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이판사판 이라고 판사를 주인공으로 하는 드라마가 방영중인가 본데, 제목을 잘못 지은 거 같다.
맞는 제목은 ‘개판‘이 아닐까 싶다.
우병우 관련된 건 모조리 영장 기가하는 판사도 그렇고,
구속적부심에서 김관진 풀어준 판사도 그렇고
‘개판‘이 아니라면 달리 뭐라 할 수 있을까?
오늘도 흙탕물 만드는데 여념이 없는 이런 사법부의 적폐들이 하루빨리 말끔히 청소되길 빈다.
눈은 내리는데 속은 부글 끓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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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이라 불린 남자 스토리콜렉터 58
데이비드 발다치 지음, 김지선 옮김 / 북로드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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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디선가 쿨함이 마구 느껴지고 있다면, 그건 에이머스 데커가 당신 가까이에 있다는 뜻입니다.

 에이머스 데커, 이 남자 혹시 아시나요? 아신다면 당신은 전작 '모든 것을 기억하는 남자'를 읽어보신 분이겠군요. 우리에겐 아직 그 이름이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세계에선 스릴러 거장의 반열에 든 미국 작가 데이비드 발다치. 놀랍게도 데뷔 하자마자 발표한 작품이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주연과 감독을 겸했던 영화 '절대 권력'으로 만들어졌었죠. '에이머스 데커'는 그의 대표적인 시리즈의 주인공입니다. 195센티미터의 거구. 소설에서 그를 본 이들은 자주 뚱보라 부르는 그는 지금의 몸매로는 도저히 믿기지 않겠지만 사실 대학 때 미식 축구 선수로 프로까지 된 바 있습니다. 그러나 경기 도중 사고로 뇌에 커다란 충격을 받아 선수 생활을 접어야했죠. 사고가 남긴 건 그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그 때 머리에 받은 충격으로 뇌가 그만 과잉기억증후군에 걸려버린 것입니다. 과잉기억증후군이란 한 번 본 것은 절대로 잊지 않고 모조리 기억하는 증후군입니다. 수험생이라면 누구나 부러워 할 능력을 그는 가지게 된 것이죠. 하지만 그에게 이것은 결코 축복이 아니었습니다. 실은 저주였죠. 왜냐하면 형사 시절, 잠복을 나갔다가 집에 돌아왔는데 아내와 딸이 무참히 살해되어 있는 것을 봤기 때문이죠. 상실의 아픔은 망각에 기대어 치유되는 법인데 데커에겐 그것이 전혀 허용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는 바로 1분 전에 본 일처럼 아내와 딸에 대한 모든 것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좋은 추억과 더불어 무참히 살해된 모습마저. 그것이 그를 망가뜨렸습니다. '모든 것을 기억하는 남자'는 데커가 그 어둡고 질척한 절망의 늪에서 헤어나와 다시금 삶의 의미를 찾는 이야기였죠.


 거기에 바로 뒤이어 계속되는 이번 작품, '괴물이라 불린 남자'는 그런 데커가 자신과 똑같은 일을 겪은 멜빈 마스라는 남자를 자기처럼 삶의 환한 빛으로 인도하는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말하니 무슨 종교 소설인가 하시겠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이 소설은 아주 빼어난 스릴러 소설로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정말 단 한 번도 손에서 놓여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흥미와 재미로 가득한 작품입니다. 줄거리를 대강 소개하면 이것을 바로 아실 겁니다.



 소설은 멜빈 마스로부터 시작합니다. 고교 시절 미국에서 가장 뛰어난 미식 축구 선수였던 그는 20년이 지난 현재 사형수의 몸으로 감방에 있습니다. 표지에 나와 있는, 철창에 갇힌 흑인이 바로 그인 것이죠. 왜 이렇게 급전직하의 삶을 살게 되었나? 그것은 그가 부모님을 살해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는 그런 죄를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가 말한 알리바이가 모조리 거짓으로 밝혀지는 바람에 그는 20년을 감옥에서 보내고 이제 사형 집행이 이뤄지는 날이 되었습니다. 마스가 사형을 당하려는 찰라, 갑자기 집행이 정지됩니다. 앨러바마 감옥에 수감된 또 다른 사형수 몽고메리가 마스의 부모를 자신이 죽였다고 자백한 것입니다. 오로지 경찰만 알고 외부에 전혀 공개되지 않은 사실을 몽고메리가 알고 있었기에 그의 자백이 신뢰를 얻어 마스의 사형 집행이 정지된 것입니다. 단순한 천운이었을까요?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주인공 에이머스 데커 입니다. 그는 현재 전작에서 협력한 FBI 특수 요원 보거트와 함께 있습니다. 데커의 뛰어난 수사 능력을 알아본 보거트가 장기 미제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주로 유능한 외부 인사들을 모은 수사팀에 데커를 참가시킨 것입니다. 데커는 셜록에 버금가는 기억력과 추리력으로 왜 그가 이 수사팀의 에이스인가를 같은 팀의 동료 밀리건이 수사하자고 가져온 케이스의 허점을 단번에 간파하여 범인을 정확히 일러줌으로써 보여줍니다. 아마도 이 부분을 읽을 때 분명 저처럼 데커의 능력에 혀를 내두를 것입니다. 그런 데커의 눈에 마스와 몽고메리 케이스가 들어온 것입니다. 그에게 항상 죽음의 그림자를 알려주는 '일렉트릭 블루'의 뇌리 속 번쩍임과 함께 그는 이 사건에 뭔가 심상치 않은 게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하여, 데커의 리드로 수사팀은 마스가 있는 텍사스로 날아갑니다. 21세기가 된 지금도 여전히 인종차별이 횡행하고 있는 그 곳으로...


 흔히 반전이 마구 튀어나오는 것을 '반전의 반전'이라 말하는데, 이 소설이 정말 그렇습니다. 단순한 사건인 줄 알았는데 규모가 점점 커지고, 지금까지 알았던 사실과 전혀 다른 진실이 잇달아 밝혀지니까요. 그런데 이게 전혀 무리하거나 어색하지 않습니다. 그 전에 반전에 대한 단서가 다 주어지고 있기 때문이죠. 주의 깊게 읽으면 눈치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발다치가 정말 아주 세부에 이르기까지 설정을 치밀하게 설계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더군요. 정말 '와~!' 하게 되는 순간이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아니, 어떻게 이리도 이야기를 잘 발전시켜 나가지 하면서 감탄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정녕 전 세계 80개국에 그의 작품이 출간되고 지금까지 팔아치운 것만 해도 1억 3천만부나 되는 거장으로서의 풍모를 실감했다고나 할까요. 하지만 단순히 스릴러적인 재미만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이 소설에서 마스는 가장 불쌍한 존재인데, 그의 고통과 절망을 섬세하게 표현하여 그 내면의 파란을 독자가 잘 감응하도록 하였고 그러면서도 마스와 비슷한 경험을 한 데커 사이에 공감을 통한 인간적인 우정까지 감동적으로 연출해(특히 이 둘의 마지막 장면이 참 여운이 많았습니다.) 결국 인간이란 자신을 깊이 이해해주는 누군가의 연대가 있어야만 자신의 커다란 상처에서 헤어나올 수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기도 했습니다. 이런 작품을 뭐라고 표현할까요? 모자라는 제 머리론 그저 시쳇말이나 다름없는 '재미와 깊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은 작품'이라는 것밖에는 떠오르지 않는군요. 셜록의 두뇌와 필립 말로의 감성을 가진 탐정 캐릭터를 원하셨다면 꼭 이 작품을 만나 보시길 바랍니다. 그것이 바로 '에이머스 데커'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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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명적 이유 버티고 시리즈
이언 랜킨 지음, 최필원 옮김 / 오픈하우스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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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가장 밝은 것은 가장 어둔 그늘을 만들기 마련이다. 한 여름에 불현듯 찾아오는 태풍처럼.

 그렇게 영국에서 팔리는 범죄 소설 중 10%를 차지할 정도로 인기가 많은 존 리버스 시리즈의 여섯 번째 작품, '치명적 이유'는 시작부터 명백하게 대비되는 두 개의 시간을 보여준다. 누군가 죽음으로 가는 시간과 동시에 에든버러의 연중 최고 행사인 에든버러 페스티벌을. 모두가 하나되어 웃고 떠드는 동안에 누군가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처형당하고 있었다. 머리, 팔꿈치, 무릎, 발목에 한 발씩, 그렇게 여섯 발의 총알을 맞아. 존 리버스는 시체를 보자마자 알아차린다. IRA가 주로 배신자를 처형하는 방식인 '식스팩'이라는 것을.

 누군가 그것을 모방해 자신의 조직을 배반한 이를 처단한 것이다.


 그 처형 방식을 알아보았다는 이유로 존 리버스는 테러 조직 수사를 전담하는 팀으로 차출된다. 자신을 별로 환영하지 않는 그 곳에서 그는 수사해야 한다. 한 편, 그는 리어리 신부에게서 개인적인 부탁을 하나 받는다. 에든버러에서 가장 거칠고 위험한 동네인 '가르-비'에 그 곳 청소년을 선도하기 위해 센터 하나를 만들었는데, 최근 그 센터 운영 방식이 이상해졌다고 한다. '가르-비'는 카톨릭인 구교와 개신교인 신교의 갈등이 극심한 지역으로 적어도 청소년만은 종교적 갈등에서 자유롭도록 만들기 위해 센터를 지었는데 요즘 카톨릭 아이들이 쫓겨났다는 소식을 들은 것이다. 그러니 어찌 된 사정인지 알아보고 이대로 카톨릭 아이들이 센터로 올 가능성이 계속 없다면 운영자에게 폐쇄토록 하라고 리버스에게 당부한다. 그러나 이 일 역시 해결하기가 쉽지 않다. 가장 거친 동네에 사는 아이들답게 아이들이 리더인 데이비 수터를 중심으로 완강히 저항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곤란한 것은 그것 뿐만이 아니다. 처형 당한 남자의 신원이 밝혀졌는데, 놀랍게도 전작에서 리버스가 감옥으로 보낸, 리버스에겐 배트맨의 조커라고 해도 무방할 악당 캐퍼티의 아들이었던 것이다. 캐퍼티는 즉시 부하들을 보내, 아들을 죽인 범인의 정보를 알려달라고 요구한다. 자신이 직접 복수하겠다고 말이다.


 이러한 삼중고 속에서 리버스는 사건 해결에 나선다. 그러면서 목도한다. 스코틀랜드에 여전히 남아있는, 그것도 아주 치열한 카톨릭과 개신교 사이의 종교적 갈등을.

 그 갈등은 리버스를 군대에 가도록 만든 1969년에 처음 일어났던 모습 그대로였다.


 어둠 속에서 불붙은 유리병들이 날아다녔다. 넝마조각으로 만든 심지에서는 휘발유가 튀었다. 화염병이 땅에 떨어지는 순간 증오는 웅덩이가 되어 번져나갔다. 사적 감정이 담긴 공격은 아니었다. 대의명분을 위한 행위였을 뿐.

 다 자신들의 명분이 키운 소동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나름의 보호 방식, 검은 택시들, 총기 밀반입, 이상과는 많이 동떨어진 사건들. 그 모든 것이 통제력을 잃은 상태였다.(p. 117)


오랜 시간이 흐르는 동안 사라졌다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그건 그저 축제의 환한 빛에 잠시 가려졌을 뿐이었다. 단 한 번도 사라진 적이 없었다. 어쩌면 축제야말로 기만이었을지 모른다. 사람들이 축제의 빛에 현혹되어 실존하는 갈등을 보지 못하도록 만드는. 그렇게 해서 뭐가 남았나? 아무 것도 없었다. 서로에 대한 불신과 증오도 그대로였고 그로 인한 상처와 고통도 그대로였다. 균열은 그런 기만의 축제로 메워질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 증거가 바로 식스팩 처형을 당한 남자의 시신이었다. 이제 존 리버스는 그것이 지금까지 항존하는 이유를 찾아야 한다. 작가가 소설 속 수사를 통해 드러내고자 하는 바는 바로 그것이다. 혐오와 증오로 상대방을 죽음까지 몰고 가는, '치명적 이유'를.


 "우리가 여기 온지는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그렇죠?" 그가 물었다.

리어리 신부가 미간을 찡그렸다. "이 세상에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자그마한 어떤 변화라도 이끌어내기에는 우릭 너무 미약해요."

"지금 주머니에 폭탄을 숨기고 있는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걸요. 우리 모두는 이곳에 살아 숨 쉬는 것만으로 세상을 변화시키고 있어요."

"폭탄 테러범을 얘기하는 게 아닙니다. 그를 막을 방법을 얘기하는 거예요."

"경찰로 살아가는 것 말이죠?"

"솔직히 저도 제가 무슨 얘길 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p. 34 ~ 35)


 개인적인 느낌으론, 지금까지 나온 존 리버스 시리즈 중에 가장 사건의 규모가 크고 스릴이 넘치는 것 같다. 처음부터 폭발하는 장면이 나오더니 후반에 가면 이야기가 아예 질주한다. 이 시리즈의 첫 작품은 한없이 우울하고 분위기가 착 가라앉아 있었다. 한 마디로 꽤나 정적이었다. 그러나 '치명적 이유'는 전혀 반대의 모습을 보여준다. 완전히 역동적이다. 존 리버스만 해도 그렇다. 우울에 젖을 겨를도 없이 쉴 새 없이 움직인다. 부서를 옮기고 도시를 오고가며 다른 여자도 만난다. 죽는 사람도 너무 많다. 살해 방식도 몹시 잔인하다. 여기저기서 갈등이 터져 나온다. 리버스는 지금 사귀는 여자 친구와 갈등을 일으키고, 경찰 내 외부도 갈등이 일어나며, 캐퍼티까지 가세해 치열의 강도를 높인다. 차갑다는 것은 분자의 움직임이 적다는 뜻이다. 뜨겁다는 것은 분자의 움직임이 활발하다는 것이다. 너무나 움직임이 많기에 당연히 이 소설은 뜨겁다. 나로썬, 이토록 뜨거운 존 리버스는 처음이었다. 마치 영화 'LA 컨피덴셜'을 보는 기분이었다. 새로웠고 그래서 좋았다. 어쩌면 스코틀랜드에서 가장 뜨거운 갈등인 종교 갈등을 다루고 있기에 소설마저 그 갈등의 온도를 닮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존 리버스는 과연 치명적 이유를 찾는가? 찾는다. 그러나 스포일러가 되기에 세세하게 말할 수 없다. 다만 그 이유에 대해선 다음과 같은 존 리버스의 말로 대신할까 한다.


 "난 당신 같은 사람들이 무서워요." 리버스가 냉담한 톤으로 말했다. 진심이었다. 콜록거리는 다드 수터는 열 명의 캐퍼티보다도 훨씬 무시무시한 사람이었다. 죽었다 깨어나도 바뀌지 않고, 말도 통하지 않는 타입. 누구도 그의 정신을 건드릴 수 없었다. 어떤 방법으로도, 운영진이 모두 퇴근해버린 가게나 다름없었다.(p. 368)


 이 소설에서 존 리버스는 이런 자들이 아직도 많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미 죽어버린 것을 뜯어먹는 하이에나처럼, 이미 전쟁은 끝났는데 여전히 전쟁이 있다고 믿으며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우리나라에서도 어버이 연합 노인들이나 자유한국당, 국민의당 혹은 안철수와 같이 흔히 볼 수 있는 사람들. 오로지 자기만 옳다는 생각에 타인을 위해 자신이 변할 생각은 조금도 않고 무작정 이기려고만 드는 사람들. 내가 입히는 상처와 아픔은 보지 못하고 애오라지 자기가 입은 것만 보는 청맹과니들.

 그것이 바로 죽음을 양산하는 '치명적 이유'라는 것을 화염의 온도 속에서 존 리버스는 깨닫는다. 그건 그대로 리버스 자신에게도 해당되는 얘기였다.

 특히 연인 페이션스와의 관계에서.


 이언 랜킨은 재밌게도 리버스와 페이션스의 관계를 통해 여전히 뜨거운 종교 갈등의 본질적인 이유와 그것을 해결하는 대안을 넌지시 암시한다. 소설 초반에서 리버스는 자신의 취향을 자꾸만 바꾸려고 하는 페이션스 때문에 곤란을 겪는다. 그런데 리버스 자신의 마음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자신의 감정만 소중하며 그걸 곧장 드러내는 변호사 캐롤라인 때문에 아주 난처해진다. 그것을 통해 깨닫게 된다. 사랑이란 자신을 조금씩 더 덜어내고, 타인에게 더 맞춰주는 노력이자 과정이라는 것을. 종교 갈등을 해결하는 게, 본질적인 면에 있어 이 사랑과 그리 다르지 않다. 때문에 소설의 마지막이 페이션스와 함께 있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다. 뭐, 그건 바로 전작 '검은 수첩'도 마찬가지였지만. 어쩌면 페이션스가 등장한 뒤로, 사실 존 리버스의 이야기의 알맹이란 잠시 그녀를 떠났다 다시 돌아오게 되는 이유에 대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사랑이란 여러 이유로 결별하고 또 재회하니까. 다만 그 사랑을 끝장내는 치명적 이유만 아니면 되는 것이다. 적어도 늘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리고 맞춰준다면 거기에 이르진 않을 것이다. 이렇게 말하니 이 소설이 무슨 연애학 개론 같네. 하기사 그렇게 읽어도 상관 없을 것 같다. 어떤 방식으로 읽든 '치명적 이유'는 속이 든든한 느낌을 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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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7-09-21 23: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헤르메스님 글에서도 뜨거움과 흥분이 뚝뚝 느껴져서 뭐지, 뭐야 하면서 따라 읽었네요^^

ICE-9 2017-09-26 20:42   좋아요 0 | URL
하하, 제 열기에 감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뜨거움과 거리가 먼 일상인지라 글로나마 한 번 가져보고 싶었어요^^
 
거짓말을 먹는 나무
프랜시스 하딩 지음, 박산호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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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랜시스 하딩의 '거짓말을 먹는 나무'는 매력적인 소설이다. 영국 아마존에서 18주 연속 1위를 했다고 하는데, 그럴만해 보인다. 19세기의 영국을 배경으로 한 판타지 소설이지만 단순한 환상 소설은 아니다. 남성 중심 사회가 가하는 억압 속에서 자신의 고유한 본성을 숨기고 오직 남성 사회가 원하는 모습을 연기해야만 했던 여성의 모습을 놀랍도록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다. 일단 이야기는 이러하다. 소설이 시작되면 주인공 소녀 페이스의 가족이 베인이란 섬으로 떠나고 있다. 페이스의 아버지 에라스무스 선더리는 목사로 자연 과학자로도 유명한데 특히나 그를 그렇게 만든 것은 바로 그가 발견한 화석 때문이었다. 그게 보통 화석이 아니라 날개 달린 인간의 화석으로 그러니까 천사의 존재를 입증하는 화석이었기 때문에 높은 명성을 얻었던 것이다. 그 화석을 발견했던 것이 원래 페이스였기에 그녀 역시 '화석의 소녀'로 짧게 유명해졌다. 그런데 그 화석이 그만 가짜라는 게 들통나고 삽시간에 과학자의 치욕이 된 아버지는 자신을 비난하는 사람들을 피해 달아나듯 베인 섬을 찾았던 것이다. 마침 그 섬의 치안 판사 앤서니 람베트가 초청해 주었다. 아직 본토에서의 일이 섬까지 알려지지 않은 탓인지 페이스의 가족은 섬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는다. 아버지는 재기를 노리고 다시 연구에 박차를 가한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섬 사람들도 아버지의 일을 알게 되고 마침내 가족 모두가 혹독한 냉대를 당한다. 


 페이스 모녀가 다가가는 순간 가게들은 일제히 문을 닫아버렸다. 케이크 가게 여자 주인은 프랑스 사람이라도 되는 것처럼 머틀이 하는 말을 못 알아듣는 척했지만 다른 사람들 말은 잘도 알아듣는 것 같았다. 작은 약제상 주인은 너무 바쁜지 페이스 모녀가 서서 기다리는 모습이 보이지도 않는 듯했다.(p. 121)



 아버지의 좌절은 심화하고 페이스가 이전에는 결코 볼 수 없었던 모습을 점점 보여주기 시작한다. 그러다 아버지가 자신을 도와 달라는 말에 단둘이 밤바다를 헤쳐 나가 한 동굴로 가게 된다. 그 동굴에 아버지가 몰래 숨겨 놓은 '거짓말 먹는 나무'가 있었다. 그 나무는 실제로 거짓말을 먹고 산다. 나무에 대고 거짓말을 하면 나무가 마치 포자를 퍼뜨리듯 마을로 퍼져나가 사람들 사이에 소문으로 떠돌게 된다. 나무가 거짓말을 먹으면 열매 하나가 생기는데, 그 열매는 먹는 이가 전혀 모르고 있었던 진실을 보게 만들어 준다. 뭐랄까? 거짓을 먹어 진실로 승화시키는 나무 같다. 어쨌든, 그렇게 거짓말 먹는 나무를 보고 온 다음 날 아버지가 절벽 중간에서 죽은 채로 발견된다. 아버지와 함께 집까지 돌아온 페이스는 왜 아버지가 다시 바다의 절벽으로 가서 죽었는지 납득하지 못한다. 죽음의 정황상 자살이 추정되지만 페이스의 엄마 머틀은 자신의 미모를 사용하여 관련자들을 유혹, 남편의 죽음을 자살이 아닌 사고사로 만들려 애쓴다. 그런데 페이스는 아버지가 죽은 현장 부근에 손수레 하나를 발견한다. 분명히 그 날 밤에 아버지와 함께 집까지 끌고 와서 온실 옆에 놓아둔 손수레였다. 그것이 어떻게 다시 아버지가 죽은 곳에 있게 된 것일까? 페이스는 직감한다. 아버지가 집에서 살해당했으며 아버지를 살해한 누군가가 손수레에 아버지 시체를 옮겨와서 절벽에서 떨어뜨린 것임을. 이제 페이스는 그동안 착한 소녀 연기 하느라 마음 속에 꼭꼭 억눌려 왔던 또 하나의 자아, '마녀 하피'를 해방시키려 한다. 


 페이스는 마음속에 수많은 의문을 안고 있었고, 그 의문은 나무상자 속의 뱀처럼 똬리를 튼 채 온몸을 비틀고 있었다. (...) 페이스의 마음속에서 그것은 이름 없는 존재였다 그러나 그녀가 그것에 이름을 지어주지 않은 이유는 그러면 그것이 그녀에게 더많은 힘을 휘두르게 될까 봐 두려워서였다. 그것은 중독이었다. 페이스도 그 정도는 알고 있었다. 페이스는 항상 그걸 포기했지만 진정으로 그런 적은 없었다. 그것은 세상이 아는 페이스와는 정반대였다. 착한 페이스, 든든한 페이스, 믿음직스럽고 따분한 페이스(p. 21)


그녀는 더이상 착한 소녀가 아니다. 아버지를 살해한 사회와 싸우는 투사다. 그것을 위해 그녀는 아버지가 물려주신 '거짓말 먹는 나무'의 힘을 적극 이용하려 한다. 아버지가 유령이 되어 마을을 떠돌고 있다는 거짓말을 비롯, 필요한 거짓말들을 마을에 퍼뜨린다. 그런데 아버지의 연구 자료를 노리는 이들이 있다. 믿었던 삼촌이 그들과 협력하여 페이스가 숨겨 놓은 아버지의 비밀 노트를 찾아서 가져가려 한다. 그들은 왜 아버지가 감춰둔 자료를 노리는 것일까? 그 이유와 사람들의 정체는 놀라운 반전 속에서 펼쳐진다.



 '거짓말 먹는 나무'는 이런 이야기다. 줄거리는 이렇지만 속을 더 뜯어 들여다 보면 이 이야기는 19세기 남성 중심 사회에 포박된 여성들이 자신의 자유와 생존을 걸고 힘껏 싸우는 분투기의 면모를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페이스만이 아닌 것이다. 소설 처음엔 자신의 미모를 이용하여 이기적인 욕구를 채우는, 그래서 더없이 속물적으로 보였던 페이스의 어머니 머틀이나 아버지를 파멸로 몰아간 최후의 흑막이 되는 존재 또한 자신이 서 있는 자리에서 여성으로써 최선을 다해 버티고 싸우고 있었다는 게 드러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소설은 단순한 판타지가 아니다. 정말은 여성 스스로 독립과 자존을 쟁취하려는 투쟁의 서사이다.


 소설에서 거짓말은 다양한 의미로 쓰인다. 하나는 여성들이 남성 중심 사회에서 생존과 지속을 위하여 자신의 고유한 모습을 숨기고 남자들이 바라는 모습을 연기하고 위장하는 것으로의 거짓말이다. 다른 하나는 그런 여성들이 싸워야 할, 여성을 억압하고 남성에게 순종적인 존재로 만들기 위해 진리처럼 위장하여 유포하는 남자들의 거짓말이다. 소설엔 많은 자연과학자들이 나오는데, 그들은 과학의 이름으로 여성이 차별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을 정당화 한다. 그러나 나중에 가서 그것들이 모두 여성에 대한 두려움과 남성의 옹졸한 자존심 때문에 나온 거짓 서사라는 게 밝혀진다. 압권은 페이스의 아빠다. 페이스는 아버지를 존경하고 신뢰한다. 비록 화석이 가짜라는 게 밝혀졌어도 페이스는 아버지를 믿고 세상이 오해하는 것이라 여긴다. 그러나 그렇게 믿었던 아버지는 페이스에게 이런 말을 한다.


 네가 아들이라면 언젠가는 세상에 두각을 나타내고 가족의 재산을 늘려서 그 은혜에 보답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딸은 절대 그러지 못해. 넌 절대로 명예롭게 군대에 복무할 수도 없고, 과학 분야에서 명성을 얻을 수도 없고, 성직이나 의회에서 명성을 얻을 수도 없고, 일을 해서 잘 살 수도 없어.

 어차피 넌 평생 내 지갑을 털어가는 짐밖에 안 돼. 네가 결혼한다고 해도 지참금 때문에 우리 집 재산이 크게 축날 거다. 넌 하워드를 그렇게 깔보면서 말하지만 네가 시집가지 않으면 언젠가는 하워드가 널 거둬주길 빌든가 집도 절도 없이 쫓겨날 거야. (p. 147)


 이것이 세상의 진실이었다. 페이스는 아버지가 만들어 놓은 거짓말에 그동안 속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아버지의 죽음은 그동안 페이스의 눈을 가리고 있었던 거짓말이 죽는 것이기도 하다. 그 죽음과 더불어 '거짓말을 먹는 나무'가 페이스의 것이 된다는 게 의미심장 하다. 왜냐하면 그 나무는 남성 중심 사회가 철저하게 감추는 진실을 페이스에게 알려주기 때문이다.(이 진실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스포일러가 되기에 설명하는 건 생략하기로 한다.) 


 페이스는 힘이 세지 않았지만 전에는 누구도 그 점을 이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위협이 항상 존재했다는 걸 알았다. 그녀와 같은 여자들에게 보이는 미소, 정중한 인사, 친절한 배려에는 그 위협이 깃들어 있었다. 그런데 그걸 가리고 있던 베일이 찢겨지고 진실의 추악한 면이 유감없이 드러난 것이다.(p. 430)


 페이스는 소설 후반에서 그 나무가 혹여 '창세기'에 나오는 '선악과 나무'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 선악과 나무가 아담이 하자는 대로 반려 동물처럼 따르기만 했었던 이브를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자립의 존재로 각성시킨 것처럼 여성에게 독립적인 의지를 불러 일으키기 때문이다. 이브와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것은 뱀의 거짓말 때문이었다. 그렇게 거짓말은 남성의 권위만 존재하던 세계를 붕괴시키고 여성과 남성이 대등한 동반자가 되는 세계를 창출시켰다. 그런 뱀을 페이스는 반려동물로 기르고 애지중지 한다. 이런 페이스의 모습은 그녀가 이브의 계승자라는 것을 우리에게 암시한다. 아버지의 죽음을 통해 새롭게 밝혀지는 또 하나의 진실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페이스의 엄마 머틀에 관한 것이다. 소설 내내 내세울 것이라고는 오직 미모 밖에 없는 지극히 속물적인 인간으로 나오는 머틀은 그러나 사실은 전혀 그런 존재가 아니었다는 게 남편의 죽음 뒤에 비로소 드러나는 것이다. 


 여긴 전쟁터야, 페이스! 남자들만 전쟁에 나가는 것이 아니라 여자도 마찬가지야. 세상은 우리에게 무기도 주지 않고 싸우는 모습을 보여서도 안 된다고 하지. 하지만 우리는 싸우지 않으면 이대로 죽게 될 거야.(p. 434)


 그러니까 그동안 머틀이 보여준 모든 행태는 사실 그녀만의 방식대로 치른 전투였던 것이다. 머틀은 페이스보다 더 일찍 남성 중심 사회의 거짓을 보았고 거기에 대해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으로 최선을 다해 대처해 온 것이었다. 그렇게 머틀이 닦아 온 길을 페이스도 이제 걷게 될 것이다.


 단순한 판타지 소설이 아니었다. 남성과 여성, 서로 다르게 쓰이는 거짓의 중의적 의미를 차용하여 독립과 자존으로 나아가는 여성의 성장을 판타지의 설정과 절묘하게 배합하여 성공적으로 재현한 작품이었다. 이야기도 꽤 몰입감이 있어 작가의 이야기 끌어가는 솜씨 역시 만만치 않았다. 프랜시스 하딩은 처음 만나는 작가인데, 이 정도의 내공을 목격하고 보니 그녀의 다른 작품 역시 만나고 싶어진다. 그녀의 데뷔작 '깊은 밤을 날아서'는 다행히 벌써 번역되어 있었다. 일단 그것부터 만나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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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7-09-21 2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이 너무 평범해서 큰 흥미가 없었는데 리뷰 내용을 보니 이 제목 외에 다른 걸 붙이기도 어려웠겠다 싶고 그러네요.

ICE-9 2017-09-26 20:40   좋아요 0 | URL
맞아요. 분명 다른 제목을 붙이기 어려웠을 것 같아요^^ 판타지 소설로만 알고 읽었는데 페미니즘적 메시지가 의외로 강해 좀 놀랐더랬습니다^^
 
이토록 달콤한 고통 버티고 시리즈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지음, 김미정 옮김 / 오픈하우스 / 2017년 7월
평점 :
품절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소설을 읽을 때 꼭 기억해야 할 점이 있다. 그녀가 코뮤니스트에다 레즈비언이었다는 사실. 그가 '열차 안의 낯선 자들'로 데뷔했을 때가 1950년이었다. 아시다시피 그 때는 그녀의 정체성을 이루는 두 가지 중요한 기둥을 남들에게 떳떳하게 밝히지 못하는 시기였다. 드러내면 대놓고 배척을 당했다. 그런 편협과 억압의 시기를 그녀는 견뎌야 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사회 스스로 정상이라고 말하는 시대의 공기가 실은 얼마나 무지와 적의로 오염되어 있는지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늘 사회 속에서 함께 섞일 수 없는 '타자'로 존재해야 했던 그녀는 그런 오염이 점점 보편이 되고 냉전 시대를 빌어 진리가 되려는 것을 보고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그것을 그대로 자신의 작품으로 옮겼다. 언젠가 거대한 파국을 가져올 지도 모를 불길한 시대의 대기를 독자들에게 전하려 한 것이다. 언젠가 그녀는 이렇게 말했었다.


 '나의 개인적인 질병과 불안은 내 세대의 그것이 좀 더 고조된 것일 뿐.'


 그러므로 영국의 유명한 스릴러 작가 그레이엄 그린이 퍼트리샤 하이스미스를 두고 '우려의 시인'이라 부른 것은 어쩌면 당연할 지도 모른다.



 '이토록 달콤한 고통'은 앞서 인용한 작가 내면의 고백이 온전히 그리고 생생하게 드러난 작품이라 할 만하다.

 이 리뷰를 쓰기 전에 다른 분들은 어떻게 읽었나 하고 몇 개를 읽었는데, 주인공 범죄에 대해 경찰이 대응하는 게 좀 미숙하고 허술하다는 평가가 보였다. 나 역시 그것이 이 소설의 주된 단점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이토록 달콤한 고통'은 스릴러 장르가 가지는 공식에 한정시켜 바라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스릴러라기 보다 시대의 주류적 경향과 전혀 다른 신념을 가진 이가 그 신념을 단념해야 한다는 압박 속에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두고 일어나는 갈등이 전면화 된, 한 마디로 생생한 심리 드라마적 성격이 더 강하기 때문이다. 소설이 나온 것은 60년이다. 냉전 시대가 가파르게 고조되고 있었고 사회주의 국가를 표방한 소련은 전무후무한 전체주의적인 면모를 보여주고 있었다. 게다가 공산주의자와 사회주의자를 가리지 않고 색출하는 '메카시즘'이 있었다.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같은 코뮤니스트에다 레즈비언이라면 여기저기서 자신의 정체성과 신념을 시험 받는 시기였다.

 어디서나 그녀를 범죄자에다 괴물로 규정하는 주장과 구호들을 만나야 했다. 단죄의 손가락들을 피하기 위해 자신의 본성과 신념을 더 철저하게 숨겨야 했다. 실제로 그녀는 레즈비언이라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이성애자인 척 한 적이 있었다. 그녀의 대표작 '리플리'가 위장하는 자의 심리를 그토록 생생하게 드러낼 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실제 경험이 눅진하게 녹여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소설엔 늘 '리플리' 처럼 다른 사람과 입장을 바꿔보는 게 나타난다. 데뷔작, '열차 안의 낯선 자들' 부터가 그러하다. 어쩌면 그만큼 내면의 고통이 컸다는 방증이고 아니면 절대로 사회가 자신의 진실된 모습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는 절망의 표현이다. 퍼트리샤 하이스미스는 그런 시간을 거쳐왔다. '이토록 달콤한 고통'이 나오기까지 10년이다.


 '이토록 달콤한 고통'은 그 10년 간 자신을 내리누르고 있었던 고민이 그대로 하나의 이야기로 재현되었다.

 자신의 진실된 정체성을 그대로 인정하고 가진 신념을 포기하고 싶지 않다는 갈망이 한 편에 있다면 다른 한 편엔 이제 그만 모든 것을 놓아 버리고 세상이 요구하는 '정상성'이라는 것에 맞춰 살고 싶다는 타협이 있다. 주인공 데이비드 켈시가 오매불망 사랑하는 애너벨이 바로 전자고, 다른 여자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끊임없이 구애하는 에피 브래넌이 후자다. 애너벨은 자신이 꿈꾸는 이상 혹은 관철해야 하는 신념의 상징이고, 에피는 포기를 통해 얻어지는 현실의 안정과 달콤함의 상징이다. 당연히 데이비드 켈시는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분신이다. 그의 고민은 곧 작가 자신의 고민이다. 그런 의미에서 주인공의 집념과 마지막 선택은 작가 자신의 의지 관철이요 선언이기도 하다. 이 소설은 무엇보다 주인공 내면의 심리가 세밀하고 뛰어나게 묘사되어 있는데, 분명 작가의 내면이 그대로 투영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말하고 싶다.

 '당시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내면을 알고 싶습니까? 그러면 좌고우면 하지 말고 '이토록 달콤한 고통'을 읽으세요!'


 그런데 이렇게 말하면 이런 질문이 가능하다.

 '심리 묘사 상세하고 뛰어나다고 하는데, 그것을 어떻게 아는가?'

 생각해 보면 심리 묘사 자체가 그런 평가를 낳지 않는다. 아무리 상세하고 생생하게 심리를 묘사해도 그 묘사가 독자의 공감을 얻지 못하면 쓸데없이 장황하고 뭘 보여주고 싶은지 모르겠다는 반응만 낳을 뿐일 테니까 말이다. 심리 묘사를 읽을 때, '와, 어떻게 이렇게 묘사하지? 굉장한 걸!' 하고 느낄 때는 언제나 나도 언젠가 가졌던 마음을 정확하게 나타내고 있거나 그것이 바탕이 되어 이런 마음도 가능하겠다 생각될 정도로 재현하고 있을 때다. 즉 묘사가 보편적 공감을 얻고 개인적 체험을 반영할 뿐만 아니라 그 묘사의 수준이 세밀한 것을 넘어 막연히 짐작만 하고 있었던 것까지 선명하게 표현할 때 그러하다. 이 소설의 심리 묘사는 정확히 바로 이런 차원을 담고 있다.


 어쩌면 이 말이 얼른 이해되지 않을 수도 있다.

 애너벨을 향한 주인공의 집착은 광기에 가까워서 '거기서 어떻게 보편적 공감을 가진다는 말인가?' 하는 반문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러나 이 주인공의 심리를 현실에 굴복하지 않고 자신의 정체성과 신념을 고수하려는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에 맞춰 본다면, 이러한 주인공의 모습은 우리들도 늘 하기 마련인 이상과 현실 사이의 번민과 갈등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는 걸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자신의 이상과 신념 그리고 타인의 인정이 아닌 나 스스로 인정할 수 있는 모습을 끝까지 추구하는 것은 늘 우리도 바라는 게 아니었던가? 그런 면에서 주인공과 우리는 그리 다르지 않다. 보편적 공감은 바로 거기서 우러난다. 우리도 한 때는, 아니 어쩌면 지금도 나만의 모습과 이상 그리고 신념을 쫓았거나 그러고 있으니까. '이토록 달콤한 고통'은 범죄 소설의 외형을 취하고 있으나 실은 그런 자들을 위한 응원이다. 가고자 하는 길을 내처 걸어가라는 등의 토닥임이다. 그랬기에 제목 역시 '이토록 달콤한 고통'인 것이다. 자신이 원하는 길로 걸어가면서 당하는 고통은 설령 그것이 아무리 크다고 해도 무엇보다 자기 자신이 되고자 하는 것에서 나오는 것이기에 '이토록 달콤한 고통'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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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7-08-28 18: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헤르메스 님 글 읽다가 문득 히치콕이야말로 천재였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열차 속의 이방인‘을 히치콕이 영화화‘합니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히치콕은 남자 배우를 실제 게이를 섭외하죠. 아주 유명한 일화인데...
이걸 보면 히치콕은 하이스미스가 은밀하게 감추고 싶었던 것을 간파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http://blog.aladin.co.kr/trackback/myperu/6971840 ( 마침 제가 쓴 리뷰가 있군요.. )

ICE-9 2017-08-28 18:37   좋아요 0 | URL
그러고 보니, 확실히 히치콕은 그런 감이 좀 남달랐던 것 같습니다.
분명 자신이 만들고자 하는 텍스트를 엄청 깊게 헤아리고 있는 게 아닌가 합니다.
역시 타인의 작품에 대해 좋은 감식안을 가진 사람이 자신의 작품도 잘 만드는 것 같네요^^

2017-08-28 18: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8-28 19:14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