몬스트러몰로지스트 1 - 괴물학자와 제자
릭 얀시 지음, 박슬라 옮김 / 황금가지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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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침공'으로 우리나라에도 이제 제법 이름을 알린 미국 작가 릭 얀시가 새로운 작품을 들고 찾아왔다.

 '몬스트러몰로지스트(Monstrumologist)'가 바로 그 장본인. 얼른 우리말로 풀이하자면 '괴물학자'가 되겠다. 제목 그대로 한 괴물학자와 열 두살 나이의 조수가 주인공인 19세기의 미국을 무대로 한 이야기다. 포스트 아포칼립스였던 전작과는 전혀 다른 크리쳐 물이다. '페니 드레드풀'이란 미드가 있는데, 이와 비슷하다고 하겠다. 개인적으로는 꽤나 취향 저격인 작품이었다. '페니 드레드풀'처럼 19세기를 배경으로 한 으스스한 공포물을 참 좋아하는데, '몬스트러몰로지스트'는 그런 내 취향을 정확하게 만족시켜주었으니까 말이다. 정말 손에 들자마자 끝까지 정신없이 읽었던 것 같다. 무더운 여름밤을 잊기에 제 격이지 싶다.



 소설은 실제 릭 얀시가 등장하여 한 요양원의 원장을 만나는 것에서 시작한다. 릭 얀시는 원장에게서 누군가가 쓴 노트 열세 권을 받게 된다. 그것을 쓴 사람은 '윌리엄 제임스 헨리'라는 사람으로 자신이 1876년에 태어났다고 주장하는 사람이다. 누구도 믿지 않지만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이 사람의 신분을 증명할만한 게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가족은 물론 친척도, 태어난 고향조차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 사람의 과거를 조금이라도 알수 있지 않을까 해서 그 노트로 조사를 좀 해 달라고 릭 얀시에게 노인이 직접 쓴 공책들을 준 것이었다. 직접 봐도 되었을텐데, 굳이 소설가 릭 얀시를 부른 것은 노인이 12살 때 겪었다고 노트에 기록한 이야기들이 전혀 믿을 수 없는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설가라면 일반인보다 좀 더 잘 정보들을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의뢰하게 된 것이었다. 바로 그 노트에 적힌 이야기가 '몬스트러몰로지스트' 본편이다. 이런 구성은 메리 셀리의 '프랑켄슈타인'이나 로버트 스티븐슨의 '지킬 박사와 하이드' 같은 소설이 나오던 시기에는 흔한 것이었다. 이처럼 그 때의 장르 소설은 주로 누가 남긴 수기 혹은 목격담 같은 것으로 소개 되었다. '윌리엄 제임스 헨리' 이름 자체에세도 릭 얀시의 농담이 느껴진다. 심리학의 아버지라 일컫는 윌리엄 제임스와 작가로 이름이 드높은 헨리 제임스, 그렇게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형제의 이름을 하나로 합쳐 놓은 것이니까 말이다.


 본편으로 넘어가면, 윌리엄 제임스 헨리가 12살의 나이로 등장한다. 그는 부모를 모두 다 잃고, 아버지가 살아 생전 충실히 모시던 괴물학자 펠리노어 워스롭의 조수로 지내고 있다. 하루는 도굴꾼 에라스무스 그레이라는 노인이 찾아온다. 자신이 무덤을 도굴하다가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며 가져온 것이다. 그레이란 노인이 탁자에 놓은 것은 두 구의 시체였다. 하나는 10대의 어린 소녀였고 다른 하나는 성인 남자의 시체였다. 성인 남자는 마치 엄마가 자식을 껴안듯이 어린 소녀를 칭칭 감고 있었는데 하나가 정말 이상했다. 머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소녀의 얼굴은 반쪽이 사라져 있었다. 무언가에게 이빨로 물어뜯긴 것이었다. 괴물학자 워스롭은 남자가 소녀를 잡아먹고 있었다고 말한다. 헨리는 의문을 가진다. 머리가 없는데 어떻게 잡아먹는단 말이지? 그 의문은 곧 풀린다. 남자에겐 입이 있었다. 바로 배가 입이었다. 남자가 소녀를 감싸듯 칭칭 감고 있었던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배로 소녀를 먹고 있던 중이었던 것이다. 헨리가 남자로 생각했던 것은 세상에 태어나 처음보는 괴물이었다. 워스롭은 헨리에게 이름을 알려준다. '안트로포퐈기'라고. 한없이 잔인하고 사람을 잡아 먹는...



 그런데 헨리 못지않게 워스롭 또한 충격에 빠진다. 안트로포퐈기는 미국에 결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먼 남쪽 바다에서만 서식한다. 그들 스스로의 힘으로 바다를 건너 미국으로 올 수 없다. 그런데 어떻게 미국에 있을 수 있는 것인가? 언제 처음 여기에 왔는지도 중요했다. 왜냐하면 안트로포퐈기가 자궁이 있는 자리에 뇌가 있어 번식이 어렵기는 하지만 그래도 1년에 한 두 마리 정도는 낳을 수 있기 때문에 언제 여기로 왔는지 알아야 어느 정도의 숫자가 여기에 있는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안트로포퐈기는 무리를 이루며 산다. 본거지를 찾아내 박멸하지 않으면 워스롭과 헨리가 사는 뉴예루살렘은 엄청난 위기에 처할 것이다. 워스롭은 자신과 똑같이 괴물학자였던 아버지의 기록에서 바너 선장이라는 인물을 찾아낸다. 무려 20년 동안 정신병원에 갇혀 있는 사람인데, 알고 보니 그가 바로 안트로포퐈기를 미국에 싣고 온 자였다. 그것도 위스롭의 아버지의 의뢰로.


 그 사실은 워스롭에게 정말 커다란 충격을 준다. 아버지는 왜 이토록 위험한 존재를 일부로 미국으로 가져온 것일까? 그 의문을 제대로 풀기도 전에 다시 한 번 엄청난 사건이 벌어진다. 안트로포퐈기가 처음 발견된 공동 묘지 근처 교회의 목사관에서 어린 자녀 네 명을 포함한 일가족이 안트로포퐈기에게 처참하게 살육된 것이다. 이대로 사태를 도저히 묵과할 수 없게 된 워스롭은 자신과 똑같은 괴물학자이자 안트로포퐈기 토벌에 일가견이 있는 존 컨스를 부른다. 그러나 그는 안트로포퐈기를 상대하는 능력은 탁월해도 인간성에 커다란 문제가 있다. 자신의 목적만 중요하지 타인의 목숨은 하찮게 여기는 것이다. 설령 그것이 친구 워롭스가 아끼는 헨리의 목숨이라 해도.


 이야기는 그렇게 안트로포퐈기의 본거지를 찾아가는 것으로 흘러간다. 그리고 거기서 드러난 진실 앞에서 워롭스는 마침내 의문을 풀게 된다. 그것도 충격 속에서...


 '안트로포퐈기'는 다른 땅에서 흘러든 존재로, 그렇게 이주자들을 비유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인간과 전혀 다른 신체 구조와 인간을 잡아먹는 그들의 문화는 신체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낯설 수밖에 없는 이주자들의 모습을 많이 과장한 것이다. 어쩌면 그들이 서식하는 땅으로 먼저 가 어떤 목적을 갖고 배에 태워 데려왔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는 '흑인 노예'의 면모도 갖고 있다고 보여진다. 그런 이주자들이 예측과 통제를 벗어났을 때 갖게 되는 두려움이 바로 이 소설에 선연하게 드리워진 공포가 아닐까 싶다.



 통제와 예측을 벗어난 이주자들을 상징하는 안트로포퐈기를 대하는 소설의 태도는 인물을 중심으로 크게 두 가지로 나눠진다. 하나는 존 컨스처럼 무조건 제거하고 보자는 식이다. 다른 하나는 워스롭처럼 그럴수록 더욱 알려고 애쓰자는 식이다. 물론 릭 얀시가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후자다. 그랬기에 소설의 주인공을 괴물에 대해 공포라는 비합리적 감정이 아니라 관찰과 검증이라는 합리적 태도로 다가가는 '괴물학자'로 삼았을 것이다. 아예 소설에서는 워스롭이 헨리에게 존 컨스에게 절대 다가가지 말라고 경고까지 한다. 여기서 작가가 왜 워스롭과 헨리 모두가 비슷한 처지를 가지고 있는지도 드러난다. 헨리는 부모를 잃었다. 그는 아주 외로운 어린 시절을 보내고 있다. 그런데 그것은 워스롭도 마찬가지였다. 그 역시 어렸을 때, 하나밖에 없는 아버지에게서 아무런 애정을 받아본 적 없는 아주 외로운 소년이었던 것이다. 집에서 멀리 떨어진 기숙사에서 늘 혼자 지내야만 했던 워스롭은 아버지의 관심과 사랑을 받는 것만이 가장 커다란 소원이었으나 괴물 연구에 지나치게 빠져버린 그의 아버지는 단 한 번도 그런 것을 주지 않았고 그래서 늘 아픔과 자신이 못나서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한다는 자책에 빠져 있어야 했다. 존 컨스에게조차 워스롭이 괴물학자가 되어 이토록 열성을 다해 일하는 까닭이 실은 아버지의 인정을 그렇게라도 해서 받아보려는 것 아니냐는 빈정거림을 당할 정도로. 헨리는 우연히 발견하게 된 워스롭이 어릴 때 아버지에게 쓴 편지에서 그런 워스롭의 모습을 본다. 헨리는 워스롭이 자신과 결코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고 그를 전보다 더욱 잘 도와주어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는 내 머리 위에 우뚝 서서 성인의 권위를 휘두르며 잔뜩 주눅든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지만, 마음 속으로 나는 작고 어린 외로운 소년을 보고 있었다. 낯선 곳에 홀로 떨어진 불쌍한 소년, 아버지의 관심과 애정을 갈구하며 편지를 쓰던 어린 소년. 그러나 그 애정에 대한 보답으로 아비가 보내온 것은 거부라는 치욕감뿐이었다. 편지는 뜯어 보지도 않은 채 낡은 트렁크 속으로 던져져 잊혔다. 이 얼마나 이상하고 비극하고 운명의 아이러니인가! 우리는 종종 긴 세월이 흐른 뒤에 아무 잘못도 없는 이들에게 복수를 꾀하곤 한다. 과거에 우리를 괴롭힌 이들과 똑같은 죄악을 반복하면서, 그렇게 나 자신이 겪었던 고통을 끝없이 보존하고 영속시키는 것이다. 그의 부친은 그의 간청을 묵살했고, 그래서 그는 나의 간청을 묵살했다. 그리고 나는... 무엇보다 가장 기묘한 아이러니이긴 하지만, 바로 그였다.(p. 137)


 워스롭도 겉으로는 그런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지만 속마음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소설이 후반으로 나아가며 더욱 많이 드러내게 된다.


  바로 이런 식의 연대가 실은 릭 얀시가 작품을 통해 정말 보여주고 싶은 게 아닐까 싶다. 이주자들의 존재가 넘쳐나는 이 시대에 말이다. 겨우 인간의 모습을 찾았던 이주자들이 어느새 점점 '안트로포퐈기'가 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그들이 우리와 공존해야 할 존재들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한, 그들은 더욱 빨리 인간의 얼굴을 잃어버린 '안트로포퐈기'가 되어버릴 것이다. 그렇게 되면 안트로포퐈기가 되어버린 그들에게 우리 역시 인간이 아니라 그저 잡아먹어야 할 먹이에 지나지 않게 될 것이다. 상대방이 인간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고 먼저 인정해 주는 일. 그것이 바로 우리 역시 인간의 얼굴을 잃어버리지 않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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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수첩 버티고 시리즈
이언 랜킨 지음, 최필원 옮김 / 오픈하우스 / 2017년 4월
평점 :
절판


  무한 경쟁을 부추기는 신자유주의는 흔히 의자 뺏기 놀이에 비유되고는 한다. 각자가 자신이 앉을 수 있는 의자를 차지하기 위하여 서로를 밀어내려고 다투는 것과 같다고. 물론 그 놀이 보다야 현실의  다툼이 훨씬 격렬하긴 하지만 말이다. 비정규직이 만연한 지금에 내일도 모레도 앉을 수 있는 자리는 모두가 바라는 꿈이기도 하다. 그런 시대에 갑자기 내가 있을 자리가 없어진다는 현실만큼 공포스러운 것도 또 없을 것이다. 게다가 나이가 중년 이상이라고 한다면 더 그렇다. 그 나이란 이제 의자를 다시 마련하기가 그리 수월하지 않다는 것을 뜻하기도 하니까. 엉덩이가 많이 무거운데, 무겁고 싶고 무거웠으면 하는데, 어쩔 수 없이 떠나야 한다는, 그 변화의 강요가 부담이요 불안으로 밀려드는 게 마치 꼭 임박한 젠트리피케이션 속 세입자와 다를 바 없는 것. 그것이 바로 중년이요, 한 번쯤 그들에게 꼭 찾아온다는 우울의 요체가 아닐까 싶다. 갑자기 왜 이런 이야기를 하냐고? 이번에 나온 이언 랜킨의 '검은 수첩'이 바로 거기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검은 수첩'은 타탄 느와르의 제왕이라고 불리는 이언 랜캔의 대표작인 존 리버스 시리즈의 다섯 번째 작품이다. 제목의 '검은 수첩'은 원래 헨리 8세가 엔 마리와의 결혼 때문에 영국 내 카톨릭을 압박하던 시절, 헨리 8세에 동조했던 수도사들이 수도원의 비리를 몰래 적었던 일종의 장부였다. 그것을 통해 비리 척결이란 명분으로 헨리 8세가 수도원을 정당하게 장악할 수 있도록 말이다. 그 이후, 잘못이나 비리 같은 것을 비밀리에 기록한 것을 두고 'BLACK BOOK'이라 불렀다. 이 같은 사실을 이야기 하는 것은 이 소설의 제목이 이언 랜킨의 존 리버스 시리즈 제목이 늘 그랬듯이 이번에도 중의적으로 쓰이고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물론 자신의 단골집 카페 주차장에서 느닷없이 뒤통수를 가격 당하여 쓰러진 브라이언 홈스가 남긴 '검은 수첩'이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주된 소재이긴 하지만 동시에 이 소설엔 자신의 자리를 잃어버린, 그렇게 젠트리피케이션이 넘쳐 나는데 '블랙북'의 원래 역할을 상기해 보면 그 역시 수도원을 젠트리피케이션 하기 위해서였으니까 말이다. 이처럼 이 소설은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검은 수첩'이 지닌 중의적 의미 그대로 젠트리피케이션 소설 이다.

 다시 말해, 밀려난 자들의 이야기.


 소설은 이렇게 시작된다. 야심한 밤을 틈타 악취가 진동하는 시신 두 구를 밴으로 운반하는 두 명의 사내가 있다. 바다에 접한 절벽에 차를 세우고 시체를 바다로 버리는데 순찰차가 멈춰선다. 경관 하나가 손전등을 들고 다가온다. 시체 버리는 것을 목격한 것은 아니다. 다만 농무가 너무 심해 혹시 무슨 문제가 있어 이 곳에 차를 세운 것은 아닌가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친절한 경관에게 찾아온 것은 느닷없는 습격과 죽음. 사람의 목숨이 쉽게 버려지는 그 곳에는 이제 절망만이 가득하다는 듯 마치 희망 혹은 구원의 상징과도 같았던 경관이 들고 있는 손전등의 빛은 그의 죽음과 함께 꺼져 버린다. 그와 동시에 존 리버스 역시 자기 자리에서 끝도 없이 밀려난다. 마약 중독자였던 동생이 갱생하겠다면서 리버스의 공간 속으로 들어오고, 당시 삶의 유일한 낙이었던 안마 시술소에서 우연히 만난 옛 동료와 회포를 나누느라 연인 페이션스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바람에 그녀의 집에서도 쫓겨난다.(이 소설은 영국에서 드라마로도 만들어졌는데, 드라마 역시 이 소설의 핵심을 제대로 알고 있었던 듯, 존 리버스가 페이션스 집에서 쫓겨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그러나 드라마의 이야기는 리버스가 맡게 되는 사건까지 포함하여 소설과 전혀 다르다. 이야기가 완전히 바뀌면서도 존 리버스가 페이션스에게 내쫓겨 지금은 남에게 세를 내 준, 원래 자기 집에서 사는 설정만은 그대로 살아 남았는데 그래서 더욱 드라마 역시 '검은 수첩'의 핵심을 밀려난 자의 이야기로 보고 있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TV 시리즈 속 리버스 경위의 모습. 켄 스콧이 맡았다.

(혹시 영화 '호빗'에서 기다란 흰 수염을 하고 있던 호빗이 생각나시는지? 그가 바로 켄 스콧이다.)

 1기와 2기의 리버스를 맡은 배우가 다른데, 1기는 예전 영화 미이라 3부작에서 웃음을 주로 맡았던 조 해너가 했었다. 


 경찰서 내 상황도 사생활과 그리 다르지 않다. 그를 마뜩찮게 여기는 경찰들이 그를 밀어내려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안팎으로 내몰리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 존 리버스는 무엇보다 혼자서 조용히 독서하는 시간을 사랑한다. 그러나 이제 그런 시간도 안녕이다. 자신의 집은 동생과 세든 대학생들의 이런저런 소동으로 소란스럽고 그 어디서도 휴식은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만하면 그가 자신의 자리에서 완벽하게 젠트리피케이션 당했다고 보아도 무방하리라. 그런데 존 리버스만 그런 게 아니라서 이 소설을 더욱 젠트리피케이션 소설로 보게 만든다. 일단 검은 수첩의 원래 소유자이자 리버스의 부하인 브라이언 홈스는 아내와의 별거로 더욱 힘든 일상을 보내고 있는 그에게 유일한 안식처였던 하트브레이크 카페 주차장에서 병원에 실려갈 정도로 구타를 당한다. 소설 초반에 등장해 리버스를 곤란하게 만들었던 동생조차 마약을 끊고 갱생하기 위해 리버스의 집에 머무르는데 거기서 오히려 심한 폭행을 당하고 다리에 거꾸로 매달리기까지 한다. 홈즈가 구타를 당했던 '하트브레이크 카페' 주인인 에디 링컨은 또 어떤가? 엘비스 프레슬리의 팬이었던 그는 비로소 자신의 꿈을 실현한, 그래서 그의 유토피아라고 할 수도 있는 카페를 마련했는데 그 가게를 버리고 달아나야 할 상황에 직면한다. 존 리버스의 조력자가 되는 앤디 스틸 역시 자신이 살고 있는 곳에서 떠날 수 밖에 없어 에든버러로 왔으며 소아성애자로 캐나다로 도피했던 앤드류 맥페일 역시 거기서 살지 못하고 다시 에든버러로 돌아온다. 사실 이언 랜킨은 리버스 시리즈 첫 작품부터 '에든버러'가 관광객들을 위한 도시가 되었다며 툴툴거렸는데, 이렇게 보자면 그 관광객들의 의미가 다소 달라지는 셈이다. 원래 자신이 있던 자리에서 밀려난 자들이라는 것으로 말이다. 에든버러는 아마도 그런 자들이 마지막으로 깃들 수 있는 곳, 그처럼 최후의 희망 같은 장소였는지 모른다. 그 희망의 모습은 저마다 다르겠지만. 그런데 그 황혼의 마지막 빛과도 같은 희망조차 사라져 버렸다. 소설 초반에 꺼져버린 손전등이 의미하듯이 말이다. 에든버러는 이제 그런 장소가 될 수 없다. 마치 그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소설의 주요 미스터리가 되는 예전에 화재로 사라진 호텔의 이름은 '센트럴'이다. 과거, 에든버러의 중심이 될만큼 훌륭한 호텔이었던 그 곳은 어느샌가 도박과 범죄의 온상이 되어버리고 결국엔 알 수 없는 화재로 전소되어 흔적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밀려난 자들로 가득한 소설 속 에든버러의 모습은 도박과 범죄의 온상이 되어버린 센트럴 호텔의 모습과 유사해 보인다. 혹여 이언 랜킨은 에든버러의 과거와 미래를 센트럴 호텔에 빗대어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더욱 존 리버스의 숙적 캐퍼티를 전면에 내세운 것은 아닐런 지. '당신들이 알고 있던 에든버러는 이제 없어. 당신들이 원하는 안식 따윈 이미 사라지고 없다'는 의미로.

 등장인물 모두가 유일한 안식처를 모조리 잃어버리는 것처럼.


 그러므로 존 리버스가 검은 수첩의 진실을 추적하는 것은 삶의 두 번째 기회 같은 것을 가질 수 있었던 과거의 에든버러가 어떻게 그런 것이 가능했는지 찾아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 소설 앞에는 작가의 말이 있는데 거기서 이언 랜킨은 '검은 수첩'이 미국 여행 도중 집필되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전혀 일본 소설 같지 않은 작품을 쓰는 무라카미 하루키는 자신의 소설들이 외국인의 입장에서 진짜 일본이라는 것은 뭘까 생각해보는 작업의 일환이라고 한 바 있다. 이처럼 외국에서 자신의 모국을 생각하면 보다 객관적이고 그만큼 본질적인 것을 생각할 수 있게 되는 듯 하다. 이언 랜킨도 에든버러에 대해 그럴 수 있었던 게 아니었을까? 바로 그 과정을 녹여낸 것이 '검은 수첩'이라고 한다면 너무 무리한 상상인 걸까?

 

 여하튼 이런 면에서 어쩌면 시리즈 사상 가장 절망적인 소설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소설에 왜 이렇게 유머가 넘치는 걸까? 언어 유희인 농담이 많이 나온다. 지금 에든버러 사람이라면 '아재 개그'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이 그것도 그리 적절하지 않는 타이밍에. 문득 니체의 말이 생각났다. '유머는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데, 인간만이 유머를 가지고 있는 까닭은 지구 상에서 가장 슬픈 동물이기 때문이다. 가장 슬프기 때문에 웃음을 발명할 수밖에 없었다'라는 말. 사실 이언 랜킨이 열심히 이 소설을 썼던 92년은 영국 역사상 최악의 해 중 하나였다. 투기꾼 조지 소로스의 공격에 영국 경제가 어이없이 무너진 '검은 수요일'이 일어났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어쩌면 캐퍼티의 전면화가 실은 조지 소로스를 빗대려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까지 든다. 한 개인에게 휘청거릴 정도로 너무나 약해져버린 공동체. 그것은 분명 예전 에븐버러의 모습이 아니었다. 사실 92년 이 때는 과거부터 강렬했던 스코틀랜드 분리주의 여론이 아주 약해진 시기이기도 하다. 무려 76%의 스코틀랜드 사람들이 이대로 영국에 복속되어 있어도 괜찮지 않느냐고 생각하고 있었다. 누구도 센트럴 호텔의 소실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았듯이 스코틀랜드 민족주의와 독립에 대해 그리 신경쓰지 않았다. 소설은 어쩌면 그런 무관심과 방관을 건드리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에든버러로 다시 돌아온 앤드류 멕페이는 리버스 경위말고는 아무도 신경쓰지 않으며 '검은 수첩'의 사건 또한 존 리버스만 관심 갖기 때문이다. 상관들은 내내 다른 '머니백' 작전에만 집중하라고 리버스 경위를 닦달한다. 그리고 그런 무관심과 방관은 자기에게 피해만 오지 않으면 괜찮다는 이기심의 소산이다. 검은 수첩 사건의 진실이 오래도록 은폐될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고, 마지막의 놀라운 반전 또한 그 때문이었듯이.


 이렇게 소설은 아주 재밌는 이야기이지만 비판의 가시들을 은밀히 지니고 있다. 누군가 주머니 속에 몰래 넣어둔 압정처럼 뜻하지 않은 순간에 찔려서 이제는 그런 무관심과 방관을 버리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느끼도록. 그래서 말인데, 존 리버스가 페이션스(Patience Aitken)에게 쫓겨나는 것의 진실은 이것인지도 모른다.

 '이제 이런 상황에 대한 우리의 인내(patience)는 다했다!'


 '너무 늦기 전에 올바로 잡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 이 소설에 짙게 서려 있다. '오로지 나만을 위해 자신의 자리를 지키려 했다간 다만 빼앗길 뿐이며 나를 버리고 모두를 위해 나설 때 오히려 자신의 자리를 지킬 수 있다'는 주제를 줄기로 하여 말이다. 내 자리에 대한 불안이 여전하고 적폐 청산이 시대적 사명이 된 지금의 우리에게도 그리 먼 이야기로 여겨지지 않는다. 그래서 한 번 읽어보시라고 추천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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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하다고 말해 스토리콜렉터 52
마이클 로보텀 지음, 최필원 옮김 / 북로드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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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갇힌 소녀'한 소녀가 갇혀 있다. 지금 그녀의 나이 열 여덟. 열 다섯 살에 친구와 함께 누군가에게 납치되어 현재 3년째 감금 중이다. 그 일로 그들의 고향 빙엄은 완전히 뒤집혀졌다. 부모와 경찰을 비롯하여 많은 이들이 그들을 찾았으나 행방이 묘연했다. 자식의 생사를 몰라 애타는 부모의 마음을 뒤로 하고 그들은 '빙엄의 소녀들'로 불리며 마을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 갔다. 하지만 그들은 살아 있었다. 범인이 빛이 없는 곳에 물도 먹을 것도 거의 없이 방치하여 갖은 학대를 다 했으나 그들은 조금도 삶의 의지를 버리지 않고 생존하기 위해 분투했다. 사회는 죽었다며 포기하고 서둘러 잊었으나 그들은 자신에게 돌아갈 집이 있다는 사실을 결코 잊지 않았다.


 그들에 대한 사회의 무시와 망각이 천벌을 받는 것일까? 우리의 주인공, 파킨슨 병을 앓는 임상 심리학자 조지프 올로클린은 영하 26도의 혹독한 겨울을 견디고 있다. 지금 런던은 남극 대륙을 횡단하는 스콧의 기분을 느낄 수 있을만큼 극지의 공간이다. 그리고 공항마저 폐쇠된 고립의 장소다. 거기서 조지프는 자신의 딸, 찰리와 함께 한다. 갇힌 소녀들 역시 누군가의 딸이듯 찰리는 그들과 비슷한 입장을 공유한다. 비록 육체는 아빠와 함께 있지만 정신적으로는 아빠에게서 이탈하려 하고 있는 중인 것이다. 조지프는 그 상황이 혼란스럽다. 그는 기드온 때문에 한 번 딸을 잃어본 적이 있다. 그 격심한 공포 속에서 괴물로 넘쳐 나는 이 사회에 딸을 내보낸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마치 그 마음을 대변한 것처럼, 조지프는 찰리를 마중나온 플랫폼에서 우연히 낯선 청년이 찰리와 친근하게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본 뒤, 다시 말해 자신의 영역을 벗어난 찰리의 모습을 목격한 후, 찰리와 함께 기차를 타고 가다 호수에서 얼어죽은 찰리와 비슷한 연령의 여성 시체를 목격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도 어쩌면 찰리와 그 청년이 했을 지도 모를 한 커플이 열차 안에서 낯뜨거운 애정 행각을 벌이는 것을 본 직후에 말이다. 그 광경은 분명 조지프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었을 것이다. '잘 봐! 찰리가 네 경계를 벗어나면 어떻게 되는지? 이렇게 되길 원해?' 그렇지 않아도 찰리가 지금 사귀는 남자 친구 제이콥 때문에 조지프의 심기는 영 좋지 않다. 나이도 훨씬 많은 데다 사는 꼴도 영 신뢰가 가지 않기 때문이다. 헤어진 아내 줄리아는 조지프에게 찰리가 제이콥과 헤어지도록 하라고 종용 중이다. 그와 별도로 조지프는 찰리가 이대로 세상에 정착하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가급적이면 보다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 더 많은 삶에 깃든 기회를 누리길 바란다. 그러나 이것은 자기 품에 두고 보호하고 싶은 욕망과 충돌한다. 조지프는 한 마디로 혼란스럽다. 우리에게 마이클 로보텀의 작품으로는 네 번째로 소개되는 '미안하다고 말해'는 바로 이런 조지프의 혼란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다. 즉 소설의 주된 미스터리가 되는 '빙엄의 소녀들'이 바로 조지프의 찰리에 대한 복잡한 감정의 투영인 것이다.




 때문에 나는 무엇보다 이 소설이 가지고 있는 형식에 주의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 소설은 갇힌 소녀중 하나인 파이퍼 해들리의 고백 혹은 기록과 조지프의 이야기가 병행하는 구조로 되어 있다. 파이퍼의 이야기가 나오면 마치 배턴을 주고 받듯 조지프의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다. 물론 이런 구성이 처음인 것은 아니다. 우리에겐 영화로까지 만들어진, 길리언 플린의 '나를 찾아줘'를 비롯하여 이미 익숙한 미스터리 플롯이다. 거기서 피해자의 고백 혹은 기록은 어디까지나 미스터리에 충실한 플롯의 한 부분으로써 기능했다. 그러나 이 소설은 다르다. 물론 여기서도 미스터리 플롯의 역할을 한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보다 더 큰 역할이 있다. 바로 특히 찰리에 대한 조지프의 태도에 대한 반향의 기능도 한다는 것이다. 주의해서 읽어 보면 파이퍼의 이야기와 다음에 이어지는 조지프의 이야기는 어떤 연속성이 있다. 다시 말해 파이퍼의 이야기는 조지프가 찰리에게 취했던 태도에 대한 반응으로 읽힐 수 있다는 얘기다. 마치 조지프와 찰리가 속내를 모조리 털어놓는 무언의 대화라도 하듯이 말이다. 바로 이 점이 소설을 더욱 흥미롭게 만든다. 우리는 조지프가 임상 심리학자라는 것을 안다. 그는 사람의 심리를 정확히 분석하는 게 일이다. 하지만 조지프의 심리를, 그것의 진짜 의미를 밝혀내는 눈은 소설에 없다. 조지프는 모두를 보지만 조지프의 내면의 진실은 아무도 보지 못한다. 바로 그것을 보여주는 게 파이퍼의 이야기다. 즉 파이퍼에 의해 조지프의 찰리에 대한 모든 태도의 밑바닥에 있는 것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이것을 인정한다면 이런 말도 가능하다. 파이퍼의 고백을 통해 비난 받고 단죄되는 것은 비단 범인만이 아니라 본질적인 의미에서 범인과 똑같은 행위를 하고 있는 조지프도 그 대상이라고. 놀랍지 않은가? 다른 텍스트를 통해 지금 진행 중인 주인공의 행위나 태도에 대한 비난과 단죄가 즉시 이뤄지다니. 범인과 조지프가 실은 동일한 존재라는 것은 결말에서 더욱 드러난다. 즉 결말이 그렇게 된 것은 오직 하나 범인과 조지프가 실은 동일하기 때문이다. '빙엄의 소녀들'을 납치한 범인이 소녀들에게 '조지'라 불리워지는 이유도 그가 조지 클루니를 닮아서가 아니라 주인공 '조지프'와 비슷한 이름으로 만들어 범인이 주인공의 분신이라는 것을 암시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이런 면에서 '미안하다고 말해'는 두 가지 층위의 이야기가 한 소설에 통합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표면적 층위에선 여느 스릴러 소설과 다를 바 없이 기승전결로 촘촘히 꽉 짜인 플롯이 독자를 이끌고 간다. 그러나 심층적 층위에선 플롯 보다 아빠와 딸의 대화처럼 구성된 과정 속으로 독자를 끌어들인다. 거기서는 모든 게 독자에게 레퍼런스가 된다. 어쩌면 실제 삶에서 조우하게 될 지도 모를 문제들에 대하여 어떻게 하면 보다 현명하게 대처할 수 있는지 이런 저런 사유의 도우미들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이야기가 이야기이니만큼 아무래도 주로 부모와 자식 관계의 일이 되겠지만.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고 하실 분들이 계실 것 같다. 그래서 소설에서 실제 예를 하나 들어보려 한다. 조지프가 경찰의 부탁 때문에 부부 강간 살해 사건의 주요 용의자인 오기 쇼를 심문하기 위해 먼저 범죄 현장부터 들르는 장면이다. 거기서 조지프는 이런 말을 한다.


 심리학자는 형사와 다른 관점에서 범죄현장을 바라본다. 경찰은 물리적 단서와 목격자를 찾아 수색한다. 나는 전체 그림을 보려 노력한다. 주요 지형지물의 특징들을. 예를 들어, 어떤 도로들은 심리적 장벽 역할을 수행한다. 그 한쪽에 사는 사람들은 절대 반대쪽으로 넘어가지 않는다. 철도선과 강들도 마찬가지다. 경계는 행동을 바꾼다.(p. 49)


 이 말을 할 때 그는 범죄로 불타버린 집을 보고 있다. 그가 경계 운운 한 것은 경계를 확실히 해 놓지 않아서 집에 있었으면서도 희생되었다는 생각 때문이다. 더구나 이 현장은 유괴된 소녀가 원래 살았던 집이기도 하다. 그 역시 경계가 허물어졌기에 생긴 일이었다. 경계를 지키는 개가 없어졌다는 게 이것의 단서로 제시된다. 그러므로 현장에서 조지프는 딸을 보호하기 위해 경계를 더욱 확고히 해야겠다는고 생각한다. 이것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조지프가 스스로 자세히 알아보지도 않고 그저 경찰이 원하는 대로 오기 쇼를 분석해 주는 것에서 드러난다. 그는 그저 귀찮고 얼른 떠나고 싶은 마음 뿐이다. 딸을 보호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러나 바로 이어지는 파이퍼는 이런 말을 한다. 자기가 사는 빙엄 마을 역사상 최악의 사건은 2차 대전 때 독일 폭격기가 마을 회관을 폭격한 일인데, 그 때 가장 안전하다고 여겼던 마을 회관으로 피신해 있었던 21명의 사람들이 희생되었다고 말이다. 그들은 조지프와 똑같이 자신이 가장 안전할 수 있는 장소를 확보했는데 오히려 그 때문에 죽었다. 그러니 파이퍼는 과연 조지프가 생각하는대로 확고한 경계가 쓸모 있는가 하고 반문하는 것이다. 심층적 차원의 이야기는 이런 식으로 진행된다. '지금 조지프가 취하는 태도는 바른 것인가?', '그것에 문제는 없는가?' 하는 것이 파이퍼의 진술을 통해 나타나는 것이다. 이런 점이 눈에 들어오면 이야기도 이야기지만 하나의 이야기 속에 이런 다층적 국면을 조형한 마이클 로보텀의 솜씨에 감탄하게 된다. 아니,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을까? 아니, 생각은 할 수 있어도 어떻게 이리도 성공적으로 해낼 수 있었을까? 더구나 표면의 이야기는 심층의 이야기로 인해 전복되기도 한다. 표면의 이야기는 조지프가 빙엄의 소녀를 구하지만, 심층에선 오히려 빙엄의 소녀가 조지프를 구하는 것이다. 단순하게 말하면, '미안하다고 말해'는 경계가 테마다. 경계를 벗어나거나, 경계가 허물어지는 것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소설이다. 이렇게 보자면 작품 전체가 합심하여 그 어떤 경계도 내부에 허용하지 않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조지프가 파이퍼를 구하는 것과 동시에 파이퍼가 조지프를 구하듯, 표면의 이야기와 별개로 진행되는 심층의 이야기가 있듯, 딱히 어느 하나로 정해지는 게 없는 작품이니까 말이다. 마이클 로보텀은 소설을 통해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이렇게 형식과 내용 모두에서 완수했다. 정녕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왜 마이클 로보텀의 대표작이라 평가받는지 알겠다. 다음 작품엔 그가 과연 어떤 성취를 할지 자못 궁금하다. 얼른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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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 번의 시선 - 합본개정판 모중석 스릴러 클럽 2
할런 코벤 지음, 최필원 옮김 / 비채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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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잠자리의 날개는 참으로 약하다. 손 끝으로 잡아 조금만 힘주면 바스라진다. 때로 삶은 그런 잠자리 날개와도 같다. 아주 사소한 계기로 평온했던 삶이 송두리째 전복되기도 하는 것이다. 어떤 소설의 제목처럼 참을 수 없는 삶의 가벼움을 그것도 아주 예민하게 느끼는 작가, 그가 바로 할런 코벤이다. 그의 소설 속 인물들은 언제나 느닷없는 공격을 당한다. 콧노래를 부르며 모퉁이를 돌았는데 갑자기 강도가 겨눈 총구를 맞이한 것과 유사하다. 예측할 수 없었던 시간과 장소에서 불현듯 들어온 것이기에 블랙홀에 붙잡힌 빛처럼 삶은 사정없이 끌려 들어간다. 그 혹은 그녀들의 삶은 갑자기 암흑이 된다. 이유를 알 수 없기에 더욱 짙어버린 어둠 속에서 몸으로 더듬으며 진실과 구원을 찾아 나가야 한다. 그들에게 진실은 곧 구원이다. 지금 겪고 있는 환란(患亂)의 이유를 찾는 것이 곧 현재의 고통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출구인 것이다. 이것이 할런 코벤이 선사하는 미스터리가 가지는 이채로운 점이다. 그의 미스터리는 다른 것과 다르게 독특한 작용을 한다. 이것은 셜록처럼 풀어야 할 트릭이 아니다. 필립 말로처럼 도덕적으로 무너진 사회의 민낯을 보여주거나 개인의 신념을 타락시키려 유혹하지도 않는다. 할런 코벤의 미스터리는 전혀 부정적인 게 아니다. 설령 주인공이 그로 인해 목숨마저 위험할 정도로 고통 받고 있다고 해도 말이다. 왜냐하면 코벤의 미스터리는 지금 삶이 가짜라는 것을 알려주는 전서구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주인공 네오가 지금까지 진짜라고 믿었던 앤더슨으로써의 삶이 가짜라고 알려주었던 '빨간 약'. 할런 코벤의 미스터리는 바로 그것이다. 한 마디로 영화 '쇼생크 탈출'에서 탈옥을 위해 준비된 숟가락.


 "진짜 삶을 찾게 해 주는 할런 코벤의 빨간 약, 자네도 한 번 먹어볼 텐가?"


 어떻게 그렇게 되는가?

 과거 때문이다. 코벤의 소설에서 주인공이 당하는 곤경은 대부분 과거와 관련이 있다. 그는 과거 사건의 피해자였거나 가해자였다. 상실의 아픔을 억지로 잊었거나 책임을 회피했다. 주인공이 과거에 어떤 행위를 했건 간에 늘 존재하는 공통점이 하나 있다. 그건 바로 사건을 직시하지 않고 회피하려 했다는 것. 그저 잊거나 책임을 피하기 위해 달아났다는 것. 바로 그것이다. 그렇다고 과거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다. 과거는 아주 솜씨가 좋은 술래다. 어디에 숨든 늘 자신을 찾아낸다. 자신에게 양심이라는 내부고발자가 있기 때문이다. 그 혹은 그녀는 진실이든 책임이든 싸우기 싫어서 도피를 선택했지만 그것은 또 다른 싸움의 시작일 뿐이었다. 바로 자신이 가지고 있는 기억과의 투쟁. 그 기억은 계속 주인공에게 말한다. 지금 네 삶은 가짜라고, 진실과 책임을 외면하는 한 진짜 삶은 너에게 없다고. 하지만 과거와 대면하는 게 고통스런 주인공은 쓴 약을 억지로 삼키는 마음으로 모르쇠 한다. 잠깐이라도 고통을 외면하기 위해 마약을 맞는 사람과 다를 게 없다. 이것은 결코 올바른 삶이 아니다. 이대로라면 악순환만 계속 될 뿐이다. 뭔가가 나타나 고리를 끊어야 한다. 과거와 대면하여 진실을 알고 그 책임을 다할 수 있도록 하여 망각과 회피로 일관된 가짜 삶의 질곡으로부터 건져내야 하는 것이다. 바로 그런 일을 하는 것이 미스터리다. 그것은 너구리처럼 굴 속 깊은 곳에서 움츠리고만 있는 자신을 나가서 진짜 삶과 대면하라고 내몰기 위해 피우는 연기와 같다. 연기가 매캐우면 매캐울수록 자아는 조금이라도 더 빨리 진짜 삶과 마주하려고 나가게 될 것이다. 코벤의 미스터리가 이와 같다. 그의 미스터리가 납치와 살인처럼 어둡고 잔혹한 색채를 띠는 이유는 단 하나, 구원을 향한 탈출의 속도를 높이는 데 있는 것이다.


 

2004년에 발표된, '단 한 번의 시선'은 이러한 코벤 미스터리의 결정체와도 같은 작품이다. 제목에서부터 할런 코벤 특유의  '아주 사소한 계기로 절단나는 삶'이 바로 드러나 있다. 주인공은 남편과 두 명의 어린 자녀가 있으며 직업이 화가이나 지금은 알 수 없는 이유로 슬럼프를 겪고 있는 그레이스. 그녀의 삶은 정말 아주 사소한 것 하나 때문에 절단 나 버린다. 그것은 바로 사진 현상소에서 찾아온 가족 사진들 속에 끼어 있던 이상한 사진 한 장(원제 그대로 JUST ONE LOOK!). 분명 자신이 찍은 사진이 아닌데다 아무래도 사진 속 인물 하나가 남편 같아서 남편에게 보여줬더니, 그 날 밤 갑자기 차를 몰고 집을 떠난 남편은 그대로 실종되어 버린다. 그렇게 느닷없이 닥쳐온 곤경 앞에서 지금껏 평온한 삶을 살던 그레이스는 어찌할 바 모르고, 남편 사건은 점점 실종에서 납치라는 게 밝혀진다. 그리고 동시에 그녀를 압박해오는 15년 전 그녀의 과거. 그것은 '보스턴 대학살'이라는 이름으로 전 미국을 전율하게 만들었던 사건이었다. 한 록 뮤지선 콘서트 장에서 일어난 그 사건은 누군가 쏜 총 한 방 때문에 수많은 젊은이들이 서로 앞다투어 달아나느라 치이거나 깔려 목숨을 잃었는데, 그레이스는 그 아비규환의 현장에서 목숨을 건진 유일한 생존자였다. 마치 자신의 이름대로 그레이스, 즉 축복을 받은 것처럼.


 하지만 그녀는 사건을 기억하지 못한다. 왜 콘서트 장에 갔으며 어떻게 목숨을 구할 수 있었는지, 그 날의 기억을 모조리 상실한 것이다. 그것은 정말 기억 상실인 것일까? 혹시 그 날의 고통과 죄책감을 애써 잊기 위한 심리적 방어는 아닐까? 남편의 실종과 함께 불시에 나타난 인물인 칼 베스파가 그것을 상기시킨다. 그는 '보스턴 대학살'에서 단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잃은 아버지이자 암흑계의 거물. 칼 베스파는 남편의 실종이 15년 전 사건과 관계있을 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한 편, 정체불명의 사진은 그레이스에게 남편에 대한 의혹을 일으킨다. 사진 속 남편을 보고 있는 한 여성의 모습은 남편이 숨긴 과거가 슬쩍 꼬리를 내민 것 같았으며 지금까지 남편의 삶을 잘 안다고 여겼지만 어쩌면 아는 게 하나도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이렇게 사진 한 장은 그레이스가 잘 안다고 여겼던 삶의 모든 것들을 'PAINT IT BLACK' 하면서 진실과 출구를 도저히 찾을 수 없는 무저갱 깊숙이 빠뜨려 버린다. 절망의 늪에서 헤어나오는 방법은 그 바닥까지 내려가서 밑바닥에서 다시 발을 차고 올라오는 것이라고 하던가? 그레이스 역시 그렇게 된다. 모든 것을 잃게 된 그 순간, 홀연히 자신이 정말 알았어야 할 진실, 보았어야 할 사람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레이스에게 공포와 불안 속에서 좌충우돌했던 무저갱은 한 마디로 통과의례와 같은 것이었다. 그레이스는 이제야 진짜 삶을 영위할 수 있게 되었고 비로소 자신의 이름대로 그레이스, 즉 축복을 받은 것이다.


 [사람의 삶이 가진 경계란 이렇게 낮고 연약할지 모른다. 외형의 경계 안에서 움츠린 채로 자기 보호에 급급하기 보다는 오히려 상처를 직시하고 그 진실과 책임을 겸허하게 인정하는 것이 진정으로 자신을 보호할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줄 것이라는 걸 말하는 게 아닐까 생각되는 원서의 표지(너무 확대 해석인 지도^^;).]


 많은 미스터리들은 우리 역시 삶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이런저런 문제들을 다룬다. 할런 코벤의 미스터리가 다른 미스터리들과 다른 점이 있다고 한다면, 다른 미스터리들은 그 문제의 원인을 찾기 위한 탐색의 시선을 바깥 세계로 돌리지만, 코벤의 미스터리는 탐침을 자기 내부로 향하게 한다는 데 있다. 고뇌와 불안을 가져오는 문제가 있을 때, 코벤이 독자들에게 바라는 것은 연어가 되라는 것이다. 바깥 탓을 하려는 것들에게 현혹되지 말고 근원으로 열심히 회귀하는 연어처럼 자기 내부로 거듭해서 깊이 깊이 들어가라고 그는 조언한다. 이는 '단 한 번의 시선'에 나오는, 또 한 명의 가정 주부 샬레인 스웨인이 너무나 잘 보여준다. 그녀는 권태와 우울에 빠져 있었다. 열정적인 사랑으로 하나가 되었던 남편과는 이미 오래전에 몸과 마음 모두 멀어졌고 현재의 늙고 초라한 모습과는 너무나 멀었던 과거 화려한 모습에 대한 미련만 곱씹으며 그러느라 더욱 비대해진 우울 속에서 무의미한 나날만 보내고 있었다. 처음 그녀는 그런 비참과 우울의 나날 속에서 자신을 건져내 줄 무언가를 오직 바깥에서 찾았다. 바로 옆집의 한 남자. 하지만 그것은 결코 구원이 되지 못했고 오히려 남편 목숨만 위험하게 만들 뿐이었다. 그러나 불현듯 그녀가 참여하게 된 미스터리(옆집 남자를 훔쳐보다 그녀가 발견한 미스터리는 그야말로 미스터리하게 진행된다.)는 결국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누구이며, 자신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를 알게 만든다. 그것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적극적으로 미스터리 속에 감춰진 진실을 알려고 하고 거기에 따르는 자신의 책임마저 다한 결과였다. 바로 이러한 샬레인 스웨인의 경로가 할런 코벤의 미스터리가 독자에게 주고자 하는 것의 원형이라고 생각된다. 자신을 두렵게 만드는 진실이라 할지라도 외면하지 말고 정직하게 직시하며 책임져야 할 것은 기꺼이 책임지는 태도. 샬레인 스웨인은 바로 그것을 나타내며 결국 소설에서 그럴 수 없는 이들은 모두 파멸했다. 이것은 또한 모든 것의 배후에 있는 범인과 얼마나 정반대의 모습인가? 회피와 무시로만 일관하는 것은 더 큰 비극만 부를 뿐이라는 것을 이 인물만큼 명확하게 보여주는 이가 또 있을까 싶다. 아, 하나 있긴 있구나. 우리나라의 박근혜, 최순실, 김기춘, 우병우 일당. 그들이 구속되면 할런 코벤의 이 소설이나 사식으로 넣어줘야겠다. 아니, 다시 생각해 보니 그런 돈조차 쓰기 아까운 존재들이다. 어차피 넣어줘도 안 읽을 것 같다. 그들 중 둘은 드라마만 열심히 본다고 들었던 것 같으니. 여하튼, '단 한 번의 시선'은 독특한 미스터리 세계를 선보이는 할런 코벤의, 그런 미스터리의  결정체라는 점에서 꼭 한 번 만나보시라고 권해드리고 싶다. 미스터리가 내적으로 깊어지면 어떤 형상이 되는지 잘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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셜록 : 크로니클 셜록 시리즈
스티브 트라이브 엮음, 하현길 옮김 / 비채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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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쩌면 난 '셜로키언'이라 할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시즌이 거듭될 때마다 더 높은 기대와 더 커다란 반향을 일으키는 드라마 '셜록'을 처음 보게 되었던 것은 '셜록 홈즈'가 나와서가 아니라 각본을 쓰고 드라마를 제작한 '스티븐 모팻' 때문이었으니까. 나는 모팻을 '닥터 후'를 통해 처음 만났고 'BLINK'를 비롯하여 그가 쓴 에피소드들을 아주 좋아했다. 그래서 그가 부활의 아이디어를 내고 각본을 썼다고 하니 드마라가 보고 싶었다. 셜록에 대해선 기대가 별로 없었다. 가이 리치가 감독한 '셜록' 영화들이 잘 보여줬듯이, 이미 셜록에겐 날 혹하게 만들 새로운 매력들이 다 고갈되었다고 생각했다. 셜록을 좋아하는 이들은 누구라도 한 번쯤 이런 꿈을 가져봤을 것이다. 셜록으로 나만의 스토리를 만들어보고 싶다는 꿈. 스티븐 모팻도 그런 사람들 중 하나였다. 그는 오랜 셜록의 팬이었고 특히 30~40년대에 만들어진 영화판 셜록들을 대단히 좋아했다. 친구 중에 이와 똑같은 사람이 하나 있었다. 그가 바로 드라마에선 셜록의 형으로 출연하는 마크 게이티스였다. 친한 친구였던 둘은 우정을 나눈지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같이 기차를 타고가다 우연히 그 사실을 알게 된다.


  사진의 주인공은 드라마 '셜록'의 공동 제작자 마크 게이티스와 스티븐 모팻. 제작 현장에서 셜록의 상징인 헌터 캡과 해포석 파이프를 물고 셜록에 대한 팬심을 드러내고 있다. 그런데 지금은 굳건한 홈즈의 상징이 되다시피 한 이 헌터 캡과 해포석 파이프는 원래 원작에는 없던 것이라 한다. 헌터 캡은 처음 삽화를 그렸던 시드니 에드워드 패짓이 그냥 그려 넣은 것이고, 해포석 파이프는 윌리엄 질렛이라는 미국인 배우가 한 연극에서 셜록 역을 맡았을 때 처음 썼던 것이라 한다. 책이 밝혀주고 있는 바와 같이 우리가 생각하는 홈즈의 모습은 알고 보면 많은 세월에 걸쳐 다양한 경로로 이뤄졌다. 새삼 홈즈가 활자를 넘어 종합적인 문화 현상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는다.


 열심히 셜록과 그 영화들에 대한 애정을 고백하던 그들은 셜록이 현대화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누군가 그 일을 해 줄 사람이 없을까 얘기를 나누게 된다. 그러다 결국 그들은 자신들이야말로 셜록 현대화의 적임자이며 바로 자신들의 손으로 그것을 이룰 작정을 한다. 어쩌면 21세기의 대표 드라마 중 하나가 될 지도 모를 '셜록'은 그렇게 아주 우연한 잡담에서 비롯되었다.


 나는 이 사실을 '셜록 시즌 4'가 방영되기 전에 공개 되었던 특별판 에피소드 '유령신부'의 국내 상영에 맞춰 발간되었던 책, '셜록 : 크로니클'을 읽고 알게 되었다. '셜록 : 크로니클'은 한 마디로 드라마 셜록에 대한 모든 것이 담겨 있는 책이다.



 시즌 3까지 방영된 드라마 셜록에 대해 궁금한 것은 뭐든지 바로 이 책을 통해 풀 수 있을 것이다. 이 이야기가 어떻게 시작되었고, 배우 캐스팅은 어떻게 이뤄졌으며 각 에피소드들은 어떻게 구상 되었고 그 장면들은 어디서 찍었으며 또 어떻게 찍었는지 그리고 드라마 속 이야기와 원작은 또 어떻게 차이가 나며 왜 그렇게 만들었는지 등등. 드라마를 보면서 품었던 아주 작은 의문조차 이 책은 기꺼이 대답을 들려줄 것이다. 드라마의 공동 기획자, 마크 게이티스가 이 책의 서문에서 한 말 그대로다.


 '이 책에서 여러분은 우리가 셜록을 창안해내고 베이커 가의 사내들을 21세기로 데려온 과정들을 세세하게 만나게 될 것입니다. 전세계 시청자들의 주목과 충성심과 사랑을 불러일으키고 주인공들을 슈퍼스타로 만든 시리즈를 제작한다는 게 힘들지만 얼마나 흥분되고 황홀하던지... 이것은 모험에 관한, 충성심에 관한, 피할 수 없는 위험에 관한, 머리 염색과 커다란 코트와 로맨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 무엇보다도 스티븐과 내가 그랬던 것마큼이나 셜록과 존을 사랑하게 되는, 헌신적인 전문가들로 이루어진 팀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드라마를 만들 때 그들에게 가장 많은 영감을 준 것은, 빌리 와일더 감독이 1970년에 만든 영화 '셜록 홈즈의 사생활'이라고 한다.



 그 영화는 처음으로 셜록의 형인 '마이크로프트'라는 인물을 창조했고 영국 정부에서 막강한 권력을 가진 존재라는 것도 이 영화에서 처음 등장한 설정이었다. 드라마에 나오는 '마이크로프트', 그대로인 것이다. 이렇게 그들 스스로 고백하듯이 이 영화의 많은 것이 드라마에 직접 인용(p. 20)되었다. 특별판 '유령신부'에서 디오게네스 클럽의 집사 이름이 '와일드'인 것은 아마도 그 영향에 대한 감사 표시 같은 것이 아닐까 싶다. 위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디오게네스 클럽' 자체도 그 영화에서 처음 등장했다. 내 생각엔 '유령 신부' 자체가 영감의 원천이 된 '셜록 홈즈의 사생활'에 대한 오마쥬로 생각 된다.


 그런데 그토록 이 영화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던 것은 그 영화가 미스터리가 아니라 바로 '탐정'에 대한 이야기였고, 무엇보다 탐정을 둘러싼 사람들과의 '관계'를 다루었기 때문이었다. 모리어티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모팻과 마크가 드라마 셜록에게 원했던 것도 바로 그것이었다. 단순히 뛰어난 추리 기계로써의 셜록이 아니라 피와 살이 있고 희노애락을 겪는 실존적인 존재으로서의 셜록을 그려내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특히 '왓슨'에게 많은 주의를 기울였다. 그들은 왓슨을 그저 조수나 셜록의 뛰어난 추리에 감탄하는 관객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모팻과 마크에게 왓슨은 엄연히 셜록과 '공동 주연'이었다. 그래서 셜록 이상으로 왓슨 캐릭터를 창조하는데 공을 들였다.


 마크는 존 왓슨을 공동 주연으로 만들기 위한 또 다른 중대한 전략이 있었음을 시사한다. "우리의 프로젝트에서 막대한 부분을 차지하는 작업이었습니다. 프로그램은 '셜록'이란 이름으로 방영될테지만, 그럼에도 존의 역할을 두드러지게 만드는 게 무척이나 중요했어요."(p. 26)


 드라마 속 왓슨은 그렇게 세심한 작업 속에서 태어난 것이었다. 내가 드라마 셜록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도 왓슨이 셜록 못지않게 커다란 존재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들의 관계가 왠지 드라마 '엑스 파일'의 멀더와 스컬리처럼 보일 정도로 말이다. 책을 읽고나니 그럴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지금 드라마 '셜록'의 인기는 바로 이러한 인간으로서의 셜록, 그리고 관계 안에서 우리처럼 불안하고 혼란스러워 하는 그를 한껏 드러냈기에 가능하지 않았나 싶다. 이렇게 '셜록 : 크로니클'은 드라마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캐릭터와 에피소드 그리고 드라마 전체에 대한 깊은 이해와 다양한 접근을 도와준다. 이런 점까지 더해 드라마 '셜록'에 대한 가장 좋은 가이드가 아닐까 싶다.


 '셜록 : 크로니클'은 지금까지 방영된 시즌 3까지의 에피소드 9개를 커다란 줄기를 하여 그 때 그 때마다 필요한 정보들을 담는 것으로 하고 있다. 각 에피소드마다엔 그것이 어떻게 만들어졌으며 원작과는 어떻게 다른지에 대한 설명이 있고 말미에 각 장면을 찍은 실제 장소를 공개하고 있다.


 시즌 3 마지막 에피소드에서 가장 위험한 적수 중의 하나였던 마구누스가 있던 저택의 모습이다. 최후 결전의 장소이기도 하다. 놀랍게도 실제 있는 건물은 아니며 드라마를 위해 새로 지었다고 한다. 첫 에피소드에서 여인의 시신이 발견되었던 아파트는 실제 있는 건물로, 매물로 나와 있는 아파트를 섭외했다고 한다. 각본대로 멀쩡한 아파트를 부순 다음, 원래 매물이었기에 촬영이 끝난 뒤엔 원상 복구 해 줬다고.

 사진은 바로 그 건물인 '로리스턴 가든스'의 모습. 어떻게 현장을 만들었는지 이렇게 여러 사진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이런 식으로 에피소드 이야기 뒤엔 그것을 실제 촬영한 장소를 다 설명하고 있다. 꽤나 자세하게 말하고 있어 이것을 근거로 영국에 가게 된다면 '드라마 셜록 투어'도 가능할 지경이다. 드라마를 만드는 세트 대부분은 실제 카디스에 있다고 한다. 런던은 물가가 너무 비싸서 촬영에 돈이 많이 든다고.


 책은 드라마 제작 전반에 관한 정보를 거의 다 담고 있다고 해도 좋다. 편집이면, 편집. 음악이면 음악. 다 설명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배스커빌의 개'에선 CG로 만든 개를 사용하기도 했는데, 그것 역시 어떻게 제작되었는지 설명하고 있다. 이것 외에, '하운드'의 뜻을 알게 되는 연구실 학자 사진을 찍었는지 하는 것등, 에피소드의 아주 사소한 소품들까지 다 말해주고 있어 드라마를 보다 풍성하게 이해하도록 만든다.



 드라마 셜록 사상 가장 충격적인 장면이었던 시즌 2의 마지막 에피소드 '라이엔바흐 폭포'에서 셜록이 빌딩 옥상에서 뛰어내리는 장면 같은 것은 실제 콘티까지 삽입하여 이해를 돕는다.



 이밖에 드라마 셜록의 시그니처 장면이라고 할 수 있는 화면 위로 지나가는 글자와 같은 정보들도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설명하고 있다. 원래 계획은 휴대폰에 나온 문자들을 클로즈 업 하는 것이었다고 하는데, 연출을 맡은 폴 맥기건 감독이 그런 건 시청자들을 너무 지루하게 만들 뿐이니 도저히 그렇게 찍을 수 없다고 하면서 그 정보들을 아예 셜록의 뇌리 속에서 일어나는 것처럼 화면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이게 실로 혜안이었다는 것은 드라마를 보면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셜록:크로니클'를 봐야 할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면 바로 이 삭제 장면이 아닐까 싶다. 각 에피소드마다 삭제되었던 장면들을 이렇게 따로 분량을 할애하여 보여주고 있다.



 주요 배역들을 맡은 배우들에 대한 상세한 소개도 있다. 사진은 드라마에서 셜록을 짝사랑 하는 법의학자로 나왔던 루이즈 브릴리.


시즌 3의 마지막 에피소드 '마지막 서약'에서 왓슨이 병원에서 사라진 셜록을 찾고 있을 때, 그녀는 주소 하나를 말하며 거기에 비밀 숙소가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곳은 바로 그녀의 집. 셜록에게 언제든 자신의 침대를 쓸 수 있다고 말한 것을 털어놓는 그녀가 귀여웠다^^



 '셜록 : 크로니클'은 마지막까지 긴장을 늦추도록 하지 않는다. '감사의 말' 옆에 이렇게 스티커가 있으니까 말이다. 어릴 때 이렇게 책 뒤에 스티커가 있으면 바로 뜯어 가방이나 공책 곳곳에 붙이기도 했는데, 이제 나이가 들고 보니 얼른 어디에 붙여야 할 지 모르겠다. 하하. 그래도 어쨌든 스티커가 있으니 좋다^^


 이렇게 '셜록 : 크로니클'은 그야말로 '기억의 궁전'이라 할 만하다. 셜록은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마음 속 '기억의 궁전'에다 저장한다. 그와 똑같이 '셜록 : 크로니클'은 드라마 '셜록'에 대한 모든 것을 빠짐 없이 차곡차곡 다 저장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아마도 드라마 '셜록'에 대해서라면 가장 충실한 가이드가 아닐까 싶다.



 그럼, 이제 셜록이 시즌 4로 모처럼 돌아왔기도 하니, '셜록 : 크로니클'과 함께 다시 한 번 드라마 셜록의 세계로 풍덩 빠져보는 것은 어떨까? 아는만큼 보인다는 말도 있듯, 드라마의 모든 것이 완전히 새롭게 다가올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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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혜윰 2017-02-08 09: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황금가지에서 이번에 130주년 기념판 나왔대서 사려구요. 셜록은 애 키우느라 1도 못봄요 ㅠㅠ

ICE-9 2017-02-15 00:54   좋아요 0 | URL
아, 저도 그 130주년 판 봤습니다. 이미 셜록 전집을 두 개나 가지고 있지만 또 소장하고픈 욕구가 무럭무럭 생기더군요ㅠ ㅠ. 아니, 아직 셜록 드라마를 못 보셨다니, 육아에서 여유가 생기시면 꼭 보시라고 추천드리고 싶네요. 저는 시즌4 에피소드2까지 봤는데, 세 네번 생각해도 버릴만한 에피소드가 하나도 없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