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무도 밀리언셀러 클럽 - 한국편 31
신시은 지음 / 황금가지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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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과 표지가 인상적이라 읽게 된 소설. 신시은 작가의 '해무도'다.



 책 날개에 있는 작가 소개를 보니 놀랍게도 94년생. 현재 나이 23. 나중에 알았는데, 스무 살에 쓴 소설이라고 한다. 그것도 장편. 헐! 잠깐 나는 그 나이 때 뭘했더라 생각한다. 술과 여자 뒤꽁무니를 쫓아다녔다. 그런데 누군가는 세상에 내놓을 한 권의 작품을 위해 노력하고 있었구나. 그러고 보니, 지금은 작고한 콘도 요시후미의 '귀를 기울이면'이 떠오른다. 자신의 꿈을 향해 달려가는 청소년의 밝고 맑은 에너지로 가득했던 애니메이션. 거기에, 학업도 포기하고 남들은 놀기 바쁜 여름방학마저 온전히 소설 쓰기에 바친 여자 아이가 있었다(그녀가 쓴 소설은 나중에 '고양이의 보은'이란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졌다.). 이름은 츠키시마 시즈쿠. 그리고 일찌감치 바이올린 장인이 되기로 결정하고 어린 나이에 이탈리아 유학길에 오르는 타카하시 잇세이. 아직 뭘해야 될 지 모를 시기에 보았던 애니메이션이라 일찍 자신의 꿈을 확정하고 일직선으로 달려나가는 이들이 얼마나 부럽던지. 그 동경을 내내 '컨츄리 로드~'를 흥얼거리는 것으로 대신했었지. 하는 리뷰와는 별 상관도 없는 이야기를 했다. 원래 하고 싶었던 말은 그 시즈쿠와 이 소설의 작가 신시은이 겹쳐보인다는 것이었는데.



 어쨌든 다시 본론으로. '해무도'는 표지만 보면 호러 필(feel)이 난다. 사실 그렇다. 프롤로그부터 해무가 끼면 사람을 데리고 가는 귀신 노파가 등장한다. 그리고 바로 이어지는 장례식. 주인공이 되는 현직 교수인 치수는 자신의 스승인 정교수가 죽었다는 부고를 받고 20년 전 정교수가 살았던 섬에서 겪은 살인 사건을 떠올린다. 그 섬이 바로 '해무도'다. 두 사람이 죽었는데, 섬 사람들은 다들 귀신 노파 짓이라면서 부들부들 떨었다. 아직도 그 사건은 해결되지 않았고 너무나 공포스러웠던 기억인지라 치수는 그 섬으로 가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리고 정교수의 장례식장. 그의 유일한 혈육인 두 딸이 장례를 치르고 있다. 그런데 갑자기 시신이 머리가 사라진다. 몸은 그대로 놔두고 머리만 없어진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동생 주연은 너무나 갑작스러웠던 아버지 죽음을 두고 해무의 짓이라고 말했다. 이제 머리가 사라지자 그 심증이 더욱 굳어진 동생은 분명 머리는 원래 자신들이 살던 곳인 해무도로 갔을 것이라고 하면서 섬으로 떠날 채비를 한다. 결국 혼자 남게 되는 것이 무서웠던 언니 주경마저 주연과 함께 해무도로 가게 된다.


 치수는 섬의 선착장에서 20년 전 같이 살인 사건을 겪은 선장을 만난다. 그는 치수에게 내내 귀신의 짓이라면서 돌아가라고 종용한다. 그래도 기어이 가려는 치수에게, 선착장에서 정교수의 집까지 가려면 중앙의 산을 넘어야 하는데 자정에는 절대 넘어서는 안된다고 경고한다. 귀신에게 죽는다면서. 그래도 치수가 말을 듣지 않자(원 이 사람 고집도 참~), 산길을 잘 아는(정해진 루트로 가지 않으면 목숨을 잃는다고 한다.) 자신의 아들을 길잡이로 붙여준다. 소설 전반부의 이야기는 치수와 선장 아들의 산을 넘는 이야기가 차지한다. 아들은 계속 겁을 주고 공포 분위기로 몰아간다. 그런 길을 안내 하겠다고 나선 선장 아들이 거의 성인의 경지에 이를 무렵,


 주경과 주연이 섬에 도착한다. 아버지 시신이 사라졌다며 얼른 자신의 집으로 가야한다는 이들의 말에 선장은 올 것이 드디어 왔구나 하는 식으로 반응한다. 아들이 치수와 산으로 떠난 지도 제법 시간이 흘러, 이제 슬슬 걱정이 되던 참의 선장은 자신의 배로 가자고 말한다. 알고 보니, 정교수의 집으로 가는 루트는 산길말고 물길도 가능했던 것. '아니, 이런 길이 있었으면 진작 이리도 데려다 줘야 하는 것 아냐? 단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아들을 사지로 내몰다니, 선장, 당신은 잔인한 아버지로세.' 이런 생각이 자막처럼 소설 장면 아래로 지나간다.


 어쨌든 이들은 정교수의 집에서 만난다. 치수는 정교수 집에 오고나서야 장례식장이 그 곳이 아니었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된다. 또 다시 하게 되는 헐~! '아니, 전화로 장례식장이 어딘지도 안 알려준단 말이야?' 하는 한편, '치수 이 사람은 도대체 뭘 믿고 그 무서운 곳으로 바로 직행할 생각을 한 거야?' 하는 생각이 동시에 떠오른다. 거듭 어쨌든, 호러 아닌가? 이런 일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세계다. 납득을 강요한다. 지금까지 분위기가 좋았다. 조금은 더 이 세계에 빠지고 싶다. 그런 생각으로. 그리고 그런 나의 바람을 들어주듯, 사랑채 가장 안쪽의 방에 있는 침대 위에서 정교수의 머리가 발견된다. 그리고 함께 발견된 누군가 남겨 놓은 글이 예고이기라도 한 것처럼 일어나는 살인 또 살인. 그것도 밀실에서. 선장은 이것이 이 집에 얽힌 귀신 노파의 저주 때문이라고 하면서 20년 전 사건도 그것과 관련있다고 이야기 하는데. 과연 정교수의 머리와 뒤이은 연속 살인은 귀신 노파의 짓인가? 아니면 그것을 가장한 사람의 짓인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가운데 치수는 뜻하지 않게 탐정의 역할을 맡게 된다.


 줄거리 소개가 너무 길었다. 소설은 이렇게 괴기와 미스터리가 혼합되어 있다. 그러고 보니, 이와 비슷한 소설이 하나 떠오른다. 바로 일본의 국민 탐정이라 할 만한 긴다이치 코스케가 데뷔한 작품으로도 유명한, 요코미조 세이시의 '혼진 살인사건' 이다. 그것도 괴기로 잘 가다, 밀실 미스터리로 분위기를 반전시켰다. '해무도'도 유사하다. 공통점이 하나 더 있다. '혼진 살인사건'은 미스터리 사건의 무대로 일본 전통 가옥을 가져왔는데,  '해무도'도 우리나라 전통 가옥인 한옥을 미스터리의 중심 무대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혼진 살인사건'처럼 공간 자체의 구조를 트릭의 장치로 이용하지는 않고 다른 것을 사용했다(무엇인지는 스포일러가 되기에 밝히지 않는다.). 이것이 개인적으로는 조금 아쉬운 부분이다. 다른 것을 사용했다는 것이 아니라, 트릭 자체가 어쩐지 좀 반칙이 아닌가 생각되기 때문이다. 이왕 아쉬운 점을 말한 김에 하나 더 부언해 본다. 앞에서 너무 괴기스러운 분위기를 강조하는 바람에 결말이 과도한 부담을 안게 되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앞부분의 한껏 고조된 공포스런 분위기 때문에 결말이 더 맥빠지게 느껴진다는 말이다.(그럼, 앞에서 이렇게 말하라고! 하실 것 같다. 하하...) 그래도 흡인력 하나만은 높이쳐 줄 만하다. 어쨌든 약관의 나이에 이만한 작품을 쓰는 것도 대단하지 않은가 생각한다. 그러고 보니 일본의 작가 오즈 이치는 십대 때 데뷔 했다지. 신시은 작가도 오즈 이치처럼 우리 나라 장르 소설계를 든든히 바쳐 줄 등뼈 같은 존재가 되었으면 좋겠다.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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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종느와르 M 케이스북 - OCN 드라마
이유진 극본, 실종느와르 M 드라마팀.이한명 엮음 / 비채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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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스북을 많이 보진 않았지만 감히 케이스북의 모범 같은 책이라 부르고 싶다. 설령 드라마를 보지 않았었도 이 책 하나만으로 드라마 완전 정복이 가능함! 사라져야 비로소 보이는 사람들에 담겨진 의미들이 텍스트를 통해 더욱 선명하게 되살아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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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5-10-29 0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르메스님 안녕.

얼마전까진 오래 노트북이 고장나서 봐도 글을 쓰기가 어려워 대체로 댓글을 안했는데 한달 되어가나 이제 노트북 샀거든요. 속도도 빠르고 자판도 다다다다 잘 써져요.

이 책 신간 훑다가 보고 이런 게 있었네..했는데 케이스북은 대체 뭔가요? 당시 저 드라마 되게 좋았는데, 드라마는 길었는데 어떻게 책에 담겼는지..(왜인지 이런 게 궁금..)

ICE-9 2015-10-30 13:26   좋아요 0 | URL
와, 아이리시스님 오랜만이에요^^ 와우, 노트북 새로 장만하신 거 축하드려요. 제것도 지금 메모리가 한계에 달하기라도 했는지 성능 저하가 커서 더욱 부럽네요^^;

아, 케이스북이랑 쉽게 말하며 DVD로 치면 코멘터리 정도로 보면 되지 않을까 싶어요. 드라마의 제작에 관계된 이런저런 세부정보들이랑 에피소드들을 정리해 보여주는.
저도 이 드라마를 좋아해서 보게 되었는데 특히 에피소드에 대해선 기대 이상으로 잘 정리해 보여주더군요. 전 이 책으로 보고서야 첫 에피소드가 굉장히 좋은 것이었구나 느꼈어요. 드라마가 마음에 드셨다면 한 번 읽어볼만한 것 같아요^^
 
탐정이 아닌 두 남자의 밤
최혁곤 지음 / 시공사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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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탐정이 아닌 두 남자의 밤>은 <B컷>, <B파일>로 한국 스릴러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 시킨 최혁곤의 신작이다. 하지만 스릴러는 아니고 본격 미스터리에 가깝다. 제목 그대로 탐정이 아닌 전직 기자인 박희윤과 전직 경찰인 갈호태가 주인공이 되어 미스터리를 풀어가는데 서막과 종막 그리고 그 사이의 5막을 합하여 모두 일곱 개의 에피소드가 여기엔 담겨있다. 그렇다고 모두 별개의 사건으로만 이뤄지지는 않고 서막에 등장하여 주인공 박희윤에게 크나큰 상처를 입히는 연쇄살인마 '바리캉맨'을 거대한 줄기로 하여 일곱 개의 에피소드를 묶고 있는 구성이다.


(표지가 참 마음에 든다.)

 

 간단히 이야기를 소개해 본다면 서막에서 박희윤은 현직 기자인데 어느날 갑자기 헤어진 옛 애인이자 인기 텔런트인 채연수에게서 자신을 구해달라는 전화를 받는다. 그리고 잠시 후, 그녀를 납치한 것으로 보이는 한 남성에게서 채연수를 구하고 싶으면 2시까지 일산 호수 공원 앞 MBC로 나오라는 연락을 받는다. 사태가 심상치 않다고 생각한 박희윤은 그녀를 구하기 위해 원래 형사였지만 심문실에서 용의자인 여성과 눈이 맞아 '우쭈쭈'(이게 무엇인지에 대한 상상은 읽는 여러분들에게 맡긴다.)를 벌이다 발각되어 파면당한 뒤 이제는 세종문화회관 뒷골목에서 '이기적인 갈사장'이란 카페를 운영하고 있는 갈호태에게 도움을 청한다. 결국 둘은 채연수를 찾지만 그녀는 이미 머리가 잘린 싸늘한 주검이 된 뒤였고 범인이 이리저리 둘을 뺑뺑이 돌린 덕분에 살인 용의자까지 되어 버린다. 박희윤과 갈호태는 그제야 범인의 함정에 빠졌다는 것을 깨닫고 그 범인이 다름아닌 지금 한창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는 '바리캉맨'이라는 것을 알게된다. 그리고 그 때 박희윤은 왜 범인이 자신들을 채연수를 빌미로 이리저리 끌고 다녔는지 그 진짜 이유를 비로소 알아차리게 되는데...


 서막에서 박희윤은 범인에게 거하게 뒤통수를 맞고 그 대가로 기자직에서 쫓겨난다. 이제 그는 전직 기자가 된 것이다. 백수가 된 박희윤은 신문사가 아니라 갈호태가 운영하는 카페로 매일 같이 출근하여 손님이 뜸한 그 곳에서 갈호태 그리고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구양과 더불어 시간을 죽여가며 자신이 구하지 못했던, 그리고 아직 사랑하는 감정이 남아있는 채연수에 대한 회한을 곰곰이 되씹고 있다. 그러다 자신이 사수가 되어 기자로 훈련시켰던 후배 여기자 홍예리가 조언을 구하는 사건에 뛰어든다. 그렇게 1막, '신들이 속삭이는 밤'이 시작된다.


 에피소드는 그런 식으로 이뤄진다. 누군가에게 조언을 하다가 아니면 과거의 연줄로 부탁을 받거나 혹은 사건 당사자로서 말이다. 이것이 탐정이 등장하는 본격 미스터리물과 다른 점이다. 보통 탐정물은 정식 의뢰로 시작한다. 하지만 이들은 탐정이 아니니(아시다시피 우리나라에선 탐정이 법적으로 허용되지 않는다. 법적으로 허용하자는 법안이 상정된 것으로 아는데 논란이 많아 통과될 지는 미지수다.) 그럴 수가 없는 것이다. 제목에서 굳이 탐정이 아니라고 강조한 것도 이 탓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추정해 본다. 왜 시작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지 알려주기 위해서랄까?


 비록 시작은 다르더라도 에피소드에 담긴 본격 미스터리이 향취는 조금도 변함이 없다. '신들이 속사이는 밤'은 홍예리 기자에게 누군가의 제보로 들어온 두 장의 사진을 단서로 한 아랍 여인에게 얽힌 미스터리를 추적하며 '목숨 걸고 베이스 볼'은 박희윤과 개인적으로 인연이 있는, 부상을 입었다가 재활 치료로  훌륭하게 재기에 성공한 야구 선수들로 구성된 '부활파'에 얽힌 살인 미스터리를 푼다. 여기서는 본격 미스터리에서 빠질 수 없는 고전적 요소인 알리바이 공작이 핵심이다. CCTV로 사건 당일의 모든 정황이 녹화된 가운데 범행이 불가능한 시간에 이루어진 살인의 알리바이를 깨야 한다. 3막 '제4요일의 암호'는 제목 그대로 셜록 홈즈에서도 나온 바 있었던 신문 광고를 통해 전달되는 암호가 중심이다. 박희윤은 우연히 자신이 일했던 민주일보에 실린 개인 광고를 읽다가 이상한 점을 발견한다. 며칠에 걸쳐 그런 이상한 광고가 서로 다른 내용으로 계속 발견되자 그는 이것이 암호라는 걸 직감하고 풀이에 나선다. 4막 '세월이 가면 43초'는 한동안 잠적했다가 다시 활동을 시작한 여가수의 죽음에 얽힌 미스터리다. 그녀는 컴백의 첫 무대로 자신의 열혈 팬들만 초대하여 자신이 태어난 고향인 '증심도'란 섬에서 콘서트를 여는데 마지막 곡으로 최호섭의 '세월이 가면'을 부르는 동안 43초간 정전이 되고 그 뒤 그녀는 시체로 발견된다. 갈호태는 그녀의 입에서 약한 아몬드 향이 나는 것을 알아차리고 청산가리로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모든 사람들이 그녀를 주시하고 있던 가운데 일어난 43초의 암흑 속에서 과연 그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과연 그녀는 자살한 것일까 아니면 타살한 것일까? 섬이라는 고립된 공간, 한정된 용의자. 그리고 사방에서 그녀를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라는 벽. 이렇게 이 에피소드는 밀실 미스터리를 담고 있다.


 "장소가 좀 넓지만 일종의 밀실 미스터리라고 봐야죠."(p.227)


 5막 '고도리 저택의 개사건'은 일단 제목을 잘 봐야 한다. '괴사건'이 아니라 '개사건'이다. 제목 자체에 은근 유머가 깃들어 있는데 과연 이 에피소드는 유머 미스터리에 가깝다. 아니면 일상 미스터리라고 해야 할까? 아무튼 갈호태가 너무도 존경하는(하지만 실력이 아니라 연줄과 운이 좋아 승진한 게 분명한) 전 경찰청장에게서 잃어버린 개를 찾아달라는 의뢰가 아닌 '부탁'이 들어오고 바로 작년에 한국 최고의 기자에게만 주는 상을 받았던 박희윤과 강력계 민완 형사 갈호태는 자신의 연줄로 복직시켜주겠다는 것과 바로 옆집이 인기 걸그룹 핫식스 숙소라서 매일 그녀들을 볼 수 있다는 전 청장의 말에 홀려서 (박희윤은 계속 툴툴 거리지만) 개 수색에 나선다. 설정대로 이 단편집에서 가장 편하게 그리고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에피소드다. 그리고 마지막 종막. 거기서 박희윤은 자신에게 계속 트라우마로 남아 있었던 '바리캉맨'과 최후 결전을 치르게 된다.


 이렇게 이 단편집은 본격 미스터리의 주 소재들을 두루 사용하면서 내용의 다양한 변주로서 독자의 흥미와 재미를 돋운다. 그렇다고 본격의 재미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 단편집은 사회파 미스터리의 모습마저 가지고 있는데 1막부터 종막까지 우리 사회의 부조리한 면모들을 골고루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1막은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차별을 그리고 2막에서는 용산 참사를 낳았던 과도한 부에 대한 욕망을 간접적으로 꼬집고 있다. 3막은 반값 등록금을 위한 대학생들의 시위와 기업의 비정한 정리해고 방식을 통해 현재도 미래도 암울한 우리 사회의 단면을 보여주며 4막에서는 성적 소수자에 대한 차별이 은연 중에 드리워진다. 그리고 종막에서는 요즘들어 더욱 문제시 되고 있는 내부고발자 보호 문제를 다룬다.


 책의 가장 마지막에 나오는 저자의 말에 따르면 그동안 썼던 무거운 스릴러와는 달리 캐릭터 중심의 '본격 사회파 코지 미스터리 스릴러의 짬뽕'을 시도해 보았다고 하는데 그 말 그대로다. 본격과 사회파 미스터리의 풍미가 짬짜면처럼 고루 감돌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둘 중 어느 쪽을 좋아하더라도 만족하지 않을까 한다.


 이 작품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아마도 그것은 작품 내적인 면이 아니라 작품 외적인 면에 있지않을까 싶다. 요즘 가장 신뢰받지 못하는 기자가 주인공이라는 사실, 바로 거기에.

 이제는 기자라는 말보다 그들을 비하하는 '기레기'란 말이 더 보통명사처럼 쓰일 정도로 기자란 사람들에게 불신의 대상이다. 물론 그 책임은 전적으로 그들에게 있다. 세월호와 국정원 사태 등등 불법과 비리가 얼룩진 커다란 문제가 터질 때마다 기자들은 왜곡하거나 침묵하는 등의 돈과 권력에 약한 모습을 꾸준히 보여줬기 때문이다. 이 단편집엔 그런 기자로서의 자괴감 같은 것이 가득 드러나 있다. 오늘날 기자들은 왜 이렇게까지 추락해 버렸을까 하는. 아마도 박희윤이 전직 기자로 설정된 것도 그가 그렇게나 자주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도 그 진짜 이유는 이러한 현실에서의 기자 모습을 반영한 게 아닐까 싶다. 그 한계 지점을 솔직히 드러내고 있기에 개인적으로는 그래서 더욱 좋았던 작품이다. 때문에 정말 기자가 주인공이라는 사실 때문에 저어된다면 그리 구애받지 않아도 좋을 것 같다.


 종막에서 이 작품이 시리즈로 계속 이어질 것이라는 뉘앙스를 풍기는데 부디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 '밤의 노동자'로 활약하는 그들의 모습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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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녀굴 - 영화 [퇴마 : 무녀굴] 원작 소설 밀리언셀러 클럽 - 한국편 17
신진오 지음 / 황금가지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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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진오의 '무녀굴'은 호러 소설이다. 호러의, 호러에 의한, 호러를 위한 소설이다.

 단적으로 말해 이만큼 장르에 충실한 작품도 또 없을 것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소설의 목적은 분명하다. 독자들이 머리를 쭈뼛거리게 만들고 한밤 중에 혼자 화장실에 가기 무섭도록 만드는 것. 그것을 위해 소설은 모든 연출과 장치를 총동원한다. 분위기는 요즘 호러 영화의 핫한 트렌드인 제임스 완 감독의 '컨저링'이나 '인시디어스'랑 비슷하다. 통칭해서 '컨저링류'라고 부를 수 있을만한 완의 영화들은 2013년에 나왔고 신진호의 '무녀굴'은 2010년에 나왔으니 당연히 영화로부터 소설이 영향을 받은 것은 없다고 하겠고 어떻게 보면 거꾸로 지금의 호러 유행을 선도했다고까지 말 할 수도 있는 작품이다. 물론 제임스 완이 '무녀굴'을 읽었을 리는 만무하겠지만 말이다. 어쨌든 '컨저링이나 '인시디어스' 시리즈를 좋아한다면 '무녀굴'도 마음에 들 것이 틀림없다. 중반에 '컨저링'이나 '인시디어스'에서 보았던 퇴마 의식이 펼쳐지는 장면이 있다. 이게 꽤나 무섭다. 맞부딪히는 힘들이 강렬하고 상황의 연출 또한 긴박한 데다 제임스 완과는 달리 유혈의 낭자도 마다하지 않아서 그렇다.


 아무튼 이 '무녀굴'은 제주도에 있는 '김녕사굴'에 전해 내려오는 설화를 바탕으로 쓰였다고 한다. 이름이 사굴인만큼 그 굴엔 아주 요력이 강해 날씨를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뱀이 살고 있었다고 하는데 그 뱀이 마을 사람들에게 해꼬지를 못하게 하려면 마을 처녀 한 명을 해마다 바쳐야 했다고 한다. 하루는 제주 판관으로 갓 부임한 서린이란 사람이 이 사실을 전해 듣고 크게 분개하여 굴을 찾아가 처녀를 먹으려는 뱀을 창으로 찔러 죽여버렸다. 그런데 이야기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뱀이 죽자 원혼의 힘이었는지 날씨가 갑자기 미친듯이 돌변한다.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낀 마을의 무당이 서린을 찾아와서는 얼른 성으로 돌아가라고 아뢴 뒤, 성안에 들어갈 때까지 절대 뒤를 돌아보지 말라고 경고한다. 서린 역시 귀담아 들었기에 뒤를 돌아보지 않으려 조심했지만 성 안에 들어가기 직전 뒤에서 어떤 군사가 '피비가 내린다'고 소리치기에 그만 뒤를 돌아다 보았다가 피비도, 외친 군사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순간, 그만 낙마하여 절명한다.


 이런 설화인데 전형적인 영웅담인 것 같다가 막판에 보복의 반전을 가져오는 변칙이 있다. 대부분 민간 전승 설화는 완결된 형태로 전해 내려오는 것이 아니고 전승되는 도중 여러 사람들에 의해 첨삭되는 경우가 많으므로 그런 면을 고려하자면 뒤의 서린이 복수당하는 장면은 아무래도 후에 결부된 것이 아닐까 싶다. 이는 당시 제주도와 조선의 관계를 고려한 데다, 섬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유달리 강한 폐쇄적인 면모를 생각한 것인데 그 때 제주도는 천대받는 땅이었고 그런 고로 제주의 민중들은 조선 왕조를 바라보는 마음이 곱지는 않았을 것이며 그런 차에 조선 중앙 정부에서 내려온 판관에 의해 자신들 삶의 바탕이 되고 있는 섬의 기존 질서가 마구 파헤쳐지는 것은 더더욱 싫었을 것이다. 즉 서린의 사굴 뱀 처리는 그런 중앙 질서에 의한 지방 질서의 교란 혹은 파괴로 볼 수 있으며 후에 그에 대한 반발로 아무리 중앙 정부가 제주도의 고유한 질서를 유린하려고 해도 결코 이뤄지지 않을 것이라는 의지의 표명 같은 것으로 서린이 뱀에게 복수를 당해 죽는 걸로 덧붙여진 게 아닐까 싶다. 그렇게 이 사굴 설화에는 뱀과 판관이라는 지역과 중앙의 대립, 그리고 그것이 매개로 사용하는 미신과 합리의 대결이 있다.


 이럴 경우 김녕 사굴 설화는 '합리'라는 것이 진리의 또 다른 이름이 아니라 그저 타자에게 자신과 닮을 것을 강요하는 선별과 배제의 다른 이름일 뿐이라는 것을 제주 민초들이 일찌기 눈치채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해방을 뜻했던 계몽이 지배에 천착하는 제국주의로 변질될 수밖에 없었던 근대의 해악을 말이다.


 그렇다고 이런 주제가 소설에 나온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시작부터 김녕사굴이 나오고 마지막에도 주 무대가 되지만 소설에서 김녕사굴은 동일화를 꾀하는 지배이데올로기에 맞서는 고유한 지역 문화의 저항 지점으로 나타나지 않고 오로지 호러의 공간으로만 소비된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지점까지 나아갔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원래 원혼이라는 것은 '아랑설화'나 '장화홍련전', 그것도 아니면 과거 '전설의 고향'에 등장했던 허다한 원혼들이 잘 보여줬듯이 지배 체제에 맞서는 존재가 아니었던가? 그런 사회적 의미가 분명 있지만 소설에선 그 의미를 잘 살리지 않는다.


 물론 아예 없다고는 할 수 없다. 원혼이 제주 4.3 항쟁 당시 이승만의 사냥개인 서북청년단의 피해자로 나오기 때문이다. 사실 4.3에서 치뤄진 학살은 가장 극심한 중앙의 지역에 대한 해악이라 할 수 있다. 원혼은 타고난 기이한 능력으로 자신의 가해자들에게 가차없이 보복하는데 그런 면에서 김녕 사굴 설화가 진화한 현대판이 될 수도 있었다고 본다. 일단 작중 인물이 판관 서린에 대해 해석하는 장면이 나오기도 하는 데다 무엇보다 이 검사란 존재가 그렇게 여기게 만든다. 이 '이 검사'란 사람은 소설의 시작에서 김녕사굴로 들어갔다가 사라져 버린 일곱명의 산악 자전거부 사람들을 찾는 책임 검사인데 그는 이제 막 검사에 임용된 사람으로 제주는 첫 부임지다. 그런 면에서 조선 중종 시설 막 과거에 급제하여 첫 부임지로 제주에 내려온 판관 서린과 여러 모로 흡사하다. 더구나 이런 이 검사는 원혼에 의해 죽기까지 하므로 그야말로 현대판 서린이라 할 만하다. 즉 작가가 이렇게 이 검사를 서린을 강하게 연상시키는 인물로 설정한 것은 작가도 애초엔 '김녕 사굴 설화'가 간직한 저항성을 충분히 살리려 한 게 아닐까 여기게 만든다. 더구나 처음 사라진 그 산악 자전거부 사람들은 모두 서울에서 온 이들이었다. 그런 그들이 가장 토속적인 논리로 무장한 제주의 공간에서 사라지고 그 중 하나가 원혼에 빙의된 채로 서울로 돌아와 사람들을 공격한다. 이런 설정은 충분히 중앙과 지역 사이의 지배와 저항의 이야기로 볼 수 있지 아니한가?


 하지만 이러한 면모는 이야기가 원혼과의 본격적인 대결로 전개되자 점점 휘발해 버린다. 심히 유감이 아닐 수 없지만 이런 점까지 포용하려 했다면 분명 소설이 원래 치중하고자 했던 호러는 반감 되었을 것이므로 두 마리 토끼 중 하나를 고르는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어디까지나 내 개인적인 아쉬움이라 말해 두는 것이 옳겠다. 어쨌든 독자를 무섭게 만드는 소기의 목적은 달성하므로 공포물을 찾으시는 분들에겐 마춤한 작품이 될 듯 하다. 나는 바로 얼마 전에 김녕 사굴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하룻밤을 보냈는데 사실 그 때 이 책을 가져갈까 생각을 했었다. 지금 읽고 그 때 안 가져가서 정말 다행이라 생각한다. 가져갔다면 난 아마 그 날 밤, 내내 방 안에 틀어박혀 있어야 했을 것이다. 비까지 부슬부슬 내렸던 밤이라 더욱 그러지 않았을까 싶다.


 2010년에 나온 이 작품을 이제야 읽게 된 건, 최근에 영화로 만들어졌다는 이야기를 들어서다. 공개된 예고편을 보아하니 소설과는 좀 다르게 전개되는 듯 하다. 소설에서 여주인공인 금주는 단 한 번도 빙의를 당하지 않는데 영화에선 빙의된 금주가 주로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것 같다. 어쩐지 요즘 유행하고 있는 '컨저링류'를 따라가는 것 같은 냄새가 나기도 한다. 그래도 내겐 금주라는 여성의 신체가 나라는 자아와 낯선 타자로 분단되어 나온다는 게 기대를 가지게 만든다.


 이전 리뷰에서 몇 번 언급했듯이 페미니즘적인 입장에서 분단된 여성의 신체란 흥미로운 대상이다. 기독교의 마녀사냥에서 충분히 입증되었듯이 '퇴마'는 타자의 존재를 용납하지 않는 지배질서의 강요로, 반대로 그 대상이 되는 원혼은 그러한 지배질서에 대항하여 자신의 고유성을 드러내려는 몸짓으로 해석될 여지가 많다. 그런 면에서 원혼, 특히 여성의 원혼은 남성 지배 질서에 억눌린 목소리의 구현으로 볼 수도 있는데('아랑 전설'이나 '장화 홍련전'에서 모습이 나타나기 전에 목소리부터 들리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오로지 공포의 존재로만 보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이것은 그대로 프로이트의 말마따나  '초자아'가 자신이 길들일 수 없는 이드를 괴물로 왜곡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며 그런 면에서 공포감은 그 공포 때문에 여성 스스로 남성 지배 질서에 더 순응하도록 만들기 위한 남성 가부장제의 이데올로기적 조작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뭐, 그렇다고 무서운 것을 무섭지 않다고 할 수야 없겠지만.


 쓰다보니 이런, 더위를 먹어서 그런가 이야기가 자꾸만 본말과 상관없는 곁가지로 빠지고 있는데 (설마 지금 내가 설명충에게 빙의된 것은 아니겠지?) 이쯤에서 각설하고 딱 한 문장으로 말한다면 소설은 정말 무섭고 영화는 그런 쪽으로 기대된다는 것이다.(설명충아 물러가라! 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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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집 슈퍼히어로
김보영 외 지음 / 황금가지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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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에서 장르 소설을 쓰는 작가들 중에 오래전부터 슈퍼 히어로에게 매료된 자들이 있었다고 한다. 슈퍼 히어로에 대해서라면 물 한 컵만 두고도 밤을 새워 이야기할 수 있는 그들. 사랑은 감기와 같아서 숨길 수 없다고 하던가. 쟁여놓은 애정은 언젠가 출구를 찾아 나오기 마련. 그 애정을 담뿍 담아 외국의 히어로가 아닌 우리만의 슈퍼 히어로 단편집을 만들고 싶다는 바람이 생겼다고 한다. 결국 그 소망은 한 권의 단편집으로 결실을 맺게 되었으니 그것이 바로 '이웃집 슈퍼 히어로'다.(어쩐지 변사 톤 같다 ㅠ ㅠ)


 왠지 제목이 촌스럽다. 아마도 단편집의 슈퍼 히어로들이 무엇보다 한국을 무대로 활동하는 '신토불이' 슈퍼 히어로인지라 그것을 강조하느라 위해서 굳이 '이웃집'이란 표현을 쓴 게 아닐까 싶다. 표지도 꽤나 '빈티지'하다. 나는 이런 스타일을 좋아하므로 마음에 드나 정작 내용과는 별로 관계가 없는 지라 그래도 살짝 아쉬움이 감도는 걸 어찌할 수가 없다. 본문과 상관 있는 일러스트였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지만 포장이 무슨 상관이랴. 꽃등심이라면 설령 신문지에 싸서 준다고 해도 맛나게 먹을 수 있다는 것엔 변함 없는 것을.
 자, 그럼 애정이 어느만한 순도의 결정으로 나타났는지 포크로 탁 찍어 그 맛을 음미해 보기로 할까?

 먼저 외관부터 찬찬히 돌려볼라치면, 여기엔 9편의 단편과 2개의 해설이 실려있다.

 일단 단편의 작가들 이름을 죽 훑어본다. 그동안 한국의 장르 소설을 읽어본 이들이라면 익숙할 이름들이 주르르 달려나온다. 진산부터 시작해서 듀나, 좌백, 김이환 그리고 김보영 같은 이름들. 무협과 SF 그리고 판타지에서 나름 명망을 떨친 존재들이라 이름을 확인하는 순간, 기대감이 확 솟구치는 것을 어찌할 수 없다.

 으음, 이 정도면 훌륭해. 입에 넣는다.

 첫 맛은 진산의 '존재의 비용'이다. 설정이 재밌다. 여기엔 평범한 사람을 초인으로 만들어주는 설계사가 하나 있다. 맞다. 짐작한 대로 하는 일이 보험설계사랑 똑같다. 초인을 원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가 지불할 수 있는 금액에 맞춰 가능한 초인을 설계해주는 것이다. 공짜가 아니다. 나름의 대가를 치뤄야 한다. 그렇게 초인이 되기 위해 지불해야 하는 비용이 바로 제목의 '존재의 비용'이다. '존재'라 말하는 것은 평범한 사람이 '초인'이라는 비범한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자신이 가지고 있는 비범한 능력을 그 대가로 지불해야 하기 때문이다. 돈이 아니다. 이유는 만고불변의 우주 법칙인 에너지 보존의 법칙 때문(인 듯 싶다). 하지만 주인공은 지극히 평범한데다 존재감도 거의 투명에 가까운 지라 지불해야 할 '비범'이 하나도 없다. 하지만 자칭 뛰어난 초인설계사라 자부하는 그녀는 거기에 굴하지 않고 결국 의뢰인을 '보이드'란 이름의 초인으로 만들어 주고 마는데...

 그렇다면 과연 의뢰인이 무엇을 그 비용으로 지불했을까? 스포일러가 되기에...


 그런데 이 비용이라는 게 참 재밌다. 그게 소설을 읽는 우리도 혹시 보이드와 같은 초인인 것은 아닐까 상상해 볼 여지를 슬쩍 남기기 때문이다. 그런 상상을 하다보면 뭐랄까 이 소설이 근본으로 묻고자 하는 것을 툭 캐내는 것도 가능한데, 그건 바로 슈퍼 히어로란 존재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문제인 것은 아닐까 하는 것이다.
 영웅은 주어진 존재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가진 신념과 그것의 지속적인 실천으로 빚어진다는 것. 이것이 아마도 '존재의 비용'이 들려주려는 진짜 이야기가 아닌가 싶다.
 즉, '존재의 비용 =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라는 등식 같은 것.

 이어지는 DCDC의 '월간영웅홍양전'은 재기발랄하다. 제목이 특이할텐데 사실 여기엔 단편의 설정이 집약되어 있다. 일단 영웅은 물론 슈퍼 히어로를 말하며 홍양은 당연히 히어로의 이름이다.
 그렇다면 월간은? 살짝 힌트를 드려본다면 홍양이 여성인 것과 관계가 있다. 여성들이 달마다 치르는 것. 그래서 '월간'이다. 홍양은 특이하게도 그 때의 스트레스가 초인적 능력으로 나타난다. 이 단편은 은근슬쩍 페미니즘적인데 그것은 악당 때문이다. 악당이 한마디로 가부장적 사고로 똘똘뭉친 남성 '꼰대'인 것이다. 그건 대사에서 직접 나타난다. 하지만 단순히 일반적인 페미니즘 이야기를 하지는 않는다.

 이 단편은 분명 구체적인 지점 하나를 가져오고 있는데 그건 바로 '생리 휴가'이다. 홍양의 초인 능력 설정이 그렇게 된 것은 '생리휴가'에 얽힌 남성 차별적 사고를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아시다시피 기업체에서 생리 휴가를 바라보는 시선은 여전히 곱지 않다. 어떤 사업체에서는 먼저 생리확인서를 제출하라고까지 요구한다. 여기에 대한 울화, 분노가 이 단편에 담겨 있다고 한다면 너무 나간 말일까? 그렇지 않다. 아마도 그것이 아니었다면 악당을 굳이 회사 사장으로 설정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이야기 자체도 재밌지만 이런 은근하게 배여든 주제 때문에 더욱 맛있게 삼킬 수 있었던 단편이다.

 세번째는 좌백이 쓴 것으로 '배트맨'을 무협물로 로컬라이징한 '편복협과 옥나찰'이다. 개명이 재밌다. '편복협'은 물론 배트맨이고 포청의 총책임자인 고둔은 형사부장 '고든'이며 집사인 알파도는 집사 알프레드 페니워스다. 그럼 '옥나찰'은 누구일까? 당연히 악당이다. 키가 10미터가 넘고 독채찍을 휘두르는 그는 사실 영화 '다크나이트 라이즈'에서 따왔다고 보여진다. 이렇게 생각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단편의 후반이 '다크나이트 라이즈'와 많이 비슷하기 때문이다.(두리뭉실하게 말하는 것은 물론 스포일러를 막기 위해서다.) 뭔가 지금 정세에 대한 간접적인 발언도 있으나 그보다는 재밌게 읽을만한 거리가 되고 싶다는 목적에 더 치중한 듯 보인다. 순식간에 흡입된다.

 네번째 김수륜의 '소녀는 영웅을 선호한다.'는 슈퍼 히어로와 슈퍼 빌란의 대결에 집중하는 단편인데 초점은 슈퍼 빌란에 더 맞춰져 있다. 제목의 소녀가 바로 슈퍼 빌란이다. 그녀는 영화 '초능력자'의 강동원처럼 사람의 손을 잡으면 그 사람을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다. 그녀는 그 능력을 자신보다 행복하게 사는 사람들에게 복수하기 위해 사용하는데 그러니 당연히 슈퍼 히어로와 맞장을 뜰 수밖에 없다. 재미지게 읽히나 설정에 빈 곳이 많고(구성상 허점이 아니라 설정에 대한 설명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다는 의미다.) 결말도 열려있다. 아니나 다를까 작가가 장편으로 만들 생각이라 한다. 아마도 불충분한 부분은 거기서 메워질 것 같다. 어쨌든 육체적 능력이 강한 자와 정신 능력이 강한 자의 대결. 흥미로운 결전이 아닐 수 없다. 어쩌면 예전 나이트 샤말란의 영화 '언브레이커블'처럼 기묘한 로맨스가 될 수도 있을 성 싶다.

 다섯 번째는 '절망의 구'로 유명한 김이환의 '초인은 지금'이다. 초인에게 경찰권을 부여하는 법안의 국민투표 결과를 앞두고 초인의 도움으로 살아남은 생존자들이 초인에 대해 그간 알고 있는 정보들을 나눈다는 게 기본 줄거리. 초인의 시점이 아니라 그 바깥에서, 일반인의 시점으로 초인을 거꾸로 들여다보려 한다는 것이 흥미로운데 궁극적으로는 '인간다움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초인이 어째서 사람들을 도우는 것일까?'를 헤아리려 한다. 이렇게 말해도 될 지 모르겠지만 인류학적이 시선이 여기에 담겨 있는 것 같다. 이 단편은 원래 장편으로, 작가는 이미 완성해 놓았다고 한다.
 
 여섯 번째는 내게는 번역가로 더 친근한 이수현 작가의 '선과 선'이다. 레드 스파크라는 슈퍼 히어로와 한 경찰의 대결에 집중하는 작품인데 한국이라서 더욱 실감나게 읽히는 단편이었다. 사실 이 단편의 진짜 강자는 따로 있는데 그것은 바로 언론이다. 언론이 어떻게 포장하느냐에 따라 슈퍼 히어로도 한 순간에 빌런이 되고 경찰도 단번에 악당이 된다. 물론 그 언론은 보다 거대한 권력의 입맛에 따라 좌우되고 있다.(지금 우라나라의 현실 그대로다.) 즉 여기엔 개인을 압도하는 구조가 있다. 대치 중인 슈퍼히어로와 경찰이 제아무리 뛰어난 능력을 발휘한다 한들 구조의 권력을 이길 수는 없다. 개인이 가지는 한계와 그러므로 거기에서 비롯될 수밖에 없는 연대의 필요성을 짧지만 설득력있게 말해준다.

 일곱번째는 듀나의 '아퀼라의 그림자'라는 작품이다. 어쩌면 '어벤져스 2'의 등장인물들이 촬영차 서울을 방문했을 때 이 단편의 아이디어를 떠올렸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흥미롭게도 듀나는 여기서 슈퍼 히어로들을 걸그룹 혹은 아이돌 밴드와 연결시키는데 촬영을 위해 방한 했을 때 몰려든 인파의 이미지랑 많이 겹친다.
 적사병이 발생하여 국민의 3분의 1이 죽고 감염의 위험 때문에 한국 전체가 20년간 격리된다. 그런데 그 적사병의 원인인 '프로스페로'는 슈퍼 히어로들을 만들어내기도 했는데 그런 존재가 이제 슈퍼스타급 인기를 얻게 된 것이다. 사실 이 슈퍼 히어들은 특정 회사에 소속되어 있으며 그 회사는 연예 기획사나 마찬가지다. 더우기 그들을 주인공으로 한 수많은 팬픽이 연일 인터넷 게시판을 오르내린다. 아무튼 이 와중에 빌런 슈퍼 히어로들을 통솔하는 라스푸틴이 사상 초유의 폭탄 테러를 감행하고 주인공이 그림자로 통솔하고 있는 아퀼라는 숙적 라스푸틴과 최후의 결전을 벌이려 한다. 듀나의 작품답게 설정이 세부에 이르기까지 잘 정리되어 있으며 일단 아이디어가 기발하기 때문에 잘 읽힌다.

 여덟번째는 김보영의 '세상에서 가장 빠른 사람'이다. 제목에서 얼른 플래시맨을 떠올렸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단편의 주인공은 플래시맨보다 더 빠르다. 1초에 지구를 7바퀴 반을 도는 슈퍼맨처럼 빛의 속도로 움직이니까 말이다. 날지는 못한다. 달리는 것 뿐이다. 그것말고는 달리 특별한 능력은 없는 평범한 남자다. 세상은 그의 존재를 알고 있고 그의 활약 때문에 세간의 관심은 그에게 초집중된 상태다. 바깥의 세상은 여지없이 뜨거울 지 몰라도 가속 능력을 발휘하여 빛의 속도로 달리는 그에겐 세상이란 그저 차분하기만 한 공간이다. 그도 그럴 것이 시간이 정지해 있기 때문이다. 아인쉬타인의 말대로 빛의 속도는 영원한 시간의 정지이니까. 사람들은 1초도 안되는 시간에 백명의 사람을 구해내는 그에게 놀라고 열광하지만 사실 주인공에게 있어서만큼은 한 달, 혹은 1년이 걸려 행하는 일이다. 누군가에겐 눈 깜빡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 정작 장본인에겐 오랜 시간이 축적된 결과라는, 이 시차(視差)가 참으로 흥미롭다.

 외연을 보다 확장하면 역사에 대한 어떤 발언 같으로 여길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우리들은 흔히 어떤 역사의 성과를 단순간에 이뤄진 것이라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그조차 사실은 그렇게 되기 위하여 누군가가 아주 오래도록 노력한 것이었다는 것을 이 '시차'는 알려주고 있다. 더하여 단번에 원하는 역사가 이뤄지지 않더라도 미리 실망하지 말고 조급해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도. 누군가는 이 어둔 밤을 밝히기 위하여 아주 오랫동안 포기하지 않고 둥둥 북을 울리고 있으므로...  뭔가 그런 것이 느껴지는 단편이었다. 그리고 유일하게 눈물이 찔끔 나왔던 단편이기도 하다. 특히 이 대목에서

 얘가 혼자 건물 하나를 다 떠받치고 있었다. 내가 수원역에서 가기 싫다고 실랑이 하는 동안, 책임져야 할 사람이 다 튀어버리고 신고도 않고 대피방송도 없이, 지금도 어디선가는 내 잘못이 아니라고 책임이나 떠넘기고 있는 동안.
 내가 안 왔으면 여기서 며칠을 있었을까. 아니, 몇 달을 있었을까. 숨이 다하도록 버텼을 거다. 숨이 다하고도 버텼을 거다. 이대로 파묻혀버렸을 지도 모른다. 아니 그랬을 거다. 내 뒤로 아무도 오지 않았겠지. 번개가 사람 다 구했다는 속보나 한 줄 나가고 영웅 만들어 줄 궁리나 하다가 덮어버렸을 것이다. 사건 키우지 않으려고 실종자 수색도 끝까지 안 했겠지.(p. 326 ~ 327)

 난 여기서 세월호 참사에서 희생당한 아이들을 떠올렸다. 누군가는 정말 그랬을 것이다. 구조대를 기다리며 친구를 위해 버티고 선 아이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믿었을 것이다. 하지만 국가는, 그런 일을 하라고 세금을 내고 있는 국가는 그들을 버렸다. 몇 시간이 지나도록 구조하지 않았다. 그들이 차창으로 멀리서 맴돌기만 하는 구조선을 보며 수면으로 가라앉아갈 때 참으로 얼마나 절망스러웠을까? 그걸 생각하니 눈에 물기가 어리고 한동안 먹먹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잡것의 세상. 어쩌다 나라가 이런 막장이 되어 버렸을까? '이기'는 지혜가 되고 '이타'는 바보가 되는 세상이다. 원래 사람들이 악했던 것은 아니나 악한 자들을 자꾸만 뽑아주는 바람에 감염되어 버렸다.(혹시 듀나의 '적사병'은 그런 악한 자의 생명을 유지시켜 주는 '종북몰이', 즉 레드컴플렉스를 은유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이제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도 생각하지 못하는 것 같다.

 정말로 마지막 단편인 이서영의 '노병들'에선 이런 존재들이 나온다. 탑골 공원에서 열심히 종북몰이를 하며 정권의 나팔수를 자임하고 있는 노인들 말이다. 그가 주인공이다. 이름은 철구. 그는 특별한 능력이 있는데 바람을 조종해 사람을 공격할 수 있다. 덕분에 청소년 시절부터 정권의 개가 되어 활약했다. 평생 그렇게 살았다. 민주화와 노동 해방을 부르짓는 이들을 마구 짓밟으며. 하지만 잘못을 모른다. 마치 지금 다른 쪽에 발을 내딛었다간 살아온 인생 전부가 무너지기라도 할 것처럼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국정원에서 운영하는 트위터 전사까지 되어 여전히 정권의 개로 남는다. 진짜 답이 없는 인생. 물론 소설은 더이상 그대로 살 수 없는 충격의 순간을 선사한다. 하지만 이름 그대로 쇠머리나 다름없는 그가 변할리는 여전히 미지수다. 아무리 불법을 자행해도 선거철만 되면 우리가 남이가 하면서 무턱대고 표를 주는 우리 주위의 허다한 노인들처럼...

 이제 소개를 다했다. 헉,헉,헉. 내리 달려오느라 얼마나 숨이 찼는지 여기서 숨을 좀 돌려야겠다.
전체적인 느낌으로 '이웃집 슈퍼 히어로'는 비록 슈퍼 히어로에 대한 애정에서 태어났을지언정 꼭 그것만 이야기하는 단편집은 아니었다. 그것 보다는 현재 사회에 대한 어떤 갑갑증 같은 것이 더 많이 투사되어 있었다. 왜 이런 사회가 되었나? 이런 사회는 도대체 누가 만들었나에 대한 것들을 슈퍼 히어로라는 존재를 통해서 풀어보려 했던 것은 아닌지 생각되기도 한다. 그래서 실감나게 읽을 수 있었고 그렇기에 슈퍼 히어로라는 것만 보고 나랑 관계없는 장르야 하면서 내치지 말고 혹시나 뭔가 이 사회에 대해 어떤 해갈되지 않는 갈증을 느끼고 있다면 대리 해소 차원으로 읽어보면 어떨까 권하고 싶어진다.

 힘든 세상이다. 슈퍼 히어로도 없으니 이렇게라도 해서 버텨야 되지 않을까?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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