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1 | 12 | 13 | 14 | 15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N을 위하여]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N을 위하여
미나토 가나에 지음, 김난주 옮김 / 재인 / 2012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미나토 가나에의 'N을 위하여'는 이제야 소개되지만 사실 '야행관람차' 앞에 쓰여진 작품이다.

 

 개인적으로 이 순서를 미리 알려두는 게 좋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그래야만 이 작품이 미나토 가나에의 작품 세계 전체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제대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전 '왕복서간'에 대해 글을 쓸 때 그녀의 작품이 점차 '고백'과는 정반대로 변화하고 있다고 말했었고 그 과도기에 속하는 작품이 '야행관람차'라고 밝힌 적이 있다. 오로지 타자의 제거에만 하던 주체가 타자가 짊어진 짐을 나누어 받으려고 한다는 게 보인다는 이유로...

 (보다 자세한 것은 여기를 참조 http://blog.aladin.co.kr/748481184/5718450 )

 

 하지만 사실 그 과도기로서의 시작은 '야행관람차'가 아니었다. 그 진정한 시작은 바로 이 소설 'N을 위하여'였다. 단적으로 'N을 위하여'는 '야행관람차'에서 보여주고 '왕복서간'에 이르러 완성되어진 그 변화에 있어 '발아'와도 같은 작품이다.

 

 

 

 책 날개를 보면 미나토 가나에의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지금까지 저의 작품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은 자기주장이 강하고 그로 인해 사랑스러운 사람들이었습니다만, 이번 작품에서는 등장인물들의 자기주장을 다소 억제하기로 했습니다.

 

- 출간에 즈음하여, 미나토 가나에의 말 중에서 -

 

 본편을 읽기전에 이 말 부터 읽었는데 그 때부터 이 소설이 '고백' '속죄' '소녀'로 이어진 흐름과 다르다는 것을 직감했다. 읽어보니 과연 달랐다. 고백과 똑같은 형식이지만 'N을 위하여'의 독백의 주체들은 '고백'의 독백 주체들과 명백하게 반대되는 것을 위해 말하고 있었다. '고백'은 그야말로 타자의 제거를 위한 '독(毒, POISON)백'이었지만 'N을 위하여'에서는 타자를 보호하기 위해 스스로 독을 삼키는 독백이었다. 단적으로 이 소설의 여주인공은 아예 사랑에 대해 이런 정의를 내린다.

 

  "그럼, 말이지, 스키시타에게 사랑이란 뭐지? 아니 바꿔 말하지 궁극의 사랑이란?"

  (...)

 "죄의 공유."

 스키시타가 중얼거렸다.

  (...)

 "... 공유란 것은 아무도 모르게 상대의 죄를 절반 짊어지는거야. 아무도. 그러니까 상대도 모르게 죄를 떠안고 아무 말 없이 떠나는 것"                                                                               

(P. 154)

 

 사실 'N을 위하여'는 이것이 핵심이다.

 

 그리고 바로 이 말은 이후에 성취되어지는 가나에의 변화그 자체를 나타내는 정의이기도 하다. 이것은 이후의 작품들 자체가 단적으로 보여준다. 여기서 나타났던 '죄의 공유'가 '야행관람차'에서도 '왕복서간'에서도 내내 반복되고 있기 때문이다. '야행관람차'에서는 살인죄를 가족과 이웃들이 나누어 짊어지고 '왕복서간'에서는 친구나 연인들이 짊어진다. 이렇게 내내 반복되고 있는 것을 보면 가나에가 궁극적 사랑의 모습으로 죄의 공유를 믿는 것은 틀림없어 보인다.

 

 문제는 이 같은 변화가 왜 일어났는가 하는 것이다.

 

 그녀는 어쩌다 '죄'라는 것을 타자의 제거를 위한 이유가 아니라 오히려 그를 궁극적으로 사랑하기 위한 통로로 받아들이게 된 것일까? 이 까닭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럴 때 대부분 살펴보는 것은 작품이 만들어졌을 당시의 시대적 상황이다. 작가도 어차피 시대와 별개로 살아갈 수 없는 존재고 독자들의 공감 또한 당시 시대적 상황과 불가분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N을 위하여'는 2010년에 나왔다. 2009년의 일본은 2008년 초래된 위기를 어느 정도 해결해 가는 양상이었으나 여전히 상황은 좋지 않았다. 실업률은 역사 이래로 최고조에 달했고 극빈자들의 수 또한 200만명을 넘게 되었다. 한 마디로 어딜가나 절망과 곤궁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우고 있었다. 미나토 가나에가 보여준 변화는 어쩌면 거기에 공명한 것은 아니었을까? 점점 늘어나고 있는 이웃들의 비극적인 삶을 마주하면서 자신의 작품으로나마 이들을 대하는 데 있어 배척과 심판 보다는 먼저 이해와 배려가 주어질 수 있도록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전과는 달리 자기 주장을 굽히고 먼저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이들을 그렸는지도 모른다.

 

 사실 이 'N을 위하여'을 보다 의미심장한 작품으로 만드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그것은 소설을 주의깊게 읽어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이 소설에 미나코 가나에의 분신이라고 해도 좋을 인물이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말하자면 이 같은 변화를 추구하고 있는 가나에의 내면이 그대로 투영된 존재가 말이다.

 바로 그 존재가 초보 미스터리 작가로 나오는 '니시자키 마사토' 이다.

 

 그는 아직 정식 데뷔도 치르지 못한 무명 작가이지만 수 년간 백수로 지내면서도 작가가 되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데 그런 그가 작가가 되기로 결심한 계기가 있다. 그건 어릴 때 겪었던 학대 때문이었다. 그는 학대로 인한 고통의 이유를 찾으려 했고 바로 그 때문에 결국은 문학을 하게 되었다. 미나토 가나에는 그가 직접 쓴 작품까지 소설에서 보여준다. 그 때문에서 소설의 구성이 다소 산만하게 됨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런 위험을 무릎쓰면서까지 가나에가 마사토의 소설을 그것도 두 편이나 인용해야 했던 까닭은 무엇일까?

 

 그 답은,

 흥미롭게도 두 편에 담긴 마사토 소설의 여정이 미나토 가나에의 소설 여정과 비슷하다는데 있다.

 

  그러니까 '작열하는 새'와 '낙원'에 이르는 여정이 그야말로 '고백'과 'N을 위하여'에 이르는 여정과 닮았다는 이야기이다. '작열하는 새'는 당할 수 밖에 없는 고통을 그린다. 거기엔 아무런 이유도 없기 때문에, 오로지 가해자의 전적인 의사에만 달린 것이기에 더 공포스럽다. 때문에 당하는 이로서는 오로지 순응하는 것 밖에는 생존할 길이 없다. 이건 마사토 뿐만이 아니다. 여주인공 스키시타 역시 이 고통스런 과거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때문에 그들은 벗어나는 것으로 앙갚음 하려고 한다. 마사토는 새가 되고 싶어하고 스키시타는 아버지가 지배하고 있는 섬을 벗어나려 한다. 이 벗어남은 바로 자신에게 고통을 가하는 존재가 버티고 있는 세계를 버림이니 그 벗어남 자체가 바로 타자의 배제에 다름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작열하는 새'는 그대로 가나에의 데뷔작 '고백'과 닮았다. 사실 '고백'의 모든 이들 또한 자신을 얽매고 고통을 주고 있는 것에서 벗어나려 한다. 사실 그들의 '살인'조차 알고보면 그들의 벗어남이 좌절되었을 때 찾아온다. 벗어남을 통한 타자의 제거가 불가능함으로 아예 그 존재 자체를 지워버리려는 것이다.

 

 이렇게 '작열하는 새'는 '고백'의 미나토 가나에를 그대로 담고 있었다. 문제는 이것이 과거의 고통이라는 것이다. 즉 스키타시와 마사토는 트라우마를 간직하고 있다. 마사토는 그 트라우마를 치유하기 위해 문학이라는 소재를 택한다. 하지만 '작열하는 새'를 쓸때만 해도 마사토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행위와 이유는 어떤 경우에도 한 쌍인 것일까?

 이미 일어나 버린 일에 대해 뒤늦게 이유를 늘어놓아 봐야 사실은 아무 것도 변하지 않는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동기다, 경위다, 이유다 하는 것을 요구하는 것일까. (p.247)

 

 그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지금 그 무엇을 한다고 해도 과거는 어차피 변하지 않는다는 걸.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글을 썼던 것은 상상적으로나마 거기에 복수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현실에서 불을 지르면 중대한 범죄가 된다. 설령 사랑을 위해 지른 불이라도. 방화의 이유가 사랑이라도 죄는 죄. 폭력의 이유가 사랑이라도 죄는 죄. 광기의 이유가 사랑이라도 죄는 죄. 어리석은 행위라며 멸시받고, 매도당하고, 존재했던 사랑마저 부정되고 만다. 하지만 문학의 세계에서는 이런 것들이 진정한 사랑이라고 평가된다. 과거의 인생에서 사랑을 찾아내고 싶으면 사실을 문학이라고 승화시키면 된다. 그러려면 각색이 필요하다.(P. 260)

 

 그렇게 애초엔 타자의 제거가 초점이었다. 하지만 '작열하는 새'를 쓰면서 그는 변한다. 글 자체가 자신을 객관화하고 그것을 반성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객관적인 자아를 창출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글을 통해 자신을 객관화한다는 것은 타자의 시선으로 자신을 볼 수 있게 됨을 뜻한다. 즉 글을 읽고 쓴다는 것 자체가 타자에게 자신을 여는 행위라는 것이다. 이야기라면 더욱 그렇다. 그 이야기를 쓰면서 작가는 여러 인물의 내면 속으로 들어가 그와 하나가 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정 덕분에 그는 자신의 과거를 받아들이게 된다.

 

 마침내 나는 과거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다 쓰고 나서 그런 예감과 보람을 느낀 작품, 그것이 바로 '작열하는 새'였다. (P. 261)

 

 그래서 그에 뒤이은 두 번째의 소설 '낙인'은 완전히 변한다. 그건 치유의 이야기이고 이것은 바로 '작열하는 새'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작열하는 새'와 '낙인'이 보여주는 궤적은 그대로 '고백'과 'N을 위하여'가 이루는 궤적과 같다.  이 말은 마사토에게 일어난 것과 동일한 것이 바로 미나토 가나에 자신에게도 일어났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니까 종합하자면 과거에 있었던 어떤 트라우마 때문에 그녀는 '고백'이란 소설을 쓰게 되었지만 타자의 제거에만 맞추어진 '고백', '속죄', '소녀'를 쓰다가 그 과정을 통해 어느 순간 그녀 역시 시선을 자신만의 고통이 아니라 타자의 고통 또한 아울러 보게 되었고 그것이 2009년 이래로 범람하는 이웃들의 고통들에 눈을 돌리게 하여 결국 이전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N을 위하여'를 쓰게 되었다고 말이다.

 

 가나에는 자신의 그러한 변신이 어디로 갈 것인가를 마사토가 글만이 아니라 실제 행위까지 하게 함으로써(스포일러상 구체적인 설명은 생략한다.) 강조한다. 그리고 아시다시피 이러한 가나에의 결심은 '왕복서간'에 이르기까지 내내 지속되고 있다.

 

 지금에서야 만나는 'N을 위하여'는 그런 소설이었다. 자신이 앞으로 무엇을 지향할 것인가를 아예 자신의 분신까지 만들어 넣어서 친절하게 말해주는 소설이었다. 하지만 솔직히 얘기하자면 약점이 없다고 할 수 없다. 앞서도 말했지만 변화를 설명해 주려는 것에 대한 과도한 친절 때문에 구성이 다소 산만해진다는 점 뿐만아니라 주인공들이 왜 그리해야 했는지 그 동기도 잘 와닿지 않는다. 다소 무리가 있는 전개란 점을 인정할 수 밖에 없는데 개인적으론 오히려 그래서 미나토 가나에의 진심이 더 잘 드러나게 된 것 같다. 무언가 꼭 전할 말이 있으면 사실 그 때문에 무리를 하게 되는 법이 아니던가. 그래서 사실 데뷔작 제목인 '고백'은 바로 이 작품에 쓰여져야 했지 않을까 싶다. 이 작품은 말 그대로 지금 미나토 가나에가 작가로서 어떻게 시작했고 글을 쓰면서 어떻게 변했으며 그래서 이제는 어디로 가고 싶은지 그 내면에 일어났던 풍경들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말그대로 미나토 가나에의 '고백'과도 같은 작품이니까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가나에 작가 자체에 관심을 가지신 분들이라면 정말 꼭 읽어야 될 작품이 아닐까 생각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물의 관
미치오 슈스케 지음, 김은모 옮김 / 북폴리오 / 2012년 6월
평점 :
품절


 

 

 

   미치오 슈스케 소설 속 심연엔 딜레마가  있다.

 

  그건 개미지옥과 같다.

  삐져나오려 버둥거릴수록 오히려 더 깊이 끌려들어가기만 할 뿐인...

  그런데 생각해보면 그 딜레마란 삶이란 것 자체에서 오는 딜레마다.

 사람은 자기를 구속하는 것에서 해방되는 것을 원하는 한 편으로 막상 자유함으로 한 껏 열려진 세상에서 무엇을 만나게 될 지 몰라 두려워서 다시금 껍질 속에 웅크려 있기를 원한다. 그 처한 현실을 벗어나고 싶어하지만 정작 떠나려고 하면 그 익숙해진 현실이 커다란 유혹으로 다가온다. 삶이 가진 영원한 딜레마다. 슈스케의 인물들은 바로 그 사이에서 어쩔 줄 몰라하는 존재들이다. 그래서 '달과 게'에 나왔던 '소라게'는 그야말로 슈스케 속 인물들의 단적인 상징과도 같다.

 

 늘 벗어나고 싶어하는 껍질을 삶이 가진 예측불가능성에 대한 두려움으로 언제든 거기로 도피할 수 있도록 자기 몸의 한 부분으로 삼아 등에 지고 걸어가는 존재들이 바로 슈스케 속 인물들이 아니던가...

 

 그런 그들이 되었다고 생각해보라...

 

 당신이 어찌할 수 없는 상처가, 아픔이 현존하고 있어 내내 통증을 호소하여 온다면...

 그럴 때 당신은 어떡할 것인가?

 

 '구체의 뱀' 이후 슈스케가 천착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 질문이란 걸, 나는 이번에 나온 '물의 관' 에서 다시금 확인한다.

 

 

 

 자신들의 분신과도 같았던 '소라게'를 라이터 불로 지지면서, 그렇게 유대교에서 자신의 죄를 양에게 전가시켜 불태움으로써 용서받았던 대속의 제의와도 같은 유희를 통해 현실의 상처를 때때로 지워버렸던 '달과 게'에서의 아이들의 놀이는 '구체의 뱀'에 이르러서는 '스노돔' 안에 간직해 두고서는 그대로 결빙시켜 버리더니 이번 '물의 관'에 이르러서는 이제 '수몰'이라는 이미지로 나타난다.

 

 일단 그렇게 슈스케가 지울 수 없고 현실 속에서 내내 반복되는 고통에 대한 첫 반응은 '의도적 망각'을 가져오는 것이다. 당신의 마음 한 부분에 스노돔을 만들어라. 상처를 그 안에 두고 그대로 결빙시켜 버려라. 당신의 마음 어딘가에 상처가 깃들어 있다면 그걸 그대로 수몰시켜 버려라. 저 깊은 심연 속에서 시간이라는 해초들이 무성히 자라나 지워버릴 수 있게... 이런 주문을 독자들의 귓가에 읊고 있는 것이나 같다. 삶은 반복된다. 주인공 할머니의 삶은 그대로 주인공이 아는 여자 아이의 삶으로 다시 재생된다. 그 힘겨웠던 삶 속에서 소라게처럼 살아왔던 자신을 나타내는 분신이라 할 수 있는 '도롱이'는 할머니에게서 여자 아이에게로 이어진다. 이건 주인공에게 삶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가늠할 수 있는 현상이 된다. 고통은 그치지 않고 세대를 거치고 거쳐서 반복된다. 그 고통 속에서 삶이라는 것을 지속하려면 할머니가 그러했듯 '의도적 망각'이 필요하다. 프로이드도 말하지 않았던가! 무의식이 바라는 욕망은 현실 사회가 용인하지 못하는 것이어서 의식인 '이드'는 그것을 사회가 용인할 수 있는 수준으로 위장 시키는데 그것이 바로 꿈의 형상이라고. '의도적 망각'이란 그런 것이다. 그러므로 할머니가 그랬듯 자기 기만의 거짓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삶이 어디 진실만 가지고 살아지는 법이던가? 때로 그것이 기만이든 아니든 거짓이 필요하다. 계속 살기 위해 스스로 속여야만 하는 순간은 누구에게나 찾아오기 마련이다. 슈스케의 깨달음은 바로 여기서 찾아왔다. 그래서 의도적 망각을 부정적으로만 여기지 않는다. 어쩌면 그것이야 말로 여자 아이 아버지가 들려준 어둔 바닷속 이야기처럼 혹은 주인공이 문화제 때 만든 유령의 집처럼 까맣게 어둡기만 한 삶을 오로지 작은 랜턴 불빛 하나만 의지한 채 걸어나가야 하는 우리들로서는 필요한 것일지 모른다. 슈스케는 그렇게 생각한다. 이렇게 된 연유는 무엇보다 삶이라는 것이 그저 '우연한 깃듦'에 다름아니다라는 자각 때문이었다. '구체의 뱀'에서 주인공은 남의 집에 더부살이를 한다. '물의 관'에서 주인공은 '여관 집' 아들이다. 그 자각이 이러한 설정을 가져왔다. 어디에도 뿌리내릴 수 없는 모든 삶이란 바람이 쉬어가는 곳처럼 우연적 거처임을 나타내기 위해서. 그래서 우리는 더욱 자유를 원하는 한 편 두려움에 젓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오래도록 절벽 가장자리에 매달린 사람과도 같이. 저려오는 팔의 아픔 때문에 당장이라도 놓아버리고 자유롭고 싶은 반면 눈에 보이는 저 까마득한 높이를 질주할 추락이 두려워 더욱 매달리게 되는지도 모른다. 결국 거기서 아픔은 늘 현재를 부정하게 만든다. 삶은 단순히 그 아픔을 지우기 위한 수동적인 것이 되고 만다. 콧두레에 코를 꾄 소처럼 상처와 아픔에 삶이 내내 끌려가는 형국이다. 그래서 슈스케는 망각을 요청한다. 무엇을 망각해야 하나? 저려오는 이 팔의 아픔인가? 아니면 내가 추락할 저 높이인가? 결론은 모두 다이다.

 

 아픔의 현존은 제대로 사고하지 못하게 만든다. 진정한 선택은 늘 제대로 사유할 수 있을 때라야 가능할 것이다. 그러니 모든 아픔을 유보한다. 거리를 두기 위해 의도적으로 망각한다. 슈스케는 그렇게 망각을 삶의 필수적인 한 부분으로 껴 안는다. 그리하여 '달과 게'에서는  보이지 않게 망각 속으로 흩어졌던 상처들이 이제는 '구체의 뱀'에선 스노돔으로, '물의 관'에서는 수몰된 것으로 그렇게 언제고 내킬 때마다 들여다 볼 수 있는 실체가 된 것이다. 이건 변화이다. 깃든 상처란 지울 수 없다는 체념이자 기왕지사 삶이 우연적이며 때문에 상처로 부터 영원히 달아날 길이 없다면 보다 제대로 살기 위해서라도 망각을 안고 보듬어갈 수 밖에 없다는 고통스런 승인이다. 하지만 그게 삶이다. 삶은 우연적이고 문자그대로 예측 불가능하기 때문에 절망만큼이나 희망 역시 열려있기 때문에 도박과도 같지만 견뎌나가야 한다. 어차피 삶이란 내기에 불과하다. 궁극적인 결과란 죽음이 도래했을 때라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때까지는 계속해서 견뎌나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의지가 될만한 것은 닥치는 대로 붙잡아야 한다. '달과 게'에서의 대속적인 제의든 '구체의 뱀'이나 '물의 관'에서의 망각이든 무엇이든...

 

 이것은 슈스케의 선동인가? 아니다. 이것은 차라리 연민이다. 그는 우리가 연약한 존재임을 아파하지만 그걸 긍정할 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그 약한 존재인 우리가 최대한 할 수 있는 것을 다 하자라는 어떤 흐느낌이 느껴진다. 그 절박한 호소가 와 닿는다. 그리고 그 호소 속에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 슈스케가 성장하고 있다...'라고...

 

 

 


댓글(2)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진 2012-07-27 04: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끔찍한 더위 속에서 무너져 가는 알라딘에 헤르메스님의 리뷰가 올라오니 마치 한 줄기의 빛을 보는 것 같습니다.
헤르메스님ㅜㅜ 저요 수련회 갔다와서 몸살감기에 걸렸어요.
온 몸의 뼈가요, 제 자리에 있지 않고 마구 돌아다니는 느낌이예요. 입에서는 이상한 냄새도 나고.
약 먹고 일곱시에 자서 몇번이고 일어났다가 이젠 완전히 일어나버렸네요.
안 그래도 더워서 글 쓰기 귀찮은데 이젠 몸까지 아프니요. 소설을써야하는데 힘드네요.ㅜ
여름감기는 개도 안걸린다는데(?) 헤르메스님께서도 꼭 몸조심!

ICE-9 2012-07-28 23:01   좋아요 0 | URL
흑흑... 저 역시... 이 무더위를 외투처럼 뒤덮고 있는 요즘. 소이진의 이런 고마운 댓글을 받으니 어디선가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에 더운 이마를 차게 식히는 듯 하네요. 아, 이런 소이진님 여름 몸살은 특히나 힘들게 한다고 하는데 정말 많이 편찮으신 것 같네요. 더운데 아프면 더 고생인데 얼른 건강하게 되기를 바랄게요. 그래야 소설도 빨리 읽을 수 있겠죠^ ^
 
[달리의 고치]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달리의 고치 작가 아리스 시리즈
아리스가와 아리스 지음, 최고은 옮김 / 북홀릭(bookholic) / 2012년 1월
평점 :
품절


 

 책을 읽는 이에게 있어 작가의 마음이 마치 손에 잡힐 듯 다가올 때 보다 더 기쁜 일이 있을까 싶다. 무모함을 약간 가미해서 말하자면 아리스가와 아리스가 내겐 그런 작가다. 결정적 계기는 지난 번 '주홍색 연구'를 읽었을 때였다. 중간쯤 이르렀을 때 갑자기 눈이 열리는 듯 하면서 이 작가가 무슨 말을 하고 있구나 하는 것이 선명히 각인되는 경험을 했었다. 실로 오랜만에 맛보는 짜릿한 경험이었고(레이먼드 카버 때도 그런 경험을 한 적은 있지만) 그래서 아리스가와 아리스가 더욱 가깝게 느껴졌다. 그렇게 해서 알게 된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작품들의 의미. 특히나 히무라 시리즈의 경우에 있어서는.

 

 단순하게 말해, 이것들은 하나의 대답과도 같다. 그러니까 아리스가와 아리스가 그 때 그 때마다 자신이 천착하고 있는 본격 추리물에 대해 던지는 질문에 대한 대답 같은 것이다. 이를테면 '주홍색 연구'는 자신이 지향하는 본격 추리물이 가졌으면 하는 가장 이상적 형태에 대한 대답이었다. 그 소설은 자신의 본격 추리물이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탐구였고 그 탐구 끝에 나온 대답이 바로 '타인의 구원을 위한 기도로서의 본격 추리'였다. 이것은 히무라 시리즈의 두번째 작품 '달리의 고치' 역시도 마찬가지다. 이 역시 아리스가 던지는 질문에 대한 스스로의 대답이다. '아리스 자신에게 있어 본격 추리란 과연 무엇인가?'가 바로 그 질문이며 그 탐색의 과정이 바로 '달리의 고치'인 것이다.

 

 

 

 말하자면 아리스의 작품이란 선종에서 종종 깨달음을 얻기 위해 던지는 화두와도 같다. 그의 작품은 이를테면 하나의 화두에서 시작하여 묵상을 하고 그 결론을 해결편처럼 내어놓는 형식인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화두처럼 던져진 질문.

 아리스에게 본격 추리란 과연 무엇일까?

 대답은 간단하다. 바로 '달리의 고치'인 것이다.

 

 달리의 고치는 사건이 일어난 장소다. 이 고치란 달리를 흠모하여 외모마저도 달리 처럼 꾸미고 사는 쥬얼리 기업체 사장이 명상을 위한 장소로 특별히 고안된 기계장치다. 즉 고치 처럼 은둔해서 조용히 개인의 내면 속으로 침잠할 수 있는 기계란 뜻이다. 여기서 바로 드러나듯이 즉 달리의 고치란 도피처의 또 다른 말이다. 이렇게 달리의 고치가 가지는 의미가 파악이 되면 소설 내내 바로 이와 같은 도피처를 뜻하는 것들이 참 많이 나옴을 우리는 보게 된다.

 

 먼저, 쥬얼리가 그렇다. 거품 경제의 호황을 타고 번성하게 된 쥬얼리 산업에 대해 탐정역의 히무라는 이렇게 말한다.

 

 "고도 성장기에 들어서 귀금속이 대중화되자 다른 상품들 처럼 체인점이 출현하게 되었지. 대량 매입 대량 판매에 의한 대중 판매지. (..) 매장 문턱이 낮아지면서 자기 취향의 물건을 예산에 맞춰 자유롭게 고를 수 있게 되었어. 79년 닛케이 신문에서 조사한 전문점 랭킹의 보석, 시계, 안경 전문점 부문에서는 귀금속 체인이 상위를 차지했어(p.85)"

 

 바로 이 체인점의 호황 덕분에 살해당한 사장은 막대한 부를 거머쥐게 된다. 그런데 히무라 말에서 드러나듯이 고도성장기에 있어서 귀금속은 일종의 도피처였다. 고도 성장에 따라 당시 일본인들은 조직 속의 한 개인으로 점점 왜소해지는 자신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그럴 때 귀금속 체인점은 좋은 유혹이 되었다. 왜냐하면 체인점이 존재하기 전까지 귀금속이란 오로지 부유한 자들만이 이용할 수 있는 전문점에서만 판매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문턱이 낮아진 체인점은 일반인들도 귀금속을 얼마든지 살 수 있게 함으로써 일반인들에게 마치 부유층이 된 것만 같은 기분을 고양시켜줄 수 있었다. 그들은 그것으로 점점 왜소해지는 자신을 잊어버릴 수 있었고 때문에 귀금속 체인점은 하나의 도피처가 되었다. 그러므로 살해당한 사장이 자신의 개인적인 도피처를 가지고 있는 것은 당연한 설정이다. 그의 막대한 재산이 모두 사람들의 도피처에 대한 염원을 자양분으로 하여 무럭무럭 커온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도피처는 죽은 사장 뿐만 아니라 그 용의자가 되는 자들에게까지 존재한다. 스포일러상 자세히 말할 수는 없으니 뭉떵거리듯 말하자면 어떤 이는 사랑을 또 어떤 이는 점치는 것을 그리고 또 어떤 이는 다른 이성의 모습을 하는 것을 도피처로 삼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소설 속 등장인물 저마다는 모두 각자의 도피처를 가진다. 그런데 그렇게 도피처를 가지게 된 연유는 다 비슷하다. 일본인들이 귀금속 체인점을 도피처로 삼았던 이유가 사회 안에서 보다 궁극적으로는 타자들 앞에서 왜소해지는 자신 때문이었듯이 등장인물들 역시도 타자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 때문에 도피처를 가지는 것이다. 즉, 그들의 도피처란 바로 불안하고 두려운 타자들을 피해 숨어들 수 있는 온전한 자신만의 세계에 다름 아니었다. 이러한 도피처의 총체적인 성격은 바로 작가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분신인 소설 속 작가 아리스에게 집약되어 나타난다. 그리고 바로 거기서 지금 작가 아리스가 이 작품에서 던지고 있는 화두. 자신에게 본격 추리란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이 나오게 된다.

 

 그것은 물론 도피처라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어쩌다 본격 추리를 쓰게 되었는지 그 내력을 알려준다. 이것이 바로 '주홍색 연구'에서 스쳐가듯 나왔던 그가 중3 때 열정적으로 한 편의 추리소설을 써내려간 내막이다. 또한 이것은 현실의 아리스가와 아리스에게 진짜 일어났던 일이기도 하므로 그가 어쩌다 본격 추리에 천착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진짜 이유이기도 하다. 바로 그 이유로 인해 본격 추리가 그에게 어떤 의미인지 드러나게 되는데 무엇보다 그가 본격 추리에 매달리게 된 원인엔 타인으로 부터의 실연이 있었다. 즉 작가 아리스가와 아리스 역시도 '본격 추리'라는 고치를 가지게 된 연유가 다른 이들과 그리 다를바 없었던 것이다. 때문에 여기서 그가 가지고 있는 본격 추리의 의미란 더욱 명확해진다. 바로 자신의 도피처라는 사실이다. 그는 그것을 내내 강조하기 위하여 등장인물 모두에게 저마다의 도피처마저 가져다 준 것이다.

 

  하지만 화두란 늘 그렇듯이 현상의 확인이 아니라 탈출을 위한 출발이다. 즉 해답이란 언제나 나아가기 위한 출발점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자신에게 본격 추리가 도피처란 대답은 이제 그로 부터 벗어나겠다라는 의미와도 같다. 그가 그런 자세로 이 소설에 임하고 있음은 우리가 '주홍색 연구'에서 그가 찾아낸 결론으로도 확인되는 바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히무라의 사건 해결을 다른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 아리스는 본격 추리를 지향하고 있지만 그 해결에 거는 의미는 우리가 생각하는 단순한 트릭 풀기가 아닌 것이다. 그건 차라리 그가 이 소설을 통해 내내 탐색한 과정의 최종 해답과도 같은 것이다.

 

  스포일러상 해결편을 말할 수 없으니 여기서 조금은 에둘러갈 필요가 있다. 해결을 통해 아리스가 가지고자 하는 의미는 무엇보다 왜 제목을 하필이면 달리의 고치로 했느냐 아니 보다 궁극적으로는 왜 달리를 끌여들었느냐를 통해 간접적으로 설명될 수 있다. 그래, 왜 달리인가? 아리스는 왜 피해자인 사장을 그토록 달리를 흠모하는 인물로  설정했을까? 그건 소설에서도 바로 나오지만 달리가 자신의 연인 갈라에게 행했던 그 사랑 때문이다.

 

  소설은 달리가 얼마나 갈라를 사랑했는가를 말해준다. 하지만 정작 갈라는 달리를 그저 이용했을 뿐이라는 소문도 있다고 히무라는 말한다. 여자를 좋아하지 않는 그답게 참으로 냉정한 대답이다. 하지만 갈라가 그러거나 말거나 달리는 상관하지 않았다. 그는 갈라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갈라가 자신에게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는 상관하지 않고 오로지 그 사랑에만 충실했다. 전적인 내어줌. 그것이 바로 달리가 갈라에게 행한 사랑의 본질이었다. 바로 그 때문에 아리스는 '달리'를 가져온 것이다. 이는 도피처가 오로지 타자들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생겼다는 걸 생각하면 더 분명해진다. 달리는 타자 때문에 불안을 느끼거나 타자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였고 그래서 도피처를 필요로 하지 않는 자였기 때문이다. 바로 그 달리 안에서 도피처에 대한 욕망으로 부를 쌓아올린 사장이 명상의 장소로 사용한다는 건 정말 의미심장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건 그대로 본격 추리에 대해 바라는 아리스의 모습과 그대로 판박이다. 즉 그 사장이 바로 아리스인 것이다. 그 사장이 달리의 전적인 내어줌에서 힘을 얻고자 했듯이 아리스 역시 자신의 본격 추리가 그런 존재가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타인에게 전적으로 내어줄 수 있어서 이제는 도피처가 아니라 오히려 자신과 타인들을 지탱해 줄 수 있는 존재가 되기를 말이다. 에필로그 처럼 붙여진 마지막 장면은 정확히 바로 이것을 나타내고 있다.

 

 아리스가와 아리스는 누누히 말하지만 그냥 단순한 본격 추리 작가가 아니다. 그는 정말 본격 추리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있는 작가다. 더구나 본격 추리 역시 작가 하기에 따라 얼마든지 높은 문학적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고 일종의 긍지까지 가지고서 생각하는 작가다. '달리의 고치'는 그러한 그의 열정 그리고 자부심이 짙게 투영된 작품이다. 한 마디로 미스터리라기 보다는 작가 아리스의 신념의 산물이다. ('달리의 고치'에서 이루어진 플롯이나 디테일의 치밀한 설정만 봐도 그것을 느낄 수 있다. 나는 이 리뷰를 통해 그것을 많이 드러내려 했으나 스포일러의 한계상 그리고 능력 부족으로 원하는 만큼 드러내지 못했음을 참으로 아쉽게 여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불야성 불야성 시리즈 1
하세 세이슈 지음, 이기웅 옮김 / 북홀릭(bookholic) / 2011년 12월
평점 :
품절


 

 

 

 

 

 

 하드보일드는 무엇보다 아웃사이더의 감각으로 충만하다.

 

'주류'라는 것에 피로를 느끼고 '세상의 상식'이라는 것에 멀미를 느끼는

한 번 그저 한없이 가벼운 깃털 처럼 속된 세상을 훌쩍 벗어나 자유롭고 싶은 영혼이 위안을

구하듯 내미는 손을 덥석 마주 잡아주는 것이 바로 하드보일드라 할 수 있다.

 

  그렇게 세상의 바깥으로 불러내 위안을 준다는 의미에서 하드보일드는 판타지와도 비슷하다.  하지만 하드보일드는 판타지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판타지는 먼저 세계를 변화시켜 그걸 보는 자아를 변화시키려 한다. 전혀 다른 세상의 모습과 거기의 논리를 통해 당신의 눈을 바꾸고 생각을 바꿔 당신을 짓누르는 현실의 중력을 제거하는 것. 그것이 판타지고 그렇게 먼저 당신의 환경을 변화시키는데 초점을 둔다. 그러니까 판타지엔 인간이 변하기 위해서는 일차적으로 그를 둘러싼 환경이 먼저 변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는 것이다. 의식을 환경의 종속물로 여기기 때문에 판타지가 깨우는 것은 당신의 이드 속에 감춰진 또 다른 '하이드씨'가 아니라 달리 볼 수 있는 당신의 '시선'이다. 그렇게 당신이 서있는 그 자리를 슬쩍 다른 자리로 이동시키는 것. 그것이 바로 판타지인 것이다.

 

 

   물론 하드보일드 역시 당신을 어디론가 데려간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게 판타지가 그러듯이 달리 볼 수 있는 자리 같은 건 아니다. 이를테면 '무대의 뒷편' 같은 게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하드보일드는 무대의 더 깊숙한 곳으로 데려간다. 무대의 핵심, 현실보다 더 현실다운 곳. 우리의 일상이 서로의 음흉한 속내를 숨기고 온갖 기만과 위선으로 덧칠되어 있음은 현대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이라면 누구나 다 느끼는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는 생존을 위해서 짐짓 모른 체 살아간다. 더러 구차하고 억울한 일을 당해도 세 끼 밥벌이에 필연적으로 따라붙는 옵션이라 생각하고 지구에 매달리기 위한 보편적 숙명이라 스스로 정당화한다. 더러 자기가 바라보는 세상이 다가 아니라고 애써 자위하기도 한다. 세상이 전부다 이렇다면 도저히 살지못할 것 같아서 차라리 나만의 경우가 아주 특수한 경우이고 그래도 세상 어딘가엔 아름다움이, 희망이 있을 것이라고 마치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를 잡는 절박한 심정으로 믿으려 자기 최면을 건다. 어쨌든 희망이란 게 가장 좋은 의미의 거짓말에 불과함을 알더라도 말이다.

 

 

   세상에 만연된 기만과 위선, 그리고 거기에 길들어짐에 따라 이제는 자기 스스로 껴입어버린 기만과 위선... 그렇게 체념 속에 자위하고 그렇게 오욕 속에 굴복하는 자아에게 하드보일드는 어디선가 불쑥 튀어나와 그의 목을 부여잡는 억센 손이 된다. 그리고 그 목을 비틀어 다른 손이 유원지의 요술 거울 처럼 현실을 왜곡하고 치장하는 모든 껍질을 산산히 부셔 드러낸 진실을 보도록 만든다. 벌것벗은 맨 얼굴의 진실을,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것을... 그렇게 무대 깊숙한 곳에 놓인 진실들을...

 

 

   따라서 하드보일드의 성공 조건은 총잡이의 액션도 포커페이스들의 비정도 아닌 '가면 벗기기'에 있다. 세상이 쓴 가면을 그리고 우리가 스스로 쓴 가면을 얼마나 잘 벗길 수 있느냐,거기에 하드보일드의 성공 여부가 달려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하드보일드는 '디스토피아적'이다. 왜냐하면 하드보일드는 세계에 대한 '홉스'적 시각이야말로 진리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모든 이들은 모든 이에 대하여 늑대'라는 그 시각 말이다. 그렇게 늑대들로 가득찬 세계. 여기엔 더이상 그 어떤 배려도 공존도 없다. 오로지 네가 죽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 식의 양자택일만 가능할 뿐. 때문에 우리는 하드보일드를 이제는 전혀 다르게 보아야 한다. 넘쳐나는 액션은 송곳니로 서로의 목을 물어뜯는 것과 같은 사람들의 이기적 행태들을 은유하는 것이며 하드보일드만이 가진 특유의 비정성 또한 '늑대들의 제국' 신민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자칫 동정과 배려를 베풀었다간 언제 자신이 오히려 목을 물릴지 모른다는 생존에 따른 두려움 가운데 어쩔 수 없이 지니게 된 경계 본능에 대한 은유라고. 따라서 이 모든 것들은 하드보일드가 의도적으로 가져버린 장르적 특징들이 아니라 모든 허위와 치장을 벗겨 세상의 가장 속된 진실 위에서만 움직일 수 밖에 없는 하드보일드로가 당연히 가질 수 밖에 없었던 생래적 특징들이라고 여겨야 한다는 것이다. 즉 하드보일드는 단순히 비유하자면 '빨간약'이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모피어스가 네오에게 건넸던, '진짜 현실'로 돌아가게 만들 바로 그 '빨간약'이다.

 

   그러니, 하드보일드는 아직도 세상 어딘가에 희망이 있다고 믿는 당신의 기만적 몽상을 거부한다. 물론 여기엔 조건이 있다. 그 희망이란 게 다만 입만 벌리고 감나무에서 떨어지는 감을 기다리는 것과도 같이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그저 막연히 도래하기만을 기다리는 희망일 경우이다. 하드보일드는 그런 무임승차적 꿈꾸기를 거부한다. 하드보일드가 궁극적으로 세상의 가면과 당신의 가면을 벗기는 이유는 당신을 그저 구경꾼으로 남겨두지 않기 위해서다. 하드보일드가 그 가면을 벗겨내어 세상의 적나라한 현실을 목도하도록 하는 것은 당신을 하나의 투사로 만들기 위해서다. 그러니까 당신 외엔 아무도 당신이 꿈꾸는 그 희망을 쟁취시켜줄 자가 없으니 당신이 조금이라도 더 나은 세상을 원한다면 골방에 처박혀 자위하지 말고 직접 나서서 싸우라고 창과 방패를 쥐어주는 것. 그것이 바로 하드보일드다. 그렇게 전혀 다른 '나'를 깨우는 것. 일상 속에선 찾을 수 없었던 전혀 다른 이면의 '하이드씨'를 깨우기 위한 자명종이 되는 것. 그것이 정녕 하드보일드가 원하는 바이다.

 

 

   때문에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하드보일드가 독자들을 경계 밖으로 데려간다고는 할 수 없다. 차라리 독자들 스스로 내부에 이전부터 간직된 아웃사이더가 되고자 하는 마음 자체가 하드보일드를 잡게 만드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살면서 굳이 직접적으로 듣지 않아도 경험으로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에게 맞서 '정의는 강자의 이익일 뿐'이라고 당당히 외쳤던 트라시마코스의 말마따나 이 세상에 정말은 어떤 법칙들이 통용되고 있는지 말이다. 하지만 머리로는 이해해도 가슴으로는 승복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결국 그 트라시마코스를 무너뜨렸던 소크라테스의 다이모니온, 우리 영혼에 간직된 그 양심의 소리가 있기 때문이다. 사람과 동물이 다른 점은 단 하나다. 인간은 자신이 전혀 모르는 이를 위해서도 희생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 그렇게 아무 이유 없이도 타자를 배려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만이 인간다움을 이룬다고 할 수 있다. 다이모니온이란 바로 그 배려에의 호소이다. 나만 아는 괴물이 아니라 스스로 타자를 배려하는 진정한 사람으로 있고자 하는 저 깊은 곳에서 울려 나오는 자발적 의지의 메아리가 바로 양심이다. 바로 이 내부에 공명되는 의지의 울림에 예민한 자들은 눈 앞에 드러난 모든 송곳니들과 어금니들의 광란에 피로와 혐오를 느낄 수 밖에 없고 그래도 좌절하지 않고 부단히 인간으로 남고자 기댈만한 뭔가를 잡고자 손을 뻗게 되는 데 거기에 부여잡힌 것이 결국 하드보일드라 할 수 있다.

 

   그러니까 하드보일드는 '맞잡은 손'이다. 앞서 진실을 목도키 하기 위해 거머쥐는 손이라 했지만 그것은 모퉁이를 돌다 불현듯 채권자를 마주한 운없는 채무자 마냥 그렇게 느닷없이 하드보일드와 만나게 되는 자에게나 타당한 비유이다. 하드보일드의 진정한 본질은 '맞잡은 손'이다. 또한 바로 여기에서 하드보일드는 결정적으로 판타지와 갈라진다. 판타지 역시 세상의 진실을 목도하도록 한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판타지는 인식의 변화를 주는 것에 만족할 뿐 그것을 위해 행위할 지 말지에 대해서는 독자 자신이 결단해야 할 부분으로 남겨두기 때문이다. 그래서 판타지의 마지막엔 늘 '현실로 되돌아옴'이 있는 것이며 그래서 판타지가 현재는 손을 맞잡고 있더라도 종국에 가선 이별의 손짓이 예정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하드보일드에겐 그런 예정된 이별이 없다. 오히려 하드보일드는 당신에게 되돌아갈 현실 따윈 없다고 말하며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맞잡은 손을 풀지 않겠다고 말한다. 그렇게 그의 맞잡은 손은 단순한 인식의 변화를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으로 하여금, 어쩌면 그 이전부터 내내 마음 속에 품고 있었을지도 모를, 행위에로의 참여를 복돋우고 응원하는 손이다.

'쫄지말고 행하라! 우리가 하나가 되어 응원하겠다!' 이런 무언의 울림이 맞잡은 뜨거운 온기 가운데 전해져 오는 그런 손인 것이다.

 

   당신이 하드보일드를 만난다는 것을 그런 것이다.

   그는 당신의 목을 거머쥘 수도 있고 당신이 내민 손을 맞잡아 줄 수도 있다. 하지만 속내는 같다. 이 야수들로 가득한 세상에서 당신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 인간의 영혼이 몇 푼의 돈으로 도매금으로 쉽게 팔리던 대공황 때 태어난 이후로 그것은 내내 변하지 않았다. 샘 스페이드, 필립 말로우, 마이크 해머, 루 아처 현대의 매듀 스커더, 엘비스 콜, 켄지와 제나로 그리고 일본의 사와자키에 이르기까지 시대가 변하고 국적이 달라도 전혀 변하지 않았다.

 

    당신은 혼자가 아니다.

    당신이 달라지려고만 마음 먹는다면 이렇게 많은 이들이 케빈 코스트너가 주연했던 영화 '꿈의 구장'에 나오는 전설적인 메이저리거들이 다시금 현실로 돌아와 오로지 순수한 야구의 기쁨만을 위해 경기했던 그 '구장' 같은 곳에 모여 오직 당신만을 격려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기때문이다. 당신은 오로지 '하드보일드'라는 티켓만 있으면 된다.

 

   그리고 여기 당신에게 또 하나의 티켓을 선물한다.

   하세 세이슈의 '불야성'이라는 진정한 하드보일드 티켓을...

 

 

 

 

   

  주성치의 이름을 거꾸로 차용한 이름이기도 한 작가 하세 세이슈의 불야성은 그동안 좋다는 소문은 무성한데 정작 본 사람은 별로 없었던 전설속의 걸작과도 같은 작품이었다. 소량만 출간되고 내내 절판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에 보시다시피 전혀 새로운 장정에 번역까지 새로이 해서 발간되었다. 가히 명불허전이라 할 정도로 앞에서 내가 말한 하드보일드의 모든 것을 충실히 담아내고 있다. 하세 세이슈가 불야성에서 묘사한 그 날것으로의 세계의 진실이 너무도 선명해 아마도 한동안 그 세계의 여운에서 헤어나오지 못할 것이다. 내내 불이 꺼지지 않는 도시라는 제목 그대로 뇌리에서 쉬이 잊힐 수 없는 멋진 작품으로 기꺼이 추천한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진 2012-02-10 0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암, 졸리다.
지금은 새벽 세시이므로 일단 멋드러진 책의 표지와 제목만 눈길주고는 자러떠납니다~
헤르메스님 안녕히 주무셔요.
감상은 내일해야지 ㅋㅋ
 
구체의 뱀
미치오 슈스케 지음, 김은모 옮김 / 북홀릭(bookholic) / 2012년 1월
평점 :
절판


 

 

 

조용히 밀려드는 파도... 

그 아래서 조금씩 심연 속으로 쓸려가는 모래알...

 

소리없이 내리는 눈...

그 아래서 서서히 존재를 잃어가는 버려진 산사의 외로운 석등...

 

미치오 슈스케의 '구체의 뱀'은 마치 이러한 모습을 영원히 결빙시킨 '스노돔' 같다.

 

 

 

 그 결빙된 풍경 안에 슈스케가 담아두려는 것은 무엇인가?

 그 구체 안의 '뱀'은 원죄를 낳게한 죄악을 상징하는 뱀일 수도 있고...

 생떽쥐베리의 '어린왕자'의 첫 머리에 나오는 코끼리를 삼킨 뱀이라는 그 무엇이든 삼켜버리는,

 아니 스스로 그만두지 않을거라면, 어차피 계속할 걸음이라면, 삼키고 가야할 무정한 '삶' 자체를 의미할 수도 있다.  아니, 자신의 꼬리를 삼켜가는 뱀 처럼 지속될 삶을 위해 스스로 죄의식을 먹을 수 밖에 없는 비정한 '삶'을 나타낸다고 보아야 하나...

 

 

 고통속으로 내던져진 존재...

 

 최근 미치오 슈스케 소설 속 인물들은 '하이데거적 창조물들(creatures)'이다.

그렇게 자신의 선택과는 상관없이 무언가에 의해 고통속으로 내던져진 존재...

전작 '달과 게'에 나왔던 이들도도 그랬고 '구체의 뱀'에 나오는 이들도 그렇다.

메울 수 없는 상실, 지울 수 없는 죄의식을 트라우마로 가진 자들이 만든 '갇힌 우주'.

그것이 미치오 슈스케가 최근에 그리고 있는 세상이다.

투명막 같은 것에 가로막힌 세상. 어디로든 달아날 길 없는 그들...

그래서 신화속 시지프스의 후예들인 그들...

그러한 자들은 어떻게 하나? 스스로를 죽임으로써 벗어나는 용기를 낼 수 없다면 어떻게 하나?

할 수 없다. 같은 상처를 보듬어 안은 자들끼리 스스로에게 손을 내밀고 안길 가슴과 기댈 등을 내밀어 줄 수 밖에...

뱀이 서로의 몸을 섞어 또아리를 틀듯, 서로의 몸에 밀착하여 겨울의 한파를 늑대무리가 견디듯...

그렇게 서로 연대할 밖에...

 

  연대...

 

  이것이 전작 '달과 게'와 지금 '구체의 뱀'을 관통하는 슈스케의 현재 주제이다.

그렇게 그는 근원적으로 치유가 불가능한 고통을 안아버린 이들이 삶을 견뎌가는 방식을 탐색한다. '시지프스의 신화'에서 알베르 까뮈는 허무와 권태 밖에는 가져오지 않는 삶을 왜 지속해야 하는지 물었다. 그는 정말 알고 싶었다. 자살이란 손쉬운 방법이 있는데도 어째서 인간들은 시지프스가 그랬듯이 결국 무위로 돌아갈 이 힘겨운 여정을 계속하는 것일까?

 

 슈스케의 질문 방식도 비슷하다.

어째서 그런 고통과 죄의식을 안고 있으면서도 계속 걷는 것인가?

당신들이 만든 연대가 그리도 많은 힘을 주는 것인가?

그렇다면 그런 연대가 어디 얼마나 유용할지 어디 한번 볼까? 말한다.

 

 

 그가 이렇게 '어떻게'를 물을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그가 보기에 연대가 그리 강고하지 못한 까닭이다.

전작 '달과 게'는 '그 연대의 연약성은 어디에서 기인하는가?'를 묻는 것이었다.

거기서 그는 말한다. 연대가 연약한 이유는 서로가 완전히 신뢰하지 못하는 까닭이라고...

자신의 현실적 고통을 없애기 위해 제의처럼 소라게를 희생시키던 아이들의 연대는 결국 발가벗듯 드러내지 못한 자신만의 비밀스런 아픔들 때문에 산산히 깨어진다. 그들의 연대는 똑같은 고통 위에서 태어났지만 결국 그저 순간의 외로움을 잠시 잊기 위한 피상적 '같이 있음'이었기에 그들의 아픔이 아무런 위안을 받지못할 가능성이 있자 무용지물이 되어버린 것이다. 즉 그들은 서로의 아픔을 덜어서 넘겨주려 연대했을 뿐 받아서 더 가지려는 연대는 아니었기에 아픔의 호소가 무표정에 의해 그대로 반사되어 나온 순간 의미가 없어진 것이었다.

 

  결국 소용 없었어... 사람은 어차피 혼자야...

 

  이것이 '달과 게'에서의 슈스케의 결론이었다.

그것이 성장소설이라 한다면 그렇게 모든 짐을 자기 혼자 져야한다는 것을 깨닫는 것.

그 뼈져린 진실의 확인. 그것이 성장이었다.

 

 그리고 그 진실의 확인 위에서 '구체의 뱀'은 출발한다.

 

 

 

 부모의 이혼으로 자신과 살기를 거부하는 아버지의 내심을 알아버린 주인공 토모는 이웃의 오츠타로 씨네 집에 얹혀산다. 오츠타로씨는 친아버지 이상으로 토모에게 신경을 써 주고 있지만 토모는 어쩐지 끝내는 다가가지 못할 여백을 느낀다. 왜냐하면 7년전 야영을 갔다가 뜻하지 않은 화재로 오츠타로씨가 결국 아내와 큰딸 사요를 잃었기 때문이다. 토모는 그 때 자신도 함께 갔기에 그리고 사요에 대한 개인적 감정도 있어서 여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그렇게 오츠타로 씨네 집에 사는 세 사람... 오츠타로, 토모, 나오는 모두 겉으로는 안정된 가족 같은 삶을 사는 듯 보이나 서로가 자기 둘레에 처 놓은 보이지 않는 경계 안에서 홀로 그 고통을 삭이며 사는 존재들이다.

'달과 게'에 나왔던 '소라게 제의 모임'의 그 세 아이 그대로...

 

 토모는 오츠타로씨를 도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삶의 근거가 되는 집을 서서히 먹어가는 흰개미를 퇴치하는 일을 한다. 하지만 정작 그들 마음 깊숙히 존재하는 영혼을 갉아먹고 있는 흰개미인 고통과 그에 대한 죄의식은 퇴치하지 못한다.

그래서 서서히 그들은 흰개미에게 먹혀간다. 끝없이...

 

 그렇다면 슈스케는 그냥 같은 얘기를 하고 있는 것 뿐인가?

사막 위의 십자가에 매달려 형벌을 받는 죄수가 오로지 홀로 정오의 땡볕을 견딜 수 밖에 없듯이

살아갈 수 밖에 없다고 중언부언하고 있을 뿐인가?

 

 물론 그건 아니다. 삶이 그냥 앞으로 나아가야만 하는 영원히 움직이는 콘베이어 벨트라면

문학 역시도 그렇다. 어쨌든 과거의 작품 보다는 한 발 먼저 내딛여야 한다.

그것이 더 깊은 절망 속이든, 더 허무의 심연일지라도,

어쨌든 조금이라도 더 내뻗는 그 움직임에 문학의 존재는

있는 것이니까... 그렇게 조금이라도 더 확장되는 우리의 사유로 인해 존재하니까...

 

 해서 그는, 그 동기의 연유는 모르겠으나,

그 모든 홀로 상처를 곱씹기만 하는 고독한 은둔을 끊고

비로소 치유를 위한 온전한 연대의 가능성이 어디에서 비롯되는지 이 소설에서 보이려 한다.

바로 토모에게 있어 죄의식의 근원이 되는 자살한 사유를 닮은 토모코의 존재를 통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오츠마루와 토모 모두를 기꺼이 껴안으려 하고 있었던

어두운 바다를 홀로 외로이 비추는 등대와도 같은 존재였던 나오를 통해...

 

 슈스케는 보여준다.

 

 어떻게 해서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고통을 안아버린,

그렇게 달아날 길 없는 트라우마의 구체 안에 갇혀버린

존재들이 연대를 통해 이제 긍정으로써 삶을 껴안게 되는가?

그러한 '함께 함'을 가능하게 하는 힘은 어디서

오는가? 하는 것을.

그것이 바로 배려라는 것을...

나의 아픔을 덜어내는 숟가락으로 타인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비록 나의 아픔은 그대로 쌓이겠지만 그래도 조금이라도 덜 아프기를 바라며

차라리 내가 숟가락이 되어 덜어오는, 타인에 대한 배려.

그것이 바로 상처받은 자 모두를 삶의 자리에 제대로 설 수 있게 하는

온전한 연대를 가능케 하는 모든 것임을 보인다.   

 

 그렇게...

한 없이 파도로 인해 심연 속으로 쓸려가면서도 어떻게 해변은 해변으로 남을 수 있고

한 없이 무정한 눈으로 덮이면서도 어떻게 석등은 석등으로 남을 수 있느냐 라는

삶을 항구적 '스노돔'으로 결빙시킬 힘은 모두...

해변이 모래알을 파도에 내어놓듯이

석등이 자신의 몸을 눈 아래 내어놓듯이...

나를 먼저 내어놓는 가운데 온다는 것을...

슈스케는 그렇게 내딛은 한 걸음.

한 권이 책이라는 그 결빙된 여정. 그것을 통해 보여준다.

 

 삶은 무섭다.

어린왕자의 보아뱀이 정말 무서운 것은 아무리 커다란 것이라 하더라도

홀로 삼켜야 한다는 그 '나누어 질 수 없음'이란 고독함 가운데 있었다.

그 예감된 고독함의 두려움이 너무도 커서 기껏 맺은 연대 또한 실패할 수 밖에 없었다.

슈스케는 이제 다른 쪽을 보라한다. 나만이 아니라 내 곁에 있는 나와 같은 또 한 사람을...

그리고 두려워말고 그를 위해 자기 먼저 내려놓으라 한다.

당신이 그렇게 덜어오는 하나의 작은 숟가락이 된다면

그 역시 덜어가는 숟가락이 기꺼이 되어 줄 것이라고...

우리가 가지는 아픔과 두려움은 먼저 덜어오려 할 때

눈녹듯 사라질 것이라고...

 

 혹시 이 책을 읽고 마지막을 덮고 나서도

흩날리는 눈으로 가득한 예쁜 스노돔에 시선을 하염없이 빼앗기듯 여운이 오래도록 이어진다면

당신 역시 알게모르게 슈스케의 말에 공명한 탓이리라...

 

 그렇게 된다면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그렇게 자신을 한동안 처마 밑 풍경으로 만들어 놓는 것도 좋을 것이라고...

그렇게 풍경이 되어 새로이 열린 가능성 처럼 밝아오는 햇살 아래

잠을 깬 더불어 함께 할 이들로 가득한 숲이 내어놓는 첫 숨을

가만히 느껴보는 것도 좋을 것이라고...

그 투명하게 밭은 숨 가운데 가득한 타인의 온기 안에서...

 

 


댓글(4)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진 2012-02-09 0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산문시같은 느낌의 리뷰로군요!
지금 오전 1시 26분.
이 시간에 딱 맞는 글입니다.
오우, 그런데 이런식으로 리뷰를 작성하니 꽤 좋은걸요.
글도 눈에 쏙쏙 들어오구.

아참,
피곤하지 않게 얼른 주무셔요 ㅎㅎ
저는 이만 자러가야겠습니다.

굳밤 :-)

ICE-9 2012-02-09 01:41   좋아요 0 | URL
와! 소이진님^ ^
깜짝 놀랐어요
잠깐 다녀왔더니 바로 댓글이 달려서...
좀 뭔가 변화를 줘 보려 했는데
괜찮은가요?
아무튼 잘 주무세요.
내일은 눈이 온다고도 하던데
강추위에도 끄덕없는 뜨거운 하루 되시길 빌게요^ ^

이진 2013-02-12 1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르메스님, 이 책을 읽고 리뷰를 쓰려던 찰나 이 리뷰가 떠올라 다시 들러요.
헤르메스님의 관찰력과 글솜씨는 도저히 못 따라가겠네요.
제가 쓰는 리뷰는 아마 졸작이 될 것 같아서 쉽게 손이 움직이질 않아요.
제목부터... 결빙된 숲... 크....
헤르메스님 제 리뷰 읽고 비웃으시면 안됩니다. 약속!

ICE-9 2013-02-12 16:22   좋아요 0 | URL
와! 구체의 뱀 읽으셨구나! 어떻게 읽으셨는지 궁금한데요.
비웃지 않을테니 빨리 올려주세요^ ^
최근에 까마귀의 엄지를 읽었는데 초반의 슈스케는 왠지 다르더군요.
후기의 강한 모라토리엄 증후군이 과연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더욱 수수께끼로 남았습니다. 아무튼 궁금 궁금^ ^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1 | 12 | 13 | 14 | 15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