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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홍색 연구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37
아리스가와 아리스 지음, 김선영 옮김 / 비채 / 2011년 12월
평점 :
품절


 

 

    - PRELUDE -

 

 

왜?

무엇 때문에? 무엇에 의해서? 어디로? 어느곳에? 어떻게?

아직 살려고 하는 것인가, 그건 어리석은 짓이 아닌가? !

아, 나의 친구여, 나에게 노을이 그리 묻고 있구나.

나의 슬픔을 용서하라!

노을이 되었다. 노을이 된 것을 용서하라!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니체,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중에서 -

 

 

 

 

   1989년 데뷔해서 여전히 순수 미스터리만을 고집하고 있는 아리스가와 아리스. 이번에 나온 '주홍색 연구'는 작가 아리스 시리즈 중 여덟번째 소설이다. 아마도 당신이 미스터리의 팬이라면 이 제목이 참으로 낯익을 것이다. 바로 코난 도일의 셜록 홈즈가 데뷔했던 그 역사적 소설의 제목이니까 말이다. 그렇다고 이 소설을 그것에 대한 패러디이거나 혹은 오마쥬라고 섣불리 판단하거나 단정내려서는 안된다. 소설을 읽고나면 분명히 느끼게 된다. 왜 아리스가와 아리스가 하필 명탐정의 대명사인 홈즈의 데뷔작 제목을 가져왔는지. 그 이유는 작품을 넘어서있다. 그러니까 그건 미스터리 작가로서의 아리스가와 아리스 자체에까지 연결되는 문제라는 말이다. 그가 왜 미스터리를 썼고 꾸준하게 순수 미스터리 소설만을 집착하고 있으며 그리고 그것을 통해 나아가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관해 초심으로 돌아가 말하기. 그게 바로 '주홍색 연구'라는 제목을 붙인 진짜 이유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미스터리 작가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그리고 그 지향을 다시금 생각해보는 자기반영적 작품이다. 

 

 

 

 

 

   - 학생 아리스 시리즈와 작가 아리스 시리즈 -

 

 

   아리스가와 아리스가 두 개의 시리즈를 번갈아가며 집필한다는 것은 이제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그에겐 에가미가 명탐정으로 나오는 학생 아리스 시리즈와 히무라가 탐정의 역할을 맡는 작가 아리스 시리즈가 있다. 그 모든 시리즈에서 작가의 분신인 아리스는 탐정의 조력자이자 수사의 관찰자 와트슨의 역할을 맡으며 학생 아리스가 히무라 시리즈를 집필하며 작가 아리스가 에가미 시리즈를 집필하는 것으로 되어있다. 그렇게 두 시리즈는 '뫼비우스의 띠' 처럼 연결되어 있다.

 

 

   '월광게임'으로 시작되는 학생 아리스 시리즈는 지금까지 네 작품이 나와있고 '46번째 밀실'로 부터 시작된 작가 아리스 시리즈는 현재까지 18편이 나와있다. 학생 아리스 시리즈가 저렇게 적게 나온 것은 애초부터 총 5부작으로 계획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학생 아리스는 이제 겨우 한 편만이 남은 셈이다. 학생 아리스 시리즈와 작가 아리스 시리즈는 같은 작가가 썼는데도 스타일이 참 다르다. 일단 학생 아리스 시리즈는 첫 작품 부터 이야기가 계속 이어진다. 등장인물 역시 에가미 아리스 콤비 뿐만 아니라 재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작가 아리스 시리즈는 그렇지 않다. 하나 하나가 단막극 처럼 그 자체로 완결된 에피소드로 이루어져 있다. 또한 학생 아리스 시리즈는 사람들이 많이 죽는다. 화산 분출로 인해 고립된 캠프라는 전형적인 '클로즈드 서클'이었던 '월광게임' 때 부터 사람들이 참 많이 죽어 나갔다. 하지만 작가 아리스 시리즈는 그렇게 많이 죽지 않는다. 기껏해야 한 두명 정도다. 그러니까 학생 아리스 시리즈가 주로 연쇄살인을 다룬다면 작가 아리스 시리즈는 '사건' 자체만 다룬다. 내 생각에 두 시리즈 간의 보다 본질적인 차이는 여기서 드러나는 것 같다. 그러니까 연쇄살인을 묘사하는 학생 아리스 시리즈는 그 때문에 트릭 풀이에 더하여 서스펜스까지 신경을 써야 한다. 하지만 순수하게 놓여진 사건 그 자체에만 집중하는 작가 아리스 시리즈는 그럴 필요가 없다. 그저 지금 사건을 수수께끼로 만들고 있는 트릭에만 집중하면 된다. 이 때문에 학생 아리스 시리즈는 분위기 주조에도 힘이 쏠리면서 논리 추구적인 면이 약해지는 반면 작가 아리스 시리즈는 트릭 하나에만 집중하기 때문에 논리 추구가 아주 정밀하다. 아마도 이 때문에 작가 아리스 시리즈를 학생 아리스가 학생 아리스 시리즈를 작가 아리스가 쓰는 것으로 설정된 게 아닌가 싶다. 아무래도 서스펜스를 계속 작동시키는 분위기 연출에 있어서는 문학적 공력이 필요할 테니까 말이다.(이건 현재 국내에 발간된 작품만 읽고 얘기하는 것이기 때문에 다른 일본 원작에 의해 얼마든지 사실과 다를 수 있음을 밝혀둔다.)

 

 

  아무튼 사족같은 이야기이지만 학생 아리스 시리즈와 작가 아리스 시리즈는 이런 차이들이 있다.

그런데 이 차이를 허무는 작품이 바로 지금 만난 '주홍색 연구'였다. 순수하게 논리로써 사건 해결에만 집착하던 작가 아리스 시리즈가 '주홍색 연구'에 와서 문득 '문학적 정조(혹은 분위기)'를 담아내고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학생 아리스 시리즈에서도 잘 보지 못했던 그런 문학적 분위기를 말이다. 바로 이 것이 이 책을 접했을 때 나로 하여금 '어, 지금까지의 아리스 작품과는 느낌이 다른 걸.' 하고 느끼게 만들었다. 낯설음은 언제나 그 정체를 보다 더 집요하게 밝히려는 동기가 되게 마련이다. 늘 익숙했던 설정이라도 혹시 가려진 무언가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의심하게도 한다. 그렇게 읽었다. 해서 생각하게 되었다. 이 소설은 어쩌면 아리스 자신의 어떤 결의 같은 작품인지도 모른다고. 그가 내내 추구해온 미스터리에 대한 스스로의 입장 같은 것을 반영한 작품인지도 모른다고. 왜 이 소설엔 하필 중3 때 고아가 되어 오로지 책을 통해 그 외로움을 이겨나갔던 아케미라는 여학생이 나오는 것일까?  중 3이라는 시기는 아리스 자신에게 있어서도 중요한 시기가 아니었던가? 그 때 그는 자신이 정말 좋아하는 미스터리의 장편을 처음으로 탈고하지 않았던가?

 

 

  아케미의 등장을 나는 중 3 시절 아리스 자신의 반영이라 여겼다. 생애 최초의 장편을 쓰던 그 시절의 반영이라고. 그래서 이 소설의 제목이 '주홍색 연구'인 이유도 바로 그 시절의 자신을 나타내려 한 것이 아니겠느냐고. 더 나아가 오로지 미스터리만 추구하여 이제는 아야츠지 유키토와 더불어 본격 미스터리의 대표작가까지 된 그가 첫 장편을 쓰던 중 3 그 시절의 초심으로 돌아가 자신이 평생 천착해온 '미스터리'라는 것이 무엇인지 돌이켜본다는 의미에서가 아니겠느냐고.

 

 

 

    -  개와 늑대의 시간으로써의 노을  -

 

 

   '주홍색 연구'에서 주홍색이란 '노을'을 말한다. 그러니까 '노을'이 메인 테마인 셈이다.

하지만 사건과 관계된 것이 아니다. 노을은 이 소설에서 추구하는 주제의 상징이며 그 분위기를 집약하는 단어이다. 한 마디로 문학적 은유이며 이 때문에 앞서 '이 작품에서 처음으로 문학적 정조를 담고 있다'고 했던 것이다. 아예 처음부터 이 소설은 그러한 노을의 의미 혹은 역할을 분명히 한다. 프롤로그와도 같은 부분에서 작가 아리스의 목소리를 빌어 이런 대사를 날리는 것이다.

 

   "오늘 오사카의 노을, 마치 세상의 종말 같아요." (P. 10)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바로 뒤이어 아케미와 정체불명의 범인을 등장시켜 그들 각자에게 노을이 또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보여주기까지 한다. 화재에 대한 고통스런 기억이 있는 아케미에게 노을은 '공포' 자체다.(소설엔 그녀에게, 정말 특이하지만, '노을 공포증'이 있다고까지 말한다.)  반면 범인에게는 그동안 망설였던 범행을 결의하도록 만든다. 그렇게 소설의 가장 주요한 등장인물들(한쪽은 관찰자, 다른 한쪽은 모든 것의 원인, 그리고 또 다른 한쪽은 범죄자)이 '노을'의 삼각형을 이룬다(파멸을 보는 자, 파멸에의 예감 그리고 파멸을 가져오는 자). 한 마디로 이 프롤로그는 이 소설이 간직한 우주의 중심이 바로 '노을'에 있다는 걸 보여준다.

 

 

    그런데, 왜 '노을의 시간'인가?

 

여기에 대한 대답은 간단하다. '노을의 시간'이 그야말로 '미스터리적 시간'에 어울리기 때문이다.

노을의 시간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가장 잘 드러내는 말이 있다고 한다면 그건 '개와 늑대의 시간'이라는 말일 것이다. 해질녘 어슴푸레한 미명 아래에서는 사물의 분간이 어렵다. 모든 선명한 것들이 서서히 어두워지고 그렇게 나를 둘러싼 모든 세계가 익명과 비밀의 존재가 되어간다. 그렇게 멀리서 내게로 다가오는 존재가 나를 따르는 개인지 아니면 나를 물어뜯을 늑대인지 분간하기 지극히 어려운 시간. 그래서 모든 것을 그저 불안과 의혹의 시선으로 밖에는 볼 수 없는 시간. 그것이 바로 '노을의 시간'인 것이다. 또한 이 시간의 본질인 불안과 의혹은 그대로 미스터리의 본질이기도 하므로 '노을의 시간'은 미스터리적 시간이기도 한 것이다.

 

   따라서 아리스가와 아리스가 이 '노을의 시간'을 작품의 주된 테마로 삼은 것은 무엇보다 적절하다 하겠으며 그가 유독 이 시간을 고집하는 것은 앞서 말했던 대로 초심으로 돌아가 지금까지 자신이 천착해온 '미스터리' 자체를 되짚으려 한다는 것 역시 여기에서 드러난다고 하겠다.

 

   왜 이렇게 생각하냐고? 그것은 중요한 등장인물이기도 한 아케미 때문이다.

 

 

 

   -  아케미,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분신  -

 

 

   아케미는 이 소설의 중심이다. 그녀는 모든 것의 원인이 되는, 2년전 해변에서 일어난 오노 유우코 사건에서 중요한 인물이었고 또 탐정의 역할을 하는 히무라에게 사건을 의뢰하는 여성이기도 하다. 그리고 또한 히무라 - 아리스 콤비와 가장 많은 말을 나누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들의 대화는 어쩐지 아케미가 가지고 있는 아픔을 덜어주려는 일종의 상담과도 같다. 그래서 어쩐지 '주홍색 연구' 자체가 노을 공포증을 가지고 있는 아케미에게 그 공포증을 지워주는 과정으로도 느껴진다. 스포일러상 말하지 못하는 부분까지 감안해 본다면 아케미는 노을과 함께 단연 이 '주홍색 연구'라는 우주의 중심이다.

   그런데, 그 아케미가 내게는 그저 소설 속 인물이 아니라 실제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분신으로 여겨진다. 왜냐하면 아케미가 들려주는 그 자신 삶의 모습이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실제 삶의 모습과 많이 닮아있기 때문이다.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실제 삶을 들여다보면 그에게 있어 무엇보다 '중3' 시절이 중요함을 알 수 있다. 그는 열정적으로 미스터리 소설에 빠져들었으며 그 결과로 지금과 같은 작가로 있게 된 그 첫 발자국이라 할 수 있는 장편소설까지 썼었다. 그건 이 소설의 아케미 역시 마찬가지다. 무엇보다 '노을 공포증'이란 트라우마를 안기게 했던 화재 사건이 중3 때 일어난다. 그녀는 거기서 이모부가 화재에 의해 돌아가시는 것을 목격했고 그로 인해 노을 공포증을 가지고 말았다. 한 마디로 삶이 전혀 다른 것으로 변화되는 결정적 시간의 도래가 작가 아리스와 아케미 모두에게 찾아온 것이다. 그렇게 친숙했던 '개'의 세계가 이제는 전혀 낯설고 날 위협하는 '늑대'의 시간으로 변하는 '노을의 시간'이 둘 모두에게 도래한 것이다. 이 도래의 비슷한 시점이 아케미를 작가 아리스의 분신으로 여기게 된 첫번째 이유였다.

 

 

  뱀다리 (2). 아케미를 아리스의 여성화된 분신으로 보는 것은 그리 무리는 아니다. 이미 그 스스로 작품에서 이미 이름 때문에 종종 여자로 오해된다고 쓰기도 했고 또한 애니메이션 명탐정 코난에서도 아리스가와 아리스를 여성화시켜 묘사한 바가 있다.

                            명탐정 코난 6기 '절규의 수술실' 편에 깜짝 등장한 '아리스가와 아리스'

 

   이렇게 제작진은 작품 속에서 그의 이름이 늘 여자 이름으로 오인되곤 하는 것에 빗대어 아예 아리스가와 아리스를 미녀로 만들어버리는 재치를 발휘했다.(전공 역시도 영문과^ ^) 아닌게 아니라 '아리스'란 이름 자체도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의 그 '엘리스'를 따온 것이다.

 

 

 

  그런데 그 시기, 작가 아리스는 왜 그토록 미스터리 소설에 빠져들었던 것일까?  바로 이것이 아케미를 분신으로 여기게 하는 두번째 이유가 된다. 그리고 아케미가 가지는 노을의 공포증이 정말은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깨닫게 한다. 소설에서 아케미는 그 '노을의 시간' 중3을 어떻게 보냈는지에 대해 이렇게 고백한다.

 

 확고의 목적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니라 말하기 어렵지만, 에리피 프롬의 책에 끌린 게 동기였어요. 중학교 3학년 겨울에 '자유로부터의 도피'나 '악에 대하여'라는 책을 집어삼킬 듯이 읽었지요. 고압적으로만 느껴졌던 사회에 저도 이런 식으로 반격해보고 싶다고 생각했어요.(P.206) (...) 고독과 불안에서 헤어나지 못할 때도 책만은 저와 차분히 대화를 나누어 준다는 사실을 알고 얼마나 구원받았는지 몰라요(P. 207)

 

 

   여기서 우리가 밑줄 그어야 하는 부분은 '사회에 대한 반격' 부분이다. 상상해 본다. 작가 아리스의 중3 시절을. 한창 사춘기 때의 그를. 그 시기는 누구나 그렇듯이 사회에서 행해지는 정형화된 삶의 길들임에 멀미를 느끼고 저항으로 충만해 있을 시기다. 흔히들 따라붙는 '질풍과 노도의 시기' 그대로 부모라는 울타리 아래서 그 때까지의 안락한 삶이 이제 세상을 스스로 책임져나가야 하는 그 시기에 이르러 전혀 낯설고 불안한 것으로 변해버린 가운데 오는 스스로 그것을 해소하고자 하는 몸부림이다. 작가 아리스도 그 시기 그렇게 몸부림을 쳤을 것이며 아마 그 몸부림 속에서 사회에 대해 반격하고 싶다는 생각 역시 들지 않았을까? 바로 그대로 아케미의 저 고백은 그 당시 아리스 자신의 고백이지 않을까? 아케미가 읽었던 저 인문서적들은 그 시기 한창 빠졌던 작가 아리스의 미스터리 소설들을 그냥 살짝 바꿔놓은 것에 불과하고 그는 그렇게 보란듯이 작가로 성공하여 사회에 반격할 것을 꿈꾸며 늘 귀감으로 삼는 엘러리 퀸과 반 다인이 혹은 딕슨 카의 소설들을 읽으면서 첫 장편소설을 써내려 간 것은 아닐까? 바로 이러한 유사점으로 인해 나는 아케미가 그야말로 아리스 자신의 분신이라 여기며 그 아케미가 하필이면 가장 처음 작가로서 첫 발을 내딛었다고 할 수 있는 '중3' 시절인 것을 감안해 그가 '초심'으로 돌아가 미스터리 자체를 다시금 음미하려 한다는 말을 했던 것이다.

 

 

 

   -  그래서 아리스, 미스터리라는 게 도대체 뭐야?  -

 

 

   아케미를 아리스의 '중3' 시절의 어린 아리스의 분신이라고 생각한다면 이 아케미가 '히무라 - 아리스 콤비'와 그토록 많은 말들을 나눈다는 게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더구나 그 상담과도 같은 대화에서 작가 아리스가 그 자신 생각하는 '추리소설의 본질'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더욱 진중하게 다가오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추리소설이 뭐냐는 아케미의 물음(그것은 또한 과거의 이제 첫발을 딛는 그 자신이 현재의 작가에게 묻는 것과도 같을 것이다.)에 작가 아리스는 이렇게 대답한다. 꽤 길지만 음미할만한 대목이 많으므로 모두 다 인용해 본다.

 

 추리소설이야말로 최대의 중죄이기 때문에 그것을 중심에 둠으로써 진상을 해명하고 싶다는 독자의 절실한 욕구를 환기할 수 있다고 소박하게 설명한 작가가 있지만 독자들이 소설 속에 나오는 살인의 진상이야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겠지요. 제 생각에... 살인사건이 테마라면 시체가 등장하잖아요. 시체란 '당신을 살해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하고 물어도 그 질문에 대답할 능력을 잃은 존재입니다.(...) 시체, 죽은 자는 우리가 아무리 질문을 던져도 절대로 대답하는 일이 없습니다. 그 불가능성이 열쇠같다는 생각도 들어요.(...) 추리소설의 불가능성이란 바꾸어 말하면 아무리 물어도 대답하지 않는 자에게 이야기를 끌어내는 게 아닐까 싶어요. 물어도 대답하지 않을거라 확신하는 상대에게, 대답해주지 않을 줄 확신하면서도 거듭 묻는다는 건 안타까운 행위라고 생각하지 않나요? (...) 이 보다 더 인간적인 행위가 있을까요?  예를 들면 신을 상대로 인간은 대답해주지 않을 줄 알면서도 필사적으로 질문을 계속합니다. (...) 잃어버린 시간을 향해 묻습니다. (...) 죽은자에게도 묻습니다. 나를 정말 사랑했나요? 나를 용서해주겠어요. 울며불며 매달려도 대답은 없습니다. 상대는 결코 대답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또다시 묻고 말아요. 추리소설은 그런 인간의 마음을 보여주는지도 모릅니다.(P.210 ~ 211)

 

   

    그는 말한다. '추리소설이란 대답을 들을 수 없는 존재에게 대답을 요구하는 것이라고. 듣지 못할 해답을 그렇게 계속 추구하는 과정일 뿐이라고...' 말이다. 이 말은 또한 다음과 같은 말로도 표현된다.

 

 사람은 어째서 그렇게까지 해가면서 기도를 바치는 것일까?

 기도, 그것은 탐정이 진상을 갈구하는 정열과 비슷하지 않은가? (P.245)

 

    

     이렇게 수십년간 미스터리 하나만을 천착해온 작가는 '노을의 시간'이 도래함과 더불어 거기에 대한 저항과 그 스스로 공포와 불안을 해소하려는 심정에서 미스터리에 빠져들고 작가로서 첫 발을 내딛게까지 되는 과거의 자신에게, '여기까지 이르고 보니 추리소설은 이런 것 같구나.'하고 넌지시 충고를 보내는 것이다.(이것은 또한 초심으로 돌아가 미스터리를 다시 한 번 되짚어 보는 스스로에게 보내는 충고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이런 것이다.

 

     도래한 '노을의 시간'. 모든 것이 의혹과 불안으로 가득찬 미지의 것으로 변해버린 그 시간 속에서 과거의 아리스 자신이 그토록 추리소설(미스터리)을 사랑했던 것은 혹시나 그 모든 것을 낱낱이 밝혀 줄 하나의 즉각적인 해답을 얻을 수 있으리란 기대에서 그랬던 것은 아닌지 어쩌면 지금까지도 여전히 추리소설이라는 것을 그처럼 '정오의 시간'을 가져다줄 수 있는 것으로 여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에 대해 추리소설이 그러한 '정오의 시간'을 가져다 줄 수 없음을 인정하는 담담한 고백인 것이다. 삶이라는 것 자체가 늘 '노을의 시간'이고 작가 역시 여전히 그 시간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존재이기에 그렇다. 이것은 아리스가 왜 각각의 시리즈 모두에서 '콤비'를 등장시키는가와도 관련이 있다. 이것은 단순히 탐정과 관찰자의 역할 관계가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작가 아리스 자신의 일종의 자아 분리이다. 감성과 지성의 분리. 사회적 관계를 맺는 사교와 홀로 내면에 침잠하여 사유하는 추리의 분리. 그렇게 아리스는 불완전한 그들을 하나로 묶어 활동하게 함으로써 작가 자신 역시 진실을 온전하게 체득할 수 없음을 암시한다. 또한 삶 자체가 '노을의 시간'의 연속이라는 것은 이번 소설에서의 살인 무대가 서로 반대되도록 설정되었다는데서 암시된다. 여기에는 두 개의 살인 무대가 존재하는데 하나는 요헤이가 살해당한 11월의 동터오는 새벽의 유령맨션이고 다른 하나는 오노 유우코가 살해당한 2년전 6월의 5시, 노을이 지기 직전의 해변인 것이다. 그렇게 이 무대가 밤과 낮, 폐쇄된 곳과 열려진 곳, 남자와 여자 모든 면에서 반대를 이루도록 설정되어 있다. 세계 자체가 서로가 다른 역할을 맡는 '아리스 - 히무라' 콤비 처럼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 이러한 설정과 콤비를 통해 아리스가 드려내려 하는 것은 역시나 단 하나다. 추리소설이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기도하는 심정으로 애타게 진실을 찾아 했던 질문을 되묻고 하는 것 밖에는 없다는 것.

 

   비록 정오의 시간이 영원히 도래하지 않을지라도 드러나지 않는 태양의 길을 찾는 무토베 처럼 진실에 대한 추구를 포기하지 않는 것. 바로 그 과정만이 추리소설의 의미이며 이로써 수십년 넘게 오로지 추리소설가로 지내온 작가 아리스 자신 역시 결의하는 것이다.

   이 진실에 대한 기도를 영원히 멈추지 않겠다고...

 

  왜?

  바로 거기에 한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노을의 시간 속에서 여전히 공포와 불안에 떨고 있는 존재가 있기 때문이다.

  돌아오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대답을 계속할 수 밖에 없는 것은 그 때문이다.

  비록 정오의 시간을 가져다 줄 환한 햇살은 되지 못하겠지만

  그저 작은 촛불이라도 되어서 그 미명 속에서 떨고 있는 작은 영혼에게 스스로 길을 찾을 수

  있게 도와줄 수만 있다면 추리소설을 통한 기도는 계속되어야 한다고...

  그렇게 그것은 사명과 같다고...

 

  때문에 아리스는 이 작품에서 이례적이라 할 만큼 아케미와 많은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추리소설의 본질이 단순히 해결이라는 빛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아픔을 당한 사람의 곁에 서서 한 개의 촛불을 드는, 그 아픔을 생각하고 위로하는 기도이기에... 작가 아리스는 이것을 진심으로 믿고 있다. 그리고 여전히 자신이 믿는 추리소설의 사명을 끝까지 다하려고 한다. 아케미와 같은 그들 모두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기 위해서...  

 

  있지요, 아케미 양. 화성으로 가는 로켓을 탈 수 있게 되면 다 함께 떠나지 않겠어요? 그곳에서는 노을이 파랗다고 해요.(P.374)

 

 

 

  이래서 나는 작가 아리스를 사랑할 수 밖에 없다. 세상의 상식은 추리소설(미스터리)이 순수하게 쾌감 위에서만 움직이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난 그것을 비웃는다. 그건 정말 모르고 하는 소리라고. 의심나면 '주홍색 연구'를 읽어보라. 추리소설도 문학의 어엿한 하나의 갈래이며 추리소설이든 문학이든 그 모든 것의 바탕에 있는 것이 바로 자신이든 타인이든 그것을 향한 '위로'라는 건 변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될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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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2-01-16 17: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리스가와 아리스다 ㅠㅠㅠ
저는 항상 이작가의 책은 고민하다, 고민하다 안 산답니다.
정말 작가도 좋아보이고 책도 재밌어 보이는데!
헤르메스님의 리뷰를 계기로 한 번 시작해봐야겠어요!

ICE-9 2012-01-17 02:28   좋아요 0 | URL
소이진님 빌려서 보는 것도 한 방법이에요^ ^
폐쇠된 구역에서 한정된 용의자들 가운데 범인찾기를 좋아하신다면 '외딴섬 퍼즐'을 순수 논리적 추리면을 좋아하신다면 작가 아리스의 '46번째 밀실'을 추천드리고 싶네요. 아리스의 트릭들이 실망스러울 수 있지만 공정하게 정직하게 하나의 논리로 치밀하게 만들어 가는 걸 지켜보는 게 전 아리스의 진정한 매력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답니다. 언젠가 소이진님의 아리스 얘기 기다리고 있을게요^ ^

이진 2012-01-17 02:42   좋아요 0 | URL
어머, 헤르메스님! 이 시간까지 주무시지 않고 뭐하시는 거여요 ㅎㅎ
제가 말할 입장은 아니지만 말이지만요.
어서 우리 자도록 해요 ㅋㅋ
 
별 내리는 산장의 살인
구라치 준 지음, 김은모 옮김 / 검은숲 / 2011년 11월
평점 :
절판


   

 

  요즘처럼 세상 일이 답답할 때가 없다. 행동으로 표현하는 것도 24시간 내내 할 수 없으니 어쩔 수 없이 마음을 추스릴 뭔가를 찾게 된다. 그래서인지 어떻게든 외부의 자극으로 틈틈이 비는 시간들을 메우려는 일이 잦아졌다. 뭔가 몰두할 수 있을 만한 일을 만들고 찾게 된다. 그럴 경우 나는 늘 두 가지의 탈출구를 찾게 된다. 하나는 영화이고 다른 하나는 정말 머리만 쓰는 미스터리를 읽는 것. 그렇게 지인들과 영화를 보기 시작했고 또 그렇게 몰두할 만한 미스터리를 찾았다. 그 때 내 눈에 들어왔던 것이 구라치 준의 '별 내리는 산장의 살인'이었다. 

 

 

 

  구라치 준은 벌써 데뷔한 지가 20년이 넘는 중견작가인데도 그렇게 작품이 많지 않은 과작 작가이다. 일본에서는 냉장고가 비어야 비로소 작품을 쓴다는 말까지 농담 삼아 떠돈다고 한다. 그런데 그렇게 그가 과작인 이유가 있다. 왜냐하면 그는 무엇보다도 치밀한 논리 전개만을 주 무기로 하는 작가이기 때문이다. 다른 것 하나 없이 오로지 치밀한 논리적 전개 만으로 하나의 미스터리 작품을 형상화하기란 참으로 힘든다. 더우기 그게 장편이라면 말이다. 그런데도 구라치 준은 해설과 옮긴이 글 빼고 총 464페이지에 이르는 작품을 오로지 하나의 논리적 매듭으로 묶어내고 있으니 그 하나의 매듭을 풀기 위해 어찌 아니 도전할 수 있을 것인가? 

 

 더구나 이 책 앞에 표기된 함랑표에 따르면 

  이렇게 다른 건 몰라도 논리정연이 만점을 상회하고 있다고 하니 더욱 더 도전의식이 불타오른다. 그래서 들었다. 사각의 링으로 들어가는 권투 선수 처럼 반드시 이겨주리라 결연한 의지를 다지며 구라치 준이 만들어 놓은 눈 덮인 겨울 산장으로 걸어 들어갔다. 

  전형적인 '클로즈드 서클' 작품이다. 

  새로이 구입한 산장을 색다른 레져 상품으로 개발하기 위해 한 부동산 업자가 광고 효과를 내기 위해 미디어들의 총아들을 불러 모은다. 늘 그렇듯이 저녁 만찬을 즐거운 가운데 만끽하고 수순에 의해 당연히 폭풍이 갑자기 몰아쳐 다음 날 산장은 고립된다. 그리고 그 고립된 날 아침. 타살된 시체 하나가 기다렸다는 듯이 발견된다. 

  너무도 전형적인 구성... 그래서 뭐라 별달리 붙일 말도 없다. 

  하지만 오히려 이런 뻔한 구성이라 왠지 더더욱 구라치 준의 자신만만한 호연지기가 느껴진다. 

  그는 마치 내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듯 하다. 

   "봤어? 자, 별다를 거 없지? 너무도 뻔하지?  하지만, 난 이 정도로도 충분히 너와 승부할 수 있어. 이렇게 아주 뻔한 구성으로도 널 멋지게 넉다운 시킬 수 있단 말이다아~!" 그리고 후렴 처럼 달라붙는 그의 우렁찬 웃음소리...  

  이 상상이 그저 공연한 공상은 아닌 것이 구라치 준은 그것가지고는 성에 차지 않았는지 거기에 더해서 아예 새로이 시작되는 장마다 간단한 안내까지 붙여 놓았던 것이다. 이를테면 1장이 시작되는 7 페이지 맨 위에는 

일단 이 작품의 주인공이 등장한다. 주인공은 화자이자 이른바 왓슨 역이다. 즉 모든 정보를 독자와 공유하는 입장이며 사건의 범인이 아니다. 

  더하여 시체가 발견되는 장이 시작되는 163 페이지에는 

  하룻밤이 지나 시체가 발견된다. 살해 방법은 눈으로 확인한 그대로이고 부자연스러운 트릭 따위는 사용되지 않았다. 

 

  예컨대, 이렇게 모든 새로운 장이 시작될 때마다 안내문이 미리 나오는 것이다. (해설을 쓴 decca님 말에 따르면 이것은 '일흔 다섯마리의 까마귀'라는 작품으로 유명한 쓰츠키 미치오의 전매 특허 스타일이라고 한다. 구라치 준 자신도 작품의 말미에 그에 자극을 받아 썼다고 솔직히 밝히고 있다.) 이거 정말 패를 모조리 보여줘도 이길 수 있다는 작가의 호연지기가 아닐 수 없는데 요즘 우리나라 호연지기의 갑으로 불리는 그 분보다 더 한 호연지기가 아닌가! 그야말로 정말 한 아마존 독자의 서평 처럼 순수한 직구로만 승부하는 작품이다. 

   "젠장! 난 직구밖에 못 던져! 쳐 볼테면 쳐 보란 말이야!"  

   그러니까 나는 이렇게 말하는 투수를 앞에 두고 타석에 들어선 타자인 것이다. 

   방망이를 굳게 잡고 투수를 노려보며 난 이렇게 말한다. 

   "좋다. 싸워볼 만 하군. 이 승부 받아주마."  

   그러자 구라치 준이 씨익 웃으며 몸을 크게 뻗는 듯 하더니 순간적으로 공을 날린다. 

   과연 그 결과는...? 

   젠장, 졌다. 완패했다. 설정 같은 거 무시하고 오로지 논리로만 겨뤘는데 보기좋게 헛스윙을 하고 말았다. 일본 작가들은 정말 대단하다. 그 어느 나라보다 미스터리를 사랑하는 나라여서 그런지는 몰라도 어떻게 이렇게 독자들 뒤통수를 때리는 트릭들을 잘도 개발해 내는 것인지 놀랍다. 트릭이라 말했지만 진짜 논리의 직구다. 여기엔 아무 변칙이 없다. 하지만 그 직구를 읽어내야 하는 내 눈이 이미 무엇에 의해 잘못 보도록 씌여져 있었다면...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투수와의 본격 대결 전에 내가 우연히 투수와 포수가 타자를 속이기 위해 서로 약속한 신호가 적혀 있는 쪽지를 주웠다고 해보자. 나는 물론 기뻐할 것이며 이제 투수가 그 어떤 속임수를 쓴다고 해도 내가 다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니 시합에 임하는 마음 역시 느긋할 것이다. 아마 아이의 재롱을 보는 부모의 느긋함과 같을 것이다. 그런데 알고보니 그 쪽지는 투수가 일부러 내 앞에 떨어드린 것이었고 나는 이미 거기서부터 투수에게 속고 있었다면... 

  말하자면 이 소설은 이런 작품이다. 거짓없는 하나의 커다란 직구와 그 직구를 전혀 다르게 읽게 만드는 유발된 사소한 착각. 하지만 그 착각이 어디서 비롯될 지 가늠하기 힘들다는 것이 또 이 작품의 매력이다. 

   당신은 구라치 준의 그물을 벗어날 수 있을까? 

   그렇게 내 대신 멋진 홈런 한 방을 날려줄 수 있을까?... 

   미스터리 해결에 일가견이 있다고 자부하는 편이라면 당장 도전해 보기를 권해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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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거리에서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억관 옮김 / 재인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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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가시노 게이고는 분명 부러운 재능을 가졌다. 별로 특별한 기교도 그렇다고 뛰어난 문장도 아닌 것 같은데 일단 첫 페이지를 시작하면 끝까지 몰입해서 읽게 만든다. 도대체 그 흡인력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을 읽을 때 마다 내가 먼저 집착하는 건 작품에 드리워진 그의 테크닉이다. 

 

  이번에 나온 '새벽 거리에서'. 

  벌써 일본에서는 밀리언셀러를 기록했고 올해 키시타니 고로와 후카다 쿄쿄(이런 '부호형사'에 이어 또 만나는군요. 뭔가 인연이 있는 것일까나~^ ^;) 주연으로 영화까지 만들어졌다. 감독은 한국에서도 개봉된 '화이트 아웃'을 감독했던 와카마츠 세츠로... 

새벽거리에서 영화 포스터 

  그러니까 이번에도 게이고는 확실한 대중적 인기를 얻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사실 이것이 다소 의외일 수도 있는 것이 이 작품, '새벽거리에서'는 분명한 미스터리 소설도 아니고 더구나 소재 역시 그리 대중적 호감을 얻을 수 없는 한 중년 가장의 불륜 스토리이기 때문이다. 

  게이고의 주 무기인 미스터리도 강하지 않고 소재 역시 선뜻 동의하기 어려운 것임에도 불구하고 저런 인기를 얻을 수 있었던 요인은 무엇일까? 아마도그건 역시 게이고 특유의 너무도 자연스레 녹아들었기에 얼른 드러나지는 않는 '플롯짜기'의 기교가 잘 발휘되었기 때문에 그러지 않나 싶다. 

  소설은 주인공 와타나베의 독백으로 시작된다. 거기서 그는 불륜의 유혹에 빠져드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일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 불장난과도 같은 불륜으로 인해 공들여 쌓아왔던 모든 인생이 단 한 순간에 무너져 버리기 때문이다. 게이고는 첫 페이지에 불륜이 가져오는 파국적 결말을 독자에게 충분히 공감되도록 설명한 뒤, 마치 뒤통수를 치듯이 주인공이 그런 불륜에 빠져들었음을 알린다. 바로 여기서 서스펜스가 시작된다. 그러니까 불륜에 빠져버린 주인공이 과연 자신의 인생을 제대로 지켜낼 수 있을까 하는... 

 

   하지만 불륜에 빠져드는 주인공을 대부분의 독자들이 받아들일 리 없다. 그래서 게이고는 현명하게도 불륜에 빠져드는 이유가 다른 게 아니라 결혼을 하면서 가정을 지키느라 잃어버렸던 혹은 포기했었던 '젊은 수컷으로서의 야성' 혹은 '남성성'을 되찾아오는 것으로 그린다. 

   "모두 다 남자가 아니야. 마누라가 여자가 아니듯 우리도 남자가 아니라고. 남편, 아버지, 아저씨, 그런 걸로 변해 버린 거지. 그러니까 여자 이야기 같은 건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다."(P.16)

  옛날 대학 산악부원들과의 대화는 기혼인 중년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했을만한 회한이기 때문에 독자들은 불륜에 빠져드는 주인공을 비난하기 보다는 응원하게 되고 그래서 작동되는 서스펜스의 강도는 더욱 고조된다. 그렇게 만든 다음 게이고는 와타나베 불륜의 대상 아키하를 등장시킨다. 

 

                                                                          영화에서 아키하 역을 맡은 후카다 쿄쿄
 

    서스펜스 차원에서 작동되는 불륜의 유혹이기 때문에 따라서 게이고는 당연히 아키하도 평범한 여성이 아닌 뭔가 색다른 매력(죄송합니다. 미안합니다 라는 말을 한 번도 해보지 않았다는 그런 식으로)의 어떤 비밀스런 구석을 가진 존재로 만든다. 따라서 독자는 당연히 알콩달콩한 로맨스를 기대하기 보다는 여자가 가진 기묘한 모습으로 인해 도대체 저 여자가 어떤 존재인지 혹은 과연 그 감추고 있는 비밀은 무엇인지 알게 되기를 더 기대하게 된다. 그런 독자의 심리를 잘 알고 있는, 달리 말하면 자신이 장치한 서스펜스의 효과가 어떻게 나타날지 거의 확신하고 있는 게이고는 와타나베가 그 자신의 장담과 그 모든 희생을 무릎 쓰고라도 아키하를 선택하게 되는지 거기까지 이르는 와타나베 자신의 감정의 흐름은 생략해도 무방하다고 생각하고 실제 그렇게 한다. 그러한 게이고의 계산은 맞아 떨어져서 독자 역시 와타나베가 어떻게 그렇게까지 빠져들게 되는 것인지 묻지 않는다. 이미 거기서 독자는 완전히 와타나베 편에 서서 어떻게 들키지 않고 그 아슬아슬한 연애를 이어가는가에만 관심이 있다. 왜냐하면 게이고가 독자를 이 게임에 더 깊이 끌어 들이도록 또 하나의 서스펜스 장치를 작동시키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아키하가 1년 뒤 3월 30일까지 말할 수 없었던, 자신의 집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이다.  

 

  아키하로 인해 불륜의 서스펜스가 미스터리의 서스펜스로 절묘하게 전이된다. 

  '들킴'에의 불안이 '신뢰'의 불안으로 바뀌어지는 것이다. 이쯤에서 이미 와타나베의 결심은 확고해진다. 그는 더이상 아내에게 들킬까 염려하지 않으며 다만 어떻게 이혼의 말을 꺼낼 것인지 그 방법과 타이밍만을 고민한다. 우리 역시 아무런 문제가 없었던 게다가 귀여운 딸아이 까지 있는 가정이 거의 초단위의 파국적 위기 앞에 놓여졌는데도 그 무너짐의 부채를 느끼지 않는다. 또 달리 시작된 서스펜스가 그러한 감정이입을 막는 것이다. 그러니까 와타나베가 전 인생을 걸고 모험을 하려는 지금 그 대상인 아키하가 과연 도박을 걸어도 좋을만한 존재인지 그 불안으로 인한 서스펜스가 이미 작동되고 있기 때문이다. 초반의 서스펜스 장치로 인해 이미 와타나베에 충분히 감정이입이 되어버린 우리는 두번째 불안 역시 동일하게 느끼면서 그저 그 불안을 조금이라도 빨리 해소하려고 페이지를 넘기는 것 밖에는 없다. 

 

 

  이 가정이 파국의 코 앞까지 왔지만  우리는 냉정한 관찰자일 뿐 근심하지 않는다. 이미 우리의 불안이 아키하에 대한 와타나베의 불안과 동일한 자리에 서 버렸기 때문이다.

  

  게이고가 원래 작품에다 무엇을 중심으로 두려 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와타나베의 불륜인지 아니면 아키하의 미스터리인지 아니면 그 둘 다 인지. 얼른 갈피를 잡기는 힘들다. 미스터리가 주가 된다고 하면 그것이 실로 강하지 않음이 실망스럽고 불륜이 주가 된다면  (스포일러가 될까봐 자세히 말은 못 하겠다.) 어느 것 하나로 시원스레 해결되지 않음이 씁쓸한 뒷맛을 남긴다. 정교하게 계산된 서스펜스를 작동시키는 게이고이니 만큼 이렇게 이도저도 아닌 결말을 준비했을 것 같지는 않은데 과연 지금은 알 수 없는 근저에 깔린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결정적인 스포일러를 회피하면서 한 가지를 말하자면, 그것은 무엇보다도 '연기'가 아닐까 한다.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연기가 아닌 배우의 '연기'를 말함이다. 왜 이렇게 생각하냐면 이 작품에서 주요하게 작동되는 두 개의 서스펜스인 불륜에서도 미스터리에서도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연기'이기 때문이다. 와타나베는 불륜을 저지르고 있지만 늘 한결같은 모습의 남편을 연기하고 미스터리에서의 아키하의 역할 역시 그렇다. 문제는 이 둘의 연기가 완전히 정반대의 목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인데 와타나베의 연기는 일상을 유지하기 위해서이고 아키하의 연기는 일상을 파괴하기 위해서이다. 그렇게 상극의 힘이 정면으로 부딪히는 것이 또 이 '새벽거리에서'의 매력이기도 하다. 사실 어떤 면에선 아키하의 존재 자체가 일상 파괴의 상징이다. 무엇보다도 와타나베로 하여금 불륜으로 이끌어 그 가정을 붕괴시키려 하니까 말이다. 

 

   아무튼 게이고는 이 연기의 행위들을 섬세하게 새겨넣는데 어쩌면 여기에 그 진정한 의도가 있지는 않을까 싶다. 그러니까 이 작품을 전적으로 이끌어가고 있는 서스펜스 장치들이 야기시키고 있는 불안들은 그대로 우리가 세상에서 느끼게 되는 불안과도 흡사하다. 우리들의 근본적 불안은 언제나 타인의 내면을 내 내면 같이 들여다 볼 수 없는데서 온다. 믿을만한 존재인지 아닌지, 내 모든 것을 내어주어도 좋을 존재인지 아닌지, 사랑하는 사람에게 조차 그러한 우리의 염려와 불안은 계속된다. 오죽하면 하이데거 조차 세계 속에 던져진 우리들이 느끼는 가장 주된 감정이 바로 '불안'이라고 정의내렸을까. 그러니 항존하는 그 불안으로 부터 우리는 우리 자신을 지키기 위하여 '연기'를 할 수 밖에 없다. 그러니까 아키하의 미스터리 처럼 진실을 파악할 수 없는 그리고 와타나베 처럼 조금의 변화에도 파국적 결말을 각오해야 하는 그러한 불안을 안고 살아가야 하는 우리들에게 '연기'란 필요불가결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아마도 게이고가 정말 보여주려 했던 것은 이러한 한계로서의 현실이 아니었을까 싶다.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내면에 받아들여야 하는 벽 같은 것. 테우리에 갇혀야만 존재가 가능한 지금의 우리들 서글픈 현실에 대해... 

 

   결혼이란 무엇보다도 서로에게 방파제가 되어주는 것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좋게 말해서 지켜준다는 의미의 방파제이지 사실은 나아갈 수 있는 곳까지 금을 긋는 빗장과도 같은 것이다. 그러니 와타나베와 그 친구들이 기혼인 자신을 더 이상 남자가 아니라고 여기는 것도 당연하다. 여자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이미 생래적 자유를 지닌 존재가 더 이상 아니다. 아빠, 엄마, 아저씨, 아줌마 등등 온갖 사회로 부터 부여되는 외피를 거듭 거듭 뒤집어 쓰고서 오히려 껍데기의 정체성을 자신의 본질로 알고 살아가야 하는 존재가 된 것이다. 테우리 안에 오래도록 갇힌 짐승은 그 테우리 속 세계를 진실로 여기게 마련이고 그렇게 다른 이들의 칼질로 정형화된 세계 속에서 만족하고 살았던 불륜 전 와타나베 역시도 감히 그 세계를 벗어나는 것을 그대로 멍청한 짓이라 여겼듯이 말이다. 

 

   때문에 게이고가 여기서 연기를 강조하게 되는 것은, 그것도 불륜을 토대로 그것을 강조하게 되는 것은  부여되는 한계를 씁쓸해 하면서도 그것을 스스로 정당화 하기까지 하면서 자포자기식으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우리들의 인위적 제스추어를 강조하기 위함이다. 그러니까 넥타이 처럼 조여드는 껍질에 부과되는 현실에 갑갑해 하면서도 '어쩌겠어, 이것이 인생인 걸. 받아들여야지..' 하는 식의 타협적 태도와 '연기'가 동일하다고 보는 것이다. 아키하의 미스터리가 보여준 결말도 그렇지만 그래서 조금은 엉뚱하게도 보이는 그런 '산티니 이야기'가 에필로그 처럼 부러 붙었던 것은 아니었을가 싶다. 

 

   그렇다고 이 소설이 '그래도 지금 니가 머무는 자리가 좋은거야.' 식의 테우리 속 모든 존재들에게 보내는 게이고의 위로인 것은 아니다. 뒤돌아 보는 눈이 보내는 미련 어린 청승도 아니다. 사실 '산티니 이야기'는 보다 깊이 들어가면 그 이전까지 게이고가 해 온 이야기 모두를 파괴하고 있다. 그는 연기의 종국에 무엇이 있는가를 거기서 보여준다. 그건 공허다. 주고 받는 '~ 하는 척'하는 연기들이 빚어내는 온갖 '~ 그런 척'하는 작위적 감정들만이 있을 뿐 이미 진실한 감정들은 쓸모없는 물건들이 벽장 속에 갇히듯 보이지 않게 사라지고 없는 것이다. '산티니 이야기'의 게이고는 그러니까 차라리 '이게 뭐야!' 하고 말하는 것과도 같다. 한 팝송의 가사와도 같이 한밤에 문득 일어나 썬글래스를 끼고 아내의 얼굴을 바라보았더니 그동안 자신을 둘러싼 화려한 외양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진실, 더 이상 우리들의 관계엔 사랑이 없음을 알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연극이 언젠가는 끝나기 마련이듯 파국은 찾아올텐데 우리가 왜 허무의 몸짓을 계속해야 하느냐 이런 말이다. 그러니까 '산티니 이야기'는 일종의 반어법적 표현이다. 실상 이를 통해 게이고가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니라고 생각되면 연기를 그만두라는 것이다. 

 

   그러니 이 소설은 위안이나 미련 같은 게 아니라 사실은 경멸인 것이다. 

 

   제목인 '새벽'은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불륜을 하고 있는 자의 내면을 그대로 시간으로 형상화 한다면 새벽 같은 것이 아닐까? 완전한 밤도 아니고 밝은 아침도 아닌, 탈색된 어둠과 희미한 여명이 뒤섞인 그대로 경계 위의 시간. 그건 그대로 정해진 자리에서 한 발을 빼고 아무것도 없는 빈 자리로 뻗는 '불륜'의 상태와도 같다.(여기서 게이고가 '불륜'을 끌어들이는 이유를 말해야 할 것 같다. 왜냐하면 자칫 내가 불륜을 정당화하고 있는 것으로 비칠 수 있기 때문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게이고가 불륜을 끌어들이는 이유는 한계지워진 우리의 존재 자체를 말하기 위함이다. 그러니까 이 소설에서 불륜은 그러한 한계를 초월하려는 우리의 모든 몸짓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여지며 이러한 불륜의 형상화는 사실 홍상수가 영화에서 그토록 자주 '불륜'을 반복하는 이유와도 같다.) 

 

   '새벽 거리에서' 제목 자체는 정확히 불륜을 선택함으로 인해 그 불안정한 시간에 불안정한 공간을 헤매일 수 밖에 없는 처지를 단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하지만 이 제목은 '산티니 이야기'가 반어법적이었듯 그렇게 게이고가 보내는 반어법적 질문이다. 그러니까 도대체 무엇이 그 새벽 거리를 헤메이도록 만드는가 이다. 물론 여기에 대해 게이고의 대답은 명확하다. 그것은 바로 '그 자신'이라고. 즉 게이고는 스스로 연기를 그만두지 않았기 때문에 새벽 거리를 헤메일 수 밖에 없는 모든 '우리들'에게 경멸을 보내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이 소설을 읽는 것은 일종의 자학과도 같다. 

 

    아무튼, 

    거리를 두고 '새벽 거리에서'를 바라보면 분명 그리 정교하지도 않고 뭔가 특출날 것이 없는 그저 평범한 남자의 불륜 미스터리라는 흔한 작품이 되는 것 같은데 게이고가 은연중 깔아놓은 서스펜스 장치에 집중하자마자 놀랍게도 그가 꽤 계산적으로 작품 곳곳에 서스펜스 장치들을 정교하게 깔아놓았음을 볼 수 있었다. 그렇게 내게 게이고의 이 소설은 무엇보다도 그가 어떤 식으로 독자들을 몰입하게 만드는지, 단 한 순간도 독자의 주의를 잃어버리지 않고 끝까지 집중하도록 만드는지 그 기교를 살필 수 있는 작품이었다. 거기다 단순히 서스펜스적 재미만을 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현재적 세계의 상태에 대한 본래적 태도 같은 것까지 다루고 있음이 또한 흥미롭게 다가왔다. 여전히 사회에 '실존'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다. 게이고가 주는 재미로 그것을 조금이라도 잊을 수 있는 것 만으로도 이 작품은 벗할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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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1-11-17 2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이 하두 많아서
제가 얼마나 읽어봤나 체크를 해본적이 있습니다. 농담 아니고 20권은 훌쩍 넘게 읽었는데 계속 나오는 그의 작품들을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더군요.... ^^

그런데도 작품마다 새로우니 참 대단한 작가입니다..

ICE-9 2011-11-19 18:44   좋아요 0 | URL
와! 정말 많이 읽으셨네요.^ ^
확실히 게이고가 작품 내는 속도는 혀를 내두를 정도인 것 같아요.
그런데도 인기가 늘 평균이상인 것은 자신이 전하고 싶은 이야기를 잘 개념화해서 어떻게 전해야 할지 그 방법론 역시 잘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
 
로즈 가든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36
기리노 나쓰오 지음, 최고은 옮김 / 비채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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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제작이자 첫 단편이기도 한 '로즈가든'의 화자 히로시는 무라노 미로 시리즈의 데뷔작인 '얼굴에 흩날리는 비'에서 자살했던 바로 그 미로의 남편이다.

  작품이 시작되면 그는 인도네시아의 마하캄 강을 배를 타고 거슬러 올라가면서 롤링스톤즈의 'SATISFACTION'이나 'STREET FIGHTING MAN' 같은 노래들을 떠 올린다.  이 노래들을 아시는 분들이라면 눈치채셨겠지만 히로시가 그 노래들을 떠올리는 이유는 어쩌면 간단하다. 그 노래들의 울림이 히로시가 딛고 있는 보트 바닥이 물결 따라 출렁일 때 마다 전해오는 '둥둥' 튀는 듯한 고동 소리를 닮아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울림이 여기서 그치지 않고 네 번째, 그러니까 가장 마지막 단편인 '사랑의 터널' 그 마지막에서 다시 한 번 반복된다는 게 흥미롭다. 그 마지막 장면에서 미로는  아래로 차들이 지나가는 다리 위에 서 있는데 거기서 미로는 차들이 지나갈 때 다리 위로 전해져 오는 울림을 듣는 것이다. 소설은 이렇게 끝맺는다.  

나는 이번에야 말로 땅속의 어두운 울림을 똑똑히 듣고 싶어서 귀를 기울였다.(P.218)

  어찌보면, 일종의 수미쌍관 구조랄까... 

  그렇게, 네 개의 단편이 모인 '로즈가든'은 하나의 울림으로 묶인다. 

  수미쌍관은 그야말로 작위적 구성이므로 여기에 기리노 나쓰오의 의도가 들어갔다면 그 이유는 의외로 간단해 보인다. 그러니까, 그녀는 바라고 있는 것이다. 이 단편집 자체가 독자들에게 하나의 울림이 되기를..., 미로가 들으려 귀 기울였던 바로 그 '어둠의 울림'이 되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나쓰오의 바람은 네 개의 작품이 어떻게 시작되고 있는지를 살펴보면 바로 드러난다. 그러니까 네 개의 작품 모두 들려오는 '소리'로 시작되는 것이다. '로즈가든'에서 히로시는 강물의 출렁거림과 함께 롤링스톤즈의 노래를 듣고 두 번째 '표류하는 영혼'에서 미로는 '퇴마사야.'라는 관리인의 목소리를 듣는다. 다음의 '혼자두지 말아요'에서는 '원숭이다'라는 말을 듣고 마지막 '사랑의 터널'에서는 '여자라서 다행이네요'라는 말을 듣는다. 그렇게 나쓰오가 이 단편들에서 '청각'이란 감각을 특권화하고 있다는 것은 명백해진다. 사실 이러한 '들음'에의 강조는 무라노 미로 시리즈가 여타 다른 사립탐정물들과 차별되는 특징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 단편집 '로즈가든'에서는 그 특징을 더욱 더 강조한다. 시작도 그렇지만 무라노 미로가 결정적으로 사건을 해결하는데 있어서도 '소리'가 많은 역할을 하는 것이다. 아니 어떤 단편에서는 오히려 무라노 미로가 가진 '시각'의 무용성을 강조하고 있기 까지 하다. 여기에서 보듯이 나쓰오가 이 '로즈가든' 자체를 들려주기 위한 하나의 울림으로 만들려고 했던 것은 명백해 보인다. 하지만 왜 여기서 유독 그것을 강조하는 것일까? 언제나 그랬듯이 내게 나쓰오에 대한 리뷰는 이렇게 의문으로 시작된다. 

 '듣는 것'은 '보는 것'과 다르다. '보는 것'은 능동적 행위이나 '듣는 것'은 지극히 수동적인 행위이다. 외부의 소리는 우리가 어쩔 수 없는 '엄습'이며 아무리 귀를 막아도 그 틈입을 막을 수 없는 '속절없음'이다. 소설의 시작을 여는 소리들은 늘 느닷없이 주인공들에게 달려든다. 그리고 그 소리들은 언제나 매의 밭톱이 먹이를 채 가듯 무라노 미로를 정해진 삶의 궤도에서 벗어나게 하고 그 소리들이 발현된 그 곳으로 블랙홀 처럼 미로를 빨아들인다. 소리에 의해 미로는 그 세계에 갇히며 그렇게 한 번 포획되면 더 이상 그 세계에서 달아날 수 없다.  그건 미로의 죽은 남편 히로시도 마찬가지다. 애초에 히로시를 무라노 미로의 세계에 가두었던 것은 무엇이었나? 그건 바로 미로의 '말'이었다. 그렇게 듣게되자 히로시는 무라노 미로의 '로즈가든'에서 더 이상 빠져나올 수 없게 되었고 오로지 죽음 만이 그 유일한 탈출구가 되었다. 그렇게 '로즈가든'의 소리들은 한 존재 전부를 바꾼다. 그런데 거기엔 그 어떤 주체의 의지도 개입되지 못한다. 지극히 수동적일 수 밖에 없는 '청각'의 특성상 당연하다. 그러니까 이것은 그야말로 사이렌의 노래소리이다. 이미 들은 이상 그에게 남은 것은 그저 끌려감 밖에는 없는 것이다. 

  나쓰오가 이 단편집을 하나의 울림으로 만드려고 했을 때 그녀가 바랬던 것도 이것이었을 것이다. '로즈가든' 자체가 독자들에게 사이렌의 노래소리가 되는 것. 그렇게 저항할 수 없게 무라노 미로라는 존재의 무저갱과도 같은 심연 속으로 끌어들이는 것. 왜?  그건 아마도 무라노 미로를 이해시키고 싶은 것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건, 

  나쓰오가 이 단편집에서 유독 '들음'을 강조하는 또 하나의 이유를 보면 드러나는데, 그건 바로 우리들이 무라노 미로에게 있어 가장 궁금하게 생각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그러니까 미로는 왜 그렇게 자신과 대적하는 어둠에게 그토록 끌리는가 하는 것. 바로 그 어둠에로의 매혹이 온전히 수동적일 수 밖에 없는 '들음'과 너무 유사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 둘은 모두 주체의 역량을 가볍게 넘어서서 완전히 사로잡아 버리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그 둘 앞에서 주체는 오로지 '속절없음'의 무기력한 포즈만을 취할 수 밖에 없다. 카메라 렌즈에 사로잡힌 모든 피사체가 그러듯이 그렇게 둘다 불가항력적이다. 

  이러한 매혹과 '들음'의 유사성에서 우리는 나쓰오가 이렇게 '울림'이 간직한 지극히 수동적인 경험을 통해서 말하고 싶은 것이 우리가 그토록 미로에 대해 궁금하게 여겼던 그 어둠의 '매혹'을 설명하려 함을 암시받게 되는데 바로 이것을 통해서 나쓰오가 '로즈가든'을 하나의 울림으로 만드는 것 자체가 바로 무라노 미로의 내면 속으로 인도하는 것임이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미로는 어쩌다 그렇게 불가항력적으로 어둠에 매혹될 수 밖에 없게 되었을까? 바로 거기에 대한 미로의 내면으로의 여행 혹은 그것을 통한 나쓰오의 대답 혹은 변호가 바로 이 '로즈가든'이라 할 수 있다. 

 

 

   

   '로즈가든'이 처음 말했던 대로 하나의 울림이라면 이 단편집 자체는 오히려 '진혼곡'에 가깝다고 해야 하리라. 왜냐하면 이번의 단편집을 끝으로 우리는 무라노 미로와 별 다른 이변이 없는 한 영영 이별을 해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팬인 나로서는 '로즈가든'은 더없이 슬픈 작품이기도 하다. 때문에 난 그것을 아주 오래도록 음미할 수 밖에 없었다. 사랑하는 이와의 이별은 어떻게든 지연시키려고 드는 게 인간의 정리가 아니던가...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이렇게 무라노 미로 시리즈 중 가장 마지막으로 나왔지만 사실 여기에 실린 네 작품은 모두 미로의 데뷔작 '얼굴에 흩날리는 비'와 두번째 작품 '천사에게 버림받은 밤' 사이에 쓰여진 작품들이다. 그러니까 1993년과 1995년에 걸쳐서 발표된 작품들이다.  하지만 발표시기야 어쨌든, 그것이 무슨 상관이 있으랴. 우리는 지금 미로와 마지막 이별을 앞두고 있고 그래서 그 멀어져 가는 등을 바라보야 하는 우리들로서는 이 '로즈가든' 자체가 '가시는 걸음 걸음... 그 뒤편에 무성하게 뿌려주는 장미 꽃잎들과도 같이...' 수고한 그 넋을 위로하는 동시에 그 넋이 어떠한 존재였는지 우리들에게 알려주는... 진혼곡으로 여겨지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울림인데... 

 

   어리석은 고집이라고 해도 좋지만 난 정말로 나쓰오가 이 단편집을 그러한 '진혼곡'의 형태로 만들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난 그것을 무엇보다도 단편들의 제목에서 확인한다. '로즈가든' '표류하는 영혼' '혼자두지 말아요' '사랑의 터널' 이 모두가 사실은 노래 제목들이기 때문이다. 물론 소설에서 직접 밝히지는 않으나 아마도 소설의 분위기를 이루는데 영감을 주었고 그렇게 하나의 바탕이 된 노래를 내 개인적으로 살펴본다면 바로 이 노래들이 아닐까 한다. 

 

 1. 로즈가든  

 

 2. 표류하는 영혼 

 

 3. 혼자 두지 말아요

 

                         

  4. 사랑의 터널
 

   

   말하자면 '로즈가든'은 무라노 미로를 보다 더 잘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컨셉트(concept) 앨범이라 할 수 있다. 컨셉트 앨범이란 하나의 주제를 위해 노래들이 유기적으로 짜여져 있는 앨범을 말한다. 그렇게 나쓰오가 선곡한 이 네 개의 단편들은 별개이지 않으며 왜 무라노 미로가 어둠에 매혹될 수 밖에 없었는가에 대해 차례로 조금씩 나아가면서 알려주고 있다. '로즈가든'은 히로시의 미로에 대한 매혹을 빌어 미로의 어둠의 매혹을 설명해주며 '표류하는 영혼'에서는 왜 미로가 어둠 - 보다 정확히는 경계 너머의 것 -에 매혹될 수 밖에 없는지 미로가 속해있는 세상의 속성 -  도처에 넘쳐나는 악의들-을 통해 말해준다. 그리고 '혼자 두지 말아요'에서는 그러한 악의로 가득찬 세상 그러면서도 피아를 식별하기 어려운 경계들의 혼란 속에서 그것을 헤쳐나가기 위해서 왜 괴물이 될 수 밖에 없는지 느끼게 만들고 마지막 '사랑의 터널'에서는 미로가 경계의 저 편, 어둠 혹은 괴물을 그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것을 우리는 보게 된다. 이렇게 말했지만 '로즈가든'은 굳이 미로의 헤아리기 어려운 심연을  탐사하기 위한 지도 같은 것으로만 머무르지 않는다.  사실 미로의 어둠에 대한 매혹은 그녀의 또 다른 작품 '그로테스크'나 '아웃'으로도 연결된다. 그렇게 이 '로즈가든'은 나쓰오가 그녀의 작품세계에 있어 또 다른 중추라 할 만한 왜 '괴물성(아임 소리 마마 같은)'에 집착하게 되는지도 보여준다. 그러니까 그녀의 작품 세계를 떠 받치고 있는 두 개의 헤르메스 기둥 중 하나인 '여성의 괴물화(욕망을 어떠한 사회적 제약에도 굴하지 않고 발현시킨다는 의미에서 -  그것은 최근에 나온 '도쿄섬'에서까지 이어지는데 -)가 어떻게 해서 나오게 되었는지 그 근원적 이유가 드러나 있는 것이다. 

 

 '소녀'에서 '괴물'까지! 

  그렇게 '로즈가든'은 여성들이 보여줄 수 있는 다양한 모습을 이 하나에다 집약하고 있다. '로즈가든'은 남성에게 포획된 존재에서 끝내 남성적 그 사회 바깥에서 머무르면서 오히려 공포의 존재로 되어가는 과정의 함축이자 바로 그 사회의 제약에서 해방되어 마음껏 자아의 욕망을 발산하는 것이야 말로 여성의 진정한 구원이라는 나쓰오의 내면 깊숙한 곳에서 울려나오는 어둠의 선언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야말로 무라노 미로는 그 모든 것이 하나로 응축된 절대 영도의 존재이며 그래서 왜 미로가 나쓰오의 페르소나이고 그녀의 모든 작품 가운데 단연 중심이 될 수 밖에 없는지 다시금 깨닫게 만드는 작품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 단편집은 나쓰오의 어둠에 매혹된 이들이라면 반드시 거쳐가야 할 작품이며 출간 사정이야 어쨌든 무라노 미로 시리즈중 가장 마지막에 읽어야 그 맛이 더욱 잘 살아나는 작품이기도 하다. 내내 말하지만 이 단편집은 그야말로 미로를 위해 바쳐진 네 개의 트랙으로 구성된 진혼곡 앨범이니까 말이다. 때문에 나 역시도 이미 유령이 되어버린 히로시가 롤링스톤즈 노래를 떠올렸듯이 이 단편집을 모두 읽고 났을 때 어쩔 수 없이 롤링스톤즈의 노래를 떠올렸다. 물론 같은 노래는 아니고 그들의 68년 앨범 '거지들의 만찬'에 첫번째 트랙으로 실렸던 'SYMPATHY FOR THE DEVIL'이었다. 어쩌면 이 단편집을 위한 사운드 트랙으로 가장 잘 어울리는 노래는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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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기리노 나쓰오의 '로즈가든' OST
    from 헤르메스님의 서재 2011-11-15 22:25 
    -원래는 일종의 '로즈가든' OST같은 것으로 만들어 보려고 음악도 같이 올리려고 했습니다만, 리뷰 로는 올라가지 않기에 부득불 페이퍼로 작성하여 올리게 되었습니다. 선곡은 로즈가든의 각 단편 제목을 중심으로 해서 작품의 분위기와 노래 가사가 비슷한 것으로 선정했습니다. 그 중 '로즈가든'과 '터널 오브 러브'는 공식적으로 확인된 것 없지만 분명 작품에 영감을 주었던 노래들로 보입니다.편한 시간에 더 편하게 감상해 보셨으면 합니다.(문제가 있다면 연락해
 
 
마녀고양이 2011-11-15 2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흑,, 미로와의 이별이라니,, 갑자기 슬퍼지는데요.
하지만 말이죠, 어둠으로 빠져드는 과정에 놓인 단편이란 정말 매력적이네요.
미로가 워낙 매력이 있어야 말이죠. 특히, 잘못된 남자만 골라서 만나는 그그... ^^

ICE-9 2011-11-15 23:05   좋아요 0 | URL
바로 그 왜 그렇게 미로가 잘못된 남자만 골라서 빠져드는가에 대해 나쓰오가 제대로 보여주고 있는 게 이 '로즈가든' 단편집인 것 같아요. '도쿄섬'을 읽고나서 더욱 더 나쓰오가 '괴물로서의 여성성'을 긍정적으로 여기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 단초를 '로즈가든'에서 엿볼 수 있더군요. 어쩌면 직접적으로 이어지는 작품이 아닐까도 생각되요. 네번째 단편에 SM클럽 경영주 이름이 기요코인데 '도쿄섬'의 거의 '아임소리마마'와도 같은 욕망충실과 생존본능을 보여주는 여주인공 이름도 기요코 거든요. 아무튼 미로의 팬이라면 정말 추천드립니다.^ ^
 
부호형사
쓰쓰이 야스타카 지음, 최고은 옮김 / 검은숲 / 2011년 10월
평점 :
절판


 

  하하하! 이거 정말 걸작이다. 간만에 아주 날 자지러지게 만드는 책을 만난 것 같다. 생각해보니 김미령 작가의 '완득이' 이후 처음이다.  마치 IQ178의 천재가 작정을 하고 글을 쓰면 얼마나 자유자재로 능수능란하게 문장을 다룰 수 있는가를 보여주기라도 하듯 장면 전환이 드리볼을 하는 '슬램덩크'의 서태웅 만큼 빠르고 미스터리이면서도 독자의 웃음을 위해 과감히 그 규칙을 파괴하는 모습이 강백호의 리바운드 만큼이나 파격적이고 게다가 정말 웃기려고 작정하여 심어놓은 개그 코드들이 윤대협이 쏘는 3점 슛 처럼 언제 어디에서 느닷없이 날아올지 몰라 무방비한 상태에서 자지러지게 만드니 지하철에서 혹시라도 미친놈이란 소리를 듣지 않도록 주위 상황을 살펴가며 접해야 하는 게 '나꼼수'만은 아님을 깨닫게 한다. 왠지 주성치 스타일의 셜록 홈즈를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그 책이 바로 '부호형사'다. 

 

 '시간을 달리는 소녀'나 '파프리카'처럼 SF작가로 혹은 '섬을 삼킨 돌고래'나 '최후의 끽연자' 처럼 풍자작가로 유명했던 쓰쓰이 야스타카가 무슨 생각이 들었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전혀 예고도 없이 갑작스럽게 내어놓았던 네 개의 미스터리 소설 중 가장 처음 작품이 바로 이 '부호형사'다. 일본드라마를 즐기시는 분들이라면 이 제목이 그리 낯설지는 않을 것이다. 후카다 교코 주연의 드라마로 만들어져 우리나라에서도 케이블로 방영된 적이 있기 때문이다. 내게는 영화 '이겨라 승리호(일본 제목으론 '얏타맨')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이기도 한 섹시봄버 하면서도 한 편으론 애잔한 도론죠 히메를 완벽하게 구현했던 그 후카다 교코의 주연작이라 보지 않을 수 없었던 드라마였기도 했다. 아무튼 바로 그 '부호형사'의 원작이 바로 이 소설이다. 드라마를 보면서도 설마 그 드라마에 원작이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다. 아니 행여 원작이 있더라도 그것이 미스터리 소설이었으리라고는 더욱 생각못했다. 설정과 캐릭터가 너무나 만화적이었기 때문이다. 드라마를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 간단히 설명하자면 혹시 '개구리 중사 케로로'를 보셨다면 거기 나오는 나라그룹의 외동딸 '나라'가 그대로 형사가 되었다고 생각하면 된다. 그러니까 그 나라가 오매불망 짝사랑하는 우주와 어떻게든 데이트를 하기 위해 천문학적인 돈을 쓰듯이 미스터리 사건을 그렇게 어마어마한 돈으로써 해결하는 것이다. 뭐, 간단히 예를 들자면 밀실 트릭을 알기 위해 회사를 통채로 설립한다든지 서로 적대적인 갱들이 도시에서 회합을 가지는데 감시하기 곤란하니까 최고급 호텔을 통채로 하나 빌려서 거기 묵게 만든다든지 뭐 그렇게 사건을 해결한다. 이 어찌 실소를 금하지 않을 수 없는 만화적인 설정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런데 이 소설을 일본의 3대 SF 작가로도 불리는 바로 그 쓰쓰이 야스타카가 썼으리라곤 더더욱 생각 못했다. 그러니 이 '부호형사'는 내 이마에 딱밤 세 대를 놓듯, 쓰리 콤보의 충격과 함께 찾아온 것이다. 

 

 한 마디로 이 책은 정말 재밌다. 오로지 IQ 178의 지능을 총동원하여 독자들로 하여금 배꼽을 잡고 웃으며 뒹굴거리게 할 목적으로 쓰여진 것만 같다. 바나나만 보면 개그 본능을 주체하지 못해 그것을 밟고 넘어지기 위해 달려가는 케로로 처럼 야스타카도 실소든 폭소든 어쨌든 웃기기 위하여 감행할 수 있는 것은 뭐든, 그것이 실험이든 파격이든 다 감행한다. 마치 MTV의 현란한 뮤직비디오 처럼 장면을 능수능란하게 전환한다든지 잘 나가다다 갑자기 독자를 향해 말을 툭 건넨다든지 얘기의 맥락과 전혀 상관없이 덩실덩실 춤을 추며 나오는 서장이라든지... 아무튼 야스타카는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독자들이 마음껏 즐길 수 있는 '개그 콘서트'를 보여준다. 하지만 그렇다고 미스터리적으로 약한 것도 아니다. '로트레크 저택 살인사건'에서 보여주었던 솜씨 답게 물론 여기서도 기가 막히는 트릭이 한가지는 있다. 그것이 바로 두번째 에피소드 '밀실의 부호형사'다. 아마도 그 트릭을 풀기란 정말 꽤 곤란할 것이다. 소설의 주인공 형사가(아참! 여기서 주인공 형사는 드라마처럼 여자가 아니고 남자다. 최고 재벌의 외동아들이자 헌신적으로 애정을 보내는 미모와 지성을 두루 완벽하게 소유한 약혼녀까지 있는 그야말로 전생에 은하계를 구한 남자다.) 그 트릭을 풀기 위해 회사 하나를 세워야 했던 것이 어쩐지 이해가 될 정도로 어렵다. 흥미가 있으면 한 번 도전해 보는 것도 이제 길어지는 무료한 밤을 위해 좋지 않을까 한다. '부호형사' 드라마 팬이라면 물론이고 간만에 한 번 웃어보고 싶은 분들 역시에게도 적극 추천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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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1-10-28 1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기걸려 비실거리면서, 머리 멍한 제게 꼭 필요한 책이군요.
음...... 헤르메스님을 저의 지름신으로 명명해드려야 할 듯. ㅠ
제가 엄청 좋아하는 장르 소설 분야를 이렇게 매혹적으로 쓰는 분은 정말 드문데 말이죠. 클났네요~ ^^

ICE-9 2011-10-28 22:24   좋아요 0 | URL
이런, 감기걸리셨군요.
그런 상황이라면 더욱 더 이 책의 가벼움이 도움이 되실 듯 해요...
옆에 삶은 고구마 놓아두고 먹으면서 만화책 읽는 듯한 느낌도 갖게하거든요^ ^ 준비하시는 일은 잘 되고 계신지요? 늘 좋은 말씀을 해주셔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어요. 얼른 쾌차하시길 바랄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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