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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와 하녀 -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마이너리티의 철학
고병권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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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쉰들러 리스트'에 이런 장면이 있던 게 생각난다. 나치가 유태인을 선별한다. 자신들에게 도움이 되는 기술자만 추려내고 나머지는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보내기 위해서다. 유태인들이 한 줄로 길게 서서 차례차례 자신이 무슨 일을 하는 지 나치 군인들에게 밝히고 있다. 그 줄 어디쯤에 역사학자가 있었다. 평생 역사만 연구해온 노인 학자다. 그는 당당히 역사를 연구했다고 말할 참이다. 그 때, 그를 아는 한 젊은이가 다가오더니 그에게 절대 역사학자라 말하지 말고 냄비 때우는 일을 했다고 말하라 한다.  노인 학자는 자존심에 커다란 상처를 입었다. 평생 고귀한 역사를 공부해 온 나에게 고작 냄비 때우는 일이나 했다고 하라니. 도대체 내가 왜 그래야 하냐고 반문한다. 젊은이는 살고 싶으면 그렇게 말하라고 한다. 고개를 가로젓는 노인. 젊은이는 그러면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고 말한다. 자기가 다 알아서 하겠다고. 결국 노인의 차례가 돌아왔을 때, 젊은이는 이렇게 말한다. 이 분은 말을 할 줄 모르며 평생 냄비 때우는 일을 했다고. 그러자 나치 군인들은 잘됐네. 마침 식당에 때울 냄비가 가득한데 하면서 노인을 차출한다. 노인 학자는 이제 산 것이다. 하지만 노인은 계속 억울한 표정을 지을 뿐이다. 세상에 역사가... 역사를 연구하는 게 이리도 가치가 없다니... 중얼거리며.


 극단적은 예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역사는 정작 중요한 순간 별 도움이 안 된다. 철학이라고 다를 것인가? 마찬가지이리라. 역사든, 철학이든 얼른 드는 인상은 실생활과 지극히 유리되어 있다는 것이다. 괜히 상아탑 학문이라고 부르는 게 아니다. 그건 철학이 처음 태어났을 때부터 짊어진 멍에였다. 그걸 우리는 탈레스에 관한 일화를 통해 알 수 있다. 탈레스가 누구인가? 서양철학사를 배울 때 가장 먼저 나오는 이름이 아니던가? 만물의 근원이 무엇인지 근심하여 물이라고 선언한 최초의 철학자. 그렇게 이 이야기는 철학의 태초에 있었던 것이다. 탈레스는 밤이면 하늘에 떠 있는 별들을 즐겨 관찰했다. 그러던 어느날 밤하늘의 별만 바라보며 가다가 그만 발 밑의 우물을 보지 못하고 빠지고 말았다. 그걸 본 트라키아의 한 하녀는 비웃으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멀리 있는 밤하늘의 별들은 잘 보면서 어찌 발 앞의 우물은 보지 못하누."


 현장 인문학자 고병권은 이 하녀의 비웃음을 철학의 임무로 여겨야 한다고 말한다. 그의 책, '철학자와 하녀'는 교도소에서 재소자를 대상으로 강의를 하던 도중 한 재소자의 질문 때문에 태어났다. 그 재소자는 저자에게 이렇게 질문했다고 한다.

 "왜 우리가 지금 여기서 철학을 공부해야 합니까?"


 쉰들러리스트의 역사학자, 트리키아 하녀의 비웃음, 재소자의 질문. 이 모두에서 잘 드러나듯이, 분명 철학과 현실엔 괴리가 있다. 철학은 현실 너머를 쫓으려고 하고 현실은 말뿐인 철학을 자신과 상관없다 여긴다. 철학은 배부른 돼지 보다는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라고 말하지만 현실은 이렇게 배고픈데 철학 나부랭이 따위가 무슨 대수냐고 말한다. 허기를 줄여주지도 못하면서 말이다. 철학은 그런 현실을 우매하다고 하고, 현실은 그런 철학을 신선놀음이라 비아냥 거린다. 간격은 좁혀지지 않는다.


 고병권은 이것이 철학과 가난한 사람(나는 이것을 현실이라 부른 것이다.) 모두 불행하게 만든다고 한다.


 철학과 가난한 사람이 대립하는 곳에서는 철학도 불행하고 가난한 사람도 불행하다. 철학은 기껏해야 현학적 유희이거나 비현실적 몽상에 불과한 것이 되고, 가난한 사람은 현실 논리를 재빨리 추인함으로써 영리한 노예, 성공한 노예가 될 뿐이기 때문이다.(p. 7)


 그러므로 이 같은 불행을 막으려면 단 한 가지 방법 밖에는 없다. 그 간격을 줄여나가는 것이다. 그의 책 '철학자와 하녀'는 바로 그것을 위한 여정이다.



 여기에는 전부 6장에 걸쳐 많은 단편적인 이야기들이 있는데 그 아래로 통일되게 흐르는 근본적 태도가 하나 있다. 그건 바로 시각의 전환이다. 이를테면, 누구나 한계라고 생각했던 지점을 오히려  출발이라고 여기는 태도다. 쉽게 발상의 전환이라 해도 좋을 듯 하다. 그건 첫머리에서 그가 철학의 사명을 '지옥에서 아름다운 공동체를 짓는 일'이며 철학은 '현실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라 현실이 중단된 곳, 즉 누구도 뛰어들고 싶지 않아 하는 지옥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이다'라고 말하는 모습에서 이미 드러난다.모두가 'NO'라고 외칠 때, 'YES'를 찾아내려 하는 것. 그것을 저자는 철학이라 여긴다. 아니, 여겨야 한다고 말한다. 진정한 철학은 무엇보다 이미 있는 현실이 아닌, 새로운 현실을 만들어 내는 것이므로.


 '철학자와 하녀'는 그렇게 다르게 보기, 생각하기를 제안한다. 이것은 특히 17세기에 많은 철학자나 예술가들이 저마다 앞다투어 신에 대해 언급한 것을 두고 그 의미에 대하여 들뢰즈가 생각한 것을 말하는 부분에서 잘 드러난다. 들뢰즈는 17세기에 스피노자, 데카르트, 말브랑슈, 라이프니츠 등이 한결같이 신에 대해서 말한 것에 흥미를 느꼈다. 물론 그 때까지는 여전히 기독교가 중심이었기 때문에 그랬을 수도 있다. 하지만 들뢰즈는 다르게 생각했다. 시대가 신을 사유하도록 제약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 사유에서 자유와 해방을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들뢰즈는 이렇게 말했다. "신을 통해 회화는 인간적인 것들, 피조물로는 할 수 없었던 것을 할 수 있었을 겁니다. 유한한 것들에서는 사유할 수 없었던 신을 통해 극한까지 가 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 "극한에서는 종교적으로 가장 경건한 화가가 그림을 그릴 때 가장 불경한 사람이 되는 게 가능합니다."(P. 129)


 그러니까, 들뢰즈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제약은 구속이 아니라 오히려 해방의 계기라고.

 또한 하이데거는 휠덜린의 시구를 인용해 이렇게 말한 적도 있다. "위험이 있는 곳에는 구원의 힘도 자라네"라고(P. 170)


 바로 이러한 시각의 전환. 그것이야말로 철학이라는 것이며 우리가 그 태도를 지향할 때, 결국 철학과 현실 사이에 놓여진 간격도 줄일 수 있다고 그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철학자와 하녀'는 이런 책이다. 그것을 하나의 근본 태도로 하여 여름의 수목처럼 가지를 쭉쭉 뻗어나간다. 그 가지의 손 끝에서 개념은 전혀 다르게 정립되고 그 바뀐 의미는 타자를 포용하는 여지를 더욱 넓혀준다. 바람은 언제나 비어있는 공간에 비례해 시원함을 가져다 준다. 자유를 느끼는 감각도 그리 다르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며 우리는 확인하게 될 것이다. 철학은 궁극적으로 자유케 하는 것이라는 걸.


 그 자유를 향한 이 책의 여정은 철학을 말하고 있긴 하지만 그리 어렵지 않다. 말은 쉽고 내용은 부담이 없으니 지하철 안에서나 카페에서 사람을 기다릴 때에도 얼마든지 벗할 수 있는 책이다.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이니 틀림없다.

 부디, 한 번 벗해보시기를...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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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4-07-19 18: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이 참 좋군요. 오랜만에 한 글자 한 글자 빼지 않고 읽었습니다.

ICE-9 2014-07-20 17:10   좋아요 0 | URL
제게 참 과분한 칭찬 같습니다. 곰곰생각하는발님 정말 감사합니다^ ^

2014-07-23 00: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직업의 지리학 - 소득을 결정하는 일자리의 새로운 지형
엔리코 모레티 지음, 송철복 옮김 / 김영사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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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애틀의 잠 못이루는 밤'이라는 영화를 만나기 전까지 우리들에게도 생소했던 도시 시애틀. 그건 당사자인 미국도 다르지 않아서 시애틀이 미국의 도시냐는 농담이 종종 유행했다고 한다. 그럴만도 한 것이 사실 시애틀은 오래도록 최악의 도시 중 하나였다. 70년대 후반, <이코노미스트>는 시애틀을 '절망의 도시'라고 불렀다. "중고차, 중고 텔레비젼, 중고 주택을 미국에서 가장 싸게 살 수 있는 곳은 워싱턴의 주 시애틀이다. 식료품을 사고 집세를 낼 돈을 마련하기 위해 집집마다 생활에 꼭 필요하지 않은 것이라면 무엇이든 내다 파는 이 도시는 거대한 전당포나 다름없다."라고 말했다. 이런 옥외 광고판까지 등장했다고 한다. "시애틀을 떠나는 마지막 사람은 전등을 꺼주시기 바랍니다." 시애틀은 그런 도시였다. 말하자면 뉴욕과는 정반대의 도시. '시애틀의 잠 못이루는 밤' 포스터에서도 그런 분위기가 감지된다.


 하지만 이런 시애틀의 모습은 이제 과거가 되었다. 지금은 "날씨 빼고는 모든 것이 완벽한 도시'라고 평가 받는다. 집에 있는 중고품이라도 팔아서 연명해야 했던 도시가 이제는 1인당 개인소득이 연간 5만 497달러가 되었다. 그것도 모자라 최근 5년간 개인 소득이 꾸준히 2.6% 증가하는 중이다. 좋은 일자리가 많기로는 미국에서 5위고, 여성 기업가에게 좋기로는 2위이며 첨단 기술 도시 순위에서는 미국에서 당당히 1위이다. 절망의 도시 시애틀은 현재 살기 좋은 도시 중의 하나로 손꼽힌다. 이 사실 앞에서 우리는 아무래도 궁금증을 가질 수 밖에 없다. 도대체 무엇이 이런 변화를 가져왔단 말인가?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지 않는다고 물론 계기가 있었다. 바로 1979년 1월 1일. 마이크로소프트사의 이전이다. 당시 빌게이츠가 설립한 마이크로소프트사는 종업원 13명의 작은 회사였지만 매출은 무려 100만 달러였다. 그것도 날로 증가하고 있었다. 원래는 뉴멕시코주 앨버커키에 있던 마이크로소프트는 그 날 시애틀로 보금자리를 옮겼다. 시애틀은 사업을 하기에 최악의 도시였지만 단 하나의 이유로 빌 게이츠와 폴 앨런은 그것을 감행했다. 바로 자신들의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이유 하나로.


 그 별 것 아닌 동기로 시작된 이전이 결국 시애틀이란 도시를 완전 바꾸어 버렸던 것이다. 원래 마이크로소프트사가 있던 앨버커키와 비교하면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 마이크로소프트사가 이전하기 직전만 해도 시애틀의 대졸 노동자들은 앨버커키보다 겨우 5% 많았다. 하지만 그 이전 후에 그 차이는 점점 벌어졌고 1990년대는 14%나 되었다. 2000년대는 첨단기술의 폭발적 성장과 더불어 무려 35%까지 치솟았다. 거의 미국과 그리스의 차이에 맞먹는 수치였다. 70년대만 해도 모든 것에서 비슷했던 시애틀과 앨버커기. 하지만 이제 시애틀의 노동자들은 앨버커키 보다 1만 4,000달러를 더 받는다. 시애틀은 미국의 소프트웨어 기술자들에게 지급되는 총 급여의 4분의 1을 받지만 앨버커키는 노동자들의 학력 수준이 점점 떨어져 값싼 임금의 질낮은 일자리만 보편화되고 있다.


 이렇게 지역간 격차가 존재한다. 그리고 이제 그 격차는 점점 늘어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직업의 지리학'을 쓴 엔리코 모레티가 주장하는 바다. 그가 확신하는 이유가 있다. 이제 산업의 토양이 전혀 달라졌기 때문이다. '빅뱅 붕괴(우리나라엔 '어떻게 그들은 한순간에 시장을 장악하는가'라는 제목으로 출간된)'를 쓴 래리 다운즈와 폴 누네스의 말대로 이제는 혁신 산업이 시장을 좌지우지 한다. 애플, 구글, 아마존, 페이스북 같은 빅뱅 파괴자들 말이다. 혁신, 즉 새로운 산업 아이템을 만들어 내는 비용은 제조업 중심의 과거보다 지금 훨씬 적어졌다. 바로 통신을 비롯한 첨단 기술의 발전 덕분이다. 거기다 세계화도 한몫 한다. 혁신 기업에게는 시장이 넓으면 넓을수록 수익도 비례해서 커진다. 그것이 이전 기업과 다른 혁신 기업만의 독보적 장점이다. 그 이유는 개발과 연구에 따른 고정 비용만 있을 뿐 정작 생산에는 그리 큰 비용이 들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마이크로소프트사가 윈도우의 새로운 버전을 만들 때, 그 프로그램을 만들기까지에는 엄청난 비용이 들지만 한 번 만들어 놓기만 하면 아무리 그걸 거듭 복사해도 별 다른 비용이 들지 않는다. 겨우 몇 센트의 복사 비용만 가지고 주구장창 프로그램을 팔아 수익을 올릴 수 있다. 이런 특수한 상황 때문에 혁신 기업은 시장이 크면 클수록 수익은 비례해서 커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구글이나 아마존,페이스북도 마찬가지다. 점점 큰 시장이 되어가고 있는 비디오 게임도 그러하다.



 이 때문에 혁신 기업은 오로지 하나의 가치만 중요하다. 이제 예전처럼 교통이나 지대, 혹은 관공서 같은 것들은 더이상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오직 단 하나, 사람만이 중요하다. 혁신 사업에 필요한 사람,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아이템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사람, 미래의 빅뱅 파괴자들. 그런 인적 자원만이 그들의 구미를 당기는 요소가 된다. 페이스북을 만들었던 마크 주커버그의 말 그대로다.


 "자신의 역할에서 특출한 사람은 꽤 잘하는 어떤 사람보다 단지 약간 나은 것이 아니다. 100배 낫다."(p. 106)


 같은 페이지에서 엔리코 모레티는 이 말을 이렇게 설명한다.


 주커버그의 이 언급은 특히 흥미로운 사실을 드러낸다. 혁신 부문의 발전은 재능의 가치 상승과 관련된다. 경제적 가치가 전에 없이 재능에 달려 있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다. 20세기에 경쟁은 물리적 자본 축적에 관한 것이었지만 오늘날에는 최고의 인적 자본 유치에 관한 것으로 바뀌었다.


 이제 사람이 그 무엇보다 중요한 자원이 된다. 아마존의 창립자 제프 베조스가 '월스트리트의 잘 나가는 대형 회사의 이사'를 그만두고 좀 더 커다란 성취를 위하여 '아마존'이란 인터넷 서점을 시애틀에서 차린 것도 그 때문이었다. 시애틀에 자신이 인터넷 서점을 운영하는데 필요한 인재 풀이 마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맞는 풍부한 인적 자원이 그를 그 곳으로 불렀다. 더구나 첨단 기술의 중심이 된 시애틀은 제프 베조스가 하고자 하는 그런 사업에 대한 이해가 높아서 당시만해도 모험이나 다름없었던 사업임에도 불구하고 커다란 투자를 두 번이나 받을 수 있게 했다. 분명 시애틀이 아니었다면 아마존은 이처럼 성공할 수 없었고 이제 아마존은 시애틀을 먹여 살리는 거대 기업이 되었다.


 바야흐로 시장의 중심 세력이 될 혁신 사업은 사람을 최우선 가치로 여긴다. 이제 사람을 중심으로 기업은 재편되고 시애틀처럼 이웃의 학력이 나의 급여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엔리오 모레코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미국 모든 도시에서 지역의 인적 자원과 급여 사이의 관련성이 매우 큰 것으로 드러났다. 실제적으로 한 도시 내에 대졸자 비중이 늘어날수록 같은 도시내 고졸자의 연봉 역시 증가하는 게 확인되었다. 이를 '인적 자원 외부 효과'라 부른다. 학력은 이제 소득 견인의 중요한 요소다.


 하지만 섣부른 오해는 금물이다. 학력 지상주의의 재판(再版) 같은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학력이란 무엇보다도 창의성을 증대하는 것, 즉 이전에 없던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 낼 수 있는 능력에 관계된 학력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나라가 주로 하고 있는 교육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기업에서 시키는 대로 일 잘 할 수 있는 기성품을 찍어내는 교육이 아닌 독창적인 생각과 그것을 실현시킬 수 있는 재능을 키워내는 교육으로서의 학력인 것이다. 제인 제이콥스는 단적으로 이 학력을 '새 일(new work)'을 만들어내는 능력이라 일컫는다.


 엔리코 모레티는 현재 지역적 격차가 날로 확대 일변도에 있음을 보여준다. 시애틀과 앨버커키처럼 인적 자원을 소유하지 못한 도시는 '절망의 도시'가 될 운명을 감수해야 한다. 산업의 풍토는 변했다. 무엇보다 사람이 중요해진 시대가 된 것이다. 페이스북은 2009년 친구들의 온라인 활동을 추적할 수 있게 돕는 회사인 '프렌드피드'를 무려 4200만 달러에 산 적이 있다. 하지만 그만한 돈을 주고서 그들이 원했던 것은 기업이나 기술이 아니었다. 그들이 필요했던 것은 오로지 사람이었다. 프렌드피드의 창업자 브렛 테일러를 비롯해서 눈독 들이고 있었던 제품 관리자와 기술자 12명. 오로지 그들을 자기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페이스북은 4200만 달러를 쓴 것이었다. 이제 이런 일은 보편이 될 것이다. 엔리오 모레티의 '직업의 지리학'은 도시 행정가들에게 자신의 도시를 번영시키려면 무엇보다 창의적 재능으로 무장한 인적 자원을 많이 확보해야 한다는 것을 주지시키겠지만 개인에게는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오리라 생각된다. 그건 바로 그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독보적인 능력을 가지는 것만이 자신이 가치를 높일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을.


 개인의 가치가 커지고 있다. 지금 우리는 조직에 너무 주눅들어 있는 것은 아닌지도 생각해 볼 때다. 이제 정답이 하나뿐인 세상은 지나갔다고 본다. 그 어떤 분야에서든 남과는 다른 생각으로 독보적 능력을 닦는 것. 그것이 가장 안정적인 삶의 동아줄이 되어줄 것 같다. 또한 도시는 이제 그런 존재들에게 더욱 신경쓰고 그 능력을 더욱 잘 발휘할 수 있도록 인프라를 구축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무엇보다 공교육의 정상화는 이를 위한 첫걸음이 될 것이다. 하루 빨리 일반고 전성시대가 되어서 그들의 모든 자질들이 동등하게 존중받고 한껏 개성을 발휘하면서 자랄 수 있도록 지원하는 교육 프로그램이 마련되었으면 좋겠다. 생각보다 개인의 힘은 크다. 그걸 믿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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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를 바꾸려면
오구마 에이지 지음, 전형배 옮김 / 동아시아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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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년 3월 11일. 그 날 일어났던 일본 원전 사태 이후로 일본 국민의 분위기는 완전히 달라졌다. 이전까지만 해도 일본인들은 'JAPAN AS NO.1'이라는 자부심으로 자신이 속한 일본 사회가 전혀 문제가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잘 굴러가고 있다고 여겼다.  버스 안의 얌전한 승객들처럼 핸들을 쥐고 있는 정부를 신뢰하며 이렇다 할 토를 달지 않고 묵묵히 순응하는 편이었다. 그러다 덜컥 사고를 만나게 된 것이었다. 그것도 차량이 전복될만큼의 대형 사고를.


 일본의 또 하나의 자부심이던 안전신화는 여지없이 붕괴되었고 그것을 바탕으로 비판적 여론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원전 사업을 민영화시키고 지속적으로 사업 확장까지 시켜온 정부에 대한 신뢰 역시 그와 함께 가라앉고 말았다. 이제 사람들은 더이상 참지 않았다. 40%라는 초유의 시청률을 보여준 일본 드라마 '한자와 나오키'는 단적인 그 증거였다. 한자와 나오키는 주인공의 이름인데 그는 은행원이다. 조그만 중소기업을 운영하던 아버지가 은행의 악랄한 속임수로 기업은 도산하고 결국 자살까지 하게 되자 복수를 위하여 아버지를 파멸로 이끌었던 은행에 취업한 것이다. 하지만 은행원이 된 동기가 오로지 복수인 것만은 아니었다. 다시는 아버지와 같은 비극을 겪는 사람이 없도록 제대로 된 은행으로 만들겠다는 신념도 있었다. 그러나 그 은행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온갖 악행과 불법을 저지르며 자신의 이익에 반하는 인물은 사전에 잡초처럼 밟아버리는 곳이다. 당연히 신념을 관철하려는 한자와 나오키 앞으로 탐욕에 물든 상사들의 날카로운 발톱이 날아올 수 밖에 없다. 그냥 묵묵히 상사들의 명령에 순응했다면 생채기 하나 안 났을 삶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한자와 나오키는 그러지 않았다. 타인의 눈물을 자아내는 불의가 있다면 결단코 바로잡으려 했다. 조직을 등에 업은 상사들의 발톱은 한자와 나오키에게 꽤나 깊은 상처를 남기고 그는 자주 파면의 위기에 봉착한다. 그러나 그는 굴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런 말을 하면서 더욱 결의를 굳건히 할 뿐이다. 그 말이 바로 '바이가에시'다. '당한만큼 반드시 돌려주겠다!'는 뜻이다. 그것도 백배, 천배로.



 바로 이것이 40%라는, 일본드라마로서는 참으로 경이로운 시청률을 이끌어낸 장본인이었다. 이 말은 원전 사태 이후에 변해버린 일본인들의 마음을 정확히 대변하고 있었다. 원전 사태는 많은 일본인들에게 믿고 순응했던 자신을 바보라고 여기게 만들었다. 더구나 뒤이은 정부의 은폐와 여론 호도 조작은 일본인들을 더욱 아연실색하게 만들었다. 그제야 깨달았다. 국가가 국민을 철저히 무시해왔음을. 가만히 있었더니 진짜 '가마니'로 여기고 함부로 해 왔음을. 한자와 나오키처럼 이를 갈지 않을 수 없었다. '바이가에시'는 그러한 그들의 마음이라 할 수 있었다. 더 이상 무시당하지 않겠다는.


 여기서 무시라는 말을 꺼내게 된 데는 연유가 있다. 바로 이것을 2011년의 '월스트리트 점령 운동'이나 아프리카의 '자스민 혁명'등, 작금에 이르러 거세게 일어나고 있는 변화의 움직임을 가져오고 있다고 말하는 책이 있기 때문이다. 


현대에는 '우리'가 조각조각 흩어진 채 소우주처럼 난립되어 있기 때문에, 이것을 바꾸면 사회가 바뀐다고 공통적으로 여길만한 것을 찾기가 대단히 어렵다. (...) 그러나 현대에 사는 누구나가 공유하는 문제의식은 있다. 그것은 '아무도 내가 말하는 것을 들어주지 않게 되었다', '나는 무시당하고 있다'라는 등의 감각이다. 이것은 수상이든, 고급관료든, 비정규고용자든, 필시 공유하고 있다. 그것을 바꾸면 누구에게나 '사회를 바꾸는' 것이 된다고 말할 수는 없을까? (p. 370)

  

 그것이 바로 62년의 동경에서 태어나 현재는 게이오기주쿠 대학에서 정책학 교수로 있는 오구마 에이지가 쓴 '사회를 바꾸려면'이라는 책이다. '한자와 나오키'의 인기는 그러한 무시당했다는 감각이 일본 저변에 확대되어있음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지 않아도 일본에는 '격차 사회'라는 말이 유행했다. 한 때 '1억명이 중산층'이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인구에 회자될만큼 일본은 그동안 사회적 격차에 대해선 둔감한 편이었다. 그러던 것이 2011년을 기점으로 유행하게 된 것이다. 바로 이 '격차 사회'란 말도 그 감각에서 발현된 것이다. 그걸 어떻게 아느냐 하면 격차에 대한 반감이 향하고 있는 대상을 통해서다. 일본인들의 반감은 '연 수입 10억엔 이상의 큰 부자에게는 향하지 않는다. 이상하게도 연 수입 300만엔 정도의 공무원이나 정사원만이 원망의 대상으로 떠오른다.(p. 371)' 이런 모습은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날로 빈익빈 부익부가 심화되고 있다면서도 우리들 원망의 이빨은 이건희 같은 재벌가들 보다 교사나 공무원 들에게 잘 들이댄다. 왜 그럴까? 바로 여기에 무시에 대한 감각이 깔려 있음을 이 책을 읽고서야 알았다. 대기업의 정사원 그리고 교사나 공무원들이 자주 원망의 화살을 받는 것은 오직 단 하나의 이유 때문이다. 그들이 안정적이라는 것. 즉 그들은 테우리 안에서 보호받고 있다고 사람들은 느끼는 것이다. 격차의 심화는 날로 테우리 안에 보호받는 사람들의 수를 줄였다. 우리나라도 이미 비정규직이 절반을 넘었다. 날로 테우리 바깥으로 떨어져 나가는 이들이 많다. 사회안전망이 부족한 일본이나 전무하다시피한 우리나라에서 테우리 바깥으로 내몰리는 것은 한없는 불안과 마주하는 일이다. 거기서는 생존마저 위태롭다. 오구마 에이지는 말한다. 빈곤이란 사실은 사회 어디에도 자기 자리가 없다는 감각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현대 일본어의 '격차'라는 것은 단순히 수입과 재산의 차이만을 지칭하지 않으며 '나는 무시당하고 있다'라는 감각의, 일본 사회 구조에 입각한 표현이기도 하다고 말할 수 있다.(p. 373)


 그들에게는 설 자리가 없다. 조르주 아감벤이 말한 법의 보호 바깥으로 밀려난 '호모 사케르'인 것이다. 깨끗이 무시된 자들. 원망은 거기에서 비롯되었다. 즉 그들의 원망이란 기실 나도 당당한 사회의 성원으로 인정받고 싶다는 호소에 다름아니었다. 그렇다면 사회를 바꾼다는 것은 진정 어떤 의미인가? 여기에 오구마 에이지는 이렇게 답한다. 되도록 많은 이들이 '무시당하고 있다'는 감각을 가지지 않도록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지향해야 할 사회의 근본된 모습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무엇을 '나를 무시하는 존재'의 상징으로 보는가는 시대마다, 각 사회의 구조마다 다르다. 이 무시의 감각을 지우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현실 사회에 존재하는 구체적 구조의 모습을 알아야 한다. 때문에 그는 책의 시작이 되는 1장에서 지금 일본 사회의 구조부터 살핀다. 그에 따르면 지금 일본 사회는 공업화 사회에서 탈공업화 사회로 변했다. 탈공업화 사회의 특징은 무엇보다 유동하는 정체성이다. 공업화 사회는 '종신 고용'이라는 말처럼 정체성이 안정적이었다. 오구마 에이지에 따르면 '전업 주부'도 공업화의 산물이라고 한다. 원래 일본에는 여성 취업률이 남성보다 높았었는데 이제 공업화 사회로 들어서면서 종신 고용으로 남성들이 안정적으로 임금을 지급받을 수 있게 되자 더 이상 바깥에서 일할 필요가 없게된 여성들은 가사에만 전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종신 고용의 신화가 붕괴된 탈공업화 사회에선 더 이상 그런 안정의 획득이 불가능해졌다. 비정규직 비율은 날로 높아져가고 있으며 대학을 나와도 번듯한 일자리 잡기는 하늘의 별 따기가 되었다. 무엇보다 그동안 일본 성장의 근간이 되었던 제조업이 크게 쇠퇴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제조업들은 임금이 상대적으로 낮은 중국이다 동남아 쪽으로 넘어갔다.  이제 일본은 다른 선진국들처럼 서비스업 종사자의 수가 제조업 종사자의 수를 크게 웃돌게 되었다. 이 서비스업 종사자 수의 증가가 바로 탈공업화 사회의 특징이다. 또한 대부분이 비정규직이다. 탈공업화 사회로 가면 갈수록 비정규직의 비율은 늘어날 수 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노동자들은 공업화 사회만큼 통일된 정체성을 가지기가 어렵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서로에 대해 가지는 생각들이 그러하듯이. 거기다 서비스업은 직종도 또 의복도 천차만별이다. 때문에 정체성은 한없이 산포되고 그만큼 유동적이 된다. 이건 달리 말해 어떤 사안이 터졌을 경우 '이게 내 문제다'라는 감각을 가지기가 어렵다는 뜻이기도 하다. '우리'라는 감각을 만들기가 어려운 사회. 그것이 바로 탈공업화 사회이다. 이는 지금까지의 사회 운동 방법 역시 재고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동안 사회 운동 방식은 어디까지나 '우리'가 쉽게 만들어질 수 있는 것으로 보았다. 당연했다. 그 때까지는 정체성이 어느정도 단일화 되어있고 항구적이었으니까. 하지만 이제 그런 시대는 지나갔다. 너무나 많이 다변화된 정체성으로 '우리'의 문제로 가져오기 어렵게 되었다. 지금 일본은 그러하다. 우리나라 역시 점차 다가가고 있다. 사회 운동의 방법 역시 전면 수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모두가 무시받지 않도록 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하여 '우리'라는 감각을 어떻게 일깨울 것인가? 당연히 들 수 밖에 없는 의문이다. 오구마 에이지는 이를 위해 제법 긴 장을 할애하여 설명한다. 그는 민주주의의 참 의미를 답사하고 자유 민주주의의 한계 지점까지 나아간다. 그러면서 근대 사회와 철학의 역사까지 아울러 훑는데 이러는 까닭이 있다. 근본적으로 탈공업화 사회 자체가 가져다주는 상황의 어려움이다.


 영국의 저명한 사회학자 앤서니 기든스는 이러한 사회의 특징을 무엇보다 '재귀성의 증가'로 꼽았다. 재귀성이 얼른 이해 안되면 '되먹임'으로 생각하면 좋을 것이다. 즉 존재든 사건이든 하나에 그치지 않고 자꾸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재구성해 나간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이것은 훗설의 현상학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다. 훗설은 말하기를 데카르트가 생각했듯이 주체와 객체는 미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지향성' 속에서 사후적으로 구성되는 것이라 하였다. 즉 우리는 고정된 자아로서 타인과 세계라는 객체를 대하는 것이 아니며 그들과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면서 변해간다는 이야기다. 또한 내가 변하면 내가 바라보는 객체도 변하게 마련이니 관계는 고정적이지 않고 가변적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드라마 같은 데서 잘 나오는 이야긴데 앙숙처럼 지내던 남자에게 어느 순간 사랑을 느낀 여자를 생각해 보자. 사랑을 느낀 그녀의 눈에 이제 남자는 더 이상 같은 하늘을 두고 살 수 없는 원수가 아닐 것이다. 예전에는 밉게 보이기만 했던 행동도 이제는 사랑스럽게 다가올 것이다. 이 중, 어느 것이 과연 진짜 그녀일까? 알 수 없다. 하지만 이미 변해버린 그녀는 더 이상 과거의 그녀에게 연연하지 않을 것임은 틀림없다. 훗설은 바로 이것을 말한 것이다. '재귀성'은 바로 이것이다. 나도 너도 매일 변한다는 것이다. 나와 너가 만나 이루는 관계 역시 요동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이 진짜다! 진리다!' 말할 수 없는 시대. 그것이 바로 기든스가 바라보는 탈공업화 사회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모든 것이 흐르는 물처럼 한없이 유동한다고 하여 '액체 근대'라고 부르기도 했다. 오구마 에이지는 이것을 가져와 '우리'라는 감각을 일깨우는 사회 운동 형성의 어려움을 토로하고 있다. 출렁이는 바닷물 위에 하얀 백묵으로 선을 긋는 것과도 같이 어려운 작업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방치할 수는 없다. 변화는 언제나 실제의 시도에서만 발현되기 때문이다.


 그러던 차에 '우리'라는 감각을 가지게 만들 좋은 계기가 닥쳐왔다. 그것이 바로 '원전 사태'다. 오구마 에이지가 특별히 6장을 일본 원전에 할애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바로 그 원전이 지금까지 잠재된 일본이 가진 모든 문제점들을 전면적으로 드러내었고 변화의 정당성을 촉구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원전은 일본인 모두의 생존을 위험하게 만들었기에 '우리'라는 감각을 갖지 않을 수 없게 하였다. 말하자면 원전은 모두가 '나의 문제'라고 여기게 만들어 변화를 위한 소중한 디딤돌이 되어 준 것이다. 이제 중요한 것은 이것을 어떻게 모으고 뻗어나가게 할 것인가에 있다. 그것을 위해 오구마 에이지는 현실 속에서 존재했던 전후 일본의 사회 운동 역사를 참조하려 한다. 지금까지 일본 사회 운동의 역사는 한번도 성공한 적이 없었기에 그건 실패한 역사의 복기에 불과하다. 하지만 타산지석이라고 지나간 운동의 실패는 우리가 어디를 디디면 안되는지는 알려줄 수 있다.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는 조심스러움이 눈에 띈다. 그만큼 이 계기를 놓칠 수 없다는 뜻일테고 그만큼 절박하다는 뜻일 터이다. 비록 재귀성이 한껏 증가하는 탈공업화 사회에서 변화로 흐르게 만드는 사회 운동의 물꼬를 트는 일은 지난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구마 에이지는 행여나 건너가지 못하여 발을 동동 구르는 길손이 있을까 하여 징검다리를 놓는 기분으로 작업을 이어나간다. '사회를 바꾸려면'는 바로 그런 책이다.


그렇지 않아도 이 책은 그 원전 사태 때문에 쓰여졌다. 정작 저자인 오구마 에이지 자신은 원전 사태가 발생했을 때 병원에 입원해 있어 그 사실을 몰랐지만. 어쨌든 원전에 대한 반대운동이 한창 높아져 가고 그만큼 정부의 은폐와 억압 또한 치열해 지던 향후의 추이를 보며 쓰여진 것이다. 말하자면 이 책 역시 '바이가에시'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이 책이 단호한 선언, 뜨거운 호소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차가운 지성의 책이다. 차분하고 냉정하게 논리적으로 그리고 분석적으로 좌초중인 일본 사회를 바꾸려면 진정 어떻게 하면 좋은가를  탐색하고 있는 것이다. 총 439페이지에 도합 9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나름 단단한 뼈대가 엿보인다. 무엇보다 사회를 바꾼다고 이야기할 때 흔히 따를 수 있는 위험인 '탁상공론'이 되지 않도록 만드려는 뼈대가.


 그렇게 이 책은 실천 가능한 대안을 마련하기 위하여 펼쳐진 진지한 모색의 작업이다. 일본 사회의 역사와 서양의 이론들까지 아우르는 내용은 꽤나 풍부하여 읽는 이의 흥미를 돋우고 현실 일본 사회의 구체적 모습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논의는 꽤나 진지하여 이 쪽에 별 관심이 없었던 이들도 읽다보면 여기에 대해 고민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후기에 저자는 자신의 책이 교과서로 읽히지 않고 어디 독서모임 같은 곳에서 토론 거리로 사용되었으면 좋겠다고 피력했는데 과연 거기에 어울려 보인다. 굴비들을 한 쾌로 엮듯 분명 주제의 일관된 흐름이 있지만 그와는 또 별도로 전체에 걸쳐 이것저것 생각할만한 꺼리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기 때문이다. 분명 저마다 다른 유동적인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들이 서로의 마음에 대해 알 수 있게 만드는 하나의 공간을 마련하기 위함일 것이다. 그렇게 이 책은 저자 자신이 말했던 대로 해답이 아니라 촉발이다. 고민의 도착점이 아니라 사유의 출발점인 것이다. 참조할 수는 있으나 구애받을 수는 없다. 오구마 에이지가 내내 설파해온 대로 정답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강 건너편으로 건너가기엔 마지막 징검다리 하나가 빠져 있는 셈이다. 그건 길손인 우리가 놓아야 한다. 이 책을 읽고 고민하는 것 자체가 바로 그 마지막 돌을 드는 것이라 생각한다. 오구마 에이지도 이 책 어디에선가 말했듯이 목소리를 스스로 내지 않으면 누구도 돌아봐주지 않는다. 물론 무시가 점점 보편화되고 있는 세상에서 그건 어렵다. 하지만 어렵기 때문에 더욱 해야 한다는 당위가 성립된다. 그렇지 않아도 독자가 주저할 것임을 예상했던지 오구마 에이지는 다음과 같은 조언이랄까 응원이랄까 하는 말을 해 놓았다.


 부당한 것에는 항의해야 한다는 체험을 이미 해봤고, 막상 해보면 재미있고,그렇게 어렵지도 않다. 바로 그런 습관을 몸에 익힌 사람들이 그만큼 늘어나면 사회는 바뀌게 마련이다.(p. 276 ~ 277)


 무엇이든 처음만 어려운 법이다. 몸에 배이게 되면 더는 고민할 것도 없다. 그 첫 단추를 이 책으로 시작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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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이지 러브 - 하나님과 지독한 사랑에 빠지다
프랜시스 챈 지음, 정성묵 옮김 / 아드폰테스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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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지금 이 땅에서 복음의 불씨를 꺼뜨리고 있는 것은 과학적 의심이나 무신론, 다신교, 불가지론이 아니다. 가장 큰 문제는 교만하고 감각적이고 사치스럽고 형식적인 교인들이 많다는 것이다.(p. 83) 


 미국에 '코너스톤'이라는 교회가 있다. 수입의 반 이상을 무조건 기부하는 것으로 유명해진 교회다. 우리말로 하자면 '모퉁이돌 교회'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유대인들에게 특히 건축에 있어 '모퉁이돌'은 중요한 존재였다. 건축의 모든 시작이 바로 이 '모퉁이돌'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모퉁이돌은 집의 벽을 쌓는 기초였다. 모퉁이돌이 제 역할을 못하면 벽은 제대로 지탱되지 못했고 집은 쉬이 무너졌다. 프랜시스 챈은 1994년 30명의 창립멤버와 함께 교회를 개척하면서 바로 이 이름을 교회에 붙여주었다. 여기엔 보다 깊은 의미가 있었다. 프랜시스 챈은 지금의 기독교가 참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앞에서 인용한 그의 말에는 그가 바라보는 지금의 기독교가 어떤 모습인지 잘 나타나 있다. 왜 그렇게 되었는가? 그는 생각했다. 아무래도 그건 사람들이 가진 속세의 욕망이 너무 커서 그만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 하나님이라는 존재의 참모습이 먹구름 사이에 들어가버린 달처럼 너무 가리워져   버렸다는 데 있는 것 같았다. 영적 건망증이 퍼지고 있었다. 그것이 너무나 퍼져서 하나님은 그저 이름만 남은 존재가 되고 말았다.

 세상 곳곳에 영적 건망증이 퍼지고 있다. 이 병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다.(p. 28)

 그의 말은 이제 의미없는 몸짓에 불과하다. 그가 무슨 말을 하든 희미한 여명에 너울거리는 그림자 연극과도 같이 삶에 아무런 생생한 울림을 가지지 못한다. 말이 빛을 잃자 고삐는 풀려버렸다. 이제 어떤 것을 취하든 부끄럽지 않게 되었다. 태연히 하나님의 뜻이라 주장도 할 수 있게 되었다. 욕망의 경고였던 하나님의 언어는 오히려 욕망을 정당화 하는 것으로 변질되었다. 빈자들을 내쫓고 교회 부지를 넓혀도, 재개발을 노리고 교인과 교회를 사고 팔아도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가난한 집 아이들이 수학여행을 경주 불국사로 가면 될 것이지 왜 배를 타고 가다 이런 사단이 벌어졌는지 모르겠다."와 "대통령이 눈물 흘릴 때 함께 눈물 흘리지 않는 사람은 다 백정"이라고 말해 국민의 공분을 샀던 한기총의 부회장까지 했던 목사는 심지어 무인가 신학교를 나온 인사였다. 이런 일들이 기독교를 부끄럽게 만든다. 그것도 어쩌다 한 번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비일비재하기에 더욱 고개를 못 들게 만든다. 종교는 정작 그 말 보다는 그것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의 모습으로 더 많은 영향을 미치기 마련이다. 로마가 로마에게 있어서는 한낱 사막의 잡신에 불과했던 여호와를 국교로 받아들이게 된 것은 무엇보다 그것을 믿고 있는 사람들의 행동 때문이었다. 그들은 순전히 하나님과 예수가 말하는 바를 지켰다. 가지고 있는 재물을 모조리 나눠주었고 가난한 몸과 마음이 되어 신과 이웃들에게 헌신했다. 로마인들에게 그들의 모습은 진정 별종이었다. 많은 이들이 그들이 여호화를 믿고 머리가 돌아버렸다고 여겼다. 하지만 주위의 괄시와 핍박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모습은 한결 같았고 비웃고 폭력을 휘두르던 자들이 점점 감명받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기독교의 인기는 점점 올라갔고 순교를 각오하고 믿어야했던 기독교는 이윽고 로마의 국교가 되었다. 하나님이라는 존재가 아니라 그 존재를 따르는 사람들의 모습이 그렇게 만든 것이었다. 그렇다면 지금의 기독교에 대한 실망과 오욕(汚辱)도 그러할 것이다. 종교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믿는다는 사람들의 모습이 그렇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프랜시스 챈은 그러기에 새로운 무언가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그건 물론 이제까지의 영적 건망증을 벗어나 하나님이 정말 어떠한 존재인지 제대로 알고 기억하는 것이다. 명목상이 아니라 실제적인 대면이다. 그것이 필요하다고 프랜시스 챈이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보다 그가 신자들의 삶에 가져오려 하는 것 때문이다. 그건 바로 '헌신'이다. 그는 이 헌신이 부족해서 오늘날의 기독교가 이처럼 많은 문제를 가지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는 단순히 무조건 믿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말한 바를 실제 삶에서 실천하는 것을 말한다. 말로만 믿는 것이 아닌 삶으로써 믿는 것. 그것이 바로 프랜시스 챈이 신자들에게 가져다주고 싶은 '헌신'이다. '크,레이지 러브'는 이러한 프랜시스 챈의 마음을 그대로 담아낸 책이다. 제목은 예전에 로마인들이 기독교인들을 보고 느꼈듯이 남들이 미쳤다고 생각할 정도로 하나님과의 사랑에 빠져볼 것을 권하고 있다. 사랑은 맹목을 낳는다. 사랑하는 존재 하나만 보이고 다른 것은 하나도 안 보이기 때문이다. '크레이지 러브'는 그렇게 세속적인 가치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 사랑을 뜻한다.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을까? 때문에 그는 하나님의 존재를 부각시킨다. 정말로 어떤 존재인지 이야기 한다. 그만한 존재이기 때문에 지독하게 사랑해도 문제 없다고.  이쯤되면 무엇이 먼저일까 생각하게 된다.

 경험을 통해 믿게 되는 것일까? 아니면 믿음이 경험마저 달리 보게 만드는 것일까? 전자는 이적을 바라는 마음과 다르지 않고 후자는 도박을 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파스칼이 신의 존재를 두고 내기한 것과 마찬가지다. 칸트를 따르자면 전자는 진짜 사랑이 아니다. 외재적인 조건을 이유로 사랑을 하는 것은 본능을 따르는 동물과 마찬가지여서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의 행위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무런 외재적인 조건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사랑해야 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 그것이 진정한 인간만이 가진 자유 의지의 표현이요, 그렇기에 진정한 사랑이다. '크레이지 러브'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 '심판'에서 변호사로 나왔던 폴 뉴먼은 이런 명대사를 남겼다.

 "신념이 있는 것처럼 믿고 행동하면 언젠가 저절로 신념대로 행동하게 될 것이다."라고.

 진정한 우리를 만들어가는 것은 마음이 아니라 행위다. 타인에게서 받는 인정이 무엇보다 근본 욕망인 우리인지라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는 저 신으로부터의 인정은 날마다 우리를 회의와 번민에 젖게 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땅히 해야 할 바를 몸으로 실천해 나간다면 언젠가는 저절로 그 회의와 번민에서 자유로워질 것으로 믿는다.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게 당위이기 때문에 하는 것. 아마도 이것이 진정한 '크레이지 러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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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살아서 좋아 - 도시 속 둥지, 셰어하우스
아베 다마에 & 모하라 나오미 지음, 김윤수 옮김 / 이지북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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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는 주거 보다는 금융 상품이 되어버린 집. 그 집에 대한 생각이 우리나라도 이제 서서히 달라지고 있다. 특히 젊은 세대들은 집을 기성세대들처럼 더이상 소유의 대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어차피 결혼도 필수가 아닌 살면 한 번 할 수 있는 옵션 같은 것이 아닌가? 가족을 굳이 가지려 하지 않는데 구태여 집을 소유할 이유가 어디에 있겠는가? 더구나 지금처럼 높아진 집값으로 미래를 여지없이 차압당한 채 평생을 은행 이자의 노예로 살 바에야 차라리 집을 소유하지 않고  현재에 충실하며 보다 자유롭게 사는 게 더 현명한 일이다. 누림이 아니라 속박이 되어버린 집. 이제 다른 주거의 라이프 스타일에게로 눈을 돌릴 때도 되지 않았을까 싶다.


 서서히 '셰어 하우스'에 대한 이야기가 들려온다. '룸메이트'라고 그것을 다룬 예능 프로그램도 있다고 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일본에서는 이미 젊은이들 사이에서 셰어 하우스가 유행이라고 들었던 바다. 최근까지도 내내 바닥을 치고 있는 일본 경제. 거기 젊은이들 역시 우리만큼이나 현재는 불안하고 전망은 어둡다. 쥐꼬리만한 수입으로는 우리나라와 엇비슷한 비싼 집값을 감당하기란 불가능이다. 경제적 압박은 일본의 젊은이들로 하여금 다른 활로를 찾게 만들었다. 거기에 등장한 탈출구 중의 하나가 바로 셰어 하우스다.

 아베 다마에와 모하라 나오미는 일본의 보통 젊은이들로서 지금 셰어 하우스를 하고 있는 이들이다. 이들은 그들의 경험에다 나름의 자료 조사와 설문을 거쳐 오늘 일본의 셰어 하우스에 대한 이야기를 한 권의 책으로 담아내었는데 그것이 바로 '함께 살아서 좋아'라는 책이다.

 우리나라의 상황도 일본과 그리 다르지 않은 지라 관심이 가게 되었다. 더구나 현재 일본의 모습은 10년 뒤 우리나라의 모습이라는 말도 있지 않았던가? 물론 지금은 그 격차가 많이 줄어들었을 지 모르지만. 부동산 시장이 지금과 같은 모습이라면 필연적으로 우리에게도 도래할 상황이기에 펼쳐보게 되었다.

 저자들에 따르면 셰어 하우스의 형태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한다. 무엇보다 운영 방법을 기준으로 한 것인데 하나는 DIY 형이고, 다른 하나는 사업체 개재형이다. 이 밖에도 다른 분류가 많지만 내가 보기에 이것이 가장 뚜렷한 분별점을 드러내는 것 같아 특별히 꼽아 보았다. DIY형은 방을 구하려는 사람들이 높은 집세에 대한 비용을 분담하기 위하여 셰어 하우스를 하게 된 유형을 말한다. 즉 자신이 원해서 셰어 하우스 형태를 취한 타입이다. 사업자 개재형은 부동산 회사나 건물주가 셰어 하우스 형태로 건물을 만들고 입주자들을 받아들이는 형태다. 좀 거친 예일지도 모르지만 우리 나라의 '고시원' 같은 것을 생각하면 될 것 같다. 사업자 개재형 셰어 하우스에서만큼은 우리나라가 일본 보다 몇십 년 앞섰던 것 같다. 어쩌면 일본의 사업자 개재형 자체가 우리나라의 고시원을 바탕으로 만들어졌을런 지도 모를 일이다. 믿거나 말거나지만. 하지만 고시원 경험이 있으신 분은 아시겠지만 결코 환영해줄 수 없는 고시원형 셰어 하우스. 당연히 일본의 사업자 개재형은 운영방식이 고시원과는 완전 다르다. 일본의 젊은이들이 셰어 하우스를 찾게 되는 원인은 보통 두가지인데 하나는 앞서 말했듯이 집세 부담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다른 이들과 더불어 살아보고 싶기 때문이다. 사업자 개재형은 특히 두 번째 이유로 셰어 하우스를 하려는 이들을 타겟으로 삼고 있다. 그래서 그들이 원하는 라이프 스타일을 듬뿍 맛보게 하기 위해 친목 도모를 위한 이벤트나 같이 모여서 공부하거나 이런저런 취미 활동을 하는 동아리 모임 같은 활동도 적극 지원한다. 특히나 활발한 정보 공유는 최근 비즈니스 아이디어를 얻으려는 이들이나 비슷한 분야의 사람들과 함께 살면서 이런저런 정보를 얻으려는 이들에게 자신들을 찾게 만드는 커다란 유혹이 되고 있다고 한다. 이같은 사업자 개재형이 유행하게 된 것은 무엇보다 부동산 경기 탓인데 셰어 하우스가 부동산 회사나 임대인들에게 불황으로 나가지 않는 건물들을 새롭게 수익을 창출할 수단이 되어준 것이다. 이런 외적과 내적 요인이 맞물려 사업자 개재형 셰어 하우스는 점차 시장을 넓혀가고 있다고 한다.

 반면 DIY형은 어디까지나 집세 부담이 가장 큰 이유가 된다. 사업자 개재형은 후자가 더 큰 목적이기에 집세 부담도 높다. 사업자 개재형은 회사나 임대인 측에서 쾌적한 공동 생활을 위한 이런저런 방편을 마련해주지만 DIY형은 당연하게도 그런 것이 전혀 없다. 오로지 같이 사는 이들이 전적으로 책임져야 한다. 룸메이트와 더불어 사는 자취 생활이 그렇듯이. 그러므로 DIY형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함께 하는 사람들이다. 성공적인 셰어 하우스가 되느냐 괴로운 추억만 잔뜩 안고 실패한 셰어 하우스가 되느냐는 같이 사는 이들이 공동 생활을 위해 얼마나 남을 배려할 수 있느냐에 달려있다. 그 배려와 협력을 낳게 하는 것이 DIY형에선 가장 중요하다. 그러기 위해선 공동 규칙을 만들고 꼭 지켜야 할 것이 요구되면 가사일을 사람마다 각자 나눠 전담하게 하는 것도 필요하다. 저자들도 DIY형 셰어 하우스를 하고 있기에 이런 것에 대하여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잘 설명하고 있다. 이들만이 아니라 다른 이들의 셰어 하우스 경험도 인터뷰나 설문조사등의 방법으로 싣고 있으므로 현재 타인과 공동생활을 하고 있는 이에게 뭔가 참고할만한 것이 있지 않을까 싶다.

 어쨌든 셰어 하우스는 우리에게도 그리 먼 일은 아닌 것 같다. 현재 부동산 상황이 이렇다면 아마도 조만간 닥쳐오지 않을까 싶다. 뭔가 지금과 다른 라이프 스타일을 추구하고 싶고 거기에 '셰어 하우스'라는 것을 떠올려 과연 세이프 하우스가 무엇인지 그 대략적인 조감도라도 살펴보고 싶었다면 이 책은 좋은 안내서가 되지 않을까 싶어진다. 어쨌든 지금 우리의 라이프 스타일이 많이 굳어진 것은 사실인 것 같다. 이제는 좀 다른 라이프 스타일을 실천적으로 추구할 때도 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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