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베스 호가스 셰익스피어 시리즈
요 네스뵈 지음, 이은선 옮김 / 현대문학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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꺼져라, 꺼져라, 짧은 촛불!

인생이란 움직이는 그림자일 뿐이고

잠시 동안 무대에서 활개치고 안달하다

더 이상 소식 없는 불쌍한 배우이며

소음, 광기 가득한데 의미는 전혀 없는

백치의 이야기다.


-세익스피어, '맥베스' 중에서 -



 윌리엄 세익스피어 서거 400주년을 맞이하여 현대 유명 작가들이 그의 대표작들을 재해석하여 자기만의 소설을 쓰는 '호가스 세익스피어 프로젝트'가 발표되고 어떤 작가들이 거기에 참여하고 있는지 명단을 미리 알렸을 때 내 눈에 가장 먼저 띄었던 작가는 바로 '요 네스뵈'였다. 해리 홀레 시리즈를 너무나도 아끼는 나로서는 당연한 반응이었다. 요 네스뵈는 권력을 향한 욕망에 눈이 멀어 스스로 파멸의 길로 나아가는 '맥베스'를 맡았다. 늘 사랑으로 아파하고 그로인해 고난을 자처하는 해리 홀레를 떠올린다면 리어왕이 좀 더 그와 맞지 않을까 싶었지만 우울과 죽음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해리 홀레를 생각한다면 맥베스도 제법 괜찮을 것 같았다. 그런 파멸의 궤적을 그리는 데 있어 능한 작가가 바로 요 네스뵈였으니! 그러고 보면 '맥베스' 처음에 등장하는 맥베스가 극 중에서 첫 전투를 치르게 되는 이가 바로 노르웨이의 왕 '스위노'다. 혹시 이것 때문에 요 네스뵈가 맥베스를 맡게 된 건 아니겠지? 요 네스뵈가 노르웨이 작가라서. 안다. 말 도 안 되는 상상이란 걸. 그냥 웃자고 하는 소리다. 흰 소리는 그만하고 어쨌든 드디어 수 년의 기다림 끝에 그 작품을 만났다. 그런데 이런! 제법 두툼하다. 세익스피어의 '맥베스'는 그렇게 분량이 많지 않은데, 어쩌다 이렇게 분량이 늘어났을까? 그 궁금증 때문에라도 나는 서둘러 책을 펼칠 수밖에 없었다.




 요 네스뵈는 일단 맥베스의 골격을 그다지 바꾸진 않았다. 스위노와의 전투에서 공을 세워 덩컨 왕에게 코도의 영주로 임명되고, 갑자기 나타난 세 마녀를 통해 자신이 장차 왕이 될 것이며 버남 숲이 스스로 움직이지 않는다면 그리고 여자가 낳은 자가 상대라면 절대 파멸하지 않을  거라는 예언을 듣게 되는 것도 그대로 나온다. 물론 자멸하는 것도. 인물들 역시 원래 희곡에서 맡은 역할에 변화를 주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 네스뵈의 '맥베스'가 새로운 이야기로 읽히는 것은 그것을 아주 현대적인 이야기로 잘 옮겼기 때문이다. 희곡의 무대가 되었던 중세의 스코틀랜드는 70년대의 도시로 바뀌었다. 그런데 이 도시란 배트맨에 나오는 고담과 그리 다를 바 없다. 전직 경찰청장 케네스 때문에 부패와 마약이 만연되어 있는 것이다. 희곡에선 스코틀랜드 왕으로 나왔던 덩컨은 그런 부패와 마약 조직을 일거에 소탕하여 깨끗한 도시로 만들려고 하는 신임 경찰청장이다. 소설의 맥베스는 희곡과 마찬가지로 도시의 마약 시장을 카테(희곡에선 세 마녀를 거느린 여신 같은 존재였는데, 소설에선 마약 조직의 수장이다.) 조직과 양분하고 있던 노스 라이더 조직 급습 작전을 성공시킴으로써(그 와중에 노스 라이더 조직의 수장 스위노는 사살된다.) 덩컨에 의해, 희곡에서 코도의 영주가 되었던 것과 똑같이 조직범죄수사반장이 된다. 그러자 헤카테가 거느린 세 마녀와 같은 존재들(그들은 헤카테 아래에서 마약을 제조한다.)이 나타나 희곡과 같은 예언을 들려준다. 세 마녀는 헤카테에게 돌아가 맥베스 마음에 일단 씨앗은 심어 놓았지만 과연 맥베스가 헤카테 생각대로 움직일 것인지 의심한다. 그런 그들에게 헤카테는 맥베스 혼자라면 불가능하겠지만 레이디가 있으니까 괜찮다고 말한다. 레이디는 맥베스가 결혼한 여성으로 그녀는 인버네스 카지노의 사장이기도 하다. 소설에서 이름이 아니라 레이디로 나오는 이유는 세익스피어 희곡에서도 그냥 '맥베스 부인'으로만 나오기 때문이다. 이름을 줬어도 별 상관없었을테지만 이만큼 요 네스뵈는 원작의 골격을 유지하고 싶었던 게 아닐지. 아무튼 맥베스는 그 예언을 레이디에게 들려주고 레이디는 맥베스에게 덩컨을 죽여야 한다고 말한다. 요 네스뵈는 레이디를 맥베스만큼이나 권력 욕망에 물든 존재로 그린다. 그런데 여기엔 연유가 있다. 과거에 그녀가 잘못된 선택을 했고 그 잘못된 선택을 스스로 정당화시키다 보니 권력의 집착에서 더이상 헤어나올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레이디의 잘못을 맥베스 역시 하게 된다. 처음엔 사소한 오판에 따른 선택이었던 것이 나중엔 벗어날 수 없는 어두운 운명의 올무가 된다. 처음엔 반신반의했던 한낱 낯선 이의 예언이 나중엔 맹목적으로 신뢰하는 신탁이 되어버렸던 맥베스처럼.


 톨킨의 '반지의 제왕'처럼, '맥베스' 역시 욕망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연약해질 수 있는지 잘 보여준다. 세익스피어의 맥베스는 욕망을 자신의 인간성과 맞바꾼 자의 이야기다. 그건 그가 원하는 자리에 가면 갈수록 자신의 사람다움을 잃어버리는 것에서 드러난다. 다른 이의 죽음은 누군가에게 아픔이 되고 분노가 되지만, 맥베스의 죽음은 찰라로 묘사되며 누구에게도 잔영을 남기지 않는다. 그는 마치 원래부터 없던 사림인 것처럼 된다. 요 네스뵈는 이것을 더욱 극명하게 보여준다. 소설에서 맥베스가 자신이 원하는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살해하는 인물은 알고보면 그 때 가지고 있었던 맥베스의 중요한 정체성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덩컨은 경찰로서 맥베스가 되고 싶은 바람직한 경찰의 상징같은 인물이고 뱅쿼(희곡에선 맥베스와 함께 세 마녀의 예언을 듣는 인물이기도 하다.)는 진짜 아버지도 아니면서 진짜 아버지보다 더한 부성애로 약물에 중독되었던 맥베스를 파멸에서 건져내고 사람으로 만들어준, 달리 말하자면 두 번째 기회를 가져다 준 사람으로 인간으로써의 맥베스가 가져야 할 사람다움의 상징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이 둘을 참혹하게 살해하여 원하는 경찰청장 자리에 오르는데, 이건 그대로 권력을 차지하는 대가로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경찰로서의 정체성과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을 희생시키는 것과 같다. 한 마디로 그는 괴물이 된 것이다.


 그런데 맥베스는 경찰청장이 되고 난 후, 더욱 약효가 강한 마약을 찾게 된다. 마치 자신이 저지른 죄악의 크기에 비례하여 더 중독성 강한 약을 찾는 것만 같다. 여기서 약은 이중의 의미로 사용된다. 하나는 약의 중독에서 쉽게 헤어나올 수 없는 것처럼 하나의 사소한 잘못된 선택도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 삶의 굴레가 될 수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맥베스의 삶이 그랬듯이 처음엔 타의에 의해 괴물이 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지속되면 이제 자의에 따라 괴물로 남는다는 것이다. 약은 명확하게 괴물의 상징이다. 사람의 증명이라 할 수 있는 이성을 억제하고 오로지 욕망의 충족만 추구하도록 만드니까 말이다. 세익스피어 희곡에서는 맥베스에게 잠을 박탈하는 것으로 점점 비인간화 되어가는 그를 나타내었다. 소설에서의 마약 중독은 마약이 늘 각성 상태에 있게 한다는 것을 감안할 때, 희곡에서 잠을 상실한 것을 빗대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잠의 상실이 소설에서 아예 사라진 것은 아니어서 더프가 맥베스를 죽이기 위해 찾아갔을 때 이런 말을 하기도 한다.


 "원하는 게 뭐야?"

 "정의와 우리의 잠을 돌려 받는 것"(p. 430)



그런 마약이 팽배해는 세상에서 자신의 이익이 아니라 정의나 타인을 위해 싸우는 사람은 모두 마약과 멀리 있다는 것도 이것을 방증한다. 한 쪽에는 괴물이 있고, 다른 한 쪽엔 사람이 있다. 맥베스의 반대편엔 더프(희곡에선 맥더프)가 있다. 희곡을 읽어 본 사람은 이 더프가 장차 어떤 인물이 될 것인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가 불륜을 저지르고 있는 연인 케이스네스(희곡에서 케이스네스는 그저 더프와 뜻을 같이 하는 스코틀랜드 귀족으로 나왔는데, 요 네스뵈는 재밌게도 소설에서 연인으로 만들어버렸다.)에게 고백했듯이, 그는 욕망보다 사랑과 책임을 더 소중히 하는 사람이다. 케이스네스를 향한 욕망 또한 아이들에 대한 책임과 사랑 때문에 과감하게 접을 수 있는 인물인 것이다. 


 내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우리 어머니는 나를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바쳤어. 내가 살 수 있도록 당신을 희생했어. 그러니까 우리 어머니가 그랬듯이 사랑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게 내 천헝이라 하더라도 아이에 대한 사랑이 가장 큰 사랑이잖아. 그러니까 아이들을 위해 그보다 더한 걸 바치지는 못할망정 다른 여자를 사랑하는 내 이기적인 욕심에 아이들에게서 가족을 빼앗겠다니, 그런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우리 어머니의 무덤에 침을 뱉는 거나 다름없어.(p. 313)


 올곧게 욕망의 길만 따랐던 맥베스와는 정반대의 남자. 하지만 아직 맥베스를 만나지 않은 분들을 위해 여기까지만 말하기로 하자. 지금은 그저 세익스피어가 맥베스를 통해 구현하려 했던 주제를 현대적으로 잘 리메이크 하고 생생한 현실과 심리 묘사로 잘 살을 붙여 더욱 피부에 와닿는 이야기로 만들었다는 것만 말해두려 한다. 부피가 이토록 두터워진 연유는 바로 거기에 있었다. 등장 인물들을 리얼한 삶의 현장 위에서 살아 숨쉬는 캐릭터로 만들기 위해 그만한 부피로 핍진성을 부여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건 성공했고 끝까지 몰입해 읽을 수 있도록 한다. 액션 장면도 많아 더욱 지루할 틈이 없다. 맥베스를 좋아하는 사람도, 요 네스뵈를 좋아하는 사람도 다 만족할만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당연히 추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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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31 23: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11-01 20: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네 명의 의인 에드거 월리스 미스터리 걸작선 2
에드거 월리스 지음, 전행선 옮김 / 양파(도서출판)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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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전 미스터리 소설을 읽을 때, 그 평가를 가장 많이 참조하고 미스터리 팬에겐 걸출한 평론서인 '블러디 머더'로 이름 높은 줄리언 시먼스는 에드거 월리스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다작 작가들 중에서 진정한 상상력의 재능을 지닌 사람은 에드거 월리스가 유일했다.('블러디 머더', p. 317)


 신랄한 평가를 서슴지 않는 시먼스라 이 정도로 말하면 상찬이 분명하다. 그러나 에드거 월리스는 우리들에게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다. 무려 173편의 소설을 발표(그 중의 절반이 추리 소설이다. 그는 SF를 쓰는 것도 좋아해 많은 작품을 발표했는데 유감스럽게도 그리 성공적이진 못했다.)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엔 거의 소개되지 않았다. 그랬기에, 이 작품의 출간이 반가웠다. 그것도 윌리스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네 명의 의인'이라서 더욱 그랬다.






 '네 명의 의인'은 제목과 다르게 피카레스크 장르에 넣어야 할 듯 하다. 필요하다면 서슴없이 살인을 저지르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이 사익 때문에 저지르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사실 돈 때문에 살인할 필요가 없다. 충분히 부유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대의를 위해 살인을 감행한다. 세상을 고통 속에 빠뜨렸는데도 자신의 돈과 권력을 사용하여 법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자들을 찾아내 처형하는 것이다. 때로 여기엔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는 자를 방해하는 이들도 포함된다. 소설에서 '네 명의 의인'의 최종 목적이 되는 영국의 외무부 장관, 필립 레이먼 경이 그러하다. 최근 영국에 스페인에서 부패한 정부(엄청난 기근이 스페인에게 닥쳐 국민들이 굶어 죽어가는데도 정부는 자신의 주머니 채우기에만 급급해 국민의 엄청난 분노를 샀다.)를 무너뜨리는데 앞장을 서고 있는 마누엘 가르시아가 스페인 정부의 손을 피해 망명해왔다. 그런데 필립 레이먼 경은 새로운 스페인을 위한 혁명의 등뼈와도 같은 가르시아를 스페인 본국으로 송환하는 법을 만들어 통과시키려 한다. 이 법이 실행될 경우 가르시아는 죽은 목숨이다. 그것은 현재 부패한 스페인 정부가 계속 존치하는 것을 뜻한다. '네 명의 의인'은 이것을 두고 볼 수 없다. 정의가 바로 세워지기 위해선 가르시아를 영국에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러므로 그걸 방해하는 필립 레이먼 경은 죽어야 한다. 소설은 처음부터 '네 명의 의인'(실은 세 명이지만.)이 필립 레이면 경을 암살하기 위하여 준비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최근 탈퇴해 경찰에 쫓기다 죽어버린 맴버를 대신해 '네 명의 의인'이 새로 영입한 인물은 '테리'. 그러나 스페인에서 데려온 이 청년은 선뜻 합류하려 하지 않는다. '네 명의 의인'에게 그는 필립 레이먼 경을 죽이기 위해 꼭 필요한 인물이다. 과연 테리는 그들의 맴버가 될 것인가? 그 이야기를 한 축에 두고 다음으로 넘어가면 필립 레이먼 경을 암살하기 위한 과정이 본격적으로 진행된다. 그들은 스스로 신사라 자청하기에 방법도 정정당당하게 한다. 그러니까 필립 레이먼 경에게 법안을 철회하지 않으면 언제까지 죽일 것이라 예고장을 공개적으로 보내는 것이다. 아침마다 수 십 통의 협박을 받는 레이먼 경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러자 '네 명의 의인'은 자신이 마음먹으면 누구든 얼마든지 죽일 수 있다는 것과 자신의 예고장이 허튼 소리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영국 하원 의회에 폭탄을 설치하고 그렇게 했다는 쪽지를 남긴다. 오직 경고의 목적이었기에 폭발을 하지 않도록 된 폭탄이었지만, 그토록 사람이 많았던 하원 의회에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들어와 폭탄까지 설치했다는 사실에 그 의회에 있던 사람은 물론 영국 전체가 공포에 잠긴다. 그 일로 온 국민의 뜨거운 관심을 받게 된 '네 명의 의인'은 그들이 전에도 대의 명분을 위해 먼 외국의 대통령까지 목을 매달아 처형하는 등 이런 일을 비일비재하게 해왔다는 게 알려지면서 더 비상한 관심과 공포의 존재가 되며 과연 그들이 제시한 시간에 레이먼 경이 죽을 것인가가 초유의 관심이 된다.


 그러나 뚝심 있는 레이먼 경은 법안 철회를 생각도 않고, 경찰은 '네 명의 의인'을 대대적으로 쫓는 한 편, 레이먼 경을 보호하기 위해 물샐틈 없는 경비로 완벽한 밀실을 만든다. 과연 '네 명의 의인'은 이 두터운 벽을 뚫고 레이먼 경을 암살할 수 있을까?


 피카레스크 장르에 밀실 살인을 뒤섞은 참신한 설정의 소설이다. 거기다 이 소설이 세상에 나온 때가 1905년임을 감안하면 돈과 권력의 힘을 빌어 법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자를 스스로 처벌하는 자경단이 등장한다는 것도 놀랍다. 자경단의 대표 작품이라 할 수 있는 배트맨도 1940년이 되어서야 등장했으니 얼마나 앞서 있는 것인가? 그러고 보니 배트맨의 설정은 아주 부유한 자가 자경단이 된다는 동일한 설정을 가지고 있는데, 혹시 밥 케인이 '네 명의 의인'을 읽고 그런 설정은 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비록 책을 읽지 않았더라도 '네 명의 의인'은 1921년과 39년에 두 번이나 무성 영화로 만들어진 적도 있어서 밥 케인이 영화로 만났을 수도 있다.


 

1939년에 나온 영화의 포스터


 어쨌거나 저쨌거나 당대엔 잘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캐릭터와 설정 그리고 형식으로 무장했으니, 왜 줄리언 시먼스가 에드가 월리스를 두고 진정한 상상력의 재능을 가진 사람이라고 말했는지 알 것도 같다. 아주 오래된 작품이지만 피카레스크 장르에 미스터리 물, 법정 물까지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기에 마지막까지 지루할 틈 없이 읽힌다. '네 명의 의인'이 때로는 위협을 위해, 때로는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다양한 트릭을 구사하는데 그것을 보는 재미도 있다. 물론 그 중 어떤 것은 좀 너무 안일한 것 같지만 말이다.(하지만 1905년이란 시간을 감안하면 용서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은 프랑스의 유명한, 범죄자 출신 경찰이자 경찰 제도의 근간을 만들었던 '비독'의 영향을 받은 것도 같다.) 아무튼 재밌다. 분량도 200여 페이지밖에 안 되니 가볍게 즐길 만하다. 고전 미스터리 소설이 취향이라면 오래도록 미싱 링크였던 것을 이제 확인한다는 마음으로 만나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다시 줄리언 시먼스에 따르면, 에드가 윌리스는 꽤 독특한 방식으로 소설을 쓰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는 인물의 이름만 적어두고 거기에 대해 다른 어떤 것도 메모하지 않았고 연재 소설을 쓸 때는 다음 편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거의 생각하지 않은 채로 즉흥적으로 썼다고 한다. 이 말을 듣고 보니 왜 '네 명의 의인'이 자유 분방한 전개를 보였는지 알 것 같다. 이런 그가 믿었던 것은 자신의 경험이었던 것 같다. 에드가 윌리스는 그리 넉넉하지 못한 집안에서 태어났고 여러 직업을 거쳐 가며 사회의 밑바닥 생활을 체험했다. 그러한 거리의 삶이란 당시를 생각해보면 범죄에 많이 노출된 삶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윌리스는 그 어떤 미사여구로도 숨길 수 없는 사회가 가진 냉엄한 진실을 보았던 것 같다. 주로 사기꾼들을 통해서 말이다. 시먼스에 따르면 윌리스는 사기꾼들의 습성과 언어에 대해 폭넓게 알고 있었고 그 지식을 작품에 효과적으로 활용했다고 한다. 이 소설에 나온 재치있는 트릭들도 그런 식의 활용이었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악인을 통해 사회의 참된 진실을 보고 그런 그들의 행위가 우리의 생각과는 반대로 가진 자들 쪽으로 너무 기울어진 사회의 균형을 바로 잡는 일일수도 있다는 생각이 그로 하여금 지속적으로 사회가 만든 정상성의 범주를 이탈한 타자를 통해 기존 사회의 전복을 꾀하는 이야기를 쓰게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네 명의 의인'도 그렇지만 이 책의 띠지에서 윌리스의 대표작으로 소개하고 있는 '킹콩'(이것은 책으로 발표된 것이 아니라 1931년,  RKO 영화사가 당시 고릴라가 나오는 영화를 계획했을 때, 그것을 위해 썼던 110 페이지 분량의 초안이다. 월리스는 이것을 5주에 걸쳐 썼다고 한다.)도 문명 저 바깥의, 오로지 야만의 땅에서 온 타자가 아니던가. 그 타자가 자신을 이용만 하고 용납하지 못하는 기존 사회를 거의 전복시킬 정도로 뒤흔드는 것이다. 이건 그대로 혁명의 은유로 보아도 무방하다. 언제까지 타자를 배척하거나 이용만해서는 사회 역시 지속될 수 없다는 외침의 표현이다. '네 명의 의인' 역시 정확히 그 연장선 상에 있다.


1933년 '킹콩' 영화 포스터. 원안이 에드거 윌리스에서 나왔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이 소설 후기에는 나오지 않는데, 시먼스는 이 책과 관련하여 재미난 사실 하나를 알려주고 있다. 원래 이 책은 출판사에 팔리지 않아서 에드거 윌리스가 자비로 출판했다고 한다. 그는 책이 좀 많이 팔릴 수 있도록 꾀를 냈는데, 그건 마지막에 필립 레이먼 경이 사방이 가로막힌 밀실에서 살해 당하는데 과연 '네 명의 의인'이 어떤 방법으로 살해했는지 그 방법을 책에서는 밝히지 않고 누군가 정답을 맞추면 상금으로 500 파운드를 주겠다고 신문에 광고를 실은 것이다. 그런데 결과는 참혹했다고 한다. 아무도 못 맞힐 것이라 여겨서 500 파운드나 되는 상금을 걸었는데, 정답이 너무 많이 접수되었던 것이다. 이런!


 줄리언 시먼스는 에드거 윌리스의 최고작으로 1922년에 발표된 '크림슨 서클'을 꼽고 있다. '놀라운 심리 탐정' 데릭 예일이 스코틀랜드 야드와 맞붙는 이야기라고 한다. 그는 이 소설을 자신의 베스트 100으로 꼽기도 했다. 그 당시에 미드 '멘탈리스트'와 같은 심리 분석 탐정이라니, 놀랍다. 이 작품도 만나볼 수 있게되면 좋겠다.


1933년에 나온 영국판 초판 페이퍼백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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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더 포스 1~2 세트 - 전2권
돈 윈슬로 지음, 박산호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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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뉴욕 시민들이 절대 감옥에 가지 않을 사람으로 시장, 미국 대통령, 교황에 이어 마지막으로 꼽을 만한 사람이 바로 뉴욕 형사 데니스 존 멀론이다.

 영웅 경찰.

 영웅 경찰의 아들.

 뉴욕시 경찰청 최고 엘리트팀 소속 베테랑 경사.

 맨해튼 북부 특별수사대.

 무엇보다 숨겨진 모든 비밀을 알고 있는 사나이이자 그 중 절반을 직접 처리한 장본인. (p. 9)


 스스로 말했던 것처럼 데니 멀론은 맨해튼 북부의 왕이었다. 그는 권력의 정점에 있다고 해도 틀리지 않는 특별 수사대 '더 포스'의 리더이니까 말이다. 그는 상부의 명령 없이 자의적으로 수사와 작전을 벌일 수 있었고 체포와 신문 과정에서 불법을 자행에도 간단히 넘길 수 있었다. 마피아도 그를 쉽게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 그들과 온갖 거래를 하거나 심부름을 하며 뒷돈을 챙기고 있었지만 대니 멀론을 비롯한 '더 포스'의 형사들은 그다지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다. 커다란 정의를 실현하려면 그런 작은 악행들은 필요불가결하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합법적 절차를 준수하며 윤리적으로 형사 일을 해도 뉴욕의 범죄를 근절시킬 수 있다는 이상주의를 경멸했고 그런 면에서 철저한 마키아벨리스트였다. 그런 그들에겐 거칠 것이 없었다. 그러나 달도 차면 기우는 법. 데니 멀론은 하나의 사소한 성급한 판단으로 몰락의 위기에 처하게 된다. 멀론은 그동안 선과 악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면서 위기를 잘 헤쳐나왔다. 그러나 이번에 닥쳐온 덫은 그리 만만한 게 아니다. 살면서 성취한 모든 것, 자기 삶에서 가장 중요한 가족은 물론 형제나 다름없는 동료들 그리고 자신은 좋은 경찰이라는 자부심. 이 모든 것을 걸어야 한다. 과연 다시 한 번 더 데니 멀론에게 운이 따라줄까? 멀론이 입버릇처럼 말했던, 분명 스타워즈의 대사를 패러디한, '다 포스'의 은총이 그와 함께 하게 될까?


 '개의 힘'으로 이제 우리에게도 제법 이름을 알린 작가, 돈 윈슬로가 새로운 작품을 들고 찾아왔다. 2017년에 출간되어 그 해, 뉴욕타임즈가 선정한 최고의 소설에도 뽑힌 '더 포스'가 바로 그것이다. 뉴욕타임즈만 올해의 책으로 뽑은 건 아니다. 내셔널 퍼블릭 라디오도, 반스 앤 노블스도, 영국의 파이낸셜 타임즈와 데일리 메일도 올해의 책으로 뽑았다. 비록 언론의 감식안이라는 게 그리 믿을 게 못된다고 해도 이 정도로 많은 이들이 올해의 책으로 꼽는다면야 작품이 확실히 좋긴 좋은 모양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는 말도 있지만 이 소설만큼은 그게 전혀 해당되지 않는다. 실제로 읽어봤더니 나 또한 올해의 책으로 꼽고 싶을만큼 뛰어났던 것이다.




 돈 윈슬로의 '더 포스'는 진정 뛰어난 작품이다. 400여 페이지 가까운 분량으로 두 권이지만 그런 길이따위 아무래도 상관없을만큼 페이지터너인데다 인종 갈등을 비롯한 온갖 구조적 모순으로 점철된 미국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해부에 서린 압도적인 깊이하며 생생하게 묘사된 등장인물의 삶이 가져다 주는 묵직한 정서적인 울림 또한 있기 때문이다. 스티븐 킹은 이 소설을 읽고 마리오 푸조의 '대부'가 생각난다고 했는데,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땐 킹이 또 과장한 것이겠거니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정말 나도 대부가 떠오를만큼 그만한 울림이 있었다. 저번에 '개의 힘'을 읽었을 때 이미 그의 역량이 심상치 않음을 느꼈지만 이번 '더 포스'는 그보다 더 성숙한 느낌이다. '더 포스' 이전에 나온, '개의 힘' 속편인 '더 카르텔(2015)'도 정말 뛰어난 소설이라고 하는데, 그는 점점 성장하고 있는 모양이다. 이 순간 나의 바람은 '더 카르텔'을 빨리 만나고 싶을 뿐이다.


 커다란 정의 실현을 위해 사소한 비리와 불법을 거침없이 행하는 형사나 경찰 조직에 대해선 익히 보아왔다. 대표적으로는 미국 드라마인 '더 와이어'가 있을 것이다. 이는 모든 합법과 윤리를 지켜서는 범죄를 제대로 근절할 수 없는 현실의 반영이다. 하지만 태평양 건너편에 있는 내겐 그 모든 게 드라마적 과장으로 보였다. 설마 가장 견제 시스템이 잘 되어있다고 자부하거나 평가받는 미국의 경찰 조직이, 지금이 엘 카포네가 설쳐대는 대공황 시대도 아니고 저토록 비리에 물들어 있을리 있겠어 여겼던 것이다. 그러나 '더 포스'를 읽어보니 그건 절대 과장이 아니었다. 뉴욕 경찰 역시 뿌리 깊이 어둠에 물들어 있었던 것이다. '더 포스'는 그걸 아주 적나라하고도 생생하게 보여준다. 시드니 루멧의 영화인 '형사 서피고'(소설에서 데니 멀론은 비리에 물든 경찰 조직을 홀로 고발했던 서피코(프랭크 서피코)를 배신자라고 욕하지만.)에 영향 받아 무려 5년 동안 수십명의 경찰들을 인터뷰 하면서 이 소설을 준비했다고 하던데, 소설에서 갓 잡은 송어처럼 펄떡 펄떡 뛰고 있는 리얼리티를 보면 빈말은 전혀 아닌 것 같다. 그러니 믿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뉴욕 경찰을 비롯한 미국 사회가 개인이 어떻게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썪어 있다는 것을 말이다. 멀론에겐 동생이 있었다. 그는 소방관으로 2001년 9.11 사태가 벌어졌을 때 진화 작업을 하다 숨졌다. 멀론에겐 동생의 죽음이 트라우마로 남아 있다. 그 때문에 그는 곁에 있는 가족과 동료를 소중히 여긴다. 그러나 그러한 무리의 형성은 또 다른 피해자를 만들기 마련이다. 무리에 절대 끼어들 수 없는 사람이 필연적으로 생기니까 말이다.


 '9.11' 이후, 미국은 대체로 그런 길을 걸어왔다. 테러를 빌미로 나와 피아를 구별지었고 피아에겐 차별로 대했다. 그렇게 9.11 이후 더욱 거세어진 미국 보수주의의 흐름을 '더 포스'는 여전히 짙게 남아 있는 인종 갈등을 가져와 매섭게 비판하고 있다. 


 당신이 겪은 일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다른 동료 경찰들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건 나도 이해해. 당신네 경찰들은 모두 프레디 그레이나 마이클 베넷(둘 다 경찰의 발포로 죽은 흑인 소년, 청년들) 죽였다고 비난받는 것이 괴롭고 억울하겠지. 하지만 자신이 프레디 그레이이거나 마이클 베넷이라서 비난을 받는 건 어떤 느낌인지 당신은 절대 몰라. 당신은 당신 직업 때문에 사람들이 당신을 증오한다고 생각하지만, 내가 나라서 사람들이 나를 중오한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잖아. 당신은 그 파란 경찰 재킷을 벗을 수 있지만, 난 이 피부 속에서 하루 24시간 일주일에 7일을 이렇게 살고 있어. 당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건, 당신이 백인이기 때문에 이해할 수 없는 건, 이 나라에서 흑인으로 산다는 것의... 무게야... 그 어마어마하게 진이 빠지는 무게가 어깨를 짓누르고 눈을 피곤하게 해서 가끔은 그냥 걷는 것만으로도 너무 힘들고 아파.(p. 239)


 이것은 멀론의 연인이자 흑인인 클로데트가 하는 말로 이 소설에서 내가 꼽고 싶은 최고의 문장이기도 하다. 어떤 정체성의 강조는 그 정체성이 될 수 없는 자의 아픔과 희생을 필연적으로 동반한다. 인종 갈등은 그 대표적인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미국은 9. 11 이후 자기만의 정체성을 강조하고 강요하는 쪽으로 흘러갔다. 9.11 이후 미국은 '애국자법'을 제정하고 국토안보부를 창설하였다. 애국자법은 모든 분야에 대해 사법집행기관의 감시를 강화하는 것으로 개인의 사생활과 통신의 자유를 비롯한 인권을 심각하게 침해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감시에 있어 국토안보부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졌다. 이쯤 되면 왜 돈 윈슬로가 멀론의 동생을 9.11에서 죽게 하고 그 트라우마에 의해 '더 포스'를 창설하는 식으로 설정했는지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 과정이 그대로 미국이 국토안보부를 창설하는 과정과 닮아 있기에 그런 것이다. 즉, '더 포스'는 '국토안보부'의 문학적인 비유다. 국토안보부는 실제 인권 침해를 하면서도 테러 방지라는 더 큰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그걸 용인했다.(오바마 역시 이와 비슷한 이유로 '애국자법을 연장하는데 서명했다.) 이건 멀론의 '더 포스'가 마피아들과 더러운 뒷거래를 정당화할 때 하는 것 그대로이다. 소설 '더 포스'는 그렇게 걸어온 미국이 어떤 결과를 낳았나 보여준다. 그것이 어떤 오늘의 현실을 빚어놓았는지를 말이다. 그들은 보다 더 단단한 내부의 결속을 위하여 외부를 도려내고 버렸지만 그렇다고 내부의 연대가 단단해진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내부의 고인 물이 썪어간데다 내부와 외부의 대립과 갈등은 더 들끓어 아주 작은 것도 방아쇠가 되어 사회를 붕괴시킬 수 있었다. 그만큼 약하고 아슬아슬한 상태가 바로 미국이었던 것이다. 소설 후반은 그걸 극명하게 재현하고 있다


 물론 '더 포스'엔 이러한 사회 비판적인 주제만 있지 않다. 이 소설은 장대한 인간 드라마이기도 하다. 선과 악, 개인과 제도 사이에서 회오리 바람 속의 연처럼 이리저리 흔들릴 수밖에 없는 인간의 연약함, 희극과 비극이 교차하는 아이러니한 삶의 순간들, 가난과 고난 그리고 그것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신념을 실천하는 용기라든가, 가랑비에 옷이 젖는 것처럼 사소한 악행을 거듭하다 되돌아 올 수 없는 파멸의 길로 치닫는 인생들하며... 그런 드라마가 유유히 펄쳐진다. 사회적인 주제에 맞춰 읽든, 인간드라마에 맞춰 읽든, 그 어느 쪽으로 읽어도 '더 포스'는 포만감을 선사하는 작품이다. 물론 그냥 재밌는 스릴러로 읽겠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이명박과 박근혜를 경험하고 최근 양승태의 사법 농단과 국민 여론을 깡그리 무시하고 영장 기각을 남발하면서 사법 농단 세력을 비호하기에 여념이 없는 사법부를 비롯하여 날이 갈수록 자신과 다른 정체성을 가진 자들에게 혐오와 적개가 깊어지는 걸 보고 있는 우리들에겐 이 소설이 특히 더 피부에 와 닿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런 이유로 감히 올해 내가 읽은 소설 중 최고의 한 편으로 꼽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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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크맨
C. J. 튜더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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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띠지에 나와 있는 말을 잘 믿지 않는 편이다. 스티븐 킹의 강력 추천이라는 말 또한 마찬가지다. 뭐, 한 두 번 속아봤어야지. 장르 소설계의 펠레 아니던가. 그러니 그런 띠지를 보면 '범죄도시'의 악역 장첸의 억양으로 '니 내가 호구로 보이니?'라고 말해주고 싶어진다. 그러나 정말 예외 없는 법칙은 없나 보다. 띠지에 나와 있는 말도 순도 100%의 진실일 수 있다는 걸 알려주는 책을 만났으니까 말이다. 그것이 바로 C.J 튜더의 '초크맨'이다.





 재판에 증인으로 불러나온 것처럼 선서라도 하고 싶다. '본인은 본 법정에서 진실만을 말할 것이며 거짓을 말할 시 위증의 죄를 달게 받겠습니다'라는 식으로. 이 소설에 한해선 그렇게 말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띠지에 나와 있는 말이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니지만. '스티븐 킹 강력추천!'밖에는 없으니 괜히 변죽만 올린 것 같아 죄송한 마음이다. 어쨌든 스티븐 킹이 강력 추천할 만하다. 아니, 이런 작품을 추천하지 않으면 어떤 작품을 추천할까 싶기도 하다. 내가 아는 스티븐 킹이라면 이 작품이 쏙 마음에 들었을 것이다. 사실 이 소설의 설정은 여러 모로 스티븐 킹 적이니까 말이다. 아마도 당신 역시 스티븐 킹의 소설을 즐겨 읽었다면 '초크맨'에서 익숙한 느낌을 받게 될 것이다. '스탠 바이 미'라든가, '드림 캐처' 혹은 '그것' 같은. 그렇게 이 소설은 어린 시절 친구인 다섯 명이 주역이며 그들의 과거와 현재를 오고가며 이야기가 전개된다. 살인이 있고 시체가 있으며 누명을 받아 죽음에 이른 자가 있으며 누구에게도 밝힐 수 없는 비밀들이 곳곳에 산재하며 놀라운 반전도 마련되어 있다. 만일 당신이 소설의 가치를 재미에 두고 있다고 한다면 당장 읽어볼 것을 권한다. 조금의 과장도 없이 말한다. '초크맨'은 올해 읽은 스릴러 중 가장 재밌는 소설이다.


 그것만으로 충분히 읽은 보람이 있지만 그렇다고 이 소설에 재미만 있다고 하면 너무 실례일 것 같다. 하지만 그 주제에 대해 자세히 말해버리면 스포일러가 될 수밖에 없어 그러지도 못하니 유감이다. 그러니 소설의 주제에 대해서만 간단하게 말하기로 하자. 이 소설의 주제는 단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 소설에 직접 나오는 것이기도 하다.

 "보이는 게 전부는 아니다."


 그래 안다. 많이 들어 본 말이라는 것을. 누가 모르겠는가? 삶도, 사람도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하지만 미숙하고 어리석은 우리들은 이걸 자꾸 까먹는다. 보이는 것을 전부라 여기고 쉽게 속고 오판하며 엄청난 실수와 잘못을 저지른다. 그러니 이 세상이 아직 사기꾼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들이 여전히 활개를 치고 다닌다는 사실이야 말로 우리가 여전히 보이는 그대로를 믿고 있다는 거의 방증이다. 그게 자신에 대해서라면 스스로 머리를 몇 대 쥐어박거나 술잔이나 기울이며 울화를 삭히면 되겠지만 타인에 대해서라면 다르다. 보이는 그대로 판단했다가 그들이 받지 않아도 될 상처를 주게 되었다면 그 죄는 또 어떻게 풀어야 한단 말인가? '초크맨'은 바로 여기에 대한 이야기이다. 삶에서 우리가 쉽게 하는 잘못들이 여기에 아주 진하게 스며들어 있는 것이다. 물론 우리가 신도 아니고 어떻게 타인의 삶을 온전히 알고 헤아릴 수 있겠는가? 그건 불가능하지만 적어도 함부로 판단하지 않는 것만큼은 할 수 있다. 쉽사리 비난하고 정죄하지 말고 먼저 보이는 것과 다른 사연은 없는지 먼저 물어보고 알아보는 정도의 노력은 할 수 있는 건 아닌가? 어쩌면 타인에 대한 섣부른 판단 역시 근본에는 남보다 내가 더 우월하다는 마음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칸트는 내가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하라고 말했겠지.


 쓰다보니, 이런 '초크맨'에 대해서 아무 말도 안 했네. 표지에 나와 있는 그림이 바로 '초크맨'이다. 그림 자체를 말하는 게 아니라 그렇게 바닥에 분필로 그림을 그려 소통하는 걸 말하는 것이다. 마을의 아웃사이더인 다섯 아이들은 그렇게 분필로 바닥에 그림을 그려 서로와 연락한다. 그런데 누군가 그 '초크맨'을 통해 사건을 일으킨다. 얼마 전 축제에서 끔찍한 사고를 당했던 한 금발 소녀가 숲속에서 살해된 것이다. 그것도 머리가 사라진 채로. 그 사건을 계기로 화자이자 주인공인 에드의 삶은 결정적으로 바뀌어 버린다. 그런데 그로부터 30년 후, 한 통의 편지가 에드에게 도착한다. 30년 전, 살인 사건의 범인은 따로 있다는. 다시 찾아온 과거가 일으키는 회오리 바람 안에서 새로운 살인이 벌어지고 30년 간 묻혀 있었던 비밀들도 하나씩 드러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비밀은 웅변한다. 모든 게 보이는 대로 믿는 바람에 일어난 비극이라는 것을.


 나는 쓰면서도 이런 말이 다 무슨 소용 있을까 싶다. 이 소설에 이런저런 말은 쓸데 없다. 그저 읽으면 된다. 그러면 절로 알게 된다. 이 책의 가치는.

 문답무용! JUST RE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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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8-10-06 0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티븐 킹이 강력 추천했다는 말은 정말일까요 갑자기 그게 진짜인지 알고 싶기도 하네요 그걸 알려줄 사람은 없군요 스티븐 킹 이름이 있어서 관심을 가진 사람도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스티븐 킹 소설 별로 못 봤군요 제대로 봐야 할 텐데, 보이는 게 있다 해도...


희선
 
블랙 라이트 특급열차 철도 네트워크 제국 2
필립 리브 지음, 서현정 옮김 / 가람어린이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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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털 엔진'으로 SF 계에 그 이름을 널리 떨친 필립 리브가 청소년을 위한 새로운 SF를 들고 찾아왔습니다. 그것이 바로 '철도 네트워크 제국 시리즈'이지요. 이번에 시리즈 2권이 나왔습니다. '블랙 라이트 특급열차'가 바로 그것입니다. 내용은 당연하게도 '레일 헤드'에서 이어집니다. '레일 헤드'는 레이븐이라 불리는 철도 네트워크 제국의 가장 강력한 저항자가 그 제국을 비밀리에 다스리고 있는 가디언들이 금지한 새로운 'K -게이트'를 여는 것이었죠. 이야기는 그렇게 열려진 게이트로 뛰어들어 주인공 젠 스탈링과 인간과 유사한 로봇을 지칭하는 모토릭 노바가 미지의 차원으로 나아가며 시작됩니다. 거긴 아직 레일이 깔려있지 않은 곳. 모든 것이 미지의 영역입니다. 아무 것도 없고, 아무 것도 모르는 그 세계에서 젠과 노바는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그런데 이야기는 젠과 노바의 것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1권을 읽으셨다면 혹시 레이븐의 사주를 받아 젠을 황제가 타고 있는 열차에 태웠던 소녀, 챈드니를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 1권의 후반에서 그는 그 일로 레일 포스에게 체포되어 냉동형(여기서는 형벌이 냉동 상태로 두는 것입니다. 100년이든, 200년이든)을 받고 있는 것으로 나왔었죠. 그 챈드니가 여왕이 된 트레노디에 의해 풀려나 시녀가 됩니다. 원래부터 철도 제국에 대한 반감이 컸고 독립심 또한 강했던 챈드니는 종속과 굴종의 의미밖에는 없는 시녀라는 위치를 달가워하지 않고 늘 달아나려 합니다만 모처럼 가지게 된 트레노디와의 인간적인 관계 때문에 섣불리 실행에 옮기진 못합니다. 그러는 가운데 철도 제국 앞으로 엄청난 위기가 다가옵니다. 황제 자리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던 프렐 가문이 1권에서 발생한 황제의 죽음으로 권력이 약화된 틈을 타서 그 자리를 차지하려 전면전을 펼쳐 온 것입니다. 황궁은 삽시간에 살육의 광장이 되고 트레노디는 챈드니의 도움을 받아 겨우 탈출합니다. 이들 역시 젠과 노바처럼 이전과 완전히 다른 새로운 영역 속으로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그런 그들이라 발견하게 된 것일까요?  실제로 철도 네트워크 제국에는 거대한 미지의 영역이 존재했습니다. 우주 곳곳에 철로를 깔아 마치 철도 네트워크 제국이 우주 전부를 지배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거기에도 엄연한 한계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 곳이 바로 2권의 제목이기도 한 '블랙 라이트 영역'입니다. 이름에서 이미 미지의 공간이라는 게 한껏 드러나네요. 가디언들은 바로 이 블랙 라이트 공간 때문에 새로운 게이트를 열지 못하도록 한 것입니다. 늘 폐쇄만 고집해 온 그들에게 블랙 라이트는 한 마디로 개방과 그 열림을 통한 변화의 부름에 다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끝까지 지배자였던 그들은 아집에 빠져 변화를 거부했습니다. 그 자폐의 화신 같은 존재가 나타나 트레노디와 챈드니 그리고 젠 스탈링과 노바와 같은 변화를 추구하는 이들을 강력하게 공격합니다. 그가 바로 쌍둥이 가디언입니다. 과연 쌍둥이 가디언과 젠 스탈링 일행 중에 누가 승리를 거머쥘까요? 


 이들의 대결 속에서 철도 네트워크 제국이 은밀히 감춰두고 있었던 비밀을 서서히 드러나는 2권은 1권이 그랬듯 역시 흥미로운 내용으로 가득합니다. 유럽은 다르겠습니다만 우리나라만 해도 철도라는 존재는 일상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는 편이죠. 기차라는 어쩌면 벌써 향수의 존재일지도 모를 그것을 가져와 무대를 우주로 옮겨 흥미로우면서도 꽤 설득력 있는 설정으로 현실감까지 맛보게 하는 철도 네트워크 제국 시리즈는 '모털 엔진' 시리즈에서 느꼈던 필립 리브의 저력을 다시 한 번 실감하게 만듭니다. 제가 특히나 이 시리즈를 좋아하는 것은, 모험과 활극으로 가득한, 그러니까 50년대 SF가 잘 보여주었던 스페이스 오페라 느낌이 많이나서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릴 때 그런 소설을 읽으면서 저도 모르게 손에 땀을 쥐었던 기억들이 이 소설을 읽으면서 자주 나더군요. 기차도 그렇고 내용도 그렇고 여러모로 향수를 자극하는 이 이야기가 앞으로는 또 어떻게 펼쳐질지 정말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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