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의 시대는 끝났다 - 우리 시대 페미니스트 4인의 도발적 젠더 논쟁
해나 로진 외 지음, 노지양 옮김 / 모던아카이브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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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년, 한 권의 책이 논쟁의 중심에 섰다. 미국의 페미니스트이자 저널리스트인 해나 로진이 쓴 '남자의 종말'이란 책이었다.

 우리나라에도 이미 번역되었는데, 그 책에서 해나 로진은 지금 사회가 가부장제에서 가모장제로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밝히면서 남자의 시대가 곧 종언할 것이라 내다 보았다. 아무 근거 없이 하는 말이 아니라 여러가지 통계들을 인용하여 구체적으로 증명했기에 첨예한 논쟁이 뒤따랐다. 이것을 캐나다의 유명한 토론 프로그램인 멍크 디베이트가 놓칠 리 없다. 즉각 해나 로진의 책을 가지고 당대에 가장 영향력 있는 페미니스트들을 초빙하여 토론을 벌였다. 때는 2013년 11월 15일. 장소는 토론토.


 3,000개의 유료 객석이 전부 매진된 가운데 그 많은 방청객들을 앞에 두고 네 명의 논객이 남성의 시대가 끝날 것이라 내다보는 쪽과 반대하는 쪽으로 서로 편을 갈라 젠더를 주제로 한 멍크 디베이트가 진행되었다. 내다 보는 쪽엔 '남성의 종말'을 쓴 장본인인 해나 로진과 모린 다우드(클린턴 섹스 스캔들과 관련해 쓴 칼럼으로 퓰리처 상을 탔고, '남자가 꼭 필요한가?'란 책을 쓴 바 있다.)가 편을 먹었고, 반대하는 쪽엔 커밀 팔리아(예술 종합 교육 대학 교수에다 사회평론가, 커밍아웃한 레즈비언이기도 하다. 전투적인 페미니스트들을 스탈린주의자라고 부르는 그녀는 현대 주류 페미니즘을 가장 신랄하게 비판하는 페미니스트 중 한 사람으로 자신을 '안티 페미니스트 페미니스트'라 칭한다. 이미 그녀의 첫 저서, '섹슈얼 페르소나'로 페미니즘 진영에서 뜨거운 찬반 양론을 일으킨 바가 있기도 하다.)와 케이틀린 모란(패널 중 유일하게 영국의 페미니스트로 그 곳에선 '괴짜 페미니스트'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녀의 '진짜 여자가 되는 법(이 책 개인적으로 추천!)'은 우리나라에도 번역된 바 있는데 여성성을 말하는 데 있어 꽤 대담하고 별명처럼 페미니즘에 대해 독특한 시각을 보여준다. 그녀 스스로는 자신을 맑시스트라 부른다.)이 편을 먹었다.



 '멍크 디베이트'의 책들을 꾸준히 출판하고 있는 모던 아카이브에서 나왔다. '사피엔스의 미래'와 '감시 국가'에 이은 세 번째 책이다. 구성은 먼저 왜 이런 토론을 벌이게 되었는지 이유를 소개하고 그 뒤에 실제 토론한 내용들이 나오며 그 후엔 패널들이 토론 전 인터뷰한 것과 현재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페미니즘 비평가 중의 한 사람이자 남성 차별도 여성 차별만큼 중시해야 한다는 에쿼티 페미니스트(케이틀란 모란이 바로 이 입장이기도 하다.)인 크리스티나 호프 소머스와 우리나라에도 번역된 '진화하는 결혼(이 책도 개인적으로 추천!)'의 저자 스테파니 쿤츠가 토론에 대해 논평한 것을 마지막에 싣는 것으로 되어 있다.


 토론의 내용을 소개하는 것은 다소 부질없는 일로 보인다. 토론은 직접 들을 때라야 비로소 그 의미의 파악도, 평가도 제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무용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 책이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 분위기만이라도 짐작할 수 있도록 무모하지만 소개라는 것을 시도해 본다면,


 일단 토론의 포문은 토론의 대상이 '남자의 종말'이기 때문에 그것을 쓴 해나 로진이 먼저 연다. 그녀는 미국과 캐나다의 실상을 통하여 현재 역사적으로 정의해온 전형적인 남성의 시대가 저물었다고 말한다. 그 이유로 첫째, 남성들이 노동시장에서 실패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둘째, 교육에 있어서도 한 개 대륙을 제외하고 전 세계 모든 국가에서 대학 졸업장을 받는 이들의 60% 이상이 여성일 정도로 남성이 실패하고 있으며 셋째로, 남성이 주요 소득자인 전통적인 가정이 급속히 사라지고 있고(이것은 특히 노동자 계층에서 급속하게 증가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남성들이 독점하고 있었던 폭력성과 공격성을 잃고 있다는 것을 든다.


 서민층 남성들은 직업을 잃고 자신의 역할을 잃고 가족을 잃고 있어요. 여성들이 혼자 다 알아서 하고 있습니다. 과거 마초들의 본거지였던 곳, 전통적 가치가 중시되던 이 나라의 일부에서 이렇게 가모장제가 만들어지고 있어요. 제가 여성들에게 묻습니다. "왜 아이들 아버지하고 살지 않으세요?" 그러면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해요. "집에 입 하나를 더 늘리고 싶지 않아서요."(p. 36)


 한 마디로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남성성이 급격하게 퇴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예로 그녀는 이제 남자들도 체모에 엄청 집착하고 있으며 관리하고 있다는 것을 든다.


 이에 반론을 펼치는 커밀 팔리아는 이러한 남성성의 퇴조를 심각하게 우려한다. 그는 이것이 자연적인 현상이 아니며 제조업이 쇠퇴하고 금융과 서비스업이 중심이 된 지식 사회가 되면서 육체 노동을 경시한 결과로 해석한다. 


 지식인 사회가 남성성과 남성다움을 일상적으로 모욕하면 앞으로 여성들은 성숙한 인간이 되고자 노력하지도 않고 헌신과 희생을 존중하지도 않는 남자들을 만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포용할 만한, 또는 반체제적인 레즈비언이 거부할 만한, 강한 남성성이 없다면 여성들은 여성으로서 중심이 잡히고 깊이가 있는 감각을 깨닫기 어려울 것입니다.(p. 41)


  그녀는 페미니즘의 적절한 임무는 여성에게 가해지는 광범위한 차별과 불평등을 초래하는 경직된 사회 관습을 공격하고 재건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남성을 편견에 가두고, 하찮게 취급하며, 악의 근원이라고 비난하지 않고도 진보적인 개혁 운동을 펼치는 것은 과거에도 가능했고 지금도 가능하다고 말한다.


 미국 페미니스트 저널리스트의 책과 글에서 가장 거슬리는 부분은 좌파의 위치에 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은연중에 부르조아의 가치와 문화의 특권을 감싼다는 점입니다.(내가 정희진의 글에서 느꼈던 불편함을 콕 꼬집고 있어 이 부분을 읽으면서 놀라웠다.) 중산류층 엘리트들의 사무 능력이나 경영 능력만을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자 인류의 궁극적인 혁명으로 다루고 있습니다.(p. 43)


 특히 커밀 필리아는 현재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라 그런지 현재 교육 체제를 많이 공격한다. 이런 교육 체제가 육체 노동 경시 경향을 더욱 확대시키고 있다면서 독일처럼 다양한 직업 훈련을 실습할 수 있는 쪽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다음 토론자로 나선 모린 다우드는 남자다움의 기준이 이미 변해버렸으며 이제 그것을 인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제 남자나 여자나 양성적인 특성이 존중되는 중성의 세계로 들어가야 하는데 여자와 달리 남자는 그 앞에서 여전히 머뭇거리고만 있어요. 왜냐하면 남자다움이라는 기준이 변하고 있는데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면서도 집에서 살림하고 애 보는 남자는 되고 싶어하지 않기 때문이죠.(p. 50)


 그러면서 이미 생물학적으로 그렇게 되어가고 있다고 밝힌다. 진화 생물학자들은 앞으로 10만 년에서 천만 년 사이에 지구에서 남자들이 사라질 것이라 예측한 바 있는데 그 이유가 남성 염색체인 Y 염색체가 점점 그 힘을 잃어가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한 마디로 과거에 연연해하지 말고 새로운 변화를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정규 교육은 하나도 받지 않고 오직 집에서 홈 스쿨링을 한 덕분에 생각에 있어서 더욱 자유분방한 케이틀린 모란은 자신의 페미니즘을 이렇게 설명하면서,


 첫째, 꽥꽥거린다. 둘째, 칵테일을 연료로 한다. 셋째, 맑시스트다.(책에는 '마르크스주의자'라고 되어 있지만 이것이 실은 일본식 표현이므로 원래 표현에 맞게 '맑스'로 고친다.)(p. 56)


 자신은 친여성도, 친남성도 아님을 밝힌 다음, 남성과 여성 모두 공존, 공영(共榮)해야 할 존재라고 하면서 이 문제를 남자나 여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문제로 바라볼 것을 역설한다.


 고통이 끊이지 않는 이 세상에서 평등이라는 개념은 우리가 도덕적으로 실패했다고 느낄 때 자신에게 선물하는 근사한 사치품이 아닙니다.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그만인 고급 캐시미어 수면 양말이 아닙니다. 평등이란 인류에게는 공기나 물과 같은 필수 요소입니다.(...) 페미니즘이 남녀는 평등하다는 간결하고도 진실한 명제라면, 우리는 미래에 그 명제를 현실로 만들기 위해 모든 노력을 해야 합니다. 남성들이 여성을 도와 평등을 쟁취할 수 있게 해줄 수도 있고, 여성들이 남성이 평등을 쟁취할 수 있게 도와줄 수도 있겠지요. 우리 앞에 닥친 문제를 '남자 문제' 혹은 '여자 문제'로 분리하는 것을 그만두고 모든 문제를 본질적으로, 다시 말해 '인류 공통의 문제'로 보기 시작해야 합니다.(p. 58)


 이제 겨우 책의 3분의 1만 소개했는데도 글이 이렇게나 길어졌다. 어쨌든 이것으로 대략 책의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해나 로진은 서민 계층에서 더욱 두드러지는 가모장 가정의 증가를 '남자의 종말'에 대한 중요한 징후 중 하나로 해석했는데 거기에 대해 커밀 필리아는 엘리트 계층과 하위 노동자 계층 사이의 불평등한 임금 구조와 사회 양극화에서 기인한 것이라 말한다. 다시 말해, 이러한 문제는 남자들만의 문제로 볼 수 없고 그러한 것을 낳는 경제 구조를 바꾸는 사회 문제로 접근해야 한다는 뜻이다. 여기에 대해 해나 로진도 동의하며 육체 노동이 주가 되는 분야의 임금도 지식 노동만큼이나 제대로 평가 되길 바란다는 말을 남긴다. 커밀 필리아는 더 나아가 교육 제도에서 혁명적인 변화가 이뤄져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남성성이 결코 스스로 회복하지 못할 것이라 말한다. 여성의 의료 시스템에 대한 논의도 있었는데, 나는 미국이 아직도 무급 출산 휴가라는 것을 이 책을 통해 처음 알았다. 놀랍게도 전 세계적으로 무급 출산을 유지하는 나라가 세 나라인데 그 중 하나라고 한다. 그리고 스웨덴 역시 1년 동안 유급 출산 휴가를 여성에게 주긴 하지만, 특정한 행동만 하도록 압박하고 있어 문제라고 한다. 해나 로진에 따르면 스웨덴이 미국보다 여성들의 일터 환경이 더 불평등하다고 말한다.(헉! 스웨덴이 그럴수가! 조금 충격인 걸.) 마일리 사이러스에 대한 찬반 논쟁(아, 물론 여기서 토론의 대상이 된 마일리 사이러스는 정확히 2013년 8월 이후의 것이다(책에는 안 나와 있기에 굳이 밝힘.))을 통한 여성성에 대한 논의도 흥미로웠다.


 이 책을 읽고 느낀 것 혹은 나는 어느 편에 서는가 하는 것을 밝힐 시점인데, 나는 그것을 전문가 논평에 나온 스테파니 쿤츠의 말로 대신하려 한다. 


 남자는 퇴물이 아니다. 남자가 퇴물이라고 하는 것은 남성과 여성이 다른 욕구와 능력과 가치를 지니고 있고, 여성의 부상이 남성에게 위협이 된다는 주장일 뿐이다. 케이틀린 모란이 지적한 대로 우리는 지금 이 길을 함께 걷고 있다. 여성이 평등한 사회를 살아갈 때 여성의 파트너와 그 아들들, 형제들이 더 나은 삶을 살게 된다.(p. 191)


 같은 전문가 논평을 한 크리스티나 호프 소머스는 이 토론을 논평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 


 누구보다 똑똑하고 자기 분야에서 성공했으며 재기발랄하기 이를 데 없는 네 명의 여성들이, 음울하고 매사 발끈하며 '강간 문화(강간이 만연하고 사회에서 용인되는 환경)'에만 집착하는 현대 페미니즘 프레임에서 벗어나 젠더 정치를 논하는 장면을 상상해보시길 바란다. 이번 멍크 디베이트에서 그런 일이 벌어졌고 남자와 여자 모두 한발 더 나아갔다.(p. 185)


 크리스티나 호프 소머스가 언급한 '강간 문화'는 우리나라 페미니즘에도 해당되는 것 같다. 현대 페미니즘 프레임이란 말마따나 때로는 그 사안이 모든 페미니즘의 생산적 논의를 다 잡아먹고 있다고도 보여진다. 젠더 정치를 보다 폭 넓은 시야로 봐라봤으면 하는 마음에서 권하고 싶은 책이다. 다들 하나같이 말빨도 좋고 내용도 쉬워서 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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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7-07-24 2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출산 문제는 남성의 비협조 문제만이 아닌 정부측의 국가적 압제가 많다고 생각해서 남성의 인식이 향상되어 개선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된다고 생각합니다. 우선은 임금 격차부터 줄여 나가야 겠지요. 그게 출산과 육아 이후의 여성들에게도 도움이 될 테고요.

에일로이 2017-07-25 03:52   좋아요 1 | URL
저도 전체적으로 동의합니다. 국가가 먼저 유급 출산 휴가를 장려하여 업무 환경을 적극 바꿔나가야죠. 어떤 책에서 봤는지 얼른 기억 나지 않는데, 사람은 많이 보고 낯익은 것에 대해선 관대해져 훨씬 쉽게 받아들인다고 합니다. 때문에 동성애의 경우에도 커밍 아웃을 보다 많이 하여 사람들의 시선에 많이 노출되는 게 낫다고 하더군요. 출산 휴가 역시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합니다. 이런 쪽으로 국가의 선도적인 제도 마련이 많이 이뤄졌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착각일 뿐이다 - 과학자의 언어로 말하는 영성과 자아
샘 해리스 지음, 유자화 옮김 / 시공사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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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처드 도킨스와 크리스토퍼 히친스 못지 않게 유명한 무신론자 과학자가 또 한 명 있으니 그가 바로 샘 해리스다. 나는 지금까지 한국에 나온 샘 해리스의 책을 '종교의 종말' 빼고는 다 읽었는데 '나는 착각일 뿐이다'는 2014년에 나온 것으로 2012년에 나온 '자유 의지는 없다'에 바로 뒤이은 저작이다. 샘 해리스의 책을 꾸준히 읽는 것은 두 가지 지적 자극 때문이다. 하나는 익숙한 것을 아주 낯설게 바라보게 하여 그 본질을 응시하게 만든다는 것과 끊임없는 회의와 의심으로 다소 모호한 상태로 내버려 두고 있었던, 그렇지만 다 안다고 여겼던 개념들을 명확하게 다듬게 한다는 것이다. '자유 의지는 없다'는 그 대표적인 예라 할 만하다. 전작에서 '자유 의지'가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공박했던 그가 이번엔 '자아'가 착각의 소산이라고 말한다. 그 주장과 근거가 담긴 책이 바로 '나는 착각일 뿐이다'이다. 원제는 'WAKING UP'. 한국어 제목 보다는 원제가 이 책이 말하는 것에 더 적합하다. 정말로 이 책은 '깨어남'이라는 원제 그대로 '영성'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영성은 얼른 정의하기가 참 어려운 단어다. 보통은 자기 존재의 참된 의미를 깨닫는 내적인 도정이라는 의미로 쓰인다. 샘 해리스의 영성도 이와 멀리 있지 않다. 그가 추구하는 것은 다름아닌 신에 대한 믿음이나 종교 없이도 그런 영성이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으로 '나는 착각일 뿐이다'는 바로 그런 것을 보여주는 책이다.


 지금 이 순간에 당신이 당신인 것 같다는 유일한 증거는 당신이 당신인 것 같다는(오로지 당신에게만 명백한) 사실뿐이다.(p. 79)


 책은 모두 5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은 '영성'으로 그는 영성이 무엇보다 종교와 구별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왜냐하면 종교가 없더라고 영적 경험은 얼마든지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자신의 영적 경험을 종교 체험으로 간주하고 종교를 벗어난 것은 영적 체험이 아니라고 여기는 것은 그동안 자신의 모든 경험을 종교적 교리의 렌즈로 바라보는 데 너무 길들여져 있는 탓이라는 것이다. 더구나 사람들은 그러한 영적 체험을 오히려 자신들이 믿는 신앙의 절대 근거 비슷하게 여기기까지 하는데 실제 영적 경험에는 그들의 전통적 믿음을 지지하는 근거가 전혀 없으므로 그것은 커다란 오류라고 지적한다. 그러면서 덧붙인다. 우리가 '나'라고 부르는 느낌은 착각(p. 21)이라고. 뇌의 미로 깊은 곳에서 미노타우르스처럼 살아가는 자기나 자아라는 것은 없다고 말이다. 여기에 맞추어 자신이 말하는 영성이 무엇인지 정의한다. 그것은 바로 '나'라는 환영을 반복해서 잘라내며 나아가는 것이라고 말이다.




 이것은 굳이 신이나 종교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가능한 일이다. 사람이 도덕적으로 살기 위해 자유 의지가 필요하지 않은 것과도 같다. 과학으로 도덕이 가능하듯. 역시 영성도 가능하다. 왜냐하면 영성의 모범은 무엇보다 불교에서 찾을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과학자의 것과 아주 유사하기 때문이다. 즉 불교의 영성 방법은 과학자의 것과 근본적으로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경험주의다. 불교의 가르침도, 과학자의 연구도 모두 경험에 기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는 경험을 매우 중시한다. 바로 이것이 왜 '나'가 착각이며 환영에 지나지 않는가에 중대한 근거가 된다. 이것은 2장, '의식'에 가서 본격적으로 설명된다. 의식은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로 잘 보여줬듯이, 자아의 등뼈라고 해도 좋다. 우리가 '나'를 느끼는 것은 의식 때문이다. 그러나 이 의식이라는 것은 어떻게 출현한 것일까? 주역에서 말하는 대로 외부에 있던 영혼의 침입일까? 진화론에서 말하는 것처럼 물질의 변화일까? 샘 해리스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의식의 탄생은 조직화의 결과임이 틀림없다. 원자를 특정한 방식으로 배열하는 것이 바로 그 원자의 집합이 존재하는 경험을 불러온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분명 우리가 성찰해보아야 할 가장 심오한 미스터리이다.(p. 75)


 그가 이토록 경험을 중시하는 것은 실체가 지금도 여전히 수수께끼에 둘러싸여 있기 때문이다. 의식의 존재를 알려주는 것은 아직도 우리의 경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의문이 생긴다. 지금까지 의식에 대해 뇌를 통해 밝혀진 것은 뭐란 말인가? UCLA에서 신경과학으로 박사 학위를 딴 인지 신경과학자인 그는 답한다. 그것은 의식 자체를 찾은 것이 아니라 단순히 의식의 내용을 찾은 것 뿐으로 현재까지 뇌를 통한 의식의 연구는 의식 자체와 의식 내용 간의 구분을 짓지 못한 채로 이루어졌다고 말이다.(p. 85) 그리고 두뇌가 결코 '나'라는 의식의 실재가 될 수 없음을 로저 스페리가 발견한 '분할뇌'를 통해 낱낱이 밝힌다. 분할뇌 사례는 두 가지 진실을 우리에게 알려주었다. 하나는 뇌의 좌우반구가 고도의 기능적 특수화를 이루고 있다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아예 독립적으로 활동하는 것도 가능하다는 것. 이렇게 두뇌 자체가 정보의 인식과 행위 의도 그리고 의식 경험 모두에 있어서 분리가 가능하니, 서로 다르게 활동하는 두뇌의 부분들을 두고 하나의 주체라고 부르는 것은 아무래도 어렵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나 자신을 경험하고 있는 것처럼 이 모든 별개의 의식을 포함하여 하나의 '나'라는 의식으로 만들어 주는 것은 무엇이며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아직 알 수 없고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나의 의식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의 근거란 경험밖에 없게 된다.(그러므로 제목이 말하는 착각의 대상은 '나'라는 게 정말 있다고 생각하는, 그 실재에 대한 착각이다. 있는 건 다만 '경험'뿐이다. 이 경험주의는 주디스 버틀러의 '수행적 정체성'과도 어느 정도 이어지는 것 같다.)


 3장 '자아'는 바로 이러한 나를 나로 여기게 만드는 경험에 대해 집중 탐구한다. 의식이 경험이라면 나를 나로 만드는 경험은 무엇인가? 그것은 둘이다. 하나는 신체적 연속성의 경험 그리고 다른 하나는 정신의 연속성의 경험. 그런데 전자는 후자에 부수적이다. 정신적 연속성을 경험하기 때문에 신체적인 연속성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3장에서는 이 '경험으로써의 자아'가 왜 우리의 전부인지에 대해 논증한다. 이것을 긍정하게 되면 왜 샘 해리스가 신이나 종교 없이도 영성이 얼마든지 가능한지 또 어떻게 과학적으로도 가능한지 이해하게 된다. 쉽게 말해서 자아가 단지 경험에 지나지 않는다면 경험의 양태를 스스로 바꾸면 되는 것이다. 부정적 정서를 긍정적 정서로 말이다. 이렇게 말하면 얼른 떠오르는 게 있지 않은가? 바로 원효 대사가 말한 '일체유심조'다. 샘 해리스의 영성은 원효 대사의 것과 많이 닮았다. 그가 왜 불교적 영성 방법을 모범으로 삼는지 어느 정도 이해가 간다. 이런 식으로 4장, '명상'에서는 영성의 구체적 방법들이 자신의 실제 경험과 결부되어 설명된다. 알고 보니 샘 해리스는 이런 쪽의 경험이 아주 많았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 세계에 안 가 본 데가 없으며 많은 스승을 찾아다녔던 것이다. 그런 오랜 구도의 노력이 뒷받침 되어 있기에 그의 말은 단호하며 주장 역시 설득력을 가지게 되는 지도 모른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마지막 장으로 '구루, 죽음, 약물'이다. 왜 그런고 하면, 여기서는 임사 체험을 다루고 있는데 그 방면에 있어 최근 아주 유명해진 책인 이븐 알렉산더의 '나는 천국을 보았다'에 대해 아주 맹렬하게 비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미국에서 발간되었을 때, '뉴욕타임즈' 베스트 셀러 1위를 무려 52주나 했다. 그만큼 미국에 끼친 영향이 컸다. 우리나라에도 발간되었는데, 아주 많은 이들이 읽은 것으로 기억한다. 이 책이 그만한 파급력을 가졌던 것은 무엇보다 저자가 뇌를 전문으로 하는 신경외과 의사였기 때문이다. 그를 수술한 전문의마저 그의 두뇌가 완전히 정지했다고 증언했기에 저자의 임사 체험은 더욱 실제로 받아들여졌고 인기도 덩달아 높아졌다. 하지만 샘 해리스는 이 책에서 왜 그 책이 실은 아무 것도 입증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그가 제공한 증거는 잘못되었고 과학과 무관하다고 말이다. 나도 이 책을 읽었고 거기에 관련된 이야기도 들었기 때문에 혹시 진짜 이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놀라며 읽었던 터라 샘 해리스의 반박이 인상깊지 않을 수 없었다. 근거가 설득력이 있어 더욱 그랬다. 그가 이븐 알렉산더에 대해 논박하는 것은 그 역시 임사 체험 못지 않은 초자연적인 경험을 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해서 그는 초자연적인 것을 덮어놓고 믿지는 않았다. 진실인지 아닌지 확실하지 않지만 오류 가능성이 다분한 것으로 남겨두었을 뿐이다.


 여기서 이 책의 진짜 목적은 어느 정도 드러난다. 샘 해리스가 이븐 알렉산더에 반대하며 취하는 태도가 실은 영성을 통해 체화시키고자 하는 태도인 것이다. 깨달음은 내 의지를 신이나 종교에 의탁하거나 초자연적인 현상들에 기대어 얻어서는 안 되는 것이며 약물과 같은 외부적인 힘을 매개로 이루는 것도 안 되는 것이다. 오직 비판과 회의가 생생하게 활동하는 이성을 통해 나아가야 하는 길인 것이다. 지금 내게 찾아온 경험이 무엇인가 끊임없이 해석하며 의미를 만들어가는 지극히 이성적인 활동. 그것이 바로 샘 해리스가 자아의 망집을 허물고 그 무엇에도 기대지 않은 채로 오로지 혼자의 힘으로 닿고자 하는 영성의 도정이다. 이것은 리처드 도킨스가 '만들어진 신'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던 것과 유사하다.


 과학자로서 나는 근본주의 종교에 적대적이다. 그것이 과학적 탐구심을 적극적으로 꺾으려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마음을 바꾸지 말고, 알아낼 수 있는 것들을 알려고 하지 말라고 가르친다. 그것은 과학을 전복시키고 지성을 부패시킨다.(p. 430)


 샘 해리스도 같은 것을 두려워 한다. 이성의 합리적 의심과 비판을 막는 모든 것들을, 그저 모든 것이 다 결론이 난 것처럼 달리 보고 생각하는 움직임들을 꼭꼭 자기 아래 가두는 모든 것들을. 부패된 지성이 뿜어대는 악취에 선량한 이성들이 오염되는 것을 막기 위해 그는 '자유 의지'나 '자아'처럼 현재 마치 종착역처럼 되어버린 개념들을 허무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그의 영성을 단 한 단어로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바로 자유라고. 숫타니파타에 나오는 이런 자유 말이다. 나는 샘 해리스가 이 책에서 하고자 했던 말 전부가 바로 여기에 집약되어 있다고 본다.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진흙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처럼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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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일의 철학자 니체는 시대가 달라지면 감각도 다르게 된다고 보았다. 니체가 주로 활동했던 때는 흔히 말하는 근대였다. 근대는 확실히 이전의 중세와 달랐다. 존 버거는 르네상스 이후로 우리의 오감 중 특히 시각이 중요해졌다고 말한다. 근대는 한 마디로 시각 패권주의의 시대였고 그것은 지금도 여전히 진행중에 있다. 한편 시간이라는 게 생겨나 모든 일상이 정확한 시간에 따라 나뉘어졌다. 그리고 증기 기관의 발달로 속도도 생겨났다. 기관차와 자동차의 속도는 말과 자기 다리에만 익숙해져 있던 이들에게 이전에는 결코 경험할 수 없었던 빠르기였다. 이 미친 빠르기와 초 단위로 관리되는 일상이 니체에겐 거의 광기에 가까운 것으로 보였다. 그래서 니체는 이런 시대를 견디려면 현재의 오감만으로는 부족하고 또 하나의 새로운 감각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바로 그 감각을 니체는 '제 6의 감각'이라 불렀다. 니체에 따르면 여섯 번째 감각은 역사의 리듬을 감지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 인류의 삶에는 언제나 일정한 속도와 경향이 있어서 자기 속도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마라톤 선수처럼 코스 전체에 대한 감각이 필수적으로 요청된다고 보았다. 종으로 역사와 횡으로 시대 전체를 통찰할 수 있는 감각인 것이다. 스티브 잡스가 증명하듯이 그런 감각을 가진 자들이 대체로 성공을 일궈냈다. 그런데 니체의 말대로 시대가 바뀌면 새로운 감각이 요청되는 것은 이처럼 시대의 변화에 따라 경험의 내용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금은? 현재는 또 근대와 다르다. 흔히들 지금을 네트워크의 시대라 말한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든 누구나 연결된다. 잠깐 페이스북만 이용해도 무수한 사람과 정보에 접속할 수 있는 게 바로 우리다. 근대의 사람이 보고 다룰 수 있었던 정보의 양과 지금 우리가 보고 다룰 수 있는 정보의 양은 하늘과 땅 차이다. 일례로 근대와 더불어 시작된 언론은 당시엔 정보를 생산하고 여론을 주도하는 데 있어 커다란 힘을 가지고 있었지만 지금은 별다른 힘을 못 쓴다. 미국 대선에서도, 우리나라 대선에서도 언론의 영향은 미미했다. 이제 정보는 누군가에게 독점되지 않는다. 생산도, 유통도 모두가 가능한 시대가 된 것이다. 이렇게 시대가 또 달라졌으니 또 하나의 감각이 요청될 수밖에 없다. 여섯 번째의 감각을 넘어선 '일곱 번째의 감각'이다. 그것이 바로 미국 '타임'지 디지털 부문 편집장 출신인 조슈아 쿠퍼 라모의 생각이다. 바로 그 생각을 한 권의 책으로 밀도 있게 풀어낸 것이 바로 '제 7의 감각, 초연결지능'이다.




 제7의 감각은 간단히 말해 어떤 사물이 연결에 의해 바뀌는 방식을 알아내는 능력이다. 왜 이 능력이 필요한가? 그것은 모든 것을 연결하는 행위가 세상에 진정으로 새로운 역할을 끌어들이기 때문이다. 힘이 초고밀도로 집중되고 복잡하고 즉각적인 혼란의 위험이 발생한다. 폴 비릴리오는 배를 발명하면 난파도 동시에 발명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와 똑같이 네트워크와 네트워크의 연결은 긍정적 결과 못지않게 부정적 결과 또한 야기할 것이다. 광범위한 SNS의 연결이 IS 테러집단에 악용되고 우리의 일상 생활을 방해하며 사생활 침해를 가져오는 것처럼 말이다.


 네트워크는 기존의 갈등을 더 복잡하게 만들지도 않지만 그 갈등에서 우리를 구해주지도 않는다. 네트워크는 오래된 증오에 새로운 충성심을 채운다. 그리고 과거의 원한을 더 사무치게 만들고 분노를 느낄 때 세상을 공격하기 더 쉽게 만든다. 인류가 비행기와 탱크 같은 '차가운 무기'의 세상에서 디지털 광신호와 생물학적 감염이 퍼져나가는 '뜨거운 무기'의 세상으로 이동했다고 단언하면 명쾌하겠지만, 사실 더 흥미진진하고 위험한 것은 차가운 시스템과 뜨거운 시스템의 생소한 결합이다. 우리의 미래에는 GPS와 TNT의 결합으로 만들어진 비유도폭탄이 훨씬 더 정확하게 제 역할을 할 것이다. DNA 같은 구성물로 이루어진 병원균들이 네트워크가 알아낸 감염이 가장 용이한 장소에 배달될 것이다.(p. 113)


 '제 7의 감각'은 초연결사회가 가진 바로 이러한 동전의 양면을 파악하는 것을 말한다. 부제가 '초연결지능'인 것은 바로 그런 연유다. '십계'로 유명한 폴란드의 영화 감독 크쥐시토프 키에슬롭스키는 동유럽의 개방 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자유와 더불어 이전에 없었던 죄악도 들어왔다. 그것은 우리에게 새로운 혼돈을 주었다. 내 영화는 바로 그 혼돈에 대한 것이다.' 네트워크 시대도 이와 같다. 개인의 역량이 확장된만큼 위험 역시 커진 것이다. 저자가 '제 7의 감각'을 생존 본능으로 보는 것도 여기에 있다.


 그런데 사실 네트워크란 것 자체도 생존과 안전의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인터넷'이란 개념이 최초로 세상에 출현한 것은 1959년으로 냉전시대 때였다. 그것을 발표한 사람은 바로 하워드 휴즈 항공사 출신의 전기 엔지니어인 폴 배런. 그 때는 아직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폭의 기억이 생생하여 특히나 미국의 경우 누구나 언제든 버튼 하나로 지구 모두가 끝장날 수 있다는 공포를 등에 짊어지고 다녔다. 최근에 나온 영화 '히든 피겨스'를 보면 바로 그런 시대의 분위기를 잘 엿볼 수 있을 것이다. 때문에 미국 외교와 국방부의 주된 관심사는 적인 소련을 정복하는 게 아니라 어떻게 하면 그 위험을 잘 피할 수 있느냐에 있었다. 스프투닉 위성과 잇다른 로켓 발사 성공으로 언제든 자기 머리 위로 수소 폭탄이 떨어질 수 있다는 가능성은 그런 위험 회피 원망에 더욱 불을 지폈다. 거기다 더욱 실제적인 문제가 있었다. 당시 미국엔 수많은 폭탄과 미사일 그리고 100만의 병력이 있었지만 실상 미사일 공격을 한 번 받으면 그걸로 응전이 영영 불가능해져 버리는 현실 때문이었다. 왜냐하면 미국 전역에 걸쳐 있는 미군 기지 간 연락망이 오직 구리선을 이용하는 전화로 이뤄졌기 때문이다. 구리선은 미사일 공격에 쉽게 끊어졌고 통신이 원활하지 않아 미국은 즉각 대응이 어려웠다. 이 난점을 극복하는 것이 바로 폴 배런에게 주어진 임무였다. 폴 배런은 미군 통신이 가진 이런 취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한 점에서 수십만 개의 점으로 믿을 수 없는 속도로 이동하는 연결망 시스템을 착안한다. 이렇게 하여 태어난 것이 바로 '인터넷'이었다. 폴 배런은 말한다.


 '어떻게 연결을 유지할 수 있을까? 나에게는 그것이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였다.' (p. 164)


 하지만 이런 생각은 미군 수뇌부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인터넷은 수직적 명령 체계가 아닌 대등한 참여로 이뤄지는 수평적 체계였고 이것은 당시 상명하달식의 통제와 복종에 익숙해진 군 수뇌부에 아주 낯선 개념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반응은 폴 배런과 같이 일하고 있던 동료 전문가들도 마찬가지였다. 미군 수뇌부와 동료 전문가들 모두 '제 7의 감각'이 부족했던 것이다. 그래서 모처럼 좋은 아이디어가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곧 사장되고 말았다. 이런 결과를 낳은 그들의 낯설음을 결코 책망할 수 없는 것은 네트워크 시대가 그들의 그러한 반응이 당연했을 정도로 아주 혁신적은 변화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카오스 이론'을 창설한 것으로 유명한 존 홀랜드는 그것을 '복합에서 복잡의 변화'라 부른다. 복합과 복잡은 다르다. 복합은 상호작용을 하는 다양한 부분으로 구성되더라도 예측에 따라 설계할 수 있으며 반복적으로 제작하여 사용할 수도 있다. 그러나 복잡은 정확한 설계대로 제작할 수 없고 구성 요소를 통제하는 것도 어렵다. 바로 이런 설계와 통제 면에서 복합과 복잡은 차이가 많이 나는데 네트워크는 이러한 '복잡계'에 속하는 것이다. 더구나 이 네트워크란 새로운 상호작용이 마구 일어나는 저수지와 같아서 늘 새로운 무언가가 만들어지는 과도적 상태에 있다. 존 홀랜드는 이를 두고 '창발'이라 칭한다. 상향식 상호작용이 전에 존재한 적이 없는 형태의 질서를 창조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완전히 달라져 버린 세계 안에서는 아무래도 새로운 감각을 갈고 닦을 수밖에 없다. 게다가 이전과 다르게 네트워크 시대는 마이크로 소프트나 애플 또는 아마존이나 페이스북 그리고 유투브에서 잘 볼 수 있듯이 선점 효과가 강력하게 작용한다. 제조업 중심의 2차 산업에서는 아무리 후발 주자라 하더라도 선발 주자가 올라간 사다리를 그들 역시 올라갈 수 있었는데(우리나라가 대표적이다.) 네트워크 시대엔 그것이 불가능한 것이다. 제 2의 아마존, 페이스북, 유투브가 잘 생겨나지 않는 이유다. 이것을 두고 저자는 '게이트 키핑'이라 부른다. 권력은 이제 얼마나 많은 연결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장소를 얼마나 빨리 찾아낼 수 있느냐로 결정된다. '제 7의 감각'은 그러한 새로운 토폴로지, 즉 지형을 만드는 게이트를 찾아내고 만드는 능력이기도 하다. 


 책은 모두 415페이지로 다소 두툼한 편이다. 모두 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1부에서는 '왜 지금 제 7의 감각이 요구되는 것인가?'에 대해 설명하고 2부에서는 '제 7의 감각'이 무엇인지 말하며 마지막 3부에서는 그 감각의 응용 같은 것으로 제 7의 감각의 저변 확대로 만들어 갈 사회의 변화를 그린다. '제 7의 감각' 뿐 아니라 갈수록 피부에 와 닿는 '네트워크'라든가 '정보화 시대'를 대체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 한 번쯤 호기심이 있었다면 이 책을 읽어보는 게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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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alia 2017-05-20 2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르메스 님 책 소개가 넘 좋아서 이 책 정말 읽고 싶어지는데요.
다음에 도서관 갈 때 『제7의 감각, 초연결지능』 함 대출해봐야겠네요.

에일로이 2017-05-21 14:03   좋아요 0 | URL
웃! qualia님 말씀 정말 감사합니다.^^ 마음에 드셨으면 저도 좋겠네요^^
 
명상 인문학 - 새벽에 홀로 깨어 나를 만나는
김승호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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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때, 명상에 관심이 있었다. 이를테면 선종의 좌선 같은 것. 달마 대사가 했다고 하는 면벽수련. 하염없이 벽만 바라보고 앉아서 내면의 세계에 칩거하는 것을 은근히 동경했다. 세계를 지우고 궁극엔 나를 지우는 그런 일들을. 그만큼 내 존재를 지워버리고 싶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 때는 그랬다. 죽음과 참 가까이 있었던 시절. 이젠 다 지나간 한 때의 이야기다. 언제 그랬나 싶게 한없이 일상인이 되어버린 나. 다름 사람들과 똑같이 정신없이 휘몰아치는 일상 속에서 몸과 마음 모두가 거기에 찌든 피로로 버겁다 보니 바라는 것은 그저 수면이나 휴식일 뿐, 명상만큼 고차원적인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그렇게 오래도록 명상이란 걸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 걸 할 만한 시간이 없기도 했고. 그래서 문득 이 책을 보았을 때 시선이 한동안 머물렀던 것 같다. 마치 어른이 되고나서 우연히 어릴 때 가장 많이 갖고 놀았던 장난감을 발견하게 된 것 마냥. '아, 그래. 예전엔 이런 것도 했었지.'하는 느낌이랄까?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지난날에 대한 애잔한 그리움까지 담아 새삼스럽게 되돌아 보게 되는 것. 김승호의 '명상 인문학'을 손에 들게 된 건 이처럼 그리움이란 원심력의 추동이었다.




 저자는 모르는 사람인데 주역 쪽으로 유명한 사람이란다. 주역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명상이란 어떤 것일까 궁금하여 더욱 이 책을 읽게 되었다. 그런데 이 책이 취하고 있는 근본 전제에 개인적으로 허들이 존재했다. 바로 영육 이원론이다. 이 책은 영혼과 육체가 완전히 별개라고 생각하고 이것을 거대 전제 삼아 명상의 의미와 가치 그리고 방법들을 설명하고 있다. 그래서 영혼의 존재도, 육체와 별개로 존재하는 영혼도 잘 수긍되지 않으면 앞으로 나아가기가 어렵다. 이렇게 만들지 않으려면 저자가 왜 영혼이 존재하고 그것도 육체와 별개의 것인지에 대해 제대로 된 근거를 들어가며 상세하게 설명해야 하는데 이조차 너무 추상적이고 원론적인 이야기만 하기에 읽다보면  '이 무슨 공상 속 객담이냐!' 하는 반응을 부를 수 있다.


 특별히 이런 부분.


 햔편, 밖으로 나온 태아의 내면에서는 또 다른 대단한 사건이 진행되고 있다. 그것은 태아의 영혼이 뇌를 향한 대장정이 시작하는 것이다.(-> 비문 같다.  '그것은 태아의 영혼이 뇌를 향해 대장정을 시작하는 것이다.'로 바꿔야 하지 않을까?) 이는 태어난 이후 자기 몸을 이루고 지배하기 위함이다. 또 한 몸 밖에서 오는 여러가지 신호를 감지하기 위함이기도 하다. 아이의 영혼은 점점 뇌로 올라간다. 호흡이 들뜨고 얕아지기 시작한다. (p. 77)


 영혼이 몸을 장악하기 위해 뇌로 올라가다니. 여기서 SF 호러 영화를 떠올리는 게 비단 나만은 아닐 것 같다. 저자는 '황제내경'을 근거로 이렇게 말하고 있는데, 여기서 '황제내경'이란 한나라 때 나온 지금으로 치면 의학책 같은 것으로 한의학의 원형이 되는 책이다. 그 '황제내경' 제2장에 나온 '혼령은 위(머리)에 잡고'에 따라 이런 설명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혼령은 어디서 나타나는 것인지(인간은 출생할 때 몸과 함께 혼령도 출산하는 것일까? 그것이 나중에 합쳐진 것이 태아란 말일까? 그렇다면 그 혼령은 어디서 만들어지는 것일까? 산모의 복중에서? 아니면 저 위 하늘 어딘가에서? 그것도 아니면 이것은 정말 상상하는 것조차 싫을 정도의 호러 같은 일이지만 속세를 유영하는 어떤 혼령이 출산되기를 기다렸다가 휙 끼어드는 것일까?) 또 바로 뒤에서 말하겠지만 저자는 영혼의 존재를 인간의 의식과 관련지어 긍정하는데, 여기에 따르자면 인간은 왜 두뇌를 가지고 태어나는지 이해하기 어렵게 된다. 영혼이 장악하기 전의 두뇌는 과연 무엇일까? 영혼이 의식의 전부라면 인간은 왜 두뇌라는, 인간 생활 에너지의 80% 가까이 쓰는 불필요한 낭비 기관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어쩌면 바로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이 '나의 몸, 나의 의식'이라는 자기 의식 일 수도 있다. 혼령이 뇌를 지배해야 비로서 나라는 주체가 태어난다는 뜻으로 말이다. 그렇다면 혼령이 지배하기 전에 감각 기관에서 오는 정보를 통합하고 해석하는 두뇌는 '나'라는 걸 모르는 것일까? '나'가 아니면 어떻게 쏟아져 들어오는 감각 기관들의 정보를 취합 분류하고 적절한 조치를 할 수 있는 것일까? 그래, 자기 의식이 없다고 하는 동물들처럼. 혼령이 있어야 비로소 인간이 된다고 하면 태아의 행위는 아무리 봐도 인간 보다는 동물에 가까우니 이 역시 성립하지 않는다. 뭐, 이런 반론들이 무한정 솓구치는데 여하튼 저자는 영혼의 존재를 다음과 같은 이유로 긍정하고 있다.


 영혼이란 무엇보다도 행위에 대한 주체로서 존재의 당위성이 인정된다. 만일 어떤 사람이 영혼이 없다고 주장한다고 하자. 그렇다면 그 역시 그것을 주장할 수밖에 없는 구조로 태어난 것뿐, 자유 선택이 아니므로 영혼'이'(책엔 '의'로 되어있는데 오타 같다.) 없다는 주장은 그의 판단이라고 할 수 없다. 영혼이 없다면 인간은 생체로봇일 뿐, 모든 판단은 자동으로 진행된다. 따라서 판단은 그의 것이 아니다. 그 주장에 따르면 '그'는 애당초 없었기 때문이다.(p. 37)


 나름 논리가 잘 서 있긴 하나 그렇다고 영혼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 이 책에서 말하는 영혼이라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는 잘 알 수 없으나(읽다보면 영혼의 범위가 고무줄처럼 늘어났다 줄어들었다 하는 것이 보인다. 어떤 때 영혼은 의식을 포함하지 않는 것처럼 써 놓았다가 또 어떤 때는 영혼이 의식 전반을 포함하는 것으로 써 놓기도 한다.) 생각하고 질문한다는 것이 꼭 영혼만의 기능은 아니지 않는가 하는 반문이 가능해 보인다. 현재 뇌과학 분야에서 지속적으로 증명되고 있는 것과 같이 인간의 의식은 오로지 두뇌 영역의 것으로, 영혼 없이도 얼마든지 성립과 활동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저자가 조금은 무리하게 보일 정도로 영육 이원론을 굳게 밀고 나가는 것은 주역 사상의 영향도 있는 것 같다. 주역에서는 이 세상을 음양의 관계로 보고 있는데 이 음양이 그 말에서 우리가 얼른 떠올리게 되는 그늘과 빛 같은 것은 아니다. 저자에 따르는 음은 물질이고 양은 물질이 아닌 것이다. 다시 말해 공간을 채우고 부피가 있는 것이 '음'이며 그런 것이 없는 게 '양'이다.


 영혼도 양이고 귀신도 양이다. 온갖 괴상한 것은 다 양이라고 생각해도 된다. 세상엔 음과 양이 있을 뿐이기 때문에 물질과 괴상한 것만 존재한다.(p. 89)


 세상의 본질을 이런 대립적인 것들의 평형 상태로 보는 것이 바로 주역이 가진 세상에 대한 근본 시선이기도 하다. 저자의 영혼에 대한 설명은 바로 이런 주역에 근거한 것이며 지금 우리 자신은 음이 되는 육체와 양이 되는 영혼이 평형을 이룬 상태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적어도 내가 보기엔 무리가 많이 가는 설명으로 내내 영혼에 대해 말해왔던 것이다.


 여기서 저자가 생각하는 명상의 의미도 밝혀지는 것 같다. 지속적으로 영혼을 상기하는 명상을 통해 평형 상태를 잘 유지시키는 것. 바로 이것이 아닐까 한다. 이것은 특히나 2부를 읽다보면 잘 느껴지는데 그 2부는 명상을 하는 방법에 대해 장소라든가 시간이라든가 자세라든가 하는 식으로 참으로 여러 가지 것들을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대부분은 내면의 침잠을 방해하는 잡념과 지극히 수동적이 되면 될수록 일어나게 마련인 육체의 반란, 즉 활동하고자 하는 본능을 어떻게 잘 다스릴 것인가에 관계되어 있다. 그래서 명상이라는 것이 무엇보다  '음'인 육체에서 솟구치는 본능과의 싸움이라는 것을 느끼게 한다. 마치 접시 돌리기와도 같이, 접시가 계속 잘 돌아갈 수 있도록 적절하게 균형을 유지하도록 만드는 것이 바로  명상인 것이다. 본능이 힘을 얻으면 동물적인 욕구가 생기고 번뇌가 뒤따른다. 끝내 평형이 깨어지고 비틀거리다 바닥으로 떨어져 처참하게 부서진다. 그런 것을 막기 위해, 나를 나로서 잘 지속하기 위해 저자는 명상을 가져온다. 이는 명상의 목표를 주역의 원리로 설명하는 제 4부에서 확연하게 드러난다. 바로 여기서 주역의 원리에 기대어 명상의 목표로 내세우는 것이 '부동심'인 것이다.


 부동심은 주역의 괘상으로는 천산돈에 해당되는데, 이는 산이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형상이다. 이때 산이 하늘을 따라 요동하는가? 산은 그저 산일 뿐, 하늘의 일에 미동도 하지 않는다. 여기서 하늘이란 세상 또는 세상만사인데 그에 대해 산처럼 부동의 자세로 견지하라는 가르침이 함축되어 있는 것이다.(p. 253)


 이렇게 흔들리지 않는 것. 좌고우면 하지 않는 것. 일희일비 하지 않는 것이 바로 '부동심'이다. 여간해서는 흔들리지 않는 완벽한 균형 상태. 명상은 바로 이런 것을 가져오려는 시간이다. 내면의 침잠을 통한 지속적인 영혼의 환기로써. 그래서 저자가 말하는 영혼의 존재도, 영육 이원론도 결코 동의하지 않으면서도 이 부분은 나름 긍정할만한 게 있다고 생각하여 어쩌면 당신을 아주 지루하게 했을 지도 모를 이 리뷰를 썼다. 통신의 발달로 어디로든 쉽게 연결될 수 있기에 그만큼 더 쏟아져 들어오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폭풍우 치는 바다 위 일엽편주처럼 이런 저런 말들에 쉽게 흔들리고 상처 받는 게 요즘의 시대이기에 더욱 필요한 태도가 아닐까 생각해서 말이다. 가짜 뉴스가 판을 치고 여기저기서 조작과 선동의 언어가 난무하는 때엔 더더군다나. 


 갑자기 삶을 이야기 하다 불쑥 정치 이야기를 해서 문맥이 좀 난감하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새 대통령이, 그것도 비로소 대통령이라고 인정할만한 대통령이 막 통치를 시작한 시점에 지지자들이 이런 마음이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개인적 바람이 지나치게 앞서는 바람에 그만 이렇게 되고 말았다. 이왕 엇나간 김에 내처 계속해 보자면, 나는 말 보다는 그 사람이 살아온 이력을 본다. 거기 매 순간마다 드러난 됨됨이를. 내 신뢰의 근거는 바로 그것이다. 높은 하늘에서 바라보면 빌딩이나 들판이나 다 평지일 뿐이고, 깊은 해구로 들어가면 순수한 농도의 어둠 밖에 없듯이 보다 높이 그리고 깊이 헤아리면 치장과 현혹의 언어들은 다 걸러지고 본질만 남는 법이다. 그 본질에 무엇이 있는가? 바로 그것이 믿음의 절대 근거가 된다. 적어도 내겐 그렇다. 때문에 그에게 있어서는 부동심이 된다.


 명상도 아마 그런 노력일 것이다. 높은 곳에서 바라보고, 깊이 내려가 헤아리는 것. 흔들리지 않는 것은 궁극의 자유이기도 하다. 세상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넘나들기 때문이다. 지금 내 글처럼. 삶에서 정치로, 정치에서 삶으로 막 넘나들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전혀 이상하지 않다. 삶이 정치와 다르겠는가? 삶과 정치는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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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7-05-11 16: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깊이 헤아리면 치장과 현혹의 언어들은 다 걸러지고 본질만 남는 법이다.

이 구절에서 한참을 머물다가 갑니다.

언젠가 ‘새벽에 읽는 주역인문학‘을 읽으면서,
님이 말씀하신것과 같은 그 부분이 혼란스러워,
제대로 된 리뷰를 올리지 못했었습니다.
걸래내고 남은 본질이 자꾸 바뀌는 느낌이랄까요.
6권짜리 주역원론이라는 책도 구입했는데, 들춰보지도 못했구요~--;

님의 리뷰를 보니, 깨닫게 되는 부분이 있어 감사인사 남깁니다, 꾸벅~(__)
..

에일로이 2017-05-13 11:34   좋아요 0 | URL
앗, 양철나무꾼님도 주역을 공부하시는군요. 저도 영혼에 대한 부분에선 꽤 난감해서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혼란스럽더군요. 주역의 근본이 음양이니 그런 시각에서 나온 것으로 간신히 납득했습니다만.^^;
그리고 말씀 너무 감사합니다. 저도 주역에 관심이 생겨 공부하려는 참인데, 좋은 책 있으면 소개 좀 시켜주세요^^
 
냇물아 흘러흘러 어디로 가니 - 신영복 유고 만남, 신영복의 말과 글
신영복 지음 / 돌베개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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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때로 어떤 이름은 삶의 어느 때와 단단히 결박될 때가 있다. 신영복이라는 이름이 그렇다. 그 이름은 내 20대와 떼어낼 수 없다. 그의 책을 처음 읽었고 더불어 벗하면서 사람과 사회를 제대로 바라보는 눈과 가슴으로 이해하는 법을 배웠다. 타인의 눈엔 어떻게 보일지 몰라도 나로서는 결코 순탄하지 않았던 혼돈과 불안의 나날들을 그래도 자맥질을 하며 겨우 헤쳐나올 수 있었던 것은 신영복이라는 구명조끼 덕분이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랬던 그는 이제 여기에 없다. 그것도 예전 인기를 끌었던 가요의 제목처럼 벌써 1년이다. 1주기를 맞이하여 유고집이 나왔다. 그가 살아 생전 신문과 잡지에 발표한 글 중 미처 책으로 엮이지 못한 글들이 여기에 실려있다. 얼레에 무수히 감긴 실처럼 그의 책에 절로 내 질긴 그리움이 거듭 칭칭 감기는 것을 어찌할 수 없다. 그렇게 단단하게 얽히고 뭉친 그리움으로 육신 없는 혼의 언어를 소중히 받아든다.



 표지에 눈이 오래 머문다. 저자가 직접 쓴 글자들이 모여 있는 품새를 보고 있노라면 어느덧 지난 겨울 광화문 광장에 있던 내가 떠오른다. 이 글자들의 운집이 그 밤, 나 역시 일원이 되어 내부에서 목을 빼들고 바라봤던 촛불의 행렬과 꽤 닮아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냇물아 흘러 흘러’라는 노랫말 때문에 더욱 그랬는지도 모른다. 그 때 바라봤던 촛불의 행진은 문자 그대로 함께 더불어 흘러가는 강물로 보였으니까. 어둠의 압제에 굴하지 않고 저마다 작은 빛이라도 되어서 정의가 바로 서고 위계에 상관없이 공정하며 아프고 약한 자의 마음을 먼저 돌볼 줄 아는 데다 사람이 오로지 사람이기에 존중받는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길을 밝히겠다는 의지로 묵묵히 흐르고 있는 빛의 강은 그야말로 ‘나무가 나무에게 말했습니다. 우리 더불어 숲이 되어 지키자’란 그의 말을 절로 떠올리게 했다. 힘겨운 겨울이었다. 그 겨울, 밤바람을 맞으며 광장에 서 있었던 것은 겨울 한파보다 더 시리고 매서운 현실의 칼바람에서 이제는 벗어나고 싶다는 절박함 때문이었다. 모두가 너나없이 밤을 낮처럼 밝히는 하나의 숲이 되었던 덕분에 다행히 희망을 만들고 지켜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 끝난 게 아니다. 이제 막 하나의 고비를 넘겼을 뿐이다. 난파 중인 배에 고리를 걸어 그저 침몰을 막은 것에 불과하다. 이제 이 배를 어떻게 수리하고 어느 곳으로 몰고갈지 생각해야 한다. 겨우 결실을 맺기 시작한 희망의 과일이 다시 파과(破果)가 되는 걸 막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그 책무를 다른 누군가에게 맡기지 말고 자신의 것으로 여겨 대안을 구축하고 실현하는 주체로서 참여해야 한다. 그렇기에 나는 이 책이 더욱 운명처럼 우리 앞에 도래했다고 여겨진다. 읽어 보니 결코 과거의 것이 아닌 바로 지금 여기에서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대답들이 글마다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이 책에 있는 글들이 20대에서 70대까지 거의 전 생애에 걸쳐서 발표한 것들이긴 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마다 변치않고 일관되게 흐르는 것이 존재한다. 바위처럼 굳건하고 한결같기에 그의 신념 혹은 근본 철학이라고 불러도 무방한 것이 말이다. 바로 '관계 중심'이다. 나는 이것이 중심이라고 본다. 그렇지 않아도 그는 1998년에 '존재론으로부터 관계론으로'라는 논문을 발표했다고 하던가. 적어도 내겐 이것이 핵심으로 보인다. 그는 근대까지의 서양 철학이 내내 개별적 존재에게 중점을 두고 있었다고 말한다. 덕분에 개별 존재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경쟁과 충돌이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졌고 그로 인해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마저 억압과 저항이 기저를 이루게 되었다는 것이다. 실은 예전의 그 역시 이런 시각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잘 알려진 대로 그는 1968년, 통일혁명당 사건에 연루되어 무기징역을 선고 받아 감옥에 갇혔다. 보통 사람으로서는 얼른 상상하기 어려운, 무려 20년이라는 긴 수감 생활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하지만 그는 절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이 늘 함께하고자 했던 민중의 밑바닥 현실로 들어갈 수 있어서 자신의 신념을 관철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기회로 기쁘게 받아들였다. 그는 민중이 주인 되는 세상을 만드는 자신의 꿈에 있어서 바깥과 감옥이 구분되지 않는다고 생각했고 그 꿈을 감옥에서 구현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곧 씁쓸한 패배감을 맛보았다. 사람들이 자신의 말에 귀 기울이기 보다는 오히려 자신을 무시하고 냉대했던 것이다. 누구보다 많이 배웠고 이론의 갑주로 무장하고 있었지만 가진 것도 없고 기댈 데도 없이 오로지 혼자의 몸으로 삶을 견뎌내야 하는 이들 앞에서는 무력할 뿐이었다. 그의 언어가 그들의 현실과 유리된 공허한 관념에 지나지 않았기에 제아무리 논리 정연하고 화려한 언변으로 포장되어 있어도 신뢰를 줄 수 없었던 것이다. 그 경험이 그에게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를 가져왔다. 시야의 지축이 흔들린 것이다. 그 때까지 그는 자기 앞의 사람을 자신이 이끌고 갈, 그만큼 그 사람에겐 자신만의 생각이나 삶의 경험이 없는 존재로 보고 있었다. 그 사람이 가진 삶이라는 거대한 맥락은 괄호쳐 버리고 눈 앞에 보이는 모습만 전부라고 여겼던 것이다. 그러나 감옥 생활을 통해, 통렬한 절망 뒤에 찾아온 혜안의 시야 속에서 그는 모든 이가 자신만큼 육중하면서도 광대한 삶의 결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눈 앞의 존재란 그저 빙산의 일각이며, 한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 사람에 체화된 모든 삶의 내막을 다 껴안을 수 있어야 가능하다는 것도. 


 나의 존재라는 것이 과연 나의 개별적 존재로서 완성되는 것인가. 나는 수많은 사람들의 기억과 그 사람들의 걱정과 어떤 배려 속에 내가 여기저기 흩어져서 존재하는 것은 아닌지, 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 내가 있는 건 아닌지, 그런 생각을 가지게 되었어요. ‘관계는 존재’라는 말도 생각났어요.(p. 50~51)


 바로 존재론에 빠진 서양의 시각이 그것을 무시한 채로 개인의 껍데기만 보고 있었고 그것의 한계란 그대로 그것만 공부한 그의 한계가 되었다. 그런 서양의 시각은 무엇을 낳았던가? 타인을 단순한 존재로 치부한 것은 부메랑이 되어 돌아와 자신마저 남들에게 그렇게 여기도록 만들었다. 결국 개인은 내재된 가치에 상관없이 오로지 겉모습을 이루는 조건에 따라 쉽게 계량화 되었고 무엇과 교환될 수 있는지에 따라서만 자신의 가치를 평가받게 되었다. 교환가치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진정한 관계는 이뤄질 수 없다. 진정한 관계는 공존과 조화가 생명인데, 교환가치는 경쟁과 우열로 변질시키기 때문이다. 갈수록 인간관계가 황폐화되고 와해되는 것(p. 47)은 그 때문이었다.


 사람의 얼굴이 담겨 있지 않은 우리의 머리와, 사람과의 관계가 사라져 버린 우리들의 삶 속에 사람 대신 무엇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들어앉아있는지... 참으로 섬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p. 183)


 그는 그런 시야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 사람을 교환가치가 아니라 그만이 가진 고유하고 온전한 가치로 봐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 저마다 가진 삶의 결을 그의 처지에서 깊이 헤아릴 수 있는 '관계 중심'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의 관계론은 바로 이런 과정을 거쳐 나온 것이었고, 지식이 아니라 뼈져린 삶의 경험이 바탕된 것이었기에 한층 더 강한 설득력을 지니고 있었다. 이처럼 그의 삶 전체에 있어서 모음(母音)이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의 진정한 배움을 감옥 생활이 가져다 주었기에 그는 감옥 생활을 사람들에게 '대학 시절'로 소개한다.


 내가 이것을 모음(母音)이라고 말한 것은 그냥 하는 표현이 아니다. 바로 여기서 그의 모든 신념과 작업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것을 책 '냇물아 흘러흘러 어디로 가니' 전체에 걸쳐 확인하게 될 것이다. 그가 석방 이후에 동양철학 연구에 더 심혈을 기울인 것이나 그를 더욱 유명하게 만든 붓글씨가 그랬듯이 말이다. 모두 근본엔 '관계 중심'이 있었다. 개별적 사물이 가지고 있는 속성 보다 그것이 맺는 관계를 통해 발현되는 새로운 성격을 우위에 두고 있기에 동양 철학에 관심을 가졌으며 붓글씨 또한 그것의 높은 경지는 파격을 통한 균형 잡기에 있고 그것은 관계론적 사고가 없으면 성취되기 어려운 미학인지라 한층 더 수양에 힘을 쓰게 된 것이었다. 


 결과가 아니라 거기에 이르기까지의 전 과정을 중시하기 위하여 고속 도로보다 완만한 속도 속에 풍경을 음미하여 그 안에 있는 자신을 조망할 수 있는 길을 선호하는 것도 이와 관련 있었다. 결과 중시는 얼마나 잘 그리고 빨리 이루느냐가 중요하기에 성장과 속도에만 집중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도로의 문화다. 하지만 그것엔 모든 것을 수단으로 전락시킬 위험마저 내포되어 있다. 바로 그 위험이 지금 현실에서 어떻게 실현되고 있는지 우리는 똑똑히 보고 있다. 아주 최근의 일이다. 삼성 중공업의 거제 조선소에서 크레인이 전복하여 7명이나 되는 노동자가 사망했다. 그것도 노동자들이 쉬어야 할 '노동절'에 말이다. 성정과 속도에만 치중한 나머지 당연히 해야 할 안전상의 조치들을 이행하지 않은 결과였다. 희생당한 그들이 기업으로써는 손쉽게 쓰고 버릴 수 있는 하청 업체 비정규직 노동자들이었기에 더욱 소홀했는지도 모른다. 사람이 수단이 되면 어떤 비극이 찾아오는지 잘 보여주는 사례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 역시 세월호 참사를 비롯하여 지금까지 허다하게 일어났던 사례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더욱 우리를 아프게 만든다. 언제까지 이렇게 어이없이 삶을 희생당하는 이들이 생겨나야 할까? 결과가 아니라 과정을 중시했다면, 그 어떤 이도 수단이 아니라 고유한 목적으로 대했다면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다. 성장과 속도의 혜택마저 모두에게 돌아가는 게 아니라 오로지 소수의 주머니만 채운다는 사실을 신자유주의 10년을 거쳐 맨 가슴으로 쏟아진 냉수처럼 선명하게 경험한 지금, '자본 논리에 맞서 인간 논리를 지키는 길이 '도로의 문화' 대신 '길의 문화', '길의 정서'를 키워야'(p. 70) 한다는 그의 말에 더욱 귀를 기울이게 되는 것은 비단 나만은 아니리라.


 이는 그대로 역사를 바라보는 시선에도 해당된다. 그렇지 않아도 역사 교과서 국정화 사태로 인해 역사를 올바로 세우지 못하면 권력을 가진 자들에 의해서 얼마나 쉽게 그리고 처참하게 왜곡될 수 있는지 명확하게 알게 된 요즘이 아니던가? 이처럼 역사가 쉽게 오염되는 근본에는 역사가 그저 과거의 사실로 국한되어 그만큼 쉽게 규정 가능하다는 생각이 깔려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존재론적으로 개인을 바라보는 시야가 그대로 역사에도 투영되고 있기에 일어나는 일이라고 말이다. 이런 무분별한 변질을 막기 위해서라도 역사 역시 관계론적으로 생각하는 태도가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드러난 하나의 사실로 판단하기 보다는 그것을 하나의 흐름이 표출한 것으로 보고 거기까지 진행되었던 당대의 다양한 움직임과 깊은 내막을 당대의 처지와 한계를 고려하면서 두루 헤아려 보려는 노력이 말이다.


역사의 보편적 발전 구도는 오랜 불균형 상태와 일시적인 균형 상태의 교직이다. 이것이 사회 변화를 대상으로 파악하지 않고 과정으로 파악하는 근거이다. 따라서 발전과 진보의 개념은 과정의 총체로서 이해되는 것이다. 더구나 선취된 이상적 모델로부터 실천을 받아 오는 과정도 아니다.(p. 243)


 이는 특히 진보의 관점으로 역사를 바라보는 이들에게 꽤 둔중한 경고가 될 것 같다. 출근길의 지하철처럼 종착지만 생각하면 도중의 역들은 그저 시간을 지체시키는 장애물에 지나지 않는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미래의 모습만 고집하는 이들에게 현재란 바로 그와 같을 것이다. 자신이 정한 미래의 규격에만 맞추다 보면 현재란 늘 모자라고 부족하게 보이기 마련. 그래서 현재가 가진 장점과 긍정적인 가능성 또한 쉽게 무시해 버리는 어리석음을 자주 범한다. 흔히들 보수는 쉽게 뭉치고 진보는 쉽게 분열한다는 말을 하곤 한다. 최근 대선에서 우리가 목도하는 상황이기도 하다. 진보가 자주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 역시 신영복 선생의 말대로 자신이 선취하려는 이상적 모델을 현실과 상대에게 강요하고 있는 탓은 아닐까? 그러기 보다는 영국의 철학자 라이프니츠가 말했던 대로 현재가 지금까지의 과정이 총체로 나타난 최선의 결과라 생각하고(이것은 현실의 한계를 온전히 긍정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변혁 주체의 역량이 부족해서라거나, 대중이 덜 계몽된 탓을 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을 어떻게 좀 더 나은 쪽으로 진전시킬 것인가에 보다 초점을 맞추었다면 대화와 협력으로 나아가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드는 것을 어찌할 수 없다.


 이와 같이 이 책엔 오늘날 당면하고 문제들과 관련하여 새겨 듣고 사색할만 말들이 참 많다. 더구나 이 말들은 한 순간 표출된 것들이 아니라 전 생애에 걸쳐 줄기차게 그의 내면에서 영글어 왔으며 선생의 삶을 통해 구체적으로 실현되기까지 했기에 더욱 설득력을 얻고 신뢰를 가지게 된다. 그렇게 삶 자체를 통해 온전하게 구현된 '관계 중심'은 결국 나와 그의 삶이 결코 다르지 않다는 자각과 그래서 함께 이 구차한 삶을 조금이라도 낫게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정언 명령으로 향해 있다. '한 사람의 정체성이란 그 일생에 담겨 있는 시대의 양'이라는 말이나 '자기의 삶 속에 파편처럼 박혀 있는 분단의 상처'나 '개인의 팔자 속에 깊숙이 들어와 있는 민족의 팔자'(p. 192)라는 말에서 그것은 대표적으로 드러난다. 한 개인을 단면이 아닌 폭과 깊이를 지닌 입체로서의 인식하는 일은 이렇게 별개의 개인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 삶의 어렵고 힘든 문제를 풀어가야 하는 공동 운명체로서의 인식으로 이어지고 시대의 부조리와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전선도, 부당하게 고통 받고 있는 병실의 구분도 없게 만든다.


 좋은 음식을 받을 때 당신의 ‘밥’이 생각납니다. 따뜻한 겨울 난로를 만날 때 당신의 ‘방’이 생각납니다. 만원 버스 속에서 여자들과 몸 부대낄 때 나는 당신의 ‘밤’을 생각합니다. 도시의 거리와 거리에 넘치는 인파, 그 흔한 보행의 자유 속에서 나는 당신의 묶인 ‘발’을 생각합니다. 당신을 전선에 두고 혼자 고향으로 돌아와서 미안합니다. 당신을 병실에 남겨 두고 혼자 퇴원하여 죄송합니다. 그러나 그곳만이 전선이 아니며 그곳만이 병실이 아니라던 당신의 말이 맞습니다. (p. 257)


 나는 그의 이 고백이 그가 지향하는 '관계 중심'을 가장 잘 나타내는 말이라고 생각된다. 지금 내가 그 어떤 높은 지위와 좋은 상황에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오로지 나로 인해서가 아니라 여기엔 내가 속하거나 어쩌면 내가 전혀 모를 수도 있는 다양한 삶의 주체와 맥락들이 연결되어 형성된 것이라는 깨달음과 설령 내가 가장 환한 곳에 있다 하더라도 그 순간 기꺼이 가장 어둔 곳에서 외롭고 아픈 이들을 떠올릴 수 있어야 하는 마음. 이것이야 말로 초혼처럼 찾아온 그가 내게 전하고 싶은 밀알의 언어라고 믿는다. 더하여 광화문의 겨울밤을 밝혔던 빛의 강이 다음으로 나아갈 바다의 모습이라고 말이다. 


 나로 국한하자면, 그는 관계와 과정 중에서 끊임없이 재구성될 내가 얼레가 되길 바란다고 할 수 있다. 나만 고집하지 않고 계속 타인들과 삶이 가진 다양한 측면들을 나처럼 여기며 감아갈 수 있도록. 그것도 무한정.


 냇물의 생명은 흐르는데 있다. 설사 바다에 다다른다고 해도 냇물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신영복 선생이 일흔이 넘어서까지 과거의 자신을 고집하지 않고 계속 재구성 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듯이 말이다. 유고를 먹먹한 그리움과 함께 읽고 난 지금, 나도 그 꿈을 꾸어본다. 감는 것을 소중히 여기며 그것에 기쁨을 느끼는 얼레의 나를. 결코 멈추지 않고 언제나 유동하며 잘 섞이는 냇물의 나를. '떨리는 지남철'과도 같이.


 북극을 가리키는 지남철은 무엇이 두려운지 항상 그 바늘 끝을 떨고 있다. 여윈 바늘 끝이 떨고 있는 한 그 지남철은 자기에게 지니어진 사명을 완수하려는 의사를 잊지 않고 있음이 분명하며, 바늘이 가리키는 방향을 믿어도 좋다. 만약 그 바늘 끝이 불안스러워 보이는 전율을 멈추고 어느 한쪽에 고정될 때 우리는 그것을 버려야 한다. 이미 지남철이 아니기 때문이다.(p. 248)


 그렇게 오늘의 내가 아니라 달리 변화될 내일의 나를 더 기대하는 나를. 죽순의 짧은 마디에서 나오는 강고한 힘이 대나무의 곧고 큰 키를 지탱하는 힘이 된다(p. 204)고 했던가. 이 순간 가지게 된 소망을 이루기 위해 지금부터라도 그런 힘을 가진 마디를 차근차근 만들어가려 한다. 죽순의 마디가 그 힘을 뿌리에게서 배우듯이 오늘 내가 처한 현실을 힘들고 어려울수록 더욱 치열하게 껴안겠다고 마음 먹어 본다. 외면도 않고 순응도 없이 보다 많이 품고 깊이 헤아리려 하며 변화를 위해 노력할 것이다. 그 때까지 선생의 말은 내게 내내 '꽃세움 바람'이 되어주리라.


 봄바람은 가지를 흔들어 뿌리를 깨우는 바람입니다. 긴 겨울잠으로부터 뿌리를 깨워서 물을 길어 올리게 하는 바람입니다. 무성한 잎새와 아름다운 꽃을 피우게 하기 위한 바람입니다. 꽃을 시샘하는 바람이 아니라 꽃을 세우기 위한 ‘꽃세움 바람’ 입니다.(p. 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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