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란 무엇인가 - 칸트 3대 비판서 특강 인간 3부작 1
백종현 지음 / 아카넷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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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칸트는 철학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면 아주 낯익은 이름일 수밖에 없다.

  어떤 철학책이든  번은  언급되기 마련이니까마치 밥상에  올라오는 김치와 같다고나 할까 접하다 보니 자연스레 궁금하게 되었다도대체 어떤 철학을 펼쳤기에 이토록 빠짐없이 인용이 되는 것일까 하고 말이다그러나 그런 의문을 속시원하게 해결하긴 어려웠다칸트의 사상은 너무나 방대했고 그걸 체계적으로 쉽게 헤아리게 도와주는 길잡이를 만나는 일은 너무나도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안내자의 도움따위 필요 없이  몸소 알아보리라!’ 하며 직접 칸트의 책을 읽는 호기도 부려보았지만 낯선 단어들의 난무와 얼른 이해가 되지 않는 개념들의 연속 공격 속에서 패배를 시인하고 서둘러 퇴각해야 했다그러나 칸트는   번의 싸움으로 쉬이 접어버릴  있는 이름이 아니었다아니 보고 아니 듣는다면 그럴  있었을 것이다하지만 칸트란 정녕 라면의 스프와 같은 존재철학의 맛을 제대로 음미하려면  관통해야만 했기에 나는 반복해서 칸트의 철학과 난전(亂戰) 벌이지 않을  없었다물론  때마다 나는 번번이 자신의 무력함을 씁쓸하게 곱씹는 패장(敗將) 기분을 느껴야 했다그러다 깨달았다유비가 삼고초려까지  가면서 제갈공명을 자신의 사람으로 삼으려했던  바로 이래서였구나 하고그러나 더이상 유비를 부러워할 필요가 없어졌다 또한 제갈공명 같은 책을 드디어 만나게  것이다그것이 바로 백종현 교수의 ‘인간이란 무엇인가 책이다부제는 칸트 3 비판서 특강.

 

 하지만 처음  책을 보았을 조금 걱정이  것도 사실이었다책의 분량이 작았던 것이다모두 267페이지 정도론 3 비판서는 커녕 과연 ‘순수이성비판조차 제대로 설명할  있을까 염려스러웠던 것이다하지만 우리나라 최고의 칸트 전문가이자 칸트 공부만 50년을 했는는 학자의 책이니만큼 속는 셈치고 일단 읽었다이런! 부제는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그야말로 3 비판서의 핵심이 고루  들어가 있었던 것이다마치 필요 없는  모조리  가지치고  정수만 모아놓은 느낌이었다. 3 비판서를 쉽고 체계적으로 헤아리게 돕는 길잡이 역할부터 그가 당대의 사람들에게  중점적으로 들려주려 했고 그것을 통해 어떤 소망을 가지고 있었는가 하는 칸트의 인간적인 면모까지  짚어주고 있었으니까 말이다이보다 훨씬  두터운 책으로도 가늠할  없었던 칸트와 그의 철학을  얇은 책으로 이토록 선명하게 응시하게 되다니! 가히 명필은 붓을 탓하지 않고 내공 깊은 고수는 분량에 좌우되지 않는가 보다.



 

  책은 크게 서론 격이 되는칸트 철학으로 들어가기 3 비판서인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그리고 ‘판단력 비판  강씩 할애하여 설명한 3강으로 이뤄져 있다서론에선 연암 박지원과 같은 시대 사람이었던 칸트가 과연 어떤 사람이었으며 그가 활동한 시대는  어땠는지와 함께 오랫동안 칸트 철학을 연구하고 번역해왔던 그의 술회가 짙게 투영된 한국어로 칸트를 읽고 공부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을 밝히고 있다그렇게 하여 칸트가  ‘인간이란 무엇인가 자신이  힘을 기울여 풀어가야  철학의 화두로 삼았으며그런 그의 작업이 비록 아주 오랜 시간이 흘렀고  타국에 살고 있지만 지금의 우리와 결코 별개의 것이   없음을 헤아릴  있도록 말이다.

 

 칸트가 인간을 화두로 삼은 것은 그의 시대를 거센 물줄기로 휩쓸었던 계몽주의 그에겐 다름아닌 ‘사람이 자기 탓인 미성숙으로부터 벗어남(p. 73)’이었기 때문이다여기서 미성숙이란 타자의 지도 없이는 자신의 지성을 사용하지 못하는 무능력함을 이르는 말로 칸트는 사람들이 그렇게 미성숙하게 되는 것이 무엇보다 타인에게 기대지 않고 자신의 지성을 스스로 사용하려는 결단과 용기의 부족으로 보았다사실 그럴만 했다르네상스를 시작으로 종교혁명을 통해 계몽의 여명이 차츰 시대를 밝히고 있었지만   동안 지배했던 기독교 때문에 당대 사람들은 신의 권위에 짓눌려 자신의 이성을 자발적으로 사용할 기회를 거의 갖지 못했으니까 말이다그들에겐 자신의 이성을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당당히 드러내 사용할  있는 자유가 필요했고 칸트는 성숙을 향한 그들의 결단과 용기를 위해 그런 자유를 주려했다그러기 위해 그는 인간을 다시금 정의할 필요가 있었다왜냐하면   때까지 사람들은 자신을 오직 신의 눈을 통해서만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자신이 무엇을 원하고 행동할  있으며 어디에서 흡족함을 느끼는지를 하나같이 신에 맞추어 생각했다칸트는 그런 사슬을 끊고자 했다인간이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보지 못하도록 신이 세워놓았던 가림막을 치워 인간의 온전한 초상을 보도록 말이다그래서 그는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근본 질문으로 돌아가 사람이라면 누구나 품었을그래서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다시금 제기한 것이다이제는 신이란 타자의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의 이성으로 그것을 음미하도록.

 

 1) 나는 무엇을   있는가?

 2) 나는 무엇을 행해도 좋은가?

 3) 나는 무엇에서 흡족함을 느낄 수밖에 없는가?

 

   개의 질문은 그대로 3 비판서와 대응한다. ‘나는 무엇을   있는가?’ 대답이 ‘순수이성비판이며 ‘나는 무엇을 행해도 좋은가?’ 대답은 ‘실천이성비판이고 마지막으로  ‘나는 무엇에서 흡족함을 느낄 수밖에 없는가?’ 대답이 판단력비판 것이다여기서 비판이란 다름아닌 ‘무엇을   있고     없는지 분간함(p.83)’ 의미한다   없는 한계 범위를 밝히는 것이 ‘비판 것이다그러므로 ‘나는 무엇을   있는가?’ 대한 비판은  ‘나는 어디까지   있는가?’이기도 하다그런 인간의 이성이   있는 범위바로 그것을 밝히는 것이 ‘순수이성비판 하고자 하는 바다거기서 칸트는 인간의 지식이 무엇보다 감성 세계의 대상에 관해서만 가능하다(p.85) 여긴다오직 우리가 감각으로 확인할  있는 것만이 지식의 대상이라는 것이다그러므로 칸트에겐 자연과학적 지식만이 지식이다실제 감각으로 확인할  없는 철학적 사변이나 종교적 담론 같은 것은 지식이 아닌 것이다그런 지식에 대해 칸트는 지식인  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한다지식이 아닌 것이 지식이라고 주장하며 권위를 내세워 사람들의 이성을 호도하면 안된다고 말이.


 그렇다고 칸트가 철학적 사변이나 종교 담론을 무가치하다고 여기는 것은 아니다그런  또한 자연과학적 지식 이상으로 우리 삶을 유용하게 만드는  인정한다다만 그것은 지식이 아니라 이념 문제인 것이다신을 예로들어 말하자면 감각할  없는 신을 섣불리 지식의 범위에 넣어 실재라고 주장하기 보다는 다만 우리의 삶을 보다 바람직하게 만들 이념의 하나로  존재를 요청할  있을 뿐인 것이다이렇게 오직 감각할  있는 것만을 실재로 인정하기에 실재라는 개념이   분명해지고 이전까지 전혀 드러나지 않았던 새로운 차원이 열리게 된다.


 왜냐하면 감각할  있으려면 그것이 언제나 특정한 시공간 위에 놓여져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어떤 것이 존재하려면 시공간 위에 있어야 한다는 일차적인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그럴  없는 것은 존재하는  아니다신도천사도 마찬가지다이렇게 우리의 존재 인식은 시공간이라는 특정한 형식을 통해 이뤄진다칸트는 이를 두고 ‘초월적 감성 형식이라 부른다칸트에게 ‘초월적이란 말은 백종현 교수에 따르면 모든 경험에 앞서는그러면서 경험 인식을 가능하게(같은 저자의 ‘칸트와 헤겔의 철학’ p.123)하는  뜻한다다시 말해 우리는 아무 것도 없는 무의 상태에서 어떤 대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감성 형식을 통해 보고 있다는 말이다 형식은 우리 바깥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내면에서 비롯되는 것이기에이런 면에서 보자면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 스스로 만든 형식에 따라 규정하는 대로 보고 있다고 말할  있다사실 칸트는 우리가 정말 그러고 있다고 말한다어떤 대상을 지각할  지각  자체만 하는  아니라 지각을 어떤 특정한 것에다 연결 혹은 종합하는 ‘통각 하며  통각은 범주라는 일정한 도식을 매개로 이뤄진다고 말이다그게 바로 관계양태로 대표되는 초월적 지성 형식이다우리는   형식을 사용해 바깥의 실재를 지각하며 오직 그것만이 실재가 된다 형식은 모두 우리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이기에 사실은 우리의 주관이 객관을 형성하는 것이다.


 그렇게 칸트는 실재의 구성을 우리 주관 영역으로 끌어들였다이것은 보다  알기 위해 오직 바깥 대상에다 우리의 주관을 끼워 맞춰야 했던 당시 사람들에겐 생각도 못한 것이었다칸트에 따르면 자연 세계를 형성한 것은 신의 말씀이 아니라 인간의 주관이었다그런 식으로 칸트는 신에게 얽매여 있던 사슬을 끊어냈다우리가   있는 것은 지식으로 삼을  있는 것은 오직 자연 과학적 세계밖에 없으며 그것을 근본적으로 형성하는 것도 바로 우리라는 것을 알리면서 말이다.

 

 그럼 이제 다음의 문제, ‘나는 무엇을   있는가 의지의 문제에 답할 차례다.

 칸트에 따르면 의지는 오직 ‘‘선의지밖에 없다(p.155)’ 한다왜냐하면 의지 ‘좋은 것을 하려함으로 나쁘게 되는 것은  의지가 약해진 것이지 나쁜 의지란  있어서 그런  아니기 때문이다그런데 이런 의지는 또한 자유의지이기도 하다좋은 것을 구속 받지 않고   있어야 의지가 진정으로 존재한다고 말할  있는 까닭이다그런데 선의지란 단순히 좋은 것을 하려는 의지를 뜻하지 않는다도덕적으로 올바른 의지를 뜻한다

 

 어떤 행위를 ‘옳다라고 하는 오로지  이유 때문에 행하려는 의지가  선의지다.(p. 160)

 

 칸트는 진정한 자유의지는 오직 선의지를 발할 때에만 가능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여기서 도덕적이란저마다 가진 상호 인격을 존중해주는  뜻한다백종현 교수는 그걸 칸트가 ‘영원한 평화에서 어떤 경우도 섬멸전이나 징벌전은 있을  없다고 말한 것을 가지고 풀어간다그렇게  뜻대로 하지 않고 상대가 가진 고유의 영역을 지켜줄  있을 비로소 도덕적이라   있다그리고 그렇게 하려는 의지가 바로 ‘선의지.


 그런데 이런 선의지는 일상  우리가 그렇듯행하기가  어렵다사람에겐 누구나 자기 본위의 욕구가 있으니까 말이다이런 자신의 경향을 극복하고 선의지를 발휘하기 위해선 아무래도 의무로 강제되지 않으면 안된다하여칸트는 도덕적이 되는 것을 정언명령으로  것이다정언명령그것은 아무런 핑계를   없는무조건적으로 따라야 하는 명령이다그리하여 ‘너의 의지와 준칙이 항상 동시에 보편적 법칙 수립의 원리로서 타당할  있도록그렇게 행위하라(p. 168)’ 도덕법칙  최상위 법칙인 정언명령이 만들어진다여기서 기존의 상식적인 견지에서 보자면 무척이나 새로운 자유 개념 도래한다당시 사람들에겐 자유란  뜻대로 마음대로   있는  자유인데칸트에겐 거꾸로  뜻이 아니라 의무로 부과되는 당위를 따를 때가 진정한 자유이기 때문이다우리는 일단 동물이다그런 이상 자연스럽게 식욕성욕과 같은 동물적 욕구를 가지고 있다백종현 교수에 따르면 라이프니츠는 ‘단자론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사람은 4분의 3 동물적이다.(p. 183)

 

 

 나도  동감한다그런 욕구는 오로지 나만의 충족을 추구하므로 대부분 도덕적 관계를 쉽게 해칠  있는 것들이다그런 욕구를 따른다는 것은  자유를 누림이 아니라 사실 내게 있는 동물적 욕구에 노예처럼 순종하는 것이다그러므로 그것에 저항하여  모든 동물적 욕구에 위배되는 의무로 부과된 정언명령을 따를 때야말로 진짜 자유라는 칸트에 말에 고개가 끄덕여질 수밖에 없다이는 또한 자신을 그저 욕망 충족의 수단으로 삼는 것을 그치는 것이기도 하니 자신의 존엄성을 지키는 길이다.


 앞서 칸트에게 계몽주의란 자신의 이성을  어떤 것에 주눅들지 않고 자유롭게 사용하는 것이라 말한  있다얼마든지 결단하고 용기를   있는 이러한 자유가 칸트가 원한 것이었다면 ‘실천이성비판 통해 어디로 가고자 하는가는 더욱 분명해지는  같다그건 바로 서로의 자유하고 대등하게 공존하는 세상말이다아무도 자신의 동물적 자유를 위해 타인을 수단 삼지 않으며 그가 타고난 존엄 그대로를 인격적으로 존중해주는 그곳이 바로 칸트가 꿈꾸는 세상이다그러기 위해서 칸트는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눈으로 자유를  것을 주문한다실천 이성은 그런 자유에 헌신할  진정한 빛을 발한다는 것도.

 

 

 

 그러나 우리도 얼른 예감하듯이 이런 의무에 따른 삶이 결코 행복할리 없다.

 칸트는 자연 세게와 도덕 세계를 순수이성과 실천이성의 세계로 분리시켰다그러면서 자연 세계 또한 알고보면 우리 인간이 능동적으로 형성하는 것임을 밝혀  지식이 아닌 이념의 도덕 세계 또한 우리가 마음먹고 노력만 한다면 얼마든지 형성 가능하다는  믿게 했다그러나 종교 상의 성인이 아닌 이상 대부분의 우리들은 행복을 자연 세계에서 구한다대다수가 생각하는 행복의 형태란 감각적인 것일테니까 말이다영화 ‘매트릭스에서 사이퍼도 가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맛있는 고기를 실컷 뜯어먹기 위하여 기꺼이 인간을 배신하지 않았던가



 아무리 선의지를 발휘해 정언명령을 따르더라도 언제든 사이퍼처럼 유혹에 빠질  있다칸트가 바라는 세상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선 이러한 배리(背理) 해결할 필요가 있었다그저 거의 무한에 가까운 시간이 걸릴 것이라든가그래서 신을 보상을 요청할 수밖에 없다고 대답해선 안되었다성실한 칸트는 거기에 대해 답할 의무가 있었다. 정언명령을 강조했던 그이기에 당연히 따라야  의무였다.


 그리하여 그는 판단력 비판 썼다.

 그에게 이것은 무엇보다 서로 대척하는 것처럼 보였던 이론 이성과 실천 이성을 조화시키는 작업이었다앞서도 말했듯, ‘판단력 비판 감정에 대해 말한다이것을 낳았던 물음인 흡족함이야 말로 감정의 문제다보다 일반화 하면 쾌와 불쾌에 대한 문제라 말할  있다이런 반응 혹은 인식은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듯이 오직 하나의 직접적인 반응만이 전부인가거기에 대해 칸트는 비판의 메스를 가한다그리고 흡족함과 아름다움 같은 인식엔  하나의 차원이 있다는  알게 된다바로 합목적성말이다. ‘합목적성이란 목적에 합치한다는 뜻으로 쉽게 표현하자면 ‘~답다  것이다그러므로 ‘아름답다  자체에 이미 합목적성이 내포되어 있다고   있다어떤 것에 대해 쾌나 불쾌를 느낄  우리는 단순히 그것만 보지 않고 마음에 있는 어떤 범주에 맞춰 쾌나 불쾌를 결정한다고 생각하면   같다이런 범주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시공간이란 감성적 형식과 양과 질같은 지성적 형식이 만나 지식을 형성했던 과정과 정확히 일치한다칸트는 미적 쾌감 역시 상상력(인식의 시공간처럼 대상의 미를 특정 순간에 합목적적으로 포착하게 만드는 감성적 형식이라   있다.) 지성의 형식이 합일하는 데서 생긴다(p.225) 하고 있으니까 말이다이처럼 감정의 영역인 미적 쾌감 역시 지식 영역과 똑같은 과정을 거친다는 점이 칸트에겐 활로가 되었다대치될 것으로 보였던 지성과 감성이 서로 만나게 되었으니까 말이다그렇게 ‘판단력비판’ 작업을 통해 칸트는 지성이 감성의 영역으로 또한 감성이 지성의 영역으로 나아갈  있다는  밝힌 것이다그렇다면 이론 이성과 실천 이성 또한 못할 것이 없다합치될  있는 것이다다름아닌 판단력을 통해서 말이다백종현 교수는 다음과 같이 ‘판단력 의의를 밝힌다.

 

 판단력에 의해서 지성의 법칙 수립과 이성의 법칙 수립이 연결된다다시 말하면지성에 의해서 자연법칙이 수립되고 이성에 의해서 자유법칙이 수립되는데이렇게 수립된 자연세계에 관한 것과 실천세계에 관한  법칙이 판단력 의해서 통일된다이로써 자연과 자유가 통일이 된다그런데 판단력은 무엇을 가지고   세계를 통일할  있는가그것은 다름 아니라앞에서 말했던  ‘실천이성비판 변증학에서 등장했던 ‘최고선 이념에 의거해서다.(p.234 ~ 235)

 

 그렇다면 어떻게 합치되어야  것인가여기에 의무론적 윤리에 걸었던 칸트의 이상 또한  수명이 결정될 것이다칸트에게 있어 합치란 어디까지나 서로 고유의 영역을 존중한 가운데 이뤄져야 한다그렇다면 자연세계가 실천세계의 법칙을 따를 수밖에 없다반대의 경우엔 실천세계 자체가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이로써 의무론적 윤리를 따라야 한다는 칸트의 생각은 구제되었다물론 여전히 현실화가 요원하긴 하지만 어쨌든 그게 옳은 길이니까 말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여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칸트의 대답 또한 완성되었다백종현 교수는 그것에 관해 이렇게 쓴다.

 

 이렇게 해서 칸트는 이성 비판을 통해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철학적으로 답한다요컨대인간은 세계 인식에서 존재자의 존재를 규정하는 초월적 주관이자행위에서 선의 이념을 현실화해야 하는 도덕적 주체이고세계의 전체적인 합리성과 합목적성을 요청하고 희망하고 믿는 반성적 존재자이다 칸트의 이성 비판은 이로써 우리가 과학적 엄밀성을 가지고 발언할  있는 것은 인식의 세계 진리의 세계에 대해서뿐이지만인간에게 가치 있는 일은 논리적 사고 활동뿐만 아니라 아니 오히려 그보다도 도덕적 완전성그리고 인간의 이상이 마침낸 실현된다는 희망 내지 확신을 가지고 역행(力行)하는 일임을 일깨워준다.(p. 237 ~ 238)


 이 말은 책의 거의 마지막에서 만나게 되는데, 교수의 논지를 죽 따라가다 이 말을 만나고나면 왠지 뭉클해지는 걸 어찌할 수 없다. 한 인간이 평생 걸어서 비로소 도착한 종착지의 모습을 그대로 문자로 형상화해 놓은 것 같아서일까? 여하튼 결코 자신이 사는 쾨니히스베르크를 벗어난 적이 없고(그는 오직 책으로만 여행했다고 한다. 그런데도 알프스 지형을 누구보다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고 한다.) 교우 관계도 그리 넓지 못하여 업무적인 관계를 떠나 만난 유명한 사람이라곤 모제스 멘델스존과 피히테, 헤르더 정도가 전부인데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대의 누구보다 깊고도 확장된 안목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상식과 권위에 결코 타협하지 않고 오직 자신만의 신선한 시야로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해답을 끝내 이렇게 찾아내고야 말았으니까 말이다.


 그러고 보면 칸트는 누구보다 자신이 정의한 계몽주의에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그 어떤 타자에도 기대지 않고, 주눅들지도 않고 결단과 용기로써 이만한 철학 체계를 만들어내었으니까 말이다. 이런 칸트의 태도는 특히나 지금의 우리나라처럼 이념과 성별, 세대 그리고 이주민에 대한 혐오와 적대를 양산하는 가짜 뉴스와 근거 없는 풍문과 선동에 휩쓸리는 사람들이 나날이 많아지는 상황에 더욱 귀감이 될 것 같다. 어느 때인가부터 우리는 어떤 사안과 부딪힐 때마다 자신의 이성을 엄중히 사용하여 사태를 온전히 헤아리기 보다는 점점 더 타인의 말에 기생하여 내 판단과 행동을 결정해버리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먹고 살기 바쁘고 머리 쓰기 귀찮다는 이유를 대면서 말이다. 이러한 포퓰리즘 심화는 비단 우리나라만의 일은 아니다. 전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형편이다. 오죽하면 얼마전 작고한 지그문트 바우만이 현재의 시대를 두고 '레트로토피아'라고 불렀을까. 모두들 칸트가 유념하고 직접 실천했던 계몽의 빛을 스스로 꺼버리곤 고유하고 독립적인 인간이 되기 보다는 그저 언제든 대체가능한 무리 속의 하나로 남게 되는 중세의 어둠 속으로 회귀하여 왜 증오하는 지도 모른채, 누군가 달을 가리키면 그 쪽 방향으로 컹컹 짖고 있는 것만 같다.


 그러므로 '인간이란 무엇인가?'는 결코 칸트만이 되새겨야 할 질문이 아니며 그걸 중심축으로 하여 전개한 사유의 여정 역시 그저 과거의 유물로 치부할 일은 아니다. 오늘의 우리가 자신의 화두로 삼아 깊이 숙고해야할 의문이며 나만의 사유 여정을 위해 곁에 두고 자주 들춰봐야 하는 길잡이인 것이다. 백종현 교수에 따르면, 칸트는 자기가 하는 철학의 소임을 중세 때 흔히 썼던 '철학은 신학의 시녀다'라는 말에 빗대어 이렇게 여겼다고 한다.


 시녀에는 두 부류가 있다. 왕비가 치맛단을 길게 늘어뜨려 끌고 갈 때 뒤에서 끌리지 않게 치맛단을 들고 가는 시녀가 있고, 왕비가 발을 헛디디지 않게, 또는 유혹에 빠지지 않게 앞장서서 등불을 들고가는 시녀가 있듯이, 철학은 신학뿐만 아니라 여타의 학문들이 헛길에 들지 않도록 앞장서 등불을 들고 가는 시녀이다.(p. 79)


  그렇다면 칸트의 철학이야말로 지금의 우리들에게 등불을 든 시녀로 보인다. 날로 치열해지는 경쟁과 팽배해지는 물질 만능주의 속에서 배려 보단 배척이, 존중 보단 갑질이 횡행하는 가운데 언제 어느 때 한낱 수단으로 전락하거나 나 또한 타인을 수단으로만 여기는 괴물이 될 지 모르는 우리들에게 진정한 인간다움을 지켜나갈 길로 인도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물론 그리 쉽게 친해질만한 안내자는 아니다. 하지만 전혀 낯선 상대도 고향이나 가족, 하는 일이나 취미를 묻다 보니 차츰 파악이 되어 그걸 발판삼아 수월하게 친해졌던 경험이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바로 그렇게 사람이 처음 만나 친하게 만드는 일을 이 책, '인간이란 무엇인가'가 하고 있다고 보면 될 듯하다. 분명 읽다보면 나처럼 오리무중이기만 하던 그의 얼굴이 하나하나 그 윤곽을 잡아나가는 걸 경험할 것이다. 이렇게 책의 내용을 나름대로 정리하여 긴 글을 쓴 것처럼 말이다. 그런 길잡이를 만나지 못하여 칸트와 벗하는 일을 미뤄두고 있었다면 얼른 이 책의 초대를 받아들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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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9-01-31 2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리뷰를 읽었더니 도리어 이 책까지 읽어야 하나 생각하게 되네요..... 대단하세요. 언제나 그러셨듯이요.

에일로이 2019-01-31 22:48   좋아요 1 | URL
앗! syo님 이렇게나 반갑고도 기쁜 댓글을 남겨주셔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어요. 언제 한 번 칸트를 제대로 헤아려보고 싶다는 생각으로 늘 손가락만 빨고 있었는데 이 책을 만나 이제 겨우 그 손가락을 입에서 뺄 수 있게 된 듯 합니다. 혹시 칸트의 3대 비판서를 읽어야겠다고 생각하셨으면 이 책을 먼저 읽어보시면 좋을 것 같아요.^^

2019-02-02 01: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2-03 16: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웨스 앤더슨의 영화
휘트니 크로더스 딜리 지음, 최지원 옮김 / 본북스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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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광들의 시대가 지나갔음인지 영화를 진지하게 논의하는 글을 만나기가 어려워졌다. 물론 한 해에 천만 관객을 넘는 영화가 몇 편이나 나올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영화를 보고 있긴 하지만, 소비의 대상일 뿐 진지한 연구나 성찰의 대상은 아니다. 인상 비평과 별점 평가가 주를 이루고 있다는 게 거기에 대한 명백한 증거가 아닐런지. 그런 의미에서 이번에 본북스에서 나온 두 권의 책이 특별히 반가웠다. 작가주의도 퇴조한 마당에 오직 한 감독에 대한 연구로 한 권의 책을 다 채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감독이란, '웨스 앤더슨'과 '미카엘 하네케'다. 모두 영화쯤 본다는 사람에게는 아주 낯익은 이름일 것이다. 깊이 영화를 본다고 자부하는 이에겐 필견의 리스트에 올라 있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현대 영화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존재다. 이 두 사람은 그야말로 작가주의에 어울리는 감독이기도 하다. 스튜디오의 고용 감독 길을 걸은 적도 없고 자기만의 세계가 뚜렷하며 그걸 자신의 작품 속에 내내 누비고 있기 때문이다. 거기다 내가 알기론, 적어도 우리나라에 출판된 책 중에 이 두 감독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서는 없었다. 웨스 앤더슨과 미카엘 하네케의 영화에 대해 전문적으로 쓴 책은 이 두 책이 유일하지 않을까 한다. 그래서 그 책이 어떤 책이냐고?



 그건 바로 '웨스 앤더슨의 영화'와 '미카엘 하네케의 영화'다. 이게 제목이다. 참 심플한 제목이 아닐 수 없다. 이 책은 번역서인데, 원래 제목도 그랬다. 작가주의 감독답게 감독의 이름만으로 충분히 브랜드가 될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일까? 아니면 미사여구 없이도 충분히 좋은 책이라는 자신감 때문이었을까? 어쨌든 당당히 이 제목을 내걸었고 두 책을 다 읽은 지금, 그 제목은 자신감의 표현이란 걸 알았다.


 웨스 앤더슨도 미카엘 하네케도 개인적인 추억담이 있어서, 어느 걸 먼저 리뷰로 쓸까 약간 고민했다. 뭐, 순서 같은 건 별 상관 없지만. 그래도 처음 만난 게 웨스 앤더슨이니, 그 감독의 책부터 리뷰하기로 한다. 말하자면 지금까지의 얘기는 다 사설이었다는 거다. 책은 참 좋은데 이걸 다 설명하자니 분량이 너무 넘쳐나고 그렇다고 상세한 얘긴 생략하고 총평만 하자니 또 너무 부족하여 꼼수를 부려 이렇게 분량을 어거지로 채운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색인까지 다 합해 426 페이지에 이르는 이 책은 모두 세 파트로 나눌 수 있다. 첫 파트는 총론 같은 것으로 감독에 대한 일반론적 해설이 있다. 그의 이력이라든지, 미국 문화에서 차지하는 위상이라든지, 그런 총체적인 것을 두 편의 글을 통해 설명한다. 본격적인 작품에 대한 연구는 그 뒤다. 두 번째 파트는 웨스 앤더슨이 지금까지 감독한 영화들을 모두 한 편씩 다루고 있다. 96년에 발표한 데뷔작 '바틀로켓'부터 잘 알려지지 않은 그의 단편 영화와 상업 광고까지 말이다. 한 마디로 그의 모든 영화에 대해 어디서도 들을 수 없었던 상세한 분석을 만나볼 수 있는 책인 것이다. 그러니 웨스 앤더슨의 영화를 좋아하고 그의 작품 세계에 대하여 관심이 많다면 만사를 제쳐두고 만나야 할 책이 아닌가 한다. 이쯤에서 개인적인 추억담 같은 걸 하나 덧붙인다면, 나는 그를 아직 유명해지기 전, 비디오테이프를 통해 처음 만났다. 98년, 우리나라에 그의 데뷔작 '바틀로켓'이 비디오테이프로 나온 것이다. 96년에 나와 그렇게 커다란 흥행을 못했는데도 98년 나온 것을 보면, 우리나라 비디오 시장이 그래도 영화광들에겐 꽤 풍요한 편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바틀로켓'은  지금은 물론 DVD 시절에도 나오지 않았었다. 어쨌든 그 때 처음 보고 너무나 독특한 이 작품에 매료되어 웨스 앤더슨이란 이름을 뇌리에 박아두게 되었고 그 뒤 '맥스군 사랑에 빠지다'를 이후로 그의 팬이 되었다. 앤더슨의 영화를 다 좋아하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나는 이 '바틀로켓'과 '다즐링 주식회사'를 좋아하는데, 그건 첫 만남이어서 그렇기도 하고 가장 자유분방한 분위기라서 그렇기도 하다. 뭔가 좀 헐겁고, 뭔가 좀 방만한 것이 내가 좋아하는 앤더슨의 세계라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별 필요도 없는 얘길 해버렸는데, 오래전 그의 영화를 처음 보았을 때가 갑자기 그리워졌기 때문이기도 하고 이미 책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을 다 한 터라 또 한 번의 꼼수를 부려 분량을 늘인 것이기도 하다. 글이 가볍고 별 내용이 없어 책도 그러하다고 생각하지 말길 바란다. 모처럼 비평다운 비평을 만나볼 수 있는 좋은 책이니. 책의 날개를 보니 영화 전문 서적을 꾸준히 발간할 모양이다. 루키노 비스콘티와 난니 모레티의 책이 무척 기대가 된다. 1인 출판사라고 하는데 부디 잘 되어서 계획한 책을 다 내줬으면 좋겠다. 열심히 응원한다.(이런, 끝도 이상해져 버렸군.)


이 영화를 좋아해서 아직도 소장하고 있는 '바틀로켓' 비디오 테이프 / 인증합니다.

오엔 윌슨과 루크 윌슨의 푸릇푸릇한 모습을 볼 수 있는데, 비디오 표지에 '텍사스 소년들'이란 말이 세월의 간격을 느끼게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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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스트맨 - 인류 최초가 된 사람 : 닐 암스트롱의 위대한 여정
제임스 R. 핸슨 지음, 이선주 옮김 / 덴스토리(Denstory)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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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닐 암스트롱.

 그의 이름은 세계에서 가장 많이 기억되는 이름 중 하나이다. 그도 그럴 것이 달에 인류 최초로 발을 디딘 사람이니까. 1969년 7월 20일 일요일, 아폴로 11호는 달에 무사히 착륙했고 인종과 성별, 종교와 이념을 초월하여 전 세계인이 하나가 되어 숨죽이며 지켜 보는 가운데 닐 암스트롱은 착륙선의 사다리를 천천히 타고 내려와 드디어 자신의 발자국으로 인류의 흔적을 남겼다. 그는 말했다. 


  "이것은 한 사람에게 있어서는 작은 발걸음이지만 인류에게 있어서는 커다란 도약이다."


 달 착륙 50주년을 맞이하여 발간된, 2005년에 발표된 우주 항공 역사를 주로 연구하는 제임스 R 핸슨의 '퍼스트 맨'은 저 말과 함께 우리의 뇌리 속에 깊이 각인된 이름의 주인공이기도 한 닐 암스트롱의 일대기를 다룬다. 물론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역시 달에 착륙하기까지의 과정이다. 사실 너무나 익숙한 이름이긴 하지만 정작 그의 삶에 대해서도, 달 착륙이 어떻게 이뤄졌는지에 대해서도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그랬기에, 지금도 여전히 사람들을 의혹 속에 빠지게 만드는 '달 착륙 음모설'에도 쉽게 마음이 흔들렸다. 그러나 책을 통해 암스트롱의 삶과 달 착륙에 관련된 모든 과정을 다 알게 된 지금, 난 단언할 수 있다. 달 착륙 음모설은 헛소리라고. 이들이 인류의 커다란 도약을 위해 무려 천 시간이 넘는 모의 비행을 하고 몇 년에 걸쳐 목숨까지 걸면서 훈련한 것을 안다면 절대 음모라고 말할 수 없다. '퍼스트맨'은 그런 과정의 작은 나사 하나까지도 다 담고 있는, 그야말로 닐 암스트롱의 삶과 달 착륙 전부에 대한 상세한 기록이며 그것으로 달 착륙 음모설을 우주 저 멀리로 날려보내는 책이다.







 닐 암스트롱은 두 살  때 처음으로 비행기 장난감을 가진 뒤로 내내 삶의 중심에 비행기가 있었다. 그는 오직 모형 비행기를 만드는 일에만 열중했으며 청소년기의 어느 때인가엔 이런 꿈을 계속 꾸기도 했다.


 "꿈 속에서 숨을 참으면 공중에 떠서 빙빙 돌 수 있었어요. 그렇다고 대단한 일이 일어나지는 않았어요. 꿈에서 나는 하늘 위로 날아오르지도, 당으로 떨어지지도 않았어요. 그저 빙빙 돌기만 했어요. 어정쩡해서 좀 답답했죠. 꿈에는 어떤 결말도 없었어요.(p. 53 ~ 54)


누군가는 이 꿈이 예지몽은 아닌가 생각할 것이다. 이 꿈은 달 주위 궤도를 빙빙 도는 아폴로 우주선과 많이 닮았으니까 말이다. 어쩌면 정말로 그의 운명은 달 착륙으로 정해져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닐 암스트롱이 어릴 때 과학 선생님은 언젠가 그에게 장래 계획을 물었는데,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언젠가 저 달에 있는 사람을 만나고 싶어요."


 그는 열다섯 살 때부터 시간당 9달러인 비행 훈련 비용을 모았고 주말마다 와파코네타에 있는 챔프 비행기 세 대 중 한 대를 타고 비행 훈련을 했다. 그는 수많은 비행을 통해 어떻게 하면 좀 더 잘 날을 수 있을까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 관심은 그를 저절로 항공 공학 쪽으로 이끌었다. 그런데 시대가 변하고 있었다. 흐름은 단순한 항공에서 이제 항공우주공학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 변화를 실감하면서 닐 암스트롱은 자연스럽게 비행사로서의 정체성을 새롭게 바꾸게 되었다. 항공 엔지니어의 정체성으로. 그것이 평생 자신의 직업 정체성이 되었다. 그는 NASA에서 우주비행사로 활동할 때도 단 한번도 자신을 우주비행사라고 생각한 적이 없다. 오로지 그는 항공 엔지니어일 뿐이었다. 이런 사실은 이 책을 읽기 전까지 전혀 모르고 있었던 사실이었다.


 몰랐던 것은 또 있다. 아폴로 11호에 닐 암스트롱과 함께 탔던 버즈 올드린의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다는 것이다. 물론 과묵하고 오직 자기 일에만 집중하는 닐 암스트롱이 사사로운 감정으로 올드린과의 사이가 나빠졌다는 건 아니다. 사실 그는 사이가 나빠졌는지 아닌지조차 몰랐다. 그런 쪽에 아예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버즈 올드린은 달랐다. 평범한 가정에서 엔지니어로 경력을 쌓아온 닐 암스트롱과는 다르게 아버지가 장성이고 대대로 높은 계급의 군인 집안 출신에다 현역 대령이었던 버즈 올드린은 명예욕이 강했다. 사실 뒤늦게 버즈 올드린을 닐 암스트롱 팀에 합류시키려 했을 때, 책임자가 닐에게 와서 다른 사람을 넣으라고 했다고 한다. 올드린 때문에 팀에 불화가 생기지 않을까 염려했던 탓이다. 과연 올드린은 누가 달에 첫 발을 딛느냐를 두고 계속 신경쓰면서 그걸 자신이 하기를 바랐다. 만나는 사람마다 그 문제에 대해 언급했고 누가 첫 발자국을 딛는지 빨리 결정하지 않는다고 불만을 지속적으로 제기했다. 처음으로 달을 밟는 것이 자신의 이름을 인류가 마지막으로 존재하는 그 날까지 기억하게 할 것이란 걸 알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닐은 그런 것엔 아무 관심이 없었다. 착륙선이 달에 무사히 착륙하는 것이 관건이지 누가 처음으로 달을 밟는가 하는 것은 지극히 사소한 문제라고 생각했다. 결국 첫 발자국은 닐이 밟기로 결정났다. 이를 두고 공학적 이유 때문이라고 설명했지만 그건 공식적일 뿐, 사실 그걸 결정하는 책임자들이 올드린의 인성 때문에 날을 고른 것이었다. 이렇게 명예를 바라는 사람은 오히려 명예가 멀어지고, 전혀 바라지 않은 사람엔 그 쪽에서 찾아온다. 닐과 올드린의 이야기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넌지시 알려주는 것이기도 하다. 


 닐이 무심했던 것은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일에 관심이 없어서였다. 그는 자신이 달을 처음 받는 사람이 되어도 그건 자기 혼자 힘이 아니라 모두가 협력한 결과라는 걸 잘 알았다. 아폴로 11호 뿐만 아니라 그 전부터 11호의 달 착륙을 성공시키기 위해 무수히 거듭해온 연구와 훈련 과정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이 다 받아야할 영예라는 것도 잘 알았다. 그는 자신이 거대한 기계 속 하나의 작은 부품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바로 그 겸허가 인류의 커다란 도약을 이끌어 낸 것이기도 했다.


 이처럼 '퍼스트맨'은 참으로 많은 것을 알려주는 책이었다. 닐 암스트롱 개인의 삶 뿐만 아니라 달에 착륙하기까지 어떤 여정을 거쳤는지를 포함하여 삶의 어떤 혜안까지 넌지시 깨닫게 만드는 책이었다. 600 페이지가 넘는 좀 부담스런 분량이긴 하지만 제임스 R 랜슨이 잘 써서 그런 건 별로 부담이 되지 않는다. 닐 암스트롱과 달 착륙에 대하여 평소 궁금한 것이 있었다면 꼭 보시라고 추천드리고 싶다. 만족감을 그득 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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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8-12-17 05: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시민 작가가 달 착륙 음모설을 아직까지도 의심하고 있다가 김상욱 박사가 동공 지진으로 유시민 작가를 바라보며 차근차근 설명하던 장면이ㅜㅋㅜ...알쓸신잡 출현 안 했음 유시민 작가 언제까지 그랬을 건가 식은 땀이;;;

에일로이 2018-12-18 10:43   좋아요 0 | URL
저도 알쓸신잡을 보진 못했지만, 그렇다면 유시민 작가야말로 이 ‘퍼스트맨‘을 꼭 읽어봐야 한다는 생각이 드네요^^ 이 책을 읽으시면 더 식은 땀을 흘리실듯^^
 
문익환 평전 - 문익환 탄생 100주년 기념 특별판 문익환 평전
김형수 지음 / 다산책방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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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게 문익환이라는 이름은 낯익은 것이다. 하지만 정작 그의 삶에 대해선 그만큼 친숙하지 못하다. 아는 건 이름과 목사라는 그의 직업 그리고 단편적으로 접했던 그가 했던 일 정도. 가장 큰 기억은 역시 단신으로 북으로 가 김일성을 만난 일이다. 때는 1989년. 87년의 6월 항쟁으로 6.29 선언이 있긴 했지만 그래도 국가보안법의 서슬이 퍼렀던 시절이다. 국가의 허락 없이 북으로 넘어간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무엇이 그를 감행하게 만든 것일까? 그 일을 들으면서 난 그게 가장 먼저 궁금했다. 그의 발길을 이끈 것. 마치 자력처럼 거기로 가야만 한다고 끌어 당긴 것이 과연 무엇인지 궁금했다. 얼마 전 싱가포르에서 북미회담이 성공적으로 열리고 이제 평화 시대로 가는 길목에 서 있으니 더욱 궁금해진다. 마침 올해가 고 문익환 목사가 태어난지 100년이 되는 해라고 한다. 그 100년에 남북관계에 이토록 커다란 성과가 주어졌으니 어쩌면 지금은 하늘에 있는 그의 가호가 함께 한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의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여 시인 김형수가 쓴 '문익환 평전'이 특별판의 모습으로 새로이 나왔다. 맞다. 첫 출간이 아니다. 14년 전에 실천문학사에서 나온 바 있다. 나는 그 때 만나지 못했다가 특별판으로 비로소 만났다. 이제야 그 궁금증을 풀어 볼 기회를 간신히 가지게 된 셈이다.




 읽어 보니 평전이라는 게 참 무서운 것이더라. 어쩌면 이 책에만 해당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이토록 한 사람이 걸어 온 삶의 길을 낱낱이 파헤치다니! 마치 그가 돌길을 걸었다면 그가 밟은 돌 하나하나를 전부 뒤집어 보여주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만큼 문익환 목사의 삶이 온전히 그리고 생생하게 복원되어 있다. 그의 삶의 결을 세부에 이르기까지 알고 싶은 이에겐 정말 좋은 선물이 될 것 같다. 하지만 이 책은 전기가 아니고 평전이다. 대상이 되는 인물에 대한 저자의 평가가 들어가 있는 것이다. 이 책을 읽어보니 그냥 전기를 쓰는 것보다 평전을 쓰는 게 더 어려운 것 같다. 전기는 있는 사실을 잘 정리해 쓰면 되지만 평전은 저자의 평가까지 들어가니까 말이다. 그런데 너무 주관적으로 쓰면 독자의 공감을 얻기 힘들다. 좋은 전기란 언제나 독자에게 공감을 이끌어내고 감동까지 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공감과 감동은 특히나 저자의 평가의 경우 독자들이 따져봐도 객관적으로 올바를 때, 적어도 납득될 때 가능하다. 결코 자기 기분이나 주관에 좌우되어선 안되며 사실을 바탕으로 냉철하게 분석하면서 독자들이 미처 헤아리지 못한 깊은 뜻마저 설득력있게 짚어줄 수 있어야 한다. '문익환 평전'은, 감히 말하건대, 그렇게 한다. 그런 책이다. 김형수는 문익환 목사의 일대기를 일화나 업적 소개에 그치지 않는다. 문익환 목사가 삶을 걸으며 어떤 선택을 할 때, 단순히 한 개인의 삶 차원에서 그것을 평가하는 것도 아니다. 문익환 목사의 선택을 김형수는 언제나 사회나 민족 그리고 시대 전체의 맥락 안에다 두고 의미를 살피고 가치를 평가한다. 그러므로 여기엔 문익환 목사의 삶만 있지 않다. 그와 함께 연동하면서 유기적으로 움직이는 사회와 민족, 시대의 초상까지 같이 어우러져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더욱 공감하고 문익환 목사의 삶에 감명 받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개인의 삶은 개인의 삶으로 그치지 않는다. 수면 위에 생겨난 작은 동심원도 스쳐가는 바람을 만나 수면 전체를 변화시키는 파문이 될 수 있듯이 아무리 작은 개인의 삶도 결국엔 전체의 삶과 결부되어 상호 영향을 주고 받기 마련이니까 말이다. 그런 개인의 삶에 의해 역사 전체가 새로운 물줄기로 흐르는 것도 역사 속에서 얼마나 많이 보아왔는가? 김형수의 '문익환 평전'은 단순히 문익환 목사의 삶을 잘 알려준다는 것을 넘어 개인과 시대가 어떻게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받는지 잘 알려주는 책이기도 하다. 시대가 없이 개인이 있을 수 없듯이, 시대 역시 개인이 없으면 있을 수 없는 것이란 걸 말이다. 어쩌면 바로 그것이 문익환 목사의 삶을 방관자에서 참여자로, 상아탑에서 민중이 고통 받는 현장으로, 기독교라는 종교의 세계에서 세속의 세계로, 지켜보는 자에서 막중한 책임을 스스로 떠맡는 자로 만들었을 지도 모른다. 이 책은 그런 것을 보여준다. 변하기 전 그도 한낱 필부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그런 필부가 시대의 거인이 된 것은 타고난 것이 아니라 실수와 후회에서 배우고 과오를 올바른 각성 속에서 반복하지 않으며 앞으로 나서고 기꺼이 넘어질 수 있는 용기를 가졌기 때문이라는 것을. 그것이 바로 뒤늦게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여 스스로 늦봄이라 자신을 칭했던 문익환 목사의 삶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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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자이너
나오미 울프 지음, 최가영 옮김 / 사일런스북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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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오미 울프는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페미니스트 작가 중 한 사람이다. 그녀는 언제나 나의 고정관념에 강력한 의문을 제기하고 이면의 진실을 발굴하여 그것을 전복시켰다. 여자에게 강요된 아름다움에 대해 쎴던 '무엇이 아름다움을 강요하는가'가 그랬고, 예전 한 칼럼에서는 페미니즘이 극우 이데올로기와 친화성이 있다는 것을 설득력 있게 보여주기도 했다. 원래는 2012년에 나왔지만 최근에 번역 간행된 '버자니어'는 여성의 성에 대해 내가 가지고 있었던 고정관념을 무너뜨린다. 이 책은 단적으로 버자이너와 뇌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 말은 여성의 경우 성적 쾌락이 오로지 육체적인 것에서만 오지 않고 정서적인 것에서도 매우 많이 온다는 것을 뜻한다. 다시 말해 여성은 몸과 감정 모두가 만족해야만 오르가슴을 느끼도록 되어있다는 것이다. 


 일단 해부학적으로 그러하다. 여성의 골반은 신경계가 단순하게 분포되어 있는 남성의 생식기와는 다르게 수많은 신경계가 아주 복잡하게 얽힌 구조로 되어 있다. 게다가 그 얽힘이 일반적이지 않고 모든 여성이 저마다 다 다르다. 여성 개인은 오직 혼자만의 골반 신경계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모든 여성은 저마다 개성적인 신경망 얽힘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어떤 여성은 신경 분지가 질에 더 발달해 있고 어떤 여성은 신경 분지가 음핵에 더 많죠. 회음부나 자궁경부에서 신경 가닥이 집중적으로 분지된 여성도 있습니다. 그러니 성적 반응의 개인차가 벌어지는 게 당연하죠."(p. 24)


 그러므로 여성에게 성행위와 성생활에 있어서 일반론은 없다. 지금까지 우리가 사람을 통해서나, 책을 통해서 들었던 모든 여성의 성에 대한 지식들은 지극이 운이 좋아야만 적용될 수 있는 헐거운 틀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는 여성에게 마치 하나의 정답이 있는 것처럼 강요해왔다. 그 때문에 사회가 요구한 것과 다르게 느끼는 여성들은 가지지 않아도 좋을 수치심과 죄책감을 가져야 했다.


 문화와 가정교육이 여성의 성에 어느 정도 영향을 주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이런 사고방식은 많은 여성에게 억울한 죄책감과 수치심을 안기거나 여성으로 하여금 내가 변태가 아닌가 하는 자괴감에 빠지게 만든다. 자신이 애인에게 오럴 섹스를 그의 전 여자친구보다 더 많이 요구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가? 질과 항문 모두 만져 달라고 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 창피한가? 가끔 절정까지 오래 걸리건 절정이 모호한 것과 같은가? 여기서 주목. 그건 당신의 할머니가 양손을 이불 위애 고이 포개고 자라고 가르쳤거나 중학교 때 수녀 선생님이 유독 무서웠기 때문이 아니다. 당신은 애인의 전 여자친구보다 성적으로 흥미가 덜한 사람이 아니고 더 엄격하게 길러지지도 않았다. 어떤 잠자리를 좋아하고 원하든, 모든 여성의 저마다 다른 성적 성향은 온전히 신경계의 물리적인 구조에서 오는 것일지 모른다.(p. 33)


 


 책이 강조하고 있듯이 우리가 때로 자신에 대해 어떤 자괴감이나 죄책감에 젖는다면 그건 아마도 우리 몸을 너무 모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사회는 우리가 그런 쪽에 관심을 갖고 알려고 하는 것을 부끄러움과 죄책감과 연결시켜 지레 못하게 만들었으니까. 프랑스의 철학자 미셀 푸코가 '성의 역사'에서 특히 자위와 관련하여 탁월하게 보여주지 않았던가? 개인이 성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을 통제하여 수치심을 느끼도록 함으로써 사회 권력의 지배를 공고히 해 왔다는 것을. 역사적으로 사회는 언제나 성 담론을 지배하고 관리함으로써 개인의 주체성을 박탈하고 쉽게 순응하는 존재로 만들었다. 그러므로 자신의 몸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은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며 오히려 사회에서 자신을 해방시키기 위한 저항적인 실천이라 할 수 있다. 나오미 울프의 '버자이너'는 그런 해방의 동력을 가져다 주는 책이다. 요즘 한창 일어나고 있는 탈 코르셋 운동이 증명하듯이, 생각해 보면 여성은 언제나 자신의 몸에서 소외되어 있었다. 자신의 몸을 자신의 눈으로 직시하기 보다는 남들이 만든 틀에 맞춰 바라보기 일수였다. 그러므로 자신의 몸에 따라 개인적인 요구를 하려해도 언제나 슬며시 일어나는 죄책감 속에서 남의 눈치를 봐야했다. 그러나 '버자이너'는 단호하게 말한다. 그런 자신을 전혀 죄스러워할 필요도, 남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다고.


 사실상 모든 여성이 적절한 환경만 조성되면 오르가슴에 도달한다는 최신 연구 결과가 많이 나와있다. 이렇게밖에 표현 못 해서 미안하지만, 이렇게 많은 여성이 성욕 결핍과 좌절, 의욕 상실로 고통받는 것이 혹시 남자들이 여자에 대해 잘못 배워서 자신이 뭘 하고 있는지 모르기 때문 아닐까?(p. 109)


 더구나 '버자이너'가 누누이 강조하듯이 여성의 경우 특히 몸은 마음과 별개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강간의 경우, 그것은 단순히 몸을 범하는 것으로 그치는 게 아니라 인격적 살인에 해당한다. '버자이너'는 대표적으로 시에라리온 내전 중 병사들에게 무자비하게 강간당한 여성의 모습을 통해 강간이 얼마나 여성의 정신을 파괴시키는지 보여준다. 그러므로 강간은 아주 무서운 죄이다. 


 강간은 영구적인 신체 손상을 남길 수도 있는 고도의 강력범죄다. 그러나 사람들은, 심지어 그 짓을 저지르는 당사자조차도, 무기가 사용되거나 다른 신체적 상해, 멍 혹은 핏자국이 남지 않는다면 강간이 그저 '강제적인 성관계'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최근 연구들은 데이트 성폭행을 비롯해 경범죄의 탈을 쓴 강간의 공포와 폭력성이 뇌와 온몸에 각인되어 피해자의 심신을 평생 괴롭힌다고 말한다. (...) 또한 오래전에 입은 성적 외상이 전혀 상관없는 것 같은 현재의 만성적 통증 감각을 심화시킨다는 최근의 분석 결과도 존재한다. 즉 옛날에 성폭행이나 성적 학대를 당했던 사람은 훨씬 나중에 아무 관련 없어 보이는 다른 병을 앓게 되면 그 통증을 보통 사람보다 훨씬 더 크게 느낀다는 얘기다. 코디 박사는 이 상관관계를 거의 확신하고 있어서 '강간이 곧 통증'이라고 말한다.(p. 138)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법원은 그 위중함을 아직 인지하지 못하고 있으니 하루빨리 이런 연구결과가 널리 알려졌으면 좋겠다.


 이렇게 '버자이너'는 여성의 성에 대해, 정말로 묻고 싶었으나 어디서도 쉽게 들을 수 없었던 대답을 그것도 아주 제대로 들려주는 책이다. 나오미 울프는 들어가는 말에서 이런 말을 했다.


 오늘날 우리가 여자로 살아가는 게 불편한 이유 중 하나는 여자의 몸과 버자이너를 가리키는 언어가 형편없다는 것이다. 일이 이렇게 된 것은 무엇보다도 버자이너가 그냥 살덩어리라는 잘못된 인식 탓이다. 하지만 여성의 성적 쾌락의 요체는 생식기만도 쾌락만도 아니다. 여성의 성적 쾌락은 여성의 자기 인식과 긍정적 태도, 창의력과 용기, 집중력과 추진력을 매개하며 여성에게 초월적 황홀경과 해방감 비슷한 감정을 선사한다. 다시 말해 버자이너를 제대로 이해한다는 것은 버자이너가 뇌의 연장선상일 뿐만 아니라 영혼의 일부라는 것을 깨닫는 것을 의미한다. (p. 5)


 작가가 말하듯, 정말로 자신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우울과 불안에 휩싸이게 되는지도 모른다. 하여, 자신의 몸이 가진 진실에 대해 알고 싶어졌다면 '버자이너'가 좋은 첫걸음이 되어 주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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