다. "파멸될 것을 알면서도 연다.' 물론 댄 머서는 자기 예상 그대로 그 문을 여는 바람에 파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열 수 밖에 없었다. 그에게 걸려 온 전화 때문이다.  이 상황이 중요하다. 그는 문에 대해 의혹과 불신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열었다. 열었던 이유는 누군가로 부터 걸려온 도움을 요청하는 전화 때문이었다. 이 연결이 코벤의 핵심이다. 왜 의혹과 불신을 가져야 하는가? 그것이 바로 타자에게로 연결되는 관심이기에 그렇다. 때문에 이 의혹과 불신의 문은 중요한 등장인물 모두에게 존재한다. 여주인공 웬디 타인스에게는 음주운전으로 자기 남편을 치여 죽여버린 아리아나 나스브로란 의혹과 불신의 문이 있다. 소아성애자에게 자신의 딸을 희생당한 에드에겐 댄 머서라는 의혹과 불신의 문이 있다. 웬디는 그 문 앞에서 나스브로가 계속 보내오는 용서를 구하는 편지를 읽으며 '이 여자가 정말로 내게 용서를 바라고 있는 것일까? '정말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있는 것일까? 줄곧 의심하고, 에드는 '댄 머서가 정말 무죄일까? 혹시 교묘한 협잡으로 혐의를 벗은 것은 아닐까?' 줄곧 의심한다. '용서할 수 없는'은 이러한 의혹과 불신이 마치 씨줄날줄처럼 엮이어진 태피스트리와도 같다. 결정적으로 실종된 헤엘리 멕웨이드가 그 모든 것을 대변한다. 오래전에 이유없이 실종되어 살았는지 죽었는지 조차 모르는 존재인 헤일리 맥웨이드는 마치 9.11을 껴안아버린 미국과도 같이 에식스 카운티를 내내 불안정하게 만든다. 그러면서 그들이 무관심했기에 잃어버린 존재를 내내 환기시킨다. 즉 타자에 대한 관심이 없이는 사회조차 안정될 수 없음을 지속적으로 상기키기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아들의 방'에선 죽음이란 영원한 상실로 사회에 죄의식을 통해 타자의 관심을 촉발시켰던 것이 '용서할 수 없는'에 이르러서는 '실종'으로 바뀐 까닭이다. 죽음은 종국적 결말이지만 실종은 영원한 의혹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욱 관심이 타자에게로 뻗어나갈 수 밖에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웬디 타인스도 문득 느낀 댄 머서에 대한 의혹 때문에 그에게 관심을 가지고 에드 역시 똑같은 이유로 댄의 진실을 찾기위해 추적한다. 하지만 그것은 쉽지 않은 노력이다. 의혹과 불신 속에서 진실을 찾으려 노력한다는 것은 참으로 수고스럽다. 때문에 코벤은 댄 머서에게 다시금 '결백'의 맷 헌터와 같은 과거를 심어준다. 의혹과 불신 속에서 타인에 대한 진실을 찾고자 하는 것이 바로 그런 삶과 똑같기 때문이다. 사회가 가지고 있는 헤일리 맥웨이드에 대한 부채는 그렇게 댄 머서에게 보여지듯 개인화 된다. 웬디 타인스는 댄 머서에 대해 그러한 부채를 지고 에드 역시 그렇다. 모두 보여지는 것을 쉽게 타협한 대가로 짊어지게 된 부채(Debt)였다. 결정적으로 코벤은 타자에 대한 이러한 부채감을 느끼는 게 옳다고 본다. 댄 머서처럼 타자에 대해 그러한 부채감을 느낄 때 우리는 보여지는 것에 쉽게 사유의 타협을 하지 않으며 그 진실을 알기 위해 의혹과 불신을 도구로 노력할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헤일리 맥웨이드에 관한 진실도 그 노력을 그냥 쉽게 포기했기 때문에 일어난 비극이지 않았는가?

 

 할런 코벤은 우리가 부정적 태도라고 여겼던 의혹과 불신을 전혀 새롭게 보기를 제안한다. 그건 물론 지금의 현실이 한 개인이 그 진실 여부를 판독하는게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진실과 거짓이 뒤범벅된 정보들로 넘쳐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정보들은 타자에 대한 지식들을 전하고 있지만 우리의 사유하기를 기피하는 습성은 편하게 보이는 그대로를 믿으려 한다. 사실 그게 마음 편하게 쉽게 사는 방법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런 우리들에게 코벤은 타인을 부채(Debt)로 여길 것을 제안한다. 그러므로 그들에 대한 진실을 추구하는 의혹과 불신은 필연적인 태도라고 설득한다. 이것은 사실 '결백'이 빠뜨린 부분이었다. 코벤은 그 공백을 다시금 새롭게 '결백'을 반복하면서 채워나가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에식스 카운티 크로니클'을 차례대로 보아야지만 드러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니 다시한 번 반복하는 바이지만 지금 '용서할 수 없는'을 들었다면 그대로 내버려두고 처음부터 차례대로 읽을 것을 감히 제안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두번째 ''THE WOODS'가 필수적인데 그것도 빨리 나와주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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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2-07-30 1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길고 대단한 글이라... 일단 감탄부터 하고 찬찬히 읽을게요~ ㅎㅎ

ICE-9 2012-08-01 00:03   좋아요 0 | URL
할런 코벤이 하고 있는 이 작업이 개인적으로는 나름 중요한 것 같아서 오랜만에 마음먹고 써 봤어요^ ^
소이진님의 감상이 어떨지 정말 궁금해지는데요. 나중에 살짝 귀뜸해줘요^ ^

호빵 2012-07-30 19: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식스 카운티의 주민들이 헤르메스님의 글을 읽은다면 코벤에 한층더한 호감을 느낄것도 같네요.

ICE-9 2012-08-01 00:04   좋아요 0 | URL
오옷! 호빵님 감사합니다.^ ^
코벤이 팬으로서 정말 기쁘기 그지없는 말씀이세요^ ^
더욱 분발하겠습니다.
 
다시금 새로이 한 발을 내딛는 미나토 가나에!

 

 

 

 

 

 

 이번에 나온 미나토 가나에의 신작 '왕복서간'에서 받게 될 느낌은 아마도 낯설음일 것이다.

 

 그렇게 분명 이 작품엔 어떤 이질감, 뭔가 이전에 나온 가나에의 작품과 다른 것이 느껴진다. 물론 그 이질감의 직접적인 원인은 일단 이 소설이 모두 편지글의 형태로 되어있다는 데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가나에의 소설은 1인칭 시점이었다. 한 마디로 독백의 소설이었다. 물론 편지도 독백이긴 하다. 하지만 편지엔 확실한 수신자가 있다. 편지의 모든 말은 그 듣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확실히 아는 상태에서 쓰여진다. 그러므로 다소 시간적 지연은 있지만 응답을 기다리는 대화를 위한 발화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동안 가나에의 독백들은 사실 그런 응답을 기다리는 소설들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독백을 말하는 자가 이미 해답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모든 소설의 과정은 사실 독백을 하는 주체가 자신이 가지고 있는 해답이 과연 맞는지 아닌지 맞추어보는 검증의 과정에 다름 아니었다. 그런데 '왕복서간'은 그게 아닌 것이다. '왕복서간'에서 편지를 보내는, 그래서 상대의 응답을 기다리는 모든 독백의 주체들은 해답을 가지고 있지 않다. 진정한 해답은 모두 듣는 상대에게 있다. 그러므로 독백의 주체들은 이제 그 타자에게 귀를 기울여야 한다. 이게 '왕복서간'과 그 이전의 작품들이 사이에 존재하는 가장 확실한 차이점이다. 즉 '고백'과 '속죄'가 오로지 말하는 '입'만 존재하는 소설들이라면 '왕복서간'은 들으려는 두 '귀'가 주가되는 소설이다.  나는 여기서 '왕복서간' 바로 전에 나온 '야행관람차'를 빠뜨리고 있는데 그것은 '야행관람차'가 정확히 그 중간단계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즉 '야행관람차'는 '왕복서간'이 결정적으로 달라지기 위해 지나야만 했었던 일종의 징검다리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말은 결국 가나에의 모든 작품들을 마치 실에 진주를 꿰듯 일련의 연속적인 과정으로 놓을 수 있다는 의미고 그렇게 보았을 때 '왕복서간'은 그 최종 종착점이라 할 만하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그 과정에 붙게 되는 라벨(lable)은 무엇인가? 그것은 '고백'과 '왕복서간'이 가지는 결정적인 차이점을 부각시키면 절로 드러날 것인데 일단 '고백'의 성격을 단적으로 정의하자면 그건 '트라우마'의 소설이라는 것이다. 가나에는 초기작에서 부터 내내 과거의 해묵은 상처를 바탕에 놓고 작품을 구축해왔다. 소설의 모든 독백들은 바로 그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에 다름아닌데 그러므로 그 상처는 내내 현실을 불안하게 만들면서 간직한 자에게 치유를 강요하는 그렇게 트라우마인 것이다. 그런데 이 트라우마에 대해 프로이드는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외상성 신경증에서 일어나는 꿈은 환자를 사건의 현장, 즉 또 다른 경악 속에서 그를 잠에서 깨우는 그 현장 속으로 반복적으로 데리고 가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정신분석학의 근본 개념' p. 277)

 

 말하자면 트라우마는 늘 상처의 현재를 반복적으로 재현함으로써 시간을 정지시키는 것이다. 트라우마를 가진 독백의 주체들은 조금도 미래로 나아가지 못한다. 프로이드는 인용한 문장 아래에 이런 말도 덧붙인다. '그들은 트라우마에 고착되어 있다.'라고...

 

그들에겐 미래가 없다. 그래서 사실은 '말'하는 입 밖에 없는 것이다. 레비나스는 미래라는 시간이야 말로 '타자'와 연결되어 있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타자란 나와 동등하거나 유사한 것일 수 없기 때문이다. 즉 타자가 진정한 타자가 되기 위해서는 어떤 경우든 근본적으로 '나'라는 동일자로 동화되어서는 안되기에 동일자의 완전한 바깥, 그 절대적 바깥에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타자란 모든 가능성의 불가능성을 뜻하는 '죽음'과도 같다고 할 수 있고 바로 그 죽음은 우리에게 있어 전혀 불가해한 것이면서 또한 우리의 유한성을 뛰어넘는 무한의 시간이 도래하는 존재이기에 레비나스는 타자의 동화불가능성이 타자의 무한성과 연결되는 것이며 정확히 바로 그 의미에서 타자는 바로 미래 자체라고 할 수 있다고 한다. 미래가 가진 예측 불가능성이 그대로 타자의 동화불가능성과 연결되고 그것이 간직하고 있는 시간 또한 무한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타자와 시간의 연결성은 들뢰즈 역시도 같다. 들뢰즈는 그것을 오스 야스지로나 후 샤오시엔 영화에서 자주 나타나는 뜬금없이 삽입되는 명상적 장면을 통해 보여준다. 즉 영화의 맥락과 아무 상관없이 제시되는 그 장면들은 더구나 아무런 움직임 역시 없기에 마치 격리된 정물화와 같다. 모든 의미와 운동성이 상실된 그 장면에서 관객들이 바라보는 것은 오로지 화면에 지속되고 있는 '시간' 뿐이다. 들뢰즈는 그 순수 지속으로서의 시간을 가장 잘 체험할 수 있는 매개물을 '영화'로 생각했고 바로 그 때문에 두터운 두 권의 시네마론까지 쓴 것이다. 한 편 그 순수 지속의 시간 앞에서 관객들은 헤메이게 된다. 왜 느닷없이 이 장면이 주어졌는지 그 해답을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들뢰즈가 말하는 이른바 '간극'의 창출이며 거기서의 '망설임'이 순수 시간이 관객에게 주는 주된 효과다. 망설임이 일어나게 되는 이유는 간단하다. 자기 내부에 해답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로지 눈 앞에 제시된 화면, 자신의 이해가능성 너머의 영역에 위치한 '타자'만이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거기서 관객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그저 귀를 기울이는 것. 무엇인가 해답이 주어져 있지 않을까 하는 속에서의 애타는 귀기울임. 내 한계 너머에 있기 때문에 할 수 밖에 없는 전적인 '나의 맡김'. 그것 밖에는 없는 것이다. 즉 이렇게 들뢰즈는 '순수 시간(pure time)'이야말로 타자 그 자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시간은 타자와 더불어 할 때 움직이는 것이란 걸...

 

 

 

 

 

 

 

 

 

 

 

 

 

 

 

 

  이런 의미에서 트라우마에 고착된 독백의 존재들에게 미래가 없다는 말은 그대로 그들의 눈에 타자는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그 소설에 나오는 모든 독백의 주체들은 타인들이 자신의 말에 어떤 영향을 받을지(보통 그 영향은 상처, 고통등이 될 것이다. 쏟아내는 고백들이 다 원한에서 비롯된 어두운 것들이기 때문이다.)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타자들은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도구의 의미 밖에는 없다. 그러므로 독백의 주체들은 거침없이 타자를 문자그대로 파괴한다. 자신이 가진 해답이 너무도 확실하기에 타인이 가지는 해답은 고려하지도 않고 신화속에 나오는 프로크라스테스의 침대 처럼 자신의 해답에 철저하게 타인을 맞추는 것이다. 말하자면 '고백'은 그런 소설이었다. 트라우마에 고착되어 귀는 없이 입만 존재하는 고백의 폭력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작품이었다. 트라우마를 안겼던 존재 자체를 스스로 스위치를 눌러 폭발시켜 버리는 와타나베는 그야말로 '고백'이 가진 진짜 의미의 상징이라 할 것이다.

 

 

 

 

 하지만 미나토 가나에는 그것의 한계를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 식으로 치유해봤자 행복해지지 않을 것임을 말이다. 그래서 소설은 그냥 고백으로 끝난다. 문득 독자에게 무한의 허공을 열어보이며... 소설은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그래서 주인공 여교사는 복수로 인해 치유되었는지 아니면 여전히 더 괴로운지 알려주지 않고 침묵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 여교사의 모습을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비슷한 사례를 가진 영화가 있기 때문이다.

 

 

   크리스토퍼 놀란을 일약 유명하게 만든 영화 '메멘토'가 그 좋은 예이다. '메멘토'의 주인공은 단기 기억 상실증에 시달린다.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그는 바로 전에 보았던 사람도 일어난 일도 곧잘 잊어버리는데 그래서 그의 몸은 정말 잊지 말아야 할 것을 새긴 문신들로 가득하다. 그렇게 그는 아내를 죽인 살인범을 추적한다. 단기 기억 상실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그는 결국 살인범을 찾아낸다. 그리고 그를 제거한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밝혀지는 사실은 진짜 범인이 놀랍게도 바로 그 자신이었으며 그는 자기가 아내를 죽였다는 진실을 잊기 위해(말하자면 그에게는 그가 아내를 죽였다는 사실 자체가 트라우마였던 것이다.) 다른 이들을 범죄자라 이름 붙이고 희생함으로써 그렇게 상상적이면서 일시적인 치유를 반복해왔던 것이다. 이것은 트라우마에 고착된 이들의 치유가 궁극적으로 어떤 모습을 띄게 되는지 분명히 보여준다. 그런 식으론 영원히 치유할 수 없으며 그저 제2. 제3의 희생양을 만들어서 때때로 맞는 모르핀 처럼 잠시 잊게하는 것일 뿐이라는 것을. 그러므로 '고백'의 여교사도 분명 같은 길을 걸었을 것이다. 아마도 와타나베를 보내버린 그녀의 두 눈은 이미 다른 대상을 물색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건 가나에에게 머무를 수 없는 장소였다. 그 고착이 가져올 영겁의 저주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다른 장소를 찾아야했다.

 

 바로 그래서 그녀는 '야행관람차'를 타게 된 것이다. 유원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야행관람차는 가나에에게 있어 세상의 비유였고 타자에게로 눈을 돌리기 위한 매개물이었다. 소설은 정말 '야행관람차'처럼 전개된다. 야행관람차 각 칸에 올라탄 사람들이 바깥을 구경하듯 소설이 여러 등장인물들을 옮겨다니며 그들 각자의 시점으로 진행되는 것이다. 그렇게 그들은 그들만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그러던 중 아주 이상적인 모습의 가정으로써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라 여겼던 가족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나고 사람들은 그 진실을 알려고 한다. 하지만 모두 관람차에 갇힌 존재들. 그래서 그들이 가진 창으로 밖에는 볼 수 없기에 때로는 상처를 입히거나 입고 불안에 떨게 하거나 떨기도 한다. 그렇게 모두들 분명한 진실을 알 수 없기에 고통에 빠진다. 답은 바로 근처에 있었는데도 말이다. 그 대답을 위해 미나토 가나에는 야행관람차를 가져 온 것이다. 빙글빙들 도는 야행관람차를. 그래서 위에도 있을 수 있고 왼쪽 오른쪽에서 있을 수 있으며 아래쪽에도 있을 수 있는 야행관람차를. 그렇게 고정된 위치라는 것이 존재할 수 없는, 때문에 고착이란 게 불가능한 야행관람차를 가져온 것이다. 즉 그 야행관람차는 타인이 바라보았던 시선을 나도 경험할 수 있게 해주는 소통의 매개물인 것이다. 말하자면 '서로-주체성'을 가능하게 만드는 존재. 그리고 가나에는 바로 그러한 야행관람차식 시점의 이동으로 인해 결국 살인으로 엄습한 고통들마저 치유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결국 가나에는 '고백'의 '나 홀로 독백의 주체'가 껴 안을 수 밖에 없는 영겁의 저주를 야행관람차식 시점의 옮김(지젝이 말한 '시차'가 이것일지도 모르겠다.)을 통하여 벗어나려고 한 것이다.

 

 그렇게 가나에는 타자를 슬며시 가져온다. 이것이 중간 단계인 이유는 그 타자의 대답을 요청하게 되는 계기가 바로 현재적 고통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트라우마가 아니고 트라우마로 진행되던 과정에 있었다.(그래서 형식 마저 느슨한 형태의 1인칭 시점의 연쇄로 이루어져 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래서 치유가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완전히 고착되지 않은 트라우마였기 때문에. '고백'은 이미 과거에 완성된, 그렇게 고착된 트라우마였다. 과연 그것도 이러한 타자들에게 맡김으로 치유될 수 있을까?     

 

 '왕복서간'은 바로 그 의문을 풀기 위한 작품이다. 여기에는 모두 세 편의 독립된 이야기가 실려 있는데 그 모두는 과거의 상처를 간직하고 있다. 즉 '고백'과 같은 완성된 트라우마가 있는 것이다. 편지들은 모두 그 트라우마를 언급하며 그것의 실체를 알기 위해 묻고 대답한다. 추궁한다는 점에서 이것은 '고백'과 유사할지 모른다. 하지만 목적은 아예 정반대다. '고백'의 추궁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해답을 남으로 하여금 실토하게 만드는 것이었다면 여기에서의 추궁은 근본적으로 '치유'를 향해 있기 때문이다.(스포일러상 자세한 것은 말하지 않도록 하겠다.) '왕복서간'에서 이렇게 치유가 가능해지는 것은 무엇보다 '야행관람차'에서 적극적으로 타인을 포용하려 들었기 때문이다. 바로 그 타자를 끌어들임이 상처를 일으킨 현재의 영원한 반복이라는 정지의 사슬을 끊고 시간을 앞으로 나아가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야행관람차가 돌아가듯이 말이다.(가나에는 어쩌면 시계의 비유로도 이것을 가져오지 않았을까?) 그렇게 드디어 미래가 도래했다. 아마도 그래서 가나에는 '왕복서간'에서 편지라는 형식을 취했는지도 모른다. 편지란 다름아닌 미래로 향한 발화이기 때문이다. 즉 편지를 쓴 사람이 기다리는 대답은 언제나 미래에서 불현듯 찾아온다. 그렇게 타자가 도래한다. 타자를 미래로 보았던 레비나스의 말 그대로 말이다.

 

 '왕복서간'이 시퍼런 날 선 언어들로 가득했던 '고백'과는 달리 부드럽고 따뜻한 밀어들로 가득하다고 느꼈다면 바로 이런 변화 때문이었다. 가나에가 트라우마의 치유를 더 이상 '말하는 입'이 아니라 '들으려는 귀'를 통해 함으로써 타자를 적극적으로 끌어들이고 그럼으로써 붙들려있었던 시간마저 미래로 진행시겼기 때문이다. 그렇게 가나에의 작품들이 보여준 일련의 과정들은 모두 자기만의 상처에 골몰하기를 멈추고 타자에게로 나아가는 과정이었다.  그리고 그것만이 궁극의 치유를 가져올 수 있음을 보여주는 여정이었다.

 

 '왕복서간'은 이러한 가나에의 현재를 보여준다. 그런 의미에서 가나에가 다다른 종착역이 어디인가를 확인하고 싶다면 꼭 읽어야 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다음에 이어질 여정의 보다 분명한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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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2-07-09 2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고백>을 읽고나서 하도 충격과 뒤끝이 심해서
<야행관람차>를 구매하고도 차마 펼치지 못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영화 <메멘토>를 한번은 열심히 봤으나 두번 다시 볼 생각이 들지 않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만큼 충격적이었다는거죠. 그런데,

<야행관람차>와 <왕복서간>을 통해서 포용이라는 개념으로 들어섰다고 하니
어쩐지 마음이 조금 놓이기도 합니다. 근시일내에, 야행관람차를 먼저 읽어야겠어요. ^^

ICE-9 2012-07-21 00:02   좋아요 0 | URL
저 역시 '야행관람차'를 읽지 못하다가 '왕복서간'과 '고백'의 차이가 너무 두드려져서 도대체 이 변화가 어떻게 된 것인가 알고 싶어서 집어들게 되어는데요. 그래서 왕복서간으로 가는 어떤 흐름을 보게 된 것 같습니다. 마녀고양이님께서는 어떻게 읽으실 지 궁금하네요.^ ^ 그런데 너무 뒤늦은 답글이라서 정말 죄송합니다. 요즘은 정말 시간이 안 나네요 ㅠ ㅠ

이진 2012-07-19 1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르메스님...
어디로 사라지신거예요 ㅠㅠㅠ
무려 열흘이라니, 이러다가 2주 채우시는 거 아닙니까?ㅎㅎ
내일이 신간평가단 리뷰 마감일이잖아요! 그렇지 않아요?
게다가 헤르메스님은 평가단장인데...(막 이래서라도 보고싶은 마음.ㅋㅋㅋ)

ICE-9 2012-07-21 00:03   좋아요 0 | URL
흑흑... 소이진님 ㅠ ㅠ
정말 너무 바빴어요.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도 모르겠네요.
그래도 오늘 리뷰 기한이라 어떻게든 다 읽고 쓰긴 했는데
때문에 몸은 이미 초주검 상태입니다. ㅠ ㅠ
소이진님은 이제 곧 방학이겠네요...
우왕~ 너무 배아파서 한달간 잠수타고 싶어요^ ^;
 

 

 

  아프리카는 오래도록 역사의 변방에 있었습니다.

 

  마치 그 거대한 대륙 전체가 어둠의 장막이라도 둘러쓰고 있는 것 처럼 아프리카는 세계사에서  보이지 않는 존재였습니다. 오죽하면 우리들 조차 세계사 시간에 근대에 이르도록 아프리카라는 이름을 볼 수 있었던 곳은 단 하나밖에 없었을까요. 그렇습니다. 인류의 역사가 근대까지 그 뜨겁고도 험난한 여정을 이어오는 동안 우리들이 볼 수 있는 아프리카는 오로지 오스트랄로피테쿠스라는 최초의 인류 화석이 발견 된 지명으로서의 아프리카말고는 없었습니다.  그 정도로 아프리카에 있어 역사는 존재하지 않는 듯 했고 그렇게 늘 변함없이 태고의 모습 그대로 존재하는 듯한 착각마저 불러일으켰습니다. 흔히들 1989년 부터 1999년까지의 아프리카를 '아프리카의 과도기'라 부릅니다. 89년 냉전체제의 종식과 더불어 양극화 체제에서 다극화체제로 서서히 옮겨가자 당시의 냉전 이데올로기에 의해 외부로 부터 지배를 받고 있던 아프리카 국가들이 스스로 자신들만의 독립적인 체제를 만들어가려 했던 시기였기 때문입니다. 냉전의 종식과 더불어 소련의 개입으로 일어난 앙골라와 모잠비크에서의 전쟁도 끝이나고 많은 나라들이 이제는 자신들만의 체제를 추구했으며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는 악명높은 인종분리 정책이었던 아라파트헤이트도 폐지되는등 처음으로 변화의 기운이 아프리카에 가득 퍼지던 시기였습니다. 하지만 아프리카를 제외한 세계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그러한 과도기 조차 찻잔 속의 폭풍일 뿐 이었습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고 널리 알려지지도 않았죠. 오늘까지도 여전히 아프리카 하면 우리들이 세렝게티나 가혹한 굶주림만을 떠올리듯이 말입니다.  

 

 

 그런데 2011년 1월. 아프리카를 달리 보게 되는 계기가 찾아왔습니다. 그것이 바로 23년간 튀니지를 독재했던 밴 앨런 정권을 무너뜨린 재스민 혁명이었습니다. 더구나 이 혁명은 거기에 그치지 않고 계속 번져나가 결국엔 42년간이나 리비아를 독재했던 카다피 정권마저 무너뜨렸습니다. 사람들은 놀랐고 이 혁명이 그 어떤 외부의 개입이나 원조 없이 오로지 아프리카인들이 순수하게 자신들의 힘으로 쟁취한 혁명이라는 사실에 더욱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그 혁명이 그 때까지 세상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아프리카인들에 대한 생각을 완전히 거꾸로 뒤집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아프리카인들이 여전히 미개하며 자신들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아프리카에 대한 원조 운동이 지금처럼 확장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도움이 그만큼 절실해서이기도 했지만 사실은 아프리카인들이 스스로는 그 어떤 해결도 할 수 없다는 그러한 우리의 편견이 뒷받침된 결과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재스민 혁명은 우리가 그동안 가지고 있었던 아프리카인들에 대한 이미지를 완전히 깨뜨려버렸습니다. 그들 역시 자신의 생각과 의지로 기꺼이 행동으로 옮길 줄 아는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그제서야 아프리카가 가진 진짜 모습을 보게 된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의문이 생겼습니다. 이러한 아프리카가 왜 그토록 세계사에 있어서 가리워져 있었고 또한 우리는 아프리카인들을 그런 식으로 생각하게 되었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 말이죠. 움베르트 에코의 '장미의 이름'은 책이 가진 가장 중요한 의미중 하나를 우리들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건 바로 책은 세상이 감추고 있는 진실을 담고 있고 언제든 우리들에게 그 진실을 들려주기 위해서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아프리카에 대해서 만큼은 에코가 책에 대해 부여했던 그 의미가 그대로 진실임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바로 그 책들을 통하여 왜 아프리카가 재스민 혁명으로 달리보게 될 때까지 그동안 우리들에게 그렇게 나쁜 이미지로만 인식되어 왔는지 제대로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세상이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지 않았던 진실이라는 것을 말이죠.

 

 우리는 그것을 수잔 벅모스의 '헤겔 아이티 보편사'에서 확실히 볼 수 있습니다.

 

 

 

 

 

 수전 벅모스의 책은 우리들이 가진 아프리카에 대한 편견이 서양이 본격적으로 식민지 정책을 펴나갔던 그 시기부터 형성된 것임을 알려줍니다. 당시 영국을 비롯한 서유럽은 경쟁적으로 식민지를 건설해 나갔는데 사실은 무력에 의한 정복이었지만 그렇게 말하면 식민지 건설의 명분이 없으니까 야만을 문명으로 계몽한다라고 미화시키는 것이 보편적 행태였습니다. 때문에 그들이 내세운 '문명화'라는 명분이 설득력을 가지려면 그들이 정복하는 땅의 주인들이 한없이 미개하고 도저히 인간이라고는 할 수 없을 정도로 야만적이었다고 해야 했습니다. 아프리카도 여기에 있어 예외일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가진 아프리카에 대한 편견은 바로 서유럽의 제국주의적 팽창의 산물인 것입니다. 그들이 마음놓고 아프리카인들을 노예로 삼고 그들의 자원을 수탈하기 위해 만들어내었던 편견이 아직도 강하게 우리들의 뇌리에 남아있는 것이죠. 수전 벅모스는 하지만 이러한 편견들이 위정자나 자본가들 뿐만 아니라 이성을 찬양하고 자유를 최대의 가치로 부르짖었던 당시의 철학자들 역시도 공유했던 관념임을 밝힙니다. 특히나 헤겔을 통해서죠. 구체적으로 수잔은 우리도 익히 알고있는 헤겔의 저 유명한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이 당시 서유럽을 놀래켰던 아이티 혁명의 영향을 받은 것임을 소상히 밝혀줍니다. 하지만 헤겔 그 스스로는 밝히지 않았고 아이티인들의 혁명을 통해 아프리카인들이 당시의 지배적 관념과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면서도 적극적으로 그 편견을 깨뜨리려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역사철학강의에서 아프리카인들은 높은 사고를 할 수 없고 그래서 아프리카는 무지로 어두운 장막이 짙게 드리운 곳으로만 설명했습니다. 말하자면 헤겔은 진정한 아프리카를 짐짓 모른 척 한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서구의 역사라는 것 자체가 자기들 외부에 대해 의도적 배제 위에 흘러왔음을 수전은 책을 통해 드러냅니다. 그런데 그러한 행태는 비단 그 당시에만 그치지 않았습니다. 현재에도 역시 여전히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수전은 그걸 바로 자신의 연구가 어떻게 헤겔 연구가들에게 취급받고 있는가를 통해 나타냅니다. 이렇게 수전이 아무리 아이티 혁명과 헤겔의 상호영향 관계를 밝혀도 지금 헤겔학파 사람들 그 누구도 여기에 관심을 두거나 연구하려 드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헤겔이 아프리카의 진실된 모습을 짐짓 모른 척 했듯이 지금의 헤겔학파 또한 헤겔이 그 아프리카로 부터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짐짓 모른척 하고 있는 것이죠. 이것을 통해 수전은 서구 중심주의적 사고로 인해 타자의 역사들이 멋대로 왜곡되어지는 형태가 여전히 이어지고 있음을 보이고 바로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역사가 이제는 보편사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에서의 보편사란 패권을 가진 중심부에서 멋대로 자르고 왜곡하는 현재의 역사가 아니라 그 외부의 타자들이 타자들 자체로서 스스로를 온전히 드러낼 수 있도록 말하자면 그들 자신의 목소리로 그들을 대변토록 하는 그런 역사를 말합니다. 그렇게 대등한 타자들이 서로 자신의 존재를 다채롭게 드러내는 역사. 그것이 바로 보편사인 것이죠. 수전의 '헤겔 아이티 보편사'는 바로 수전이 지향하는 보편사가 어떤 것인지 보여주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오히려 가치중립적이라고 말해지는 학문의 영역에서 조차 서구중심주의에 기반한 이해관계로 인해 아프리카는 멋대로 왜곡되어 버렸음을 보여주는데 이것은 비단 수잔 벅모스의 주장만은 아닙니다. 여기에는 또 하나의 저작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마틴 버넬의 '블랙 아테나'란 책입니다.

 

 

 

 

 

 

 마틴 버넬은 먼저 그리스 신화가 우리가 익히 아는대로 신화가 아니라 역사적 사실을 단지 상징과 은유의 형태로 기록한 것임을 상세히 밝힙니다. 그렇게 버넬은 그리스 신화를 역사로 볼 것을 주장하는데 얼른 우리는 이것이 참 바보같이만 들립니다. 왜냐하면 그리스 신화가 신화에 불과하다는 건 누구나 다 아는 뻔한 사실이기 때문이죠. 하지만 버넬은 우리가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가 바로 수전 벅모스와 마찬가지로 19세기에 팽배한 아프리카에 대한 서유럽 제국주의의 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해 역사학자들이 단순한 신화로 날조한 데 있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 신화를 역사적 사실로 바라보면 무엇보다 그리스 문명의 기원이 바로 이집트로 대표되는 아프리카가 되는데 그렇게 되면 당시 아프리카 침략에 정당성을 부여하던 미개한 열등 인종인 아프리카인들을 계몽한다는 명분이 더이상 성립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당시의 서유럽 역사학자들은 자신들이 가진 인종주의적 우월성을 유지하기 위해 그리스 문명의 기원을 이집트나 페니키아가 아니라 같은 서양인 미케네 문명을 그 기원으로 날조했던 것입니다. 바로 그 날조가 지배적인 견해가 되어 오늘날 우리의 상식으로 자리잡게 된 것음을 버넬은 '블랙 아테나'를 통해 아주 상세히 밝혀줍니다. 여기서 보면 아시겠지만 우리가 그동안 서구 제국주의에 의해서 왜곡된 아프리카의 역사를 읽는다는 것은 단지 아프리카의 어두운 역사를 복기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서구 제국주의에 형성된 그 같은 왜곡된 편견들은 많은 부분 지금 우리의 상식으로 당당히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이것은 그대로 우리가 가진 덧칠된 편견들을 걷어내고 그 진실한 참모습을 새로이 알아가는 기회가 되기도 합니다. 바로 이 때문에 에코가 말했던 책의 의미는 하나의 진실이 되는 것입니다. 아프리카의 왜곡된 이미지와 역사에서 단적으로 드러나듯이 그동안 세상이 가리고 있는 진실이 이렇게 책을 통해 드러나고 있음을 똑똑히 깨닫게 되니까요.

 

 이렇게 과거의 아프리카가 가진 왜곡으로 부터 자유롭게 되었다면 이제 현재의 아프리카를 바라보던 인식 역시도 달라지게 되겠지요. 그동안의 굶주림과 미개함 그리고 수동성으로 가득한 땅이 아니라 그 자신의 삶과 역사를 위해 스스로 대안을 찾아나가는 적극성과 가능성의 땅으로 말이죠. 현재 아프리카의 세네갈에서 참사관으로 근무하고 있는 윤상욱의 '아프리카에는 아프리카가 없다'라는 책은 바로 이 같은 아프리카가 가진 현재의 모습을 변화된 새로운 시각으로 정말 잘 보여주는 책입니다. 현지 아프리카의 경험까지 더해져 정말 생생한 아프리카의 모습을 전해주고 있는 책은 정치와 경제 그리고 문화 전반에서 아프리카가 현재 마주하고 있는 곤경과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대안들을 스스로 어떻게 만들어나가고 있는지 그 외부적 시각이 아니라 바로 아프리카 내부의 시각으로써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책이 아프리카가 현재 가지고 있는 의미를 아프리카 내부라는 미시적 시각에서 보여주고 있다면 르몽드 디플로마티크가 기획하고 펴낸 '르몽드 세계사 2편', '세계질서의 재편과 아프리카의 도전'은 세계 전체라는 거시적 시야에서 아프리카가 가진 의미와 그 가능성을 보여주는 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이제 점점 다극화 시대로 나아가고 있는 현재에 있어 서서히 주체적으로 자신들의 체제와 삶 그리고 역사를 형성하고 있는 아프리카가 거기에 있어 어떠한 역할을 할 수 있을지 주목하고 있습니다. 윤상욱의 '아프리카에는 아프리카가 없다'와 이 '르몽드 세계사 2'는 아프리카를 그 내부와 외부에서 고루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병행해서 보면 참 좋은 책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기까지 어제의 아프리카와 오늘 그리고 앞으로의 아프리카를 제대로 진실되게 바라보게 해 줄 책들을 추천해 보고 대략 살펴보았습니다. 사실 우리가 다른 나라의 역사와 현재에 관심을 가지기란 쉽지가 않습니다. 당장은 우리 자신의 삶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이겠지요. 하지만 앞에서도 이미 말했습니다만 아프리카의 경우에도 드러나듯이 결국 타자의 역사와 현재를 살피는 일은 곧 우리 자신의 역사와 현재를 살피는 일이기도 합니다. 더구나 그들이 걸어온 역사적 경로와 우리가 걸어온 경로도 다르지 않으면 더욱 그렇겠지요. 그런데 우리 역시 그들 만큼이나 역사에 있어선 주변부였고 그들이 지배당했던 만큼 우리도 역시 식민지 지배를 거쳤으며 모든 식민지 경험을 가진 국가의 국민들이 그러하듯이 우리 역시 여전히 서구 중심주의적 시각에 깊이 물들어 있습니다. 이만큼이나 과거와 지금 우리의 모습은 그들과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때문에 그들에게 덧칠된 편견을 지워가는 건 서구에 의해 우리 자신에게 덧칠된 편견을 지워나가는 일일 것입니다. 말하자면 아프리카를 진실되게 이해하는 건 다름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의 고유하고도 진실된 모습을 찾아가는 또 다른 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라도 어제와 오늘의 아프리카를 제대로 바라보게 해 줄 이 책들을 꼭 벗해보실 것을 권해드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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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하 감독의 새 영화가 드디어 나왔다.

  '쌍화점' 이후에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어, 근데 제목이 '하울링'이다.

  설마, 이번 영화가 리메이크인 것일까?

  생각했었다.

 

  왜냐면 제목의 '하울링'  은

  '그렘린'으로 한 때 이름 꽤나 날렸던, 하지만

  영화를 가지고 마음껏 장난치는 악동절 기질로

  악명이 더 높았던 감독,

  조 단테 의 데뷔작 제목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도 조단테의 데뷔작은

 '인간 늑대의 음모'라는 참으로 기묘한 제목으로

  비디오로 나온 적 있다.(비디오 수집 시절 이 오리지널

  판을 찾기 위하여 꽤나 애먹었던 기억도 새록하다.)

  그러니까 조 단테의 '하울링'은 우리나라에서

  붙인 제목이 말해주듯 늑대 인간이 나오는 영화였다.

 (늑대로 변하는 특수효과가 꽤 인상적이었다.)

 

 

  그럼, 유하가 한국한 늑대인간 영화를 만드려는 것일까?

  주연이 단 한번도 유하와 인연이 없었던 송강호인 이유도

  늑대인간과 드랴큘라가 상극이라는 사실은 왠만한 사람이라면 다 알테니까

  일부러 박찬욱 감독의 '박쥐'에서 드라큘라가 되었던 송강호를 데려와

  키치적 변주의 재미를 더하기 위해서였더 것일까?

 

  이렇게 멋대로 상상이 전개되는 가운데

  그 모든게 한낱 오해에 불과함을 알게 되었으니...

  사실 제목만 '하울링'일 뿐, 조단테 데뷔작의 리메이크는 아니며

  아예 원작조차 따로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당연히 늑대인간의 얘기도 아니라고...

 

 

 

 

  그 원작이, 바로...

 

  일본 작가 노나미 아사  의

 '얼어붙은 송곳니' 라고 한다.

  15회 나오키 상까지 수상한 작품이라고 하는데

  안타깝게도 아직 읽지 못했다.

 

  노나미 아사의 '얼어붙은 송곳니'는

  어차피 영화 예고편에 다 나오므로 하는 말이지만

  개에 의해 이루어지는 연쇄살인을 다루는 작품

  이란다. 그러니까 이번 영화의 제목 '하울링'은

  개에 의한 연쇄살인이라는 단순한 이유로

  붙인 것에 불과했던 것이다.

 

  근데,

  '뭐, 개에 의해 연쇄살인?...'

  하자 이와 비슷한

  영화가 예전에도 하나 있었음이 생각났다.

 

 

 

 

   그 영화가 바로...

 

  B급 영화의 거장으로도 유명한

  사무엘 풀러  의 'WHITE DOG'이었다.

  80년대의 미국은 늑대 혹은 개와 무슨 인연이라도 있었

  던 것일까? 앞서 소개한 조 단테의 '하울링'이 1981년에

  나왔는데,

  사무엘 풀러의 'WHITE DOG'은 1982년에 나왔다.

  (현재 드라마로 다시 만들어지고 있는 '틴 울프'

   도 1985년 마이클 J 폭스 주연으로 만들어졌다.

   신보수주의로 무장한 레이거노믹스가 절정에 달할

   무렵 이토록 야성성을 강조하는 영화가 왜 득세

   하게 되었는지 살펴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 같다.)

  우리나라에도 '마견'이란 역시나 기묘한 제목으로

  비디오로 나왔었다. 정말 휘귀했던 비디오로 보고

  싶었던 많은 이들을 애태웠는데 제목이 저렇게

  '마견'이 된 것은 연쇄살인을 저지르는 개에게

  'WHITE'란 제목이 붙여짐으로 혹시 이 영화를 보고

  반미주의적 의식이 움트면 어쩌나 하는 윗분들의 우려때문이 아니었겠느냐는

  풍문이 돌기도 했다.

 

   충격의 복도, 언더월드 USA로 그야말로 파격적이고 충격적인 영화 세계를 보여주었던 B급 영화의 대부, 사무엘 풀러가 70세가 넘어서 만든 이 작품은 '얼어붙은 송곳니'와 마찬가지로 개에 의해 일어나는 연쇄살인을 다룬다. 뭐, 제목만 보고서도 이미 짐작하셨겠지만...

 

 

   잠깐 스토리를 소개해 본다면,

   한 소녀가 자동차에 치인 개를 구하는데 그 개가 어쩐지 좀 이상하다는 걸 발견한다. 흑인만 보면 이유도 없이 으르릉 거리며 날뛰는 것이다. 나중에 알고보니 그 개는 한 백인 인종주의자에 의해 흑인만을 노려 살해하도록 훈련시킨 개였다. 한 흑인 개 조련사가 그 사실을 알고 그 개를 고치려고 나선다는 그런 이야기다.

 

   여기까지만 봐도 이 영화엔 인종주의에 대한 비판이 들어있음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평생 반골로 살아온 사무엘 풀러 답게 그저 그런 개가 나오는 공포영화는 아닌 것이다. 그런데 이 영화가 오로지 사무엘 풀러만의 오리지널은 아니다. 그러니까 여기에도 유하의 '하울링'이 그랬듯이 따로 원작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원작을 말한다면 아마도 원작자를 아는 사람들은 조금 충격을 받을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그가 바로, '유럽의 교육' '하늘의 뿌리' '새벽의 약속'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를 쓴 '로맹 가리' 이기 때문이다.

 

 

 

 

 

 

 

 

 

 

 

 

 

 

 

 

 그 로맹 가리가 1970년 10월 9일자 라이프지에 발표한

 단편 'WHITE DOG'이 바로 그 영화의 원작이다.

 오른쪽의 표지가 'WHITE DOG'이 표제작으로

 실린 프랑스에서 출간된 단편집의 초판 표지이다.

 (아래는 영문판의 표지) 

 

 

 

 

 

 

 

 

 

 

 

 

 

 

 

 

 

 

 

   아직 국내엔 번역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평소 로맹 가리의 작품을 접해왔던 분들이라면 '세상에 사람을 물어 뜯어 죽이는 살인마 개의 이야기라니, 그런 걸 정말 로맹 가리가 썼단 말이야?'하고 정말 의아해하지 않을까 싶은데... 그런데 그의 데뷔작 '유럽의 교육'을 생각하면 나 개인적으로는 이 작품이 그리고 있는 세계가 그리 낯선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유럽의 교육' 2차 대전이 한창 중인 독일 점령하의 폴란드에서

  독일군과 싸웠던 폴란드 레지스탕스의 삶을 다룬 소설이다.

  실제로  레지스탕스 활동을 했었던 로맹 가리 자신의 자전적 체험이

  깊숙이 투영된 소설이기도 하다.

  그렇게 로맹 가리는 자신이 직접 겪었던 전쟁 얘기를 그대로 담아

  전쟁이 가져다 준 증오와 광기 그리고 그로 인한 인간성의 황폐와

  절망을 얘기한다. 미처 제대로 어른이 되기도 전에 그러한 것들을

  자신의 근본적 체험으로 '교육' 받을 수 밖에 없었던 스스로의 모습

  을 절절하지만 빼어난 문장으로 한차례 걸러 담담하게 고백하고 있

  다. 

 

 

 

  여기서 우리가 마주하는 것은 전쟁이 주는 모든 경험을 자신의 근본적 체험으로 가지게 되어 그로부터 의식과 판단이 자유로울 수 없는 영혼과 그렇게 규정되었지만 한 편으론 그 규정된 의식과 판단으로 부터 자유롭고 싶어하는 영혼이 그 내부에서 격렬히 싸우고 있는 한 어린 영혼의 모습이다. 그렇게 길들여진 것과 그 길들여짐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는 갈망이 한데 뒤엉켜 진흙탕 싸움을 벌이고 있는 영혼의 전장이다. 거기서 로맹 가리는 말한다. 인간의 삶이란 그 길들여짐에서 벗어나 어쩌면 상상속에서나 가능할지도 모르지만 그 모든 길들여짐으로 부터 자유로운 자기 자신만의 고유한 개체성을 획득하는게 아니겠느냐고...

 

  바로 이러한 생각, 자유에로의 몸부림이 또한 단편 'WHITE DOG'에게로 그대로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로맹가리의 근본적 질문은 이것이다.

  사람은 진정 자유로운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원초적 체험이란 늘 남으로 부터 규정당한 것. 그렇게 길들여짐이기 때문이다.

  그렇담, 그 길들여짐에서 우리는 벗어날 수 있는가? 확신할 수 없다. 그건 영원한 숙제이다.

  그것이 가능하다면 그 방법은 무엇인가?

   

  사무엘 풀러의 영화도 마찬가지다. 사무엘 풀러 역시 'WHITE DOG'을 통해 이것을 묻는다.

  애초에 한 인종주의자로 부터 조련된 개를 내세우는 까닭이 바로 이것이다. 로맹 가리 처럼 한 쪽으로 사고하도록 길들여진, 그렇게 하나의 원초적 체험이 되어버린 존재를 다시 다른 쪽으로 생각하게 할 수 있을까? 그렇게 자신의 신체 내에 철저하게 길들여진 의식으로 부터 자유롭게 만들 수 있을까를 묻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로서 풀러는 인종주의의 근저로 들어가는 것이다. 지금 사회에 현상되는 인종주의는 어쩌면 그 길들여진 개 처럼 우리 자신 역시 그렇게 사고가 길들여져서 나타난 것이 아니었겠느냐고 말이다. 그러니까 스스로 그 개를 다시금 조련시키려 하는 흑인 조련사는 사실 지금 영화로 관객들로 하여금 인종주의 자체를 다시금 생각해 보게 만드려는 사무엘 풀러 자신의 분신이기도 하다. 또한 조련 자체로 상징되듯이 80년대 등장했던 흑인과 백인간의 인종 갈등을 '계몽'이라는 수단으로 개선시키려 했었던 주류 담론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사무엘 풀러의 'WHITE DOG'은 그 시대에 가장 뜨거운 감자였던 주제를 그 모든 논의되는 대안들과 더불어 정면으로 음미해 보려는 노장의 당당한 '참여'였던 것이다.

 

  과연 길들여짐이 또 다른 재교육으로서 조정 가능한지 사무엘 풀러가 내놓은 답안은 혹시나 이 영화를 보실 분들을 위하여 미지의 것으로 남겨두려 한다. 또한 이 페이퍼는 어디까지나 유하의 신작에 대한 것이지 사무엘 풀러와 로맹가리의 것은 아니므로... 이 '길들여짐'의 주제가 사회철학과 또한 긴밀한 관련이 있음을 말하는 정도로만 그칠까 한다.  

 

 

  아무튼, 바로 이 '길들여짐'의 주제 때문에 나는 알 수 있었다.

  왜 유하가 노나미 아사의 '얼어붙은 송곳니'를 '쌍화점' 차기작으로 선택했는지...

 

 

 

 

 

 

 

 

 

 

 

 

 

 

 

 

 

 

 

  '쌍화점'의 얘기를 생각해보면,

  '하울링'이 유하 작품 세계에서 가지게 될 연속성이 보다 분명하게 드러난다.

  '쌍화점'은 무엇을 말하는 영화였나? 단순히 말하자면 '왕의 사람'으로 처음부터 길들여져왔던 '조인성'이 그로부터 자유로운 자신의 진정한 자아를 찾아가는 얘기라 할 수 있다. 왕비와의 '연정'으로 처음으로 이성애에 눈을 뜬 조인성은 그제서야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사유할 수 있게 되고 이로써 어릴 때 부터 왕에 의해 일방적으로 길들여진 '동성애적' 정체성에서 벗어나려 한다. 즉 '쌍화점' 은 궁극적으로 '길들여짐과 그것에 대한 거부'의 얘기였다. 그러니까 로맹 가리의 '유럽의 교육' 과 마찬가지로 외부로 부터 강요된 길들여진 정체성과 그것에 저항하는 개인의 고유한 정체성이 서로 칼날을 겨누고 뒤엉키는  얘기인 것이다. 이것은 유하가 '말죽거리 잔혹사' 이후 내내 천착해 온 이야기이기도 하다. '말죽거리 잔혹사' '비열한 거리' 그리고 '쌍화점' 이 일련의 영화들은 사실은 모두 같은 얘기를 하고 있다. 즉 박정희 이후 우리의 내면에 본격적으로 자리잡게 된, 그렇게 가부장적 국가 권력에 의해 길들어질 대로 길들여진 우리 정체성에 관한 얘기인 것이다.(여기에 대해선 물론 세세한 근거를 댈 수 있지만 여기서는 그냥 유하가 그 길들이는 권력 주체의 자리에 내내 '아버지'라는 존재를 가져가고 있음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는 정도만 언급해 둔다.)

 

 

   그러니 '길들여진 존재'가 길들여진 그대로 충실히 살인을 수행하는 노나미 아사의 '얼어붙은 송곳니'는 사실 그야말로 유하가 내내 천착해온 테마인 것이다. 아마도 그렇기에 유하는 이 작품을 자신의 차기작으로 선택할 수 있었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말죽거리 잔혹사' 이후 유하는 같은 주제를 내내 다루면서도 그 접근 방법은 다 달랐다. '비열한 거리'와 '쌍화점' 만큼이나 이번 '쌍화점'과 '하울링' 역시도 그 접근 방법이 파격적으로 달라졌는데, 이 색다른 변주를 통해 독재에 의한 길들여짐을 집요한 정밀함으로 보여주었던 '쌍화점' 처럼 또 어떤 길들여짐에 대한 변주를 송곳니로 물어뜯어가며 연주해 줄 지 정말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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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2-01-20 2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르메스님이시당 ><
저는 유화감독은 모르지만, 쌍화점을 알고. 하울링은 모르지만 얼어붙은 송곳니는 알아요. 읽어보지는 않았지만.안그래도 곧 영화를 보러갈건데 참 감사합니다, 생각햇는데 담달 개봉이군요... 씁쓸합니다 ㅠ

ICE-9 2012-01-24 23:15   좋아요 0 | URL
소이진님, 설날은 잘 보내셨나요?
소이진님은 다음달에 바쁘신 모양이로군요.
그런데 저도 그래요. 흐엉 ㅠ ㅠ...
너무나 기다렸던 유하의 신작이지만
밀린 일이 많아서 2월달 안으론 못 볼 것 같아요...
ㅠ ㅠ...

맥거핀 2012-01-20 2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울링'이라는 제목으로 시작해, 사무엘 풀러와 로맹 가리를 거쳐, 다시 유하감독이 하울링을 찍을 수밖에 없는 이유로 돌아오는 글이 아주 인상적입니다. 무릇 소개글이란 이렇게 써야하는 건데...덕분에 유하 감독의 신작에 별 관심이 없었는데 관심이 부쩍 생기네요.

ICE-9 2012-01-24 23:28   좋아요 0 | URL
박정희가 주입한 현재까지도 우리에게 남겨진 '근대화적 정체성'에 각각 다른 변주로서 내내 천착한다는 점에서 유하는 개인적으로 관심이 많은 작가입니다. '쌍화점'은 동성애를 가지고 독재와 개인의 저항을 절묘하게 풀어간 그 절정을 보여준 작품이라고 개인적으로 평가하는데 그래서 그 이후의 작품이 어떤 것을 보여줄지 더욱 궁금했는데 이번엔 아예 내내 은유적으로 담아왔던 '길들임'의 문제가 본격적으로 나타나 더 기대감을 가지게 만드는군요. 여기서 문득 맥거핀님이 신작을 기다리는 누굴까 궁금해지네요. 그리고 또 기대작이 하나 늘었어요. 벨라 타르의 '토리노의 말'. 세상에 이 영화가 개봉된다는군요. 극장에서 만나는 타르의 영화는 처음이라서 마구 두근거려집니다. 2월은 정말 바쁜데 이 영화만은 어떻게든 만사제치고 볼 생각이에요. 타르가 공식적으로 자신의 마지막 영화라고 말하기도 했고...

맥거핀 2012-01-26 00:45   좋아요 0 | URL
아..벨라 타르 영화가 개봉을 하는군요.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아주 평이 좋았다고 하던데, 저도 챙겨서 봐야겠습니다.
 

 

  미야베가 뭔가 달라지고 있다...

  그것을 느꼈던 것은 작년에 나온 '영웅의 서'를 읽었을 때였다.

 

 

   표면적으로 '영웅의 서'는 그녀의 전작 '브레이브 스토리'를 다시금 더한층 업그레이드 시킨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제목에서도 분명히 연속성이 느껴지지만('영웅의 서'라는 제목은 '브레이브 스토리'에서 '브레이브'가 '영웅'으로 '스토리'가 '서(書)'로 바뀐 것에 불과하다.)  인물의 설정이나 왜 환상의 세계로 뛰어드느냐 하는 것 등등 여러가지 면에서 많은 유사성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표면적일 뿐이고 더 깊이 들어가 살펴보면 '영웅의 서'가 결정적으로 차이가 난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바로 그것은 '브레이브 스토리'에서는 그 환상의 세계가 현실의 아픔을 치유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존재로 단순히 묘사하는 것으로 그쳤지만 '영웅의 서'에선 왜 환상의 세계(보다 정확한 용어로 말하자면 '환상성')이 그러한 힘을 가질 수 있는지 그 원인을 추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웅의 서'는 그렇게 함으로써 '환상성'을 담는 중요한 틀이 되는 '이야기' 자체를 끌고 들어온다. 그리하여 미야베 미유키는 '이야기'라는 것 자체를 매개로 '환상성'이 현실과 별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이어지는 것이며 오히려 현실 세계마저도 '환상성'을 바탕으로 구축되어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하여 현실이라는 것이 그대로 닫혀진 폐쇄적 절대 세계가 아니라 '환상성'에 의해 열려진 하나의 잠재적 과정의 세계라는 것을 밝혀 자신이 속한 세상을 유일하게 존재하는 절대적 세계로만 인식했을 때 찾아올 수 있는 세계로 인한 상실과 아픔을 그렇게 그 세계 역시 단순히 하나의 가능적 세계임을 밝혀 그 담장 너머를 바라보게 함으로써 치유하는 것이다.

 

 

 

 

 

 

 

 

 

 

 

 

 

   미유키의 새로운 판타지 '영웅의 서'는 바로 그러한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이렇게 '영웅의 서'가 '브레이브 스토리'와 갈라지게 된 것은 미유키가 그 소설에서 하나의 상실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즉 '브레이브 스토리'에서 '환상성'으로 들어가게 된 것은 개인의 아픔 때문이었지만 '영웅의 서'에선 실종되어 버린 자신의 오빠를 구하기 위해서라는, 그렇게 타인을 위해 들어간다는 차이가 있다. 그러니까 '개인의 아픔'에서 '상실된 타인의 구원'으로의 테마 자체의 진화로 인해 '영웅의 서'는 결정적으로 '브레이브 스토리'와 달라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내가 미야베 미유키가 뭔가 달라지고 있다고 느꼈던 것도 바로 여기서였다. 그 때까지 작품에서 내가 느꼈던 미유키는 자신의 상처를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에 맞춰져 있었다. 하지만 '영웅의 서'에서는 더 이상 자신의 아픔이 아닌 타인의 아픔을 어떻게 보듬어 안고 치유할 것인가에 대해 그녀는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올해 그 다음 작품 '고구레 사진관'이 나왔다.

 

   고구레 사진관을 읽고나서 '영웅의 서'에서 받았던 느낌은 이제 확신으로 바뀌었다. 왜냐하면 '고구레 사진관'은 '영웅의 서'에서는 일종의 대략적 스케치 정도로 남아있었던 타인의 아픔에 대한 치유라는 테마가 정면에서 다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고구레 사진관'은 '영웅의 서'와 더불어 새로운 곳으로 발걸음을 떼려 하는 미유키를 보여주고 있었다.

 

 

 

 

   또한 개인적으로 이 '고구레 사진관'은 그 걸음에 대한 미유키 자신의 하나의 선언으로 보였다.

 

   내게 그것은 특히나 '고구레 사진관'이라는 제목 자체에서 느껴졌다.

 

   '고구레 사진관'이라는 제목은 나에게 다른 어떤 작품을 연상시켰다. 그 작품은 바로 마츠모토 세이초의 초기작이자 1952년 아쿠타카와 상을 받은 작품이기도 한 '어느 '고쿠라 일기'전' 이었다. '고구레', '고쿠라' 어떻게 좀 비슷하지 않은가? 미유키가 일부러 '고쿠라'와 비슷한 제목을 쓴 건 아닐까 의혹을 가지게 된 것은 무엇보다 이 '어느 '고쿠라 일기'전'이 그녀 자신 직접 만들다시피한 '마츠모토 세이초의 걸작 단편 컬렉션'에서 그 첫 작품으로 그녀 스스로 선택했던 작품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미유키의 별명중 하나가 '세이초의 장녀'라는 것은 이제 알려질 대로 알려진 사실이다. 그만큼 미유키는 세이초를 존경한다. 그녀 스스로 그의 작품을 본받아 작품을 써왔다고 밝힌바도 있다. 그런데 더욱 흥미로운 것은 그녀의 새로운 시작이라고도 할 수 있는 '고구레 사진관'이 마츠모토 세이초의 거의 첫 시작이라고 해도 무방한 '어느 '고쿠라 일기'전'과 제목 뿐만이 아니라 그 내용에 있어서도 어느 정도 닮아있다는 사실이다.

 

  고구레 사진관은 아주 낡은 사진관이다. 현대적으로 변해버린 시가지에 그 사진관은 시대를 잘못 만난 것처럼 과거의 낡은 유물과도 같이 존재한다. 사람들마저 그것이 아직도 없어지지 않고 남아있다는 사실에 놀라워할 정도다. 바로 거기에 주인공 에이이치의 가족이 이사온다. 그렇다고 아버지가 사진사인 것도 아니다. 평범한 회사원인데도 그 낡디 낡은 건물의 매력에 빠져 '사진관'을 살림집으로 삼은 것이다. 그렇게 '고구레 사진관'은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의, 하나의 상징 같은 것으로 제시된다. 그것은 거기에 나온다는 유령 처럼 사라진 것의 재림이자 상실했던 것의 귀환 같은 것이다. 이것은 세이초의 '어느 '고쿠라 일기'전'에서도 마찬가지다. 그 소설에서 '고구레 사진관'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은 사라져 버린 직업이라고 할 수 있는 '전편(傳便 : 간단히 개인적인 편지 같은 걸 전하는 사람으로 우체부는 아니다.)'이다. 소설의 주인공 고사쿠가 결정적으로 작가 오가이의 잃어버린 '고쿠라 일기'를 찾으려고 했던 이유가 바로 그가 어릴때 자기집 셋방에 살았던 할아버지의 직업이 '전편'이었기 때문이다. 고사쿠는 그 '전편'인 할아버지가 일하러 갈 때 마다 딸랑딸랑 울리는 방울 소리에 아련한 추억을 가지고 있으며 이제는 사라져버린, 그렇게 존재하지 않게 된 '전편'이라는 직업에 대해 그리워한다. 그러다가 선배의 소개로 우연히 오가이의 '전편'에 대한 추억담을 읽게 되고 그 역시 자신처럼 그 사라져 버린 '전편'을 애틋하게 그리워하고 있음에 동병상련을 느껴 오가이의 잃어버린 '고쿠라 일기'를 찾아나서는데 전 생애를 걸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고구레 사진관'과 '전편'이 동일한 의미를 가지듯이 두 작품은 모두 상실된 것을 다시 되찾고자 하는 것에 공통점이 있다. '고구레 사진관'은 역시 사진이 주 소재다. 그것도 평범한 사진이 아니라 심령 사진이다. 그래서 본질적으로 미스터리를 지향한다. 주인공 에이이치는 우연히 이상하게 찍혀진(가족이 한데 모여 웃고 있는 뒤로 그와 똑같은 사람들이 그들을 내려다보며 슬픈 표정을 짓고 있는 그런) 사진의 비밀을 풀었다가 소문이 나서 본격적으로 의뢰가 밀려드는 바람에 본의 아니게 심령사진 명탐정이 된다. 그렇게 그는 모두 네 개의 에피소드에서 그 각각의 심령 사진에 얽힌 사연을 찾아 그 묶여진 '한의 매듭'을 푸는 일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에이이치의 일은 세이초의 고사쿠가 하는 일과 아주 비슷하다. 사연을 알 수 있을만한 사람들을 찾아 그들의 얘기를 듣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진에 담겨진 타인의 아픔을 알게되고 그것을 들어줌으로써 타인의 아픔을 치유하는 것이다. 미유키의 고구레가 세이초의 작품과 다르다면 여기가 다르다. 그러니까 탐문하고 상실된 것을 회복하는 과정은 비슷하지만 세이초의 그것이 미유키의 전작 '브레이브 스토리' 처럼 오로지 평생 불구로 살아야 했던 개인의 아픔을 치유하는 것에 그쳤다면 미유키의 '고구레'는 어디까지나 타인의 상처를 치유하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는 사실이다.

 

  같은 시작이나 지향점은 이렇게 차별을 둠으로써 오히려 미유키는 자신의 새로운 시작을 더욱 공고히 한다. 아마도 이 때문에 탐정역을 맡은 에이이치를 '영웅의 서'의 주인공 '유리코'와 똑같이 아직 세상의 때가 묻지 않아 순수한 '청소년'으로 설정했을 것이다. 하지만 유리코도 에이이치도 그들이 청소년이라서 타인의 상처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아니다. 유리코가 그렇게 된 것은 오빠의 실종 때문이었다. 즉 본래적으로 상실을 간직한 그녀였기 때문에 같은 상처를 가진 이들을 제 아픔 처럼 품어줄 수 있었던 것이다. 에이이치도 마찬가지다. 그 또한 메울 수 없는 상실을 간직하고 있다. 네 살때 인플루엔쟈로 죽어버린 여동생 '후코'가 그것이다. '고구레 사진관'도 어떻게 보면 '영웅의 서'와 비슷하게 후코로 인해 새겨져버린 상실을 치유해가는 이야기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고구레'는 '영웅의 서' 보다 더 멀리 나아간다. 유리코의 오빠는 돌아올 수 있는 존재지만 후코는 절대 돌아오지 못할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근본적으로 치유가 불가능한 상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더구나 그 상실은 언젠가는 그 누구에게라도 도래할 상실이 아니던가? 그렇게 시간문제일 뿐이 아니던가?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자기가 간직한 상실에만 골몰하여 스스로를 고립시킬 것인가? 아니면 도래할 상실의 예감으로 그저 불안에만 떨고 있을 것인가?

 

   바로 이 질문에서 미유키는 대담하게 한 발을 더 뻗는 것이다. 그리고 그 도래했거나 도래할 상실 앞에서 어쩌면 무모하고 지나치게 낙관적일지도 모르지만 타인에게로 손을 뻗어 그들의 상실을 치유해 줌으로써 그 새겨진 상실과 도래에 대한 불안을 극복해가자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에이이치의 동생 '피카'가 가지고 있는 상징적 의미인 것이다.

 

  사실 이 '후코'란 이름 때문에 생각난 것이지만 이러한 에이이치의 모습은 이 소설이 처음이 아니다. 바로 미유키의 전작 가운데 이미 한 번 나온적이 있었다. 그러니까 그녀의 최고 걸작 '화차'와 '이유' 사이에 나왔던 일본 SF대상까지 받았던 1997년작 '가모우 저택사건'에서 말이다.

 

 

  '가모우 저택사건'은 '타임슬립' 장르물이다. 주인공은 시간여행을 할 수 있는 한 사람에 이끌려 과거 일본의 가모우 저택으로 가게 되는데 마침 그 시기가 일본이 군국주의로 나아가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던 1936년 2. 26 쿠데타 즈음이며 그 가모우 저택이란 그 쿠데타로 부터 일본의 군국주의화를 막을 수 있었던 유일한 인물이 살고 있는 곳이었다. 말하자면 주인공은 일본이 끝내는 패망의 길을 걷고야 말 그 궁극의 분기점으로 인도된 것이다. 그렇게 이 소설 '가모우 저택사건'은 '고구레 사진관'에서 에피소드를 끌고 가는 심령사진에 담겨졌던 압축된 과거와도 같다. 그렇게 한 장의 사진이 그 사연이 일어난 시간을 가둬두고 있고 그 사진을 보면서 우리가 그 봉인된 시간 속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가모우 저택사건' 역시 그러한 과거 여행인것이다. 그리고 에이이치가 그 사진 속에 담겨진 아픔의 매듭을 풀어 헤쳤듯이 '가모우 저택사건'의 주인공 다카시 역시 그러한 일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다카시 또한 에이이치 처럼 결국 하나의 존재를 상실로 안게 된다. 바로 그 존재의 이름이 후키였다. 가모우 저택에서 일하는 하녀이자 먼 과거의 여자 후키. 다카시는 우여곡절 끝에 현재로 돌아왔지만 바로 그 때문에 사랑하는 후키와는 영원히 이별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그렇게 에이이치에게 있어 후코 처럼 영원한 상실을 안게 되었다.

 

  주인공에게 똑같은 의미로 자리잡은 '후코'와 '후키'... 이렇게 비슷한 그녀들의 이름 처럼  고구레 사진관의 주제 의식도 어쩌면 '가모우 저택사건' 때 부터 내내 남아있었던 것은 아닐까도 생각된다. 왜냐하면 그렇게 메울 수 없는 상실을 안게 된 다카시였지만 미유키는 그것을 비극으로 끝내지 않기 때문이다. 작품의 마지막에서 다카시는 이렇게 독백한다.

 

   그렇지만 다카시의 머릿속에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 후키가 있다. 스무살의 후키, 하얀 앞치마의 후키, 걱정하는 후키, 화내는 후키...차가운 손의 감촉,눈에 뒤덮인 가모우 저택, 자기 생애에 지워질 리 없는, 다카시의 기억이 숨쉬는 장소.(P.307)

 

  그러니까 고구레 사진관은 다카시의 가모우 저택과 같은 곳이다. 상실이 그저 상실로만 남는 것이 아니라 추억이 되는 것은 함께한 시간들이 기억 속에서 '영원한 현재'로서 내내 도래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미유키는 머나먼 시간을 지나 이제 '고구레 사진관'에 와서 '가모우 저택사건'에서는 미처 끝맺지 못했던 말을 마저하는 것이다. 그녀가 '고구레 사진관'을 통해 다시 들려주는 남은 말들은 이렇다.

 

   우리가 상실을 가지는 것은 시간 관념을 너무 직선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시간은 그렇게 지나갔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에겐 기억이 있고 그 기억의 렌즈로 새겨놓은 변하지 않는 모습들이 있다. 함께했던 타인의 기억, 그를 사랑했던 기억, 그로부터 사랑받았던 기억들이. 그것들은 사라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또 하나의 참여자로서 함께했던 '내'가 아직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있고 나의 기억이 있는 한 그 시간들은 그저 지나가버린 그렇게 잃어버린 시간들이 아니다. 그것은 언제든 다시 돌아가 뛰어들 수 있는 '영원한 현재'이다. 그렇게 그것은 낡은 앨범속의 사진들과도 같다. 아주 오래전 일을 찍은 사진이더라도 우리는 그 사진을 보면서 마치 그 시간으로 그대로 걸어들어간 느낌을 가지게 되지 않은가? 사진이 그렇게 무한의 유통기한을 가진 통조림 처럼 변질되지 않는 현재를 건네주듯이 우리의 기억 역시 마찬가지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것만 가지고는 만족을 하지 못한다. 아마도 그 이유는 우리가 너무 물질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에 그런지도 모른다. 너무 물질 위주로만 생각하다보니 사람들의 정신이 얼마나 위대한 힘을 가지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그 사람의 정신이, 거기에 간직된 기억이 현실 보다 더 생생한 현실을 만들어 낼 수 있음을, 존재보다 더 진짜의 존재를 창조해낼 수 있음을 보지 못한다. 하지만 보라 '고구레 사진관'의 사진들은 한 인간의 정념이 물리법칙을 뛰어넘어 원하는 현실을 투사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물질에 현실에 깊숙히 매몰된 의식으론 오로지 상실 밖에는 안을 수 없지만 기꺼이 기억의 힘을 믿고 모든 세상의 상식과 물질로 부터 자유로운 자는 그 상실의 껍질 안에 움트고 있는 희망의 빛을 보게 된다. 그 빛이 열어보이는 현전되는 시간 속에서 그 타인이 여전히 자신의 손을 맞잡고 곁에 있음을...

 

 그렇게 미유키는 사진을 그것도 심령사진을 가져왔고 영원히 곁에서 머무르는 유령(그는 우리 기억의 부름에 대한 화답이다.)을 가져왔으며 우리가 누군가와 더불어 있는 한, 그렇게 내어주는 손이 있고 맞잡는 손이 있으며 서로를 안을 수 있는 두 팔이 있는 한, 영원의 상실은 끼어들 틈이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고구레 사진관'은 정말 달라져버린 미유키를 느끼게 한다. 생각해보면 '크로스 파이어'의 아오키 준코와 '고구레 사진관'의 에이이치는 얼마나 멀리 있는 것인지... 자신의 원한을 풀기 위해서는 무고한 개인마저도 무자비하게 불태워버렸던 아오키 준코의 그림자는 역시 같은, 지울 수 없는 상실을 가졌으나 늘 동생에게 자상하고 타인에게 관대한 에이이치의 환한 미소에게선 더이상 찾아볼 수 없다.

 

 

 

  그렇게 아오키 준코는 현실과 물질에 너무 매몰된 나머지 지나간 시간을 오로지 절대적 상실로만 바라보았던 인물의 대표적 상징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래서 미유키의 '고구레 사진관'까지의 여정은 그 아오키 준코를 극복하는 과정이었다고도 말할 수 있을 듯 하다. 그녀가 이렇게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를 하게 된 것은 무엇보다 '에도 연작'들이 그 계기가 되었을 듯 하지만 그 얘기는 너무 길어지니 다음 기회로 돌리기로 하고 이쯤에서 지금 나온 '고구레 사진관'이 개인적으로 어떻게 전혀 새로운 미유키의 걸음이라고 여기게 되었는지 그녀가 선집했던 세이초의 작품과 그녀의 전작들을 통해 밝히는 글을 접을까 한다.

 

  오늘 슬픈 소식이 있었다. 개인적으로 한때 같은 지역구에 살았고 더러 만나서 말씀도 많이 들었던 분인지라 다가오는 아픔이 더 컸다. 그래서 솔직히 말하자면 이건 내 개인을 위한 글이다. 우리에게 그 분의 기억이 있는 한 절대로 상실될 일이 없다는 것은, '고구레 사진관'으로 에둘러 말하고 있을 뿐, 나 자신에게 건네는 일종의 '믿음'이기도 하다. 그 믿음을 확신으로 만들기 위해 이 글을 쓴 것이다. 그렇게 나는 미유키를 믿어보련다. 내 기억에서 언제까지고 생생히 살아있는 한 그 분 역시 늘 내 곁에서 머무르고 계시다고. 그 분과 악수를 나누던 감각 그리고 그 분과 헤어질 때 바라보았던 그 가을 하늘을 언제까지고 영원히 바래지 않는 사진으로 간직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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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1-12-31 1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 미미 여사의 책을 말씀하시는 지독한 상실과 사회적 불평등의 직시로 인해
접하기 매번 주저주저하면서 집에 쌓여간 가는 중인데, 역시 헤르메스님은 저의 지름신.
브레이브 스트리는 얼마전 네권을 모두 구입하고도 아직 못 읽었네요. 그런데
이후 신간들에게 더 눈이 가는군요. 영웅의 서와 고구레 사진관. 이거 정말 읽고 싶은데요.

헤르메스님의 슬픈 소식이 제 슬픈 소식과 통하는거 같습니다.
좋은 관계란 믿음이고, 믿음을 바탕으로 행동화하는거라 저는 생각합니다.
어제 하두 울었더니.. ^^

헤르메스님, 올 한해 보여주신 좋은 리뷰들 진정으로 감사드리고
내년 건강하고 즐거운 일 가득하세요.

ICE-9 2012-01-02 22:12   좋아요 0 | URL
올해는 무엇보다 마녀고양이님과 만날 수 있어서 더욱 뜻 깊었던 것 같습니다.
마녀고양이님도 새해엔 하시는 일, 원하시는 일 모두 뜻대로 다 잘 되시고 항상 건강과 행복이 함께하시길 바랄게요^ ^

이진 2011-12-31 2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글 너무 좋아서 뭐라 말을 못하겠어요.
추천을 몇백개를 찍고싶은데 ㅠㅠㅠ 어쩌지 이걸... ㅠㅠ

헤르메스님 그간 님의 리뷰를 읽어보며 얼마나 감동을 받았는지 ㅠㅠ
저도 닮고싶답니다 ^^

새해복 많이 받으셔요!
내년에도 멋진 글 써주세요~

ICE-9 2012-01-02 22:11   좋아요 0 | URL
하하.. 소이진님 반갑고 너무 감사드려요^ ^
과분한 칭찬에 몸둘 바를 모르겠네요...
소이진님도 올해 많은 복을 받으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들이 다 이루어지길 바랄게요.
그리고 더 좋은 리뷰를 위해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

이진 2012-01-12 22:06   좋아요 0 | URL
크크, 대단하신걸요.
두 작품 이달의 당선작 선정이라니요 ㅠㅠ
저도 이번에는 한번 기대해봤습니다만 역시 알라딘은 어린제게는 행복을 주지 않는군요. 지금 책도 안보내주고있어요. 흑흑 나쁜 알라딘ㅠㅠ

ICE-9 2012-01-13 02:10   좋아요 0 | URL
제가 소이진님의 페이퍼를 이미 봤으니까 하는 말이지만 제 생각에 다음 달 당선은 거의 확실시되지 않을까 싶던데요.^ ^
조금만 기다리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