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나 : 주사위는 던져졌다 레오나 시리즈 The Leona Series
제니 롱느뷔 지음, 박여명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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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최근 스웨덴 산 노르딕 느와르는 다변화하고 있는 듯하다. 얼마 전에 읽은 에밀리에 셰프의 '마크드 포 라이프'도 그랬는데, 이번에 나온 제니 롱느뵈의 '레오나'도 그러하다. 지킬과 하이드 처럼 법과 불법 사이의 묘한 경계에 서 있는 자들을 주인공으로 그린다. '마크드 포 라이프'의 경우, 주인공은 어릴 때 세뇌되어 암살을 한 과거가 있다. 현재 그녀는 그 기억이 깨끗하게 지워져 법을 수호하는 검사로 일하고 있다. 그런데 그 잊혀졌던 과거가 점점 현실로 고개를 쳐드는 일이 발생한다. '레오나'의 경우는 형사다. '마크드 포 라이프'의 주인공과는 다르게 남편과 자녀도 있다. 겉으론 가장 안정적인 자리에 있는 것 같지만 실상은 다르다. 그녀는 심한 도박 중독자다. 그것도 영화 '타짜'에서 딸의 수술비를 도박으로 날렸던 교수처럼 아들의 수술비마저 도박으로 탕진할만큼 중독이 심하다. 때문에 그녀는 날마다 남편이 잠들면 몰래 일어나 데스크탑으로 가서 온라인 포커를 친다. 낮에는 법을 수호하고 밤에는 불법을 자행하는 일을 하는 것이다. 그러니 지킬과 하이드로 부를 수밖에. 




 결국 도박 때문에 그녀는 끔찍한 범죄까지 감행하고 만다. 우리는 이 소설의 처음에서 심하게 학대 받은 아이를 통하여, 아이가 지닌 미리 녹음된 테이프로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아이가 더 심한 학대를 받을 것이라고 은행원에게 협박하여 돈을 가져가는 것을 본다. 너무나 잔인한 수법의 범죄라 이 사건은 삽시간에 스웨덴 전역의 관심을 모은다. 바로 이 수사를 레오나가 맡는다. 그러나 소설에서 묘사되는 레오나의 모습은 아무리 봐도 주인공 보정을 받기 힘들고 법의 심판을 받아야 할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그녀는 살인까지도 저지르지 않는가!


 정의감이 투철한 독자에겐 인내를 요구할 수 있는 소설이다. 더구나 레오나는 자신이 저지르는 일에 대해서 아무런 양심 상의 가책을 받지 않는다. 가정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남편은 아이들을 사랑하며 가정에 충실한 사람이다. 오직 문제가 있는 것은 그녀 뿐이다. 바로 도박. 그것을 계속하기 위해 그녀는 거짓말을 반복하며 주위 사람들을 속이고 어린 아이마저 범죄에 이용한다. 남편은 그저 필요하기 때문에 부부로 있는 것 뿐이며, 아이들만은 사랑의 감정을 다소 느끼나 그것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생각은 조금도 없다. 그만큼 자신의 욕망에 더없이 충실하다. 자신에게 중요한 것은 그것 뿐이다. 그녀 스스로도 보통 사람들이 공감이라 부르는 감정들이 차단되어 있다고 말한다.


 이런 주인공의 면모 때문에 이 소설은 더없는 독특함을 가진다. 이런 여성 주인공은 처음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장르 소설에서 등장한 악녀 중에서도 상급이라 할 만하다. 대개 주인공이 악녀일 경우 악행을 저지르는 데 있어선 그래도 뭔가 대의라고 할 만한 게 있었다. 이를테면 가장 많이 나오는 것이 자식이나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레오나는 그런 것조차 없다. 그녀는 가정을 기꺼이 파괴해서라도 자신의 욕망을 충족하려 한다. 범죄를 저지르는 것도 가족을 위해서가 아니다. 돈을 챙겨 도박을 마음껏 할 수 있는 나라로 홀로 떠나는 것이 목적이다. 너무나 색다른 모습의 주인공이기 때문에 끝까지 읽게 만드는 힘이 있다. 뭐, 그렇게 만드는 동기는 어쩌면 상반된 모습을 하고 있을 것이다. 누군가는 레오나가 어서 처벌 받는 것을 보려고 읽을 것이며, 누군가는 레오나가 어떻게 법망에서 벗어나는지 보기 위해 읽을 것이다. 또 어떤 누군가는 여성 주인공이 너무나 정도를 벗어났기에 페미니즘적 입장으로 읽으려고도 할 것이다. 보통 악녀라는 낙인은 가부장제 사회가 정한 상궤에 벗어나는 여성의 이마에 찍혀지므로 악녀는 페미니즘적인 가치를 구현하는 존재로 많이 여겨졌다. 레오나 역시 아이에 대한 것이나 자식에 대한 것이나 모두 전통적인 여성상에 극명하게 반대되는 모습을 보이고 있어 페미니즘 시선으로 바라보면 어떨까 하는 유혹을 많이 받게 된다. 그런데 이 악녀의 형성은 바로 가부장제의 지하실에서 이뤄졌다. 레오나는 어려서부터 딸이라는 이유로 부모에게 차별을 많이 당했다. 아버지는 철저하게 남자인 오빠만을 위했고 레오나가 그 서열에 조금이라도 반항을 하면 곧장 지하실에 홀로 가둬버렸다. 그 때의 경험은 그녀에게 트라우마가 되었고, 그녀는 늘 무의식의 공포로 자리잡은 지하실의 격리와 어둠으로부터 달아나려 애쓴다. 그녀가 경찰이 되고자 한 것도 실은 그 때문이었다. 다시는 자신을 가뒀던 그 질서의 피해자가 되지 않기 위해 질서를 만들고 지키는 자가 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도박 중독이 남성이 되고자 하는 욕망에 균열을 일으킨다. 알고 보면 그녀에겐 서로 상반된 두 가지 욕망이 있는 셈이다. 하나는 아버지와 같은 남성이 되고자 하는 욕망이다. 그것은 바깥에서 강요로 주입된 욕망이다. 아버지의 부당한 처사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도박 중독은 순전히 자신의 내부에서 솟아난, 오직 자신만의 것이다. 도박 충동, 그것은 남성 중심 사회에서 독립된, 고유한 자신이 되고자 하는 욕망의 다른 모습이다. 그녀가 형사와 아내 그리고 엄마로서 보다 더 남성 사회에 편입될 수록 마치 거기에 반발하듯, 도박 충동이 거세지는 것도 그렇게 해석하도록 만든다. 한 편, 아버지와 레오나의 관계는 다시 아빠와 올리비아의 관계로 반복된다. 올리비아는 사실 어린 시절 레오나의 분신이다. 재밌는 것은 반복된 올리비아와의 관계에서 레오나가 엄마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레오나는 이중적이다. 올리비아를 한 편으로는 아버지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게 만드는 존재이기도 하고, 다른 한 편으로는 아버지의 지배에 거듭 종속시키는 존재이기도 하다. 작가는 레오나에게 왜 이런 이중적 지위를 가져다 준 것일까? 그러고 보면 형사로서의 레오나도 그렇고, 아내와 엄마로서의 레오나도 그렇고 다 이중적 지위를 가지고 있다. 아직 이것의 의미는 내게 모호한 채로 남아 있는데 이야기가 좀 더 진전되면 분명해지지 않을까 한다. 현재 나온 레오나의 이야기는 삼부작 중 1부에 불과하다.


 레오나 외에 다른 인물까지 눈을 돌리면 페미니즘적으로 볼 여지는 더욱 많아진다. 일단 여자 검사 니나가 그러하다. 그녀는 처음에 원칙주의자로 나오는데, 소설 중반에서 레오나의 유혹에 넘어가 레오나와 한 편이 된다. 바야흐로 남성이 원하는 여성상에서 가장 멀리 달아난 '악녀들의 연대'가 탄생한 것이다. 이것은 남성 중심의 사회 또는 가부장제 질서와 타협하지 않겠다는 선언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소설 속의 두 여성 약자들의 모습은 악녀가 되는 것을 제외한 모든 여성들의 유화적 혹은 타협적인 제스쳐들이 소용없다는 것을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 두 여성 약자들이란, 하나는 범죄에 이용되는 학대 받는 어린 여자 아이 올리비아이고, 다른 하나는 남성 권력자들에게 비인간적인 착취를 당했던 매춘부 디나이다. 올리비아는 주로 아빠에게 당하는 소외와 고통을 호소하는데, 그것은 그대로 사회의 가부장이라고 할 수 있는 남성 관료들에게 당하는 디나의 고통과 이어진다. 그런데 그런 디나는 이렇게 말한다.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을 위해 싸우는 게 뭔지는 내가 더 잘 알아요. 뭐 하나라도 변화시킬 수 있기를, 내가 얼마나 바랐는지 당신은 모를 겁니다. 하지만 지금 이 처지에서는 아무것도 변화시킬 수 없어요. 결국은 내가 똥물을 뒤집어쓰고 말 테니까. 젠장, 지금 이 문제를 놓고 당신과 대화를 나누는 것 자체가 무의미해요. 우리는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들이라고요."(p. 355)


 디나는 남성 중심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해 뭐든 해 봤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모든 게 소용 없었다고 고백한다. 오히려 자신이 당했다고. 디나의 행위엔 오직 하나가 빠져 있었다. 그것은 바로 악녀가 되는 것. 그런 의미에서 디나의 절망이 악녀들의 연대를 만들어냈다고 볼 수 있다. 남성 중심 사회의 변화를 바란다면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해야 한다는 것. 그것이 디나가 말한 '우리는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들'이라는 말의 진짜 의미다. 문득 이와 비슷한 말을 들려주었던 영화 한 편이 생각난다. 바로 '에이리언'으로 유명한 리들리 스콧 감독의 '델마와 루이스'다. 델마와 루이스는 평범한 주부로 그들끼리 여행을 떠났다가 남성들의 부당한 처사를 경험하고는 그들만의 고유한 정체성에 눈을 뜨기 시작한다. 결국 그들은 범죄자가 되는데, 그것은 남성 중심 사회가 원하는 여성상에서 가장 멀리 벗어난 모습이다. 영화의 마지막은 그들이 남성 중심 사회와 결코 타협하지 않고 차로 절벽에 뛰어드는 장면이다. 리들리 스콧은 절벽에서 벗어나는 그들의 모습에서 화면을 멈춰 그들이 추락하는 것이 아니라 실은 해방의 비상을 하는 것이라 암시한다. 나는 레오나와 니나도 이와 비슷한 게 아닐까 생각한다.



 물론 이것은 섣부른 단정일 수 있다. 아시다시피, 지금 읽은 '레오나'는 원래 3부작으로 계획된 것의 첫 부분에 불과하니까 말이다. 앞으로의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되느냐에 따라 지금 내가 한 말은 완전히 허황된 것으로 판명날 수도 있고, 들어맞을 수도 있다. 과연 어떨까? 그 최종 확인을 위해서라도 얼른 3부까지 출간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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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 속 소녀
도나토 카리시 지음, 이승재 옮김 / 검은숲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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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0년이나 정신과 의사로 일해 온 플로레스에게 레베가 레이어 검사가 한 남자를 데리고 온다. 남자의 이름은 포겔. 얼마 전 이 곳 아베슈를 뒤흔들었던 애나 루 소녀 실종 사건을 담당한 형사다. 교통사고를 당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외과 병원으로 가야지 왜 정신과? 검사는 필요한 게 있다고 한다. 바로 이 형사가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한 어젯밤 행적이 궁금하다는 것이다. 검사는 플로레스에게 부탁한다. 이 남자를 상담하여 어젯밤 무엇을 했는지 알아내 달라고. 그렇게 포겔의 고백으로 애나 루 실종 사건에 얽힌 이야기가 흘러가기 시작한다. 이탈리아 출신으로 이제는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스릴러 작가가 된 도나토 카리시가 2015년에 발표한 '안개 속 소녀'는 이렇게 출발한다. 그런데 플로레스와 포겔이 만난 날은 애나 루가 실종된 지 무려 62일이나 지난 후다. 과연 그동안 어떤 일이 있었길래 애너 루 실종 사건을 맨 앞에서 진두 지휘하던 형사가 갑가지 용의자가 된 것일까? 마치 그 궁금증을 풀어주겠다는 듯이 작가는 포겔의 고백을 매개로 하여 독자를 실종 이틀 후, 크리스마스 때로 데려간다. 포겔이 실종 사건을 지휘하기 위하여 아베슈 마을로 파견되어 온 날이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오지의 마을, 아베슈. 조용히 몰락해가던 중이었으나 뜻밖에 형석이라는 귀중한 광맥이 발견되어 다시금 되살아나는 중이다. 하지만 그 부활의 과실은 모두에게 골고루 돌아가지 않았으니, 혜택을 입어 졸지에 졸부가 된 이들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하고 점점 더 가난에 찌들어가는 사람들이 있다. 있는 자들은 부를 과시하고 없는 자들은 그런 자들을 혐오한다. 마을은 사이에 메울 수 없는 깊은 심연을 둔 채 양 쪽으로 갈라지고 있었다. 실종 된 소녀 애나 루는 고립된 아베슈 마을만큼이나 눈에 띄지 않는 아이였다. 넉넉하지 못한 가정 환경 속에서 그래도 고양이를 사랑하는 구김살 없는 아이로 자라났다. 특별한 문제도 갈등도 없었다. 이 말은 뚜렷한 용의자가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랬기에 실종 사건 수사는 난관에 부딪혔다.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어려운 사건을 곧잘 해결한 포겔이 특별히 아베슈 마을로 파견되었다. 그런데 같이 온 형사 보르기는 포겔의 수사에서 어떤 위화감을 느낀다. 자신이 생각하기에 애나 루 실종 사건의 제 1 원칙은 애나 루를 찾는 것인데, 포겔의 관심은 오직 범인에게만 있기 때문이다. 그는 애나 루에 대한 것보다 범인에 대한 말을 더 많이 하며 '그는 유명세를 원하니 무대를 만들어주어야 한다'는 둥 '괴물을 수풀에서 내몰아 정체를 밝혀야 한다'는 둥의 이야기만 한다. 아무래도 포겔의 목적이 누구나 다 바라듯이 애나 루를 찾아 집으로 무사히 돌아오도록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범인을 잡아 자신의 명성을 드높이는데 있는 것 같다. 포겔의 주특기는 미디어의 적극 활용이다. 그러나 애나 루의 무사생환을 위한다면 혹시 납치했을 지도 모를 범인을 자극하지 않기 위하여 미디어는 되도록 쓰지 않는 게 현명하다. 그러나 포겔은 미디어를 이용하는데 거침이 없다. 이것만 봐도 포겔은 애나 루가 어떻게 되든 상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의 관심은 오직 어떻게 하면 연기를 계속 피워 그것을 피해 뛰쳐나온 너구리를 포획할까 뿐이다.


 결국 한 남자가 덜커덕 걸려든다. 이름은 로리스 마티니. 애나 루가 다녔던 고등학교 문학 교사다. 클리어란 미모의 아내와 모니카란 십대 딸과 함께 6개월 전에 갑자기 아베슈로 이사왔다. 갑작스런 이주 때문에 졸지에 친한 친구와 헤어져야 했던 모니카는 그것을 주도한 엄마 클리어와 사이가 좋지 않다. 그런데 그들이 갑자기 이사해야 했던 이유가 있었다. 변호사로 잘나가던 클리어가 자신의 모든 경력을 포기하면서까지 아베슈로 와야 했던 이유가. 마티니가 포겔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은 그가 타고 다니던 차 때문이었다. 그 차는 애나 루를 거의 스토킹 하듯 촬영한 영상에서 애나 루가 있던 장소마다 마치 애나 루를 따라다닌 것처럼 반복적으로 등장하여 수사진을 긴장케 했는데, 그 차의 주인이 바로 마티니였던 것이다. 이 사실이 밝혀지는 부분이 정말 압권이다. 무심코 있다 복부로 강렬하게 들어오는 훅을 맞게 된 느낌이었다. 포겔은 유일하게 수면 위로 떠오른 용의자 마티니를 쉽게 놓아줄 생각이 없다. 그는 이번 수사를 멋지게 해결하여 명예 회복을 해야 한다. 이전에 맡았던 손가락 테러리스트 수사에서 커다란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그가 용의자로 점찍은 회계사를 증거 조작까지 해서 잡아 넣었는데 그만 조작 사실이 들통나는 바람에 자신의 명성에 커다란 금이 가고 만 것이다. 그는 부하 직원에게 책임을 뒤집어씌워 가까스로 파면되는 것을 면했다. 미디어를 적극 활용하여 늘 기자들의 카메라 플래시 세례라는 스포트라이트의 한 가운데 있었던 포겔은 마약 중독에 버금가는 그 쾌락을 다시 한 번 누려보고자 애나 루 사건을 적극 활용하기로 한다. 그래서 동기도 부족하고 증거도 불충분한 마티니를 미디어 맛사지를 통해 이웃과 가족 모두에게서 고립시켜선 정신적 공황 상태에 빠지게 하고 그의 특기인 증거 조작으로 감옥에 집어 넣는다. 미디어의 영향력은 대단해서 사람들은 삽시간에 애나 루의 존재를 잊어버리고 오직 덤불 속에서 뛰쳐나온 늑대처럼 마티니에게만 관심을 갖는다. 마녀 사냥이 시작되고 평범하지만 성실했고 가정적인 남자에다 친절한 이웃인 마티니는 제대로 된 변호의 기회조차 한 번 얻지 못하고 미성년자나 유혹하는 음험한 괴물로 낙인찍힌다. 사정을 제대로 헤아리려는 시도는 없이 심판만 하기 바쁘다. 그것은 아내 클리어와 딸 모니카에게도 마찬가지다.


 이대로 포겔의 계획대로 되어가나 했는데 9회말 투아웃까지도 경기 결과를 섣불리 예단할 수 없는 야구 시합처럼 갑자기 뜻밖의 물건이 포겔에게 도착한다. 한 대의 노트북. 거기엔 30년 전에 소녀 여섯 명을 납치하고 사라져 버린 '안개 속 남자'에 대한 사건 파일이 소개되어 있었는데 그가 노린 여섯 명의 소녀에 공통점이 있었다. 바로 애나 루처럼 빨간 머리에 주근깨가 있는 소녀라는 것. 파일은 애나 루의 범행이 단독범이 아니라 30년 전 연쇄 살인의 부활임을 나타내고 있었다. 놀란 포겔은 얼른 노트북을 보낸 사람을 확인한다. 지금은 은퇴한 기자. 과연 이것은 진실일까? 정말 30년 전 '안개 속 남자'가 부활하여 다시금 저지른 범죄인 걸까? 그렇다면 포겔은 어떻게 해야 하나? 다시 또 증거 조작을 저지르고 말았는데. 느닷없이 나타난 단서에 두렵고 복잡한 심정이 된 포겔은 기자를 만나러 간다. 과연 그것은 또 어떻게 플로레스와의 대화로 연결되는 것일까?


 예측 불허의 이야기 전개와 출중한 페이지터너 능력이 도나토 카리시의 특기라고 할 수 있는데, 이번 '안개 속 소녀' 역시 주특기가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앞서 잠깐 언급했듯이, 이야기를 가지고 노는 재주가 상당하다. 이 소설엔 두 번의 놀라운 반전까지 마련되어 있는데 그것이 결코 억지스럽지 않기에 더욱 그렇게 보인다. 마티니는 소설 속에서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것은 언제나 '악당'의 역할이다(p. 136)라는 말을 하는데, 마치 그것을 실천하기라도 하듯 이 소설은 악인 열전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악인들로 넘쳐나고 있다. 한 소녀가 사라졌고 생사여부 또한 밝혀지지 않았는데 소설 속 인물들 대부분은 거기에 별 관심이 없다. 모두들 어떻게 하면 그것을 밑천 삼아 떡고물을 많이 떨어지게 할까만 신경 쓴다. 실종되어 돌아오지 않은 애나 루는 우리들에게 아무래도 세월호 참사의 아이들을 연상시키는데, 그래서 더욱 그들의 행태가 분노를 자아내게 만든다. 오직 마티니의 아내, 클리어만이 애나 루 소식에 대해 노심초사 신경을 쓴다. 같은 딸을 가진 엄마로서 결코 자신과 먼 이야기가 아니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런 클리어를 제외하고 애나 루는 제목 그대로 안개 속에 가려져 있다. 그런데 그 안개는 결코 자연적인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한없이 인위적인 것이다. 미디어가 피워 놓은 안개이니까 말이다. 제목의 안개는 정확히 그것을 가리킨다. 포겔과 그와 짝자꿍이 된 미디어의 이기심이 피워 낸 안개. 그것이 사람들이 정말 봐야 할 곳을 보지 못하게 눈을 가리고 포겔과 미디어에게 이익이 되는 쪽으로만 보게끔 짙은 안개를 피워냈다. 세월호 참사 때, 박근혜 무리들과 거기에 야합한 언론들이 그랬던 것과 똑같이. '안개 속 소녀'는 바로 그러한 미디어의 행태를 매섭게 비난하는 작품이다. 소설에서 포겔은 플로레스에게 이런 말을 한다.


 제가 해야 할 일은 사건을 지켜보는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는 일이었습니다. (...) 우리 모두에겐 괴물이 필요했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다른 누군가보다 자신이 더 낫다고 느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전 그런 사람들이 원하는 먹잇감을 던져줬을 뿐입니다.(p. 132 ~ 133)


 사실 이러한 포겔의 고백은 지금의 미디어가 하는 것 그대로다. 한겨례, 경향, JTBC, 오마이뉴스도 예외는 아니다. 조국의 어머니가 이사장으로 있는 웅동학원이 마치 어마어마한 탈세를 한 양 과장하고 강경화 남편이 살기 위해 지은 집을 부동산 알박기로 몰아가며, 김부겸의 아내가 얼마되지 않는 비상장주식 신고 누락을 마치 엄청난 금액을 고의로 누락한 것처럼 포장하는 것과 같은 일들이 비일비재했다. 괴물을 찾아내는 게 아니라 괴물을 만들어내는 게 지금 언론이 하는 일이었다. 포겔이 하는 것과 똑같이 오로지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멋대로 조작하고 왜곡한 괴물을 우리보고 뜯어 먹으라고 던져준 것이다. 그들은 공정이라는 이름으로 자신들을 포장하고 있으나, 그들의 말은 정직한 게 아니었고 오로지 독일 뿐이었다. 우리들을 자신들과 같은 괴물로 만들기 위한. 괴물을 만들어내는 자들이 계속 성공할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뿐이다. 우리 모두들 자신과 같은 괴물로 만드는 것. 우리가 그들처럼 괴물이 되어 점점 더 비이성적이 되고 정의나 도덕이 아니라 오로지 이기심에 물들어갈 때, 그들의 일은 점점 더 영향력을 가지게 되고 거기에 드는 수고는 적어질테니까. 그들은 우리가 아직 미몽 속에 빠져 있으며 자신들이 우리를 진실로 선도하고 있다고 악을 쓰지만, 사실 그들이 인도하는 곳은 더 깊은 안개 속이다. 우리가 계속 무지와 혼돈 속에 함몰되어 있는 것만이 그들이 원하는 것이니까. 문재인 정부 한 달. 특히 인사청문회를 둘러싼 보도 행태를 보며 더 절절하게 깨닫게 되었다. 그들이 특종이라며 요란하게 호각 소리를 내면 낼수록 그것은 우리를 더 짙은 안개에 둘러싸게 만드는 주술에 불과하다는 것을.


 이제 그런 눈속임과 선동에서 눈과 귀를 닫아야 할 때다. 인위적 안개는 스스로 뚫고 나가는 수밖에 없다. 수동적 수용이 아니라 능동적 파악이 될 때, 우리는 타인을 괴물로 삼지도, 또 우리 자신이 괴물이 되지도 않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기 위해 우리의 눈과 귀는 어디로 향해야 하는가? 바로 그들이 안개를 피우는 진정한 목적이기도 한, 그들이 안개로 가리려 하는 희생자와 약자들의 모습과 목소리다. 누구도 애나 루의 행방에 대해 관심 갖지 않을 때, 유일하게 신경을 썼던 형사 보르기가 다음과 같은 것을 배웠던 것 그대로.


 희생자들도 이야기를 한다는 사실.

 희생자들이 자신의 입장에서 사건에 관한 진술을 할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이 부분은 수사 초기부터 무시되곤 한다. 하지만 희생자들에게도 목소리가 있다. 그들의 과거가 대신 이야기를 들려주기 때문이다. 단지 누군가가 귀를 기울여주면 될 뿐이다.(p. 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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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인류 1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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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저기요. 네, 거기 당신. 아, 피하지는 마세요. 도를 믿으세요 같은 말을 하는 사람은 아니니까요. 얼굴이 충분히 그런 의심을 할만큼 생겼다구요? 와, 너무 하시네요. 모독을 당해드렸으니 그 보답으로나마 잠깐 제 얘기 좀 들어보세요. 긴 시간은 뺏지 않을테니까요. 네? 알았으니까 무슨 얘기냐구요? 혹시 베르나르 베르베르라는 이름 들어보셨나요? 들어보셨다구요? 럭키군요. 다행이 당신이 제게 할애할 시간을 좀 더 단축시킬 수 있을 것 같네요. 다 읽어보셨나요? 보셨다구요. 와, 정말 매니아시군요. 제3인류는? 아, 그건 아직이라구요. 잘 되었네요. 하마트면 이대로 이별을 고할 뻔 했어요. 아무튼 제3인류 빼고 다 읽어보셨다니까 드리는 말씀인데 이런 거 혹시 못 느끼셨나요?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모든 작품이 사실은 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거. 그렇게 같은 주제로 한 일련의 작품이라는 것을 말이죠. 이런 못 느끼셨다구요? 도대체 뭘 읽은 거예요? 등장인물도 겹치고 이야기도 전작의 내용들이 언급되는 등 분명하게 이어지는 지점들이 있잖아요. 아, 뭐라 하는 것은 아니구요. 좀 더 디테일하게 읽어보시라는 거죠. 그러면 분명 느끼게 되실 겁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작품들이 모두 하나의 흐름 속에 단계별로 서 있다는 것을. 제게 긴 시간을 허락해주신다면 당장 이 자리에서 증명해 드리겠습니다만 당신이 바쁘시다는 것을 알기에 어쩔 수 없이 그건 생략하고 바로 '제3인류'라는 본론으로 들어갈게요. 네, 저는 언제나 듣는 상대의 눈높이를 맞추는 사람이랍니다. 하하하. 어쨌든 아마도 '제3인류'를 읽게 되시면 분명 느끼시리라 생각해요. '제3인류'도 그 이전의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연속성 위에 서 있는 작품이라는 걸 말이죠.


 짧게 그 증거를 말씀드리죠. 일단은 그동안 내내 반복적으로 나타났던 에드몽 웰즈의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이 여기서도 여전히 얼굴을 빼곰 내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거기다 또 하나! 그 에드몽 웰즈의 손자인 다비드 웰즈가 이 작품의 주인공이라는 점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어쩌면 당신도 읽어보시면 그렇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어요. '제3인류'가 어쩐지 인간판 '개미' 같다고 말이죠. 저는 그렇게 생각되더군요. 연속성의 증거에 대해선 짧게 이야기 하느라 딱 두가지만 말씀드려 성에 차지 않으셨죠. 그래야 했던 이유가 있었어요. 바로 왜 인간판 '개미'로 여기는가에 대한 이유도 말해야 했거든요. 시간을 많이 뺏기가 죄송스러워 이렇게 나눈 것이죠. 결코 제 능력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당신을 배려한 결과임을 부디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아무튼 그 이유를 이제 말씀 드릴게요. '개미'를 읽어보셨다니까 아시겠지만 거기엔 로제타 석을 이용해 개미의 신으로 군림하는 '니콜라'라는 존재가 나옵니다. 그런데 '제3인류'에도 그런 존재가 나와요. 그것이 바로 가이아죠. 네, 어디서 많이 들어온 이름이라구요? 와, 대단하세요! 맞습니다. 고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대지의 여신 이름이죠. 제우스가 멸망시킨 타이탄 족. 그래서 가이아가 신이냐구요? 글쎄요, 정확한 의미에서 신은 아니에요. 정확하게 묘사하자면 인격을 가진 지구라고 말할 수 있겠네요. 쉽게 지구가 인간처럼 생각하고 감정을 가졌다고 상상해 보세요. 거기다 기상도 마음대로 조정하고 모든 동물을 움직이며 때로 인간에게 불만이 생기면 쓰나미를 일으켜 휙 쓸어버리기도 하는 지구를 떠올려 보세요. 네, 그게 바로 가이아입니다. 어떤 면에선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제대로 이름 붙인 것이죠. 사실 대지란 지구의 살결 아니겠어요.


 네, 뭐라구요? 그런 비슷한 존재가 예전에도 나왔던 것이 기억나신다구요? 와, 정말 매니아셨군요. 맞습니다. 나왔었죠. 바로 6부작인 '신'에서 말이죠. 미카엘이란 이름이었죠. 지구 1호를 관리하던. 그러고 보니 가이아와 미카엘 닮은 점이 많네요. 일단 자신의 의지를 그리스 신화의 신탁처럼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은 물론 개미에서도 나왔던 것입니다. 그러니 인간판 '개미'라는 생각이 자꾸 들 수밖에요. 그리고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더없이 냉정하고 잔혹해질 수 있다는 것도 가이아와 미카엘의 공통점이죠. 네, 그런 미카엘이 기분나빴다구요? 아, 이런 그러면 가이아도 마음에 드시지 않겠네요. '제3인류'의 가이아는 미카엘 보다 한 숟갈 더 뜨거든요. 이를테면 가이아는 자신의 기억을 담당하는 석유를 인간들이 마구 캐내자 신종플루 같은 독감균을 만들어 내어 수십억의 인구를 죽여버립니다. 뭐, 그런 황당한 자식이 있냐구요? 자신이 알츠하이머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 그렇게 무자비한 짓을 벌여도 되느냐구요? 거,보세요. 제가 마음에 드시지 않을 거라 그랬죠. 하지만 가이아에게도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사정은 있답니다. 혹시 공룡이 멸종당한 이유를 아시나요? 네, 맞습니다. 유카탄 반도에 떨어진 거대한 운석 때문이었죠. 그것도 다 아시다니 오늘은 제가 운이 좋네요. 말을 한참 줄일 수 있어서. 여하튼 그 운석의 충돌은 오랜 빙하기를 가져왔고 지구 가이아는 엄청난 상처를 입었습니다. 사람으로 치면 트라우마가 될 수밖에 없는 상처였죠. 한번 죽을 고비를 넘겨 본 사람은 다시는 그와 같은 위기를 겪지 않으려 조심하기 마련입니다. 도둑에게 당한 사람이 편집증일 정도로 문단속에 온통 신경을 쓰듯 말이죠. 그런 사람에겐 아주 작은 위협조차 중대하게 다가오기 마련입니다. 그러니 과잉 대응이 나오는 것이죠. 네, 가이아는 행여 또 그런 상처를 받지 않을까 벌벌 떠는 불쌍한 녀석입니다.


 그런데 말이죠. 재미있는 것은 이 가이아가 인류를 비롯하여 지구의 모든 생물들에게 아버지와 같은 존재라는 것입니다. 아버지란 어떤 사람인가요? 근엄하면서도 자식을 위해서라면 아낌없이 희생하는 모습이 얼른 떠오르죠. 왜, 미소를 지으시죠? 뭔가 의미심장한 웃음 같은데. 나중에 말해주겠다구요. 알겠습니다. 아무튼 그런데 베르베르는 아버지 같은 존재인 가이아를 전혀 다르게 묘사하는 것입니다. 상처에 벌벌 떨고 한없이 이기적인 모습으로 말이죠. 이것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이야말로 '제3인류'가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일단 여기에 대해선 나중에 말하기로 하죠. 거기로 나가기 전에 먼저 짚어야 할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좀 어렵게 말할게요. 달리 떠오르는 말이 없어서 말이죠. 그건 바로 '선별'입니다. 아, 당신도 아시는군요. 네, 그건 '개미'에서부터 이어져 온 것이기도 하죠. 때문에 더욱 이 '제3 인류'가 연속적인 이야기라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벌벌 떠는 겁장이에 지나지 않는 이 가이아가 자기를 지키려 하는 대표적인 행동도 바로 선별이기 때문입니다.

   

 혹시 '메르쿠리우스 임무' 기억나시나요? 새로 추대된 클리푸니 개미 여왕이 개미들과 공존하며 살아가던 인간들에 대한 음식 공급을 중단하자으로 죽을 정도로 굶주림에 허덕이던 그들이 자신을 따르는 개미들에게 지하실에 갇힌 자신들을 구조해달라는 메세지를 지상의 인간들에게 전하도록 했는데 그것이 바로 '메르쿠리우스 임무'라는 것이었죠. 그런데 말이죠. 이게 '제3인류'에서 좀 더 확장된 스케일로 반복되는 것입니다. 인류가 가이아의 생존에 위협하자 가이아가 '제3인류'라는 것을 만들어 인류를 멸망시키려 하거든요. 인간이 '가이아'가 되고 그들의 개미가 '제3인류'가 된 것말고는 차이가 별로 없죠? 이래서 '제3인류'를 자꾸 인간판 '개미'라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더구나 개미의 핵심 주제인 선별이 여기서도 비중있게 다뤄지기까지 하죠.


 네? 도대체 '제3인류'가 뭐냐구요? 의미는 단순해요. 선별이 세번째로 일어났다는 뜻밖에 없거든요. 태초의 인류는 거인족이었다고 합니다. 가이아가 생존에 도움이 되려면 되도록 체구가 큰 것이 좋겠다 싶어 그렇게 만든 것이죠. 그들이 '제1인류'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순종하지 않고 위협이 되자 그보다 작은 '제2인류'를 만들어 멸종시켜 버립니다. 그것이 바로 지금 우리들인 현생 인류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 인류도 거인족과 똑같은 경향을 보이는군요. 그래서 가이아는 다시 한 번 멸종을 위한 선별을 합니다. 그렇게 세 번의 선별이 진행되었고 하여 '제3인류'입니다. 이렇게 씁쓸하게도 종말을 위한 세 번째의 병기라는 의미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뭐라구요?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왜 이러느냐구요? 갑자기 파시즘에 경도되기라도 한 것이냐구요? 제가 어떻게 알겠어요? 하지만 베르나르 베르베르급 정도되는 작가가 아무 이유없이 그렇게 설정했을 리는 없겠죠. 네, 거기엔 물론 이유가 있습니다. 종말을 가져온다는 것에 신경쓰시기 바랍니다. 사실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여기서 누군가의 죽음을 간절히 바라고 있으니까요. 아니, 선별과 배제가 내내 이어져 왔으니 항상 노려왔던 것이기도 합니다.네? 그게 누구냐구요? 바로 아버지입니다. 앗, 당신이 아버지라구요? 이런 많이 놀라셨겠네요. 그렇다고 내 자식에게 이런 책을 읽힐 순 없다며 책을 집어던지시지는 마시구요. 조금만 차분히 들어보세요. 이제 왜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오디이푸스의 후예라도 된 듯 줅기차게 아버지의 죽음을 가져오려 하는지 얘기해 드릴테니까.


 그 이유에 대해 단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아버지란 존재가 사실은 선별과 배제의 근원적으로 불러 일으키는, 요즘 아이들 말로 하자면 최종 보스이기 때문입니다. 네, 안심하세요. 여기의 아버지는 지극히 상징적인 존재니까요. 보다 안심시켜드리기 위해 프랑스의 철학자 자크 라캉의 말을 잠시 빌려올게요. 아시다시피 그는 한 개인의 욕망을 통제하는 대타자가 존재한다고 했습니다. 개인 밖에 있는 존재인데 개인을 넘어서는 존재이기에 큰 '대'자가 붙은 것이죠. 쉽게 말하면 사회 질서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런데 사회 질서는 위계 질서라는 게 있지요. 자식은 부모를 따라야 하고 부하직원은 상사를 따라야 하며 군인은 지휘관을 따라야 하듯이 말이죠. 위계엔 언제나 가장 꼭대기에 있는 정상이 존재하기 마련입니다. 그렇게 가장 높은 곳에 거하면서 위계 질서 자체를 떠받치고 관리하는 존재가 말이죠. 그것이 대타자이며 그 지위란 가정에서의 아버지와 같기 때문에 흔히 아버지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죽이고 싶은 것은 바로 그런 아버지예요. 이제 안심하시겠죠? 당신과는 상관없는 문제라구요.


 베르베르가 자꾸만 살의를 느끼는 것은 그런 아버지가 반복해서 선별과 배제를 행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이들은 성별이나 계급, 인종에 관계없이 대등한데 이 아버지란 존재는 온갖 빗금으로 나와 너를 나눠 누구는 데리고 있고 누구는 내쫓기 때문이죠. 다른 누군가가 아닙니다. 서구 사회를 오래도록 지배해 온 근원적 사유체계 가 바로 그것입니다. 마르틴 하이데거는 '동일성과 차이'라는 책에서 서구의 형이상학을 단적으로 이렇게 표현한 적이 있죠. 고대 그리스 이후로 서구를 지배해 온 형이상학은 동일자와 타자를 엄밀히 나누고 모든 것을 동일하게 만들려 했으며 그렇게 되지 않는 타자는 배척했다고.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땅에 묻고자 하는 건 바로 그런 아버지입니다. 세계 2차 대전 중에 나치가 유태인을 학살했듯이 분리와 차이를 통해 비극을 반복적으로 양산하는 아버지 말이죠. 혹시 당신도 자녀들을 차별했다면 그 대상일지 모르니 조심하시죠. 네, 사람을 어떻게 보냐구요? 아, 죄송합니다. 사실은 그런 분이 아닐 줄 알았어요.


 아무튼 '제3인류'는 본질적으로 그런 것을 이야기하는 작품입니다. 이러면 또 문득 떠오르는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작품이 하나 있지 않나요? 우왓! 정답이에요! 맞아요, 바로 '아버지들의 아버지'죠. 어때요? 이런 제목을 듣고나지 이제는 좀 수긍이 가시겠죠? 베르베르는 내내 '아버지'란 과녁을 겨누어왔다는 것을. 그러니 우리나라 시인 이성복의 이런 시가 갑자기 생각나네요. '아버지, 이 개XX. 넌 입이 백개라도 할 말이 없어!' 그리고 록그룹 '도어즈'의 노래 'THE END'에 나왔던 이런 가사두요. "아버지, 난 당신을 죽이고 싶어!" 제가 하고 싶은 말은 베르나르 베르베르만 호로자식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살부 의식은 국경과 시대를 넘나들어 항존해 왔다는 것이죠. 오죽하면 프로이트조차 문명의 근원엔 살부의식이 자리잡고 있다고 말했겠어요. 그러니 아, 위험해하고 내치지 마시고 읽으세요. 이것은 다만 문명 비판이니까요. 더구나 늘 천착해왔던 주제인지라 제법 귀기울만 합니다. 문명 비판이라고 하니까 왠지 무거울 것 같다구요? 이런, 이 소설의 작가가 누구인지 잊었나요? 베르나르 베르베르입니다. 재미와 몰입으로 독자가 작품을 순식간에 먹어치우도록 하는데 발군의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구요. 그러니 걱정마세요. 흔쾌히 참여하세요. 그러다 보면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우리 문명의 근원적인 잘못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겁니다. 재미 외에 이런 성찰의 덤까지 주니 할인 마트의 '1+1'처럼 어찌 덥썩 잡지 않을 수 있을까요? 빠져 보세요. 제가 팬이라서 이렇게 말할 수도 있긴 합니다만 그래도 후회는 별로 없을 거예요. 그 어떤 배제와 차별 없이 모두가 대등한 가운데 궁극적인 자유를 추구하는 그의 비행엔 분명 탑승할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제가 너무 시간을 많이 뺐은 건 아니죠? 어쩐지 표정이 좋지 않으신데 그래도 유익한 대화이지 않았나요? 아니라구요? 아니, 왜 주먹은 쥐시는지? 어쨌든 이제 드릴 말씀도 더 없고 하니 그만 헤어져야 겠네요. 뭔가 미진한 구석이 있으시다면 다음에 또 대화를 나누면 되겠지요. 네, 뭐라구요? 다음에 또 만나면 각오 하라구요. 가이아의 아픔을 이해하게 만들어주겠다구요? 아니, 이런 제가 무슨 잘못을 한 거죠? 있는 힘껏 눈높이에 맞추어 자세히 말씀드린 것 밖에는 없는데. 너무하세요, 정말! 네? 왜 멱살을? 이혼하면 책임지라구요? 오늘이 결혼 기념일이라 레스토랑에서 아내와 만나 오붓이 저녁을 먹을 생각이었는데 저 때문에 한참이나 늦게 되었으니 어떡하냐구요? 그렇지 않아도 기념일을 하나도 못챙겨 아내가 잔뜩 벼르고 있는 참인데 오늘은 진짜 죽었다구요? 아, 그러면 진작 말씀 좀 하시지. 죄... 죄송합니다. 어떻게 사죄를 드려야 할지... 이런 우시면 어떡합니까? 아, 정말 아버지는 고달픈 존재로군요. 어쩐지 가이아가 왜 그렇게 유별나게 구는지 이해할 듯도 해요. 아악! 얼굴은 때리지 마세요. 생명이라구요. 악! 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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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잔 이펙트
페터 회 지음, 김진아 옮김 / 현대문학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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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 스스로는 왠지 '이공계 스릴러'라는 레이블을 붙이고 싶은 소설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의 작가 페터 회가 참 오랜만에 돌아왔다. 그 스밀라가 어른이 되어 가정을 가진 엄마가 되었다면 이렇지 않을까 싶은 캐릭터 '수잔'이 주인공인 '수잔 이펙트'란 소설과 함께 귀환한 것이다. 이 소설에도  '스밀라'처럼 기이한 능력을 가진 존재들이 등장한다. 주인공 수잔부터가 그러하다. 수잔은 사람들로 하여금 부지불식간에 흉중 깊은 곳에 있는 진심을 고백하도록 만드는 능력이 있다. 수잔이 특별이 원하는 것도 아니고, 고백하는 당사자가 최면 같은 것에 걸린 것도 아닌데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비밀을 수잔에게 술술 털어놓는 것이다.


 "방금 그 말을 한 것은 내가 아니었어. 소매를 걷어 올린 것도 내 의지가 아니고. 내 안에 있는 다른 것, 내가 모르는 어떤 것이었어. (...) 누가 이걸 보고 평범한 대화라고 하겠어? 그걸 부르는 이름이 있니? "

 "제가 자란 곳에서는 수잔 이펙트, 수잔 효과라고 불렀어요." (p. 27)



 이처럼 제목의 '수잔 이펙트'는 수잔의 특별한 능력을 가리킨다. 나는 앞서 분명히 '존재들'이라고 말했다. 이 소설이 '스밀라'와 결정적으로 차이나는 지점이 바로 거기다. '스밀라'엔 스밀라 혼자 나왔지만, 이 소설엔 가족이 등장한다. 바로 수잔의 가족이다. 남편과 남매 쌍둥이가 있다. 모두 수잔처럼 특별한 능력이 있다. 수잔과 남편 라반이 함께 있으면 시너지 효과가 일어나 수잔 이펙트가 한껏 증강된다. 그들이 있는 공간 전체에 있는 사람들이 영향을 받아 혼자만 간직한 진실을 고백하기 위해 앞다투어 찾아오는 것이다.(쌍둥이의 능력은 책을 통해 직접 확인하시길.) 수잔의 능력이 가진 가치를 가장 먼저 알아보고 자기 연구 주제까지 삼은 노벨상 수상자 안드레아 핑크는 라반 역시 그런 능력이 있는 것을 알고 일부러 수잔과 연인이 되도록 만들었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형성되지 않고 인위적으로 유도된 탓일까?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가족으로 '타임지'에 소개까지 된 가족이지만 문제가 많다. 내내 삐걱거리고 덜컹거리다 지금은 완전히 해체 직전까지 가버렸다. 


 우리는 노력했다. 그래서 태생부터 독불장군에 극도의 개인주의자인 네 명이 과연 한 지붕 아래서 살 수 있을 것인가, 라는 수수께끼도 풀었던 것이다.(p. 21)


 수수께끼를 완벽하게 푸는 것은 실패했다. 소설은 이 네 가족이 외국에서 그것도 온갖 추문을 일으켜 경찰에게 체포되거나 추적을 당하던 중에 덴마크의 법무부 장관 토르킬 하인의 지시로 모두 덴마크로 강제 송환된 데부터 시작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그런 수잔의 가족 앞에서 토르킬 하인은 어떤 일 하나만 해주면 가족 모두의 죄를 없던 것으로 만들어주겠다고 제안한다. 자신의 가족이 실은 자체 내에 이미 몰락을 잉태하고 있는 양자물리학과 다를 바 없다고 깨달은 수잔은 미래가 없는 가족에게 미래라는 시간을 가져다 주기 위해 그 임무를 맡기로 한다. 그것은 1970년대부터 존재했던 덴마크의 비밀 조직, 의회미래위원회가 남긴 마지막 보고서 두 건과 위원회 명단을 그 위원이었던 마그레데 스플리드를 찾아가 가져오는 것이었다. 수잔의 특별한 힘이 여지껏 굳게 닫힌 그녀의 입을 열게 할 것이라 여긴 것이다. 그런 생각은 들어맞았으나 어떻게 된 일인지 위원회 사람들을 만나는 족족 살해되어 버리고 이런 죽음의 위협은 수잔과 가족에게까지 찾아온다. 이런 일이 잦아지니 수잔과 그 가족들은 단순해 보이는 임무 이면에 뭔가가 분명 있다고 생각하고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사용해 '의회미래위원회'에 관련된 모든 것을 조사해 나간다. 놀랍게도 이 '의회미래위원회'는 비유하자면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에 나왔던 범죄 예지 시스템 같은 것으로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정확히 예측해서 보고서를 만들던 위원회였다. 그리고 그 위원회를 관리했던 자가 바로 토르킬 하인이었다. 그런데 어찌된 연유인지는 몰라도 마지막 보고서 두 개가 누락되었고 거기에 어떤 일들이 예측되어 있는지 알기 이해 하인은 수잔의 가족과 거래를 한 것이었다. 이제 하인마저 믿지 못하게 된 수잔과 가족은 독립적으로 움직이고 그러다 전 세계의 운명이 걸린 음모가 지금 이 순간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하나의 작은 사건이 마침내 인류 전체의 운명을 좌우할 무언가와 연결된다는 점에서 '수잔 이펙트'는 '스밀라'와 유사하다. 그 소설에선 스밀라의 내적 불안과 혼돈이 거대한 음모로 연결되었지만 이 소설에선 가족 간의 불신과 불통이 그것과 연동된다. 다시 말해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소설에서 착착 진행되고 있는 세계 붕괴의 음모는 사실 붕괴 중인 수잔 가족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때문에 세계의 붕괴를 막기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는 그대로 가족의 미래를 보존하기 위해 어떤 일을 할 것인가와 이어진다고 하겠다. 누구보다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잘 알았으나 공동체의 운명보다 개인의 이익을 더 우선시 하는 바람에 종말을 맞아버린 '의회미래위원회'는 사실 극도의 개인주의로 똘똘뭉친 수잔의 가족이 수수께끼를 끝내 풀지 못했을 경우 찾아 올 불길한 예언이나 다름 없다. 공동체라는 점에서 수잔 가족의 모습은 또한 현재 프랑스 대선의 양상으로 한층 더 음울한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는 유럽 공동체의 모습이기도 하다. '수잔 이펙트'를 페터 회가 유럽 연합에 보내는 하나의 제안이라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은데, 여기에 실린 그의 목소리를 단순하게 정리하자면 너무 자신의 상처에만 골몰하지 말며 미움이 생기고 원망이 들수록 무엇보다 상대방과 허심탄회하게 대화하려고 노력하자 정도가 될 것 같다.


 재밌게 읽었다. '스밀라'에서 느꼈던 페터 회의 독특한 작품 세계가 잘 살아나서 더욱 그랬던 것 같다. 캐릭터도, 문장도 그리고 이야기의 전개도 어느 하나 톡톡 튀지 않는 게 없다. 이런 스타일을 좋아하지 않는 분들에겐 다소 지루하게 여겨질 수도 있겠으나 내 취향은 이런 쪽이므로 정말 즐겁게 읽었다. 그러면서 가장 많이 했던 상상 하나가 있다. 수잔을 우리나라 대선 토론에 참석해 보면 어떨까? 라반까지 함께. 그러면 다섯 명의 대선 후보 흉중에 과연 무엇이 있는지 국민들에게 그대로 다 드러날텐데. 정치의 생명이 거짓과 모략 그리고 협잡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진실이 되는 그런 나라에 하루빨리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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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7-05-04 1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초능력을 가진 사람들과 그들의 임무, 음모를 가지고 그들을 이용하는 조직 등을 볼 때 저는 페터 회 [콰이어트 걸]이 더 오버랩 되는군요. 재밌겠습니다^^

ICE-9 2017-05-08 00:23   좋아요 0 | URL
앗, 저는 ‘콰어어트 걸‘을 아직 못 읽었는데, 그런 내용이었군요. 독특한 능력을 지닌 이들이 나온다는 점에서 일련의 연속성이 느껴지네요. 꼭 한 번 읽어봐야겠어요^^
 
내 손 놓지 마
미셸 뷔시 지음, 김도연 옮김 / 달콤한책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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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마샬 벨리옹은 프랑스 사람입니다. 그는 바캉스 시즌을 맞아 아내 리안 그리고 하나밖에 없는 딸 소파와 함께 마다가스카르 섬 근처에 있는 레위니옹 섬으로 여행을 갑니다. 그런데 유럽과 한없이 다른 이국적인 열대의 풍경 안에서 최고의 휴가를 만끽하던 그에게 자신의 인생 전체를 통째로 전복시킬 사건이 그만 찾아오고 맙니다. 아내 리안이 묵고 있던 호텔에서 사라진 것입니다. 그것도 그냥 사라진 것이 아니라 피와 피묻은 부엌칼등 혹시 살해 되었을지도 모를 정황을 남기고서 말이죠.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정신 공황에 빠질만한 일인데 설상 가상으로 레위니옹 섬 경찰들은 마샬을 의심합니다. 호텔의 목격자들이 마샬에게 불리한 진술을 했기 때문이죠. 위기의 올가미가 점점 마샬의 목을 죄어오는 가운데, 그는 자신의 차 유리창에 누군가 써놓은 글을 발견합니다.


 내일 오후 4시

 카스카드 만

 딸과 올 것 (p. 82)


 이것이 아내를 납치한 이가 썼다는 것을 확신한 마샬은 딸 소파와 함께 자동차를 타고 호텔을 빠져나갑니다. 마샬이 사라지자 경찰은 그를 아내를 살인한 용의자로 단정하고 추적에 나섭니다. 한없이 낯선 이국의 땅에서 그는 과연 경찰의 추적을 피해 아내를 되찾고 다시금 자신의 일상으로 온전히 돌아갈 수 있을까요?



 이 소설을 읽게 된 것은 두 가지 점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는 작가가 미셸 비쉬라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소설의 무대가 레위니옹 섬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미셸 뷔시는 우리나라에 '그림자 소녀'로 처음 소개 되었습니다. 데뷔가 2015년이니, 제법 빠르게 소개된 셈입니다. '그림자 소녀'는 비행기 추락 사고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소녀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미스터리로 아주 흥미로운 작품이었습니다. 뒤이어 소개된 '검은 수련'은 아직 읽지 못했지만, 이런저런 리뷰를 읽어보니 일반 독자들의 평이 좋더군요. 그래서 믿을만한 작가라 생각하고 이번에 나온 '내 손 놓지마'를 들게 되었습니다. 휴가를 보내려 떠난 섬에서 갑자기 비극적 사건을 겪는다는 설정이 흥미로웠고 그것이 또 제임스 카메론의 영화 '아바타'의 주요 촬영지이자 요즘 트레킹의 명소로 떠오르고 있는 '레위니옹 섬'을 무대로 벌어지는 지라 손에 잡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실은 저도 언젠가 꼭 레위니옹 섬에서 트레킹을 해보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거든요. 그래서 더욱 미셸 뷔시의 '내 손 놓지마'는 제가 놓칠 수 없는 소설이기도 했습니다. 미셸 뷔시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소설가이기 이전에 대학에서 지리학을 가르치는 교수이거든요. '그림자 소녀'에서도 무엇보다 제 눈에 들어온 것은 아주 정확하면서도 상세한 지리에 대한 묘사였습니다. 그런 미셸 뷔시가 '레위니옹 섬'을 무대로 이야기를 펼친다? 분명 '그림자 소녀'만큼이나 레위니옹 섬에 대한 정확하면서도 상세한 지리 묘사가 나올 것은 뻔한 이치죠. 그러니 이 소설을 읽으면 레위니옹 섬에 대한 생생한 모습을 느껴볼 수 있겠다고 생각했죠. 그렇게 읽게 되었고 물론 그 생각도 들어맞았습니다.


 재밌는 소설입니다. 개인적으로 만족했습니다. 레위니옹 섬 전체를 무대로 쫓고 쫓기는 추격전이 벌어지니, 섬의 분위기를 느끼고 싶었던 제게는 더욱 안성마춤인 작품이었죠. 물론 뒷 페이지를 넘기게 만드는 호기심과 긴장감도 끝까지 적절히 유지하고 반전도 마련되어 있어 미스터리 작품만으로도 제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습니다. 휴가지에서 일어나는 일이니, 휴가 때 읽으면 더욱 좋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드는군요.


 특히나 저는 미셸 뷔시가 왜 하필이면 레위니옹 섬을 무대로 삼았을까에 관심이 갑니다. 알고보면 레위니옹 섬은 참 특이한 섬이거든요. 섬 자체는 인도양에 있는 마다카스카르 제도에 있습니다. 마다카스카르 섬 오른 편에 작은 두 개의 섬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레위니옹 섬이죠. 바로 이웃에 있는 섬은 모리셔스 섬이구요. 소설에도 모리셔스 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주요 등장인물 중 하나는 그 섬에 살고 있기도 하죠. 어쨌든 프랑스에서 한없이 멀리 있는 섬입니다. 그러나 레위니옹 섬은 프랑스 땅입니다. 1643년 이래 계속 프랑스 영토인 것이죠. 제국주의 시대 잔재라고 해도 무방합니다. 이런 역사 때문에 레위니옹 섬은 인종적으로 그리고 정치적으로 아주 복잡한 환경을 구성하고 있습니다. 인종도, 언어도, 문화도 그리고 종교도 다양하게 마구 혼종되어 있죠. 그래서 MELTING POT의 대표적인 장소 중 하나입니다. 아무래도 이런 환경이면 갈등이나 분쟁이 많이 일어나겠죠. 그래서 섬 이름마저 '레위니옹'이 된 것입니다. 레위니옹은 영어로 'REUNION'을 뜻하죠. 한 마디로 많은 것이 다른 우리지만 하나가 되어 잘 살아보자는 바람이 섬 이름 자체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이런 레위니옹 섬의 환경을 알게되면 왜 정치학자이자 선거지리학 전공인 미셸 뷔시가 하필이면 소설의 무대를 레위니옹 섬으로 했는 지도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레위니옹 섬의 환경은 지금 프랑스에서 한창 진행 중인 정치적 환경과 많이 닮아 있으니까요. 바로 최근에도 이주 노동자와 난민 문제로 프랑스가 시끄러웠죠. 프랑스 대혁명의 세가지 정신 중의 하나이기도 한 관용으로 유명한 프랑스조차 현재는 우파들이 대놓고 배척 정책을 펼치자고 주장하는 있는 중입니다. 다양한 인종과 문화 그리고 종교적 갈등으로 인해 프랑스라는 MELTING POT이 한창 들끓고 있는 것입니다. 레위니옹 섬처럼 말이죠. 아마도 작가 미셸 뷔시는 레위니옹 섬을 빌려와 비슷한 정치 지형이 되어가고 있는 프랑스의 현재를 말해보려 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특히나 제게는 소설에 나오는 어린 딸 소파의 시선이 의미심장하게 보이네요. 굳이 어린 아이의 시선을 넣은 것은 이야기의 긴장감을 높인다는 차원을 넘어, 한없이 순수한 어린 아이의 시선을 통하여 어른들이 가지는 타인에 대한 불신과 갈등은 더욱 뚜렷하게 대비하고자 함이 아닐까 합니다. 그 소파와 마샬이 서로의 손을 힘껏 부여잡았듯, 비록 인종도, 언어도, 문화도 그리고 종교도 다르다고 해도 타인의 손을 놓지 말고 서로에 대한 이해와 존중으로 손을 꽉 잡자는 뜻으로.

 그런 작가의 마음까지 투영된 '내 손 놓지마'는 분명 손에 잡고 읽어볼만한 책이라 생각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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