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죄의 소나타 미코시바 레이지 변호사 시리즈 1
나카야마 시치리 지음, 권영주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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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갑자기 잇달아 그의 책이 발간되는 바람에 더욱 그 이름을 뇌리에 새겨두게 된 일본 작가, 나카야마 시치리의 '속죄의 소나타'를 읽었습니다.

 몇 년 전에 '살인마 잭의 고백'을 통해 한 번 만나 본 적이 있는 작가입니다. 세 가지 점에서 감탄한 바 있습니다. 독특한 설정을 이야기로 잘 풀어낸다는 것과 플롯을 참 잘 짠다는 것 그리고 이야기를 굉장히 흡인력 있게 끌고 나가는 것. 간단히 말하면, 참신함과 대중성을 고루 갖추었다고나 할까요? 그래서인지 그의 소설 중 많은 작품이 일본에서 드라마로 만들어졌더군요. 그의 이름을 가장 먼저 알린 '안녕, 드뷔시'가 그렇고 우라와 의대 법의학 교실 시리즈로 나온 '히포크라테스의 선서'가 그러하며 이번에 나온 '속죄의 소나타'도 드라마로 제작되었습니다. 최근 그의 소설이 다시금 이렇게 주루룩 나오게 된 것은 분명 2016에 '안녕 드뷔시'와  '히포크라테스의 선서'가 드라마로 만들어졌기 때문일 겁니다. '속죄의 소나타'는 그 보다 전인 2015년에 드라마로 방영되었죠. 읽은 게 '속죄의 소나타' 외에 '살인마 잭의 고백'밖엔 없기 때문에 작가에 대해 아직은 뭐라고 말하기가 어렵네요. 다만 '참신성'과 '대중성'만큼은 그의 분명한 '트레이드 마크'란 것을 확인했습니다.


 네, '속죄의 소나타'도 '살인마 잭의 고백'처럼 독특한 설정을 가집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미코시바 레이지라고 변호사인데, 수임료만 많이 주면 도덕적으로 비난을 받는 이도 변호해 동종 업계에서 아주 악명이 높습니다. 드라마 '리갈 하이'에 나오는, 사카이 마코토가 분한 왕재수 변호사 코미카도 켄스케를 떠올려 보시면 미코시바 레이지 이미지와 얼추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물론 악덕 변호사가 주인공이라고 해서 이 소설이 참신한 설정이라는 건 아니에요. 그런 건 앞서 말한 '리갈 하이'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다음 것은 정말 다른 데서 보도 듣도 못한 설정입니다. 미코시바 레이지가 실은 살인자였거든요. 그것도 중학생 때 말이죠. 그냥 죽이고 싶어서 5세의 여자 아이를 죽였습니다. 그러고서도 그게 잘못이라는 걸 전혀 몰랐죠. 네, 그는 전형적인 '소시오패스'였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바로 이런 궁금증이 드시겠죠? 아니, 그런 살인자가 어떻게 변호사가 되었단 말이야? 거기에 대해 이 소설의 등장인물이기도 한 라이야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사법고시는 말이지, 인격은 상관없어. 어때, 재미있지 않냐? 곤경에 처한 사람 돕는 일일 텐데 인간성은 고려하지 않는다 이 말이야. 나처럼 세상 사람들한테 악마라느니 인간이 아니라느니 그런 소리를 들어도 시험 성적만 좋으면 변호사 배지를 받을 수 있는 거다. 일본은 참 좋은 나라라니까."(p. 215)


 솔직히 전 이 문장 하나만으로 이 작품이 단번에 좋아져버렸습니다. 라이야 말이 맞습니다. 사법고시에 인격은 필요없죠. 그런 의미에서 우리나라도 참 좋은 나라입니다. 인간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사법고시 때문에 우병우도 나왔고, 양승태, 홍만표, 이인규를 지금도 여전히 볼 수 있는 수많은 사법 적폐들이 출몰할 수 있었으니까요. 그러니 소시오패스 살인마 출신이 변호사 되지 말란 법도 없죠, 뭐. 소설은 그런 미코시바 레이지가 어떤 남자를 죽이고 시체를 처리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아무런 인간적인 감정 개입 없이 철저하게 자신에게 혐의가 오지 않도록 계산적으로 움직이는 그의 모습을 보노라면 역시 사법고시의 은총을 받아 변호사가 된 괴물이구나 하는 생각밖에 들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작가는 '속죄의 소나타'란 제목을 붙였던 걸까요?


 읽어보면 아시겠지만, 이 제목은 결코 비유가 아닙니다. 정말 '속죄'의 이야기이고, 그런 속죄로 나아가는데 커다란 역할을 한 것이 '소나타' 입니다. 여기에 관한 이야기는 직접 읽으면서 느껴보는 게 가장 좋다고 생각되기에 다른 설명은 하지 않겠습니다.


 각설하고, 다시 미코시바 레이지의 이야기로 돌아가겠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공들여 처리한 시체가 어떤 자연적인 조건의 개입으로 레이지의 예상보다 일찍 발견되어 버립니다. 시신의 신원이 남의 약점을 잡아 그걸로 돈을 뜯어내는 것으로 유명한 잡지 기자 가가야로 밝혀지자 노련한 형사 와타세와 파트너 고테가와는 살인이 그것과 관련되었을 것이라 생각하고 그가 최근 찾았던 '도조 제재소'를 방문합니다. 당시 도조 제재소는 사회적으로 꽤 유명한 곳이었는데, 왜냐하면 원래 이 제재소를 경영하고 있던 소이치로라는 남자가 사고를 당하여 뇌사에 빠졌는데 아내가 안락사를 시켰기 때문입니다. 일본이 아직 안락사를 범죄로 보고 있었기 때문에 이 사건으로 안락사에 대한 논쟁이 뜨겁게 일어난 것이죠. 그런데 그런데 나중에 소이치로의 죽음으로 굉장한 액수의 사망 보험금이 나오는 것으로 밝혀지자 검찰은 아내가 힘들어서가 아니라 보험금을 노리고 살인했을 것이라 보고 살인죄로 기소합니다.


 당시 재재소는 경영난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그 아내는 국선 변호사를 선임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 국선 변호사가 바로 하필이면 '미코시바 레이지' 였습니다. 와타세 형사 일생이 도조 제재소를 찾아 가보니 지금은 소이치로 부부의 유일한 아들, 미키야가 경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남자, 움직일 수 있는 것은 겨우 왼손 뿐인 장애인입니다. 그 자리에 나온 미코시바 레이지를 보고 바로 예전의 '중학생 살인마'라는 걸 안 와타세는 가가야가 레이지를 협박하러 왔다가 살해되었을 것으로 추리합니다. 레이지는 와타세 형사가 굉장히 노련하다는 것을 직감하고 본능적으로 위기가 왔다는 것을 알아차립니다. 과연 레이지는 이 위기를 잘 넘길 수 있을까요? 그리고 레이지는 왜 돈이 전혀 안 되는 소이치로 안락사 사건을 맡게 된 것일까요? 레이지는 아내가 소이치로를 죽이지 않았다고 생각하는데 그렇다면 소이치로 죽음의 진실은 무엇이었을까요? 또 잡지 기자 가가야는 무엇 때문에 살해된 것일까요? 와타세의 추리는 맞는 걸까요? 이런 이야기 그 어디에도 속죄와 관련된 흔적은 찾아보기 어려운데, 제목은 어쩌자고 속죄의 소나타가 된 것일까요?


 아마도 읽다보면 저처럼 이런 많은 의문이 들 것입니다. 이 모든 의문은 3부를 지나 놀라운 반전과 함께 모두 해결됩니다. 특히나 3부에서 일어나는 변화가 너무 급작스럽기에 여기서 부자연스러움을 느끼실 분들도 있을 것 같아요. 그것만 슬쩍 눈 감아준다면 이 소설은 꽤 재밌게 다가오지 않을까 합니다. 뭣보다 4부에서 밝혀지는 반전이 꽤나 흥미진진하거든요.


 작가가 직접 밝히지 않았기에 조심스럽지만, 미코시바 레이지는 아마도 실존했었던 인물을 모델로 하고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바로 '고베아동연쇄살인사건'으로 유명한 '아즈마 신이치로' 입니다. 모두 3명의 초등학생을 살인한 범인이 14세의 중학생으로 밝혀져 일본 열도를 그야말로 충격으로 뒤흔들게 만들었죠. 레이지는 뚜렷한 살인 동기가 없는데 형사가 자꾸 이유를 닦달하자 할 수 없이 즐겨 본 호러 영화 때문이라고 대답하는데, 이 역시 아즈마 신이치로가 했던 대답이기도 합니다. 그는 미성년자였기에 소년원에 수감되었는데, 레이지도 똑같은 과정을 밟습니다. 때문에 분명 아즈마 신이치로가 미코시바 레이지의 모델이 되었을 것 같구요, 그 아즈마 신이치로가 변호사가 되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에서 이 소설이 나왔으리라 전 생각되네요. 물론 아즈마 신이치로의 범행은 레이지의 것보다 훨씬 더 엽기적이었지만.


 이런 점 때문에 더 재밌게 읽은 듯 합니다. 참신한 설정과 법정 미스터리 그리고 반전이 주는 산뜻한 맛을 좋아하신다면, '속죄의 소나타'를 한 번 만나보셔도 좋을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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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7-12-29 0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기억이 확실한지 모르겠지만 야쿠마루 가쿠 소설 《천사의 나이프》에도 어렸을 때 사람을 죽인 사람이 변호사로 나왔어요 오래전에 읽어서 아닐지도 모르겠지만 한번 본 것 같아요 소년법을 이야기하는 거였어요 거기에서 변호사가 된 사람도 어렸을 때여서 그 일은 드러나지 않았죠 변호사만 인격을 보지 않는 건 아니죠 인격을 갖춰야 하는 일 모두 보지 않죠 그 일을 하다 달라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잖아요

어떤 반전이 있을까 싶네요


희선
 
달의 영휴
사토 쇼고 지음, 서혜영 옮김 / 해냄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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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상 이야기'로 이미 그의 이름을 우리나라에 한 번 알린 적이 있는 사토 쇼고의 소설이자 157회 나오키 수장작이기도 한  '달의 영휴'는 환생에 대한 것입니다.

 줄거리 소개부터 바로 들어갈게요. 이야기는 오래 전에 아내와 딸을 교통사고로 한꺼번에 잃고 혼자 살고 있는 오사나이 쓰요시가 예전 딸의 친구이기도 한 여인과 그녀의 딸을 카페에서 만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딸의 친구라지만 장례식 때 말고는 지금까지 만난 적이 없었던 이 여인이 갑자기 연락을 해 와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녀의, 아주 어린 딸이 쓰요시를 아주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이야기합니다. 이제 처음 보는 사이인데도 말이죠. 나중에 밝혀지는 사실은 쓰요시에게 더욱 충격적인 일입니다. 죽은 딸의 친구인 엄마의 딸이 바로 자신의 죽은 딸이 환생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름도 딸의 이름과 똑같은 '루리'라고. 그러나 쓰요시에겐 마냥 허무맹랑하게 들리지 않습니다. 과거에 자신에게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한 이가 또 있었습니다. 바로 지금은 죽고 없는 아내가 쓰요시에게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루리가 심한 고열을 잃고 죽을 고비를 간신히 넘긴 다음이었습니다. 어느 날 아내가 쓰요시에게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아무래도 루리가 다른 존재가 환생한 것 같다고. 단 한 번도 들려주지 않은 말을 하고 노래를 부르며 또 어떤 남자를 찾아가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고.


 그러나 눈에 보이는 것만 믿는 쓰요시는 그런 아내의 말을 묵살해 버립니다. 초등학생인 된 루리가 기억 속의 남자를 만나겠다면서 가출까지 했지만 그냥 덮으려고만 합니다. 그런데 지금 그런 자신의 무시와 방관이 어쩌면 커다란 잘못이고 사실 딸과 아내의 죽음 역시 어느 정도는 자신에게 책임이 있는 게 아닌가 하는 계기를 만난 것입니다. 때문에 쓰요시는 딸이 환생했다는 그 어린 '루리' 또한 받아들이지 않으려 합니다. 그러나 이미 실체로 출현한 '루리' 앞에서 그런 저항은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오직 단 하나만 가능할 뿐입니다. 자신이 다 안다고 생각했던 현실이 실은 보잘 것 없는 크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고 그토록 오만했던 자신을 자책하면서 닥쳐오는 변화를 받아들이는 것.



 '달의 영휴'는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서로 다른 색깔을 취하는 카멜레온 같은 소설입니다.

 어떤 분들은 이 소설을 환생을 거듭해서라도 이루지 못했던 사랑을 이루려 하는 아주 애달픈 사랑 이야기로 읽힐 것입니다. 사실 그런 성격이 강합니다. 작가는 이 소설을 주로 세 개의 가지로 엮어 풀어나가고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루리의 원본이 되는 여인이 미사미란 연하의 남자와 연애를 하는 이야기이니까요. 그러나 루리가 아니라 저처럼 쓰요시에 주목한다면 이 소설은 전혀 다른 이야기로 읽힙니다. 사실 저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이 점이 정말 궁금했습니다. 왜 환생을 잘 믿지 않으며 지속적으로 거부하는 쓰요시로 이야기를 시작하고 소설의 주된 인물로 삼았는지 말이죠. 저는 이것이 환생을 다룬 소설로선 아주 독특한 시점이라 여겨졌습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나온 대부분의 환생을 다룬 작품들을 생각해 보시면 납득되지 않을까 합니다. 그동안 환생을 다룬 작품들 하면 저는 얼른 일본 애니메이션 '나의 지구를 지켜줘'와 우리나라 영화 '번지점프를 하다'가 떠오르는데요, 그 두 작품 모두 '환생'의 주체 이거나 '번지 점프를 하다'처럼 환생 하기 전의 연인과 같이 환생하는 존재의 직접적인 상대방이었습니다. 아, 그리고 또 요번에 '오리엔트 특급 살인' 영화를 감독한 케네스 브래너가 주연 감독한 영화  '환생'도 있다는 게 생각나네요. 그 영화 역시 환생한 주체들이 주인공이었습니다. 이렇게 환생을 다룬 많은 작품들이 환생한 주체이거나 직접적인 상대방 범위를 잘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소설은 제 3자 인데다 한결같이 환생을 거부하는 자인 것입니다. 사실 '환생' 장르에 어울리는 주인공은 루리가 사랑한 연하남 미사미일 것입니다. 이 소설엔 그런 루리를 괴롭혔던 남편도 등장하는데, 이 남자를 악역으로 삼으면 그동안 나온 '환생 장르 공식에 딱 맞아 떨어질 것 같습니다. 하지만 사토 쇼고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미사미와 원래 루리의 남편 모두 쓰요시 보다 비중이 적은 조연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사실 이 소설의 진짜 주인공은 '쓰요시'입니다. 저는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의문이 더욱 커지는 것입니다. 왜 제 3자인데다 환생을 부정하는 쓰요시가 주인공인 것일까?

 그런데 이런 쓰요시의 모습에서 뭔가 기시감이 느껴지진 않습니까? 현실은 계속 '네 생각을 바꿔, 이제 네가 변화해야 할 차례야!'라고 강권하는데, 땅바닥에 얼굴을 쳐박은 타조처럼 보이지 않는 척을 하면서 오로지 지금의 현실과 자신의 주관만을 고집하려 억지를 부리는 모습에서 저는 얼른 후쿠시마 원전 사태 이후의 일본 정부 모습이 떠오르는군요. 그 때의 아베 정권은 정말 쓰요시와 같았습니다. 후쿠시마 원전 사태는 환생한 루리처럼 지금까지 아베 정권이 했던 것과 하고자 하는 일에 대한 자성과 중대한 변화가 필요하다는 신호였지만 그들을 그것을 쓰요시처럼 깨끗이 묵살했습니다. 현실은 계속 지금 잘못 나가고 있다고 알렸지만 밖으로 열린 귀를 모두 닫고 자기 합리화에만 빠져 있는 일본에게 전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아내와 딸을 모두 잃은 쓰요시처럼 재생의 기회를 날려버렸습니다. 이건 지금의 일본인 후쿠시마 원전 사태 이후로 점점 더 최악이 되고 있다는 것에서 여실히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죠. 아마도 이런 까닭으로 저는 사토 쇼고가 하필이면 쓰요시를 주인공으로 쓴 것 같습니다. 쓰요시처럼 아주 어리석은 행보를 보여 온 일본 정부와 그것을 지지한 일본 국민에 대한 섬뜩한 경고를 날리기 위해서 말이죠. 너무 나간 해석일까요? 하지만 전 그렇게 생각되지 않습니다. 바로 마지막 장면 때문이죠. 반전이기에 자세히 말하진 않겠습니다만 거기서 루리는 쓰요시에겐 아주 중요할 사실 하나를 말해줍니다. 그리고 그 사실은 이미 쓰요시 주변에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변하지 않은 자신의 눈으로는 전혀 볼 수 없었던 것이었죠. 그러나 이제 그것이 보이게 된 것입니다. '환생'에 대하여 마음을 열어 자신을 변화시켰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소설엔 이런 쓰요시와 비슷한 인물이 하나 더 나옵니다. 바로 원래 루리의 남편입니다 그 역시 쓰요시처럼 오직 눈에 보이는 현실만이 전부라고 여기면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그것이 루리의 영혼을 질식하게 만들었죠. 그녀가 미사미를 사랑하게 된 것은 일종의 숨통 같은 것이었습니다. 루리는 우연히 찾아온 미사미를 자신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계기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런 루리가 죽음마저 초월한다는 점에서 사토 쇼고가 쓰요시와 루리 남편의 의미를 이 소설에서 어떻게 쓰고 있는지 한층 더 명확하게 드러나는 것 같네요.


 사토 쇼고가 이런 전개를 취한 까닭에 대해서 달리 뭐라 설명할 수 있을까요?

 변하지 않으면 아주 가까이 와 있는 희망조차 보지 못한다고 이리도 선명하게 알리고 있는데. 

 '달의 영휴(盈虧)'란 달이 차고 이지러지는 걸 뜻한다고 합니다. 소설이 이것을 제목으로 한 것은 영휴하는 달처럼 사람의 삶과 죽음도 연속된다는 걸 나타내기 위해서겠죠. 그것이 바로 '환생'이기도 하구요.  그러나 제가 보기엔 한 가지 의미가 더 있는 것 같습니다. 바로 '영휴' 그대로 한없이 변하는 달의 모습입니다. 지구에서 보이는 달의 모습엔 항구적인 것이 없습니다. 부단히 변합니다. 바로 그런 일본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작가의 기원이 스민 제목이기도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내내 자폐(自閉)로만 치닫고 있는 일본 속에서 국민들의 영혼이 모조리 질식하기 전에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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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터의 요리사들
후카미도리 노와키 지음, 권영주 옮김 / arte(아르테)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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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에서 먹는 것은 정말 중요한 일입니다. 싸우는 일이야 말로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니 잘 싸워서 전쟁에 승리토록 하려면 잘 먹여야 할테니까요. 그래서 옛날 전쟁에 대한 책을 읽어보면 언제나 장군을 괴롭히는 가장 커다란 문제는 보급로를 어떻게 적군으로부터 잘 지킬 것인가였죠. 현명한 장군은 적의 본진을 치는 것이 아니라 일단 보급로부터 끊어놓고 전투를 시작했구요. 당나라와 고구려가 혈전을 벌인 안시성 전투에서 보듯, 아무리 강한 군대라 해도 보급이 일단 끊기면 추풍낙엽이 되어 쓸려가는 것은 뻔한 운명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허다하게 만들어진 전쟁을 소재로 한 작품에서 이런 먹거리에 대한 것은 쉽게 무시되어 왔던 것 같습니다. 전쟁은 언제나 전투가 중심일 뿐, 그들이 뭘 어떻게 먹었나 하는 것은 그리 잘 나오지 않았죠. 그래서 이 소설이 더욱 제 눈에 들어왔던 것 같습니다. 후키미도리 노와키의 '전쟁터의 요리사들'이란 소설이 말이죠. 놀랍게도 이 소설은 제목 그대로 그토록 많은 전쟁 관련 작품에서 여지껏 단 한 번도 다뤄지지 않았던 취사병이 주인공으로 나오고 있었거든요. 그것도 노르망디 상륙 이후의 2차 세계 대전을 배경으로 해서 말이죠.



 이야기는 노르망디 상륙 작전이 있었던 1944년에 열 아홉살이던 에드워드 그린버그를 중심으로 시작합니다. 인생을 사는 낙이 먹는 것인 그는 열 일곱의 나이가 가지기 쉬운 영웅심과 모험심 때문에 군대에 지원합니다. 그러나 훈련 받던 도중 아무래도 군인이 자기 적성에 맞지 않다고 깨달은 그는 어느날 문득 조리병 모집 공고를 보고는 요리 잘하는 할머니 밑에서 내내 레시피를 자장가 삼아 들으며 자랐던 그에게 조리병은 적성에 맞지 않을까 생각하고 거기에 응모, 결국 조리병이 됩니다. 그러나 곧 후회하고 맙니다. 군대 내에서 조리병의 평가가 그리 좋지 못했기 때문이죠. 군인들에게 조리병은 흔히 '낙오자'로 취급되었습니다. 그러다 드디어 1944년. 미 육군 제101 공수사단에 배속된 그는 노르망디로 떠나게 됩니다. 본격적인 이야기는 노르망디 상륙 작전이 성공한 후에 전개됩니다. 바다가 아니라 낙하산으로 공중에서 강하하여 도착한 프랑스의 이즈빌 마을부터 시작하여 카랑탕을 지나선 연합군의 뼈아픈 실책이 된 마켓 가든 작전 수행 도중인 네델란드의 에인트호벤을 거쳐 미 육균 제101 공수사단의 가장 어려운 전투이기도 했던 아르덴에서 정점을 찍고 드디어 독일에 입성, 소설 속 최후의 거점인 쾰른에 이르기까지의 대장정이 주요 주둔지를 중심으로 모두 5장에 걸쳐 진행됩니다.




  각 장마다 그린버그가 소속된 취사 부대의 조리병 일행들이 낙하산이라든가 달걀 분말가루 등 전쟁이 아니었다면 잘 만날 수 없는 소재로 이루어진 미스터리를 마주하며 과거가 불분명한 '에드'라는 조리병이 탐정이 되고 그린버그가 왓슨이 되어 그것을 해결합니다. 모든 이야기들이 실제 전쟁 상황과 유기적으로 잘 연결되어 있어 아주 실감나게 읽혔습니다. 작가가 자료 조사를 정말 많이 했는지 후방 부대에 있는 병사들의 일상이라든가 조리병들의 주로 했던 일이나 요리하며 부대 내 인종차별 문제 등 다른 데서 잘 볼 수 없었던 내용까지 두루 있어서 더욱 재밌게 읽었습니다. 한 가지, 라디오에서 밥 딜런의 노래가 나왔다는 부분은 명백한 오류로 흠이었지만요. 밥 딜런은 41년 생으로 44년 당시는 네 살이었죠. 혹시 동명 가수가 있었다면 모르겠습니다만.


 어떤 작품은 독특한 설정만으로 반을 먹고 들어가기도 합니다. 그런 면에서 '전쟁터의 요리사들'은 제게 반은 먹고 들어간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겠네요. 조리병이 주인공이란 사실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탐정이 되어 전쟁이라는 일상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미스터리를 풀어간다는 것 역시 이 책에 대한 제 점수를 50점 부터 시작하게 만든 요소였습니다. 따지고 보면 전쟁이란 지극히 비일상의 시공인데, 거기에 일상 미스터리 장르를 섞었다니 이런 용감한 시도를 했다는 것만으로도 평소 소심한 저는 점수를 주고 싶네요. 그렇지만 시도 했다는 것만으로 점수를 주는 것은 역시 비합리적입니다. 그러나 기꺼이 높은 점수를 주려합니다. 그 시도가 꽤 성공적인 결과물을 만들어내었으니까요. 전쟁터에 어울릴만한 일상 미스터리가 나왔고 그것을 또 설득력있게 풀어갔던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전쟁이 가지고 있는 잔혹함과 비극 역시 놓치지 않았으니. 이건 뭐, 올해 가장 인상적이었던 작품 중 하나라고 말하지 않을 도리가 없네요. 그동안 너무나 비슷한 모습만 보여주는 일본 미스터리에 물리신 분들이라면 이 소설 추천합니다. '전쟁터의 요리사들'은 분명 일본 미스터리의 새로운 맛을 충분히 느끼게 할 겁니다.


 후카미도리 노와키가 일본이 한창 전쟁 가능 국가로 향해 가는 이 시점에서 하필이면 2차 세계 대전을 배경으로 소설을 쓴 이유는 명백합니다. 아베가 지금 획책하는 정책에 반대하기 위해서죠. 이야기와 에필로그마다 세심하게 누벼져 있는 전쟁이 망가뜨리는 평범한 인간의 삶만 봐도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아베의 그런 정책이 좀 더 타오르도록 만드는 연료가 이방인에 대한 차별과 배제에 기반을 둔 자국민 우월주의인데 소설은 거기에 대해서도 분명히 문제라고 지적하고 있지요. 아예 챕터 하나를 거기에 할애해서 말이죠. 다시 말해, '전쟁터의 요리사들'은 동시대에 대한 작가의 우려가 깊이 배인 작품인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이 작품 자체가 꽤 용기 있는 발언이라고 생각하며 그래서 작가를 응원하고 싶네요. 물론 독일이 아니라 일본을 적군으로 삼아 주인공들이 싸우는 이야기를 그렸다면 더 좋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무라카미 하루키가 최근에 나온 '기사단장 죽이기'에서 완전히 묘사한 것도 아니고 겨우 몇 구절로 '난징대학살'을 언급하는 바람에 우익에게서 거센 비난과 공격을 받았던 것을 생각하면 작가로서 결코 쉽지 않을 선택이었을 겁니다. 최근 일본의 분위기가 좀 그렇죠. 그래서 더욱 '전쟁터의 요리사들'을 응원하고 싶네요. 뒤이어 더 많은 용감한 발언들이 나와 일본에서 횡행하고 있는 전쟁과 무력을 향한 무분별한 광기에 찬물을 끼얹게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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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08 09: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1-26 21: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성모
아키요시 리카코 지음, 이연승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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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랜만에 충격이란 말이 결코 아깝지 않은 작품을 하나 만났습니다. 아, 이런 둔중한 충격은 실로 아비코 다케마루의 '살육에 이르는 병' 이후 처음이네요. 놀라운 반전입니다. 예언 하나 할게요. 분명 두 번 읽게 되실 거고 두 번째 읽으실 때는 처음보다 훨씬 더 눈을 크게 뜨고 읽게 되실 겁니다.


 이런 이런, 충격의 여운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탓에 어떤 작품인지 소개도 안 드렸네요. 웬 뜬금없는 소리인가 하셨을 것 같습니다. 그 뜬금없음을 잠재우기 위해 얼른 소개하도록 할게요. 일본 작가 아키요시 리카코의 '성모'란 작품입니다. 조성모의 성모가 아니구요. 흔히 기독교에서 예수의 어머니를 부를 때 쓰는 말인 성스러운 어머니를 뜻하는 성모(聖母)입니다. 그렇다고 기독교 이야기도 아니에요. 미스터리 소설이랍니다. 그것도 4살 짜리 유아가 목이 졸려 살해되고 성기마저 제거된 채 무참히 버려지는 사건이 등장하는, 끔찍하며 엽기적인 소재의 스릴러 소설이라 할 수 있죠.



 그런데 왜 제목이 '성모'냐구요? 주인공이 어머니이기때문 입니다. 

 그녀는 고등학교 때 하도 생리가 오지 않자 검진을 위해 산부인과를 찾았다가 다낭성 난소 증후군에 걸렸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다낭성 난소 증후군에 걸리면 난포가 여러 개 만들어지고 일정 크기까지 자라지만 결코 배란까지 이어지지는 않는다고 하는군요. 네, 아이를 낳기 힘든 몸이었던 겁니다. 그녀는 대학에서 만난 남자와 결혼하는데, 그 남성 또한 외동 아들이라 자손이 귀해 시댁에서 은근히 압박이 들어옵니다. 그녀 역시 어머니가 되는 것을 신성하게 여겼기에 불임 시술도 여러 차례 받고 체외 수정도 시도합니다만 아이는 쉽게 찾아와주지 않습니다. 어렵게 자궁에 안착한 태아조차 두 번이나 유산하고 맙니다. 그토록 험난한 과정을 거쳤으니 간신히 얻게 된 딸 가오루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이겠습니까? 주인공 호나미는 가오루 앞에서 여러 차례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주겠다는 맹세를 합니다.


 그 맹세가 필요했습니다. 왜냐하면 앞서 말한 엽기적이고 끔찍한 유아 살해가 바로 호나미가 사는 동네에서 벌어졌기 때문이죠. 살해 대상이 가오루와 비슷한 나이인지라 호나미의 공포는 더욱 커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경찰이 열심히 수사를 하지만 그렇다고 호나미의 불안이 가셔지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이 기껏 목격한 수상한 남자조차 별 혐의 없다고 풀어주는 경찰을 보면서 호나미는 자신이 직접 범인을 잡아야겠다고 마음 먹습니다.


 이 호나미의 반대편에 마코토란 고등학생이 있습니다. 그는 검도부로 학교에선 1학년인 검도부원들을 가르치는 한편, 봉사의 의미로 학교 밖에서도 아이들에게 검도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예의 바르고 성적도 발군이며 외모 또한 아주 수려한지라 자기 학교 여학생 뿐만 아니라 이웃 학교 여학생에게마저 동경의 시선과 애정 고백을 받는 일이 허다합니다. 마코토의 그런 모습이 소설 초반부터 나오는데, 읽는데 '뭐, 이런 부러운 녀석이 다 있지?' 하는 생각이 절로 들더군요.


 그러나 신은 공평합니다. 모든 게 완벽해 보이는 마코토이지만 그 모든 장점을 아무 소용 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릴 정도로 크고 통제할 수 없는 어둠의 충동을 주었으니까요. 그 충동이 무엇인지는 구태여 설명하지 않아도 문맥상 능히 짐작하시리라 생각합니다. 


 이렇게 소설은 전반부부터 대결 구도를 명확하게 깔아 놓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아이를 지키고자 하는 자, 호나미와 억누를 수 없는 충동 때문에 아이를 없애고자 하는 자, 마코토의 대결 구도인 것이죠. 거기에 살인범을 수사하는 다나자키와 사카구치 혼성 형사 콤비까지 비슷한 분량을 차지하며 끼어들기에 삼파전을 하듯 이야기가 더욱 흥미롭게 전개됩니다. 끝까지 내내 읽게 된다는 말이지요.


 그러다 어느 순간 모든 게 뒤집힙니다. 

 반전이 가져온 격동 속에서 손은 결말이 아니라 앞 페이지를 향해 재빨리 움직입니다. 내가 뭘 착각했고 뭘 놓쳤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이런 종류의 소설은 제법 읽어왔고 그래서 더이상 충격 받을 일도 없다고 자부했는데, 웬걸 그 자부가 얄팍한 오만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이마에 얼음을 대듯 선명하게 확인하게 되네요. 정녕 놀랍습니다. 아직도 이런 소설이 나올 수 있다니. 아주 흡족한 마음으로 두 번 읽었습니다. 더하여 제목처럼 모성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을 하게 되네요. '지켜준다'는 것의 의미와 한계에 대해서도. 분명 뇌리에 깊은 인상을 남기는 작품이 될 것입니다.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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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막의 게르니카
하라다 마하 지음, 김완 옮김 / 인디페이퍼 / 2017년 9월
평점 :
절판



 앙리 루소 화가가 세상에 공개하지 않은 작품을 두고 두 큐레이터의 치밀한 머리 싸움을 보여주었던 '낙원의 캠퍼스'의 작가, 하라다 마하가 새로운 작품을 들고 찾아왔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번에 나온 '암막의 게르니카'란 작품입니다. '암막'이란 검은 장막을 뜻합니다. '게르니카'는 표지에도 나와있듯이, 파블로 피카소의 유명한 그림이죠. 



 피카소의 고향인 스페인은 한창 내전 중이었습니다. 군부 프랑코가 1933년 선거를 통해 집권한 공화파 정부의 개혁 정책에 반발하여 쿠데타를 일으켜 벌어진 내전이었죠. 파블로 피카소를 비롯하여 에스파니아의 많은 지식인들은 당연히 공화파 정부를 지지했습니다. 그러나 독일 히틀러와 이탈리아 무솔리니의 지원을 받은 프랑코의 무력을 당해내기엔 역부족이었습니다. 국가적인 지원을 유일하게 얻을 수 있었던 곳은 프랑스였지만, 프랑스 역시 섣불리 개입했다가 역으로 독일의 침공을 받을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내전과 되도록 거리를 두려 했기에 상황은 더욱 악화되기만 했죠. 그러던 1937년 4월 26일. 공화파 지지자들의 거점이었던 '게르니카'를 독일 공군이 무차별 폭격하여 무려 1,600명의 시민이 사망하는 비극이 일어나고 맙니다. 이런 사정은 2016년에 발표된 영화 '게르니카'를 보면 잘 나와 있으니, 이것을 보시면 게르니카의 비극을 더욱 잘 아시게 될 듯 합니다.


 그 때, 파리에서 만국 박람회 때 발표할 작품에 매진하고 있던 파블로 피카소는 언론을 통해 그 소식을 접하고는 커다란 충격을 받았습니다. 자신의 조국에서 그토록 엄청난 비극이 일어났으니 당연했겠지요. 자신의 예술이 정치적 도구로 전락하게 될까봐, 아직 공공연히 자신의 입장을 발표하지 않은 피카소였습니다만, '게르니카 사태'를 계기로 드디어 자신의 생각을 작품으로 드러내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잘 아는 '게르니카' 입니다. 세로 약 350cm, 가로 약 780cm의 크기에 모노크롬으로 그려진 게르니카는 스페인관 맨 앞자리에 전시되어 만국박람회를 찾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게르니카의 비극을 생생하게 알리는 동시에 인류가 전쟁을 그만두고 평화를 지향해야 한다는 것을 감동적으로 웅변했습니다. 여기에 얽힌 유명한 일화가 하나 있지요. 하루는 독일군 장교가 게르니카 그림을 보러 와서는 피카소에게 이렇게 물었다고 합니다. "이 그림을 그린 사람이 당신이요?" 그러자 피카소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니오. 이 그림을 그린 것은 당신들이요." 이 소설에도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게르니카'는 그렇게 태어났고 이후 내내 폭력과 전쟁을 고발하고 자유와 평화를 염원하는 목소리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만국 박람회 전시가 끝난 뒤, 그림의 거처를 두고 파블로 피카소가 한 선택 때문에 더욱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는 '게르니카'가 프랑코가 지배하는 스페인이나 독일 나치의 손아귀로 들어가 그림이 지닌 반전의 목소리가 지워지지 않도록 아예 그림을 그로부터 절대 안전할 수 있는 미국에다 맡겨버린 것입니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이 당부했습니다. '스페인에 진정한 민주주의가 돌아올 때 돌려달라'고. 바로 이 선택과 당부 때문에 '게르니카'가 가지는 반전과 평화의 상징은 보다 더 확고해진 것입니다. 


 그런데 이 그림이 다시 한 번 전 세계적으로 주목받은 적이 있습니다. 바로 2003년, 콜린 파월이 UN에서 이라크 공습을 개시하며 기자 회견을 연 때였습니다. 콜린 파월은 그 기자 회견을 UN 안전보장이사회 회의실에서 했는데, 거기엔 '게르니카'가 가진 평화의 목소리를 기리기 위해 '게르니카'의 태피스트리가 원본과 똑같은 규격으로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파월이 방송이나 보도 사진으로 그 그림이 보이지 않도록 장막으로 가려버린 것입니다. '암막의 게르니카'라는 소설 제목은 바로 이 사건에서 나온 것이죠. 아무래도 전쟁을 선포하는 자리에 강한 반전 메시지가 담긴 그림이 같이 사람들에게 노출되는 게 좀 꺼림칙했던 모양입니다만 오히려 그로인해 더 큰 논란을 일으키고 더 많은 비난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게르니카'는 다시 한 번 사람들의 뇌리 속으로 들어왔고 자신이 지닌 반전과 평화에 대한 염원을 되새기게 했습니다.


UN 안전보장이사회 회의실 전경입니다. 원래는 이렇게 보이는 게르니카를 장막으로 가려버린 것이죠. 현재는 없습니다.

 2009년, UN이 건물 보수를 할 때 영국에 이송한 후로 내내 거기에 있다고 합니다.


 하라다 마하의 '암막의 게르니카'는 이 두 사건, 그러니까 '피카소가 게르니카를 그리는 것'과 '파월이 기자 회견 당시 게르니카 태피스트리를 가린 것'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 나갑니다. 피카소가 직접 등장하는 과거의 사건과 9. 11 이후의 현재가 서로 교차하면서 진행하는 구성인 것이죠. 과거와 현재 이야기 모두 이야기를 끌어가는 중심 인물이 있습니다. 모두 여성입니다. 과거에선 실제 피카소의 연인이자 게르니카 작업 모두를 촬영했던 '도라 마르'라는 여성이 중심이고, 현재에선 어릴 때 게르니카를 실제로 보고 그림에 매혹된 뒤로 평생 피카소를 연구했고 9.11 때 사랑하는 남편을 테러로 잃은 후, 더욱 '게르니카'가 가진 반전과 평화의 메시지를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야겠다고 생각하고 그 그림을 전시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뉴욕현대미술관의 큐레이터, '요코'라는 여성이 중심입니다. 


 도라 마르는 '우는 여인'의 모델이기도 합니다. 그 옆에 있는 그림은 소설에서 언급되는 도라 마르의 초상화 입니다.


 하라다 마하는 도라 마르와 요코를 주축으로 과거와 현재의 게르니카 이야기를 번갈아 전개시키면서 '게르니카'에 얽힌 기구한 사연과 어둔 시대일수록 더욱 잃지말아야 할 예술의 의미에 대해 진지하게 얘기하고 있습니다. 스릴러 형식을 취하고 있긴 합니다만 그런 요소는 다소 부족한 편입니다. 그러나 그림 '게르니카'에 관심이 많고 거기에 얽힌 사연들이 궁금하다면, 이 소설은 정말 좋은 벗이 되어줄 듯 합니다. 아마도 하나의 그림이 가지는 의미와 역할이란 게,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거대하다는 것만큼은 분명 느끼시지 않을까 합니다.


 거기다 하라다 마하가 왜 하필 지금에 와서 이 소설을 썼는지 생각해보면 더욱 읽어야 할 작품으로 생각됩니다.

 이 소설은 2016년에 발표되었습니다. 그 때의 일본을 생각하신다면, 하라다 마하가 왜 게르니카를 소재로 소설을 썼는지 그 동기가 어느 정도 짐작되실 것 같습니다. 그 때의 일본은, 물론 지금의 일본도 다르지 않습니다, 아베 정권에 의해 한창 전쟁 가능 국가로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전쟁 포기가 핵심인, 흔히 말하는 평화헌번 9조를 개정하려고 엄청 노력했었죠. 군비 증강을 통한 일본 재무장이 여기저기서 획책하고 있었습니다. 하라다 마하는 바로 그러한 일본의 움직임에 분명한 경고를 보내고 아베 정부의 선동을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방법으로 무력화시키기 위해 '암막의 게르니카'를 쓴 것입니다. 하라다 마하에겐 지금의 일본이 바로 전쟁 선호를 위해 게르니카를 가려버린 암막이었던 것이죠. 그러니 소설의 내용 어느 하나 무심히 들어오지 않습니다. 지금의 우리나라 역시 김정은와 트럼프의 자존심 싸움 때문에 평화가 위협받고 있으니까요. 이런 미치광이 놀음에 현혹되어 섣불리 잘못된 판단을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암막의 게르니카'를 통해 '게르니카' 그림이 가진 의미를 다시금 깊이 돌아봐야하지 않나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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