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란 무엇인가
마이클 샌델 지음, 이창신 옮김 / 김영사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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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이클 샌델의 책, ‘정의란 무엇인가?’는 우리가 이미 상식적으로 생각했던 것을 오히려 미지의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신비한 힘이 있다. 비유하자면 자기 땅에 대해서 속속들이 다 알고 있다고 자부하던 사람이 막상 자기 땅을 거닐어 보고는 그 다양함과 다채로운 풍요로움에 놀라 사실은 자기 땅에 대해서 하나도 모르고 있었구나 여기게 만드는 그런 힘이 말이다. '정의'라는 게 그랬다. 그건 아주 익숙한 말이었고 그만큼 자명한 단어였다. 하지만 이번에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어보니 내가 생각외로 정의에 대하여 모르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내가 지금까지 알고 있었던 것은 그야말로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다. 정의란 게 정말은 무엇인지 몰랐으니 그만큼 어떤 것을 정의롭다고 생각해야 할지 혼란스러웠던 것 같다. 이 책 앞부분에는 마이클 센델이 과연 이게 정의로운 상황일까 하고 예로 드는 상황이 나오는데 난 그 중 어느 것도 분명히 정의롭지 못하다 말할 수 없었다. 다 정의로워 보였고 또 그렇지 않았기도 했다. 말 그대로 혼란이었다. 알고보니 그게 내가 정의에 대한 엄밀한 개념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결과였다. 수박의 겉껍질만 핥고는 이게 수박의 맛이구나 하고 느낀 것과 같았다. 그 안에 있을 달콤한 붉은 속살은 생각하지도 않고 말이다.

 '정의란 무엇인가'는 그러한 표면밖에는 모르는 우리에게 정말 정의가 무엇인지 그 진정한 맛을 알려주는 책이다. 그럼으로써 어느 것이 진정으로 정의로운 상황인지 스스로 가늠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책이다. 그를 위해 무엇보다 이 책은 사유의 엄밀함을 강조한다. 잇달은 사례로 계속 우리가 생각한 것의 반전된 사례를 내놓는 것도 그렇게 쉽게 결론을 내리지 말고 그 진정한 의미가 드러날 때까지 계속 생각하라고 촉구하는 것과 같다. 흔히 도저히 사유로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를 '아포리아'라고 한다. 마이클 센델이 든 사례를 보면 이러한 아포리아에 자주 직면하게 되는 게 바로 정의의 문제임을 알 수 있다. 특히나 현대 사회는 이익 사회다. 여러 많은 집단들이 서로의 이익 추구를 위해 노력하는 사회인 것이다. 그런 사회인만큼 정의가 필요하다.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정의'의 가치가 아니면 그들 스스로 추구하고 있는 이익을 포기하지 않으려 들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려움은 바로 거기에 있다. 그들을 제대로 납득시키기 위해서는 말해지는 정의가 제기 가능한 모든 반론들을 포용하면서 거기에 설득을 위한 합리적 근거를 제시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정의란 모든 수준에서 더욱 엄밀하게 사유되어지지 않으면 안된다. 이것이 '아포리아'라고 해서 정의에 대한 사유를 그만둘 수 없는 이유다. 마이클 센델이 모든 관점에서의 정의를 이토록 세세한 사례들로 단계적으로 접근시키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한다.

 먼저 그는 정의가 궁극적으로 일종의 분배 원리라는 것을 보여준다. 한정된 자원을 가진 사회가 그 구성원 각자에게 어떻게 나누는가에 있어 그 기초가 되는 원리가 바로 정의라는 것이다. 우리는 정의로움을 얼른 '의(義)'의 문제로 생각하지만 서양에 있어 정의란 어디까지나 분배란 관계된 개념이었던 것이다. 이는 고대 그리스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렇게 정의에 관한 모든 현대 논의에 있어 원초적 출발점이 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론’ 역시도 시민들에게 부와 명예를 어떻게 나눌 것인가 하는 측면에서 정의를 다룬 것이었다. 결국 여기서 ‘같은 것은 같게 다른 것은 다르게 나눠야 한다’는 유명한 분배적 정의가 도출되었다.

 그리하여 이 분배에 있어 지금까지 대체적으로 세 가지 입장의 주요한 정의론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일종의 정의론의 '본류(本流)'들이다. 대체로 이 본류들은 자신이 가장 추구하는 것이 무엇이냐에 따라 결정적으로 그 분배에 대한 정의조차 달라지는데 그 추구하는 각각이 무엇이냐 하면 행복, 자유 그리고 미덕이다.  그렇게 행복을 지상과제로 추구하는 것이 공리주의이고 자유를 추구하는 것이 자유지상주의이며 마지막으로 미덕을 추구하는 것이 바로 '미덕' 주의인 것이다.(얼른 와닿지 않는 용어일텐데 마이클 센델 자신이 그렇게 써놓고 있으므로 할 수 없이 그대로 쓴다. 사실 이 이름은 보다 '공정하게'에 맞춰진 이름이다. 공리주의와 자유지상주의와 미덕이론의 차이점은 앞의 두 입장은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고려가 없다는 것이다. 반면 미덕이론은 오히려 그것을 중심에 놓고 생각하는 입장이다. 사회적 약자 입장에 먼저 서서 그들 스스로 충분히 살 수 있는 기반을 먼저 배려해주고 그 다음 분배를 생각하자는 게 바로 그것이다. 그것은 전적으로 그것이 옳기 때문에 하는 것임으로 그래서 '미덕'이란 이름이 붙는 것이다.)

 마이클 센댈은 이 세가지 본류의 의미와 한계들을 조목조목 짚어준다. 물론 독자 머리로 먼저 생각하게 만드는 것을 놓치지 않고서 말이다. 그렇게 공리주의는 재화의 효용성 측면에서 정의를 가늠하지만 사람이 느끼는 행복이란 사람만큼이나 다양한 법이기 때문에 과연 효용성이란 잣대 하나로 뭉뚱그려 계량화시킬 수 있는지 의문이 들며 자유 지상주의란 무엇보다 이득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기여로 결정된다고 여겨 그들이 획득한 이익을 정당화하는데 과연 그 노고를 순전한 개인의 노고로 볼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제기된다. 왜냐하면 이 사회에서 모든 조건이 초기화 된 순수한 의미에서 공정한 출발선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두 친구가 있었다. 하나는 부유한 집안 출신이었고 다른 하나는 지방에서 올라온 가난한 집안 출신이었다. 이 둘은 공무원 시험 준비에 투여할 수 있는 시간 자체가 압도적으로 달랐다. 전자쪽은 부모의 돈 때문에 마음껏 공부를 할 수 있었던 반면 후자는 학비도 제대로 지원해주지 못하는 집안 형편 때문에 학비를 위한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을 뿐 아니라 기거할 방도 잘 구하지 못해 편안히 공부를 할 시간조차 제대로 마련할 수 없었다. 들이는 시간이 다른만큼 그 결과도 달라질 수 밖에 없는 건 불문가지다. 자유지상주의는 이런 차이를 무화시킨다. 이미 사회경제적으로 개인들은 분명한 차이를 가지고 있지만 자유지상주의의 정당화는 마치 이런 것이 없는 것처럼 취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덕 이론은 바로 이것을 공격한다. 그런 자유 지상주의의 말은 눈가리고 아웅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엄연히 존재하는 개인들의 차이 때문에 정말 공정성이라는 정의 관념에 투철하고자 한다면 사회가 나서야 한다고 생각한다. 태어날 때부터 뒤에서 따라잡아야 하는 사회적 약자들을 배려해 가진자들과 같은 자리에서 출발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자유지상주의자들은 얼굴을 찌푸린다. 그리고 항변한다. 내가 어렵게 노력해서 얻은 것들인데 왜 나눠주어야 하냐고 말이다. 요즘 사회 복지를 위해 부유층 증세를 말할 때마다 듣게 되는 소리이기도 하다. 하지만 미덕 이론은 그 전제 자체가 틀렸다고 한다. 그들은 이미 사회로 부터 혜택을 받은 상태에서 출발했으니 그건 사회로 부터 나눠받은 것일뿐 온전한 자기 것이라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그들은 '내 것'의 정당화로 자신이 투자한 노력, 비용을 내세우지만 센델이 예로 든 마이클 조던의 이야기에서 보듯이 현대 사회에서 개인의 노력이 의미가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성공했을 때 뿐이므로 결국 결과에 의해서 좌우될 뿐인 노력의 가치에 대해서 미리 선험적으로 모두 인정되는 보편의 가치인양 주장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설사 그 노력이라고 하는 것도 요즘 금융 투기에서 보듯이 결코 얻는 대가가 노력과 정비례하지 않기 때문에 더욱 인정할 수 없다고 한다.  미덕 이론은 이렇게 사회가 나서서 분배가 해주어야 하는 정당성을 한껏 드높여 주지만 그렇다고 '전가의 보도'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센델에 따르자면, 일단 사회가 전면에 나섰을 때에 나타날 수 있는 부작용을 모두 고스란히 안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역사에서 이미 그 극단의 사례를 파시즘과 공산주의라는 형태로 목도한 바 있다. 사회에 보다 많은 권한을 몰아주는 것은 합리적인 견제와 균형을 가져다주는 장치가 없을 경우 늘 그렇게 억압적인 사회로 변질할 우려가 있었다. 미덕 이론이 말하는 대로 바람직한 사회적 분배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사회가 과도한 힘을 사용하려 할 때마다 적절히 견제하고 균형을 잡아주는 장치가 무엇보다 절실하다. 하지만 미덕 이론은 거기에 대해서는 이렇다할 사유를 하지 않는다. 더구나 사회가 나서서 이익을 조정하려들면 덜 받은 자들과는 분명히 갈등을 일으키게 된다. 견제와 균형은 그러한 갈등을 잘 조절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한데 이만큼 미덕 이론이 원하는 분배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요청되는 장치들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고려되지 않고 오직 원칙론만 고수하고 있는 형편이니 문제라는 것이다. 즉 센델은 이 미덕이론이 사회 현실과는 동떨어진 이상론에 그칠 위험을 늘 안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보다 현실적인 한계를 고려한 차원에서 생각할 필요가 있으며 그런 차원에서 하트가 말했듯 개인이란 태어났을 때 부터 자신이 소속된 공동체를 완전히 무지의 베일로 가리기엔 불가능하며 되도록 갈등의 소지를 줄이려면 무엇보다 한 개인과 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그가 속한 그 공동체의 다양성을 고려하면서 최대한 그를 존중해주는 쪽으로 분배하는 게 나을 것이라 말한다. 그는 서사적 정의론을 주장한 찰스 테일러와 함께 그러한 '공동체적 정의론'을 주장하고 있는데 이는 그에 따른 것이기도 하다.

 '정의란 무엇인가'는 이렇게 세 가지 본류가 가진 의미와 한계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그렇게 보다 분명히 보여준다. 정의론에는 왕도가 없음을. 어디까지나 지금도 계속해서 사유로써 채워 나가야 하는 빈자리라는 것을 말이다. 그렇다. 여기에 마이클 센델이 이 책을 쓴 진정한 목적이 있었다. 해서 그는 계속해서 구체적인 사례로서 우리의 사유를 유도했던 것이다. 무엇보다 정의론이란 우리 모두와 직결된 문제이니만큼 먼저 우리 스스로 올바른 정의를 위한 사유 속으로 직접 뛰어들어야 함을 말해주기 위해서 말이다. 다시 말해, '정의란 무엇인가'는 그를 위한 하나의 초대장인 것이다.

 그리고 촉발이었다. 이 책이 바탕이 되어 스스로 생각한 정의에 대한 사유들을 서로 나눌 수 있게 만드는. 그러한 사유들이 서로 활발하게 오고가는 광장으로 이끄는 손길이었다. 과연 그 바람대로 '정의란 무엇인가'는 발간되자마자 우리나라에 거센 돌풍을 일으켰고 사람들은 그 책에 자극받아 자신이 생각한 정의론들을 서로 나누기 시작했다. 이 책의 진정한 의의는 바로 거기에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자신의 언어로 생각을 표현하지 못했던 이들에게 자신의 언어로 생각하고 말할 수 있게 만들어주었다는 그것에.

 정의론이 늘 부단히 채워나가야 하는 사유의 빈자리인만큼 그보다 더 우리에게 요청되는 태도는 또 없을 것이다. 그렇게 보자면 이 책은 자신의 역할을 충분히 다 했다고 볼 수 있다. 정의에 관해 생각하기를 넘어 기꺼이 나 자신의 말로 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생각해보면 역사적으로 정의가 변절될 때는 언제나 다수의 침묵 속에서 이루어졌다. 많은 이들이 거기에 대해 생각하기를 멈추고 말하기를 그만 둘 때 언제나 소수는 자신의 뜻대로 정의를 왜곡시키고 그 뜻을 우리마저 따르도록 강요했다. 그러므로 이렇게 생각하고 말하기를 끊임없이 불러일으킨다는 것은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정의의 왜곡과 변질을 막는 길이기도 하다. '정의란 무엇인가'는 그 질문 자체로 정의의 순수한 이념을 지키는 일이다. 그 물음이 부단히 이어져야 하는 것처럼 센델의 이 책 역시도 늘 그렇게 읽혀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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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S 다큐프라임 퍼펙트 베이비 - 완벽한 아이를 위한 결정적 조건
EBS <퍼펙트 베이비> 제작팀 지음 / 와이즈베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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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솔직히 말해 현실적으로 육아와 그다지 관계가 없는 나인데 이 책을 읽게 된 것은 무엇보다 1부에 나오는 이야기가 참으로 흥미로웠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저마다 체질이 다르다. 아무리 많은 음식을 먹어도 어떤 이들은 전혀 살이 찌지 않는 이가 있는가 하면 한 편으론 아주 적게 음식을 먹는데도 오히려 살이 부적 찌는 사람들도 있다. 뭐, 이건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다. 진짜 말하려는 것은 바로 다음에 있다. 그러니까 이렇게 사람들이 저마다 다른 이유에 대해 과학은 지금까지 대체로 두 가지 이유를 말해왔다. 하나는 유전이고 다른 하나는 환경이었다. 쉽게 말해 우리가 이렇게 저마다 다르게 된 이유는 부모로 부터 물려받은 유전자가 다 다르기 때문이거나 아니면 자라온 환경이 저마다 다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퍼펙트 베이비'는 여기에 대해 '제3의 길'을 제시한다. 유전도 환경도 결정적인 인자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퍼펙트 베이비'가 내세우는 새로운 이유는 무엇인가?

 

 그게 바로 '태아 프로그래밍' 이다. 여기서 태아 프로그래밍이란 말은 임신 중 태아가 어떤 경험을 했느냐가 태아로 그치지 않고 그 이후의 삶에도 계속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것을 일컫는다. 즉 사람들이 저마다 달라진 데는 바로 엄마 뱃속에 있을 때 태아가 어떤 상황에 놓여있었고 거기서 무엇을 경험했으냐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도대체 이 이론은 어떻게 세상에 등장하게 되었을까? 여기엔 역사적 경험이 단단히 한몫했다. 그러니까 세계 제2차 대전 중 네델란드에서 있었던 일이다. 1940년 겨울, 독일은 네델란드를 침공한다. 하지만 네델란드의 완강한 저항으로 침공은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때마침 겨울이라 식량이 부족할 것을 예상한 독일은 침공에 힘을 쏟지 않고 네델란드 주위로 단단한 포위망을 형성하여 고립시키고는 그대로 네델란드 굶주리기 작전에 돌입한다. 독일의 계산대로 혹한의 겨울 속에서 네델란드 국민들은 튤립 뿌리까지 먹어가면서 극심한 굶주림의 고통을 당하게 되고 무려 만여명의 네델란드 사람들이 아사하는 지경에 이른다. 이 참혹한 역사적 현실이 어떻게 태아 프로그래밍으로 연결된 것일까? 훗날 네델란드 암스테르담 메디컬센터의 한 여성학자가 당시의 출생 기록들을 우연히 발견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현재 어떻게 되어있을까?'란 호기심에 추적해보니 이 때 태어난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에 비해 비만이나 당뇨, 심장질환등 성인병 비율이 유독 높음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이들의 부모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이 때 태어난 이들은 부모에게는 없었던 병력을 모두 보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같은 어머니에게서 태어났어도 다른 자녀들과는 달리 유독 그 때 태어난 이들만이 성인병에 쉽게 걸렸다. 그러므로 그 이유를 유전이라 할 수 없었다. 자녀들이 보여준 차이는 자라온 환경이 동일했으므로 환경의 탓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거기에 이유가 있다면 그건 오직 하나뿐이었다. 바로 엄마 뱃속에 있을 때 태아로서 경험한 극심한 굶주림이 이후의 삶에까지 영향을 미친 것이었다. 태아 프로그래밍은 그렇게 해서 세상의 전면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이는 실험으로도 밝혀졌다. 임신한 생쥐를 네델란드 굶주리기 작전 상황과 똑같은 조건에 놓고 출산할 때까지 관찰한 것이다. 대조를 위해 역시나 임신한 생쥐를 보통의 상황 속에 놓아두고 서로 비교한 결과 굶주린 상황에 처했던 임신한 생쥐가 낳은 새끼수는 그렇지 않은 생쥐 보다 훨씬 적었고 그 새끼들의 체중 역시도 보통 새끼 생쥐들 보다 적었다. 즉 임신 중 어떤 상태에 있었으냐가 그 이후까지 영향을 미친 것이다. 보통 굶주린 가운데 태아 시기를 보내면 저체중으로 출산된다고 한다. 하지만 자라면서부터는 이러한 차이가 없어지는데 그렇다고 안심하기엔 이르다.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오히려 이 상황이 더 위험한 것이기 때문이다. 저체중으로 태어난 개체는 그렇지 않은 개체에 비해 콜레스트롤은 1,3배, 중성 지방은 1,5배 그리고 내장 지방은 무려 2배나 더 높았다. 즉 그들이 평범하게 태어난 이들의 성장 속도를 따라잡은 것은 오로지 살찌우기 덕분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저체중은 쉽게 비만으로 이어지기 마련인데 왜냐하면 극심한 굶주림을 겪은 태아는 오로지 그 배고픔을 면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기 때문에 그것과 관련된 장기에 대해서만 집중할 뿐 그것과 상관없는 장기는 그냥 내버려두기  때문이다. 그렇게 태아가 내버려두는 가장 대표적인 장기가 바로 '췌장'이다. 췌장은 인슐린을 생산한다. 인슐린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우리 몸에 미처 소화되지 않은 영양소들은 포도당이 되어 미래를 위해 혈액 속에 저장하게 되는데 이 포도당을 분해하여 세포 속으로 잘 스며들게 만드는 것이 바로 인슐린이기 때문이다. 췌장이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면 이 인슐린 분비가 어렵게 되고 그렇게 되면 혈액 속에 포도당이 분해되지 않고 그대로 쌓이게 된다. 그러면 포도당이 넘쳐서 소변으로까지 흘러나오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당뇨'다. 태아적 경험은 이런 메커니즘으로 비만과 당뇨를 불러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더 주목해야 할 사실은 바로 그렇게 되도록 선택한 것이 상황이 아니라 태아 자신이었다는 것이다. 태아가 어떤 장기를 더 활발하게 가동시킬 것인가 선택한 것이다. 이는 장기만이 아니다. 여기엔 유전자도 해당된다. POMC란 유전자가 있다. 주로 체내의 지방 세포를 분해하는 유전자다. 이 유전자가 제 역할을 하지 않으면 지방이 분해되지 않고 쌓여 비만에 이르게 된다. 열악한 임신 상황으로 태어난 저체중의 아이들을 조사해보면 공통적으로 바로 이 POMC 유전자 기능이 꺼져있음을 알게 된다. 놀랍게도 굶주린 상황에 처했던 태아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그 때는 필요없었던 POMC 기능을 꺼버린 탓이다. '아니, 어떻게 그럴수가? 유전자는 어디까지나 타고나는 것인데 어떻게 후천적으로 태아 마음대로 꺼버릴 수 있단 말인가?' 이런 의문이 당연히 들 것이다. '퍼펙트 베이비'에 따르면 놀랍게도 그게 가능하다고 한다. 유전자의 DNA 정보는 주로 'GATC'라는 네 개의 기호로 코드화 되어 저장되는데, 훗날 이 'C'에서 'CH3', 즉 '메탈기'라는 게 붙어 있는 것과 붙어 있지 않는 것이 발견되었다. 그런데 이것은 태어날 때 부터 그리된 것이 아니라 후천적으로 처한 환경에 따라 붙어 있거나 떨어지거나 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즉 지금까지 우리는 부모로 부터 물려받은 유전자는 죽을 때까지 절대 변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했지만 이 CH3 존재 덕분에 상황에 따라 후천적으로도 얼마든지 변형 가능한 것임을 알게 된 것이다. 이것의 발견으로 유전자 기능 또한 개체가 얼마든지 임의적으로 스위치를 껐다 켜듯 할 수 있음을 알게 되었고 그리하여 '후성 유전학'이라는 새로운 학문 또한 나타나게 되었다. 태아 프로그래밍은 이 후성 유전학의 도움으로 그 중요성이 더욱 커지게 되었다. 부모에게 전혀 그런 유전 인자가 없더라도 태아가 어떤 후천적인 상황에 처함에 따라 새로이 유전 인자를 가지게 되는 것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모에게 전혀 그런 병력이 없더라도 태아는 걸릴 수 있다. 이렇게 '퍼펙트 베이비'는 지금까지의 패러다임을 변화시킨다.

 

 그 뿐 아니라, 태아적 경험이 이후의 삶에까지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이제 우리에게 비록 지금이 극심한 저출산 시대이긴 하지만 정부가 하는대로 그저 무턱대고 출산의 양만 늘릴 것이 아니라 출산의 질을 보다 더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것임을 요청한다. 임신한 여성과 가정에 대한 정책으로 배려되지 아니하면 열악한 상황에서 태어난 아이들의 증가로 인한 장차 높은 성인병 환자의 급증으로 국가의 의료 부담마저 높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훗날의 부담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국가는 이제라도 임부와 그 가정들이 보다 편안하고 풍족한 임신 환경이 될 수 있도록 관심을 가지고 정책적으로 배려해야 되지 않나 생각된다. '퍼펙트 베이비'는 생각 이상으로 부모와 자식이 끈끈한 연대로 이어져 있음을 보여주는 책이다. 한 자녀를 '퍼펙트 베이비'로 만드는 데 있어 그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부모인 것이다. 자식은 부모의 거울이라고 하더니 정말 그랬다. 요즘은 점점 자녀에 대한 부모의 역할을 소홀히하는 추세가 늘어난다고 하는데 이 책을 통해서라도 부모들이 자식들에게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 자각할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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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 종교를 위한 인문학
김경집 지음 / 시공사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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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는 알고 보면 참 신기한 종교이다.

 원래 기독교는 저 변방의 그리 풍요롭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별달리 세력도 없는, 그것도 겨우 한 부족이 섬기는 것에 불과했다. 그러던 것이 지금은 전 세계적으로 가장 영향력이 큰 종교 중의 하나가 되었으니 어찌 신기하지 않을 수 있을까? 기독교가 믿는 하나님 야훼는 당시만 해도 세상에 널린 허다한 신들 중 하나였다. 물론 지금은 그 무엇도 대신할 수 없는 절대 신의 위치에 서 있지만 말이다. 그가 그와 같은 자리에 오를 수 있도록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은 어디까지나 로마가 기독교를 국교로 선언한 데 있었다. 로마가 그러지 않았다면 기독교는 절대 지금과 같은 자리에 이르지 못했다. 그건 예수 부활 승천 이후 그의 제자들이 각지로 전도를 다녔던 여정을 기록한 사도행전만 봐도 알 수 있다. 거기 한 대목엔 예수의 제자 베드로가 그리스에서 전도를 한 기록이 나온다. 당시 그리스에선 사람들에게 뭔가 알리려면 언제나 아고라에서 행해야 했었다. 베드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아고라에서 사람들을 모아놓고 자신이 믿는 기독교에 대해서 열심히 강론했다. 주로 유일신 사상과 원죄의 삶과 그 구원에 대해서였다. 그리스 사람들의 반응은 어땠을까? 한 마디로 비웃는다. 도대체 저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고 비아냥거린다. 당연했다. 그들은 제우스도 있고 헤라도 있으며 바다는 포세이돈, 태양은 아폴론 하듯이 여기저기에 많은 신들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그런 형편에 어떻게 신이 하나라는 말이 곧이곧대로 들어오겠는가? 또한 원죄의 삶과 구원이라는 것도 그들에겐 헛소리에 불과했다. 삶 자체가 어찌 원죄일 수 있단 말인가? 삶은 그저 사는 것이며 그냥 누림의 대상이 아니던가. 너무나 현실적이었던 그들은 원죄 운운하는 베드로의 말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다. 당장 논쟁을 건다. 철학에 능숙한 그들답게 증명해 보라고 소리친다. 그들 앞에서 베드로는 어쩔 줄 몰라 당황할 뿐이다. 그렇지 않아도 원래 아는 것이 많지 않고 말솜씨도 별로 좋지 않은 그다. 철학과 화려한 수사로 무장한 그들 앞에서 설득은 이미 물 건너 가 버렸다. 그냥 믿으라고 외칠 뿐이다. 이처럼 초기 기독교가 전파될 때 말은 별로 힘이 못 되었다. 문명이 발달한 곳일수록 더욱 그랬다. 그렇다면 더욱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도대체 무엇으로 기독교는 광대한 제국이었던 로마의 국교가 될 수 있었던 것일까?

 

 

 로마의 황제가 불현듯 하나님의 위대함을 경험이라도 하게 된 것일까? 아니면 알고 보니 기독교의 교리가 다른 것 보다 워낙에 월등한 것이라 여기기라도 했던 것일까? 모두 아니다. 기독교가 국교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오로지 단 하나다.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이 직접 사는 모습으로 기독교를 믿으면 얼마나 다르게 살 수 있는지 몸소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가난한 자들에게 아주 부유한 자들조차도 가진 것들을 모조리 아낌없이 나누어 주었고 이웃들에게 언제나 친절하고 헌신적으로 대했다. 지금의 기독교인들이 보여주는 모습과는 너무나 다른 모습이라 얼른 믿기 어려울지도 모르겠지만 남아있는 당시 기록에 따르자면 분명 그랬다. 때문에 사람들은 기독교를 좋아했고 점점 믿어나갔다. 그들을 교화시켰던 것은 말이 아니라 실천이었다.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될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베드로의 그리스 전도 여행과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기까지의 과정은 신앙인이 정말 무엇에 힘을 써야 하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번지르한 말이 아니라 몸으로 직접 행하는 실천이라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지금의 교회는 어떠한가? 오로지 말로 하는 전도에만 힘을 쓴다. 생활속에서 기독교가 얼마나 삶을 바꿀 수 있게 만드는지 그걸 실천으로 보여주기 보다는 그저 찾아가서 전하고 억지로 오게 만들고 그런 것에만 힘을 쓴다. 신도들도 별로 다르지 않다. 삶에서 예수가 말하는 것을 실천하기 보다는 교회 내에서 높은 직분에 오르는 걸 더 힘쓰고 헌금이나 십일조 혹은 주일성수와도 같은 요식적인 것으로만 자신의 신앙을 증명하려 애쓴다. 내 이웃들에 대한 봉사와 헌신으로 신앙을 드러내기 보다는 나만 드러내고 높일 수 있는 것에만 헌신적이다. 그러므로 지금의 기독교는 감동이 없다. 믿는 자들이 믿지 않는 자들과 아무런 다른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는데, 아니 오히려 더 못난 모습을 보여줄 뿐인데 어찌 믿게 만들 수 있을까? 해서 지금의 교회는 악을 쓴다. 삶에서의 실천으로 다른 모습을 보여주지 못함이 궁극적인 원인이라는 건 깨닫지 못하고 이단이 많아서라는 둥 아직 전도와 선교가 모자라서라는 둥 악을 쓴다. 말, 말, 말만 넘쳐난다. 지하철 안에서 외치는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들었을 때처럼 아무런 공감을 주지 못하는 말만큼 시끄러운 것은 없다. 지금의 기독교는 자꾸 사람들의 마음이 완고해져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한다고 하지만 정작 마음의 문을 닫게 만드는 것이 바로 현재 기독교의 모습이란 것을 왜 모르는 것일까?

 

 

 정말 중요한 것은 실천이다.

 그것이 종교의 궁극이다. 종교란 기복이 아니라 결국 삶을 변화시키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삶의 변화는 말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오로지 삶에서 실천으로 나타날 때라야 완성된다. 사람들도 그걸 안다. 그것으로 가짜 종교인과 진짜 종교인을 구분하기까지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기독교는 삶의 변화는 도외시한 채 여전히 외적인 것에만 치중한다. 교회를 더 크게 짓거나 그저 신자의 수만 불리려는 것으로. 그럴수록 자신의 입지만 더욱 줄어들게 할뿐인데도.

 

 

 그런 현실의 안타까움이 한 권의 책을 낳았다.

 

 카톨릭 대학에서 인간학과 영성 과정을 맡아 가르치는 김경집의 '눈먼 종교를 위한 인문학'이 바로 그 책이다. 그는 단적으로 지금의 기독교가 눈이 멀었다고 말한다. 돈과 권세라는 세속적 욕망에 눈이 멀었다는 것이다. 이 책은 그 멀어버린 눈에게 다시 올바른 시각을 찾아주기 위해 쓰여 졌다. 기독교 안에서 이루어지는 비판은 여타의 다른 학문에 대한 비판과 다르다.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는 기준점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건 물론 성경이다. 교리에 대한 것이든, 그 신앙 태도에 관한 것이든 모든 건 다 성경에 근거해서 이루어져야 한다. 현실 기독교에 대한 날선 비판의 수리검을 날리는 이 책 역시 마찬가지다. '눈먼 종교를 위한 인문학'은 기독교인들이라면 익히 잘 알고 있을 예수의 행적을 기록한 네 복음서를 중심으로 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오병이어'나 ''산상수훈'등 특히 잘 알려진 모두 18개의 예수 에피소드들을 대상으로 한다. 다들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이야기들이라서 '달리 새로울 게 없을 것 같은데'라고 생각할 지 모르지만 사실 그것이야말로 김경집이 노리는 것이다. 왜냐하면 너무도 익히 잘 알려진 그 이야기들에 대한 지금까지의 해석들이 원래 성경이 의미하고자 하는 바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고정관념처럼 그 의미가 굳어진 근저에는 평범한 신도들의 목사나 전문가들의 해석에 대한 무비판적 수용이 있기 때문이다. 바로 그것을 강조하고 평신도들이 설교나 책 이전에 먼저 스스스로 헤아려 볼 것을 권유하기 위해 그는 오히려 아주 익숙한 것들에 새로운 해석의 물길을 열어주는 것이다. 역사적 실증이나 해석학등 인문학적 방법들을 동원해서 말이다. 다시 말 해,  이 책은 누가 더 성경이 말하는 원뜻에 맞는가를 두고 겨루는 진검승부의 외양을 하고 있지만 궁극엔 정말 중요한 것은 나만의 초식으로 성경을 해석해보는 것이며 바로 그 자발적 움직임을 고취시키는데 있는 것이다. 사실 이 같은 방향성에 대해 나 역시도 동의할 수 밖에 없다. 나 역시 나와 같은 평신도들의 무비판적 추종이야말로 오늘날과 같이 부끄러운 기독교의 모습을 낳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믿음이 주가 되는 것이 신앙이지만 올바른 성찰이 수반되지 않은 믿음은 그저 맹종에 불과하다. 또한 변질과 부패로 가는 길에 있어 맹종만큼 빠른 지름길도 없다.

 

  앞서도 신앙의 완성은 실천이라고 말했지만 그 실천 역시도 이러한 성찰적 믿음에 근거할 때 제대로 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김경집이 이 책을 통해 궁극적으로 원하는 건 그것이다.  잘 알려진 예수의 행적들을 중심으로 그 참뜻을 다시금 밝혀 진정한 실천을 가로막는 방해물과도 같이 자신의 잘못된 신앙을 정당화하는 핑계 거리나 제공하는데 그치는 말들을 제거하려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 책에서 날리는 모든 수리검은 오로지 삶의 실천으로 이끄는 자기 성찰적 믿음이란 과녘을 향하여 날아가고 있는 것이다. 바로 그를 위해서 김경집은 성경의 이야기만 하지 않는다. 모든 꼭지마다 거기에 더하여 그와 비슷한 비중으로 용산참사나 쌍용자동차 정리해고와 같은 지금 바로 우리 곁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회적 현실까지 알알이 박아놓는 것이다. 왜 우리에게 그토록 성찰적인 믿음이 또한 그것이 바탕이 된 실천이 절실해질 수 밖에 없는지 보여주기 위해서 말이다. 때문에 읽는 이로서는 아무래도 태도의 변화에 대해 숙고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 책은 바로 그걸 위한 것이다. 이 책이 성경 해석에 중점을 두고 있으므로 어쩌면 이 책에서 더러 해석상의 오류나 표현상의 잘못을 잡아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거기에 천착하는 것은 달을 가리키는데 손가락만 보고 있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사소한 잘못으로 무시하기엔 이 책에서 말하고 있는 뜻이 너무도 당위적이고 신앙인이라면 더욱 절실한 것이기 때문이다. 나처럼 기독교에 문제가 있다고 느낀 이들에겐 오래 만에 해갈을 하는 듯 한 기분을 느길 수 있을 것이다. 생각 같아서는 주일날 주보 대신 이 책을 돌리고픈 마음이다. 부디 이 책을 읽어서라도 우리가 정말 힘써야 하는 신앙의 모습이란 어떤 것일까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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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독서뿐 - 허균에서 홍길주까지 옛사람 9인의 핵심 독서 전략
정민 지음 / 김영사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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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가 나비 잡는 것을 보면 사마천의 마음을 얻을 수 있지요. 앞발은 반쯤 꿇고 뒷발은 비스듬히 들고, 손가락을 집게 모양으로 해 가지고 살금살금 다가가, 손을 잡았는가 싶었는데, 나비는 호로로 날아가 버립니다. 사방을 둘러보면 아무도 없고, 계면쩍어 씩 웃다가 장차 부끄럽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하는, 이것이 사마천이 책을 저술할 때입니다. 

('오직 독서뿐' p. 228)

 

 정 민 작가의 새로운 책, '오직 독서뿐'을 읽다가 반가운 글을 만났다. 인용한 글이 바로 그것인데 참으로 오래만의 재회였다. 이 글은 본디 연암 박지원의 것으로 아주 오래 전 그의 문장 선집에서 첫 조우를 한 바가 있다. 그 때 이 글을 얼마나 감탄하며 읽었는지 모른다. 사마천이 책을 쓸 때의 마음을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다니 역시 당대의 최고 문장가답다는 생각을 했다. 그 때 부터 난 이런 문장을 쓰고 싶었다. 연암 박지원의 것을 내 것으로 만들고 싶어서 닥치는 대로 찾아 읽기도 했다. 하지만 당대 최고의 내공을 내 것으로 만들기란 누구나 다 알다시피 그리 쉬운 게 아니다. 비록 그 문장은 내 것으로 만들지 못하였으나 이 글에 연암 박지원이 스며놓은 그 뜻만은 내 것으로 할 수 있었다. 이 글을 읽고 크게 깨달은 바가 있어 그 때부터 책을 벗할 때마다 드러난 문장 보다는 왜 하필이면 이렇게 표현했을까를 더 생각하게 되었다. 요 몇년 사이 리뷰를 인터넷 서점에 올리고 있는데 아무래도 만인에게 공개된 곳이다보니 더러 내 리뷰에서 행한 해석을 두고 의문을 표해 오시는 분들을 만날 때가 있다. 굉장히 독특한 관점인데 어떻게 그렇게 읽을 수 있느냐를 비롯 그렇게 해석하는 근거는 무엇이냐는 질문도 받는다.(물론 자주는 아니고 거의 가뭄에 콩나듯 어쩌다이지만.) 그 때의 내 대답은 이미 예상하시는대로다. 작가가 하필이면 왜 이런 구성을 취했을까 혹은 왜 이런 표현을 굳이 쓴 것일까에 주로 천착하다보니 그렇게 해석하게 되었다고. 근거 역시 바로 거기에 있을 뿐 다른 건 없다고. 추리 소설을 보면 어떤 탐정들은 어떤 증거를 대할 경우 그 자체 보다는 왜 그게 하필이면 그렇게 놓여 있었는지 그 맥락을 먼저 따지는 경우가 있다. 내 리뷰 스타일이 바로 그와 비슷한데 그렇게 하도록 만든 것이 연암 박지원의 이 글이었던 것이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다시 음미해 보아도 여전히 좋은 문장이고 변함없이 좋은 뜻이다. '일침'에 이어 또 한 번의 옛 선조들의 좋은 글들을 모은 '오직 독서뿐'은 이렇게 엄선된 좋은 글들로 읽는 멋과 그 뜻을 음미하는 맛 모두가 좋은 책이다. 이번의 책은 주로 독서와 관련하여 조선 선비들의 글을 모았다. 그렇게 유명한 책벌레라고 소문났었던 '홍길동'의 허균, '성호사설'의 이익, '동사강목'의 안정복, '북학의'의 홍대용, 연암 박지원, 간서치 이덕무를 비롯하여 모두 9명의 내노라 하는 조선의 최고 책벌레들의 글이 여기엔 실려 있다. 책은 사람을 중심으로 그의 글들이 모여 있는 형국인데 그래서 읽노라면 저절로 저마다 다른 책에 대해 중시하는 부분을 느끼게 된다. 이를테면 허균은 주로 독서를 통해 얻을 수 있는 흥취를 강조하는 경향이 있고 이익은 그 자신 학자였던만큼 책을 통해 학문을 닦는 태도를 보다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글로는 처음 만나보는 백수 양응수는 좋은 독서에 대해 굉장히 구체적으로 알려주는데 어째 그 자신의 시행착오적 경험에서 우러나온 듯한 느낌이 난다. 알아주는 책벌레이자 실학자이기도 한 안정복과 홍대용은 과연 그들답게 '잡서를 경계하라'나 '책 읽기의 못된 버릇'등 아주 실제적인 독서 방법들을 알려주며 박지원은 진짜 책읽기의 고수가 비법들을 들려주는 듯하며 책읽기하면 바로 떠오르는 그야말로 명실상부 책읽기의 대표자 간서치 이덕무는 그야말로 책읽기의 오타쿠만이 할 수 있는 말들을 들려준다. 이렇게 책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서나, 책의 것을 내 것으로 만드는데 있어서나 원칙이든 실제적 방법이든 새겨둘만한 참 좋은 말들도 많지만 이런 식으로 각 존재들의 개성적인 면모마저 드러나기에 더욱 재밌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요즘은 새삼 독서의 중요성이 대두되고 있어 좋은 독서에 대한 이런 저런 방법들을 알려주는 책이 참 많지만 진정한 책벌레였던 우리의 옛 선조들은 과연 어떻게 했는지 더하여 알아두는 것도 참 좋을 것 같다. 옛 글이지만 거기에 녹아있는 뜻은 전혀 지금 시대에도 떨어지지 않으니 보다 현명하고도 좋은 방법을 얻고자 한다면 오히려 이 책이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 여겨지기도 한다. 이것은 내 실제적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이기도 한데, 사실 여기에 실린 글들 중 마음에 든 것은 기회 있을 때마다 다른 이들에게 들려준 적이 있었는데 호응이 꽤 좋았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이 책은 묵독 보다 낭독이 더 어울리는 것 같다. 그렇지 않아도 원래 조선의 지식인들은 주로 글을 읽음으로써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비록 문장들이 한문을 풀이한 것이긴 해도 정 민 작가가 그 쪽도 염두에 두고 번역했음인지, 아니면 아예 처음부터 풀이를 해서 읽어도 그 맛이 나도록 썼음인지 그 정확한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소리 내어 읽는 맛이 제법 크다. 묵독하는 것보다 더 머리에 쏙쏙 잘 들어오는 것도 같고. 아무튼 낭독하기에 어울리는 책이다. 많은 이들이 함께 있는 자리에서 낭독하고 그 뜻을 서로 같이 나누면 더욱 뜻깊은 독서가 되지 않을까 싶다.  

 

 책을 읽는 사람은 점점 줄어들고 동네 서점은 망하고 출판 시장은 계속해서 불황이다. 사람들이 책을 점점 읽지 않게 된 이유에 대해 어떤 이들은 다른 재밌는 거리가 많아서라고 한다. '오직 독서뿐'에 실려 있는 옛 선인들이 들었다면 참으로 기겁할만한 소리다. 그들이 그토록 책을 많이 읽게 된 것은 당시 별 다른 여흥거리가 없어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오직 독서뿐'에는 책을 읽는 것에 대한 다양한 많은 말들이 나오지만 오직 한 가지만은 나오지 않는다. 그건 '왜 책을 읽는가?'이다. 거기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이 없다. 왜냐하면 그건 그들에게 불필요한 질문이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책을 읽음에 있어 '왜?'라는 질문은 성립되지 않는다. 책은 그저 읽는 것이니까, 아니 읽어야만 하는 것이니까. 그렇게 독서란 그들에게 필연이었다. 그러므로 읽었다. 무조건. 그것도 언제나 단정히 의복을 갖추고 바른 자세로. 아침에 일어나서는 가장 먼저 어제 읽은 것을 떠올리고 읽을 때는 그 뜻을 제대로 자기 것으로 만들 때까지 몇 번이나 암송하면서. 그렇게 읽었다. 그런 그들에게 우리는 도대체 책이 뭐라고 그렇게까지 하느냐고 묻겠지만 그러면 그들은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일단 읽어보라고. 그러면 언젠가 자연히 알게 된다고. 산이 있으니까 올라간다고 했던 한 산악인의 말과도 같이, '홍씨 맛이 나기에 홍씨라고 대답한 것 뿐이온데'라고 했던 어린 대장금의 말과도 같이 아주 단순하고도 자명하게 왜 '오직 독서뿐'인지 알게 될 것이라고. 맞다. 진리는 늘 자명하다. 그 경지를 경험한 자들에게는. 그러니 '왜'라는 질문은 잠시 접어두고 그냥 닥치는 대로 읽어보는 건 어떨까? 그렇다고 그냥은 읽지말고 이 책에 실린 원칙과 방법들을 유념하면서. 그러면 자연히 알게 되리라. 독서가 왜 모든 것인지...

 

 독서는 순수한 몰입이다. 무엇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가치 있는 행위다. 의도를 가지고, 목적을 전제로 하는 독서로는 거둘 것이 없다. (...) 자발적 독서, 무목적의 몰입, 읽지않을 수 없어서 하는 독서만이 우리 삶을 들어올린다.  업그레이드시켜준다. (p.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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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편전쟁에서 5.4운동까지 - 중국근대사 인간사랑 중국사 1
호승 지음, 박종일 옮김 / 인간사랑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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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나라에 대해서 알고 싶다면 그 가장 좋은 길은 그 나라의 역사를 들여다 보는 것이다. 역사는 많은 것을 말해준다. 오늘이 있기까지 어떤 경험을 겪었으며 그 와중에 어떤 것이 형성되었고 또한 무엇을 지향하게 되었는가 하는 것까지. 역사란 단적으로 그 나라의 심층을 속속들이 살필 수 있는 나이테와도 같다. 그렇게 한 나라를 이해하기 위한 지름길인 것이다. 특히나 우리나라와 전혀 다른 역사적 경험으로, 전혀 다른 체제를 가지고 있는 나라라면 더욱 그렇다.

 

 지금 세계에서 가장 관심을 받고 있는 나라는 중국이다. 그들의 파워는 경제적인 것이든 정치적인 것이든 해마다 늘어나고 있다. 이미 앞으로의 세계 정세 판도가 중국을 중심으로 펼쳐질 것이라는 전망도 거세게 나오고 있는 참이다. 이러한 부상과 더불어 중국을 이해하려는 움직임이 여기저기서 일어나고 있다. 그건 우리나라에서 해마다 늘고 있는 중국 관련 서적의 출판 현황만 봐도 증명된다. 하지만 과유불급이라고 너무 많은 책의 존재는 오히려 우리의 걸음을 머뭇거리게 만든다. 도대체 어떤 책을 보아야 할 지 선뜻 가늠하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감히 제안하건데,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그들의 역사를 한 번 들여다 보는 건 어떨까? 물론 그 기나긴 중국의 역사를 다 들여다보는 것은 부담이 되는 일임을 안다. 하지만 굳이 그 전부를 들여다 볼 필요는 없다. 지금의 중국을 낳은 것은 어디까지나 청 이후의 근대이므로 그 근대와 사회주의 체제를 유지했었던 현대를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한다. 우리에게도 유명한 중국학자 조너선 스펜서는 중국이 지금과 같은 모습을 갖게 된 그 시작을 청나라에서 찾고 있다. 청대 들어와서 형성되었고 정비된 모든 것이 그대로 지금 중국을 다지는 데 기틀이 되었다는 것이다. 역사를 공부할 때 우리는 흔히 '사관(史觀)'이라는 말을 듣는다. 독일의 해석학자 딜타이 이후로 역사도 사실의 기술이 아니라 하나의 해석이라는 게 널리 받아들여졌는데 사관이란 그 해석에 있어 기준이 되는 일종의 틀이라 할 수 있다. 같은 사실을 놓고서도 역사학자들이 서로 다른 견해를 표방하는 것은 가지고 있는 사관이 다르기 때문이다. 지금 중국이 청대에 근원을 두고 있다는 조너선 스펜서와 전혀 다른 사관을 가지고 있는 이라면 현재 중국을 낳게 한 근원을 어디로 볼까? 난 그런 의문에서 전혀 다른 중국 역사를 말해줄 책을 찾고 있었고 이왕이면 조너선 스펜서와 같은 외부인의 눈이 아니라 그 내부의 눈으로 바라 본 중국을 들려주는 책을 보고 싶었다. 그러다 만나게 된 게 바로 이번에 나온 '아편전쟁에서 5.4 운동까지'라는 책이었다.

 

 '아편전쟁에서 5.4 운동까지'는 호승(1918~2000)이란 사람의 책이다. 호승은 중국공산당의 핵심이론가이지만 중국사학자로 더 유명하다. 그런 그에게 '아편전쟁에서 5.4 운동까지'는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중국공산당의 핵심이론가라는 그의 약력을 보아서도 알 수 있듯이 그의 사관은 '마르크스의 역사유물론'이다. 그런 입장에서 그는 조너선 스펜서와 같이 현대 중국의 시작을 청대에서 잡고 있는 것을 비판한다.

 

 소련의 일부 중국사 연구자들은 중국근대사의 기점을 17세기 중엽 청왕조의 건립 시까지 늘려잡고 있다. 이런 시대구분은 한편으론 서구 역사의 시대구분을 중국 역사에 무리하게 대입하는 것이며 다른 한 편으로는 중국 근대사의 주제를 중국 국내의 민족 모순에 국한시키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기도 하다. 이런 시대구분 방식은 비과학적이며 따라서 중국역사학계는 단연코 부정해왔다. (p.15)

 

 당시의 소련 중국사 연구자들 역시 호승처럼 마르크스 역사유물론적 입장에서 역사를 보아왔다.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호승의 말에서 보듯 중국역사학과 전혀 다른 입장을 가지게 된 것은 어디까지나 외부의 눈으로 중국 역사를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호승의 말은 중국 역사는 어디까지나 그 내부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 말은 그대로 내가 왜 이 책을 선택하게 되었나를 말해준다. 내부의 눈으로 본 중국의 역사란 또 얼마나 달라질 수 있는지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렇게 보았을 때 중국의 역사는 어떤 다른 모습을 가지게 되는가? 일단 그것은 시작점이 다르다. 호승을 비롯한 중국 역사학자 내부의 시선들은 중국 근대사의 시작을 아편 전쟁에서 찾는다.

 

 왜일까? 이건 마르크스 역사 유물론을 어느정도 이해하고 있어야 가능하다. 마르크스의 역사관에서 근대란 어디까지나 봉건이 아닌 것을 말한다. 마르크스는 역사를 어떤 생산 방식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구분해왔고 거기서 봉건이란 쉽게 말하면 생산 방식이 소수의 손에 독점되어 있는 것을 가리킨다. 거기서는 역사의 주체가 되는 민중이 자신의 노동으로 생산한 것을 소유할 수 없기 때문에 오로지 생산도구와 다를바 없는 존재가 되는데 그게 바로 봉건제도의 핵심이다. 봉건이냐 근대냐의 구분은 민중이 자기 노동을 통해 생산한 것을 전유할 수 있느냐로 구분된다. 청대에는 그럴 수 없었다. 그러므로 중국 근대사의 시작을 청대로 잡을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아편전쟁인가? 그건 아편전쟁으로 서구 열강들이 본격적으로 중국을 침탈해 들어오면서 청대가 와해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전통적으로 군림하던 계급들이 와해되기 시작하면 항상 그것을 대체하는 계급들이 생겨났다. 그렇게 아편전쟁 이후로 중국에도 신흥계급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그게 바로 서구 열강이 가져온 자본주의와 맞물리면서 생겨난 자본가계급이었다. 이는 생산의 주요 형태가 소작에서 임금으로 바뀌는 것을 뜻했고 그렇게 됨으로써 프롤레타리아, 즉 무산계급이 태어나는 배경이 되었다. 이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출현 때문에 호승은 아편전쟁을 중국근대사의 시작으로 삼은 것이다. 그는 '아편전쟁에서 5.4 운동까지'에서 중국 근대사를 세가지 중요한 기점으로 나누어 설명하는데 그 스스로는 그것을 '혁명 고조기'라고 부르고 있다. 즉 그에게 중국 근대사란 그렇게 나타난 중요한 세 차례의 혁명 고조기를 통한 무산계급과 농민 계급의 역량이 점차 강화되고 있는 시기인 것이다. 그렇게 세 차례의 혁명 고조기를 거쳐 무럭무럭 자라난 민중들의 역량으로 결국은 지금과 같은 사회주의를 이루게 되기까지의 과도기. 그것이 바로 호승이 바라보는 중국의 근대사다. 호승에게 있어 아직 사회주의가 도래하지 못한 중국의 근대사란 반(半)봉건, 반(半)식민의 시대다. 아직 무산계급이 여전히 자신이 생산한 것의 주인이 되지 못하고 있으니 봉건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수많은 서구 열강에 국토가 유린당하고 있으니 겉은 나라가 있으나 알맹이는 전혀 그렇지 않은 식민지의 상태라는 것이다. 진정한 중국의 현대는 오로지 그 반봉건과 반식민을 벗어난 상태에 있으니 그것이 바로 모택봉에 의해 이룩하게 되는 중국 사회주의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런 입장에서 그 현대로 나아감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책의 내용대로 하자면 민중의 역량이 강화되었던 기점들인 세 차례의 혁명고조기는 중요한데 그렇다면 그 세 번의 혁명고조기는 과연 무엇일까?

 

 그걸 말해 본다면 이렇다. 제1차 혁명고조기는 1851년에 일어나 무려 15년간 계속된 태평천국의 난이며 제2차 혁명 고조기는 1898년 일어난 무술유신운동과 1900년에 일어난 의화단 운동 그리고 마지막 제3차 혁명고조기는 1905년의 동맹회 설립과 1911년에 일어난 신해혁명이다. 책은 이 세 차례의 혁명고조기에 무엇이 일어났던가를 보다 세밀하게 밝혀주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래서 '아편전쟁'에서 '5.4운동'까지 이 책은 주로 네 개의 시대로 구분하여 설명하고 있다. 그 중 1부에 해당하는 아편전쟁과 태평천국운동까지의 부분은 아편전쟁이 일어난 당시의 중국 정치와 경제 상황과 그 전쟁으로 중국 내부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 밝혀 점차 혁명의 주요 주체가 되는 무산계급들이 어떻게 형성되고 그 역량을 강화해나가는가를 보여주는데 이 시기엔 무엇보다 태평천국을 일으킨 핵심 계층이기도 했던 농민들을 중심으로 살피고 있다. 당시의 무산계급은 아직 역사의 주체가 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하지 못해 그 빈자리를 전통적으로 착취당하고 있던 농민 계급이 떠맡았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러한 태평천국의 난으로 인해 봉건의 성격이 강했던 청 왕조는 급격히 와해되기 시작하고 내부적으로는 점점 성장하는 민중의 분노를 달래기 위한 회유책으로 외부적으로는 중국의 이권을 노리고 달려드는 열강의 강요로 체제 변화에 나서게 되는데 오히려 그 때문에 태평천국의 난으로 발아되었던 씨앗은 더 크게 성장하여 결국은 또 한 번의 농민들이 주축이 된 혁명운동인 '의화단' 흥기를 낳게 만든다. 의화단 흥기는 비슷한 시기 우리나라의 동학과 닮은 점이 눈에 띄는데 동학이 동학이란 종교가 그 바탕이 되었듯이 의화단 역시 '백련교'라는 종교가 바탕이 되었고 또한 동학혁명운동이 당시 농민에 대한 수탈과 학정으로 대변되는 봉건제도에 대한 반발과 일본에 대한 반제국주의 운동 모두가 합쳐진 것이었듯이 '의화단' 흥기 역시 두 성격을 모두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의화단이 이토록 커다랗게 흥기할 수 있었던 것도 당시 격심해지고 있는 서구 열강에 대한 반발이 광범위하게 퍼져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많은 식민지 국가들에서 프롤레타리아의 혁명은 그 상황상 민족 해방 운동과 겹쳐지는 경우가 많은데 그건 중국도 우리나라도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동학이 결국은 일본에 의해 좌절되었듯이 의화단 흥기 역시 이미 들어와있던 열강의 연합군에 의해 좌절되고 말았다. 동학과 의화단 모두 농민들이 자발적으로 일으킨 혁명 운동이었고 거의 나라를 집어삼킬 정도로 막강한 힘을 발휘했으나 결국 그 꿈을 이루지 못하고 쓰러져버리고 말았는데 이로써 우리는 자발적으로 일어난 농민혁명의 한계를 보게된다. 물론 여기의 실패에는 열강의 막강한 군사력이 단단히 한몫하긴 했지만 동학의 우금치 전투에서 보듯 전략과 전술에 따른 일사분란한 대응이 없었던 것도 분명 그 대패의 원인이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그 혁명의 역량을 결집하고 나아갈 방향을 일사분란하게 정해주는, 머리와 같은 하나의 선도적 존재의 필요성이 대두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호승은 제2차 혁명 고조기에서 절실하게 느꼈던 것은 그들을 제대로 이끌어줄 선도적 조직, 즉 중국 공산당의 필요성이었다고 말한다. 제3차 혁명고조기는 바로 그와 같은 중국공산당의 형성으로 나아가게 되는 과정이다. 선도적 조직의 중요성은 상황 탓이다. 이제 중국 민중이 맞서 싸워야 할 것은 청 왕조가 아니라 그보다 훨씬 막강한 제국주의 세력들인 것이다. 강한 적을 상대할수록 무엇보다 중요해지는 건 적은 역량이나마 제대로 쓰여야 할 곳에 쓰일 수 있도록 하는 관리와 결집이다. 그래서 선도적 조직이 더욱 절실히 요청되는 것이다. 그 시기 중국도 다르지 않았다. 비슷한 자각에서 중국 지식인들이 중심이된 동맹회가 1905년 결성된다. 말하자면 종국에는 중국공산당에 이르고말 그 일보라 할 수 있는 조직이 만들어진 셈이다. 그것이 나중에 가서는 결정적으로 청왕조를 무너뜨릴 신해혁명으로 이르게 된다. 결정적인 탈봉건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무려 800페이지가 넘는 이 책을 중요한 내용만 발췌하여 이런 식으로 간략하게 정리해 보았다. 주로 이 책이 어떤 내용의 책인지 알려주는데 중점을 두고 설명해 봤는데 얼마나 잘 전달되었을지 모르겠다. 아무튼 호승의 '아편전쟁에서 5.4 운동까지'는 이런 사관 위에서 중국 근대사를 집대성하여 보여주고 있다. 방대한 분량만큼 내용은 정치와 경제를 막론하고 아주 상세히 설명되어 있으며 논지가 확고한만큼 중언부언없이 말하고자 하는 맥락을 끝까지 잘 유지하고 있다. 호승이 이 책을 통하여 처음으로 주장한 세차례 혁명 고조기를 기준으로 중국 근대사를 보는 방법은 이 덕분에 중국 역사학계의 정설로 자리잡았다고 하니 그것만봐도 여기에 투영한 그의 논지가 얼마나 선명한가 하는 것은 능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마르크스 역사 유물론적 입장이라 거기에서 비롯되는 호불호가 있을지 몰라도 중국근대사를 헤아리게 해주는데 있어 이만한 안내서는 또 없다고 생각된다. 중국근대사는 오늘날의 중국을 근본적으로 형성한만큼 중국을 알기위해서는 보아두지 않으면 안되는 영역인데 그를 위해서라면 이 책 역시도 그만큼 필독서가 아닐까 여겨진다. 왜냐하면 마르크스적 역사관은 중국 사회주의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도록 중국 역사를 바라보는 지배적 창구가 되어왔고 그만큼 다져진 내실과 깊이가 있기 때문이다. 보다 깊이 이해함에 있어서는 보다 다양한 관점들을 두루 보는 것만큼 더 좋은 것도 없다. 그러니 이런 관점의 역사도 한번쯤 보아두면 어떨까 싶다. 더구나 이 책은 굳이 그런 관점을 배제하더라도 중국 근대사에 대한 아주 상세하고도 충실한 설명을 담고 있으니 중국 근대사를 비행하는데 있어 더없이 좋은 항로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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