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령 작가
로버트 해리스 지음, 조영학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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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버트 해리스의 출세작이라고 할 수 있는 '유령 작가'가 개정판의 모습으로 다시 찾아왔다. 원래는 대필 작가를 뜻하는 '고스트 라이터'란 제목으로 나왔었는데, 이번엔 '유령 작가'란 제목으로 바뀌었다. 아마도 개봉된 영화 제목에 맞춘 것 같다.


 

 영화는 보았으나 소설론 이번에 처음 만났다. 로만 폴란스키의 영화는 오랜만에 만나보는 70년대 스릴러 영화의 분위기를 한껏 간직한 영화였다. 사건 보다는 분위기, 인물 보다는 공간을 적극 활용해 의미를 전달하려고 애썼다. 로만 폴란스키 자신이 성범죄 전력으로 많은 국가에서 입국이 금지된(입국만 하면 바로 체포될 것이므로) 망명자 신분이라, 비슷한 처지에 처한 전직 영국 수상 아담 랭에 감정 이입하는 듯해 보이는 장면도 있었다. 소설에서 아담 랭을 국제형사재판소에 고발한 현재 영국의 국방장관 라이카트는 '아담 랭은 CIA의 연금을 받고 은퇴해서는 장관님과 그 놈의 국제형사재판소를 향해 'fuck you'(번역은 다른 말로 되어 있는데 여기서 쓸만한 단어가 아니기에 이리 표현함. 영화에서 주인공 역할을 맡은 이완 맥그리거가 소설과 같은 대사에서 이 단어로 말함.)를 날릴 겁니다'라고 말하는 주인공 작가에게 이렇게 응수한다.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옛날 사람들은 추방을 죽음보다 더 끔찍한 형벌로 생각했어. 그리고 이봐, 랭이 망명자가 될 수 있겠어? 세계 어디에도 갈 수 없는데? 국제형사재판소가 뭔지도 모르는 개똥 같은 미개국 몇 나라조차 어려울 거야. 비행기라는 건 늘 엔진에 문제가 생기거나 연료 공급을 해야 하는 법이고, 그렇게 되면 어딘가에 착륙을 해야 할 테니까 말이야. 우린 언제까지고 기다릴 수 있어. 그리고 그 때가 바로 그자를 잡는 순간이 될 거야." (p. 342)


 로만 폴란스키가 이 글을 읽었다면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자신에게 하는 말이라 여겼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영화에서는 이 대사가 나오지 않는다. 이 소설에서 내 마음을 가장 강하게 울린 문장이건만. 왜 여기서 이런 기분을 느꼈나 하면, 만일 지금 누군가 내게 '유령 작가'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키워드가 뭐냐고 묻는다면, 시국이 시국인지라 아무래도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을 듯 하다.


 그것은 두 개로 하나는 '대필'이고, 다른 하나는 '비선 실세'라고.


 때문에 이 소설은 원래 저널리스트로 유명했던 로버트 해리스가 당시 영국 수상이었던 토니 블레어의 퇴임에 맞춰, 토니 블레어를 모델(소설의 전직 수상 아담 랭이 바로 토니 블레어다. 실제 로버트 해리스는 랭에 대한 묘사 때문에 토니 블레어 측으로부터 고소 당할 뻔 했다고 한다.)로 하여 쓴 소설이지만, 읽다 보면 왠지 영국만의 또 소설 속 만의 이야기로 느껴지지 않고 꼭 지금 우리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보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우리가 최근 가장 많이 들었던 단어 또한 대필과 비선 실세가 아니었던가. 민주주의의 근간이 붕괴된 시점인데도 그것에 무한 책임이 있는 장본인인 자신은 아무 책임이 없는 것처럼 퇴진할 생각은 전혀 하지도 않고 오히려 여성의 사생활 운운 하면서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거나 자신이 피의자나 다름 없으면서 자신에게 있는 권력을 빌미로 주권자인 국민의 명령과 검찰 조사까지 깡그리 무시하고 있으면서 다른 사안에서는 검찰에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엄중히 조사하라고 명령하는 둥 막나가고 있으니 절로 라이카트의 '우린 언제까지고 기다릴 수 있어. 그리고 그 때가 바로 그자를 잡는 순간이 될 거야.'에 마음의 결기를 다시 돋우는 것과 함께 울컥할 정도로 공감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도 반드시 잡고 싶다'고



 어쨌든 일단 이야기부터 간략하게 소개해 보도록 하자. 남의 자서전이나 회고록을 대신 집필하는 전문 대필 작가, 즉 '고스트 라이터'인 주인공에게 이제 막 영국 수상 자리에서 물러난 아담 랭의 회고록을 대신 집필해 달라는 의뢰가 들어온다. 2주 전, 원래 회고록 집필을 맡고 있던 마이클 맥아라가 익사체로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경찰은 자살로 결론 내렸다. 정치인 회고록을 써 본 적도 없을  뿐 아니라 가장 쓸모 없는 책이라 생각하고 있던 주인공은(계속 주인공이라 하는 것은 소설에 이름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나'가 화자가 되어 말하는 1인칭 시점이다. 영화에서도 주인공 이완 맥그리거의 배역 이름은 그의 직업인 'The Ghost'로만 표기 되었다. 소설에서 그는 아담 랭을 처음 만날 때 이렇게 자신을 소개하기도 한다. "당신의 유령입니다."라고. 이것이 소설 속 그의 진실이기도 하다. 로버트 해리스는 고유한 실체라는 것을 드러내는 이름을 일부러 지워 유령이나 다를 바 없는 그의 존재를 더욱 부각시킨다. 그는 진정 유령이다. 유령은 개입이 금지된 존재. 그렇게 관찰자의 역할 밖에 할 수 없다. 눈치가 빠른 독자라면 바로 여기에서, 주인공이 가지고 있는 유령이란 한계를 통해 소설의 결말도 어느 정도 알아차릴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동종 업계에서 자신의 가치를 올릴 수 있는 기회라 여기고 이 말을 하여 그 일을 떠맡게 된다.


 요점인즉슨 이름만으로 책을 파는 시대는 지났다는 겁니다. 우린 혹독한 시련을 통해 그 진리를 터득했죠. 책을 팔고 영화와 노래를 파는 건 이 심장입니다.(영화에서는 '가슴'이라 번역되었다.)(p. 35)


 그런데 두 가지 조건이 있었다. 하나는 집필 기간이 겨우 한 달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아담 랭은 현재 미국에 있는데 그 집에서 집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유가 있었다. 맥아라가 써 놓은 초고가 마치 일급 기밀이라도 되는 듯 외부로의 유출이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주인공이 아담 랭의 집에 가보니 과연 검색이 엄격하고 맥아라의 원고 역시 금고에 보관되고 있었다. 주인공은 당연히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다.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엄중히 관리하지? 고작 원고 아닌가?' 그런데 집필을 이제 막 시작한 시점에서 아담 랭이 국제형사재판소에 전범으로 고발 당하는 일이 발생한다. 취임 시절 영장 없이 영국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던 파키스탄인 네 사람을 미국이 불법 납치하도록 도왔다는 혐의였다. 퇴임 이후 가장 큰 위기를 맞은 아담 랭. 그마나 자신이 협조한 미국의 지지로 간신히 일상을 버텨 간다. 한편 원래 정치에 아무런 관심이 없었던 아담 랭을 정치 세계로 이끈 장본인이라고 하는 그의 아내 루스는 아담 랭이 비서 아맬리아와 바람을 피고 있다고 의심해 그에게 냉담하게 군다. 이런 비상 시국에 그것도 영 찜찜하기 그지 없는 대기 속에 홀로 놓이게 된 주인공은 심기가 영 편치 않다. 영화에서는 그런 그의 마음을 그가 일하는 방의 커다란 창문으로 바람이 휘몰아치는 흐린 날씨를 담아내는 것으로 표현한다.



 작업에 집중할 수 없던 그는 산책을 나가는데 그러다 우연히 맥아라의 시체가 발견된 해변에서 전날 밤 수상한 불빛들이 목격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렇다면 설마 자살한 것으로 알려진 맥아라의 죽음이 자살이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 이렇게 맥아라의 죽음에 의문을 품게 된 주인공은 아담 랭과 회고록 집필을 하는 한편, 맥아라의 원고와 자료를 더욱 집중해 살피게 되고 그러다 맥아라가 비밀리에 남겨 놓은 단서들을 찾아내게 된다. 그리고 맥아라의 자동차에 있는 네비게이션이 가리키는, 그가 죽기 직전에 찾아간 장소에서 뜻밗의 인물을 발견하게 된다. 그가 바로 하버드 대학교 정치학 교수인 폴 에미트. 그는 세상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아담 랭의 케임브릿지 대학의 연극 동아리 시절 아담 랭과 함께 연극을 했던 사람이었다. 맥아라는 바로 이 사람을 만난 뒤 돌아가다 죽은 것이었다. 과연 이 사람이 누구이기에? 그 때부터 주인공은 아담 랭이 영국의 이익에 반하는 미국의 정책에도 반대하지 않고 한결같이 공조해 온 흑막에 연루되어 맥아라처럼 목숨마저 위험에 처하게 된다. 과연 그는 무사히 아담 랭의 진실을 밝힐 수 있을까? 하지만 소설은 우리의 예상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파국은 갑자기 찾아오고, 진실은 전혀 예기치 않은 곳에서 충격과 함께 밝혀지게 된다.



 소설의 원제는 'THE GHOST'다. 소설에서 유령 작가가 책을 쓰는 진짜 작가이듯, 여기서의 유령 역시 육체를 움직이는 실세 아니 실체를 뜻한다. 주인공이 아담 랭과의 첫 대면에서 자신을 '고스트'라고 소개 한 것은 실은 해리스가 심어 놓은 아주 강한 단서였다. 그 말을 듣고 있는 아담 랭은 정말로 '고스트'가 없는 존재로 밝혀지니까 말이다. 이 아담 랭은 앞서도 말했듯, 토니 블레어를 모델로 했다. 토니 블레어는 노동당 출신 수상으로 처음엔 앤서니 기든스가 주장한 '제3의 길'을 주된 노선으로 걷겠다 천명하며 많은 이들의 기대를 받았으나 갈수록 신자유주의 정책을 펴고 이라크 전쟁에서 미국의 가장 강고한 협력 국가가 되어주는 등 자신이 말한 것과 전혀 다른 행보를 보여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결국은 부시의 푸들로 전락한 토니 블레어의 모습을 보면서 영국인이라면 누구나 생각했을 것이다. 

 '도대체 쟤 영혼(ghost)에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우리가 길라임(이라 쓰고 박근혜라 읽는다.)이 '통일은 대박'이라는 둥, '혼이 비정상', '우주의 기운' 운운할 때마다 머리를 갸웃거리며 생각했던 것과 똑같이.


 로버트 해리스의 이 소설은 바로 그런 의문을 스스로 소설로 재밌게 풀어 본 것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우리가 길라임의 이해할 수 없는 발언이나 정책에 대해 최순실을 넣으면 다 납득이 되는 것처럼, 로버트 해리스도 이해 안 되는 토니 블레어의 행태에도 그런게 있지 않았을까 생각한 것 같다. 아마도 그렇게 나왔으리라. 소설의 마지막에서 충격적으로 밝혀지는 '비선 실세'는. 그 비선 실세의 존재가 너무나 충격적인 것이라 섣불리 믿기지는 않는다 해도.


 스릴러 소설가로서의 만만치 않은 저력을 문장이나 플롯 곳곳에서 느껴볼 수 있는 '유령 작가'는 오늘의 한국 현실을 대입해 읽어보면 더욱 재밌는 작품이다. 영화는 비극적 결말로, 소설은 다소 열린 결말로 끝나지만 현실은 부디 승리로 끝나기를 바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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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신의 만찬
올렌 슈타인하우어 지음, 권도희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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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저녁 만찬을 나눈다. 한 때는 연인이었다. 지금은 따로,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삶을 살고 있지만. 헤어진 뒤, 오래도록 만나지 않았다. 대략 6년. 서로 연락조차 없었다. 끝이 좋지 않았던 것이다. 여자는 이별의 말 한 마디 없이 남자의 인생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다른 남자와 결혼했다. 아이도 둘 낳고 행복한 가정을 만들었다. 남자가 보기에도 여자의 삶은 완벽해 보인다. 자신은 여지껏 혼자이고, 아직도 그녀를 깊이 사랑하고 있는데. 

 남자의 이름은 헨리. 여자의 이름은 셀리아.

 언뜻, 로브라이너 감독의 로맨틱 코미디 영화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가 떠오른다. 주인공의 이름이 해리, 샐리와 비슷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둘의 관계는 비록 서로 미련이 남아 있다 해도 전혀 낭만적이지 않다. 둘은 원래 미국의 첩보원이었다. 근무지는 오스트리아의 빈. 남자는 현장 요원, 여자는 연락책이었다. 혹시 '본 아이덴티티'라는 영화를 보았는지? 보았다면, 헨리를 맷 데이먼으로, 셀리아를 파리 지부에서 비슷한 일을 했던 줄리아 스타일스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나는 그 둘이 주인공 커플이라 상상하며 책을 읽었다.


 남자는 아직도 현직이지만 여자는 전직이다. 여자는 남자를 떠나는 것과 동시에 첩보원 일도 그만두었기 때문이다. 이런 그들의 만남이니 만큼, 오늘의 만남이 순수한 만남일 리는 없다. 첩보원 일을 떠났어도 여자는 잘 알고 있다. 남자가 옛 추억 따위에 젖어 자신을 찾아 올 리는 없다는 것을.

 맞다. 남자에겐 남자에겐 꿍꿍이가 있다. 그들을 결정적으로 헤어지게 만들었던, 6년 전 사건. 여객기 하나가 아랍 테러리스트들에게 납치되었다. 그들은 동료의 석방을 요구하며 빈 공항에서 대치 중이었다. 남자와 여자는 그 사건을 해결해야 했다. 그러나 테러리스트들과 내통하는 자가 있었다. 그 변절자로 인해 피랍 여객기 안에서 범인들의 정보를 알려주던 요원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건은 비극으로 끝났다. 요원은 머리에 총을 맞아 죽고, 여객기에 인질로 잡혀 있던 120명의 승객도 전원 사망해 버린 것이다.

 그 사건으로 둘은 영영 갈라졌다. 그런데 6년 후, 바로 그 사건이 다시금 과거의 심연에서 현재의 수면으로 불쑥 부상했다. 배신자를 알려주는 중요한 정보 하나가 뒤늦게 발견된 것이다. 그 정보가 나타내는 주요 용의자는 두 명. 하나는 여자의 직속 상사 빌이고, 다른 하나는 셀리아, 즉 여자다. 그렇게 남자는 순서대로 찾아 온 것이다. 먼저 빌을 만나고 이젠 여자 차례다. 남자는 여자가 배신자라 생각한다. 오늘의 만찬은 그 진실을 확인하는 자리다. 하지만 단순한 만찬은 아니다. 사실상 재판이나 다름없다. 여자가 배신자라는 게 확인되면, 첩보부의 관례에 따라 바로 즉결 처분 당할 테니까. 첩보부에 관타나모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자, 과연 이 만찬의 종막은 어떻게 될까?


 미국의 스릴러 작가 올렌 슈타인하우어의 2015년 발표작, '배신의 만찬'은 오로지 남자와 여자의 만찬으로만 이뤄지는 작품이다. 독자는 그 만찬의 시작과 끝을 함께 하며(일단 만찬이 시작되면, 작품의 현실은 끝날 때까지 단 한 번도 만찬 장소를 떠나지 않는다. 알프레드 히치콕의 영화, '다이얼 M을 돌려라'나 '로프'처럼.) 서로에게 유일했던 사랑이 어떻게 고통과 죽음만을 낳은 배신에 이르게 되었는지, 세밀한 내면 묘사(책은 남자와 여자의 내면을 한 장씩 번갈아 가며 전개된다. 우리는 남자의 입장에서 상황을 보다가, 그와 똑같은 상황을 여자의 입장에서 읽게 된다.)와 거듭된 반전을 통해 확인하게 된다. 그리고 이렇게 스스로 묻게 될 것이다.

 "도대체 사랑이 무엇이냐?"

 왜냐하면, 이 모든 배신과 비극의 기저(基底)엔 바로 사랑이 있었으므로. 사랑이 그들의 모든 고통을 가져 오고, 죽음마저 불러 왔던 것이다. 사랑, 그것이 유죄였다. 그러나 그렇다고 한들, 그들이 사랑을 버릴 수 있었을까? 어떻게 그러겠는가? 아무리 대의를 위한다고 해도 그렇지, 어떻게 운명의 연인을 죽도로 내버려 두거나, 등 뒤에 차디찬 배반의 단검을 꽂을 수 있단 말인가? 사랑 때문에 가문과 신분 그리고 조국을 배신하는 것을 오히려 위대한 사랑의 힘이라며 칭송한 우리가 아니었던가? 로미오와 줄리엣 그리고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처럼.

 이성으론 아무리 알아도, 마음은 어쩔 수가 없다. 그들의 선택은 필연이었다. 그들의 비극은 예정된 운명이었다. 오직 사랑한 것이 죄였고, 그것에 이미 파국은 점지되어 있었던 것이다. 소설로 깊이 깨닫는다. 사랑이 가진 비극성과 그것에 결부된 한없이 연약한 인간의 실존을.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고 했나? 그 사랑을 보존하기 위해 잘라 버려야 할 것이 이다지도 많은 것을. 마음이 연약하기에 그렇게 밖에는 달리 할 수 없는 인간인 것을.

 헨리와 셀리아. 알고보면 그들은 햄릿의 후예들이다. 햄릿은 자신의 복수가 아무 가치가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면서도 감행했다. 많은 사람과 자신마저 파멸될 것을 알았지만 그만두지 않았다.
 어찌하랴? 그것이 인간인 것을.

 이청준 작가의 '벌레 이야기'(나중에 이창동 감독의 '밀양'으로 만들어진)에 나오는 주인공이 생각난다. 자신의 아이를 유괴당한 여인이. 그녀는 신의 믿음을 통해 범인을 용서한다. 자신의 용서로 범인을 구원할 것이란 생각에 감옥에 있는 범인을 면회한다. 하지만 범인이 먼저 자신에게 용서를 구한다. 감옥에서 신을 믿고 자신이 얼마나 큰 죄를 저질렀는지 비로소 깊이 깨닫게 되었다고 하면서. 신의 용서로 새 삶을 살게 된 그는 반드시 여인을 만나 사죄를 드리고 싶었다고 말한다. 그렇게 말하는 그의 낯빛은 정말 신의 용서를 받은 것처럼 평온해 보인다. 그녀는 절망한다. 용서는 자신이 해야 할 것이었다. 범인으로 아들을 잃은 자신이. 반드시. 하지만 게임은 이미 끝나 있었다. 비극의 당사자인 자신은, 그로 인해 지금도 어마어마한 고통을 겪고 있는 자신은 정작 신과 범인의 협잡에 의해 소외되어 버렸다. 여인은 절절히 깨닫는다. 자신이 믿었던 신에게 배신 당했음을.


 우리는 여인의 심정이 충분히 이해된다. 하지만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그녀는 이미 그를 용서하려 했다. 그 용서의 마음 밑엔 그가 과거의 잘못에서 자유롭게 되어 다시금 삶을 새로이 살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자비심이 있을 것이다. 자비심이 주가 되었다면 누가 용서하든, 아무 상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여인에겐 누가 용서하느냐가 더 중요했다. 반드시 자신이어야 했다. 그녀가 믿었던 신은 여인에게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라고 했다. 이웃 사랑의 원동력은 자신의 부재에 있었다. 하지만 여인도, 우리도 자신을 포기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래서 프로이트도, 바디우도 그런 이웃사랑을 불가능한 명령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어쩔 수 없다. 우리 모두는 감정따라, 마음따라 흐를 수밖에 없는 미약한 벌레이기에.

 겸허히 인정하자. 그러므로 헨리든, 셀리아든 누구의 잘못이라 단죄하는 건, 오롯이 자만일 뿐이라고 말해야 하리라. 우리는 그들을 그저 연민해야 한다. 같은 햄릿으로서, 같은 벌레로서, 그들과 같은 운명을 짊어지고 살아가는 동포로서. 그 연민의 눈으로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오로지 서로에 대한 위로와 격려 밖에 없을 것이다.

 많은 이들이 우리가 정말 많은 것을 할 수 있으며 불가능한 것은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우리도 그것을 믿도록 하려 한다. 하지만 내가 보기엔 바로 거기서 우리 고통의 대부분이 나오는 것 같다. 할 수 있다 생각하기에 못하면 질책부터 하고, 가능하다 믿기에 닥달부터 하고 본다. 개인이 처한 상황이나 지닌 자질, 개성은 쉽게 묵살되고 목표가 절대이자 그것을 이루느냐 마느냐가 전부가 된다. 그가 아무리 열악한 처지에 있든, 가지고 있는 능력 안에서 최선을 다했던, 상관없다. 이루지 못하면 모조리 무능한 자의 비겁한 변명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가 겪는 아픔마저도 그리 치부되어 우리가 그를 배려하지 않고, 돌보지 않아도 쉽게 정당화할 수 있도록 만든다. 만일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그리 많지 않은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솔직히 인정하는 것에서 출발했다면 어땠을까? 이와 반대의 상황에 있지 않았을까? 적어도 우리가 겪는 아픔의 절반 정도는 줄지 않았을까? 우리가 강하다는 생각은 이 불안정하고, 예측불가의 세상에서 잘 버틸 수 있을 것이란 달콤한 환상을 준다. 그러나 결국은 자신마저 상하게 할 달콤한 독약에 불과하다.  허세란 독이 든 음식인 것이다.

 내 생각 대로, 믿음 대로 되는 일이 거의 없는 삶은, 정녕 '배신의 만찬'이라 할 만하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든 헨리와 셀리아가 그랬듯, 삶이 발 밑에서 붕괴하는 것을 경험할 수 있다. 그럴 때 우리는 내가 못나서, 더 잘난 나가 될 수 있었는데 노력하지 않아서 그렇게 되었다고만 생각했다.아니다. 인간이 약한 것이다. 삶 자체가 그런 것이다. 그러니 나의 단점도, 약점도 되어선 안 되는 것이다. 이렇게 겸허히 우리가 가진 약함과 한계를 인정한다면, 그 한계 안에서 나와 똑같이 버둥거리며 범위를 좀 더 넓히려 애쓰는 우리들만 눈에 들어오지 않을까 한다.
 연민으로 위로와 격려의 손길을 절로 내미게 되는.

 '배신의 만찬'은 이런 걸 돌아보고, 자주 곱씹게 만드는 소설이었다.
알고 보면 헨리와 셀리아, 그들에게 더욱 필요했던 존재의 진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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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리의 노래 버티고 시리즈
댄 시먼스 지음, 김미정 옮김 / 오픈하우스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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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페리온'과 '일리움' 시리즈로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미국의 작가 댄 시먼스는 가장 좋아하는 SF 작가 중 한 사람이다. '내 이름은 콘라드'나 '신들의 사회'의 로저 젤라즈니처럼 신화와 과학적 상상력을 절묘하게 뒤섞는 게 그의 장기라고 할 수 있는데, 그의 데뷔작 '칼리의 노래'는 뜻밖에도 공포 소설이다. '칼리'는 잘 알다시피 인도 신화에 나오는 존재다. 그녀는 파괴신 시바의 아내로 살인을 즐기기 때문에 인도 신화에서 가장 무서운 신으로 알려져 있다. 소설은 그런 칼리를 떠 받드는 것으로 알려진 인도의 도시 캘커타를 중심으로 하여 칼리와 관련된 아주 무섭고 참혹한 이야기를 담는다.


사진은 20주년 기념판의 표지. 칼리와 그녀를 비밀리에 숭배하는 도시 캘커타를 묘사하고 있다.


 소설은 1985년에 나왔다. 시기를 일부러 언급하는 것은 이 소설을 이해하는 데 있어, 소설이 쓰인 시대의 상황을 아는 것이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그 때의 미국은 로널드 레이건이 대통령이었다. 그는 대통령이 되자마자 70년대 후반에 흐르고 있던 데탕트를 백지화 시켜버렸다. 미국은 소련에게 50년대에 그랬듯이 다시 강경 대응하기 시작했고 그것을 위해 군비를 증강시켰다. 그렇게 미국과 소련은 신냉전시대로 접어들었다. 레이건은 그렇게 되길 원했다. 그래야 미국이 자유 세계의 리더로 군림하고 자기 아래에 있는 나라들이 아무런 찍소리도 못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소련이 다시 자유세계의 주적으로 떠오르면 힘이 부족한 나라들은 미국의 입김에 따라 좌지우지될 수밖에 없지 않은가. 한 마디로 레이건은 인도의 카스트 제도와 같은 굳건한 위계 질서로 이루어진 국제사회를 원한 것이다. 물론 그 최상층은 미국이 차지하고 말이다. 그런데 레이건의 소망은 나라 외부에만 그치지 않고 나라 내부로도 향했다. 국민들 사이에도 그런 위계 질서를 만들고자 했다. 그래서 부유층 감세가 주 목적인 레이거노믹스를 단행했다. 그는 규제를 완화했고 고용과 복지에 들어가는 정부 지출도 대폭 축소했다. 빈익빈 부익부가 심해졌고, 있는 자는 점점 더 살기 좋아졌고, 없는 자는 날이 갈수록 사는 것이 어려워졌다. 그들 사이에 절대 건널 수 없는 간격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하나의 질서가 점차 만들어져 갔다. 인도의 카스트 계급과도 같이.


 이것이 또한 레이건이 신냉전체제를 원했던 또 하나의 이유이기도 했다. 신냉전체제가 되면 외부의 갈등이 내부의 갈등 보다 더 커져서 국민들의 눈은 자연히 그 쪽으로 쏠리게 된다. 그렇게 되면 그들의 처지가 점점 열악하게 되어도 관심을 갖거나 저항하는 것이 적어지기 마련이다. 그들에겐 자유 세계의 리더 국가의 국민이라는 프라이드가 있고, 그들의 부족한 재화는 막강한 군사력을 통해 강요한 불공정 무역으로 다른 나라들에게서 충당될 테니까 말이다. 레이건의 모든 정책은 가장 상위에 있는 오직 하나의 존재를 위해서만 시행되었다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캘커타가 오로지 가장 위에 있는 칼리를 위해 존재한 것과 똑같이.



 '칼리의 노래'는 바로 그런 시대를 은유하고 있다. 시먼스가 하필이면 인도를 소설의 배경으로 한 것도 그 때문이다. 그는 인도의 카스트 제도와 상위에 군림하는 살인의 신 칼리를 통해 현재 미국이 만들고 있는 시대가 바로 그런 것이 아니냐고 묻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소설의 결말에 이르면 선명하게 부각된다. 때로는 별다른 소개 없이 무작정 이야기 속으로 뛰어드는 것이 더 좋은 소설이 있다. 내가 보기에는 '칼리의 노래'가 그러하다. 처음엔 평이하게 흐르다가, 느닷없이 당신의 모골을 송연히 만드는 장면을 만날 것이며, 시먼스가 이런 기괴한 상상력도 가지고 있었구나 하는 이야기를 만날 것이다. 이야기가 워낙 몰입도가 있어 그 자체만으로도 읽은 보람을 충분히 가지겠지만, '칼리의 노래' 내면엔 점점 암흑으로 치닫고 있는 당대에 대한 우려와 고민이 깊이 서려 있다. 시먼스는 타자와의 공존을 허락하지 않고, 자신의 기득권을 위해 함부로 우열을 가리고 그것을 통해 타자를 배척하는 곳은 어디나 공포와 살인으로 가득찬 칼리의 노래가 울려퍼질 것이라 예언한다. 그 예언은 지금 맞아떨어지고 있는 중이다. 단지 혐오한다는 이유만으로 죄없는 사람을 공격하고 살인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하다.


 그 칼리의 노래를 멈추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시먼스는 그것을 배려와 용서라고 말한다. 그런 마음은 무엇보다 주인공의 아내 암리타에게서 재현된다. 그녀는 남편을 따라 고향인 인도로 돌아간다. 그리고 거기서 카스트 계급에도 속하지 못하는 불가촉천민 여인 하나가 잔디 깎는 일을 하다가 감전 당하는 것을 발견한다. 여인 주위에 많은 인도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여인이 쓰러진 것을 보고도 누구 하나 도와주지 않는다. 불가촉천민이기 때문이다. 여인을 도와주었던 것은 오직 암리타 뿐이었다. 오로지 여인을 도와야한다는 생각에 암리타가 앞뒤 따지지 않고 나선 덕분에 여인을 살릴 수 있었다. 이런 암리타의 고백은 불가촉천민이 당하는 고통이 세계 보편이라고 말하는 캘커타 부유층 인사에 반하여 나왔다. 암리타는 보편이라고 해서 용납되는 고통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그렇게 밝힌 것이다.


 사실 '칼리의 노래'는 세익스피어의 '태풍(템페스트)'와 유사하다.


 '태풍'은 난파 중인 배로 시작한다. 불안과 죽음의 공포가 가득한 세상이다. 그렇기에 그 배는 칼리의 노래에 현혹된 캘커타라고 해도 무방하다. 거기서는 누구나 제 목숨을 보전하려 애쓸 뿐, 아무도 타인을 위해 희생하려 하지 않는다. 타인의 고통은 그저 남의 불행일 뿐이다. 그런 '태풍'의 세계에 구원을 가져 오는 것은 프로스페로의 딸 '미란다'다. 미란다는 난파 중인 배의 사람들이 당하는 고통을 마치 자신이 당하는 양 공감하는 유일한 사람이다. 그녀는 타인의 아픔을 보면서 측은지심을 느낄 수 있었던 단 한 사람이었으나 결국 그런 그녀의 마음이 복수심에 지배되어 오직 자신을 이렇게 만든 적들을 파멸시킬 궁리만 하고 있었던 아버지 프로스페로를 감명시켜, 심판과 멸망으로 끝나버릴 뻔 했던 세계마저 구하게 된다. '칼리의 노래'에서 암리타가 하는 일을 미란다가 하는 것이다.


 셰익스피어의 '템페스트'의 한 장면을 그린 그림. 난파 중인 배를 미란다가 애통해하며 보고 있다.


  그렇다면 소설의 주인공이자 암리타의 남편인 루잭은 '태풍'의 칼리반이라 할 수 있다.

 칼리번은 프로스페로의 하인이지만 속으론 항상 프로스페로에게 반항하면서 언제든 그의 질서를 전복시키고 말겠다는 꿈을 꾸고 있다. 마치 루잭이 그런 칼리번인 것을 암시하듯이, 이미 칼리의 세상이 되는 것을 막을 수 없다고 말하는 다스에게 루잭은 이렇게 말한다.


 "반항도 일종의 희망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p. 264)


 보는 방향에서 가장 왼쪽에 있는 존재가 바로 칼리반이다. 칼리반과 미란다 그리고 프로스페로는 이렇게 하나의 유사 가족 형태를 취하고 있다. 미란다는 프로스페로의 친딸이나 칼리반은 아니다. 이런 미란다와 칼리번이 '칼리의 노래'에선 암리타와 루잭 부부로 재현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이렇게 '칼리의 노래'는 '태풍'과 유사한 면이 있으며 '태풍'을 염두에 두고 읽으면 '칼리의 노래'에 담겨진 진심이 더욱 잘 드러난다. 그러고 보니 소설에서 칼리의 노래에 반하여 자신의 신념을 당당히 밝힌 유일한 인물에게 '암리타'라는 이름을 준 것도 의미심장하다. '암리타'는 인도 신화에서 신들이 마시는 음료의 이름이다. 그 음료를 마시면 불사(不死)에 이른다고 한다. 그런데 소설에서 칼리도 자신의 신적 권능을 보여주기 위해 익사한 시신을 되살린다.


 다시 말해 소설엔 두 개의 불사(不死)가 존재하는 셈이다.


 하나는 타자의 고통을 배려하는 측은지심이 가져오는 불사(不死)이고, 다른 하나는 레이건이 원했던 것처럼 오로지 타인의 파괴를 통해 나의 것만 영속시키는 불사(不死)이다. 어떤 것이 진정한 불사(不死)일까? 그 답은 소설을 읽으면 자연히 알게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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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러드차일드
옥타비아 버틀러 지음, 이수현 옮김 / 비채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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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옥타비아 버틀러가 우리나라에서 지금보다 조금만 더 유명했다면, 올해 '엑스맨 아포칼립스'가 개봉했을 때, 분명 이런 말이 나왔을 것이다. "어, 설정이 버틀러의 '야생종'과 너무 비슷한데 혹시 그 소설을 모델로 만든 거 아냐?"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분명 그랬다. 최초의 돌연변이로, 그 스스로 말하는 대로 많은 문명권에서 신으로 추앙받아온 '아포칼립스'는 정말로 '야생종'의 신적인 존재라 할 수 있는 '도로' 같았고, 거기에 맞서, 현재는 많은 돌연변이들이 그들의 리더로 동경하는 미스틱은  '야생종'의 안얀우 같았다. 

 도로는 인간과 다른 이종(異種)으로 자신의 초능력으로 그들을 지배하려 하고, 안얀우는 자신들만의 공동체를 만들어 공존하려 한다. 더하여, 안얀우는 미스틱과 똑같이 무엇이든 변신할 수 있는 능력도 가지고 있었다. 그렇게 '엑스맨 아포칼립스'와 '야생종'은 닮은 꼴이었다.  공식적으로 밝히지는 않았지만 분명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아니, 받지 않을 수 없다. 옥타비아 버틀러의 소설들은, '엑스맨'처럼 남들과 다른 존재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면, 그런 삶의 양태와 의미를 헤아리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먼저 거쳐가야 할 작품이니까 말이다. 타자의 감각으로 타자와의 진정한 공존을 추구하는 작가. 그가 바로 옥타비아 버틀러다.


 '블러드 차일드'는 2006년에 작고한 그녀가 세상에 남긴 유일한 단편집이다. 표제작 블러드 차일드를 비롯한 단편 7개와 두 편의 에세이로 되어 있는 이 단편집은 옥타비아 버틀러의 작품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필독서라 말해도 전혀 무리가 없다. 흔히들 버틀러를 SF 작가로 분류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버틀러를 다 설명한다고 할 수 없다. 버틀러를 담기에 SF란 범주는 너무나 협소하다. 사실 그녀에게 SF는 목적도 아니다. 다만 수단일 뿐이다. 평생 백인 남성 중심 사회인 미국에서 흑인 여성으로 살아온 그녀가 주류에서 소외되고, 차별받은 타자로서 체득한 경험과 성찰을 독자에게 좀 더 쉽게 전달하기 위해 택한 통로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 SF 작가라는 선입견을 가질 필요는 없다. 한번쯤 사회에서 차별받는 타자에 대한 문제의식을 지녀보았다면, 자신의 취향이 무엇이든 상관없이 만나도 되는 작가인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오히려 SF 팬들이 버틀러를 삐딱하게 볼 지도 모르겠다. '괜히 전하고픈 테마에만 집착해 SF적인 재미는 별로 찾아볼 수 없나 보다' 하면서. 하지만 그것도 오해라고 말해주고 싶다. 버틀러는 SF적인 재미에도 충실하니까. 그렇지 않았다면, '블러드 차일드'가 SF 계 최고상의 양대 산맥인 휴고와 네블러 상을 모두 수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상을 받은 단편은 또 있다. '말과 소리' 역시 84년에 휴고 상을 수상했다. 

  '블러드 차일드'는 71년에 자신의 작품을 처음으로 할란 엘리슨에게 판 그녀가 84년부터 그녀가 죽기 직전인 2005년까지 발표한 단편들을 담고 있는데, 그런 의미에서 거의 평생에 걸쳐 발표한 단편들이 담겨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더구나 다섯 번째 단편, '넘어감'은 71년에 처음으로 돈을 받고 원고를 팔 수 있었던 두 단편 중 하나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책을 통해 버틀러의 생 초짜 모습도 살펴볼 수 있는 것이다. 

 모든 단편엔 공통점이 있다. 주인공이 대부분 경계 위에 서 있다는 것이다. 그/그녀는 언제나 세상 전체를 지배하는 거대 세력과 그들에게 종속되었으나, 존재론적으로 다른 존재들 사이에 끼어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그/그녀는 온전히 주체도 아니고, 그렇다고 온전히 타자도 아니다. 그/그녀는 주체와 타자라는 층이 겹쳐진, 중층의 존재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그녀가 남들보다 구속의 강도가 두 배가 될 것이니 힘들 것이라 지레짐작한다. 때로 그렇기도 하다. 하지만 버틀러가 보여주는 궁극적인 모습은 구속의 강도만큼 선택의 자유 또한 확장되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단순하게 그/그녀가 양쪽 모두에게 속했다는 사실로 오는 혜택은 아니다. 그 보다는 선택할 수 있는 주체가 되었다는 것에 뒤따르는 당연한 권리의 향유라고 해야 한다. 
 
 왜? 그/그녀를 둘러싼 두 세계는 모두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있다. 그들의 선택은 격리된 공동체의 내적 질서를  그저 따르는 것으로, 거기엔 아무런 주체적인 결단이 개입하지 못한다. 하지만 양쪽에 끼어 있는 그/그녀는 스스로 양쪽 중 어떤 질서를 따를 것인지 선택할 수 있다. 오로지 자신의 결단으로 자신의 운명을 선택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칸트가 한 말 그대로다. 칸트는 벤담의 공리주의를 공격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 공리주의가 말하는 이익은 단순히 동물적인 본능을 따른 것일 뿐, 이성적인 행위라고 할 수 없다. 우리는 배고프면 음식을 먹고, 졸리면 잔다. 그 행위는 우리에게 이익이 되지만, 그것은 순전히 동물적 욕구를 자연스럽게 따른 결과일 뿐이다. 그러니 그것을 자유라고 말할 수 없다. 자유는 오로지 스스로 선택할 수 있을 때 찾아온다. 그러므로 온전히 이성의 명령에 따를 때 사람은 자유롭다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자유는 자율적 주체만이 향유할 수 있으며, 자율적 주체는 오로지 이성적인 결단과 선택을 통해 태어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될 때 주체는 비로소 타자에 대한 책임마저 떠맡을 수 있다. 버틀러의 주인공들은 이런 경로를 그대로 따른다. '블러드 차일드'에선 누나를 대신해 자신을 희생하는 남동생이 나오고, '저녁과 아침과 밤'에선 자신도 걸린 질병의 환자들 생존을 위해서 자기에게 주어진 책임을 기꺼이 떠 맡으려는 여성이 등장한다. '말과 소리'의 주인공 여성은 유일하게 자신의 세계를 지켜줄 남자가 희생되었지만, 그것이 오히려 그녀를  주체로 만들어 고아가 된 두 어린 아이들마저 책임진다. 이렇게 중층의 존재는 결국 타자의 책임으로 나아가고, 그것을 통해 두 세계의 공존을 추구한다.

 '블러드 차일드'는 이런 이야기들의 집합이다. 그래서 너무나 늦게 나왔지만, 지금 우리들 앞에 나타난 것이 무슨 운명처럼 느껴진다. 왜냐하면 지금은 그야말로 혐오와 증오로 넘치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가장 최근에 전 세계를 놀라게 했던 브렉시트 또한 이민자들에 대한 혐오와 증오가 낳은 산물이었다. 많은 노동자들이 브렉시트에 찬성했는데, 그것은 그들이 현재 겪고 있는 삶의 어려움을 이민자들 탓이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한 마디로 이민자들에 대한 혐오와 증오를 투표를 통해 분출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들의 삶을 힘들게 만든 것은 정작 다른 데 있었다. 대다수 영국 노동자들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는 제조업이 눈에 띄게 쇠퇴하고 있었던 것이다.

 혐오와 증오는 자신의 불안을 잠재우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다. 그들이 조금만 지금 자신들의 상황이 어디서 비롯 되었는지 이성적으로 접근했다면 그런 혐오와 증오가 얼마나 말도 안되는 지 알았겠지만, 혐오와 증오는 자신이 너무나 손쉽게 할 수 있는 것이었기에, 그만 별다른 성찰없이 그것과 타협하고 만 것이다. 그래서 결국 어떻게 되었나? 불안을 잠재우려 한 행위였지만, 오히려 더 큰 불안만 증폭시키고 말았다. 우리도 쉽게 저지를 수 있는 잘못이다. 강남역 무차별 살인을 비롯하여 작금에 일어나는 여러 비극적인 사건들이 그걸 증명한다. 그러므로 버틀러가 보여주는 경로가 더욱 소중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특사'를 보면 자율적 주체가 될 수 있었던 이유가 양쪽, 그러니까 주체와 타자 모두 공감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단정이 아닌 이해, 배척이 아닌 대화 그리고 과시가 아닌 존중이 그런 주체를 만든다는 것을 말이다. 그렇게 하여, 더 강고한 책임으로써 구성원 모두를 공존으로 이끌 수 있는 것이다.

 버틀러는 자신의 작품에서 꾸준히 사회에서 타자로 소외당한 이들이 자신들만의 공동체를 만드는 것을 구현했다. 그러나 이 공동체는 '야생종'의 안얀우가 잘 보여주듯이, 상호 공존을 위한 일종의 '터 닦기'였다. 그러니까 진정한 공존을 위해 스스로 타자에 대한 윤리적인 태도를 정립하고 실천하기 위한 중간 단계인 것이다. '저녁과 아침과 밤'의 병원 공동체처럼.

 이 단편집 또한 그런 '터 닦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대상은 독자다. 어떤 SF 작가는 SF를 가리켜 하나의 상상 실험이라는 말을 했다. 그렇다면 이 단편집 또한 상상 실험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타자와 진정한 공존을 이루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테마로 한.

 그렇기에, 타자에 대한 혐오와 증오가 갈수록 깊어지는 시대라면 더욱 이 상상 실험이 소중하지 않을 수 없고 버틀러가 유명하든 안하든, 취향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무조건 널리 읽히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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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걸
메리 쿠비카 지음, 김효정 옮김 / 레디셋고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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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대한 것 이상으로 좋았던 작품이다. 제목은 '굿걸'. 작가는 '메리 쿠비카'. 미국 시카고 교외에서 살고 있는 평범한 주부라는 것말고는 별다른 이력이 없는데, 놀랍게도 데뷔작이다. 어쩐지, 비슷하게 작가가 되었던 '아웃'의 기리노 나쓰오의 아우라가 느껴진다. 데뷔작이 이 정도라면 메리 쿠비카 역시 기리노 나쓰오처럼 굉장한 작가로 성장할 여지는 충분한 것 같다.


 '그래서 도대체 무슨 얘기인데 이리 사설이 길어?' 하실 분이 계실 것 같아서 바로 이야기의 소개로 넘어가 보자면,


 낙엽이 하나 둘 떨어지는 가을. 이브 데닛은 전화를 한 통 받는다. 걸어 온 사람은 자신의 둘째 딸 미아가 교사로 일하는 학교의 동료. 미아가 실종되었다고 한다. 미아가 그대로 미아(迷兒)가 되어버린 것이다. 아재 개그 해서 미안. 형사 게이브 호프만이 미아의 실종을 수사하기 위해 이브의 집으로 파견된다. 이브의 남편은 시카고에서 이름 높은 판사 제임스. 그리고 딸이 하나 더 있다. 이름은 그레이스로, 현재 변호사로 일한다. 남편과 언니는 둘 다 안하무인. '부전여전'의 뜻을 알고 싶다면 이 둘을 보면 될 것 같다. 덕분에 미아는 자주 소외되었다. 그레이스와 달리 미아는 아버지 뜻을 자주 거슬렀다. 아버지와 미아가 결정적으로 부딪혔던 것은 미아의 장래. 아버지는 미아가 자신을 따라 법조계에 투신하기를 원했으나, 미아는 자신이 좋아하는 그림을 계속하길 원했다. 미아는 아버지의 강권에도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고, 결국 미아는 제임스가 군림하는 가족에게 'Bad Girl'이 된다. 그런 상황 속에서 미아는 사라진 것이다.



 이제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 것 같은가? 언뜻 그동안 허다하게 나온 실종 관련 미스터리들이 그랬듯이, 그녀를 실종으로 만든 범인이 있고, 가족은 지옥의 고통으로 빠져들며, 형사들은 온갖 단서를 모아 범인 추적에 나서고, 그런 와중에 범인과 가족 그리고 형사 사이에 심장을 쫄깃쫄깃하게 만드는 긴장감과 서스펜스가 펼쳐지리라 생각하겠지? 하지만 메리 쿠비카는 그런 우리들의 기대를 단번에 저버린다. 소설이 시작한 후, 얼마 되지도 않아, 그러니까 불과 24 페이지에서 느닷없이 미아가 납치되었다가 살아서 돌아왔다고 밝히는 것이다. 작가는 이것으로 이 소설이 우리가 흔히 들었던 그런 이야기는 아니며, 자신은 이런 장르에서 들어보지 못했던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를 할 것이라 선언한다. 그대로 미아는 돌아왔는데 미아는 아니다. 본인은 납치 당한 사실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며, 미아도 아니라고 주장한다. 미아의 기억이 하나도 없다며, 자신의 이름은 클로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결단코 미아다. 그런데도 그녀는 자신이 다른 사람이라 주장한다. 도대체 그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우리는 이제 범인의 정체나 실종자의 생사 여부 등, 비슷한 장르 소설에서 중점을 두고 읽었던 것과는 다른 초점(바로 그 질문!)으로 이 소설을 읽어야 할 것을 종용 받는다. 아니나 다를까, 우리는 미아가 클로이라고 주장한 뒤에 바로 범인의 정체가 밝혀지는 것을 보게 된다. 그것도 바로 범인의 시점으로.


 시점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이 소설은 세 명의 시점이 번갈아가며 전개된다. 바로 미아의 어머니인 이브의 시점, 그리고 형사 게이브의 시점, 마지막으로 범인 콜린의 시점이다. 이렇게 분산된 시점은 소설의 흥미를 위해서가 아니다. 실은 다양한 시점으로 현재 미국의 가족을 임상하기 위해서다. 그렇다. '굿걸'은 최근 길리언 플린 이후로 더욱 주류로 자리 잡아가고 있는 'Domestic Noir'다.


 Domestic Noir에서 범죄는 여타의 범죄 소설과 다른 의미를 가진다. 여기서 범죄는 사회가 범죄로 잃어버린 안정을 되찾기 위해, 그래서 과거의 모습을 지속하기 위해 해결해야 할 장애물이 아니다. 그것 보다는 평온을 위장하기 위해 일부러 깊이 은폐하고 있었던 부정(不正)이 비로소 표면으로 솟아오르는 통로다. 범죄는 가면으로 가리워진 이면의 진실을 드러내며, 그렇게 밝혀진 민낯의 직시(直視)를 통해 현상된 부정의 온전한 대면으로써 제대로 된 대안을 찾도록 이끄는, 그것을 위해 범죄 스스로는 해결로 소거되어야 하기에, 한 마디로 '사라지는 매개자'다. 동시에 드러난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보다는 그저 더 두터운 진흙을 발라 다시 가리기에 급급한 지금까지의 사회적 대처에 일침을 놓는 존재다. '굿걸'의 범죄 역시 그러하다.


 그런 범죄의 의미를 필터로 소설은 '도대체 무엇이 정말 '굿걸'인가?'를 묻는다. 보통 '굿걸'은 어른의 말씀을 잘 듣는 아이에게 썼다. 달리 말하면, 기성의 권위와 질서를 아무런 저항 없이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는 존재가 바로 '굿걸'이었다. 소설에서 기성의 권위와 질서는 물론 아버지 제임스로 대표된다.(그러므로 진정한 굿걸은 아버지와 꼭 닮은 존재가 되어버린 그레이스라 하겠다.) 이 소설은 가부장적이고, 자신밖에 모르는 아버지가 군림하는 가족 안에서 그의 권위와 질서를 따르지 않는 여성이 당하는 고통을 세 명의 시점으로 임상한다. 그런 의미에서  Domestic Noir 이자 여성주의(페미니즘) 소설이다. 세 명이 서 있는 자리가 의미심장하다. 이브는 과거의 굿걸이었다. 빼어난 미모를 타고난 그녀는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개척하기 보다는 그 미모를 이용해 남성 질서에 깊이 종속되길 원했다. 부와 안정을 누리기 위하여. 그녀는 어머니로서, 미아가 아버지에게 당하는 고통을 목격하지만, 너무나 종속되어 이제 독립하는 것마저 두려워진 그녀는 미아의 고통을 모른 척 했다. 그런 이브에게 미아의 실종은 자신이 누구이며, 어디에 시선을 두어야 하는가를 깨닫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게이브는 남자지만, 공감 능력이 탁월하다. 그런 그의 모습은 용의자 콜린의 모친을 만날 때 한껏 증명된다. 콜린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간 것이었지만, 병환이 위중한 것을 보고 자신이 직접 그녀를 요양소로 데려간다. 콜린의 거처가 알려져 콜린이 경찰에게 포위되었을 때도 게이브는 콜린을 살리려 노력한 유일한 인물이었다. 이것은 제임스와 정반대의 모습이다. 제임스는 자신의 뜻과 어긋나면 친딸이라 하더라도 가차없이 저버렸다. 하지만 게이브는 설령 자신이 잡아야 할 용의자라 해도 인간적인 공감과 연민을 멈추지는 않았다. 게이브와 이브가 이어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할 지도 모른다. 마지막으로 콜린은 제임스 같은 아버지로부터 학대를 받았던 인물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콜린은 미아와 같았다. 콜린은 미아를 아무도 모르는 숲 속의 오두막으로 데려가는데, 그 곳은 제임스가 대변하는 남성 중심의 질서로 부터 독립된 영토의 상징이라 할 만하다. 우리는 여기서 소설이 찍고자 하는 방점이 소외가 아니라 독립에 있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그 독립의 영토에서 진정한 유대는 이뤄지고 결국 그들을 내몬 기성의 권위와 질서는 전복된다. 이렇게, 이브와 게이브 그리고 콜린은 제임스의 세계로부터 이탈하려 하거나 한 존재들이었다. 오로지 그들의 시선만이 나온다는 것이 중요하며, 그 모든 것이 가장 먼저 제임스의 세계에 도전한 미아로 인해 비롯된다는 것도 중요하다. 그렇게 이 소설, '굿걸'은 아직까지 여성 차별만큼 끈질기게 잔존하는 가족 내의 가부장적 질서에 대해 직시와 성찰을 촉구한다. 결코 재미로만 흘려 들을 수 없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다.


 이런 까닭으로 감히 추천할만한 좋은 소설이라 생각한다. Domestic Noir 라는 범주가 생겼을만큼 최근 가족을 중심으로 한 이런 취지의 소설들이 많이 나오고 있다. 그만큼 사람들이 많이 가부장적 질서의 문제점을 깨닫고 있다는 징후가 아닐까 한다. 좋은 현상이다. 보다 많은 작품들이 나와서 위기를 넘어 붕괴마저 초래했으면 좋겠다. 종속과 그것의 연장으로써 타자에 대한 혐오로 존속하는 '굿걸'이 아니라, 독립과 그것이 바탕이 된 타자에 대한 공감과 배려로 공존하는 '굿걸'이 가득한 세상이 오기를 소망해 본다. 그것도 얼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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