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음식문화박물지
황교익 지음 / 따비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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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리하기를 좋아한다. 재료를 섞어 양념으로 조율하여 하나의 음식으로 완성하는 재미에 빠진 지는 제법 되는데 아직도 음식이라는 것에 대한 어떤 명확한 생각 같은 것은 없었다. 그저 만드는 것이 즐거웠고 맛보는 것이 재밌었을 뿐. 그렇게 내게 음식이란 만들고 맛보는 것 이상의 의미는 없었다. 그래서 황교익의 '한국음식박물지'를 손에 든 것도 별다른 생각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그저 우리나라 음식에는 어떤 것들이 있나 알고 싶었을 뿐. 하지만 읽고나서 그동안 너무나 단편적으로 음식을 바라보던 것에 반성하게 되었다. 사실 요네하라 마리의 '팬티 인문학'을 읽었을 때 부터 우리의 일상에 속한 모든 것들이 보이는 것과는 다르게 저마다 다양한 역사와 풍부한 이야기들을 간직한 존재들임을 인식했었지만 어느새 잊고 있어나 보다. '한국음식박물관'의 느낌은 정확히 '팬티인문학'과 같았다. 아무렇게나 주문하고 편하게 먹곤 하는 음식에도 마리가 말했던 팬티 이야기 그대로 그토록 깊은 역사와 저마다의 정치적 계산들이 뒤얽힌 다양한 이야기가 깃들어 있었던 것이다.

 

   이 책의 제목에서 특히나 주목해야 할 것은 '박물지'라는 점이다. 그렇게 이 책에는 음식만 나오지 않으며 그에 딸린 도구와 짓는 공간 그리고 거기에 들어가는 재료와 양념까지 한 마디로 음식을 둘러싼 모든 것이 나온다. 우리가 편하게 드는 숟가락 그리고 젓가락에게 조차 두 페이지의 글이 할애될 만큼 그 깃들인 이야기가 단촐하지 않음을 일깨워준 책이 이 책 말고 또 있었는지 모르겠다. 밥그릇은 또한 어떠한가? '공기'란 말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에서 부터 시작해 지금 식당에서 흔히 쓰는 스테인레스 밥그릇이 어떻게 해서 생겨났고 쇳내가 나서 한국인들이 싫어했음에도 불구하고 어쩌다가 주류가 되어 이제는 밥그릇의 상징으로까지 되었는지 다 단번에 토해내고 있다. 이렇게 일상에서 아무렇지 않게 대하는 도구에서 조차 그 모든 것에 역사가 있고 삶의 애환이 담긴 이야기가 있으며 그것을 둘러싸고 벌어지고 있는 정치적 행위들이 있음을 생각한다면 다음 부터는 식탁 위에 무심히 놓여진 숟가락, 젓가락들이 완전히 달라져 보일 것 같다. 어쩌면 손에 그것을 쥐고 몇 번이나 그 감촉을 되새겨볼 지도 모르겠다. 이 책은 그렇다. '한국음식박물지'는 날 둘러싼 모든 익숙한 것들을 전혀 새롭게 바라보도록 한다. 내가 늘 먹는 음식 늘 사용하는 도구 좋아하는 재료들이 그저 반복된 일상 속에서 있는 그대로 변함없는 존재들이 아니라 그들도 나이를 먹고 세월 속에 변해가며 스스로의 역사와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존재임을 깨닫게 한다. 그들도 늘 있는 그 자리에서 나와 같이 함께 이 시대를 호흡하고 있는 존재임을 느끼게 한다.

 

 

   우리는 일상에서 늘 대하곤 하는 것들에게 하나의 착각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그것들이 하나의 얇은 단면만을 가지는 존재라는 착각말이다. 물론 그러한 우리의 생각은 틀렸다. 일상에서 마주치는 모든 것들은 평면이 아니라 켜켜이 역사가 쌓이고 이야기가 중첩된 비록 보이지는 않더라도 높다란 길이를 가진 '지층'인 것이다. '한국음식박물지'는 바로 그러한 이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그 지층을 바라보게 한다. 그 층층히 퇴적된 지층 어딘가에 깃들인 역사와 이야기들을 살펴보게 한다. 그래서 어느 순간 우리의 일상이 놀랍도록 풍성한 역사와 이야기를 간직한 것들로 둘러싸여 있음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박물지'는 말하자면 그 깃들인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다. 하지만 그에 깃들인 이야기가 그저 편한 것만은 아니다. 거기엔 원하지 않았는데도 이편 저편으로 갈라질 수 밖에 없었던 음식들의 서글픔이 있다. 음식들이 그렇게 된 데에는 물론 사람들 탓이 크다. 음식을 두고 사람들이 정치적으로 행하기 때문이다. 황교익은 책에서 정치를 이렇게 정의한다. 정치는 먹는 것을 나누는 행위라고. 그래서 음식에 깃들인 이야기 역시 더더욱 정치적이 될 수 밖에 없나보다. 사람이 모여 이루는 사회 자체가 윗 편과 아래 편으로 나뉘어지는 이상은. 사람이 계층을 나눠 편을 가르니 음식 역시 편을 나뉘게 되었다. 황교익은 상층의 음식이 있고 서민의 음식이 있다고 말한다. 상층의 음식은 서민이 감히 음식으로 신분상승 하지 못하도록 더없이 고급화되고 사치스러워지고 서민의 음식은 음식으로나마 대리적으로 신분 상승하려는 서민의 욕망으로 인해 그 이름을 상층의 음식으로 부터 차용하고 모양만이라도 닮도록 꾸민다고. 모든 것이 정치적이다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도 있지만 음식마저 이렇게 우리들의 욕망을 위해 나위어져야 한다니 어째 좀 서글프기도 하다. 하지만 황교익은 그 많은 음식에 깃들인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오히려 '음식이 정치적이다'라는 사실을 직시하도록 한다. 일상의 풍성함에 경이로움을 느끼기 이전에 그것을 두고 벌어지는 계급 갈등을 먼저 보라는 것이다. 왜? 음식은 그저 먹기 위한 대상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만드는 사람의 노동 또한 들어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음식을 만들어내는 일이 바로 사람의 일이기 때문이다. 음식의 가격을 억지로 낮추면 거기 들어가는 사람의 노동력의 대가 또한 턱없이 낮아진다. 수입산을 쓰면 된다고 2차 산업의 호황을 위해 1차 산업을 포기하는 식으로 무역 협정을 타결하면 먹거리의 수급이야 문제 없을지 몰라도 우리의 음식을 가꾸고 만드는 농부들, 어부들은 아예 살 길을 잃는다. 그렇게 하나의 음식에는 사람의 피와 땀 그리고 목숨줄 마저 달려있음을 그는 보라고 한다. 아예 음식이 그렇게 정치적이었다면 이제 이 모든 것이 매어달린 음식을 더더욱 정치적으로 다루어야 하지 않겠냐고.

 

 

   말하자면 황교익은 음식에 깃들인 이야기를 통해 종적으로 길어진 음식의 지층들을 그에 매달린 정치적인 이야기들을 밝혀 이제는 개인이 아닌 집단의 차원으로 나아가 횡적으로 늘리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그동안 음식을 너무 개인적으로만 대해왔다. '나만의 먹을 것' '우리 가족의 먹을 것'만을 위해 먹거리들을 대해왔다. 그리고 그랬기에 음식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노고가 애환이 그리고 삶 자체가 달려있는지 보지 못했다. 황교익의 너른 마당처럼 펼쳐보이는 횡적인 음식 이야기는 이제 우리의 시야가 넓어져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의 귀가 거기에 깃든 그들의 호흡과 한숨과 애끓는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솔직히 실로 깨달음이 컸다. 그리고 그동안 음식을 오로지 개인적인 식견으로만 바라보던 나 자신을 반성했다. 아담 스미스의 역설이 음식에도 통하는 지 당장 없으면 굶어죽게 될 소중한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동안 음식의 존재를 너무 무심히 대해온 것 같다. 그래서 이렇게 FTA가 통과되어 음식의 주권마저 위태롭게 될 상황에 처했는데도 위기 의식이 잘 일어나지 않는 것 같다. 황교익이 거듭 다짐두었던 대로 음식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의 산물이며 그 너머에 거기에 깃들고 매달린 사람들이 존재한다. 그렇게 우리는 그저 음식의 문제를 다룬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그것은 음식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의 문제였다. 이제 더이상은 음식 위에 드리워진 그들의 잔영을 보지 못하는 일은 없을 것 같다. 그 하나 하나를 기르고 베고 찧고 옮기고 삶거너 쪄낸 배여든 손길 하나 하나를 느끼지 못하는 일은 없을 것 같다. 그리고 이제 음식 앞에 서게 되면 먼저 귀 기울일 것이다. 그들이 내게 들려주려고 담아둔 그 오래된 이야기들에... 그렇게 사람을 기억하고 우리가 서로 이어져 있음을 기억할 것이다. 이 모든 것에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들의 입이 아니라 거기에 깃들인 사람들의 삶임을 떠올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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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1-12-21 1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르메스님은 제 지름신 맞네요... ^^

주위에서 항상 보는 물건에 대해서 `역사가 켜켜이 쌓였다`는 말씀이 와닿아요.
우리는 얼마나 쉽게 잊어버리는지 모르겠어요. 그리고
음식이 정치적이라는 말씀은 서글퍼요. 너무나 정녕 그렇구나 싶어서 더욱 그래요.
FTA 통과 이후, 제가 매주 받아먹는 농촌공동체 언니들이 더 생각난답니다.
선물이라도 보내드려야 하는데, 하면서 차일피일 미루는... ㅠㅠ

헤르메스님, 즐거운 연말되셔요.

에일로이 2011-12-25 20:48   좋아요 0 | URL
마녀고양이님도 화이트 크리스마스 잘 보내셨나요?
저도 음식에 대해 정치적이라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었는데 이 책을 읽고 거기에 눈을 뜨게 된 것 같아요. 앞으로는 어떤 것을 대하든 거기에 깃든 손들과 삶을 마음에 먼저 담아두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마녀고양이님도 얼마 남지 않은 연말 잘 정리하시고 행복하게 보내세요^ ^
 
팝콘을 먹는 동안 일어나는 일 - 영화와 광고로 본 문화의 두 얼굴
김선희 지음, 송진욱 그림 / 풀빛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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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와 광고...

 

  시각이 특히나 패권적 감각이 된 현대에 와서 이 두 매체는 점점 더 지배적 위치를 점유하게 되었다. 오래도록 대중적 호응을 받았던 영화와 자본주의의 총아라 불리는 광고인지라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이 두 매체에 대해 의심의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니까 영화와 광고가 단지 보여지는 부분만이 아니라 그 저변에서 사람들의 무의식에 작용하여 그들의 욕망을 의도하는 쪽으로 충동질하고 또한 원하는 쪽으로 생각들을 통제한다고 말이다. 보통 이러한 시각들을 문화연구 분야에서는 이데올로기적 시각이라고 부른다. 그러니까 여기엔 한 가지 전제가 있는 셈이다. 영화와 광고가 더이상 가치중립적이지 않다는.

 

  영화와 광고를 비롯하여 문화가 더이상 가치중립적이지 않다는 생각도 이미 오래전 부터 있어왔다. 정확히는 스튜어트 홀에 의해 주도된 '문화 연구'가 활발하게 됨으로써였다. '문화 연구'는 문화가 있는 그대로 투명한 존재가 아니라 생산에 있어서 부터 그 이면에 만든자의 의도와 목적이 개입되는 수단적 매커니즘이라 말한다. 그러니까 문화란 어디까지나 특정한 의도에 따라 특정한 효과를 노려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비관적으로 나아가면 문화란 통제된 대중을 생산하여 특정 체제의 사회가 지속되는 결과까지 초래한다는 것이다. 특히 존 버거의 경우 'WAYS OF SEEING'을 통해 아무 특별할 것도 없는 평범한 광고 사진에서 조차 에어브러쉬 기법을 이용하여 사람들의 욕망을 충동질하고 특정한 생각들을 옹호하게끔 만드는 메세지가 감춰져 있음을 밝힌 바 있다. 이런 존 버거의 고발은 컬트 감독 존 카펜터에게도 영향을 주어 그 역시 영화 'THEY LIVE'에서 존 버거의 논의 그대로 사회에서 생산되는 모든 미디어에 의도적으로 숨겨진 메세지가 있음을 SF적(그러니까 특별한 선글래스를 쓰면 감춰진 메세지가 보인다는 식으로)으로 형상화한 바 있다.

 

 하지만 문화연구의 시각들이 비단 비관적인 전망만을 생산하려는 것은 아니고 그들이 논의를 통해 더욱 사람들에게 주지시키려 했던 것은 문화를 바라봄에 있어서 되도록 주체적이고 비판적인 시각을 유지함으로써 문화를 생산하는 자들의 논리에 어리석게 이용되지 않게끔 하려 함이었다. 지금 유행하는 언어로 말하면 문화 생산의 저의에 깔린 '꼼수'를 밝혀 그 문화적 전략에 '쫄지 않고'  제대로 가지고 놀며 판단하게끔 하려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문화연구'는 대중들에게 카펜터 영화에 나오는 그런 선글래스를 주려 한 것이다.(카펜터의 선글래스는 일종의 후설이 말하는 모든 판단 중지, 지금까지의 모든 생각과 가치관의 리셋(RESET)를 의미하는 '에포크'를 차용한 것이기도 하다. 이것은 분명 어느정도 진실을 가지고 있다. 진정한 진실에의 자각은 단절로 부터 오니까 말이다.)

 

  과연 문화가 그렇다는 게 사실일까?

  너무 치우친 생각이 아닐까?

  혹시라도 아직도 이렇게 생각하는 분들이 계시다면 카펜터의 그 선글래스로 바로 이 책 김선희 작가의 '팝콘을 먹는 동안 일어나는 일'을 추천드리고 싶다.

 

  물론 영화와 광고에 대해 이러한 비판적인 시각을 견지하는 책이 이 책이 처음이 아니다. 이 이전에도 비슷한 시각의 책들이 상당히 많이 나와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감히 추천하는 까닭은 첫째 굉장히 쉽다는 점이다. 어떤 저작들은 상당한 이론으로 무장하여 좋은 얘기들을 하는데도 쉽게 다가서지 못하게 하는 측면이 있었다. 하지만 김선희의 책은 그러한 거리감이 없다. 그는 이론틀 마저도 정말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하지 않으며 그나마 논의에 무리를 주지 않는 선에서 가벼운 언급으로 지나쳐 갈 뿐이다. 그러므로 이런 책을 읽을 때 들 수 있는 선입견, 그러니까 너무 어려우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 따위는 하지 않아도 좋다.

 

  둘째는 동시대성이다. 여기서 동시대성은 다른게 아니라 바로 우리가 얼마전 보았던 영화나 드라마 광고가 주 논의의 대상이라는 말이다. '문화연구'에 있어 치명적인 약점 중 하나가 '시간'이다. 그러니까 너무 늦게 나오면 거기서 논의되는 영화나 광고들이 하도 오래되어 이미 잊혀지거나 해서 사람들에게 얼른 다가오지 못하여 이해의 거리를 더욱 넓혀버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문화 연구' 또한 시의적절하게 업데이트될 필요가 있는데 김선희의 이 책은 그런 면에서 바로 얼마전 우리들이 감상했던 것들을 논의의 대상으로 삼고 있으므로 쉽게 참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추천할만 하다.

 

 셋째는 선명한 주제와 정연한 논의 구조이다. 책이 쉽고 따끈따끈한 소재를 사용하는 경우 쉽게 가질 수 있는 약점은 너무 쉬운 것과 시의적절성에 몰두한 나머지 그만 자기가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뭔지 그리고 그것을 제대로 전달할 수 있는 논의적 구조를 망치는 일이다. 그런 면에서 김선희의 이 책은 그 모든 일어날 수 있는 위험으로 부터 벗어나 있다. 그녀는 서두에서 부터 그녀의 방법론을 밝혀 놓는다. 그녀는 두 가지의 방법을 사용한다고 하는데 하나는 푸네스의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두더지의 방법이다. 그녀 자신의 말에 의하면 푸네스는 보르헤스의 소설에 나오는 인물로 모든 것을 기억하는 능력이 있는데 그처럼 영화와 광고를 다루는 데 있어 그 세부에 이르기까지 놓치지 않고 말하기 위해 그 푸네스의 방법을 쓸 것이라 한다. 그리고 두더지의 방법은 두더지란 원래 앞이 보이지 않아 정해진 길이 아니라 무작정 자신만의 길을 파헤쳐 가는데 그처럼 자신도 위로 부터 주어진 의미와 이론에 굴하지 않고 오로지 그녀 자신만의 길로 해석을 밀고나가 그 자체로서 저항의 길을 만들어내겠다는 일종의 선언이다. 즉 이것은 대상과 해석에 따른 각각 다른 방법으로 대상에 있어서는 푸네스를 해석에 있어서는 두더지의 길을 가겠다는 것인데 그 둘이 모여 이루는 것은 결국 지배적 주류가 보도록 허용하는 것에 맞서 그것을 전복하고 그와 독립되고 자립적인 주체가 될 수 있도록 저항의 흐름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것이 그녀의 선명한 주제의식이다. 그렇다면 책 전체에 걸쳐 이러한 주제의식이 과연 잘 전달될 수 있도록 선명한 논의 구조를 가지고 있는가? 그에 대한 답은 긍정적이다. 이 책은 크게 네 개의 단위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각각은 헤겔이 말했던 정신의 발전 과정에 그대로 대응되는 듯 하다. 그러니까 첫번째, '복제되는 현대 신화들'에서는 헤겔의 첫번째 단계인 '개인'에 대응해 영화나 광고를 통해 특히나 강요 혹은 이식되는 신자유주의적 정체성이 횡단되고 있는 '개인'을 그리고 두번째 '문화거울로 바라보기'에서는 헤겔의 두번째 단계인 '가족'에 그대로 대응해 현대의 신자유주의가 문화적 매체를 통해 가족의 위상을 어떻게 의도에 따라 변화시키고 있는가를 탐색한다. 그리고 세번째 '공존을 위한 숙제들'에서는 그 논의를 이제 '사회적' 차원으로 넓히고 마지막 네번째 '지구 단위로 생각하기'에서는 근대와 생태환경 자체를 그 기반으로 삼는다. 이렇게 김선희의 논의는 헤겔의 정신의 발전 단계를 따라 개인과 가족 그리고 사회에서 시대와 지구 전체로 포커스를 넓혀가며 그 각각에서 문화 매체들이 어떻게 이용되고 있는지 세부에 이르기까지 자세히 보여주는 것이다. 즉 그녀는 앞에서도 말했듯 쉽게 독자들이 다가오게 하면서도 천명했던 푸네스의 방법을 잊지 않으며 각 단락 마다 선명한 주제 의식 마저 포기하지 않기에 개인과 시대, 지구 전체로 시야로 넓혀가면서도 자신만의 저항의 길마저 내내 이어가도록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독자는 그 세부에 이르기까지 저항의 논리를 자기의 말로 무장할 수 있게 되며 보다 더 커다란 시각 위에서 주입되거나 유포되고 있는 이데올로기적 전략들을 스스로 비판할 수 있는 역량마저 가지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보다 더 중요한 게 있으니 이렇게 하면서도 이런 내 말이 더 어렵게 여겨질 만큼 끝까지 쉽고 편하게 독자들을 데려간다는 점이다.

 

  알고 있듯이 현실은 일종의 매트릭스다. 이 말은 현실은 그저 순수한 현실이 아니라 사람을 언제든 홀리려고 드는 온갖 이데올로기적 전략과 전술이 횡행하는 중첩된 장(FIELD)라는 것이다. 그 안에서 우리는 쉽게 자기가 어디에 서 있는지 알고 있다고 자신하고 있지만 사실 그렇지 못하다. 부르디외의 '아비투스'란 말도 있듯이 어느샌가 그 매트릭스 안에서 우리의 모든 신체와 감각 기관마저 그 얼기설기 엮어진 이데올로기들에 의해 경마장의 말처럼 한쪽만 보도록 색안경이 자기도 모르게 씌워졌거나 혹은 누군가에 의해 의도적으로 재조정된 신경조직으로 진실을 감각하기 불가능할 정도로 내 감각이 착란되고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문화연구'가 온전한 주체가 되도록 한다는 말은 쉽게 말하면 당신에게 진실만을 말하는 거울을 주는 것이다. 당신이 그 거울에 비친 적나라한 현실의 모습을 보고 온전한 제 자신을 바라볼 수 있도록. 혹시나 이 글을 읽고 당신 역시 지금 내가 어디 서 있는지 그 진실한 위치를 알고싶어졌다면 이 책이 그 거울이 되어줄 수 있을 것이다. 그것도 선글래스를 쓰는 것 만큼이나 손쉽게. 앞에서 말한 세 가지 이유로 기꺼이 추천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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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1-12-21 1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주제 역시 제가 관심있던 주제네요.
항상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서, TV를 보면서 광고에 대해서 생각했는데 말이죠.
최근 광고의 대부분이 통신 관련이란거 아시죠? 황금알을 낳는 거위는 맞는 모양인데,
대체 최근 한 집당 한달 통신 지출 비용을 보면 확실히 수긍이 가더군요. ^^

에일로이 2011-12-25 20:55   좋아요 0 | URL
확실히 광고의 대부분을 슬쩍 살펴만봐도 통신가 광고가 대부분이더군요. 마케팅에 그리 많은 비용을 쓸 수 있는 것도 모두 통신사가 과한 비용을 소비자에게 부담시키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 아닌가 싶어요.특히나 우리나라의 기형적 과점구조가 소비자에게 과도한 비용을 떠넘기는 걸 가능하게 만들고 있기도 하지요. 하지만 일반 소비자들은 이런 구조와 행태를 잘 인지하지 못하죠. 그게 아마도 광고와 영화, 언론을 비롯한 미디어들이 거기에 대해 보지 못하도록 프레임을 사람들에게 씌우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어요. 진정한 권력은 보지 못하도록 만드는게 아니라 존재하는데도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 처럼 만드는데 있다라는 말도 있듯이. 그렇게 가리고 못 느끼게 하고 있는 것이 그들의 역할이 아닐지 새삼 의심하게 만들더군요. 그것을 보게 하는 것 그것이 이 책이 하고 싶은 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

맥거핀 2011-12-21 17: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를 읽다보니 책에 흥미가 생기네요. 쉽고 시의적절한 책이라는 데에 크게 위안을 가지고, 보관함에 소중하게 넣어둡니다. 좋은 리뷰 감사드려요.

에일로이 2011-12-25 20:55   좋아요 0 | URL
맥거핀님 또 들려주시고 이렇게 좋은 말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

소피친구 2012-01-19 1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선희씨가 어떤 책을 쓰셨는지 궁금해서 들어왔는데 이 책에 대해 서평을 잘 써주셔서 작가의 책을 구입하는데 망설이지 않을 수 있었어요. 솔직하고 대단히 성의있는 글이라 저도모르게 댓글을 남깁니다.

에일로이 2012-01-20 19:12   좋아요 0 | URL
이렇게 방문해주시고 좋은 말씀까지 해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김선희씨의 이번 책은 저 역시 꽤 만족했던 책이었는데 소피친구님도 마음에 드셨으면 정말 좋겠습니다. 혹시 또 보실지 모르겠지만, 설 연휴도 잘 보내시길 바랄게요^ ^
 
진화의 종말
폴 R. 에얼릭 & 앤 H. 에얼릭 지음, 하윤숙 옮김 / 부키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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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우리들이 흔히 가지고 있는 상식에 기대어 보자면 진화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한 개체가 가지고 있는 유전자에 이루어지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그 진화에 있어서 유전자 못지 않게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환경이라고 말하는 학자가 있으니 그가 바로 스탠퍼드대 생명공학 교수인 폴. R 에얼릭이다. 그는 이미 전작, '인간의 본성들'에서 유전자 뿐만 아니라 한 인간이 가지고 있는 문화적 환경에 의해서도 진화가 이루어짐을 밝힌 적이 있다. 이번에 새로이 나온 같은 대학의 연구원으로 있는 아내와 같이 저술한 이 '진화의 종말'도 요지는 그와 다르지 않다. 하지만 개체가 환경과 상호작용 하면서 진화한다는 이른바 '공진화'에 대해서는 그 뒷받침 되는 증거가 최신 연구 결과까지 포함하여 전작보다 더 넓어졌고 다루는 세계 역시도 '생태계' 전체로 더 확장되었으며 단순히 '환경의 영향 역시 크다'라는 식의 현상의 기술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인식이 지금 맞이하고 있는 생태계 전체의 파국적 위기 앞에서 어떻게 위기 극복을 위한 대안으로 나아갈 것인가 까지 말하고 있어 한 마디로 폴 R 에얼릭이 지금까지 해 온 작업의 이른바 집대성이라 할 만하다. 

 

  제목인 '진화의 종말'은 우리나라에서 붙인 제목으로 여기에서의 '종말'이란 내 생각이지만 헤겔이 말했던 그런 '종말'인 듯 보인다. 그러니까 결국 역사가 최종 완성형에 이르렀다는 그런 의미에서의 종말인 것이다. 원제는 'THE DOMINANT ANIMAL'이다. 즉 '인간'에 이르러 진화는 하나의 극점에 도달했다는 의미인데 하지만 이것은 그리 낙관적인 의미만은 아니다. 에얼릭이 굳이 이런 표현을 쓴 것은 인간이 단순히 헤겔식으로 하나의 완성형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인간에게 진화의 극점이자 지구의 '지배자'로서의 지위에 걸맞는 생태계 전체의 보호를 위하여 져야할 책임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니까 말이다. 그러니까 '진화의 종말'이 쓰여진 진짜 이유는 점점 심화되는 위기로 빠져드는 생태계 전체를 위하여 다시 한 번 인류의 관심과 책임을 고취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책 전체의 내용은 바로 그와 같은 의도에 맞게 철저히 이루어져 있다. 초반에는 다윈의 '자연선택론'을 통하여 진화라는 것이 환경과의 상호작용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강조한다. 여기서는 전작에서 했던 것과 같이 진화라는 것이 오로지 유전자에 의한 것이라는 우리의 통념을 깨뜨리는 것에 집중한다. 그는 유전율이란 개념을 드는데 유전율이란 유전으로 결정되는 비율을 나타내는 지수를 말한다. 우리는 흔히 머리가 나쁜 부모에게 머리가 나쁜 자식이 나온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대부분 자식의 형질은 부모가 물려주는 유전자로 결정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근거로 가장 많이 드는 것이 '일란성 쌍둥이'이다. 모든 것이 똑같고 모든 똑같은 환경에서 자라났는데도 일란성 쌍둥이는 전혀 같지 않다. 그러므로 인간은 유전적으로 결정된다는 결론이 나온다. 하지만 에얼릭은 반론을 제기한다. 그것은 유전율을 너무 낮게 잡았기 때문이라고. 유전율을 낮게 잡았다는 것은 관찰 대상의 환경을 단순화하고 오로지 나타난 형질만을 보고 판단을 내렸다는 뜻이다. 에얼릭은 유전율을 높게 잡았을 경우 그러니까 그 쌍둥이들이 살아온 모든 과정을 세세히 밝히고 그 와중에 점차적으로 형성되어온 모습들을 두루 살핀다면 유전자 말고도 거기엔 환경의 영향마저 무시하지 못할 정도로 작용했음이 분명히 드러날 것이라 말한다. 그리고 실제 높은 유전율을 적용한 경우 지금은 '일란성 쌍둥이'에게 있어 상이한 차이는 환경의 요인 역시 작용함이 드러났다고 한다. 그렇게 에얼릭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지만 자주 잊는 것, 그러니까 인간이 태어날 때 부터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人間)'이란 한자의 뜻 그대로 사람이 사람과 그를 둘러싼 환경과의 꾸준한 상호작용으로 형성되는 것임을 다시금 일깨워준다. 

  

  그렇게 환경 요인의 중요성을 강조한 뒤 중반에 가서는 우리 인간의 지배가 지구 전체의 생태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보여준다.  우리는 이미 앞서 우리를 둘러싼 환경이 마치 촘촘한 그물처럼 얼마나 밀접하게 상호작용을 하는지 보았다. 때문에 마치 너무나 정교하게 쌓여있어 그 어느 한 조각이라도 빼내면 그대로 허물어질 것 같은 블록들 처럼 인간의 개입이 자칫 잘못하여 그 어느 하나라도 잘못 건드린다면 어떤 파국적 결과가 초래될지 모른다는 생각부터 앞서게 된다. 바로 그 생각 그대로 에얼릭은 인간의 저마다의 욕망과 편리를 위해 또는 보호의 명목으로 자연에 인위적으로 손을 대는 것이 얼마나 좋지 않은 결과를 불러올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많은 사례들이 있지만 특히 미국에서 실제로 있었던 실험 '바이오스피어 2'가 그렇다. '바이오 스피어 2'란 '바이오 스피어 1'인 지구의 생태 환경을 그대로 인공적으로 복제한 실험을 말한다. 모든 과학자들이 실제 생태계 환경을 정확히 복사하여 인공적인 생태계를 복제하였지만 그래서 그것 역시 지구 생태계 처럼 완벽하게 흘러갈 줄 알았지만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변수들이 발생했고 그리하여 결국 '바이오스피어 2'의 생태계는 파괴되어 실험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이 실험의 실패가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인간이 제아무리 예측의 달인이라 하더라도 자연이란 하나의 거대한 생태계 전체는 그러한 인간의 예측을 가볍게 넘어선다는 사실이다. 즉 인간은 자연 앞에서 여전히 예측 불가능성과 통제 불가능성의 운명에 빠질 수 밖에 없으며 그러하니 인간이 보잘 것 없는 계산과 기술로 오만하지 말아야 함을 역설하는 것이다. 바로 그 얕은 계산과 오만함이 결국 어떠한 결과를 불러왔는지 가장 우리에게 살갑게 다가오는 예가 각 나라들이 저마다 닥친 생태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외국으로 부터 천적이라 할 수 있는 동물이나 곤충들을 수입해 오는 사례이다. 우리나라에도 외국에서 들여온 황소개구리가 우리 고유의 생태계를 모조리 망쳐 문제가 된 적이 있지만 그게 비단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일만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에얼릭은 호주를 비롯하여 많은 나라들이 그런 식으로 해결하려 하다가 받았던 엄청난 피해들을 보여준다. 단순한 계산으로는 자연의 가장 작은 부분 조차 통제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러한 실패가 자주 반복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에얼릭은 그 이유로 우리가 우리를 둘러싼 생태계라는 거대한 매커니즘을 제대로 바라보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즉 '생태계'라는 것은 아주 미시적은 부분, 즉 '마이크로 코스모스'라고 불리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의 작은 부분 조차도 서로가 아주 밀접하게 엮이어진 거대한 상호작용의 네트워크로 이루어져 있는데, 때문에 어느 하나에 개입하면 당연히 되먹임(피드백)이 일어나며 그것이 너무나 촘촘히 엮어진 네트워크에서 발생하는 일인지라 그 어떤 변수가 작용하여 그 어떤 결과가 불러올지 예측하기가 너무나 어렵다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카오스 이론'에서 말하는 '나비 효과'와도 같다. 미국 LA에서의 나비의 날개짓이 중국에 폭우를 불러오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떤 경로를 통해 그 모든 결과가 일어나는지 파악하기란  실로 불가능한 것이다. 

 

  '환경은 거대하다' '진화의 종말' 후반은 마치 이 한 마디로 요약될 수 있을 정도다. 인간의 의식과 역사 조차도 환경과의 상호작용으로 형성될 만큼 중요한 환경. 그러나 우리는 지금 얼마나 작고 쉽게 여기고 있는 것인지... 에얼릭은 그러한 우리의 교만과 호기를 통렬하게 비웃는다. 자연 자체만이 아니라 인간과 자연 조차도 긴밀하게 엮이어져 있기 때문에  미국 사람들의 캐시미어에 대한 호감이 중국의 황사를 증가시키고 그래서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미국 사람들 마저 기관지염으로 빠뜨리는 것 만큼이나 우리의 작은 행동 하나 조차 어떤 결과가 닥쳐올지 전혀 모르는 지경인데도 우리는 그 '되먹임'을 인지하지 못하고 오로지 목전의 이익만을 집착한 채 무분별하게 환경에 개입하고 있다는 것이다. 환경적 요인을 중요하게 생각함은 무조건 삽질 부터 할 것이 아니라 그 삽질을 하기에 앞서 그것이 어떤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지 충분히 따져보고 하라는 것이다. 그것도 아주 세밀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자세히 말이다. 왜냐하면 환경이 가지고 있는 네트워크 자체가 그러하니까, 즉 하나의 거대한 맥락으로 움직이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 많은 상호작용을 단순화하고 관련된 것만 보아서는 다가올 결과를 정확하게 알아낼 수 없을테니까 말이다.  인간의 지엽적인 눈으로 보자면 자연은 늘 스스로 일어나지 못하는 아이처럼 보일지 몰라도 사실은 위에서 지긋이 내려다보는 어른과도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사실 에얼릭이 더 선호하는 건 환경을 보호하고 싶다면 아무 짓도 하지 말고 그저 있는 그대로 내버려두는 일이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 눈에 보이는 하나의 얼룩이 있다고 해도 그것은 종점이 아니며 비록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부분에서 느낄 수도 없는 느린 속도라 해도 스스로 치유해나가고 있는 하나의 과정에 다름아니기 때문이다. 에얼릭은 우리의 조급증을 경계하라고 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차분히 기다리지 않고 함부로 손을 대어 인간의 의지와 기술을 들이민다면 그것은 보호가 아니라 그저 학대에 지나지 않을 것임이, 읽고 난 지금엔 그렇게 생각된다. 

  

  이 책을 읽다보면 우리의 통념이라는 것이 또 얼마나 안 좋은 결과를 불러오는지 똑똑히 깨닫게 된다. 따라서 무엇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제대로 아는 것, 보는 것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되새기게 된다. 에얼릭의 논지는 단순하지만 그 단순함이 오히려 그동안의 통념이 다만 편견에 지나지 않았음을 질책하는 것이라 아프게 다가온다. 그 통념으로 인해, 우리가 알았든 알지못했든 그동안 지구는 우리로 인해 많은 아픔을 겪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 지구까지는 생각할 것 없이 지금 우리의 국토 또한 그러한 것이다. 강의 물줄기를 함부로 바꾸고 인위적으로 막고 돈을 위해 강바닥을 사정없이 파내는 등 정말 생각할 수 있는 가장 거대한 펀치를 사정없이 자연에다 날리고 있는 오늘의 현실을 생각하면 개발이라는 것이 불러오는 것은 오로지 생태계 전체의 파국 밖에는 없다는 에얼릭의 호소가 그렇게 절절하게 다가오지 않을 수 없다. 겸손과 배려가 타인에게 만이 아니라 자연에 대해서도 근본적으로 가져야 할 태도임을 다시한 번 깨닫는다. 그것이 에얼릭이 원제에다 정말 전하려고 했었던 진심, 그러니까 지배자로서 인간이 생태계에 대해서 짊어져야 하는 책임에 걸맞는 자세이기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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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100년의 기억을 찾아 일본을 걷다 - 생생한 사진으로 만나는 일제강점기 조선인 강제징용 잔혹사
이재갑 글.사진 / 살림 / 2011년 8월
절판


예전에 TV에서 우토로 마을에 대한 것을 본 적이 있다. 우토로 마을은 인근의 군 공항 건설을 위해 강제징용된 조선인들 1,300명이 온종일 강제 노동으로 혹사당하던 중에 자연스레 형성되어진 마을이었다.
하지만 패망 후 공항 건설은 중단되고 그 동안의 노동에 대한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했던 조선인들은 한 푼도 없는 처지인지라 전쟁이 끝나서도 그 곳을 떠날 수 없었고 그렇게 자연스럽게 조선인의 마을로 자리잡게 도었다. 그러다가 그 마을 전체의 부지가 한 부동산 회사로 넘어가면서 회사가 거기 사는 마을 주민 모두에게 강제퇴거 명령을 내렸고 그로 발생한 우토로 마을 주민들의 애환과 그 도움의 호소를 다루었던 프로그램이었다.
수 년에 걸친 가혹한 강제 노동에 대한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한 그들을 거기다 그렇게 냉혹하게 몰아내는 일본의 모습을 보면서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멀쩡히 우리나라 땅에 잘 살다가 어느 순간 일본에 의해 강제로 끌려가 3~4백 미터 지하의 갱도에서 석탄을 캐거나 때로는 단바의 광산에서 처럼 겨우 30CM의 좁은 갱도에 몸을 집어 넣고 망간을 캐거나 우토로 처럼 공항을 건설하거나 일본 자국민에게는 시키지 않을 그런 고되고 위험한 막노동일을 하면서 강제징용 당한 우리 조선인들이 흘린 눈물과 피가 저 일본 땅에 참으로 가득하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니 씁쓸하기도 이를데 없었다. 그러다 그 후, 단바 망간 기념관에 대한 소식을 TV에서 또 보게 되었고, 그 때 나는 그 고통의 역사적 현장을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오로지 개인의 힘으로 지키고 있는 것을 보면서 다시 일본에 간다면 나 역시 저렇게 고통의 현장들을 직접 돌아다니면서 역사가 새겨놓은 상흔들을 겪고 기억해 두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막상 그 생각을 그대로 실천에 옮기기는 어려웠다. 일단 내가 아는 것이 별로 없었고 거기에 대해 유용한 정보를 얻기도 내 힘으로선 벅찼기 때문이다.

그래서 뭔가 적절한 도움을 얻을 곳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차에, 이렇게 사진작가 이재갑의 '한국사 100년의 기억을 찾아 일본을 걷다'라는 책을 만나게 되었다.

이 책은 그야말로 후쿠오카로 부터 오키나와까지 일본 전역 곳곳에 아로 새겨진 강제징용당한 우리 조선인들의 상처와 애환의 현장을 다루고 있다. 비록 그 대부분 일본이나 우리나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으며 그저 무관심과 망각 속에 버려져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진 속 저 강제징용 당한 조선인들이 캐냈던 석탄 더미로 이루어진 거대한 산 처럼 절대 지워지지 않을 뚜렷한 역사적 존재로 남아있는 그 현장을 말이다.

그 대부분의 현장은 "우리의 언어는 아우슈비츠가 어떤 장소라는 것을 표현할 수 있는 범주를 가지고 있지 않다'라고 조너선 웨버가 말했던 것 처럼 언어화가 불가능한 그저 망연히 전해져오는 그 곳에 깃든 상처와 고통에 오롯이 젖을 수 밖에 없는, 리오타르가 말했던 바와 같이, '트라우마'의 공간들이다. 지은이는 답사를 통해 바로 이러한 트라우마의 공간에게 그동안 잃어버렸던, 그렇게 지워진 목소리들을 다시금 찾아주려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사진을 하나의 업으로 삼게 된 것은 다름아닌 '우리 이웃들의 삶이 때로는 우리 삶을 지탱한다'는 말이 내포하는 것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싶다는데 있었는데 작업이 치열해질 수록 바로 그 지탱하는 이웃들의 삶이 무엇보다 역사적인 것이며 오히려 한국전쟁과 일본 강점기 처럼 무엇보다 거센 폭력에 노출되고 그로인한 아픔과 상처로 점철된 역사속의 이웃들이 현재 우리의 삶을 지탱하고 있는 뿌리임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잃어버린 우리들의 이웃인 그들의 눈물과 애환이 우리네 삶으로 그대로 이어지고 있음에 그들의 잃어버린 목소리를 찾아주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을 아는 것과도 같아서 그는 일본 전체에 걸친 강제 징용 당한 조선인들의 트라우마적 공간을 이렇게 하나의 책에다 담으려 하는 것이다.

책은 후쿠오카, 나가사키, 오사카, 히로시마, 오키나와 각각 한 챕터씩 할애하여 총 5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각 장의 처음에는 이렇게 답사한 곳의 위치가 나와있는 지도가 있다. 다소 대략적이라는 게 아쉽지만 이 책이 답사기가 아니라 무엇보다 그동안 망각 속에 버려졌던 강제 징용 당한 조선인들의 삶을 다시 환기시키는 데 있음을 생각하면 수긍이 간다.

그렇다고 지은이가 단순히 과거의 아픔을 환기시키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그의 사진 작업이 무엇보다 과거와 현재가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게 하는 것임을 상기한다면 아마도 당연하겠지만 그는 그 아픔이 어떻게 현재로 연결되고 있는지, 지금 현재의 우리에게 그 아픔이 어떤 의미인지 또한 아울러 담는다. 그러한 측면이 무엇보다 개인의 기억함과 일본 사회의 망각함 사이의 대립으로 나타난다. 즉 지워지고 있는 역사를 복원시키려 노력하는 개인들과 과거의 상흔과 자신이 저지른 범죄를 지움으로써 이제는 전혀 다르게 변해버린 일본 현재의 모습 사이의 대비인 것이다. 그렇게 기억하려는 개인과 망각시키려는 사회의 대조를 통해 과거를 이어받는다는 것, 아픔을 기억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로새기려 한다. 무엇보다 이 사진이 그것을 잘 드러내고 있다. 이 사진은 강제 징용 당한 한 조선인의 무덤이다. 당시 일본은 조선인들이 노역 끝에 죽어도 묘비를 만들지 못하게 했다. 그래서 조선인들의 무덤은 하나의 돌로 표시할 수 밖에 없었다. 전쟁의 폐허를 지우고 과거의 범죄적 흔적을 지운 현재 일본의 변모해버린 모습에 비해서 이 희생자들의 무덤은 저렇게 제대로 된 표식하나 없이 그저 돌 하나가 된 채 그것도 풀 숲 어딘가 보이지 않는 곳에 무심하게 버려져 있는 것이다. 마치 현재의 일본이 그들의 범죄적 과거를 지우기 위해 자꾸만 망각 속으로 떠밀고 있는 듯한 형국과도 같다. 그 곳을 찾아오는 이는 저 할아버지 처럼 그것을 기억하는 개인들 뿐이다. 할아버지는 거기서 신세타령가를 부른다. "우리의 고향은 경상북도인데 어째서 숯 파러 왔느냐"로 시작되는 그 타령은 마치 망자의 혼이 다시금 흘러나와 자신의 목소리로 부르는 것 같다. 말이 아니라 노래, 나의 목소리가 아니라 죽은 자의 빙의된 목소리라는 점에서 저 돌 하나로 남은 무덤은 그야말로 절대 치유될 수 없는 상처로서의 트라우마의 공간이 된다. 그렇게 빙의라는 점에서, 그 상처를 되새기고 있는 것이 바로 나라는 점에서 그 곳은 나와 연결된, 내가 속한 공간이 된다.

여기서 그 트라우마 공간과 연결된 나를 되새김은 비단 내 국적, 내 민족을 환기시키는 것이 아니다. 아우슈비츠가 비단 유태인들만의 비극이 아니라 인류가 인류에게 가할 수 있는 극한의 폭력이 가져온 비극을 상기시키듯, 여기 하나의 돌 무덤에서 환기되는 것도 다른 나라 백성이라고 해서 마구 가해지는 제국주의적 폭력과 착취가 가져오는 커다란 비극인 것이다. 지금 일본이 지우고 있는 것은 바로 그 폭력과 착취의 증거들인 것이다. 지워진 것은 언제든 다시 반복될 수 있다. 따라서 그 결과로서의 아픔, 새겨진 비극을 기억함은 바로 그 반복의 연쇄를 끊는 일이 된다. 초래될 비극의 도래를 지연시키는 일이 된다. 바로 이 사진에 나오는 벽에 쓰여진 글 처럼 말이다. 우토로 마을을 돕기 위해 사이타마에서 왔다는 이 누군가의 글은 이러한 기억함의 궁극이 종래에는 어디에 도달하게 되는지 잘 보여준다. 지은이가 답사의 마지막 장소인 오키나와에 있는 강제 징용당한 조선인들이 무덤인 '한의 비'에서 느끼는 것도 그것이다. 문득 거기 묻혀진 조선인들 중 하나가 자신의 할아버지와 같은 고향이었음을 보고 그는 자신도 모르게 격한 감정에 빠진다. 그는 이렇게 그 감정을 고백하며 답사를 맺는다.

"지난 1996년부터 일본 관련 작업을 시작하면서 힘들고 어려운 점이 많았다. 그리고 나름의 이유를 만들며 나를 합리화하고 이겨나갔다. 하지만 오늘은 그런 날들과 달랐다.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격한 감정이 치솟고 가슴이 먹먹해지면서 마치 이 작업의 당위성이 나의 운명인 듯 기쁘면서도 마음이 아팠다. 나는 흐르는 눈물을 감출 수 없었다.(p.338)"

이 치솟는 울분, 아픔, 눈물이 바로 트라우마적 공간과의 만났을 때의 반응이며 그것은 모두 저 아픔을 당한 자와 내가 다르지 않다는 자각에서 나온다. 그렇게 나와 연결되고 내가 속해 있는 바로 그 곳의 존재라는 깨달음 말이다. 우토로 마을을 도우러 온 사이타마에서 온 사람이나 일본의 최남단 오키나와에서 결국 울어버린 지은이나 트라우마적 공간 앞에서 느끼는 것은 똑같다. 이들이 모두 우리와 다르지 않다는 단순한 사실이다. 그들의 고통이 내 고통이며 그들의 버려짐이 바로 나의 버려짐이라는 자각이다.

우리 할아버지도 강제 징용당한 조선인 중 하나였다. 어쩌면 내가 정말 이 아픔의 현장들을 둘러볼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도 유년 시절 약주에 취하시면 내내 들려주시던 그 고통과 아픔이 절절했던 징용 시절의 기억이 어디선가 남아있기에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나 역시 분명 그 곳에 이르면 지은이와 비슷한 감정을 겪게 될 것이다. 그렇게 많은 트라우마의 공간들을 내 몸 여기저기에 새겨놓고 돌아오게 될 것이다. 잊지 않는 것. 그 어디든 폭력에 노출되고 사회의 강압에 쉽게 지워질 수 있는 자들은 모두다 내게 속한 자들이라는 것을 잊지 않는 것. 아마도 그 새겨진 상처들은 그렇게 호소할 것이다. 이 책을 읽고나니 언제든 빨리 그 곳을 다녀와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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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 쇼크 - 고령화, 쇼크인가 축복인가
테드 피시먼 지음, 안세민 옮김 / 반비 / 2011년 7월
평점 :
절판


 

 

  오래 살고 싶다는 것은 비단 진시황제만의 욕망은 아니다. 성경에 따르면 인류 최초의 인간 아담은 900년 넘게 살았다고 한다. 아서왕 이야기에 나오는 마법사 멀린은 사람의 수명은 600년이 적당하다고 말한다. 그래야 인간으로서 배워야 할 최소한의 것들을 다 배울 수 있다고. 그래서 그는 그만큼 생을 누렸다. 신화라는 것을 인간이 가장 욕망하는 걸 은유와 상징으로 버무린 이야기라고 정의한다면 이렇게 오래 산 사람들이 나오는 것은 수명의 연장이야 말로 우리의 가장 근원적 욕망임을 나타내는 것이 아닐까 한다. 같은 이야기를 스페인의 철학자 우나무노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의 삶이 가진 가장 근본적인 비극적 의미는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이며 종교를 비롯한 모든 인간이 만들어내는 문명적인 것들은 바로 그 비극을 조금이라도 지연해보고자 하는 욕망에서 나왔다고.

  다행히 현대에 들어와서 이러한 욕망은 서서히 충족되고 있는 중이다. 테드 C 피시먼의 ‘회색쇼크’에 따르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사는 1시간 마다 평균 수명은 11~15분 정도 늘어나고 평균 수명은 날마다 5시간씩 늘어난다(P.447)’고 하니까. 하지만 사람은 혼자 사는 것이 아니고 많은 사람들이 모두 조금이라도 오래 살기를 원하는 만큼 그렇게 이러한 바람들이 집단적으로 실현이 될 때 개인은 전혀 예기치 못했던 각종 사회 문제와 그로 인한 변화들이 마구 생겨나게 된다. 그것이 바로 테드 C 피시먼의 책 제목 ‘회색 쇼크’의 의미이며 이 책이 독자에게 보여주려 하는 것의 전부이다. 

   ‘회색 쇼크’는 말 그대로 점점 수명이 늘어나는 그렇게 노인이 많아지는 ‘고령화 사회’를 다룬다. 하지만 이론적인 틀로 독자를 학생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저널리스트 출신답게 미시적인 측면과 거시적인 측면 모두를 아우르는 실제적인 사례들로써 독자를 그것의 목격자로 참여시킨다는데 독특성이 있다. 한 마디로 '고령화' 사회에서 야기되는 모든 문제와 변화들을 가장 가까이에서 한 번 체험해 보라는 것이다. 그렇게 초점이 실제적 사례들에 맞춰진 만큼 피시먼은 현재 고령화 현상이 가장 집약적으로 표출되고 있다고 보여 지는 일종의 ‘사례군’으로서의 몇 개의 지역(혹은 국가)들을 골라 그것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그에 의해 선별된 지역(혹은 국가)들은 이렇다. 

  먼저 ‘고령화’에 특화된 지역사업들을 개발하여 가장 적극적으로 ‘고령화’에 발맞춰 나가고 있는 미국의 ‘플로리다’로 부터 갑작스러운 '고령화'의 진전으로 부족해진 노동력으로 인한 이민족의 유입과 극심한 재정 압박으로 인해 이제 노인 문제를 가정 내부의 책임으로 전가시키고 있는 ‘스페인’을 비롯, 세계에서 가장 노인 인구가 많아서 ‘고령화의 최전선’으로 불리지만 오히려 그 ‘고령화’ 때문에 젊은 세대가 기성 가치관으로부터 탈피하고 전통적인 가족의 의미가 퇴색되는 등 가치관 자체가 혼란의 와중 속으로 들어가고 있는 일본을 경유하여 제조업의 발달로 부유한 도시로 손꼽히다가 ‘고령화’로 인한 노동력 부족으로 제조업이 몰락하고 그것을 보충하기 위한 이민자들의 대량 유입 그리고 그러한 상황 속에서 재정적 지원을 받을 수 없는 늘어난 노인 인구들이 저마다 새로운 삶의 방식을 시도하는 가운데 오히려 전통적 가족의 가치가 점점 높아지고 있는 미국의 록퍼드와 오랜 역사 때문에라도 동양의 전통적인 가족의 가치가 가장 높았던 국가가 ‘고령화’를 맞이하면서 어떻게 해체되고 새롭게 받아들여진 자본주의 때문에 어떤 식으로 다시 조합되는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중국까지, 피시먼은 마치 현미경을 들이대듯 한 개인의 삶이라는 미시적인 부분에서부터 나라 전체를 아우르는 거시적인 부분까지 가감 없이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건져내어 마치 탁본을 떠 보이듯 독자 스스로의 눈으로 그 세세한 부분까지 관찰할 수 있도록 안내한다. 그야말로 전 세계에 미치고 있는 ‘고령화’의 현재와 그것이 야기할 미래의 모습을 충실히 경험할 수 있도록 만드는 책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한 가지 아쉬운 것은 별로 친절하지는 않다는 것이다. 앞 서 말한 대로 우리는 이 책을 통해 ‘고령화’의 현상은 이해할 수 있지만 그것을 어떻게 내가 판단하고 받아들여야 할 것인지에 대한 도움이 될 만한 해석의 틀 같은 것은 이 책이 주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저자는 실제 상황을 이야기하기 전에 거기에 대해 일종의 원론 같은 것으로 ‘장수에 관한 짧은 역사’라든가 ‘과학이 노화를 막을 수 있을까?’ 등등의 약간 이론적 틀이라 볼 만한 것들을 부가하고 있긴 하나 정작 논의하고자 하는 것과는 또 맥락이 맞지 않아 오히려 혼란을 부추긴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한 마디로 전체를 일목요연하게 아우르기엔 곳곳에 다소 산만한 구석들이 눈에 띈다는 것이다. 너무 개별적 상황들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려 한 나머지 독자로 하여금 전체적인 맥락을 놓치게 하는 우를 범하지는 않았나 싶다. ‘회색 쇼크’ 즉 ‘고령화’는 가까운 미래에 전 세계에 걸쳐 가장 중요한 이슈로 분명 떠오를 문제다. 그것도 부정적 의미에서 말이다. 아마도 피어슨은 거기에 대해 독자 개인이 지금 진행되고 있는 ‘고령화’ 현상을 잘 이해하고 거기에 나름대로 대처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기 위해 이 책을 썼을 것이다. 하지만 상황은 언제나 그렇지만 인지 그 자체만으로는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 그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제대로 된 시각을 만들어줄 수 있는 틀이 있어야 비로소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고령화’가 가져올 변화 그리고 문제들은 절절히 체감하는 바이지만 거기에 대해 평범한 한 개인으로서의 내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혹은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이 책은 그리 제대로 짚어주고 있지 못한 것 같다. 다시 말 해 책에 기술된 실제 상황에서 각 나라들은 각자 저마다의 방식으로 '고령화'에 대처하고 있는데 독자는 그 중 어느 것이 자기에게 적합한지 그 적절한 선택의 기준을 얻기 위한 갈피를 잡기가 어려운 것이다. 물론 바람직한 대처 방안이란게 현실과 깊이 맞물릴수록 존재하기가 어렵지만 스스로 그 잠정적인 대안이나마 도출할 수 있도록 제대로 해석하기 위한 최소한의 이론적 틀마저 주지 않는 것은 다소 불친절한 게 아닌가 싶다. '고령화'가 지금 나에게도 닥쳐올 문제이기에 더욱 그렇다. 피어슨이 혹시라도 또 ‘고령화’에 대해 쓴다면 실제적 현실과 그것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는 이론적 틀을 적절히 안배하여 하나의 맥락으로 이어지게끔 해서 독자들이 ‘고령화’에 대해 체계적으로 이해하고 그래서 나름대로 준비 할 수 있도록 좀 친절히 써 주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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