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우리는 혼자가 되었나 - 시스템이 붕괴된 한국 사회의 아찔함을 읽다
이정국.임지선.이경미 지음 / 레디셋고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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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독일의 철학자 헤겔에 따르면 사람에겐 근본적으로 타인들로 부터 인정을 받고자 하는 욕망이 있다고 합니다. 헤겔은 심지어 그 욕망을 근본 중의 근본, 즉 가장 주된 욕망으로 보고 사실 사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갈등들은 바로 그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에서 생겨난다고까지 말했습니다.

 

 아마도 그래서 우리 사회는 저마다 내는 목소리들로 넘쳐나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시쳇말로 목소리 큰 자가 이긴다는 말도 있듯이 정작 우리들에게 들려오는 목소리는 모든 목소리가 아니라 힘있고 돈있는 자들의 목소리 뿐입니다. 그들에게는 확성기와도 같은 그들 편에 서서 그들의 목소리만 볼륨을 크게 높여주는 언론들까지 있어 더욱 그렇습니다. 여기에 대한 가까운 예가 하나 있지요. 바로 얼마전에 많은 이들을 화나게 만들었던 전기요금이 바로 그것입니다. 올 여름은 정말 더웠습니다. 낮에도 더웠고 밤에도 더웠습니다. 정말 살인적인 더위였습니다. 아니나다를까 많은 분들이 이 폭서로 인해 운명을 달리하시기도 했습니다. 사람들 뿐만이 아닙니다. 돼지도 닭도 더위에 죽었습니다. 살인적인 더위일뿐만 아니라 살돈(殺豚), 살계(殺鷄), 살견(殺犬)의 여름이었습니다.(아, 살견은 아니군요. 더위 보다는 사람 손에 더 많이 죽었을테니...) 그런 더위니 많은 이들이 에어컨의 힘을 빌려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 대가로 평소보다 몇 배나 되는 전기요금을 치러야 했습니다. 거기다 정부는 그동안 숱하게 블랙아웃을 경고하며 우리 가정용 전기를 아껴 써라고 으름장을 놓아 자기 에어컨을 켜는데도 어쩐지 조바심을 느껴야 했습니다. 하지만 말이죠. 가정용은 전체 전기 사용량에 겨우 10%남짓을 차지할 뿐입니다. 아무리 아껴라고 얘기를 해봐야 그 효과는 미미하다는 것이죠. 전체 사용량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산업용 입니다. 하지만 철저하게 기업 프렌들리를 외치는 이 정부는 변함없는 수출량은 위해서는 여기의 전기를 아껴서는 안되니 가정용이 대신 희생을 치뤄야 한다고 말하죠. 하지만 가정용은 겨우 도토리 수준. 아무리 굴러보았자 수박 한 번 구르는 걸 당해내겠습니까. 사실 한국의 가정용 전기요금은 세계 수준으로 보아도 비싼 편입니다. 하지만 전력량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이번에도 한전은 가정용을 또 4.6%를 인상했죠. 물론 산업용은 그대로 두고 말이죠. 이건 뭐 경제위기는 다 같이 겪는데 그 희생은 모두 가정용의 등에다 짊어지게 하는군요. 어차피 수출이 잘된다고 해도 낙수효과는 없다는 것이 증명된 마당에 삥 뜯기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을 당하면서 어디까지 허리띠를 졸라매야 하는 것인지 서민들의 가정이 대기업들을 위한 총알받이들인가요.

 

 하지만 올 여름 내내 들려온 목소리는 모두 정부의 목소리 뿐이었습니다. 이 같은 현실을 알리고 전기 요금의 부당함을 알리는 목소리는 우리에게 전혀 들려오지 않았죠. 이번에 맞은 요금 폭탄으로 이제야 누진제에 대한 화난 여론의 목소리가 불붙듯 일어나니까 그제서야 조정 국면에 들어가는 시늉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 사회에서 목소리를 내는 것은 중요합니다. 내지 않고 가만있으면 그 누구도 신경써 주지 않습니다. 미국도 그렇죠. 미국에서도 선거를 치를 때 실제 정책으로 만들 공약을 펼치는 대상은 오로지 중산층 뿐입니다. 자신의 한 표를 적극적으로 행사하는 계층을 위해서만 그들의 구미를 돋굴 수 있는 공약을 마련한다는 말이죠.

 

  이렇게 목소리를 내는 일이 아무리 중요하다고 해도 우리 사회에는 엄연히 필터링이 존재합니다. 그런 일을 하는 것이 특히 언론들이죠. 이미 언론인 사명 따위는 화석과 같은 존재가 된지 옛날이라 정경과 유착해도 언론들은 부끄러움을 모르고 오로지 그들이 원하는 것만 내보낼 뿐입니다. 영화 '브이 오브 벤데타'에서 처럼 모든 독재국가가 독재자 하나의 목소리만 퍼뜨리듯이 우리의 귀에도 그들의 목소리 밖에는 들리지 않습니다. 그 목소리에 가려진 사회적 약자, 사회적 소수의 목소리들은 전혀 들려오지 않습니다.  오로지 저 홀로 울려 퍼지는 커다란 목소리는 G20 때 처럼 온갖 장밋빛 전망을 내어놓지만 그 아래 가리워진 목소리들의 주인공들은 60년대에도 겪었고 70년대에도 겪었고 80년대에도 겪었던 그 고통 그대로를 당하고 있을 뿐입니다. 역사는 오로지 그 목소리들의 주인공에게서만 발전했을 뿐, 가리워진 목소리의 주체들에게 있어서는 역사는 한 번도 나아간 적이 없습니다.

 

  경제위기는 점점 가시화되고 있고 이제 여기저기서 보다 분명한 신호로 우리가 잠에서 깨어나야 할 때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하나의 목소리에만 취해서 몰랐던 현실을, 진실을 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전에는 들리지 않았던 작은 목소리들을 우리가 먼저 나서서 찾아 들어야 할 때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2012년 한국 언론 인권상 수상작인 '왜 우리는 혼자가 되었나'는 바로 그 신호에 응답하는 책입니다.

  우리에게 들려오지 않았던, 하지만 분명하게 존재하고 있었던 우리 이웃들의 작은 목소리를 모아 들려주는 책입니다.

 


 

 

 여기에는 날마다 원치 않아도 웃느라 감정을 착취당하는 감정노동자의 목소리도 있고 어차피 배경으로 선정될거면서 괜한 희망 고문으로 마지막에 가서는 늘 절망만 안게 되는 인턴 사원의 울컥하는 목소리도 있으며 정부가 적극적으로 출산을 장려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직장에서 임신했다는 이유 하나로 차별을 받는 직장맘들의 목소리도 있고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기만 하는 대학 등록금을 마련하느라 학업을 중단하기를 반복하다가 끝내 자퇴할 수 밖에 없었던 이의 목소리도 있고 아직도 연탄을 땔 수 밖에 없어서 날마다 연탄 가스 중독을 두려워하고 살아야 하는 이의 목소리도 있으며 유학와서 개발도상국 출신이란 이유로 차별을 받는 유학생의 목소리도 있습니다.

 

 여기엔 평소 들을 수 없었던 목소리도 있고 잘 알고는 있으나 특별히 관심을 기울이지는 않았던 목소리도 있습니다. 그래서 목소리들을 통해 미처 몰랐던 현실을 알게 되기도 하고 무심했던 예전을 탓하며 좀 더 관심을 두리라 결심하게도 됩니다. 하지만 이 책이 정작 중요한 것은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여기 실린 22개의 목소리가 모두 이 사회를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그 주인공이 되어보았을 목소리라는 사실입니다. 네, 이것은 바로 지금의 내 모습일 수도 있고 어쩌면 과거에 아니면 장차 다가올지도 모를 그런 목소리 입니다. 내게서 저만치 떨어진 목소리가 아니라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바로 나 자신의 목소리입니다. 그러니 이것은 몰랐던 현실을 알게 되거나 무심했던 현실에 관심을 가지거나 하는 차원이 아닙니다. 그보다 더 나아가야 합니다. 언젠가 우리의 몫이 될지도 모르는 이 모든 상처와 고통을 잉태하고 있는 목소리를 끊어내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는 차원까지 말이죠.  그리고 아마도 그 고민의 끝엔 그것을 위한 우리의 목소리가 하나의 실천으로 나와야 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궁극적으로 이 책이 지향하는 것은 이제 우리 스스로 목소리를 내는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 상존하고 있는 이 목소리들의 고통을 중지시키기 위해서 말이죠. 진실은 때로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힘을 발휘합니다. 아마도 그것은 그것이 바로 우리 자신의 이야기임을 깨닫기 때문이겟죠. 그 자리에 바로 나 자신도 설 수 있음을 말이죠.

 

 '왜 우리는 혼자가 되었나'는 그런 책입니다. 당신이 잊고 있었던 혹은 잃어버렸던 목소리를 되찾아주는...

  이제 당신 스스로 목소리를 내야 할 때가 왔습니다.

  자, 두 팔을 힘껏 벌리고 외치세요.

 

  "HEAR MY VOI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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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의 진보
심보선.장석준.박상훈 외 지음 / 이음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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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시기를 사람들은 진보의 무덤이라 말한다. '지금 여기의 진보'에는 홍세화의 글이 마지막에 실려 있는데 지금 진보신당 대표인 그가 총선의 저조한 득표율로 당이 취소되고 다시 당사를 옮겨야 하는 상황에서 맞딱드린 현상은 이를 너무도 잘 보여준다.

 

 여의도 당사를 비워져야 할 기일을 다가오는데 새로 옮길 곳을 찾기가 힘들었다. 결국 한 달 보름이 걸려서야 겨우 계약할 수 있었다. 이유는 한 가지였다. 당 이름을 말하는 순간 건물주가 바로 고개를 가로젓는 일이 허다했고 심지어 계약을 하고 나서 취소를 당한 경우도 있었다. 통합진보당 비례대표 경선 부정선거 사태 이후 벌어진 풍경이었다. '우리(진보신당)는 그 당(통합 진보당)이 아니'라거나 구차함을 무릎쓰고 우리는 당이 아니라 준비하는 단체라고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p. 283~ 284)

 

 하지만 진보는 이번 총선까지만 해도 그 정도는 아니었다. 당시 진보진영의 주체가 모여서 만들어진 통합 진보당은 눈부신 성공을 이루었다. 지역구 의원 7명에 비례대표 6명. 모두 13명의 의원을 산출했을 뿐만 아니라 제3당으로까지 그 지위가 격상했다. 바야흐로 이제 좀 진보가 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때가 왔다고 다들 기대가 컸다. 그것으로 총선의 결과가 준 실망감에 대한 위안으로 삼는 사람들도 많았다. 하지만 그 기대와 위안은 오래가지 못했다. 비례대표 경선 과정에서 구당권파의 선거 조작이 탄로난 것이다. 하지만 정작 사람들의 뒤통수를 더 강하게 내리쳤던 건 다른 데 있었다. 비록 부정 선거가 이루어졌어도 도덕적인 것을 무엇보다 중요한 가치로 생각하는 진보답게 그 선거로 인해 당선된 사람들이 자진 사퇴했으면 좋게 마무리 될 일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진보라는 이름표를 붙인 자로는 정말 어울리지 않게 사퇴를 하지 않고 버텼으며 그들의 세력인 구당권파는 온갖 말도 안되는 이유로 그들을 비호했다. 더구나 그들의 사퇴를 의결하기 위해 모인 대의원 회의때는 12시간이 넘는 동안 조직적인 의사 방해 공작으로 우리 모두의 공통된 가치인 민주주의마저 망치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그래도 그들은 부끄러움이 없었다. 그들은 당당했고 오히려 부정선거로 당선된 자들을 정당하게 사퇴시키려 하는 사람들을 음모라며 공격했다. MB정권 때 가장 많이 썼던 사자성어는 바로 '후안무치'였다. 정확히 그 때의 구당권파도 거기에 막상막하였다.

 

 사람들은 충격에 빠졌다. 적어도 내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그 다음날 모두 쌍욕이 작렬했다. 배신의 정도가 컸던 한 사람은 지금도 진보란 말만 들어도 진동 모드의 휴대폰처럼 부르르 떨기도 한다. 그렇게 진보는 비오는 날의 쓸모없는 전단지처럼 바닥에 버려졌다. 진보의 깃발은 남의 말은 전혀 들을 줄 모르는 막귀에다 자기 목소리만 크게 낼 줄 아는 입을 가진 자들의 손에 의해 갈가리 찢겨지고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진보의 신념 따위는 헌신짝처럼 내동댕이치고 비민주와 불합리로 무장한 자들에 의해 무너졌다.

 

 진보가 살던 동네는 이제 폐허만 남았다. 상처를 받을 대로 받은 사람들은 귀신이 나온다는 흉가나 폐가를 보듯 멀리 떨어져서 이제 그곳을 돌아보지 않았다.

 

 하지만 그러한 무시도 오래갈 수 없다. 거기를 보지 않으려 다른 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그보다 훨씬 더 어둡고 희망없는 세상이 빵셔틀을 하려는 일진들 처럼 '씨익' 웃으며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배경도 없고 돈도 없는 약자들은 언제나 그 모든 것들을 가진 자들의 총알받이로 살아야 하는 세상이. 그래서 네거리만 나가면 만나게 되는 편의점 마냥 상처와 절망을 받게 되는 세상이 말이다. 그러니 '그래, 똥 묻는 개보다는 그래도 겨 묻은 개가 낫겠지' 싶어서 진보를 포기하지 않게 된다. 그나마 약자가 살려면 그래도 진보가 좀 나아보이니까. 다시 말해 지금의 세상이 영혼을 익사시킨다고 한다면 진보는 적어도 조금의 숨통은 풀어줘서 자맥질이라도 할 수 있게는 해주니까...

 

 그래서 다시 찾았다. 망해버릴대로 망해버린 진보지만 다 타버린 건물 더미에서 쓸만한 것을 건져내듯 다시금 진보의 목소리에 귀기울이고 싶었다. 여전히 완전히 믿지는 못해도 칠흙 같은 어둠 보다는 그나마 반딧불 정도의 밝기라 해도 빛이 있는게 나으니까. 오늘의, 너무도 어이없어서 오히려 우스꽝스럽기까지 한 이 사태를 보다 더 좋은 미래를 위해 거쳐야 했던 시행착오로 여길 수 있게 되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그렇게 보게 된 책이다. '지금 여기의 진보'라는 책은...

 진보진영 10명의 목소리를 담고 있는 이 책은 그래서 내게 꼭 진보 위에 드리워진 무덤 속 같은 깊은 어둠 속을 저마다 홀로 날아다니고 있는 진보의 목소리라는 반딧불 하나 하나를  채집해 모아 놓은 유리병 같았다. 진보 진영에서는 제법 명망있는 이들의 목소리는 무너진 진보를 어떻게 새로운 축대와 서까래로써 다시 새롭게 지을 것인가 그 고민이 담겨있다. 중요한 것은 저마다의 고민들이라는 것이다. 즉 이 책은 어떤 하나의 줄기 아래 같은 이야기를 하자고 모인 책이 아니다. 지금 이 시점에서 진보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저마다 생각한 것을 개인적으로 이야기하는 광장이다. 그래서 군무가 아니라 독무다. 개성을 가진 열 마리의 반딧불이 저마다의 빛깔로 사람들의 앞길을 비춰주고자 모여 청사초롱과 같은 빛을 내는 것. 그게 바로 '지금 여기의 진보'라는 책이다.

 

 그러므로 순서에 구애받을 필요도 없다. 마음에 드는 이 부터 읽어도 상관없다. 어떻게든 이 열 명의 사람들이 저마다 뿌려내는 다채로운 색깔들은 잭슨 폴락의 액션 페인팅 처럼 당신 앞에서 진보라는 그림으로 탄생한다. 시인이자 사회학자 심보선은 진보의 개념이 옛 것 그대로가 아니라 오늘에 맞게 새롭게 설정되어야 함을 말하고 현재 진보신당 창당준비위회 정책위원회 의장인 장석준은 이제 진보가 녹색사회주의로 확장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이번 총선에서는 우리나라에서도 녹색당이 참여했었다.)  후마니타스 출판사 대표인 박상훈은 진보가 대중들의 사랑을 어떻게 하면 받을 것인가를 현실적인 차원에서 접근한다. 칼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을 번역해서 더욱 유명해진 홍기빈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살림살이 경제학을 다시 되살려 그것을 하나의 지향점으로 삼고자 한다. 이렇게 이 책은 서로 다른 악기를 연주하는 열 명의 연주자가 만들어내는 고유의 선율들로 가득하다. 하지만 진보에 대한 그들이 가진 고민의 깊이는 비슷하고 그것을 그저 말뿐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가능하게 만들기 위하여 진지하게 접근한다는 공통점이 있다는 점에서 모아놓고 들으면 불협화음의 아니라 근사한 오케스트라가 된다.

 

  마음을 도닥여주고 평화로움에 젖게 하다가 나중에는 웅대한 비젼을 연출하여 저절로 희망을 부풀어 오르게 만드는 오케스트라 말이다. '지금 여기의 진보'는 그런 희망을 위해 열 명의 반딧불들이 연주하는 빛의 오케스트라이다. 일독(一讀)이 아니라 일청(一聽)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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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본형의 신화 읽는 시간 - 신화에서 찾은 '다시 나를 찾는 힘'
구본형 지음 / 와이즈베리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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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화경영사상가라는 구본형(나는 사실 이 분의 책을 처음 읽었는데 다른 리뷰를 보니 꽤나 많이 알려진 분이라 다소 놀랐다.)에게 있어 신화란 하나의 접점이다.

 단순히 그리스라는 먼 나라에 존재하는 먼 과거의 이야기가 아닌

 지금 바로 우리 삶과 연결되는 살아있는 이야기이다.

 

 그래서 구본형의 이 책, '신화 읽는 시간'은 카이로스(kairos)적이다.

시간이 단순히 언젠가는 닥쳐올 사멸을 위하여 그저 일직선으로만 움직이는 크로노스의 시간이었다면 구본형의 신화는 그저 해묵은 과거의 허황된 이야기를 다시 한 번 더 헤집어 보는 것에 불과했을 것이다. 하지만 바로 지금 여기의 의미를 더욱 중요하게 여기는, 그래서 물리적으로 객관적인 시간이 아니라 정서적으로 주관적인 시간의 의미를 더 중시하는 카이로스의 시간에서라면 구본형의 신화는 더이상 먼지를 뒤집어 쓴 과거의 유물로만 남지 않는다. 그것은 신화를 언제나 바로 오늘 우리의 동반자로 초대하기에 오히려 마치 갓잡은 참치의 날뛰는 생생한 푸르름 처럼 선연하게 살아 숨쉬는 존재가 된다.

 

 거기서 구본형의 손은 쉴 새 없이 움직인다.

그래서 신화 속 아라크네 처럼 오늘의 우리 삶이 직면하고 있는 문제들과 관련하여 신화에 깃든 의미들을 쉼없이 자아내여 그들에게 새로운 생명을 부여하여 우리의 사유가 입을 수 있는 하나의 옷으로 만든다.

 

때로는 여름 날 삼베옷 처럼 왜 이렇게 사는지에 대한 우리 마음의 갑갑증을 시원하게 풀어주고

때로는 겨울 날 두터운 스웨터처럼 한파와도 같은 현실을 이기기 위한 따스한 희망을 전해주는...

 

 구본형의 '신화 읽는 시간'은 그런 책이다.

 

 여기서 구본형은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으려 한다.

 하나는 너무도 방대해서 쉽사리 이해하기 어려운 그리스 신화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서 한 눈에 그리스 신화의 내용을 파악하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현재의 우리가 살면서 만나게 되는 여러 문제들과 관련하여 그리스 신화가  그것을 슬기롭게 풀어 갈 어떤 혜안들을 가지고 있는지 수박을 쪼개어 그 빨간 속을 드러내듯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서 단순히 신화의 지식만이 아니라 그 혜안들을 통해서 나를 새롭게 창조할 수 있는 힘까지 얻을 수 있도록...

 

모든 신화는 자신의 과거를 죽이고 새롭게 태어난 이야기를 품고 있다. '새롭게 태어난다'는 것이 바로 변화의 정수다. 신화는 모험을 통한 변화의 이야기이다. 나의 신화를 만들어간다는 것은 나의 세계가 없는 평범한 삶에서 자신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나의 세계를 창조해냄으로써 내 안에 신의 세계를 구현해가는 과정이다. 스스로 주도하고 고난과 맞서고 마침내 세상에 자신의 작은 왕국 하나를 건설해나가는 이야기다. 성공과 실패가 하나의 물결처럼 서로를 교환하는 것, 승리와 환희와 패배와 모멸이 온몸을 휩싸는 일에 뛰어드는 것, 모든 신화는 바로 이 무수한 모험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리하여 우리로 하여금 '나'를 찾아 떠나는 긴 여정을 시작하도록 부추긴다. (p. 15)

 

 이러한 새로이 나를 찾아주는 이야기가 이 '신화 읽는 시간'이라는 판도라 상자에는 모두 29개가 담겨있다. 그 중에는 욕망의 전성시대라고도 일컫는 우리 시대에 있어 그 욕망의 덧없음을 말하는 아프로디테의 이야기도 있으며 분노가 점증하는 이 시대에 있어 그 화를 절제하는 법을 가르켜줄  아킬레우스의 이야기도 있다. 혐오가 사실은 엄청난 창조 에너지를 간직하고 있음을 일러주는 피그말리온의 이야기가 있는가 하면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많은 비극을 가져오는지 보여주는 다이달로스의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구본형은 그저 신화의 이야기만 담지 않는다. 그가 새롭게 발굴해낸 의미가 더욱 설득력을 가지도록 문학과 영화는 물론 예술과 철학까지 동원한다. 혐오에게 간직된 창조 에너지를 보다 설득력있게 하기 위해 그는 니체와 살로메의 이야기를 가져오며 '무사유'가 불러 일으키는 악에 대해서는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가져온다.

 

 그렇게 구본형은 그 이야기가 간직한 빛을 조금도 잃지 않도록 만들기 위해 이야기에 또 하나의 이야기를 연결한다.

 그야말로 신화를 접점이 되도록 만드는 것이다.

 

 학창시절 때, 우리나라 고전문학을 가르치시던 선생님 한 분이 계셨다.

 이 분의 수업은 정말 우리 사이에서 인기가 많았는데 그건 특히 사자성어 때문이었다.

 그 분이 가르치는 사자성어는 정말 재미있었다. 그냥 사자성어 뜻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유래된 역사적 사건을 방대한 역사적 지식으로 참으로 쉽고도 재미나게 설명해주셨기 때문이다. 마치 사자성어가 그냥 네 개의 글자가 아니라 그 한 자, 한 자가 저마다 무궁한 의미로 살아 숨쉬는 하나의 세계를 포함하고 있는 듯 했다.

 구본형의 신화 읽는 시간을 읽으면 그 분이 떠오른다.

 분필로 칠판에 신나게 나라와 한자를 적으시며 하나라도 더 재미있게 들려주려고 애쓰시던 그 분의 밝은 표정이 기억난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은 물론 그 분을 모르겠지만 어쩌면 구본형의 책에서 그 분의 표정을 찾아내게 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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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이재익, 크리에이터 - 소설.영화.방송 삼단합체 크리에이터 이재익의 거의 모든 크리에이티브 이야기
이재익 지음 / 시공사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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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뷰라는 걸 써본지가 이제 한 일년 남짓 된다.

 리뷰도 일단은 스스로 무언가를 만드는 일이라 쓰다보니 저절로 '크리에이티브'에 관심이 가게 된다.

 여기서 '크리에이티브(creative)'란 이재익 작가에 따르면,

 

 광고업계뿐 아니라 방송, 영화, 연극, 문학, 각종 이벤트 기획 등등 아이디어로 시작해 구체적인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모든 행위에 크리에이티브란 표현을 쓸까 한다.

 아, 또 되도록이면 상업적인 결과물 위주로 범위를 좁히자. 어차피 이 책은 크리에이티브를 팔아서 먹고사는 크리에이터들, 또 그런 직업을 갖고 하는 사람들이 볼 테니까. (P. 16)

 

 이런 것이다. 내가 쓴 리뷰들을 훑어보면 장르 소설에 대한 리뷰가 훨씬 많은데 장르 소설을 즐겨 읽다보면 자연히 나도 한 번 장르소설을 써볼까 하는 마음이 생기게 되고 하지만 문창과는 커녕 국문과 언저리에도 가보지 못한 나는 거기에 대해서는 아는 것 하나 없으니 맨땅에 헤딩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뭔가 도움 받을 만한 것을 찾게 되는 것이 인지상정이니 그런 이유로 상업적 크리에이티브에 있어서라면 최전선이라 할 수 있는 이재익 작가의 뭐라고 할까 크리에이티브가 되기 위한 실전 지침서라고나 할까 아무튼 그런 책을 이렇게 잡게 된 것이다.

 

 

 

 

 혹시 당신이 나처럼 크리에이티브에 관심을 가졌다면 그래서 그에 관련된 책을 찾다가 이 리뷰를 읽게 되었다면,

 그런 당신에게 이 책은 두 가지 장점을 가지고 있다고 말해줄 수 있다.

 

 하나는 진짜 페이지 넘어가는 속도가 장난이 아니다라는 것.

 몰랐는데 원래 이재익 작가에게 따라다니는 별명 중 하나가 '페이지터너'라고 한다. 그만큼 더운 여름 날에 아이스크림을 핥아대듯 술술 읽힌다. 입담에 있어 둘째 가라면 서러울 '두시탈출 컬트쇼'의 담당 PD라서 그런지 이야기를 끌고가는 재담이 뛰어나다. 20대 중반의 등단에서 부터 지금 라디오 PD를 하면서 겪었던 사연까지 자기 이야기를 돼지고기 두루치기에 고추장 양념 들어가듯 적절하게 섞어 독자의 관음증적 욕구마저 충동질하고 있어 마른 들판에 번지는 불길처럼 활활 읽힌다.

 그렇게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아도 내처 읽힌다는 것. 그래서 책이 아니라 어쩐지 낭독하는 오디오 같다는 느낌이 날 정도라는 것. 이것이 첫번째 장점이다.

 

 두번째는 확고한 정체성이다.

 이 책을 가장 잘 정의할 수 있는 말은 아무래도 실전 지침서일 것이다.

 이 책은 그런 자기 정체성에 더없이 충실하다.

 말 그대로 이론은 상관없이 크리에이티브에 있어서 현장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들을 수 있다는 것.

 현장이라는 의미 그대로 실제 크리에이티브한 행위를 할 때 실제적으로 도움이 될만한 것들을 들을 수 있다는 것.

 이것이 두번째 장점이다.

 

 이 책이 그러한 실천에 있어 실제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은 앞서도 말했듯이 이재익 작가가 누구보다 왕성하게 크리에이티브활동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말에 따르면 그는 현재 세 가지의 경력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하나는 '두시탈출 컬트쇼'의 라디오 PD. 다른 하나는 영화 시나리오 작가. 그가  20대 중반 부터 시나리오(등단 작품이 바로 영화로 까지 만들어지는 바람에)를 썼으며 '목포는 항구다'의 원작자이고 '원더풀 라디오' 시나리오도 직접 썼다는 것은 지금에서야 알았다. 마지막 하나는 소설가다. 그는 지금까지 열 두편의 장편소설을 냈다고 한다. 그 중 '41'과 '씽크홀'은 현재 영화로 제작중이라고 한다. 뭐 이정도면 크리에이티브에서 방귀 좀 뀐다고 해도 누가 뭐라 할 사람은 없을 것 같다.

 

 이런 그이기에 그만의 크리에이티브적 실천 비법을 가르쳐준다고 하니 귀가 솔깃해질 수 밖에 없다. 무엇보다 저런 왕성한 창작활동이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 궁금해서라도 그 비법을 보고 싶은 것이다. 책은 총 세 개의 파트로 나뉘어 이루어져 있는데 가장 처음은 크리에이티브에 대한 소개와 그런 일을 하는 크리에이터가 된다는 것에 대한 것으로 대부분은 이재익 작가가 어떻게 하여 지금과 같이 될 수 있었던가에 대한 이야기이므로 '난 개인적인 삶에는 관심없어. 내가 원하는 건 어디까지나 창작 비법 뿐이라구!'하는 사람은 바로 '파트 2'로 넘어가도 상관없다.

 

 파트 2와 파트 3가 말하자면 붕어빵의 앙꼬다.

 하지만 다루고 있는 부분은 다른데 파트 2가 크리에이터의 원칙 같은 것을 말한다면

 파트 3는 실제 크리에이티브를 할 때 있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실천적 지침이라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진짜 맛난 것은 가장 나중에 나오는 과자 종합 세트와도 같은 형국이다.

 

 2부의 원칙에서 이재익 작가가 가장 강조하는 것은 근성이다.

 

 중요한 것은 생각만 하지 말고 무조건 결과물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리고 결과물이 나올 때까지 포기하지 않고 계속 덤비는 것이다.

 장르소설의 신이라 할 수 있는 스티븐 킹은 '작품은 엉덩이로 쓰는 것'이라 말했는데 그것과도 일맥상통한다.

 그런 의미에서 '크리에이터는 어떻게 단련되는가'는 크리에이터가 되고 싶은 분들의 정신무장을 위해 꼭 읽어두면 좋은 글이다.

 나조차 크리에이터도 아니면서 읽으면서 왠지 스스로 반성하는 기분이 되었으니까...

 여기서 이재익 작가가 진정한 크리에이터가 되기 위해서 강조하는 건 결국 하나다.

 그건 생활 자체를 크리에이티브로 바꾸는 것이다. 즉 아예 크리에이티브 중심으로 습관을 들이는 것이다.

 

 항상 크리에이티브 중심적 습관을 지녀야 한다. 천재적인 직관을 지니지 못한 크리에이터에게 크리에이티브 중심적 습관은 꼭 필요하다. 노력은 의지가 있어야 가능하지만 습관이 몸에 배면 노력 없이도 같은 효과를 볼 수 있으니 (P.110)

 

 한 마디로 일상의 모든 시간을 생존을 위한 필수 시간 외에는 다 크리에이티브에 할애하는 것이다. 그건 단순히 창작을 하라는 뜻이 아니라 만나는 사람도 크리에이티브적 관점에서 뭔가 활용할만한 점이 없을까 관찰하고 보게 되는 책이나 영화, 신문 그리고 드라마에 있어서도 어떻게 이야기를 전개시키고 갈등을 고조시켜나가며 클라이막스에서 그것을 해결하는가와 같은 창작의 관점에서 감상하라는 것이다. 그렇게 보는 것, 생각하는 것 모두를 크리에이티브 중심으로 만드는 것. 그것이 이재익 작가가 강조하는,  크리에이터가 되기 위해 그 무엇보다 가져야할 습관이다.

 

 하지만 당연히 이런 일이 쉬울 수 없다. 자칫 그런 습관이 지나치면 미친놈이란 소리를 들을 수도 있다. 만나는 사람마자 뚫어져랴 쳐다보게 될테고 사람들이 가볍게 감상을 말하는 자리에서 진지한 난도질식 분석으로 분위기를 망쳐놓을테니까. 그래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이재익 작가는 바로 그 뒤에 '크리에이터의 맛'이란 글을 달아두었다. 이는 당근 같은 글이다. 성공한 크리에이터가 어떤 달콤한 과실을 맛보는지 절절히 보여서 계속 달리게 만들기 위한...

 장미의 아름다움을 만지기 위해서는 가시에 찔리는 고통도 감수해야 한다는 것과 같은 이치의 글이다. 

 

 그렇게 꼭 가져야 할 습관을 말한 다음 그는 이제 진짜 창작은 어떻게 하는지 그 자신 '씽크홀'과 '41'을 썼을 때의 경험을 가지고 세세하게 이야기해준다.  개인적으론 여기서 꽤 배울게 많았다. 사실 지금까지 창작에 대해서 별로 생각조차 해본적이 없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야기를 구성하는데 있어 이재익 작가가 구사하는 대화법은 참신했고 꽤나 유용하게도 보였다. 언젠가 만화가 강풀은 모든 이야기는 한 문장으로 요약되지 않으면 재미없다고 말했는데 그것과 이재익 작가의 대화법이 어쩐지 통하는 것 같기도 하다. 최대한 단순화 시켜서 단단한 뼈대를 구축하는 것이 먼저라는 것을 깨달았다. 

 

 여지껏 남이 만든 이야기만 소비해왔던 나는 사실 이렇게 이야기를 만드는 일이 참으로 매력적으로 보인다. 그런 건 모두 선천적으로 재능을 타고 난 사람만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했는데 재능이 아니라 노력, 스스로 한계를 지워 포기하려는 마음이 무엇보다 가장 커다란 문제라는 이재익 작가의 말을 듣고는 좀 용기도 생겼다. 아무튼 그저 막연하게만 느껴졌던 이야기 만드는 일에 대해 뭔가 좀 체계 같은 것이 잡혔다고나 할까 그것이 이 책에서 내가 얻은 최고의 수확이라 할 것이다.

 

 크리에이티브에 관심을 한 번 가져봤던 분들이라면 이재익 작가의 이 책을 읽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하지만 읽을 때 주의 사항 하나가 있다.

 근처에 복통약을 준비해 놓을 것...

 소설, 영화, 방송 삼단 합체로 잘나가는 분의 이야기라 읽으면 본능적으로 배가 아파 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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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하는 착한 사람들 - 우리는 왜 부정행위에 끌리는가
댄 애리얼리 지음, 이경식 옮김 / 청림출판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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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 밖의 경제학'의 댄 애리얼리의 또 하나의 카운터 펀치. 그것이 바로 이번에 나온 '거짓말 하는 착한 사람들'이란 책이다. 여전히 그는 우리가 익히 상식으로 알고 있는 것이 다만 편견으로 점철된 고정관념에 지나지 않음을 스스로 고안하고 실시한 풍부한 연구 사례를 통해 다소 충격 속에 보여준다. 저번이 경제학에 대한 우리의 고정관념이라면 이번엔 도덕성에 대한 우리의 고정관념을 뒤흔든다.

 

   많은 사람들이 현대인들의 도덕성에 대해 회의적이라고 알고 있다. 사람들은 자기 주위의 사람들을 기회만 되면 얼마든지 비도덕적으로 될 수 있는 사람으로 여긴다. 이러한 믿음은 바로 얼마 전에 방영된 드라마 '추적자'에서 여실히 드러난 바 있다. 주인공과 아무리 가까운 친구, 동료라 하더라도 거액의 유혹을 받는 순간 여지없이 배신의 방아쇠를 당기는 것을 보면서 시청자들은 그 누구도 설마 어떻게 저럴 수가 하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 사회의 단면을 지극히 현실적으로 그려냈다고 여겼다. 거액의 돈에 굴복하여 친구의 우정과 동료의 신뢰를 져버리는 것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말이다. '추적자'는 아예 더 나아가 이 사회 전체가 쉽게 비도덕적이 될 수 있는 곳임을 보여주었다. 돈과 권력 앞에서 검찰이든 언론이든 정부 관료든 무엇보다 도덕적이어야 할 존재들이 꼬리를 살살 흔드는 개로 변해버렸다. 그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믿음을 그대로 대변하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라인홀드 니버는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라는 책에서 사람은 도덕적으로 태어나지만 사회가 비도덕적으로 만든다고 상세하게 밝힌 바 있는데 바로 그대로였다. 이런 사회이기에 우리는 스스로에게 그리고 남들에게 쉽게 남을 믿지 말라고 되뇌인다. 이것이 바로 지금 우리가 우리 곁에 있는 타인들을 바라보고 있는 시선이었다.

 

 

  여기에 바로 댄 애리얼리의 '거짓말 하는 착한 사람들'을 꼭 읽어야 하는 이유가 있다.

  이 책은 바로 그러한 우리의 시선이 오해에 불과함을 알려주고 결국 그것을 교정시켜 주기 때문이다. 댄 애리얼리가 사람들의 도덕성에 대해 우리의 고정관념을 사정없이 뒤 흔들고 부셔버리는 데도 이것이 아주 설득력 있게 들리는 것은 책 전체에 걸쳐 그가 사람들의 도덕성에 대해 정확하게 알기 위해 고안한 독창적인 실험 결과 때문이다. 그것이 너무도 객관적인 데이터로 실증적으로 우리의 도덕성에 대한 생각들이 오해와 편견에 불과한 것임을 보여주기에 댄 애리얼리의 말에 절로 귀기울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도덕성에 가장 흔한 사람들의 생각을 한 예로 들어보자. 플라톤의 책에 나오는 '기게스의 반지'도 있듯이 우리들은 사람들이 들키지 않는 확신만 있다면 얼마든지 비도덕적이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흔히들 투명인간이 되면 무엇을 가장 하고 싶냐 하는 질문에 가장 많이 나오는 대답만 봐도 알 수 있다. '은행에 몰래 들어가서 원 없이 돈을 가져오겠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많다. 하지만 정말 그들이 투명인간이 된다면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우리의 상식은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지만 댄 애리얼리의 실험 결과는 다르다. 댄 애리얼리는 실험을 통해 우리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우리가 알고 있듯이 남의 시선이 아님을 밝혀내었다. 우리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따로 있었다. 그것은 남의 시선이 아닌 바로 자신의 시선이었다. 놀랍게도 댄 애리얼리의 실험에서 사람들은 아무리 들키지 않는 확신이 있다 하더라도 커다란 부정은 저지르지 않았다. 그것이 아주 고액의 이득을 가져다주는 것이라 해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아주 사소한 부정만 저질렀다. 이 놀라운 반전에 댄 애리얼리는 그 이유가 궁금했다. 그리고 또 다른 여러 실험을 통해 이 이유를 알아내었다. 사람들이 아무리 남들이 자신의 부정을 모른다 하더라도 사소한 부정만 저질렀던 이유는 남들은 모르지만 자기는 그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 사람들은 자신의 양심상 자신이 도덕적 인간이라는 확신에 상처를 주지 않는 선에서만 부정을 용인했던 것이다. 즉 사람들이 보다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은 타인의 시선이 아니라 바로 자신이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었다. 내가 나를 바라보았을 때 나쁜 놈으로 보이는 것을 가장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사람의 양심이란 게 실제적으로 기능하고 있음을 또한 의미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 때 이제껏 우리가 알아왔던 대로 이득을 먼저 고려하지 않는다. 우리가 가장 먼저 고려하는 것은 도덕성인 것이다. 아무리 경제적 선택이라 하더라도 나 자신이 도덕적이라 자부심을 느낄 수 있는 한에서 우리는 선택하는 것이다. 이는 굉장한 충격이지 않는가? 당신이 지금까지 생각하고 있었던 상식을 뒤집는 것은 아닌가? 적어도 내겐 그랬다. 그리고 그 결론이 거듭된 실험 결과를 통해 입증된 것이었기에 납득될 수밖에 없어서 더욱 그랬다.

 

 

  하지만 이 사회에는 이득 때문에 부정을 저지르는 사람들이 많다. 그 사람들은 어째서 그럴 수 있는 것일까? 댄 애리얼리에 따르면 그 사람들은 그냥 요즘 인기 있는 개그 캐릭터 '갸루상'의 말대로 '사람이 아니무니다'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아니다. 사람에겐 최소한의 도덕적 자부심이란 마지노선이 본성상 존재한다. 그들은 그러한 마지노선 자체마저도 무너진 사람들이기 때문에 '비인간(非人間)', 즉 괴물이다. 그들은 우리의 도덕적 인간이 되려는 마음에 상처를 주고 그 노력을 포기하게 만든다. 하지만 댄 애리얼리에 따르면 이는 어불성설이다. 그들은 이미 사람이 아니기에 그들에게 사람다움의 기준을 갖다 대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의 그러한 모습은 괴물을 닮기 위해 사람을 포기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여기서 우리의 시선은 제대로 교정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존재론적인 이유 말고도 여기엔 또 하나의 이유가 더 있다. 그건 이미지다. 댄 애리얼리는 실험을 통하여 실제 물질적인 현금일 때보다도 현금을 나타내는 이미지 상징 같은 것이 될 때 훨씬 더 많이 거대한 부정을 저지른다는 것을 밝혀낸다. 즉 진짜 돈이 오고갈 때는 사람들은 커다란 부정을 저지르지 못하지만 그것이 돈을 나타내는 수치이거나 다른 표식이라면 아무 거리낌 없이 부정을 저질렀던 것이다. 이 실험은 이번 미국의 서브 프라임 경제 위기 때 굴지의 금융 회사들이 보여준 후안무치한 비도덕적 태도가 어떻게 해서 나왔는지 말해준다. 그것이 진짜 돈이 아니라 다만 수치로 표시된 돈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많은 미국의 서민 가정을 파멸로 몰아넣었으면서도 반성은 커녕, 스톡 옵션을 행사하고 성과급을 받는 등 자신들의 이익을 철저히 챙기면서도 아무런 양심상 가책을 받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번에 저축 은행 사건에서 보듯 너무도 자주 금융 사기나 사건들이 일어나는데 아마 그 이유 역시도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 한다. 어떤 면에선 과연 사람들이 이러한 사소한 차이 하나로 쉽게 비도덕적이 될 수 있을까 의심스럽기도 할 것이다. 댄 애리얼리는 거기에 대해 그건 우리 인간들의 마음이 아주 교활한 이야기꾼이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말하자면 현실의 돈이 아니라 수치로 변환된 가상의 돈은 실제 물리적으로 오고가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스스로의 양심을 속이기 위해 좋은 변명거리로 만들기 쉽기 때문이다. 그렇게 사람들은 한편 도덕적이지만 또 스스로 도덕적 인간이라는 자부심에 상처를 입지 않으면서 비도덕적으로 이득을 챙길 수 있는 우회로를 또한 만들어내는 데도 능수능란하다. 대개 그럴 때 사람들이 내세우는 변명거리는 세 가지다. 하나는 '남들도 다 하는 것이잖아' 또 다른 하나는 '이번 한 번 뿐이야' 마지막은 '나 하나쯤 그런다고 티나 나겠어' 하는 생각이다. 이런 사소한 마음들이 결국엔 커다란 부정을 낳게 되는 그 첫걸음이 됨을 댄 애리얼리는 잘 보여준다. 이렇게 보면 우리가 타인의 영향을 많이 받는 것으로 생각하게 되겠지만 사실 여기서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 모두가 본성상 아주 능수능란한 교활한 거짓말쟁이라는 것이다. 즉 우리는 우리의 생존을 위해서는 아무리 말이 안된다 하더라도 필요하면 거침없이 거짓의 이야기를 꾸미는 존재다.

 

  그러니까 결국 이미지란 시선의 교란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다. 내가 나를 바라보는 모습을 혼란시키기 위해 마술사가 현란한 손동작으로 관객의 시선을 끌어 자신이 정말 하고 있는 것을 숨기듯이 그렇게 우리의 도덕적 자부심을 상처 입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그렇게 내가 도덕적이라는 자부심을 계속 가지기 위하여 타인에 대한 시선을 가지고 내 자신의 시선을 교묘하게 뒤트는 것이다. 남들이 저러니까 나도 괜찮아 하는 식으로... 결국 우리들은 스스로 속이기 위해서 남을 이용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남이 다 그렇게 때문에 내가 날 비도덕적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내가 비도덕적이 되기 위하여 남들을 물귀신 작전처럼 끌어내리는 것이다.

 

 

  댄 애리얼리의 이 책이 정말 중요한 것은 보다 자신에게 정직한 시선을 던지도록 강요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늘 편하게 남 핑계를 댄다. 세상이 이렇게 된 것도 결국은 다 남들 때문이다. 이런 생각을 일상에서 참 많이도 하고 산다. 하지만 댄 애리얼리는 그 핑계 아래 정말 움트고 있는 우리의 밑바닥을 보게 한다. 사실은 내가 비도덕적 유혹에 쉽게 굴복하기 위하여 괜스레 남들 핑계를 대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고 말이다. 왜냐하면 나를 비롯한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은, 그렇게 우리의 이웃들은 어떤 선택을 할 때 무엇보다 도덕성을 가장 먼저 고려하는 선하디 선한 사람들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아무 곳에서도 그런 선함을 찾아 볼 수 없다고 아우성을 친다. 그런데 사실 그 아우성은 나의 도덕적인 자부심에 상처를 입지 않고 비도덕적이고 싶다는 아우성에 다름 아니었다. 모든 변화는 자기에게 정직해 질 때이다. 진정한 변화 또한 그렇다. 아무런 기교나 협잡 없이 정직하게 나의 도덕성을 지키려 할 때 타인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 또한 바뀌게 될 것이다. 그렇게 댄 애리얼리는 진정한 변화를 위한 가장 소중한 첫 걸음이 어디로부터 시작되어야 하는지 이 책을 통하여 분명하게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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