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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행동하게 하는가 - 마음을 움직이는 경제학
유리 그니지 & 존 리스트 지음, 안기순 옮김 / 김영사 / 2014년 6월
평점 :
캘리포니아 대학과 시카고 대학의 행동경제학 교수들인 유리 그니지와 존 리스트가 공저한 '무엇이 행동하게 하는가'는 두 가지 점에서 다른 경제학 책들과 차이가 난다.
하나는 현상 보다 그것을 유발한 동기에 초점을 맞춘다는 것이다.
사회엔 많은 차별이 있다. 인종차별, 성별차별, 계층차별, 학력차별, 연고차별 등등. 살면서 이런 차별을 한 두번 안 당해본 사람이 없을만큼 우리는 차별의 벽에 둘러싸여 살아간다. 도대체 왜 이런 차별이 존재하는 것일까?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당연하게도 천지사방의 참 많은 현자들과 석학들이 사시사철, 불철주야 어떻게 하면 이 차별을 없앨 수 있는지 연구에 연구를 거듭해 왔다. 하지만 들인 그 노력에 비해 누구나 느끼듯이 차별의 한랭전선은 여전히 그대로다. 더러는 이상론에 치우쳤고 더러는 현실에서 전혀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하여 차디찬 눈바람은 아직도 차별의 바깥쪽 사람들을 덜덜 떨게 만들고 있다. 언제나 혹독한 겨울이다.
경제학도 다르지 않았다. 아담 스미스는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에 맡겨두면 자연스럽게 해결되리라 보았지만 가진자와 가지지 못한자의 간격만 더욱 넓혀주었을 뿐이었다. 마르크스는 자본의 동학을 근본적으로 전복시키려 했지만 오용과 남용 끝에 아직까지도 요원하기만한 꿈으로 남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 경제학은 이곳을 포기해 버렸다. 차별은 유령의 집처럼 분명히 곁에 존재하지만 보아서도, 다가가서도 안되는 영역이 되고 말았다. 신자유주의는 이러한 '의도적 무시'를 정당화시켜 주었다. '얼마나 더 많은 이윤을 창출할 것인가?' 이것을 지상과제로 삼고 달려도 아무런 가책을 느끼지 않도록 다독여 주었다. 자연스럽게 차별은 도저히 풀 수 없는 실타래를 뜻하는 '아포리아'가 되고 말았다. 어떻게도 해결할 수 없는 난제. 이러한 난제의 낙인은 그 차별의 해결에 책임있는 자들에게 그 짐을 덜어주는 효과말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
갈수록 차별은 가속화되고 있지만 그 반대의 움직임이 더디기만 한 것은 이 때문이 아닐까 싶다. 하여, 유리 그니지와 존 리스트의 작업에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이 아포리아의 영역에 기꺼이 뛰어들었으며 차별을 해결하기 위한 그 실제적 대안까지 아울러 척척 만들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이 행동하게 하는가'는 그런 책이다.
'THE WHY AXIS'는 이 책의 원제다. 제목 그대로 이 책은 행위의 축인 동기에 중점을 둔다.
실제적인 차별의 해결을 위해 그들이 바라보는 건 사람을 행동하게 만드는 진짜 동기다. 그들은 그것을 위해 인간을 근본적으로 이익 추구의 존재로 본다. 이기적이라는 게 아니다. 그들은 이기심과 이익 추구를 구별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를테면 착한 일을 하게 되는 경우를 들어보자. 이 행위는 물론 이기적이지 않다. 하지만 착한 일은 대개의 경우 칭찬이나 자신에 대한 자긍심을 높이는 것과 같은 긍정적 결과에 대한 기대도 하기 마련이다. 이것이 바로 이익 추구다. 인간이 행동하는 것은 뭔가 거기에 자신에게 이로운 것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수긍이 된다. 최근 뇌 연구에 의하면 우리의 뇌는 착한 일을 더 선호한다고 한다. 즉 선한 행동을 '쾌'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처럼 인간은 근본적으로 '쾌'를 지향하게 되어있다. 이익추구란 다름아닌 이 '쾌'를 추구하는 행동이다. 그들은 이것을 모든 행위의 동기로 본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 행위자가 진정으로 무엇에 가치를 두고 있는가를 먼저 파악하려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그들은 차별 현상 자체에 뛰어들지 않는다. 그 수면 아래에서 움직이면서 진짜 차별을 낳고 있는 동기를 건져 올리는데 중점을 둔다.
인종차별주의자로 타고났다기 보다는 차별하는 행동의 뒤에 어떤 동기가 숨어 있는지 알고 싶었다. 차별이 사람들의 삶에 장기적으로 심각한 영향을 미치는 것은 확실하므로 사람들이 매일 활동하는 실물시장에서 차별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파악하고 싶었다. 사람들이 차별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깊이 자리잡은 편견 때문일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을까? (P. 26)
과연 자연스런 편견일까? 그렇다면 차별은 그대로 '아포리아'로 남게 될 것이다. 콘크리트가 되어버린 편견만큼 참 깨기 어려운 것도 없다는 것은 선거할 때마다 우리가 경험하는 것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저자들에 따르면 물론 아니다. 그건 어떤 동기에서 비롯되어 시간 속에서 집적하여 굳어진 것에 불과하다. 편견은 사상누각이다. 낳게 한 동기만 잘 뒤흔들면 우르르 무너지는.
이는 사실 중대한 관점의 변화를 초래한다. 책을 읽어보면 분명히 느끼게 되는 사실이다. 우리는 편견을 가진 이를 질타한다. 지금 한국에 널리 유포되고 있는 '국개론'은 그 단적인 현상이라 할 것이다. 한 마디로 '이해못할 족속이다'라는 이름표요 '대화 불가능이다'라는 항복이다. 즉 '아포리아'였다. 그렇게 하면 쉬워진다. '그들을 바꾸기 위해 내가 뭘했던가?'라는 책임에서도 자유로워질 수 있다. 욕만 해도 된다. '그들이 안 변하는데 난들 어쩌겠어?'하면서 양 손바닥을 위로 올리고 어깨짓만 하면 그만이다. 책을 읽으면서 나라고 다르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그랬다. 난 그들을 계몽의 대상자로만 보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내가 가진 게 정답이니 너희는 듣기만 해!'라고만 말하고 있었음을 수긍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면서 더욱 소름이 돋았던 것은 이것이 다름아닌 폭력이었다는 사실이었다. 규정의 폭력. '그들은 생각도 없고 그저 깊은 편견에 사로잡혀 좀비처럼 움직일 뿐이다'라고 내 멋대로 단정지어 버렸던 것이다. 존재를 사물과 같은 비존재로 여겼으니 폭력이 아니고 무엇인가.
동기를 중시한다 함은 단적으로 그들을 스스로 생각하고 합리적으로 움직이는 존재로 여긴다는 것이다. 이는 내가 제대로 헤아리고 해답을 내렸듯이 그들도 똑같이 그렇게 하고 있음을 상정한다. 다만 출발점이 달랐을 뿐이다. 즉 계몽의 대상이 아니라 대화의 상대자로 인정하는 것이다. 그들은 바꾸어야 할 상대가 아니라 먼저 헤아려야 할 대상이다. 중요한 관점의 변화란 바로 이것이다. 타인을 내 속으로 내재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나를 타인 속으로 내재화 시키는 것. 그들의 눈높이에서 상황을 바라보고 깃든 속마음을 헤아리는 것.
그렇게 이 책은 진정 변화를 원한다면 무엇보다 기본이 되어야 할 태도를 내게 깨우쳐 주었다. 이것만 해도 내겐 큰 수확이다. 포기와 무시가 사실은 내 약함을 증거하는 것 외엔 아무것도 아니라고 알려 주었으니까.
진정 그런 것 같다. 아포리아라는 낙인은 내 무력함의 고백에 지나지 않는 것 같다. 그것도 내가 편하자고 하는.
그런 의미에서 '아포리아'는 이제 그만 쉬어도 좋다는 표지가 아니라 내 의지와 지적 근력을 어디까지 트레이닝할 수 있는지 그 도전으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유리 그니지와 존 리스트는 그렇게 했다. 그들은 그 때까지 미답의 영역으로 남아있었던 동기로 뛰어들었고 그것을 위해 이 때까지 경제학자들이 잘 하지 않았던 것을 또 과감하게 실행에 옮겼다.
그것이 바로 이 책이 가진 두 번째의 차이점이다. 바로 실험이다.
과거 경제학자들은 통제된 현장 실험에 회의적이었다. 경제계란 무엇보다 수많은 사람과 기업이 살아 움직이는 곳이다. 이는 곧 온갖 돌발 변수가 난무한다는 것을 뜻한다. 반면 실험은 많은 변수를 통제한 가운데 이루어진다. 의도적으로 단순화시킨 현실. 하지만 단순함은 복잡함을 반영할 수 없다. 하여 경제학자들은 외면했다. 그러나 저자들은 통제된 현장 실험을 감행한다. 근저에 깔려있는 믿음은 이것이다. 지금까지의 경제학은 통계의 바탕을 두고 있지만 그 통계란 상관관계만 밝혀줄 뿐, 인과관계를 보여주지는 않는다. 요즘 유행하는 '빅데이터'가 대표적이다.
'빅데이터'라는 시류가 있다. 엄청난 양의 자료를 수집하여 유형을 관찰하면 흥미 있는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다. 물론 빅데이터는 중요하다. 하지만 이러한 사고방식엔 커다란 문제가 있을 수 있다. 근본적으로 인과관계가 아닌 상호연관성을 근거로 자료에 접근하기 때문이다. 데이비드 브룩스는 이렇게 주장했다.
"자료 조직 방법과 비교 대상에 따라 상관관계를 가지는 대상은 수도 없이 많다. 무의미한 상관관계에서 유의미한 상관관계를 가려내려면 인과 가설에 의존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P.21 ~ 22)
문제는 경제학은 해답을 찾는 학문이고 여기서 보듯이 해답은 상관관계로 찾아질 수 없다는 데 있다. 예를 들어 '인센티브'가 있다. 사실 정부가 차별이 아포리아라고 해서 손놓고 있는 것은 아니다. 조금이라도 차별을 줄이기 위하여 실제 움직인다. 그런데 방법은 한정적이다. 대부분이 '인센티브'를 주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장애인을 고용하면 세금을 감면해준다든지, 가난한 학생들이 학업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할 수 있도록 열심히 하면 장학금을 준다든지 하는 것들이 대표적이다. 정부만이 아니다. 많은 기업이나 학교 그리고 가정에서조차 사람들을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기 위하여 '인센티브'를 준다. 하지만 효과는 제한적이다. 사실 '인센티브'는 어디까지나 매개다. 원래는 원하는 방향으로 완전히 정착되도록 던져주는 당근에 불과하니까 말이다. 목적은 그것이다. 인센티브는 항구적으로 주어질 수 없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대부분 인센티브가 종료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인센티브는 잠깐의 효과는 기대할 수 있어도 원하는만큼의 변화를 가져오지 못한다. 왜 그럴까? 저자들은 말한다. 인센티브 정책이 대부분 실패하는 것은 그 인과관계를 잘못 보았기 때문이라고. 즉 변화시키려는 대상의 진정한 동기를 파악하지 못했기에 실패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인과관계를 제대로 파악하는 것은 중요하다. 통계는 이걸 줄 수 없다. 더구나 요즘 유행하는 '빅 데이터'는 방대한 양에다 너무 온갖 자료들을 수집한 탓에 변수의 흥미로운 조합이 많아 인과관계를 제대로 설정하기조차 어렵다. 결국 실제 현실을 보여준다고 하여 통계에 기반하더라도 뭔가 의미를 건지려면 실험과 똑같이 변수들을 적절하게 잘라내어 임의적으로 만든 가설에 의존해야 한다. 통제된 현장 실험과 별 다를 바 없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저자들이 이 때문에 실험을 중요한 방법으로 가져오는 것은 물론 아니다. 어차피 이들이 천착하는 것은 동기다. '동기'라는 축은 단순한 상황에 있든 복잡한 상황에 있든 별반 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단순한 상황에서 깃든 동기는 보다 분명한 형태로 드러나기 쉽다. 때문에 통제된 현장 실험은 그들에게 꽤나 유용한 방법인 것이다. 그리고 책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실제로 그들의 방법은 유의미한 결과를 낳았다.
이렇게 이전과 차이나는 점, 그 두 개의 축을 가지고 그들은 차별이라는 '아포리아'의 우주로 뛰어든다. 여기엔 모두 8개의 해결하기 힘든 문제가 있다. 남성보다 적은 여성의 급여 문제, 전혀 좁혀지지 않는 성별의 격차를 해결하는 문제, 가난한 학생들이 스스로 공부하게 만드는 문제, 가난한 아이들과 부자의 아이들 사이에 존재하는 학업 차이를 좁히는 문제, 사람들 사이에 여전히 남아있는 차별을 해결하는 문제, 차별을 없애기 위한 공공정책이 왜 그다지 실효를 거두지 못하는 지에 대한 문제, 학교폭력과 아동비만 그리고 지구온난화를 줄이는 문제, 마지막으로 기부금을 증진시키는 문제 등이다. 아직 한 장이 남아있는데 그것은 현장 실험을 행하지 않는 현재의 기업 문화를 타박하는데 할애되어 있다.
사실 우리 주위에서 일어나는 사회 문제를 다 건드리고 있다고 해도 무방하다. 그것도 과연 이게 해결될 수 있을까 싶었던 문제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현장 실험을 거듭하고 근저에 놓여있는 동기를 파악하기 위해 끝까지 치열하게 고민한다. 무엇보다 그들이 제시한 대안이 실제 효과로 나타났음이 이를 입증하고 있다. 새삼 '강해서 버티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버터셔 강해지는 것이다.'라는 말이 생각난다. 실은 패배주의랄까, 그런 무기력에 절어 있었다. 요즘 주위에 이민가는 이들이 많은데 실은 나도 동조하려고 기회를 엿보고 있던 중이었다. 무시하면 편하다. 나랑 상관없다고 생각하면 지금만큼 좋은 세상도 없다. 그렇게 되려, 닮아지려 했었다. 잊고, 눈감고, 귀막고. 타조처럼.
타조는 천적이 쫓아오면 달아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냥 땅에다 머리를 쳐박고 애써 보지 않으려 한다. 눈에 보이지 않으면 위험도 없다는 식이다. 우리들도 흔히 하는 실수. 카오스 이론은 북미의 나비 날개짓 한 번이 아시아에 태풍을 몰고올 수도 있다고 말한다. 그만큼 자연계는 작은 한 부분이 커다란 여파를 낳을만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사람의 사회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나랑 상관없는 일들은 없다. 세월호의 희생된 아이들이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들은 모두 '공동운명체'라는 것을. 무시와 포기는 비극을 반복적으로 양산하고 언젠가는 그 희생자의 명단에 내가 오를 것이다. 변화만이 그걸 막는 길이다. 정말 원한다면 나 편하자고 그들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대화하려는 노력을 피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런 걸 생각한다. 다시금 홍상수의 영화 '극장전'에서 김상경이 했던 마지막 대사가 떠오른다. "생각해야 해. 생각만이 날 살릴 수 있어." 예언같다. 포기하지 않는 것. 끝까지 치열하게 고민하는 것. 그것이 바로 나도 살리는 길 같다. 이 문장을 이 책에 대한 소감의 마침표로 삼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