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크바의 신사
에이모 토울스 지음, 서창렬 옮김 / 현대문학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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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은 때로 예기치 않은 곤경을 가져다 준다.

 1922러시아의 유서 깊은 가문 출신인 로스토프 백작에게 그런 일이 일어났다볼셰비키가 혁명에 성공하여 정권을 잡자 그를  호텔의 스위트룸에 평생 가둬버린 것이다그는 죽을 때까지   발자국도 호텔을 떠날  없다추사 김정희가 그랬고 버마의 아웅산 수지가 그랬듯이한정된 공간에 못처럼  박혀 버린 것이다미국 작가 에이트 토올스 소설'모스크바의 신사' 이렇게 시작한다제목의 신사는 당연하게도 로스토프 백작이다그런데 이런 시작을 보노라면 조금 걱정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그도 그럴 것이  책의 분량은 무려 723페이지니까 말이다 곳에서 내내 갇혀 살아야 하는 자를 가지고 이만한 길이의 이야기를 과연 계속 흥미과 재미를 느끼면서 읽도록   있을까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하지만  어려운 것을 에이트 토올스는 해낸다그것도 사람만이 아니라공간까지 호텔을 벗어나지 않으면서 말이다한정된 사람과 공간을 가지고 이토록 풍성하고 흥미로운 얘기를 자아낼  있다니 실로 입이  벌어질 수밖에 없다겨우  번째 작품이라는 말에  벌어져 버린다.


 소설을 읽으면 역시 강하게 떠오르는 것은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주인공이 이름이 '전쟁과 평화' 나왔던 로스토프 백작 이름 그대로이고 호텔의 고양이 이름까지 역시  소설에 나왔던 '쿠투조프'라서  그렇게 된다톨스토이의 로스토프는 소설의 마지막에 자신의 밑에서 일하는 농부들을 사기꾼이라며 불신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에이트 토올스의 로스토프는 그와 완전히 정반대의 모습을 보여줘서 재밌다계층과 나이를 불문하고  예의를 지키며 배려하고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 진솔한 우정을 나누는 것이다혹시 에이트 토올스는 '전쟁과 평화' 로스토프 백작이 계속 나이를 먹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 속에서 자신의 로스토프를 빚었던 것은 아닐까진실은 모르겠지만 어쨌든 ‘전쟁과 평화에서의 로스토프와  소설의 로스토프에게서 비슷한 점이 있는  사실이다. ‘모스크바의 신사 로스토프에게 가장 커다란 트라우마를 만들게  계기인 도박 사건 역시 ‘전쟁과 평화 로스토프도 겪는다재밌게도 ‘모스크바의 신사에선 도박에 이겼지만, ‘전쟁과 평화에선 함정에 빠져 계속 잃는다그런데 도박을 하는 동기는 같다. ‘모스크바의 신사에선 로스토프가 복수를 위해 도박을 벌였지만, ‘전쟁과 평화에선 로스토프에게 복수하려는 자가 도박으로 끌어들인다.


 사정이 이러하다 보니전쟁과 평화 주제와 ‘모스크바의 신사 주제가 서로 이어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전쟁과 평화 주제는 역사의 거대한 움직임인 전쟁과  개인의 사소한 삶이 결코 유리되어 있지 않다는 것으로 실은 우리 모두가  같은 거대한 운명 공동체를 이루기에 나밖에 모르는 협소한 시야보다는 다른 모두를 아우르는 넓은 시야를 지닐 것이며 닥쳐온 불행이나 고난이 있더라도 기나긴 삶의 시간 속에서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가질지는 누구도   없으니 섣불리 낙담하거나 좌절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모스크바의 신사 그와 비슷한 말을 들려준다.

 우선은 불현듯 닥쳐온 고난이 그렇다주인공 로스토프에게 닥쳐온 것은 전쟁만큼이나 느닷없고 비극적이다보통 사람이라면 내내 실의에 빠져 주검처럼 살만한 일이다그러나 로스토프는 그러지 않는다비록 거할  있는 곳과 움직일  있는 거기다 말할  있는 사람이 턱없이 한정되어 있다고 해도 오히려 거기서  풍부한 드라마와 깊고도 친밀한 관계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사람이 환경에 쉽사리 지배되지 않는다는 것을 ‘모스크바의 신사만큼 생생하게 알려주는 소설은  없을  같다설령 그것이 제아무리 척박한 환경이라도 말이다.


 그렇지만 물론 아무나   있는 일은 아니다로스토프가 그럴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자신을 주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그는 아무리 갑작스럽게 맞딱드린 변화라 해도 과거의 권위나 명성에 기대어 변화를 거부하지 않았다그저 겸손하게 온전히 받아들였다.


"시대가 해야  일은 변화하는 것입니다할레키 그리고 신사가 해야  일은 시대와 함께 변화하는 것이지요."(p. 122)


 이러한 겸허와 존중의 태도는 그를 감금시켰던 볼셰비키와는 얼마나 다른가?

 그들은 자신의 뜻에 따르지 않거나 맞지 않으면 로스토프에게 했던 것처럼 감금시키거나 숙청시켜 버리는  타자를 대하는 유일한 태도였다오로지 자신의 틀을 타인에게 절대적으로 강요할 개인이 가진 개성은 전혀 용납하지 않았다고통 속에서 거지처럼 유랑했던 로스토프의 친구 시인이  대표적인 사례다그가 하필이면 시인으로 설정된 것도 시야말로 개인의 독립적인 개성이 가장  드러나는 곳이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싶다.


 그렇다면  소설엔 뚜렷한 하나의 전선이 존재하는 셈이다.

 얼른 볼셰비키  로스토프의 싸움이라고 해도 불러도 좋을 정도로 개인을 지우기 위해 익명화 시키려는 세력과 반대로 개인이 지닌 고유한 개성을  드러내고 지켜주려는 로스토프가 만드는 전선이다이런 전선은 볼셰비키가 와인의 라벨을 모조리 지워버렸던 에피소드에서 선명하게 드러난다거기서 로스토프는 볼셰비키가  짓에 대해 이렇게 안타까움을 표시한다.


 안에  와인이 무엇이든 간에 이웃한 다른 와인과는 같지 않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같기는커녕 백작의 손에 들린  속의 내용물은  국가나  인간과 마찬가지로 독특하고 복잡한 역사의 산물이다와인의 색깔맛은  와인이 태어난 지역의 특유한 지형과 고유한 기후를 나타낼 것이다. (...) 그랬다 병의 와인은 시간과 공간의 최종 추출물이고개성  자체의 시적 표현이었다그런데도 이곳에서 와인은 익명의 바다로평균과 무지의 영역으로 던져졌다.(p. 232 ~ 3)


 이처럼 볼셰비키는 익명화의 바다 속에 개인을 침몰시키려 한다그런 볼셰비키에 맞서 로스토프는 개인의 고유한 개성을 건져내려 애쓴다바로 이런 싸움이 소설에 존재하는 것이다


 이것을 고려하면 작가가  하필이면 로스토프가 하나의 장소에 계속 부박히는 설정을 했는지도 어느 정도 이해가 간다로스토프가 결코 떠날  없는 호텔이라는 공간 자체가  개인의 모습을 상징하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호텔이란 공간은  사람의 삶이다 삶을 어떻게 바라보는가바로 그것에서 볼셰비키와 로스토프는 차이가 난다볼셰비키가 그러하듯이상대의 삶을 존중하지 않고 그저 이용만 하려는 자의 눈에  개인은 삶의 깊이와 폭을 전혀 지니지 않는 얇은 평면으로만 보일 것이다어떤 라벨을 붙여도 상관없는.

 반면에  개인이 가진 독립적인 개성과 삶을 최대한 존중하고 배려하는 사람의 눈에  개인은 저마다 자기의 폭과 깊이를 옹골차게 가지고 있는 것을 보일 것이다소설에서 로스토프 백작이 식당에서 풍경을 스케치하고 있는 건축가 지망생에게 이렇게 말했듯이.


 "방이라는   안에서 벌어진 모든 일들의 총체라는 말씀이군요."

 "바로 그거라고 생각해요." 백작이 말했다. " 특별한 방에서 이루어진 교류의 결과가 무엇인지는 정확히 꼬집어 말할  없지만 교류 덕분에 세상이 나아졌다는 것만큼은 확신할  있습니다."(p. 522)


 지배인 안드레이가 어느   보여준 놀라운 저글링 실력이나 지배인과 요리사 그리고 로스토프가 공모하여 러시아 전통 요리를 몰래 만든 것도 이러한 것의 표현이다 사람의 삶이란 함부로 라벨을 붙일  없는 존재라는 것을 선명하게 드러내기 위한.


 그리고 바로 이러한 삶의 무규정성불확실성이  사람의 삶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존중해야만 하는 이유가 된다또한 우리가 환난이 닥쳐왔다고 해서 쉽게 무너지거나 희망을 놓아버려서는 안되는 이유이기도 하다소피야의 말대로.


 아버지는 우리 인생은 불확실성에 의해 움직여 나아가는데그러한 불확실성은 우리의 인생 행로에 지장을 주거나 나아가 위협적인 경우도 많다고 했다그러나 우리가 관대한 마음을 잃지 않고 보존한다면 우리에게 극히 명료한 순간이 찾아들 거라고 했다우리이게 일어난 모든 일들이 갑자기 하나의 필수 과정이었음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순간이 찾아든다는 것이었다우리가 앞으로 살아가야  삶으로 꿈꿔온 대담하고 새로운 삶의 문턱에  있을 때조차도 그렇다는 것이다.(p. 687)


 이러한 말을 ‘모스크바의 신사 소설 자체로 놀랍도록 온전히 재현한다 사람에게는 얼마나 무궁무진한 힘과 가능성이 있는지그렇기에 우리는 삶의 완전히 끝날 때까지  어떤 어려움에 처하더라도 걸어가는 것을 포기해서는 안된다는 것을소설에서 로스토프가 있었던 방은 자신이 그동안 있었던 방들 가운데 가장 작은 방이었으나 바로  방에서 그는  속에 있었던  어떤 방보다  많은 일과 인연을 만들어냈다.


 말할 것도 없이  방은 지금껏 살아오면서 그가 사용했던 방들 가운데 가장 작은 방이었다하지만  사방   안에서 세상은 오고갔다. (p. 683)


 이만큼 삶이 가진 불확실성이 바로 삶의 활발한 역동성을 만들어내며, 그 역동성이 진정한 나를 만들어간다는 것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이야기가  있을까 싶다로스토프가 만들어내는 삶의 무늬를 보노라면 나도 그런 역동성을 가지고 싶어진다. 물론 로스토프는 어떻게 하면 그런 역동성을 가질  있는지도 보여준다하루하루 성실하게 계속 뚜벅뚜벅 걸어가는 것이다.

 알렉산드르 로스토프는 과학자도 아니고 현자도 아니었다하지만 예순넷이라는 나이를 먹은 그는인생이란 것은 성큼성큼 나아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만큼은 현명했다인생은 서서히 펼쳐지는 것이다주어진 하나하나의 순간마다  번에 걸친 변화를 보여주는 과정이다우리의 능력은 흥하다가 이울고우리의 경험은 축적되며우리의 의견은 - 빙하가 녹듯 매우 느리지는 않다 해도 적어도 천천히 점진적으로 - 진화한다소량의 후추가 스튜를 변화시키듯매일매일 벌어지는 사건들이 우리를 변화시킨다.(p. 630)


 소설을 읽고 나면  말이 지극히 옳다는  알게된다순간삶의 다양한 국면마다 조급하게 일희일비했던  자신이 조금 부끄러워지면서 삶을 보다 높은 안목으로 바라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아주 높이 나는 새에겐 높은 빌딩이나 낮은 주택이나  하나의 평면으로 보이듯이삶의 어려움과 고난도 그렇게 바라봐야겠다고.


 요즘처럼 무더위에 쉽게 짜증을 내며 만사 귀찮다는 표정으로 모든  마냥 내버려 두고 있는 내겐 특히나 필요한 안목이다. ‘모스크바의 신사 본받아 ‘서울의 신사   있었으면 좋겠다평정심과 중심을 잃지 않고 나로 인해 다른 이들 또한 좋은 추억과 인연을 만들  있는 사람설령 아주 조그만 둥지라도 누군가 주저없이 날아와 편히 깃들  있는 사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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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엣 타인 응우옌 지음, 김희용 옮김 / 민음사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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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트남 전쟁을 소재로 다룬 작품들은 지금까지 허다하게 만나보았다.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의 '지옥의 묵시록'이나 올리버 스톤의  '플래툰', '7월 4일생'을 비롯한 많은 영화가 있었고 황석영의 '무기의 그늘'이나 안정효의 '하얀 전쟁' 또 박영한의 '머나먼 쏭바강'을 포함한 많은 소설이 있었다. 그러나 비엣 타인 응우옌의 '동조자' 같은 소설은 처음이다. 왜냐하면 이 소설은 지금까지 베트남 전쟁을 다룬 작품들이 담고 있지 않았던 새로운 목소리를 들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베트남 사람 자신의 목소리를.


 생각해 보니 지금까지 내가 보고 읽은 베트남 전쟁에 대한 작품들은 모두 베트남 사람의 것이 아닌 제3자의 것이었다. 남의 전쟁에 할 수 없이 뛰어든 이들의 시선으로 바라봤던 전쟁만이 내가 만날 수 있는 베트남 전쟁의 전부였던 셈이다. 많은 영화와 소설들이 전쟁이 가져다 준 고통과 절망을 그리고 있었지만 그건 오로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전쟁에 휘말린 바깥에서 온 자들의 고통과 절망이었을 뿐, 정작 거기엔 전쟁의 당사자이자 다른 어떤 누구보다 많은 상처를 가졌을 베트남 사람들의 것은 빠져 있었다. '동조자'는 무엇보다도 그걸 깨닫게 했다. 지금까지 나는 단 한 번도 베트남 사람 자신의 목소리를 들어보지 못했다는 것을.




 소설 '동조자'는 베트남 전쟁과 그 이후를 시간적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월남 장교이지만 실은 북베트남을 위해 일하는 첩자가 주인공이다. 소설의 대부분은 주인공이 자신의 정체성을 증명하기 위해 수용소의 소장에게 쓰는 자술서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러한 자술서의 형식은 사실 주인공의 삶을 단적으로 집약하여 나타내고 있는데 왜냐하면 그는 평생 자술서를 쓰듯 남에게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야 했던 것이다. 어릴 때는 프랑스인 아버지와 베트남인 어머니 사이에서 '잡종 새끼'라고 놀리는 베트남 사람들에게 자신이 베트남인이라는 것을 증명해야했고 자라서는 북베트남의 첩자로 일하느라 자신이 남베트남에 충성하는 군인이라는 걸 증명해야 했다. 그리고 베트남이 패망하고 북베트남이 지배하게 되었을 때는 그들에게 자신이 서양 문명에 세뇌되지 않았으며 여전히 북베트남에게 충성하고 있다는 걸 증명해야했다.


 그는 단 한번도 남에게 있는 그대로 온전히 받아들여진 적이 없다.

 늘 자기 스스로 당신과 같은 사람이라는 걸 입증해야 했다. 그것을 위해 그는 두 사람을 희생시키기까지 한다. 그 희생자들이란 '무분별한 소령'과 '소니'다. 한 사람은 주인공이 장군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죽였고 다른 한 사람은 질투 때문에 죽였지만 희생자들의 공통점을 생각한다면 그들을 그 죽인 진짜 원인은 다른 곳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바로 그들이 가진 확고한 정체성 때문이라는 걸 말이다. 그들의 정체성은 '무분별한 소령'의 뚱뚱한 육체만큼이나 흔들리지 않는다. '소니'처럼 자신의 존재를 증명할 필요도 느끼지 못한다. 주인공의 눈에 그들은 더없이 자유로워 보이는데 우리는 그 자유가 그들의 안정된 정체성에서 비롯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주인공에게 부재한 그것을 그들은 아낌없이 누리고 있었기에 주인공은 그들을 죽음으로 내몬 것이다. 


 그는 늘 둘 사이에서 흔들렸다.

 프랑스와 베트남 사이에서, 북베트남과 남베트남 사이에서, 만과 본이라는 친구 사이에서, 민족 문화와 외래 문명 사이에서. 그는 베트남에서 미국으로 또 북베트남으로 이동하지만 그 어디서도 자신의 영토를 발견할 수 없었다. 어디를 가나 그는 의혹의 시선을 받는 이방인일 뿐이었다. 그에겐 자유가 허락되지 않았다. 정체성이란 덫에 완전히 속박되어 늘 상대가 요구하는 가면을 써야했다. 그것이 어릴 때부터 자신을 옥죄는 올가미와 다를 바 없었기에 그는 거기서 헤어나고자 했다. 그가 북베트남의 혁명에 동조했던 것도 죽이고 싶을 정도로 아버지를 원망했던 이유와 똑같이 그것에 기대서라도 자신의 정체성을 온전히 확립하고자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오히려 혁명에 철저하게 배반당한다.


 독립과 자유 - 나는 이 단어들을 말하는 데 너무 신물이 났다 -의 이름으로 스스로를 해방시켰지만, 그런 다음 곧 우리의 패배한 동포들에게서 그것을 박탈했던 것이다.(2권, p. 292)


 그리고 그제서야 깨닫게 된다. 자신이 혁명을 통해 이루고자 했던 독립과 자유가 아무 것도 아니듯, 자신이 그토록 목매달았던 확고한 정체성 또한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그것은 환영에 불과했다. 아무것도 아닌 것에 언젠가 누군가가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무언가 있는 것처럼 잔뜩 위장시켜 놓았던 것이 바로 '정체성'이었던 것이다.


 일본인들이 우리에게 황인종의 우월성을 가르쳐주지 않았다면, 프랑스인들이 우리를 문명화시키려 시도한 적이 결코 없었다면, 호찌민이 변증법적이지 않고 카를 마르크스가 분석적이지 않았다면, (2권, p. 258)


 이처럼 그가 아무것도 아닌 것을 의미가 있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은 바깥에서 주입받은 것이었다. 무언가 되어야만 한다고 말했던 바깥의 이념이나 사상들 모두가 실은 그를 옭아매는 사슬에 다름 아니었던 것이다. 친구이기도 한 정치의원의 혹독한 심문을 통해 그는 정체성이 무의미하다는 진실을 깨닫고 비로소 사슬에서 풀려난다. 이제 그에겐 모든 게 농담으로 보인다. 그는 아무것도 없는 것을 당당히 아무것도 없다고 비웃을 줄 아는 '익살꾼'이 된다. '벌거벗은 임금님'이란 동화에서 유일하게 임금님이 벌거벗었다고 말했던 아이가 쾌활하게 웃으며 임금님을 비웃었듯이.


 농담을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들은 정말로 위험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아무것도 없음'을 경건한 마음으로 말하고,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아무것도 없음'을 위해 죽을 것을 요구하고, '아무것도 없음'을 숭배하는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은 '아무것도 없음'을 비웃는 사람을 너그럽게 봐주지 못한다.( 2권, p. 284)


  진정한 독립과 자유는 하나였다. 웃는 것. 그것은 동화 속 아이와 같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자신의 모습도, 타인의 모습도. 그 어느 틀에 끼워맞추지 않고. 익살은 자신과 상대방을 사회가 온갖 것으로 덕지덕지 기워놓았던 정체성의 껍질을 산산히 깨뜨리고 본연의 모습으로 돌려놓는다. 태어났을 때와 똑같이 그 어떤 규정도 있지 않았던 순수한 현존(現存)으로. 순수하게 독립적이고 완전하게 자유로운 그 상태로.


 이것은 사르트르가 '인간은 실존이 본질에 선행하는 존재다'라고 말했던 것과 일맥상통한다. 이 말은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 먼저 존재하고 정의되는 것은 그다음이라는 의미다. 그러면서 사르트르는 첫 순간에 인간을 아무 정의도 할 수 없는 것은 우선 인간이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그는 나중에야 비로소 무엇이 될 것이며 그 자신이 스스로 만들어 가는 대로 될 것이다.'라고. 이 사르트르의 말에서 우리는 주인공이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 알 수 있다. 남이 먼저 닦아두고 걸어가라며 내모는 길이 아니라 자신이 가고자 하는 길을 스스로 만들어 나갈 것이라는 걸. 세상에 되어야 할 존재 같은 건 없다. '답게'란 말만큼 폭력적인 것도 또 없다. '동조자'가 충분히 보여주었듯이 지금 가지고 있는 그 모습만으로도 우리가 존중받아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


 그러나 오늘의 시대는 이것을 완강히 거부하고 있다. 갈수록 인종과 국적 그리고 성별과 계층을 이유로 한 차별과 적대가 횡행하고 있다. 곳곳에 혐오의 말들이 넘쳐나고 갑질의 난무와 증오의 분출로 피해를 입는 사람들이 허다하게 생겨난다. 알고보면 이 모든 일의 근본엔 아무것도 아닌 것을 아주 무거운 의미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우리의 착각이 있다. 지금 내가 입고 있는 정체성의 옷은 어쩌다 입게 된 옷일 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일시적이고 잠정적인 그 옷을 자기 존재 의미의 전부라고 여긴다. 그리고 고정 불변하며 나는 절대 너가 될 수 없다고도.


 프랑스의 인류학자 레비 스트로스는 언젠가의 연설에서 야만인이란 다른 사람을 야만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정체성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동조자'의 장군이나 소장이 잘 나타내고 있는 것처럼 타인에게 멋대로 고정된 정체성을 씌워 혐오와 증오의 말들을 쏟아내는 사람의 머릿속에만 존재한다. 자신이 타인보다 더 자유롭고자 타인을 차별과 모욕으로 공격하지만 그럴수록 더 갇히게 되는 건 자신이다. 진정으로 자유롭고자 한다면 우선 타인부터 정체성의 그물에서 해방시켜줘야 한다. 그래야 자신도 해방될테니까 말이다. 주인공이 잘 보여주었듯이. 


 결국 '동조자'는 제목 그대로 우리가 과연 어디에 최종적으로 동조해야 하는가를 알려주고 있는 셈이다. 그건 모든 인간이 그 자체로 오롯이 동등하다는 사실이다. 인간은 선행하는 어떤 개념의 실현 같은 것이 결코 아니다. 다만 순수한 시작일 뿐이다. 아무런 구분도, 우열도 없는. 그리고 누구에게도 그 시작을 자기 뜻대로 이끌고 갈 권리 역시 없다. 바로 이것에 우리는 동조해야 한다. 타인 뿐만이 아니라 나 또한 독립적이고 자유롭게 하는 이념의 동조자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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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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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주 어릴 때의 일이다. 아버지와 함께 밤의 서커스 공연을 관람한 적이 있다. 그때의 아버지는 내가 첫 아들이라 그랬는지, 세상에서 자신이 놀랍다고 생각한 것을 내게 보여주길 원했다. 넓은 바다라든지, 새벽 안개가 수면 위로 서서히 걸어가는 호수라든지. 아마도 그런 경이로운 것들을 통해 내가 살아간다는 것의 즐거움을 알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싶다. 물론 그 이유를 아버지는 한 번도 말해준 적이 없고 그저 나만의 짐작에 불과하지만. 서커스 관람도 그 중 하나였다. 당시 아버지가 내게 보여준 많은 풍경처럼 처음 서커스를 보았던 그 밤의 광경 역시 내 기억에 여전히 선명하게 박혀있다. 그 곳은 신비의 장소였다. 일상에서 만나볼 수 없는 존재들이 출현했고, 커다란 공 위에서 자유롭게 저글링 하는 이가 있었으며 까마득한 높이에서 날개가 달린 듯 활공하는 이들이 있었다. 거기는 일상의 중력이 미치지 않았다. 우리를 속박하고 있는 세계의 질서도 가벼이 넘나드는 것 같았다. 사람에게 엄연한 한계로 주어졌다고 여겼던 것들이 더는 사람의 가능성을 막는 벽이 아니게 되었다. 그렇게 '서커스 나이트'는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를 바꾸었다. 세계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거대하다는 것을 감탄과 갈채의 시선 가운데 확인시켰다. 그 여백을 얼마나 많이 볼 수 있는가가 결국엔 나의 행복을 좌우한다는 것도.



 요시모토 바나나의 '서커스 나이트'를 읽다 보니 절로 그 밤의 서커스가 떠올랐다. 제목 때문이 아니다. 소설에 서커스가 나왔기 때문도 아니다. 소설에 담긴 이야기 전체가 그 밤의 서커스와 똑같은 것을 내게 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야카란 여성이 있다. 어릴 때 부모님을 모두 비행기 사고로 잃은 뒤로 그녀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집을 가져본 적이 없다. 그녀의 생애는 방랑과 더부살이도 점철되어 있었다. 언제나 거주는 일시적이었고 이제 정주를 하게 되나 안심하면 뜻하지 않게 추방의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장돌뱅이의 운명이 그러하듯이 사야카, 그녀의 삶도 자신이 주도하는 것은 없었다. 수면 위의 잎새처럼 누군가 일으킨 파문에 휩쓸리는 삶이었다. 적어도 지금까진 그랬다. 그런 그녀의 삶이 한 통의 편지로 변하기 시작한다. 과거의 상처가 눅진하게 배어든 그녀의 굽은 손가락이 펴지듯이, 위성처럼 누군가의 삶을 맴돌기만 했던 그녀가 이제 항성이 되어 남에게도 따스한 빛을 나눠주는 것이다. 세상이 그녀가 여기는 것보다 훨씬 거대하며 그것을 통해 삶에는 사야카 집 마당에 있는 히비스커스 나무 아래 묻혀 있었던 과거의 연인 이치로 쌍둥이의 형 뼈와도 같이 지금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삶의 여백들이 광장처럼 넓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밤의 서커스가 주었던 것과 똑같이.


 인생사 새옹지마(塞翁之馬)라 했던가. 그 고사에 나오는 변방 노인이 깨달았던 대로 더 넓은 시선으로 세상을 담아보면 우리는 알게 된다. 삶을 긍정한다는 것이 무지와 무력의 소치는 아니며 쐐기처럼 박힌 상처라 해도 담아두고 곱씹기 보다는 허허로이 흘려보내는 게 내일의 나를 위해서도 좋다는 것을 말이다. 사야카가 그런 깨달음과 함께 시어머니의 삶을 점차 자신의 삶으로 받아들이는 것 그대로. 소설은 그걸 전하고자 한다. 하지만 서커스처럼 현란하거나 소란스럽게 말하지 않는다. 그저 조용한 물결이다. 고요하게 독자를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바에 젖도록 한다. 소설도 언급하고 있듯이 한류 드라마라면 충분히 격한 갈등이 일어날 만한 설정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런 것 하나 없이 유유히 흘러가는 것이다. 어쩌면 소설이 간직한 전적인 포용과 대책 없는 낙관주의가 소설에서 시선을 거두게 할지도 모르겠다. '유유자적'이란 말을 글로 만나본 게 다인 일상으로 꽉 차 있고 대책 없이 남을 믿는 것만큼 바보 같은 짓은 또 없다는 말을 상시로 듣는 우리의 삶과는 너무나 거리가 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그동안 바나나의 문학 세계가 걸어온 여정을 생각한다면 이것을 다만 문학적 과장으로 여길 수는 없을 것 같다. 요시모토 바나나, 이전의 그녀는 현실이 아닌 곳에서 구원을 찾았다. 삶의 새로운 의미나 가능성은 먼 이국에서만 불어오는 미풍이었다. 하지만 '서커스 나이트'에서 그녀는 사야카의 고향인 '발리'가 어디나 될 수 있다고 말한다. 구원은 저 멀리 있는 어딘가가 아니라 바로 여기에 있다는 것이다. 그걸 강조하기 위해 현실을 좀 더 믿어볼 만한 곳으로 또 사랑할 만한 곳으로 구현한 것은 아닐까 싶다. 그런 삶에 봄날에 온천을 즐기는 곰처럼 마냥 젖어있다 보니 길들기라도 한 것인지 소설 속의 삶을 구태여 과장으로 여길 필요는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삶은 포용과 긍정으로 충만한 곳인데 내가 협소한 시야를 가진 탓에 그 반대로만 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그때, 문득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처음으로 보았던 밤의 서커스가 떠올랐다. 뒤이어 지금의 내가 경이로움에 말갛게 씻긴 눈으로 세상을 있는 그대로 힘껏 껴안았던 그때와는 너무 멀어졌구나 하는 자각까지도. 그 마음이 그리워지면서 하나의 갈망 또한 강렬하게 솟아났다. 다시 한번 그 밤의 서커스로 가고 싶다는.


 그러고 보면, 문학은 서커스가 아닐까? 서커스와 똑같이 문학도 일상의 중력에 속박되어 그저 삶의 편린만 바라보고서 불신과 불안으로 세상을 속단하기 바쁜 내게 삶의 새로운 면모를 한껏 재현하여 이전과는 전혀 다른 시선과 마음으로 삶을 대면하도록 만드니까 말이다. 이처럼 홀연히 경이와 구원의 장소로 우리를 데려갈 수 있기에 우리는 지금도 여전히 문학을 벗하는지도 모른다. '서커스 나이트'는 그런 문학의 힘을 그득 맛볼 수 있는 감미로운 만찬이다. 연일 폭염으로 더욱 피로와 비관에 물든 눈으로 삶을 바라보는 이가 있다면 이 만찬으로 초대하고 싶다. 그 날 밤, 아버지가 내 손을 이끌었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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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평화 1~4 세트 - 전4권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레프 톨스토이 지음, 박형규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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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리 고전이라도 등장인물들과 사는 형편이 너무 다르다 보면 이야기에 몰입이 잘 안 되기 마련이다. 레프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도 그 중 하나가 아닐까? 신자유주의가 피워 놓은 매운 연기가 아직 채 가시지 않고 소득 불평등에 더하여 자산 불평등까지 극심해진 요즘 같은 세상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꾸만 불안해져가는 현재의 생활과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한 잔의 커피조차 여유롭게 마시기 어려운데, '전쟁과 평화'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은 하나같이 대저택에다 많은 토지를 소유한, 당장은 먹고 살 걱정이 없는 귀족 계급이니까 말이다. 그들이 아무리 아프고 힘들다 해도 그들이 가진 재산과 여유를 떠올리게 되면 얼른 '다 배 부르고 등 따뜻하니까 저러는 거다'하는 생각부터 드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에게서 귀족이라는 것을 벗기고 보면 사실 그리 딴 얘기로 여겨지지 않는다. 무엇보다 전쟁 상황이라는 게 그렇다. 그것은 오늘의 상황과 비슷하다. 물론 이제 막 시작된 남북 평화시대에 찬물이나 끼얹자고 하는 말은 아니다. '전쟁과 평화'에 나오는 것처럼 나라 사이의 전쟁을 뜻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 사회에 넘쳐나고 있는 증오 또는 혐오를 두고 하는 말이다. 신문을 보면 날마다 증오 범죄가 늘어난다. 혐오도 다반사로 쏟아낸다. 정치와 성별, 직업과 세대, 빈부를 비롯해 이제는 제주도의 예멘 난민 문제에 대한 인터넷 댓글에서 보듯 국적까지, 여기저기서 편을 가르고 상대를 경멸하는 온갖 명칭을 새롭게 만들어가며 적대시 하기 바쁘다. 형편이 이러하니 어떻게 전쟁으로 보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전쟁과 평화'에서 러시아 공작을 위해 일했던 프랑스인 요리사를 오직 프랑스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잡아서 스파이란 누명을 씌워 처형했던 러시아 사람이나 일단 러시아의 도시에 입성하면 사정 봐주지 않고 무조건 약탈부터 감행했던 프랑스인과 하등 다를 것이 없는데.


 그렇기에 우리는 '전쟁과 평화'의 주연이라 할 만한 안드레이와 피예르에게 공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들 역시 지금의 우리와 마찬가지로 적대가 강요되는 상황 속에서 어느 것이 거짓이고 또 어느 것이 진실인지 도무지 분간할 수 없는 가운데 시행착오를 반복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늘 쓰러지고 넘어지며 방황한다. 러시아와 프랑스 사이에서, 자유 의지와 운명 사이에서, 영웅과 순응하는 필부 사이에서, 황제와 민중 사이에서, 사랑과 배신 사이에서 그리고 전쟁과 평화 사이에서. 나폴레옹과 쿠푸조트가 보여주는 선명한 대립처럼, 톨스토이는 '전쟁과 평화' 속에 이분법적인 구도를 많이 만든다. 이토록 대립각이 분명하게 세워져 있지만 그 사이에서 헤매는 이들의 눈엔 그 모든 것이 온통 짙은 안개에 가리워진 것으로만 보인다.




 그들은 이것과 저것을 구분하여 자신의 자리를 제대로 찾고자 갈망한다. 그 확보가 그들에겐 깨달음이다. 그러나 그러한 각성은 이제야 비로소 손에 쥔 것 같았으나 다시 또 어느새 손가락 틈 사이로 다 빠져 나가버리는 모래알에 다름 아니다. 오늘 찾은 해답이 내일이 되면 오답으로 변해버린다. 안드레이를 보자. 그는 1권의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자신이 헌신했던 국가가 한낱 허망한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보다 고귀한 가치를 쫓아 거기에 걸맞는 진보적인 인간이 되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요 의무라고 생각했지만 자신과 약혼한 나타샤가 아나톨과 눈이 맞아 자기를 배신하려 했다는 것을 알게 되자 배신감과 복수심에 사로잡혀 원대한 이상을 쉽게 포기해 버린다. 피예르는 또 어떠한가? 그 또한 예기치 않게 베주호프 백작의 유일한 상속자가 되어 비로소 자신의 이상을 구현할 기회를 얻었지만 아내 옐렌이 돌로호프와 바람을 피우자 비탄과 허무의 늪 속에 빠져 모든 이상과 희망을 내려놓는다. 이처럼 각성은 곧 쓸모 없는 것으로 밝혀지고 삶은 점점 더 빠져나갈 수 없는 미로가 된다. 마치 톨스토이가 작정하고 그들에게 정주(定住)의 희망을 포기시키는 것도 같다. 


 어쩌면 이러한 지속적인 추방이 톨스토이의 진의(眞意)는 아닌 걸까? 세상은 사실 나와 너를 쉽게 구분할 수 없는 안개요 미로라는 것. 전선(戰線)의 가시 철조망은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나폴레옹이 모스크바를 내려다보면서 하는 생각들이 잘 보여주듯이, 선별(選別)은 나를 높이고자 하는 욕망의 소산이다. 세상을 오로지 자기 목소리로 채우고자 하는 마음. 그러나 거대한 세상은 그에게 너도 한낱 부품에 지나지 않는다고 선언한다. 그저 세상을 움직이는 수많은 톱니바퀴 중 하나일 뿐이라고. 겸허하라는 뜻이다. 쿠푸조트가 자신의 뜻을 주장하기 보다는 운명에 조용히 순응한 것처럼. 나폴레옹은 자신을 내세우기 위해 싸웠지만 쿠푸조트는 세상의 움직임을 살피고 그에 따라 모스크바를 내어주기까지 하면서 물러났다. 도시에 들어간 프랑스군이 자행한 약탈은 사실 나폴레옹 싸움의 본질이다. 남의 것을 취하여 자신을 높이는 극단의 행태이니까. 그 약탈에 쿠푸조트는 포기로 맞섰고 결국 승리했다. 안드레이와 피예르 그리고 그들이 함께 사랑했던 나타샤의 구원도 바로 거기서 찾아왔다. 내어놓는 것, 물러서는 것, 조용히 순응하는 것.


 무엇보다 나타샤의 변화가 그러하다. 가장 밝은 삶의 색채로 가득했던 그녀는 그 밝기가 절정에 이른 순간, 그러니까 세상을 자기 뜻대로 다 할 수 있으리라 여겼던 순간에 어리석은 현혹에 사로잡혀 모든 것을 망치고 말았다. 그 때의 그녀는 피예르의 아내, 옐렌이었고 또 다른 나폴레옹이었다. 그 실패가 그녀를 변화시켰고 부상당한 안드레이의 간호를 통해 구원을 얻게 되었다. 톨스토이는 그 때의 나타샤를 조도를 아주 많이 낮춘 공간에다 담는다. 움직임도 많이 줄인다. 어둠과 수동성의 장막을 겹겹이 휘두른 쿠푸조트인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진정한 사랑과 구원은 나타샤가 가장 어둡고 가장 낮은 자리에 처했을 때 도래했다. 피예르가 농부의 모습이었다가 프랑스군의 포로까지 되는, 그렇게 가장 많이 추락한 지점에서 가장 높은 성찰을 얻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안드레이 또한 부상을 당해 꼼짝도 못하고 누웠을 때에 참된 구원을 향해 나아갈 수 있었다. 이것은 끝까지 자신을 내려놓지 못하는 로스토프의 미래와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그렇기에 톨스토이는 우리에게 부단한 떠남을 권유하는지도 모르겠다. 세상이 혼돈과 불안의 안개로 보이는 것은 알고보면 하나의 편을 정하고 거기에 편승하여 자신을 높이고자 하는 우리의 욕망 자체에서 비롯된다면서 말이다. 결국은 자기애(自己愛)가 인식의 착란을 일으켜 무분별한 적대에 현혹되도록 하는 것이다. 운명의 순응이라는 형태의 겸허는 그것을 억누르고자 함이다. 처음 나폴레옹에 현혹되어 그를 찬미하기 바빴던 피예르가 점점 거기서 벗어나 기층 민중에 대한 애정을 가지게 되듯이 기실은 연대를 향한 몸짓이다. 톨스토이는 누누이 말한다.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역사를 만들어 나가는 것은 영웅이라는 개인이 아니라 민중이라는 전체라고. 


 이처럼 톨스토이는 분리가 아니라 통합을 추구한다. 이것은 안드레이피예르 그리고 로스토프에게도 나타난다. 나는 이 셋이 실은 톨스토이의 분신이 아닐까 싶다. 각 자 톨스토이 영혼의 어떤 한 부분을 나타내는 존재. 톨스토이의 전기를 쓴 영국 작가 앤드루 노먼 윌슨은 톨스토이가 내적 모순으로 가득찬 존재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러면서 가장 격렬한 모순은 탕자와 성자 사이의 모순이라고 했다. 나는 세 사람이 그 모순을 반영한 존재로 보인다. 로스토프는 탕자, 안드레이는 성자 중 이지적인 부분 그리고 피예르는 성자 중 감성적인 부분을. 문득 피예르가 자신에게 지리를 가르쳤던 노교사의 말을 떠올렸을 때가 생각난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 중심에 신이 있고, 그래서 어느 물방울이나 되도록 신을 크게 투영하기 위해 퍼지려고 노력하는 거야. 그리고 커지기도 하고, 합쳐지기도 하고, 작아지기도 하고, 표면에서 사라진 것은 깊숙이 가라앉았다가 다시 떠오르지 봐. 이것이 카라타예프야, 흘러넘치다가 사라졌어, 알겠지, 얘야." (4권, p. 250)


 세 사람은 그런 물방울이다. 이 말처럼 처음엔 선명했던 세 사람의 분리는 시간이 흐를수록 경계가 점점 흐릿해진다. 그러나 톨스토이의 통합은 물방울에 대한 말에 나타난 바대로 완전히 하나로 합치는 것이 아니다. 겸허에 기반한 그의 통합은 모으되 억지로 붙잡지 않는다. 강요가 아닌 자발적으로 형성된 하나, 중심과 주변이 따로 없이 모두가 다 그 자체로 중심인 하나인 것이다. 이건 다만 형상이다. 높은 하늘 위에서 내려다 보면 고층 빌딩도 논밭도 모두 평면에 지나지 않는 것과 똑같이. 신의 눈으로 바라 본 세상인 것이다. 궁극적으로 톨스토이는 우리가 그러한 신의 눈을 갖기를 바란다. 그럴 때 대립은 너 죽고 나 살자 식의 경쟁이 아니라 보다 더 온전한 하나로 나아가는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전쟁이 평화의 소중함을 각인시키고 실연이 사랑의 소중함을 깨닫게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것은 둘로 나뉘지 않고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물론 거기엔 겸허가 기본 태도로 정립되어 있어야 한다. 사랑은 그 겸허의 가장 대표적인 형태이다. '전쟁과 평화'는 1805년부터 1820년까지의 시간 속에 펼쳐지는 전쟁 이야기이자 사랑 이야기이기도 하다. 나타샤의 변화는 애정과 사랑이 어떻게 구분되는지 보여준다. 사랑은 나타샤가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타인만을 생각할 때 비로소 발현된다. 톨스토이가 사랑을 가져 온 것은 그 때문이다. 타자에게 나를 내어주는 것. 공작 영애 마리야가 로스토프와의 결혼 후에 그에 대해 실망하는 것도 타자를 믿지 않는 태도 때문이 아니었던가. 사랑이 신의 눈을 갖게 한다. 온갖 적대에 휘둘리지 않고 현명하게 뚜벅뚜벅 걸어가게 한다. 나만의 불안을 보지 않고 타인과 시대의 불안부터 먼저 보게 만든다. 그러는 가운데 자신의 불안마저 잊고 진정한 대안을 찾아 나서게 한다. 그 때, 평화는 저절로 찾아온다. 순응과 겸허의 사랑은 그런 걸 가능하게 만든다.


 이렇게 말하고 있지만서도 과연 정말 그렇게 될까 나조차도 얼른 믿기지 않는다. 하지만 말년의 톨스토이가 몸소 실천했던 걸 보노라면 그렇게 될 것도 같다. 아니, 그렇게 된다고 믿고 싶다. 이토록 혐오와 증오가 판을 치는 세상을 공존과 평화의 세상으로 되돌릴 수만 있다면 아무리 작은 희망이라도 없는 것 보다는 나으니까. '전쟁과 평화'는 광막한 어둠 속에서 손으로 미로를 더듬는 우리들을 출구로 인도하는 둥둥 울리는 북소리이다. 들을 준비가 된 자는 듣게 되리라. 그러므로 '전쟁과 평화'는 결코 고릿적 얘기가 아니다. 나와 그들이 처한 상황이 다르지 않고 그들과 나의 고민이 차이나지 않기에 바로 오늘의 이야기다. 지금처럼 증오와 혐오의 화염이 분별과 상식을 집어 삼키고 있는 매캐한 대기 속에서 숨막히는 사람이라면 한 번은 귀를 기울여야 할. '걸작에 관하여'를 쓴 샤를 단치는 걸작은 절대 엄청나게 많은 수의 사람이 읽는 책이 아니라 엄청나게 많은 수의 사람이 한 번은 들어봄 직한 책이라고 한다. 그러나 '전쟁과 평화'만은 듣지만 말고 많이 읽었으면 좋겠다. 북소리가 점점 더 크게 울려 이 대기를 뒤흔들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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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 패트릭 멜로즈 소설 5부작
에드워드 세인트 오빈 지음, 공진호 옮김 / 현대문학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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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소설은 아주 고통스런 기억에 대한 것이다. 

 너무나 고통스러워서 늘 죽음을 바랐던 이가 오로지 거기에 대해서 쓰는 것만이 자신을 살아있게 하기에 써야만 했던 소설이기도 하다. 바로 2018년 5월, 베네딕트 컴버배치 주연의 미니시리즈로도 만들어진 '패트릭 멜로즈'의 원작이 되는 소설에 대한 얘기다.





 그 원작이 되는 소설이 국내에 발간되었다. 작가의 이름은 에드워드 세인트 오빈. 1960년에 영국 런던에 부유한 상류층에서 태어난 사람이다. 작가와 작품 모두 아직은 우리나라에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영국에선 꽤나 유명하다고 한다. 그 예로 총 다섯 권으로 이뤄진 이 시리즈의 첫 권인 '괜찮아'는 베티트래스크 문학상을 받았고 네 번째 권인 '모유'는 페미나상을 받았으며 맨부커 상 최종 후보에도 올랐다.


 나는 그 중 처음으로 나온 '괜찮아'를 읽었다. 원제는 'NEVER MIND'. 귀에 낯이 익다면 그건 미국의 대표적인 얼터너티브 락그룹인 '너바나' 때문이다. 그들의 두 번째 앨범이자 90년대의 음악 판도를 완전히 뒤바꿔버린, 역사적인 음반 제목이 바로 'NEVER MIND'였으니까 말이다. 어쩌면 소설의 제목 역시 너바나의 음반 제목에서 가져온 것은 아닐까 생각되기도 한다. 음반은 91년, 소설은 92년에 나왔으니까. 92년 쯤이면 'NEVER MIND'가 특히 'SMELLS LIKE TEEN SPIRIT'를 선두로 세계 전체를 폭풍처럼 휩쓸고 다닐 무렵이다. 제목을 지을 때, 작가나 편집자의 귀에 한 번은 들어갔을 것이며 너바나의 노래가 담고있는 메세지가 '패트릭 멜로즈'의 주제와도 상통한다는 생각에 '이거 좀 잘 어울리는군' 하며 썼을지도 모를 일이다. 'SMELLS LIKE TEEN SPIRIT'이 어떤 노래인가에 대해 커트 코베인은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밝힌 바 있다.


 그 노래는 자신의 친구들에 대한 노래이며 그들은 늘 자신을 십대와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그들이 늘 어른이 될 수 있는 가이드라인 같은 것이 지금 세상에 없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어른다운 어른이 없는 세상. 그들은 어른이라 말하지만 사실 실패한 어른에 지나지 않는 세상. 그러므로 그들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라도 스스로 어른이 되는 길을 찾아갈 수밖에 없는 세상. 'SMELLS LIKE TEEN SPIRIT'은 바로 그런 세상의 모습을 얘기했고 'TEEN SPIRIT'을 지도가 사라져버린 세상에서 스스로 지도를 만들어 나가는 혁명의 상징으로 삼았다.  '괜찮아'를 읽어보면 보여주는 것이 이것과 그리 다르지 않다. 소설은 오전 7시부터 모두가 잠든 밤까지 단 하루를 담는다. 1960년대의 프랑스 프로방스 지방을 배경으로 말이다. 소설이 한 권에 걸쳐서 이 하루를 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할 지도 모른다. '괜찮아'를 비롯하여 패트릭 멜로즈 시리즈의 모든 작품들은 사실 작가의 자전적인 소설이고 그의 삶을 들여다 볼 때 그 하루는 자신의 인생을 결정적으로 뒤바꿔버린 것이었으니까 말이다. 그 날, 다섯 살인 패트릭은 아버지 데이비드에게 강간을 당했다. 실제 작가 또한 그랬다. 겨우 담 위로 올라가 걷다가 뛰어내린 일에서 촉발된 그 사건은 작가와 그의 분신인 패트릭 모두에게 평생 지울 수 없는 상처가 되었다. 그 일로 작가는 글쓰기로 자신의 삶을 스스로 구할 수 있게 될 때까지 내내 약물 중독과 반복된 자살 시도라는 자기 파괴적인 삶을 살 수밖에 없었다. 뒤이은 시리즈의 책들은 모두 그런 고통의 기록이라 할 만하다. 이처럼 자신의 삶이 순식간에 무간 지옥으로 변해버렸으니, 한 권 전체를 할애하여 그 날을 복기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할 것이다.


 소설은 아버지 데이비드로 시작한다. 출발부터 데이비드는 자기보다 약한 존재를 무자비하게 괴롭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정원의 개미들을 물줄기를 퍼부어 죽이는가 하면 자신의 집에서 하녀로 일하는 하층 계급인 이베트가 무거운 세탁물을 들고 지나가자 일부러 말을 걸어 팔이 아파서 괴로울 때까지 그 자리에 있도록 하기도 한다. 영국 왕의 사생아 가문인 그는 마치 조상이 당한 멸시를 후손이 되갚아 주기라도 하는 듯이 타인을 지배하고 군림하지 않으면 못 사는 존재이다. 식탁 상석에 있는 데이비드 전용 의자인 '총독 의자'는 그런 데이비드 모습을 단적으로 상징한다. 그런 아버지로 시작하여 소설이 줄기차게 보여주는 것은 어른이라고 할 수 없는 어른의 모습이다. 그들은 많은 돈과 지식 그리고 교양을 가지고 있지만 그 어느 것 하나도 그들을 어른으로 만들어주지 못한다. 데이비드의 아내이자 패트릭의 엄마인 엘리너도, 데이비를 숭배하는 니콜라이도, 친구인 교수 빅터도 모두 자신을 사랑하기 위해 타인의 인정을 구걸하는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인정 받기 위해 허영을 부리고 남을 험담한다. 후반의 데이비드의 저택에서 벌어지는 저녁 만찬이 생생하게 보여주는 것처럼(개인적으로 이 소설의 가장 압권인 부분이 아닐까 한다.)남을 비꼬고 무시하는 것이 마치 상류층의 매너라도 되는듯 행동하는 그들은 자신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오듯 가식과 위선에 불과하다. 패트릭이 당한 강간은 진실과 존중 그리고 배려가 사라진, 그러한 어른 같지 않은 어른의 세계가 끝내 낳고야 만 비극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두 커버가 겹쳐져 있습니다. 보는 방향에서 오른쪽에 있는 것이 드라마 방영을 기념하여 특별히 나온 표지이고 왼쪽에 있는 것은 원래 표지입니다.


 '괜찮아'는 도저히 지도로 삼을 수 없는 어른들의 세계를 마치 날카로운 메스를 대듯 신랄하게 비난하는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닮고 싶은 어른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른으로 인정할 수 있는 모습을 스스로 만들어가야 한다. 너바나가 'NEVER MIND'를 통해 들려주려 했던 이 말을 우리는 바로 이 소설에서도 들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현실 세상이 정말 그랬다. 90년대는 미국 부시 정부의 걸프 전쟁으로 막을 올렸다. 초장부터 십대의 아이들이 보게 된 것은 밤 하늘을 별처럼 수 놓으며 날아가는 미사일과 대기에 꽉 차 흐르는 피와 죽음의 냄새 그리고 증오의 후끈한 열기였다. 이것은 80년대 횡행한, 사회적 약자에 대한 무시와 배제로 요약할 수 있는 신자유주의가 마치 최대치에 도달해 폭발한 것만 같았다. 그것이 십대에게 어른이 되라고 강요하는 어른들이 만든 세상이었다. 도처에서 죽고 다쳐서 쓸려나가는 사람들과 폐허가 되어가는 풍경을 보면서 십대의 아이들이 어른들이 자신의 손에 쥐어준 지도를 찢어 발기는 것은 당연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제목은 '괜찮다'고 하지만 사실 그 어디서도 괜찮다고 할 수 있는 모습을 찾을 수 없는 이 소설은 차라리 '너바나'와 같은 제목을 사용했던 섹스 피스톨즈이 외쳤던 것과 똑같이 그런 어른들의 세상에 대해선 '신경 꺼라!'로 소리치고 있는 것 같다. 어쩌면 이 말은 그 후로도 3년 내내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하고 홀로 아버지에게 끔찍한 일을 당했던 그 때의 자신에게 지금의 작가가 해주고 싶은 말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보기에 '괜찮아'엔 그런 시대의 들끓음, 응집된 분노가 서려있다. 이 소설이 하필이면 대처 수상의 은퇴하고 얼마 안 되어 나왔다는 것도 이런 느낌을 더욱 강화한다.


 어쨌든 고통은 시작되었다. 이후로 오래도록 작가와 그의 분신인 패트릭은 절뚝거리며 세상을 살아갈 수밖에 없게 되었다. 누구도 무서워하지 않았던 데이비드에게도 공포는 있었다. 언젠가 그는 그리스의 이타카 공항에서 기어다니며 구걸하는 거지를 본 적이 있다. 데이비드는 혹시 자신의 진실된 초상이 그런 거지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런 거지가 되지 않기 위해 그는 더욱 더 타인의 약점을 물어뜯는 걸 즐기며 남들에게 아멸차게 군다. 그의 공포는 그대로 패트릭에게 전이되어 현실로 만들고 말았다. 이후의 패트릭 삶은 실상 그런 거지와 다를 바 없었으니까 말이다. 거지가 되지 않으려는 마음이 결국 아들을 그런 거지로 만들고 말았다. 옛 사람들은 부모가 죄를 지으면 자식이 죗값을 치른다는 말을 흔히 했다. 누군가의 탐욕과 무분별이 일으킨 전쟁이 많은 고아를 만드는 것과 똑같이. 악의와 죄는 어디로든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언제나 도착하고 마는 편지처럼 돌아와 응당의 대가를 치루도록 한다. 크면 클수록 더 오랫동안. '패트릭 멜로즈'는 그 궤적의 길이를 생각토록 한다. 비록 자신이 가해자가 아니라 하더라도 패트릭의 엄마인 엘리너가 그랬듯이 또 뭔가 잘못된 걸 알았지만 내 일이 아니라는 생각에 끝내 방관하고만 앤이 그랬듯이 침묵과 방관 속에 더 커지고 길어지는 누군가의 비극을.


  작가의 엄마는 작가가 아버지에게 그런 짓을 당하고 있다는 것을 전혀 몰랐다고 한다. 아무도 도와주지 않고, 누구에게도 전할 수 없었던 그 아픔이 고이고 쌓이면 어떻게 될까? 다음의 이야기는 바로 그것에 대한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마치 '여기에 들어오는 자, 모든 희망을 버려라'가 새겨진 단테의 지옥 문 앞에 서 있는 기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해 읽은 소설 중 가장 인상 깊은 것중 하나이기에 어서 문을 열고 들어가 다음 작품을 만나고 싶은 마음을 금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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