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랑의 달
나기라 유 지음, 정수윤 옮김 / 은행나무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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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전 노래 중에 엄정화가 부른 '하늘만이 허락한 사랑'이란 노래가 있었다. 세상 사람들이 용납하지 못하는 사랑을 하는 이의 입장에서 부르는 노래로, 그래도 우리 사랑은 하늘만은 허락하리라는 애절함이 담겨 있다. 일본 작가 나가라 유의 '유량의 달'을 읽으며 이 노래가 언뜻 떠올랐다. 왜냐하면 소설 속 사랑도 하늘만이 허락할 사랑이기 때문이다. 





 주인공의 이름은 가나이 사라사. 여성이다. 그녀는 어릴 적 완벽한 가정에서 살았다. 부유해서가 아니다. 자유로웠기 때문이다. 사라사가 저녁으로 아이스크림을 먹고 싶다고 해도 야단치지 않고, 말리지 않고 원하는 대로 해주는 집. 반대와 간섭은 없고, 존중과 배려만이 존재하는 집. 자신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봐주며 설사 세상이 이해하지 못할 개성이라도 해도 그것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게 응원해 주는 집. 그녀는 그런 곳에 있었다. 그러나 호사다마라 했던가. 때이른 아버지의 죽음으로 그 집은 산산조각 나버리고 주인공은 이모 집에 얹혀 살게 된다. 그 때부터 사라사 삶엔 짙은 그늘이 드리운다. 이모네 집은 자기 집과 정반대의 곳이었기 때문이다. 개성을 훈육으로 몰개성으로 만들어비리는 집. 자유는 없었다. 답답함만이 가득했던 그 곳에서 사라사를 죽고 싶을만큼 고통스럽게 만들었던 건 이종 사촌 오빠가 밤마다 나쁜 짓을 하러 자신의 방을 찾아왔기 때문이다. 그 때가 아홉살이었다. 그녀는 집에 들어가기 싫어 놀이터에서 친구들과 놀았다. 그러다 늘 놀이터에 나와서 어린 소녀들을 얌전히 훔쳐보던 후미란 대학생과 알게 되었다. 후미의 집에 놀러간 사라사는 후미가 예전 부모님처럼 자신의 개성을 온전히 존중해주자 마치 다시 예전의 그 집을 찾은 것만 같아서 그 곳에 살고싶어진다. 그렇게 두 달 동안 후미 집에서 살았다. 그 사실을 전혀 모르는 이모네 가족은 실종신고를 냈고 나중에 후미는 소아성애자에다 유괴범이 되어 경찰에 체포된다. 사라사는 사회가 생각하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고 알리고 싶지만 아이의 말에 귀기울여 주는 어른은 하나도 없었다. 그렇게 후미 없이 산 지 15년 뒤, 예전의 개성을 소진하고 사람들 생각에 자신을 맞추며 살아가던 사라사 앞에 우연히 후미가 다시 나타난다. 그녀는 어린 시절의 집이 없어진 이후로 늘 그 어디에도머물지 못하고 소설의 제목처럼 유랑하며 살아왔다. 후미를 다시 본 순간, 사라사는 깨닫게 된다. 자신이 유량을 끝내고 진정으로 정박할 수 있는 곳은 바로 후미라는 걸. 그러나 세상의 눈이 무섭다. 사회는 아직도 사라사의 유괴 사건을 기억하고 있다. 진실을 모르는 그들의 시선에서 자신들의 사랑은 허락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라사는 후미에게로 이끌리는 마음을 어찌할 수 없다. 과연 이 사랑은 어떻게 될까? 하늘만이 허락할 이 사랑은 어떤 결말을 맺게 될까?


 소아성애자와의 사랑이라는 꽤나 충격적인 소재를 가지고 있는 '유랑의 달'은 소재의 불편함만 넘길 수 있다면 꽤 읽어볼만한 소설이다. 사라사의 심리 표현이 너무나 섬세하게 잘 되어있어 독자의 공감을 잘 이끌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해선 안되는 사람을 사랑한다는 내용의 이야기가 아니라 어디에도 마음을 둘 수가 없어 표류하는 이가 간신히 자신의 거주할 수 있는 곳을 찾아가는 이야기로, 그런 유랑의 심리라면 우리 역시 살면서 종종 가지기 때문이다. 나가라 유는 처음 만나게 된 작가인데 문장이 좋았다. 그 때문에 더욱 이 소설이 파격적인 소재에도 불구하고 인기를 끌어 마침내 2020년 서점 대상 1위라는 영예까지 차지하게 된 것이 아닐까 싶다. 서점 대상은 대중성이 담보된 상으로 알고 있다. 그만큼 소재가 가지는 한계를 세심한 심리 묘사와 이야기 전개로 제대로 돌파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걸 보면 작가의 능력이 상당한 것 같다. 그의 다른 작품도 만나보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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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죄의 죄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92
하야미 가즈마사 지음, 박승후 옮김 / 비채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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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구 선수 출신이라는 독특한 이력을 지닌 일본 작가, 하야미 가즈마사. 이번에 그가 쓴 '무죄의 죄'가 출간되었다. 68회 일본추리작가협회상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입소문만으로 50만부가 팔렸다고 한다. 이만하면 비평과 대중적 인기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았다고 해도 그리 과언은 아닌 듯하다. 제목에서 이 소설은 미스터리 장르에 속한다는 걸 은근히 내비치고 있는데 온전히 거기에만 할애되어 있는 건 아니다. 절반은 삶이 지는 씁슬한 비애감과 다소의 뭉클함이 느껴지는, 인간 드라마라고 부를만한 것이 차지하고 있다. 나는 이 소설을 그 둘의 교집합으로 이해하며 그 각각이 하나의 질문을 근간으로 하여 구축되어 있다고 본다.


 그 질문이란, 하나는 '태어났으니 살아야 하나?'이고 다른 하나는 '사형제도는 과연 존치할만한 것인가?'이다. 

전자의 질문은 인간 드라마 부분이, 후자의 질문은 미스터리 부분이 해답을 찾아간다.



 책은 모두 네 개의 부분으로 이뤄져 있다. 시작의 프롤로그와 끝의 에필로그 그리고 본편이 되는 1부('사건 전야')와 2부('판결 이후')다. 

 소설의 중심인물은 이제 24세가 된 여성, 다나카 유키노. 그는 방화로 임산부와 그녀의 쌍둥이 두 딸을 살해한 죄로 사형을 언도받은 사형수다. 시작에서 우리는 그녀가 막 사형 집행을 당할 순간에 있음을 본다. 프롤로그에선 법정에서 피고인은 인생을 건 연기를 한다는 생각으로 취미로 재판 방청을 즐기다 급기야 교도관까지 된 여성 사도야마의 눈으로 다나카 유키노와 그녀가 저지른 사건 정황이 소개된다. 소설을 마무리하는 에필로그도 그녀가 화자를 맡는다. 다나카 유키노의 사건은 단순한 것으로 취급되었다. 그녀는 자신을 버린 남자 게이스케를 집요하게 스토킹 했으며, 


거기서 우리는 다나카 유키노가 범죄를 저지르기 전에 자신을 버린 남자 게이스케를 집요하게 스토킹 했으며 열일곱 살에 호스티스로 일한 어머니의 사생아로 태어나 새아버지에게서 학대를 받았고 강도 치사로 아동자립지원시설에 입소한 전력이 있다는 걸 듣게 된다. 그런 불우한 과거와 끔찍한 범죄 때문에 사회는 그녀를 서슴없이 '괴물'로 부르고 사람들은 너무나 쉽게 '저런 쓰레기는 빨리 죽여야 해'(p. 27)'라고 말한다. 그렇게 이 사건도, 사람도 사도야마가 술집에서 들었던 어떤 낯선 남자의 말처럼 '딱 그래 보이네'(p. 33)하는 한 문장으로 모두 정리되는 것처럼 보였다. 처음에는.


'사건 전야'라는 제목을 가진 1부는 이런 생각이 오해에 불과하다는 걸 깨닫는 여정이다.

여기서는 마치 미나토 가나에의 소설처럼 다나카 유키노와 관계가 있는 주변 인물들의 육성 고백을 통해 하나하나 계단을 올라가듯 유키노라는 인물과 그 범행의 진실을 보여준다. 열일곱 살에 호스티스로 일했다는 것 때문에 무책임한 엄마로 낙인찍힌 유키노의 어머니 히카루는 '단 한 사람에게라도 큰 사랑을 받으면 그 아이는 제대로 된 삶을 살 수 있다'는 말로 히카루가 유키노를 낙태하는 걸 그만두게 한 산부인과 의사 단게의 고백으로 오히려 자식에게 책임을 다하려고 애쓴 정반대의 인물로 밝혀지고 법정에서 '태어나서 죄송합니다'란 말로 모두를 놀라게 한 유키노 역시 배다른 언니 요코의 고백을 통해 백 살까지 살기를 꿈꿨던 천진난만하고 착한 소녀에 불과헸다는 게 드러난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유키노가 프롤로그에서 봤던 것과 전혀 다른 존재였다는 것, 그렇게 사람도, 사건도 모두 '딱 그래 보이네'라는 말로 단정이 결단코 불가능한 복잡한 이면이 배여있음을 알게된다. 그녀는 당연히 사형을 받아야 할 죄를 저지른 게 아니라 어쩌면 정말로 아무 죄 없이, 제목처럼 무죄라는 죄 때문에 거기 갇혀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사실 또한.


 '판결 이후'라는 제목을 가진 2부는 그런 무죄의 죄 때문에 갇혀 있는 유키노를 사형에서 구하기 위한 여정이다.

 1부, 요코의 기억에서 잠깐 소개된 유키노의 어릴 적 친구 단게 쇼와 신이치가 여기서 주역을 맡는다. 다나카 유키노를 버린 게이스케의 친구로 등장해 게이스케와 다나카 유키노의 관계가 세간에 알려진 것과 전혀 다르다는 것을 보여준 핫타 사토리 또한 등장한다. 1부가 인간 드라마적 성격이 강하다면 2부는 미스터리 성격이 강하다. 여기서 다나카 유키노가 진범이 아닐 수 있다는 가능성이 제기되기 때문이다. 친구였지만 다나카 유키노가 이기적인 외할머니 다나카 미치코에게 끌려가 강제로 이별한 뒤로 오래도록 못 봤지만 단게 쇼가 매스컴이 묘사하고 있는 다나카 유키노의 모습을 전혀 믿지 않았던 것은 기억 속 그녀가 진짜 모습이라고 신뢰하기 때문이다. 그는 다나카 유키노와 아무런 개인적 접점이 없는 이들이 자기식대로 편집하고 해석하며 덧칠한 일반론을 따르기 보다는 소중한 추억을 함께 나웠던 어린 마음 속에 와 닿았던 그녀의 말과 마음을 따른다. 지극히 개인적인 것에 기대어 커다란 먹구름으로 자라난 세간의 정의(定義)를 관통하는 것이다. 그건 신이치, 핫타도 마찬가지다. 이쯤에서 우리는 왜 작가가 하필이면 주변 인물들의 눈을 통해서 다나카 유키노라는 인물상을 구성해 나가고 있는지 그 이유를 짐작한다. 바로 그 개인적인 접점이 중요하다는 걸. 단게와 요코, 핫타와 쇼 그리고 신이치와 같이 내가 판단하려는 상대와 함께 한 눅진한 경험이 없다면 남들이 일으키는 풍문에 따라 덮어놓고 판단해선 안된다는 걸 강조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작가가 왜 한 챕터를 시작할 때 다나카 유키노에게 사형을 언도한 판결문의 한 부분을 제목으로 인용하는 이유 또한 알게 된다.

그 판결문은 '딱 그래 보이네'에 따라 형성된 일반론의 집약이다. 그러나 그 아래의 내용들은 그걸 차례로 배반한다. 우리는 아주 잘 알게 된다. 판결문은 아무런 진실을 담고 있지 않으며 오직 편견과 무지 그리고 오해와 무책임의 덩어리라는 것을. 이런 것을 근거로 내려지는 사형을 우리는 과연 정당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여기서 두 번째 질문, '사형은 과연 존치할만한 것인가?'의 대답이 자연스럽게 나오게 된다. 그걸 내리는 판사는 피고와 아무런 개인적인 접점이 없다. 오직 제출된 증거와 변론만이 전부다. 판관은 그래야 객관적일 수 있다고 말하겠지만 만일 그 근거가 되는 것들이 다나카 유키노의 경우처럼 잘못되었다면? 사형은 형법이 가진 최고의 형벌이므로 그것을 언도하는데 있어선 그 무게에 걸맞는 신중함이 요구된다. 원죄, 즉 자신이 짓지도 않은 죄 때문에 사형을 당하는 일이 없도록 하려면 피고의 모든 인격과 삶을 철저히 검증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우리는 그것을 할 수 없다. 경우에 따라선 쇼와 신이치처럼 아주 개인적이거나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경험이 있고서야 비로소 알 수 있는 진실된 초상도 있기 때문이다. 


 소설이 시작을 여는 사도야마도 그렇고, 쇼와 신이치도 그렇고, 블로그를 통해 개인적으로 사건의 진실을 알리고 있는 핫타도 그렇고 계속 편지라는 형태의 개인적인 글로 다나카 유키노와 관계를 맺게하는 이유가 뭘까? 매스컴 앞에선 오직 괴물의 면모만 보였던 다나카 유키노가 참된 자신의 모습을 비로소 열어보이는 것도 그런 개인적인 편지들인데 과연 그 이유는 뭘까? 굳이 답할 필요가 있을까 싶다.


진실은 급하게 먹어선 도저히 알 수가 없고 마치 뜸을 들여야 밥이 익는 것처럼 깊고도 오래된 경험의 공유가 있고서야 마침내 드러난다는 말 외엔.


우리는 그렇기에 섣부른 추정이 불러 올 화를 막기 위해서라도 사형제도를 폐지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인간이 가진 한계로 인해서 무죄의 죄가 언제든 생길 수 있으므로...


이건 비단 사형 문제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삶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이로써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은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우리는 자신의 삶을 사랑하지 않아서 어서 빨리 죽고싶다는 열망밖에 없는 다나카 유키노를 만난다. 그녀는 왜 그런 절망만을 안게 되었던가? 그녀는 단게가 말했던 것처럼 단 한 사람이라도 자신을 사랑해주었으면 이러지 않았을 것이라 한다. 그런데 우리는 그녀를 위해 헌신하는 쇼와 신이치, 핫타를 본다. 전면에 나서지 않았지만 늘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요코와 오조네 리코도 본다. 그녀의 바람은 충족되었다. 그러나 자신의 의지만 있으면 살 방도가 열릴 수 있는데도 유키노는 그러지 않는다. 이유는 단 하나다. 그러한 것들이 그녀에게 전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린 왕자에선 '사막이 아름다운 건 어딘가 보이지 않는 우물이 있기 때문이야'라고 말했지만 유키노에게 보이는 건 사막 뿐이었다. 편지를 통해 작은 반딧불 같은 희망이 보이기도 했지만 그건 사막을 밝히기엔 너무나 모자라 보였다. 적어도 그녀에게는. 그래서 걸음을 멈춰버린 것이다. 만일 그 작은 반딧불을 그저 미력하다고 여기지 않고 더 큰 것으로 봤었다면 어땠을까? 그것을 곧 적만한 어둠이 올 것이라는 황혼이 아니라 밝은 아침이 찾아오리라는 여명의 빛으로 인지했었다면 결말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그녀는 왜 쇼와 신이치가 그랬던 것처럼 어린 시절에 가장 좋은 추억을 공유했던 친구들을 신뢰하지 않았을까? 그녀는 왜 사회가 멋대로 만든 규정을 스스로 받아들여버렸을까? 너무 단순한 판단인지도 모르겠지만 사회가 다나카 유키노를 바라봤던 것처럼 유키노 역시 삶을 그렇게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난 생각한다.


삶에 정말 도움이 되는 진실들은 그저 감처럼 툭 떨어지지 않는다. 앞서도 말했듯 깊고도 오랜 숙성이 필요하다. 물론 나는 한 사람의 인생을 이렇다 저렇다 평가할만한 깜냥은 안된다. 자격도 없다. 다만 이런 말만 남겨두고 싶을 뿐이다. 어쩌면 절망은 우리의 성급함이 자아낼지도 모른다는 것. 조금은 긴 호흡으로 삶을 바라봐야 한다는 것. 사형에 대한 것도, 우리가 만나는 허다한 사람과 사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처음 만나보는 작가, 하야미 가즈마사의 '무죄의 죄'는 이런 문장들로 응집될 파문들을 계속 일으키는 작품이었다. 마지막 페이지를 넘긴 다음에도 오래도록.


이 소설엔 놀라운 반전이 있고, 그 반전이 충분히 납득되도록 단서도 다 깔아두고 있는데 스포일러가 되기에 그 부분에 대한 것은 일절 밝히지 않는 것으로 한다. 이걸 쓰는 이유는 그런 반전 때문에 미스터리 물로써도 꽤 읽을만한 작품이라는 걸 알리기 위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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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
마리 유키코 지음, 김은모 옮김 / 작가정신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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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의 아미타빌, 일본의 주온. 모두 특정한 공간이 가득한 공포를 자아낸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예로부터 공간은 다 동일하지 않았다. 어떤 공간은 신성한 힘이 있다고 여겨졌고 또 어떤 공간은 아주 사악한 힘이 깃들어져 있다고 믿어졌다. 그건 지금도 변함이 없다. 현재 도시에 떠도는 괴담들 역시 어떤 공간을 무대로 한 것이 많으니까 말이다. 인간의 악의를 제한없이 재현하여 독자로 하여금 불쾌감을 유발시키는, 이른바 '이야미스' 장르에 있어서 가장 두각을 나타내는 일본의 여성 작가 마리 유키코. 그녀가 이번에는 모처럼 이야미스 장르를 떠나 아미타빌이나 주온처럼 공간을 무대로 한 호러 연작집을 들고 나왔다. 제목은 '이사'. 일본에선 2013년에 발표된 책이다.




  모두 여섯 편이 단편이 실려 있는데 제목이 '이사'인 것은 그 내용이 다들 이사와 관련있기 때문이다. 

 첫 단편, '문'에선 자신이 살고 있는 집이 살인마가 살던 곳이라는 걸 알게된 여성이 이사를 위해 어떤 집을 방문하여 살펴보다가 숨겨진 문을 찾아내는 이야기가 나오고 두 번째 '수납장'은 남편 없이 홀로 외동딸을 키우는 여성 일러스트레이터가 한창 이사 준비를 하다 수납장에서 딸 아이가 그린 그림을 발견하게 되는 이야기이며 세 번째 '책상'은 이사짐 센터 업체에서 전화 접수 업무를 갓 맡은 주부가 자기가 쓰는 책상에서 전에 일하던 여성이 써 놓은 편지를 찾아내는 이야기이며 네 번째 '상자'는 직장에서 사무실 이사를 했는데 유독 자기 짐만 잃어버려 커다란 곤란을 겪는 한 정규직 여성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으며 다섯 번째 '벽'은 어린 시절의 가정 폭력으로 불우한 기억을 가지고 있는 남자가 자기 동료 또한 지금 살고 있는 집의 벽을 통해 옆집의 심각한 가정폭력을 알게되었는 걸 듣게 되는 이야기이며 마지막 '끈'은 이야기의 무대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이제 막 새집으로 이사 온, 이사를 참 좋아하는 여인이 다시 한 번 첫 번째 단편에 나왔던 '문'을 발견하는 이야기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이 책의 제목으로 '이사'만큼 어울리는 것도 또 없을 듯하다.


  마리 유키코로서는 처음 도전하는 호러장르일텐데, 결과는 첫 시도 치고는 꽤 괜찮게 나왔다.

'이야미스' 장르를 쓸 때, 마리 유키코는 주로 묘사를 건조하게 했는데 이건 '이사'에서도 그리 달라지지 않았다. 그러니까 잔혹하거나 충격적인 장면 묘사를 통하여 무서움을 전달하지 않고 별다른 자극없이 무덤덤한 기술로 독자를 슬쩍 호러의 장소로 데려간다는 뜻이다. 여기 실린 소설의 공포 대부분은 반전을 통해서 온다. 평범한 공간이 삽시간에 죽음의 공간이 되고 여기가 무서움의 장소인 줄 알았는데 사실은 전혀 다른 곳이었다는 게 별안간 독자 앞에 일어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사'는 소재만 그런 것이 아니라 독자의 정신마저 '이사'시키고 있다고 하겠다. 이러한 전환, 전복이 꽤 깔끔하고 앞서 세세한 단서를 두어 설득력있게 이뤄지기 때문에 나는 '이사'를 호러 소설로도 꽤 괜찮다고 한 것이다. 거기다 '상자' 같은 단편에선 마리 유키코만의 장기인 '이야미스'또한 가득 맛볼 수 있었기에 더욱 만족했다.


  한 가지 이 책의 매력으로 빼놓을 수 없는 게 있다. 바로 '작품 해설'이다.

  보통 작품 해설은 해설이기 때문에 독자는 그것이 객관적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간단히 말해 허구가 아니라고 말이다. 소설의 작품 해설은 바로 그러한 독자의 사고 습관을 멋지게 이용하고 있다. 해설에서 소설 속 이야기가 모두 실화인 것처럼 설명하여 독자로 하여금 픽션인줄로만 알았던 소설 속 이야기가 진실일 수도 있다는 오리무중에 빠뜨리는 것이다. 거기다 해설하는 사람의 이름까지, 분명 이 소설을 읽었다면 눈치채지 않을 수 없는, 모든 소설에 꼭 등장하는 이름인 '아오시마'로 하여 마지막 문장에서 살짝 소름마저 일으키고 있다. 이런 점 때문에 난 작품 해설이 정말 해설인지 의심스럽다. 어쩌면 이 작품 해설까지 마리 유키코가 쓰지 않았을까 싶고, 그래서 여기에 실린 단편은 여섯이 아니라 실은 일곱으로 봐야하지 않나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다. 여하튼 이처럼 독특한 작품 해설까지 포함하여 '이사'에 실린 모든 단편들은 마리 유키코의 책이 늘 그랬듯이 벗할만한 매력이 있다. 가볍게 괴담의 세계에 발을 담그고 싶으시다면 얼른 손에 한 번 들어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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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9-30 01: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들 도키오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89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문승준 옮김 / 비채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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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가시노 게이고의 '아들 도키오'를 읽었다. 

 최근에 발표한 작품은 아니고 2005년에 발표한 작품이다. 예전에 창해 출판사에서 발간한 적이 있는데, 이번에 비채에서 나온 건 번역자가 다르다. 다시 말해 새로 번역한 책이다. 우리나라에서 꽤나 팔린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때문에 우린 히가시노 게이고가 미스터리만이 아니라 인간미가 따스하게 흐르는 휴머니즘 소설에도 일가견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아들 도키오'는 그 전조(前兆)라고 해도 좋다. 사실 현재의 어떤 존재가 시간 이동을 통해 과거의 누군가를 치유한다는 기본 설정부터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과 유사하다. 분명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이 보여준 기적은 '아들 도키오'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이 소설엔 프롤로그가 있다. 주인공 미야모토 다쿠미는 발병하면 뇌신경이 차례차례 죽어버리는 무섭고 희귀한 유전병인 그레고리우스 증후군에 걸린 레이코와 그 사실을 잘 알면서도 결혼한다. 자신의 유전병을 물려줄 수 없기에 아이는 낳지 않겠다는 레이코의 말에도 아이를 무척 좋아하는 다쿠미였지만 그녀의 마음을 헤아려 동의한다. 그러나 레이코는 뜻하지 않게 임신해 버리고 지우려고 하는 그녀에게 미야모토는 과거에 어떤 청년에 자신에게 들려주었던 '내일만이 미래가 아냐'라는 말을 떠올리고 어떤 아이가 태어나더라도 후회하지 않고 진심으로 사랑하며 행복해지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설득하여 결국 아들 도키오를 태어난다. 그러나 건강하게 잘 자라나던 도키오는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 끝내 그 증후군에 걸리고 만다. 시간이 흘러 이제 완전히 의식을 잃어버린 도키오를 보면서 미야모토는 20년도 더 전에 자신이 아들과 만났다는 사실을 기억해낸다. 그걸 마지막으로 프롤로그는 끝나고 우리는 20년 전의 젊은 미야모토 다쿠미를 만난다. 그런데 그의 모습은 현재와 너무나 다르다. 상대방의 어떤 결점도 사랑으로 다 받아들이며 늘 자신보다 남의 마음을 헤아리고 배려하던 모습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결국 혼자일 뿐이야'라는 말을 철저히 신봉하며 한없이 타인을 불신하는 가운데 미래에 대한 아무 희망도 없이 살고 있는 것이다. 그 다쿠미가 어느 날, 자신의 친척이라 주장하는 한 낯선 청년을 만난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도 자기보다 자신을 더 잘 알고 있는 그가 당혹스럽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느껴지는 묘한 친근감 때문에 다쿠미는 갈 곳이 없다고 말하는 그와 같이 지내게 된다.


 그 낯선 청년의 진짜 정체는 여기까지 글을 읽으신 분들이라면 쉽게 눈치챘을 것이다. 맞다. 아들 도키오다. 미래의 다쿠미가 아들을 보면서도 과거에 그와 만났다는 사실을 이내 떠올리지 못했던 것은 과거에 도키오가 다른 사람의 몸을 빌려 다쿠미 앞에 나타났기 때문이다. 소설은 도키오에게 의식을 완전히 잃게 되면 유전병의 영향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영혼이 되어 시간을 자유자재로 이동할 뿐만 아니라 타인의 몸에도 빙의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는 것으로 묘사한다. 소설은 다쿠미의 입장에서 진행되기에 자신이 알고 있는 것과 완전히 정반대인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서 아들 도키오가 받은 충격과 실망에 대해서는 알려주지 않는다. 어쨌든 도키오는 그런 아버지의 모습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낳은 상처를 찾아 치유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인다. 사실 다쿠미에겐 커다란 상처가 있었다. 아주 어릴 때, 생모와 이별하여 양부모 손에서 컸는데 처음엔 사랑을 다해 길러주었던 그 부모도 나중에 가서는 잔뜩 실망스러운 모습만 보여주었던 것이다. '결국 혼자일 뿐이야'는 외간 여자와 바람이나 피고 돈만 밝히는 남자로 전락해 버린 양아버지가 자주 하던 말버릇이었다.


 다쿠미는 현재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고통을 아주 어릴 때 자신을 버린 생모 탓이라 여기고 가득 원망한다. 마치 왕가위의 영화 '아비정전'에서 자신을 버린 어머니를 원망하던 장국영처럼... 아들 도키오는 그런 다쿠미와 생모를 화해시키려 중한 병으로 누워있다는 그녀, 도조 준코의 집까지 찾아가게 해보았지만 쉽지가 않다. 


 "그렇잖아. 이쪽은 가난한다는 이유로 버려졌다고. 버림받고, 관계없는 집에서 자른 끝에 결국 무엇 하나 남지 않았어. 그런데 버린 쪽은 가난한 다른 사람을 위해 열심히 살았다니. 열심히 살아 감사를 받고 있다니. 하느님 취급이잖아. 아이를 버린 여자가 말이야. (...) 정말 웃기네. 내 생애 최고로 웃기는 일이야."(p. 190)


 그런데 다쿠미의 여자 친구인 지즈루가 갑자기 사라진다. 

 처음엔 그냥 단순히 다쿠미에게 실망하여 집에 돌아오지 않는 것으로 알았는데 오카베란 남자와 같이 사라졌을 뿐만 아니라 그 둘을 뒤쫓고 있는 수상한 녀석들이 잔뜩 있다는 것도 알게 된다. 소설 중반은 그렇게 다쿠미와 도키오가 사라진 지즈루를 찾아나서면서 깊이 엮이게 되는 미스터리한 사건과 도조 준코가 헤어질 때 건네준 누군가의 습작인 것 같은 만화책을 단서로 단 한 번도 정체가 밝혀지지 않았던 다쿠미의 생부를 찾아가는 이야기로 이뤄진다. 독자가 히가시노 게이고에게 바라는 장르적 재미는 바로 이 부분에서 충족되는데, 이건 다쿠미 역시 마찬가지다. 다쿠미 또한 그 여정을 통하여 늘 원망했었던 불우한 출생의 사정을 이해하고 거기서 파생된 대충 오늘만 수습하며 무책임하게 살던 현재의 모습에서 벗어날 결심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어떤 과정을 거쳐 나타나는 지는 소설을 통해 직접 확인하시는 게 좋겠다. 아울러 다쿠미가 어떻게 현재의 아내인 레이코와 처음 만나게 되었는가 하는 것도. 또 거기에 도키오가 어떤 결정적인 역할을 했는지 또한. 이런 식으로 히가시노 게이고는 정말 마지막까지 독자의 흥미를 지속시킨다.


 이 소설을 통해 히가시노 게이고가 전하고자 하는 바는 도키오가 아버지 다쿠미의 멱살을 잡아 흔들면서 했던 말에 집약해서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좋아하는 사람이 살아 있다고 확신할 수 있으면 죽음 직전까지도 꿈을 꿀 수 있다는 말이라고. 당신 아버지에게 어머니는 미래였어. 인간은 어떤 때라도 미래를 느낄 수 있어. 아무리 짧은 인생이어도, 설령 한 순간이라 해도 살아 있다는 실감만 있으면 미래는 있어. 잘 들어. 내일만이 미래가 아냐. 그건 마음 속에 있어. 그것만 있으면 사람은 행복해질 수 있어. 그걸 알았기에 당신 어머니는 당신을 낳은 거야. 그런데 당신은 뭐야. 불평만 하고. 스스로 무엇 하나 쟁취하려 하지도 않아. 당신이 미래를 느끼지 못하는 건 누구 탓도 아냐. 당신 탓이야. 당신이 바보라서."(p. 396)


 그렇게 말한 뒤, 도키오는 자신은 태어나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희귀한 유전병인 그레고리우스 증후군에 걸려 의식마저 깡그리 잃어버린 도키오가 말이다. 어떤 삶이든 지속할 가치가 있다. 미래라는 빛은 바깥 환경에서 자신에게 비춰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비춰나가는 것이다. 이런 말들이 마음 깊이 절로 선명하게 각인되는 순간이다.


 '아들 도키오'가 발표된 때는 일본이 한창 '잃어버린 10년'이란 말을 외치고 있던 시기였다. 버블 붕괴의 후유증이 일본 사회를 그레고리우스 증후군에 걸린 것마냥 마비시켜 나가고 있었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거품에 대한 대비는 전혀 없이 그것이 주는 달콤한 꿀에 대한 탐닉만 존재했던 과거에 대한 원망과 미래의 가능성을 현실에 대한 불안으로 압살시켜 갔던 다쿠미의 분신이 비일비재하는 상황이었다. 아마도 히가시노 게이고는 그런 다쿠미들에게 자신의 소설을 통해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위로와 응원을 전하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과거의 다쿠미 시간대를 하필이면 제2차 오일쇼크가 터졌던 즈음으로 설정했던 건 아닐까 싶다.(이건 소설에서 스타워즈(그러니까 75년에 처음 발표된 영화말이다.)가 상영된지 4년이 지났다고 한 것에서 유추한 것이다.) 1치 오일쇼크에서 커다란 곤경을 겪었던 일본은 그 때의 교훈으로 2차 오일쇼크는 성공적으로 넘길 수 있었다. 그래서 거품 경제로 이어지는 80년대의 호황까지 이뤄냈다. 비록 붕괴라는 비극으로 마침표를 찍기는 했지만 젊은 다쿠미의 시간을 그 때로 정한 것은 이런 사실을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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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어하우스 플라주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90
혼다 데쓰야 지음, 권남희 옮김 / 비채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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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 헌법은 사회적 신분에 따른 차별을 금지하고 있지만 전과자라는 사회적 신분에 대한 차별은 그가 얼마나 많이 갱생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는가에 상관없이 2000년에서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횡행하고 있다. 너새니얼 호손의 소설인 '주홍글자'의 주인공 헤스터 프린의 가슴에 새겨진 주홍글자처럼 설령 그것이 단 한 번의 실수로 찍힌 낙인이라고 해도 쉽사리 지워지지 않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삶을 새롭게 일으킬 두 번째의 기회를 주지 않는 것은 그대로 삶을 박탈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여서 감히 사회적 타살이라고 불러도 무방하지 않을까 한다. 우리들에겐 여형사 히메카와 레이코 시리즈로 유명한 혼다 데쓰야의 '셰어하우스 플라주'는 그러한 사회적 타살을 당하고 있는 이들의 이야기다.




 주인공은 다키오. 원래 여행사에서 영업을 했던 그는 딱 한 번 했던 각성제 때문에 경찰에 체포되어 집행유예를 받았다. 그러다 설상가상으로 집까지 불에 타서 이젠 머물 곳조차 없어져 버렸다. 거의 벼랑 끝에 내몰린 다키오에게 오직 단 하나의 공간이 그에게 머물 수 있는 자리를 내어준다. 그 곳이 바로 제목의 '셰어하우스 플라주'. 준코라는 여인이 운영하는 이 곳은 특이하게도 모든 방에 문이 없다. 찾아온 사람을 다만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플라주의 성격이 잘 나타나 있다. 과연 거기 있는 사람들은 모두 다키오보다 훨씬 더 어두운 과거를 가지고 있다. 학원 폭력에 휩쓸려 동급생을 살해까지 한 사이코패스 소녀가 있는가 하면 코카인을 판매하는 애인 때문에 전과자가 된 것도 모자라 아직도 도망 중인 애인 때문에 늘 경찰에게 시달리는 여인도 있고 양아치에서 벗어나 간신히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는 가운데 좋아하는 여인까지 만나 데이트를 하다 그만 자신의 과거 모습과도 같은 불량배 학생과 시비가 붙어 사고로 상대방이 죽어버리는 바람에 인생이 다시 나락으로 떨어져버린 남자도 있다. 그러나 거기 있는 모두는 현재의 어둠에 그대로 머무르려 하지 않는다. 어떻게든 스스로의 힘으로 어둠에서 빠져나오려 노력한다. 사이코패스 소녀는 여러 사람을 만나며 자기가 모르는 감정을 배우려 애쓰고 여인은 자신을 인정하고 힘내라고 말해주는 사람들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더욱 성실하게 살아야겠다고 다짐한다. 그렇게 다들 어떻게든 과거 자신의 잘못을 속죄하고 삶이 숨겨둔 두 번째의 기회를 잡으려고 하지만 사회는 그걸 허용하지 않는다. 그들이 걸머지고 있는 전과자라는 멍에 때문에...


 "됐어. 할 수 없지... 우리가 전과자인 건 사실이니까. 인생이 그렇게 간단히 리셋되지는 않아. 과거는 언제까지나 따라다녀... 속죄는 할 수 있어도 실수를 저지른 과거를 지울 순 없어."(p. 145)


이건 다키오도 마찬가지다. 각성제로 집행유예를 받았다는 사실 때문에 어느 회사도 그를 받아들여주지 않는다. 그 어떤 곳에도 정착하지 못한 채, 이리 밀리고 저리 떠밀리며 마냥 둥둥 떠다니기만 할 뿐인 표류물. 그것이 다키오였고 플라주에 기거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이들을 오직 플라주만이 두 팔을 벌려 맞아주었다. 방에 문이 없는 그 곳이. 그래서 어쩌면 셰어하우스의 이름이 플라주인 지도 모른다. 플라주의 뜻에 대해 소설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플라주'는 프랑스어로 '해변'. 바다와 육지의 경계선. 모호하게 계속 흔들리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접점. 남과 여, 선과 악, 진실과 거짓, 사랑과 미움, 그리고 죄와 용서(p. 278)


 바다에서 정처없이 방황하던 표류물들은 해변으로 떠밀려 온다. 해변은 그들을 있는 그대로 모조리 받아들이며 거기서 표류물들은 비로소 안식을 얻는다. 그러나 해변이 딱히 뭘 하는 건 아니다. 그냥 찾아 온 사람에게 안주할 둥지가 되어준 것 뿐이다. 플라주도 그렇다. 운영자 준코가 상처난 이들을 찾아다니며 살갑게 상담해주거나 하는 건 아니다. 그냥 그들이 서로 보듬어 살아갈 공간을 허락한 것 뿐이다. 그가 등에 짊어지고 있는 과거에 대해 함부로 재단하지 않고 그저 오늘도 힘겹게 삶을 버티고 있는 동료로 인정해 준 것 뿐이다. 그랬는데도 플라주에 모인 사람들은 자신이 그토록 바랐으나 세상 어디에서도 얻을 수 없었던 온기를 얻는다. 더이상 과거의 어둠에 발목을 잡히지 않고 제대로 자신의 삶을 꾸려나갈 활력을 얻는다. 사람은 절대 변할 리가 없다면서 타인에 대해 한 번 심판을 내린 것을 결코 바꾸려 하지 않았던 이마저 온전히 감화시켜 자신의 과오를 깊이 참회할 정도로.


 소설은 이러한 과정을 독자가 전혀 과장이라고 느껴지지 않게끔 차분히 납득시켜 나간다. 타인을 그 자체로 인정하고 믿어주면서 그가 다시 걸어갈 수 있게 자신의 손을 기꺼이 내미는, 어쩌면 사소한 행위가 다름아닌 플라주를 유토피아로 만든 근본이었다는 것을. 그랬기에 이 소설은 애틋한 따스함으로 다가오는지도 모르겠다. 미국에서 지금도 진행 중인 시위를 야기했던 흑인에 대한 인종 차별이 대표하듯이 타인에 대한 불신과 적대가 매캐한 연기가 되어 우리의 하늘을 날로 집어삼키고 있는 요즘이기에.


 인간미를 수놓은 서정성이 넘치는 소설이긴 하지만 혼다 데쓰야 작품답게 미스터리와 반전이 없는 건 아니다. 살인범이라 믿는 사람이 유력한 증인의 증언 번복으로 풀려난 것을 듣고 분명 무슨 흑막이 있을 거라 짐작하여 홀로 그를 추적하는 기자가 미스터리의 축을 움직이는데, 바로 이것이 반전과 맞물려 '데쓰야라면 역시 미스터리지!'하고 기대하고 읽었던 사람들 또한 그 바람을 어느 정도 충족시켜 준다. 등장 인물 저마다 가지고 있는 사연들을 읽는 재미와 사이코패스 소녀 미와처럼 개성 강한 캐릭터도 있어서 페이지가 빨리 넘어간다.


 처음 읽었을 때, 설정이 다카하시 루미코의 유명한 만화 '메종일각'과 꽤 비슷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작가가 소설에서 그 작품을 언급하면서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있었다. 분명 플라주의 주인 준코는 메종일각의 주인 교코가 모델일 것이다. 물론 기거하는 사람들의 분위기는 정반대이지만. 메종일각에 모인 사람들은 플라주에 모인 사람들과 전혀 다르다. 그들은 주인공 고다이의 사생활을 전혀 허용하지 않는 사람들이며 짝사랑하는 교코와 가까워지려는 걸 번번이 방해한다. 이런 차이점까지 있어서 더욱 흥미롭게 읽었다. 원래 인류는 다른 포유류 보다 신체 기능이 떨어져 생존을 위해 같은 인간과의 상호 협력을 증진하는 방향으로 진화했다고 한다. 인간만이 유일하게 언어 능력이 발달한 것도 보다 잘 협력하려고 소통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므로 공존과 협력은 인간의 기초적인 생활 방식인 것이다. 우리가 이기적인 사람을 싫어하고 갑질하는 이의 목덜미에 철퇴가 내리치길 원하는 것도 그래서다. 그들이 협력하지 못하도록 이끌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소설, '셰어하우스 플라주'는 과도한 경쟁과 무분별한 배척에 내몰리느라 그동안 잊고 있었던 인간다움의 근본은 무엇인가를 상기하게 만든다. 그래서 이런 말로, 뜬금 없을 지도 모르겠지만, 이 글을 마치고 싶다.


 코로나 19 사태로 인해 더욱 홀로 고립되는 요즘, 누군가와 더불어 함께 나눈다는 것에 그리움이 깊어진다면 얼른 이 '셰어하우스 플라주'를 방문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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