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행동하게 하는가 - 마음을 움직이는 경제학
유리 그니지 & 존 리스트 지음, 안기순 옮김 / 김영사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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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캘리포니아 대학과 시카고 대학의 행동경제학 교수들인 유리 그니지와 존 리스트가 공저한 '무엇이 행동하게 하는가'는 두 가지 점에서 다른 경제학 책들과 차이가 난다.


  하나는 현상 보다 그것을 유발한 동기에 초점을 맞춘다는 것이다. 

  사회엔 많은 차별이 있다. 인종차별, 성별차별, 계층차별, 학력차별, 연고차별 등등. 살면서 이런 차별을 한 두번 안 당해본 사람이 없을만큼 우리는 차별의 벽에 둘러싸여 살아간다. 도대체 왜 이런 차별이 존재하는 것일까?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당연하게도 천지사방의 참 많은 현자들과 석학들이 사시사철,  불철주야 어떻게 하면 이 차별을 없앨 수 있는지 연구에 연구를 거듭해 왔다. 하지만 들인 그 노력에 비해 누구나 느끼듯이 차별의 한랭전선은 여전히 그대로다. 더러는 이상론에 치우쳤고 더러는 현실에서 전혀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하여 차디찬 눈바람은 아직도 차별의 바깥쪽 사람들을 덜덜 떨게 만들고 있다. 언제나 혹독한 겨울이다.


 경제학도 다르지 않았다. 아담 스미스는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에 맡겨두면 자연스럽게 해결되리라 보았지만 가진자와 가지지 못한자의 간격만 더욱 넓혀주었을 뿐이었다. 마르크스는 자본의 동학을 근본적으로 전복시키려 했지만 오용과 남용 끝에 아직까지도 요원하기만한 꿈으로 남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 경제학은 이곳을 포기해 버렸다. 차별은 유령의 집처럼 분명히 곁에 존재하지만 보아서도, 다가가서도 안되는 영역이 되고 말았다. 신자유주의는 이러한 '의도적 무시'를 정당화시켜 주었다. '얼마나 더 많은 이윤을 창출할 것인가?' 이것을 지상과제로 삼고 달려도 아무런 가책을 느끼지 않도록 다독여 주었다. 자연스럽게 차별은 도저히 풀 수 없는 실타래를 뜻하는 '아포리아'가 되고 말았다. 어떻게도 해결할 수 없는 난제. 이러한 난제의 낙인은 그 차별의 해결에 책임있는 자들에게 그 짐을 덜어주는 효과말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


 갈수록 차별은 가속화되고 있지만 그 반대의 움직임이 더디기만 한 것은 이 때문이 아닐까 싶다. 하여, 유리 그니지와 존 리스트의 작업에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이 아포리아의 영역에 기꺼이 뛰어들었으며 차별을 해결하기 위한 그 실제적 대안까지 아울러 척척 만들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이 행동하게 하는가'는 그런 책이다.


 'THE WHY AXIS'는 이 책의 원제다. 제목 그대로 이 책은 행위의 축인 동기에 중점을 둔다.


 실제적인 차별의 해결을 위해 그들이 바라보는 건 사람을 행동하게 만드는 진짜 동기다. 그들은 그것을 위해 인간을 근본적으로 이익 추구의 존재로 본다. 이기적이라는 게 아니다. 그들은 이기심과 이익 추구를 구별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를테면 착한 일을 하게 되는 경우를 들어보자. 이 행위는 물론 이기적이지 않다. 하지만 착한 일은 대개의 경우 칭찬이나 자신에 대한 자긍심을 높이는 것과 같은 긍정적 결과에 대한 기대도 하기 마련이다. 이것이 바로 이익 추구다. 인간이 행동하는 것은 뭔가 거기에 자신에게 이로운 것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수긍이 된다. 최근 뇌 연구에 의하면 우리의 뇌는 착한 일을 더 선호한다고 한다. 즉 선한 행동을 '쾌'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처럼 인간은 근본적으로 '쾌'를 지향하게 되어있다. 이익추구란 다름아닌 이 '쾌'를 추구하는 행동이다. 그들은 이것을 모든 행위의 동기로 본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 행위자가 진정으로 무엇에 가치를 두고 있는가를 먼저 파악하려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그들은 차별 현상 자체에 뛰어들지 않는다. 그 수면 아래에서 움직이면서 진짜 차별을 낳고 있는 동기를 건져 올리는데 중점을 둔다.


 인종차별주의자로 타고났다기 보다는 차별하는 행동의 뒤에 어떤 동기가 숨어 있는지 알고 싶었다. 차별이 사람들의 삶에 장기적으로 심각한 영향을 미치는 것은 확실하므로 사람들이 매일 활동하는 실물시장에서 차별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파악하고 싶었다. 사람들이 차별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깊이 자리잡은 편견 때문일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을까? (P. 26)


 과연 자연스런 편견일까? 그렇다면 차별은 그대로 '아포리아'로 남게 될 것이다. 콘크리트가 되어버린 편견만큼 참 깨기 어려운 것도 없다는 것은 선거할 때마다 우리가 경험하는 것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저자들에 따르면 물론 아니다. 그건 어떤 동기에서 비롯되어 시간 속에서 집적하여 굳어진 것에 불과하다. 편견은 사상누각이다. 낳게 한 동기만 잘 뒤흔들면 우르르 무너지는.


 이는 사실 중대한 관점의 변화를 초래한다. 책을 읽어보면 분명히 느끼게 되는 사실이다. 우리는 편견을 가진 이를 질타한다. 지금 한국에 널리 유포되고 있는 '국개론'은 그 단적인 현상이라 할 것이다. 한 마디로 '이해못할 족속이다'라는 이름표요 '대화 불가능이다'라는 항복이다. 즉 '아포리아'였다. 그렇게 하면 쉬워진다. '그들을 바꾸기 위해 내가 뭘했던가?'라는 책임에서도 자유로워질 수 있다. 욕만 해도 된다. '그들이 안 변하는데 난들 어쩌겠어?'하면서 양 손바닥을 위로 올리고 어깨짓만 하면 그만이다. 책을 읽으면서 나라고 다르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그랬다. 난 그들을 계몽의 대상자로만 보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내가 가진 게 정답이니 너희는 듣기만 해!'라고만 말하고 있었음을 수긍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면서 더욱 소름이 돋았던 것은 이것이 다름아닌 폭력이었다는 사실이었다. 규정의 폭력. '그들은 생각도 없고 그저 깊은 편견에 사로잡혀 좀비처럼 움직일 뿐이다'라고 내 멋대로 단정지어 버렸던 것이다. 존재를 사물과 같은 비존재로 여겼으니 폭력이 아니고 무엇인가.


 동기를 중시한다 함은 단적으로 그들을 스스로 생각하고 합리적으로 움직이는 존재로 여긴다는 것이다. 이는 내가 제대로 헤아리고 해답을 내렸듯이 그들도 똑같이 그렇게 하고 있음을 상정한다. 다만 출발점이 달랐을 뿐이다. 즉 계몽의 대상이 아니라 대화의 상대자로 인정하는 것이다. 그들은 바꾸어야 할 상대가 아니라 먼저 헤아려야 할 대상이다. 중요한 관점의 변화란 바로 이것이다. 타인을 내 속으로 내재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나를 타인 속으로 내재화 시키는 것. 그들의 눈높이에서 상황을 바라보고 깃든 속마음을 헤아리는 것.

 그렇게 이 책은 진정 변화를 원한다면 무엇보다 기본이 되어야 할 태도를 내게 깨우쳐 주었다. 이것만 해도 내겐 큰 수확이다. 포기와 무시가 사실은 내 약함을 증거하는 것 외엔 아무것도 아니라고 알려 주었으니까.


 진정 그런 것 같다. 아포리아라는 낙인은 내 무력함의 고백에 지나지 않는 것 같다. 그것도 내가 편하자고 하는.

그런 의미에서 '아포리아'는 이제 그만 쉬어도 좋다는 표지가 아니라 내 의지와 지적 근력을 어디까지 트레이닝할 수 있는지 그 도전으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유리 그니지와 존 리스트는 그렇게 했다. 그들은 그 때까지 미답의 영역으로 남아있었던 동기로 뛰어들었고 그것을 위해 이 때까지 경제학자들이 잘 하지 않았던 것을 또 과감하게 실행에 옮겼다.



 그것이 바로 이 책이 가진 두 번째의 차이점이다. 바로 실험이다.

 과거 경제학자들은 통제된 현장 실험에 회의적이었다. 경제계란 무엇보다 수많은 사람과 기업이 살아 움직이는 곳이다. 이는 곧 온갖 돌발 변수가 난무한다는 것을 뜻한다. 반면 실험은 많은 변수를 통제한 가운데 이루어진다. 의도적으로 단순화시킨 현실. 하지만 단순함은 복잡함을 반영할 수 없다. 하여 경제학자들은 외면했다. 그러나 저자들은 통제된 현장 실험을 감행한다. 근저에 깔려있는 믿음은 이것이다. 지금까지의 경제학은 통계의 바탕을 두고 있지만 그 통계란 상관관계만 밝혀줄 뿐, 인과관계를 보여주지는 않는다. 요즘 유행하는 '빅데이터'가 대표적이다.


 '빅데이터'라는 시류가 있다. 엄청난 양의 자료를 수집하여 유형을 관찰하면 흥미 있는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다. 물론 빅데이터는 중요하다. 하지만 이러한 사고방식엔 커다란 문제가 있을 수 있다. 근본적으로 인과관계가 아닌 상호연관성을 근거로 자료에 접근하기 때문이다. 데이비드 브룩스는 이렇게 주장했다.

 "자료 조직 방법과 비교 대상에 따라 상관관계를 가지는 대상은 수도 없이 많다. 무의미한 상관관계에서 유의미한 상관관계를 가려내려면 인과 가설에 의존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P.21 ~ 22)


문제는 경제학은 해답을 찾는 학문이고 여기서 보듯이 해답은 상관관계로 찾아질 수 없다는 데 있다. 예를 들어 '인센티브'가 있다.  사실 정부가 차별이 아포리아라고 해서 손놓고 있는 것은 아니다. 조금이라도 차별을 줄이기 위하여 실제 움직인다. 그런데 방법은 한정적이다. 대부분이 '인센티브'를 주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장애인을 고용하면 세금을 감면해준다든지, 가난한 학생들이 학업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할 수 있도록 열심히 하면 장학금을 준다든지 하는 것들이 대표적이다. 정부만이 아니다. 많은 기업이나 학교 그리고 가정에서조차 사람들을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기 위하여 '인센티브'를 준다. 하지만 효과는 제한적이다. 사실 '인센티브'는 어디까지나 매개다. 원래는 원하는 방향으로 완전히 정착되도록 던져주는 당근에 불과하니까 말이다. 목적은 그것이다. 인센티브는 항구적으로 주어질 수 없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대부분 인센티브가 종료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인센티브는 잠깐의 효과는 기대할 수 있어도 원하는만큼의 변화를 가져오지 못한다. 왜 그럴까? 저자들은 말한다. 인센티브 정책이 대부분 실패하는 것은 그 인과관계를 잘못 보았기 때문이라고. 즉 변화시키려는 대상의 진정한 동기를 파악하지 못했기에 실패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인과관계를 제대로 파악하는 것은 중요하다. 통계는 이걸 줄 수 없다. 더구나 요즘 유행하는 '빅 데이터'는 방대한 양에다 너무 온갖 자료들을 수집한 탓에 변수의 흥미로운 조합이 많아 인과관계를 제대로 설정하기조차 어렵다. 결국 실제 현실을 보여준다고 하여 통계에 기반하더라도 뭔가 의미를 건지려면 실험과 똑같이 변수들을 적절하게 잘라내어 임의적으로 만든 가설에 의존해야 한다. 통제된 현장 실험과 별 다를 바 없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저자들이 이 때문에 실험을 중요한 방법으로 가져오는 것은 물론 아니다. 어차피 이들이 천착하는 것은 동기다. '동기'라는 축은 단순한 상황에 있든 복잡한 상황에 있든 별반 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단순한 상황에서 깃든 동기는 보다 분명한 형태로 드러나기 쉽다. 때문에 통제된 현장 실험은 그들에게 꽤나 유용한 방법인 것이다. 그리고 책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실제로 그들의 방법은 유의미한 결과를 낳았다. 


 이렇게 이전과 차이나는 점, 그 두 개의 축을 가지고 그들은 차별이라는 '아포리아'의 우주로 뛰어든다. 여기엔 모두 8개의 해결하기 힘든 문제가 있다. 남성보다 적은 여성의 급여 문제, 전혀 좁혀지지 않는 성별의 격차를 해결하는 문제, 가난한 학생들이 스스로 공부하게 만드는 문제, 가난한 아이들과 부자의 아이들 사이에 존재하는 학업 차이를 좁히는 문제, 사람들 사이에 여전히 남아있는 차별을 해결하는 문제, 차별을 없애기 위한 공공정책이 왜 그다지 실효를 거두지 못하는 지에 대한 문제, 학교폭력과 아동비만 그리고 지구온난화를 줄이는 문제, 마지막으로 기부금을 증진시키는 문제 등이다. 아직 한 장이 남아있는데 그것은 현장 실험을 행하지 않는 현재의 기업 문화를 타박하는데 할애되어 있다.


 사실 우리 주위에서 일어나는 사회 문제를 다 건드리고 있다고 해도 무방하다. 그것도 과연 이게 해결될 수 있을까 싶었던 문제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현장 실험을 거듭하고 근저에 놓여있는 동기를 파악하기 위해 끝까지 치열하게 고민한다.  무엇보다 그들이 제시한 대안이 실제 효과로 나타났음이 이를 입증하고 있다. 새삼 '강해서 버티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버터셔 강해지는 것이다.'라는 말이 생각난다. 실은 패배주의랄까, 그런 무기력에 절어 있었다. 요즘 주위에 이민가는 이들이 많은데 실은 나도 동조하려고 기회를 엿보고 있던 중이었다. 무시하면 편하다. 나랑 상관없다고 생각하면 지금만큼 좋은 세상도 없다. 그렇게 되려, 닮아지려 했었다. 잊고, 눈감고, 귀막고. 타조처럼.


 타조는 천적이 쫓아오면 달아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냥 땅에다 머리를 쳐박고 애써 보지 않으려 한다. 눈에 보이지 않으면 위험도 없다는 식이다. 우리들도 흔히 하는 실수. 카오스 이론은 북미의 나비 날개짓 한 번이 아시아에 태풍을 몰고올 수도 있다고 말한다. 그만큼 자연계는 작은 한 부분이 커다란 여파를 낳을만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사람의 사회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나랑 상관없는 일들은 없다. 세월호의 희생된 아이들이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들은 모두 '공동운명체'라는 것을. 무시와 포기는 비극을 반복적으로 양산하고 언젠가는 그 희생자의 명단에 내가 오를 것이다. 변화만이 그걸 막는 길이다. 정말 원한다면 나 편하자고 그들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대화하려는 노력을 피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런 걸 생각한다. 다시금 홍상수의 영화 '극장전'에서 김상경이 했던 마지막 대사가 떠오른다. "생각해야 해. 생각만이 날 살릴 수 있어." 예언같다. 포기하지 않는 것. 끝까지 치열하게 고민하는 것. 그것이 바로 나도 살리는 길 같다. 이 문장을 이 책에 대한 소감의 마침표로 삼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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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용사전 - 국민과 인민을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을 위한 철학적 인민 실용사전
박남일 지음 / 서해문집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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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용(御用). 원래는 임금이 쓰는 물건을 뜻하는 말이었다. 그러던 것이 지금은 정부를 위해 일하는, 혹은 권력자의 뜻에 영합하는 이나 행동을 뜻하는 말로 쓰이고 있다. 그대로 정부가 사용하는 물건이 되었다는 뜻일 것이다. 말은 변한다. 언어에 대해서라면 방귀 좀 뀐다는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와 사물이 일대일로 대응한다는 초기의 논리를 철회하고 언어의 의미란 그저 놀이에 불과하다는 것으로 입장을 바꾸었다. 그만큼 정해진 의미가 없는 임의적이고 자의적으로 만들어지는 게 말의 의미라는 것이다. 언어학자로 후일 포스트모더니즘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소쉬르도 말하지 않았던가. 말이란 그저 그릇에 불과할 뿐이라고. 그렇게 기표라 일컬어지는 시니피앙와 의미가 되는 시니피에는 딱히 들어맞지 않고 상황에 따라 분리된다. 그러므로 말해진 바로 그 단어에 우리는 집착해서는 안된다. 말의 진짜 의미는 오로지 맥락으로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일례로 오늘 문참극 사퇴를 두고 한 새누리당 의원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 사람이 친일의 의미로 말하지 않은 것은 국민이 다 안다고. 국민은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데 한 방송국이 악의적으로 부정적인 것만 강조해 보도한 것이라고.  누가, 어떤 국민이 그렇게 이해하는가? 내 주위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발언에 대해 성토했는데. 그렇다면 그 많은 사람은 국민이 아니라는 것인가? 물론 그럴 것이다. 그동안의 새누리 행태로 보아 그들의 머릿속에 존재하는 국민은 그들이 무슨 말을 하고 행동을 하든 그저 좀비처럼 묻지마 지지하는 이들일테니까. 오로지 새누리에 대한 콘크리트 지지를 보내는 이들만이 그들에겐 국민이다. 그 외는 다 종북이고 좌파이며 미개인에다 (한기총의 조광작이란 사람이 말했듯이) 백정이다.


 하지만 이런 맥락적 이해는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 사회생물학자들이 말하듯이 인간의 두뇌란 참으로 귀찮은 일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두뇌란 깊이 헤아리기 보다 바로 보여지는 그 표면만 포착하게끔 만들어져 있다. 다시 말해, 이런 맥락적 이해를 하자면 훈련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 때부터 그랬다. 그래서 만들어진 게 '수사학'이다. 아시다시피 수사학의 전문가들이었던 '프로타고라스'는 당시의 엘리트들이었다. 말을 못하면 관직에 진출하지 못했던 시대라 당연했다. 소위 출세를 하고 싶은 그리스 시민들은 비싼 수업료를 지불하며 수사학을 배워야만 했다. 이렇게 배우고 갈고 닦아야만 하는 능력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러지 않는다. 말은 헤아림의 대상이 아니라 파블로프의 개가 종소리만 들리면 먹이가 있건 없건 침을 질질 흘리듯이 그저 즉각적인 인식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렇게 말은 이성의 영역에서 감성의 영역으로 넘어갔다.


 들뢰즈는 언젠가 말했다. 지금의 시각 중심의 문화가 계속 지속되면 사람들은 머리가 텅 빈 바보가 될 것이라고. 즉 '무사유'의 시대가 도래하리라 내다보았다. 사람의 뇌는 귀찮은 것을 싫어한다. 그래서 인간의 두뇌는 당연하게도 말보다 그림을 선호한다. 보기 좋은 것을 먼저 취하려 든다. 지나친 시각에 대한 선호는 인상만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는 우를 범하게 되었다. 그렇게 감성의 사회가 도래했다. 외모중심사회가 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그 사람이 속하고 뒤에 놓여진 커다란 삶이라는 맥락은 싹둑 잘려나가고 오로지 지금 보이는 모습만이 전부가 된다. 타인만이 아니라 사회도 그렇다. 이번 지방 선거에서 '도와주세요'란 구호를 보라. 사람들은 그것이 나온 맥락, 그들이 원하는 대로 도와주었을 경우 따르게 될 여파 같은 건 생각하지도 않고 그저 '도와달라'는 말에 표를 주었다. 그래서 지금은 세월호 참사의 책임을 지고 사퇴를 한 총리가 헌정 사상 초유의 유임이라는 상식적으로 도저히 납득되지 않는 상황에까지 직면하고 말았다. 상식이 있다면 TV 화면을 붙들고 '오호통재라'를 외칠 수 밖에 없다. 이건 세월호에서 희생당한 이들에 대한 능욕이 아닌가!


 하여,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도대체 왜 빙산의 일각 밖에는 보지 못하는가? 수면 아래 더 커다랗게 존재하는 말의 맥락을 헤아리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 것일까?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타이타닉과 같은 꼴이 날 뿐이다. 수면 위로 드러난 빙산만 보고 무시하고 지나가려다 그 아래에 있는 커다란 빙산에 부딪혀 그만 침몰하고만 타이타닉.


 박남일의 '어용사전'을 보았을 때, 난 정말 이 책이 지금 우리들에게 필요하다고 보았다. 같은 말이지만 처한 계급에 따라 얼마나 달라질 수 있는지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에 나온 말의 의미들이 사전적 정의는 아니다. 그렇지만 읽는 우리들은 이 사전의 의미에 공감하며 그것이 진실임을 안다. 왜냐하면 우리들 역시 새누리 의원이 인터뷰에서 국민을 말할때 느껴지는 것처럼 비록 박남일처럼 매끄럽게 언어로 빚어내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실상 그 말하는 언어의 참모습이 무엇인지는 이미 맥락적으로 이해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이 '어용사전'의 의미들은 그들의 상황과 말투 그리고 행동들을 총체적으로 바라보고 맥락적으로 파악한 의미들인 것이다. 우리도 언젠가 막연히 냄새를 맡았던 것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단순히 이데올로기적으로 교언영색에 불과한 그들의 언어를 교정해주는 것이 아니다. 사실 이 책은 이념 같은 것을 떠나서 보아야 한다. 우리 자체가 얼마나 말의 표면적 의미나 사람이나 사물의 인상에만 집착하고 있으며 또한 진정한 판단이란 오로지 모든 측면을 아우를 수 있는 맥락적 이해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알려주는 책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이 책 자체가 우리에게 절실히 요구되는 맥락적 이해를 위한 하나의 훈련이나 마찬가지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이 책을 기꺼이, 그것도 아주 열렬하게 추천한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엄청난 비용을 들여가며 이 훈련을 했다. 거기에 비한다면 이 책의 한 권 값은 그저 시시한 부담에 불과하리라. 꼭 좀 벗하시고 달리 볼 수 있는 눈을 많이 가지는 것만이 진정 우리를 자유케 하는 길임을 느껴 보시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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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론 이펙트 - 정의로운 인간과 국가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10 그레이트 이펙트 8
사이먼 블랙번 지음, 윤희기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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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서적에서 나오고 있는 '10 그레이트 이펙트' 시리즈라는 게 있다. 역사에 가장 커다란 영향을 끼친 10권의 책을 선정하여 말 그대로 오늘날까지 그것이 어떤 의미와 영향력을 가졌는 지 살펴보는 시리즈인데 '국가론 이펙트'는 그 중 여덟 번째 책이다.


 제목 그대로 이 책은 플라톤의 대표적인 책 '국가론'을 다루고 있다. 정치철학 방면에 있어서 '국가론'이 가지는 의미는 크다. 최초로 '정체'라는 것을 본격적으로 살펴보기 시작한 책이기 때문이다. 플라톤은 여기서 당시 정세적으로 혼돈 상황에 있었던 아테네를 투영하여 보다 굳건한 정치체제의 설립을 사유한다. 현명한 1인의 철인을 중심으로 한 각 자의 덕목에 맞게 주어진 각 자의 직분에 저마다 최선을 다하며 유기적으로 짜여진 체제. 이것이 플라톤이 바라던 국가의 이상적 모델이라는 사실은 널리 알려진 바이다. 하지만 이러한 국가 모델은 늘 독재정치와 전체주의를 가져올 위험이 있다. 원래 플라톤은 귀족주의자에다 엘리트주의자로 그만큼 민주주의를 우매한 대중들에 의한 정치라고 부정적으로 여겼던 그이므로 그러한 위험은 더욱 크다고 하겠다. 아니나 다를까 세계 2차 대전을 일으켰던 히틀러의 나치는 이것을 자신들 체제의 정당성 근거로 내세우기도 했다. 때문에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을 쓴 칼 포퍼는 그 책에서 플라톤의 국가론을 신랄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플라톤은 가지고 있는 영향력이 큰만큼 명암도 뚜렷하게 존재한다.  영국의 유명한 사회철학자이기도 한 사이먼 블랙번은 원래 자신은 플라톤에 대해 회의적이었음을 밝히면서 '국가론'이 가진 명암을 조금의 가감도 없이 객관적으로 서술해 놓는다. 그런 이유로 국가론이 가진 가치와 한계를 살피는 데 가장 좋은 안내서가 나오지 않았나 싶다.


 그렇다고 이 책을 그저 국가론에 대한 해설서라고만 여기면 곤란하다. 사이먼 블랙번은 플라톤이 그 책에서 무엇을 말했나를 중시하기 보다는 오늘에 와서 플라톤이 국가론에서 행한 사유 실험이 어떤 의미가 있을 지에 더욱 천착하기 때문이다. 사이먼 블랙번은 플라톤이 국가론에서 했던 가장 중요한 사유 실험은 어떤 측면에서는 오늘날까지 여전히 유효하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플라톤이 '국가론'에서 가장 비중있게 다루었던 사유 실험은 실제 역사적 사건에서 비롯되었는데 그건 투기디데스의 '펠레폰네소스 전쟁사'에 기록된 아테네의 밀로스 침략이라고 한다. 당시 스파르타로부터 위협당하고 있던 아테네는 다른 속국들이 아테네로부터 이탈하여 힘을 감소시키지 않도록 키클라데스 제도 서쪽에 있는 조그만 섬 국가인 밀로스를 침략한다. '국가론'이 나오기 40년 전의 일로 당시 아테네는 38척의 전함과 1만 명의 병사를 밀로스에게 보냈지만 밀로스에선 고작 500명의 병사가 이에 맞서야 했다. 그만큼 힘의 격차가 있었다. 밀로스는 도덕적 견지에서 이같은 강자가 약자를 함부로 하는 것이 옳지 않음을 들어 자비를 베풀고 물러가 줄 것을 부탁한다. 늘 명예와 정의를 외쳐왔던 아테네였기에 그리했던 것이지만 아테네는 거부한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자기의 이익을 지키느냐 못 지키느냐의 관점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라는 것이다.


좀 추상적인 차원에서 법을 말하자면 거기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하나는 자연법이고 다른 하나는 '노모스'다. 노모스는 흔히 규범이라 번역되는 것으로 어떤 공동체에서만 통용되는 법을 말한다. 이런 이유로 대체로 관습법으로 많이 번역된다. 반면 자연법은 그러한 공동체의 한계를 벗어나 인류 보편의 이성에 따른 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테면 세상 어디에서나 항구적인 모습으로 적용되는 '정의' 같은 것 말이다. 아테네와 밀로스 사이의 논쟁은 그러니까 자연법과 노모스 즉 관습법의 대결이라 할 수 있다. 밀로스는 자연법을 들어 아테네의 침략을 비난했지만 아테네는 자기들만의 노모스를 들어 침략을 정당화한다.


사이먼 블랙번에 따르면 플라톤의 국가론은 이같은 노모스의 한계를 벗어나는 데 있다고 한다. 문제는 노모스가 어떻게 형성되는가 이다. 플라톤은 이것을 내면화의 과정이라 본다. 타인의 시선이 없었다면 노모스가 내부에 자리잡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는 거다. 이러한 내면화된 노모스를 극복하고 어떻게 하면 모두가 자신의 이익을 뛰어 넘어 무사공평한 입장에서 도덕적 행위를 할 수 있을 것인가를 추구하는 것. 그것이 바로 플라톤이 '국가론'에서 비중있게 벌인 사유 실험의 중요한 목표였다고 사이먼 블랙번은 말한다. 따라서 이러한 플라톤의 문제 의식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단적인 예로 세월호의 참사가 이를 증명하지 않는가? 플라톤의 철인은 바로 그러한 무사공평의 견지에서 철두철미하게 이성에 기반하여 도덕적으로 행위하는 자를 뜻한다. 바로 그러한 철인 정치로 나아가기 위해 플라톤은 초반에 노모스의 가장 강력한 대변자인 트라시마코스와 글라우콘을 논쟁에 끌어들이는 것이다. 트리시마코스는 정의는 강자의 이익에 불과하다고 말하고 글라우콘은 '기게스의 반지'를 들어 우리가 도덕을 지키는 본질적인 이유는 그것이 우리에게 이익이 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플라톤의 이들의 관점을 논박하면서 좀 더 자연법적인 의미에서 도덕적으로 행위할 수 있는 자원들을 모아간다.


지금까지 국가론은 어디까지나 정체에 대한 철학으로 이해했다. 그런데 사이먼 블랙번은 여기에 전혀 새로운 빛을 던져주었다. 지금까지도 우리에게 여전히 남아 강한 힘으로 작용하고 있는 '습속적인 것'에 대해 한 가지 중요한 사유의 참조로서 '국가론'을 가져온 것이다. 도덕적으로 산다는 것이 어리석은 자와 동의어가 되는 세상이다. 신념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이익에 야합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치부되는 세상이다. 정의는 강자의 이익에 불과하고 기게스의 반지가 없더라도 타인의 시선에 아랑곳없이 파렴치한 발언을 일삼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그런 자들이 사회의 윗 부분을 차지하고 총리까지 넘보고 있다. 개탄을 후크송의 후렴구처럼 반복하지 않을 수 없는 시대. 어쩌면 오늘의 절망, 오늘의 탄식은 나도 일상에서 늘 저지르고 있는 타협에 근본적으로 배태되어 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그런 타협이나 타산을 늘 방관한다면 나 역시 언젠가 오늘의 괴물들처럼 될 지 모르겠다고.


어떻게 사는 게 옳게 사는 것인가? 지금의 세상은 이러한 질문을 더욱 근본적으로 요청하는 것 같다. IMF는 우리에게 그저 현실적 이익을 쫓는 것만이 진리라고 여기게 했지만 결국 그것이 가져오는 건 지옥 밖에 없음을 우리는 지금 여기서 똑똑히 보고 있는 것 같다. 그 지옥 속에서 무의미한 화염으로 사라지지 않기 위하여 사이먼 블랙번을 경유하여 바라본 '국가론'에서의 물음을 다시 한 번 되새겨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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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 BOOn 3호 - 2014년
RHK일본문화콘텐츠연구소 편집부 엮음 / RHK일본문화콘텐츠연구소(월간지) / 2014년 5월
평점 :
품절




 BOON 3호가 나왔다. 시작은 오사카다. 이제 오사카하면 내게는 애니메이션 '킬라킬'의 '오사카'이다. 난 '천원돌파 그렌라간'을 좋아하는데 그 팀이 나와서 '트리거'란 독립 제작사를 세웠고 거기서 첫 발표한 작품이 바로 '킬라킬'이다.



 지금 장동건 주연으로 개봉중인 '우는 남자'의 원작인 '크라잉 프리맨'의 작가 이케가미 료이치의 1974년작 '남조'를 바탕으로 나가이 고의 '큐티 하니'를 믹스했다고 할만한 작품인데 꽤나 물건이다. 그렌라간이 기조로 내세웠던 열혈물을 좋아한다면 분명 좋아할만한 작품이다. 스토리도 좋다. 무엇보다 도무지 예측 불가한 전개가 마음에 든다. 아무튼 애니메이션의 대부분은 고등학교 혼노지를 무대로 펼쳐지는데 그 혼노지를 다스리고 있는 '일진'이라고 할만한 키류인 사츠키는 일본 전국 재패를 위해 무장 수학 여행을 일으킨다. 한마디로 자신의 휘하에 있는 무장 학생들을 수학여행이란 명목으로 파견하여 다른 도시의 고등학교를 점령하는 것이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오사카'다. 역시 상인의 도시답게 오사카는 돈으로 대항한다. 엄청난 돈을 뿌려 오사카 시민 전체를 대항군으로 만든다.(만화적 과장이 무제한적으로 펼쳐지는 게 이 애니메이션의 장점이다.) 하지만 키류인 사츠키는 돈보다 사람들을 지배할 수 있는 것은 공포라며 그것이 진실임을 보여주겠다면서 압도적인 힘을 과시한다. 정말로 목숨의 위협을 느낀 오사카 시민들은 돈을 내버리고 뿔뿔이 흩어진다.


 이 장면이 인상에 남았던 이유는 이 에피소드가 바로 오늘의 일본을 간접적으로 나타내고 있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분명 그동안 일본을 지배하고 있던 것은 '돈'이었다. 하지만 3.11을 이후로 그건 달라졌다. 이제 일본 시민들을 지배하는 건 '공포'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아베 정부는 돈으로 그 공포를 누르려 하고 있다. 이 오사카 에피소드는 그것에 대한 발언이라고 할 수 있다. '돈 따위가 언제 죽을 지 모르는 공포 앞에서 무슨 소용이란 말이냐!' 이것이다.


 푸코는 80년대 테러리즘의 증가를 목도하면서 장차 '시큐리티'가 법을 능가할 것이라 보았다. 분단체제인 우리에겐 늘 '시큐리티'가 법을 능가했지만('헌법' 위에 존재하는 '국가보안법'은 거기의 가장 대표적인 증거 아닐까? 그 '국가보안법'을 지탱하고 있는 건 오로지 북한으로부터의 시큐리티 확보 하나 뿐이다.) 유럽과 미국에서는 아무래도 예언적 상황이었나 보다. 아무튼 현재 이러한 푸코의 예측은 정확히 맞아 떨어졌다. 9. 11 이후의 미국, 3. 11 이후의 일본 그리고 유럽 할 것 없이 지금 최대의 화두는 '시큐리티의 확보'이니까 말이다. 그 앞에서 법은 간단히 무시된다. 저 미국의 국토안보부가 그렇고 우리나라의 국정원이 그렇듯이. 그런데 우리나라는 최소한의 시큐리티도 확보하지 못하면서 법만 무시하니 문제다.


 NLL 대화록 유출은 국가 안보를 위험에 빠뜨렸지만 유출한 당사자들은 모두 무혐의 처리 되었고, 세월호로 수장된 수백명의 희생자들에 대해선 더 말할 것도 없다. 특히 '세월호'는 시큐리티 보장에 있어 이 정부가 너무도 무능하다는 것을 단적으로 국민들에게 알려주었다. 그런 주제에 법질서마저 마음껏 무시하고 있으니 분노가 치미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번 지방선거는 그 분노의 표출이 될 것이라 여겼으나 뚜껑을 열어본 결과는 아니었다. 그렇지만 이대로 가라앉지 않을 것으로 본다. 차후에 도 여전히 시큐리티의 불안을 해소하지 못한다면 분명 커다란 위기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BOON 3호에 대한 리뷰인데 오사카가 첫머리부터 나오는 바람에 그만 이야기가 딴 데로 새고 말았다. 각설하고, BOON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관심있는 부분은 역시나 메인 요리라 할 수 있는 특집란이다. 이번엔 '오타쿠'다. '오타쿠의 생태학'이란 제목의 특집란에는 모두 네 개의 꼭지가 있는데 <오타쿠? 오타쿠!>라는 제목의 첫 꼭지는 오타쿠란 무엇인가에 대해 말해주고 있고 <취미와 오타쿠>라는 제목의 두번째 꼭지는 일본에서 유행하고 있는 '취미검정열풍'을 통해 사실 오타쿠란 취미검정을 즐기는 보통의 일본인과 다를바 없다면서 비정상인으로 보는 오타쿠에 대한 시각을 교정하고 있으며 세번째인 <'여성 '오타쿠로서 동인녀>는 동인녀를 대상으로 오타쿠의 생태를 관찰하고 있다. 마지막으로는,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롭게 읽은 것인데 ,<소토코모리, 일본 바깥을 떠도는 사람들>로 최근 증가하고 있는 태국이나 인도와 같은 물가가 싼 나라에서 적은 비용으로 장기간 체류하면서 유랑하는 '소토코모리'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이 '소토코모리'에 대해서도 일본 주류의 시각은 오타쿠와 마찬가지로 부정적인데 이 글은 그것의 긍정적 의미를 부여하여 그 시각을 용해시키고 있다.


 개인적으로 기대하기로는 이번 '오타쿠' 특집은 저번호의 3. 11과 연계되어 새로운 대안적 정체성으로서 '오타쿠'를 탐색하는 것은 아닐까 여겼었는데 뒤의 두 글에서도 어느 정도 그런 것이 감지되기는 했으나 보다 전면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은 아니라서 조금 아쉬움이 남았다. 아무래도 일본하면 역시 가장 관심있는 대상이 '오타쿠'이기에 그 관심에 대응한다는 측면에 더 중점을 두고 기획된 특집이 아닐까 싶다.


BOON을 보는 또 하나의 이유인 작가론에서는 이번엔 '무라카미 하루키'와 '아베 고보'를 다루었다. 최근에 '불타버린 지도'를 읽고 넋이 나가버릴 정도로 좋아하게 된 작가가 바로 아베 고보였으므로 반가운 글이었다. 아베 고보의 정체성이라고 할 수 있는 아방가르드적 성향에 대해 말하고 있어 특히 흥미롭게 읽었다. 하루키에 대해서는 웬만큼 읽었다 여겼는데 동성애에 대한 부분은 이전에 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어서 흥미로웠다. 개인적으로 이 코드에 맞춰서 다시금 읽어보고 싶다는 마음까지 생겼다. 더하여 일본 문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괴'에 대해 말해주고 있는 에세이인 '요괴와 공존하는 일본'도 재밌게 읽었다.


BOON에서는 '일본문학출판동향'도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나도 읽었던 윤여일의 '사상의 번역'에 대한 소개가 나와 반가웠다. 글의 대부분은 오에 겐자부로의 '말의 정의'에 할애되고 있는데 나 역시 3. 11 이후의 오에 겐자부로가 궁금한 지라 읽어보고 싶어졌다.


 이렇게 또 한 권의 BOON과 만나 정보에 대한 갈증을 해갈한다. 일본 문화에 대해서 깊이 있게 들여다 보기엔 유일한 매체라 되도록 오래 이어졌으면 좋겠다.


 그리고 읽고나면 늘 다음 호의 특집은 무엇일지 궁금해 지는데 BOON을 아끼는 독자에 대한 작은 배려로서 말미에 '예고편' 같은 것을 좀 실어주면 안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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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4-06-13 19: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옷, 이런 잡지가 다 있군요?
일본은 우리나라의 미래 사회를 반영할 때가 종종 있어서, 흥미가 생기네요.
하지만 구매는 일단 자제, 요즘 제가 또다시 집 청소 중인데 읽지 않은 훌륭한 책들이 가득하더라구요.

선거가 끝나자마자, NLL 대화록 유출 판결 진짜 웃기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유병언 회장 일가가 나쁜 놈인 것은 확실하지만 그것에만 총력을 기울이고 다른 것들은 슬쩍 묻어가려는 최근 행태도 웃기기 짝이 없습니다. 다 묻어가려고 총리도 일부러 그런 사람들만 지명하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면서, ^^, 헤르메스님과 술 한잔 기울이면서 이런 얘기들 하면 아마도 코드가 잘 맞을 것 같네요. 둘이 엄청 열변을 토하려나요?

희선 2014-06-15 0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떤 소설에 일본 사람들이 다른 나라로 떠나서 살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하던데, 여기에는 물가가 싼 나라에 가서 머무는 이야기가 나오는군요 히키코모리 반대, 소토코모리군요 일본말이니 이렇게 된 것이겠지만 재미있군요 사람이 살아있어야 돈도 벌고 이것저것 하고 싶은 일도 하는데... 사람은 아주 작은 차이로 죽을 수도 있어요 죽지 않고 살아있음을 기쁘게 여겨야 할 텐데, 살다보면 그런 것을 잊고 맙니다

요괴와 공존하는 일본 재미있을 것 같군요 아베 고보, 무라카미 하루키 이야기도... 아베 고보는 이름은 알지만 소설은 한권만 봤습니다


희선
 
인문/사회/과학/예술 주목 신간 작성 후 본 글에 먼댓글 남겨 주세요.

  신간평가단을 하면서 한가지 좋지 않은 점은 여행 중에도 갑자기 이렇게 기한이 생각나 새벽에 느닷없이 이렇게 신간 추천을 쓰게 되는 일인 것 같다.


 


 아무튼 5월에 나온 인문 신간중 가장 눈에 번쩍 뜨인 책 중의 하나는 존 힐의 '켄 로치'였다.

 페이지가 무려 560 페이지인데다 부제가 '영화와 텔레비젼의 정치학'인 것을 보면 켄 로치의 감독 경력 전부를 소개하고 있는 듯 하다. 더구나 켄 로치하면 영국국영방송에서 텔레비젼 감독을 하던 초창기부터 영화를 정치적 문법으로 만들어온 감독으로서 감독들 중 가장 정치적인 감독이라고 하여도 무방한데 영화를 통해 아일랜드 정치 문제를 심도있게 분석한 존 힐이라면 켄 로치의 뿌리라 할만한 이런 정치 문제를 잘 다룰 듯도 보인다. 예전 '케스'를 아주 감동 깊게 보았고 아주 최근에 나온 것과 텔레비젼 시절의 몇몇 작품들을 빼고는 거의 다 본 감독으로써 그의 감독 경력을 모두 망라하여 조망하는 이런 책은 아무래도 유혹이 아닐 수 없다. 에이젠쉬타인 이후로 그림자처럼 강하게 결부되었던 영화와 정치에 대해서 한 감독을 통해서 차분히 엿볼 흥미로운 기회를 제공할 것 같다.    





 여행을 와서 그런가 음식에 대한 책이 눈에 들어오는 걸 어찌할 수가 없다. 여행이 가진 매력 중 하나는 그 지방의 향토 음식을 경험하는 것일텐데 그런 음식들을 접하다보면 거기에 담겨진 그 지방의 독특한 문화와 풍습들이 눈에 들어올 때가 있다. 음식 또한 문화적 풍토의 산물이라는 것을 새삼 확인하는 순간이다. 


 이 책은 특이하게도 음식 분야가 아닌 영국의 미디어 연구자들이 공저했다. 그만큼 음식을 문화를 매개하는 미디어의 한 측면으로 접근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5장 이후이다. 음식에 담겨진 국가정체성과 음식의 지구화. 한 번쯤 깊게 읽어보기를 기대했던 내용이다. 이 책이 문화로서의 음식에 대해 보다 풍부하게 들려주게 되기를 기대한다.






 이 책의 저자 김성도는 우리나라에 기호학이라는 것을 가장 처음 알렸던 학자가 아닌가 생각된다. 나도 그의 '기호학이란 무엇인가'로 기호학을 처음 접했던 것 같다. 데리다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그레마톨로지'도 그가 번역했다.


 오래도록 기호학을 연구해온 그가 본격적으로 도시를 기호학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저번 달엔 데이비드 하비의 '반란의 도시'로 정치경제학적으로 바라본 도시를 한 번 경험해 본 터다. 그래서인지 기호학적으로 바라본 도시의 의미는 또 어떻게 다가올지 호기심이 동한다. 인문학적 측면에서 도시가 가진 거의 모든 의미들을 방대하게 다루고 있는 듯 하다. 인문학적 지평으로써의 도시에 대해 제대로 정리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 같다.


 이상으로 6월의 새벽에 느닷없이 호출되듯 박차고 나와 써야했던 5월의 신간추천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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