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인문학 - 넓게 읽고 깊이 생각하기
장석주 지음 / 민음사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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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니까 지그문트 바우만의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을 읽을 때였다.

  책 맨 앞 부분에 나와있는 '추천의 글'에서 반가운 이름 하나를 만났다. 그 이름이 바로 '장석주'였다. 학창시절에 한 번 만났다가 오랜 세월이 흐른 후 다시 보는 이름이라 일단 반가웠지만 조금 의아하기도 했다. 내가 기억하는 장석주는 시인에다가 에세이스트로가 전부였기에 실례가 되는 말일지도 모르지만 바우만에 대한 추천 글을 쓸 정도가 되시나 하는 의구심이 생겼던 것이다. 하긴 그가 운영했던 출판사 '청하'가 펴냈던 책들을 떠올려 보면 장석주가 어느정도로 인문에 대해 관심이 있었는지는 곧 드러나지만서도(그 중엔 한국 최초의 '권력에의 의지'번역을 비롯한 니체 저작들의 번역 출간도 있다.) 그래도 의혹의 그림자는 쉽사리 지워지지 않는 가운데 읽어나갔다. 그러다 놀랐다. 내 의혹을 그대로 저 멀리 안드로메다로 날려버릴 정도로 그는 전문가 뺨 칠 정도로 꽤나 상세하게 현재 가장 주목받는 철학자중의 한 사람을 분석할 수 있는 내공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상세하기도 했지만 제대로 그 맥마저 짚어내고 있어서 더욱 놀라움이었다. 이 조우가 있었기에 그가 본격적으로 인문에 대한 얘기를 펼치고 있는 '일상의 인문학'이란 책의 존재를 알았을 때 선뜻 읽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일상의 인문학'은 일단 한 권의 책을 주제로 삼아 이야기 한다.

  그렇게 여기엔 무려 50권의 책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있다. 그렇다고 전적으로 그 책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다. 그러니까 이 책은 서평집이 아니라는 의미다. 여기서 책은 그저 하나의 길잡이 역할만 할 뿐이다. 그러니까 강가의 나룻배와도 같이 하나의 상념이 타고 보다 너른 사유의 바다로 나아갈 매개물에 불과하다.

 

  장석주의 인문 스타일은 이른바 풀뿌리라고 할 수 있다.

  자양분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쭉쭉 뻗어나가는 풀뿌리 처럼 그렇게 보다 깊은 사유를 이끄는 무언가가 있으면 사양 않고 촉수를 뻗어나간다. 그래서 처음에 시작했던 상념이 이런 저런 관계된 메타 텍스트를 거치고 돌아오면 이전의 상념들 보다 그 맛은 깊어지고 속은 더욱 알찬 장맛이 되어 돌아온다. 문제는 결코 그 어디든 머무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책의 제목이 왜 일상의 인문학일까 생각해 보았다.

  우리들은 흔히 일상과 인문을 별개로 생각한다. 그렇게 인문이란 일상에서 빠져나와 상아탑 같은 곳에나 머무르면서 펼쳐지는 고담준론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물론 장석주는 그러한 고정관념을 공격한다. 그리고 말한다. 일상이야 말로 인문이 시작되는 곳이라고. 그는 책의 처음부터 인문학을 뜻하는 라틴어 후머니타스를 풀이하며 인문이라 다름아니라 인간의 모든 삶에서 필요한 통찰을 찾아내는 학문이라 말한다. 일상과 별개이거나 그걸 넘어서는 것이 아니라 좀 더 일상을 제대로 영위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라고 말이다.

 

  그렇게 인문은 일상적 삶과 결부되어 있지만 제목의 의미는 단지 거기에 그치지 않는다. 정작 문제는 그 통찰이 어디로부터 올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인문은 어떻게 일상의 굳건한 벽을 허물고 틈을 내어 우리로 하여금 감춰진 진실을 보게 하는 것일까? 그 대답을 장석주는 이 책에서 일관되게 고수하고 있는 스타일로써 보여주고 있다. 그러니까 앞서도 말했듯이 어디로든 막힘없이 자유롭게 흐르는 사유의 물길을 통해 보여주는 것이다. 다시한번 강조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머무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행여나 그 끝에 도달했다 하더라도 다시금 훌쩍 떠날 수 있는 사유의 여유로움이 진정한 인문 정신임을 그는 책에다 새긴 스타일 자체로 보여준다.

 

  생각해보면 우리의 일상이란 정형화된 하나의 틀이다.

  우리는 자유로이 일상의 삶을 산다고 여기지만 사실은 이미 근대 초기 부터 생성되고 규격화된 '일상적 삶'이란 형태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을 뿐인 것이다. 조르주 아감벤 같은 이는 바로 이런 이유로 현대인들은 진정한 의미의 경험을 하고 있지 못한다고 한다. 철학에서 경험이란 어떤 정형화된 틀도 매개하지 않는 그저 직접적이고 순수한 감각만을 의미하는데 지금 현대인이 삶에서 겪는 경험의 대부분은 무엇보다 이미 굳건히 형성된 일상 생활 양식이라는 틀로 매개되어진 것을 단순히 반복하는 것에 불과하므로 결코 경험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감벤에 따르면 단적으로 우리의 삶이란 컴퓨터가 그러하듯이 단순히 프로그래밍대로 움직이는 것 뿐이다.

 

  인문이 힘을 잃게 된 이유도 아마 여기에 있지 않을까 싶다.

  장석주가 보여주는 대로 인문이 어디에도 머무르지 않으며 아무리 절대적으로 주어진 것도 상대화시키고 그로 인해 보다 더 현명한 대안을 찾아 나가는 것이라고 한다면 미리 주입된 프로그래밍에 따라 그저 움직이는 일상은 오히려 반복된 답습으로서 그저 강하게 머무르기만 할 뿐이다. 그 머무름의 관성에 우리는 너무도 길들여진 나머지 어느새 새롭게 바라보는 것 자체마저 피로를 느끼게 되어 늘 부단한 새로움 속으로 내모는 인문에 대해 거리감을 가지게 되었던 것은 아닐까. 하지만 달이 차면 기울듯이 제아무리 굳건한 일상의 틀이라 하더라도 항구히 머무를 수는 없는 법이다. 무엇보다 사람은 주어진 상황을 스스로 되새길 수 있는 이성적 동물이므로 과연 이대로 살아도 괜찮은가 하고 되묻을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슬라보예 지젝도 말했지만 인간 자체가 원래 해답이 하나 주어지면 얼른 그것이 해답이 아닐 가능성을 생각하게 되는 존재다. 그렇게 인간은 끊임없이 되묻는 존재, 언제나 그 너머를 생각하고 움직이는 존재, 물길이 막히면 그 앞에서 주저앉지 않고 돌아서 흐르는 것처럼 인간의 본성 자체가 어디서든 머무르지 않고 어떻게든 뚫고 헤쳐나가는 존재이기에 일상이란 결국 창살이 부서진 우리가 되기 쉬운 것이다. 듣기에 지금 우리나라는 인문학 열풍에 휩싸여 있다고 한다. IMF가 불러일으킨 돈으로 좌지우지 되는 세상에 염증을 느끼고 이제 물질적 만족 보다는 삶의 질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서 그러한 열풍이 오게 되었단다. 그런데 거기서 삶의 질이란 무엇일까? 그건 보다 가치있는 삶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과연 어떤 삶이 진정으로 가치있는 지 알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요구되는 게 있다. 그건 지금까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기존의 모든 생각과 가치관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진정한 가치란 기존의 생각과 가치관을 모조리 지운 텅 빈 마음으로 순수하게 바라볼 때라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바로 그 자유로움을 인문이 가져다 줄 수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인문을 필요로 하고 지금처럼 인문학 열풍이 불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말하자면 지금 우리들은 나와 세상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새로운 눈을 찾고 있다. 거기에 어디서든 결코 머무르지 않으며 늘 훌쩍 벗어나 새로운 것을 조망하려는 이 일상의 인문학은 그 눈을 찾는데 많은 도움이 되어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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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의 물리학 - 과학은 인간의 일상과 운명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
미치오 가쿠 지음, 박병철 옮김 / 김영사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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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개봉한 영화 '토탈리콜'은 우리의 근 미래를 다루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거기에 신기한 것들이 참으로 많이 나온다. 이를테면 바퀴없이 날아다니는 자동차라든가 상하좌우 어디로든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는 엘리베이터라든가 또는 아무런 지지대 없이 그냥 공중에 붕 떠 있는 건물들 같은 것들 말이다.

 

 

 

 

 

 

 뉴튼의 물리학 법칙 쯤은 가볍게 무시하는 이러한 것들은 그래서 우리의 눈길을 끌며 또한 우리로 하여금 생각하게 만든다. 아무리 미래라고는 하지만 과연 저런 것이 가능할까 하고 말이다. 그런데 어쩌면 이런 궁금증을 가진다는 것 자체가 어리석어보일 수 있겠다. 왜냐하면 '그냥 영화적 상상력 아니냐?' 하면서 치부해버리면 될 일을 현실적 가능성 따위나 운운하고 있으니...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솔직히 나 역시도 그런 치부의 전력이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바퀴없이 날아다니는 자동차만 해도 그렇다. 우리는 이미 그것을 미래가 주 배경이 되었던 영화 '백 투 더 퓨쳐'의 속편에서도  본 바 있다. 그런데 그 '백 투 더 퓨쳐'가 속편에서 날아갔던 미래는 2015년으로, 지금으로부터 불과 3년 후다. 하지만 아직도 날아다니는 자동차가 나올 가능성은 티끌만큼도 되지 않는다. 그 영화를 보면서 언젠가는 나도 날아다니는 자동차를 탈 수 있겠지 꿈꾸었던 아이들은 그 꿈이 깨어지는 아픔을 2015년으로 다가갈 수록 날마다 맛보아야 한다. '꿈을 꾸는 것과 실현하는 것은 다른 말이다.'라는 것을 미래를 다룬 영화들을 보면서 꿈을 꾸었던 꼬마들 만큼이나 뼈져리게 깨닫는 이들이 또 있을까?

 

 그러니 당연히 시니컬해질 수 밖에. 미래란 지금의 현실과 그리 다르지 않을 것이며 영화에서 묘사되어지는, 모든 눈이 번쩍 뜨일만한 미래의 모습이란 거짓 환영에 불과하다고 말이다. 아직도 그런 걸 믿는 사람들이 행여나 주위에 있다면 기꺼이 어리석다고 얘기해 준다. 아마도 이러한 현실적 경험에서 우러나온 시니컬함이 'SF 소설이나 영화'를 바라보는 우리의 태도마저 결정했는지 모르겠다. 그러니까 본래 SF가 추구하는 목적인 실현 가능한 미래 세계의 대안적 모델을 탐색하거나 검증하는 장르라기 보다는 그저 재미를 위해 실현성 없는 허황된 이야기만 일삼는 장르라는 것으로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스타트렉의 '트렉터 빔'이나 '텔레포테이션', 또는 스타워즈에 나왔던 '데스 스타'의 '행성파괴광선' 같은 것을 물리학적으로 진지하게 연구하는 학자가 있다면 '거 참, 할 일은 어지간히 없고 시간은 어지간히 많은 학자군.'하고 마냥 비아냥 거리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우리들 앞에서 오히려 당당하게 물리학의 연구 대상에서 제외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그 어떤 것이든 인류에게 있어  '불가능은 없다'라고 선언하는 과학자가 있으니 그가 바로 '미치오 카쿠'다.

 

 

 

 

 

 

 그런데 우리는 그의 이런 말을 들어도 함부로 무시해버릴 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세계 최고 물리학자 중의 한 사람이고 거기다 그를 유명하게 만든 '평행 우주'를 읽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사람의 내공이 어느 정도인지 능히 짐작이 갈테니 하는 말이지만 그 내공의 경지로 볼 때 그가 무슨 말을 하든 아무런 근거없이 그냥 하는 말은 아닐 것임을 쉬이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정말로 'SF'에 나오는 그 어떤 기술이든지 현실적으로 가능하게 될 것임을 믿으며 그 실현가능성을 진지하게 검토한다. 그리고 그는 이미 그 태도를 '불가능은 없다'라는 책과 동명의 다큐멘터리로 증명한 바 있다. 때문에 우리는 미치오 카쿠의 그 진지하면서도 객관적인 고찰과 검증을 통해 또한 깨닫지 않을 수 없다.  결코 꿈을 꾼다는 것과 실현 가능하다는 것이 다른 말이 아닌 것임을!  2002년 한국 월드컵을 4강에 가게 했던 '꿈은 이루어진다' 캐치프레이즈 대로  'SF'란 허황한 환영이 아닌 실현 가능한 일들의 '예언'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토탈 리콜'의 원작자이기도 한 필립 K 딕은 한 단편에서 SF 작가들을 서슴없이 '예언자'로 부른 적이 있었는데 미치오 카쿠도 그렇지만 나 역시 이에 동감한다. 그러니까 이 '예언'이란 말에 포함된 진정한 의미는 이것이다. 정말 중요한 것은 불가능하다고 단정하고는 쉽게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리 불가능해 보여도 실현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이루어지리라 믿고 끝까지 지속적으로 노력해야 한다는 것 말이다. 미치오 카쿠는 바로 그 진정한 의미에서의 '예언'을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가능은 없다'나 이번 '미래의 물리학'에서 미치오 카쿠가 하는 말을 듣고 쉽게 그를 '너무 낙관적이다'라고 평가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미치오 카쿠는 '낙관'을 새로이 정의한다. 그러니까 그는 바라보는 대상을 가지고 낙관 혹은 비관인지를 가늠하지 않는다. 미치오 카쿠가 낙관 혹은 비관을 가늠하는 기준은 언제나 그 바깥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내부에 있다. 다시 말해 미치오 카쿠가 낙관하는 것은 다가올 미래가 가진 낙관할만한 가능성 때문이 아니라 그가 그것이 가능할 수 있도록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노력할 것임을 알기 때문에 낙관인 것이다. 이것은 정당하다고 할 수 있다. 낙관이나 비관은 단순한 전망일 뿐이다. 문제는 전망은 언제나 실행이 뒤따라야만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즉 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행위이다. 현실적으로 이루어내는 것은 머리 속 계산이 아니라 우리의 손과 발이 행하는 실천인 것이다. 그러므로 낙관과 비관의 기준 역시 정작 있어야 할 곳은 우리 자신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를 얼마나 신뢰하느냐, 그것을 위해 얼마나 노력할 수 있느냐 바로 거기에 낙관과 비관을 결정하는 기준이 있는 것이다. 바로 그렇기에 미치오 카쿠는 '불가능은 없다'라고 낙관할 수 있다. 그는 믿고 있고 또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인류가 아무리 불가능해 보이는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포기없이 계속해서 연구하고 노력할 것임을 말이다. 그 신뢰의 근거 역시 전혀 허황되지 않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와 같이 다양한 분야에서 연구에 헌신하고 있는 전세계의 수많은 동료들로 부터 그 근거를 얻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당장은 실용화 가능성이 없더라도(즉 아무런 실익이 주어지지 않더라도), 그 누가 알아주지 않더라도 묵묵히 해야 할 연구에 매진하고 있는 그들에게서 말이다. 더우기 눈으로 보고 직접 나누는 대화를 통해 얻게 된 것이었기에 더욱 단단한 낙관이 될 수 있었다. 그래서 이러한 미치오 카쿠의 낙관이 사실은 인류 전체에 대한 신뢰에 기반하고 있다고 해도 그리 과언은 아닐 것이다. 아마 내가 미치오 카쿠의 책을 좋아하는 것도 그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 바탕에 사람들에 대한 따스한 시선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이번에 나온 '미래의 물리학'을 단적으로 말하라면 일종의 '예언서'라고 하겠다.

 앞서 SF를 예언으로 봐야 한다고 말했을 때 그 '예언'의 의미로 말이다. 그렇게 미치오 카쿠는 향후 100년에 우리들에게 찾아올 과학적 혁신을 모두 여덟가지 분야에 걸쳐 얘기해주고 있다. '평행우주', '불가능은 없다'에서 이미 보았듯이 여기에서도 논의되는 과학적 지식들은 매우 상세하지만 결코 어렵지 않다. 일반인들에게도 과학을 무엇보다 편안하고 쉽게 다가가도록 만드는 데 특출난 재능을 보이는 미치오 카쿠의 저력이 '미래의 물리학'에서도 다시금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다. 그래서 난 영화 '토탈 리콜'이 그리는 세계가 그리 허황된 것만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정작 영화에서는 어떻게 그러한 것들이 가능한 것인지 설명하지 않는다. 왜 자동차가 바퀴없이도 비행할 수 있고 건물들이 아무런 지지대 없이도 공중 부양을 할 수 있는지 말이다. 그래서 어쩌면 그 세계가 더 허황되게 여겨졌을 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영화 속 세계가 그렇게 허황된 상상이 아니라 과학적 이론에 기반해 세워져 있음을 이 '미래의 물리학'을 보고 알게 되었다. 그 세계가 바로 자기력을 완전히 지배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가능하게 되었다는것을 말이다. 미치오 카쿠는 이 책의 5장 '에너지의 미래'에서 인류가 자기력을 지배하면 어떤 세상이 우리에게 닥쳐오는지 상세하게 보여준다. 거기서 미치오 카쿠가 보여줬던 세계가 바로 그대로 '토탈 리콜'의 세계였다. 물론 빈부와 계급의 격차가 심한 정치적 상황은 빼고 순수한 테크놀로지 측면에서의 세계만 말이다. 그 꿈같은 일이 자기력만 제대로 통제할 수 있으면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미치오 카쿠는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지금 어떤 노력들이 이루어지고 있는지도 구체적으로 보여주었다. 그렇게 이론과 실현 가능성을 위한 노력 양자를 균형있게 다 다뤄줌으로써 꽤 설득력이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 역시도 카쿠 만큼이나 언젠가는 그것이 정말 가능해 질 것이라 믿게 된다. 그리고 그리게 된다. 핵융합 기술이 이루어져서 무한의 동력을 쓰게 될 인류를, 그렇게 한정된 에너지와 자원에서 해방되어 이제 전통적 개념의 '부'로 부터 벗어나 전혀 다른 소유의 관념과 재산의 관념을 가지고 살아가게 될 인류의 모습을...

 

 그렇게 미치오 카쿠의 '미래의 물리학'은 단순히 테크놀로지의 발전만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 장차 그 기술의 실현으로 우리의 삶 자체가 어떻게 바뀌는지도 말해주는 책이다. 인쇄술의 발명이 궁극적으로 프랑스 대혁명으로 이어져 중세와는 전혀 다른 보다 혁신된 지금의 삶을 만들어내었듯이 말이다. 그래서 더욱 '예언서'다. 예언이란 언제나 삶과 밀접한 관계가 있지 않았던가! 그렇게 그러한 기술들의 실현으로 우리가 장차 맞이하게 될 삶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 될 것이라 말한다. 현재 뇌신경학, 사회생물학, 진화학자등이 누차 증명하는 바 대로 우리의 존재에게 있어 본디부터 타고나는 것이 거의 없다. 우리의 의식, 인격마저 사실은 환경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형성된다. 그러므로 세계를 혁신할 기술이 인류의 삶을 그 근본부터 바꿔버릴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역사를 돌이켜 보면 기술의 발전이란 언제나 자유의 확장과 비례 관계였다. 그리고 그게 가능했던 이뉴는 기술의 혁신이 언제나 인류의 사유를 '리부팅(REBUTING)' 시켰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 그 때 형성될 미래의 가치관은 지금의 가치관과 분명 다를 것이라는 것이다. 지금과 같은 사물을 보는 방식, 사유 방식, 세계와 타인에 대한 판단 등은 거기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을 지도 모른다. 당장 핵융합 기술이 실현되어 무한의 에너지를 사람들이 쓸 수 있게만 되어도 지금 우리가 가진 가치관에 있어서 얼마나 많은 변화가 일어나겠는가? 혹시나 알아차렸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사족이나 다름 없을지도 모를 이 말을 계속 하는 것은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기술에 대한 비관론을 염려해서이다. 즉 '미래의 물리학'에 대한 나의 생각들이 미치오 카쿠만큼이나 지나친 낙관이 아니냐는 말을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그 비관론이란 이미 형성되어진 과거의 잣대로 미래를 바라보고 있기에 생긴 것이 아니겠는가 하고 말이다. 그러니까 이런 옛날 얘기가 있지 않은가? 한 선사가 고양이를 너무 무서워하는 생쥐가 불쌍해 호랑이로 만들어 주었으나 여전히 생쥐 때의 두려움이 남아있어 고양이를 계속 두려워하는 바람에 도로 생쥐로 만들어버렸다는 얘기 말이다. 바로 그 이야기 속의 생쥐처럼 다가올 미래를 우리가 그저 과거의 잣대만 가지고 너무 염려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말했던 대로 미래에 도래할 기술로 인류의 모습이 어떻게 바뀔지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 그건 지금까지 했던 우리의 경험과는 전혀 다른 경험을 통해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늘 유한한 재화에 시달린 우리들이 무한의 재화를 쓴다는 게 어떤 것인지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한정된 수명을 가진 자가 영원한 삶을 살아가는 존재가 어떻게 삶을 바라볼 것인지 예측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다시 말해 '닥터 후'의 타디스에 들어간 사람들이 '어떻게 안이 바깥보다 더 넓지?'하고 놀라는 것 말고는 달리 할 게 없다. 직접 경험해보지 않고서는 모른다라는 시쳇말도 있듯이 진정한 사유란 결국 경험의 엄습 뒤에야 오는 것이다. 그런데도 영화 '토탈 리콜'처럼 미더워하고 염려하는 것은 사실 단 하나의 이유 밖에는 없다고 생각된다. 바로 인류에 대한 신뢰가 있느냐 아니면 없느냐 그것이다. 다시 말해 인류에 대한 비관하고 있으면 미래 역시도 비관일 것이며 인류에 대해 낙관하고 있으면 미래 역시도 낙관일 것이다.

 

 사실은 바로 여기에서 미치오 카쿠의 '미래의 물리학'은 이제 읽기의 전혀 다른 차원을 열어 놓는다. 앞서도 말했듯이 미치오 카쿠가 가진 낙관의 바탕은 인류에 대한 신뢰에 있다. 그리고 그는 바로 그 신뢰가 도래할 미래의 모습이 어떤지를 결정할 궁극적인 힘임을 안다. 그러면 정말로 우리가 힘써 가져야 할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미래 기술의 청사진 보다는 인류에 대한 신뢰를 가지는 것, 바로 그것이 아닐까? 그래서 어쩌면 정말 미치오 카쿠가 이 책을 통해 보여주려 했던 것도 우리가 언젠가 맞이하게 될 기술의 진보가 아니라 보다 좋은 세상을 위해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한 발 한 발 다가가고 있는 인류의 모습을 통해 그 신뢰를 가지게 함이 아닐까? 이렇게 보자면 '미래의 물리학'이 보여주는, 그 '꿈'을 향한 전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재진행형인 다양한 노력들은 그야말로 우리가 왜 인류에 대해 신뢰를 지녀야 하는지 그 증거가 되는 셈이다. 그러니까 H.G 웰즈의 소설, '타임머신'의 마지막에 나오는 꽃과 같은 차원의 증거다.

 

 '타임머신'에서 주인공은 머나먼 미래(802701년)로 날아간다. 그리고 거기서 인류가 '엘로이'가 되어 모든 문명적인 것이 제거되어 이제 스스로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는 존재가 된 것을 본다. 한낱 '몰록'의 가축이 되어 그저 도살당할 수 밖에 없는 운명에 처한 인류를 주인공은 도와주는데 거기서 그의 도움을 받은 한 여자는 그에게 야생화 하나를 꺽어준다. 마지막에 다시 미래로 가버린 주인공이 남기곤 간 그 꽃을 바라보며 주인공의 친구인 화자는 이렇게 말한다.

 

  그는 인류의 진보를 어둡게 보았다. 쌓아올린 문명이 필연적으로 무너져서 결국에는 그것을 쌓아올린 자들을 파멸시킬 것이기 때문에 애초에 헛고생이라고 했다. 그게 사실이라면 우리는 그렇지 않다는 듯 살아낼 도리밖에는 없다. 하지만 내게 있어 미래란 여전히 암흑이고 공백이다. 기억에 의존한 그의 이야기가 밝힌 몇몇 군데만 빼면 광할한 미지나 마찬가지다. 그래서 나는 위안 삼아 이상한 흰 꽃 두 송이를 곁에 두고 있다. 이젠 갈색으로 쭈그러들고 납작해지고 버석버석해진 그 꽃은 지력과 체력이 사라진 미래에도 여전히 감사하는 마음과 서로를 아끼는 마음이 인간의 가슴 속에 살아있었음을 증거하고 있다.

 

 

 그렇게 웰즈에게 그 꽃은 인류에 대한 신뢰의 상징이었다. 그리고 그 꽃이 증거하는 신뢰로 인해 그는 세계 대전이 한창 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인류에 대해 낙관할 수 있었다. '우주전쟁'은 그것에 대한 단적인 증거이지 않는가. 웰즈가 보여주듯이 우리가 생각하는 미래란 이렇게 인류에 대한 신뢰의 여부로 좌우된다. 문제는 불신이 낳는 것은 결국 모든 것의 회의 끝에 나오는 '자기 보신' 밖에는 없다는 사실이다. 말하자면 타임머신에서 그랬듯이 자기만을 위해 기꺼이 엘로이들을 학살하는 몰록들의 창궐이다. 그러므로 그 미래가 몰록으로 넘쳐나느냐 아니냐는 바로 오늘의 인류를, 적어도 내 곁의 타인을 바라보는 시선에 달려있다고 말해도 과언은 아니다. 바로 그와 같은 이유로 인해 미치오 카쿠는 그 시선을 보다 긍정적으로 만들고자 이 '미래의 물리학'을 쓴 것이다. 이는 그가 책 첫 머리에 인용한 윈스턴 처칠의 말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는 바이다.

 

 "마음을 다스리는 자가 미래를 다스릴 것이다."

 

   

 과학책을 가지고 '뭐 이런 말을 할 것 까지야!' 하실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렇게 말해야 했다. 이 책이 그야말로 웰즈의 '꽃'과 같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미치오 카쿠의 책을 읽으면 과학도 궁극엔 인간학이지 않을까 생각된다. 쉽게 말해 인간을 바라보는 태도가 과학적 태도 역시 결정함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기술이 과연 가치중립적인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던 사람은 마르크스였다. 그는 기술의 발달이 인간 해방을 가져올 수 있다고 믿었지만 기술이 순수하게 가치중립적이라고는 보지 않았다. 그래서 산업혁명을 가져온 기술도 마르크스는 부정적으로 여겼다. 그것이 자본가의 이윤만 추구하고 숙련을 통해서만 높아질 수 있는 노동자들의 가치를 소거해나갔기 때문이었다. 기술이 그렇게 변질된 것은 오로지 자본가 자신들의 이윤만 추구하려는 노력에 기인했다. 즉 그들의 시선이 노동자들이 더불어 살아야 할 사람이 아니라 오로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용하는 도구로만 보았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마르크스와 미치오 카쿠는 같은 자리에 선다. 그리고 힘을 모아 같이 외치고 있다. 결국 중요한 것은 타인을 바라보는 시선이고 그 포용과 배려 속에서 신뢰가 무르익을 때 우리의 미래 역시도 그와 똑같이 찾아올 것이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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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과학 - 위대한 석학 16인이 말하는 뇌, 기억, 성격, 그리고 행복의 비밀 베스트 오브 엣지 시리즈 1
스티븐 핑커 외 지음, 존 브록만 엮음, 이한음 옮김 / 와이즈베리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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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문간 분화가 점점 조밀해지고 그 사이의 경계 역시 두터워지면서 학문적 성과가 점점 지엽적인 것에 머무르자 거기에 대한 반성으로써 각 학문들이 쌓아왔고 그 최신의 성과에 대해서 영역을 넘나들며 자유로운 토론을 통해 학문간 소통의 창구를 보다 넓혀보고자  출범한 것이 바로 EDGE FOUNDATION 이다. 

 

 


 EDGE FOUNDATION 은 1996년, 편집자이자  브록만 출판사의 대표이기도 한 존 브록만에 의해 설립되었다. 리처드 도킨스와 같은 학자들에게 보다 대중적인 책을 쓰도록 만든 바도 있던 존 브록만은 그렇게 학문이 자신의 영역에만 갇혀 대중과 점점 괴리되는 것에 문제의식을 느껴 보다 각 학문들이 광장으로 나와 다른 영역의 학문들과 만나고 좀 더 대중 친화적이 될 수 있도록 이 EDGE FOUNDATION 을 만들었다. 무엇보다 이 EDGE FOUNDATION 이 유명한 것은 여기에 참여한 회원들의 면면 때문인데 이제는 별 다른 설명이 필요 없는 리처드 도킨스를 비롯, '빈 서판'의 스티븐 핑커, 서울대 도서관 대출 순위 1위라는 '총, 균, 쇠'의 저자 제레미 다이아몬드, 행동경제학의 창시자 가운데 한 사람이며 심리학자로서 드물게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생각에 대한 생각'의 저자인 대니얼 카너먼까지 이른바 각 학문 분야에서 가장 명망있는 유수의 학자들이 여기에 회원으로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로 치면 '초호화 배역진'이라고나 할까. 아무튼 EDGE FOUNDATION 의 홈페이지엔 지금도 각 학자들이 연구한 것들이 차곡차곡 쌓여 누구든 볼 수 있도록 개방되어 있는데 바로 그러한 집단 지성의 산물과도 같은 성과를 한 권의 책으로 만든 것이 이번에 나온 '마음의 과학'이라는 책이다.
 
 이 '마음의 과학'은 제목 그대로 우리의 두뇌, 마음, 성격 그리고 기억 등에 관하여 지금까지 이루어진 인지과학, 진화심리학, 이론심리학, 신경과학, 신경생물학, 행동유전학등의 최신의 연구 성과를 담고 있다. 말하자면 우리의 뇌와 마음에 대한 과학적 연구에 있어 최신 업데이트 판이라 할만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이 책이 가진 커다란 장점이지만 개인적으로 더 주목하게 되는 장점이 또 하나 있다. 바로 비용에 있어서의 장점이다. 일단 이 책에 실린 저자들을 한 번 훑어보자. '빈 서판', '마음은 어떻게 작동하는가'로 유명한 진화심리학의 거장, '스티븐 핑커'가 있다. 또 '명령하는 뇌, 착각하는 뇌'로 너무도 유명한 뇌인지과학의 거장, 라마찬드란이 있다. 거기다, 영화로 까지 만들어졌었던 '스탠퍼드 감옥 실험'을 만들었던 주인공이자 그 실험을 한 권의 책으로 만든 '루시퍼 이펙트'의 저자 필립 짐바르도도 있다. '타고난 반항아'를 읽어보신 분이라면 이 학자의 열정에 감동을 받지 않을 수 없는 거기다 몇 번째의 자녀로 태어나느냐가 사실은 우리의 성격을 형성시키는 주된 원인이기도 하다는 것을 밝혀내 놀라움을 준 학자  프랭크 설로웨이를 비롯 우리나라에도 소개된 '스트레스'의 저자이자 신경생리학의 권위자인 로버트 새풀스키에 진화심리학의 권위자, '제프리 밀러' 거기다 신경과학 최고의 권위자 중의 한 사람인 스타니슬라스 드엔, '코끼리는 생각하지마'로 우리에게도 일약 유명해진 하지만 그 보다는 인지과학에 있어 권위자이며 인지언어학의 창립자이기도 한 '도덕 정치를 말하다'와 '몸의 철학'으로도 너무도 유명한 조지 레이코프까지 있다. 이쯤되면 무슨 말을 할지 눈치채실 분도 있으실 것 같다. 즉 이 '마음의 과학'이 비용면에서 꽤나 효율적이라는 말은 바로 이렇게 유명한 학자들의 논문이 총망라되어 있으니 권당 2만원이 훌쩍 넘는 그들의 개별 저작들을 보지 않고도 얼마든지 그들의 이론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이 '마음의 과학'은 단적으로 그들의 개별 저작들에서 살펴온 논의들의 액기스만 모아놓은 것과도 같다.

 그러므로 우리는 보다 적은 비용과 시간으로 그들의 최신 견해들을 훑어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최상의 경제적 효율성을 가진다. 하지만 책이 어찌 그 효율만 가지고 평가될 수 있으랴. 정작 중요한 것은 물론 내용이다. 이 책은 모두 16인의 최고 권위자들의 글이 모여있지만 각각의 단편 하나가 일련의 흐름으로 이어지도록 체계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 편, 한 편이 모두 각자 나름의 연구 성과인데도 그것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물흐르듯이 이어져 새삼 과학책의 편집자로 잔뼈가 굵은 존 브록만의 편집 솜씨가 얼마나 뛰어난지 느끼게 한다. 그렇게 우리의 마음이 본래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절묘하게 가공된 장치'이며 그것도 자연선택이 작용한 진화의 산물임을 말하며 언어야 말로 그러한 인류의 생물학적 진화에서 진정한 혁신이었다는 것으로 스티븐 핑커가 그 포문을 열면 그 바통을 받아 라마찬드란이 기원전 4만년 전에 갑자기 출현한 언어의 발명을 비롯한 인간의 정신능력과 문화가 갑자기 폭발적으로 발달한 것이 무엇보다 인간과 영장류 특유에게만 있는 타인을 모방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거울 뉴런' 덕분임을 말하고 바로 이 거울 뉴런의 존재로 말미암아 우리의 마음이 오늘날처럼 이렇게 복잡하게 되었음을 설명하면 그 마음이 가장 단적으로 드러나는 형상이기도 한 성격은 또 어떻게 형성되는가에 대해 그것이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환경과의 유기적 협업(즉 '공적응(COADAPTATION)')에 의한 산물임을 같은 부모를 가진 형제들간의 대비효과를 통해 프랭크 셜로웨이가 보여주며 바로 그렇게 우리의 마음이나 성격 그리고 정체성마저 본래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환경의 영향 역시 많이 받는다는 것을 스탠포드 감옥 실험으로 '루시퍼 이펙트'가 있음을 밝혀내었던 필립 짐바르도가 더욱 확증한다.

 책은 이렇게 마치 릴레이 경주를 하듯 이전의 학자가 단언했던 것을 보다 세부적으로 확인해주면서 또 다음 학자에게 자신의 작업의 미진한 부분들을 말하게끔 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는데 그래서 읽는 우리들은 각자 저마다 다른 학자의 글들을 읽지만 '마음'이라는 것에 대하여 오늘의 최신 과학은 어떤 입장을 가지고 있는지 하나의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읽게 된다. 그래서 보다 쉽게 더욱 체계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무엇보다 이 책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던 상식들이 얼마나 과학적 오류였는지 제대로 깨닫게 한다. 우리는 흔히 우리의 마음이나 성격 같은 것들이 본래적으로 형성된 것이라 여기지만 최신의 과학적 연구가 보여주는 바에 따르면사실 그것은 타고난 것과 환경이 서로 조응하면서 이루어낸 산물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우리의 타자로 부터 많은 영향을 받는 바깥으로 열린 존재였다. 무엇보다 우리의 학습 능력을 만들고 지금처럼 복잡한 마음을 갖도록 만든 '거울 뉴런'이라는 존재가 그렇다. 애초에 우리가 지금과 같은 마음의 상태를 가지게 된 것도 타인에 대한 모방 덕분이었던 것이다. 스타니슬라스 드엔에 따르면 환경의 영향이 얼마나 지대한지가 더욱 드러난다. 그녀는 특히나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무한에 가까운 수까지 헤아려 경이롭기까지한 '수를 헤아리는 능력'을 연구의 초점으로 삼았는데 그 연구 결과 그토록 경이로운 수를 헤아리는 능력 역시도 인간이 본래적으로 타고난 능력이 아니라 문화적 축적의 산물에 지나지 않았다. 그녀는 단적으로 이렇게 말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구구단을 기억하기가 왜 그렇게 어려울까? 무엇보다도 우리 뇌가 구구단을 배우도록 진화한 적이 결코 없었기 때문에, 이 목적에 덜 적응된 뇌 회로를 갖고 진땀을 빼야 하는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수학에 약한 것은 우리 인간의 정상적인 증상이고 수학을 잘하려면 상당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실제로 아이들이 수학을 배울 때의 정서 상태와 집중량의 차이를 근거로, 왜 일부 아이들은 수학을 잘 못하고 일부 천재백치들은 계산에 놀라운 능력을 보이는지 그 이유를 꽤 많이 설명할 수 있다. 성차를 비롯하여 수학 능력에 타고난 차이가 있다는 증거들을 다수 검토한 나는 수 능력에 개인별 차이가 나타나는 상당 부분이 타고난 '재능'의 차이 때문이라고는 믿지 않는다. 교육이 핵심이며 긍정적인 정서가 수 능력의 성공을 추진하는 행위이다. (P. 193 ~ 194)

 그녀는 나아가 우리가 잘 아는 수학 천재들도 마냥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오롯이 수학에 바쳐진 집중력과 오래된 훈련의 산물일 뿐이라고 말한다. 즉 태어나면서 천재는 없다는 것이며 있는 것은 보통 사람 이상의 압도적인 집중력과 훈련이 빚어낸 숙련자가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들 스스로 본래적으로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라 여겼던 사람의 많은 부분들이 사실은 인류라는 종 자체가 겪어온 환경과 내가 처한 환경의 협력을 통해 이루어진 산물이었다. 다시 말해 '나'라는 존재 자체가 하나의 단독 집합이 아니라 여러 많은 것들과의 '교집합'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최신의 과학 이론들은 왜 우리가 타자에 대해서 좀 더 포용적이어야 하는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애시당초 우리라는 존재 자체가 그렇게 함으로써 지속해왔던 것이다. 하지만 이 책에서 얻는 것은 이것 뿐만이 아니다. 달리 얻게 되는 것 또 하나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우리 자신에 대한 생각 중 많은 부분이 사실은 오해에 근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를 위해 일부러 스타니슬라스 드엔의 저 말을 인용했다.

 사실 저 말은 내게 참으로 위안이 되는 말이기도 했다. 난 학창시절 수학을 정말 못했다. 과학자가 되고 싶었지만 인문으로 전공을 택해야 했던 이유도 고등학교 수학을 정말 못했기 때문이다. 나는 타고난 내 머리가 나빠서 그런줄로만 알았는데 스타니슬라스 드엔의 말에 따르면 절대 그런 것은 아니니 참으로 위안이 되었다. 다만 내 집중력과 훈련이 부족할 뿐이었던 것이다.(그러고보니 수학을 별로 열심히 한 적이 없다. ㅡ ㅡ;) 아무튼 스타니슬라스 드엔에 따르면(이 사람의 말을 무시할 수 없는 것이 이 분야에 관해서 가장 최고의 권위자이기 때문이다. 이 '수'에 관한 그녀의 연구는 많은 학자들을 놀라게했다.) 모든 건 교육과 훈련의 결과요 우리 노력의 산물이다. 타고난 머리만 탓하며 노력을 게을리 한 나 자신이 참으로 한없이 부끄러워지기도 하지만 그래도 이 말은 어쩐지 힘이 된다. 집중력과 훈련만 제대로 하면 웬만큼은 다 가능하다는 이야기이니까. 비유하자면 생래적인 차이라 여겼기에 한없이 높아만 보였던 농구 골대가 그 키가 내가 던질 수 있을 만큼으로 작아진 느낌이랄까 아무튼 그렇다. 그러니 다른 사람에게 함부로 머리가 나쁘다는 이야기도 하지 말아야겠다. 다만 '네가 집중을 못하고 훈련을 잘 하지 않아서 그래.' 정도로만 말해야겠다. 어쩐지 머리가 나쁘다는 말 보다 훨씬 더 긍정적으로 들린다. 그래서 듣는 사람도 낙관적이 될 것 같다. 진지 모드로 죽 이어지다가 갑자기 개인의 잡설로 나오고 말았는데 그만큼 이 책은 과거의 나 자신을 되돌아보게 만든다는 것도 아울러 알리기 위해서였다. 이 책이 사람이라는 존재에 대하여 가진 많은 오해들을 보여주기 때문에 그동안 나 자신을 이렇게 저렇게 규정하며 그 이유로 때로는 방기하며 때로는 나태했던 스스로를 꾸짖게 되는 것 같다.

 아무튼 '마음의 과학'이란 이 책은 이런저런 장점이 참 많은 책이다. 인간이라면 한번쯤 궁금해봤을 두뇌와 마음 그리고 성격과 의식이란 것에 대하여 정말 많은 것들을 그것도 쉽게 알려주는데다가 생각지도 못했던 것들을 깨우쳐 우리의 오해들을 짚어주고 그러한 오해에 빠져 그른 판단을 했었던 나 자신 역시 되돌아보게 한다는 점에서 내겐 정말 좋은 책이었다. 같은 궁금증이나 언제 한 번 이런 책을 보아야겠다고 생각하셨던 분들이라면 이 책이 아주 좋은 벗이 되어줄 것 같다. 이쯤에서 더 좋은 소식은 이 엣지 시리즈가 이 한 권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책 날개에 보면 문화, LIFE, 우주, 사고에 관한 책들이 목록으로 나열되어 있다. 아마도 출간 예정인 책들 같다. '마음의 과학'으로 이 엣지 시리즈에 대해 무한 신뢰가 생겼다. 빨리 만나보게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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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는 왜 실패하는가
대런 애쓰모글루 외 지음, 최완규 옮김, 장경덕 감수 / 시공사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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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혹시 이런 궁금증 가져보신 적 있으신가요?

 '왜 어떤 나라는 잘 살고 어떤 나라는 못 살까?'

 

 한번쯤 다른 나라를 부러워해 본 사람들이라면 이런 의문 또한 한번쯤 품어본 즉 한데요. 사실 이 질문은 아주 오래도록 학자들을 괴롭혀온 질문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미 근대 초기 때부터 말이죠. 그 대표적인 학자가 우리들도 잘 알고 있는 삼권분립을 주창한 저서 '법의 정신'으로 유명한 몽테스키외입니다. 단 두 권 밖에 없는 그에게 또 다른 저서 '페르시아인의 편지'가 사실은 그 의문을 풀어보려는 시도였기도 했었죠. 오래도록 여러 지방을 여행 하면서 경험한 다양한 나라의 다양한 풍습들은 몽테스키외로 하여금 역사적인 삶에는 일반적인 모습이 없으며 각 나라가 지닌 역사와 환경에 따라 다양하게 발전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하였고 그를 통해 그는 '풍속'을 그 사회를 알 수 있는 가장 주요한 통로로 인식했습니다. 그리고 그를 통해 자신이 가지고 있던 의문 '왜 나라 사이에 불평등이 존재할까?'를 풀어갔죠. 그가 주목한 건 지리적 위치였습니다. 각 나라가 지구상 어디에 위치하느냐에 따라 사람들의 성향 역시 달라져 나라 사이에 불평등이 생긴다고 보았죠. 지금도 우리가 흔히 동남아 사람들을 바라볼 때 하는 생각, 그러니까 그들이 못사는 건 더운 나라라서 한 없이 게으르기 때문이라는 그 생각은 바로 이 몽테스키외에게서 비롯된 것이죠.(최근 이 몽테스키외의 이론은 '총, 균, 쇠'를 쓴 제레미 다이아몬드에게도 이어져 보다 세련된 형태로 전개되고 있습니다만 역시나 똑같은 한계는 있다고 하겠습니다.) 하지만 같은 열대 기후에 속한 나라라 할지라도 다 똑같이 열악한 건 아닙니다. 이를테면 싱가포르가 있지요. 그러니 환경적 요인은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 수 밖에 없고 후일 시간이 지나 거기에 대해 전혀 다른 이유를 제시하는 학자가 나타나게 됩니다. 그가 바로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으로 우리에게도 유명한 막스 베버 입니다. 그 역시 이 책을 쓰게 되었던 것은 왜 서양에서만 자본주의가 부흥하게 되었을까 하는 의문 때문이었습니다. 서양 보다 훨씬 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의 나라들에선 왜 자본주의가 생기지 않았고 그래서 서양 제국주의의 희생양이 될 수 밖에 없었는가 그는 이것을 알고 싶어했습니다. 그리고 그 책을 통해 이유를 제시합니다. 그게 바로 '프로테스탄티즘(개신교 정신)'이었습니다. 루터와 칼뱅의 특유한 개신교 논리가 자본주의가 발흥되도록 했고 결국 서양과 동양의 불평등을 낳았다고 본 것이죠. 그렇게 막스 베버는 종교를 비롯한 문화적 원인이 나라마다 차이가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습니다. 하지만 이 역시도 결정적인 해답은 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예외의 존재가 분명히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지금 우리 가까이에. 네, 바로 우리 한국입니다.  우리는 지금 분단국가입니다. 같은 역사와 언어를 공유하는 한민족이 서로 갈라져 있습니다. 다시말해 북한과 우리는 문화적 차이가 그리 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아시다시피 지금 북한과 남한의 차이는 아주 큽니다.

 

 

 

 

 

 2006년 영국의 데일리 메일이 게시한 이 사진처럼 말입니다. 이 사진은 우리나라의 밤을 찍은 것입니다. 그런데 남한은 빛으로 여기저기 반짝이지만 북한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는 같은 문화적 요인을 가지고 있지만 차이는 이렇게 눈에 확 띌 정도로 극명합니다. 그러니 막스 베버의 이론도 절대적인 것은 아닌 것이죠. 그럼 도대체 뭘까요? 어떤 이들은 '무지 이론'을 내세웁니다. 이름만 거창할 뿐 사실 별 거 아닌 이론입니다. 즉 그 나라가 가난한 건 국민이나 통치자가 가난을 극복하고 부유해지는 방법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거죠. 이론이 쉬운 만큼 속 편한 해결책이기도 합니다. 뭐든 그 나라의 탓으로만 돌려버리면 되니까요. 하지만 과연 그럴까요? 국민이나 통치자가 부유해지는 방법을 몰라서 그럴까요? 물론 아니죠. 이건 우리나라만 생각해도 바로 답이 나옵니다. 이를테면 '사대강'이 있지요. 여기에 들어가는 비용이 거의 40조가 넘습니다. 지금 우리나라의 재정상 부담하기 지극히 어려운 비용입니다. 거기다 우리 국민 전체의 90% 넘는 사람들이 이 정책에 반대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행되었고 그 때문에 바로 얼마전엔 한강 식수가 '녹조 라떼'가 벌어지는 일이 발생했죠. 40조는 그냥 허공으로 증발한 셈이 되어버렸고 앞으로 이런 인위적인 자연 재해 때문에 또 얼마나 추가 비용이 들어가야 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나라 재정은 점점 어려워지고 정말 써야할 데에 못 쓰게 됨으로써 우리는 그만큼 더 가난해지겠죠. 자아, 사정이 이렇습니다. 국민은 분명히 보다 현명한 대안을 알고 있었고 또 한 목소리로 알렸습니다. 하지만 저 위에 있는 자들은 듣지 않았죠. 그들이 믿는 기독교에서 말하듯 '십자가를 지는 마음'으로 소통조차 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들이 왜 그랬을까요? 뭐, 다들 아시지 않을까요? 그들의 주머니에 흘러 들어올 '돈' 때문이란 걸. 이게 핵심입니다. 한 나라가 가난하게 되는 건 환경의 요인도, 문화적 요인도, 무지 이론 때문도 아닙니다. 그렇게 멀리서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한 나라가 가난하게 되는 이유는 지극히 간단합니다. 그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상층의 엘리트 계층이 오로지 자기들의 이익만 챙기려 하기 때문이죠. 대대손손 잘먹고 잘살기 위해 그들의 주머니만 불리려 하기 때문입니다. 영국의 경제학자 대런 애쓰모글루와 제임스 A 로빈슨은 이런 것을 '착취적 제도'라 부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착취적 제도'가 한 나라를 다른 나라보다 못살게 만드는 가장 결정적인 이유라고 제시합니다.

 

 그것이 전면적으로 전개되는 것이 바로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라는 책입니다.

 

 

 

 

 

 이 책은 이러한 새로운 관점에서 나라마다 존재하는 불평등의 그 이유를 밝혀갑니다. 어째 이유가 너무 단순하기도 하고 게다가 경제학이 너무 정치적으로 기운 것은 아닌가 생각되기도 하여 좀 믿을 수 없다고 여기실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 때문인지 애쓰모글루와 로빈슨은 장장 641 페이지에 걸쳐서 그것도 구체적인 사례들을 즐비하게 나열하면서 그 의심을 불식시켜 나갑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중에 가서 이 말을 새삼 다시금 확인하게 되지요. '진리란 본디 단순하다'라는 것을...

 

 아무튼 이 책은 나라마다 존재하는 불평등을 앞에서도 말했듯이 그 나라가 어떤 제도를 가지고 있는지, 즉 제도적인 관점에서 접근합니다. 이러한 제도적인 관점은 영국에서 경제학을 가르치고 있는 우리 장하준 교수도 취하고 있는 관점인데 어쩌면 지금 영국 경제학의 주류가 '제도주의'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왜 경제학이 이토록 정치적인 관점을 가지느냐 하실수도 있으실 것 같은데요. 거기에 대해선 저자들이 이렇게 분명히 답하고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경제학은 정치를 외면해왔지만, 세계 불평등을 설명하려면 정치에 대한 이해는 필수적이다. (...) 그간 경제학은 정치적 문제들이 이미 해결되었다고 가정해왔다. 세계불평등에 대해 설득력있게 설명하지 못했던 이유는 바로 그런 사정이 있었기 때문이다.(p. 110)

 

 그러니까 저자들은 정치적 관점에 기운 것이 아니라 해결되지 못한 정치적 문제들이 경제적인 문제에 분명하게 영향을 미치는 이상 보다 정확한 경제적 분석을 위해서라도 고려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죠. 그러한 정치적인 문제들을 고려한 결과 결국 한 나라의 경제적 상태를 결정하는 것이 착취적 제도를 가지고 있느냐 포용적 제도를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나뉜다 는 걸 알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착취적 제도란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한 계층의 소득과 부를 착취해 다른 계층의 배를 불리기 위해 고안된 제도(p. 121)를 말합니다. 쉽게 말해 오로지 지배 계급의 이익만 불리는 제도인 것이죠. 반면 포용적 제도란 자신의 재능에 가장 걸맞는 직업과 소명을 추구할 자유를 누릴 수 있을 뿐만아니라 공정한 경쟁의 장을 통해 그럴만한 기회를 잡을 수(p.121) 있도록 보장해주는 제도를 말합니다. 저자들은 바로 이 포용적 제도가 번영의 원동력이라 봅니다. 이 정의에서 보듯이 포용적 제도이냐 아니냐를 알 수 있는 근거는 두 가지 입니다. 하나는 능력에 따른 성과가 주어지느냐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능력에 맞는 성과를 가져갈 수 있도록 공정한 경쟁이 보장되느냐 입니다. 말하자면 이 두 가지가 착취적 제도냐 포용적 제도냐를 가르는 기준인 셈이죠. 그런 의미에서 능력보다 옛날 고려의 '음서' 식으로 출신 성분이나 뒷 배경이 더 중요하게 취급되고 SSM 처럼, 대기업이 막강한 자본으로 동네 자영업자들의 상권을 몰아내는 것 같은 공정한 경쟁이 보장되지 않는 사회는 착취적 제도라 할 수 있는 것이죠. 그런데 왜 이 착취적 제도가 한 나라의 번영을 막게 될까요? 이게 바로 어쩌면 이 책의 핵심일지도 모릅니다. 그건 그 제도가 많은 이들에게 인센티브를 주지 않아서 각 개인들이 보다 나은 향상을 위해서 아무런 창의성도 노력도 혁신도 하지 않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즉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많은 인센티브를 줄 수 있느냐가 한 나라의 번영을 좌지우지 하는 열쇠라는 게 이 책의 결정적인 핵심입니다. 여기서 어쩌면 많은 분들이 '뭐야?' 하실수도 있을 것 같아요. 사실 별로 새로울 것이 없는 내용이기 때문이죠. 아담 스미스가 '국부론'에서 다 했던 이야기이기도 하구요. 그렇게 별로 새로울 것도 없는 것을 듣기 위해 시간도 없는 우리가 무려 641 페이지나 읽어야 하나 눈을 찌푸릴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이럴 때 옛날 저의 은사 한 분은 이런 말씀을 하셨죠. '아는 것과 체감하는 것은 다르다.'고. 이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이 책은 비록 경제학 책이고 아담 스미스의 논의를 보다 많은 근거로서 세련되게 말하고 있을 뿐인지도 모르겠지만 우리에게 보다 중요한 것을 절절히 체감하도록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내면에 존재하는 경제와 정치의 그 이분법적 사고가 얼마나 잘못이었는지 말이죠. 우리는 흔히 생각해왔습니다. 경제와 정치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그래서 잘살게만 해준다면 까짖 것 정치적 불평등쯤이야 무시할 수 있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눈부신 경제 발전에 비하자면 어이가 없을 정도로 우리의 정치현실은 낙후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책은 보다 분명히 보여줍니다. 정치적 문제의 해결과 경제적 문제의 해결은 같이 간다는 것을! 그것이 인센티브로만 설명되는 문제점은 있습니다만 사실 인센티브라는 것도 사람마다 다 다르지 않을까요? 어떤 사람들은 경제적 인센티브가 중요하겠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 못지 않게 정치적 인센티브도 중요하지 않을까요? 이를테면 최근에 새롭게 조명되고 있는 고 장준하씨 처럼 말이죠. 그런 면에서 일독을 권해드리고 싶은 책입니다. 결국 정치적 문제의 해결이 경제적 번영을 위한 밑거름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게 해 주는 책이니까 말이죠.(물론 여기에 미국과 한국이 '포용적 제도'의 대표적 나라로 거론되고 있는 것은 저 역시 좀 불만이 있습니다. 아마도 인센티브를 오로지 경제적인 것만 고려한 탓이겠죠.) 이제 정말 대선을 얼마 앞두지 않은 오늘의 우리가 어디를 바라보아야 하는지 알기 위해서라도 벗해야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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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에서 철학하기 - 낯익은 세상을 낯설게 바꾸는 101가지 철학 체험
로제 폴 드르와 지음, 박언주 옮김 / 시공사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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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학...

생각만해도 왠지 벌써 머리가 아파오는 것 같고 마음이 부담으로 가라앉는 듯한 느낌이다.

그만큼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었던 철학. 제대로 살기 위해서는 꼭 한 번 벗해야 한다고 현인들은 말씀해 오셨지만 살아보니 일부러 그런 복잡한 생각 하지 않아도 충분히 살 수 있을 것 같고 그래서길을 가다 아주 예뻐보이는 철학책들이 내 옷깃을 부여잡아도  '도를 아십니까' 묻는 사람들을 피하듯  일찌감치 무시하고 그냥 지나치기 바빴던 철학...

 

 하지만...

삶이 예상대로 순탄하게 흘러가지 않거나 예기치 않았던 삶이 준비한 반전을 맞이하다 보면 도대체 사는 것의 의미란 무엇인가 묻지 않을 수 없다. 나날이 사소한 불운들과 커다란 불행들 사이에서 이런저런 것들을 겪다보면 도대체 이 모든 것들에 의미는 있기는 할까 하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현실만 생각하는 삶은 근시안적이다. 그 때 그 때 닥친 일들을 헤치울 수 있을 뿐 보다 높은 곳에서 멀리 헤아리게 하지는 못한다. 그럴 때 사람들은 철학을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부담스럽다. 뭔가 쉽게 철학이라는 것을 해 볼 수 있게 해 주는 책이라면 좋겠는데....

 

그런 당신을 위해 툭 떨어진 책...

 

 

 

 

 

 

 

 그것이 바로 로제 폴 드르와의 '일상에서 철학하기'이다.

 

 프랑스의 국제철학학교 교수를 역임했던 그는 지금까지 수많은 철학에 관련된 책을 펴냈는데 그 철학책들에겐 한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건 바로 철학을 난해하고 현실과 동떨어진 학문이 아니라 알고보면 철학이란 그렇게 어렵지 않고 현실과 단단히 결부되어 있으며 현실을 보다 더 생생하게 만들어 줄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알려준다는 점이다. 이는 로제 폴 드르와가 항상 책을 쓸 때 염두에 두는 점이기도 한데 그렇게 한결같이 이어져 온 로제 폴 드르와의 주제 의식이 가장 잘 나타난 책이 바로 이번에 나온 '일상에서 철학하기'이다.

 

 

 웃! 왠지 제목에서 부터 뭔가 난해한 게 느껴져... 하는 당신을 위해 책에 대해서 잠깐 얘기하자면...

 

이 책은 절대로 우리가 흔히 떠올리게 되는 그런 이론서가 아니다. 이 책에 가장 합당한 정의는 아마도 '놀이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문자 그대로 여기에는 모두 101가지의 일상에서 별다른 노력없이 즐길 수 있는 철학 놀이가 실려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밑줄을 그어야 할 부분은 '별다른 노력없이'란 부분이다. 정말로 이 책에 실린 놀이들을 하는데는 별로 힘들일 필요가 없다. '상상으로 사과 깎아보기'라든가 '반짝이는 별 내려다 보기' 혹은 '소리를 줄인 채 TV 화면 보기' 같은 것이 부담을 줄 리는 없을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래서 오히려 별 것 아닌 것으로만 보이는 이런 경험들이 과연 철학과 무슨 관계가 있을지 의심스럽다.

 그러나 속단은 금물.

 로제 폴 드르와는 정말 우리가 일상에서 쉽게 할 수 있는, 별 것 아닌 것으로만 보이는 이러한 101가지의 경험적 놀이를 통해 분명히 철학적 경험으로 인도하고 있으니까.

 

 

 

이를테면 '상상으로 사과 깎아보기'를 보자...

로제 폴 드르와는 101가지 모든 놀이를 이야기 하기에 앞서 항상 그 놀이에 걸리는 시간과 필요한 소도구 그리고 그 효과까지 미리 설명해 두고 있는데  '상상으로 사과 깎아보기'에 걸리는 시간과 필요한 소도구 그리고 효과는 그에 따르자면 이렇다.

 

소요시간 20 ~ 30분 / 도구 없음 / 효과 집중력

 

 내가 이 놀이를 택한 건 리뷰를 쓸 때마다 내가 늘 겪었던 경험이기도 해서이다. 나는 리뷰를 쓰기 전에 보통 먼저 머리로 대강의 윤곽을 그리고 나서 실제 글로 옮긴다. 그런데 머릿속으로 글의 분명한 세부까지 다듬고 나면 슬며시 꾀가 생긴다. 이 정도로 마무리 해 놓았으면 그냥 글로 옮기기만 하면 되니까 나중에 써도 상관없겠지 하고 말이다. 그래서 미루다가 쓰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그런데 그렇게까지 세부적으로 다듬어 놓았던 내용이 막상 글로 옮기게 되자 여지없이 허물어지는 걸 많이 경험했다. 그건 결코 내가 잊어버렸기 때문이 아니었다. 다듬어 놓은 그 상태 그대로 옮기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글로 실체화되려는 순간에는 뭔가가 맞지 않고 앞과 뒤가 틀어지며 균형이 제대로 잡히지 않는 블럭처럼 위태위태 하기가 일수였다. 이런 반복된 경험들이 내게 있었음은 로제 폴 드르와의 바로 이 글을 읽고서야 생각났다.

 

 우리가 머릿속에서 현실을 쉽고 분명하게 재현해낼 수 있을거라는 믿음은 상당 부분 착각일 수도 있다.(p. 67)

 

 경험상 이 말은 진실이었다. 그저 옮기기만 하면 될 정도로 다듬어 놓았는데도 막상 글로 그대로 옮기기조차 쉽지 않았다. '상상으로 사과 깎아보기'란 놀이는 바로 이러한 떠올리는 것과 현실로 하는 것과의 괴리라는 재현의 어려움을 체험하는 놀이다. 그러면 이 놀이를 통해 우리가 깨닫게 되는 철학적 경험은?

 

 그것은 바로 우리가 의식에 혹은 마음에 대해 가지고 있는 착각을 바로 잡아주기 위해서다. 우리는 마음이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생각할 수 있다고 자부한다. 우리가 서슴없이 남들 앞에서 남의 말을 듣기도 전에 우리가 생각하는 진실을 말할 수 있는 건 바로 그런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마음이 카메라처럼 정확히 현실을 모사하고 또 재현해낼 수 있다는 믿음 말이다. 하지만 과연 그런가? '상상으로 사과 깎아보기'를 통해 우리가 얻는 것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로제 폴 드르와의 말을 빌리면 이렇다.

 

 당신이 이 체험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우리의 정신이라는 것이 실제로는 현실에 얼마나 불충실한지, 현실을 정확하게 포착하고 재현하는 데에 얼마나 취약한지에 관한 것이다. 평소에는 "현실? 그쯤이야 뭐..."라고 생각하는, 유난히도 잘난척하는 우리의 정신이 말이다.(p. 70)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에 대해 겸허해야 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현실은 있는 그대로의 현실이 아니라 사과를 먹기 쉽게 조각내는 것처럼 각자의 마음이 소화하기 쉽게 잘라내고 다듬고 더러는 왜곡시킨 현실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보다 온전히 총체적이고 진실된 현실을 담고자 한다면 우리는 상대방의 말에 귀기울야 한다. 신이 입은 하나요 귀는 두 개를 만드신 것도 마음에 본래적으로 각인된 그러한 한계 때문이 아니었을까?

 

 이렇게 로제 폴 드르와의 '일상에서 철학하기'는 별 거 없어보이는 그런 경험들을 통해 철학적 경험들로 인도하는 책이다. 정말 놀이처럼 즐기다가 어느 순간 '돈오점수'하게 되는 그런 책이다. 상식적인 견지에서 철학은 언제나 일상의 경계 바깥에 존재한다고 생각되어왔다. 일상이 멈추는 곳. 철학은 일상에서 뚝 떨어져 나온 공간에서나 가능한 사색적인 활동으로 여겨졌었다.

 하지만 로제 폴 드르와는 전혀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말해준다. 우리의 일상이야 말로 철학적 사색을 위한 더없이 훌륭한 공간이라는 것을 말이다. 특별한 공간을 선택할 필요도,   별다른 노력을 기울일 필요도 없다. 그저 한번쯤 상상해 보는 것, '뜨거운 태양 아래 배깔고 한숨 자기'나 '아무에게나 미소 짓는 것' 혹은 '헌책방에서 탐닉하기'나 '밤거리를 하염없이 돌아다니기'와 같이 평소에는 잘 하지 않았던 행동들을 해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러고보니 이 책에 가장 잘 어울리는 비유는 도라에몽이 가지고 있는 '어디든지 문'일 것 같다.

 

 

 

 아무리 당신이 지루한 일상 속 공간에 있다고 해도 로제 폴 드르와의 이 문을 꺼내고 들어가기만 하는 새로운 경험과 의미로 채워지는 일상을 만나게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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