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의 번역 - 쑨거의 <다케우치 요시미라는 물음> 읽기와 쓰기 우리시대 고전읽기 질문 총서 4
윤여일 지음 / 현암사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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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쓰기란 언제나 글을 쓰지 않는 마이너리티와 우연히 마주친다는 것입니다. 이 마이너리티를 위해서, 마이너리티를 대변해서, 마이너리티의 뜻대로 책임지고 글을 쓴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 [그저] 서로가 서로를 밀고, 자신의 도주선 위로, 서로 결합된 탈영토화 속으로 끌어들이는 우연한 마주침이 있다는 말이지요. 글쓰기는 항상 다른 어떤 것 - 자신의 고유한 생성이 되는 어떤 것과 합류합니다.( 들뢰즈의 '대담' 중에서)


  들뢰즈는 글쓰기를 단적으로 '타자-되기'로 정의한다. 여성에 대해 글을 쓴다는 것은 '여성-되기'이고 동물에 대해 글을 쓴다는 것은 '동물-되기'이며 흑인에 대해 글을 쓴다는 것은 '흑인-되기'이다. '타자화'라는 점에서는 번역도 글쓰기와 마찬가지다. 번역은 무엇보다 타인의 언어를 나의 언어로 바꾸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타인의 언어를 제대로 번역해내기 위해서는 타인이 어떤 마음으로 그 말을 하는지 그 타인의 내부로 들어가는 것이 필요하다. 내가 번역하려는 타자의 입장에 서지 않으면 제대로 된 번역이 나올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 번역 또한 '타자-되기'라 할만하다. 윤여일의 이 책 제목이 '사상의 번역'으로 된 것은 바로 이런 의미에 있지 않을까 싶다. 타인의 사상을 내 것으로 하는 것도 번역 과정에 다름아니기 때문이다. 단순히 말하자면 번역은 일종의 대화다. 그런 까닭에 타인의 사상과 만나 나의 것으로 내재화 하는 일도 답습이 아니라 대화라 할만하다.

 

 

 '사상의 번역'은 현암사에서 나오고 있는 우리시대 고전 읽기 총서 중 한 권이다. 이 총서시리즈는 한 권의 책을 텍스트 삼아 이야기를 풀어내는 게 특징이다. 총서의 네번째로 발간된 '사상의 번역'은 다소 우리에게 생소하다고 할 수 있는 중국 여류 학자 쑨거의 '다케우치 요시미라는 물음'을 주된 텍스트로 한다.

 



 저자가 자신의 책을 특히나 '사상의 번역'으로 한 것은 기실로 하나의 작품을 읽는다는 것이 그러한 번역이기 때문이다. 그 자신의 말을 들어보면 이렇다.
 
 작품이 진정 작품이라면 그 제약을 딛고 나와 타인에게로 손을 뻗는다. 자신의 진실에 천착했던 유한한 개체의 지난한 사고의 흔적이 타인에게 물음으로 육박해간다. 작품의 문제 의식은 짙은 농도로 말미암아 읽는 자에게로 삼투되고 읽는 자는 작품에 자신의 내면 세계를 투사해 거기서 잠재되어 있던 여러 물음이 모습을 이룬다.그런 작품에는 어떤 번역성이 감돌고 있다. 원문에서 이미 번역이 시작되고 있다.(p. 8)

 그런 의미에서 저자는 쑨거의 '다케우치 요시미라는 물음'이 다케우치 요시미라는 한 개체의 사상을 번역한 번역서라고 한다. 같은 의미에서 윤여일의 이 책 또한 쑨거가 번역한 다케우치 요시미를 다시금 번역한 번역서다. 하지만 이 책의 제목이 번역인 게 단순히 그것만을 뜻하지 않는다. 거기엔 한 가지 의미가 더 결부되어 있는데 그건 바로 이 책이 취하고자 하는 방법론이다. 다케우치 요시미라는 사상가는 얼른 파악하기가 힘든 사상가다. 그에 대한 평가도 분분하다. 쑨거는 다케우치 요시미 같은 유형의 사상가를 제대로 파악하려면 무엇보다 내재적 비판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건 주로 다케우치 요시미의 사상적 공헌이 그의 한계와 밀착되어 있기 때문인데 그런 의미에서 다케우치 요시미의 사상이란 선택의 여지가 조금도 없는 상태에서 어렵게 내린 개인적 결단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 결단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려면 무엇보다 그 결단을 내린 시점의 당사자 안으로 들어가는 것 말고는 달리 없다. 따라서 내재적 비판이어야 하는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내재적 비판이란 이런 것이다.

 내재적 비판이란 상대의 문제의식을 파고들어 그 문제의식으로부터 상대가 내딛지 못한 다음의 일보를 비판자가 재구성하는 것이다.(p. 19)

쑨거처럼 이 책도 이 방법을 취한다. 윤여일은 다케우치 요시미의 문제의식을 파고 들고 그를 번역한 쑨거의 문제의식으로 파고들어 그들이 봉착한 한계에서 그 너머에 있을 수 있는 것들을 비판적으로 재구성한다. 이 책은 그러한 대화이다. 무엇보다 타자-되기의 대화이다. 들뢰즈는 언젠가 자신의 철학은 남의 등에 달라붙어 자라났다고 고백한 적 있는데 이 책이 취하는 내재적 비판과 그리 다르지 않는 것 같다.
 
 쑨거가 다케우치 요시미에게 주목했던 이유는 다케우치 요시미가 타자인 중국과 대면하면서 일본인이라는 입장에서 중국을 보고 그것을 일본적으로 동일화했던 것이 아니라 거꾸로 중국이라는 타자의 중심에 서서 일본인이라는 자신의 한계를 절감하면서 오히려 일본이라는 자기 내부를 지속적으로 허물어 갔음에 있었다. 그 타자 지향성에 쑨거는 대화의 가능성을 발견했다. 그건 그대로 서구 중심의 근대에 간직된 한계에 대한 대안이기도 했다.

 하이데거가 말했던 대로 근대는 어디까지나 포식자와 같았다. 즉 자신과 차이 나는 것들을 그 모습 그대로 존중하지 않고 모조리 삼켜서 자기와 똑같이 만들었다. 푸코가 말했던 대로 근대의 이면엔 선택과 배제가 차별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자신과 닮을 수 있는 것은 선택했지만 그럴 가능성이 없는 것은 가차없이 배제되었다. 그렇게 자기 동일화의 이데올로기가 근대의 본질이었다. 그러므로 모든 게 단일한 전체가 되는 파시즘이 근대에 들어와 태동되었던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헌데, 쑨거가 보고 있는 다케우치 요시미의 사상은 그와 정반대에 위치해 있었다. 거기엔 자기 동일화가 없었고 오히려 타자와 대면하면서 끊임없이 자신을 수정해가는 '타자-되기'가 있었다. 근대가 간직하고 있는 해악을 치유할 수도 있는 대안의 모습이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윤여일은 쑨거가 다케우치 요시미와 대면하면서 찾아낸 대안의 맹아들을 하나하나 찾아나간다.

 먼저 다케우치 요시미가 문학을 바라보는 태도다. 다케우치에게 문학은 장르가 아니라 하나의 태도였다. 어떤 태도인가 하면,

  자기부정만이 진정한 부정의 가치를 지니며, 자기부정을 거치지 못한 지식, 바깥에서 주어진 지식은 생명력을 지니지 못한다. 문학이란 태도며, 자기부정적 태도다. 문학가라면 마땅히 유동적 상태로 자기를 갱신할 수 있어야지 굳어버려서는 안된다.(p. 58)

 다케우치에게 문학은 자기부정의 태도였다. 나와 같게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부정하기 위해 중국 문학을 대했고 중국을 대했다. 그는 그런 식으로 평생 연구했고 늘 닮고 싶어했던 루쉰의 문학도 대했다. 사실 자기부정으로서의 문학적 태도는 루쉰을 연구하며 가지게 된 것이었다. 무엇보다 루쉰 역시 늘 자기 한계를 긍정하면서 한 걸음을 더 내딛으려 한 결과 나온 것이 그의 문학이었기 때문이다.

 루쉰은 스스로를 노예라 여겼다. 그건 현실 중국 사회에 대한 절망의 표현이었으나 다케우치는 그 절망 때문에 루쉰은 저항할 수 있었다고 생각했다. 그는 말했다. 저항은 절망의 행동화로 드러난다고.

 구원을 바란다는 사실이 자신을 노예로 만들고 있다. 노예에서 벗어나려면 가야 할 길 없는 고통스러운 상태지만 깨어나 자신이 노예임을 자각해야 한다. 그 공포를 견뎌야 한다. 만약 공포를 견디지 못한 채 구원을 바란다면 그는 노예라는 자각마저 잃는다.(p. 109)

 그런 의미에서 자신이 노예임을 자각하는 노예를 다케우치는 '깨어난 노예'라고 부른다. 그는 노예를 거부함과 동시에 해방의 환상 또한 거부한다. 깨어난 노예는 주인이 되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착취와 차별의 한 축이라는 것을 자각하는 것이다. 개인의 상황이 아니라 그것을 만드는 근저에 놓여진 구조를 본다. 그러므로 자신의 처한 상황 밖에 보지 못하는 '노예근성'과 구별된다. 그렇게 다케우치는 끊임없이 개인이란 내부에서 빠져나가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는 사상가의 내적 모순이 사라지면 사상은 평면화되고 그렇게 되면 타락하게 된다고까지 말한다. 그는 통속화를 가장 두려워한다. 자기 모순, 자기 부정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오히려 이를 지향한다. 진정한 사상가는 오로지 거기에 있을 때라야 숨을 쉴 수 있기 때문이다.

 쑨거는 이러한 다케우치의 태도를 루쉰의 말을 빌러 '쩡짜'라 부른다.

 바로 서두에서 진정한 사상적 만남은 자신을 상대에서 투입하고 끄집어내는 과정을 거치면서 자신을 갱신하는 것이라고 말했는데 그게 바로 쩡짜의 의미다.(p. 113)

 쑨거는 '쩡짜'가 깨어난 노예의 숙명이라고 한다. 

 주체는 쩡짜로 타자와의 대립 속에서 자신을 씻어낸다. 동시에 부단히 회심의 축을 향해 돌며 자기를 재형성한다. 이로써 주체가 얻는 것은 유동성이다. 다케우치가 말하는 행위란 바로 이런 의미다.(p. 115)

 즉 무엇보다 주체가 되는 것은 흐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어디든 고여있지 않고 그 어떤 곳이든 기꺼이 흐를 수 있는 것. 그것이 사상을 하는 주체가 지향해야 할 바라고 다케우치와 다케우치를 번역한 쑨거가 말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이러한 다케우치의 생각들이 한창 민족주의가 강해지던 시기에 나왔다는 것이다. 그는 일본군으로 2차 대전에 참전했다. 그의 첫 저작이자 대표작이었던 '루쉰'은 참전 직전에 죽을 것을 염두에 둔 그가 마치 마지막으로 할 말을 다하겠다는 일념으로 쓴 것이다. 그렇게 모두가 모두에 대해 배타적일 때 다케우치는 타자인 루쉰과 만나면서 주체는 무엇보다 흘러야 한다는 것을 깨쳤다. 쑨거는 그런 다케우치를 1988년에 만났다. 그 한 해 뒤에 중국에서는 현대에 들어 가장 비극적인 사건이라고 할만한 '천안문사태'가 벌어졌다. 민주화를 바라는 중국 청년들과 지식인들의 염원을 탱크로 처참하게 짓뭉개버린 사건이었다. 천안문사태는 80년 후반에 들어와 더욱 거세어지던 중국 청년들과 지식인들의 민주화 운동의 절정과도 같았다. 그 열망에 대해서 중국 정부는 조금도 귀기울이려 하지 않았고 철저하게 무력으로 짓밟으려고만 했다. 이러한 중국 정부의 모습은 다케우치의 일본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그 시기에 쑨거는 다케우치를 만났고 그의 '쩡짜'를 경험한 것이다.

 그런 상황 속에서 오히려 반대의 길을 걸어온 다케우치와 쑨거의 사상 편력은 지금 날로 우경화되는 추세 속에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과연 진정한 주체는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무엇을 주체로 삼아야 하는가에 대해서 여러가지 생각 거리를 가져다 준다. 그런 면에서 '사상의 번역' 역시 다케우치와 쑨거처럼 적절한 시기에 나왔다고 하겠다. 날로 동아시아 삼국 서로에 대한 적대의 시선을 키워가는 요즘 이 책을 통해 '쩡짜'로서 타인을 한 번 헤아려 보는 시선도 가질 필요가 있지 않을까? 그런 면에서 많은 분들이 이 책을 읽고 '쩡짜'를 한 번 경험해 보셨으면 좋겠다. 꽤나 좋은 책으로 적극 추천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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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더는 패러디다 - 주디스 버틀러의 <젠더 트러블> 읽기와 쓰기 우리시대 고전읽기 질문 총서 5
조현준 지음 / 현암사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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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젠더는 패러디다!

 이 말은 젠더트러블에서 주디스 버틀러가 하고자 했던 말을 정확히 나타내고 있다. 그동안 여성을 바라보는 두 가지 개념적 틀이라 할만한 것이 있었다. 섹슈얼리티와 젠더가 바로 그것이다. 섹슈얼리티는 흔히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생물학적 성을, 젠더는 사회적으로 형성된 성을 뜻했다. 남성도, 여성도 바로 그 섹슈얼리티와 젠더가 혼합된 몸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대부분, 그것도 특히 여성의 경우 젠더는 넘어가야 할 장애물 같은 것으로 생각되었다. 현재 사회는 어디까지나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사회였고 그렇게 여성에게 덧씌워진 젠더란 남성 중심의 사회가 보다 잘 존속하기 위해 길들여진 정체성이라 여겨졌기 때문이다. 여성의 진정한 해방을 위해서는 방해가 되는 가짜 정체성. 그것이 바로 '젠더'였다. 패미니즘은 젠더를 벗어나 생물학적 본연의 섹슈얼리티로 돌아가고자 하는 움직임이라고 보아도 다르지 않았다. 그것이 마치 하나의 패러다임처럼 굳어졌을 때 여기에 반기를 든 여성학자가 출현했다.


 


 

 그것이 바로 주디스 버틀러였다. 여기서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그녀의 성적인 성향이다. 그녀는 레즈비언이다. '젠더트러블'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이 책에서의 급진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그녀의 주장은 그녀가 레즈비언으로서 한 경험 위에서 빚어졌다. 중세이래로 서양 가치관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기독교의 여파도 있고해서 동성애는 비정상적인 성애의 행태로 규정되었다. 동성애자들에게 이것은 그야말로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이성애와 동성애는 단지 사랑하는 상대만이 달라졌을 뿐인데 하나는 바람직한 것으로 다른 하나는 비난받을만한 것으로 치부되니 말이다. 주디스 버틀러에게 이러한 상황은 그야말로 이성애의 강박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사회 성원을 지속적으로 재생산하여야만 하는 사회가 사람들에게 강제적으로 부여한 규범. 사실 기독교가 동성애를 죄악시 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생육하고 번성하라'가 하나님이 인류에게 내린 지상명령이었는데 동성애는 번성, 즉 번식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주디스 버틀러는 이를 강제적 이성애라 부른다. 더구나 이는 대표적으로 기독교가 퍼뜨린 관념이다. 한데 기독교는 남성 중심 이데올로기의 대표적 존재다. 패미니즘에서 남성 중심의 사회가 가진 가장 중요한 특징은 강압이다. 남성 중심의 사회는 다른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다른 것은 기필코 같게 만들어야 하고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억압하거나 그도 불가능하면 배제한다. 그러니 강제란 무엇보다 남성 중심 사회의 속성이다. 이로써 더욱 강제적 이성애를 받아들일 수 없는 명분이 커진다. 그야말로 강제적 이성애는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적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성애에 대한 이러한 생각은 그동안 고유한 본성이라고 여겨져왔던 섹슈얼리티조차 달리 보게 만든다. 타고난 몸 그대로의 여성이라 하더라도 과연 그것이 진정한 여성의 정체성이 될 수 있을까? 그것이 온전한 정체성이 되려면 어디까지나 순수의 시선으로 바라보아야 할 것인데 그러지 못하다. 이미 태어난 그대로의 여성 신체를 바라보는 눈마저 남성 중심의 이데올로기로 왜곡되어 있기 때문이다. 주디스 버틀러는 무언가의 원본을 상정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남성 중심의 이데올로기에 물들어 있음을 뜻한다. 어떤 궁극의 일자(the one)가 있다고 가정하는 것이 남성 중심 이데올로기의 전반적 특징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디스 버틀러는 그런 것이 없다고 해야 하고 결국 섹슈얼리티와 젠더의 구분을 폐하여야 한다고 여긴다. 그래서 주장한다. 우리가 지금까지 섹슈얼리티로 여겨온 것도 정말은 젠더일 뿐이라고.


 이렇게 주디스 버틀러에 의해 처음으로 섹슈얼리티와 젠더의 이분법은 폐지되었다. 하지만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원본은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이다. 여기엔 지향해야 할 목표 같은 것이 없다. 모든 건 거기까지 이르는 과정이지도 않다. 지금 어떤 모습이든지 그 모습이 전부이며 또 지금 행하고 있는 모든 것이 진실이다. 


 주디스 버틀러의 주체는 '되어야 할 어떤 것'이 아니라 '삶 가운데 행위하면서 그 때 그 때 이루어지는 그 무엇'이다. 주체가 행위하는 것이 아니라 행위하면서 주체가 된다. 정체성은 타고 나는 것이 아니라 구성되는 것이며 그것도 행위를 통해 형성되는 것이다.


 행위 뒤에 행위자는 없다. 행위자는 행위 안에서 또 행위를 통해서 가변적으로 다양하게 구성된다. 젠더의 표현물 뒤에 젠더 정체성은 없다. 젠더 정체성은 자신의 결과라고 간주되는 바로 그 '표현물들'을 통해서 수행적으로 구성될  뿐이다.(p. 41)


 그런데 우리는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수행하지 않는다. 그럴 수 있는 인간은 없다. 우리는 흔히 남성, 여성이라 여겨지는 것들에 따라서 수행한다. 르네 지라르도 말했듯이 인간의 모든 행위는 모델에 대한 모방에 불과하다. 한데 우리가 상정하는 여성 혹은 남성 모델이란 진짜의 것이 아니라 남성 중심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가정된 것에 불과하다. 우리가 흔히 여성적이다, 남성적이다 하는 것들은 그렇게 진짜가 아닌, 진짜를 모방한(그랬다고 가정하는) 것을 다시금 모방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래서 젠더는 제목처럼 패러디다.


 패러디적 정체성은 원본에 대한 모방이 아니라 원본이라 가정되는 복사본에 대한 모방으로 얻어지는 정체성이기 때문에 원본의 권위를 부정한다. 패러디가 원본의 희화화나 조롱을 목적으로 원본을 모방하는 행위, 혹은 그 결과물이라면 이것은 원본의 권위와 본질을 전제하지 않는 모방을 가능하게 한다.(p. 38)


 모든 게 다 모방인데 어느 것이 진짜 모방인지 알려줄 원본이 없다면 모든 모방이 있는 그대로의 원본이게 되는 것도 가능하다. 그러므로 어떤 행위를 통해 만들어지는 정체성이든 그 누구라도 그것에 대해 가짜다, 옳지 못하다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건 행위의 대상에 대한 것이지만 이러한 정체성 인식은 행위하는 당사자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즉 내가 진짜 누구인가는 고려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애초에 원본이 부재하기에 내가 어떻게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려줄 모델도 없다. 나는 그 모든 것이 될 수 있고 어떤 행위를 통해서 형성하는 모든 정체성이 사실은 다 나의 정체성이다. 나의 정체성이란 그 때 그 때의 행위를 통해 표현되는 것이며 그렇게 내 정체성은 카멜레온처럼 아니면 엑스맨의 미스틱처럼 얼마든지 변할 수 있다. 패러디적 정체성은 바로 이 측면이 중요한데 이것은 개인을 획일적 정체성의 감옥에서 해방시키기 때문이다. 즉 패러디적 정체성은 내게 모든 것이 다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것이 주디스 버틀러처럼 동성애든, 이성애든 아니 성을 떠나 그 무엇이든 말이다. 패러디적 정체성은 무한의 잠재된 가능성으로 내게 자유를 준다.


 사실 주디스 버틀러는 존재가 가지는 대부분의 우울증은 바로 이 획일적 정체성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믿는다. 또한 타인에 대한 차별 역시 어딘가에 옳다는 것을 알려줄 진짜 원본이 존재하며 정체성이 확실히 구분되어 있다는 생각에서 기인한다고 본다. 때문에 이러한 수행으로 형성되는 정체성, 시시때때로 변할 수 있는 가변적 정체성은 개인에게도 타인과 더불어 살아가야만 하는 사회에도 모두 유익한 것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주디스 버틀러는 '젠더 트러블'에서 이 가변적이고 구성되는 정체성의 모습을 때로는 뉴욕 할렘 지구의 드렉퀸들을 소재로 한 '파리는 불타고 있는가'라는 다큐멘타리를 통해 때로는 프로이트와 크리스테바와 같은 정신분석과 대결하면서 적극적으로 펼쳐나간다. '젠더 트러블'의 이 모든 지적 투쟁을 그 책을 번역하기도 했던 조현준은 '젠더는 패러디다'라는 책에서 빠짐없이 그리고 (이것이 이 책의 무엇보다 장점인데) 쉽게 그려내고 있다.


 그동안 강제적으로 규정되고 불변하는 정체성이 개인과 사회에 가져다 준 해악을 생각한다면 이러한 정체성의 새로운 시각은 얼마든지 음미할 필요가 있는 일이라 생각된다. 그런 면에서 조현준의 이 책은 잘 된 '디켄딩'과도 같다. 정작 원저인 '젠더 트러블'을 읽을 때 느껴지는 텁텁한 난해함을 이 책에서는 디켄딩으로 와인에서 이물질을 분리해내듯이 말끔하게 분리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주디스 버틀러의 출발이자 핵심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길잡이로서 진정 추천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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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란의 도시 - 도시에 대한 권리에서 점령운동까지
데이비드 하비 지음, 한상연 옮김 / 에이도스 / 2014년 3월
평점 :
절판



 '자본의 한계'로 세계적으로 이름을 떨쳤던 영국의 공간경제학자 데이비드 하비. '반란의 도시'는 그런 그가 2012년에 세상에 내놓은 책이다. 1982년에 나온 '자본의 한계'는 그동안 마르크스주의가 중시하지 않았던 공간의 의미를 새로이 발굴하고 그것을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과 접합하여 많은 주목을 받았다. 그건 1971년에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세미나로 읽기 시작하여 무려 10년간 '자본론'을 연구한 끝에 나온 결실이었다. 아무도 돌아다보지 않았던 공간을 바탕으로 자본론을 새로이 구성했기 때문에 책은 당연히 어려웠고 세계적인 명성을 가져다 준 책이지만 사실 가장 읽히지 않는 그의 대표작이 되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일종의 신념처럼 '자본의 한계'에 투영했던 입장을 내내 관철시켰다. 그런 그에게 있어 도시로 관심이 옮겨간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그는 '자본의 한계'에 뒤이어 1985년에는 '자본의 도시화'와 '의식과 도시경험'을 내놓았고 결국 그 결정체로서 1989년에는 우리나라에도 번역된 '도시의 정치경제학'을 내놓았다. 도시에 관한 그의 책은 2000년에 나온 '파리, 모더니티의 수도'에서 정점에 달하는데 근대의 핵심이자 파리 혁명을 통한 저항의 도시였던 파리가 어떻게 그 후 반저항의 도시로 탈바꿈하는지 문화 전반에 걸쳐 그 정치경제학적 동인을 파헤쳤던 책이었다. 더구나 그 '파리'는 데이비드 하비 자신에게도 아주 의미있는 곳으로 그가 지금처럼 평생을 실천적 마르크스주의에 헌신하게 되었던 결정적인 이유도 파리에서 일어난 '68혁명' 때문이었다. 그는 처음부터 이론에 머무는 마르크스주의가 아니라 실천될 수 있는 마르크스주의를 원했으며 그가 해 온 모든 이론 작업은 결국 어떻게 마르크스주의를 제대로 실현할 수 있을 것인가에 맞춰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반란의 도시'는 지금까지 그가 천착해온 마르크스의 자본론에 바탕을 둔 공간의 정치경제학이 집약적으로 들어간 가운데 보다 약탈적이 된 최근의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 맞서 어떻게 저항의 동맥을 만들어나갈 것인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 방향은 처음부터 제시되고 있다. 바로 역시 68혁명을 계기로 앙리 르페브르에 의해 제기된 '도시권'을 되살리는 것이다.


 르페브르는 도시권이 애타는 호소인 동시에 요청이라고 주장했다. 도시권은 도시 일상 생활이 쇠퇴하는 위기에서 비롯하는 실존적 고통에 대한 반응이라는 의미에서 호소였다. 또 도시권은 이 위기를 똑똑히 직시해 대안적 도시생활을 창조하라는 명령을 담고 있다는 의미에서 요구였다.(p. 9)


 이러한 도시권은 단순히 말하자면 내가 살고 싶은 환경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요구하는 권리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도시권에 대한 요구는 도시 공간의 형성 과정에 행사하는 권력, 즉 우리가 살아가는 도시를 만들고 뜯어고치는 방법을 지배하는 권력을 철저하고 근본적으로 주장하는 것을 말한다.(p. 28)


 사실 지금까지 우리들은 정작 우리가 거주하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도시가 만들어지는 것에 대해선 수동적이었다. 소수의 입안자들이 선을 긋고 중장비를 가져와 파내기 시작하면 그러나 보다 생각하기 일 쑤였다. 데이비드 하비는 이걸 하나의 권리로 만들어서 보다 적극적으로 여기에 도시인들이 개입하기를 원한다. 왜냐하면 도시라는 공간의 그 어떤 배치든 그것은 그냥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잉여 가치가 사회적, 지리적으로 집적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도시화는 언제나 일종의 계급 현상이었다. 잉여가 어디서, 누구에게서 추출되건 그것을 사용할 권한은 소수의 손아귀에 있었기 때문이다.(p. 28)


 그러므로 도시권에 대한 요구는 소수의 손아귀에만 주어진 작업에 대중들 스스로 전면적으로 개입하여 착취의 선들을 끊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그런데 왜 도시화는 언제나 소수 자본가의 착취와 약탈이 수반될 수 밖에 없는가? 그것은 마르크스가 말한 바, 자본주의는 계속적으로 잉여가치를 생산해야만 지속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자본가들은 끊임없이 이윤을 창출해야만 하는 압박에 놓인다. 그래서 끊임없이 확장할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이렇게 생산을 지속적으로 할 수 있더라도 안심할 수 없다. 또 하나의 자본주의 필연적인 법칙인 '이윤율 저하 경향' 때문이다. 생산의 지속과 확장은 이윤율을 자꾸만 떨어뜨린다. 공급이 많으면 가격이 떨어지는 것과 같은 이유다. 이대로 방치하다간 결국 공황에 직면한다. 그러므로 자본가들은 너무 생산물이 많지 않도록 적절히 조절해야 한다. 그건 바로 잉여 생산물들을 흡수하도록 하는 것이다. 즉 자본가들에겐 이윤율을 유지하기 위해 생산하는 것만큼이나 잉여 생산물을을 지속적으로 흡수하는 것 또한 중요하다. 도시 공간 형성에는 대규모의 재화가 필요하다. 한 마디로 단번에 잉여 생산물을 써 버릴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이 때문에 데이비드 하비는 도시화가 진전되는 것이라 말한다. 그 모두가 잉여 생산물을 흡수하기 위한 과정인 것이다.


 그는 그 실제 사례로써 프랑스 제2 제정기 당시에 조르주 외젠 오스만이 파리를 재개발했던 것과 1942년 미국에서 로버트 모제스가 오스만에 영감 받아 뉴욕 주변에 대규모의 거주 공간을 마련했던 것을 든다. 오스만이 당시 파리에 과잉된 자본을 흡수하기 위해 파리를 근대적 도시 공간으로 변모시켰다면 모제스는 뉴욕이라는 도시만이 아닌 그 외곽까지 포함하는 대도시권 전체의 재개발로 변모시켰다고 한다. 모제스는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각종 대규모의 도시 기반시설로 당시에 과잉된 자본을 흡수했는데 이러한 뉴욕의 재개발은 이후 모든 나라의 도시 재개발의 모범이 되었다. 물론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이러한 역사적 사례에서 보듯이 도시화란 다름아닌 자본주의가 유지되려면 할 수 밖에 없는 잉여 생산물의 흡수를 위한 작업이다. 하지만 자본가들이 언제까지나 여기에 기댈 수는 없는 노릇이다. 도시화에도 한계가 존재하기 마련이다. 자본주의적 생산이 결국엔 공황으로 이어지듯이 이런 식의 도시 공간 형성은 장기적으로는 결국 투기로 변질된다. 의제자본 때문이다. 의제자본은 실제 자본은 아닌데 자본으로 의제되는 것을 말한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자본이란 어디까지나 노동자가 직접 생산을 통해 얻는 것이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노동을 매개로 하지 않은 획득물도 있다. 대표적으로 이자다. 이자는 어디까지나 돈이 돈을 낳는 것으로 인간의 노동이 개입되지 않는다. 그런 것을 '의제자본'이라 한다. 자본이 아닌데 자본인 척 행동하기에 그렇게 부른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마르크스의 말에 반감이 든다. 이자도 결국 자본이 생산한, 그렇게 자본이 아닌가? 우리는 이걸 당연히 돈의 생산물로 간주하지만 사실 이자는 중세까지만 해도 죄악시 될 정도로 이유없이 뜯어가는 것으로 여겨졌다. 빌려준 돈이 새끼를 쳐서 그 이자까지 갚아야 한다는 건 유태인말고는 할 수 없는 생각이었던 것이다. 소득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노동을 매개해서만 인정되었다. 따라서 이자에 대한 지금의 관념이란 사회적으로 형성된 것이다. 의제자본이 바로 그렇다. 의제자본은 주로 생산된 것이 또 한 번 만들어낸 2차적 생산물로 실은 자본주의가 제대로 순환하기 위해 발라주는 윤활유와 같은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이자를 생각하듯이 거기에 사실은 아무 것도 없는데도 어떤 생산적인 활동이 있는 것처럼 여긴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이런 의제자본을 물신적 구축물이라 부른다. 외면만 보게 만들어 그것을 창출한 실제 사회적 관계는 은폐한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은폐된 사회적 관계는 뭘까? 그게 바로 착취다. 혹은 약탈이다. 의제자본은 잉여가치의 이차적 형태다. 따라서 유통이나 금융 부문도 의제자본이다. 이미 생산된 잉여가치만을 다루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의제자본들은 노동을 매개로 하지 않으므로 실제 가치 이상으로 무한히 증가될 수 있다. 서로 은행이 돈을 빌려주는 관계를 생각하면 된다. 한쪽 은행이 다른 쪽 은행에서 돈을 빌려 그 돈을 그대로 그 은행에게 빌려준다. 실제 돈은 그대로이지만 양쪽에서 카운트 되는 자산은 두 배로 늘어나 있다. 잉여 생산물을 흡수하기 위한 도시 공간 형성은 바로 이 의제자본들이 마구 흘러드는 과정이다. 의제자본이 의제자본을 낳는다. 결국 투기 붐이 일어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데이비드 하비는 도시화는 필연적으로 부동산 거품에 직면한다고 말한다. 거품과 그 붕괴 현상은 특이점이 아니라 자본주의 도시에 있어서 상수인 것이다.


 그런데 그 피해는 모조리 보다 덜 가진 쪽에 훨씬 더 가중된다. 도시화는 어디까지나 잉여 생산물 흡수를 통한 계급 착취의 과정이므로 그럴 수 밖에 없다. 용산 사태가 잘 보여주듯이 말이다. 그러므로 도시권의 획득을 통해 이러한 과정의 반복을 끊어야 한다. 그런데 도시는 모두 같이 살아가는 영역이므로 결국 도시권을 요구함은 공유재를 둘러싼 투쟁으로 나타난다.


 공공 공간 및 공공재의 생산과 접근을 누가, 어떻게, 누구의 이익을 위해 규제하는가의 문제를 놓고 늘 투쟁이 벌어진다. 도시의 공공 공간과 공공재를 공동의 목적을 위해 영유하려는 투쟁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p. 137)


 그런데 데이비드 하비는 이 공유재를 단순히 재화로 해석하지 말 것을 부탁한다. 그 보다는 어디까지나 사회적 관계로 보아달라고 말한다.


 사실 공유재를 만드는 사회적 실천이 존재한다. 이 실천은 특정 사회 집단만 배타적으로 이용하거나 아니면 사회 구성원 전부가 부분적으로, 혹은 공개적으로 이용하는 공유재와의 사회적 관계를 만들고 확립한다. 공유재를 만드는 실천의 핵심에는 사회집단과 환경의 공유재적 측면 사이의 관계는 집단적이고 비상품적이어야 한다는, 즉 시장교환과 시장평가의 논리가 배제되어야 한다는 원칙이 자리잡고 있다.(p. 138)


 이런 도시의 경관이 대표적인 공유재다.

 

 유명한 그리스의 산토리니다. 집 하나하나는 저다마 개인의 소유물이지만 집단적으로 연출한 이 경관은 공유재다. 그게 너무도 멋져서 죽기 전에 꼭 가 보아야 한다는 말까지 듣는다. 이렇게


 개인과 사회 집단은 각각의 일상적 활동과 투쟁을 위해 도시라는 사회적 세계를 창조하고 그럼으로써 그 안에서 거주 가능한 하나의 틀로 공유재를 만들어낸다. 이 문화적으로 창출된 공유재는 아무리 사용해도 파괴당하거나 하지 않지만 과도하게 남용되면 질이 떨어지고 평범하고 진부한 것이 되어 버린다.(p. 139)


 사람들이 산토리니로 가는 건 다른 어디에서도 산토리니가 가진 아름다움을 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데이비드 하비는 그걸 '독점지대'라고 말한다. 다른 어디에도 없어서 그 독특함과 희소성으로 가치를 가지는 공간을 일컫는다. 그 반대엔 '디즈니화'된 공간이 있다. 어디서나 볼 수 있어서 진부하기 이를 데 없는 공간이다. 독점지대는 이러한 공유재가 얼마든지 재화 가치를 지닐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렇지 않아도 이 산토리니의 매력 때문에 많은 관광업자들이 돈을 벌고 있지 않은가. 그렇게 공유재를 어떻게 창조하고 활용하느냐에 따라 '헤이온와이'처럼 독점지대로 이윤을 창출할수도 있고 '디즈니화'되어 그렇고 그런 공간 중의 하나로 전락할 수도 있다. 데이비드 하비가 이렇게 공유재와 그것을 통한 독점지대의 창출을 강조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도시권을 이 시대에 걸맞는 인권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해서이다.


 그동안의 인권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소유권을 바탕으로 하여 설정되어왔다. 자유가 한 개인의 자유에 대한 소유권을 바탕으로 했듯이 말이다. 데이비드 하비는 이제 인권의 개념이 그 개인의 소유권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여긴다. 그리하여 공공으로서의 인권의 대표로서 '도시권'을 가지고 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도시권'이 그저 가설의 것이 아니라 실제 삶에서 충분히 형성 가능한 인권임을 보여주기 위하여 '공유재로서의 도시'와 그 '독점지대'의 가치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현재의 지자체들은 이 독점지대를 가지기 위해 발버둥이다. 그것은 날이 갈수록 중요해지는 관광산업 때문에 더욱 불타오르고 있다. 이제 공간은 집합적 상징자본의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의 힘은 갈수록 막중한 역할을 한다.


 집합적 상징자본의 힘, 즉 어떤 장소에 특별한 차별성을 부여하는 행동이 갖는 힘이다.(p. 184)


 이는 도시 거주민의 집단적 실천이 만들어내는 힘이다. 그들의 노동으로 인한 것이므로 진정한 자본이다. 데이비드 하비가 독점지대를 왜 강조하는지 이제 그 이유를 알 것이다. 이것이 필연적으로 착취와 약탈을 수반하는 의제자본으로 넘쳐나는 도시화를 막는 길이기 때문이다. 도시권은 바로 그러한 집합적 상징자본을 만들어내는 참여이며 그 참여를 통해 그 어디에도 없는 자신들만의 독점지대를 만드는 가치의 창출이다. 또한 이것은 어디까지나 시장 교환을 배제하므로 반자본주의적이다. 즉 데이비드 하비는 도시권의 요구와 그러한 도시에의 전면적 참여가 결국 반자본주의 운동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 아니 그 둘은 꼭 함께하지 않으면 실패하고 말 정도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이 흐름에서 데이비드 하비는 어떤 도시에서 시민들이 보다 나은 삶적 공간으로서의 도시를 위해 참여하고 투쟁하면 자연적으로 반자본주의 운동으로 이어지리라 보고 있다. 더우기 거기에 대한 실제 사례까지 존재한다. 바로 2000년 볼리비아에서 민영화된 식수 때문에 일어났던 엘 알토시의 시민의 저항이다. 거기다 2011년의 런던 봉기와 뉴욕의 월 스트리트 점령 운동도 있다. 이런 사례들을 검토하며 데이비드 하비는 그 역도 얼마든지 가능함을 보여준다.


 즉 반자본주의 투쟁이 결국은 보다 나은(순수한 의미에서의 '인간적인') 도시에서의 삶을 결국 가져다 줄 것이라 말하는 것이다. 이로써 도시권에 대한 요구는 어디까지나 진정한 목적을 위한 중간 단계에 불과하다는 그의 말이 가졌던 의미가 비로소 드러난다. 결국 그가 '반란의 도시'를 통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흔히 생각할 수 있는 대로 반자본주의 운동과 도시의 삶을 개선하는 것이 그리 격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둘은 긴밀히 연결되어 있으며 어디까지나 함께 진행해야 한다는 게 이 책에서 데이비드 하비가 들려주고자 하는 것이다.


 하비에 따르면 신자유주의가 세상을 지배한 뒤로 약탈이 더욱 전면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하지만 그동안의 도시화는 서울의 아파트가 그러하듯 개인을 더욱 파편화시켜서 저항의 연대를 만들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럴수록 약탈은 더욱 전면화되고 노골적이 되었다. 이제 그들은 이빨을 조금도 숨기지 않는다. 그들이 드러낸 이빨을 보지 않을 수 없는 우리는 분노하지만 그 분노를 넘어 연대를 위한 거점을 어디서 찾아야 할 지 막상 잘 알 수가 없다. 데이비드 하비의 '반란의 도시'는 바로 그 시작을 위한 공간을 어디에 설정해야 할 지 알려준다. 무엇보다 바로 자신이 살고 있는 도시가 더이상 지금과 같은 분노와 절망을 겪지 않도록 만드는 투쟁의 현장이라는 것을. 덕분에 도시에 산다는 것의 진짜 의미를 아주 잘 알게 된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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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구 2015-03-14 07: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ㅉㅉ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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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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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으로 패러다임을 말한 바 있었던 토마스 쿤에 따르면 어느 시대나 그 시대를 지배하는 패러다임은 있게 마련이며 그건 인식의 틀과 진리들을 독점하므로 당대의 사람들은 그로부터 강한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고 한다. 즉 패러다임이 허용하는 눈으로 세상을 보고 패러다임에 맞는 사실만을 자기의 진실로 여기게 된다는 말이다. 그렇게 삶은 스스로 만든 가치관이 아니라 패러다임이 규정한 가치관으로 형성될 때가 많다. 특히나 지금처럼 개인의 삶이 언제든 사소한 이유만으로도 쉽게 추락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더욱 그렇다.

 하이데거는 인간이 가지는 삶에 대한 근본적 감정이 불안이라고 말했는데 그 말은 현대에 이르러 그대로 진리가 되어 버렸다. 모두가 불안하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액체근대'에서 현대인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홀로 남겨졌다고 느꼈을 때 걷잡을 수 없이 몰려드는 불안감을 지우기 위한 '소속감'이라고 말한 바 있다. 불안하기에 현대인들은 어디에든 껌처럼 달라붙으려 한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현대가 소비지상주의에 빠지게 된 것도 사실은 불안 때문이라고 말한다. 생각해보면 쇼핑 공간은 그저 '소비자'라는 것말고는 다른 정체성이 없는 곳이다. 그렇게 단순히 소비하는 행위 하나로만 거기에 속했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는 공간이다. 그리 쉽게 소속감을 얻을 수 있기에 사람들은 쇼핑에 빠져든다. 물건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어딘가 내가 소속되어 있다는 느낌이 필요해서 쇼핑을 하는 것이다. '지름신의 영접'은 이 순간 소속되고 싶다는 열망의 다른 표현이다. 그만큼 현대는 불안이 넘치며 자기 혼자 남았다는 사실을 참지 못한다. 어쩌면 잠시만 혼자가 되어도 얼른 스마트폰을 통해 누군가에게 연결되려하는 것 역시도 그 때문인지 모른다.

 이런 사회일수록 패러다임의 힘이 강해질 수 밖에 없다. 그것이 개인들에게 소속감을 주기 때문이다. 불안할수록 사회는 보수화된다고 하는데 그 역시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건 위험하다. 역사적으로도 공황이 가져온 불안이 결국은 2차 대전을 일으킨 파시즘을 낳고 말았으니까. 단순히 어딘가 속하고 싶다는 마음은 그릇된 선택을 초래할 수 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어딘가에 소속되는 것이 아니라 자꾸만 그 열망을 양산하는 이 불안의 정체가 무엇인가 파악하는 것이다. 질병은 언제나 그 근원이 되는 요인을 치료해야만 진정으로 완치된다. 우리의 상황도 마찬가지다. 불안의 뿌리가 되는 원인을 제대로 제거하지 않으면 완전한 치유란 없다. 소속감은 그저 잠시의 통증을 없애는 진통제에 불과하다.

 그 불안의 뿌리를 근절하는 것. 그 일을 하는 것이 바로 인문이다. 원래 인문이라는 말을 낳은 르네상스가 그러했던 것처럼. 르네상스는 모든 인간을 하나님의 자녀라는 거대한 소속감으로 통일했던 중세의 어둠을 몰아내고 그 존재 자체로 고유한 가치를 지닌 개인을 건져내었다. 계몽은 빛이 가져온 해방을 뜻하는데 빛은 다름아닌 사물의 개별성을 드러내며 그런 의미에서 계몽이란 개인을 짓누르는 거대한 소속감부터로의 해방이었다. 한 마디로 패러다임을 무너뜨려 그 안에 갇혀있던 개인들을 모조리 다 탈출시킨 것이다. 인문이란 말은 거기서 유래했고 그 힘을 가져온 것 또한 인문이었다. 지금 사람들이 불안을 다스리기 위하여 인문을 찾는 것은 그런 역사적 기억 때문인지도 모른다.

 결국 인문이란 무엇인가? 다르게 보는 것이다. 기존의 틀을 부정하는 것이며 홀로 있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경계 바깥으로 홀연히 넘어갈 수 있는 용기이며 어디든 머무르지 않는 바람이 되는 것이다. 인문은 부정성에 있다. 그 부정을 통해 달리 생각할 수 있고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획득하는 것. 그것이 인문이다.

 한병철의 '투명사회'는 그러한 부정으로서의 인문을 잘 보여준다. '투명사회'는 그동안 우리의 열망이었다. 참 많이도 우리 삶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고 건강과 안전에 직결된 정책들이 그들만의 밀실에서 짬짜미로 이루어지는 것을 보아왔기 때문이다. 모두가 그 과정이 투명하게 공개되길 바랐다. 그게 신뢰의 유일한 근거였기에 더욱 그랬다. 믿을 수 없는 이에게 우리가 흔히 '속을 알 수 없는 놈'이라 말하듯이.

 하지만 한병철은 그걸 오해라고 말한다. 아니 위험한 생각이라 경고한다. 그건 사실 사회가 보다 손쉬운 지배를 위해 바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사회 시스템은 모든 사회적 과정을 조작 가능하게 만들고 신속하게 만들기 위해서 투명성을 강요한다. 가속화의 압력은 부정성의 해체와 궤를 같이한다. 커뮤니케이션은 같은 것끼리 반응할 때, 동일자의 연쇄반응이 일어날 때 최대 속도에 달한다. 다름과 낯섦의 부정성, 타자의 저항은 매끄러운 동일자의 커뮤니케이션을 방해하고 지연시킨다. 투명성은 타자와 이질적인 것을 제거함으로써 시스템을 안정시키고 가속화한다. 이러한 시스템의 강제로 투명사회는 곧 획일적 사회가 된다. 바로 이 점에 투명 사회의 전체주의적 특성이 있다.(p. 14~ 15)

 한병철은 투명하게 된다는 것의 보다 근본적인 모습을 바라본다. 지금 우리가 '세월호 침몰'에서 보듯이 모든 것이 조작 가능한 상황에서 설사 모든 과정이 투명하게 공개된다고 하더라도 그건 환영에 불과하다. 마술과 같다. 마술도 바로 우리 눈 앞에서 행해지며 그만큼 투명하지만 정작 그것이 맹점으로 작용한다. 우리가 눈 앞에서 투명하게 드러나는 과정에 집중하는 사이 정작 트릭을 만드는 다른 손은 보지 못하니까 말이다. 그렇게 우리 앞의 '투명성'이란 이만큼만 보여지도록 허용된 것일뿐 진실 그대로는 아니다. 그러면서도 보여준 이들은 그 조작된 투명성을 가지고 이제 그만 우리의 입을 닫으라 강제한다. 투명성에 집착하는 한 우리는 납득할 수밖에 없고 결국엔 말 잘듣는 청맹과니가 될 수 밖에 없다. 전체주의적 특성이 있다는 말이 괜한 말은 아닌 것이다.

 이런 식으로 한병철의 책은 패러다임을 흔든다. 전작, '피로사회'가 성과주의 패러다임을 흔들었다면 '투명사회'는 '투명성 집착'의 패러다임을 흔든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중세의 패러다임을 흔들었던 르네상스 그대로 진정한 의미의 인문이라 할 만하다. 한병철이 이렇게 뒤흔드는 것은 알게 모르게 현대 사회에 만연된 파시즘적 경향을 대중들에게 경고하기 위해서다. 그건 미세한 테크놀로지로 은밀하게 행해지기에 대중들이 얼른 알아차리지 못한다. 대표적으로 트위터나 페이스북 같은 SNS들이 그렇다.


 오늘날 세계 전체가 하나의 파놉티콘으로 발전한다. 파놉티콘의 외부는 존재하지 않는다. 파놉티콘은 전체가 된다. 내부와 외부를 가르는 벽은 없다. 자유의 공간을 자처하는 구글과 소셜네트워크는 파놉티콘적 형태를 취해간다. 오늘날 감시는 흔히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자유에 대한 공격'이라는 형식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사람들 스스로 자발적으로 파놉티콘적 시선에 자기를 내맡긴다. 사람들은 자기를 노출하고 전시함으로써 열렬히 디지털 파놉티콘의 건설에 동참한다. 디지털 파놉티콘의 수감자는 피해자이자 가해자이다. 여기에 자유의 변증법이 있다. 자유는 곧 통제가 된다.(P. 101 ~ 102)

 투명성은 그동안 자유와 해방의 상징이었지만 이제는 달라졌다. 지금의 투명성이란 통제와 감시의 위장일 뿐이다. 기술은 우리의 일상을 투명하게 드러내도록 도와주었지만 그건 어딘가에서 낱낱이 기록되어 감시의 수단이 되고 있고 기술은 또한 우리를 그 어디든 연결시켜주었지만 그만큼 쉽게 통제의 대상으로 노출시켜 버렸다. 이런 은밀하게 일하는 손이 있지만 우리는 그것을 잘 보지 못한다. 보여지는 현상에만 너무 집착한 탓이다.

 앞서 말했던 대로 인문이란 새로운 시선을 가지는 것이다. 그 전까지는 보지 못했던 곳을 보게 만드는 것. 그것이 인문이다. 유난히 보여지는 것에 집착했던 프랑스의 철학자 메를로 퐁티는 우리에게 보여지는 것은 사실 보여지는 것과 가리워진 것의 접합으로 여겨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제대로 본다고 말할 수 있으려면 보여지는 하나만 보아서는 안된다. 그 배후에 가리워진 것까지도 볼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사실은 모든 걸 보면서도 청맹과니인 것은 이 때문이다. 그 배후의 가리워진 것을 보지 못함이다. 허용하고 조작된 현상만 보고 쉽게 전부라 여기기에 그렇다.

 그러기에 한병철은 제대로 보는 법을 이 책을 통해 보여주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리하여 배후에 가려진 것도 함께 볼 것을 말했던 메를로 퐁티처럼 그 역시 타자를 함께 볼 것을 강조한다. 그도 말한다. 진정한 시선을 타자를 보는 것에 있다고.


 예전에는 더 많은 시선, 사르트르가 말하듯이 타자의 출현을 알리는 시선이 있었다. 사르트르에게 시선은 인간의 눈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오히려 세계 전체를 시선이 있는 존재로 경험한다. 시선으로서의 타자는 도처에 있다.(P. 147)

 디지컬 커뮤니케이션은 시선이 결핍된 커뮤니케이션이다. (...) 문제는 오히려 시선의 근원적인 부재. 타자의 부재에 있다. 디지털 매체는 우리에게서 점점 더 타자를 빼앗아 간다.(P. 149)

 왜 이렇게 타자가 중요한가? 오로지 타자만이 우리의 고유한 주체성을 지켜줄 수 있기 때문이다. 타자의 부재가 전체주의화로 이어지는 것은 그것이 곧 나의 부재이기 때문이다. 나는 홀로 성립되지 않는다. 헤겔이 '정신현상학'에서 잘 논증한 것처럼 타자와의 대면을 통해 나를 객체화하면서 반성적으로 형성되는 것이다. 그래서 헤겔은 자신을 객체화시킬 수 없는 즉자적 존재인 동물과 달리 인간은 대자적 존재라 말했다. 그게 정신이다. 한병철은 이렇게 말한다.


 정신은 타자를 대면할 때 깨어난다. 타자의 부정성이 정신의 생명을 유지한다. 자기 자신과의 관계를 넘어서지 못하는 사람, 자기 속에 틀어박혀 있는 사람은 정신을 가지지 못하는 사람이다. 정신의 특별한 능력은 '자신의 개별적 직접성에 대한 부정을, 무한한 고통을 감내할 수 있다는 데 있다. 타자의 부정성을 완전히 떨쳐버린 긍정성은 죽은 존재로 쪼그라든다. '자기 자신과의 단순한 관계'에서 탈출하는 정신만이 경험을 할 수 있다. 고통이 없고, 타자의 부정성이 없고, 긍정성만 과다한 경우에 경험은 불가능하다. (P. 186~187)

  조르주 아감벤도 현대인의 이러한 경험의 빈곤에 대해 말한 적이 있다. 그래서 아감벤은 현대인은 자전적 경험이라고 할만한 것이 없으므로 현대는 자서전이 불가능한 시대라는 말까지 했다. 철학에서 경험은 자신을 자신답게 해주는 것을 말한다. 주체성을 형성하고 보장할 수 있는 것. 그것이 경험의 진정한 의미다. 그 경험은 대부분 타자와 대면하여 결국은 나 자신을 깍아내는 것이므로 부정의 경험이요, 고통의 경험이다. 그리하여 헤겔은 '정신은 고통이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디지털 커뮤니케이션엔 그런 것이 없다. '좋아요' 버튼만 있는 페이스북처럼 과잉된 긍정만이 있을 뿐이다. 부정의 경험이 없는 긍정은 라캉이 말한 자기가 보는 것을 무조건 나와 동일시하는 상상계의 거울과 같아서 거대한 파문이 만든 하나의 동심원에 불과한 나만 있을 뿐 타자는 없다. 그 타자로 인해 비로소 온전한 주체의 나가 될 수 있는데도 타자는 깨끗이 배제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시선도 없고 경험도 없다. 온갖 정보를 다 습득하지만 진정한 깨달음에 이르지 못하는 이유도 그래서다.

 디지털커뮤니케이션은 쇼핑과 더불어 현대인들이 소속감으로 자신의 불안을 잊으려 널리 하는 행동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다. 하지만 한병철은 그것이 위험한 독약임을 경고한다. 우리는 그것을 자유와 민주주의의 증진으로 생각했지만 한병철은 거꾸로 '감시와 통제가 디지털 커뮤니케이션의 본질적 요소(P.212)'라고 말한다. 그렇게 우리의 굳어진 통념을 흔든다. 이면으로 눈을 돌리게 한다. 이것을 그만하자는 것은 아니다. 지금 우리가 가진 '투명성'이나 '디지털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시각을 그대로 가질 경우 뒤따를 수 있는 커다란 위험을 경고하고자 하는 것이다. 진실은 제안이다. 거기에 은밀히 깃든 어둠을 몰아내고 진정한 자유와 해방의 상징으로 투명성과 디지털 커뮤니케이션을 복원하자는.

 그래서 이제 이 책은 나의 사유를 요청한다. 정신의 진정한 경험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궁극의 목적은 여기에 있지 않을까? '싫어요'의 사유를 하게 만드는 것. 그러한 부정성을 통하여 그동안 묻혀졌던 진정한 나 자신을 한 번 도려내어 보는 것. 강요된 전적인 투과를 거부하는 불투명성의 몸짓을 하는 것. 그러한 도려냄과 몸짓을 통해 '타자'를 헤아려 보는 것. 그것이 이 책이 진정 맞추고 싶은 과녁인지도 모른다.

 그러고보면 불안은 이것이 전부다라고 생각했을 때 더욱 커졌다. 이번 시험이 마지막 도전이라고 여기는 수험생이 더 초조한 것처럼. 네델란드의 철학자 반 퍼슨도 현대에 이르러 죽음이 깨끗이 배제되고 오로지 현세의 삶만이 유일하게 되자 불안 역시도 그만큼 증가했다고 말한 바 있다. 타자를 배제한 채, 지금 있는 여기 그리고 지금 존재하는 나만 절대라고 여길 때 엄습하는 불안의 그림자 역시 더욱 짙어지는 것 같다. 결국 불안이란 외부를 보지 않으려는 눈, 저 너머를 생각하지 않으려는 마음 자체에서 배태되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이제 타자와 대면할 것을 요청하는 이 책의 말들이 더욱 소중해지는 것 같다. 인문이 우리의 불안을 궁극적으로 치유할 수 있다면 그 힘도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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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CAR MINI 마이 카, 미니 - 나를 보여 주는 워너비카의 모든 것
최진석 지음 / 이지북 / 2014년 3월
평점 :
품절



 미니를 선호하는 이들이 많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확실히 그런 모양이다. 이렇게 미니에 대한 애정으로 중무장한 책까지 나온 걸 보면. 한국경제신문사 기자로 있는 최진석의 'MY CAR MINI'가 바로 그 책이다. 나 역시 MINI를 좋아했다. 7년 전 즈음에는. 내가 미니를 처음 본 것은 영화 '미스터 빈'에서였다.  주인공 빈이 몰고다니는 차가 바로 사진의 연두색 미니였다. 정확히는 1977년형 미니쿠퍼였다. 대형차를 선호하는 우리나라에서는 참 볼 수 없는 소형차인지라 어찌나 앙증맞아 보이던지. '빈'을 연기했던 로완 앳킨슨만큼이나 '호오, 저렇게 귀여운 차도 있구나!' 하고 깊이 인상에 남았다. 미니의 진짜 매력을 알게 된 것도 영화 덕분이었다. 바로 '이탈리안 잡'. 흔히 말하는 강탈 장르의 영화였는데 주인공 일당들이 경찰의 추적을 피해 운전하던 차가 바로 이 미니였다. 역시나 미니쿠퍼. 골목 사이를 누비고 계단을 오르내리는 둥. 미니의 장점을 할 수 있는 한 가득 보여주는 영화여서 미니에 대한 매력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이 책에서도 나오는 이야기지만 미니는 역사가 꽤나 깊다. 처음 나온 것이 1959년이다. 우리로서는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왜 이렇게 작은 차를 만들게 되었을까? 계기가 있었다. 바로 1956년 일어난 수에즈 전쟁이다. 그 해, 이집트의 대통령이 바뀐다. 새로 당선된 대통령은 당시까지 이어지던 수에즈 운하에 대한 이집트와 영국 그리고 프랑스와 이스라엘의 공동 경영이라는 기존의 관행을 깨고 이집트만의 국유화를 선언해 버린다. 당시 수에즈 운하는 유럽에 원유를 공급하는 주요 통로였으므로 이같은 이집트의 선언은 당연히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이스라엘의 반발을 부를 수 밖에 없다. 그렇게 수에즈 전쟁이 벌어졌다. 전쟁으로 원유 공급이 줄어들자 유가는 폭등. 사람들은 기름값에 부담을 가지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결국 기름값은 적게 들고 연비는 높은 소형차를 사람들은 원하게 되고 발빠르게 그러한 소비자의 '니즈'를 알아차린 '브리티시 모터 코퍼레이션'은 주 엔지니어 알렉 이시고니스에게 소형차를 만들어줄 것을 요구한다. 그로인해 태어난 것이 바로 '미니'였다. 처음 미니의 길이는 불과 3050MM였다.

 그렇게 작은 차였지만 이시고니스는 성인 네 명이 탈 수 있는데다가 짐까지 실을 수 있도록 설계했다. 작게 만들면서 이렇게 하는 건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시고니스는 이를 위해 앞 바퀴와 뒷 바퀴를 최대한 바깥으로 가게 했다. 그러면 엔진과의 연결이 어려웠다. 당시의 자동차들은 엔진과 바퀴가 세로로 나란히 연결되는 후륜 구동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시고니스는 당시로서는 꽤나 획기적인 발상을 감행했다. 바퀴와 엔진을 수평으로 나란히 연결되도록 한 것이다. 그렇다. 전륜 구동 방식이다. 오늘날의 자동차들이 대부분 채택하고 있는 이 방식은 바로 이 미니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렇게 하여 차체만 작아졌을 뿐, 기능은 별로 줄어들지 않게 되었다. 사람들은 소형에 기름값이 적게들면서도 사람도 짐도 웬만큼 실어 나를 수 있는 이 미니에 열광했다. 그 인기와 자동차의 역사를 바꾼 공로를 인정받아 이시고니스는 후일 영국 여왕으로부터 기사 작위까지 얻게 되었다. 

 

 그렇게 미니는 역사도, 의미도 결코 가볍지 않다. 더구나 이 미니에는 또 하나의 의외의 사실이 존재한다. 바로 미니가 랠리, 즉 자동차 경주를 통해 오늘에 이르렀다는 사실이다. 사실 얼른 보기에 생긴 것도 그렇고, 이렇게나 작은 차가 어떻게 자동차 경주를 할 수 있을까 믿겨지지 않는다. 하지만 사실이다. 미니는 자주 자동차 경주에 쓰였다. 이 미니를 최초로 자동차 경주에 썼던 사람이 바로 존 쿠퍼다. 미니 쿠퍼라는 이름은 그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존 쿠퍼는 미니가 극히 짧은 오버행을 갖는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이것은 앞바퀴와 뒷바퀴가 모두 차의 범퍼 가까이 있게 된 애초의 설계 때문이었는데, 이같이 오버행이 짧아지면 차체에서 바퀴로 가는 반응 속도가 빠르다. 즉 운전자가 원하는 대로 빠르게 차를 움직일 수 있는 것이다. 이같은 미니의 특성은 도로 보다는 핸들을 자주 움직이게 되는 비포장 도로나 산길에서 더욱 유용하다. 과연 거친 산길 경주에서 미니는 두각을 나타내었다. 최근까지도 사하라 사막을 횡단하는, 일명 죽음의 경주라 불리는 다카르 랠리에서 2012년부터 2014년까지 3년 동안 미니는 내리 우승하는 기염을 토했다. 그저 앙증맞은 귀여운 차로만 생각했는데 의외로 이러한 와일드한 면모가 있다니. 그런 반전의 매력이 있어 아직도 많은 이들이 미니의 팬을 자처하는 지도 모르겠다. 여기에는 미니스커트를 세계 최초로 만든 메리 퀀트도 있다. 그녀가 애용하던 차가 다름아닌 미니였다. 미니스커트라는 이름 역시 바로 그 미니에서 온 것이다.

 

 

  물론 저자 최진석도 그 중 한 사람이다. 'MY CAR MINI'는 그의 그러한 애정으로 똘똘 뭉쳐진 책이다. 모두 216 페이지에 이르는 다소 얇은  이 책은 다섯 개의 파트로 구성되어 있는데 처음 부분엔 미니의 메인 컨셉인 'FUN & NOT NORMAL'에 대해서 설명하며 두번째 부분에선 미니의 역사를 세번째 부분에서는 미니의 종류를 설명한다. 네번째 부분에선 메인 컨셉 대로 현재 어떻게 미니를 가지고 FUN 하는 지를 국내 각종 미니 동호회까지 소개해가며 보여주고 마지막 부분에선 실제 미니를 가지고 있는 이를 대상으로 한 차 정비하는 법을 소개한다. 미니에 대해 알고 싶은 사람, 가지고 싶은 사람 그리고 가지고 있는 사람 모두를 망라한 구성이다. 이 책의 부제 대로 '미니의 모든 것'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책이 분량도 적고 내용도 부담 없기에 특히나 가볍게 미니에 대해 알고자 했던 분들에게는 더할 나위없이 적합한 책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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