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 1
요시다 슈이치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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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전작 `사랑에 난폭`에서 보니 요시다 슈이치의 필력은 악인의 심리를 그릴 때 더 날카로워진다. 청동거울의 녹을 긁어내는 철수세미랄까. 하여 악인을 그리지만 도리어 우리를 비추는 거울이 된다. 내가 모르는 나의 얼굴을 불현듯 상기시키는 작가. `분노`는 또 어떤 내 얼굴을 보게할지 꽤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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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 다시 벚꽃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62
미야베 미유키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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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스파이어가 겨울밤 매서운 칼바람이라면 이건 봄날 황혼녘 햇살이 벚꽃 잎을 투과할 때의 아련한 열기. 보다 원숙해서 구수하고 따스해서 정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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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 다시 벚꽃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62
미야베 미유키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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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이란 한 줌의 벚꽃.

 손 안의 벚꽃잎은 제아무리 예뻐도 한 결 부는 바람에도 흩날려 속절없이 사라진다. 웃고 마시고 떠들다가도 문득 손등에 내려앉은 벚꽃잎이 서글프게 느껴지는 것은 그런 까닭이다. 작은 분홍빛 두어개에 간직된 허망함. 쇼노스케도 그랬을 것이다. 쇼노스케는 미야베 미유키의 '벚꽃, 다시 벚꽃'의 주인공이다. 소설에서 그가 가장 먼저 보는 것은 문간 너머 저만치 서 있는 벚꽃 나무다. 그걸 그가 넋 놓고 보게 된 것 역시 허망함이었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사무라이지만 도쿠가와 막부 시대가 열리면서 사무라이는 이제 칼을 들 일이 없어졌다. 칼로써 존재할 수 있었던 사무라이는 칼을 버려야 했고 그런 그들에게 사무라이라는 이름은 태평성대 막부 시대를 살아가는데 오히려 돌부리가 되었다. 거기다 믿고 따랐던 아비는 누명을 쓰고 할복했으며 가문은 결단나고 세속적 성공을 쫓던 어미와 형과는 소원해졌다. 그는 혼자다. 자신을 든든히 받쳐주던 모든 것들이 손 안에 벚꽃잎처럼 사라진 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고관 사카자카 시게히데가 그를 불러서는 아비의 죽음에 얽힌 비밀을 알려준다. 아비는 횡령죄 혐의를 받았는데 적극적으로 항변했으나 한 장의 문서로 죄를 인정하고 할복하고 말았다. 그런데 그 문서가 사실은 누군가 아비의 필적을 흉내내어 만든 위조 문서라는 것이다. 놀라는 쇼노스케에게 사카자카 시게히데는 그 대서가가 현재 다른 크나큰 음모에도 연루되어 있으니 에도로 가서 그를 찾아 아비의 복수를 하라고 말한다. 아비의 명예회복을 간절히 바랐던 쇼노스케는 에도로 온다. 그리고 거기서 그는 전혀 다른 삶의 방식을 경험한다.




 에도로 와서 쇼노스케가 거하는 곳은 셋방살이하는 이들이 한데 모여 있는 지금으로치면 연립주택과 비슷하다. 인물과 살이의 묘사를 보노라면 옛날 TV에 방영했다고 하는 드라마 '한지붕 세가족'이 얼핏 연상될 정도이다. 없는 살림이지만 야박하지 않으며 모두가 제 일처럼 남을 도와준다. 소설은 처음부터 그 곳에 원래 있던 널담이 없어졌다고 하는데 그것이 마치 상징이기라도 하듯 거기 사람을 사이엔 벽이 없다. 더불어 사는 사람들이 이타적이라는 것을 빼면 타카하시 루미코의 걸작 '메존일각(우리나라엔 도레미하우스란 제목으로 발간된 만화)'과 비슷하다고 하겠다. 같은 피를 나누었지만 남보다 먼 쇼노스케의 가족과 피 한 방울 안 섞였지만 가족만큼 살가운 이웃들을 생각하면 과연 가족의 경계가 무엇인가 생각하게 된다. 여기서 밝히지만 실은 이것이 바로 '벚꽃, 다시 벚꽃'에서 미야베 미유키가 천착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대서인을 찾는 문제도 사실은 그가 권력다툼을 해결할 한 수장의 유언을 위조할 가능성 때문이다. 나중엔 또 한 여성의 납치 사건에도 연루되는데 그것도 진짜 가족과 입양의 문제가 얽힌다. 이렇게 소설의 가장 중요한 사건들은 모두 가족을 중심으로 벌어진다. 그럴 때마다 중요해지는 것은 경계다. 진짜 유언을 보존하고, 순수 혈통을 고집하는 것은 진실을 고집하는 일과 같다. 그러나 진실은 아집에 가까울 정도로 언제나 확실한 경계선을 두려 한다. 나와 남을 나누고 거짓과 격리되려는 진실처럼 유익이 되지 않는 남은 내치는 것이다. 쇼노스케의 어미와 형이 도움이 되지 않는 아비와 동생을 멀리했듯이.


 하지만 미야베 미유키는 묻는다. 과연 그렇게 진짜를 고집하는 게 좋은 것일까?

 결국 사단은 언제나 진짜를 의식하고 그것을 확보하려 하거나 그것에 상처 받을 때 일어났다. 거기에서 미야베 미유키의 대답은 이미 나와 있는 것 같다. 그런 면에서 왜 미야베 미유키가 쇼노스케를 둘러싼 이웃들의 삶을 조금은 불필요하다고 싶을 정도로 많은 비중을 두어 묘사하는 지도 어느 정도는 짐작이 가게 된다. 바로 사람 관계에 있어서 확실한 경계 따윈 아무런 필요가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하는 것이었음을 말이다.


 이것은 에도로 올라온 쇼노스케의 직업이기도 한 '필사'에서 제대로 드러난다. 

 필사란 다시 쓰는 작업이다. 그것은 반복이지만 똑같지 않다. 소설에서도 분명히 언급한다. 마음이 일치되어야 똑같은 글이 가능하다고. 그러니 필사는 같지만 다르다. 원래 쓰는 자와 지금 쓰는 자, 그렇게 두 마음이기 때문이다. 마음이 일치된 글은 소설에서 비극을 낳았다. 하지만 일치되지 않은 글은 보다 많은 이에게 배움을 주었고 즐겁게 만들었다. 경계선의 넘나듦은 여기서도 존재한다. 필사란 글이 달라짐이요, 쓰는 이 또한 타인의 글에다 자신을 의탁하는 것이니 경계를 지워가는 행위다.(허나, 완벽한 일치란 또 하나의 확정된 경계선을 만드는 일에 불과할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쇼노스케는 필사를 하면서 점점 더 자신을 넓혀간다. 나중에 그는 어떤 공간을 입체로 만드는 '입체 그림'도 스스로 제작하는데 그 역시 현실 공간의 필사라고 볼 수 있으니 글씨라는 2차원의 필사 공간이라는 3차원의 필사로 더욱 넓혀진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렇게 경계를 없애는 가장 대표적인 행위로써 필사가 주어진 것이며 그 필사를 새로운 직업으로 삼은 쇼노스케는 그대로 경계를 넘나드는 대표적인 존재라 할 수 있다. 결국 마지막에 가서 쇼노스케는 아예 자신마저 바꿔버린다. 모습은 그대로이나 다른 사람의 존재를 빌림으로써 이제는 궁극의 필사 단계라고 불러도 좋을 존재의 필사를 하는 것이다.(3단계 진화라니, 쇼노스케가 드래곤볼에 나오는 초샤이어인 같다.^ ^) 그렇지 않아도 지혜에가 기치에게 쏟았던 마음을 헤아리거나 쇼노스케와 와카가 서로에게 주는 배려를 보노라면 관계를 정말 두텁게 만드는 것은 각자의 처지에 대한 깊은 이해와 존재에 대한 있는 그대로의 포용이라는 걸 느끼게 된다. 이렇게 말하는 쇼노스케를 짝사랑하는 긴의 마음은 얼마나 예쁜가?


 "무사 나리는 체면이 서지 않으면 살 수 없는 거예요? 가난한 건 창피한 거예요?"

 엉엉 울고 있으니 말이 또렷하지 않다. 숨 쉬는 것도 여의치 않은 상태에서 띄엄띄엄 하는 말이었다.

 "그럼 어떻게 해서라도 부자가 돼요. 와다야에, 데릴사위로 들어가도 돼요. 나, 이제 질투하지 않을게요."

 쇼노스케는 할 말을 잃었다.

 "여기 계속 있으면, 쇼 씨도 언젠가, 이래선, 무사로서 창피하다고, 생각할 거 잖아요, 그럼...."

 긴은 바닥에 쭈그리고 앉았다. 조그만 등이었다. 가느다란 목덜미였다. 이 처녀는 이 처녀대로 작은 몸뚱이로 생활을 책임지고 있다. (P.512)


소설에 화창한 봄날의 벚꽃 거리를 걷는 것 같은 다사로움이 가득한 것도 그 때문이리라. 너나없이 함께 할 때, 서로의 이마에 반사된 햇살도 더욱 환해지는 법일 테니까.


 '고구레 사진관'부터였을까? 미야베 미유키의 사람과 세상을 보는 시선이 따스하다고 느꼈던 것은.

 '벚꽃, 다시 벚꽃'은 그런 미야베 미유키의 시선이 활짝 만개한 느낌이다. 여기서 만개란 표현은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주제를 더 힘껏 밀고나갔음을 뜻한다. 소설은 쇼노스케를 통해 경계를 완전히 허무는 곳까지 나아가고 있으니까. 예전에 한 시인은 말했다. "나는 멸망한다. 고로 존재한다" 마지막 장면에선 마치 그 시어를 반향으로 듣는 듯 했다.


 소설은 2013년에 나왔다. 시점을 고려한다면 이 소설은 현재 일본에 대한 미야베 미유키의 제안으로도 생각할 수 있다. 왜 이렇게 생각하는가 묻는다면 그건 당시 집권한 아베 정권이 추진하는 정책을 고려해 본다면 대답이 될 것 같다.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아베 정권이 추진하는 우익 정책의 본질은 확실한 금긋기이다. 자국과 타국을 나누고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타국을 불안하게 만드는 일도 서슴지 않는 것이다. 마치 그런 아베에게 말이라도 하는 것처럼 미야베 미유키는 금긋기에 집착했던 인물들이 어떤 말로를 맞게 되는지 보여준다. 여기에 해당되는 인물은 모두 셋인데 스포일러가 될 수도 있으므로 이름은 밝히지 않는다. 다만 한 사람은 끝내 이전의 자신을 버릴 수 없어 할복하고 다른 이는 타인을 파멸시키는 범죄자가 되며 마지막 사람은 모든 것을 잃고 정처없는 떠돌이가 된다는 것만 밝혀두련다. 반면 기꺼이 경계를 뛰어넘었던 자들은 행복한 결말을 맞았다. 쇼노스케를 제외하더라도 솜씨가 없었으면서도 아버지가 일으킨 장어 요리를 포기하지 못해 나락으로 점점 떨어지던 한 식당 주인은 한 사무라이의 조언으로 예전의 굴레에서 벗어나 새로운 음식을 시작하자 번성하게 되고 기치는 입양된 자신을 생각하지 않자 더 훌륭한 여성으로 성장한다. 이렇듯 선명하게 대비가 소설엔 존재하니 전자는 아베에게 보내는 경고요, 후자는 제안이라고 여겨도 그렇게 무리는 아닐듯 하다. 의미심장하게 와닿는 것은 마지막에 나오는 쇼노스케의 스승이기도 한 사에키 노사가 하는 다음과 같은 말이다.


 "제자야."

 "아, 예."

 "뒤죽박죽이었구나." (P. 626)


 이 소설의 주제를 한 단어로 말하라고 한다면 난 이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뒤죽박죽.

 우리는 거기서 얼른 혼돈을 떠올리고는 갸우뚱할 지도 모르겠지만 오히려 이렇게 너나의 경계없이 한데 얽히고 설키는 것이 사실은 더 좋은 게 아닐까 싶다. 그렇게 되면 그 어떤 존재나 그것이 지닌 가능성이 배제되지 않으며 모두가 대등한 가운데 다양한 존재와 가능성의 하나로써 공존하고 있을 테니까 말이다. 물론 쇼노스케의 셋방 이웃들이 보여주었듯이 온전한 배려와 포용이 먼저 바탕되어야 하겠지만. 분명 그리 된다면 확실한 경계선 보다는 배제되는 아픔, 잘려나가는 통증이 덜할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바로 널담이 모조리 사라진, 미야베 미유키가 꿈꾸는 세상이다. 일본이 그리 되었으면 좋겠다는 소망이 어린.


 '벚꽃, 다시 벚꽃'을 통해 우리는 그 꿈의 거리를 거닐 수 있다. 그러다 문득 '벚꽃박죽'이란 말을 떠올리고는 살짝 미소지을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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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5-06-16 1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미 여사의 에도 시리즈는 늘 사자마자 읽었는데
이 책은 출판사가 바뀐 바람에 다소의 꺼림직함이 있어요. ㅠㅠ. 하지말 읽겠죠, 미미 여사의 광팬이니.
읽고 나서 다시 한번 헤르메스님의 리뷰를 읽어야겠네요. 맞아요, 미미 여사의 시각이 참으로 따스해졌죠...

ICE-9 2015-06-22 20:42   좋아요 0 | URL
정말, 요즘은 `크로스파이어` 같은 처음의 날 선 칼날 같은 분위기가 많이 무뎌진 것 같아요. 화차나 이유, 모방범의 분위기를 생각하면 새삼 얼마나 멀리 있는 지 실감하게 되죠. 저 개인적인 생각으론 역시 3.11의 영향이 아닐까 싶어지더군요.^ ^
 
수차관의 살인 아야츠지 유키토의 관 시리즈
아야츠지 유키토 지음, 김은모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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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로관의 살인'에 뒤이어 '수차관의 살인'을 읽었습니다.

요즘 저는 아야츠지 유키토의 관 시리즈를 시간날 때마다 다시금 복기하는 셈인데

읽으면서 과연 '관' 시리즈가 가지고 있는 매력이 뭘까 하고 거기에 맞춰 하나하나 알음알음 해나가고 있는 중입니다.

 

 사실 아야츠지 유키토는 '신본격의 기수'로 흔히 평가됩니다만 신본격이란 말과 함께 그의 이름을 알린 '십각관의 살인'은 좀 반칙이 있었죠. 본격 미스터리인 줄 알고 접근했지만 가장 중요했던 트릭이 의외의 곳에서 터져 나오는 바람에 다소 허망했던 기억이 납니다. '본격'하면 무엇보다 반 다인이 말했던 대로 '스포츠'처럼 공정해야 합니다. 그건 일본의 요코미조 세이시에 따르더라도 지적 소설로서의 추리 소설이 가져야 할 품격입니다. 어쩌면 그래서 '신본격'이라는 말이 붙었을지도 모르겠어요. 진정한 본격이 아닌 약간 반칙성이 있는 본격이라는 의미에서. 물론 농담입니다.

 

 아무튼 그래서 저는 이 두 번째의 작품, '수차관의 살인'이 더욱 마음에 들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 소설이야말로 그 자신이 기수가 되는 신본격에 정말 어울리는 작품이 아닌가 합니다. 말하자면 이 작품이야 말로 신본격 아야츠지 유키토의 시작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네요. 

 

 

 '수차관의 살인' 은 제가 지금까지 읽어본 관 시리즈 중(물론 저는 암흑관 이후로는 아직 못 읽어봤습니다만) 무엇보다도 작가와 독자간의 공정한 겨루기에 가장 중점에 두고 쓰여진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데뷔작이 약간 반칙적이라는 불평은 저 말고도 일본 국내에서도 제기되었던 게 아닐까 싶기도 해요. 그렇지 않다면 이 작품에서 물씬 풍겨 나오는 마치 '이 작품에 관한 한 공정하지 못하다는 말은 쑥 들어가게 하겠다'라는 유키토의 일념이랄까요, 하여간 그런 느낌은 받지못했을 테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당신이 정말로 추리 능력으로써 작가와 겨루기를 원한다면 이 작품만큼 좋은 작품도 없다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아야츠지 유키토는 이 작품만큼은 예리한 분이시라면 초반에 모든 걸 파악하는 것도 가능할 위험마저 무릎쓸 정도로 최대한 공정하게 임하고 있거든요. 그만큼 추리로 '진검승부' 하기엔 더할 나위 없이 적격인 책입니다.

 

  앞서도 얘기했지만 저는 이 '수차관의 살인'을 관 시리즈의 실질적인 원점으로 보는데요. 그 이유는 무엇보다 전작 '십각관의 살인'과는 달리 이야기가 벌어지는 공간이 나뉘어지지 않고 하나로 수렴된다는 데 있습니다. 저는 이게 '십각관'과의 중요한 차이라고 봅니다. 바로 이 수렴을 통해서 아야츠지 유키토의 '관'시리즈가 가지는 중요한 매력이 살아났기 때문입니다. 물론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사실 '십각관'을 쓸 때 유키토는 '관'시리즈 같은 것은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라 여겨집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관'시리즈가 줄 수 있는 '관'에게 투영된 독립적인 생명력 같은 게 없거든요. 이 말은 '십각관'까지만 해도 미스터리가 기능하기 위한 무대 장치 이상의 의미는 없었다는 말입니다. 요컨대, '십각관'은 굳이 십각관이 아니었다 해도 별 상관은 없었다 그 말이죠. 그저 살인이 벌어지고 해결이 이루어지는 이차원적 평면의 공간으로만 의미가 있었을 뿐 '십각관' 자체가 가진 분위기로 하나의 독립적인 존재가 되어 작품의 분위기를 만들어감에 있어 유기적인 공조는 그대로 직선적 미스터리의 이야기 배경 뒤로 무화(無化)어 버렸습니다.

 

 하지만 '수차관'은 다릅니다. '수차관'은 단순히 미스터리의 배경으로 남지 않고 독립적 존재와 그 깃든 독특한 분위기로서 분명히 제 몫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수차관의 살인'은 '수차관'이 아니면 안되는 것이죠. 왜냐구요? 그 이유를 지금부터 설명하겠습니다. 물론 어디까지나 지극히 주관적인 견해라는 걸 미리 알려드립니다. 

 

   이것이 바로 수차관의 모습입니다. 성벽에 붙어 있는 세 개의 거대한 수차. 바로 그 때문에 수차관인 것이죠. 이 표지엔 수로가 보이네요. 바로 저 수로가 이 '수차관의 살인'의 실질적인 시작이 되는 사건인 1년 전, 가정부 네기시 후미에가 표지에도 나와 있는 성탑의 발코니에서 추락하여 흘러간 곳입니다. 아무튼 바로 저 세 개의 수차가 왜 이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수차관'이 아니면 안되는가 정확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야츠지 유키토는 왜 이 '수차'를 모티브로 가져왔을까요? 그가 이걸 가져온 건 그게 수차라서가 아닙니다. 유키토가 이 '수차'를 가져온 건 일종의 비유적 의미였습니다. 그러니까 사실은 '시계'의 비유로써 수차를 가져온 것이죠. 때문에 하필이면 세 개입니다. 바로 시간의 과거-현재-미래를 가리키기 위해서죠. 그렇다면 '시계관'처럼 아예 시계를 가져오면 되지 않느냐 하시겠죠? 그렇지는 않습니다. 유키토에게 정말 중요했던 것은 시계 자체가 아니라 흐르지 않는 시간이었거든요. 영원히 고정된 시간. 바로 그래서 수차가 필요했습니다. 벽에 단단히 붙박혀 결코 움직이지 않는, 영원히 고립된 시간을 암시하기 위해서 말이죠. 이건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작품 속에서 유키토 스스로 한 등장인물의 입을 통하여 밝혀놓고 있기도 합니다.

 

 "이 수차는 마치..."

 남자는 거기서 말을 끊고 내내 말이 없던 기이치의 반응을 슬쩍 살폈다.

 "마치?"

 쉰 목소리가 가면 틈으로 새어 나왔다.

 "마치 이 저택을, 시간의 흐름을 거슬러 이 골짜기 공간에 정지시켜 놓기 위해 움직이는 것 같다는 생각이요"

 (p. 43)

 

 이렇게 직접적으로 드러나듯이 수차란 이러한 고립과 정지의 이미지, 즉 영원한 영어(囹圄)의 공간임을 암시하기 위해 고정된 시간의 비유로써 가져온 것이죠. 그렇게 이 소설에서 중요한 것은 '고립'입니다. 흐르지 않는 시간, 빠져나갈 수 없는 공간. 사건은 그 고인 시간과 공간으로 부터 달아나려는 욕망에서 비롯됩니다.

 이것은 소설에서도 반복되어 나오는 표현인 '섬처럼 떠올라 있는' 수차관의 모습을 강조한 표지인데 개인적으로 이 표지는 수차관이 가지는 핵심을 정확히 표현하고 있다고 보여집니다. 말하자면 아야츠지 유키토는 무엇보다 '고립'을 강조하기 위해 그 분위기를 가장 잘 살릴 수 있도록 이 '수차관'을 가공하여 소설에 넣었다는 것이죠. 벽에 붙은 수차는 정지된 시간의 상징으로, 섬처럼 홀연히 존재하는 수차관은 거기에 폐쇄되어 영어의 삶을 살고 있는 존재들의 상징이랄 수 있겠습니다. 이 수차관의 원래 주인은 이름난 화가였는데 그의 그림이 수차관 내부 회랑에 걸려 있습니다. 절대로 바깥으로 나가지 못한 채 말이죠. 그런 면에서 이 그림들 또한 형무소에 갇힌 '수인(囚人)'과 비슷한 이미지로 넣은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렇게 '수차관'은 '고립무원'을 보다 더 효과적으로 강조하도록 설정되어졌습니다. 그래서 갇힌 자들의 달아나고 싶은 욕망이 훨씬 선명하게 독자들에게 다가오지요. 때문에 수차관은 미스터리의 평면적 무대가 아니라 하나의 독자적 존재로서 작품의 분위기를 만들어가는 유기적인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독립된 존재감은 이 '수차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시작되었고 '관'시리즈가 가지는 중요한 매력을 형성하는데 일조를 하게 됩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아야츠지 유키토의 작품이 가진 매력을 트릭 보다는 어디까지나 분위기를 형성하는데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 '수차관의 살인'을 분위기 보다는 트릭에 좀 더 비중이 들어간 '미로관의 살인' 보다 더 우위에 놓겠습니다. '미로관의 살인'도 좋긴 좋았지만 '관' 시리즈의 중요한 매력이라고 생각되는 '관' 자체가 가지는 매력을 그리 살리지 못했기에 아무래도 '수차관의 살인' 보다 하위에 놓을 수 밖에 없을 것 같네요. 여기까지 쓰면 제가 가장 최고로 치는 관 시리즈가 무엇인지 어쩌면 짐작하실지도 모르겠군요. 네, 그렇습니다. 저는 트릭은 '시계관', 분위기는 '암흑관' 이렇게 두 개를 최고로 칩니다. 뭐, 어디까지나 주관적 취향이에요.

 

 이렇게 '관' 시리즈의 매력을 개인적으로 되새겨 보는 오늘의 여정은 이것으로 끝맺게 되겠네요. 줄거리 소개 하나 없는 리뷰라니 좀 어이없어 하실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그런 소개는 다른 곳에서도 얼마든지 보실 수 있을테니 그런 정도로 이해하고 넘어가 주시면 고맙겠어요. 뭐, 이런 식의 리뷰도 좀 색다른 맛으로 괜찮지 않을까요? 밥만 먹고 살 수는 없으니까요. 네, 물론 막무가내 억지 주장입니다.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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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2-03 01: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12-07 23: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신의 손 밀리언셀러 클럽 104
모치즈키 료코 지음, 김우진 옮김 / 황금가지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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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골키퍼나 투수처럼 손으로 하는 일에 남다른 능력을 가진 친구에게 사람들은 종종 이런 말을 하곤 한다.

 "오, 그는 정말 신의 손을 가졌어."


 또한 때로 인력으로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운명의 힘을 예감했을 때도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이건 정말 신의 손이 한 일이야."


 '신의 손',

 그것은 재능이자 운명이다. 신이 허락할 정도로 뛰어난 재능이라 여기기에 얼른 운명으로 생각되는 지도 모른다. 니체의 말을 굳이 빌리지 않더라도 운명적인 것은 비극의 아우라를 가진다. 하물며 그것에겐 죽음의 냄새마저 도사린다. 죽음처럼 미리 결정되어 있고 도저히 변경 불가능한 탓이다. 그래서일까? 죽음이 불행이듯 운명은 자주 저주처럼 여겨진다. 그러니까 이런 말도 가능하다. 재능은 곧 저주라고.


 중국의 철학자 장자는 어느 날 아주 오래된 나무를 본다.

 수백 년을 산 나무다. 장자의 옆에서 한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이 나무는 말이죠, 그저 오래 살고 있다 뿐이지 별 쓸모는 없어요. 집을 지을 수도 없고 문짝으로도, 바퀴로도 도대체 사용할 수가 없어요. 아마 세상에 이렇게 쓸모없는 나무도 찾아보기 힘들 걸요." 그러자 장자는 이렇게 말한다. "그 때문에 이 나무는 이토록 오래살 수 있었던 것일세." 나무는 아무런 재능이 없었기 때문에 오랜 세월 살아남을 수 있었다. 우리가 아는 많은 천재들은 제대로 천수를 누리지 못했는데 이 사실을 대비해 보면 영화 '스파이더맨'에서 주인공 피터 파커의 다음과 같은 말은 꽤나 설득적이다.


"이것(스파이더맨 능력)은 축복이자 저주다!"


 '신의 손'은 그 모순을 함축한 말이다.

 이를테면 카인의 표식이다. 인류 최초의 살인자 카인은 동생 아벨을 살해하는 바람에 신으로부터 영원한 유랑의 형벌을 받는다. 그는 신에게 애원한다. '이런 살인자의 몸으로 세상으로 나갔다간 저의 죄 때문에 언제 다른 사람들 손에 죽을지 모릅니다.' 그러자 신은 카인의 이마에 표식을 준다. 그리고 세상에 선포한다. '이 표식을 가진 자를 건드리면 내가 똑같이 보복하리라.' 카인은 안심하고 세상에 나간다. 표식을 가진 탓인지 아무도 자신을 건드리지 않는다. 동시에 아무도 자기 곁에 다가오지 않는다.


 카인이 잘 보여주듯이 피터 파커가 말하는 저주란 고독이다. '신의 손'은 에덴으로 가는 길을 막고 있는 화염검처럼 타인과의 관계를 단절시킨다. 질시와 몰이해라는 가위로 싹둑! 

 천재가 불길한 것은 묘지를 배회하는 유령과도 같은 그림자를 달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홀로 죽거나 고독에 미쳐서 광기의 희생양이 될 미래를 예언하는 것과도 같은 그림자를...


 소설 '신의 손'에 드리워진 것도 그런 그림자다.


이 소설은 14회 일본 미스터리 대상 신인상 수상작인 '대회화전'으로 먼저 소개된 바 있는 모치즈키 료코의 데뷔작이다.


2004년 집영사문고본으로 첫 간행되었을 때의 표지.

 이름에서 이미 알아차렸을 지도 모르지만 료코는 여성작가다. 1959년에 태어났으니 데뷔작은 40대 중후반에 나온 셈이다. 흔한 말로 늦깎이 작가라고 할 수 있다. 확실하게 알려진 것이 없기에 추측에 불과하지만 어쩌면 무명 작가로서의 삶이 길었을 지도 모른다. 이런 추측을 하게 된 것은 무엇보다 이 소설, '신의 손' 때문이다. 소설이 저자 료코와 똑같은 여성 작가가 중심이기 때문이다.

 기스기 교코가 바로 그 장본인이다. 그녀를 만나 그녀의 작품을 본 사람들은 그녀를 '신의 손'이라 부른다. 그녀는 분명 신이 부여했으리라 여길 정도로 재능이 있었고 글에 대한 열정은 더 커서 어마어마한 양의 작품을 남겼으나 한 번도 출간되지 못했다. '신의 손'을 가졌으나 내내 무명 작가였다. 글을 쓴다는 것은 몸 속에 괴물을 한 마리 키우는 것과 같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던 그녀는 세상에 작가로 인정받지 못하는 처지에 절망한 나머지 자신이 키우던 괴물에 끝내 먹혀버린 것일까? 알 수 없는 이유로 사라져 버린다. 어차피 소수만 알고 있었던 존재. 그 이름은 곧 세상에서 잊혀져 버린다.

 그런데 10년 후, 불현듯 그 이름은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른다. 대중과 평단의 호평 속에 공신력 있는 문학상을 받은 한 소설이 실은 기스기 교코의 작품을 훔친 것이라는 고발이 나온 것이다. 고발한 주체는 다카오카 마키라는 여성. 그녀는 자신이 알고 있는 의사인 히로세를 통해 기스기 교코와 내연의 관계였다는 편집자 미무라에게 자신의 원고를 보내 그것을 증명하려 한다. 미무라가 그 원고를 본 결과, 놀랍게도 그것은 분명 기스기 교코의 것이었다. 더구나 그 원고는 단 한 번도 세상에 알려진 적이 없다. 그렇다면 다카오카 마키가 사라진 기스기 교코일까? 미무라는 히로세를 만나 그 진상을 알아보려 한다. 밝혀진 사실은 다카오카 마키는 기스기 교코가 아니라는 것. 더구나 그 둘 사이엔 아무런 접점조차 없다. 생판 남인 것이다. 그렇다면 다카오카 마키는 어떻게 세상에 한 번도 나오지 않은 기스기 교코의 원고를 가지게 된 것일까? 미스터리는 바로 거기서 시작된다. 그리고 그 미스터리는 누구도 몰랐던 기스기 교코의 진실된 초상으로 인도한다.

 기스기 교코의 초상을 보았을 때, 얼른 떠오르는 말이 있었다.

 바로 '다락방의 미친 여자'다.

 '제인 에어'에 나오는 다락방에 갇힌 미친 여자는 페미니즘에 있어 또 하나의 대표적인 상징이다. 그것은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사회에 길들여지지 않는 야성(남성 중심 문명에 편입되지 않았다는 의미에서)의 여성을 의미한다. 그 때문에 사회의 가장 구석진 자리(격리된 공간의 일종으로써)인 다락방에 갇힌 것이다. 물론 그녀는 미치지 않았다. 재능으로나 지성으로나 오히려 정상인들보다 더 비범하다. 실은 바로 그 때문에 다락방에 갇힌 것이다. 그녀의 재능과 지성으로 남성 사회를 유지시키는 남성만이 가지는 전유물들을 획득하여 남자들을 두렵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남자들에게 그건 전복의 징후였고 더구나 길들일 수 없는 것이었기에 공포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하여, 남자들은 그런 여자들을 보이지 않는 다락방에다 가두게 된 것이다. '광기'의 팻말을 여성의 목에다 걸거나 '괴물'로 치부하여...

 실제로 19세기에 남자들만의 전유물이었던 글쓰기를 과감하게 감행했던 여성들은 모두 '다락방의 미친 여자'라는 굴레를 뒤집어 써야만 했다. 글을 쓰려는 여자들은 그 시기 남자들에게, 그것도 작가인 남자들에겐 더욱 주제 넘은 건방진 짓이었고 그 어떤 미덕으로도 상쇄할 수 없는 구제불능의 악행이었다. 정말로 그랬다. 그러므로 감히 펜을 통해 경계를 넘으려 했던 여성들은 당연히 쏟아지는 비난과 격리를 감수해야 했다. 쓴다는 것엔 그만한 위험이 뒤따랐다. 재능은 그녀들에게 저주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신의 손'의 기스기 교코 역시도 그렇다. 그녀는 현대의 '다락방의 미친 여자'라 할 수 있다. 그녀는 작가가 되고 싶어 한다. 오직 그것만이 그녀 삶의 전부다. 그녀는 미친 듯이 글을 쓴다. 수 년간 오로지 열정만으로 골방에 틀어박혀 글을 썼다. 엄청난 양의 글을. 남성들은 그녀를 길들일 수 없었다. 여기서 길들인다는 것은 그녀에게서 펜을 뺏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아무도 성공하지 못한다. 그녀가 남성 사회에 전혀 길들여지지 않았다는 암시로 그녀가 쓰는 글들은 대부분 범죄와 파멸 그리고 죽음이라는 어두운 이야기들이다. 사회의 안정된 기반을 허무는 이야기들. 그렇게 그녀는 격리되어 있었다. 그런 그녀를 오로지 남성들이 포위하고 있었다. 주의 깊게도 교코를 상대하는 편집자들은 모두 남성으로 소설은 설정하고 있다. 19세기 여성들이 글을 쓰는 남성 작가들에게 포위되어 다락방에 '미친 여자'로 갇히게 되었듯이 교코 또한 똑같이 갇히는 것이다. 정녕 기스기 교코는 19세기 여성 작가들의 후예라고 할 수 있다.

 '신의 손'은 사실 이런 이야기다. 이 소설은 기본적으로 미스터리이고 결국 기스기 교코의 실종과 오랜 세월이 지나 불현듯 도래한 그녀 원고의 비밀도 풀리지만 보다 심층적으로 보자면 남성의 음경이라 할 수 있는 펜을 차지하기 위해 분투했던 여성의 이야기라 할 수 있다. 달리 말하자면 (너무 식상한 표현이라 쓰기 싫지만 이만큼 그걸 선명히 드러내는 말도 또 없는 것 같아서 부득불 쓴다.) 여성의 해방과 자유를 향한 몸부림과도 같은.

 과연 그녀는 성공했을까, 실패했을까?
 결말에 밝혀지는 비밀은 누구에게는 실패로 읽혀질 수 있을 것 같지만 난 성공으로 보인다. 그녀는 그것으로 모든 남성 중심의 가치관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그녀는 남성들에게 결코 헤아릴 수 없는 존재로 남는다. 영원한 물음표의 존재. 19세기의 상황으로 보자면 그것이야 말로 남성만의 전유물이었던 펜을 되차지한 여성의 모습이랄 수 있었다. '다락방의 미친 여자'는 가장 독립된 여성의 모습이니까.

 광기가 투쟁이고 격리가 해방이다. 이런 비틀림이야말로 남성 중심 세계의 중력으로부터 여성들을 벗어나게 만드는 날개인 지도 모른다. 그런 면에서 결말을 긍정적으로 본다. 더구나 뒤늦게 출현한 원고는 교코를 둘러싼 모든 남성 가해자에게 그대로 복수가 아닌가? 그런 의미에서 그녀의 투쟁(그렇게 불러도 좋다면)은 성공한 것이다. 같은 여성 작가인 모치즈키 료코는 어쩌면 아직은 무명 여성 작가로서 데뷔하기 험난했던 경험으로 교코에게 빙의되어 이 소설을 써내려 갔던 지도 모른다. 교코가 토해낸 언어들은 그대로 소설을 쓰던 당시 료코의 심정이지 않았을까? 그래서 료코인 자신의 이름과 비슷하게 교코로 한 것은 아닐까?

 이런 상상을 하게 되는 것은 료코가 이 소설에서 등장인물의 심리를 섬세하게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먼저 알려진 '대회화전'과 꽤 다른 점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대회화전'의 전개는 좀 '스타카토'적인 면이 있었는데 '신의 손'은 '레가토'적인 면이 강하다. 그 이음새를 단단히 하는 것이 투명하게 묘사하는 등장인물들의 심리다. 그래서 더욱 교코의 고독과 방황이 눈에 들어온다.

 그래서 어쩌면 남자인 나보다도 지금도 펜을 들고 기꺼이 '다락방의 미친 여자'가 되려는 여성들이 더 공감할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정말로 '신의 손'은 그런 그녀들을 위한 연가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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