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하는 지도 - 12개의 지도로 읽는 세계사
제리 브로턴 지음, 이창신 옮김, 김기봉 해제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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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도에 미친 사람을 뜻하는 '맵헤드'를 쓴, 그 역시도 이름난 지도광인 켄 제닝스는 어린 시절 지도가 나오지 않는 판타지 소설은 들춰보지도 않았다고 하는데 웃겼다. 나도 그랬으니까. 지도가 들어있는 이야기들이 좋았다. 지도를 보는 것을 좋아했다. 어려서는 가장 많이 들여다 본 교과서가 사회과 부도였고 나이가 들어서는 조르주 뒤비의 '지도로 보는 세계사'였다. 내가 역사를 좋아하게 된 것은 실은 지도 때문이었던 것 같다. 어떤 사건을 읽게되면 반드시 그 곳의 위치 그리고 형세를 보아야만 직성이 풀렸다. 그런 내가 '12개의 지도로 읽는 세계사'라는 부제가 붙은 제리 브로턴의 '욕망하는 지도'를 읽게 된 것은 내일 아침에 동쪽에서 태양이 떠오르듯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는지 모른다.


 읽어 본 소감? 한 마디로 경이로운 책이다. 구글 어스를 처음 보았을 때 잡지 'PC월드'의 편집장 해리 매크래컨은 "황홀하다"고 했다고 하는데 나 역시 이 책에 대해 같은 말을 할 수 있을 듯 하다. 만일 지금까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어떤 것의 매력을 알려주고 지금까지 바라보았던 이상의 시야를 열어주는 책이 좋은 책이라고 한다면 이 책이 그렇다. 번역되지 전부터 이 책의 존재를 알았고 이미 바깥의 상찬을 익히 봐왔던 터였는데 과연 거짓이 아니었다. 나처럼 지도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무려 600페이지가 넘는 책이지만 무리를 해서라도 순식간에 홀라당 읽어버릴지도 모른다. 덕분에 나는 지금 엄청난 후유증을 치르는 중이다. 위장이 뒤틀려 며칠 동안 고생한 것도 모자라 지금은 잇몸이 부어올라 제대로 말하는 것조차 힘들다. 그러니 읽을 때 여유를 두고 읽으시길. 급히 먹다 체한다라는 말이 책에도 그대로 통용되는 말임을 이제서야 몸으로 알았다.

 프랑스의 철학자 장 보드리야르는 현대는 가상이 실제를 대체했다면서 그 대표적인 예로 지도를 든 바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는 실제 그 장소에 있을 때조차 그 곳이 내가 찾아가는 곳인지 알기 위하여 지도를 들여다보기 때문이다. 이제 실제는 가상의 보완이 없으면 그 존재조차 인정받기 어렵게 되었다. 그처럼 지도는 가상으로 엮어진 기호의 체계인데 바로 그 때문에 기호가 그러하듯이 있는 그대로를 투명하게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가진 많은 인간적인 것에 좌우되기 십상이다. 이를테면 이 책의 제목처럼 욕망 혹은 가치관 같은 것들. 제리 브로턴은 이 책의 프롤로그에서 '지도를 만들려는 욕구는 인간의 기초적이고 지속적인 본능이다."라고 말했다. 본래 생물에겐 '인지적 관계대응'이라고 해서 거대하고 두렵고 인식할 수 없는 '저쪽' 세상과의 관계에서 나를 구별하고 정의내리기 위해 공간적 환경과 관련한 정보를 획득하고 처리하며 상기하는 행위를 본능적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도 제작까지 나아가는 것은 인간이 유일하다. 그러므로 나처럼 지도 보는 것을 좋아하는 것도 어쩌면 나의 나됨을 붙잡고 싶은 욕망의 발현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책은 그냥 지도가 아니라 '세계지도'를 대상으로 한다. 저자에 따르면 세계지도는 좀 특별한 의미의 영역을 가진다고 한다. 다른 지도 제작과는 다른 도전과 기회에 직면하기 때문이다.(P.30) 지금과 같이 인공위성을 이용한다든지 하는 것과 같은 혁신적 기술이 태동하기 전에는 세계지도를 제작하는 데 있어 특별히 두 가지에 의존해야 했다고 한다. 하나는 머리 위의 하늘이고 다른 하나는 상상력이다. 이 후자가 특히나 중요한 영향을 끼쳤는데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사람들이 파악할 수 있는 세계란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는 세계와는 달리 지극히 협소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막대한 외부를 어떻게든 지도에 나타내려면 상상력에 의존하는 것 말고 달리 뭐를 할 수 있었을까? 그렇게 해서 지도는 실제의 공간을 복사기로 밀어내는 듯 만들어지지 못하고 인간적 욕망의 간섭 아래 놓이게 되는 것이다. 이건 결코 미개한 기술 때문이 아니다. 가장 혁신적인 기술을 보여주는 구글 어스에서조차 이러한 욕망의 간섭과 위험은 여전하다고 그는 말하고 있으니까.

 그러므로 지도란 결국 만드는 '나'의 표현이다. 나의 욕망, 가치관의 상관물이다. 따라서 지도를 들여다 보는 일은 단순히 공간의 위치를 특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만든 이들의 욕망, 가치관을 들여다보는 것과 마찬가지다. 

 즉 지도란 책이다. 마크 트웨인의 '허클베리 핀의 모험'이란 책을 읽어보면 허클베리 핀이 자신이 도와주는 한 여인에게 이렇게 말하는 구절이 나온다. 
"당신의 얼굴은 책 같아요. 그들은 당신의 마음에 무엇이 있는지 얼굴에서 다 읽게 될 거에요."
지도가 바로 그렇다. 제리 브로턴은 자신의 책을 통해 이것을 입증한다. 그렇게 우리는 제리 브로턴의 인도로 12개의 세게 지도를 만나면서 허클베리 핀이 말했던 그대로 당시 그 지도를 제작했던 이들이나 국가의 심중에 무엇이 있었는지 혹은 바랐는지 읽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럼, 무엇을 읽는가? 먼저 이 책은 지도로 읽는 세계사이다. 우리나라 책에는 부제로 쓰였지만 원래 제목은 이것이었다. 제목 그대로다. 정말로 우리는 지도를 매개로 역사적으로 세계가 변천해 온 과정을 읽을 수 있다. 특히나 3장, 신앙이라는 제목으로 소개되는 '헤리퍼드 마타문디'와 5장, 발견이라는 제목으로 소개되는 마르틴 발트제묄러의 세계지도'를 비교해 보라. 여기서 우리는 정확히 중세에서 르네상스로 넘어가는 굴곡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1300년경에 제작된 헤리퍼드 마파문디

(중세 시대의 대표적 지도로 영국의 해리퍼드 성당의 별관에 보관되어 있어 그렇게 불리고 있다. 마파문디라는 말은 넵킨을 뜻하는 라틴어 '마파'와 세계를 뜻하는 라틴어를 합친 말이다. 현재 유네스코 기록 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는데 기독교가 지배하던 당시 중세의 가치관을 전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지도 맨 위에 예수님이 보이고 예루살렘이 지도의 중심에 놓여져 있고 그 곳이 속한 아시아가 지도의 2/3을 차지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지도의 위쪽이 우리가 흔히 예상하는 북쪽이 아니라 동쪽이라는 것이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지도의 위쪽은 북쪽으로 하는 게 좋다고 하여 그 때부터 북쪽으로 해왔는데 여기서는 무시된 것이다.(이는 중세 지도의 특징이기도 하다.) 더구나 프톨레마이오스의 격자선도 보이지 않는다. 하나의 거대한 구안에 갇힌 세계는 이 지도가 보여주려는 게 세계가 아니라 예수가 다스리는 세상이라는 기독교를 보여주려는 듯 하다.
 

 '미국의 출생성명서'로 유명한 마르틴 발터제묄러의 세계지도
(1507년에 제작되었고 목판 인쇄되었다. 1998년 미국 의회도서관이 무려 천만달러라는 거금을 들여 구입해 더욱 유명해졌다. 지도를 좋아하는 이들에게 미국 의회도서관은 특히 유명한 곳이다. 세계에서 희귀하다는 지도가 거의 다 여기에 보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출생증명서'라는 말은 이 지도의 진위를 처음 검증하고 이 구입의 필요성을 미국 의회도서관에 알린 영국의 유명한 지도 거래상이자 아메리카지도 전문가인 필립 버든이 붙인 것이라고 한다. 그는 처음 이 지도를 보았을 때 미국 독립선언서와 미국 헌법 다음으로 중요한 미국 문헌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당시 지도는 독일의 한 백작이 소유했었는데 그 매각 의뢰서를 '발견자들'로 유명한 대니얼 부어스틴(여기서 이 이름을 만나게 될 줄이야.)이 썼다고 한다. 이 지도가 그만한 가치를 가지는 것은 처음으로 아메리카를 독립된 대륙으로 묘사하고 아메리카라는 이름을 붙여 준 지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바로 이 지도에는 당시 한창 꽃피우던 르네상스적 정신이 구현되어 있기 때문이다. 마파문디와는 다르게 더이상 예수 같은 성경 상의 인물도 등장하지 않고 다시금 프톨레마이오스의 전통으로 돌아가 지도의 위쪽도 그의 권고대로 북쪽으로 잡고 있다. 거기다 르네상스 시대에 새로 발견된 지역들을 프톨레마이오스의 고전적 세계모형과 조화를 이루도록 한 노력도 현저하다. 이처럼 지도에는 당시 지배하던 가치관들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세계지도를 통해 세계사를 읽는 일이 허언이 아닌 것이다.)

1969년에 발표된 영국의 락그룸 'EAST OF EDEN'의 데뷔 앨범 커버

 (여인의 나신에 메르카토르의 지도가 문신처럼 그려져 있는 멋진 커버로 내가 좋아하는 앨범이기도 하여 이 자리에서 소개해 본다. 앨범 이름 역시 메르카토르 프로젝트이다. 한 마디로 메르카토르가 지도를 통해 하려고 했던 일을 음악을 통해 하겠다는 뜻을 표방한 것. 이들은 주로 인도 음악 스타일을 많이 연주했는데 그런 면에서 관용을 지도를 통해 구현하려 했던 메르카토르의 이념을 잘 따르고 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LP로 보면 더욱 근사한 커버다.)

 그런데 이렇게 읽다보면 또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바로 지도를 만들고 보고 읽는 '인간'이다.

 지도에 투사하고 있는 가치관, 지도에 투영된 인간의 욕망들을 읽다보면 저 마파문디와 발터제묄러의 세계지도 차이에서 보듯 인간들의 생각들이 어떻게 바뀌고 그 욕망 또한 어떻게 달라졌던가가 눈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마파문디에선 없었던 국가와 개체의 발견이 발터제묄러에서는 나타나는가 싶더니 종교개혁과 더불어 나타난 메르카토르의 투영법이 사실은 오로지 하나만 군림하며 그것을 중심으로 주변과 변방만을 만들어내던 세계를 떠나 어디까지나 모든 지역을 똑같은 존재로서 공평하게 다루려 한 이념이 투영된이었음을 알게되면서 개체라는 독립성의 발견과 함께 이 장의 제목대로 '관용'에 인류가 눈을 뜨게 되는 것을 목도하는가 하면 바로 그 관용이 개체의 독립이 더욱 굳어짐에 따라 서로 자기가 중심이 되려는 욕망으로 변질되어 결국은 매킨더에 의해 만들어져 이후 전쟁을 일으킨 주요한 원인이 된 '지정학'의 탄생으로 굴절되는 걸 보면서 자연히 인간의 마음이 흘러온 길을 더듬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책은 세가지를 준다.
 하나는 지도와 그에 관련된 많은 이야기거리들을. 다른 하나는 지도의 변천을 둘러싼 세계 역사의 변화를. 마지막으로 그 경로를 따라 이행해 온 인간 마음의 발자취를 말이다. 단적으로 지도라는 것이 이렇게 많은 것을 담을 수 있는 풍부한 텍스트라는 것을 이 책을 통해 깊이 느끼게 된다. 그러니 지도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써 어찌 황홀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몸이 비상벨을 아무리 울려도 다음 페이지로 넘기고 싶은 마음을 억누를 수 없었다. 그래서 요모양 요꼴로 고생하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마음만은 왠지 풍요로워진 느낌이다. 아무튼 좋은 책이다. 아마도 당신에게는 여덟 번째로 권하는 것 같다. 만나는 이들마다 권하고 다녔는데 제대로 헤아려 보질 못했네. 몸이 이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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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적 폭력 비판 - 자기 자신을 설명하기
주디스 버틀러 지음, 양효실 옮김 / 인간사랑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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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문은 알튀세르에서 시작된다.

 그러니까 그를 절망케 했던 것. 바로 체자레 보르지아의 운명.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의 모델이기도 한 그는 오래도록 분열되어 있었던 이탈리아의 통일이라는 위업을 바로 목전에 두고 병마로 쓰러진다. 그리고 그 우연히 걸린 병 때문에 이탈리아 통일이라는 거대한 역사적 흐름은 그대로 좌절되고 만다. "어떻게 이럴수가! 이토록이나 위대한 역사가 한낱 병마 따위에!" 마키아벨리는 진심으로 아파했다. 알튀세르에게도 이건 충격이었다. 그가 믿고 있던 마르크스의 역사 법칙이 한 순간에 무너지는 것이었으니까. 마르크스는 말한다. 역사란 필연적으로 법칙을 따른다고. 그렇게 인류의 역사는 지금의 자본주의에 이르기까지 원시공산제로부터 필연적으로 발전해왔으며 그와 똑같이 공산주의 사회로 필연적으로 다다르게 될 것이라고. 하지만 체자레의 사건은 전혀 다른 걸 보여주었다. 병마와 같은 작은 우연이 거대한 역사적 필연마저도 거꾸러뜨릴 수 있음을. 그래서 그는 마르크스의 유물론적 역사관을 수정하기에 이른다. 저 고대 그리스의 루크레티우스를 따라 우발성의 유물론을 정초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제 질문이다. 역사란 과연 우연일까? 필연일까?

 어떤 이들은 이게 동전의 양면이라고 말한다. 채무자를 기다리고 있는 채권자를 생각해보자. 그 채권자는 채무자가 몇 시에 어디를 통해 집으로 오는지 훤하게 알고 있었고 그래서 골목 한 모퉁이에서 가만히 그 채무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채무자는 채권자가 그정도까지 알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고 그 날도 여느날과 다름없이 홀가분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느닷없이 꺾어진 골목에서 채권자가 기다렸다는 듯이 나타나는게 아닌가!  채무자에게 이 채권자의 출현은 느닷없이 당한, 우연의 횡액이겠지만 채권자에겐 아니다. 채무자의 출현은 필연인 것이다. 뭐, 우연과 필연은 보기 나름이라고 편하게 정리내릴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이렇게만은 이야기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것이 우연인지 필연인지를 정확히 가늠할 수 있는 것은 신(神)적 인식으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만한 인식을 가지지 못한 보통의 우리로서는 무엇이 우연이고 또 무엇이 필연인지를 분명히 구분할 수 있다. 알튀세르도 바로 그 수준에서 우발성의 유물론을 이야기한다. 이 알튀세르의 이론을 진지하게 받아들여 하나의 사회 이론으로 정립한 이들이 있으니 그들이 바로 에르네스토 라클라우와 상탈 무페다. 그 둘은 우연적으로 결정되는 것과 그람시의 헤게모니론을 받아들여 한 권의 책을 썼는데 그것이 바로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 이었다. 이는 보편적이며 필연적인 것에 바탕을 둔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중대한 수정이었다. 하부에 의한 결정이 아니라 상부에 의한 구성이 더욱 강력하며 그렇게 헤게모니 또한 얼마든지 우연히 변화될 수 있다고 보았다. 말하자면 그들에 의해 알튀세르로 부터 제기되었던 '우연성'이 보다 더 부각되게 된 것이다. 이제 그들은 중요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이렇게 우연성이 넘쳐난다면 보편성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건 과연 정립 가능한 것인가?

 

 아시다시피, 포스트모던은 보편성을 부셨다. 거대 서사의 종말. 그렇게 그것은 지역적인 것, 특수적인 것에 특권을 부여했다. 포스트 모던이 나왔을 때 부터 그것이 소비지상주의를 떠받치고 보수를 강화하는 쪽으로 흐르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는 목소리들은 있었다. 그 예언은 맞아 떨어졌고 포스트 모던은 2008년의 서브프라임이 일으킨 금융 공황과 더불어 침몰하고 있는 중이다.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샴페인을 성급하게 터뜨렸다. 아직 헤겔이 말한 역사의 종말은 도래하지 않았으며 이제는 다시금 '보편성'을 생각해야 할 시대가 온 것이다. 무엇보다 거대 서사의 종말이 가져온 지금의 모습을 보라. 사무엘 헌팅턴의 예언대로 갈수록 인종주의, 부자와 빈자간의 대립은 격해지고 있다. 이제까지 그들을 제어해주던 최소한의 이념적 틀마저 사라졌기 때문이다. 미국은 미국대로 패권을 유지하려 하고 중국은 중국대로 자신이 패권국가가 되려하며 일본은 일본대로 또다시 제2의 대동아공영을 부르짖을 준비를 하고 있다. 서로가 합의하에 공생의 길을 도모하는 '보편성'이 시급히 요청되는 시기인 것이다.

 

 최근의 철학적 흐름 가운데 하나는 바로 이러한 보편성을 정초시키는데 있으며 주디스 버틀러는 그 흐름의 대표적인 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이미 국내에 소개된 그녀의 주저 '젠더 트러블'에서 보여주듯이 그녀는 성적 정체성을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구성되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렇게 그녀는 우연적인 것을 포용한다. '과정 중의 형성' 그것이 핵심이다. 바로 거기에 맞처 그녀는 '보편성'을 정립하는 것도 탐색하고 있는데 이번에 나온 '윤리적 폭력 비판'은 바로 이러한 구성주의적인 것을 '나'라는 주체성 확립에 연결지어 탐색한 것이다. '윤리적 폭력 비판'의 원래 제목은 'GIVING AN ACCOUNT OF ONESELF'다직역하자면 '자기 자신을 설명하기'라고 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 제목 자체가 이 책에서 주디스 버틀러가 하려는 것을 집약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왜 자기 자신을 설명하는 것에 천착하는 것일까? 그건 '보편성의 정립'을 염두에 두면 쉽게 답이 나온다. 보편성의 정립이란 쉽게 비유하자면 일종의 대화와 같다. 그렇다면 대화가 이루어지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출발점은? 물론 그건 자기 소개다. 그렇게 자신을 설명하는 것이다. 의례적 만남이든, 사교적 만남이든 모든 만남에는 필연적으로 타인에게 나 자신을 설명하는 과정이 뒤따르게 된다. 그래야 서로 이해의 차원으로 다가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서로 이해의 차원을 '보편성'이라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나 자신을 설명한다는 것은 상대방과의 상호 보편성을 정초하는 데 있어 필요한 기초 작업인 셈이다. 보다 원활한 상호 이해가 가능한 가급적 투명한 보편성을 가져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그 시작이 되는 '나 자신에 대해 설명하기'가 잘 이루어져야 한다. 때문에 그녀는 천착하는 것이다.

 

 여기서 뒤따르기 쉬운 하나의 오해.

 '나 자신을 설명한다'고 했을때 우리가 과연 설명하는 '나'란 고정적인 것일까, 우연적인 것일까?

아마도 고정적인 나일 것이라 생각하시는 분이 많으실 것이다. 하지만 아니다. 주디스 버틀러는 모두 3부에 걸쳐서 나 자신에 대해 말한다는 것이 정말 어떤 의미인가 말하고 있는데 그 중 1부의 이야기가 바로 내가 말하는 '나'라는 게 내가 익히 경험했고 알고 있는 나는 아닌 것임을 보여주는데 있다. 그러니까 우리가 우리 자신을 설명할 때 우리의 진실된 모습을 설명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보다 정확히는 그 설명하는 순간 우리는 만들어지고 바로 그 과정중에 형성된 우리 자신을 설명할 뿐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늘 가지고 있었던 자아를 그 설명의 순간 '쨘!'하고 드러내는게 아니라 오히려 그 설명을 통해 정의를 얻지 못했던 우리의 자아가 그제서야 비로소 명확해지는 것이다. 즉 우리의 정체성이란 바로 그 설명의 순간 형성되어진다. 이것이 바로 1부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핵심이다. 그렇게 우리의 정체성이란 고정 불변의 자아가 아니라 나 자신에 대해 발화하는 순간 다양하게 가변화되는 우연의 존재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 스스로는 우리를 꽤나 고정 불변적인 것으로 여긴다. 누구나 다 '나는 이러이러한 사람이야.'라고 생각하고 있듯이.

 

 혹시 궁금하게 여기진 않았는지?

 왜 우리는 우리가 가진 존재의 가능성을 이토록 협소하게 이해하고 있는지?

 

 주디스 버틀러는 그 까닭을 밝혀준다.

 바로 거기서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윤리적 폭력 비판'이 들어온다. 칸트의 '비판' 시리즈를 오마쥬하고 있는 듯 보이는 이것은 2부 '윤리적 폭력에 대항해서'에서 상세히 설명되고 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 말 좀 이상하다. 윤리와 폭력이 어떻게 결합될 수 있을까? 윤리란 원래 서로 간의 폭력을 없애기 위해 사람들 사이의 약속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던가? 그런데 주디스 버틀러는 그러한 윤리가 우리에게 폭력적으로 작용한다고 말한다. 때문에 2장의 제목은 '윤리적 폭력에 대항해서'인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말하는 윤리란 도대체 무엇일까? 그리고 그것은 또 어떻게 해서 우리에게 폭력적이 되는 것일까?

 

 이걸 알려면 다시 나 자신을 설명하는 순간으로 돌아가야 한다. 남에게 자신을 설명하는 순간을 다시 한 번 떠올려 보자. 그 때 우리의 의식은 어떻게 전개되는가? 과연 우리는 그 순간 우리 자신을 있는 그대로 설명할 수 있는가? 정말 투명하게 드러내는가? 아마도 아닐 것이다. 앞서도 말했듯, 우리는 우리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지 못한다. 일례로 사람들 사이에는 언제나 일정한 자기 소개의 규칙이 존재한다. 우리 자신을 설명하는 행위는 언제나 그 규칙을 따르게 되는 것이다. 내 자의대로 나 자신을 설명하지 못한다. 설령 자의대로 한다고 해도 상대방이 나에게 규칙에 따를 것을 요구한다. 할 수 없이 외부에 이미 존재하는 규칙이나 혹은 방식에 따라서 나 자신을 설명할 수 밖에 없다. 어떤 의미로 그것은 예의라고도 불리고 혹은 배려라고도 불린다. 이렇게 나 자신을 설명한다는 것은 외부의 규칙을 가져올 수 밖에 없다. 규칙 뿐만이 아니다. 나 자신을 설명하는 것 자체도 언제나 외부에 기댈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나 자신을 언어로 설명하는 그 순간, 나의 말들은 바로 탈취되어 내 삶에서 우러나온 담론이 아닌 타인에게 받아들여진 언어의 담론으로 즉각 변형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건 내가 속했던 시간이 아니고 타인이 속했던 시간 틀 위에서 새롭게 번역된다. 내 삶의 직접 경험이라는 터전 위에서가 아니라 그 타인이 살아온 삶의 경험적 틀 위에서 말이다. 즉 다시 말해서 우리가 아무리 서로에게 투명하게 나 자신을 설명한다고 해도 그것이 언어라는 또 문법이라는 혹은 예절이라는 외부적 형식을 빌려오는 한 마치 서로 다른 언어를 하는 사람들끼리 번역해서 듣는 것처럼 할 수 밖에 없다는 그런 의미다. 나는 일부러 언어 이외에 '문법'이라는 말을 썼는데 왜냐하면 이를 통해 강조하고 싶은 게 있기 때문이다. 그건 바로 문법에서 연상되어지는 '규범'의 존재를 나타내기 위해서다. 예절이라는 것도 그 규범의 존재를 강력하게 시사한다. 즉 우리에겐 서로가 소개하고 또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매개항으로써 '규범'이란 게 존재한다는 걸 말하고 싶은 것이다.

 

  자신을 설명하는 순간, 규범이 도래한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의 틀이 되어 나 자신을 거기에 맞추게 한다. 나는 다양하지만 정해진 규범의 틀은 마치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처럼 틀에 맞지 않는 걸 잘라낸다. 폭력적이다. 다양한 나는 규범이 허용하는 틀 내에서 협소해지고 앞서도 말했듯이 나 자신의 정체성은 그 발화의 순간 형성되는 것이기에 어느 순간 그것은 나의 모습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래서 나 자신 역시도 나라는 존재를 협소하고 고정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외부의 규볌이라는 윤리는 우리에게 폭력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주디스 버틀러는 이걸 니체를 들어 설명한다.

  니체는 우리가 나 자신에 대해 설명하는 것이 무엇보다 사법적 체계로 부터 비롯된 것이라 말한다. 즉 타인에게 상해를 입혔을 때, 자신에겐 전혀 그런 고의가 없었음을 스스로 입증하던 것에서 나 자신을 설명하는 것이 나왔다는 것이다. 니체의 이말은 우리가 알고 있는 자아가 온전히 있는 그대로의 자아가 아니라 외부에 의해 강제적으로 형성된 것임을, 그리고 그걸 그대로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인 것임을 강력히 시사한다. 왜냐하면 법정 앞에서 자신의 변호란 아무래도 있는 그대로의 나를 드러내기 보다는 남이 보다 잘 이해할 수 있는 나로 만드는데 더욱 초점을 맞추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애시당초 나를 설명한다는 것이 변호로 부터 출발했고 이제는 본질이 되었기에 우리는 앞에서 가해지는 윤리적 폭력 앞에서 일종의 자기 방어로써 나 자신을 협소한 것으로 그리고 고정 불변의 존재로 스스로 규정해왔던 것이다.

 

 결국 우리는 왜곡된 우리의 자화상을 진실인 것처럼 알고 살아가는 것이며 이런 왜곡된 상으로는 주디스 버틀러가 바라는 투명한 보편성을 정초할 수가 없다. 깨어진 거울로는 서로의 진정한 모습을 비출 수가 없는 것이다. 해서 우리는 윤리적 폭력에 대항해서 보다 온전히 나 자신을 드러내고 받아들일 수 있는 '설명하기'로 나아가야 한다. 그 탈주, 미끄러짐을 이야기 하는 것이 바로 제3부의 '책임'이다. 3부에 책임이 나오는 것에 대하여 의아해 할 분들이 계실지 몰라서 부언하자면 이는 어디까지나 나 자신에 대한 설명이 사법적 체계 아래에서 나왔다는 니체의 말과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책임이 등장하게 된 것이 바로 법 때문이었기 때문이다. 근대에 들어와 인간 개인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형벌 또한 중세처럼 연좌제가 아니라 오로지 그 개인에게 돌릴 수 있는 것만 내리게 되었다. 그렇게 개인에게 그 처벌을 감당해야 할 이유로써 '책임'이라는 게 대두되었던 것이다. 한 마디로 책임이란 '나의 나-됨'의 완성이다. 주디스 버틀러는 책임을 이렇게 설명한다.

 

 자신을 책임진다는 것은 자기-이해의 모든 한계를 시인하고, 이 한계를 주체의 조건으로서뿐 아니라 인간 공동체의 곤궁으로서도 확립한다는 것이다(p.146)

 

 '책임'은 나를 설명하고 그 와중에 나를 만들어가는 것의 종착역이다. 거기서 나라는 상은 만들어지는데 왜 주디스 버틀러는 이것을 마지막 장으로 불러온 것일까? 그건 바로 나라는 상(像)의 확립과 관계가 있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과정의 진실된 정체를 밝히는 것. 책임이란 우리가 바라보는 우리 자아의 확정된 모습인데 과연 그것은 있는 그대로의 우리 모습인걸까? 주디스 버틀러는 정신분석학자 라플랑슈와 푸코의 고백 이론을 들어 이 확정된 자아의 상을 남김없이 때려 부순다. 실로 그런 건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다고 말이다.

 

 놀라운 건 라플랑슈의 이론이다. 그는 우리가 우리 자아의 모습을 형성하는 유아기 때부터 아예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아니라 타자에 호응해서 자아를 만들어간다고 단언한다. 쉽게 말하면 나라는 자아는 나 자신의 뜻대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반응에 따라 형성된 것이며 그 상호 조정의 결과라는 것이다. 그렇게 타자가 우리 내부에 원초적으로 깊숙이 들어와서 우리 자아의 형성까지 주관했다는 것이 라플랑슈의 주장이다. 그러므로 법이 네가 누구냐 물었을 때 비로서 나 자신이 태어났다는 니체의 말과도 같이  애초부터 우리에게 진정한 나의 모습이란 없는 것이다. 있다면 그동안 수많은 타자들과의 상호 작용 속에서 그때 그때따라 맞춰가며 형성된 '나'가 있을 뿐. 푸코의 고백에 대한 이론은 이를 더욱 증명한다. 푸코는 고백이 내면의 진실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바로 그 고백을 통해서 내면의 진실이 형성되는 것이라 말한다. 즉 고백은 자신의 자아를 형성해가는 하나의 육체적 실천인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푸코는 고백을 통한 우리의 자아 표현이 '자신의 내면성을 용해시키고 자아의 외면성 속에서 자신을 재구성'하는 것이라 말한다. 이는 그대로 애초부터 타자에 의해 우리의 자아란 게 형성되어왔다는 라플랑슈의 이론과 그대로 이어진다.

 

 이렇게 라플랑슈도, 푸코도 우리의 자아란 고정된 것이 아니라 타인에 의해 그 때 그 때에 따라 변형되고 수정되어 왔음을 보여준다. 말하자면 지금 우리가 진실이라 알고 있는 모습 또한 내 삶의 어느 순간 타인과의 어떤 계기로 굳어진 것에 불과하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책임'이 '꽝!'하고 도장을 찍는 것과 같은 확정된 자아란 게 있을 수 있는가? 그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라플랑슈와 푸코 그리고 레비나스의 이론을 인용하면서 주디스 버틀러가 '책임'의 장에서 주장하는 건, 나 자신이란 건 부단히 형성되는 존재라는 것이다. 즉 나는 어떤 시점에 일의적으로 규정될 수 없고 마치 파인만의 경로처럼 무한히 가변될 수 있는 존재라고 말이다. '나 자신을 확실히 설명한다는 건 영원히 불가능할 노력'이라고 푸코가 말했듯이.

 

 주디스 버틀러는 나라는 존재가 이렇게 늘 수정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존재의 모든 부분이 수정 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이렇게 모든 변화와 수정에 열려있는 존재로 여기는 것이 보다 투명한 보편성을 위한 소중한 첫걸음이라고 여긴다. 왜냐하면 나를 이렇게 받아들여야만 되도록 윤리적 폭력으로 부터 비껴나서 보다 허심탄회하게 상대방에게 귀기울일 수 있기 때문이다. 나의 나-됨을 고집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무엇보다 상호 타협을 위한 첫 계단이니까 말이다. 결국 여기에서 드러나는 건 나 자신을 설명한다는 게 진짜 어떤 의미냐는 것이다. 그건 우리가 얼른 이 말에서 생각했듯이 나의 '나-됨'을 남에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진실은 그만큼 나를 더 허물고 타인에게 여는 행위라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설명한다는 것은 내 안에 여백을 만드는 일이다. 혹은 더 많은 귀를 가지는 일이다. 나를 비우고 다시금 타인을 포용하면서 새로이 나를 만들어 가는 것. 그것이 바로 나를 설명한다는 것의 진정한 모습이다.

 

 들으려는 귀는 없고, 말하려는 입만 많은 요즘. 주디스 버틀러의 이와 같은 주장이 소중히 여겨지는 것이 과연 나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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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 What? - 삶의 의미를 건저 올리는 궁극의 질문
마크 쿨란스키 지음, 박중서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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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이름은 마크 쿨란스키이다. 

그는 미국인이고 버클리대 연극과가 학위의 전부라고 말한다면, 이미 그의 전작 '대구'와 '소금'을 읽어본 이라면 의아하게 생각한다.
"뭐야, 역사학자 아니었어?"하고...

'대구'면 '대구'(물론 여기의 대구는 절대 지명이 아니다. 미국인 마크 쿨란스키가 알지도 못하는 한국의 도시에 대하여 쓸 리는 없지 않은가? 당연히 생선 이름이다.)
'소금'이면 '소금'
천착하는 하나의 사물에 관해서라면 상세한 미시사를 복원해 준 작가라 역사과가 아니라 연극과를 나왔다는 사실이 뜻밗으로 다가올 수 밖에 없다.
그런데 또 한 편으론 수긍이 가기도 한다. '대구'면 '대구', '소금'이면 '소금'이 그런 미시사에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이 읽어도 푹 빠져서 읽을만큼 아주 재밌기 때문이다. 그의 책에는 뭔가 독특한 재미가 있는데 과연 연극과를 나왔기에 그런 맛을 우려낼 수 있는 것이구나 생각하게 된다.

 아무튼 알 사람은 다 알고 모르는 사람은 모르는, 그러면서도 일단 만나게 되면 그의 다음 책을 기다릴 수 밖에 없는 이가 마크 쿨란스키다.

 자, 환영한다!
 드디어 그의 새로운 책이 나왔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제목은 한 단어! '무엇'을 뜻하는 'WHAT?'이다.


역시나 독특하다.
이 책은 오로지 물음표로 끝나는, 그렇게 질문으로만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질문은 누가 봐도 질문인데, 어떤 질문을 보는 순간에 그게 질문이란 걸 알 수 있다고 하면, 이미 그 글 안에 질문이 들어 있는데도, 즉 질문이 이미 거기 있는데도 왜 굳이 거기에 물음표를 붙이는 것일까? 내가 느낌표에 대해 항상 느껴왔던 감정도 이런 것이 아닌가?! (P. 19)

마크 쿨란스키가 뽑은 인류 역사상 가장 중요한 20가지 질문에 대하여 한 챕터씩 할애하여 말하고 있는 책은 위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정말로 모조리 질문으로만 이루어져 있다. 예외는 없다!

 차례마저 이렇다.


  이런 식으로 이 책에는 모두 770개의 물음표가 있다.
  그 중 두 개는 이렇게 책의 앞 표지와 뒷 표지에 있다.
 더스트 커버를 벗기면 양장본 표지에 이렇게 어릴 때 많이 본 번호따라 선 긋기가 나오는데,


 그걸 선으로 이은 그림은 뒷 표지에 나와 있다.



 이렇게 말이다.
역시나 마크 쿨란스키! 책을 재밌게 만들 줄 안다.
이 그림은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니다. 자세히 보면 점이 모두 20개인 것을 알 수 있는데 그건 이 책에 실려있는 중요한 질문의 숫자와도 같다. 그렇게 이 그림은 그 같은 질문들이 모두 하나의 질문으로 연결될 수 있으리라 말한다. 이를테면 삶에 대한 궁극적인 질문 같은 것으로...

 아무튼 신기하게도, 문장이 모두 물음표로만 이루어져 있는데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오히려 새로워서 더욱 문장에 집중하게 되는 것 같다. 마크 쿨란스키의 이번 책은 수 많은 질문 속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물음표는 언제나 원심력의 기호이다.
하나의 의미, 하나의 정답에 안주하기 보단 밖으로, 저 아무 것도 없는 벌판으로 밀어낸다. 그 곳에서 우리는 지금까지 의지하고 있던 모든 것을 버리고 순수하게 헐벗은 상태에서 다시 자신만의 해답을 찾아야 한다. 물음표는 유목의 기호이고 방랑의 기호이다. 고인 물은 썩고 흐르는 물은 늘 새롭다. 물음표는 흐름의 기호이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물어야 한다. 마침표가 주는 중력에서 기꺼이 벗어나 물음표가 주는 무중력의 세계로 뛰어들어야 한다.
해답을 거부하고 질문을 제기하는 것. 그렇게 정답이 정해주는 너의 이야기가 아닌 물음표로 새롭게 만들어가는 나의 이야기로 채우는 것.
 그것이 어쩌면 이 책의 제목이자 가장 커다란 물음표인 'WHAT?'에 대한 대답인지도 모른다.

 홍상수의 영화 '극장전'에서 주인공의 마지막 대사는 이것이었다.
 "생각해야 해! 생각만이 날 살릴 수 있어!"

한나 아렌트에게 사유는 구원이었다. 그것은 악마가 되지 않게 만드는 유일한 십자가였다.
생각한다는 건, 사유한다는 것은 결국 질문을 하는 것이다. 끊임없이 묻고 또 되묻는 것.

 훌륭한 질문자의 상당수가 고대 문명에서 나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우리는 훌륭한 질문을 던지는 능력을 점차 잃어버리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지식이 질문으로 시작된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것일까? 거의 모든 것을 최초로 발명했다고 주장하는 중국인들이 훌륭한 질문을 던졌었다는 사실이 과연 놀랄만한 일인가? (P.80)

 마크 쿨란스키의 말대로 현대는 질문을 싫어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정답을 말해 줄 수 없는 질문을 하는 것을 싫어한다. 실제적으로 유용하지 않은 것을 두고 하는 질문을 싫어한다. 어른들은 아이들의 질문을 귀찮게 여기고 상급자는 하급자의 당연한 의문마저 반항으로 생각한다. 권력자는 국민의 질문을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여긴다.

 질문을 못하게 하는 것이 권력 크기의 척도가 되고, 질문을 안하는 것을 안정이라고 여기는 사회는 이미 죽었다.
생명은 언제나 질문에서 온다. 물음표는 늘 새로운 호흡으로 숨을 쉬는 시간을 창조한다.

 마크 쿨란스키의 '무엇 WHAT?'은 그러한 시간의 결정같은 것이며, 이 책에 담겨 있는 770개의 물음표는 언제는 그런 시간을 가져다 줄 것이다. 카이로스의 비둘기들...

 ONE MORE!


 이 책의 각 챕터는 하나의 의문문과 함께 마크 쿨란스키가 직접 그린 판화들로 시작된다.
아래는 그 중 몇 개를 발췌한 것이다. 이런 그림까지 어우러져 있어 더욱 읽을 맛이 났던 책이었다.
작고 가벼워 휴대하기 좋다는 장점까지 있어 어디서든 이 질문을 시작으로 사유의 시간들을 가져볼 수 있을 듯 하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후후, 왠지 표지의 물음표가 무언가를 연상시켜
(차마 입밖에 낼 수 없는 그 무엇이다^ ^)
한 번 유머 삼아 연출해 본 것...
마크 쿨란스키의 책이라면 이런 장난도 어쩐지 어울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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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은 밥이다 - 매일 힘이 되는 진짜 공부
김경집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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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엇보다 638페이지의 두툼한 부피감으로 날 압도하는 김경집의 '인문학은 밥이다'는 선언과도 같은 제목에서 은근히 암시되듯이 그야말로 '인문학 입문의 결정판'과도 같은 책이다. 일단 목차로 들어가보면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실감할 수 있을텐데, 인문학의 텃밭과 다름없는 철학이나 종교, 역사나 문학 뿐만 아니라 다른 인문학 입문서에서는 잘 나오지 않는 미술이나 음악, 정치와 경제 그리고 환경과 젠더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우리가 실생활에서 접해볼 수 있는 모든 분야를 인문학이라는 필터로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이 책을 보게 된 건, 무엇보다 저자에 대한 신뢰가 있어서다.


책으로서는 두 번째 만남인 이 저자는 일전에 '눈 먼 종교를 위한 인문학'으로 만나본 적이 있는데, 지금 무엇보다 왜곡되고 어긋나버린 기독교의 복음에 대해 인문학적 성찰을 바탕으로 객관적인 검증에 나섰던 그 책은 예전부터 비슷한 의문과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내게 그야말로 오랜 갈증이 해갈되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해 주었다. 그랬던 저자이기에 내게 깊은 인상을 남길 수 밖에 없었고 그의 이름으로 나온 이 책에 선뜻 손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책을 읽게되면 속표지에 나오는 지은이 소개글부터 읽게 되길 바란다. 그걸 읽어보면 어떻게 이 책이 나왔으며 이런 책이 가능했던가를 이해할 수 있다. 인용해보자면 이렇다.


 서른 살 무렵에 25년은 배우고 25년은 가르치며 25년은 마음껏 책 읽고 글쓰며 문화운동에 뜻을 두고 살겠다고 마음먹었고, 두 번째 25년을 마친 뒤 미련없이 학교를 떠나 지금은 충청남도 해미에 있는 작업실 '수연재'에서 '나무처럼 사는' 바람을 품고 살고 있다.


 읽었을 때, 참 멋있지 않은가 생각했다.

 아마 나도 언젠가는 미련없이 오늘의 모습과 결별하고 원하는 대로 읽고 쓰면서 살고 싶다라는 같은 바람을 가지고 있어서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마음은 그리 품었어도 안정되고 미래가 보장된 삶에서 훌쩍 벗어나 아무 것도 자라지 않는 황야와도 같은 불안한 미래 속으로 자신을 던지는 것은 그리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이 작가는 과감히 실천했고 보란듯이 자신이 원했던 삶에 천착하고 있으니 부럽기도 하고 자신의 말엔 확실히 책임지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 더욱 믿음직스럽기도 하도 그렇다. 아무튼 '인문학은 밥이다'는 그러한 그의 결심과 실천 때문에 나올 수 있었고 또 그만한 각오와 내력이 스며있었기에 이 같은 분량과 전 분야를 아우르는 넓은 망라가 가능했던 것 같다.


 대저 두께와 내용의 질은 반비례 한다는 속설이 있지만 이 책만큼은 그렇지 않다. 전 분야를 인문학이라는 필터로 아우르면서도 내용이 무너지거나 전개가 산만하다거나 하는 일 없이 꼭 있어야 하고 필요한 말만이 담겨져 있는데, 이렇게 핵심이 되는 줄기를 돋우고 그에 따른 교통 정리가 잘 될 수 있었던 이유도 그에게 오랜 세월에 걸친 경험의 내공이 쌓여져 있는 탓이 아닌가 한다. 이 책 마지막에 실린 작가의 글을 보면 25년간 자신이 학교에서 어떻게 학생들에게 인문학을 가르쳤는지 나와 있는데, '인간학'이라는 강의의 성격상 학교의 전 전공을 상대해야 했던 그는 무엇보다 먼저 수강하는 학생들의 전공에 맞춰 자신의 강의 방법을 수정해 나갔다. 즉 이공계 학생들에게 인문학을 강의할 때는 이공계 지식과 연계했고 음악과 학생들에겐 또 음악적 지식과 연계해 설명하는 식으로 해 나갔던 것이다. 그렇게 그는 오랜 세월 인문학이라는 어떤 고정된 경계를 고수하기 보다는 강의 할 때마다 학생들 눈높이에 맞춰 과감히 다른 분야로 경계를 넘나드는. 소위 말하는 '통섭'을 실천해 온 것이었다. 이 책이 널리 아우르면서도 꽉 찬 중량감을 지닐 수 있었던 것도 그 덕분이었다.


 그렇다고 이 책이 난해하다거나 그런 건 아니다. 무엇보다 이 책은 입문서다. 그러니 초심자를 부담스럽게 만드는 내용은 나오지 않는다. 이 책이 무엇보다 독자들에게 주고자 하는 건 '접속'의 경험 이다. 자본주의가 확립된 뒤로 자본주의에 특유한 생산 방식인 '분업' 또한 세계 곳곳으로 뻗어나가면서 점차 지배적 생산 형태로 자리잡게 되었는데 문제는 그에 그치지 않고 학문 세계에까지 영향을 줘버린 것이었다. 원래 플라톤이 말했듯이 학문이란 나뉨이 없는 것인데 그 분업의 영향 때문에 학문은 지나치게 갈라지고 세분화되어서 덕택에 이전에 없었던 각종 학문들이 생겨났지만 서로간에 소통은 없는 상황이 닥쳐오고 말았다. 그래서 서로가 저마다 쌓아올린 상아탑에 갇혀 나홀로 떠드는 아우성만 있을 뿐, 서로 협력하기 보다는 그저 타인의 몰이해를 탓하며 비난과 공격만을 일삼아 함께 했다면 더욱 발전했었을 학문은 소통 부재와 분쟁에 그만 발목을 잡혀 정체의 늪에 빠지고 말았다. 학문을 이 같은 늪에서 구해내고자 일찌기 많은 학자들은 학문 서로간의 소통을 호소했는데 바로 김경집의 이 책 역시 그러한 입장 위에 서있다.


 이 책이 전 분야를 망라하게 된 진짜 이유도 거기에 있다. 인문학이 지금까지 사람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좁은 영역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보다 널리, 다양한 분야와 상호 교류하면서 '2인 3각' 경기를 하는 사람들처럼 서로 도와가며 같이 보조를 맞춰나가는 것임을 보여주기 위해서인 것이다. 그에 따르면 삶은 인간에게 무엇보다 하나의 총체적 경험으로 다가오는데 세분화된 학문들은 저마다 자신들의 특유한 학문적 경험만을 내세울 뿐으로 그리하여 살아가는데 현실적 도움은 주지 못한다고 한다. 학문은 결코 상아탑에 머무르는 지식이 되어서는 안되며 어디까지나 실제 삶에 유익함을 주어야 제대로 된 학문이라 믿는 저자는 때문에 학문이 진정 진짜 삶에 유익함을 줄 수 있게 만드려면 무엇보다 그 총체적 경험을 포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인문학이 무엇보다 인간학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나는 인간학은 인문학이며 동시에 인문학은 인간학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단순히 학문적인 지식과 정보를 습득하고 교양을 함양하는 데에 그쳐서는 안 된다. 인문학을 통해 배운 것들을 자신의 삶에 적용할 수 있어야 하고, 일상의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데 인문학으로 유연해진 사고방식의 덕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인문학은 궁극적으로 삶에 대한 반성적 성찰이며, 인간에 대한 보편적 가치의 회복이다. 이를 깨우쳐 인격의 도야로 나아가는 것이 바로 인문학이다.(P. 636 ~ 637)


 말하자면 이 책은 지은이의 이 같은 신념을 하나의 책이라는 물리적 경험으로써 독자들에게 선사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실제 삶과 유리되지 않는 학문, 그냥 공허한 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인격 향상에도 도움이 되는 학문, 바로 그 인간과 세계 모두에게 지하에 있어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사실은 모든 수목과 동물들에게 생명의 젖줄이 되고 있는 '지하수'처럼 끊임없이 생명을 공급하는 인문학이란 어떤 모습인지 보이는 것이다. 입문서라는 한계 때문에 세밀한 붓터치가 아니라 대략적인 스케치에 그치고 만다는 게 참 아쉽긴 하지만 말이다.


 아무튼 우리는 이 책을 통해 인문학의 진정한 모습은 어떤 것인가 체감해 볼 수 있다. 각 분야와 씨줄과 날줄처럼 얽힌 인문학의 모습을 보는 건 이 책을 통해 얻게 되는 덤이고 우리가 진짜 깨닫는 것은 지식은 결코 삶과 그리고 인격과 분리되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이다. 요즘 우리 사회에서는 우리를 참으로 실망시키는 지식인들이 많다. 판사나 의사, 변호사들이 여성들의 민감한 신체 부위를 몰카로 찍는가 하면 유명 대학의 교수씩이나 하는 분들이 지켜야 할 자신의 학문적 신념을 배신하면서까지 정치권과 야합하기도 하고 장관 후보자들은 마치 필수 경력이기라도 하듯 위장전입이나 탈세와 같은 범법의 전력들이 꼭 하나씩은 있다. 그런 걸 볼 때마다 지식이라는 건 그저 돈벌이 수단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인상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이것도 다 지식이 삶이나 인격과 유리되어 있다라는 생각이 팽배해 있는 탓이 아닐까. 여성학자 조여정이 쓴 '글 읽기와 삶 읽기'라는 책이 있다. 시리즈인데, 그 2권을 보면 우리가 치뤘던 도덕 시험 사례를 통하여 우리가 어떻게 지식이 삶 그리고 인격과 분리된 경험을 고착화시켰는지 설명하는 부분이 나온다. 예를 들어보자면 흔히들 많이 치뤘던 'O, X' 시험을 통해서다. 그러니까 착한 일을 한 사람에게 'O'표 하시오.', 혹은 '나쁜 사람에게 'X'표 하시오.' 같은 것들. 그렇게 우리는아주 어릴 때 부터 삶에서 꼭 지켜야 하는 윤리마저 자세한 설명과 실제 경험으로서 알기 보다는 그저 암기라는 주입된 형태로 학습했고 바로 그 때문에 자신이 알고 있는 윤리를 태연히 위반하는데도 전혀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는 '머리 따로, 몸 따로'의 프랑켄쉬타인이 되고 만 것이다.


 어쩌면 오늘날 우리를 가장 힘들게 만드는 것의 근본 원인도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 이른바 드라마 속의 현빈이 말하는 대로 '사회지도층'이라는 인사들이 자신이 배운대로, 익힌대로만 행동해주었더라도 지금 우리가 받고 있는 스트레스의 8할은 줄어들었을 것 같은데 말이다. 정말로 예외가 되어도 아무런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는, 전혀 자신이 잘못하지 않았다는 그 태도에 우리의 비극이 있는 것 같다. 비온 뒤 담쟁이 넝쿨처럼 죽죽 자라나는 그 태도를 더 이상 수수방관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이 책을 벗할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이 책은 제목 그대로 인문학이 밥과도 같이 우리 삶에 실제로 아주 많이 도움이 되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나왔지만 우리가 정말 여기서 캐내어야 하는 보석은 결코 지식이 삶과 인격과 분리될 수 없다는 신념이 아닐까 한다. 그러고보니 인류 역사상 모든 현인들은 무엇보다 현인의 덕목을 '지행일치(知行一致)'를 삼았다. 오래 살아남은 옛말치고 틀린 말 없다는 생각을 다시 한 번 하게 된다. 요즘은 많은 사람들이 비웃고 있는 말이긴 하지만. 바로 그 비웃음 속에 우리의 비극마저 잉태되어 있음을 한시바삐 깨달아야 할 것 같다. 이 책을 당장 읽어서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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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프래질 - 불확실성과 충격을 성장으로 이끄는 힘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 지음, 안세민 옮김 / 와이즈베리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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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때로 어떤 책은 진실로 기존의 상식을 완전히 뒤엎어 버리기도 한다. 그런 책을 만났다. 나심 탈레브의 '안티프래질'이 바로 그 책이다. 이 책은 가히 전복적이다. 기존에 가지고 있었던 우리의 생각을 완전히 뒤집어 버린다는 뜻이다. 무엇을 뒤집느냐고? 단순히 말하자면 '예측'에 대한 것이다. 우리들이 상식으로 받아들인 것이 있다. '예측할 수 있다는 건 좋은 것이고 예측 할 수 없다는 것은 나쁜 것'이라는 생각이다. 이건 인류가 가진 보편화된 믿음이기도 하였다. 그 때문에 경제학이 발달하고 사회과학이 발달하고 통계학이 발달했다. 단순히 말해 이 학문들은 왜 존재하고 이토록 성장했는가 하면 보다 잘 예측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우리의 머리를 어지럽게 만든 그 숱한 이론들도 왜 생겨났던가? 따지고 보자면 좀 더 잘 예측하기 위해서였다. 이론의 이름으로, 법칙의 이름으로 때로는 기법의 이름으로 참 다양하게도 나타났지만 목적은 하나였다. 미래를 잘 예측해서 리스크를 가급적 방지하고자 함이었다. '오오! 찬양 받으라! 예측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야 말로 우리의 구원일지니!' 그 많은 이론들은 이런 찬송가와도 같다. 지금까지의 이론들은, 학자들은 저마다 솜씨가 좋은 예언자가 되기를 원했다. 세상은 원래 정해진 법칙 대로 질서 정연하게 움직이는 법이거늘 우리가 제대로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이 아직 발견해내지 못한 'MISSING LINK' 탓으로만 여겼다. 정말로 세계는 기하학적인가? 그렇게 선형적인가? 아니라고 반박하는 사람이 있다. 그의 이름이 바로 나심 탈레브이다.(니콜라스까지 쓰기에는 이름이 너무 길어서 이렇게 부르기로 한다.) 그는 말한다. 세계는 선형적인 것이 아니라고. 절대적으로 비선형적이라고! 이 말은 곧 세계는 '1+1=2' 처럼 움직이지 않으며 '1+1= 1/2로도 나타난다는 의미다. 쉽게 말해서, 비선형이란 당신이 약 복용량을 두 배로 늘리거나 공장 종업원 수를 두 배로 늘리더라도 원래 기대했던 대로 두 배의 효과를 얻지 못한다는 걸 말한다. , 세계의 본질은 완전히 예측 불허라는 것이다.

 

  '그런데, 예측을 잘 하겠다고? 천만에! 그건 절대 불가능이야. 오히려 그런 식의 인위적인 개입들이 더욱 우리를 힘든게 만드는 걸 알랑가몰라?'

 이게 나심 탈레브의 예측 가능성을 십계명처럼 절대적으로 신봉하는 자들에게 던지는 돌직구다. 한 마디로 너네들은 엉터리라는 말이다. 이런 예측 가능성의 신화는 주로 근대 이후 서구 사회를 양분화했던 소련과 미국의 엘리트들에 의해 주도되었기 때문에 나심 탈레브는 양 진영의 가장 최고 대학의 이름을 빌어 '소비에트-하버드 환상'이라 부른다.

 

  그러나 기죽어 있을 그들이 아니다. 예측 가능성을 신봉하는 자들은 나심 탈레브에게 말한다. "뻥까시네!"라고. 그러자 나심 탈레브는 이렇게 되받아친다. "뻥이 아냐. 그렇다면 내가 제대로 보여주겠어!"

  그 말대로 한 권의 책을 낸다. 정말 얼마나 작심했던지 페이지 수만 해도 '찾아보기'까지 합해서 무려 754 쪽에 이른다. 그야말로 방대하다. 두께 자체가 마치 '어이, 예측 가능성의 쫄다꾸들, 난 이정도로 내 말에 대해 논리와 근거를 제시할 수 있는데 어디 너네 카드들도 한 번 까 봐! 정말로 진검승부 한 번 펼쳐보자구! 쫄리면 뒤지시든가!"라고 말하는 듯하다. 그렇게 손만 대면 베일 것처럼 날카롭게 벼리된 나심 탈레브가 만든 회심의 검이 바로 '안티프래질'이란 책이다. 그에 따르면 그 자신 가장 사랑하는 책이라고 한다.

 

 한 마디로 '안티프래질'은 '소비에트-하버드 환상'을 깡그리 부수기 위해 태어났다. 왜냐하면 이러한 예측 가능성에 대한 과잉 신앙이 무엇보다도 2008년의 금융 위기를 불러왔기 때문이다. 그건 가장 대표적인 사건일 뿐이다. 나심 탈레브에 따르면 우리 세상엔 이 예측 가능성의 신봉이 가져오는 무수한 부작용이 있다. 사회가 원하는만큼 개선이 안되는 것도 예측 가능성에 대한 과잉 신앙으로 순리대로 흐르도록 놔두지 않고 자꾸만 이것저것 개입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도 해마다 여름이면 진한 녹조 라떼를 선물하는 4대강이 있지 않은가? 어쩌면 안티프래질 다음 개정판엔 전세계에 섣부른 개입에 대한 뜨거운 경고로 4대강이 등장할지도 모르겠다.  

 

 사실 2008년 금융 위기로 가장 덕을 많이 본 사람이 다름 아닌 나심 탈레브다. 그 전부터 유일하게 장차 커다란 금융 위기가 도래할 것이라 예측하며 잇달아 미국 경제에 경고했었기 때문이다. 과연 그의 예측 대로 금융 위기는 현실로 나타났고 예언이 실현되는 것 만큼 예언자에 대한 믿음을 확실하게 만드는 것도 없으니 나심 탈레브는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학자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사실 남의 비극을 밟고 행운을 거머쥔다는 게 다 그렇지만 그렇게 되기까지 그의 삶도 그리 순탄했던 건 아니다. 잇달아 미국 경제에 대해 날린 경고로 월 스트리트 저널은 나심 탈레브에게 지금 월가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으니 나심 탈레브는 행여나 암살되지 않도록 경호원을 둘 필요가 있는 것 같다고 지상으로 진지하게 충고해 오기도 했으니까 말이다. 나심 탈레브는 이 충고를 심각하게 받아들여 정말로 경호원을 둘 것인가를 고민했다고 한다. 그 결과 그가 하게 된 것이 스스로 체력을 증진시키는 웨이트 트레이닝이었다. 안티프래질의 핵심 개념은 바로 이 웨이트 트레이닝에서 나왔다. '안티프레질'을 위한 주요 방법론 중 하나로서 나오는 '바벨 효과'(성경에 나오는 바벨탑의 바벨이 아니라 운동할 때 드는 역기 비슷한 기구를 말한다.)는 바로 그 경험에서 나온 것이다.

 

 자꾸 '안티프래질', '안티프래질'하는데 그 뜻을 몰라 궁금하셨을 것이다. 그렇다고 '안티프래질'이 뭔지 알고 싶어서 일부러 영어 사전을 펼칠 필요는 없다. 쿡쿡. 실은 사전에 없는 말이다. 당연하다. 나심 탈레브가 직접 만들었으니까. 쉽게 말하면 '안티프래질'은 '깨지기 쉬운'을 뜻하는 fragile의 반대말이다. 하지만 영어엔 그 반대말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나심 탈레브가 직접 만들었는데 그것이 바로 'Antifragile'이다. "뭐야, 별 거 아니네. 뭣하러 일부러 말을 만든담? 그냥 설명해도 되잖아!" 아니다. 하나의 단어는 나심 탈레브에게 중요하다. 그 이유를 그는 책에서 그리스 문화에서는 오래도록 '블루'라는 말이 없었다는 것으로 설명한다. 그 옛날 호머가 '오딧세이아'를 썼을 때 파란 바다를 뭐라고 표현했는지 기억하시는지? '오디세이아'에는 참으로 바다가 많이 나오지만 호머는 '파란 바다'라고 쓰지 않았다. 정확히는 ' 어두운 와인 색의 바다'라고 표현했다. 왜? 호머가 색맹이라서? 아니다. 파란색을 나타내는 말이 고대 그리스에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 문화엔 딱 네 가지 색깔 밖에 없었다. 하얀색, 검은색 그리고 무지개의 애매한 색깔을 표현할 때 쓰는 빨간색, 노란색이 전부였다. 그러므로 그렇게 쓴 것이다. 그리스 사람들은 색맹이 아니었지만 단어가 없었기 때문에 문화적으로는 색맹이 될 수 밖에 없었다. 나중에 '블루'라는 말이 태어나고서야 그리스 사람들은 색깔에 대한 지식을 보다 넓힐 수 있었다. 그걸로 나심 탈레브는 단어의 중요성에 눈을 떴다. 어떤 현상을 설명하는 적절한 단어가 없다면 현존하는 현상 자체도 보지 못하는 문화적 색맹 사태에 빠지게 된다는 걸 깨닫게 된 것이다. 때문에 그는 '측정 가능한' 프래질 보다 세상에 훨씬 많은 측정 불가능한 '안티프래질' 현상을 보여주기 위하여 '안티프래질'이란 말을 만든 것이다. 굳이 프래질이란 단어를 쓰는 것은 이 개념이 특히나 외부의 충격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2008년 금융 위기와 같이 커다란 충격이 닥쳐올 경우 예상했던 대로 부정적 결과가 나타나면 '깨지기 쉬운' 프래질이다. 그런데 세상엔 그런 프래질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충격이 더 좋은 결과를 나타내는 것도 많다. 예를 들어 유명한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역사의 연구'에서 인류의 문명이 바로 자연의 연속적 도전에 대한 응전의 결과였다고 한 바 있다. 자연재해든 전염병이든 그게 그냥 부정적인 효과로만 머물지 않고 결국엔 인류의 문명을 좀 더 진보하도록 충동질했다는 의미다. 그런 면에서 아놀드 토인비가 바라보는 문명이란 '안티프래질'이라 할 수 있다. 측정불가란 그런 뜻이다. 깨지리라 예측했지만 오히려 더 좋은 결과가 나와버리기 때문이다. 이 책은 제목대로 그러한 안티프래질을 가득 담아낸다. 사골을 삶듯 한껏 우려낸다.

 

 이 사골 국물은 모두 5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오해는 마시라. 책은 한 권이다. 보통의 책에서는 '장'으로 쓰는 것을 '권'으로 했을 뿐이다. 그렇게 1권에서는 핵심 개념이 되는 안티프래질을 설명하고 2권에서는 근대에 들어와 프래질이 특권화되고 안티프래질이 무시되면서 그동안 결국 우리를 예측 가능성의 신화 속으로 몰아넣은 '소비에트-하버드 환상'의 문제점에 대해 이야기하고 왜 안티프래질에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3권에서 보여준다. 그렇게 이론적인 작업을 마친 다음 4권부터는 안티프래질을 위한 구체적 방법론이 전개되는데 그중 가장 중요한 방법론이라 할 만한 옵션이 4권에서 설명되며 인식론적 방법이라 할만한 비선형성에 대해서는 5권, 그와 비슷한 방법론이라 할 수 있는 '비아 네가티바'는 6권에서 이야기되며 그리고 마지막 7권에서 어쩌면 안티프래질에게 있어 가장 치명적인 약점이 될 수도 있는 윤리의 문제가 등장한다.(왜냐하면 모든 게 예측 불허하다면 행위의 상호 통제를 바탕으로 하는 윤리를 정초하기가 매우 곤란해질 수 있으므로)

 

 메인 디쉬는 이렇게 이루어져 있으며 군데군데 깨알같은 저자의 유머가 감칠맛을 더한다. 때문에 약간 이해하기 버거운 부분도 있었지만 그나마 쉽게 읽히는 편이고 때에 따라서는 읽는 재미도 느낄 수 있다. 아무튼 이 책은 마르셀 프루스트 소설에 나오는 과자 '마들렌'과도 같다. 무심코 맛보게 된 그 과자가 단번에 오래도록 잊어버렸던 기억을 환기시키고 전혀 다른 세계에 대한 경험을 낳았듯이 이 책 역시도 읽는 이에게 그와 똑같은 경험을 선사하는 것이다. 특히나 세상이 어디까지나 예측가능하다고 믿었던 이들에게는 문자그대로 전복이다. 보통 전복은 그 '급변'으로 인해 많은 저항을 부르는 법이지만 나심 탈레브는 그 근거로 온갖 분야의 연구 결과들을 내세우고 있으므로 저항의 힘줄은 어느 순간 느슨해져 버린다. 이 책엔 그런 힘이 있다. 우리나라에도 이제 '생각에 대한 생각'이란 책으로 유명한 대니얼 카너먼은 이 책을 두고 '세상을 다른 눈으로 바라보게 해 준 책'이라고 했는데, 과연 그 말대로인 것이다.

 

 이 책이 이토록 안티프래질을 강조하는 이유는 다른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섣부른 예측으로 이루어지는 인위적 개입을 막기 위해서이다. 4권 이후부터 나오는 모든 안티프래질을 위한 방법론들은 그대로 바보 같은 예측 위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어설픈 개입'(나심 탈레브가 말하는 용어다.)을 막기 위해서 나온 것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아마도 그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2008년의 금융 위기 당시 많은 지식인들이 그대로 시장의 논리에 따르라고 했지만 미국 정부는 인위적 개입을 단행했고 그 때문에 결국은 2010년 또 한 번의 커다란 위기를 겪게 된 데 있을 것 같다. 안수기도로 환자의 병을 고치겠다며 억지로 기도원으로 데려갔다가 두들겨 맞아 죽은 우리나라의 실제 사건처럼 이런 인위적 개입이 도리어 크나큰 화를 부른 경우는 너무나도 많다. 앞서도 말했듯 4대강이 그 가장 대표적인 경우고 작금엔 부동산 시장 역시 그렇다. 가만히 시장의 법칙에 맡겨두면 알아서 조정될텐데 정부가 자꾸만 인위적으로 개입하니까 시장은 왜곡되고 더욱 막장으로 치닫는다. 나심 탈레브는 이걸 '의원성 질환'이라고 부른다. 빠른 해결을 위해 인위적 개입을 의도했다가 도리어 해를 입은 경우로 치료를 위해 병원을 찾았지만 오히려 병만 더 얻게 된 것을 뜻한다. 하는 얘기를 들어보면 이 문제가 좀 심각한 것 같다. 미국 통계에 따르면 병원에서 의료 사고로 죽는 환자의 수가 교통 사고로 죽는 환자의 수보다 적어도 3배 크게는 10배는 많다고 하니까 말이다. 또한 병원균을 통한 감염 외에 의사를 통한 감염으로 사망하는 사람이 특정 암으로 사망하는 사람보다 더 많다고도 한다. 이와 같이 그렇게 심한 것도 아닌데 병원을 자주 찾는 것과 같은 '어설픈 개입'은 미국이나 우리나라의 현실 사례에서 보듯이 해악을 초래한다. 그들은 발생할 수 있는 리스크를 예측하여 그것을 막기 위해 이러저러한 개입을 해야한다고 말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대로 입증된 적은 별로 없다. 그 보단 어설픈 예측이 국토 곳곳에 남긴 상처만 더 많이 볼 뿐이다. 섣부른 예측으로 쓸데없이 많은 예산만 축내고 결국엔 처치하는 것마저 곤란해진 거대한 쓰레기 건축물들 하며...

 

 그러므로 안티프래질이 말하는 방법론이란 다름아닌 나타날 수 있는 리스크에 가장 적절하게 대처하는 방법이다. '바벨 효과'는 바벨이라는 운동 기구가 양족에만 바벨이 있고 가운데는 아무 것도 없이 텅 비어 있듯이 그렇게 오히려 프래질과 안트프래질의 양 극단의 방법을 사용하는 것이 더 효과적인 리스크 관리법임을 보여주는 것이고 옵션은 하나의 목적을 정하고 달려가는 여행가이기 보다는 그 때 그 때의 기분에 따라 목적과 방향을 지속적으로 수정해가는 산책가처럼 계획 수립에 있어 다양한 방향과 변화를 염두에 둘 것을 강조하는 방법이다. 이런 식으로 안티프래질은 본래는 안티프래질한 세계의 리스크에 어떻게 적절하게 대처할 것인가를 알려주는 책이다.

 

 현대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바로 예기치 않은 리스크다. 사람들이 이런저런 과잉 정보에 매달리게 되는 것도 어떻게든 리스크를 최소하화려는 노력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나심 탈레브가 말하듯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리스크 관리법은 그리 적절하지 않다. 대개의 경우 수정되어야 할 하나의 신화로 부터 파생되어진 것들이 많기 때문이다. 나심 탈레브는 바람직한 안티프래질의 태도로서 근대에서는 가장 공격받는 '꾸물거림'을 내세운다. 무조건 '빨리! 빨리!'를 내세우는 우리나라에서는 특히나 비난받는 태도이지만 나심 탈레브는 이러한 태도야 말로 가장 현명한 안티프래질한 대처라고 강조한다. 무조건 덥석 물기 보다 과연 먹어도 좋은 것인가 먼저 이리저리 요모조모 다 따져보라는 것이다. 하나의 결정을 내리기 전에 충분한 정보 수집, 충분한 토론과 의견 수렴이 먼저 선행되어야 할 것을 요구하는 이 태도의 중요성은 이미 4대강 사태에서 우리 역시 충분히 본 바 있다.

 

 그러므로 나는 이 안티프래질의 말에 나름 공감이 간다. 대니얼 카너먼의 말 그대로 이전보다 세상을 보는 눈이 더 풍성해진 것 같다. 현명함이란 어쩌면 많은 정보를 참조하면서 스스로 균형을 찾아가는 것이 아닐까? 그런 면에서 '안티프래질'은 현대인들에게 가장 공포스러운 리크스에 대하여 가장 현명하게 대처할 수 있는 지도를 그려주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어쩌면 누군가에게는 진정 보물지도가 되어줄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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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13-10-18 17: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생각에 관한 생각>을 보니 탈레브의 격찬이 있던데, 그 탈레브의 책이군요~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낼 가서 냉큼 사와야 겠어욤^^
알찬 리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