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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스 콜드 리졸리 & 아일스 시리즈 8
테스 게리첸 지음, 박아람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3년 5월
평점 :
절판


 

 

 

 

 RHK에 따르면 지금까지 발간한 스릴러 소설을 통털어 가장 많이 팔린 책이 바로 테스 게리첸의 '외과의사'라 한다. 하와이에서 의사로 근무하다 산후 휴가 중에 작가로 데뷔한 테스 게리첸이 로맨스 소설 작가에서 지금의 스릴러 작가로 변신하는 데 있어 그 시작이 되었던 작품이다. 지금은 그녀의 대표 시리즈가 된 형사 제인 리졸리와 법의관 마우라 아일스 시리즈의 시작이기도 하다. 그만큼이나 인기를 얻었음인지 테스 게리첸의 소설은 우리나라에 꾸준히 소개되었고 이번에 이야기하고자 하는 '아이스 콜드'는 그 시리즈 중 여덟번째 작품이다. 유감스럽게도 난 '아이스 콜드'를 통해 처음 테스 게리첸과 만나므로 이렇게 일반화하기엔 무리가 따르지만 아무래도 이번 작품은 마우라 아일스가 주인공이라고 생각된다. 과장이 아니라 정말로 이 소설은 철저하게 마우라 아일스에게 그 초점이 맞춰진 작품이라고 말이다.

 "미안하지만, 제인 리졸리.이번 작품만큼은 당신이 들러리에요."

 

 마우리 아일스에게 초점을 맞추고 소설을 보면 이 작품은 그야말로 단순 명쾌하다. 그동안 많은 스릴러 작품을 리뷰란답시고 해왔지만 이 작품만큼 그냥 술술 풀리는 건 처음이었다. '아이스 콜드'란 제목 그대로 '얼음처럼 차가운' 것만큼 선명한 감각으로 느껴지는 것도 없는데 이 소설이 그렇다. 그만큼 테스 게리첸이 보여주고자 하는 게 분명히 드러나 있는 것이다. 너무나 이정표가 확실해서 길을 잃기가 불가능할 정도로 말이다. 이 말은 곧 이 작품에 군더더기란 게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설명서대로 레고 블럭을 만든 것처럼 모든 조각들은 정확히 있어야 할 곳에 배치되어 있는 작품인 것이다. 시리즈 전체를 본 이들에겐 어떻게 평가될지 모르겠으나 이 작품에 한해서만은 테스 게리첸 그녀는 자신이 작품을 통해 무엇을 말할지 정확히 알고 있는 가운데 이야기를 완전히 장악하면서 쓰고 있다고 생각된다.

 

 그렇다면 '아이스 콜드'는 어떤 이야기일까?

 

 일단 마우라 아일스의 시작을 보자. 그녀의 이야기는 '그들의 관계는 끝나가고 있었다'로 시작된다. 누구와의 관계? 바로 그녀의 애인 대니얼 브로피와의 관계이다. 둘은 사랑하지만 결혼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대니얼 브로피 그는 이미 결혼했기 때문이다. 그것도 인간이 아닌 신과. 그렇다. 그는 신부이다. 마우라 아일스는 그가 자신과 결혼해주기 원하지만 대니얼 브로피는 '지금도 이렇게 당신 곁에 있잖아요'하고 말할 뿐이다. 하지만 마우라는 그것만으로 만족할 수 없다. 그를 온전히 가지지 못하기 때문이다. 마우라는 대니얼이 선택해주길 바란다. 신이 아니라 자신을. 하지만 그는 그러지 못한다. '신부'라는 하나의 제도에 갇힌 그는 그녀를 사랑하지만 제도를 떠나지 못한다. 선택은 늘 미뤄지고 그만큼 마우라의 번민도 가중된다. 이제 그녀는 묻는다. 언제까지 이런 상황을 지속해야할까? 아무래도 대니얼은 신부라는 신분을 포기하지 않을 것 같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계속 기다려야 하는 것일까?

 

 마우라는 깨닫는다. 그건 또 하나의 대니얼이 되는 것임을. 대니얼은 이대로 달아나자란 마우라의 말에 지친 한숨을 내뱉으며 이렇게 답한 적이 있었다.

 

 "우리가 아무리 세상을 잊으려 해도 세상은 늘 그자리에 있어요. 우린 결국 그 세상으로 돌아와야 하고."(P.17)

 

 그렇게 대니얼은 무모하게 변화를 가져오지 말자고 말한다. '꼭 그래야 하는 건 아니에요'라고 마우라는 항변하지만 자신도 그게 옳다는 건 안다. 빌어먹을. 그녀 역시 대니얼만큼이나 책임감이 강하니까. 하지만 그런 자신이 싫다. 그러니 갈등할 수 밖에. 대니얼의 말처럼 이대로 변화를 거부한 채, 상황에 안주해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과감히 박차고 나가서 나 스스로를 새로운 변화 속으로 던져 넣어야 하는 것인지?

 '아이스 콜드'는 소설의 시작에서 제기된 마우라의 이러한 의문에 대한 해답의 여정이다.

 

 그들이 11월의 아침 공항에서 앞으로의 관계를 두고 말없이 갈등을 겪고 있을 때 한 경찰이 다가와 퉁명스럽게 말한다. 여긴 하차구역이니 당장 차량을 이동하라고. 하지만 마우라는 그 지시를 바로 이행하지 못한다. 대니얼과 연인처럼 헤어지고 싶지만 그가 신부라는 것 때문에 남들의 눈이 무서워 주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자 경찰이 소리친다. "거기! 당장 차량 이동하시죠!"(P. 18)

 

 대단한 장면 연출이다. 단적으로 마우라 아일스가 무엇 때문에 고민하고 있으며 자신을 위해선 무엇과 싸워야 하는지 그 궁극의 존재를 이렇게 선명히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건 바로 제도다. 대니얼 브로피를 가두고 있는 제도. 인간에게 그 직분에 맞는 모습만을 가질 것을 강요하는 타인의 시선으로 육화된 제도. 바로 그 제도가 가진 인간 모습의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편협하고 억압적인 모습이 이렇게 그 제도적 권력의 가장 대표적인 존재라고 할만한 경찰의 명령으로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테스 게리첸은 앞으로 마우라가 바로 이 획일성을 강요하는 제도와 싸우게 되리라고 예언한다. 아니나 다를까 그 예언은 물론 실현된다. 와이오밍의 잭슨빌, 그 컨퍼런스에서 마우라는 옛 대학 친구 하나를 만나게 된다. 이름은 더그 캄리. 마우라가 가장 먼저 떠올리는 그에 대한 기억은 그가 다리 하나를 다쳐서 절뚝거렸던 것이다. 더그는 왜 그런 일이 있었는지 말해준다. 닌자 복장을 하고 옥상에서 어슬렁거리다가 떨어졌다는 것이다. 완전 무모하고 상식적이지 못한 그의 행동은 그가 소설에서 무엇을 나타내는 존재인지 보여준다. 세상이 규정한 대로는 움직이지 않는 존재라는 것을. 그만큼 이성적이지 않은 무모한 존재지만 그건 세상의 입장에서만 그렇고 자신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야말로 변화에 몸을 맡기는 자유로운 존재이다. 마우라가 같이 여행하자는 그의 제안을 덥석 받아들이게 된 것도 그 때문이다. 세상에 갇혀 자신의 사랑조차 마음대로 하지 못했던 그녀가 정말 하고 싶었던 것을 더그가 하고 있었던 것이다. 과연 여행길에 올라서도 더그는 무모해보이는 선택을 한다. 마우라는 그런 그가 처음 생각했던 것만큼 그리 미덥지 못하다고 여기는데 아니나 다를까 그런 더그의 행동 때문에 마우라 일행은 결국 '천국'이라는 버려진 마을에 갇히게 된다.

 

 얼른 보기에 이 갇힘은 더그의 무모함 때문이고 그렇게 변화를 받아들임을 부정하는 듯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여기에는 두 가지 근거가 있다. 하나는 이 갇힘이 바로 마우라가 더그에게 보내는 의심 뒤에 이루어진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마을의 정체 때문이다. 읽으면서 이런 연쇄에 주의해 보면 '천국'에의 갇힘이 더그 때문이 아니라 바로 마우라 자신 때문임을 알게 된다. 즉 그녀가 더그의 태도에 대해 회의적이었기 때문에 마을에 갇히게 되었다는 그런 의미다. 이는 갇히게 된 마을의 정체를 보면 확인되는데 다름아니라 그 마을은 오직 한 명의 종교 지도자가 원하는 대로만 움직이는 '모음교'의 신도들로만 이루어진 곳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확인하게 되듯이, 마을의 이름으로 보나 '모음교'의 성격으로 보나 이는 정확히 대니얼 브로피를 가두고 있는 기독교 자체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아니, 너무도 명확해서 어떻게 달리 해석할 수가 없다. 마우라는 바로 거기에 갇힌 것이다. 그녀가 정말 너무나 싫어하는 그 공간에 말이다. 그러니 이를 어떻게 더그의 탓으로 돌릴 수 있을까? 결국 마우라의 의심이, 비록 그것이 일말일 망정, 갇히게 했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죄인이여, 부족한 건 네 믿음이니라."라고 게리첸에 마우라에게 말하는 것과 같다. 뒤돌아보는 바람에 그대로 소금기둥이 되어버린 룻의 아내. 마우라가 바로 그녀인 것이다.

 

 게다가 그 마을은 지금 차디찬 눈 속에 버려져 있다는 것이다. 생활의 흔적은 보이는데 사람만 보이지 않는다. 분명 모두들 어디론가 급히 떠나가 버린 형국이다. 이는 비록 일말의 미련은 남아있을 망정 마우라가 그토록 벗어나고 싶어하는 오로지 인간에게 획일적인 정체성만 강요하는 제도의 단적인 진실이다. 사람들은 그 제도가 스스로를 지켜주고 대니얼 브로피가 그러듯이 더 높은 곳으로 고양시켜 줄 것이라 믿지만 그 안에 사람은 없는 것이다. 제도는 사람을 고려하지 않는다. 제도는 오로지 제도만 고려할 뿐이다. '모음교'의 교주가 신도들을 위해서 한 일 모두가 결국은 자신을 위한 일이었듯이 제도도 그러한 것이다. 그 종교에서 주로 희생되는 것은 어린 소녀들이다. 제도에 갇힌 소녀들을 교주는 원하는 대로 마음껏 유린하고 남자들마저도 닥치는대로 소녀들을 범한다. 그 소녀들을 보호해주어야 할 엄마라는 여성들은 오히려 교주의 뜻이라며 소녀들을 내어주기 바쁘다. 기계와도 같은 지극한 수동성. 그게 '모음교' 엄마들의 본질이었다. 테스 게리첸은 왜 이토록 여성에 대한 학대와 착취를 보여주는 것일까? 답은 한 가지다. 소녀는 현재 마우라에 대한 은유이며 엄마란 미래 마우라에 대한 은유라는 것. 해서 제도, 거기엔 아무런 구원의 가능성이 없는 것이다. 마우라가 진정 스스로 존재하고자 한다면 오로지 버려야만 하는 곳인 것이다. 그게 설사 죽음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해도.

 

 이러한 철저한 희망의 말살. 이는 테스 게리첸이 마우라에게 남아있는 일말의 미련이라도 깡그리 없애기 위하여 일부러 갇히게 했다고 밖에는 달리 설명할 수 없다. 그러므로 그 뒤의 장면이 제인 리졸리로 바뀌어 마우라의 죽음이 나오는 것도 당연한 수순이다. 진정한 변신은 이전 존재의 전적인 죽음에서만 가능하니까. '매트릭스'의 네오가 그랬듯이.

 

 변화에는 조력자가 필요하다. 네오에겐 모피어스가 필요했고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에겐 토끼가 필요했으며 단테에겐 베르길리우스가 필요했듯이. 이제 걸어야 할 길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길이기에 아무래도 앞에서 등불을 들고 길잡이가 되어 줄 이가 필요한 것이다. '아이스 콜드'에서는 줄리언 퍼킨스란 소년이 그 역할을 맡는다. 그가 마우라에게 말하는 자신의 이름은 '생쥐'다. 생쥐란 제도의 바깥에서 그것이 구획해 놓은 것을 넘나드는 존재다. 생쥐는 모든 곳에 있을 수 있고 모든 곳을 다닐 수 있다. 정확히 줄리언 퍼킨스가 그렇다. 테스 게리첸은 그 제도로 부터 달아난 자였다는 걸 강조한다. 그는 한 부모에게서 양육되지도 못했고 정규 교육조차 제대로 받은 적이 없다. 그는 마을이 아니라 산 속에서 홀로 산다. 테스 게리첸은 줄리언의 할아버지도 그런 존재였음을 밝혀 이 성격을 더욱 강조한다. 중요한 것은 그가 자립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는 마을의 힘을 빌리지 않고서도 할아버지로 부터 배운 야생에서 살아남는 법을 통해 얼마든지 살 수 있다. 그 뿐 아니라 마우라까지 챙겨줄 정도다. 한 마디로 전적인 외부의 존재인 것이다. 단적으로 사람들이 이름을 물을 때마다 줄리언이 사회가 부여한 이름이 아닌 자기 스스로 정한 이름을 말하는 것에서 드러난다. 줄리언은 끝까지 자신의 이름을 생쥐라 말한다. 이러한 줄리언의 의미는 경찰에게서 마우라를 구해줄 때 더욱 확고해진다. 앞서 공항에서의 경찰 모습으로 대표되듯이 소설에서 경찰이란 기독교와 더불어 제도의 굳건한 힘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존재이다. 그런데 그 경찰과 겨루는 것이 바로 줄리언인 것이다. 그러니 이런 줄리언이 길잡이가 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는 바로 나타난다고 하겠다. 즉 제도로부터 완전히 결별하고 스스로 홀로 서는 것만이 이제 마우라가 걸어야 하는 길이라는 것이 말이다.

 

 이게 '아이스 콜드'의 핵심이다. 차가운 얼음을 뺨에 댄 것과도 같이 선명히 전해져오는 테스 게리첸의 진심인 것이다. 꾸준히 시리즈를 읽어왔었다면 보다 분명히 확신을 가지고 말했을 터인데 그러지 못해서 이렇게 말하는 것마저 조심스럽긴 하지만 마우라 아일스는 행여 제도가 강요하는 획일성에 저항해 스스로의 다양성을 추구해가는 존재를 나타내는 게 아닐까 싶다. 그렇게 이 시리즈의 한 쪽 축엔 제도와의 싸움이 있는 게 아닐까 싶어진다. 마지막에 나오는 마우라의 독백이 그래서 더욱 결연하게 들린다. 이건 어쩌면 테스 게리첸의 각오인지도 모른다.

 

 '눈 때문에 차단된 골짜기. 나는 나만의 골짜기에 갇힌 거야. 나를 구할 수 있는 사람은 나 밖에 없어.'(P. 447)

 

 그 진상은 이제 전작들을 읽어봐야 확실히 알 수 있을테지만 아무튼 '아이스 콜드'만은 차디찬 눈처럼 편견에 사로잡혀 있고 냉혹한 제도를 마지막 장면의 폭발과도 같이 산산히 날려버리는 소설이었다. 마우라의 말처럼 누구나 자신만의 골짜기에 갇혀 있다. 하지만 비극은 그러한 갇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남들 손에 구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에 있지 않을까 싶다. 그렇게 내 존재의 구원을 자꾸 남에게 의탁하느라 '모음교'와 같은 독재의 종교도 생기고 편협하고 획일적인 제도가 더욱 강성해지는 것이 아닐까 싶다. 구해지길 바란다면, 진정한 나라는 주체로 서고 싶다면, 무조건 스스로의 힘으로 할 수 밖에 없다. 그건 그대로 제도에 의존했던 시각에서 벗어나 나의 눈으로 이제 타자와 세계를 바라봄을 뜻한다. 변화란 바로 그런 것이다. 시각의 바꿈. 나만의 고유한 시선으로 다른 이들을 담는 것. 변화란 이토록 주체화와 연결되어 있다. 마우라가 줄리언이라는 타자를 받아들임으로써 더욱 고유한 자신이 될 수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아이스 콜드'는 그 둘의 단단한 매듭이다. 어쩌면 이전의 마우라와 같은 우리들마저 끌어올려 줄 지 모른다. 분명 여기에는 그만한 힘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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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을 탐하다 - 판타스틱 픽션 BLACK 14-3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14
마이클 코리타 지음, 최필원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3년 6월
평점 :
절판


 

 

 

 

 

 

 

 아버지!

 아버지! 이 씹새끼

 너는 입이 열개라도 말을 못해!

 

 - 이성복, '그해 가을' 중에서 -

 

 

  소설에 나오는 FBI 요원 그레이디는 말한다. 프랭크는 아비저로 부터 '총알과 시체의 유산'을 받았다고.

유산이 있다. 아버지로 부터 물려받게 되는 유산이. 말하자면 하나의 총체적 세계이다. 거기서 아들은 선택해야 한다. 아버지의 복제가 될 것인가 아니면 자유로운 나 자신이 될 것인가? 정답은 쉽지만 실제로 행하기엔 어렵다. 이미 선택하는 자신이 아버지의 세계에 깊이 침윤된 까닭이다. 그건 의식의 저 밑바닥에서 '나'란 것의 기저를 이루고 있다. 무의식을 지배하는 존재다. 피에르 부르디외의 '아비투스'처럼 결심과 의지로 훌쩍 빠져나올 수 있는 존재가 아닌 것이다. 불새와도 같이, 진정한 자신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존재를 온전히 불태워야만 가능하다. 그럴때만 부활은 원하는 만큼의 보상이 된다. 헤르만 헤세도 '데미안'에서 말하지 않았던가? 새가 살기 위해서는 껍질을 깨뜨려야 한다고. 껍질이란 자신을 이루고 자신에게 익숙한 세계다. 그런 세계를 깡그리 부술 정도의 고통을 감내하지 않으면 온전한 의미의 해방은 어렵다. 그러니까 '총알과 시체의 유산'으로 부터 말이다.

 

 마이클 코리타는 흔히 '신성'으로 불린다. 새롭게 나타난 젊은 별이라는 뜻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데뷔작 '오늘 밤 안녕을'은 미국에서는 아직 법적으로 술도 마시지 못하는 나이인 만 20살에 나왔다. 스릴러 작가로 치면 아직 주민등록증에 잉크도 마르지 않을 나이에 그는 데뷔를 한 것이다. 그렇게 그는 젊은 세대에 속하고, 가족적으로 비유하자면 아들 세대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일까? 그의 소설은 그 입장에서 진행되는 것이 많다.(난 아직 '숨은 강'을 읽지 못했기에 그건 빼고 하는 말이다.)'오늘 밤 안녕을'에서 주인공 사립 탐정 링컨 페리를 찾아와 아들의 죽음에 관련된 사건을 의뢰하는 이는 '존 웨스턴'이라는 아버지다. 그런데 코리타가 그 아버지를 드러내는 모습이 흥미롭다. 70대 후반의 이 꺽다리 노인은 왕년에는 제법 건장했을지 모르나 지금은 '말라빠지고 배는 쭈글쭈글한'모습이다. 눈빛만은 보이는 건 뭐든지 빨아들이겠다는 듯이 날카롭지만 정작 그야말로 마치 세월이 고압의 흡입기라도 되어 남김없이 빨아들이기라도 한 것 같은 모습이다. 그런 그가 링컨 페리에게 2차대전 이야기를 한다. 탑골 공원에 가면 흔히 만날 수 있는 '왕년에 내가'를 노래의 후렴구처럼 반복하는 노인들처럼...

 

 '오늘 밤 안녕을'이 이렇게 첫 시작부터 미이라처럼 되어버린 아버지를 드러내는 것은 그것이 바로 코리타가 보고 있는 미국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아버지를 양산해 내었고 또 그런 아버지들이 떠 받쳐온 미국은 코리타에게 지금 그런 모습에 불과한 것이다. 의미심장하게도 그 아버지의 이름은 '웨스턴'이다. 그 '서부'야말로 무엇보다 전통적인 미국을 대표하는 상징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그 웨스턴을 이어받은 아들은 살해당하고 그 아내와 딸은 실종된다. 아버지의 세계에서 아버지의 그림자를 충실히 따랐던 아들의 마지막이 파멸인 것이다. 자신만이 아니라 그 가족까지 포함해서. 그게 지금의 미국이 아들 세대에게 물려주고 있는 유산이었다. 2차 대전의 이야기가 흘러 나왔던 것처럼 '총알과 시체의 유산'이 물려줄 수 있는 건 파멸 밖에는 없었던 것이다. 코리타는 그래서 아들 세대가 전면에 나서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버지들의 유산에서 벗어나 역사와 미래를 바로 그 자신들의 몸으로 직접 떠 맡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걸어 나오게 된다. '오늘 밤 안녕을'에서는 링컨 페리가 그리고 '밤을 탐하다'에서는 프랭크가. 바로 아들들이. 코리타의 분신들이.

 

 그렇게 '밤을 탐하다'는 스탠드 얼론이지만 '오늘 밤 안녕을'에서 이어지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달리 말하면 코리타가 거기서 천착했던 주제가 좀 더 선명하게 부각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밤을 탐하다'에는 두 명의 주인공이 나온다. 하나는 물론 프랭크고 다른 하나는 '노라'라는 여인이다. 공통점이 있다. 프랭크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에게서 살인 기계가 되는 훈련을 받은 자로 아버지를 죽게 만든 자에게 내내 복수를 꿈꾸며 살아가는 인물이다. 노라는 갑작스런 아버지의 병으로 아버지가 운영하던 자동차 정비소를 스스로 꾸려나가려 한다. 하나는 아버지가 비록 죽고 없어도 그 세계에 강력하게 붙들려 있는 자고 다른 하나는 아버지를 대신해 그 세계를 지속해 나가는 자다. 그렇게 다들 아버지의 유산으로 부터 자유롭지 못한 자들이다. 아버지 세계가 감옥과도 같다는 것은 이미 소설의 첫머리에서 부터 제시된다. 소설의 첫 장면이 유치장에 갇혀 있는 프랭크로 부터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그건 지금 프랭크의 인생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비유와도 같다. 그에겐 아버지로 물려받은 길을 걷지 않아도 충분히 스스로 독립할 수 있을만큼의 재능이 있지만 아버지로 부터 각인된 세계로 인해 그러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건 노라도 마찬가지다. 노라의 첫장면은 같이 일하고 있는 제리라는 남자의 시선 속에서 드러난다. 그 제리의 눈에 노라는 정비소를 꾸려가는 어엿한 경영자라기 보다는 그저 남자를 유혹하려 드는 '암컷'일 뿐이다. 노라는 지금까지 무시된 자신의 가능성을 스스로 입증하기 위해 남자들만의 영역인 정비소 일로 들어왔지만 그저 그렇고 그런 여자들 중의 하나로만 인지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제리의 불만에서 더욱 노골적으로 표현된다. 그렇게 그들은 갇혀있다. 하나는 스스로, 다른 하나는 타인들의 시선에 의해.

 

 이는 정확히 우리 무의식을 그 근저에서 지배하고 있는 아버지가 하고 있는 것과 동일하다. 하나는 아버지가 새겨놓은 언어로 스스로를 번역하게 함으로써 자신을 오로지 아버지의 눈으로만 평가하게 만들고 또 다른 하나는 그런 언어가 하나의 질서가 되어 자리잡음으로써 내부적으로는 어떻게 자신의 언어로 스스로를 쓸 수 있게 되었더라도 이제는 외부의 눈으로써 그 언어를 쓰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아들의 진정한 해방은 이 자아와 타자 둘 모두에게 완강히 붙들려 있는 '아버지의 언어'로 부터 자유로울 때만이 가능하다. 믿을 수 없는 아버지의 유산으로부터 스스로의 힘으로 구원을 찾아나서는 이야기인 '밤을 탐하다'가 프랭크와 노라 둘 모두를 주인공으로 데려온 것은 그 때문이다. 그 둘이 하나인 것은 똑같이 매개자가 있다는 것에서도 드러난다. 즉 아버지가 부재한 가운데서도 계속 아버지의 그림자가 되어 그 아버지의 언어를 지속시키는 매개자들 말이다. 프랭크에게는 아버지 질서가 가장 강력하게 지배하는 공간인 '토마호크'를 지키는 에즈라가 있고 노라에겐 앞서 말한 '제리'가 있다. 그렇게 매개자들이 아버지의 공간을 여전히 고수하고 있다는 것도 공통점이다. 이들은 지속적으로 아들들에게 아버지의 존재를 공명시킨다. 분명 프랭크와 노라에게 아버지와의 간격은 그만큼의 해방인 것이지만 매개자들의 목소리는 오히려 그 모자람만 부각시키고 그렇게 죄의식을 일깨워 더욱 아버지와 닮아지려 애쓰게 만들 뿐이다. 이런 식으로 내부는 매개자들로 인해 구원을 가져올 곳이 없으니 구원은 전혀 다른 쪽, 그러니까 완전한 외부에서 와야만 했다.

 

 바로, 데빈이다.

 

 데빈은 프랭크에게 아버지를 함정에 빠뜨려 죽게 만든 자신의 원수이다. 그는 그를 끝까지 추적하겠다고 아버지와 굳게 약속했고 지금까지 그의 삶이란 전적으로 데빈을 중심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코리타는 이 기표를 비튼다. 표면적으로만 증오이지만 진실한 의미에선 그 진정한 구원의 가능성으로. 때문에 코리타는 데빈을 그런 존재로 만든 것이다. 원수만큼 스스로에게 외부적인 존재도 또 달리 없을테니까. 이는 데빈이 온 장소에서도 암묵적으로 드러난다. 플로리다. 서늘한 아침공기가 솔잎과 장작 연기를 타고 흐르는 울창한 숲과 호수로 가득한 '토마호크'에게 있어선 그야말로 타자일 수 밖에 없는 땅. 데빈은 바로 그런 땅에서 왔고 그만큼이나 타자인 것이다.

 

 현대 철학의 주류들은 말한다. '구원은 오직 타자로 부터 온다'고. 당연하다. 온갖 매개자들이 들끓기만한 내부는 전혀 다른 언어를 들려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레이디는 그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존재가 아닐까? 알고보면 프랭크는 바로 그 그레이디 때문에 갇히게 된 셈인데 그는 가장 강고한 아버지의 권력의 상징이라 할만한 FBI의 요원이다. 거기다 그가 그토록 프랭크에게 집착하는 것은 자신만은 보다 강력한 아버지의 모습이 되려는 은밀한 욕망 때문이기도 하다. 이만큼이나 아버지가 되려고 애쓰던 자가 사실은 프랭크를 가둔 진정한 장본인이었던 것이다. 그것도 FBI가 되어 내부를 강력하게 지배하는 존재가 말이다.

 

 그러므로 외부를 요청할 수 밖에 없다. 데빈은 바로 그 요청에 응답한 존재인 것이다. 과연 절대적 외부의 존재로써의 데빈은 프랭크와 노라의 세계에 메워질 수 없는 균열을 일으키고 거기다 랭크와 노라에게서 보자면 자신을 가두고 있었던 매개자들마저 제거하여 프랭크와 노라에게 자신들만의 언어를 돌려준다. 이런 존재이기에 데빈의 결말이 우리의 예상과 다른 것도 당연하다. 이게 바로 이 소설에 투영된 코리타의 주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새삼 그 주제에 대해서 말을 덧붙일 필요가 있을까 싶다. 타자에 대한 전적인 열림만이 현재 미국이 물려준 유산으로 부터 달아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은 마지막에 나오는 '파트너'라는 말만으로도 입증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이렇게 내가 보고 있는 마이클 코리타는 아들 세대에게 밤만 탐하도록 만드는 이제는 집착 밖에는 남지 않은 쭈글쭈글한 주검과도 같은 미국에서 어떻게 빠져나갈 것인가 달리 말하면 어떻게 우리들만의 언어로 새롭게 생각하고 대안을 만들어 나갈 것인가 그 의문을 꾸준히 천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 또한 '신성'이라는 젊은 세대이기에 그런 의문과 스스로 풀어가는 노력에 더욱 주목하게 되기도 한다. 아직 그 결실을 충분한 깊이로서 보여주고 있지는 못하지만 거기까지의 이르는 과정만큼은 위에서 말했듯 충분히 정교하게 세공되어 있고 또 이야기 역시 흥미롭기에 여전히 그 다음의 여정을 기대하게 만든다. 1982년생인 그는 아직 젊다고 봐도 무방하리라. 젊음이라는, 아직 남겨진 그 무한한 가능성에 기대를 걸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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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언 하우스
존 하트 지음, 박산호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3년 3월
평점 :
절판


 

 

 

 존 하트의 시작은 정말로 인상 깊었다. 그의 데뷔작 '라이어'는 내게 베르나르 베스톨루치의 영화 '거미의 계략'을 보았을 때와 똑같은 기분을 느끼게 하였다. 거기엔 영웅으로만 여겨왔던 아버지의 죄를 발견한 한 아들이 있었다. 아버지가 구축했고 그가 신뢰했던 세계가 죄의 대가였으며 기만에 불과했다는 걸 깨달은 그 아들은 도스토예프스키와도 같이 자신에게 주어진 원죄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다. 선택은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이대로 묻어버리고 지금껏 해왔던 것처럼 아버지의 질서에 편안히 안주하는 것. 다른 하나는 그 위선과 기만의 베일을 벗겨 버리고 그 모든 죄악을 낱낱이 진실과 정의의 법정에 드러내는 것. 믈론 그랬을 경우 아들의 인생마저 파멸될 것은 불문가지다. '라이어'는 그렇게 선택의 기로에 선 아들의 내면을 그리고 있었다. 존 하트의 '라이어'는 읽으면 '모든 문명은 사실 '살부(殺父)'의 욕망 에서 비롯된 것이다'라는 프로이트의 말이 절로 떠오를 수 밖에 없다. 아버지를 죽이려는 욕망은 기성의 체제에 대한 불신과 관계가 있다. 그러니까 아버지란 바로 기성 체제의 상징과도 같은 것이며 그 아버지를 죽임은 대안적 세상의 새로운 도래를 염원하는 것과 같다. '라이어'는 그랬다. 거기엔 사회가 길들이지 못한 '오디이푸스 컴플렉스'가 강렬히 존재했고 결국 아들은 오디이푸스의 경로를 충실히 따른다. 그렇게 존 하트의 '라이어'는 스스로 고아가 되려는 소설이었던 것이다.

 

 '고아'가 되고픈 욕망. 존 하트의 소설엔 그런 게 존재한다. 그렇게 자기의 혈연을 지우고 뿌리를 지워 독립적 존재가 되려한다. '다운 리버'는 아예 쫓겨난 자식의 입장에서 이야기가 진행된다. 물론 그것은 누명을 쓴 것이지만 아들은 스스로 죄의 신체가 되어서라도 아버지의 세계로 부터 자유로워지려고 한다.(소설의 표면적 이야기가 아닌 왜 존 하트가 굳이 성경 속 탕아의 이야기를 가져왔는가 하는 그 내밀한 동기를 유추해 본 이야기다.) 그리고 그 경계선 바깥에서 아버지의 세상을 바라보려 한다. 이는 '라이어'에서 한 발 더 나아간 것이다. '라이어'는 그래도 아버지의 질서 안에서 아버지의 죄를 반추했었다. 하지만 이제 아들은 그의 영역을 벗어나 보다 먼 발치에서, 그렇게 더욱 객관적으로 아버지의 세계를 바라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다운 리버'에서 왜 존 하트에게 '고아'가 되려는 욕망이 존재하는지는 더욱 분명해진다. 이처럼 고아가 되면 될수록 보다 자신이 처한 현실을 더욱 객관적으로 살펴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아버지라는 기표 아래에서 위선과 기만으로 덧칠된 세상의 진실을 알아 낼 확률이 높아지는 것이다. 그 진실에 자신의 구원이 있기에 아들의 아버지로부터의 뒷걸음질은 더욱 거세어질 수 밖에 없고 그렇게 '고아'가 된다는 건 선택이 아니라 필연적 지향이다.

 

 아니나 다를까, 존 하트의 네 번째 작품의 제목 '아이언 하우스'는 주인공 마이클이 있었던 고아원의 이름이다. 이제 아들은 아예 처음부터 고아로 나오는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난 아직 '라스트 차일드'를 보지 못했고 그래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 조금은 무리가 따르지만 그래도 존 하트는 작품이 이어질 때마다 보다 더 다음의 단계로 나아갔다고 말하고 싶어진다. 아버지 질서 속에 있었던 '라이어'에서 그 질서 바깥으로, 그렇게 좀 더 대등하고 객관적인 입장의 '다운 리버'로 나아갔듯이 '아이언 하우스'도 그 전작들로 부터 한 발을 더 멀리 뻗은 것이라고 말이다.

 

  그렇게 아들은 '탕아'에서 '고아'가 되었다.  하지만 '내쳐진 존재'라는 점에서 이 이야기들은 결국 비슷한 이야기가 아닌가? 그렇다면 '아이언 하우스'는 '다운 리버'의 단순한 반복이 아닌가 생각될 수도 있다. 하지만 아니다. 그 결정적인 전환의 지점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바로 그 작품이 '라스트 차일드'인데 애석하게도 아직 읽어보지 못한 탓에 정확하게 그 근거를 댈 수는 없다. 하지만 '아이언 하우스'를 통해 거꾸로 유추해 보건데 분명 거기에는 고아가 되려는 욕망이 새로이 발견해 낸 차원, 즉 '책임'이 존재하는 것 같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존 하트가 걸어온 작품 여정을 총 결산하는 것과도 같은 이 '아이언 하우스'에서 그 뻗은 발이 디디는 곳이 바로 '책임의 통감' 이기 때문이다.

 

 

 아들은 아버지로 부터 자유로워지는 것만으로는 안된다. 그의 죄악 때문에 자유로워지려 했다면 더더욱 그렇다. ''살부(殺父)' 정당화 되는 건 오로지 그 자신이 좋은 아버지가 되었을 때 뿐이다. 그 자신이 새로운 구원적 질서를 형성하지 못하면 '살부'라는 또 하나의 죄악을 더 하는 것 밖에는 되지 못한다. 오디이푸스가 왕인 까닭이 바로 그것이다. 오디이푸스 컴플렉스 자체가 기존의 질서와 새로운 질서 사이의 대립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즉 고아는 스스로 좋은 아버지가 되었을 때라야 비로소 진정한 구원을 받는다. 그런 그에게 있어 좋은 아버지가 된다는 것은 책임을 떠 안는 것 밖에는 없다. 왜냐하면 그 자신을 달아나게 만들었던 아버지 죄악의 진정한 정체가 바로 '방기(妨棄)' 이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언제 나쁜 아버지가 되는가? 그것은 자식에 대한 책임을 다하지 않고 내버려둘 때이다. 아버지는 언제 죄인이 되는가? 그것은 사회에 대한 책임을 다하지 않고 무시해버릴 때이다. 물론 그 내버림과 무시의 이유는 단 하나다. 그건 아버지가 이기적이기 때문이다. 모든 방기는 아버지가 가진 이기적 욕망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의 질서가 위선과 기만의 베일로 둘러싼 죄악의 세계가 되는 것도 겉으로는 타인을 위하는 척 하지만 사실은 오로지 이기적 욕망만이 전부인 세계이기 때문이다. 아들은 그와 같은 이기적 악취에 질려 달아난 것이다. 자기 자신 밖에 모르는 그 비정함을 혐오해 아예 핏줄을 부정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좋은 아버지가 되기 위해서 그가 무엇보다 해야 하는 건 바로 '책임'을 떠 맡는 것 밖에는 없다. 이기적 아버지가 아닌 이타적 아버지가 되는 것. 그렇게 '방기(妨棄)'와 책임은 대립된다.

 

  사실은 이 대립이 바로 '아이언 하우스'의 핵심이다. 이 소설엔 많은 '아버지의 기표'를 가진 존재들이 나오는데 모두 이 대립선을 중심으로 좋은 아버지와 나쁜 아버지로 나뉘어진다. 다시 말해 주인공 마이클은 자신이 참조 가능한 많은 아버지를 만나는 셈이며 결론적으로 이 작품은 기꺼이 고아가 되어버린 아들이 좋은 아버지가 되어가는 과정의 이야기인 것이다. 개인적으로 이 '아이언 하우스'는 '라이어' 때 부터 '고아가 되려는 욕망'을 주제로 내내 끌어왔던 작품 세계를 일단락 시키는 작품으로 보인다. 그렇게 이 작품은 '라이어'에서 부터 '아이언 하우스'까지 존 하트가 걸어왔던 여정이 모두 집대성되어 있다고 보아도 좋다. 시작은 그야말로 '라이어'다. 뉴욕의 거대 범죄 조직의 보스 아래서 킬러로 일하던 마이클은 우연히 엘레나라는 여인을 만나 사랑에 새로이 눈뜨게 되고 그녀가 아이까지 가지는 바람에 이제 곧 아버지가 될 마이클은 더 이상 아들에게 부끄러운 아버지가 되지 않기 위해 그 때까지 친아버지처럼 모시고 따르던 조직의 보스로 부터 빠져나올 결심을 한다. 그렇게 시작은 '라이어'와 똑같이 편입된 아버지의 질서로 부터 빠져나오려는 이야기인 것이다. 물론 그건 '라이어'만큼이나 쉽지가 않다. 그리고 정작 문제 또한 보스에게 있지 않다. 유일한 아버지인 보스는 그 존재 자체를 버거워하고 있으며 오히려 마이클에게 죽여달라고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무기력하고 약한 존재일 뿐이다. 그런데 이 무기력의 아버지는 그대로 '다운 리버'의 아버지와도 같다. 그 역시 자기가 중심인 세계의 방관자이다. 약하고 무기력하다. 그러니 더 이상 세계는 가동되지 않고 스스로 그 하중을 견디지 못해 내부로 부터 허물어진다. 자멸은 무기력한 아버지의 소망이다. 더 이상 다른 걸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이언 하우스'도, '다운 리버'도 그렇다. 모두 똑같다. 그런데 이러한 아버지 세계의 위축은 아들이 진실에 눈뜨고 성장한 탓이기도 하다. 그건 정확히 우리의 성장 경험과도 일치한다. 자랄수록 아버지가 점점 왜소해진다는 것은 자식이라면 누구나 다 느끼게 되는 것이 아니던가. 바로 그런 것이다. 그대로 조용히 내파된다면 그것도 그런대로 괜찮을 것이다. 물론 그렇게 되지 않는다. '트러블 메이커'들이 있다. '고아'가 되지 못한 자들. 아버지의 질서 안에서 편안히 거주해 왔던 자들. 아버지가 가진 죄악의 진실을 보지 못했기에 여전히 아버지와 닮은 존재가 되는 것이 유일한 소망인 아들들. 바로 그 아들들이 '고아'인 마이클을 내버려두지 않는 것이다. 그 아들들에게 '고아'인 마이클은 스스로 아버지가 되지 못하게 만드는 지울 수 없는 영원한 얼룩이다. 죄악의 진실을 알고 있는 마이클이 그들에게 아버지의 죄를 누누히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마이클이 있는 한 아들들은 제대로 된 아버지가 될 수 없다. 아버지다운 아버지로서 만족하고 있을 수가 없다. 그래서 그들은 마이클을 '고아'의 자리에서 '아들'의 자리로 오게끔 유혹한다. 아버지의 질서로 다시금 편입시켜 그 얼룩을 지우려 한다. 그러므로 아들들의 아버지가 되려는 욕망이 강하면 강할수록 '고아'인 마이클이 제거되어야 하는 것은 필연이다. '아이언 하우스'에 담긴 이야기의 한 축에서 벌어지는 갈등의 원형은 바로 이것이다. 여기에 타협의 여지는 없다. 왜냐하면 이건 존재들끼리의 대립이 아니라 오디이푸스 컴플렉스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세계들의 대립이기 때문이다. 책임의 세계와 방기의 세계. 그 대립에 회색지대란 없다. 아들들이 마이클에 대해 가지는 감정이 표면상으로는 분노이지만 사실은 질투인 이유도 그 때문이다. 질투란 감정은 도저히 우리 힘으로 어쩔 수 없을 때 들게 되는 감정이다. 그건 우리 절대적 무력함의 고백에 다름아닌 것이다. 즉 질투란 타협의 가능성이 애초에 봉쇄되었을 경우에 비로소 하게 된다. 그러므로 아들들이 마이클을 질투하는 건 당연한 것이다. 상호 타협 가능한 중간 지대가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일 있으면 어떻게 되는가? 더 나아가 스스로 억지로 만들려고 한다면? 그럼 정신분열증이 된다. 다중 인격의 존재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스포일러가 되기에 그 정체에 대해선 침묵하지만 '아이언 하우스'에서 그렇게 된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그러므로 이 축은 마이클에게 오로지 원심력으로만 작용한다. 갈등이 깊어지면 깊어진만큼 그는 더욱 기존의 아버지 질서에서 멀리 달아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달아남 자체로 되는 것은 없다. 앞서 말한 대로 그가 정말 바라는 구원을 얻으려면 진정한 책임을 지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때문에 존 하트는 마이클에게 동생을 선사하는 것이다. '아이언 하우스'에 같이 있었지만 지금은 헤어진 동생 줄리앙은 마이클에게 그 '달아남'이 진정한 구원적 상태에 이르도록 만드는 사다리와도 같은 존재인 것이다. 소설은 그렇게 내내 방기와 책임의 대립 이쪽 저쪽을 왔다갔다 한다. 여기엔 다양한 인물들이 나오지만 모두 그 한쪽 자리를 하나씩 차지하고 있다. 동생이 있는 아비게일의 이웃에 사는 카라벨 고트로는 딸을 방기한다. 딸은 자기 엄마로부터 가해지는 고통을 참을 수 없어 집을 뛰쳐 나와 '마이클'처럼 스스로 고아가 되려 한다. 이렇게 소설엔 방기하는 부모와 거기에 대항해 스스로 고아가 되려는 존재들이 군집을 이룬다. 이로써 존 하트는 마이클뿐 아니라 그 다른 존재들을 통하여 보다 분명히 보여준다. 책임을 떠 맡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대안이요 구원이라는 것을 말이다. 존 하트는 아예 마이클로 하여금 동생 줄리앙이 당했던 학대를 방기하여 동생을 더욱 큰 고통에 빠뜨렸던 인물마저 누군가를 책임지고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용서하게 함으로써 이것을 더욱 확증한다. 소설 내내 한 존재를 지키는 이야기가 지속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책임을 맡는 것. 하나의 존재에 대해 진정한 책임을 느끼고 거기에 충실하는 것. 그 외에 다른 것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이 소설 '아이언 하우스'에서는 진정한 책임 끝에 나오는 방어야 말로 동시에 구원의 '구축'인 셈이다. 새로운 아버지의 구축인 것이요 그가 중심이 된 진정한 대안적 세계의 구축인 셈이다. 이 소설의 결말은 바로 이 말을 문자 그대로 형상화한 것과 같다.

 

  이러한 구원의 분명한 제시는 이 소설이 지금까지 존 하트가 해왔던 것의 완결이라는 것을 더욱 암시한다. 말하자면 이 작품은 지금까지 그가 천착해 온 물음에 대한 일종의 최종 해답인 셈이다. 좋은 아버지가 되기 위해서 스스로 기꺼이 '고아'가 되려고 했던 아들은 여기에 이르러 그 진정한 해답을 찾은 것이다. 그건 바로 타인의 존재를 떠안는 것, 절대로 내 이기적 욕망으로 타인을 나몰라라 하거나 버려두지 않는 것, 그렇게 바로 책임이다. 그런데 독일의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에 따르면 이 책임이야 말로 자유의 진정한 모습이다. 책임은 무엇보다 그 원인을 묻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교환 관계가 아니다. 있는 것은 오로지 전적인 내어줌 밖에 없다. 그래서 책임은 오로지 당위적 차원에서만 존재한다. 그건 내가 그러한 존재이기 때문에 무조건 해야만 하는 그런 것이다. 아버지이기 때문에 무조건 자식을 책임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떤 원인에서 비롯된, 또는 어떤 이유로 떠 맡은 책임이 아니다. 진정한 책임이란 그런 것이다. 따라서 거기에 있는 건, 오로지 책임을 떠안을 것인가 아니면 그냥 방기할 것인가를 두고 선택할 결단 밖에는 없다. 그런데 방기는 오로지 나의 이기적 욕망을 따른 결과로 결국 거기엔 내 동물적 욕구든 혹은 이해타산이든 아무튼 원인이나 이해가 개입되게 되니, 난 그것에 종속되어 선택한 것일뿐 온전히 자유로 행한 것은 아니다. 따라서 그 어떠한 원인이나 이유도 개입되지 않은, 순수한 당위로서의 책임을 떠안는 것이야 말로 자유인 것이다. 그것은 온전히 내 순수 의지로 결단하고 떠 맡은 것이기 때문이다. 전적인 나의 자발적 의지의 결과인 것이다.  그래서 칸트는 책임이야 말로 진정한 자유의 모습이며 그로인해 개인은 더욱 진정한 주체가 된다고 말했다. 결국 존 하트의 '아이언 하우스'는 이러한 칸트의 말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가 왜 책임을 맡는다는 것이 진정한 아버지로 거듭나는 길이라 했는 지, 그 명확한 이유에 대해서는 칸트에게서도 똑같이 들을 수 있으니 존 하트가 찾았고 그리고 여기서 내어놓는 해답이 어불성설인 것이 결코 아님을 우리는 알 수 있다. 그리고 존 하트에게 있어 또 하나의 탁월한 성취라 할 수 있는 이 작품을 우리가 읽어야 할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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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까지 연기하라
로버트 고다드 지음, 김송현정 옮김 / 검은숲 / 2013년 1월
평점 :
절판


 

 

 미스터리를 좋아하는 이들에게 오래도록 미스터리 비평서에 있어 하나의 모범으로 자리잡아왔던 줄리안 시먼스의 '블러디 머더'. 그 책을 보면 줄리언 시먼스가 '럼 펀치'의 엘모어 레너드나 '블랙 달리아'의 제임스 엘로이 같은 현대적인 작가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 이유란 다름아니라 형편없는 문장력 때문이다. 아무리 미스터리라고 해도 그렇지 '눈알을 데굴데굴 굴렸다'라는 표현을 어떻게 쓸 수 있느냐는 것이다. 다른 이들은 사회 하위 계층의 언어를 현실감있게 표현한 것이라고 하지만 시먼스 자신이 보기에 그것은 그저 보다 더 좋은 문장을 쓰기 위해 당연히 기울였어야 할 작가적 노력을 방기한 결과일 뿐이라고 한다. 쉽고 간결한 문장이 좋긴 하지만 그저 작가 자신이 편하게 쓰기 위해서 나온 것이라면 작품을 망치는 독(毒)일 뿐이라고 그는 전한다.

 

 

 

 

  하필 이 부분이 인상에 남았던 이유는 나 역시 현대 미국 스릴러 소설을 읽을 때마다 자주 마주치곤 하던 그 표현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때마다 나도 '뭐, 미스터리이니까!'하는 식으로 그냥 넘어가곤 했는데 시먼스의 말을 들어보니 아무리 미스터리이더라도 일단은 글로 된 작품인 이상 문장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 때부터 미스터리를 읽을 때에도 문장을 신경쓰면서 읽게 되었다. '끝까지 연기하라'로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되는 영국의 미스터리 작가, 로버트 고다드는 그렇게 해서 발견하게 된 작가이다. 그러니까 로버트 고다드는 무엇보다 좋은 문장으로 나를 매료시킨 작가라는 말이다. 안타깝게도 로버트 고다드가 미스터리 작가로서의 경력을 시작한 것이 1986년이라 '블러디 머더'에서 언급되지는 못했지만 분명 시먼스 역시도 고다드를 좋아했을 것이다. 스티븐 킹은 고다드의 작품을 일컬어 '단숨에 읽기에는 너무 좋은 작가'라고 말했는데 나도 동의한다. 그럴 수 밖에 없다. 문장 때문이다. 만연체라서 의미를 파악하느라 여러 번 읽는 것이 아니다. 너무나 심오한 은유와 상징들 때문에 멈춰서 시선을 송곳처럼 돌리게 하기 때문도 아니다. 문장들이 미려한 자태를 뽐내어 십대 소년이 르느와르가 그린 독서하는 소녀의 그림을 바라보듯이 넋을 잃고 음미하게 만들어서도 아니다. 그의 문장은 간결하다. 그렇다고 화려한 꾸밈이 있는 것은 아니다. 당연히 놀라운 은유나 심오한 상징도 없다. 단순하다. 평범하다. 그런데 왜 호들갑이냐고? 문장 하나만 놓고 보면 그렇다. 하지만 정작 고다드의 마법은 문장들이 모여있을 때 이루어진다. 아, 이걸 말로 설명하려니 정말 어렵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그냥 예를 드는 게 낫겠다. 주인공 토비 플루어가 조지4세가 머물렀던 로열 퍼빌리언 궁에서 아들의 죽음으로 결국 헤어져버린 아내 제인을 떠올리는 장면이다.

 

 

 

 

 

  나는 로열 퍼빌리언 궁전의 뾰족탑과 양파 모양 지붕들을 건너다보며, 가련하고  뚱뚱한 왕, 조지 4세에게서 동질감을 느꼈다. 그는 자신의 진정한 아내 피츠허버트와 안락한 가정생활을 누리고 싶어했지만, 결국 둘은 갈라서고 말았다. 그들의 이별은 여러 면에서 조지의 잘못이었고, 내가 제니를 잃은 것도 내 잘못이었다. 하지만 책임을 인정한다고 해서 그러한 삶의 과오들이 가벼워지는 것은 아니다. 사실 정반대다. (p.268)

 

 

 

 

 

 

 

 

 이런 식이다. 읽어보면 알겠지만 문장 하나하나는 색다를 게 없다. 그런데도 읽으면 묘한 매력이 있다. 특별할 것이 없는 문장인데도 여기에서 문득 시선이 멈추게 된다. 사실 토비가 '끝까지 연기하라'의 주된 사건에 휘말리게 되는 것은 남의 아내가 되려하는 제인을 다시 찾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그것을 위해서라면 연기자로서의 자기 경력을 모두 희생해도 좋을 정도로 열렬히 말이다. 위의 말은 그 제인을 만나 한 차례 더 거부를 당한 뒤 나온 것이다. 애타게 되찾고 싶어하는 아내에게서 다시 자신에게 되돌아올 가망이 없다는 걸 확인하는 것만큼이나 토비에게 아픈 것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문장에는 그가 어느 정도로 제인을 놓쳐버린 것을 후회하는지 또는 지나가버린 과거를 얼마나 되돌리고 싶어하는지에 대해서는 단 한 마디도 직접적으로 표현하고 있지 않다. 그런데도 읽는 독자는 그런 토비의 후회가, 안타까움이 느껴진다. 이게 고다드의 마법이다. 그의 문장들은 무심한 시선을 닮았다. 안으론 성게를 삼킨 듯 다시 게워낼 수 없는 날카로운 아픔이 있지만 문장들은 그런 내색없이 그저 먼 산에 떠 있는 흰 구름을 보듯 한다. 그러다 어느 순간, 문득 한 쪽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린다. 이는 내내 질질 짜면서 두 눈에 줄줄 흘러내리는 눈물 보다 더욱 인상 깊게 다가온다. 마치 세계가 반전된 것과도 같은 감각 속에서 그 무심함이 참음의 몸짓이었으며 결국 흘러내린 눈물은 그렇게 했음에도 새어나왔을 정도로 더욱 컸음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것 보다 더 깊이 다가온다. 완전히 홀딱 벗는 것 보다 반쯤 벗는 것이 더 에로틱하게 보이는 것과 같은 이치랄까. 마치 비어있는 용의 눈에 점을 찍듯, 결정적인 것은 마지막 문장이다. 마지막 문장을 빼놓고 읽어보면 이 한 문장의 있고 없고의 차이가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다. 말하자면 무심히 붙은 마지막 문장이야 말로 사실은 마술사가 '프레스티지!'하고 외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사실 이렇게 문장의 매력에 대해 말한다는 건 리뷰에게 좋은 도움이 못된다. 문장에 대한 선호도는 지극히 주관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나는 제임스 설터 가 그의 소설 '어젯밤'에 썼던 그런 문장 스타일을 선호한다. 로버트 고다드는 제임스 설터의 문장을 읽을 때와 비슷한 느낌을 준다. 한 번 더 체로 걸러내는 듯한 함축과 군더더기를 많이 덜어낸 담백한 맛이다. 하지만 설터의 문장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이라면 고다드의 문장에 있어서도 매력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냥 소설의 줄거리를 분석하거나 등장인물들의 상징, 또는 추구하고 있는 주제를 말하는 게 낫다. 사실 그런 쪽으로 리뷰를 많이 써 왔기도 하다. 로버트 고다드의 이 책도 그렇게 할 수 있었다. 연기 인생이든 사랑이든 모든 것에서 거부당한 주인공 토피 플로어가 결국은 자기와 똑같은 처지에 빠졌던 존재를 통해 자신의 아픔과 처지를 객관화하고 그를 통해 보다 바람직한 선택으로 나아가는 이야기라는 것을 주제로 쓸 수도 있었다.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이야기의 매력에 대해 말한 뒤에 주인공의 상황과 그의 도플갱어라고도 할 수 있는 범인의 설정을 통해 그것이 넌지시 토니 블레어가 추구했던 제3의 길의 사실상 실패를 은유한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무엇보다 나에게 가장 먼저 다가온 것은 문장의 매력이었기 때문이다. 고다드가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되기 때문에 더욱 이야기의 매력 보다는 문장의 매력을 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고다드가 더 깊이 전달하기 위하여 군더더기를 잘라내고 모든 것을 한 문장에 응축시켜 놓듯이 문장의 매력을 알리는 것에만 집중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결과는 보시다시피이다. 호응이든 비난이든 감수할 작정이지만 일단은 로버트 고다드가 이제라도 국내에 소개된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된다. 좋은 문장이 가진 매력이 작품의 매력마저 어떻게 상승시킬 수 있는지 잘 보여주는 예가 되지 않을까 싶다. 그러고보니 지극히 호불호가 갈릴 이 리뷰를 쓰고 있는 지금 내 심정을 정확히 대변하는 문장이 마침 소설에 나와 있었다. 그것을 인용하면서 나 역시 올릴까 말까 망설였던 것을 끝내려 한다.

 

 

 

 

 

 때때로 나는 통제력을 내려 놓고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 둘 때 최고의 연기가 나온다.

안타까운 점은 연기를 평가하는 사람이 내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좋든 싫든 그게 현실이다.(p. 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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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아이즈 2013-01-31 1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르메스님 제임스 설터 어젯밤, 보관함에 담았습니다.
<체로 걸러내는듯한 -- 담백한 맛>이란 님의 말에 그만 꽂혔지 뭡니까.
꼭 읽어서 제 것화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친절한 리뷰 고맙습니다.^^*

ICE-9 2013-02-05 22:40   좋아요 0 | URL
팜므느와르님 이렇게 들러주시고 또 좋은 말까지 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 제임스 설터는 제가 정말 좋아하는 작가인데 팜므느와르님도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습니다.^ ^

Shining 2013-01-31 1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흥미진진한 미스터리, 가 아니라 문장이 좋은 미스터리, 라니. 이런, 읽지 않을수가 없잖아요ㅠ 전 최근에 로렌스 블록의 글을 좋게 읽었어요. 마초적이고 그렇게 특이할 것 없는 이야기들인데. 묘하게도 어떤 애절함이나 냉담함, 진실함 같은 것이 뒤엉켜서 이상한 감칠맛이 나더라구요(웃음). 아, 블러디 머더.. 추천받은 적 있는데 잊고 있었네요ㅠ 이번 기회에 읽어보겠습니다+_+

ICE-9 2013-02-05 22:44   좋아요 0 | URL
로렌스 블록, 저 역시도 무척 좋아하는 작가입니다. 800만가지 죽는 방법을 읽었을 때의 감흥이 아직도 선연히 남아있어요. 와! SHINING님과 같이 좋아하는 작가가 있다니(더구나 메튜 스커더는 제가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 중의 하나인데^ ^) 어쩐지 더욱 SHINING과 가까워진 느낌이네요.^ ^ '블러디 머더'도 정말 좋더군요. 미스터리 비평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 모범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

희선 2013-02-01 2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이 좋은 미스터리군요 어떤지 보고 싶군요
저는 지금까지 이쪽 이야기 보면서 글이 안 좋다고 느낀 적은 없어요
읽은 게 얼마 없어서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냥 저한테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 적은 있어요 그런 것은 사람마다 다르기도 하겠죠

그런데 제가 책을 읽으면서 그것을 느낄 수 있을지...
확실하게 말하지 않은 것을 느낄 수 있으려면 경험이 많아야 할 텐데
별로 없어서 말이죠


희선

ICE-9 2013-02-05 22:49   좋아요 0 | URL
미스터리라는 것이 어디까지나 대중 친화적이 되어야 하는 이상, 나올 수 있는 문장의 패턴들이 그리 다양하다고 말할 수는 없는데요. 아마 그런 의미에서 미스터리 작가들은 자신의 스타일에 대해서 제약이 있고 또 그만큼 고민을 하게 되는게 아닐까 싶기도 해요. 그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좋은 문장들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고다드를 꼭 좀 소개하고 싶었습니다.^ ^ 희선님도 마음에 들어하시면 좋겠어요^ ^ 그리고 뭐든 경험이 필요한 법이죠. 양질전환이라는 말도 있듯이 경험이 쌓이다 보면 저절로 감식안 같은 것이 생길거에요. 그러니 너무 심려치 마세요^ ^(그렇다고 제가 경험이 많다는 말은 아닙니다. 하하^ ^)
 
11/22/63 - 1
스티븐 킹 지음, 이은선 옮김 / 황금가지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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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지만 확실히 2000년의 9.11 이 미국 문화 전반에 가한 충격은 대단했다. 포스트 9.11 이란 말이 어느새 비평계의 용어로 자리잡았을 정도로 미국의 문화, 그것도 영화나 장르 소설을 비롯한 대중 문화는 분명히 9.11 의 전과 후로 그 경계가 나뉘게 되었다. 다시 말해 9. 11의 이후에 미국에서 생산된 대중 문화의 산물들은 그 영향으로 부터 달아날 수 없었다는 이야기다. 즉 9. 11 은 문자그대로 트라우마였다.

 

 그것이 트라우마라는 징후를 보이고 있음은 도처에서 나타난다. 개인적으로 슈퍼 히어로 최고의 걸작으로 생각하는 샘 레이미의 '스파이더 맨 2'와 '다크나이트'는 9. 11의 강박증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그들이 영웅으로 겪는 곤경과 지게 되는 책임은 9. 11 이후의 미국이 겪고 있는 고통과 앞으로 나아갈 방향으로서의 대안에 대한 간접화법이기도 했다. 그건 소설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폴 오스터는 최근에 나온 '보이지 않는'이란 소설에서 9. 11이 안겨준 상실과 고통을 과거의 회고를 통해 그 원인의 궤적을 복기해 봄으로써 치유의 통로를 찾는다. 이렇게 과거로의 회귀는 포스트 9. 11의 소설들이 보여주는 뚜렷한 징후라 할만한데 바로 이것이 트라우마를 가진 자의 증상이라서 흥미를 끈다.

 

 트라우마는 절대 치유되지 않는 상처이며 지워질 수 없는 얼룩이다. 그것은 불현듯 엄습해서 현실을 뒤흔들어버리는 그저 압도될 수 밖에 없는 아픔이다. 그 환기되는 아픔을 통해 트라우마는 현재라는 시간 자체를 정지시키고 당하는 주체를 늘 과거로 되돌린다. 그는 그 연장된 과거의 시간에서 도저히 달아날 수 없다. 그렇게 그는 현재를 살지만 사실 그에게 있어 현재란 단순한 환영에 불과하고 정말로 그가 살아가는 건 영원한 과거일 뿐이다. 트라우마는 과거의 압도이며 블랙홀처럼 빨아들이는 몰입이다. 바로 이와 똑같이 과거에서 그 원인을 되새겨보려는 소설들 역시도 과거로 돌아가는 건 선택 사항이 아니다. 그건 필연이요 숙명이며 사람으로서 해야 할 도리 비슷하게 묘사된다. 9. 11 의 트라우마성은 이러한 유사성에서 더욱 확증된다.

 

 폴 오스터 만큼 9 .11을 지속적으로 환기하는 작가가 있다면 그건 바로 스티븐 킹이다. 2000년 이후에 나오는 그의 소설들의 중심엔 무엇보다 9.11이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사실 그의 모든 소설들은 9. 11 에 대한 이러저러한 사유의 지점들을 나타낸다. '셀'은 그만큼 똑같은 공황과 미국이라는 정체성 자체를 되돌아보게 만들었던 9. 11의 은유이며 그걸 보다 공동체 중심의 시야로 넓혀 살펴보려 했던 것이 '언더 더 돔'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의 뇌리에 그야말로 9 . 11 이 그림자처럼 달라붙어 있음을 뚜렷이 드러내는 작품은 바로 2008년에 나온 단편집, '해가 저문 이후'라고 할 수 있다. 그 전이나 그 후엔 은유나 비유로 삽입되었던 9 .11 이 이 단편집에서만큼은 그의 존재를 전면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첫 단편 '윌라' 부터 마지막 단편 '선셋노트'까지 거기서 스티븐 킹이 이야기 하는 것은 9 .11 이 우리에게 무엇이었고 우린 그것으로 인해 어떻게 바뀌었으며 이제 그 상처와 상실을 안고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그야말로 정신분석가 앞에서 자신의 트라우마와 그것과 더불어 사는 현재의 모습이 어떠한지 담담히 고백하는 단편집인 것이다.

 

 이 '해가 저문 이후'에서 스티븐 킹은 9.11을 안고 현재를 살아가는 것에 대하여 할 말을 거진 다 했다고 볼 수 있다. 언제나 그렇듯이 현재의 아픔을 술회한 끝에 찾아오는 것은 이제 완전한 치유를 위해 그 원인을 찾아보는 것이다. 폴 오스터 역시도 그랬다. 원인을 찾아 거슬러 올라가는 '보이지 않는'는 이전 두 작품에서 현재 진행중인 상처와 상실을 충분히 드러낸 뒤에 나오게 된 것이었다. 스티븐 킹도 그와 동일한 궤적을 보여준다. 그렇게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현재의 상처를 객관화하여 온전한 치유의 대안은 무엇인지 탐색하는 작품이 바로 2011년에 나온 '11 / 22 / 63'인 것이다.

 

 

 제목의 '11 / 22 / 63' 은 존 F 케네디가 달라스에서 오스왈드에 의해 피살당한 날이다. 모든 미국인들이 미국의 꿈이 죽어버린 날로 기억하는, 한마디로 대참사의 날이다. 제목이 이렇게 존 에프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당한 날로 된 것은 바로 소설의 이야기가 어떤 특정의 공간이 시간 여행을 가능케 한다는 걸 알게 된 주인공이 과거로 돌아가 미국 역사가 이토록 암울하게 흘러가게 되어버린 결정적인 날이라 여겨지는 1963년 11월 22일에 일어난 존 에프 케네디 대통령의 암살을 막으려 한다는 것이 주된 내용이기 때문이다. 즉 단적으로 말해 '과거로 돌아가 역사의 비극을 막는다'는 이 이야기는 그대로 폴 오스터가 '보이지 않는'에서 보여주는 것과 동일하다. 그러니까 여기서 존 에프 케네디의 죽음을 막는다는 것은 사실 9. 11을 막는다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스티븐 킹은 '해가 저문 이후'의 후기에서 존 에프 케네디의 암살을  9. 11 만큼이나 미국 역사에 있어서 의미심장한 비극으로 꼽았었다. 스티븐 킹에게 존 에프 케네디 암살은 9. 11과 그 역사적 중요성에 있어서 동의어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11/ 22 / 63'을 단순히 시간 여행자를 그린 소설이 아닌 '해가 저문 이후'에서 9 . 11이 남긴 현재적 상처들을 숨김없이 토해낸 스티븐 킹이 이제 그 아픔에서 어느정도 객관적인 거리를 두고 과거로 거슬로 올라가 지금의 비극을 야기한 원인들을 되짚어 보고 다시는 이와 같은 비극을 겪지 않기 위해(이것이 케네디의 암살을 막는다는 것의 궁극적인 의미일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그 가능한 대안을 탐색하는 이야기로 읽어야 한다. 이건 그저 구원의 도래만을 바랐던 그가('해가 저문 이후'에 일률적으로 흐르는 인물의 수동성은 바로 이것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이 남긴 것들'과 'N'은 그 성향을 드러내는 가장 대표적인 단편들이다.) 이제 스스로 일어나 그 구원의 가능성을 찾으려 한다는 적극적 의지의 표명과도 같다. 그래서 시간 여행이 하나의 공간을 통해서만 가능하도록 스티븐 킹은 설정한 것이다. 스스로 먼저 들어가지 않으면 안되도록 하기 위해서 말이다. 주인공이 과거를 왜 고치려 하는가? 그리고 끈질기게 과거가 수정당하는 것을 막으려는 불가사의한 힘은 무엇인가? 과연 지울 수 없는 과거의 비극은 현재적 노력으로 봉합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등등의 작품을 읽는 사이 떠오르는 의문들 하나하나는 그대로 다시는 9 . 11이란 비극을 겪지 않기 위해 우리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하는 거대한 물음들의 조각들이며 이에 ' 11 / 22 / 63'이 보여주는 여정은 바로 그에 대한 스티븐 킹의 응답이라 할 수 있다.

 

 이런 면에서 소설은 그야말로 '사유의 네트워크' 라 할 수 있다. 여행의 풍경이 그저 객관적인 풍경이 아니라 사실은 나라는 주체와 풍경이라는 객체과 만나 어우러진 일종의 감성적 혼합물이듯 그대로 사유속의 여정이라 할만한 소설을 읽는다는 것 역시도 우리가 읽게 되는 건 온전히 그대로 스티븐 킹만의 사유인 것이 아니라 그 속에 깃들어 끊임없이 간섭하고 단락시키며 또는 수긍하거나 배척하는 우리네 사유와 분리할 수 없을 정도로 얼기설기 엮어진 테피스트리적 혼합물이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자극되며 반성되고 성찰로 나아가는 소화의 과정을 스티븐 킹과 더불어 마치 '2인 3각'을 하듯이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들뢰즈가 고백했던 것. 그러니까 자신을 두고 뻐꾸기 처럼 남의 등에 달라붙어 기생하면서 사유를 살찌운다고 했던 것 그대로인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이 소설을 통해 스티븐 킹의 등에 달라붙어  우리에겐 어쩌면 강건너 불구경일 수 있었겠지만 미국 역사에 있어서는 일대 터닝포인트가 되어버린 '9 . 11' 이 정작 당사자인 미국인들에겐 어떤 것을 남겼으며 그들이 겪고 있는 현재적 아픔을 통해 어떤 미래를 향해 노력하는지를 그 사유의 흐름을 통해 알게되고 보다 우리 내면의 폭을 살찌우게 되는 것이다. 아마도 내가 이 소설을 추천한다면 바로 이 점 때문이리라. 그리고 이 소설에서 더욱 성숙해진 스티븐 킹은 분명 이것을 보다 확실하게 보증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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