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 트라비아타의 초상 - 개정판 변호사 고진 시리즈 2
도진기 지음 / 황금가지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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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와우! 결말에서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도진기 작가의 '라 트라비아타의 초상'을 읽고 난 뒤 든 첫 소감입니다. 정말 충격적인 반전이 있군요. '라 트라비아타의 초상'은 도진기 작가의 초기작입니다. '붉은 집 살인사건'에 이은 두 번째 작품으로 알고 있어요. 그것이 이번에 새로이 '황금가지'에서 나왔네요. 눈길을 확 잡아끄는 노란 표지로.



 베르디의 유명한 오페라 제목이기도 한 '라 트라비아타'는 '길을 잃어버린 여인'을 뜻합니다. 살해된 정유미를 뜻하는 것일까요? 표지의 열쇠는 사라진 104호의 현관 열쇠입니다. 그 곳은 정유미와 함께 발견된 시신의 남자가 거주하는 곳이죠. 아마도 범행 방법을 알 수 있게 만드는 중요한 단서라 표지에 나온 것 같습니다.


 도진기 작가에겐 두 가지 시리즈가 있습니다. 하나는 어둠의 변호사 '고진'이 활약하는 시리즈고, 다른 하나는 해결사 '진구'가 활약하는 시리즈죠. 그동안 진구 시리즈는 제법 많이 만나봤는데, '고진' 시리즈는 처음입니다. 아, '진구' 시리즈에서 그가 한 번 까메오처럼 출연한 것을 본 적도 있군요. '가족의 탄생'이란 작품에서 말이죠. 어쨌든 그렇게 '라 트라비아타'로 고진 시리즈와 첫 대면을 해봤는데 너무 좋았습니다. 솔직히 말해, 진구에겐 미안하지만 '진구' 시리즈 보다 더 좋았어요. 아마도 제가 '본격파'라서 그런 것 같습니다. '라 트라비아타의 초상'은 순도 100%의 본격 미스터리이니까요.


 아, 본격이라는 말은 순수하게 추리로 트릭을 풀고 범인 찾기에만 집중하는 소설을 말합니다. 그동안 도진기 작가의 본격 미스터리를 안 접해본 것은 아니지만 그건 모두 단편이었습니다. '라 트라비아타의 초상'처럼 장편으로 만나본 것은 처음인데, 정말 잘 썼더군요. 처음부터 끝까지 잔뜩 몰입하게 만들었습니다. 소설은 '붉은 집 살인 사건'에서 등장한 이유현이 법정에서 커다란 실망감을 얻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서초구의 한 독신자 아파트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의 범인을 잡아 재판에 넘겼는데 한 변호사의 도움으로 풀려난 것이죠. 그 방법이 실로 절묘했기에 이유현은 그 변호사가 누군지 능히 짐작합니다. 바로 '붉은 집 살인 사건'에서 뛰어난 능력을 보여준 어둠의 변호사 '고진'이라는 사실을 말이죠. 그것을 깨달은 이유현이 고진에게 전화로 연락하면서 이야기는 이제 독자를 그 살인 사건의 현장으로 데려갑니다.


 피해자는 정유미라는 25세 여성이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집인 204호 거실에서 목에 송곳이 박혀 죽은 채로 발견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옆에 시신 한 구가 더 있습니다. 남자로, 그는 나중에 바로 아래층인 104호에 사는 사람이고 살해된 정유미를 예전부터 스토킹해 오던 인물로 밝혀집니다. 이 사건을 경찰이 발견하게 된 것은 정유미의 애인 김형빈의 신고였습니다. 김형빈은 정유미와 통화하다 '강도다'라는 말을 듣고 얼른 경찰에 신고한 것입니다. 이제 서초경찰서 강력반 팀장 이유현의 수사가 시작됩니다. 그런데 이 사건 난해하기 그지 없습니다. 정유미의 현관은 비밀번호를 눌러야 들어갈 수 있는 도어락이 걸려 있는데, 그 비밀번호는 정유미와 애인 김형빈만 알고 있다고 합니다. 이 집엔 가사도우미로 일하는 할머니도 한 분 드나들고 계셨는데 정유미는 자신에게도 비밀번호를 알려주지 않았으며 언제나 그녀가 먼저 열어줘서 들어갔다고 진술합니다. 살해된 현장엔 그 어디도 강제로 침입한 흔적이 없기 때문에 알리바이가 확인된 김형빈을 용의자에서 제외하면 침입 경로는 오직 베란다 하나 뿐입니다. 이것은 아파트 입구 CCTV를 확인한 결과 다른 외부 침입자가 전혀 나타나지 않았기에 더욱 굳어지게 됩니다. 그래도 혹시 동기를 가진 범인이 있지 않을까 하여 정유미 주변 인물을 샅샅이 탐문했지만 너무나 깨끗하여 결국 동기가 아니라 범행 방법에 치중하여 베란다 침입이 가능한 물품을 언제나 사용할 수 있는 자를 체포합니다. 그런데 그 자가 고진의 조력으로 풀려난 것입니다. 따지듯 자신을 찾아온 이유현에게 고진은 범인이 정말 흥미로운 존재라며 자신의 추리를 들려줍니다. 이 때부터 고진의 추리쇼가 3회에 걸쳐서 상연됩니다. 한 번에 그 세 가지를 다 말하는게 아니고 하나씩 풀어놓는데 그 하나만 듣고 이유현이 수사하게 됩니다. 그러나 막히고 그러면 고진이 두 번째 가능성을 들려주고 또 막히면 세 번째 가능성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마치 3막으로 된 추리극 같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고진의 추리 정말 탁월합니다. 그 방법에 나름 놀랐습니다. 이 사건엔 두 가지 트릭이 있습니다. 하나는 '심리트릭'이고 다른 하나는 '시간차 트릭'입니다. 이 트릭을 하나하나 논파해 내는 고진의 추리가 정말 절묘합니다. 본격 미스터리를 즐기는 것은 어디까지나 어려운 트릭을 정교한 추리를 통해 아귀가 딱딱 맞게 해결하는 것을 보는 쾌감 때문이죠. '라 트라비아타'는 그런 쾌감을 충분히 선사합니다. 소설에서 고진은 이유현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현대의 기술 앞에 범죄의 설자리는 갈수록 없어지고 있다고들 말하지. 지문, DNA, 혈흔 분석 같은 거야 물론 예전부터 있었지만, 요즘은 사건 생기면 딱 세 가지만 보면 되잖아? 휴대폰, 이메일, 그리고 통장 계좌. 이거만 뒤져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누구와 사회적 관계를 맺고 있는지 다 나와. 그래서 전통적인 추리 소설의 트릭은 대부분 현대에는 성립이 안 돼. 하지만 말이야. 난 좀 생각이 달라. 새로운 기술이 등장한 만큼 새로운 트릭의 지평도 그만큼 넓어진 거야. 수사 기관을 속일 수단도, 기발한 범죄의 여지도 얼마든지 더 생겨난 거야. 그런 내 이론을 범인이 그대로 실현해 보여 줬어. 정말 재미있지 않나? 하하하."(p. 160 ~ 161)

 '라 트라비아타의 초상'은 그야말로 그런 고진의 생각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거기다 놀라운 반전까지 마련되어 있는데, 이것이 또 전혀 뜬금 없지 않습니다. 이 말은 사전에 단서가 다 제시되어 있으며 꼼꼼하게 읽고 잘 추리했다면 알 수 있다는 것이죠. 한 번 도전해 보시죠. 당신은 과연 범인을 찾아낼 수 있을까요? 이런 점까지 더해 도진기 작가가 왜 초기에 발표한 두 작품만으로도 명성을 얻었는지 잘 알겠더군요. 아직 만나보지 못했다면 한 번 꼭 읽어보세요. 분명 어릴 때 셜록 홈즈나 엘큘 포와로의 추리 소설을 읽으면서 느꼈던 즐거움을 다시 맛보게 해 줄 것입니다. 정작 도진기 작가는 시마다 소지의 '점성술 살인사건'을 읽고 미스터리계에 입문했다고 하지만요. 후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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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원남녀
나혁진 지음 / 황금가지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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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싸구려 질문을 먼저 해 봅니다. 추리 소설 좋아하시나요? 저는 좋아합니다. 아주 어릴 때 엘러리 퀸의 '이집트 십자가의 비밀'을 만난 뒤로 지금까지 계속 좋아해 왔습니다. 추리 소설도 깊이 파고들면 장르가 꽤나 다양한데 저는 그 중에서도 '본격'을 좋아합니다. 사실 이 말은 일본에서 쓰는 것인데, 쉽게 풀어 말하자면 '범인 찾기'라 할 수 있습니다. 파일로 반스 시리즈로 유명한 S.S. 반다인이 교양인을 위한 지적인 스포츠라 불렀던 바로 그것이죠. '범인 찾기'라 할 수 있는 데도 굳이 '본격'이라 쓰는 것은 역시 저의 허세 때문이겠죠. 추리 소설의 원조라 평가받는 에드거 알란 포의 '모르그가의 살인' 역시 범인 찾기였던 만큼 누구의 죄인가 밝히는 것은 추리 소설의 근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추리 소설의 황금기 때만 해도 이런 본격물이 대세였지만 지금은 꽤나 보기 힘들어졌습니다. 이미 역사가 오래된 지라 그만큼 설정도, 트릭도 한 번쯤은 다 써서 바닥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간혹 '범인 찾기'를 전면으로 내세운 작품을 만나면 반갑지 않을 수 없습니다. 네, 그런 작품이 나왔습니다. 때문에 구구절절 말이 많아진 것이죠. 무슨 책이냐구요? 바로 나혁진 작가의 '낙원남녀'란 소설입니다.



 나혁진 작가의 네 번째 작품입니다. 첫 번째는 느와르, 두 번째는 스릴러, 세 번째는 라이트 노벨스러운 본격물이었는데 이번에는 순수 본격이군요. 카멜레온처럼 색깔을 달리하여 도전하는 게 좋아 보입니다. 역시 '범인 찾기' 소설답게 그런 쪽 방면으로 여왕으로 평가받는 애거서 크리스티의 두 작품이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고 합니다. 플롯엔 '다섯 마리 아기 돼지'가, 캐릭터 구성엔 '왜 에번스를 부르지 않았지?'가 말이죠. 모티브가 된 작품을 같이 읽으며 비교해 보는 것도 재밌을 것 같습니다. 각설하고, '낙원남녀'는 낙원아파트에서 1년 전 일어난 하나의 살인 사건과 또 하나의 살인 미수 사건의 범인을 찾는 것이 기본 스토리 입니다. 범인 찾기에 탐정이란 존재는 필수인지라 당연히 탐정이 등장합니다. 남자와 여자가 콤비를 이루는데요, 남자는 강마로, 여자는 유지혜 입니다.  이 둘이 주인공 입니다. 그래서 제목이 '낙원남녀'인 것이죠.


 유지혜는 사실 수사하게 되는 사건의 당사자 입니다. 살인 미수 사건의 피해자이니까요. 그녀는 한 기업의 비서로 일하다가 그 사건 때문에 심한 트라우마를 겪어 현재는 직장을 쉬고 창동에 있는 학원에 강사로 나가고 있습니다. 그런 그녀에게 술집에서 우연히 지혜를 본 강마로가 접근해 옵니다. 자신은 명탐정을 꿈꾸는 사람으로 그 훈련 겸, 유지혜의 사건을 꼭 해결하고 싶으니 같이 범인을 찾아내자고 말이죠. 반신반의 했던 지혜는 그가 건네 준 명함에 나와 있는 블로그를 찾아 갔다가 그가 서울대 재직 중인 로봇 공학자이며 이미 경찰이 해결하지 못한 사건을 한 번 추리로 해결한 적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결국 그와 함께 1년 전 사건의 범인을 찾아 나서기로 합니다. 공교롭게도 죽은 최순자와 지혜가 같은 낙원아파트 봉사 단체 회원이라 아무래도 그 봉사 단체가 관련된 것 같아서 회원들을 중심으로 수사해 나가게 되는데,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기 위해서라면 물 불 안 가리는 강마로와 그것 때문에 안절부절 하는 유지혜의 케미가 은근히 재밌습니다.


 이런 이야기 입니다. 뜬금없이 소개를 뚝 끊는 것은 특히 '범인 찾기'의 경우 줄거리를 시시콜콜 말하면 안 되기 때문이죠. 본격물을 대하는 최고의 자세는 사전에 아무 정보 없이 그냥 읽는 것입니다. 그래야 본인이 아무런 선입견 없이 제대로 추리할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이렇게 가장 기본적인 사항만 소개합니다. 제 글을 읽고 이야기가 궁금하셨다면 직접 읽어보실 것을 권해드립니다. 소설은 정말 재밌습니다. 캐릭터의 묘사도 생생하고 둘 사이에 이뤄지는 앙상블도 좋습니다. 범인 찾기 과정, 범인의 트릭도 아주 현실적이라 더욱 몰입감을 높입니다. 물론 '헉!' 하는 반전도 마련되고 있구요. 한 마디로 본격에서 기대할 수 있는 모든 것이 다 구비되어 있으며 또한 잘 살려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네요. 저는 정말로 재밌게 읽었습니다. 그것도 한 달음에 말이죠. 장편으로는 오랜만에 만나보는 본격인데다 그것이 또한 꽤 성공적인 것이었기에 만족감 또한 컸습니다. 무더운 여름에 잘 빠진 본격만큼 좋은 것도 또 없습니다. 몰입으로 더위를 잊게 만들기 때문이죠. 바로 '낙원남녀'가 그런 시간을 선사합니다. 그리고 작가에게 바랍니다. 부디 이대로 끝나지 않게 해 주세요. 뒷 이야기가 보고 싶습니다. 기다리다 현기증이 날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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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7-08-11 23: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포가 쓴 소설 범인이 누군지 알아요 책도 읽지 않았는데 그걸 알다니, 다른 데 그게 나와서 알아 버렸습니다 아무것도 모르고 봤다면 이럴 수가 했을지... 어쩌면 그런 건 그 뒤에 다른 사람이 또 쓰지 않았을까 싶기도 합니다 잘 생각나는 건 아니지만, 있었던 것 같기도 한데... 트릭은 잘 몰라도 읽다보면 범인을 짐작하기도 하는군요 짐작보다 어떻게 한 건지 같은 것도 알면 좋을 텐데 여전히 어렵네요 저는 왜 사람을 죽였을까, 그걸 더 보는군요 이런 거 본 지 얼마 안 됐을 때는 내가 생각한 사람이 범인이라니, 하면서 마음속으로 좋아하기도 했는데...


희선

ICE-9 2017-08-13 21:21   좋아요 0 | URL
실은 희선님처럼 어떻게 보다 왜를 보는 게 전 더 현명하다고 생각됩니다. 셜록은 왜 보다 어떻게만 집착하기에 인간미가 없지요. ‘왜‘에 관심을 두지 않으면 비극은 반복됩니다. 반면, 프랑스의 메그레는 어덯게 보다 왜에 더 신경씁니다. 범죄 보다는 인간에 더 눈을 두지요. 이걸 흔히 말하는 본격과 사회파의 구별 기준으로 삼을 수 있을 것도 같습니다 . 본격은 ‘어떻게‘에 사회파는 ‘왜‘에 초점을 맞춥니다. 영국이 본격을, 프랑스가 사회파를 더 추구하게 된 것은 세계 대전의 영향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프랑스는 2차 대전 때 독일에게 점령 당했으니까요. 비극을 겪으면 아무래도 어떻게 보다는 왜에 더 신경쓸 수밖에 없겠죠. 우리의 세월호 참사가 그러하듯이.
 
모래바람 진구 시리즈 4
도진기 지음 / 시공사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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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가운 비가 온다. 그것도 간만의 폭우다. 

그 소리에 쉬이 잠이 오지 않는다. 커피 한 잔을 내린다. 새벽에 이런 시간을 갖게 되면 애수에 젖어들기 쉽다. 기억은 과거로 흐르고 안타깝게 헤어진 이들 혹은 놓치거나 잃어버린 것들이 슬쩍 기억의 툇마루에 엉덩이를 내려놓는다. 도진기의 '모래바람'을 읽었다. 도진기 작가에겐 두 개의 대표 시리즈가 있는데 하나는 표면상 백수지만 실은 남의 뒤를 캐는 게 전문인 '진구'고 다른 하나는 법정 보다 상대의 약점을 잡아 합의로 마무리 짓는 것을 좋아하는 '어둠의 변호사', '고진'이다.


  '모래바람'은 진구의 이야기다.

 그것도 네 번째의 책. 그런데 이런 날이라면 진구도 나처럼 문득 과거의 시간 속을 거니게 될 것이란 걸 알았다. 늘 인간의 감정이라곤 보이지 않았던 진구였기에, 과거라는 거 역시 그에게 별 의미가 없을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그에게도 보통 사람들처럼 첫 사랑이란 게 있었던 것이다. 아니, 진구는 그런 단어 쓰는 것을 싫어할테니 그냥 첫 여자라고 해야할까? 어찌되었든 그녀의 이름은 유연부다. 누구보다 똑똑하고 싹싹한 미소녀. 중학생 남자라면 누구나 사귀어봤으면 할 만한 존재. 하지만 그것은 겉모습일 뿐이고 그 영혼은 실은 진구만큼이나 삭막하다. 둘은 아버지들 때문에 알게 되었다. 진구의 아버지와 연부의 아버지가 역사학 교수로 연구 동료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버지들의 사이는 그리 원만하지 못했다.

 연부의 아버지가 진구의 아버지를 라이벌로 강하게 의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연부의 아버지는 진구의 아버지를 한 번 이겨보는 게 소원이었다. 그러나 자신의 능력은 그것을 이뤄주지 못했다. 하여 연부의 아버지는 연부를 통해 그 소망을 대리 충족하려 한다. 연부에게 무조건 진구를 이기라고 강요하는 것이다. 진구의 아버지가 연부의 아버지를 라이벌로 인식하지 않았듯, 진구 역시 그런 경쟁에서 초연했다. 연부는 괜한 희생자일 뿐이었다. 그러나 연부는 진구를 싫어하지 않았다. 상식적이지 않은 자신의 모습을 온전히 이해해 줄 수 있는 것은 진구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연부 아버지의 뜻과는 다르게 연부와 진구는 좋은 관계를 이루었다.


 하지만 그것마저 곧 깨져버리는 순간이 닥쳐온다.

 바로 진구와 연부가 아버지들과 함께 동행한 '누란'을 찾아나선 여행에서였다. 그 여정에서 뜻하지 않은 변고가 일어나 그만 진구의 아버지가 죽고 연부의 아버지는 실종되어 버렸다. 진구와 연부는 나란히 커다란 비극을 공유하게 된 것이다. 그 때까지만 해도 파국은 아니었다. 진짜 붕괴는 같이 여행을 떠났던 한 교수가 쓴 탐사 일지가 책으로 발간 되었을 때 일어났다. 그 책 때문에 연부와 진구는 소원한 관계가 되었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나 만나게 된 것이다. 진구가 의뢰인을 찾아간 그 곳에서 사장인 의뢰인의 비서로 일하고 있는 연부를 말이다.


진구 일행이 찾아갔던 실크로드 상의 누란의 폐허. 이런 곳에서 소설처럼 거센 모래바람을 만나게 되면 정말 위기에 처할 듯 하다.

그런데 '누란' 하니, 문득 윤후명 소설, '누란의 사랑'이 떠오른다. '돈황의 사랑'에 뒤이어 나왔던...


 '모래바람'은 이처럼 전작에서 한 번도 밝혀지지 않았던 진구의 과거를 본격적으로 밝힌다.

 그가 어떻게 자라왔고 지금의 성격이 된 것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 지 하는 것을. 진구란 캐릭터에 흥미를 느꼈다면 한 번은 궁금했을 것들을 바로 이 작품에서 제대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한 인물이 중심이 된 시리즈에서 그의 과거가 밝혀지는 것만큼 중요한 일은 또 없다. 과거란 오늘의 자신을 형성한 정체성의 역사. 그것을 통해 비로소 우리는 하나의 인물을 평면적이 아니라 입체적으로 이해하게 되니까 말이다. 뼈대로만 남아있던 존재에 살과 피를 주는 것과 같아서 이러한 입체적인 이해는 캐릭터의 생명을 오래도록 지속시키기 위해서라면 필수적 절차이기도 하다. 독자의 뇌리 속에서 캐릭터의 생명을 연장시키는 연료와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진구 시리즈를 접하는 데  있어 '모래바람'은 꼭 거쳐야 할 관문 같은 게 아닐까 생각된다. 


 그래서인지 사실 인간 드라마의 성격이 강하다.

 미스터리 부분은 주로 후반에 배치되어 있는데 그 때까지 소설이 주로 표현하는 것은 등장인물들 사이의 대립과 갈등이기 때문이다. 하나는 이기기 위하여, 다른 하나는 지키기 위하여 모두들 그러한 자신의 욕망에 순수하게 충실한다. 이것이 전작들과 차이가 나는 점이다. 바로 전작 '가족의 탄생'만 해도 상속을 둘러싼 미스터리가 작품 전체를 관통했지만, 여기의 미스터리는 욕망의 결과로만 나타나니까 말이다. 욕망, 그것이 소설이 좀 더 비중을 두고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며 제목의 '모래바람' 역시 자기도 모르게 걷잡을 수 없이 휘말리게 되며, 알면서도 쉽사리 빠져나올 수 없는 욕망을 가리킨다. 아마도 진구의 과거, 그렇게 인간적인 면을 보다 많이 드러내려 했기 때문에 생겨난 변화로 보인다.


 여하튼, 이 소설의 미스터리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과거에 일어난 사막에서의 아버지들의 사망과 실종에 관련된 미스터리이고, 다른 하나는 현재에 벌어진 유연부가 모시는 사장의 피살 사건이다. 전자의 미스터리는 진구의 여친 해나가 입수한, 그리고 진구와 연부에게 결정적인 결별을 안겨 준 탐사기 '누란 왕국을 찾아서'의 내용이 책중의 책 형식으로 소개되는 것으로 전개되고 후자의 미스터리는 연부와 결혼하려는 사장 아들과 그것을 완강하게 반대하는 사장의 갈등을 기축으로 하여 전개되는 데 여기에 유연부가 수상한 분위기를 드리운다.


 비중이 다소 작아지긴 했어도 미스터리가 그냥 소비되기 위하여 들어간 것은 아니다.

 여기에도 놀랄만한 반전과 예측하지 못했던 사건의 진실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늘 그랬던 것처럼 미스터리에 중점을 두고 읽어도 무방하지 않을까 한다. 어쨌든 이번 작품으로 앞으로 도진기 작가의 작품이, 비슷한 시기에 나온 '악마의 증명'에서 이미 나온 바 있듯이, 사람에 중심을 둘 것이라는 게 보다 확실해졌다.


 다음 작품이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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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의 남자
박성신 지음 / 황금가지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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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뭘 해도 안되는 남자. 팔리지 않는 소설가. 그가 바로 소설의 주인공 최대국이다. 이름은 대국이지만, 현실은 먹다 남긴 복국보다 못한 신세다. 재산은 사기로 날렸고 아내에겐 이혼 당했다. 그는 오늘도 자살할 자리를 찾아다닌다. 그러다 한 남자를 만났는데 그가 충격적인 소식을 전한다. 오늘 저녁에 아버지가 총을 맞고 중태에 빠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쩌라고?' 주인공은 시큰둥하다. 그도 그럴 것이 한 번도 자신을 살갑게 대한 적이 없었던 아버지였다. 아버지다운 모습조차 보인 일이 없었다. 자신이 망한 인생 팔할은 아버지 책임이라 여기고 있었다. 그러니 그런 일이 있다고 해도 왜 상관을 할 것인가? 어차피 자신도 죽을 작정인데.


 그런데 남자가 뜻밖의 제안을 한다. 아버지의 수첩을 찾아오면 3억을 주겠다는 것이다. 하나밖에 없는 예쁜 딸, 이제는 다른 남자가 아버지가 되어버린 딸에게 아버지 노릇 제대로 한 번 해보는 게 소원이었던 대국은 아버지가 비밀리에 감춰둔 수첩을 찾아 나선다. 이 이야기와 병행으로 전개되는 이야기가 있다. 그것은 38년 전 과거의 이야기로 실은 대국의 아버지의 이야기다. 그의 이름은 월출. 그는 놀랍게도 남파 간첩이다. 제목의 '제 3의 남자'란 바로 월출을 가리킨다. 그는 비록 남파 간첩이긴 해도 남과 북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아니 속할 수 없었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지금 대국이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것처럼.


 북에 남은 가족의 안전을 위해 위험한 임무를 여럿 수행했으나 그의 삶은 여전히 불안하고 한없이 고독하다. 간첩에게 보통 사람의 인연이란 사치이자 시한 폭탄 같은 것. 언제 그것에 발목을 잡힐지 모르고 또 언제 그들이 자신 때문에 위험에 처할 지 모른다. 월출은 눅눅한 세월의 먼지 가득한 작은 책방에서 자폐의 삶을 보낸다. 하지만 우연한 만남이 그를 내버려 두지 않는다. 홀연히 자신의 삶 안으로 들어선 여성. 그 여자, 해경. 월출은 마음을 접으려 하나 뜻대로 되지 않고 결국 그녀와 연인이 된다. 그러나 허락되지 않은 사랑을 시작한 것에 대한 형벌이었던걸까? 사랑은 그의 삶을 파국으로 몰아가고 그것은 대국의 삶마저 휘청거리게 만든다.




 '제3의 남자'는 '아무리 오래된 과거라 해도 우리의 현재가 결코 그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아마도 소설의 주역들을 부자 관계로 묶인 것은 과거와 현재가 혈연만큼 끈끈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리라. 현재 대국이 지닌 상처의 근본은 과거에 있었다. 현재 그가 알고 있는 것 대부분도 진실은 아니었다. 월출이 남파 간첩으로 거짓된 정체성 속에서 살았던 것 그대로 대국 역시 따지고 보면 그런 삶을 살고 있었다. 대국이 찾는 '검은 수첩'은 단적으로 '과거를 모르는 모두가 거짓된 정체성의 존재들'이란 사실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검은 수첩'은 진실된 정체성을 기록한 것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제3의 남자'는 '잘못된 과거를 제대로 청산하지 않으면 어떤 비극이 일어나고 반복되는가?'를 잘 보여준다. 이 소설에는 5공 시절 고문기술자로 악명이 높았던 이근안을 연상시키는 존재가 등장한다. 비극의 배후요, 만악의 근원이다. 이런 자가 그 오랜 세월 변함없이 활개를 칠 수 있었던 것도 잘못된 과거를 바로 잡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잘못된 과거에 아무 관심이 없었던 우리 자신 때문이기도 하다. 적폐의 탄생은 탐욕 때문이지만, 지속과 반복은 우리의 무지와 무관심 탓이다. 대국은 그런 우리들을 반영하는 존재다. 그는 자신의 삶이 그리 망가진 진짜 이유를 모른다. 그러면서 괜히 남탓만 한다. 우리의 시선도 비슷하지 않을까? 진실된 정체성이 기록된 '검은 수첩'의 작성자인 아버지, 월출은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알아야 할 진짜 역사를 상징하고 있는 존재이기도 하다. 대국이 아버지의 이야기를 통해 진정한 구원을 얻었던 것처럼, 우리 역시 잘못된 과거라면 더더욱 관심과 참여로 바르게 청산하여야 비정상의 사회에게서 받는 피로와 통증이 가셔질 것이다. 적폐 청산은 가슴을 짓누르는 돌덩이를 치우는 작업이다. 내가 제대로 숨 쉬고 살기 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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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6-01 14:4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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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6-11 16:2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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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세계 사건부 - 조선총독부 토막살인
정명섭 지음 / 시공사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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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때는 1926년 9월 22일. 3. 1 운동으로 인해 일본 제국주의가 조선 통치 기조를 문화 정책으로 바꾸고 조선인에게 언론 소유와 각종 공직의 진출을 허용한 시기에 주로 취미와 풍속 기사를 다루는 잡지 '별세계'의 기자 류경호는 평소 잘 알고 지내던 육당 최남선의 부름을 받는다. 최남선이 그를 데리고 간 곳은 광화문에 있는 조선 총독부 건축 현장. 어제 아침 거기서 조선인으로 조선 총독부 건축에 참여하고 있는 설계사 이인도가 시신으로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그것도 팔, 다리, 머리와 몸이 모조리 토막난 상태로. 하지만 그게 류경호를 데리고 온 이유의 전부는 아니었다. 시신의 부위들이 꼭 대한제국을뜻하는 한자 큰 대자로 배열되어 그렇지 않아도 공직에 있는 조선인들을 못마땅히 여기고 있는 일본인들에게 그것이 하나의 빌미가 되어 조선인 축출이 본격적으로 거행되면 어쩌나 하는 우려 때문이었다. 사실 최남선은 그런 움직임을 획책하고 있는 일본인 조직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름하여 '일동회'로 이념이나 신념이 아닌, 오로지 이익만 쫓는 집단으로 그들은 문화 정책에 따라 조선인의 공직과 사업 진출로 자신의 이익이 줄어들자 어떻게든 조선인들을 내쫓으려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이 본격적인 움직임을 보이기 전에 류경호로 하여금 얼른 사건을 해결하도록 할 작정으로 부른 것이었다. 류경호가 실은 아주 뛰어난 탐정이라는 것을 최남선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과연 최남선의 걱정대로 일동회가 본격적으로 음모를 꾸미기 시작하고 그 바람에 이인도와 친했던 또 한 명의 조선인 설계사 박길룡이 용의자로 체포된다. 그것을 시작으로 일동회는 언론과 경찰의 인맥을 동원하고 압력을 행사하여 박길룡을 당시 일본인들에게 가장 두려운 항일 무장 조직이던 의열단과 연계시켜 조선인 축출 명분을 만든다. 그리고 조선 총독부가 완공되는 날 모든 언론을 통해 그 사실을 공식적으로 발표하여 지지 여론을 만들고 조선인 배제 정책을 시행하려 한다. 완공까지 남은 시간은 겨우 3일. 그 안에 류경호는 이인도 토막 살해에 얽힌 미스터리를 풀어야 한다. 과연 진범은 누구이며 류경호는 그럴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이 바로 정명섭 작가의 '별세계 사건부'의 주된 줄거리다. 제목 때문에 얼른 판타지가 아닌가 생각하실 수도 있겠지만 보시다시피 미스터리다. '별세계'는 당시 실제로 있었던 잡지 '별건곤'을 픽션화한 이름이다. 소설은 작가가 우연히 '별건곤'을 본 게 계기가 되어 태어나게 되었다. 이 소설이 가진 커다란 미덕 중의 하나는 1926년 당시의 경성 분위기를 생생하게 재현하고 있다는 것인데 그 역시 '별건곤'의 덕택이다. 작가가 밤문화를 비롯하여 경성 곳곳의 묘사를 바로 '별건곤'의 기사를 바탕으로 썼기 때문이다. 미스터리와 별개로 이것이 꽤 읽는 재미를 준다. 나는 사실 이 시대에 관심이 많아서 더욱 즐겁게 읽은 것 같다. 살인과 관련된 미스터리는 셜록 홈즈의 어떤 소설을 오마쥬 하고 있기도 하여 셜로키언이라면 보다 더 재미를 느끼지 않을까 싶다.


 실제 '별건곤'의 모습. 책의 표지 디자인은 여기서 따온 듯 하다.


 한 편, 일동회의 음모 때문에 이 소설은 1920년대의 조선을 배경으로 하지만 실은 바로 지금 우리나라 상황을 빗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왜냐하면 일동회가 획책하는 일이 기실 김기춘이 주도했던 '블랙리스트'와 동일하기 때문이다. 


 사실 이 일은 조선 사람, 특히 자네와 같은 지식인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칠 거야. 관리도 될 수 없고, 높은 자리로 승진할 기회도 사라지게 되니까 말이야. 하지만 대다수의 조선 사람들은 관심 없어할 거야. 당장 먹고 사는 문제랑 상관이 없고 눈에 보이지 않으니까 말일세. 사실 진실의 가장 큰 적은 바로 무관심이지.(p. 279)


 블랙리스트가 오로지 자기들에게 아무 이익이 되지 않을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여 주로 예술가나 지식인들 위주로 작성되었듯, 일동회의 음모도 자기들 이익에 방해가 되는 조선인 그것도 특히 지식인이 대상인 것이다. 그러나 그 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듯 당장 내가 먹고 사는 일과는 그리 관련이 없다보니 블랙리스트라는 게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 사람들에게 얼른 피부로 와 닿지 않는 것 같다. 그러나 까놓고 보면 민주주의와 관계된 문제 중에 내 삶과 별개인 것은 하나도 없다. 모든 것은 가깝거나 멀게 다 연결되어 있고 어느 하나라도 무관심으로 방치하면 결국 내게도 커다란 피해로 돌아온다. 무엇보다 박근혜가 바로 그것에 대한 살아 있는 증거다. 그래서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정치에 아무런 관심이 없는 이들을 idiot, 즉 바보로 규정했는지 모른다. 탄핵 정국을 힘겹게 넘긴 지금, 이제 우리도 바보의 의미를 원래 의미에 맞게 정의내려야 할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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