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뷰티풀 크리처스 - 그린브라이어의 연인, 판타스틱 픽션 블루 BLUE 3-1 판타스틱 픽션 블루 Blue 3
캐미 가르시아.마거릿 스톨 지음, 김승욱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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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주의 작은 마을, 개틀린...

 남북전쟁을 아직도 '주들 사이의 전쟁'이나 '북부의 공격으로 벌어진 전쟁'이라고 부를만큼 그 곳은 폐쇄적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예로부터 이어진 전통적인 남부의 가치를 완강히 고수하고 있었다. 변하지 않는 건 비단 생각만이 아니었다. 마을 자체의 모습도 그러했다.

 

 개틀린은 영화에 나오는 작은 마을들과 달랐다. 혹시 50년쯤 전에 만들어진 영화라면 또 몰라도. 우리 마을은 찰스턴에서 너무 멀어서 스타벅스도 맥도널드도 없었다.(...) 도서관에는 여전히 컴퓨터 도서목록 대신 도서카드가 있고, 고등학교에는 여전히 칠판이 있고,(...) 근처 극장인 시네플렉스에 가면새 영화 디브이디가 나올 때쯤 같은 영화를 볼 수 있었다.(...) 개틀린에 깜짝 놀랄 일은 전혀 없었다. 이 마을은 촌구석 중에 촌구석이었다. (P. 12) 

 

개틀린은 그러한 곳이었다. 웅덩이처럼 고여있기만 한 마을. 옹고집처럼 변화를 거부하며 살아온 공간. 그래서 시간마저 내버려두고 비켜나가 버린 것처럼 보이는 곳. 그 곳이 바로 개틀린이었다.  

 

   

 

 이러한 곳에 갇힌 채, 매일 마을을 떠나기만을 바라던 열 여섯 살 소년 이선 웨이트는 매일 밤 한 소녀의 꿈을 꾼다. 언제나 신비로움으로 가득했던 그 소녀는 낯익은 마을에서는 전혀 볼 수 없었던 낯선 매력이었기에 이선은 꿈 속의 소녀와 사랑에 빠져 버린다. 이선이 그녀와 사랑에 빠지게 된 것은 소녀 자체가 마을에서는 단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이국적 매력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었으므로 그 사랑은 또한 마을을 빠져나가고 싶다는 이선이 가진 열망의 다른 모습이기도 했다. 그런 이선에게 여름날 우연히 떨어진 낙뢰처럼 정말로 낯선 이방인 하나가 찾아온다. 그녀의 이름은 리나.

 

 

 

 

 이선에게 있어 리나는 마치 자신이 늘 꾸었던 꿈 속의 소녀가 현실로 튀어나온 것과 같았다.

 

 처음 이야기를 꺼낸 뒤로, 새로 전학 온 여자아이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어딘가 다른 곳에서 온, 어딘가 다른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가능성 때문에, 어쩌면 우리보다, 나보다 더 넓은 세상을 아는 아이일 수도 있었다.(P. 31)

 

 

 이선은 곧 리나에게 사랑을 느낀다. 그런데 리나 역시 그런 이선의 관심이 필요했다. 오래도록 변화를 거부하며 살아 온 곳은 이방인들에게 그리 친절하지 않다. 그것도 상서롭지 못한 '레이븐 우드'라는 성을 가진 이방인이라면, 더구나 주로 타고 다니는 차가 '장의차'라면. 당연히 리나는 학교에서 소외 당한다. 그런 리나에게 유일하게 마음을 열었던 친구가 바로 이선이었다. 물과 기름처럼 서로 섞일 수 없는 개틀린과 레이븐우드 가문을 놓고 보자면 이선과 리나는 거의 로미오와 줄리엣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선에게 있어 마주해야 할 난관은 그게 다가 아니었다. 마을 사람들의 따돌림과 괴롭힘 정도는 사소한 장난으로 만들어버릴 정도로 리나에겐 자신이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비밀이 있었고 거기다 가혹한 운명 역시 기다리고 있었다. 과연 그 시련 앞에서 이선과 리나는 자신들의 사랑을 잘 지켜나갈 수 있을 것인가?

 

 

 미국의 두 여류 작가 카미 가르시아와 마거릿 스톨의 공동으로 쓴 판타지 소설, '뷰티풀 크리처스'는 이렇게 삶에 있어서 우리 역시도 언젠가는 마주할 수 밖에 없는 변화를 과연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다.

 

 

 

 

 

 오래도록 한결같은 모습을 유지해 온 개틀린과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신비로운 존재감으로 넘쳐나는 여주인공 리나가 이루는 뚜렷한 대비는 이 주제를 선명히 부각시키고 있다. 따지고 보면 정말로 이 소설의 중심엔 하나의 '전선(FRONT LINE)'이 있는 셈이다. 변화를 거부하고 한 번 결정된 것은 영원히 고수하는 그렇게 운명에 종속된 존재들과 그러기 보다는 오히려 변화에 자신을 열어 한껏 받아들이는 그렇게 운명은 정해진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임을 보여주는 존재들이 서로 대치하고 있는 전선이 말이다. 거기서 빚어지는 갈등과 반목 사이에서 꾸준히 서로를 지켜나가는 이선과 리나의 사랑을 통해 카미 가르시아와 마거릿 스톨은 운명을 비어 있는 페이지라 생각하고 변화에 자신을 여는 것이야 말로 스스로를 구원하는 것임을 설득력있게 밝히고 있다.  

 

 카미 가르시아와 마거릿 스톨이 그 주제를 주로 이선과 리나의 사랑을 통해 이야기하는 것은 변화를 받아들임이 바로 타인을 받아들임과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즉 변화에 우리 자신을 여는 것은 타인에게 우리 마음을 여는 것과 같다고 그녀들은 말하는 것이다. 그들이 이런 식으로 변화를 이야기 하는 것은 사실 현재 미국의 모습과 관련이 있다. 즉, 2000년에 일어난 9. 11 사태 이후로 미국에서 압도적으로 높아져 버린 이방인들에 대한 배척을 반성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소설 속 개틀린의 모습은 현재 미국의 반영과도 같다. 특히 그건 그 개틀린을 마음껏 주무르고 다니는 링컨 부인을 중심으로 한 DAR(Daughters of the American Revolution, 미국 독립 전쟁 참가자 자손들의 부인 애국 단체를 말함.)에서 드러난다. 그 DAR의 모습은 타자에 대한 배척과 적대가 높아져가는 미국인들의 태도를 빗대고 있기 때문이다. 즉 '뷰티풀 크리처스'에서 이선과 리나를 둘러싼 개틀린에서의 모든 상황은 그대로 작가인 카미 가르시아와 마거릿 스톨이 마주한 미국의 현실인 것이다. 그녀들은 거기서 현실의 미국을 이렇게 정의 내린다. 첫 머리에 나온 남북전쟁에 대한 개틀린의 인식과 일부러 DAR 단체를 소설 속으로 가져온 곳은 바로 그것을 명확히 밝히기 위함이다.

 즉 현재의 미국은 흑인을 노예로만 취급했던 남북 전쟁 전의 남부와 별 반 다르지 않다고.

 

 그 남부가 타자에 대한 적대적 태도를 고수하다 파국을 맞았듯이, 현재의 미국도 그런 태도를 고수하다간 파국을 맞을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변화를 야기하는 타인에게 보다 자신을 열고 나와 같은 존재로 받아 들여야 한다. '뷰티풀 크리처스'는 바로 이러한 그녀들의 진심이 담긴 소설인 것이다. 그렇게 이 소설은 비록 판타지의 외양을 취하고 있지만 사실 보다 깊숙한 곳에서는 현재 미국이 가지고 있는 잘못에 대한 성찰을 요구하고 있다. 타자와 변화에 대해 한껏 자신을 열고 깊숙이 받아들이는 이선과 리나의 사랑이야 말로 다름아닌 미국이 지향해야 할 올바른 태도라는 것을 소설을 통해 분명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더하여 이 소설이 강조하고 있는 것이 또 하나있다. 그것은 주체적이 되라는 것이다. 즉 자신이 스스로 결정하고 절대 남의 손에 결정이나 판단을 맡겨두지 말 것을 요청한다. 자신에게 놓여진 운명을 앞에두고 리나의 태도가 변했던 것처럼 소설을 읽는 독자들에게도 그 리나처럼 자신의 머리로 판단하고 자신의 마음으로 결정할 것을 소설은 권한다.

 

  카미 가르시아와 마거릿 스톨의 이러한 제안 역시도 현실 미국의 모습과 관계가 있다. 무엇보다 9. 11 이후 부시 정부가 이라크 침공 때  했던 것들 때문이다. 그 때 부시는 이라크에게 대량의 살상 화학 무기가 있다는 것으로 침공을 정당화했었다. 미국의 모든 언론들은 부시의 이러한 말을 받아썼고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그 말에 휘둘러 전쟁을 지지했다. 하지만 나중에 드러난 진실은 전혀 달랐다. 이라크에 있다고 했던 살상 화학 무기는 없다고 판명되었기 때문이다. 즉 미국의 대중들은 그저 전쟁을 목적으로한 선동에 휘둘린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말에 휘둘리지 않고 제 머리로 제대로 판단할 수 있었다면 막대하게 희생된 이라크 민간인들과 아직도 전쟁에서 받은 상처로 정신적 후유증을 겪고 있는 많은 참전 군인들의 영혼들을 구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마치 그것을 그대로 나타내려는 듯 '뷰티풀 크리처스'에서 리나와 대적하는 주요한 흑의 주술사 리들리와 세라핀은 모두 사람들의 생각을 자기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능력자로 묘사되고 있다. 소설에서는 그 능력을 일컬어 '세이렌'이라고 부르는데 이 능력은 있지도 않은 허위의 사실들을 가지고 대중들의 생각과 판단을 마음대로 주물렀던 부시 정부와 언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은유한 것과도 같다. 리나는 바로 이런 존재들과 싸우고 있는 것이다.

 

  난 저 여자나 저 애한테 관심이 없어. 그냥 일반인들의 본질을 보여주고 싶었을 뿐이야. 일반인들이 얼마나 쉽게 휘둘리는지 얼마나 앙심을 잘 품는지. (P.566)

 

 

 그러므로 카미 가르시아와 마거릿 스톨이 소설에서 강조하는 것은 더욱 뚜렷해진다. 무엇보다 자신이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라는 것이다.

 

 

 

 

 사실은 이렇게 주체적이 되는 것이야 말로 타자와 변화에 한껏 자신을 열어놓는 길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우리가 타자와 변화에 선뜻 자신을 내맡기지 못하는 것은 살면서 알게 모르게 바깥으로 부터 주입된 선입관 때문이니까 말이다. 우리는 미처 직접 경험해보지도 못했으면서 타자들에 대한 생각과 판단들을 많이 가지고 있다. 미국인들이라면 아랍인들이 그럴 것이고 우리들이라면 지역주의에 의해 왜곡되었거나 못사는 나라들에 대한 우월감에 삐뚤어진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시선이 그럴 것이다. 그렇게 우리에겐 막상 직접 만나 대하고 보면 어떤 순간 그동안의 생각들이 그저 근거없는 편견에 지나지 않았음을 확인하게 될 때가 많다. 그러면서 그동안 그런 편견을 가졌던 자신을 반성하고 그런 것이 없었더라면 더 빨리 더 많은 좋은 시간을 그 타자와 더불어 가질 수 잇었을텐데 많이 아쉬워하게 된다. 내가 주체적이 되지 못했음에 놓쳐버렸던 타자들이나 희생해버렸던 시간들을 생각해보면 주체적이 되라는 요청은 더욱 절실해 보인다. 주체적이 된다는 것과 타자와 변화에 자신을 열어 놓는 것은 바로 이렇게 연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녀들은 이선과 리나의 여정에 그 둘을 긴밀하게 엮어놓은 것이다. 

 

 '뷰티풀 크리처스'는 이렇게 지금 우리에게 있어 가장 필요한 태도에 대해서 말해주는 책이다. 지금 유럽에서 부흥하고 있는 신우익이나 전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이주민들에 대한 배척을 생각해보면 사실은 우리 시대에 절실한 태도이기도 하다. 분명 우리를 나누고 있는 그 많은 경계선들은 알고보면 있지도 않은 것에 기초한 환영이거나 전혀 진실에 기반하지 않은 거짓에 지나지 않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우리의 귀를 홀리려 드는 수많은 세이렌의 노래소리에 우리 자신을 내맡기고 있는 것이다. 그런 자들의 목소리로 부터 우리 자신을 되찾아야 한다. 왜 우리의 운명을 남의 손에 맡겨두어야 하나? '뷰티풀 크리처스'는 따지고 보면 우리가 정말 들어야 할 목소리는 어디에 있는지 알려주는 소설이다.

 

  이선과 리나가 서로에게 귀를 기울였듯이 말이다. 그런데 그 둘은 서로 연결되어 마음으로도 말을 주고 받을 수 있다. 그건 마치 나의 내부에서 들려오는 소리와도 같다. 어쩌면 소크라테스가 사람이 정말 귀 기울여 들어야 할 유일한 소리라고 말했던 '다이모니온'인지도 모른다. '다이모니온', 그것은 자기 내면, 그러니까 정확히는 바로 양심에서 울려나오는 목소리를 뜻한다. 이선과 리나가 서로 주고 받는 마음의 대화는  그대로 '다이모니온'과 같았다. 그리고 그 귀기울임은 소설의 후반으로 갈수록 더욱 스스로를 온전하게 지켜나가는 데 더욱 중요한 역할을 한다. 말하자면 이렇게  카미 가르시아와 마거릿 스톨은 분명한 메세지를 주고 있는 것이다.

 

 이 소설은 온갖 세이렌과 세라핀의 유혹으로 부터 온전한 당신 자신을 구해내기 위한 것이라고...

 타인을 제 몸같이 아끼고 사랑하는 당신을 위해...

 

 

 

 이 소설은 현재 영화로 제작되어 포스터에 나온 바와 같이 4월 18일 날 개봉된다고 한다.

 인용한 스틸 사진은 모두 이 영화에 나오는 것들이다.

 그러므로 사진의 저작권 또한 영화사와 배급사에 있음을 밝혀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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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트르 1 : 하이에나의 숨결 로트르 1
피에르 보테로 지음, 이세진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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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의 판타지 문학만을 전문적으로 발간하고 있는 소담출판사에서 이번에 내놓은 '로트르'라는 작품은 몇 년 전 '에윌란의 모험'으로 국내에 소개된 피에르 보테로의 신작이다. 작가는 2009년 11월에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가 사고를 당해 아깝게 사망했는데 그러니까 '로트르'는 그의 유작인 셈이다. 유작이라서 그런지 왠지 페이지가 더욱 허투르 넘어가지 않는다. '로트르'의 기본 얼개는 전작 '에윌란의 모험'과 유사하다. '에윌란의 모험'의 주인공이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의 진짜 비밀을 깨닫고 모험의 여정을 나서는 것처럼 '로트르' 역시도 그러하다. 이 작품의 주인공 나탕은 자신이 다른 사람들과는 뭔가 다르다는 이질(異質)의 감각 을 가지고 있는 소년이었다. 그 이질의 감각이 너무도 심해서 다른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조차 못했는데, 그러던 중 갑작스러운 집의 화재로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요행히 목숨을 건진 나탕은 정말로 자신이 보통 사람과 전혀 다른 존재라는 걸 깨닫는다. 천부적으로 타고난 보통 사람 이상의 특별한 능력으로 세계를 암묵적으로 이끌어왔던 '파미유'라는 존재라는 걸. 부모님 역시 자신과 같은 '파미유' 였으며 그들의 능력이 고루 자신에게 전해졌다는 것 또한. 그 능력으로 알고보니 부모님은 수상한 존재들에게 죽임을 당한 것이었고 그래서 그는 도피한다. 그러다 같은 파미유인 그러나 정체를 알 수 없는 자의 인도로 샤에라는 소녀를 만난다. 샤에는 나탕보다 더 이질적인 존재였다. 왜냐하면 나탕은 그저 감각만이 이질이었는데 샤에는 아예 육체 자체가 이질이기 때문이다. 샤에는 생명의 위협을 느끼면 몸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변해버렸다. 그것도 거대한 하이에나로. 나중에 밝혀지는 사실은 '파미유'가 단일한 존재가 아니라 각자 서로 다른 능력을 가진 일곱개의 파미유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나탕의 할아버지 앙통은 그러한 파미유에 대한 사실을 다음과 같이 알려준다.

 

  "바르트가 너에게 파미유마다 고유한 능력을 타고난다는 얘기는 했을 게다. 바티쇠르(짓는 자), 메타모르프(변신하는 자), 게리쇠르(치유하는 자), 네 어미의 파미유인 음네지크(기억하는 자), 스콜리아스트(주해하는 자), 그리고 우리 코지스트(생각하는 자)가 있단다."

  "그러면 모두 여섯뿐인데요."

  나탕이 지적했다.

  "일곱번째 파미유는 사실 파미유 반열에 오를 자격이 없어. 약하고 비겁하지. 가장 먼저 망조가 든 것도 그 파미유였고. 자기들은 가소롭게 기드라는 이름을 내세우고 있다만."(p. 199) 

 

 앙통의 말투가 가진 뉘앙스에도 드러나듯이 이 일곱 개의 파미유들은 같은 존재지만 함께 협력하지는 않는다. 각자가 가진 능력이 저마다 최고라며 오히려 반목한다. 나탕의 아버지가 파미유임을 포기하고 보통 사람으로 살아야 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파미유들은 절대 능력이 다른 파미유와 결혼해서는 안되는데 코지스트인 아버지가 그 반대를 무릎쓰고 음네지크인 어머니와 결혼하는 바람에 코지스트의 최고 수장이기도 한 나탕의 할아버지 앙통에 의해 파문을 당해 그리 되었던 것이다. 결국 이질적인 육체의 샤에도 파미유라는 것이 밝혀진다. 바로 변신하는 자, 메타모르프로. 자신을 제외한 모든 파미유들을 자기들에게 위협이 되는 잠재적인 적으로 간주하는 코지스트는 이 샤에를 메타모르프가 자신들을 공격하기 위해 보낸 스파이라 생각하고 그녀를 심문하기 위해 감금한다. 자신과 다른 존재지만 이미 사랑을 느껴버린 나탕은 샤에를 구해내고 자신을 샤에와 만나게 해 준, 결국 '기드'라는 파미유로 정체가 밝혀진 인물의 도움을 받아 코지스트의 추적을 피해 숨는다. 그리고 그 기드에게서 봉인되었던 악의 존재 로트르가 풀려났으며 자신과 샤에만이 로토를 물리칠 수 있다는 말을 듣게 된다.

 

 이것이 1권까지의 이야기 인데('로트르'는 모두 3권으로 이루어져있다. 발간은 첫 권만 되었다.) 얼른 보아서도 이 이야기가 사실은 지금  유럽에서 거세게 불붙고 있는 인종적 편견에 대한 이야기('로트르'는 2009년에 프랑스에서 발간되었고, 차별을 받아오던 이민자들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한창 폭동을 일으켰던 무렵에 쓰여졌다.)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보기엔 이것이 전작 '에윌란의 모험'과 비록 그 얼개는 비슷하나 결정적으로 갈라지는 지점이다.

 

 무엇보다 두 작품 모두에서 나타나고 있는 특별한 능력이 함축하고 있는 의미가 전혀 다르다는 사실에서 이것은 입증된다. 즉 '로트르'에서 나오는 특별한 능력들은 '에윌란의 모험'과 달리 프랑스에 존재하는 사회 계층이나 인종의 은유로 쓰이고 있는 것이다. 최하층의 파미유로 경멸을 받는 기드가 사실은 프랑스에 존재하는 이민자 집단을 은유하는 것임은 따로 말할 필요가 없다. 그의 이름에서 이것은 바로 드러난다.

 

 

  "아저씨 이름이 뭐예요? 전 아저씨를 동네에서 한 번도 뵌 적이 없는데요."

  "내 이름은 라피 하디 맘눈 압둘 살람이다. 하지만 날 아는 사람들은 대부분 그냥 라피라고 부르지. 왜인지는 나도 모르겠다." (p.75)

 

 

  완전히 이슬람의 뉘앙스를 풍기는 이름이 아닌가? 이러한 라피는 사실 샤에보다 더욱 이질적이다. 이질적인 육체를 가진 샤에 조차도 본 적이 없는 존재로 그렇게 아예 사회 전체에 대해서 이질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찌 이 라피를 이민자 집단의 상징과 달리 볼 수 있을 것인가?

 

 그러므로 이 작품 '로트르'는 그렇지 않아도 전직 교사인 피에르 보테로는 이 작품의 주 독자층인 청소년들에게 현재 일어나고 있는 프랑스의 가장 커다란 문제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보아야 한다. 지금의 프랑스는 어떤가?  그동안의 차별을 더 이상 못견뎌서 이민자들이 폭동을 일으켰을 만큼 프랑스는 계층에 따른 차별, 인종에 따른 차별을 당연시해왔던 사회였다. 그건 소설에서 능력에 따른 차별을 절대시 했었던 파미유와 판박이였다. 그렇다면 프랑스는 이대로 괜찮을 것인가? 물론 아니다. 현실에서도 거센 폭동을 불러 일으켰듯이 봉인에서 풀려난 거대 악 '로트르'에 직면하는 것이다. 더구나 그 파미유에서 최상층으로서 이 체제가 더없이 굳건하다고 자부했던 코지스트들 조차도 로트르의 위협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졌다. 즉 차별에 바탕을 둔 사회는 파미유만큼이나 취약하고 불안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달라져야했다. 서로 다르다고 해서 차별하고 적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보듬어안고 존중해야 할 계기로 여겨야 하는 것이다. 피에르 보테로는 바로 이것을 들려주기 위하여 '로트르'를 쓴 것이다. 정말 소설 속의 '로트르'처럼 파국을 몰고 올지도 모를 미증유의 사태를 미연에 막기 위해서라도.

  때문에 '이질성(異質性)'으로 뭉쳐지나 적대가 아닌 사랑과 도움의 동반자적 관계를 이루는 나탕과 샤에 (그리고 라피)가 구원자의 모습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로트르는 너희 둘의 핏줄에 여섯 파미유의 피가 흐르기 때문에 두려워하는 거란다."(p. 276)

 

 다시 말 해, 이들이 보여주는 모든 것이 실은 피에르 보테로가 전하고 싶은 대안인 것이다.

 

 소설은 전작 '에윌란의 모험'이 그랬듯 역시나 흡인력이 굉장하다. 조금 훑어만 보려 했다가 순식간에 다 읽어버렸을 정도로. 보테로 전하고자 하는 것을 소설적 재미도 놓치지 않고 잘 우려내었다는 것이 이 작품이 가진 최고의 장점이다. 좀 더 많은 그의 작품을 보고 싶기에 유작이라는 것이 너무도 아쉽다.

 

 '하늘에서 평안히 거하시기를...'  이렇게 뒤늦은 인사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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뷰티풀 다크니스 - 판타스틱 픽션 블루 BLUE 3-2 판타스틱 픽션 블루 Blue 3
캐미 가르시아.마거릿 스톨 지음, 김승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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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캐미 가르시아와 마거릿 스톨의 '뷰티풀' 4부작중 두번째 작품인 '뷰티풀 다크니스'는 상실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러니까 주인공 커플인 이선과 리나가 자신이 껴안아버린 상실을 어떻게 딛고 이겨나가는지 거기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선은 어머니를 잃었고 리나는 메이컨을 잃었다. 이선의 어머니는 이선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려주는 빛과도 같은 존재였고 그건 리나에게 메이컨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삶의 길을 환하게 밝혀주는 빛과도 같은 존재들을 이선과 리나는 잃어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이 2부의 제목이 '다크니스'인 것이다.

 

 그렇게 사라져 버린 빛... 어디로 가야할지 분명히 보여주는 그 빛이 사라지고 그들의 여정에 어둠이 찾아온 것이다. 홀로 밝혀진 빛을 안심하고 따라가던 사람들이 막상 그 빛이 사라지면 어떻게 될까? 당연히 혼란스러울 것이다. 자신이 지금 디디고 있는 곳이 어디인지 알 길이 없어 혼란스러울 것이고 이제 어디로 가야 제대로 가게 될지를 몰라 당황스러울 것이다. 그렇게 빛의 사라짐은 미래만이 아니라 현재마저 불길한 그림자를 드리운다. 그리고 그렇게 드리워진 어둠의 장막 아래에서 어둠 속에서 미로를 헤메이는 자가 늘 의혹과 불안속에 가까스로 선택을 하듯이 그렇게 모든 관계를, 모든 상황을 판단해야 한다.

 

 '뷰티플 다크니스'는 바로 그러한 혼돈과 불안의 여정이다.

 

 요즘은 영 어덜트 판타지가 대세이다. 얼마전 개봉한 '헝거게임'도 그렇고 이미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트와일라잇'도 그렇다. 갑자기 이렇게 십대들을 주인공으로 한 판타지가 인기를 끌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여기엔 어떤 미국의 역사적 경험이 큰 워인이 된 것 같다. 즉 정치적으로는 2001년에 세계무역선터가 테러를 당해 붕괴된 9.11 사태 때문이고 경제적으로는 2008년의 서브프라임으로 초래된 금융위기가 그 원인인 것 같다. '왜 하필이면 이 두 개인가?'라고 묻는다면 보다 궁극적으로 이 두 사건이 모두 그 때까지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역사가 끝났다'라는 선언아래 그 무엇보다 우월하고 안정적으로 구가되고 있던 체제가 더 이상 확실하다거나 믿을만한 것이 아님을 미국인들에게 깨닫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 두 사건으로 인해 문득 미국인들은 자신이 디디고 서 있는 땅이 단단한 대지가 아니라 속으로 자꾸만 무너지고 있는 모래 늪이란 걸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다. 즉 넘쳐나는 불확실성 앞에서 지금까지 생각해왔던 모든 확실한 것들은 대기 속으로 흩어져 사라지고 이제는 그 어디서도 현실을 굳건히 지탱해 줄 반석을 찾을 수 없다는 불안만이 남은 것이다. 아마도 바로 그 불안의 징후를 영 어덜트 판타지들이 제대로 잡아내고 있기 때문에 지금과 같은 인기를 얻고 있는게 아닐까 싶다.

 

 

 이것은 주로 영 어덜트 판타지들이 디스토피아를 주 무대로 가져온다는 점에서 드러난다. '뷰티풀 다크니스'의 저자 케미 가르시아 처럼 교사인 작가의 작품 '매치드'도 전체주의의 디스토피아를 가져왔고 최근에 나온 '퓨어' 역시 대폭발로 멸망해버린 뒤 불구와 기형의 인간들로 넘쳐나는 디스토피아를 그린다. 이 희망이라곤 전혀 찾아볼 길 없는 디스토피아에서 유일하게 구원의 빛을 가져오는 존재들은 주로 십대들이 맡게 되는데 그래서 이 디스토피아는 어른들이 망쳐버린 지금의 현실 자체를 은유한다고 볼 수 있으며 십대들이 주로 구원의 존재가 되는 것은 이제 더 이상 기성세대의 가치관이 아닌 새로운 세대의 가치관으로서만이 이 디스토피아적 현실을 타개해나갈 수 있으리라는 믿음 때문인 것 같다. 문제는 이 구원의 존재들이 보여주는 행태가 주로 타자에의 포용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모든 영 어덜트 판타지에서 강조하는 것은 나와는 전혀 다른 그래서 이해할 수 없는 타자들이라고 하더라도 그들을 이해하고 포용하려는 노력만이 지금 이 사회를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선언이다.

 

 이러한 타자의 받아들임은 '뷰티풀 다크니스'의 전작 '뷰티풀 크리쳐스'에게도 동일하게 나타났던 주제이기도 하다. 거기서 미국 남부의 폐쇄된 마을 '개틀린'에서 전혀 낯선 존재인 리나를 이선은 유일하게 받아들이는 존재가 되는데 작가들은 의미심장하게도 늘 자유를 찾아 개틀린을 떠나고 싶어했던 이선의 꿈이 비로서 리나라는 완전히 낯선 존재를 받아들임으로써 이루어지게 만든다. 즉 그 리나로 인해 개틀린이 이선이 생각해왔던 대로 옛날부터 하나도 변하지 않은 단일의 고정적인 공간이 아니라 그 내부에 기이하고도 신비한 비밀을 많이 가지고 있는 그래서 변화무상한 세계의 중심임을 밝혀지는 것이다. 그렇게 '뷰티풀'의 작가 캐미 가르시아와 마거릿 스톰은 구원이 여기가 아닌 저기 그렇게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타자를 나와 같은 것으로 받아들이는 거기에 있는 것임을 강조한다. 이렇게 세계를 바꾸지 않고 현실을 그대로 두되 그 안에서 개인의 마음가짐을 바꾸는 것이 영 어덜트 판타지에서 보여지는 또 하나의 주류적 경향이라 할 수 있는데 아마도 이 뷰티풀 3부작은 그러한 경향의 대표작이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의 작품이 상실을 그리고 있는 것은 참으로 주목된다.

 

 

 

 전작에서 그렇게 사랑했던 이선과 리나는 그 상실로 인해 관계가 위험에 처하게 된다. 더구나 리나는 자신의 빛이었던 메이컨의 죽음에 대해 직접적인 책임까지 있어서 더욱 혼란을 겪게 된다. 그래서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던 리나는 스스로 어둠이 되려고도 한다. 작가들이 이렇게 상실을 가져오는 것은 디스토피아적 판타지를 그리고 있는 작품들과 어느정도 궤도를 같이 한다. 즉 더 이상 기성세대의 생각들은 새로운 대안을 가져올 수 없다는 확신이다. 이선을 가르쳐온 어머니, 리나를 인도해온 메이컨이 죽는다는 것은 아마도 이 같은 확신을 반영하는게 아닌가 싶다. 즉 이 두 작가가 이번 작품에 상실을 가져온 것은 이선과 리나가 그들만의 힘으로 이 세상에 구원을 가져올 새로운 빛을 찾게하고자 함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상실의 성격이다. 즉 상실은 과연 메워져야만 하는 구멍인 것일까 하는 것이 정작 여기서 물어야 할 질문이다.

 

 이 상실은 이선에게 그리고 리나에게 어머니와 메이컨이 다 같이 보다 확실한 것을 보여주는 빛이었다는 점에서 확실성의 상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선과 리나가 그토록 방황하는 것은 바로 이 확실성을 찾고자 함임을 우리는 알 수 있다. 그런데 과연 이러한 확실성은 굳이 찾아야만 하는 것일까?

 

  지젝은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라는 책에서 데카르트가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오히려 주체는 오로지 불확실성 위에서만 성립할 수 있다고 말한적이 있다.  즉 '나는 의심하는 한에서만 존재한다'는 것이다. 지젝은 히치콕의 영화 '의혹'의 여주인공 리나(공교롭게도 이 작품의 여주인공과 이름이 같다. 그래서 특별히 언급한다.)가 남편이 자기를 죽일지도 모른다는 의혹과 불신 가운데서도 바로 곁에 그 진실을 확실히 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최후의 순간까지 그 확실성이 도래하는 것을 지연시키며 의혹과 불신을 지속시키는 것을  예로 들어 이렇게 설명한다.

 

 "공식적으로" 주체는 필사적으로 확실성을 찾으려고 그를 갉아먹고 있는 의심의 벌레에 대한 치료약을 제공해줄 명백한 해답을 찾으려고 분투한다. 하지만 실제로 그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피하려고 하는 진정한 재앙은 바로 이 해결이며, 최종적이고도 명백한 해답의 출현이며 바로 그 때문에 그는 그의 불확실하고 불확정적이고 동요하는 지위를 끊임없이 고수하는 것이다.( 지젝의 책. p.137)

 

  그런데 왜 주체는 불확실성을 지속시키기 위해 이렇게 확실성을 지연시키는 것일까?

 

  주체는 자신의 우유부단을 고집하고 선택을 연기하는데, 이는 양자택일의 한 쪽을 선택함으로써 다른 쪽을 잃을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가 진정으로 상실을 두려워하는 것은 의심 그 자체, 불확실성이며, 모든 것이 아직 가능하고 그 어떤 선택항들도 제외되지 않은 열린 상태이다.(같은 책, p. 138)

 

  그러니까 무한히 많은 잠정적인 대안들을 늘 가능성의 대지 위에 무성하게 자라도록 놓아두기 위하여 그 모든 것을 단번에 쓸어버릴 하나라는 확실성을 밀쳐내는 것이다. 나는 바로 이것이 '뷰티풀 다크니스'가 상실을 하나의 테마로 가져온 이유라고 생각한다. 어둠의 미로 속에서 그 어둠이 가져다주는 모든 소리와 감촉 그리고 그것이 불러 일으키는 모든 생각들을 모든 대안의 가능성으로 담아두는 것. 바로 이것을 위해서 말이다. 아마도 이것이 이왕에 이 작품이 기성세대의 가치관을 모두 지워버리고 그 그라운드 제로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추구하려고 했다면 더 걸맞는 선택일 것이다. 왜냐하면 현재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가치관은 늘 확실한 진리를 찾으려 추구해왔으며 그것도 오로지 하나의 진리만을 고수하려 했던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획일적이 아닌 모든 가능성이 그대로 대등하게 무성한 안개꽃들 마냥 존재하길 원하는 이 작품에 있어서는 그것을 배척하고 상실을 궁극적으로 껴안는 것은 당연한 선택인 것이다. 이것은 세계를 궁극적으로 단일한 어둠으로 만드는 종말에 대한 표현을 이렇게 한 것에서도 드러난다.

 

 "리브, 저 사람들 뭘 하는거야?" 내가 속삭이듯이 물었다.

 "결정의 달을 부르고 있어." (p.492)

 

 

 지금까지 역사적으로 일어난 많은 비극은 다름아닌 늘 하나의 진리만을 인정하고 그렇게 확실성을 갖고 오려다 일어난 일이었다. 내가 가진 확실성은 타자를 배쳑하게 하지만 불확실성은 타자를 포용하게 한다. 그 불확실성이 나의 것 역시도 하나의 잠정된 그저 가능한 생각에 다름아님을 인정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뷰티풀 다크니스'가 지금 영 어덜트 판타지가 보여주는 대로 새로운 세대의 전혀 새로운 가치관에서 비롯되는 구원을 추구한다면 이 작품이 찾고 있는 구원의 모습은 아마도 환한 낮이라기 보다는 밤이 될 것이다. 그것도 무수한 별들이 수놓인 그런 밤. 그 멀리 있는 작은 별들 하나가 다 저마다 대안이 되고 가능성이 되는 그런 밤 말이다.

 

 내가 이 작품의 마지막에서 문득 그리게 된 것은 그런 밤이었다.

 이 다음의 이야기가 어떻게 또 이어질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는데  '뷰티풀 4부작'은 1년마다 발간된다. 3부에서 이어질 이야기를 보기 위해서는 다시 또 1년을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가장 큰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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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2-06-19 2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르메스님 오랜만이어요.
오랜만인데 갑작스레 질문. 디스토피아가 뭐에요?
죄송해요. 이렇게 멍청한 사람이라서 ㅎㅎㅎㅎ

ICE-9 2012-06-19 23:20   좋아요 0 | URL
무슨 말씀을요^ ^
디스토피아란 유토피아의 반대말이에요. 그러니까 유토피아가 쉽게 말해 모든 인간이 가장 행복하게 잘 살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세계를 말한다면 디스토피아란 그것과 완전 반대인 가장 불행하고 고통스러운 세계를 말하는 것이죠. 인간이 그를 둘러싼 세계로 인해 행복해지고 완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세계로 인해 억압받고 고통받는 세계 그것이 디스토피아랍니다.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나 조지 오웰의 '1984' 같은 작품이 전형적인 디스토피아 소설들이죠. 대답이 잘 되었는지 모르겠어요^ ^;

이진 2012-06-19 23:24   좋아요 0 | URL
오, 대답 너무 잘되었어요. 작품 예까지 들어주시니 금상첨화군요.
오랜만에 외국 소설을 읽어보고 싶네요. 요즘 통 한국 소설로만 읽어 놓으니 스릴러와 추리에 대한 감각이 떨어졌어요. 뭐, 원래 감각이 없었지만. 스노우맨 읽고 싶은데 너무 두꺼우이 ㅠㅠ
 
퓨어 1 줄리애나 배곳 디스토피아 3부작
줄리애나 배곳 지음, 황소연 옮김 / 민음사 / 2012년 4월
평점 :
절판


 

 

 유토피아가 결핍이 만들어낸 이상이라면 디스토피아는 삶의 어느 순간 문득 엄습하는 '이렇게 살아도 괜찮은가?'하는 불안이 결국은 보게 만드는 진실이다. 이렇게 유토피아가 인간의 힘과 이성으로 얼마든지 결핍을 메울 수 있다는 낙관론의 소산이라고 한다면 디스토피아 역시 비관론의 소산이긴 하지만 그 밑바닥에 존재하는 것은 '부재하는 것은 영원히 도래하지 않고 결핍은 영원히 충족되지 않을 것이니 우리의 힘과 이성의 한계를 정직하게 인정하는 가운데 출발하자'라는 일종의 겸허한 자기 긍정이다. 그렇게 유토피아가 다소 자기 능력의 과신에 자리잡는다고 한다면 디스토피아는 냉정한 현실 인식 위에 자리잡는다. 즉 유토피아가 이카루스의 날개라면 디스토피아는 메두사에게로 다가가는 페르세우스의 거울인 것이다.

 

 

 

 새삼 이런 구별을 말하는 것은 이러한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의 모습이 지금 말하는 이 소설 줄리애나 배곳의 '퓨어'에서도 그대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소설은 대폭발로 인해 멸망해버린 지구의 모습을 그리는데 거기엔 그 대폭발로 부터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은 일단의 무리들이 모여사는 '돔'이라는 곳이 있다. 그 '돔'은 폐허와 굶주림 그리고 죽음만이 가득한 거기에다 사람들 또한 화상으로 인한 흉터와 기형 그리고 온갖 사물들과의 융합으로 기괴한 모습을 이룰 수 밖에 없는 그 곳에서 유일하게 온전하고 안전한 세계가 된다. 제목인 '퓨어'는 바로 그 '돔'에 살고 있는 몸에 아무런 화상 자국도 흉터도 없으며 융합도 되지 않은 멀쩡한 신체를 가진 이들을 그 바깥의 사람들이 부르는 명칭이지만 그것은 동시에 마치 소설 속 재활원 처럼 순백으로 결빙된 구원이라 할만한 '돔' 자체에 대한 의미이기도 한다.

 

 그런데 그 '돔'은 어떻게 생겨났는가? 그것이 바로 주인공 패트리지의 아버지인 월럭스의 유토피아적 욕망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이미 지독한 병에 걸려 죽어 가고 있었어. 요양원은 사람들로 가득했고, 감옥은 감염된 병자들을 위한 곳으로 변해갔어. (...) 게다가 도시는 탄약으로 넘쳐나고 민란이 들끓었어. 슬픔은 커지고 삶의 무게는 참을 수 없을 만큼 버거워졌어. (..) 굳이 대폭발이 아니었더라도 우리는 그렇게 갈 데까지 가다가 결국은 서로를 죽이며 피바다를 만들었을 거야. 그러니까 어찌 보면 그들이 빨리 끝장을 내 준 셈이기도 해. 안 그래?"(2권 P. 18)   

 

 

 대폭발은 바로 월럭스가 일으킨 것이었고 그건 바로 위에서 잉거십이 말하는 바와 같은 그런 세상을 뜯어고쳐보겠다는 유토피아적 욕망에서 발현된 것이었다. 그렇게 이 소설엔 그 누군가의 유토피아적 욕망과 그 결과로서의 디스토피아적 세계가 일종의 댓구를 이룬다. 이러한 댓구의 모습은 무엇보다 두 가지 중요하지만 서로 대립되는 상징에서도 나타난다. 그 두 상징이 바로 불사조와 백조이다. 소설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불사조는 대폭발을 가져온 계획에 붙여진 이름이고 백조는 패트리지와 프레시아 일행을 어머니에게로 인도하는 조각이다. 아니 백조 자체가 어머니의 또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그렇게 불사조는 유토피아를 백조는 디스토피아를 의미한다. 이제와 말하지만 여기서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는 어떤 묘사된 현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보다 근본적으로 이것은 세상에 대한 어떤 시선자체를 의미한다. 아시다시피 유토피아란 어디까지나 세계의 발전가능성과 인간의 완전가능성이란 개념을 바탕으로 형성되는 것이다. 즉 여기에는 단순히 현상의 서술이 아니라 그 서술 자체를 가져오는 세계와 인간을 바라보는 어떤 시선 혹은 태도가 근원적으로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다. 불사조와 백조의 상징은 바로 그 각각에 자리잡은 그 근원적 시선에 대한 것이다.

 

  불사조란 언제 죽더라도 자기 의지로 온전히 부활할 수 있는 새다. 때문에 그것은 인간의 현재가 어떠한 모습이든 인간의 의지와 이성으로 언젠가 분명 완벽한 세상을 이룰 수 있다는 유토피아적 욕망의 근원에 자리잡은 낙관적인 자기 확신과 닮아있다. 자신의 의지만으로 부활까지 가능하게 만드는 불사조는 분명 그것의 제대로 된 상징이리라. 반면에 백조는 유아하지만 연약하다. 그는 부드러운 순응의 존재이다. 더구나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단 한 번 아름다운 노래를 부른다는 '스완송(swansong - 여기에는 또 다른 의미가 있는데 그건 바로 귀에 큰 이상이 생겼을 때 들려오는 이명(耳鳴)이다. 그런데 그 이명이 끝나면 더 이상 듣게 되지 못한다고 한다.)'을 생각한다면 더욱 그렇다. 배곳은 아마도 이 때문에 백조를 디스토피아적 자기 긍정의 상징으로 가져온 것일지 모른다. 그 임박한 죽음 앞에서도 비록 생애의 마지막 노래이지만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는 백조의 모습에서 주어진 한계 속에서 최선을 다하는 의지와 태도를 보았기 때문에 말이다. 그렇게 백조는 디스토피아 문학의 일종의 창세기라 할만한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와 조지 오웰의 '1984'가 궁극적으로 주려했던 것이 인간의 이성과 의지의 한계를 인정하게 하여 무모와 무지가 가져올 수 있는 비극을 경고하고 그것이 닥쳐오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조심할 것을 종용하려했던 것임에 비추어 본다면 그야말로 적합한 상징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단순히 말해 불사조가 유토피아적 욕망에 내재된 발전가능성과 완전가능성(사실 이것은 월럭스가 가지고 있는 생각 그대로이기도 하다.)에 대한 상징이라면 백조는 완전히 그 반대인 퇴보가능성과 불완전가능성(단적으로 어머니에게 있으리라 여겼던 치유약의 불완성성은 이러한 디스토피아가 가지는 시선상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에 대한 상징인 것이다.

 

 그러니까 여기서 드러나는 것은 줄리애나 배곳의 '퓨어'는 단순히 디스토피아를 그리는 소설이 아니라 그 시선에 있어서(그리고 태도에 있어서도) 디스토피아를 추구하는 소설인 것이다.(백조는 소설에서 궁극적으로 일종의 구원으로 인도하는 빛과도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즉 이 소설의 디스토피아는 하나의 방법론임과 동시에 하나의 지향점이기도 한 것이다.

 

 그렇다면 배곳은 왜 하필이면 디스토피아 - 궁극적으로는 그 근원에 자리잡은 세계와 인간을 바라보는 시선 - 를 지향하는 것일까?

 

  이것엔 아마도 두 가지 이유가 있지 않을까 싶다. 첫째는 동시대성의 추구 때문이다. 그러니까 배곳 스스로가 이 작품에다 최대한 동시대적 현실을 담으려 했기 때문이다.

 

 유명한 미국의 경제학자 누리엘 루비니는 최근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유토피아의 반대인 디스토피아는 이 시대를 대변하는 용어다. 많은 불확실성과 리스크를 대면한 우리에게 이제 유토피아는 사라졌다."라고. 이것은 비단 루비니 교수만의 입장은 아니다. 지금 세계의 경제분야의 석학들은 2012년을 한 마디로 디스토피아의 시대라 부른다. 왜 그렇게 부르는 것일까? 그것은 2008년 미국의 서브프라임 사태 그리고 현재 진행중인 유로의 위기 거기다 여전히 높은 실업난 그리고 날로 악화되는 경제적 불평등으로 인해 지금까지 사람들이 자본주의가 가져다주리라 믿었던 유토피아적 전망이 더 이상 이루어질 수 없음을 절절히 체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소설 '퓨어' 그대로 유토피아적 욕망으로 충동되었던 자본주의가 결국은 디스토피아로 귀결하고야 말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최근엔 그 전까지 꾸준히 생산되던 십대들의 풋풋한 사랑을 다루는 하이틴 로멘틱 코미디가 헐리우드 영화에서 사라졌음을 보게된다. 이제 헐리우드 영화속 십대들은 더 이상 사랑의 달콤함을 얘기하지 않는다. 대신 데브릭 그레닉의 영화 '윈터스 본' 처럼 아버지가 떠넘긴 빚을 청산해야 하거나 잭 스나이더의 영화 '써커펀치' 처럼 자신의 존재를 압살하려 드는 아버지로 부터 스스로를 구원해야 하거나 게리 로스의 영화 '헝거게임' 처럼 어른들이 망쳐놓은 세상을 제대로 고쳐야 하는 짐을 떠 맡는다. 이렇게 보니 십대들에게 얹혀진 짐이 과부하가 걸릴 만큼 어마어마하지 않을 수 없는데 이토록 세상을 치유할 책임을 십대들에게 지우는 까닭이 뭘까? 그건 아마도 십대들이 이제는 차츰 폐기물로 전락하고 있는 자본주의적 사고 방식에 그래도 어른들 보다는 조금이나마 덜 오염되어있기 때문이 아닐까? 덜 오염된 생각 바로 거기에 구원의 가능성 역시 자리잡고 있다고 여기기에 그런 것이 아닐까 싶다. 공교롭게도 이 소설 '퓨어'의 주인공들도 모두 십대들이다. 그들 역시 앞서 인용한 영화들의 십대들처럼 어른들이 미처 완성하지 못했던 세상의 구원을 대신 이룩해야 하는 책임을 떠 맡는다. 어쩌면 이 것은 지금 예술가들이 바라보고 있는 십대들의 의미에 대하여 배곳 역시 공감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이렇게 소설이 디스토피아를 다루게 된 것은 단순한 소설적 설정이라기 보다는 무엇보다 배곳이 동시대성에 충실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동시대성에 충실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그것은 단적으로 배곳 그녀 자신이 소설 '퓨어'를 그저 그런 암담한 미래를 그린 판타지가 아니라 무엇보다도 바로 지금의 세상에 대해 말하는 소설로 받아들여 주었으면 한다는 것이다.

 

 즉 그녀는 이 소설이 다만 재미를 위한 읽을거리로 그치지 않고 지금 처한 현실에 대해 냉정하게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이렇게 디스토피아가 되어버린 지금의 상황을 어떻게하면 현명하게 극복할 수 있는지 사유하게 만드는 그런 계기가 말이다. 그래서 배곳은 디스토피아적 시선을 담는다. 이것이 두 번째 이유이다. 그러니까 하나가 동시대성의 추구를 통해 지금 처한 현실의 가장 본질적인 모습을 작품에다 담고자 한 것이라면 다른 하나는 그 담겨진 현실을 가지고 그것을 극복할 대안을 독자들 스스로 생각할 때 참조할만한 것으로써 배곳 나름의 대안을 제시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앞서도 말했지만 디스토피아적 시선의 근본은 어디까지나 주어진 한계의 긍정과 그 안에서의 최선이다. 배곳은 이것을 무엇보다 아이들의 신체 묘사를 통해 드러낸다. 앞서도 '돔'을 제외한 바깥의 사람들은 흉터와 융합의 존재라고 말을 했는데 주요 인물 중 '퓨어'인 패트리지와 라이다를 제외하고는 프레시아, 브래드웰 그리고 엘 캐피턴 모두는 융합된 존재다. 프레시아는 한 쪽 손이 예전의 행복한 가정이었을 때의 프레시아를 암시하는 인형의 머리와 융합되어 있으며 브래드웰은 새들과 융합되어 있고 엘 캐피턴은 가장 아끼던 동생과 융합되어 있다. 그런데 이렇게 융합된 존재들은 그저 단순한 사물이나 존재만은 아니다. 배곳은 주의깊게도 각 인물들이 가장 바라마지 않는 것을 융합시켰다. 이를테면 프레시아는 옛날의 그 행복하고도 안전했던 자신으로 되돌아가기를 늘 꿈꾼다. 바로 인형의 머리는 바로 그 때의 상징이자 프레시아 욕망의 상징인 것이다.  브래드웰도 마찬가지다. 그는 늘 자유롭기를 꿈꾼다. 새는 언제나 자유의 상징이었다. 그렇게 브래들웰도 자신이 욕망하는 것의 상징과 융합되어 있는 것이다. 엘 캐피턴은 어떠한가? 그는 융합되기전 동생을 무엇보다 아껴왔다. 또한 그들이 만나게 되는 선한 어머니들의 존재도 마찬가지다. 그녀들 역시 그녀들이 무엇보다 아끼는 자녀들과 융합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게 배곳은 융합된 존재들이 단순한 존재가 아니라 무엇보다 그들 욕망의 상징임을 밝힌다. 왜 배곳은 하필이면 그것들과 융합시켰던 것일까? 거기에 대한 근본적인 이유는 융합된 존재들에 대한 등장인물들의 반응에서 짐작된다. 프레시아, 브래드웰은 자기 욕망의 상징임에도 불구하고 항상 숨긴다. 프레시아는 어떻게든 소매로 인형 머리의 손을 가리려 하고 브래드웰 또한 셔츠로 끝끝내 가리려 한다. 그것은 비단 그 모습의 흉물스러움 때문이 아니다. 그들이 그것들을 가리는 진정한 이유는 그들이 처해있는 현실상 그들의 욕망이 그대로 충족되어질 수 없음을 스스로 분명하게 자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프레시아는 인형이 상징하는 안전과 안락함을 가져다 줄 '돔'에 대한 염원을 스스로도 뻔한 욕망이라고 생각하며 부끄러워한다. 브래드웰은 홀로 자유롭게 되고 싶지만 아직도 그의 도움을 많이 필요로 하는 이들이 있기에 그럴 수 없다. 그는 그렇게 될 수 있을 때 조차 남들을 돕기 위해 기꺼이 그 자유를 포기한다. 즉 그들의 숨김은 그들의 냉정한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한 '지금은 이럴 때가 아니야'라는 마음의 간접적 표현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렇게 그들은 세상에 대한 현실의 인식을 바탕으로 스스로의 욕망을 억제한다. 그것은 결국 자본주의의 좌초를 가져온 (특히나 현 금융권에서 보여지는) 무분별한 욕망 추구와는 분명 다른 모습이다. 이것이 덜 오염된들 자들에게서 보여지는 구원의 가능성이라면 어떻게 해서 이것들이 가능한지가 관심사가 될 수 밖에 없다. 우리는 소설 속에서 그러한 자기 제어, 절제가 바로 세계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임에서 나오는 것임을 본다. 그들은 자신들이 그런 존재라고 해서 세상이 그렇다고 해서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는다. 그냥 주어진 신체의 한계와 세계의 한계 속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간다. 그야말로 디스토피아적 태도 그대로다. 그런데 이러한 긍정 그리고 최선이 왜 필요한 것일까? 그것은 그 긍정이 바로 공존을 위한 토대이며 포용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첫걸음이기 때문이다. 패트리지와 프레시아 그리고 브래드웰이 소설속에서 보여주는 한결같은 모습이 있다. 그것은 늘 타인의 반응을 신경쓰고 되도록 그 반응에 공감하려는 노력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건 자신의 한계를 알기 때문이었다. 월럭스 처럼 자기 자신에 대해 과신하지 않고 자신의 이성과 능력의 한계를 순순히 인정한 가운데 타인들과 함께하지 않으면 제대로 살아갈 수 없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자신과 세계의 긍정은 곧 타인과의 연대로 나아가게 한다.

 

 배곳은 무엇보다도 디스토피아가 되어버린 오늘의 현실을 제대로 치유하기 위해서는 이 연대하려는 마음이 필요하다고 본다. 그래서 배곳은 '퓨어'의 주인공들을 일종의 '파티(party - RPG게임에서 흔히 보는 집단적 주체)' 로 만든 것이다. 이러한 공존 그리고 연대의 추구는 무엇보다도 엘 케피턴의 신체가 보여준다. 엘 케피턴은 자신의 등에 자신이 가장 아끼는 동생 헬머드가 융합되어 있다. 하지만 동시에 헬머드는 늘 한시라도 빨리 자유롭고 싶어지는 굴레이기도 하다. 특히나 케피턴에게 있어 헬머드의 꾸물럭거리는 두 손의 움직임은 그러한 분리 욕망을 더욱 부채질한다. 소설의 마지막에 배곳은 그 꾸물럭거림의 정체를 밝힌다.(내가 이 소설에서 가장 감탄한 부분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스포일러상 그 정체는 말하지 않겠다.) 결국 그들은 공존을 선택한다. 서로의 한계 지점에 존재하는 이들이지만 긍정하고 포용하기로 선택한 것이다.

 

  이 소설의 가장 독특한 모습이라고 할만한 융합 역시도 바로 이 공존과 연대를 전면적으로 말하기 위해서 가져온 것이다. 융합이란 섞임이요 그렇게 나 아닌 것들을 포용하는 것이다. 그것도 일순간이 아니라 영원히! 문제는 소설에서 그렇게 융합된 존재들이 모두 그것을 긍정하는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융합된 존재들 중 그 누구도 자신에게 융합된 것에 대해 증오를 드러내지 않는다. 그들은 다만 수용하고 그것과 공존하는 가운데 최선의 삶을 살아갈 뿐이다. 그렇게 융합은 연대의 기반이 타자의 긍정이요 자신과 똑같은 것으로 여기는 포용임을 드러내는 중요한 상징이다. 이러한 융합의 상징성은 모든 악의 근원인 월럭스와 그의 중개자이자 또 하나의 가부장적 존재인 잉거십이 가지고 있는 특성들과 대비해서 보면 더욱 뚜렷이 나타난다. 월럭스와 잉거십, 그들은 절대 포용하는 자들이 아니다. '돔'은 철저하게 바깥의 사람들과 격리되어 있으며 더구나 그 안에서 시행되는 '코딩'의 비밀 역시 개인의 의사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월럭스는 자신의 뜻을 따르지 않는 패트리지의 어머니를 버리고 잉거십은 순종하지 않는 아내를 구타한다. 모두 일방적이고 거기다 강요적이다. 배곳이 유토피아적 욕망을 위험하다고 보는 것은 어쩌면 거기에 바로 이러한 타자를 고려하거나 배려하지 않는 일방적인 시선 혹은 태도 때문일지도 모른다. 또한 무절제한 욕망 추구를 보여주었던 자본주의 또한 바로 이러한 시선 혹은 태도를 근원적으로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오늘날과 같은 디스토피아를 가져왔을지 모른다는 의심 역시 가능하다. 바로 그래서 배곳은 공존과 연대의 상징으로써 전면적으로 융합을 가져온 것이다.

 

  더러 좋은 작품을 표현할 때 '의외의 보물'이라는 말이 있는데 '퓨어'는 그야말로 거기에 어울리는 작품이었다. 융합된 존재들로 이루어진 독특한 설정. 현실의 디스토피아적 의미와 그 극복을 위한 대안을 깊이있게 담아내면서도 절대 지루하지 않게 만드는 이야기적 재미. 한 마디로 나같이 설정의 참신성에 많은 점수를 주는 사람으로서는 매혹되지 않을 수 없는 작품이었다. 하지만 물론 더욱 높이 평가해야 할 것은 자신의 주제를 온전히 독자들에게 전하기 위해 꽤나 세부적으로 공을 들여 설정해 놓았고 또한 그것들이 유기적으로 제대로 결합되어 있다는 것이다. '은유와 상징의 정교한 건축물'이라는 표현은 이 작품의 또다른 닉네임이다. 이 책은 이것저것 건드려 볼 부분이 참으로 많은 작품이다. 총 3부작이라고 하는데 앞으로 두 작품이 나온다면 음미해 볼 부분은 더욱 쌓이게 될 것이다. 그 때 또 얼마나 이런 저런 말들을 내가 쏟아내게 될 지 은근히 기대가 된다. 그 때의 보다 풍성한 수다를 기약하며 1부, '퓨어'에 대한 얘기는 이쯤에서 그치는게 좋겠다.

 

 리뷰의 제목으로 삼은 GRAVE NEW WORLD는 우리에게는 AUTUMN으로 유명한 그룹 STRAWB의 노래 제목이다.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BRAVE NEW WORLD)'를 무덤을 뜻하는 GRAVE로 살짝 바꾼 제목의 이 노래는 아일랜드 출신인 그룹 STRAWBS가 종교적 갈등으로 일어난 아일랜드 유혈 사태를 보면서 만들었는데 모두들 빛나는 유토피아를 가져온다면서 시작했지만 결국 가져오는 것은 무덤과 같은 신세계일 뿐이지 않냐며 꼬집는 노래이다. '퓨어'를 읽으면서 많이 생각났고 많이 들었던 노래였다. 월럭스의 '돔'처럼 타자에 대한 배려와 연대가 없는 유토피아란 결국 GRAVE NEW WORLD가 아닐까...

 

 

Grave New World - Strawbs

 

 

There's blood in the dust
Where the city's heart beats
The children play games
That they take from the streets
How can you teach when you've so much to learn
May you turn
In your grave
New world.

There is hate in your eyes
I have seen it before
Planning destruction
Behind the locked door
Were you the coward who fired the last shot
May you rot
In your grave
New world.

There is death in the air
With the lights growing dim
As those who survive
Sing a desperate hymn
Pray that God grants you one final request
May you rest
In your grave
New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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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2-05-12 16: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르메스님 ㅠㅠㅠ 왜이렇게 뜸하셔요, 요즘.
매일 알라딘에 들어오면 서재브리핑보면서 헤르메스님 글 먼저 찾는데 요 며칠동안 전혀 보이지 않아서 얼마나 기다렸는데요. 더워서 글쓰는게 귀찮아지신거에요?ㅎㅎㅎㅎㅎ

ICE-9 2012-05-13 20:31   좋아요 0 | URL
더워서 그런 것은 아니고^ ^;...
흑흑 요즘 너무나 바쁘답니다.ㅠ ㅠ
거기다 또 며칠간은 몸이 안 좋기도 했고...

글도 자주 올리고 해야 하는데...
소이진님은 중간고사 이제 끝났죠?
얼마나 후련하실까요?
저도 좀 그런 빈 시간들이 주어졌으면 좋겠어요^ ^;

이진 2012-05-14 22:47   좋아요 0 | URL
아이코야 ㅠㅠㅠㅠㅠ
바쁘시구나, 헤르메스님.
맞아요. 요즘 한창 일이 바쁠때죠.
저만 학생이다보니 하릴없이 떠돌아다니기만 하고.
다들 잘 안보이시던데 얼른 일이 처리되서(?) 헤르메스님 좀 더 쉴 시간이 많아지기를. 그래야 나도 좋은데 ㅠㅠㅠ 파이팅!
 
십 브레이커 - 세상과 온몸으로 부딪쳐 자신의 길을 찾는 소년의 이야기
파올로 바치갈루피 지음, 나선숙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2년 2월
평점 :
절판


 

 

   네일러...

 

  늘 약 아니면 술에 취해 조금이라도 수틀리면 아들에게 무지막지한 폭력을 일쌈는 그의 아버지는 단단히 박힌 못 처럼 질기게 살아라고 그런 이름을 그에게 붙여주었다고 했다. 네일러는 그 이름이 마치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는 신탁이라도 된 양 그렇게 살았고 사실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는 세상이기도 했다. 때는 언젠가의 미래. 세상의 대부분이 '절대수축'이라는 해수면 상승으로 바다 속으로 가라앉고 자원마저 고갈되어 오로지 재활용을 통해서만 필요한 자원을 얻을 수 밖에 없게 되었다. 그렇게 한정되어진 자원으로 인해 당연히 빈부의 격차는 극심해지고 모든 것은 그저 가진 '자본'의 양으로만 결정되었다. 따라서 국가는 더이상 소용없어지고 오로지 소수의 다국적 기업만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세상이 되고 말았다. 네일러는 이러한 마치 영국이 한창 식민지 건설을 통해 제국주의로 향해 나가던 것과 같은 세상에서 가장 빈곤한 계층의 아이로 태어났다. 그 계층이 살아남으려면 오로지 제 몸뚱이를 이용하여 좌초된 선박에 들어가 다국적 기업에 팔만한 고철더미들을 모으는 것 밖에는 없다. 그러니까 예전 우리나라 난지도에도 있었다는 재활용할만한 물건들을 찾아 쓰레기 더미를 뒤지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넝마주의'가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도 그건 그나마 괜찮은 편이다. 그들을 특히 '스캐빈져'라 부르는데 그렇게 배에 들어가 고철을 가져오는 것도 왜만한 행운이 따르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지극한 부러움의 대상이니까. 세상에는 그조차 되지 못해서 자신의 장기나 피를 기업에 팔 수 밖에 없는 사람들로 넘쳐나기 때문에...

 

 

 그러한 스캐빈져들에게 있어 희망은 딱 두 가지 밖에 없다. 하나는 절대 몸이 자라지 않는 것. 왜냐하면 선박 도처에 뚫린 구멍을 찾아 그 안으로 들어가 필요한 금속을 가져와야 하는 스캐빈져들로서는 몸이 커져 버리면 더이상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특히나 유조선 같은 경우 아직도 발견되지 않은 석유 탱크를 찾아내는 것이다. 석유가 완전히 고갈되어 그렇게 찾아낸 석유는 엄청나게 고가에 팔리기 때문이다. 즉 어딘가 잠자고 있는 탱크 속 석유는 스캐빈져들에게 한 방에 그 고단한 삶으로 부터 탈출시켜 줄 로또와도 같은 것이다.

 

 

  네일러도 마찬가지였다. 그 둘의 희망만을 안고 단순히 오늘만은 살아남기 위해 내일 같은 건 전혀 생각하지 않고 어두운 통로들을 기어다니며 금속들을 모았다. 하지만 그래도 네일러는 바라는 게 하나 더 있었다. 멀리서 바라보기만 했었던 '쾌속선'을 타고 푸른 바다를 항해하는 것. 잠깐만 마음을 놓아도 무심코 그런 자신의 모습을 공상할 만큼 간절한 바람이지만 낮에는 어둡고 자칫 잘못하면 목숨마저 위태로운 통로들과 밤에는 무자비하게 가해질 아버지의 폭력 밖에는 없는 네일러에겐 그건 영원히 이루어지지 않을 꿈이었다. 그러니까 절망의 우물 바닥에 빠져버린 자의 두 눈 안에 비쳐드는 밤하늘의 별들과도 같은 그런 꿈이었다.

 

 

  생각해보면 바치갈루피가 그려내는 세상들은 다 그랬다. '와인드 업 걸'에서도 그랬다. 온갖 유전병들이 들끓고 다국적 기업들이 식량을 제멋대로 통제하는 바람에 굶주림만이 가득한 그렇게 희망이라고는 그 어디도 존재하지 않는 세상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바치갈루피에게 그저 디스토피아라는 의미만으로 머무르지 않는다. 그가 이런 가혹한 세상을 주인공들에게 선사하는 것은 디스토피아를 다루는 소설들이 흔히 그렇듯이 미래에 닥쳐올지도 모를 비극적 세계를 묘사로써 지금 현실을 계도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사실 보다 궁극적인 목적은 오히려 주인공들의 성장을 위한 발판을 마련해주기 위해서다. 그러니까 달리 말해 이렇게 세상을 묘사하는 건 거기에 바치갈루피가 정말 주인공들에게 전해주고 싶은 그런 마음이 투영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마음이란 다름아닌 주인공들이 그 어디에도 기대지 않고 제 스스로의 의지와 결정으로 서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바치갈루피는 그 무엇보다 오로지 혼자의 힘과 생각으로 그 자신만의 길을 가도록 원한다. 그건 그대로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그의 진심이기도 하다. 때문에 그는 '와인드 업 걸'에서도 그랬지만 이 소설 '십 브레이커'에서도 일단 세상을 한 번 '리셋' 시킨다. 노아 시대의 홍수와도 같이 '와인드 업 걸'에서는 거대한 홍수로 또한 이 소설에선 카트리나와도 같은 거대한 태풍으로 기존의 모든 것들을 날려버리는 것이다. 그렇게 기성의 모든 것들이 완전히 비워진 상태에서 주인공들이 스스로 자신의 길을 찾아갈 수 있도록...

 

  그렇게 '십 브레이커'에서 네일러가 사는 마을은 완전히 전복되고 네일러는 그 뒤집어진 세상 속에서 자신의 꿈에 다가갈 계기를 얻게된다. 그리고 그 계기를 통해 네일러는 그 오래된 꿈을 위해 거침없이 달려가게 된다. 더 이상 하루하루를 견뎌내기에 급급한 자맥질이 아니라 힘차디 힘찬 헤엄으로 세상이 가르쳐 준 법칙이 아니라 자신이 발견한 새로운 삶과 인간에 대한 믿음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아버지라면 망설이지 않았을 것이다. 이 부잣집 소녀의 목을 긋고, 반지를 빼내고, 거기서 피를 씻어내며 웃었을 것이다.  일주일 전이라면 네일러 자신도 똑같은 일을 했을 것이다.(...)

 '그 순간 나는 슬로스가 나의 생명도 그녀의 생명만큼 소중하다고 생각해주기를 너무도 간절히 바랐지' (...)   물에 빠진 소녀의 애원하는 눈을 바라보면서 네일러는 한 때 자신의 눈도 꼭 그러했으리라고 생각했다. (P.128)

 

 

  바치갈루피는 늘 압도적인 서사를 자랑한다. 그는 그 누구보다 흠뻑 매혹시킬만한 이야기를 할 줄 아는 작가이다. 거기다 SF적 세계인데도 그 디테일이 뛰어나서 현실감이 넘치기 때문에 더 이야기 속으로 빨려들게 한다. 그 블랙홀과도 같은 이야기 속에서 바치갈루피는 똑똑히 보여준다. 그 수많은 고난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스스로가 찾아낸 믿음 안에서 당당히 나아가는 주인공의 모습을. 그러니까 바치갈루피의 매력이기도 한 압도적인 서사는 사실은 독자들에게 어떤 희망을 주기 위함이다. 즉 소설의 주인공처럼 그렇게 자신을 믿고 가도 된다는, 전혀 세상이 말하는 규칙 같은 것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는, 오로지 네 자신만 믿고 나아가도 충분히 괜찮다는 바로 그런 믿음을 주기 위함인 것이다.

 

 

 

 

거짓말을 비웃을 수 있는 진실을 가르쳐주는 자가 누구지? 

  누가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고 어떻게 지킬것인가를 결정하지?

  누가 우리를 바꾸지? 

  누가 우리를  자유롭게 만들 열쇠를 가지고 있지? 

  그건 바로 너야. 

 너는 이미 너에게 필요한 모든 무기를 가졌어 

 그러니 이제 싸워! 

 

- 마치 영화 'SUCKER PUNCH' 이러한 마지막 독백과도 같이... -

 

  지금보다 한 십년만 거슬러 올라가기만 해도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주로 했던 말은 "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였다. 아이들은 그들에게 남겨진 시간의 양 만큼이나 무한한 미래의 가능성과 동의어였고 그래서 한 편으론 어른들의 부러움과 시기의 대상이 되기도 했지만 그래도 어른들은 아이들이 그 남겨진 가능성을 아낌없이 모조리 쓰기를 원했다. 하지만 지금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하는 말은 이제 더 이상 그 말이 아니다. 지금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소년들이여, 제발 살아달라!"

 

  그렇게 어른들이 절박하게 외쳐야 할 만큼 현재의 대한민국은 아이들이 죽어나가는 시대다. 아파트에서 떨어지고 집에서 목을 메고 각종 폭력에 시달리다 죽는다. 비단 육체적인 죽음 뿐만이 아니다. 오직 좋은 성적만 강요하는 사회. 입고 있는 옷의 브랜드와 살고 있는 집의 평수로 모든 삶이 단정되어버리는 사회. 자신의 꿈조차 제가 원하는 것이 아닌 기성품 처럼 남들이 찍어주는 것에 맞춰주어야 하는 사회. 그 속에서 이제 그들의 영혼마저 죽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어쩌면 그들의 자살 역시도 영혼의 타살을 자행하고 있는 사회에 대해 더이상 그들의 희생을 강요하지 말라는 절박한 외침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그들은 '살아달라'는 말 밖에는 할 수 없는 어른들의 무기력을 비웃고 그것으로 그들에게서 더이상 아무런 구원의 빛이 나올 수 없음을 통박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오로지 앞만 보고 빨리 달리기 위해 스스로 거세해 버린 경주마와 같은 어른들로 가득한 이 세계...

 

  바치갈루피가 그려내는 '십 브레이커'의 세상은 그러니 사실은 먼 얘기가 아닌 것이다. 네일러의 하루를 몸으로 착쥐하고 영혼으로 핍박하던 그 세상이나 바로 지금 우리들 세상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어른들의 강요가 매일 아이들의 희망을 압살해 가는... 다만 우리는 '그들을 위해서'라는 사실은 자신 조차 믿지 않는 거짓말로 그걸 치장하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사실은 지금 우리의 현실이 아이들에게 더 잔인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런 잔인한 세상에서 바치갈루피는 처음 청소년을 위해 쓴 이 소설에서 말하는 것이다.

  "세상은 너를 그저 벽돌벽 속의 벽돌 하나로 만드려고 한다. 하지만 어른들이 너를 위해 무언가를 해 주기를 기다리지 말고 먼저 스스로 벽돌벽 속 한 개의 벽돌이기를 거부하고 뛰쳐나가라. 구원은 오직 너의 그 탈주의 몸부림 안에만 있으니..."

 

  사실 이런 말조차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이 소설에 어울리지 않는 중언부언에 지나지 않는다. 바치갈루피의 이 소설이 말하고 싶은 바는 단 한 문장으로도 나타낼 수 있다.

 

  "거세된 어른들은 신경쓰지마! 너에겐 너 만의 진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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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2-02-19 2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리뷰를 읽다가 바치갈루피라는 단어가 나오길래(설명조차도 없길래)
대체 뭐지? 하면서 리뷰를 수십번이나 들여다 보았는데도 없길래 올려다 보았는데 작가의 이름이었군요. 스스로 멍청하다고 꿀밤을 먹이는 중입니다.
생각해보면 요새는 성장소설을 피하는것 같아요. 아마 의도적인것같아요. 그걸 읽어서 뭐하겠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질 않는다는. 아마 이 아름답지만 중언부언에 지나지 않는다는 리뷰를 읽고서도 이 책을 피할 것 같아요. 스캐빈져의 순수한 모습을 보고서도 말이죠..

ICE-9 2012-02-19 23:36   좋아요 0 | URL
성장소설이 일종의 자기개발서 같은 것으로 읽힐 수 있다는 소이진님의 말씀에 충분히 공감이 갑니다. 그런데 '십 브레이커'는 제가 스포일러가 될까봐 내용의 많은 부분을 빠뜨려서 그렇지 소이진님이 생각하는 그런 성장소설은 분명 아닐거에요. 저는 성장소설을 점진적이냐 혹은 급진적이냐에 따라 착한 그리고 나쁜 이렇게 구분하는데 '십 브레이커'는 '나쁜' 성장소설입니다. 급진적이고 결말을 고려하면 굉장히 전복적이죠. 사실 주체 정립은 전복적 실천이기도 합니다. 온전한 자기 스스로가 된다는 것은 그동안 자신의 내부에 횡단된 사회의 온갖 프레임들을 걷어내는 작업이기도 하니까요. '만인은 만인에게 있어 늑대'라는 홉스적 진실을 날 것 그대로 드러내는 가차없는 소설이에요. 그런면에서 무시하기 어려운 소설인데 이 소설의 매력을 제대로 못 살려냈다니 제가 아마 시간에 쫒기는 가운데 써서 그런가봐요. 언젠가 다시 한 번 제대로 리뷰해야겠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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