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방랑
후지와라 신야 지음, 이윤정 옮김 / 작가정신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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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지와라 신야의 '동양 방랑'. 제목처럼 터키의 이스탄불에서 앙카라와 흑해, 티벳과 버마, 치앙마이와 상하이, 홍콩과 청량리, 도쿄로 이어지는 여정을 다룬 여행서다. 하지만 표지부터 범상치 않다. 작가의 얼굴에 책에서 인용한 글로 꽉 채운 것이 예쁜 풍경을 주로 쓰는 전형적인 여행서 표지와는 사뭇 다른 것이다. 



 표지부터 이 책은 네가 알던 여행서와 많이 다르다면서 마음의 준비를 시키는 것 같다. 읽어보니 과연 그랬다. 당신이 만약 여행서를 가고자 하는 곳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읽는다면 이 책엔 당신이 기대하는 것이 하나도 나오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랜드마크는 물론, 예쁜 거리의 모습이나 풍경은 고사하고 그 곳의 먹음직스러운 대표 요리 또한 나오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반대의 것들이 가득하다. 여행지에서 일부러 가지는 않는 곳들. 허름한 선술집, 버려진 항구, 인적 드문 빈민가의 시장이나 골목, 사창가 등등. 매끈하게 꾸며진 외관의 여행 엽서 같은, 그 곳의 삶이 아니라 우리네 삶처럼 신산하고 질척하며 땀에 절은 살내음이 물씬 풍기는 삶을 담는다. 


 어느새 여행이 떠도는 풍수처럼 제멋대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사실은 터키 이스탄불에서 시작해 수많은 도시의 인간 진창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인도 콜카타에 도착해 질리도록 악취를 맡고, 이제 슬슬 동남아시아로 떠나려는 단계에서  심호흡을 하고 싶어졌다.

(p. 249)

 생각해 보면, 여행은 심호흡을 하기 위해서다. 꽉막힌 일상의 악취에서 벗어나 낯설고 이국적인 곳에서 신선한 공기를 호흡하기 위해 떠나는 것이다. 하지만 후지와라 신야의 여행엔 그런 공기가 없다. 어딜가든 코 끝에 진하게 배여드는 건, 이 곳과 그리 다르지 않는 허무와 비애 그리고 고통의 진한 내음 뿐이다. 어떻게 보면, 그는 대지의 곳곳마다 감돌고 있는, 삶 자체에서 눅진하게 풍겨오는 악취를 맡기 위해 400여일의 여행을 떠난 것 같다. '인도 방랑'과 '티벳 방랑'에 이어 '방랑 3부작'을 완결짓는 '동양 방랑'은 그런 여행의 기록이다. 인간을 떠나 인간이 없는 곳에서 자유와 해방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한 걸음 더 인간 사이로 들어가 그들의 육신에 새겨진 삶이 남긴 생채기들을 더듬는 것. 자유가 아니라 속박의 의미를 헤아리는 것. 그것이 바로 '동양 방랑'의 기록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붙박이처럼 한 자리에 머물면서 힘겹더라도 자신의 방식으로 삶을 견디며 버티고 있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보게 된다. 때가 되면 연례 행사처럼 목을 매면서도, 구출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명랑하게 되는 여인이라든지, 낯선 손님이 식당에 찾아오면 무작정 합석해 손님에게 많은 음식을 사달라 하고는 모조리 먹어치우고 나중에 식당 주인에게 리베이트를 받는 거구의 이스탄불 여성 같은, 정말 그저 한 번 보고 스쳐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오래 머물면서 그 삶 깊숙이 들어가지 않고서는 볼 수 없는 삶의 모습들이 이 책엔 참 많이 나오는 것이다. 특히 저자가 앙카라에서 우연히 한 창부의 사진첩을 보고 사진 속 여성이 내뿜는 광기에 강한 인상을 받아 그 주인공을 찾아 앙카라의 온갖 곳을 헤매고 다니는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사실 그에게 여행이란 찾는 것이기도 했다. 그는 책에서 내내 냄새를 얘기한다. 어디를 가면 꼭 맡게되는 냄새가 있다는 것이다. 냄새, 그건 육신을 가진 존재가 내뿜는 살내음으로 저자에게 지금 자신이 서 있는 곳이 가상이 아니라 실상이라는 걸 알려주는 신호이기도 했다. 다시 말해 그에게 냄새란 실존의 증거였고, 깃털처럼 무작정 떠다니고 있는 것만 같은 자신의 발을 대지에 단단히 묶어둘 수 있는 중력 같은 것이었다. 그런 냄새의 출처와 만난다는 것. 그것이 그에겐 구원이었고 그런 면에서 1년 넘에 이어진 여행은 구도의 여정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앙카라에서 그가 했던 추적 또한 그가 여행을 통해 하고자 했던 것의 일환이었다. 그러나 그는 여자를 만날 수 없었다. 그리고 정말은 여자도 아니었다. 마침내 사진 속 여자를 알고 있는 남자를 만난 저자는 그에게서 그녀는 실은 성전환한 남자이며 이미 바다에 빠져 죽었다는 얘길 듣는 것이다. 일전에 저자가 보고서 정말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바다에. 거긴 해마다 많은 여성들이 목숨을 내던지는 곳이라면서...


 보는 건 겪는 것과 다르다. 저자에게 여행이란 어쩌면 그걸 깨닫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그러기에 그는 어디를 가든 매순간 자신의 상식과 가치관을 내려놓고 먼저 공감과 헤아림의 시선을 보내는지도 모른다. 앞서도 말했듯 그는 서울의 청량리도 여행한다. 때는 1981년의 겨울이다. 광주의 항쟁이 있고나서 1년이 지난 뒤의 서울. 그는 서울에 오자마자 택시 기사가 틀었던 라디오에서 우연히 듣게된 판소리에 매혹된다.


 전라남도는 한반도 남단에 위치하는, 일본으로 치면 현이다.

 판소리는 전라남도의 노래다. 예로부터 전라남도 사람들은 중앙으로부터 멸시와 학대를 받아왔고 지금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한다. 판소리는 그런 풍토에서 태어난 가시 돋친 잡초 같은 노래다. 주로 부조리에 대한 원한, 권력에 대한 강렬하고 외잡한 풍자를 담고 있다고 한다. 판소리는 전라도 사투리로만 불려진다.

 "작년에 폭동이 일어난 광주는 전라남도의 중심 도시죠?"

 "맞아요."

 "그럼 이마에서 피를 흘리던 그 청년들은 함께 목이 터져라 판소리를 불렀던 거군요."

 ".... 손님. 그런 이상한 말은 서울에 도착하면 함부로 입에 담지 않는 게 좋아요."(p. 244)


 그런데 그 때 광주는 어떤 곳이었던가? 그만한 비극을 당했으면서도 자신의 고통을 호소할 수 없었던 도시요, 아예 거기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것 자체가 폭력적으로 금지된 곳이었다. 그건 아무도 찾아와 주지 않는 버려진 육신이나 다름 없었다. 어쩌면 저자가 얘기하는, 청량리에서 저자를 느닷없이 덮쳐 여관으로 끌고 가 저자의 완강한 거부에도 불구하고 계속 성행위할 것을 강요했던 곰치 할멈은 광주를 비유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누구도 자신을 찾아와 주지 않고 보려 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라도 해서 자신이 여기 있다는 것을,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싶은 마음은 그 때의 광주도 다르지 않았을테니까 말이다. 이런 생각이 그리 틀리지 않다고 여기는 것은 저자가 곰치 할멈의 얘기를 이렇게 끝맺기 때문이다.


 방바닥에 굴러다니는 효자손이 눈에 띄었다. 그 낡고 반들반들한 대나무 손가락을 보면서 나는 잠에 빠져들었다. 몽롱한 의식 속에서 빗소리에 섞여 여자의 오열과 울음소리를 들은 것도 같다.(p. 461)


 책의 마지막에 실린 '여행의 빙점'이란 글에서 그는 말한다. '동양 방랑'은 아무리 낯선 곳에 가더라도 무심해지는, 그렇게 빙점이 되어버린 자신의 여행을 기사회생 시키기 위해 떠난 여행이라고. 그는 자신의 여행이 아무 것도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얼어붙어 버린 것을 인간을 피해 풍경만 찾아다녔기 때문이란 걸 깨닫고 '동양 방랑'에선 정반대로 인간을 만나는 것을 과제로 삼았다고 한다. 그렇게 눈 앞에 나타나는 모든 인간을 일생일대의 인연으로 여기고 소중히 대하며 변두리 유곽의 창녀에서 심산에 틀어박힌 스님까지 어떤 인간이든 철저히 사귀기로 했다고 한다. 이제야 왜 '동양 방랑'이 눈 보다 코를 더 자극했는지 이유를 알겠다. 이 책은 그가 자신에게 부여한 과제를 얼마나 충실히 수행했는가를 증명이라도 하듯 인간이 지닌 저마다의 살냄새로 자욱했기 때문이다. 그는 단언한다.


 누구에게나 빙점은 있다.

 반드시 찾아온다.

 인간의 빙점을 녹이는 것은 인간이다.

어쨌든 사귀어보라.

 '인간은 살덩이죠. 감정으로 가득한...' 


 여름이다. 많은 이들이 여행을 떠날 것이다. 그 중엔 저자처럼 여행의 빙점을 느끼는 분도 있을 것이다. 그런 분들에게 '동양 방랑'을 권해본다. 어쩌면 좋은 자극이 되어  빙점이 되어버린 여행을 저자처럼 기사회생시킬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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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동물원
진 필립스 지음, 강동혁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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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 필립스의 '밤의 동물원'은 감히 올해의 발견이라 부를 수 있을만한 소설입니다. 작년에 뉴욕 타임스 북 리뷰가 최고의 범죄소설로 꼽았다는 얘길 듣긴 했었어도 생소한 작가라 그리 큰 기대는 없이 읽었는데 과연 그런 평가를 얻을만한 작품이더군요. 작가의 이름은 진 필립스. 찾아보니 미국 작가더군요. 2009년에 'The Well and The Mine'로 데뷔했고 '밤의 동물원'은 2017년에 다섯 번째로 발표한 소설입니다. 일단 필력이 대단합니다. 시작부터 끝까지 긴장감을 조금도 늦추지 않은 채 몰아가는 힘이 있고 등장인물의 심리 또한 아주 세심하게 묘사하는데다 문장도 정말 좋더군요. 뭐라고 할까요? 한 권의 소설을 읽을 때 기대하는 재미를 모조리 다 채워주는 작품이라고 할까요? '밤의 동물원'은 그런 소설입니다. 그러니 주저없이 올해의 발견으로 꼽을 수밖에요.


 '밤의 동물원'의 원제는 'Fierce Kingdom'입니다. 번역하자면 '치열한 왕국'이라고 할까요? 사실 동물원에 어울리는 제목은 아닙니다. 동물원은 야생의 치열한 생존 경쟁에서 벗어난 동물들이 살아가는 곳이니까요. 그런데 왜 한국 제목은 '밤의 동물원'일까요? 그것은 소설의 무대가 정말로 밤의 동물원이기 때문입니다. 한데 왜 영어 제목에 'Fierce'가 들어갔을까요? 그건 세 명의 남자가 중화기로 무장하고 동물원에 있는 사람과 동물들을 무차별 학살하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콜럼바인 고등학교 총기 난사 사건'이 동물원에서 일어났다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소설은 학살이 벌어진 하룻밤 동안이 일을 그립니다. 링컨이라는 아주 어린 아들과 단 둘이 동물원에 놀러온 엄마 조앤을 주인공으로 해서 말이죠. 이야기는, 단순하게 말하자면, 조앤과 링컨이 동물원에서 마구잡이로 사람과 동물을 살상하는 세 명의 학살자에게서 살아남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소설은 이야기가 시작되는 오후 4시 55분부터 오후 8시 5분까지 시간 별로 진행되는데, 아무래도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단 한 순간도 긴장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학살자 눈에 조금이라도 들켰다간 자신은 물론 사랑하는 아들의 목숨마저 빼앗길테니까요. 소설은 그러한 위기적인 상황과 어떻게든 아들은 구하고픈 엄마의 절박한 심리가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야기에 몰입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죠.



 이 소설은 정말 재밌습니다만 재미가 다가 아니라서 더욱 올해의 발견으로 꼽게 만듭니다. 뭐랄까요? 아이를 키운다는 것, 부모가 된다는 것, 그리고 누군가를 믿는다는 것. 그런 것에 대해 참으로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때문에 저는 그랬습니다만, 중간과 마지막에 가슴이 먹먹해지는 부분까지 있었습니다. 엄마의 입장에서 소설이 진행되기에 현재 아이를 키우시고 계시다면 가슴에 와닿는 부분이 정말 많지 않을까 생각해요. 또한 이런 부분이 잠깐 잠깐 드러나는 조앤의 과거 회상을 통해(주로 조앤의 엄마가 자신에게 했던 것과 조앤이 링컨에게 했던 것과의 비교를 통해) 강조되고 있기도 하구요. 어쩌면 바로 그래서 제목이 'Fierce Kingdom'이 된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네요. 한 여성이 엄마가 되어 자식을 키운다는 것은 이 험한 세상에 치열하게 살아남는 것과 그리 다르지 않다는 의미로 말이죠. 우리는 얼른 과연 그럴까 생각하지만 작가는 잘 보여주죠. 우리가 세상을 그렇게 보고 있다면 그건 대낮의 동물원을 보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말이죠.


 대낮의 동물원은 우리 속의 동물들마저 한가로이 보일만큼 평화로워 보입니다. 우린 어쩌면 그런 평화를 잠시나마 맛보기 위해 동물원을 찾는지도 모르겠어요. 소설의 처음에서 링컨과 조앤이 함께 벌이는 히어로 놀이처럼. 소설은 그 세계를 명백하게 신화와 영웅의 세계로 설정합니다. 링컨이 가지고 노는 장난감이나 만드는 이야기 속에는 그런 의미가 깃들어 있지요. 신화와 영웅의 세계는 우리의 생각대로 흐르는 곳입니다. 거기서는 우리가 가진 믿음과 상식이 전혀 배반받을 일이 없지요. 악은 응징되고 정의는 실현되고 선함과 희생은 보답을 받습니다. 그러나 조앤과 링컨이 그 세계에서 벗어나 동물원의 출구 가까이 다가간 순간, 현실 세계는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게 드러납니다. 정의나 선함의 보상 따위 전혀 존재하지 않는, 잔혹함과 살상이 넘치는 약육강식의 세계라는 것이. 세상은 '밤의 동물원'이며 바로 그런 세계 속에서 사랑하는 아이를 키워야 한다는 것이. 소설 곳곳에서 드러나는 학살된 우리 속의 동물은 바로 그러한, 조앤이 세상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허상이 깨어진 것의 비유로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떤 면에선, 학살이 벌어지는 동물원은 조앤이 세상에 가지는 두려움이 반영된 공간으로도 보입니다. 아무래도 자식을 키우는 부모는 세상에 대해 많은 두려움을 가지기 마련입니다. 매일 벌어지는 범죄와 사고 소식에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테러와 전쟁 그리고 점점 심화되는 신자유주의를 보다보면, 내가 과연 자식을 잘 키울 수 있을까 하는 불안이 생기지 않을 수 없죠. 그 두려움과 근심이 조앤이 처한 동물원의 위기 상황으로 비유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볼 수 있는 것은 조앤이 동물원의 경험을 통해 성장하기 때문입니다. 초반의, 그저 불안에 떨며 어떻게든 링컨만 살리고 보자는 이기적인 모습에서 후반엔 위협과 위기에 당당하게 맞서고 아들이 아닌 남을 위해 자신마저 희생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죠. 결국 자신이 보다 강하고 이타적인 존재가 되지 않으면 불안에서 헤어날 길은 없다는 것을 소설은 보여주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불안을 이기는 힘은 바로 자기 내부에 있다는 것을 말이죠. 이것은 특히나 초반에 조앤이 핸드폰을 통해 남편에게 의지했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그녀는 성장하기 전, 계속 숨어 있으면서 핸드폰을 통해 남편이 어서 자신을 구해주기만을 바라는데요, 끝까지 남편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바깥이 자신을 구원해주길 바라는 마음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죠.


 아들이 이름이 하필이면 링컨인 것도 의미심장 합니다. 소설에도 흑인 노예 해방을 시켰던 대통령에서 그 이름을 따왔다고 밝히고 있더군요. 링컨이란 이름은 해방의 상징인 것입니다. 그러나 소설에서 이 이름은 역설적인 의미로 쓰였습니다. 초반에 보여주는 조앤과 링컨의 관계는, 링컨의 입장에서 해방 보다는 속박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나중에 자신에게 피난처를 제공하는 십대 흑인 소녀 케일린에 대해 조앤이 짜증내는 것(이 케일린은 링컨의 미래 모습으로 나오는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함께 숨어 있었던, 교사였다가 은퇴한 파월과 로비(학살자 중 하나)의 관계로 암시됩니다. 조앤은 물론 자기 엄마의 경험도 있어서 링컨을 아낌없이 사랑합니다. 그러나 링컨을 독립된 주체로 인정하지 않고 늘 자신이 직접 보호하고 지켜야 한다는 것에서 사실 조앤은 링컨을 속박한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이런 까닭에 조앤이 부모가 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 진정으로 눈 뜨는 순간, 링컨 역시 엄마와 떨어져 홀로 공포와 맞서는 것으로 연출된 게 아닐까 싶습니다.


 이렇게 '밤의 동물원'은 이야기의 재미도 재미지만 후반의 감동과 함께 부모가 된다는 것과 사람을 믿는다는 것을 아주 깊이 있게 헤아려 보게 만드는 소설입니다. 뭔가 긴 여운이 남는 소설을 바란다면 참으로 더할 나위 없는 추천작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네요. 무더운 여름 밤, 밤의 무더위를 잊게 해 줄 뭔가를 찾으신다면 어떨까요? '밤의 동물원'을 한 번 방문해 보시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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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국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1
가와바타 야스나리 지음, 유숙자 옮김 / 민음사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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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이 내린 날, 환한 아침 속에 드러난 눈밭의 나신(裸身)은 황홀한 꿈 같다.

 그것은 마치 범접(犯接)이 금지된 아름다움 같아서 어쩐지 발 하나 올리는 것조차 망설여질 지경이다. 그러나 잠깐의 망설임일 뿐. 하루의 밥벌이를 위해 기계적으로 움직여야 하는 일상 앞에서 삶이 가진 다른 모습을 조금 엿본 것 같은 순간은 오래된 잠자리의 날개처럼 쉬 바스러지고 만다. 오후의 자판기 앞에서 커피 한 잔을 들고 고된 몸을 벽에 기댈 때, 공허한 눈으로 담게 되는 하늘에 언뜻 그려질지언정. 그렇게 아련한 꿈이 된다. 여기에 '겨울의 환(幻)'이란 이름을 붙여본다. 찰라(刹那)로만 존재하고 그렇기에 서글픈 아름다움을.


 그런 겨울의 환(幻)에 어울리는 소설이 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이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라는, 일본 소설 중에서도 상위에 손꼽히는 아름다운 문장으로 시작하는 이 소설은 니키타 현의 애치고 유자와 온천을 배경으로 겨울마다 잠깐 이뤄지는 시마무라와 고마코의 사랑을 담는다. 하지만 그들의 사랑은 그렇게 절절하지 않고, 늘 기약없이 만났다 무심히 헤어지는 것으로 꽤나 담백하다. 바로 그 담백함, 선뜻 초연해질 수 있는 관계이기에 시마무라는 겨울이 될 때마다 불현듯 잊지 않고 고마코를 찾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둠과 흰눈의 대비처럼 전혀 현실 같지 않은 그 곳에서 문득 무책임할 수도 있는 사랑이라 고마코로 향하는 발길은 계속되는 것이리라. 휴가 때 단골로 찾아가는 여행지처럼.




 시마무라에게 그것은 모든 현실의 중력에서 벗어나는 비현실의 향유요, 무중력의 탐닉이지만 만날 때마다 달라지는 고마코의 삶은 시마무라로 하여금 점점 더 향유와 탐닉을 못하게 만든다. 발길이 거듭될수록 설국의 몽환은 꿈이 아니라 질척한 현실이 되고 시마무라 역시 그저 잠깐 머물다 훌쩍 떠나는 여행자에서 소작인과 같은 책임을 가지는 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고마코가 그랬고, 요코가 그랬듯이.


 시마무라에게 설국은 결국 녹아 흔적없이 사라질 수 있기에 아름다운 곳이었지만 설국의 눈은 녹지 않는다. 겨울은 언제까지나 이어지고 허무에서 생의 의미를 찾았던 시마무라를 계속해서 배반한다. 그의 발은 그 곳에서 끝내 얼어붙고 마는 것이다.


 시마무라는 공허한 벽에 부딪는 메아리와도 같은 고마코의 소리를, 자신의 가슴 밑바닥으로 눈이 내려 쌓이듯 듣고 있었다. 이러한 시마무라의 자기 본위의 행동이 언제까지나 지속될 수는 없었다.(p. 134)


 그 예감은 맞아 떨어진다. 끝내 설국은 시마무라에게 커다란 화염으로 작별을 고하는 것이다. 요코의 죽음과 고마코의 절규와 함께.


 동시에 우리도 알게 된다. 겨울의 환(幻)은 찰라(刹那)이기에 동경과 그리움을 낳는다는 것을. 순간의 향유만이 환(幻)을 미()로 남게 한다는 것을. 그것에 탐닉하여 집착하는 순간, 환(幻)은 사라지고 동경 속에 솟아난 우리들의 날개는 여지없이 꺾이며 그 빛 또한 이제는 영원히 다시 오지 않을 것이 되고 만다는 것을. 그렇게 되는 것은 시마무라가 잘 보여주었듯 환(幻)에 취하고자 하는 마음엔 자기 본위의 욕망 또한 서려 있기 때문이리라.


 순수는 때묻기 쉽다고 한다. 분명 오직 자신만을 위한 것이기에 그럴 것이다. 책임보다 강한 게 없듯이, 방기보다 연약한 것도 또 없으니까 말이다. 어쩌면 그랬기에 작가는 설국 내에서의 동선(動線)을 자주 지워버리는 지도 모른다. 시마무라와 고타로. 모두 많이 움직이지만 그 과정은 나오지 않는 것이다. 그들은 움직이기 보다는 출몰한다. 유령처럼. 움직이고 있다고 느껴질 때는 오직 시마무라가 설국에서 떠나올 때 뿐이다. 현실이라는 책임의 장소로 다가갈 때라야 시마무라는 실존의 무게를 얻는 것이다. 얼른 이러한 문장이 떠오른다. 책임이 실존을 부여한다.


 시마무라는 언젠가 고마코와 헤어져 홀로 기차를 타고 돌아오다 연인인 줄 알았던 한 늙은이와 젊은 여인이 그저 같은 열차에 탔기 때문에 말을 나눈 사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는 울음을 터뜨릴뻔 한 일이 있다. 아무리 아름다운 것이라 하여도 더는 아무 의미도 가지지 않게 되는 것을 실감한 탓이다. 그는 허무에 절망한다. 너무 절망하기에 허무에 탐닉한다. 그러나 그 허무가 정작 자신에게서 비롯된다는 건 알지 못한다. 그 안에 자신만 있기 때문이란 걸.


 시마무라는 고마코와 함께 밤하늘의 은하수를 본 적이 있다. 시마무라 눈에는 그저 예쁜 은하수였지만, 고마코의 눈에는 눈이 시려서 눈물이 나는 아름다움이었다. 시마무라는 그런 고마코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다가 고마코가 유코의 시체를 껴안고 절규할 때, 그 은하수가 자신에게로 육박하고 있음을 느낀다. 소설은 그것으로 끝이 나나, 분명 나는 시마무라가 왜 고마코가 별 거 아닌 자신을 좋아하는지, 그 이유를 깨달았으리라 본다. 고마코의 심미안 자체가 달랐다는 것을. 자신밖에 없는 시마무라의 심미안은 표면의 현상만 보지만, 타인에 대한 책임으로 삶을 거쳐온 고마코의 심미안은 그 내부에 깃든 것을 보고 그것을 형성한 전체를 헤아린다는 것을. 그렇게 그는 절감했을 것이다. 진짜 아름다움은 홀로가 아니라 함께 있을 때 볼 수 있다는 것을.


 이처럼 설국은 환(幻)을 얘기하지만 그것의 중독을 슬쩍 경고하는 소설이다. 일상의 도피처가 아니라 오히려 그런 마음을 추스리고 생을 다시 짊어지게 하는 것이 진정한 환(幻)이라고 말이다. 왜냐하면 환(幻)은 시선으로 대상을 착취하는 데서 오는 게 아니라 대상과 내가 더불어 함께 한 경험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삶에는 출근 길에 밟아야 하는 나신(裸身)의 눈 같은 것들이 있다. 무심코 흥얼거리는 노래 한 소절이나 기울이는 한 잔의 술에서 문득 떠올리게 되는 아름다운 추억들 말이다. 짧고 다시 돌아올 수 없으며 긴 여운을 남긴다는 점에서 그런 추억 역시 겨울의 환(幻)이라 할 만하다. 그런데 우리 모두는 경험한 적이 있지 않은가? 삶의 둔중한 타격에 무릎이 꺾일 때마다 때로 그런 추억들이 절망하는 마음을 바로 잡아주고 다시 내일에 대한 희망으로 우뚝 서게 해주었던 일이.

 '설국'에 한껏 배인 유려함은 바로 그러한 경험의 진짜 아름다움과 소중함을 일러주기 위한 것이라 생각한다.

 관통과 축적이 참된 아름다움을 만들고 그렇기에 삶에서 그냥 버려지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지금 자신이 서 있는 자리가 설국이라 여기는 것. 이것이 정녕 작가가 우리에게 주고자 하는 눈(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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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임메카 2018-06-29 17: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리뷰 잘 읽었습니다. ^^

˝설국”은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일본인 작가로서는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받게 해준 작품이라는 것에서 의의가 큰 작품이죠.
소설의 배경이 니가타 현이라는데, 그 곳의 유자와 온천에 머물면서 쓴 소설이라 겨울에 여행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적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저희 카페에 ˝설국˝을 소재로 한 모임도 있고 그 외에도 영화나 독서모임에 대한 여러 정보가 있어요. 관심있으시면 한 번 들려보세요.

˝설국˝ 선정모임
https://cafe.naver.com/moimmecca/3327

모임메카 카페
http://cafe.naver.com/moimmecca
 
햇빛 어른거리는 길 위의 코끼리 알마 인코그니타
우밍이 지음, 허유영 옮김 / 알마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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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햇빛 어른거리는 길 위의 코끼리'라는, 참으로 시적인 제목을 가진 이 소설은 대만 작가 우밍이가 썼습니다. 우리나라엔 처음 소개되는 작가인데, 대만에선 꽤 유명한 작가로 2018년엔 '자전거 도둑'으로 맨부머상 인터내셔널 후보에도 올랐다고 합니다. '중화상창'이라는, 30년간 타이뻬이의 랜드마크로 있었다가 지금은 사라진 상가를 중심으로 10개의 단편을 옴니버스로 엮은 소설입니다. 단편들 모두 중화상창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이들이 주인공인데, 그들이 어린 시절에 보았던 육교와 거기서 마술을 벌이던 마술사가 공통적으로 나옵니다. 말하자면, 그것이 이 소설의 핵심인 것이죠. 회상의 색채가 많이 가미되었기에, 읽다보면 얼마전 우리나라에서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드라마 '응답하라 1988' 느낌이 많이 납니다. 아니, 정말로 '대만판 응답하라 1988'로 불러도 좋을 것 같아요. 드라마만큼 밝지도, 사람들 사이의 정겨움은 없지만 이제 사라져 버린 옛 것에 대한 그리움이 이 소설엔 어린 시절 골목에 가득 퍼지던 김치 찌개나 된장 찌개 내음만큼이나 흠뻑 배여들어 있으니까요. 이야기는 결코 쉽지 않고, 마술사가 나오는만큼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넘나듭니다만 그래도 자신합니다. 한 번 잡게 되면 몰입해 읽을 수밖에 없는 매력적인 이야기란 것을.





 소설은 예전에 내 세계의 중심을 차지했던 것이 어느 순간 홀연히 사라져 그것이 마음에 남긴 여파 같은 것을 뒤쫓고 있습니다. 이미 사라져 버린 '중화상창'이 소설의 중요한 무대가 되었다는 것 자체가 그것을 나타내고 있죠. 등장인물들에게 과거란, 도저히 건너갈 수 없는 저 너머의 땅을 멀리서 바라보는 것과 같습니다. 다시는 그 곳으로 갈 수 없는데 해까지 저물고 있어 이제 볼 수도 없게 되는 것이죠. 그러나 그 곳은 한 때 자기 삶의 중심을 차지했던 곳. 흐르는 시간처럼 쉽게 망각 속에 던져줄 수 없습니다. 그건 곧 거기에 속했던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과 같으니까요. 그러므로 그들을 거기에 가 닿고자 합니다. 마치 중화상창의 상가 양쪽을 이어주던 육교처럼. 건널 수 없는 곳을 건너게 해 준 그 육교처럼 말이죠. 소설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육교엔 바로 그런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현실에선 불가능한 과거로의 회귀를 마술처럼 가능케 하는 것. 그래서 마술사가 모든 단편마다 등장하는 게 아닐까 싶어요. 기억이란 때로 마술 같죠. 늘 잊고 살았었는데, 어느 날 불현듯 떠오른 기억이 언제 잊고 있었냐는 듯 바로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그 때의 시간 속으로 되돌아가게 하니까요. 마술이 일상을 장악하는 현실의 중력을 없애버리듯이, 기억은 망각에 붙들린 과거를 자유롭게 합니다. 거기서 우리는 묻습니다. 오늘의 내가 고통스러운 건, 과거의 나에게서 무엇을 잃어버렸기 때문일까 하고.


 그런 질문 또는 파문을 조용히 만드는 소설입니다. 그것도 조용히. 마치 천에 스며드는 염료와 같은 속도로.


 '새'의 단편엔 1979년이란 시간이 명시되는데, 그래서 이 소설을 대만의 역사와 연계시켜 해석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1979년은 대만이 중국 때문에 미국과의 수교가 끊어진 때이거든요. 밖으로 날아갈 수 있는 날개가 꺾이고 새장에 갇히는 시기인 것이죠. 소설 역시 새를 사랑해 계속 키웠으나 그 어떤 새도 오래 기를 수 없었던 아이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모든 단편마다 다른 마술을 보여주는 마술사는 그 단편에선 죽은 새를 살리는 마술을 보여주는데, 마술이 성공하기 위해선 누가 새에게 절대 손을 내밀어선 안된다는 것을 강조하죠. 단편의 주인공도 마술사를 믿어 죽은 새를 되살리는 마술을 하는데, 오빠가 결정적인 순간 손을 내밀어 실패하고 맙니다. 여기서 왜 하필이면 손이 강조되는가? 그건 수교를 생각하면 바로 답이 나오죠. 나라가 외교 관계를 맺을 때 가장 먼저 하는 것이 서로 손을 내밀어 하는 악수니까요. 아무도 잡아주지 않는 내민 손이 그대로 새의 죽음과 연결되는 것에서 수교 단절말고 달리 뭘 생각할 수 있을까요?


 이런 식으로 대만 역사를 알고 있으면 여기에 실린 단편들이 하나의 알레고리로도 읽힐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돌사자와 같은 소재도, 자살이나 방화 혹은 죽음으로 이르는 연애 같은 이야기도 과거 대만 역사가 남긴 것을 슬쩍 암시하거나 드러내고 있거든요. 일일이 다 밝히면 글도 너무 길어지고 직접 소설을 읽을 때 얻게 되는 재미가 반감되기에 '새'밖에 설명할 수 없는 것이 조금 유감이네요. 그러니까 단순히 추억을 회상하는 이야기는 아니라는 거죠. 그래서 비록 우리가 대만인도 아니고 중화상창에 대한 아무런 추억이 없더라도 이 소설을 재밌에 읽을 수 있는지도 모르겠어요. 저는 그랬습니다. 꽤 인상 깊게 읽었어요. 우밍이란 이름을 뇌리에 단단히 새겨둘만큼. 그의 다른 작품도 만나보고 싶네요. 소설의 주인공이 중화상창의 마술사에게서 잘 떠나지 못했듯, 저 역시 한동안 우밍이가 만나게 해 준 세계의 여운 속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이 소설을 읽고나서 왠지 이 노래가 많이 생각나더군요. 가사에 흐르는 정조가 소설과 비슷해서 그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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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국
엠마뉘엘 카레르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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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놀랍도록 술술 읽힌다. 이게 참 대단해 보이는 것이 담고 있는 게 예수와 초대 교회가 중심이 된 '신약'이라고 하는 사람에 따라서는 따분해서 선뜻 손이 가지 않는 소재인데다 분량도 무려 700 페이지에 가까운데도 그렇다는 것이다. 읽다보면 이 둘은 아무런 장애가 안된다. 그저 비탈길을 빠르게 굴러가는 둥근 돌마냥 이 뒤엔 또 어떤 흥미로운 이야기 거리가 있을까 하는 호기심이라는 동력에 힘입어 끝까지 내처 읽을 뿐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들에겐 '콧수염'으로 유명한 프랑스 작가 엠마뉘엘 카레르가 2014년 발표한 '왕국'이란 소설이다.


 '왕국'이란 제목에서부터 이 소설이 기독교에 대한 것이란 걸 짐작할 수 있다. 주로 바울과 루카를 다룬다. 그것도 픽션의 형식이 아니라 르포 형식에 가깝게. 자전적인 경험과 관련된 많은 자료가 인용되어 있어 어떻게 보며 에세이로도, 또 어떻게 보면 인문서로도 보일 수 있는 작품이다. 한 마디로 카멜레온. 그만큼 다양한 색채로 자유분방하게 진행되기에 몰입력이 강한 지도 모르겠다. 이야기는 본편이 되는 4부와 하나의 프롤로그 그리고 에필로그로 이뤄져 있다. 프롤로그에선 이 소설이 무엇을 주제로 하고 있는지 보여준다 .바로 '믿음'이란 걸. 1부인 '위기'에선 자신이 어떻게 '믿음'이란 주제에 천착하게 되었으며 하필이면 왜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대상으로 소설을 쓰게 되었는지를 불현듯 자신에게 찾아온 오래도록 글을 쓰지 못하는 슬럼프와 그것을 계기로 열심을 다하게 된 신앙 생활과 엮어 말해준다. 2부는 제목처럼 '바오로(사도 바울)'에 대한 이야기다. 루카의 '사도행전'을 바탕으로 그가 어떤 심정에서 바울의 이야기를 써내려 갔는지 말하고 있다. 이왕 '루카'가 나온김에 나도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거기에 대한 이야기로 바로 들어가려 한다.




 신약에는 유명한 네 개의 복음이 있다. 모두 예수의 행적을 대상으로 한 것으로 그 중 '누가복음'은 가장 이채로운 빛을 지닌다. 누가(소설에선 루카)는 생각해 보면 참 특이한 복음 작가다. 무엇보다 그는 다른 복음 작가들과 달리 예수와 동시대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예수가 세상에서 사라진 뒤 많은 시간이 지나고서야 예수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유대인이 아니라 이방인이었다. 거기다 직업이 의사로 지식인이었다. 그것을 증명하듯, 누가 복음은 가장 유려하고 세련된 그리스 문체로 씌어졌다. 그는 다른 작가들처럼 예수의 그 어떤 이적도 눈으로 본 적이 없고 말씀도 귀로 들은 적이 없다. 그는 다만 예수를 풍문과 기록으로만 접했다. 오늘날 우리들과 똑같이. 그 때만 해도 예수의 존재는 그리 크지 않았다. 그저 변방에 홀연히 나타났다 사라진, 오늘날로 치면 뭐랄까 '구루' 같은 존재였다. 


루카는 그런 존재의 이야기를 우연히 들었다. 엠마뉘엘 카레르의 표현대로 백인 엘리트가 어쩌다 동방에서 왔다는 불교를 접한 것과 같았다. 요즘 백인들이 불교에 대해 가지는 흥미 그대로 그 역시 예수라는 존재에게 흥미를 가졌으며 직접 현장으로 가 살펴 볼 생각을 했다. 그렇게 해서 세상에 나온 것이 바로 '누가복음'이었다. 이 소설이 천착하고자 하는 '믿음'과 관련해서 말하자면 루카에겐 믿음의 근거라는 게 없었다. 그건 외부에서 주어진 게 아니었다. 오로지 스스로 구현한 것이었다. 그가 믿기로 결정했기에 형성된 믿음이었다. 그런데 그런 믿음의 결실이 지금은 네 복음서 중의 하나로 당당히 자리잡고 있다. 세상의 다른 많은 이들에게 오래도록 믿음의 근거가 되고 있다. 이건 아이러니인가? 아니면 희망 혹은 절망인가?


 700 페이지를 관통하는 질문은 이것 단 하나다. '믿음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어떤 실체를 지향하는 마음의 움직임인가? 아니면 외부의 그 무엇도 필요로 하지 않는 순전히 혼자만의 결단인 것일까? 그것도 아니면 확신과 의심 사이를 늘 아슬아슬하게 줄타기하는 게 숙명으로 주어진, 오히려 인간이 가진 내적 한계를 드러낼 뿐인 걸까? '왕국'은 믿음이 가진 이러한 다차원적인 면모를 엠마뉘엘 카레르 자신이 직접 화자가 되어 하나하나 풀어가는 이야기라 할 수 있다. 자신과 가장 닮은 '루카'를 아리아드네의 실처럼 사용하면서...


 이렇게 보자면 1부에 가득 재현되고 있는 작가 자신의 경험담은 결코 본편과 유리된 게 아니다. 그 경험 모두가 실은 믿음이 가진 이러저러한 모습에 대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로 오직 '필립 K 딕'을 좋아한다는 이유로 채용한 자식의 보모 이야기가 그렇다. 그녀는 보모가 되자마자 면접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어 작가를 당황케 만든다. 작가는 그녀에 대한 것을 그녀의 전 고용인인 미국 외교부 직원에 대해 알아보기까지 하면서 고용했는데, 보모는 완벽하다는 그들의 말과 너무나 달랐던 것이다. 보는 것(이적)과 들은 것(복음)과 너무 다른 실체로 집약할 수 있는 이 이야기는 그대로 카레르가 신앙에 대해 가지는 불안과 맞아떨어진다. 그리고 이 보모에게 집약된 의혹은 그대로 소설 후반 루카의 복음(4부)으로 이어진다.


 나는 예수가 부활했다고 믿지 않는다. 나는 한 인간이 죽은 자들 가운데서 돌아왔다고 믿지 않는다. 다만, 사람들이 그걸 믿을 수 있다는 사실이, 나 자신도 한때 그걸 믿었다는 사실이 날 궁금하게 만들고, 날 매혹시키고, 날 불안하게 하고, 내 마음을 뒤흔들어 놓는다(어느 것이 가장 적합한 표현인지는 모르겠다.) 내가 이 책을 쓰는 목적은 내가 더 이상 부활을 믿지 않게 되었기 때문에, 그것을 믿는 이들보다, 그리고 그것을 믿었던 나 자신보다 더 잘 안다고, 더 똑똑하다고 생각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나는 나 자신을 너무 두둔하지 않기 위해 이 책을 쓴다.(p. 389)


 최근 나는 카레르의 이 말을 떠올리게 만든 두 개의 뉴스를 공교롭게도 같은 날 들었다. 하나는 세간에 '무안단물'로 유명한 이단인 '만민중앙교회'의 담임 목사가 여러 여신도를 성추행 하고 돈으로 입막음 했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이스라엘 병사가 팔레스타인인 비무장 민간인을 저격하고 환호하는 것이었다. 하나같이 과연 믿음이란 게 무엇인가 되묻게 만들었다. 하나는 믿음(목사가 아니라 신도들을 말한다.)이 범죄를 방관하며 조장하고 있었고 다른 하나는 믿음이 괴물로 만들고 있었다. 맹신 또는 광신 그리고 확신만큼 위험한 것도 또 없다는 것을 이 두 뉴스는 잘 보여준다. 믿음은 결코 이성의 제어에서 놓여서는 안된다는 것을 말이다. 사실 믿음이란 확신을 지양해야 할지도 모른다. 사람의 인식에는 엄연한 한계가 있다. 신이 아닌 이상 우리는 모든 것을 알 수가 없다. 확신은 온전히 인식하고 판단할 때라야 비로소 가능하지 않을까? 의심 없는 상황이 살아가는 데는 편안함을 주겠지만 역사나 주위에서 흔히 보듯 결국은 스스로 어리석게 만드는 길이며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르게 한다. 카레르는 소설에서 예수가 사람들이 생각하는 모든 상식을 전복시켰다는 것을 강조한다. 특히 복음서에서 예수가 들었다는 비유가 그러하다. 서로 다른 노동 시간을 한 일꾼들에게 동일한 달란트를 주는 것이나 '돌아온 탕자'(도덕적으로 살아온 99명 보다 비도덕적으로 살아온 1명의 영혼은 더 귀중하게 여기는 것)의 이야기는 예수의 왕국이 세상의 꼴지가 거기선 1등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제껏 우리가 알아왔던 합리와 가치와 전혀 다르게 운영된다는 것을 증언하고 있다.


 이러한 전복이 믿음에도 그대로 해당되는 것이 아닐까? '왕국'의 후반부는 그것에 대해 짚고 있는 것 같다. 무턱대고 믿는 게 믿음이 아니라 끊임없는 의심과 회의 속에서 이성으로 열심히 헤아리면서 그것을 바탕으로 스스로 구축해 나가는 믿음. 그러면서도 그렇게 나온 믿음을 오로지 하나의 가능성으로 여기고 또 다른 길이 열리면 또 언제든 그것을 받아들이며 그리로 훌쩍 나아갈 수 있는 믿음. '왕국' 전체에 오롯이 새겨진 카레르 자신의 지적 탐구는 그러한 믿음의 모습을 물씬 보여주고 있다. 생각해 보면 바울은 레닌과 똑같이 말로만 존재했던 것을 세계에 실재로 구현한 자였다. 왜 지젝이 레닌을, 알렝 바디우가 바울에 천착하는지 알 듯 하다. 그들의 행로는 누구나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이념의 구현이 그들의 말만큼 불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실례다. 신자유주의 시대에 바울과 레닌이 꿈꾸었던 것은 이제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이들이 많다. 그러나 지금의 세상과 그리 다르지 않았던 바울과 레닌의 시대에서 그들 역시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고 누구도 가능하지 않았다고 말했으나 그들은 자신이 믿었던 세계를 만들었다. 이는 루카가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썼던 것과 그리 다르지 않다.


 믿음은 때로 기적을 만든다. 그러나 어떤 믿음이어야 할까는 늘 물음의 상태로 남는다. 바울이 자신의 세계를 세울 수 있었던 것은 예수의 위대함 때문이 아니라 그를 믿었던 신자들이 로마인들은 상상할 수도 없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카레르도 소설에서 잘 보여준 것처럼 신자들은 자신이 가진 것을 없는 이들과 아낌없이 나누었고 존중과 배려가 삶의 기본 태도로 배여 있었다. 말씀이 아니라 그 말씀을 그대로 따르는 삶이 결국은 기독교가 로마를 지배하게 된 궁극적인 원인이었다. 당시 로마를 생각한다면 이건 기적이었다. 그런 기적을 믿음이 만든 것이다. 삶이 뒷받침된 믿음이었기 때문에.


 하지만 지금의 믿음은 본질이 아니라 부수적일 때가 많다. 돈 혹은 권력이라는 보다 상위의 목적을 위해 봉사하는 수단에 지나지 않는 믿음. 그러므로 기독교는 내내 찌푸린 눈쌀과 조롱의 대상이 되고 때로 범죄와 학살을 태연히 저지르는 괴물까지 양산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신이 인류에게 점점 장애가 되고 있는 상황에서 엠마뉘엘 카레르의 '왕국'은 지금 당신의 믿음은 어떠한가를 매섭게 묻고 있다. 겉으로 드러난 논란에 집중하기 보다는 배후에 일관되게 흐르는 작가의 목소리에 귀기울일 때 작품이 가진 온전한 의미가 드러나며 당신의 대답 또한 찾을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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