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편집광의 비밀서재
릭 바이어 지음, 오공훈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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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읽는 것도 먹는 것과 같다.

 어떤 책들은 지루해서 젓가락으로 깨작거리듯 읽게 되지만 또 어떤 책들은 너무도 재밌어서 숟가락으로 떠 먹는 것도 성에 안차서 숫제 주걱으로 퍼먹듯 읽게 된다.

 

 역사 속 발견과 발명의 순간에 일어났던 자잘한 일들을 소상히 알려주는 책,

 릭 베이어의 '과학편집광의 비밀서재'는 내게 있어 후자 쪽에 속했다.

 

 

 

 

 

 첫 페이지를 열자마자 연금술과 성경에 얽힌 이야기가 흥미진진해서 그 자리에서 보너스 페이지의 마지막 유명인들의 특허까지 다 읽어버렸다. 그만큼 페이지가 쉽게 넘어가도록 재밌게 쓰여진 책이기도 하지만 마치 알사탕을 한 개씩 까먹듯 한 알 한 알 새롭게 드러나는 과학적 발견 발명에 얽힌 사연들이 달콤한 흥미로움으로 자꾸만 뒷 얘기들을 읽지 않을 수 없게끔 만들었기 때문이다. 새삼 릭 베이어가 다큐멘터리쪽 뿐만아니라 글에도 무척 재능이 있음을 느끼게 되었다.

 

 릭 베이어는 역사 다큐멘터리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번쯤 그 이름을 들어보았을 법한 작가다.

 

 

 

릭 베이어의 모습

 

 

 무엇보다도 '라이트 형제의 도전'이 있고 각 종 상을 수상하여 더욱 그를 유명하게 만든 미국 혁명이 일어난 그 첫 순간을 다룬 '혁명이 시작된 날'이라는 다큐멘터리도 있으니까. 그 중 특이한 것으로 'Timelab 200' 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건 역사 속에 일어난 200가지 사건들을 모아 만든 다큐멘터리로 지금 말하고 있는 책인 '과학편집광의 비밀 서재'는 바로 이것에 바탕을 두고 만들어진 책이라 할 수 있다. 사실 릭 베이어는 그 'Timelab 200'을 기초로 하여 죽 분야별로 계속 써오고 있는데 그렇게 2003년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알아두면 좋을만한 놀라운 이야기를 묶어 'The Greatest Stories Never Told'를 2003년에 썼었고 그 뒤 2005년엔 잘 알려지지 않은 대통령들의 놀라운 일화를 다룬 'The Greatest Presidential Stories Never Told'를 썼었으며 바로 그 뒤이어 나온 것이 2007년 'The Greatest Science Stories Never Told', 즉 '과학 편집광의 비밀 서재' 이 책인 것이다.  잘 알려지지 않은 놀라운 과학 이야기가 '과학 편집광의 비밀 서재'라는 제목으로 바뀐 내막을 잘 알 수 없으나 아무튼 제목 그대로 이 책엔 모두 100개의 잘 들어보지 못했던 놀라운 과학 이야기가 실려 있다.

 

 

 

 

워낙에 역사 지식에 있어 해박하기로 유명한 작가인데다가 독자의 관심을 잡아 두는 스토리텔러로서의 능력 또한 탁월하기에 100여 가지의 이야기가 전혀 지루하지 않게 읽힌다. 또한 각 이야기마다 새로이 알게 되는 것들이 많아 지적 만족 또한 채워준다. 아마도 이 책이 아니었다면 여성들이 세상을 지배해야 이 사회가 멸망당하지 않는다고 굳게 믿었기 때문에 그러한 젊은 여성들을 대변할 강력한 영웅 캐릭터로 원더우먼을 창조한 사람이 바로 최초로 거짓말 테스트 방법을 만들어 그 때문에 거짓말 탐지기의 아버지라 불리는 윌리엄 마스턴이라는 사실을 알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윌리엄 마스턴이 자신이 믿는 신념에 따라 창조한 최초의 여성 슈퍼 히어로 원더우먼.

사진은 영원한 원더우먼의 히로인인 린다 카터가 TV시리즈에서 원더우먼으로 변신한 모습.

 

 

 또한 최초의 기계식 컴퓨터가 사실은 에디슨의 백열전구 보다 50년 앞서 발명되었다든지 최초의 인터넷은 무려 우드스탁 페스티벌이 일어났던 해인 1969년에 이미 비밀리에 탄생했다는 것도 몰랐을 것이다. 또한 청진기는 사실 신사 체면으로 여자 가슴에 바로 귀를 대로 들을 수가 없어서 만들어진 존재라는 것도 지금은 유원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거대 관람차가 사실은 1893년 컬럼비아 박람회 때 파리 박람회 때 만들어진 에펠탑을 능가하기 위해서 의욕적으로 만들어진 전시물이었다는 사실 또한 몰랐을 것이다. '과학편집광의 비밀 서재'는 바로 그런 의미에서 정확한 제목이 된다. 이 책에 실린 대부분의 이야기들은 그야말로 과학에 편집광적이지 않았다면 찾아낼 수 없었을 사실들로 가득하니까 말이다.

 

  이 책은 한 마디로 알아가는 즐거움이 있는 책이다. 그런 즐거움을 좋아하시는 분들이라면 뷔페에 갔는데 자기가 좋아하는 음식만 가득 나와있는 기쁨을 느낄만한 그런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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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래압력은 어떻게 세상을 치유하는가 - 소속감에 대한 열망이 만들어낸 사회 치유의 역사
티나 로젠버그 지음, 이종호 옮김, 이택광 감수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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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우리에게 2PM 이전에 우람한 근육으로 무장한 짐승남들의 매력을 물씬 느끼게 해 준 영화가 있었으니,

  그게 바로 잭 스나이더 감독의 영화 '300'이었다. 그 300명의 스파르타 전사들이 수만명의 페르시아 대군을 막아내었던 역사에서 실제 일어났던 일을 영화로 만든 이 작품을 보면서 사실 궁금했던 것 하나가 있었다. 

 

 

 아무리 그들이 용맹하다고 하나 그래도 겨우 300에 불과한 그들이기에 엄청난 숫자로 몰려오는 대군을 직접 눈으로 보게 된다면 두려움에 젖어 싸움을 피한다거나 몸을 사리게 될만한데 그 누구도 제 한 몸 살자고 뒷 걸음질 치지 앟고 오히려 혹시나 자기가 동료들보다 뒤질세라  적극적으로 나서서 싸우는 것을 보면서 과연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만드는 것인지 궁금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그들의 군령이 엄한 것도 아니었다. 전투에 임하는 것을 전사들의 자의에 대부분 맡겨두고 있는데도 그들은 한결같이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싸웠다. 때문에 그 이유는 하나밖에 없어 보였다. 바로 전사들이 바라보는 동료들의 모습 때문이었다. 자기 주위의 동료들 모두가 하나같이 두려워하지도 않고 피하지도 않고 앞다투어 전장으로 달려나가 싸우고 있으니 설마 정말 겁먹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주위의 분위기상 그것을 그대로 드러낼 수가 없었던 게 아닐까. 오히려 더욱 그러한 두려움을 자기 혼자만 느꼈다는게 수치스러워서 그것을 끊어내듯이 일부러 더 세차게 창을 휘둘러 대었던 게 아니었을까.

 

 생각해보면 사람은 알게 모르게 주위 사람들의 영향을 참 많이 받는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라는 속담도 있듯이 표나지 않게 두루두루 섞이는 걸 더 선호하는 한국인은 더욱 그렇다. 그만큼 우리들은 속한 분위기를 무시하기가 어려운데 바로 그러한 주위 분위기로 부터 받는 압력, 즉 같은 동료들로 부터 받는 압력을 바로 '또래 압력(PEER PRESSURE)'이라 부른다. 일종의 '사회적 압력'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데 사람이 이것을 무시하기 어려운 이유는 자신이 속한 또래 집단에서 인정받고 동화되는 과정에서 이탈할 경우 생기는 소외감과 스트레스를 피하기 위해서 무의식적으로 눈높이를 맞추려고 노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동안 이러한 '또래 압력'은 왕따나 이지메와 같은 현상과 맞물려 부정적인 것으로만 인지되어 왔다. 사실 이 '또래 압력'에 대한 불편한 시선은 사실 사트르트에서 부터 있어왔다. 솔직히 사르트르는 타자를 자신이 진정한 주체로 있지 못하게 만드는 방해물 같은 것으로 여겼다. 그래서 그는 '검은 얼굴 하얀 가면'을 썼던 프란츠 파농이 알제리 해방을 의논하기 위해 방문했을 때 새벽에 찾아왔다는 이유로 거절한 적도 있었다. 또래 압력에 대해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마도 이와 비슷한 시각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내가 나답게 되는 것을 막고, 내가 뭔가를 향해 뻗어나가고 싶을 때마다 가로막는 벽 같은 것으로...

 

 하지만 그 시각에 대해 정면으로 반박하는 책이 나왔다. 그것이 바로 '뉴욕타임스'의 저널리스트로 유명하 티나 로젠버그의 '또래압력은 어떻게 세상을 치유하는가(JOIN THE CLUB)'라는 책이다.

 

 

 이 책은 우리나라에서 붙은 제목 그대로 '또래 압력'이 가져다주는 긍정적인 효과에 주목하는 책이다. 바로 그 긍정적인 효과를 그냥 이론적으로 풀어내는 책이 아니라 오로지 실제적인 사례들로써 독자로 하여금 충분히 공감가능하게 만들어주는 책이다. 티나 로젠버그는 단적으로 그 '또래 압력'이 정말 커다란 '사회적 치유책'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동료 압력이 사람들을 나쁜 상황으로 밀어넣을 수 있다면 반대로 나쁜 상황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다. 미국의 저소득층 주택단지에 찾아가 어머니와 할머니들에게 자식을 키우면서 무엇이 가장 두려우냐고 물어보라. 아마도 친구라고, '우리 애는 착한데 나쁜 친구들과 어울려서 문제(어쩌면 우리나라 부모들의 대답과 이렇게도 한결같은지...)'라고 답할 것이다. (...) 우리 모두는 나쁜 치구들의 꾐에 빠진 착한 어린아이다. 너무나 강력하고 나쁜 힘을 발휘하는 또래압력은, 더 강한 또래압력만이 제압할 수 있다. 함께 몸무게를 재고, 함께 수학 문제를 풀고, 함께 축구를 하고, 함께 장난 전화를 하고, 함께 체포를 당하고, 각자 준비를 한 음식을 함께 먹게 하는 또래압력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다. 우리를 구원하는 구명줄의 형태는 너무도 다양하다. 중요한 것은, 구명줄의 반대편에 누가 서 있느냐이다. (P. 491)

 

 사실 이 말은 티나 로젠버그가 책을 끝내면서 한 말이다. 그런데 이 책과 여정을 함께 한 우리들에게 이 말은 정말로 설득력있게 들린다. 이 구명줄의 반대편에 서 있는 그 누군가를 정말 온기를 지닌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타인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이 그러한 온기를 가질 수 있도록 티나 로젠버그는 남아공 지역사회에서 어떻게 에이즈를 성공적으로 퇴치했으며 사루바이라는 인도 카스트 제도에서 가장 미천한 존재가 어떻게 사람들을 모아 설득시키고 굳건한 카스트 제도를 서서히 허물어뜨려 가는지 또한 텍사스 주의 주립대학들에서 소수 인종들이 그동안 불리했던 수학과 과학 교과에서의 성적을 어떻게 획기적으로 향상시켜 가는지 더우기 그토록 잔혹한 세르비아의 밀로셰비치의 독재체제 아래서도 굴하지 않고 결국은 그 정권을 무너뜨린 오트포르가 어떻게 그것을 이루어냈는지 바로 그 모든 것의 바탕에 '또래 압력'이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곁의 타인들이 나를 방해하는 존재들이 아니라 나와 함께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진정한 동료들로 다시금 바라보게 한다.

 

  바로 그러한 시각의 중요성, 그렇게 타인들을 믿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바로 오트포르가 보여준다. 오트포르는 티나 로젠버그가 또래 압력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만들고 결국 이 책까지 쓰게 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그는 밀로셰비치 정권 아래서 민주화 운동을 이끌어간 리더였는데 티나 로젠버그가 그를 주목한 이유는 그가 보여주는 운동이 기존의 정치 운동과 달라도 너무 달랐기 때문이다.

 

 기존의 민주주의 운동가들은 정당을 형성하지만, 오트포르는 파티를 벌였다. 사람들이 즐기려고 물 좋은 바에 가듯이 신나게 즐기려고 이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다. 마로비치는 말했다. "우리는 라이프스타일을 만들어내요. 우리의 운동은 쟁점이 아니라 나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거에요. 멋진 삶에 관한 거죠. 우리는 정치를 신나는 것으로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어요."(P. 15)

 

 이들은 기존의 민주화 운동의 입장에서 보자면 가벼웠다. 이념에 대한 학습도 없고 굳건한 조직력도 뒷받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히려 오트포르의 운동은 기존의 정치 운동이 할 수 없던 걸 해냈다. 밀로셰비치는 결국 이 운동에 굴복했다. 가벼웠기 때문에 그들은 오히려 오래 지속할 수 있었다. 부담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더욱 많이 뻗어갈 수 있었다. 조직이란 것이 없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누구나 대등하게 참여하여 오히려 더 굳건해질 수 있었다. 무엇보다 오트포르가 전파한 것은 정치란 것이 삶과 유리되어 있지 않다는 자각이었다. 그들이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정치란 게 별게 아니고 다름이 아니고 그렇게 자신의 원하는 삶을 만들어 가는 것 자체가  바로 정치란 것을 많은 사람들에게 납득시켰기 때문이었다. 그들에겐 정치라는 것 자체가 하나의 라이프스타일이었다.

 

 사실 이러한 오트포르의 운동은 우리나라에도 있다. 바로 '나는 꼼수다'이다. 오트포르의 운동을 정의하는 특성들은 사실 '나는 꼼수다'에도 그대로 해당되는 사안이다. 오트포르가 즐기면서 참여하기를 바랐듯 나는 꼼수다도 호쾌하게 웃으며 또는 낄낄거리며 참여하기를 바랐다. 그리고 오트포르가 여기 함께한 많은 이들이 모두 당신의 동료들이며 그러니 밀로세비치 앞에서 주눅들 필요가 없다고 말했듯이 '나는 꼼수다'도 쫄지 말것을 선포한다. 아마도 최근 두 번의 선거동안 젊은이들의 투표율이 그나마 증가한 것은 바로 '나는 꼼수다'가 일으킨 '또래 압력' 덕분인지도 모르겠다. 덕분에 오트포르가 밀로셰비치를 무너뜨렸듯이 '나는 꼼수다'는 결정적으로 서울을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 이렇게 '또래 압력'은 비단 딴 나라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바로 지금 우리 곁에서도 얼마든지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최근에 가장 인구에 회자되던 신조어 중의 하나에 '국개론'이 있다. 이 단어는 사회의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킬만한 부정과 부패가 만연한데도 그저 모르쇠하고 무비판적으로 그 가해자들에게 변함없이 지지를 보내는 이들을 경멸을 담아 부르던 말이었다. 이건 단적으로 우리가 지금까지 타인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었는지 보여준다. '사람만이 희망이다'라고 박노해는 어느 에세이에선가 말했지만 때로 사람이란 그 어느 것보다 절망을 가져다줄 수 있는 존재임을 그동안 우리는 내내 경험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이번의 통진당 붕괴를 초래하고 있는 이석기나 김재연이 그렇고 그들은 제명시키는 듯 하다가 막판에 변절해 국민들에게 또 한 번 커다란 고통을 안겼던 녹색연합 출신의 김제남이 그렇다. 우리는 그렇게 살면서 나날이 사람에 대해 절망감만 키워간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티나 로젠버그는 바로 그러한 우리의 시각이 어쩌면 자생할지도 모를 희망을 짓밟는 성급한 처사임을 일깨운다. 문제는 조급하게 보편화시키지 않는 것. 그들의 사례를 일반의 사례로 보지 않는 것. 그것이다.

 

 산드라 블록과 휴 그렌트가 나왔던 영화 '투 윅스 노티스'라는 영화가 있다.

 거기서 산드라 블록은 진보적 변호인으로 휴 그랜트는 돈 만 아는 자본가로 나온다. 한 장면에서 둘은 다툰다. 그러다가 어이가 없다는 투로 산드라 블록은 이렇게 말한다.

 

 

 

 "이 봐요, 당신은 세상에서 제일 엉망인 사람이에요!"

  그러자, 휴 그랜트가 이렇게 반박한다.

 "말도 안 돼요! 세상 사람들을 다 만나 봤어요?"

 

  맞다. 휴 그랜트의 말대로 우리는 사실 모두를 만나보지 않았으면서도 너무도 쉽게 단정을 짓는다. 사람들이 다 이러이러하다고. 행동경제학에서 사람들을 정의하기를 대단한 이야기꾼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먼저 정답을 정해놓고 모든 사실들을 그에 맞춰 꾸민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내가 사고 싶은 가방이 두 개가 있다고 치자. 그런데 하나 같이 마음에 들어 선뜻 선택하지 못할 때가 있다. 그럴 때 사람들은 자주 동전 던지기 같은 방법을 택한다. 하지만 그럴 때 대부분은 사실 더 선호하는 게 있지만 그것이 선뜻 선택할만큼 아주 뛰어나지가 못해서 망설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동전 던지기로 마음 먹는 걸 도우려는 것이다. 그런데 뜻밗에 동전이 자신의 더 선호하는 것을 정해주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가? 그 동전이 나오는 대로 조금 덜 마음에 드는 걸 사는가? 천만에. 아닐 것이다. 당신도 나도. 우리는 그럴 때 똑같은 반응을 한다.

 

 동전을 다시 던지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렇게 속삭인다. 원래 처음엔 다 연습이잖아... 하면서...

 그런데 또 동전이 배신하면?  다시 던진다.

 그러니까 내가 원하는 가방이 나올 때까지 동전을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던지는 것이다.

 

 그래서 대단한 이야기꾼이다. 사람의 머리속엔 이런 편리한 핑계와 변명들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러면서 스스로 합리적이라는 위안을 얻는다. '국개론'에 작용되는 매커니즘도 똑같다. '국개론'이란 진창으로 들어가서 그 아래에 정말 무엇이 있는지 헤집어보기 보다는 그냥 바깥에서 보이는 대로 믿고 싶어한다. 그게 사실 더 편하기 때문이다. 먼저 '국개론'이란 정답을 내려놓고 거기에 맞춰 모든 근거들을 모은다. 그러면서 스스로 합리적이라 위안을 얻는다. 말하자면 티나 로젠버그는 우리들에게 이런 것을 일깨운다. 내가 타인을 바라보는 시각은 그저 나의 감정적 반응의 소산이 아닐까 의심하게 만드는 것이다. 휴 그랜트의 대사대로 우리는 모두를 만나보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늘 이렇다 저렇다 쉽게 일반화의 오류를 저지른다. 왜 그렇게 할까?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저 내가 받은 감정적인 상처를 그를 통해 보상받기 위해서이다.

 

  '또래 압력'의 긍정적인 힘을 말하는 이 책은 그러한 시선의 교정을 가져오는 소중한 경험이다. 내가 남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의 궁극에 무엇이 있는지 스스로 돌이켜 보게 만든다. '일체유심조'라고 원효는 해골에 담긴 물에서 깨닫고 말씀하셨지만 그건 타인을 바라보는 눈에도 그대로 해당된다. 사람이 함께 손을 잡고 걸어가야 할 희망의 존재가 되는가 아님 차마 내 손을 내밀지 못할 절망의 존재가 되는가 그 해답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 안에 있다는 그런 말이다. '또래 압력은 어떻게 세상을 치유하는가?'는 궁극적으로 누군가를 바라보는 나의 눈에 긍정의 온기를 더 담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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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전기 - 축복과 저주가 동시에 존재하는 그 땅의 역사
사이먼 시백 몬티피오리 지음, 유달승 옮김 / 시공사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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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이몬 시백 몬티피오리의 '예루살렘 전기'는

 서양 역사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인 예루살렘의 그 탄생에서 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담고 있는 책이다. 보통 지명을 중심으로한 역사서에는 붙지 않는 'THE BIOGRAPHY'라는 말을 일부러 제목으로 쓴 것에서 부터 모든 것을 망라하고 있다는 지은이의 자신감이 느껴지는 듯 하다.

 

 예루살렘의 역사를 읽는다는 것이 그저  나와는 상관없는 타자의 역사를 읽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근대화'라는 19세기에 서양에 의해 주도된 보편화를 이미 겪었고 바로 그 보편의 핵심엔 서양 정신의 많은 부분을 형성하고 있는 '기독교'가 자리잡고 있는데 예루살렘의 역사란 바로 그 기독교의 역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즉 예루살렘이란 공간은 특정한 하나의 공간이 아니라 지금에 있어서는 하나의 보편으로 자리잡은 공간이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의 역사를 살펴본다는 것은 우리에게 자리잡은 '보편'이 어떤 식으로 형성되었는지 알아가는 여정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일본의 식민지와 그에 뒤이은 미군정 그리고 이승만과 박정희의 독재정권을 거치면서 급속도로 우리 내면속에 자리잡게 된, 그리하여 이제는 거의 '아비투스'가 되어버려 떼어낼래야 떼어낼 수 없는 한 부분이 되어버린 '서양 근대'를 마치 산란기가 되면 자신의 고향으로 강을 거슬러 돌아가는 연어들과도 같이 그 근원에서부터 되짚어 보는 여정인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예루살렘 전기'를 읽는다는 것이 마치 오래된 앨범의 옛 사진을 뒤적이듯 과거만을 회고하는 여정이라고는 할 수 없다.

왜냐하면, 2000년 세계무역 박람회가 테러로 무너졌던 9.11 사태에서 드러나듯이 이 예루살렘이라는 공간 자체가 여전히 지금 세계의 가장 커다란 갈등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90년대 초반의 사회주의의 몰락 이후 지금까지 예루살렘은 대부분 일어나고 있는 테러들에게 그 근원적 원인을 제공하고 있다. 현대에 일어난 가장 큰 전쟁인 이라크 전쟁만 보아도 예루살렘이 촉발시킨 갈등이 얼마나 커다란 비극을 불러올 수 있는가는 쉽게 짐작된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의 역사를 살펴보는 것은 '오늘'을 더욱 잘 이해함과 동시에 '평화'를 가져오는 사전 정지작업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 갈등의 물줄기를 근원에서부터 시작해 지금까지 주욱 훑어볼 수 있음으로 그 갈등이 진정 무엇에서 비롯되었는지 알게하고 그것이 이리도 커다란 비극을 낳으며 자꾸만 반복되는 이유를 객관적으로 고찰할 수 있게 만들며 그를 통해 갈등의 연쇄를 끊고 진정한 평화를 가져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제대로 된 해답을 찾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지은이 몬티피오리가 856 페이지라는 엄청난 분량으로 예루살렘의 모든 역사를 쓴 이유이며( 놀라운 것은 참고문헌 목록만 거의 80여 페이지에 달한다. 참고문헌을 한 번 읽어보면 지은이가 이 책을 쓰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고를 들였는지 저절로 느껴진다. 사실 이 정도로 방대하게 저술한다는 것이 웬만한 열정으로는 감당이 안 될 것이라는 건 쉬이 짐작이 가는 바이지만 참고문헌을 통해서 이 책에 대해 저자가 얼마나 열정적으로 임했는지 더 크게 깨달았다.) 이를 통해 예루살렘을 늘 우리의 뇌리 속에 생생히 되살려야 할 까닭이다. 

 

  

 예루살렘은 한 때 세계의 중심으로 여겨졌고 오늘날에는 더욱 그러하다. 이 도시는 아브라함의 종교들이 충돌하는 각축장이자 점차 인기를 얻은 그리스도교, 유대교 및 이슬람 근본주의의 성지이며 문명들이 충돌하는 전략적인 전장이자 무신론과 신앙이 부딪히는 최전선이고, 세속적 매혹의 대상이며 인터넷 시대의 현기증 나는 음모론과 신화 만들기의 대상이자 24시간 뉴스 시대에 전 세계 카메라들의 조명이 쏟아지는 무대이기도 하다. 종교와 정치, 그리고 미디어의 관심으로 인해 예루살렘은 그 어느 때보다 열정적인 연구의 대상이 되고 있다.(p. 9)

 

  크리스마스 때 어쩌다 이름이나 한 번 듣는 예루살렘.

  그렇게 누군가에겐 전설 속의 옛 지명이었고 또 누군가에게는 순례해야할 성지로만 남아있던 예루살렘. 그렇게 단일한 공간으로만 여겨지던 예루살렘. 하지만 몬티피오리는 처음부터 그러한 예루살렘의 이미지를 깨뜨린다. 그는 단적으로 말한다.

 

 예루살렘은 '전선(FRONT LINE)'이라고...!

 

 그것도 몇 백년이상이나 해묵은 유대교와 기독교 그리고 이슬람교가 아직도 여전히 첨예하게 대립하며 과장되고 부풀려진 인위적인 거짓들과 허위와 왜곡으로 부터 덜 오염된 사실이 총탄처럼 오고가며 교전을 치뤄지고 있는 세상에서 가장 뜨거운 전선인 것이다. 몬티피오리는 그 열기를 한 권의 책으로 담아내려 한다. 그 불길이 어디에서 부터 시작되었으며 왜 아직도 불타고 있는 유전처럼 아직도 거세게 타오르고 있는 것인지 그 이유를 보여주려고 한다. 그래서 이 책은 지금까지 나온 예루살렘에 대한 역사서들과 다르다. 왜냐하면 이 책이 담고자 하는 열기는 어디까지나 그 공간에 존재하는 이들이 빚어내는 갈등들에서 비롯되는데 바로 그 갈등들을 표현하자면 아무래도 유대교와 기독교 그리고 이슬람교와 또한 무신론까지 다 대등하게 존중하여 각 자의 목소리들을 온전히 들려주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우리가 보아온 예루살렘의 역사서는 모두 하나의 목소리만을 담고 있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기독교 중심으로 예루살렘 역사를 살펴보는 책들은 기독교라는 하나의 목소리만을, 유대교 중심으로 보는 책은 또 유대교라는 하나의 목소리만을 그리고 이슬람교를 중심으로 보는 책은 이슬람교의 목소리만 들려줄 뿐이었다. 하지만 몬티피오리의 이 책은 다르다. 우리는 여기서 예루살렘에 운집한 가지각색의 아우성들을 들을 수 있다.

 

 이 책은 마치 내가 어떤 재판에 배심원으로 불려와 각 피고인들의 변론을 차례로 듣고 있는 것과 같았다. 그렇게 나는 그들의 모든 목소리를 차례로 들었는데 처음엔 예루살렘을 만들고 다졌던 그리고 한 때 추방되었으나 이제는 피의 살육을 통하여 터줏대감이 되어버린 유대교의 목소리를, 그리고 다음엔 유대교인들이 예루살렘을 다질 때마다 핍박받고 저항했던 이교도들의 목소리를 들었고 그 다음엔 동로마 제국과 함께 건너온 그리스도교의 목소리를 들었으며 다음엔 그들에게도 성지였던 예루살렘을 점령하여 십자군 전쟁을 불러일으킨 이슬람교의 목소리를 들었고 제국주의의 확장과 더불어 그들의 손발 역할을 했던 '선교'를 통해 들어왔던 개신교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들은 각자 자신들의 입장을 충분히 전달했는데 그건 이 재판에서 판사의 역할을 맡고 있다고 해도 무방한 지은이 몬티피오리가 그 어느 종교적 입장에 치우치지 않고 오로지 가치중립적으로 그들 모두에게 공평하게 기회를 주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역사적 정황을 더욱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공정한 재판을 위해 배심원들에게 사건의 정황을 제대로 인식시키는 것이 판사에게 요구되는 정말 중요한 자질이라고 미국의 연방대법관을 지냈던 Oliver Wendell Holmes는 말한 바 있는데 그렇다면 몬티피오리야 말로 제대로 된 판사가 아닌가 싶다.

 

 예루살렘은 예수로 인해 '평화'의 상징 같은 곳이 되었지만 사실은 내내 피로 얼룩진 역사였다. 지금 이스라엘이 세워지게 된 것 역시도 시온주의자들이 벌인 무시무시한 살육 덕분이었다. 그래서 예루살렘의 역사를 읽는다는 것은 인간이 인간에게 얼마나 잔혹해질 수 있는지, 또한 타자를 존중하지 않는 독선과 아집이 얼마나 커다란 비극을 반복적으로 잉태하게 하는지 깨닫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것을 위해서일까? 그의 체계적이면서 객관적인 서술은 그러한 사태를 냉정하게 관찰하게 하고 많은 인용들과 평이한 서술은 폭넓은 이해를 가능하게 한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마치 판사가 마지막 평결을 내리듯이 그는 하나의 진실을 대면하게 한다. 우리가 왜 타자들을 존중하지 않으면 안되는지 그에 대한 진실을...

 

  어쩌면 뻔한 결론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나면 전혀 뻔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이 책에 실린 그 수많은 역사적 경험들에서, 비록 상상을 매개로 한 것이지만, 직접 눈으로 보고 귀로 들어 마음으로 부터 납득한 진실이기 때문이다. 몬티피오리는 진심으로 납득시킨다. 정말 저 예루살렘을 갈가리 찢어놓는 철조망은 어디에 있느냐고? 그것은 바로 타자를 나만큼 대등한 존재로 인정하지 않는 우리의 눈과 머리 속에 있다고 말이다. 이 책은 그 한 문장을 당신 마음에 깊이 새겨두기 위해 '예루살렘의 역사' 전체를 놓고  재판이 벌어지는 법정과 같다. 그러니까 당신이 이 책을 읽는다는 것은 내가 그랬듯이 배심원으로 호출된 것과 마찬가지다. 만일 당신이 우리 의식에 있어 근원적인 부분을 형성하고 있는 존재를 제대로 알고 싶고 오늘의 세계를 더욱 잘 이해하길 원한다면 당장 그 호출에 응할것을 정말 권해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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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만나는 민주주의 역사
로저 오스본 지음, 최완규 옮김 / 시공사 / 2012년 6월
평점 :
절판


 

 최근의 아프리카에서 마른 들판에 불길이 번지듯 거세게 일어난 재스민 혁명과 더불어 민주주의는 다시 초유의 관심사가 되었다. 근대 이후로 가장 광범위하게 자리잡은 정치 체제이지만 아직도 민주주의만큼 논쟁적인 개념이 없는 것 또한 사실이다.

 

 민주주의는 이미 존재의 문제가 아니라 이제 '정도'의 문제가 되었다. 많은 나라에서 많은 계층들이 저마다 다 다른 목소리로 '이것이 민주주의다'라고 말하고 있는 판국이다. 절차적 민주주의까지만 민주주의라고 보는 측도 있고 어디까지나 실제적인 민주주의가 확립되어야만 비로소 민주주의다운 민주주의다 라고 말하는 측도 있다. 거기다 정치적 민주주의까지만 민주주의로 보는 측도 있고 요즘 같이 경제적 불평등이 만연한 상황에서는 경제적 민주주의까지 이루어져야 민주주의라고 보는 측도 있다.

 

 지금까지 전통적으로 민주주의에 대한 정의는 (국가를 포함하여) 한 체제의 정당성은 오로지 국민의 정치적 합의에 의해 바탕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한가지 오해는 민주주의는 이념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체제를 뜻하는 말일 뿐이다. 즉 민주주의란 오로지 국민의 합의에 의해서 그 나라의 정당성이 확보되는 체제 그 이상의 의미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서 사실은 문제가 생긴다. 여기에 나오는 국민이란 단어나 합의란 단어가 그 자체로는 뜻이 분명하지 않은 외부적으로 그 뜻을 구체화할 수 밖에 없는 가치충전식 개념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국민을 어디까지 볼 것인지 그리고 합의의 형태는 어떻게 할 것인지 여기에 대해 명확한 기준이 없기 때문에 시대별로 그만큼 다양한 나라와 계층들이 모두 다 자기가 민주주의라고 우길 수 있는 토대가 되었던 것이다. 결국 민주주의라는 개념 자체가 '정도'의 문제로 흐를 수 밖에 없는 약점을 잉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아직도 여전히 민주주의가 논쟁적인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이 때문에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사실 민주주의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 국민을 제대로 교양을 쌓지 않은 평민들까지 확대시킬 경우 스스로 그들의 이해관계 추구를 제어할 길이 없으므로 그들의 욕망 때문에 오히려 소수의 엘리트들에게 선동될 여지가 많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바로 그렇게 중우정치로 빠져들 위험이 다분했기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는 민주주의를 최악의 정치체제에 놓아두었는데 사실 그것은 고대 그리스에서 그 자신 직접 체험한 결과에서 나온 선택이기도 하였다.  또한 이러한 민주주의라는 개념 자체에 내포된 불명확성과 그 기준의 부재 때문에 민주주의를 연구하는 학자로 이름높은 로버트 달 같은 학자는 사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민주주의가 고대 그리스에서 발현되어 지금까지 이어져왔다는 식으로 하나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 조차도 오해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민주주의에는 그런 역사 자체가 존재하지 않으며 그 때 그 때의 현실적 상황에 의해 형성되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즉 민주주의에게 연대기라는 것이 있다면 당시 상황이 빚어낸 민주주의들이 저마다 하나하나의 단층들이 되어 층층이 쌓여진 지층 같은 모습이라는 것. 그렇게 민주주의는 각 시대와 나라에 따른 고유한 것들이 있었을 뿐 일련의 발전된 경로는 없었다. 그런데도 우리가 지금 민주주의에 대해 막연하게나마 개념을 가지는 것은 일종의 추출된 요소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그 쌓여진 수많은 단층들에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요소들을 가지고 우리는 민주주의의 개념으로 일종의 콜라쥬를 한 것이다.

 

 이와 비슷한 견해를 지금 소개하려는 책 로저 오스본도 보여준다.

 그가 작년에 펴낸 이 책 '처음 만나는 민주주의 역사'는 그 전에 집필한 서구 문명의 역사의 연장선상에서 민주주의에 초점을 두고 쓰여진 책이다. 로저 오스본은 특이한 이력을 가진 역사 작가인데 그건 그의 전공이 역사가 아니라 전혀 관계가 없어 보이는 지질학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지금 가장 주목받는 역사 작가중의 하나가 된 것은 아마도 그의 역사 연구와 서술 방법이 지질학적이기 때문에 그렇지 않을까 한다. '지질학적'이란 게 도대체 무엇이냐라는 질문이 가능할텐데 그것은 셜록 홈즈를 한 번 떠올려 보면 이해될 듯 싶다. 지질학에 대해 소양이 아주 깊은 홈즈는 옷이나 신발에 묻은 흙만 보아도 그가 어디를 거쳐서 자신에게 왔는지 다 알아낸다. 그렇게 홈즈가 세부를 통해 경로라는 하나의 줄기를 뽑아내듯이 지질학은 세부와 전체를 유기적으로 조합하는 학문이다. 이 책 '처음 만나는 민주주의 역사'는 바로 그러한 오스본의 전공이 유감없이 발휘되어 있는 책으로 그렇게 각 시대별로 역사적 사실에 대한 상세한 세부의 묘사를 통해 끝내는 민주주의라는, 그 내부 속에 애매한 구멍을 가진 그것에 대한 전체적 밑그림마저 독자 스스로 그리는 것이 가능할 정도로 도와주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가 바라보는 민주주의는 로버트 달과 그리 다르지 않은데 그는 서문에서 이렇게 밝힌다.

 

 연대기 순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면 그것이 발달 과정을 그리는 것으로 여겨져 잘못된 가정을 하기 쉽상이다. 그 첫째는 새로운 민주주의가 옛 민주주의로 부터 무언가 배웠을 가정이다. 실제로는 모든 형태의 민주국가가 제 나름대로 민주적 제도와 관례를 만들어내야 했다. (...) 두 번째 잘못된 가정은 사건의 전개가 항상 개선을 뜻한다는 생각이다. (..) 이 책을 읽고나면 민주주의가 각기 다른 시기에 존재했지만 그렇다고 시간이 흐르면서 개선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을 것이다.(P. 22)

 

 그러므로,

 

 민주주의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적응하기 때문에 도식화가 불가능하다.  민주주의의 주요 기능이 바로 변화와 적응이 자유롭게 일어날 수 있는 사회를 지탱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P. 19)

 

 바로 이러한 민주주의 자체가 가진 속성이 만들어내는 단층화 과정을 고대 아테네로 부터 시작해 최근의 민주주의적 상황까지 보여주는 것이 바로 이 책이다. 이 책의 특징은 앞서도 말했듯이 지질학적 스타일로 민주주의와 관련된 역사적 사실의 세부를 공들여 복원하는 것에 있다. 때문에 로저 오스본이 말한대로 민주주의가 그야말로 특정한 시대의 자유로운 변화와 적응의 산물임을 뚜렷하게 인식할 수 있게 한다. 그런 의미에서 다른 책에서는 접할 수 없었던 3장 중세에 발현되었던 민주주의 모습이라든지 4장 그라우뷘덴의 총투표제도들에 대한 이야기는 이 책만이 가진 장점이라 아니 할 수 없다. 무엇보다 그라우뷘덴의 경우 로버트 달이 민주주의의 기원이 아테네가 아니라 바로 거기에 있다고 말한 곳이기도 해서 이번에 자세히 엿볼 수 있어서 무척이나 만족스러웠다. 이렇게 로저 오스본의 책은 학창시절과 대학시절 많이 배웠던 민주주의에 있어서 공백으로 남겨진 역사들을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게 하는데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무엇보다 '헌법'을 공부하는 이들에게 참 많은 도움이 될 것 같다. 헌법을 보다보면 반드시 영국 혁명이나 프랑스 혁명등 서구 헌법의 역사와 기본권의 역사를 배우게 되는데 간략하게만 서술되어 있어서 제대로 그 면모를 확인하기가 어렵다. 개인적으로 헌법책에서 이름만 들어왔던 '수평바'의 진면목을 이 책을 통해 확인할 수 있어서 기뻤다. 이런 식으로 그 자세한 모습을 몰라서 그 역사를 그저 암기만 할 수 밖에 없었던 분들이라면 이 책은 참으로 유용하리라 생각된다. 더구나 이 책에는 그동안 우리에게는 또 하나의 공백이었던 미국 독립과 비슷한 시기의 라틴 아메리카 공화국들의 모습과 인도의 민주주의 정착과정까지 다루고 있어 그야말로 민주주의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를 돕는다. 특히나 라틴 아메리카의 경우 미국과 똑같이 식민지로 부터 독립하였으나 그렇게 비슷한 역사적 경험을 가졌으면서도 미국이 성공적인 대통령제를 이룩한 반면 라틴 아메리카의 공화국들은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음을 비교해서 살펴볼 수 있는 것은 흥미롭다.

 

 결국 이 책을 읽고나면 민주주의란 확정의 개념이 아닌 과정상의 산물이라는 것을 뚜렷이 인지하게 된다. 그 시대의 특정의 요구에 따라 변화하고 적응해 온 것이 무엇보다 민주주의라는 생물임을 분명히 깨닫게 되는 것이다.

 

 민주주의란 수많은 삶의 표현이다. 그러므로 '달성되는 것'이 아니라 늘 현재진행형일 수 밖에 없다. 민주주의는 또 공동체적 창의성의 줄기찬 발로다.(p. 497) 

 

 깨닫게 되는 건 비단 민주주의에 대한 관점만은 아니다. 민주주의가 아무리 자체에 흠결을 가진 개념이라 하더라도 분명 좋은 민주주의와 나쁜 민주주의는 얼마든지 식별가능하기 때문에 좋은 민주주의를 이루기 위해서는 어떡해야 하는가 하는 것도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이럴 때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것은 독립전쟁 당시 미국의 모습과 1848년의 프랑스 혁명이다. 이 둘은 우리가 가장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민주주의 모습에 가장 근사치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바로 그것을 이룩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보다도 당시 대중들의 활발한 정치참여였기 때문이다. 즉 미국은 이미 영국혁명 당시 저변으로 확대된 기층 민중들의 활발한 정치참여가 라틴 아메리카와는 달리 성공적인 대통령제를 만들었으며 그것을 가능케한 제대로 된 정당제도를 낳았고 1848년의 프랑스 혁명은 산업화로 인해 도시 사회로 활발하게 이양되고 덕분에 변호사, 상인, 자영업자, 의사, 회계사등 도시 중산층이 성장하게 됨으로써 갈수록 정치토론과 참여가 활발해졌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이들은 새로운 사회를 만들고 관리해야 할 책임이 바로 자신들에게 있다(p. 277)는 생각까지 하고 있어 정치활동에 더 적극적이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좋은 민주주의는 기층 민중들의 정치에 대한 관심과 활발한 참여가 있을 때라야 가능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깨닫는 것이다. 오로지 적극적인 관심과 참여만이 좋은 민주주의를 가져오는 첩경임을 말이다. 민주주의라는 하나의 과일은 막연히 누군가 따 주기를 기다리며 나무 아래 누워서 입만 벌리고 있는 이들에게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손을 내젓든 장대를 들고 휘적이든 아뭏든 뭔가 따려고 적극적인 행위를 하는 자에게만 보상처럼 뚝 떨어진다. 민주주의란 한 체제가 어떠해야 하느냐를 국민적 합의로 결정하는 것이다. 그렇게 합의에 참여하는 국민을 그 체제의 주인으로 인정하는 것. 그것이 바로 민주주의다. 이렇게 보다 많은 이들을 주인으로 만들어 보다 많은 이들이 자신의 삶에 주체로 있게하는 보다 좋은 민주주의는 로저 오스본이 잘 보여준대로 쟁취의 산물이다. 사람들은 투쟁이 가져오는 불안 보다는 적당한 타협을 통한 안정을 추구하기 마련이지만 사실 그것은 민주주의를 포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민주주의는 오스번이 말했던 대로 공동체적 창의성의 줄기찬 발로인데 그 창의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P. 497) 바로 내 삶과 마찬가지라는 부단한 관심과 참여만이 당신이 원하는 민주주의를 당신에게 가져다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일례로 장하준은 언젠가의 책에서 민주주의란 가진 돈 만큼 권리가 인정되던 자본주의에 대항해 돈이 아니라 존재 자체만으로 권리를 행사하게끔 만들어 자본주의의 해악을 극복하는 좋은 체제이다라고 말했다. 바로 그 돈으로 결정되던 권리를 존재 자체만으로도 가질 수 있게 하기 위해 얼마나 지난한 싸움을 벌였던가를 그의 책 '사다리 걷어차기'는 잘 보여준다. 그런데 장하준이 이렇게 칭찬하는 보통 선거권의 확대가 다른 측면에서는 사실은 성장하는 노동계급의 힘을 두려워한 부르조아들이 노동자들을 선거권으로 한 국가에 보편적으로 참여하는 국민으로 만들어 계급의 일원이 아니라 평등한 나라의 일원으로 각성시킴으로써 노동자들의 계급 의식을 희석화시키고 그래서 계급적 단결을 와해시키려는 전략에 지나지 않았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즉 이들의 주장은 만일 그러한 보통 선거권의 확대가 없었으면 자본주의의 파국은 더 빨리 그리고 더 전면적으로 찾아왔을 것이라는 말이다. 이것은 슬라보예 지젝의 점진적 개선 보다는 단 한 번의 파국적 혁명을 위한 '부단한 부정(negative)'을 떠올리게 한다. 이 모든 말들의 함의는 당신이 거처하는 민주주의라는 공간이 순탄한 평화 지대가 아니라는 것이다. 저 보통 선거권을 둘러싼 음모와 지젝의 말에게서 나타나듯이 당신히 느끼든 못 느끼든 당신이 서 있는 그 곳은 저마다 자신이 바라는 민주주의를 위해 수 많은 힘들과 전략이 맞부딪히는 전장에 다름아니다. 그 힘들과 전략은 당신을 비켜가지 않으며 좋든 싫든 당신 신체 위에서 무수한 전선(front line)을 형성하는 것이다. 그렇게 당신은 이미 싸움에 참여하고 있으며 민주주의를 위한 싸움에서 후방은 없다. 로저 오스본의 이 책의 원제는 링컨이 유명한 게티스버그 연설에서 했던 말이기도 한 'OF THE PEOPLE BY THE PEOPLE'이다. 다른 말로 하면 민주주의는 부단한 당신의 관심과(소유격을 나타내는 OF는 민주주의를 소유물로 만든다. 누구든 자기의 소유물엔 부단한 관심을 가지는 법이다.) 당신의 신체 자체를 필요로 한다.('BY' 자체가 행위를 요구한다는 점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거기에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 그 전에 이 책을 통해 미리 생각을 정리해 두는 것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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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녀 - 궁궐에 핀 비밀의 꽃, 개정증보판
신명호 지음 / 시공사 / 2012년 5월
평점 :
품절


 

 

 

 역사란 이제 기록이 아니라 발굴이 되었다.

 더 이상 왕조 같은 지배계급을 중심으로 하거나 전쟁이나 혁명 같은 거대한 사건 중심이 아니라 그들에게 관심의 스포트라이트를 갖다대느라 상대적으로 가리워졌던 그래서 더 왜곡되기도 했었던 역사적으로 무시되어졌던 존재들에게 다시금 빛을 찾아주고 목소리를 가져다 주어서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는 대낮의 환한 광장으로 인도하는 것. 그것이 바로 오늘날 역사의 소명이 된 것이다. 지배계급이 존재했었던 곳엔 어디에서나 그렇게 역사의 관심에서 소외된 자들이 존재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우리나라도 서양의 역사 못지않게 공식적 기록에 그 흔적조차 남기지 못했고 지금 역시도 온전히 관심과 인정을 받지 못한 존재들이 상당한 것이다. 아마도 그 대표적인 존재가 바로 궁녀가 아닐까 한다.

 

 

 현재 부경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재임중인 신명호의 '궁녀'는 오래도록 빛을 받지 못하여 무지의 베일에 가리워져 있었던 궁녀들의 삶을 제대로 복원해보려 한 저작이다. 그가 새삼 잊혀진 궁녀들의 삶에 주목했었던 것은 여성들의 급속한 사회적 지위 향상과 더불어 조선시대 내내 억압받았던 여성상을 새롭게 조명해보려는 노력들이 계속되고 있는데 그 재조명의 대표적인 분야가 바로 대비, 왕비, 후궁, 궁녀등 궁중 여성들이 될 것이라 한다. 왜냐햐면 조선은 그 무엇보다 왕조국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궁중 여성들의 경우 지금도 그것을 재현한 사극들에서 잘 드러나듯 자칫 그 권력의 추구와 흥미본위의 선정성에만 집착해 그 삶의 진정한 모습이 왜곡될 위험을 많이 안고 있다. 신명호는 그래서 역사소설이나 영화 그리고 드라마에 의해 왜곡될 위험을 우려해 학문적 탐구가 더욱 절실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이번에 나온 '궁녀'는 바로 그러한 신명호의 문제의식에서 태어난 산물인 것이다.

 

 책은 총 6장에 걸쳐  진행되는데 첫째 장은 오래도록 역사의 관심을 받지 못해 공식적인 사료가 거의 전무하다시피한 궁녀들의 삶을 어떻게 연구할 것인지 그 방법론을 논하고 둘째 장은 궁궐에서 그저 그림자들로만 존재하는 궁녀이기에 혹 우리의 선입견은 그녀들의 삶이 그대로 단일한 무채색의 삶이지 않을까 생각하기 쉬운데 이 장은 궁녀들의 삶이 전혀 그렇지 않음을 그러니까 파란만장한 다채로운 빛으로 가득한 것이었음을 특기할만한 궁녀들 개인의 삶을 통해 드러내는 장이다. 신명호가 하필이면 두번째 장에서 이러한 개개 궁녀들의 삶을 통해 다채로운 궁녀의 삶을 보여주는 이유는 이러한 다양한 삶의 모습을 통해 독자의 흥미를 일으킨다는 점도 있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아무리 궁녀들이라고 하더라도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이 오로지 왕조에 대한 충성이라는 보편적 이념으로만 움직였던 존재들이 아니라 그 이전에 보다 근본적으로는 개인의 욕망을 성실히 추구했던 존재들임을  밝히기 위해서다. 조선 왕조가 건국 당시 부터 개인들의 욕망을 억누르고 보편적인 이념만을 추구하려 했던 나라임은 조선의 기틀이 되는 근본 사상을 다졌던 정도전이 경복궁의 침전을 '강녕전'이라 이름붙인 연유에서 단적으로 드러나는데, 그 강녕전의 의미는 바로

 

  왕이 밤에 조용히 황극을 닦으며 식욕, 색욕, 권력욕 등 인간의 원초적 욕망들을 잠재워야 한다는 의미였다.(p. 9)

  (여기서 '황극'이란 인간의 원초적 욕망들이 생겨나기 전의 중용 상태를 말하는데 즉 황극을 닦음이란 어디로나 치우치지 않도록 편견과 아집을 버리고 공평무사한 중립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이렇게 조선은 처음부터 개인의 원초적 욕망을 무화(無化)시키는 것을 이념으로 출발한 나라였다. 그렇게 모든 존재들을 보편이라는 광막한 장막으로 덮으려 한 나라였다. 하지만 신명호는 그 왕조의 중심에 있어서 누구보다 그 보편적 이념에 봉사했어야 할 궁중 여성들조차 무엇보다 개인의 원초적 욕망을 추구했던 존재들임을 드러낸다. 말하자면 궁중 여성들의 존재 자체가 보편적 이념과 개인적 욕망 사이의 투쟁을 의미하는 상징이었음을 밝히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그동안 궁녀의 실제 삶이 그동안 역사적으로 전혀 조명받지 못했다는 것의 환유로 작용한다. 다시 말해, 그 궁녀들의 삶이 그토록 조명받지 못했던 이유가 바로 개인의 욕망 보다는 어디까지나 보편적 이념을 중시했던 조선 때문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래서 그동안 가리워졌던 궁녀들의 삶을 복원하는 것은 그렇게 보편적인 이념의 그늘아래 웅크리고 있어야 했을 개인의 욕망들을 복원하는 길이기도 한 것이다. 바로 그래서 신명호는 자신의 저서 '궁녀'를 욕망을 비롯하며 개인적인 삶의 실현을 밑그림 삼아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3장과 4장 그리고 5장은 그 개인으로서의 '궁녀'의 삶에 있어서 바탕을 이루는 조건들을 그려낸다. 즉 3장에서는 궁녀의 선발이 어떻게 이루어지며 4장에서는 궁녀들의 조직이 어떻게 구성되고 움직이는지 그리고 5장에서는 그들의 업무와 라이프 스타일을 밝히는 것이다. 이 모든 궁녀들의 삶의 조건들을 다 그려내고 난 뒤 드디어 마지막 6장에서 가장 개인의 원초적 본능이라 할만한 궁녀들의 성과 사랑을 이야기 한다. 그러니까 이 책의 순서는 그냥 무심히 배열된 것이 아니라 지금 궁녀의 역사를 복원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와 관련하여 의도적으로 배치되어 있다는 것이다. 즉 보편적 이념의 정수라 할만한 정도전의 강녕전에서 그 중심에서 오히려 개인의 원초적 욕망 충족에 충실하는 궁녀들의 삶까지 이르는 여정은 그야말로 보편적 이념이 결국은 개인의 원초적 욕망에 의해 패배하는 여정인 것이다. 결국 우리는 궁녀들의 삶을 통하여 궁녀들 삶 자체의 모습 뿐만이 아니라 이념이 아무리 강고하게 억누른다고 해도 개인의 원초적 욕망은 굴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된다. 그리고 이로써 역사가 다시금 보편이란 이름아래 지워진 개인들의 삶을 발굴한다는 의미가 무엇인지도 깨닫게 된다. 개인은 그 자체 삶으로서 완전한 것이며 그 개인을 자꾸만 부족한 존재로 만들어서 길들이려 드는 보편적 이념은 그야말로 억압적 가설이거나 공염불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궁녀'의 역사란 그저 지나간 역사의 흔적이 아니라 오늘의 생생한 역사로 다시금 음미할 필요가 있지 않나 싶다. 즉 궁녀들의 삶이란 사회라면 언제나 존재할 수 밖에 없는 보편적 이념과 개인의 원초적 욕망 사이의 대립을 제대로 되새겨 볼 수 있는 현장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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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2-06-10 2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오, 이번 책은 제목과 표지부터 강렬하네요.
리뷰도 짧고 강렬하고. 마침 책 사려는데, 음 읽어볼까.
<채홍>을 읽었더니 이제 궁녀 이야기만 나오면 눈이 번쩍 뜨입니다요 ㅋㅋ

ICE-9 2012-06-10 22:58   좋아요 0 | URL
후후, 사실 마지막 장에 '채홍' 얘기가 나와요. 읽으면서 소이진님이 읽으면 좋아하겠다 생각도 했더랬죠^ ^ 그런데 정말 오랜만이에요. 제가 너무 들르지도 못하고 그랬죠? 곧 찾아갈게요^ ^

프레이야 2012-06-11 2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 책 관심가길래 마음에 찜해뒀는데 님의 리뷰 읽고는 바로 담아갑니다.^^

ICE-9 2012-06-13 02:47   좋아요 0 | URL
앗. 프레이야님 감사합니다.^ ^
저는 꽤 만족스럽게 읽었는데 프레이야님도 만족하실 수 있으시면 좋겠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