킬 오더 메이즈 러너 시리즈
제임스 대시너 지음, 공보경 옮김 / 문학수첩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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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이즈 러너’를 좋아한다. 비슷하게 세계의 종말 이후를 다루고 있는 여타의 영 어덜트 판타지 소설과 처별되는 이 소설만의 독특한 면모 때문이다. 다른 작품들은, 대표적으로 ‘헝거게임’이 그러한데, 등장인물들 간의 경쟁을 바탕으로 하고 있지만 ‘메이즈 러너’는 등장인물 사이의 협력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점이 마음에 들었다. 


 사실 작금의 영어덜트 판타지 소설들이 주로 멸망 후라는 ‘디스토피아’를 다루는 것은 2008년 미국의 금융 위기 이후 더욱 노골화된 경향으로  현재 미국 사회가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의 간접적인 표명이라고 할 수 있다. 소설들이 경쟁을 통해 이야기를 끌고 나갔던 것도 현대 사회가 바로 그것을 주축으로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으로 현실의 충실한 반영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엔 한계가 존재했다. 왜냐하면 경쟁에서 승리하는 주인공의 묘사가 오히려 그들이 저항하고자 하는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에 봉사하도록 이끌고 있었던 것이다.


 미셸 푸코에 따르면 하이에크가 주도했던 신자유주의의 근본 목표는 어디까지나 노동자를 개인 기업가처럼 만드는 데 있었다. 즉 노동자로 하여금 자신의 신체와 의식 모두를 1인 기업처럼 보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신자유주의가 가장 우려했던 것은 노동자들의 단결권이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그들을 뭉치게 만드는 계급 의식을 희석화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하이에크 같은 신자유주의 사상가들은 어떻게 하면 노동자들이 계급 의식을 가지지 않고 언제까지나 하나의 개인으로 남겨둘 수 있을까를 가장 최우선적으로 생각했고 거기에 노동자들을 한 명의 기업가처럼 만드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때문에 경쟁이 중시되었다. 나아가 모두를 경쟁이라는 게임에 참여하도록 만들기 위하여 정부의 보호막도 모조리 해체해 버렸다. 그들의 작은 정부란 바로 그것을 위해 나온 것이었다. 


 흔히 사람들은 신자유주의가 정부의 개입을 줄이려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건 전적으로 오해에 불과하다. 사실 그들은 정부의 개입을 적극 옹호한다. 단 그 개입이 어디까지나 예전에는 경쟁으로부터 자유로웠던 영역까지 진출해 거기에서조차 경쟁 제도를 만들어 낼 때에만 그렇다. 대표적으로 공기업이나 의료, 수도, 전기, 경찰과 같은 공공서비스의 민영화 같은 것 말이다. 모든 영역에서의 경쟁의 창출. 이것이 바로 신자유주의가 생각하는 정부의 지상 목표다. 그들이 이렇게 경쟁을 중시하는 이유는 자본주의 사회가 가진 구조적인 모순을 얼마든지 개인의 능력에 따른 결과로 사람들에게 쉽게 정당화시켜 흔한 말로 혹세무민하기 쉽기 때문이다.


 즉 신자유주의의 진짜 목표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을 자기 능력에 따른 결과로 생각토록 만드는 것. 모두를 ‘MEA CULPA’로 만들어 구조적 모순을 은폐시키는 것. 그리고 내가 속한 공동체에 대한 타격이라고 생각하면 쉽게 연대했을 개인들을 어디까지나 자기 능력의 부족으로만 생각케 하여 연대 의지를 휘발시키는 것. 신자유주의 시대에 들어와 대폭 늘어난 자기계발서도 신자유주의가 바로 이와 같은 인간형을 양산하려 한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증명하고 있다고 하겠다. 이렇게 하여 다시는 프랑스 대혁명이나 파리 꼬뮌 혹은 러시아 혁명 같은 노동자들의 계급 운동이 발생하지 않는 것이 바로 하이에크와 같은 신자유주의 사상가들이 꿈꾸는 유토피아인 것이다. 소수의 권력자와 다수의 노예와 같은 순종자들. 영어덜트 판타지 소설이 종말 후의 디스토피아를 그리고 있는 것도 그것이 바로 신자유주의가 꿈꾸는 세상의 본질적인 모습이기 때문이다. 소설 속에서 권력자들은 그런 세계를 종종 유토피아라고 부르지 않았던가. 주인공은 그런 세계를 부수려 한다. 그런데 부수려 하면 할수록, 경쟁에 이기려 하면 할수록 주인공은 더욱 개인 기업가적 모습을 보인다. 능력을 연마하고 홀로 전략을 짜며 성공하면 무리의 인정을 받아 지위가 높아진다. 신자유주의가 그리던 이상형의 전형적인 모습을 닮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소설이 추구하는 대안의 설득력도 그 기초가 부실해진다. 대부분의 작품에서 후반의 긴장감이 떨어지는 것은 그 때문인 지도 모른다.


 그런데 ‘메이즈 러너’는 달랐던 것이다. 이들의 공동체는 마치 플라톤의 국가를 연상시켰다. 모두가 정해진 자리가 있고 주어진 역할에 충실하며 미로를 빠져나간다는 공동체의 목적에 맞춰 서로 협력했다. 그들의 모든 노력 자체가 대안을 향한 한 걸음이었다. 그러니 그들의 행보가 궁금하고 그들이 만들어 내는 흐름이 이 다음엔 어디로 연결될 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메이즈 러너’의 속편 스코치 트라이얼의 개봉에 발맞춰 출간된 ‘킬 오더’는 ‘메이즈 러너’의 프리퀄이다. 즉 영화의 결말에 밝혀지는 세상의 멸망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그리고 있는 작품인 것이다.



 소설은 메이즈러너의 주인공 토머스와 테리사가 헤어지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이제 토머스는 기억을 지우고 메이즈 러너가 되기 위해 미로로 향하는 승강기에 오르고 있다. 그리고 이야기는 13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새로운 주인공 마크와 트리나를 보여준다. 그들은 원래 소꿉친구다. 나중에 ‘태양 플레어 현상’이라 일컬어지는 태양열의 엄청난 증가로 노출된 지구 상의 사람들이 모두 불타 죽기 바로 직전 마크와 트리나는 서로 마주보며 지하철에 타고 있었다. 마크는 트리나를 좋아하지만 얼굴도 예쁘고 몸매도 근사해 학교 인기인이 된 트리나에게 사랑을 섣불리 고백하지 못한다. 그러다 갑자기 지하철이 멈추고 억지로 문을 열고 나간 터널에서 마크와 트리나는 플랫폼의 사람들이 불에 타 죽는 것을 목격한다. 서둘러 터널로 달아나지만 터널 역시 그리 안전한 곳은 아니었다. 위기가 닥쳐오고 전직 군인인 알렉의 도움으로 그것을 무사히 넘긴 그들은 간신히 살아남은 소수의 사람들과 이제 정착촌을 이루어 살아간다. 하지만 고난은 그게 다가 아니었다.


 하루는 공공연히 필요한 물품들을 나눠주러 날아오던 비행선 버그가 나타나더니 도움을 기대하고 모인 마을 사람들에게 화살의 비를 퍼붓기 시작한다. 쓰러지는 마을 사람들을 보며 마크와 알렉은 마을을 구하기 위해 싸우고 결국 며칠에 걸쳐 버그 한 대를 추락시키고 돌아와 보니 화살에 맞은 마을 사람들이 모두 죽어 있는 것을 알게 된다. 그것도 그냥 죽은 것이 아니라 머리 속에 벌레들이 들어와 마구 갉아먹는다며 끔찍한 통증을 호소하다가 죽어버렸다는 것을.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낀 마크는 비행선에 서 보았던 상자를 떠올린다. 바로 그 상자에 ‘바이러스’라고 되어 있고 ‘전염성이 매우 높다’고 적혀 있었던 것을. 버그가 쏘았던 화살에는 ‘플레어’라는 이름의 사람의 뇌를 공격해 죽게 만드는 바이러스가 발라져 있었던 것이다. 감염자는 속출하고 마크의 친한 친구들도 잇달아 죽는다. 마크와 알렉은 트리나를 비롯하여 사람을 모아 백신을 구하려 버그가 왔던 곳을 찾아 떠난다. 천신만고 끝에 다다른 기지에서 그들은 충격적인 진실을 알게 된다. 알래스카에 있다는 연합 정부가 이대로는 지구 재건이 힘들다고 생각해 바이러스를 통해 인구를 대폭 줄이기로 결정했다는 사실을. 그것이 바로 메이즈 러너 후반의 지구 풍경을 낳은 ‘킬 오더’였던 것이다.


 프리퀄인데다 주인공도 다르지만(한국인 캐릭터 ‘민호’도 나오지 않는다. 민호의 이야기는 아마도 ‘피버 코드’에서 나오는 것 같다.) 페이지가 거침없이 넘어가는 것은 여전하다. 익숙한 전개인데도 사건들이 잇달아 터지는 빠른 속도감으로 식상함을 느낄 여지마저 얼른 없애 버리고 있다. 한 마디로 독자로 하여금 이야기에 푹 쩔게 만드는 제임스 대시너의 솜씨는 ‘킬 오더’에서도 변함없이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이다. 전개가 다소 창의적이지 못하다는 점이 걸리긴 하지만 내가 ‘메이즈 러너’의 매력으로 생각했던 점은 여기에서도 변함은 없었기에 만족할 수밖에 없는 작품이었다. 공존과 그것을 위한 협력이라는 ‘메이즈 러너’의 모토는 여기서 더욱 치열하게 전개된다. 무엇보다 마크의 일행을 가로막는 것들 모두가 철저히 공존 보다는 자기 본위로 똘똘 뭉친 집단이기 때문이다. ‘킬 오더’를 만든 연합 정부는 말할 것도 없고, 숲에서 마크 일행을 마귀라 부르는 광신자 집단(사실 그들은 바이러스의 실험 대상으로 알고보면 피해자였다.)도, 자기들을 감염시켰기에 치료제를 얻기 위해서라도 연합 정부마저 감염시켜야 한다고 선동하는 기지의 브루스도 다 마찬가지다. 그런데 여기서 재미있는 사실은 비극은 모두 그들의 두려움에서 잉태되고 있는데 정작 그 두려움의 원인은 그들 자신이 낳았다는 것이다. 브루스는 광신자 집단을 두려워 해 세상 전부를 파괴할 지도 모를 위험을 감수한다. 그런데 광신자 집단을 만든 것은 바로 자신들이었다. 똑같이 연합 정부도 ‘킬 오더’ 명령을 수행한 브루스에 의해 커다란 위험에 처한다. 이렇게 소설은 그들의 이기적인 생각으로 내린 지극히 편협한 결정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비극의 부머랭으로 돌아오는지 선명하게 보여준다. 덕분에 그런 그들과 대비되어 주인공 일행이 마지막에 택하는 행위는 더욱 극적으로 강조된다. ‘킬 오더’는 메이즈 러너 시리즈가 어디를 향해 뛰어가는 작품인지 보다 선명하게 말해주는 작품이다. 나처럼 메이즈 러너의 모토에 반하여 이 작품을 찾게 된 이들이라면 ‘킬 오더’도 만족하리라고 본다. 다 읽고 나니 프리퀄 제2부인 피버 코드가 기다려진다. 글레이더들이 ‘메이즈 러너’가 되기 전의 이야기가 바로 여기에 담긴다고 하니 더욱 그렇게 되는 것 같다. 부디 갈증이 깊어지기 전에 나와 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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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5-08-28 15: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오, 저 바로 얼마 전에 메이즈 러너 시리즈를 새벽까지 탐독했는데
헤르메스님 아니었으면 프리퀄을 놓칠 뻔 했군요!

피버 코드? 으아... 아무래도 제임스 대시너 작품을 다 훑어봐야겠네요.
사고 싶은 책이 있다는 사실은, 늘 신납니다~

ICE-9 2015-08-28 18:53   좋아요 0 | URL
앗! 마녀고양이님, 역시나 저랑 판타지 취향이 비슷하시군요^^
저도 늘 읽을 책이 남아 있을 때 신나더군요^^ 특히 섀도우 헌터스 4권과 5권이 나와서 반가웠어요. 최근 4권을 읽었는데 후반에 완전 폭발하더군요. 세상에 그런 식으로 위기를 넘길 줄은... 어쨌든 신나하며 5권을 시작하려 하고 있습니다^^

마녀고양이 2015-08-28 19: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 저는 섀도우헌터스 읽고 세권 모두 홀랑 팔아버린터라 후속 안 읽으려고 했는데, 이런, 헤르메스님 말씀 들으니 슬슬 끌려가네요 ㅋㅋ

ICE-9 2015-08-31 22:36   좋아요 1 | URL
네번째 부터는 새로운 이야기의 시작이라 세권이 없어도 괜찮지 않을까 싶어요. 그런데 저는 잘 기억이 안나서 자주 이전 책을 찾아봤습니다만^^; 마녀고양이님이 어떻게 읽으실지 정말 궁금한데 제발 낚여주세요^^

2015-08-29 01: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8-31 22: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세트] 웨이크 시리즈 - 전3권 - 꿈을 엿보는 소녀 + 끝나지 않는 악몽 + 최후의 선택 블랙 로맨스 클럽
리사 맥먼 지음, 김은숙 옮김 / 황금가지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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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웨이크' 시리즈는 미국의 여성 작가 리사 맥먼의 데뷔작이다. 첫 작품 'WAKE(꿈을 엿보는 소녀)'가 2008년, 그 다음 작품인 'FADE(끝나지 않는 악몽)이 2009년 그리고 2010년에 마지막 작품인 'GONE(최후의 선택)'이 나옴으로써 시리즈가 완결되었다.



 주인공은 제이니 해너건. 2005년 현재, 17살의 소녀다. 그녀에겐 특별한 능력이 하나 있는데 의식이 멀쩡한 상태에서 남의 꿈 속으로 들어가 볼 수 있는 것이다. 남의 꿈을 엿보고 싶다는 욕망은 누구나 한 번쯤 가지게 마련인 것으로 그렇다면 제이니는 꽤 운이 좋은 것 같지만 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이 능력엔 두 가지 단점이 있는데 하나는 들어가는 꿈이 대부분 악몽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남의 꿈으로 들어가고 나오고를 자신의 의지대로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냥 길을 걸어가다 행여 근처에 누군가 자고 있기라도 하면 '휙' 그의 꿈으로 들어가 버리기도 하고 차를 운전하는 도중에도 남의 꿈에 휩쓸리는 바람에 사고를 당할 수도 있다. 맞다. 제이니 해너건은 불우하다. 가진 능력만은 아니다. 사는 처지도 그러하다. 태어날 때부터 아빠는 없었고 엄마는 알콜 중독자다. 제이니가 늘상 보는 엄마의 모습이란 취한 것 말고는 없었다. 그런 엄마가 집안일을 제대로 할 리 없다. 제이니는 철이 들기도 전에 집안일을 도맡아야 했다. 거기다 가난하기까지 하다. 생활비를 직접 벌어야 했다. 살기 위해 필사적으로 일해야 했다. 그런 그녀에게 자신이 가진 능력은 오히려 장애가 될 뿐이다. 시간을 조금이라도 아껴 공부하고 일해야 할 판에 느닷없이 남의 꿈으로 끌려들어가 그것도 악몽을 같이 체험하느라 다 까먹고 있다니. 만일 신이 불행을 염두에 두고 한 소녀를 빚는다면 제이니 해너건이 되지 않을까?



 이런 이유로 제이니는 누구보다 '삶'(이라는 세계)을 무겁게 여기는 존재다. 나에게 있어 '삶'이라는 세계는 전적으로 타자라고 할 수 있다. 산다는 것은 그것과 관계를 맺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거기서 나는 세계에 압도당할 수도 있고 혹은 내가 세계를 압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고? 그것이 바로 이 소설에서 리사 맥먼이 꿈을 다루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즉 제이니가 자신의 뜻과 상관없이 휩쓸리는 타인의 꿈이란 어디까지나 제이니가 마주한 세계의 은유다. 여러 면에서 우리는 그것이 또한 리사 맥먼의 의도라는 것을 알 수 있다. 1부에서 제이니는 남들의 꿈에 그저 압도당할 뿐인데 그건 힘겨운 삶을 살고 있는 제이니가 느끼는 세계의 중력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제이니는 누구보다 열심히 산다. 삶의 평정을 위해 분투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다만 자신을 내리누르는 거대한 공룡과도 같은 세계의 무게를 간신히 버티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그녀는 삶을 전혀 주도하지 못한다. 이것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남의 꿈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과 마찬가지라 할 수 있다. 거기다 제이니는 자신이 가진 능력을 도무지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는데 그만큼 제이니 앞에 놓인 세계도 그녀에겐 정체불명이다. 그러니 제이니는 외로울 수밖에 없고 불안할 수밖에 없으며 의심을 할 수밖에 없다.


 그러다 1권의 후반에서 제이니는 자신이 일하는 양로원 환자인 스투빈 부인을 통해 그런 능력을 '드림캐처'라 부르며 그 능력을 가진 이도 자기 혼자만이 아님을 알게 된다. 스투빈 부인은 장님으로 거의 죽은 듯이 살다가 세상을 떠났는데 제이니에게 마지막 유언처럼 남긴 편지에서 자신도 제이니와 똑같은 존재라는 것을 밝힌 것이다. 그것을 시작으로 제이니 앞에 점점 자신의 능력을 어떻게 사용하고 제어할 수 있는지 알게되는 기회가 많아진다. 사랑이라고 하기엔 부족하고 친구라고 하기엔 넘치는 남자 친구 케이벨과 경찰 서장을 통해서다. 알고보니 스투빈 부인은 그 경찰 서장과 오래 알고 지낸 사이로 자신의 능력을 경찰 수사를 위해 사용해왔던 것이다. 그 사실로 인해 제이니는 자신의 능력이 다만 저주는 아님을 알게되고 케이벨, 서장과 함께 긍정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간다. 동시에 서장에게서 건네받은 스투빈 부인의 노트를 통해 점차 자신의 능력을 어떻게 발휘하고 제어하는 지도 배우게 된다.


 여기서 리사 맥먼이 꿈을 세계의 은유로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은 다시 한 번 드러난다. 제이니가 꿈에 대한 이해와 통제를 넓혀가자 거기에 발맞춰 현실 세계도 점점 주도하게 되는 것이다. 2권은 바로 그런 제이니를 보여준다. 말하자면 여기서 제이니는 진정한 'WAKE', 즉 각성을 하게 된다. 세계에 대해 자신이 주체라는 것을 이제 깨닫게 되었다는 의미에서 말이다. 하지만 능동적인 주체가 되어 삶을 주도하게 되었다 하더라도 불안과 의심은 여전히 남게 마련이다.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이 다만 바뀌었을 뿐, 세계의 본질은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달리 본다고 해서 세계가 가진 어둠은 변하지 않는다. 2권에서 제이니가 마주하는 사건이 바로 그것을 상징한다.


 우리도 그렇지 않은가? 나이를 먹어 세계의 페이지를 뒤로 넘길수록 더욱 검다는 것을!

 과연 제이니도 스투니 부인의 노트를 통해서 자신의 능력이 가져올 미래에 대한 충격적인 진실을 알게 된다. 이 불길한 예언은 그동안 꿈을 세계에 대한 은유로 써온 리사 맥먼에게 나 하나의 힘으로 결코 어쩌지 못하는 세계 앞에서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윤리적 질문을 제기한다. 바로 그것이 3권, '최후의 선택'이 가진 이야기다.


 그녀는 거기서 태어나서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아버지를 드디어 만나게 된다. 비록 의식불명으로 목숨도 오늘내일하는 상태였지만. 아무튼 놀랍게도 아버지도 '드림캐처'였다. 그리하여 결국 제이니 앞엔 선택가능한 두 개의 길이 놓이게 되는데 하나는 스투빈 부인의 길이요, 다른 하나는 아버지, 헨리의 길이다. 설령 비극적 운명만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고 하더라도 스투니 부인처럼 적극적으로 세계의 어둠을 없애려 뛰어들 것인가? 아니면 아버지 헨리가 제이니와 엄마를 버렸던 것처럼 내 삶의 평안만을 위하여 철저한 격리를 택할 것인가? 이 고민을 풀어가는 것이 바로 3권의 이야기라 할 수 있다. 따지고 보면 비단 제이니만의 고민은 아니다. 얼마든지 이 소설을 읽고 있는 오늘 우리의 고민도 될 수 있다. 불법과 부조리가 흑사병처럼 창궐하는 세상에선 누구나 도대체 내가 이 세계를 어떻게 해야 할까 생각하게 마련이니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3권을 읽는다면 제이니의 고민이 좀 더 가깝게 피부로 와닿지 않을까 싶다.


 '웨이크' 3부작은 블랙 로맨스 시리즈 중 하나로 나왔고 그러니 물론 로맨스의 비중이 높다. 하지만 내겐 사랑 보다 내 앞에 놓인 불행한 현실, 세계의 어둠에 어떤 태도로 맞서야 하는가로 읽혔다. 제이니가 주로 보게 되는 꿈이 악몽이라는 사실이 주효했다. 그 악몽이란 게 대부분 타인의 무의식 저 깊이 숨겨 있는 트라우마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근원적 상처를 마주한 그녀이기에 제이니의 이야기는 더욱 그렇게 들려왔다. 어차피 사랑도 타인과의 관계이니까 로맨스라고 해서 그런 주제가 엷어지는 것도 아니긴 하다.


 아무래도 문장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솔직히 이야기보다 문장이 내겐 더 많이 눈에 들어왔는데 오로지 '~한다' 식의 현재형으로만 채워져 있다. 이런 문장만 있는 것은 처음인지라 참 특이했다. 미국의 범죄 수사 드라마처럼 '2006년 8월 10일 화요일 7:45 AM' 하는 식으로 단락을 구분한 것도 새로웠다. 묘사도 많이 절제하고 한 문장에 최소한의 정보만 담는 것으로 그쳤는데 그래서일까 소설 보다는 어떤 동향 보고서를 읽는 느낌이었다. 보고서가 소설 보다 현실에 가깝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아마도 리사 맥먼은 그렇게 해서 독자들에게 더욱 강한 현실감을 주려고 했던 게 아닐까 싶다. 덕분에 쉽고 빠르게 읽힌다.


 결론적으로 뭔가 새로운 이야기, 독특한 분위기의 작품을 만나고 싶었다면 괜찮은 선택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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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그림자 그림자의 바다 십이국기 1
오노 후유미 지음, 추지나 옮김 / 엘릭시르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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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십이국기의 재래. 정말 반갑다.


'십이국기' 1권, 가제본의 모습


 저자인 오노 후유미를 좋아한다. 그녀의 주 특기라고 한다면 호러다. 아마도 누군가의 기억에는 꽤나 무서운 이야기를 잘도 쓰는 여성 작가로 남아 있으리라. 나는 그 때문에 그녀를 좋아한다. 오노 후유미에게 있어 공포는 목적이 아니다. 실은 수단에 불과하다. 오노 후유미의 진짜 관심은 '사회'에 있기 때문이다. 까놓고 이야기하자면 그녀는 변혁을 갈망한다. 그녀는 일본 사회의 현재 모습에 염증을 느낀다.자기가 속한 일본이라는 사회가 좀 더 올바른 쪽으로 자리잡히길 바란다는 뜻이다. 그런데 달라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바로 그 사유의 과정을 오노 후유미는 소설로 표현한다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그녀는 '사회파' 작가다. 미스터리가 아닌 호러를 주 특기로 한다는 것만 다를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분명 오노 후유미의 완성형은 '시귀'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최고 걸작이더라도 완전한 무에서 태어날 수는 없다. 다시 말해 '시귀'와 같은 최고 걸작이 태어나도록 산파 같은 역할을 한 작품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시귀' 바로 전에 나온 이 작품, '십이국기'이다.


 '십이국기'는 판타지다. 오노 후유미의 주 특기인 호러는 아닌 것이다. '십이국기'는 출판사가 먼저 제의해서 쓰게 되었는데 그 때까지 오노 후유미는 판타지의 '판'자도 경험해보지 못한 '초짜'였다. 그래도 그녀는 이쯤에서 새로운 시도를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도전했다. 오노 후유미의 작품을 읽어보면 대번에 알 수 있겠지만 변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야 말로 그녀가 추구하는 것이다. 출판사는 당시 유행 중이던 중세 유럽 스타일의 판타지를 원했다. 하지만 오노 후유미는 거기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었다. 전혀 모르는 것으로 하기 보다는 그래도 잘 알고 있는 것으로 하는 게 좋지 않을까 생각했다. 중세 유럽은 잘 몰랐지만 고대 중국이라면 잘 알았다. 그래서 판타지의 세계를 그 쪽으로 설정했다. 그리하여 당시로서는 독특한 판타지인 '십이국기'가 태어났다.


 오노 후유미로 하여금 '십이국기'를 쓰게 한 또 하나의 유인(incentive)이 있었으니 바로 다나카 요시키의 '은하 영웅 전설'이다.



 오노 후유미는 그 소설을 좋아했는데 그러다 주인공 황제인 라인하르트 폰 로엔그람이 실은 영원히 죽지 않는 , 말하자면 불로불사이고 그러다 나쁜 왕이 되어 버리면 바로 불로불사의 능력이 사라지는 것으로 하면 어떨까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것이 기초가 되어 '십이국기'의 독특한 체제가 형성되었다. 이것은 이번에 나오는 1권 '달의 그림자, 그림자의 바다'에서 여주인공 요코의 여행 동반자가 되는 라쿠슌을통해 다음과 같이 말해지고 있다.


 "한 임금이... 오 백 년?"

 "물론이지. 왕은 신이야. 사람이 아니야. 하늘은 그 왕의 기량만큼 나라를 맡기지. 그러니까 능력 있는 왕일수록 치세가 길어."

 "흐음..."

 "왕이 바뀌면 나라가 어지러워지는 건 어쩔 수 없어. 그만큼 좋은 왕을 얻은 나라는 풍요로워지지. 특히 연왕은 여러 개혁을 이룬 수완가야. 명군이라면 종왕도 명군이지만, 주국은 안온하고 안국은 활기 있다고들 하지." (p. 321)


 '요코'와 쥐인 '라쿠슌'


  뭔가 '성군지상주의'랄까? 플라톤의 '철인' 사상 비슷한 냄새가 난다. 오노 후유미가 '은하 영웅 전설'의 자장 안에 있다는 걸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즉, 민주주의를 만능의 체제로 여기지 않는다는 의미다. '십이국기'의 나라들은 동시대 일본의 곁에 있다. 주인공 요코는 타임슬립을 통해 과거로 가지 않는다. 갑자기 나타난 '게이키'라는 정체불명의 존재에 의해 '십이국기' 사람들이 '허해'라 부르는 바다를 건너온 것이다. 즉 '십이국기'와 요코가 살던 현대 일본은 동시에 존재한다. 하지만 나라를 이루고 있는 근본 체제는 전혀 다르다. 여기서 우리는 '십이국기'가 '은하 영웅 전설'처럼 현재의 일본과 전혀 다른 체제를 상상하고 그것을 일종의 대차대조표 삼아 거꾸로 지금 체제의 대안을 그려보는 오노 후유미만의 사유 실험임을 알 수 있다.


 때문에 오노 후유미는 '십이국기'의 체제를 정교하게 세공한다. 1권을 읽으면서 다 알 수 있는 부분인데다가 설명하다 자칫 스포일러를 남발할 수 있기에 여기서 자세히 소개하지는 않겠다. 분명 소설을 읽다보면 오노 후유미가 설정에 꽤나 공을 들였음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사실 '시귀'도 그렇고, '흑사의 섬'도 그렇고 이런 아주 정교한 배경의 설정이야말로 오노 후유미의 특기라 할 만하다. 읽다보면 오노 후유미가 정작 이야기보다 오히려 이렇게, 저렇게 세계를 만들고 질서를 구축하는데 더 재미를 느끼는 게 아닐까 생각될 정도다. 스스로 즐기지 않으면 그만한 공을 들이기가 어려울 테니까 말이다.


 보다 더 깊이 들어가면, 그녀가 왜 하필이면 이런 개인적 역량이 나라의 운명마저 좌지우지 하는 설정을 하게 된 것인가가 드러난다. 1권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요코의 여정은 오노 후유미가 그런 체제를 상정했던 이유의 설명이기도 하다.


 바로 여기서 오노 후유미가 그녀의 모든 작품을 통털어 천착하고 있는 '혼종'의 주제가 나타난다. 멀리 돌아왔지만 이쯤에서 오노 후유미가 왜 호러를 즐겨 쓰는지 말해야 할 것 같다. 오노 후유미에겐 언제나 외부의 감각이 중요하다. 폐쇄된 자아를 허물고 바깥으로 눈과 마음을 열게 만드는 감각이다. 오노 후유미는 그 '변화', 궁극엔 '혼종'이 구원의 통로라고 여긴다. 자아든 사회든 할 것 없이 말이다. 그녀에게 가장 끔찍한 것은 '고인 웅덩이'다. 외부에겐 일체 마음을 열지 않고 기존 자신의 것만 오로지 고집하는 것을 그녀는 혐오한다. 그건 일본이 바깥의 바람이 들어오는 창문이 하나도 없는 폐쇄 사회인 것에 대한 그녀의 염증에서 기인한다. 그녀가 호러를 쓰는 것은 그 때문이다. 바람과도 같은 외부의 감각으로 벽을 흔들려는 것이다. 내부를 허무는데 호러만큼 충격을 주는 것도 없기 때문이다.


 이런 입장은 '십이국기'에도 변하지 않는다. 주인공 요코의 여정은 정확히 이것을 보여준다. 처음 '허해'를 건너온 요코는 절망한다. 그녀가 전혀 모르는 세상에 던져졌기 때문이다. 그것도 혼자서. 게다가 누구의 도움도 없이.


첫 여정에서의 요코의 모습

('허해'를 건너온 뒤, 요코는 원래 부분만 빨강이던 머리카락이 모두 빨강이 되었고,

얼굴과 모습이 이전과 달라졌다. 나중에 여행하는 나라의 옷으로 갈아 입는데 사람들은 요코를 사내로 생각한다. 다시 말해, '허해'를 건넌 뒤, 요코는 철저한 '타자'가 되는 것이다.


 거기서 요코는 철저한 이방인이다. '허해'를 건너온 자들을 '해객'이라 부르는데 요코가 있는 나라는 그 해객을 체포하려 한다. 더구나 한 번 '허해'를 건너오면 다시 자신의 세상으로 돌아갈 방법은 없다. 그녀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거기에 버려졌다. 그녀에게 익숙한 것들은 모두 '허해' 건너편에 있다. 여기는 그 경계의 바깥인 것이다. 외부의 감각이 압도적으로 충만해질 수밖에 없다. 거기서 그녀는 선택해야 한다. 예전의 나를 고수할 것인가? 아니면, 적극적으로 변할 것인가? 변한다는 것은 타자와의 관계를 재정립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요코의 여정은 내면의 여정이다. 거기서 요코는 비로소 진실한 인간 관계가 어떤 것인지 눈을 뜨고, 인간 존재에게 있어 확실한 경계는 하나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결국 그녀 역시도 지금까지 그녀가 생각해왔던 존재가 아니었으니까.


 이러한 요코의 변화가 '달의 그림자, 그림자의 바다'에 투영된 오노 후유미의 본심이 아닐까 싶다. '십이국기'는 그런 면에서 '시귀'와 연결되며 그 보다 긴 호홉으로 '나와 타자', '변화와 혼종'의 주제를 천착한다.('십이국기'는 아직도 완간되지 않았다.)


 '십이국기'는 예전에 '조은세상'에서 발간한 적이 있다. '애니메이션'마저 우리나라에서 방영했기에 아는 이들도 적지 않다. 하지만 이전에 나온 판본은 두 가지 치명적인 문제가 있었는데 하나는 엉성한 번역이고 다른 하나는 삽화가 대부분 삭제된 것이었다. 나는 지금 가제본을 받아 읽었고 가제본을 받을 때 엘릭시르가 먼저 밝히기를 가제본엔 삽화가 들어가지 않는다고 하였기에 삽화 쪽은 뭐라 말을 할 수 없다. 하지만 번역에 관해서라면 가히 '일취월장'이라고 말할 수 있을 듯 하다. 


 일단, 이전의 혼란스럽기만 했던 표기와 호칭 부분이 제대로 정리되어 있어 대화도 한결 산뜻하게 들려온다. 덕분에 더욱 쉽게 지금 읽고 있는 상황을 머리에 그릴 수 있었다. 번역만큼은 믿고 보아도 좋지 않을까 생각된다. 솔직히 그럴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번역한 이가 '시귀'를 번역한 추지나이기 때문이다.  삽화에 관해서라면 정식 발매본엔 신조사의 재간행본 그대로 야마다 아키히로의 일러스트가 삭제 없이 모두 들어간다고 한다. 야마다 아키히로의 일러스트를 좋아했다면 이번 '십이국기'는 '반드시 소장!'이 아닐까 싶다.


 자세한 사항은 엘릭시르가 보내온 'Q&A'를 참조.

  


  어쨌거나 십이국기의 재래가 반갑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완결까지 다 나온다고 하니, 이러다 영영 결말을 못 보게 되는 것 아닌가 우려하고 걱정하며 절망했던 나에게는 춤이라도 덩실덩실 추고 싶을만큼 기쁜 소식이다. 그렇지 않아도 우울하고 마음 힘든 것 투성이인 요즘, 이렇게 나마 또 조금 숨 쉴만한 것을 얻는 것 같다. 오래도록 나의 산소 호흡기가 되어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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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4-11-04 1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잠깐만요... 헤르메스님 서재 놀러왔다가 이런 소름끼치고 머리털이 곤두서고 숨이 턱 막히는 소식이.......
와........ 헤르메스님한테 먼저 반갑다고 인사했어야 하는데.....
결말까지................... 와....

ICE-9 2014-11-05 02:36   좋아요 0 | URL
오! 소이진님 방가방가~!!
워떻게 지낸데요? 정말 많이 궁금했어요~^ ^
사실 이 소식 들었을 때 소이진님도 많이 좋아하겠구나 생각했었어요.
역시 그러네요. 저와 똑같이~!!
같이 제발 완결까지 무사히 나올 수 있도록 빌자구요~^ ^
그리고 잘 지내고 있는 거죠? ^ ^
 
오솔길 끝 바다
닐 게이먼 지음, 송경아 옮김 / 시공사 / 2014년 6월
평점 :
품절


 나는 양쪽에 각각 나무딸기와 들장미가 있는 좁은 오솔길을 따라 천천히 털털거리며 차를 몰았다. 오솔길 가장자리 어디에도 개암나무나 손질하지 않은 산울타리는 서있지 않았다. 시간을 거슬러 차를 몰고 가는 것 같았다. 다른 건 전부 달랐는데, 그 오솔길은 예전 그대로였다.

-오솔길 끝 바다, P. 14 -

사람은 나이가 들면 점점 뒤를 돌아보게 된다고 합니다. 젊은이는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살지만 노인은 과거에 대한 추억으로 산다는 말도 있잖아요. 그 추억 속에는 한 결같이 등장하는 공간이 있게 마련입니다. 늘 행복한 풍경으로 그려지는 곳이. 그리고 생각하죠. '언젠가 꼭 한 번 그 곳에 다시 가보고 싶다'라고.

 이럴 때, 저는 작가들이 부럽더군요. 우리들은 겨우 찾은 추억이라도 기껏 잠시 엉덩이를 붙였다 나올 뿐이고 종국에 가선 저와 함께 사라져 버릴 터이지만 작가들은 마치 랜드마크를 만들듯 그 기억을 구체적으로 형상화하여 영원히 남겨둘 수 있으니까요. 극장판 '은하철도 999'를 보셨나요? 그것은 린타로가 가졌던 유년에 대한 그리움을 가득 담은 것이었습니다. 마지막에 떠나는 메텔을 보며 줄줄 흐르는 철이의 눈물은 이제 다시 올 수 없는 유년을 떠나보내는 린타로의 눈물이나 마찬가지였죠. 그러한 애절한 그리움이 나이가 들어갈수록 파란색 잉크에 떨어진 천이 그렇듯이 마음 한 구석 점점 물들어가는 것 같습니다. 다시는 돌아올 수 없기에 더욱 애절한 그리움이. 작가들은 자신의 작품에다 그런 그리움을 담는 것이겠죠. 린타로가 그러했듯이. 닐 게이먼도 그러합니다. 소설에다 그리움을 가득 실어 보내는 것이죠. 홀연히 바다를 건너 우리 앞에 도달한 다시 오지 못 할 유년에 대한 그리움의 배.그것이 바로 이번에 나온 '오솔길 끝 바다'입니다. 


 네, 닐 게이먼이 돌아왔습니다. 환상문학의 거장이라는 타이들이 전혀 빈말이 아님을 보여주는 그 닐 게이먼이 말이죠. 이 사진이 닐 게이먼의 모습이에요. 앞서 이 소설이 그리움의 배라고 했죠? 그렇게 말한 이유는 이번 작품에 닐 게이먼의 자전적 요소가 참 많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유년의 자기 모습이 말이죠. 그는 책만이 유일하게 세상과 소통하는 창구였던 유년의 자신 모습을 그대로 주인공에게 주었습니다. 주인공이 소설에서 하는 어떤 행위들은 그대로 과거 자신의 행위이기도 합니다. 닐 게이먼은 오래도록 잊었던 기억을 불러내게 만들어준 어린시절의 사진들을 많이 보내온 자신이 여동생에게 특별히 감사의 인사를 전하더군요. 이를테면 이런 사진 같은 것.



 이게 진짜 그 사진인지는 모르겠어요. 이 사진은 소설 속에도 삽화처럼 들어가 있습니다. 흑백으로 말이죠. 이 벽돌집은 닐 게이먼의 집 그대로라고 하는데 어쩌면 진짜 사진일 수도 있을 것 같네요. 그럼, 저 배수관 위의 소년이 어린 시절(소설에서는 일곱살로 나옵니다.)의 닐 게이먼이겠군요. 이 배수관 사진은 소설의 에피소드로 그대로 사용되었습니다. 정말 흥미진진한 탈출기로.

 

 이렇게 자전적 요소가 참 많이 들어가 있습니다. 그래서 램프를 들고 어두운 터널로 들어가는 닐 게이먼의 사진을 가져왔어요. 사진처럼 추억의 램프를 들고 오래도록 망각의 심연 속에 가라앉아 있었던 그 때의 기억을 터널 속에서 길을 찾듯이 거슬러 올라가고 있으니까요. 은근히 소설의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나요? 그 여정의 결과로 나온 것이 바로 2013년에 나온 '오솔길 끝 바다'라고 할 수 있겠네요.

 


 표지가 굉장히 근사합니다. 아무래도 이 말부터 할 수 밖에 없어요. 개인적으로는 '역대급'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에요. 한동안 갖고 다녔는데 주위에서 보는 이마다 예쁘다고 하더군요. 후후.


 띠지를 벗긴 모습이에요. 이런, 야간이라서 좀 흐리게 나왔네요. 윗사진처럼 파랑의 색감이 뛰어난데 이 사진에선 하나도 드러나지 않는군요. 망했어요. 망한 사진이 문제라서 그렇지 표지는 정말 뛰어납니다. 거기다 햇살이나 형광등에 비쳐보면 표지 전체가 반짝거려요. 아마도 달에 비친 연못의 물결을 표현하려 한 게 아닐까 싶어요. 일러스트는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서 가져왔더군요. 그것도 에필로그에서. 주인공이 마지막으로 바라보는 햄스톡 농가의 오리 연못 모습을 말이죠. 연못 위에 비친 저 두 개의 달이 하나의 반달로 겹쳐지는 장면으로 소설은 끝나는데 마지막 문장은 이러합니다.

 잊힌 기억처럼 혹은 황혼 속에 녹아드는 그림자처럼 과거 속으로 희미해져버린 것.(p. 287)


 일러스트는 그 연못이 주인공에게 무엇이었나를 잘 나타내고 있는 듯 보여요. 바로 자신에게 있어 가장 소중한, 그 무엇보다도 자신의 존재 그 자체로 충만할 수 있었던 유년 중 가장 소중한 공간이라는 것을. 읽어보시면 아시겠지만 일러스트의 저 검은 고양이는 바로 주인공의 분신이랄 수 있는 존재랍니다. 그 분신과도 같은 고양이가 내내 연못을 바라보고 있군요. 잊힌 기억처럼 희미해져가지만 자신은 언제나 그 곳에 있고 싶다는 바람 같은 것을 나타낸 것은 아닐까요?

 

 어쨌든, 저 마지막 문장에도 어떤 아쉬움, 그리움 같은 것이 느껴지죠. 저는 '은하철도999' 극장판의 마지막 모습이 떠오르더군요. 유년을 상징하는 메텔을 떠나보내야 하는 철이의 눈물. 소설에는 나오지 않지만 분명 주인공도 눈물을 흘리지 않았을까 싶어요. 괜한 비유는 아니에요. 정말 이 소설에는 메텔이라 말할 수 있는 존재가 나오거든요. 그 메텔처럼 소년에서 어른으로 성장시켜 주는 누군가가. 

 

 소년에겐 누나에 대한 선망 같은 것이 있습니다. 프로이트라면 오디이푸스 컴플렉스 때문에 엄마와 결합하고 싶은 욕망이 아버지라는 상징계의 질서로 좌절되자 그 대리충족의 대상으로서 누나를 원하게 된 것이다라고 말하겠지만. 이유야 어쨌든, 분명 그런 것이 있어요. 뭐랄까 둥지 같은 존재로서. 네, 저는 누나가 없었기에 더욱 그랬는지 모르지만. 그래서 이 소설의 주인공에게 더욱 감정이입이 된 것일지도 모르겠어요. 

 그 메텔과도 같은 존재가 누구냐구요?



 그 전에, 참고로 원서의 표지는 이렇게 생겼습니다. 우리나라가 연못을 위에서 본 모습을 나타냈다면 원서는 아래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군요. 저 연못 아래에 있는 소녀가 바로 주인공과 함께 모험을 하게 될 '레티 헴스톡'입니다. 헴스톡은 닐 게이먼의 소설을 좀 읽어본 사람이라면 친숙한 이름이죠. 닐 게이먼이 다른 소설에서 자주 반복해서 쓰곤 했으니까요. 다른 작품에서는 그저 스쳐 지나가는 정도의 존재로 등장했는데 여기서는 핵심적인 역할을 맡았습니다. 닐 게이먼의 팬으로서는 드디어(!) 헴스톡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게 된 셈이랄까요. 팬으로선 이것만으로도 이 소설을 벌떼처럼 달려들어 읽을 가치가 있는 것이죠. 네, 어디까지나 게이먼의 팬이라는 전제 하에서 말입니다.

 

저 소녀가 바로 메텔입니다. 이름은 벌써 말했죠? 레티 헴스톡이라고. 소설에서는 11살 정도로 나옵니다. 정도로 표현한 것은 사실 이 소녀의 나이가 11살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소녀는 그보다 훨씬 오래 살았어요. 얼마나 오래인지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말이죠. 레티 헴스톡은 엄마랑 할머니와 삽니다. 농장엔 이 세식구가 전부에요. 남자는 없어요. 엄마는 중년으로 보이고 할머닌 노인으로 보입니다만 진짜 나이는 보이는 것과 다릅니다. 무려 할머니는 달이 하늘에 생기는 걸 직접 봤다고까지 말하고 있어요. 나이 계산이 불가능해요. 네, 이들은 인간이 아닙니다. 인간을 훌쩍 초월한 존재들이죠. 주인공에게 그들은 '대양'에서 왔다고 그래요. 소설의 가장 첫 부분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레티는 자기들이 오래된 나라에서 대양을 건너 이 곳에 왔다고 말했다. 레티의 어머니는 그게 오래전 일이라 레티가 기억을 못하는 것이며, 그 오래된 나라는 가라앉았다고 했다. 레티의 할머니인 헴스톡 노부인은 딸과 손녀 둘 다 틀렸고, 가라앉은 곳은 진짜 오래된 나라가 아니라고 했다. 자기는 진짜 오래된 나라를 기억할 수 있다고 했다. 헴스톡 노부인은 그 진짜 오래된 나라는 폭발했다고 했다. 

 

  그들이 온 통로가 바로 OCEAN, 즉 '대양'입니다. 원서 제목의 'OCEAN'은 바로 그것을 가리키죠. 그런데 우리나라는 바다로 바뀌었군요. 아마 '오솔길 끝 대양'이 어감상 별로 좋지 않아서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렇다고 저 '대양'이 바다를 가리키는 것 아니에요. 사실은 헴스톡 농장 뒤쪽에 있는 오리 연못을 가리키는 것이죠. 그 연못을 헴스톡 사람들은 '대양'이라 부릅니다. 원서 표지는 그 대양 아래로 가라앉은 레티를 나타내는 것이에요. 저 상황도 사실 소설에 나오는 내용인데, 그것은... 으음,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밝히기가 어렵네요.

 

 

 

 그렇게 헴스톡 농장은 초월적 존재들이 사는 초월적 공간입니다. 어느 날 주인공은(주인공의 이름은 나오지 않습니다. 소설에서 아버지가 딱 한 번 주인공을 두고 '핸섬 조지'라고 부르긴 하는데 진짜로 조지라서 조지라 부른 것인지 아니면 어릴 때의 별명을 부른 것인지 확실하지 않아요. 단 한 번도 주인공이 자신의 이름으로 불리지 않는 것을 보면 닐 게이먼이 일부러 주인공을 익명의 존재로 남겨두려 한 것 같네요.) 경제적으로 어려워져 세를 내준 자기 방에 살던 오팔 광부가 자동차에 숨져 있는 것을 아버지와 함께 발견합니다. 경찰이 출동하고 사고 현장을 수습하던 차에 주인공이 방해가 되자 어디 데려다 놓을 데가 없나 살피고 있는데 마침 어떤 여자 아이가 자기 농장에서 잠시 데리고 있겠다고 말합니다. 그 소녀가 바로 레티였죠. 주인공은 그렇게 하여 오솔길 끝에 있는 헴스톡 농장으로 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 '대양'이라 불리는 연못에서 기이하게 죽은 물고기를 발견하게 되는데 그 이유가 물고기 내장 속에 있던 은화 6펜스 때문임을 알게 됩니다. 그 때부터 이상하게도 주인공에게 돈이 들어옵니다. 그 후, 밀납인형이 되어버린 할아버지가 자신의 입 속에 숨막히도록 무언가를 자꾸 집어넣는 꿈을 꾸게 되는데 겨우 일어나 뱉어보니 은화 6펜스가 나오는 것입니다. 이 은화를 들고 헴스톡 사람들에게 보여주자 헴스톡 노부인은 대양을 통해 무언가가 이 세상으로 나왔다고 합니다. 노부인 스스로는 들러붙어 나오기에 '벼룩'이라 부르는. 하지만 그대로 놔주면 세상에 커다란 혼란을 가져오는.

 

 노부인은 레티에게 '그것을 묶고, 길을 막고, 잠의 세계로 돌려보내야 한다'고 말합니다. 레티는 동료로서 주인공을 데려가겠다고 합니다. 위험하다고 어른들이 반대했지만 말을 듣지 않는 레티. 결국 그녀는 주인공을 데리고 대양을 통해 들어온 정체불명의 존재를 찾아 숲으로 떠납니다.

 

 드디어, 만나게 된 존재. 그것은 이렇게 생겼습니다.

 

 얼굴은 너덜너덜했고, 눈은 천에 뚫린 깊은 구멍이었다. 그 뒤로는 아무 것도 없는 회색 캔버스 가면뿐이었다.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거대한, 다 너덜거리고 찢어진, 폭풍에 휘날리는 가면.(P. 72)

 

 다시 말해, 이렇게...

 

 

 그 존재를 좀 더 사실적으로 표현하면 이렇게 되겠죠...

 

 

 결국 레티는 이 존재를 물리치나 그 전에 절대 놓지 말아야 했던 손을 주인공이 그만 놓쳐버리는 일이 발생하고 맙니다. 그리고 그 때문에 주인공은 정말 커다란 곤경에 처하게 됩니다. 바로 수수께끼의 미인 가정부 '어슐러 몽턴'이 나타나 자신을 집에 가두고 아버지를 유혹하여 죽이려고 하는 것이죠.

 

 

이 여인이 바로 어슐러 몽턴입니다. 이 일러스트는 '팬아트'인데 소설에서 도망가는 주인공을 하늘에서 날아 쫓아가는 그녀를 그린 것입니다. 이 장면 묘사 정말 좋더군요. 일곱 살 아이가 폭풍우 치는 밤에 무시무시한 존재로부터 쫓기는 공포와 긴박감을 제대로 그려내고 있었습니다. 역시 닐 게이먼이로구나 생각했습니다. 묘사가 그리듯이 되어 있어 상상만으로도 얼마든지 영상을 만들어내는 것이 가능했는데 그렇지 않아도 '오만과 편견'의 영국 감독 조 라이트가 영화로 만들고 있다고 하는군요. 이 장면이 영화로는 어떻게 표현될지, 그게 가장 궁금합니다.

 

'오솔길 끝 바다'는 정말 환상적인 이야기입니다. 이야기는 끝까지 어디로 튈 지 모르는 공처럼 예측 불허의 전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거기다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신비한 존재들까지 등장해서 독자의 상상력을 마구 부채질하고 있죠.

 

 소설 속에서 또 하나의 공포스런 존재였던 '청소부'들 처럼.

 

 

 


그들은 하늘 높이 떠 있었고 칠흙같이 검었다. 너무나 검어서 실재하는 존재가 아니라 내 눈 속의 얼룩 같았다. 그들은 날개를 가지고 있었지만 새는 아니었다. 새들보다 더 오래된 존재였다. 수십, 아니 수 백 마리가 원과 고리와 소용돌이를 만들며 날았다. 새는 아니지만 퍼덕이는 그것들은 하나씩 하나씩 천천히, 아주 천천히 내려왔다(P. 207)

 

 

 어릴 때, 가을이면 들판에 저렇게 까맣게 무리지어 날아다니는 새떼들을 보곤 했는데 혹시 닐 게이먼도 유년 시절에 그걸 보고 저런 기이한 생물을 상상해낸 것은 아닌지 모르겠군요. 아무튼 이들은 그 막강한 헴스톡 노부인도 여간 처리하기가 까다로워 '말썽쟁이들'이라고 부를 만큼 공포스런 존재입니다. 그만큼 강하고 무엇이든 먹어치우는 이 존재들이(그래서 그들 스스로는 청소부라 부르죠.) 일곱 살 주인공을 먹어치우려 달려드는 것입니다. 주인공은 참 운도 지지리 없군요. 어린 나이에 이토록 무서운 공포와 몇 번이나 맞딱뜨리다니.

 

이제 대강 소설의 분위기를 아셨나요? '오솔길 끝 바다'는 이런 소설입니다. 여러 차례의 고난을 통해서 어른으로 성장하는 이야기인 것이죠. 근저에는 다시 재회할 수 없는 유년 시절에 대한 그리움이 잔뜩 배여있는. 어쩌면 이 때문에 어른이 된다는 것의 서글픔까지 묻어나는 소설입니다. 닐 게이먼은 이 소설을 어른을 위한 동화라고 했다더군요. 그건 어쩌면 주인공을 공포에 떨게 만드는 존재들 중 하나가 어쩌면 독자인 어른 자신의 모습과 닮아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사실은 스스로 약해서 권위적이 될 수 밖에 없었던 아버지의 모습, 남들의 행복을 위해 일한다고 하지만 실은 오로지 자기 행복만을 위해서 모든 것을 해왔던 어슐러 몽턴의 모습, 욕망 충족을 위해서라면 앞 뒤 안 가리고 뭐든 닥치는 대로 해치우는 '청소부들'의 모습. 분명 언젠가는 우리들 역시도 그 모습들 중 하나를 가지고 있었을 겁니다. 어쩌면 '대양'이라는 물의 이미지를 가져온 것도 사실은 이 소설이 그처럼 반추의 의미로 독자들에게 다가가기 원해서였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드는군요. 특히나 주인공의 에필로그를 생각하면 더욱 그래요.

 

 거기서, 어른이 된 주인공은 헴스톡 노부인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그럼, 전 합격했나요?"

 오른 쪽에 있는 노부인의 얼굴은 짙어지는 황혼에 가려서 읽을 수 없었다. 왼쪽의 젊은 여인이 말했다.

 "사람으로 사는 일에 합격이나 불합격은 없단다."(P. 282)

 

 

 주인공의 이 같은 질문을 어른인 독자들도 하게 될 것 같습니다. '나 지금 제대로 살고 있는 거야?'하는 것 같은 질문을. 어쩌면 주인공에게 이름을 주지 않은 것도 독자들이 감정 이입하기 쉽게 하려는 의도였는지도 모르겠군요.

 

 저는 원래 닐 게이먼을 좋아했습니다만 이 소설은 특히나 마음에 드는군요. 이야기도 나무랄 데 없이 재밌고 뜯어보면 여러 상징이나 비유들이 제법되어 꽤 독해의 재미까지 주고 있거든요. 그야말로 무더운 여름밤을 잊기 위해 제격인 작품이지 않나 싶습니다. 

 

그럼, 이제 여러분들도 이 오솔길로 여행을 떠나보지 않으시렵니까?

저 기억 속 어딘가에 있을 유년의 연못으로...


 

아래 사진은, 외국에서 나온 '오솔길 끝 바다' 한정판입니다.

근사해 보여서 가져와 봤어요. 우리나라도 이 소설이 많이 팔리면

이런 한정판으로 내어줬으면 좋겠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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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리부트 - 전2권
에이미 틴터러 지음, 박효정 옮김 / 황금가지 / 2014년 6월
평점 :
절판


REBOOT


죽었으나 다시 살아 돌아온 자들을 '리부트(REBOOT)'라 부른다.
때는 근미래의 지구. KDH 바이러스가 창궐하여 많은 인류가 죽는다. 그런데 KDH 바이러스가 가진 힘은 사람을 죽이는 데만 있지 않았다. 놀랍게도 그 바이러스는 죽은 사람을 다시 살릴 수도 있었다.

리부트로 되살아나는 것 자체는 단순히 KDH 바이러스의 또 다른 작용에 지나지 않았다. KDH에 감염된 사람들 대부분은 사망에 이르렀지만, 몇몇 (어리고 강한) 사람들에게는 바이러스가 다르게 작용했다. KDH 바이러스가 아니라 다른 원인으로 사망한 사람도. 생전에 한 번이라도 KDH에 감염된 적이 있다면 리부트가 될 수 있었다. 리부트가 될 때 시체는 사망 전보다 더 굳세고 강력한 육체로 되살아난다. (P. 21)

하지만 리부트, 즉 되살아난 자들은 그것만 변하는 게 아니다. 육체가 달라진 만큼 마음도 달라지는 것이다. 한 마디로 그들은 이전의 인간다운 마음을 잃어버린다. 감정을 잃고 타인의 아픔에 공감할 줄 아는 마음도 잃어버린다. 맞다. 그들은 '사이코패스'다. 눈하나 깜짝하지 않고 사람을 태연히 죽일 수 있다. 여자든, 어린아이든, 노인이든 상관없이. 머리를 잘리지 않는 한, 총을 맞아도 죽지 않고 부러진 뼈도 시간이 지나면 곧 원상태로 복구되는 불사신의 몸이지만 사람들이 리부트를 싫어하고 리부트가 되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러한 리부트들을 '생전 모습의 악한 복제판'이라 부른다.

 '렌 178'
그녀가 주인공이다. 렌은 리부트다. 렌은 12살에 리부트가 되었다. 이름 뒤의 178이란 그녀가 죽어있었던 시간을 말한다. 즉 렌은 178분 동안 죽었다가 다시 살아 돌아왔다는 말이다. 리부트들 사이에선 뒤의 숫자가 높을수록 강하다. 150을 넘어가는 리부트는 잘 없다. 하물며 178분 근처는 손에 꼽을만하다. 그만큼 렌은 강하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 숫자는 그만큼 인간다움에서 멀어지는 수치이기도 하다. 오래 죽으면 죽을 수록 육체는 강인해지지만 마음은 얼어붙어만 간다. 그 숫자는 냉혹의 수치요, 괴물의 수치다. 숫자가 적은 리부트들도, 사람들도 모두 렌을 두려워한다. 가까이 오는 것조차 꺼린다. 그건 또한 고독의 수치이기도 하다.




차디찬 마음을 가진 그녀에게 삶의 의미 따위는 없다. 그저 명령이 떨어지면 사람이나 탈주한 리부트들을 사냥하는 것 뿐. 그녀는 병기와 다름없다. 그런 그녀가 소속된 곳은 인발진. 일종의 기업이다. 언젠가 되살아온 리부트들을 도구로 써먹을 수 있다는 주장이 생겨났고 그에 따라 설립된 단체다. 말하자면 일종의 군수 회사다. 인발진은 리부트들을 군인이 아니라 무기처럼 관리한다. 지속적으로 리부트들을 모으고 렌과 같은 경험이 많은 리부트들을 조교로 시켜 신입 리부트들을 지도한다. 그러던 어느 날, 캘럼 레예스 22가 신입 리부트로 렌이 있는 곳에 온다.

 '캘럼 레예스 22'
 십대의 남자 아이. 렌은 이미 6년간 리부트로 일했으니 나이는 얼추 비슷할 것이다. 그가 죽은 시간은 숫자 대로 겨우 22분. 렌은 놀란다. 40분 미만의 사람을 좀처럼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22분이면 거의 인간이나 마찬가지다. 과연 캘럼은 다른 리부트들과 달리 실실 웃고 있다. 그런데 그런 캘럼이 렌에게 허물없이 인사한다. 거의 인간이나 마찬가지면서도 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친해지려고 애를 쓴다. 렌은 확신한다. 저 정도의 숫자라면 분명 두 달 안에 죽게 될 것이라고.




 왜일까? 렌은 캘럼이 신경쓰인다. 자신을 두려워하지 않고 괴물이 아니라 인간을 대하듯이 해주었기 때문일까? 확실하지 않다. 확실한 건, 캘럼이 리시의 훈련생으로 갈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리시는 이미 52명의 훈련생을 죽였다. 별다른 일이 없는 한, 캘럼도 그럴 것이다. 렌은 그게 신경쓰인다. 숫자가 적은 훈련생을 맡는다는 것은 조교로서도 큰 모험이다. 오로지 명령 수행과 이기적 타산밖에 남지 않은 렌은 원래 그런 무모한 선택을 할 리 없었다. 하지만 렌은 자신도 모르게 캘럼을 자신의 훈련생으로 선택한다. 그리고 이제 전체 사회를 동요시킬 그들의 여정이 시작된다. 


RETURN

아마도 눈치챘을 것 같은데, 리부트는 좀비의 또 다른 변형이다. 자의식이 있고 인육을 먹지 않는다는 점에서 차이가 날 뿐, 그 밖의 다른 것은 좀비와 다를 바 없다.  렌, 그녀는 죽음에서 돌아왔지만 아직 인간으로는 돌아가지 못했다. 그건 겨우 반 밖에 되지 않은 '리턴'이었다. 그렇다면 결국 리부트는 무슨 이야기인가? 그건 바로 인간으로 돌아가는(RETURN) 이야기다. 그런데 인간이란 무엇일까? 과연 렌은 어떻게 되어야 우리는 렌이 드디어 인간으로 돌아왔다고 말할 수 있을까? 리부트의 진짜 질문은 바로 여기에 있다. 진정한 인간다움을 찾아가는 것. 렌이 그 '인간다움의 이타카'에 도착했을 때 우리는 정녕 그녀가 완전히 '리턴'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질문을 풀기 위해, 그 이타카를 찾기 위해 작가 에이미 틴터러는 사랑을 가져온다. 그렇다. 이 소설은 압도적인 강함을 지닌 여전사가 나오고 칼이 바람을 가로지르며 여기저기서 총탄이 난무하지만 기본적으로는 로맨스다. 헤겔은 사랑은 가장 친밀한 타인과의 대면을 통해 자신의 진짜 모습을 알게 만들어 준다고 한 바 있는데 '리부트'의 사랑 역시 그렇다. 그 사랑을 통해 렌은 자신이 되찾아야 할 인간의 진짜 모습을 깨닫게 된다. 바로 '캘럼'이라는 일종의 롤 모델을 통해서...

ROMANCE

리부트는 모두 2권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1권은 어디까지나 렌을 중심으로 진행되지만 2권에서는 렌과 캘럼이 돌림노래를 하듯 서로 번갈아가며 이야기의 중심이 된다. 즉 1권과 2권의 형식이 동일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니 2권을 읽을 때 좀 난점이 있다. 1권에 익숙해진 나머지 그처럼 읽다가 렌과 캘럼의 이야기를 혼동할 우려가 있는 것이다. 2권을 읽을 때는 챕터 앞에 나오는 사람의 이름을 꼭 확인하고 읽는 게 좋다. 이렇게 소설은 좀 독특한 구성을 지니고 있는데 작가, 에이미 틴터러가 이처럼 하는 이유는 무엇보다 렌이 캘럼과의 사랑을 통해서 점점 각성하게 될 참된 인간다움이 과연 무엇인지 보여주기 위해서다. 그건 바로 타자를 자기와 대등하게 받아들이는 게 인간다움의 진정한 '이타카'라는 것이다. 때문에 에이미 틴터러는 2권에서 렌과 똑같은 비중으로 캘럼에게 주역을 허락한 것이다. 이는 리부트들을 관리하고 있는 인발진과 탈주한 리부트 마이카의 행태에서 더욱 드러나는데 이 둘엔 공통점이 있다. 그건 바로 타인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발진과 마이카에게 자신과 다른 존재는 그저 도구와 방해물 이외엔 아무 것도 아니다. 렌이 결정적으로 캘럼을 데리고 인발진을 탈출한 이유는 인발진이 리부트들에게 놓고 있던 수상한 약 때문이었다. 렌은 룸메이트 에바의 사건을 통해 그 약이 리부트의 자의식을 제거하여 인육을 뜯어 먹는 괴물로 만든다는 것을 알게 된다. 다시 말해 인발진은 리부트들을 좀 더 손쉬운 도구로 만들기 위해 좀비화 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캘럼도 그 약을 맞게 된다. 워낙에 캘럼이 죽이라는 인발진의 명령을 무시한 탓에 목숨이 위험하긴 했지만(리부트가 인발진의 명령을 거부하면 즉시 처형이다.) 그 치료제를 찾기 위해서라도 인발진에서 탈출할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인발진은 타자인 리부트들을 결코 자신과 대등한 존재라고 인정하지 않는다. 같은 리부트인 마이카는 어떤가? 그도 마찬가지다. 그는 자신들을 괴물 대하듯 하고 노예처럼 부리는 인간들을 절대 인정할 수 없다. 인발진뿐 만 아니라 보통의 민간인들 역시 그에게 오로지 제거해야 하는 종양일 뿐이다. 그렇게 그들은 닮았다. 인발진은 좀비를 만들고 마이카는 괴물들로 만든다. 오디세우스가 고향인 이타카로 가기 위해 헤쳐나온 난관이나 마찬가지다. 렌의 사랑인 캘럼은 이들과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한마디로 그에겐 뭔가를 나누는 선이라는 게 없다. 그에게 자신을 괴물보듯 하는 부모나 동생도, 자신을 비웃고 경멸하는 상위 리부트들 또한 다 포용의 대상이다. 그는 누구도 죽이지 않고 자신을 배척하는 이를 돕기위해 기꺼이 목숨을 걸고 뛰어든다. 모두가 나 자신처럼 소중하다. 그게 바로 캘럼이다. 렌은 그 캘럼을 통해 자신이 가야 할 이타카로 가는 것이다. '리부트'의 사랑이란 오디세우스의 배와도 같다.

 이제 우리는 알 수 있다. 그녀가 언제 진정 '리턴'이 되는 지.
그건 바로 냉혹한 그녀의 두 눈에서 공감의 눈물이 흐르는 순간이다.

 내가 읽은 리부트는 이런 소설이다. 타인을 수단화하거나 배척하는 것이 날로 심해지는 시대에, '의리'란 말이 어느새 유행어가 될만큼 사람 냄새가 몹시도 그리운 시대에, 우리가 그토록 그리워하는 참된 인간다움을 과연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2권 분량이지만 읽기에 별 부담은 없었다. 이야기 전개 속도가 빠르고 흥미로운 사건들이 이야기가 좀 늘어진다 싶으면 어김없이 튀어나와 가속도를 높여주었기 때문이다. 좀비의 아이디어를 새롭게 변형하여 현재 판타지 소설의 주류적 경향이라고 해도 좋은 디스토피아와 잘 버무렸다고 보여진다. 

            


 동영상은 '리부트'의 북트레일러다. 원서의 출판사가 만든 것인데 소설의 분위기를 잘 나타내고 있는 것 같아 가져와 본다.
맨 앞에 나오는 소년이 켈럼22, 네번째의 기묘한 눈을 가진 소녀가 바로 렌178 이다. 폭스사에서 영화로 만든다고 하는데 영상으로는 이 둘의 여정이 어떻게 표현될 지 자못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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