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백한 불꽃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77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김윤하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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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의 작품이 오래 살아남는 길은 무엇일까?

 ‘율리시스  제임스 조이스에 따르면 그건 작품을 수수께끼로 가득 채우는 것이다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이 공존하는 가운데  어떠한 의미의 독재도 허용하지 않는 영화 ‘곡성 그러했듯무수한 의혹이 존재하는 가운데 모두들 자신만이 찾은 단서를 바탕으로 의미의 숲을 만들어 가더라도 누구도 감히 그것이 틀렸다 단정할  없도록 하는 권위에 굴복시키지 않고지식이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너도   있어!’ 유혹으로 독자를 끊임없이 난무하는 해석의 전장 속으로 참여할  있게 하는 무대 중앙에서 오직 듣기만 하는 침묵의 관객 앞에서 설파하는 독백이 아니라 저마다 자신의 사고로 단단히 무장한 고유한 목소리를 한껏   있는 대화의 광장이 되는  말이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도 자신의 작품이 그렇게 되길 바랐던 것은 아닐까?

 나는 ‘창백한 불꽃 읽으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일단  소설은 특이한 형식을 갖고 있다일정한 서사의 흐름이 없다찰스 킨보트가  머리말이 나오고 세계적으로 유명하다는 시인  프랜시스 셰이드가 죽기 직전까지 집필한 ‘창백한 불꽃이란 시가 뒤이어 이어진다그리고  시에 대해 가장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찰스 킨보트의거의 책의 3분의 2 차지하는  주석이 따라나온다우리는 그래도  책이 소설이긴 하구나 하는 인상을 주석에서 주로 받는데그것 역시 평범하지 않아서 앞서 나온 시의 단어와 문장을 중심으로 하나의 단락을 이루며 셰이드의 삶과 킨보트가 가지고 있는 셰이드와의 추억 그리고 젬블라 왕국의 마지막  카를 크사베리의 탈출기와 그를 암살하기 위해 쫓아다니는 야고프 그라두스의 이야기등 여러 방면으로 종횡무진 하고 있는 형편이라 정신을 바짝 차리고 이야기의 결을 섬세하게 훑지 않으면 지금  사람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나 갈피를 잡기가 어렵다내가 처음 읽을  그랬듯이, 멍하니 읽다보면  책에 나와 있는 모든 것이 그저 도통   없는 수수께끼가 되어버려 나보코프는 도대체  이런 소설을 썼나 하는 의문부터 들게 되는 것이다.

 

  재독은 필연이었고 목적은 당연히  이유를 찾아내는데 있었다그러한 과정 속에서 ‘창백한 불꽃 해석의 전장터라는  깨달았다셰이드가 시를 통해 전하고자 했던 것과 킨보트가 주석을 통해 알리고자 하는 것이 서로 달랐던 것이다셰이드가 ‘창백한 불꽃 썼던 것은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추정에 불과하다부모 곁을 먼저 떠나간  헤이즐을 기리기 위해서였다그가 시에서 이렇게 썼던 대로 아이의 존재도인간의 삶도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보여주는데 있었다

 

 마땅히 확신하건대우리는 살아남을 것이며

 사랑하는  아이도 어딘가에 살아 있을 것이다.(p. 91)


 그러나 킨보트에게  시는 자기 혼자만의 과거를 세계에 전하는 매개체였다현실에선 잃어버린 왕국을 시를 통해 되찾을  있는 그리고 문학이 가진 영원한 생명을 통해 비로소 회복한  성채를 영겁에 걸쳐 보존할  있는기회였다 마디로 그에게 ‘창백한 불꽃 헤이즐의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동시에 많은 추모 평론이 셰이드의 자전적 경험으로 이뤄졌다고 해석했듯셰이드의 것도 아니었다. ‘창백한 불꽃 킨보트 자신의 것이었다그는 그렇다는 사실을 주석에서 적극적으로 상세하게 설명해 나간다작가의 진짜 의도나 세간의 중론 따윈 그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진실은 왕처럼 하나일 수밖에 없고  진실은 오직 자신만이 알고 있으니까.

 

이런 단언에 친애하는 시인은 어쩌면 동의하지 않을지 모르나좋든 나쁘든 최후의 말을 하는 이는 바로 주석자다.(p. 36)


 ‘창백한 불꽃 이런 투쟁이 전개되고 있었다근원적인 측면에서 따져 보면 투쟁은 ‘네가 틀렸고 내가 옳다!’ 식의 하나의 의미로 고착화시키려는 움직임이다그러나 셰이드의 시는 원래 그런 목적으로 쓰여지지 않았다앞서 내가 헤이즐을 기리기 위해 썼다고 말했지만 사실 셰이드가  이런 시를 썼는지는 셰이드 본인만이 알고 있다고 해야 한다읽어보면 알겠지만 과연 하나의 총체적인 의미로 파악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당연히 들게 되는  난해한 시인 까닭이다어쩌면 시인조차  이유를 몰랐을 수도 있다왜냐하면 시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두운  나의  저서(자유시)였다. ‘밤의 파도소리

 다음에 나왔고그후에 ‘헤베의 술잔 눅눅한 사육제의

  마지막 꽃수레가이제 나는

 전부 ‘시집이라 명명하고더는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투명한 무언가는뭔가 달빛 방울 같은

제목이 필요하다도와주시오창백한 불꽃) (p. 90)



 대부분 제목을 자신의 작품을 파악했을 때 만든다는 점에서 시인 자신도 시가 가지는 진짜 의미에 가닿지 못하는 간극을 느낀 것이다거기서 도움을 호소하며 터져 나온 ‘창백한 불꽃 차라리 간구였으며 간극이 나타내는 시의 의미를 하나로 길어낼  없다는 일종의 항복 선언이었다또한 이는 딸이 죽음과 관련한 시구에서 보듯종결에 대한 거부도 있었다.

 

 하지만 킨보트는 전혀 다른 의미로 ‘창백한 불꽃 행한다.

 나는 나보코프가 ‘창백한 불꽃이란 제목을 감히 중의적 의미로 달았다고 생각한다하나는 앞서 말한, 하나의 의미로 고착되는  거부하는 걸 뜻하고 또 다른 하나는 킨보트가 하는 것과 같이  하나의 의미로 규정하는 것을 뜻한다. 후자에 있어 내가 생각하는 ‘창백한 불꽃 이미지란 다름아닌소설의 마지막(그러니까 원래 시에는 없는 1000행의 주석 부분) 나오는 셰이드의 삶을 끝장낸 암살자 그라두스의 총탄이 발사된 총구이다바로 거기서 터져나온더이상 스스로 다른 빛과 표정을 짓지 못하는 ‘창백한’ 시신으로 만들어 여지없이  하나의 의미로 박제해 버린 ‘불꽃’을 '창백한 불꽃'이 가리키고 있는 게 아닐까 한다.


 이것으로 내가 셰이드와 킨보트를 완전히 대척점에 두고 있다는 게 밝혀졌다. 

 한 쪽에는 문학을 보다 다양한 의미로 널리 타오르게 하려는 불꽃이 있고 다른  쪽엔 자신이 보다 진리에 가깝다는 확신으로  하나의 의미만 허용하려는 불꽃이 있는 것이다이런 면에서 오직 자신이 생각하는 의미대로 셰이드의 시를 구축하려는 킨보트의 몸짓은 그대로 암살자 그라두스와 전혀 다르지 않다. 나는 나보코프가 그걸 보여주기 위한 목적으로 그라두스의 이야기를 기입했다고 생각한다권위와 지식에 기대어 자기가 파악한 의미를 진리의 권좌에 앉혀 모두가 순종하기를 바라는우리 또한 어느 정도 공유하고 있을 지도 모를 성향을 대표하는 존재로 말이다킨보트가 셰이드 시에대 하고 있는 것과 그라두스가 카를 크사베리의 목숨을 빼앗으려 세계를 종횡무진하며 노력하는 것의 동일성은 킨보트와 그라두스가 각각 셰이드와 암살 대상에게 다가가려   겪는 과정 상의 곤란이 비슷하다는 것에서도 일면 드러난다킨보트가 셰이드에게 자신이 바라는 대로 시를 쓰도록 하려는 의도가 반복해서 실패하듯이 그와 발맞추어 카를 크사베리를 암살하려는 그라두스의 시도 또한 예기치 않게 좌절을 경험하는 것이다이런 과정의 닮음과 순서의 비슷한 배치로 그라두스가  다른 킨보트라는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데 그라두스에 대해 킨보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의 인물은 단순한 형태의 스프링과 코일로 내부가 작동하는 태엽장치 같은 인간이었다어쩌면 청교도라고 부를 만도 했다몸서리쳐질 정도로 단순한 어떤 근본적인 혐오감이 그의 둔감한 영혼에 스며들어 있었다그가 혐오한 것은 불의와 기만이었다그는 언어로 표현할 길이 없고 표현할 필요도 없을 만큼 무모하게  정열을 다해 둘의 조합 -  둘은 항상 붙어다니기 마련이지만 -  혐오했다 자의 어쩔  없는 어리석음에서 비롯된 부산물만 아니었다면그러한 혐오는 칭찬받아 마땅했다그는 자신이 이해할  없는 범위를 넘어서는 모든 것을 부정하고 기만적이라고 단정했다그는 통념을 숭배했는데자못 현학적인 침착함을 발휘한 숭배였다.(p. 189)

 

 그는 자신이 이해할  없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는 사람이다그런 것은 아예 존재해선 안된다고 여기는 인물이다. 오직 자신과 자신만이 아는 세계가 있을 뿐이다. 다른 것을 말하고 보여주는 타자는 있을 자리가 그의 왕국엔 없다. 그런데 킨보트가 원래 젬블라 왕국에서 만인지상의 자리에서 유아독존으로 군림하던 왕이었다는 걸 상기하면 이러한 그라두스의 모습은 킨보트를 보다 단순화한 것이라 해석해도 별 무리가 있을 것 같진 않다. 이렇게 우리는 킨보트와 그라두스를 자기 중심주의라는 범주에 같이 놓아둘 수 있다. 


 그 반대편에 셰이드가 있다. 나보코프는 이 대립을 셰이드의 딸 헤이즐을 통하여 더욱 강조한다.

 킨보트의 주석을 통하여 드러나는 헤이즐은 폴터가이스트 현상을 일으키며 기꺼이 유령과 소통하려는 인물로 묘사된다. 그만큼 헤이즐은 현실의 지배 영역에서 탈주해 있으며 한껏 타자 친화 또는 지향적인 존재다. 셰이드가 쓴 '창백한 불꽃'은 그런 딸이 영원하길 바라는 시였다. 이는 곧 문학이 어떤 권위나 지식으로 내리누르는 규정에 굴종하지 않고 그런 것이 없거나 부족하더라도 보다 많은 타자의 목소리에 스스로를 열어주는 존재가 되길 바라는 염원이기도 하다. 헤이즐과 관련된 너무나 기이해 보이는 서사는 바로 이러한 셰이드가 딛고 서 있는 자리의 선명한 부각을 위하여 들어간 것이라 나는 생각한다. 그건 바로 뒤이어 이어지는 킨보트의 해석이 아주 정반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까닭이다. 셰이드는 다음과 같은 문장을 통하여 유령을 목격한다.


 '유령 같은 형체로 응고된 어둡고 창백한 반점 덩어리가 현관 불빛이 가까스로 미치는 정원 벤치에서 몸을 일으켰던 것이다.(p. 235)(강조는 필자)'


 여기에 들어간 '창백한'과 '불빛'은 제목의 '창백한 불빛'이 어쩌다 나오게 되었는지 또한 어느 정도 추정하게 한다. 그런데 킨보트는 이걸 단순한 전기 현상에 불과하다고 주석을 단다. 불가해한 타자의 출몰과 그걸 그대로 존중하려는 문학에 대하여 과학이라는 도구로 타자를 아무 의미 없는 것으로 깨끗하게 제거해 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킨보트가 과학을 언급하니 헤이즐이 죽은 연도가 의미심장하게 눈에 들어온다. 그녀가 죽은 1957년은 소련이 세계 최초로 인공위성 스푸트닉 1호를 쏘아 올리는 것에 성공하여 미국인들이 이제 곧 공중에서 핵폭탄이 쏟아질지 모른다는 공포를 압도적으로 느꼈던 해이기도 하다. 그 때 미국은 오직 과학에 사활을 걸었다. 타자에게 자신의 자리를 기꺼이 내어주는 문학이 설 자리는 그렇게 점점 더 사라져 갔던 것이다. 헤이즐의 죽음은 바로 그런 것을 나타내고 있는 지도 모른다. 비록 셰이드는 사상과 사회적 배경을 무시하고 문학을 보라고 했지만 말이다. 그렇지만 셰이드의 이런 말은 그가 문학을 많고도 다양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타자 지향적인 존재로 보고 있다는 내 생각에 자신감을 충전하고 있다.


 예를 들면 ‘셸리의 문체는 매우 단순하고 훌륭하다라든지 ‘예이츠는 항상 진실하다’ 같은 해석 말이지이런 해석은 아주 만연해 있어서어떤 비평가가 어떤 작자의 진정성에 대해 얘기한다면 비평가나 작자 모두 바보란    있어.” 킨보트 : “하지만  고등학교에서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법을 배운다고 들었는데요?” “바로 거기부터 빗자루로 쓸어버리듯 뜯어고쳐야  아이에게 서른 과목을 가르치려면 서른 명의 전문가가 있어야 한다네중국이나  밖의 다른 것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고경도와 위도 차이도 설명할  없어 달랑  사진   보여주며 그게 중국이라고 귀찮은  말하는 여선생은 없어야지.”(p. 194)


 이제 오직 수수께기로 가득차 보였던 '창백한 불꽃'이 내밀하게 간직한 속뜻을 내게 조금 드러내는 것 같다. 문학에 대한 태도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것이며 그건 타자에 대한 태도와 동일하다는 것을.

 

 이토록 문학이 윤리와 결부되어 나타나는 것은 실제로 그의 아버지가 러시아 극우파 테러리스트에 의해 암살 당했다는 자전적 경험에서 연유하기도 하고, 이 소설 전에 나온 '롤리타'가 오로지 소재로 오해를 받아 큰 논란으로 미국과 영국에서 출판이 금지된 상황에서도 비롯되기도 할 것이다. 그러므로 단순히 오래 살아남는 작품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의 문학 작품이나 한 사람의 타자를 대한다는 것이 한 명의 스승을 대하듯 겸허하고 신중해야 한다는 것을 독자로 하여금 직접 겪도록 하기 위해 '롤리타'도 그렇고, '창백한 불꽃'도 그렇고 이처럼 자신의 이해와 공감을 초월하는 것이라도 마음을 열고 받아들일 수 있는 이들에겐 신선한 자극과 그 못지 않은 터득의 즐거움을 선사하는 암호를 작품마다 계속 누비고 있는 것이리라. 그러고 보니 타자에 대한 책임을 강조했던 철학자 레비나스는 스승을 섬기는 것이 불가능한 자는 텍스트도 읽을 수 없다고 말했다. 우치다 타츠루가 쓴 '레비나스와 사랑의 현상학'에 나오는 얘기인데, 그 이유를 인용하자면 이러하다.


 스승이라는 이름을 가진 한 사람의 '타자' 안에 무한의 예지가 숨어 있으며, 그 일거수일투족 모두가 예지의 기호라는 '신화'를 수용한 자 앞에 비로소 텍스트는 열린다. 그것은 '스승을 섬긴다'고 하는 행위와 '텍스트를 읽는다'고 하는 행위가 똑같은 하나의 지적 모험을 의미하기 때문이다.(같은 책, p. 44)


 '창백한 불꽃'이 주고자 하는 태도가 이와 틀리지 않을 것이다. 소설의 마지막은 다음과 같은 킨보트의 독백으로 끝난다.


 그러나 어떤 일이 일어나고 어디에서 그 장면이 펼쳐지든, 누군가가 어디선가 조용히 출발할 것이다-아니, 누군가는 이미 출발했고, 아직은 좀 더 멀리 떨어진 곳에서 표를 사고, 버스 배 비행기에 오르고, 착륙하고, 백만 명의 사진사를 향해 걸어가고, 결국 내 초인종을 울릴 것이다. - 더 크고, 더 훌륭하고, 더 유능한 그라두스가. (p.371)


 타자를 스승으로 섬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스승으로 군림하려 하는 한, 독선과 묵살로 이어지는 비극의 연쇄는 끝나지 않을 것임을 암시한다. 이것까지 보고나니 홀로 타오르는 거대한 불꽃보다 미미하지만 저마다 다른 색깔과 형상으로 타오르는 작은 불꽃들을 더 자세히 들여다보고 소중히 여겨야겠다고 절로 다짐하게 된다. 아주 작은 반딧불들이 더위로 숨막히는 여름밤을 아주 낭만적인 풍경으로 뒤바꾸듯, 그 어디에 나의 세계를 확장하고 성장시키는 스승이 깃들어 있을지 모르는 일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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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지 소녀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76
앨리스 먼로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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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구나 자신의 삶을 의미로 충만하게 채우고 싶어한다.

 하지만 정작 어떻게 채워야할  모를 때가  많다대부분 우리가 선택하는 방법은 모방이다남이 원하는 것을 따라 원하고 다들 바라는 것이니 좋은 것이겠거니 정당화 한다거지는 남의 것을 통해 자기 존재를 지속하는 사람이다언제나 타인을 모방해 자신을 형성하는 우리들은 그런 면에서 거지나   다를  없다앨리스 먼로의 비교적 초기작에 속하는 거지 소녀 로즈란 여성을 중심으로 자신의 자아를 만들어 나가는 과정을 담는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여기는 이유는 여기엔 모두 열 편의 이야기가 있는데 로즈 삶의 시간 순서에 따라 배치되어 있기 때문이다.  과정 속에서 그녀가 자기 자아의 형성과 유지를 위해 선택하는 방법 역시 모방이다.

 

 그녀는 언제나 양극단 사이에서 뭔가를 선택할 것을 강요받는다.

 어릴 때는 새엄마 플로처럼 아버지(혹은 어른) 원하는 모습이  것인가 아니면 자신만의 고유한 모습이  것인가 사이에서 그랬고(장엄한 매질) 학교에 들어가서는 프래니 맥길처럼 타고난  모습을 절대적 한계로 받아들이고 부조리한 세상의 공격에 그대로 순응할 것인가 아니면 코라처럼 사생아라는 사실과 변기 치우는 것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가정 환경이라는 한계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주체를 당당하게 만들어  것인가 사이에서 그랬다(특권). 자라서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아서 고등학교에 들어갔을 자기 마을에만 있었을 적엔 인지하지 못했던 자신의 가난이 부유한 이들과 비교되어 눈에 들어왔으며(자몽  처음으로 홀로 기차를 타고 토론토로 갔을 때는 결백한 모습으로 위장하고 다가온 수치와 비루함 앞에서 용기있게 그것을 내치느냐 아니면 굳이 해가   없다고 여기고 순응하느냐 사이에서 번민해야했다(야생백조). 그런 상황과 그녀의 선택은 결혼을 앞두고도 달라지지 않아서 함께  시간이 길어질수록 느는  실망 뿐이라 사랑하지 않는다는  알면서도 패트릭의 청혼을 정말  존스의 그림인 ‘코페투아왕과 거지 소녀 거지 소녀처럼 수동적으로 받아들였으며(거지 소녀) 이러한 수동성은 자신이 너무 부유한 것에 대한 죄책감이 반대편에 있는 이들에 대한 선망으로 굴절되어  매력적으로 다가온 불륜의 유혹 앞에서도 마찬가지였고(장난질) 패트릭과 이혼  보다  주체적으로 자기 삶을 꾸려야 했을 때조차 불륜남 톰과 함께 자기 욕망을 실현하느냐 아니면  애나에게 엄마의 책임을 다하느냐 사이에서도 변함없이 이어졌다(섭리).  모든 순간에 로즈는   번도 자신이 상황을 능동적으로 이끌어  적이 없었다언제나 상황의 압박 속에서 사회가 자신을 어떻게 바라볼지 경계하면서 그들이 보기에 좋을 방법을 선택했던 것이다그러나 그녀가 바라는 것은 얻을  없었고 반복된 실연의 아픔 속에서  ‘기다리는 에서 벗어날  없었다어느덧 중년에 이르러 혼자만의 삶에 보다 뿌리를 내린 뒤에도 로즈는 여전히 세상이 정한 궤도를 벗어나 고유한 자신의 존재를 용기있게 드러내는 ‘야생 백조 되지 못한다(사이먼의 행운). 

 

 페인트칠한 돔형 지붕과 기둥들이 그녀의 눈꺼풀 안쪽에 비친 장밋빛 하늘 위로 경이롭게 떠다니다 축포를 터트리듯 산산이 흩어졌다새떼가심지어 야생백조떼가커다란 돔형 지붕 밑에서 깨어나 지붕을 뚫고 폭발하듯 하늘로 솟구치는 모습 같다고도   있었다.(‘야생 백조’, p. 121)


 그녀는  외롭고 사람들의 초대를 받길 바라며(p. 277) 배우라 얼마든지 그들이 원하는 모습이 되어 섞여들어갈  있을(p. 278) 정도가 되었지만 바라는 행복은 아직도 요원하기만 하다급기야 어린 시절부터 자기 삶을 항성처럼 지탱해주던 플로가 치매에 걸리고 자신을 매혹했던 그토록 독립적이며(많은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흑인을 검둥이로 불렀을 정도로(p. 335)) 강했던 존재감마저 이제 과거지사가 되어버린다(스펠링). 그와 똑같이 개인이 가진 고유한 개성을 정해 놓은 규격에 맞춰 몰개성으로 희석시켜 버리는 사회의 행위를 가장 대표적으로 보여준다고   있을만한 행진에서 항상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신의 존재를 가감없이 내보였던 밀턴 호머도자기 것을 내려놓고 타자를 중심으로 그의 것을 받아들이고 헤아리려는 사람보다 자신의 생각을 - 그것이 설령 선입견이라  지라도 -  많이 관철시키려는 미스 해티 같은 이들이 많아지는 흐름 속에서 서서히 자취를 감춰간다그것은 밀턴 호머를 따라하며 그것으로 자신의 독립적인 존재감을 드러내던어린 시절 밀턴 호머의 신도라는 것을 남몰래 공유했던 친구이기도  랠프 길레스피의 죽음으로도 드러난다.( 도대체 네가 뭐라고 생각하니?)


  편의 이야기에 나타난 일련의 모습을 보다보면 모방 외엔 달리 선택할 것이 없어 보인다. 후반의 밀턴 호머와 랠프 길레스피에서 현저하게 드러나듯, 세상은 점점  고유한 개성과 독립성으로 무장하려고 하는 주체들에게 가혹적으로 굴고 그런 존재들을 자기가 먼저 선택하지 못하고 마냥 코페투아왕의 간택을 기다려야만 하는 그림  거지 소녀로 만들려고 하는  같기 때문이다처음으로 자신의 고유한 개성을 포기하도록 만들었던 아버지의 ‘장엄한 매질 내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밀턴 호머란 이름 자체도 그걸 나타내기 위해 만든 게 아닐까 싶다사라진 낙원을 뜻하는 ‘실락원   밀턴과 자신의 진짜 고향을 상실한 오디세우스의 이야기를  호머의 이름을 합친 것이니까 말이다. 그러고 보니, 이 소설이 나온 1970년대 후반은 베트남 전쟁의 여파로 사회가 급속도로 보수화가 되어가던 무렵이기도 했다. ‘장엄한 매질에서 아무  없는 베키의 아버지타이드 노인을 오직 풍문에 근거하여 무자비하게 구타했던 해트 네틀턴이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 이제는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유일한 고리가 되어 마치 그런 일은 일절 없었던 것처럼 회고하는 것과도 같이 과거는 미화되었고 오로지  좋은 과거를 복원하기 위하여 기성의 권위에 존중할 것만 요구되었던 시절이었. 당연히 자신만이 가지는 개성 혹은 차이는 쉽사리 드러낼 수 없었다. 60년대 꽃피웠던 히피즘은 말할 것도 없고 7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활발했던 흑인과 여성 중심의 운동 역시 어느새 얼어붙고 말았다. 소설은 그런 분위기에 예민하게 감응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토록 자신의 존재를 형성하고 유지하는 것이 협소한 범위로 획일화 되자 ‘거지 소녀에서 패트릭의 가족들이나 ‘장난질 나오는 산부인과 병동의 여성들처럼 사람들은 오직 타인에게 인정받을  있는 직업이나 타인이 소유한 것을 모방한 소비를 통하여 자신을 입증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거지 소녀  빈곤함의 채록이기도 하다.


  결과 무엇이 남았는가?

그건 ‘장난질에서 성공한 클리퍼드와 조슬린 부부가  보여주듯허망함이며 ‘거지 소녀에서  훗날 우연하게 재회한 패트릭이 로즈에게 선명하게 보여준 것처럼 적의 뿐이다오직 타인의 시선을 중심으로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자신의 고유한 가능성을 소진시켜  자들은 현재 자신의 모습이 불만족스러운 까닭에 대해서도 더이상 자기 내부에서 찾아낼  없기 때문에 그저  비어있는 자신을 느끼거나  탓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나아가 로즈가 조슬린 부부를 혐오하면서도 다시 찾아가는 것처럼 잇달아 실패를 안기는 삶을 타협과 포기로 계속 짊어지고 가는 과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현재의 라는사실은 지속성의 잔재에 불과할 뿐인 모습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며 때론 마치 숙명이라도 되는 것처럼 매달리게 되는 것 역시 이러한 수동성에 너무 길들여져 버린 탓인 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리 사회의 압박 강도가 심해지더라도 이제 어쩔 수 없다면서 쉽사리 두 손을 들 수 없다. 이런 삶의 궤적이 도달하는 곳에 무엇이 있는지 또한 그런 삶이 가져오는 고민과 피로의 증폭을 소설을 통하여 너무나 잘 알게 된 까닭이다. 다행히도 소설은 어느새 자신이 육중한 감옥에 갇혀 있다는 것을 깨달은 우리들을 위해 탈출할 수 있는 단서 또한 헨젤과 그레텔의 빵조각처럼 놓아두고 있었다. 그건 물론 스스로 자신의 독립성을 쟁취하는 쪽으로 이어졌다. 이를테면 로즈가 '장난질'에서 클리퍼드와 불륜을 저지르기 위해 한없이 낯설고 홀로 배회하는 여성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는 '파월리버' 기꺼이 찾아갔던 것처럼 말이다. 파월리버는 어떠한 곳이었나?


 파월리버는 실재하는 장소가 아니라 죄지은 여행자들이 잡혀서 형벌을 받는 악취나는 신기루다. 그녀는 정말로 놀라지도 않았다. 해서는 안되는 점프를 했고, 그래서 이곳에 착지하게 되었다.(p. 220)


 그러한 죄지은 땅으로 과감하게 뛰어든 로즈는 행진에서 조롱과 경멸의 시선에 아랑곳 하지 않고 자신의 고유한 존재를 한껏 드러내는 밀턴 호머와 많이 닮았다. 바로 이러한 시도들이, 사회가 규정한 것에 속박되지 않고 그것과 반대되는 것이라 하더라도 자신을 고유한 주체로 만들어 줄 수 있는 것이라면 매혹의 대상으로 삼고 실천까지 반복해서 감행한 것이 계속된 실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조슬린 부부의 허망함에 물들지 않고 자신을 유지시켰을 뿐만 아니라 패트릭이 지녔던 적의와 거꾸로 더욱 타인의 곁에서 타인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만든 힘이 되어 준 것이다.


 그 결과, 우리는 '스펠링'과 '넌 도대체 네가 뭐라고 생각하니?'에서 과거와 좀 달라진 로즈의 모습을 본다. 이전까지 로즈는 자기를 위해 남의 곁에 붙어 있으려는 존재였지만 이제는 타인을 위해 타인 곁에 남을 수 있는 존재가 된 것이다. 일방적인 모방의 단계에서 서로가 대등한 대화의 관계로 진입한 것과도 같다. 거기서 로즈는 이제 자기만의 고유햔 주체성을 구축할 기억들을 쌓기 시작한다.


 로즈는 이에 대해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으며, 자신이 이야기하지 않음으로써 고이 간직하는 것이 단 하나라도 있어서 기뻤다. (...) 그녀는 랠리 길레스피와 자신에 대해 무엇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그의 삶을 가까이에서, 여태 사랑했던 남자들보다더 더 가까이에서 느꼈다는 것, 자신의 자리 바로 옆 칸에 존재한다고 느꼈다는 것 말고는(p. 369)


  이런 로즈의 변화는 결과에 연연하지 말고 감행하라는 권유로 새기게 만든다. 플로의 경고로 대변되는 사회의 지속적인 위협에 주눅들지 말고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에 대담하게 뛰어들라는. 코페투아왕과 거지 소녀의 관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오직 거지 소녀 자신 뿐이라고 말이다. 

 이제 말하는 바이지만 앞에서 내가 말한 로즈의 수동성은 엄밀한 의미에서 전적인 수동성만은 아니다. '장엄한 매질'에서 로즈가 자신을 때리는 아버지에게 취했던 연기처럼, 그리고 '야생 백조'에서 몰래 자신의 다리를 만지는 노인 목사에게 온전히 당하지만은 않은 것처럼 스스로 어느 정도 주도적으로 참여한 게임이라고 보는 게 보다 정확하다. 

 왜냐하면 아버지가 자기 역할을 연기하며 보여주는 지독함과 과장을 로즈 역시 똑같이 보여주며 자신의 역할을 연기해야   같았기 때문이다그녀는 폭력의 피해자 역할에 마음껏 몰입한다그로써 그녀가 불러일으키는혹은 불러일으키기를 희망하는 감정은 마지막에 가서 아버지가 진저리치며 보여줄 경멸이다.(p. 38)


  작가가 로즈에게 배우란 직업을 준 것도 이와 연결되지 않을까 한다. 배우란 수동성과 능동성이 하나의 절충을 이루는 존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배우란 대중의 공감을 얻기 위해 그들이 바라는 모습을 연기해야 한다. 그러나 무조건 그들의 구미에 맞춰야 하는 건 아니다. 배우는 그들이 원하지 않는 모습도 뛰어난 연기를 통해 공감을 끌어낼 수 있으며 그것으로 대중의 생각과 취향을 바꿀 수 있다. 이런 식으로 말이다.

 

 서해안 지역 사람들 모두가 입에 달고 다니는 말은 ‘연약이었다그들은 오늘  연약해진 느낌이 든다거나 연약한 상태에 처해 있다는 식으로 말했다 아니에요로즈는 말했다 내가 오래된 말가죽으로 만들어졌다는  분명하게 느껴져요초원의 바람과 햇볕에 피부가 그을리고 거칠어졌다그녀는 말가죽이란 말을 강조하기 위해 자신의 주름진 갈색 목덜미를 찰싹 쳤다벌써부터 그녀는  연기하게  인물의 말투와 버릇을 조금씩 따르기 시작했다.(p. 311)

 소설은 로즈가 배우로 꽤 많은 유명세를 얻었다고 밝히고 있으므로 이렇게 연약한 것을 바라는 사람들에게 말가죽처럼 질기고 강한 면모를 보였어도 성공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휘둘리지 않는 것. 내가 아무리 자의대로 할 수 없는 협소한 상황에 있더라도 마냥 수동적으로 끌려가기 보다 비록 조금이나마 내 주체성을 발휘해 보려 노력하는 것이 소중하다고 믿는 것과 이를 위한 모든 시도가 설령 바라는 것만큼 빨리 보상을 받진 못한다고 하더라도 언젠가는 분명 훌륭한 자양분이 되어주리라고 낙관하는 것도 그리 힘들 것 같지 않다.

 소설은 처음 로즈의 삶을 거울처럼 충실히 비춰 보여주지만 들여다보면 볼수록 어느새 그 거울 앞에 우리가 서 있음을 알게 된다.
 삶의 의미를 채우기 위해 로즈가 취했던 방법이 우리와 그리 다르지 않고 그로 인해 가졌던 패배와 아픔의 기억 역시 어느 정도 공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자문하게 만든다. 우리는 지금 어떠한 방법으로 삶의 의미를 채우고 있으며 만일 지금 내가 비루함과 고통을 겪고 있다면 그건 과연 어디서 연유하는 것인지, 행여 나 또한 무분별한 모방 속에 수동적으로 끌려가기만 하는 삶을 살고 있는 건 아닌지 하고 말이다. 더구나 지금의 세상이란 얼마전에 작고한 지그문트 바우만이 '레트로 유토피아'라고 말했을 정도로 과거의 모습과 권위에 집착하고 남들의 편견에 별 비판없이 동조하여 무리를 이루어 거기에 속하지 않은 존재들은 배척하라는 선동과 가짜 뉴스가 날뛰는 판이니 더욱 이 질문을 예사롭지 않게 새기게 된다. 거기에 대한 해답을 강요하지 않고 등장인물의 심리와 삶의 정경에 대한 섬세한 재현을 통해 독자를 차분하게 몰입시킨 가운데 스스로 찾아가도록 하는 이 소설은, 소설이 나왔을 때보다 상황이 더 심각해 보이는 오늘날 더 귀를 기울여야 하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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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에 가기로 한 메르타 할머니 메르타 할머니 시리즈
카타리나 잉겔만 순드베리 지음, 정장진 옮김 / 열린책들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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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

 너무나 많이 듣는 말이다. 그런데 그토록 많이 들으면서도 한 번도 이런 의문은 가져보지 않았다. 왜 소년만 야망을 가져야 하는 거지? 노년은 야망을 가지면 안 되나? 왜 이런 의문이 들었는가 하면, 카타리나 잉엘만순드베리의 '감옥에 가기로 한 메르타 할머니'를 읽었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혁명을 꿈꾸는 할머니의 이야기인 까닭이다. 사람들은 말했다. 노년이 야망을 품으면 노욕(老慾)이라고. 늙어서 그러는 건 너무 추하다고. 하지만 이 소설은 정반대로 말한다. 꿈이든 야망이든 사랑이든 그런 건 모두 나이와 전혀 상관 없다고. 혁명도 얼마든지 꿈꾸어도 좋다고. 그 할머니의 이름은 메르타 안데르손. 그녀는 다이아몬드 요양원에서 보호라는 미명 하에 행해지는 온갖 금지 속에 갇혀 있다. 예전에 그녀는 농부였다. 억센 두 손으로 가축도 기르고 작물도 생산했다. 자기 스스로 뭐든 만들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현재는 그러지 못한다. 먹고 싶은 것도 못 먹고 하고 싶은 것도 못 한다. 잠자는 시간조차 정해져 있다. 그야말로 다시 혼자서는 아무 것도 못 하는 어린 아이로 돌아간 것만 같다. 내가 끌기 보다는 남에게 끌려가기만 하는 생활. 당연하게도 이런 자신이 못 미더울 수밖에 없다.


 여기, 노인 요양소에 들어온 이후로는 자기가 생각해도 이상할 정도로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어쩌다 이렇게 무기력하게 변해버렸을까? 국민들이 자기 나라 정부와 의견 일치를 보지 못할 경우 국민들은 혁명을 일으킨다. 여기서도 혁명을 일으켜야 할지 모른다. 메르타는 <거의 언제나, 꿈은 이루어진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메르타는 이 믿음이 조금 두렵기도 했다.(p. 15)


 그녀는 다시 한 번 그 믿음에 기대어 보려고 한다. 자기 삶의 주인이 되기 위해서. 그러나 바란다고 해서 다 되는 건 아니다. 메르타처럼 꿈을 이루기가 요원한 장소에 있는 경우엔 더 그렇다. 자신이 원하는 감을 따고자 한다면 직접 장대를 사용해 가지를 흔들지 않으면 안된다. 혁명이 행위로 완성되듯이 오로지 적극적인 실천만이 자신이 바라는 곳으로 데려다 줄 수 있는 것이다. 다행히 우리 메르타에겐 과감한 실천력이 있다. 하늘이 무너져도 쥐구멍을 찾아내는, 아니 찾아내고야 마는 사람이다. 그녀는 사람을 모으고 함께 금지를 위반해, 거기서 오는 자유와 쾌감을 통해 반기의 즐거움을 동료들에게 전염시킨다. 그렇게 하나의 그룹이 형성된다. 장차 다이아몬드 요양원만이 아니라 스웨덴 전국의 노인 요양원 전체를 뒤바꿀, 진정한 의미의 혁명을 갖고 올 그룹이.


 애초엔 감옥에 가기 위해서였다. 자신들을 전혀 주체로 인정하지 않는 요양원의 처사에 반발해서였다. 감옥의 간수는 적어도 죄수를 어린아이처럼 대하진 않으니까. 다시 말해 메르타와 그녀의 동료들은 어린아이로 길들이려는 요양원의 행태에 지쳤던 것이다. 


 메르타가 바르브로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저 젊은 것은 노는 게 뭔지 도통 몰라! 어린아이들도 잔치를 하면 밤새 놀고 그러잖아! 우리에겐 그럴 권리도 없다는 거야."

 천재가 입을 열었다. "규칙을 아주 정확하게 지켜야만 기분이 좋아지는 그런 사람들이 있게 마련이야."(p. 525)


 그건 그들의 성미에 전혀 맞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 자신의 세계를 가진, 주체적인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선원 출신 갈퀴는 각종 꽃과 허브를 길렀다. '천재'라 불리는 오스카르 크루프는 온갖 물건들을 발명했다. 사서가 되는 게 꿈이었지만 여성 모자를 만드는 디자이너가 되었던 스티나는 회화에 몰두했다. 평생 은행에서 일하다 은퇴한 안나그레타만이 다소 보수적이었다. 하지만 그녀 역시 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늘 정해진 궤도만 따라 살던 사람에겐 위반이 더 큰 의미와 즐거움으로 다가오게 마련이므로. 그리하여 그들 모두 메르타에 뜻에 동조, 감옥에 가기 위하여 범죄를 지으려 했다.


 감옥, 그 곳은 평범했던 그들의 인생에서 무진장 멀리 있는 장소였다. 그러므로 그런 곳에 스스로 간다고 하는 것은 구획된 삶에서 탈주하는 것과 같다. 프랑스의 철학자 들뢰즈는 이 탈주를 무엇보다 주체가 되는 행위라 보았다. 왜냐하면 우리는 마치 화단에 심어 놓은 꽃처럼 사회가 정한 위치에서 그가 부여한 정체성에 갇혀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반복된 일상이 형성하는 사회적 정체성의 중력으로 어느새 무엇이 진짜 자신인지 모르게 된 우리들은 사회가 씌어준 가면을 나의 진짜 얼굴로 여기며 벗어날 줄 모른다. 탈주란 그 예속의 상태에서 스스로 빠져나오는 것이다. 사회가 정한 자리가 아니라 내가 정한 자리에서 뿌리 내리려는 움직임이기에 주체적인 행위가 되는 것이다. 


 작가는 그러한 탈주의 강조를 위하여 보통 사람들의 비정상의 장소로써 '감옥'을 가져왔을 것이지만 그 하나의 의미만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메르타 일행이 막상 감옥에 가보니 요양원과 그리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요양원에 바르브로가 있다면 감옥엔 리사가 있듯이, 어디서나 개인에게 주체의 역량을 빼앗고 명령을 잘 따르는 아이로 길들이려 하는 건 똑같았던 것이다. 이러한 동일성으로 작가는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일단 마음을 먹고 작은 실천이라도 하다보면 탈주는 이뤄지는 것이며 장소따윈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고 말이다. 즉 메르타와 '노인 강도단' 동료들이 모여서 범죄를 모의하고 그것을 하나하나 실천해 나가는 그 순간, 그들은 이미 예전의 그들이 아니게 된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뭘 해야 하지?

 이 세상에서 가장 성가신 노인들이 돼보는 거야.(p. 54)


 정말 그들은 그런 존재가 되었다. 감옥에서의 그들 모습만 봐도 알 수 있다. 노쇠한 몸에게 어디서든 공격이 이뤄질 수 있는 감옥은 그야말로 공포의 장소다. 하지만 메르타 일행은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다. 감옥은 오히려 메르타는 더 원대한 꿈을 꾸고 천재는 다른 사람의 범죄 방법을 배우며 몸을 젊게 가꾸는 등, 더 능동적인 주체로 만드는 토양이 될 뿐이다.


 이처럼 요양원의 금지된 문을 열 수 있는 마스터키는 이미 자기 내부에 있다. 안주하지 않고 탈주를 감행할 때 열쇠 또한 이미 손에 쥐어져 있는 것이다. 소설 초반, 가장 먼저 능동적인 주체가 된 메르타가 하필이면 모든 문을 열 수 있는 마스터키를 훔치게 되는 건 그런 의미다.


 그런데 왜 작가는 이러한 탈주를 강조하는 것일까?

 아마도 그건 우리가 타인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보다는 미리 형성되어 있는 정형화된 이미지로 바라보기 때문일 것이다. 성별, 인종별, 종교별 그리고 연령별. 저마다 우리가 직접 경험한 데서 오지 않은, 누군가 주입한 이미지가 분명히 존재한다. 그리고 자주 우리는 거기에 따라 판단한다. 우리는 이런 걸 선입관이라고 한다. 소설에서 메르타 일행이 고가의 명화 두 점을 훔칠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사람들의 선입관 덕분이었다. 노인은 약하고 수동적이라 범죄 행위 같은 건 감히 꿈도 꿀 수 없다는, 이러한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선입관이 경비원으로 하여금 메르타 일행을 범행 현장에서 뻔히 보고도 그냥 가게 한 것이다. 이런 장면에서 우리는 깨닫는다. 우리의 선입관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 


 그러고 보면 메르타 일행이 하필이면 범죄를 저지르게 한 것도 의미심장하다. 그동안 우리가 보아온 수많은 범죄 영화에서 노인들은 은행 같은 곳에서 범인들의 총구 앞에 덜덜 떠는 존재이거나 갑자기 목숨의 위협을 받게 되어 주인공으로 하여금 활약하게 만드는 계기였지 이렇게 범죄 행위의 주축이 된 적은 거의 없었다. 특히 메르타 일행이 저지르는 것과 같은 강탈 행위에선 더욱 그랬다. 갑자기 횡단 보도 위로 넘어져 주인공의 활약을 방해나 하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작가가 허다한 범죄 중에서도 절도와 은행 강도 같은 강탈 행위를 가져온 건 바로 그 때문이 아닌가 한다. 이걸로 영화가 노인에게 반복적으로 형성한 관습적인 이미지를 통렬하게 깨뜨리려는 것이다. 이러한 작가의 마음은 다음과 같은 메르타의 생각에 잘 드러나 있다.


 우리는 모두 웃는 얼굴 밑에 참으로 많은 것을 숨기고 산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웃음에 얼마나 잘 속는가!(p. 45)


 다시 말해, 우리는 자신도 사회가 씌어 놓은 가면을 진짜 얼굴로 여기지만 타인을 볼 때도 가면인 줄 모르고 진짜 얼굴로만 여기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이중의 어리석음 속에서 우리는 기성복처럼 양산된 가짜 얼굴에 안주하며 그 아래에 있는 맨얼굴을 들여다보려고 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대로 사회가 이식(移植)한 자리를 마냥 있어야 할 내 자리로 알고 살아가는 것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평생 누군가 씌워준 가면을 진짜 얼굴로 여기고 살아가는 것만큼 비극적인 것도 또 없다. 그러므로 작가는 이 소설로 그 가면을 벗기려는 것이다. 우리가 가진 진짜 얼굴이 드러나도록. 그리하여 탈주를 강조한다. 탈주란, 다름아닌 그 가면을 벗기는 행위이니까.

 스티나가 덧칠한 것을 벗겨내자 비로소 진짜 명화가 드러났던 것처럼.


 노인의 야망을 노욕이라 부르는 것도 선입관이다. 어떤 나이든간에 자신의 가능성을 한껏 실현할 수 있는 기회를 제한해선 안된다. 탈주로 주체가 되기 위해서 장소가 전혀 중요하지 않았듯 나이 또한 그런 것이다. 그 어떤 선입관 없이 사람은 다만 그 자체로 이해받아야 하고 존중받아야 한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겉모습이, 거기에 덧칠된 선입관이 점점 본질을 압도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특히 성별과 인종, 국적과 계층 그리고 세대에 있어 그런 것이 더 심해지고 있다. 그 사이에서 오고가는 혐오와 적대의 말들이 얼마나 많은가? 이런 말들의 지옥을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어떤 범주에 속하는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오직 거기 있는 단 한 사람으로 보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선입관에 물든 가면을 벗기고 그 사람만의 진실된 얼굴을 보려고 해야 한다. 메르타의 탈주는 그 직시(直視)를 위한 궤적이다. 그러므로 더욱 열렬히 응원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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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30 02:2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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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01 20:4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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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말의 희망 패트릭 멜로즈 소설 5부작
에드워드 세인트 오빈 지음, 공진호 옮김 / 현대문학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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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말의 희망'은 베네딕트 컴버배치 주연의 드라마로도 만들어진 바 있는 패트릭 멜로즈 시리즈의 세 번째 작품이다. 에드워드 세인트 오빈의 이 시리즈 소설들은 지금까지 계속 반어적인 제목을 달았다. 1권의 제목은 '괜찮아'였는데 정작 소설을 읽어보면 전혀 괜찮지 않은, 아닌 괜찮을 수 없는 이야기였고, 두 번째는 '나쁜 소식'이었지만 그 소식의 주인공인 죽은 아버지와 주인공 패트릭 멜로즈의 관계를 생각하면 결코 나쁜 소식이 아니었다. 이번의 제목인 '일말의 희망' 역시 반어적이다. 소설은 단 한 번도 일말의 희망을 보여주지 않으니까 말이다. 절망의 어둠만 더 깊어질 뿐이다.


  아버지가 죽고 8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청년기는 지나갔지만, 그 자리에 성숙의 흔적은 없었다. 슬픔과 탈진이 증오와 광기를 숨기는 경향을 성숙이라고 하지 않는 한은 그랬다.(p. 17)




 그 절망의 출처는 어디인가?
 바로 패트릭 멜로즈가 참석하게 된 파티에 있다. 패트릭 멜로즈의 소설들은 언제나 하루의 시간을 담는다. 이번 소설 역시 그 파티가 열렸던 하루를 담는다. 1권과 3권을 모두 읽은 분들이라면 두 소설이 어딘가 닮아있다는 것을 느끼게 될 지도 모른다. 1권은 멜로즈의 아버지가 주최했던 저녁 만찬이 중심이었다. 그 만찬은 남을 지배하는 것을 좋아하는 아버지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우주와 다를 바 없었다. 그 날 주인공은 아버지에게 자기 삶에서 가장 커다란 고통을 겪는다. 그 고통은 아버지가 중심인 세계가 자신을 위해서 타인을 가차없이 짓밟는, 아주 이기적인 우주라는 사실을 증언한다. 그런데 3권의 파티 장면도 이와 별로 다를 바 없다. 일단 파티의 주최자 소니를 비롯하여 거기에 참석하는 니콜라이를 비롯권력의 정점을 상징하는 존재이기도  마거릿 공주가 보여주는 모습이 1권의 데이비드가 보여주는 모습과 그리 다르지 않는 것이다파티의 참석자들은 패트릭에게 "자네가 데이비드의 아들이군."하는 식으로 말을 걸어 패트릭에게 내내 8 전의 죽은 아버지를 상기시킨다이것은 또한  파티의 세계가 실은 아버지 데이비드가 만들었던 세계와 닮은 꼴이라는 것을 패트릭에게 주지시키는 것이기도 하다파티에서 오고가는 말을 세세하게 담고 있는  소설은 소위 돈과 권력을 가진 영국의 상류층들이 아래 계층 사람들을 얼마나 하찮게 보고 있는가를 독자들에게 끊임없이 각인시킨다  압권은 마거릿 공주다공주가 파리 대사에게  모욕은 그대로 1권에서 패트릭이 당한 고통을 어느 정도 상기시킨다.

 에드워드 세인트 오빈은   파티를 가져왔는가?
 소니의 파티가 데이비드 저녁 만찬의 확장판임에 다름 아님을 떠올려볼  그것은 패트릭에게 고통을 안겼던  세계가 실은  가정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인 것임을 보여주려고 했던  아닐까 싶다다시 말해 소설에서 오빈은 영국의 상류층이 가진 저열한 의식을 자신의 자전적 경험을 통해(소설에 묘사된 마거릿 공주의 모습은 실제 모습을 많이 가져왔다고 작가가 밝혔다고 한다.) 낱낱이 까발리려 했던 것이다. 독자로 하여금 이런 사람들이 지배하는 영국에 과연 일말의 희망 같은  있을까 자문하도록 하기 위하여. 그런데 패트릭은 쉽게 이 세계를 떠나지 못한다. 가지 않으려 했다가 결국은 이 파티에 참석하는 것처럼. 그렇지 않아도 그는 소설 초반에 평생 두 곳에 동시에 있어야 할 필요 때문에 지쳤다(p.14)고 말한다. 아버지 세계를 증오하면서도 한 편으론 떠나지 못하는 자신을 빗댄 것이 아닐까 한다. 희망의 부재는 그 어정쩡함에 있다. 패트릭이 소설의 마지막에 바라봤던 백조처럼 아버지 세계에 발을 들이밀고 있는 한 아무리 구원을 찾으려 노력을 해도 그것은 무용한 여정인 것이다. 그러므로 소설은 일말의 희망이 어디에 있는지 거꾸로 보여주는 셈이다. 아버지 세계와의 결연한 결별에 존재한다는 걸 말이다. 다음에 이어질 네 번째 작품의 제목은 '모유'다. 이것은 패트릭이 이제 아버지의 세계를 떠나 어머니의 세계에서 구원의 가능성을 모색한다는 뜻일까? 진실은 아마도 직접 책을 읽어봐야 알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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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13 02: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소설을 읽을 때 혹시 이런 생각 해 보신 적 없으셨던가요? 소설도 영화처럼 음악이 흐르면 좋겠다는 생각 말이죠. 영화는 음악이 많은 역할을 합니다. 이야기와 거기에 흐르는 감정을 훨씬 실감나게 만들어주죠. 로맨스나 스릴러 혹은 공포 영화에 음악이 없다고 상상해 보세요. 얼마나 많이 심심해질까요? 분명 그토록 애절하게 느껴지지도 않을 거고 긴장감이 넘치거나 무섭지도 않을 겁니다. 소설에도 어울리는 음악이 흐른다면 영화와 똑같이 이야기와 감정이 훨신 더 잘 살아나지 않을까요? 그런 음악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한 번 찾아봤습니다. 소설에 어울리는 음악이 있는지.


그런데 소설에 영감 받은 음악들이 정말 많더군요. 그 모든 음악들은 노래를 만든 아티스트 나름의 독후감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자신이 읽은 것에서 느끼고 생각한 것을 음악으로 표현한 것이니까요. 그런 음악들을 영감을 준 소설을 읽을 때 듣는다면 그것 역시 영화의 OST(original sound track)처럼 소설을 위한 음악으로 여길 수 있지 않을까요? 어쩌면 무모할 지도 모를 이런 가정에 기대어 소설과 음악을 모두 좋아하는 당신에게 감히 몇 곡 추천하고자 합니다.


1. 조니 미첼 , 'Both Sides, Now'와 솔 벨로의 '비의 왕, 헨더슨'





 최근에 공포 영화 '유전'을 봤는데 영화가 끝날 때 이 노래가 흐르더군요. 물론 영화에 나오는 버전은 조니 미첼의 것이 아니라 주디 콜린스의 것이었지만요. 캐나다의 유명한 싱어 송 라이터인 조니 미첼이 68년에 발표한 이 노래는 지금은 미첼의 대표곡일 뿐만 아니라 유명 락음악 잡지인 롤링스톤즈가 지금까지 나온 모든 대중 음악의 순위를 500위까지 매긴 적이 있는데 거기서 171위를 차지한 바 있는 뛰어난 노래입니다. 그런데 이 노래는 미국 작가 솔 벨로가 59년에 발표한 '비의 왕, 헨더슨'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었다고 하는군요. 노래를 만들게 된 경위는 이러합니다. 67년, 미첼은 비행기에서 이 소설을 읽었습니다. 그런데 미첼이 탄 비행기가 이륙할 때, 소설에서 아프리카로 가기 위해 헨더슨이 탄 비행기 역시 이륙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 일치가 미첼이 비행기의 창 아래로 하늘에 떠 있는 구름을 보고 있을 때 이런 상상을 하도록 했습니다. 헨더슨 역시 자신과 똑같이 비행기에서 하늘에 떠 있는 저 구름을 보고 있겠지 하는 상상을 말이죠. 그러자 갑자기 노래에 대한 영감이 생겨났고 바로 노래를 써나갔다고 합니다. 그렇게 아직도 많은 이들이 좋아하는 'Both Sides, Now'는 태어났습니다. 비행기에서 말이죠. 이 노래를 쓸 때만 해도 이렇게 유명해지리라곤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고 하는군요. 휴가철이 다가옵니다. 이번에도 많은 분들이 낯선 타국을 찾아 비행기에 오르시겠죠. 저 역시 그렇습니다. 그 때, 조니 미첼의 이 노래와 솔 벨로의 소설을 들고 가는 것은 또 어떨까요? 비행기에서 구름을 바라보며 미첼의 노래와 벨로의 소설을 읽는다면 노래에 나오는 이 가사를 쓸 때의 미첼의 마음을 훨씬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난 구름의 양면을 모두 보았어요.

하늘의 위에서, 땅 위에서

그래도 여전히 내가 떠올리는 구름은 환상에 지나지 않아요.

난 구름이 뭔지 전혀 모르겠어요.

(...)

나는 삶도 양면에서 보아왔어요.

승자의 눈으로도, 패자의 눈으로도

내가 떠올리는 삶 또한 환상이에요.

나는 삶이 뭔지 전혀 모르겠어요.




2. 데이빗 보위, '1984' / 조지 오웰 '1984'





 지금은 유명을 달리한 영국의 팝스타 데이빗 보위는 70년대에 조지 오웰의 '1984'를 락 뮤지컬로 만들려고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웰의 저작권을 가지고 있는 단체가 허락하지 않은 바람에 무산되고 말았죠. 정말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만일 허락하여 데이빗 보위가 '1984'를 락 뮤지컬로 만들었다면 우리는 소설 '1984'의 훌륭한 OST를 가질 수 있었을텐데 말입니다. 그래도 실망하긴 이릅니다. 비록 뮤지컬 기획은 쓰러졌지만 거기에 쓰려고 했던 곡이 살아남아 그가 74년에 발표한 앨범에 수록되었으니까요. 그것이 바로 보위의 최고 음반 중 하나로 손꼽히기도 하는 'Diamond Dogs'이란 앨범입니다. 보위가 상반신만 빼고 개의 모습이 되어버린 커버로 유명한 음반이기도 하죠. 살아남은 곡은 이 곡 '1984'를 비롯하여 'Big Brother','We are the dead'으로 세 곡입니다. 분명 베트남 전쟁을 계기로 영국과 미국 모두에서 점점 되살아나는 보수 우익의 분위기를 경계하고자 보위는 오웰의 '1984'를 뮤지컬로 만들려했던 것 같습니다. 어쨌든 '1984'를 읽을 때 보위의 이 노래들을 들어보면 어떨까요? 소설이 좀 더 새롭게 다가올지도 모릅니다.



3. 엘튼 존, 'Goodbye Yellow Brick Road' / 라이먼 프랭크 바움, '위대한 마법사 오즈'





 우리나라에도 유명한 이 노래는 제목에서 바로 드러나듯이 '위대한 마법사 오즈'에 영감을 받아 만들어졌습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 소설을 원작으로 하여 1935년에 만든 영화가 직접적인 영향을 줬지만 말이죠. 엘튼 존은 그 영화에서 도로시 역할을 했던 주디 갈란드의 심정을 헤아리며 이 노래를 만들었다고 하는군요. 이 때, 엘튼 존은 자신이 이룩한 화려한 성공 속에서 음악을 시작할 때 가졌던 초심을 잃은 것은 아닌지 우려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예술 보다는 상업성에 치중하여 음악 활동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고 말이죠. 그렇게 엘튼 존은 도로시가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위대한 마법사 오즈를 찾아 노란 벽돌길을 걸었던 것처럼 자신에게도 원래 음악을 할 때 가졌던 마음으로 돌아갈 수 있는 노란 벽돌길이 있었으면 한 것입니다. 그런 자신의 뿌리에 대한 그리움을 담아 이 노래를 만든 것입니다. 그러나 엘튼 존은 삶이라는 게 그런 길을 쉽게 찾을 수 있을 정도로 단순하지 않다는 것도 잘 압니다. 아니, 이렇게 불안하고 고민하며 걸어가는 게 실은 진정한 삶이라는 걸 깨닫고 있습니다. 정답을 쉽게 찾고 걸어갈 수 있는 단순한 삶이란 그저 애완 동물의 삶과 그리 다르지 않다고 말이죠. 그런 마음이 이 노래엔 담겨 있습니다. 소설 속에서 도로시와 그의 세 친구들이 자신이 오래도록 바랐던 것을 찾기 위해 오즈를 찾아가지만 그것이 정말 삶의 정답인지 아니면 그저 환상에 지나지 않는지 몰랐던 것처럼, 우리 역시 지금 걷고 있는 이 길이 우리를 어디로 데려다 줄 지 모릅니다. 하지만 엘튼 존이 말하듯이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도달하는 장소가 아니라 지금 걸어가고 있는 과정 자체인 지도 모릅니다. 그런 것을 생각하며 이 노래와 오즈를 벗해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하네요.




4. 롤링스톤스, 'Sympathy for the Devil' / 미하일 불가코프 '거장과 마르가리타'





 롤링스톤스가 68년에 발표한 앨범, 'Beggars Banquet'의 첫번째 트랙으로 실린 이 노래, 'Sympathy for the Devil'는 러시아 작가 미하일 불가코프가 쓴 고전인 '거장과 마르가리타'에 영감을 받아 만들어졌습니다. 원래 이 소설은 믹 재거의 여자 친구인 페이스풀이 믹 재거에게 한 번 읽어보라고 권해준 것이라고 해요. 하층 계급 출신이었던 페이스풀은 믹 재거가 접하지 못했던 새로운 사상들을 많이 접하게 해줬는데요, 미하일 불가코프의 소설도 그 중 하나였죠. 믹 재거는 이 소설을 읽고 감명을 받은 나머지 '거장과 마르가리타'에 나오는 악마를 주인공 삼아 노래까지 만들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믹 재거에 따르면, 이 노래는 악마 찬양 노래가 아니라 실은 인간이 가진 어두운 면에 대한 것이라고 합니다. 얼굴의 표정이 천변만화하는 것처럼 어느 것 하나로 고정할 수 없는 인간의 삶을 노래한 것이라고 말이죠. 생각해 보면, 불가코프의 소설에 나오는 거장과 마르가리타도 그러했죠. 본래 아주 평범한 박물관 직원에 지나지 않았던 거장은 길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여인, 마르가리타와 운명적인 사랑을 하고 그 결실로 본디오 빌라도에 관한 소설을 쓰는 소설가가 되었다가 끝내 비밀 경찰에 체포 되다가 스스로 정신병원에 들어가고 맙니다. 이토록 삶의 굴곡을 다양하게 겪은 것이죠. 그건 마르가리타도 다르지 않습니다. 본래 저명한 과학자의 아내로 상류층이었던 그녀는 거장과 운명적인 사랑에 빠지고 거장이 정신병원에 들어간 뒤로는 악마와의 계약에 따라 악마가 주최하는 대 무도회의 여왕이 되었다가 계약에 따라 다시 거장과 만난 후로는 반지하의 아파트에서 살아갑니다. 결코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없는 참으로 다변하는 삶인 것이죠. 이 소설에 나오는 악마 또한 그러합니다. 사실 이들은 정해진 것을 허물고 단면만이 허락되는 세상에 이면을 들춰내는 존재들이죠. 의도적인 카오스의 창출자이자, 단일한 진리를 산포시켜 그 족쇄에 매인 자들을 해방하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이성은 결국 광기가 되고 광기가 끝내 합리가 되는 진리를 역설하는 자인 것입니다. 노래는 이러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단일한 의미로 규정되지 않는 삶의 복잡한 면모들을 직시하라는 의미로 말이죠. 아마도 그렇기에 프랑스 영화 감독 장 뤽 고다르는 이 노래에 영향을 받아 영화를 만들었고 잡지 '롤링스톤스'가 뽑은 지금까지의 대중 음악 순위 500위 중 32위를 차지하고 있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거장과 마르가리타'를 읽게 된다면 이 노래를 꼭 한 번 들어보세요. 소설이 전혀 다른 새로운 얼굴을 지니고 다가올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소설에 영감을 받아 만들어진 노래를 한 번 소개해 봤습니다. 물론 이것만은 아니고 이 밖에도 정말 많은 노래들이 있지만 분량 때문에 이것밖에 소개하지 못하는 게 좀 유감이네요. 어쨌든 여기에 소개한 소설을 읽을 때 노래도 한 번 찾아 들어보세요. 혹시 아나요? 그 노래 때문에 책에 대한 기억을 쉽게 소환할 수 있게 될 지. 여러가지 이유로 책 읽기에 지치게 되면 그 책에 영감 받은 음악을 들으면서 독서의 기운을 충전하는 것도 좋겠지요. 책을 벗하는 방법은 다양합니다. 자신만의 방법으로 책을 벗하는 것도 좋은 독서 방법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독서를 향한 여러분의 분투를 응원하며 이만 글을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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