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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와 하녀 -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마이너리티의 철학
고병권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14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영화 '쉰들러 리스트'에 이런 장면이 있던 게 생각난다. 나치가 유태인을 선별한다. 자신들에게 도움이 되는 기술자만 추려내고 나머지는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보내기 위해서다. 유태인들이 한 줄로 길게 서서 차례차례 자신이 무슨 일을 하는 지 나치 군인들에게 밝히고 있다. 그 줄 어디쯤에 역사학자가 있었다. 평생 역사만 연구해온 노인 학자다. 그는 당당히 역사를 연구했다고 말할 참이다. 그 때, 그를 아는 한 젊은이가 다가오더니 그에게 절대 역사학자라 말하지 말고 냄비 때우는 일을 했다고 말하라 한다. 노인 학자는 자존심에 커다란 상처를 입었다. 평생 고귀한 역사를 공부해 온 나에게 고작 냄비 때우는 일이나 했다고 하라니. 도대체 내가 왜 그래야 하냐고 반문한다. 젊은이는 살고 싶으면 그렇게 말하라고 한다. 고개를 가로젓는 노인. 젊은이는 그러면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고 말한다. 자기가 다 알아서 하겠다고. 결국 노인의 차례가 돌아왔을 때, 젊은이는 이렇게 말한다. 이 분은 말을 할 줄 모르며 평생 냄비 때우는 일을 했다고. 그러자 나치 군인들은 잘됐네. 마침 식당에 때울 냄비가 가득한데 하면서 노인을 차출한다. 노인 학자는 이제 산 것이다. 하지만 노인은 계속 억울한 표정을 지을 뿐이다. 세상에 역사가... 역사를 연구하는 게 이리도 가치가 없다니... 중얼거리며.
극단적은 예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역사는 정작 중요한 순간 별 도움이 안 된다. 철학이라고 다를 것인가? 마찬가지이리라. 역사든, 철학이든 얼른 드는 인상은 실생활과 지극히 유리되어 있다는 것이다. 괜히 상아탑 학문이라고 부르는 게 아니다. 그건 철학이 처음 태어났을 때부터 짊어진 멍에였다. 그걸 우리는 탈레스에 관한 일화를 통해 알 수 있다. 탈레스가 누구인가? 서양철학사를 배울 때 가장 먼저 나오는 이름이 아니던가? 만물의 근원이 무엇인지 근심하여 물이라고 선언한 최초의 철학자. 그렇게 이 이야기는 철학의 태초에 있었던 것이다. 탈레스는 밤이면 하늘에 떠 있는 별들을 즐겨 관찰했다. 그러던 어느날 밤하늘의 별만 바라보며 가다가 그만 발 밑의 우물을 보지 못하고 빠지고 말았다. 그걸 본 트라키아의 한 하녀는 비웃으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멀리 있는 밤하늘의 별들은 잘 보면서 어찌 발 앞의 우물은 보지 못하누."
현장 인문학자 고병권은 이 하녀의 비웃음을 철학의 임무로 여겨야 한다고 말한다. 그의 책, '철학자와 하녀'는 교도소에서 재소자를 대상으로 강의를 하던 도중 한 재소자의 질문 때문에 태어났다. 그 재소자는 저자에게 이렇게 질문했다고 한다.
"왜 우리가 지금 여기서 철학을 공부해야 합니까?"
쉰들러리스트의 역사학자, 트리키아 하녀의 비웃음, 재소자의 질문. 이 모두에서 잘 드러나듯이, 분명 철학과 현실엔 괴리가 있다. 철학은 현실 너머를 쫓으려고 하고 현실은 말뿐인 철학을 자신과 상관없다 여긴다. 철학은 배부른 돼지 보다는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라고 말하지만 현실은 이렇게 배고픈데 철학 나부랭이 따위가 무슨 대수냐고 말한다. 허기를 줄여주지도 못하면서 말이다. 철학은 그런 현실을 우매하다고 하고, 현실은 그런 철학을 신선놀음이라 비아냥 거린다. 간격은 좁혀지지 않는다.
고병권은 이것이 철학과 가난한 사람(나는 이것을 현실이라 부른 것이다.) 모두 불행하게 만든다고 한다.
철학과 가난한 사람이 대립하는 곳에서는 철학도 불행하고 가난한 사람도 불행하다. 철학은 기껏해야 현학적 유희이거나 비현실적 몽상에 불과한 것이 되고, 가난한 사람은 현실 논리를 재빨리 추인함으로써 영리한 노예, 성공한 노예가 될 뿐이기 때문이다.(p. 7)
그러므로 이 같은 불행을 막으려면 단 한 가지 방법 밖에는 없다. 그 간격을 줄여나가는 것이다. 그의 책 '철학자와 하녀'는 바로 그것을 위한 여정이다.
여기에는 전부 6장에 걸쳐 많은 단편적인 이야기들이 있는데 그 아래로 통일되게 흐르는 근본적 태도가 하나 있다. 그건 바로 시각의 전환이다. 이를테면, 누구나 한계라고 생각했던 지점을 오히려 출발이라고 여기는 태도다. 쉽게 발상의 전환이라 해도 좋을 듯 하다. 그건 첫머리에서 그가 철학의 사명을 '지옥에서 아름다운 공동체를 짓는 일'이며 철학은 '현실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라 현실이 중단된 곳, 즉 누구도 뛰어들고 싶지 않아 하는 지옥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이다'라고 말하는 모습에서 이미 드러난다.모두가 'NO'라고 외칠 때, 'YES'를 찾아내려 하는 것. 그것을 저자는 철학이라 여긴다. 아니, 여겨야 한다고 말한다. 진정한 철학은 무엇보다 이미 있는 현실이 아닌, 새로운 현실을 만들어 내는 것이므로.
'철학자와 하녀'는 그렇게 다르게 보기, 생각하기를 제안한다. 이것은 특히 17세기에 많은 철학자나 예술가들이 저마다 앞다투어 신에 대해 언급한 것을 두고 그 의미에 대하여 들뢰즈가 생각한 것을 말하는 부분에서 잘 드러난다. 들뢰즈는 17세기에 스피노자, 데카르트, 말브랑슈, 라이프니츠 등이 한결같이 신에 대해서 말한 것에 흥미를 느꼈다. 물론 그 때까지는 여전히 기독교가 중심이었기 때문에 그랬을 수도 있다. 하지만 들뢰즈는 다르게 생각했다. 시대가 신을 사유하도록 제약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 사유에서 자유와 해방을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들뢰즈는 이렇게 말했다. "신을 통해 회화는 인간적인 것들, 피조물로는 할 수 없었던 것을 할 수 있었을 겁니다. 유한한 것들에서는 사유할 수 없었던 신을 통해 극한까지 가 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 "극한에서는 종교적으로 가장 경건한 화가가 그림을 그릴 때 가장 불경한 사람이 되는 게 가능합니다."(P. 129)
그러니까, 들뢰즈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제약은 구속이 아니라 오히려 해방의 계기라고.
또한 하이데거는 휠덜린의 시구를 인용해 이렇게 말한 적도 있다. "위험이 있는 곳에는 구원의 힘도 자라네"라고(P. 170)
바로 이러한 시각의 전환. 그것이야말로 철학이라는 것이며 우리가 그 태도를 지향할 때, 결국 철학과 현실 사이에 놓여진 간격도 줄일 수 있다고 그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철학자와 하녀'는 이런 책이다. 그것을 하나의 근본 태도로 하여 여름의 수목처럼 가지를 쭉쭉 뻗어나간다. 그 가지의 손 끝에서 개념은 전혀 다르게 정립되고 그 바뀐 의미는 타자를 포용하는 여지를 더욱 넓혀준다. 바람은 언제나 비어있는 공간에 비례해 시원함을 가져다 준다. 자유를 느끼는 감각도 그리 다르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며 우리는 확인하게 될 것이다. 철학은 궁극적으로 자유케 하는 것이라는 걸.
그 자유를 향한 이 책의 여정은 철학을 말하고 있긴 하지만 그리 어렵지 않다. 말은 쉽고 내용은 부담이 없으니 지하철 안에서나 카페에서 사람을 기다릴 때에도 얼마든지 벗할 수 있는 책이다.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이니 틀림없다.
부디, 한 번 벗해보시기를...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