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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평등의 킬링필드 - “나”와 “우리”와 “세계”를 관통하는 불평등의 모든 것
예란 테르보른 지음, 이경남 옮김 / 문예춘추사 / 2014년 7월
평점 :
품절
첫 문장이 인상적이다. 불평등은 사람을 죽인다. 비유가 아니라 '팩트'다. 미국의 흑인들만 보아도 그렇다. 2008년에 인종과 교육이 결부된 불평등은 그 약자의 위치에 있는 흑인의 수명을 평균 12년 줄였다고 한다. 러시아는 자본주의가 되고 불평등이 심화될수록 사회주의일 때 비해서 사망률이 남자는 49%, 여자는 24% 증가했다고 한다. 물론 사회적 약자들의 수치다. 문자 그대로 불평등은 사람을 죽였다. 전 세계적으로 불평등 계수가 증가할수록 사망률도 늘어났다. 이런 면에서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사회학과 명예교수로 있는 예란 테르보른의 책 제목은 실로 의미심장하다. 그 책 제목처럼 정말로 이 세계는 '불평등의 킬링필드'이니까 말이다.
이제 불평등을 막아야 하는 것은 단순히 잘 먹고 잘 살기 위한 것만은 아니다. 그 보다는 자기 목숨을 지키는 일인 것이다. 혹시 당신은 살만하다고 해서 해당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는가? 그렇지 않다. 1990년대에 영국의 역학자 리처드 윌킨슨은 생명을 위협하는 불평등이 가난하고 교육 수준이 낮은 사람 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 여유롭고 지체 높고 교육 수준이 높은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미친다고 발표했다. 불평등의 생명에 대한 위협은 계층의 고하를 가리지 않는다. 일례로 2005년에 아이즈너와 애번즈는 상대적 박탈감이 건강을 악화시키고 사망률을 높인다는 흥미로운 결과를 내놓았다. 근거로 오스카 상을 받은 배우들이 후보에 올랐다가 고배를 마신 배우들보다 평균 3년 더 오래 살았다는 것을 들었다. 노벨상 수상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수상자들이 그렇지 못한 자들 보다 평균 수명이 더 길었다. 사실 이런 예를 들 필요도 없다. 엄친아의 존재로 인해 고통받는 어린 학생들처럼 우리 역시도 상대적 박탈감이 가져다 주는 스트레스가 얼마나 심한 지는 경험으로도 잘 알고 있으니까.
그런데 불평등의 폐해는 신체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마음에도 악영향을 미친다. 스트레스가 아니라 타인을 믿지 못하는 불신에 대한 것이다. 대체적으로 불평등이 심화될 수록 타인에 대한 불신 역시 커진다고 한다. 국민들의 행복 지수가 가장 높다는 것으로 알려진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의 국민들은 3분의 2가 타인을 믿을만하다고 여기지만 브라질 국민들은 겨우 3%만 그렇다고 생각한다. 불신의 정도가 불평등에 비례하는 것이다. 요즘 우리나라도 타인에 대한 불신이 매우 심해졌다. 이것이 또한 최근 더욱 극심화된 불평등의 효과인지도 모르겠다. 벤지만 디즈데일리는 '국민은 하나가 아니다. 사실은 부자와 빈자라는 두 개의 국민이 있다.'라고 말했다는데 과연 불평등이 그런 역할까지 한다. 불평등이 심할수록 사회 분열마저 가속화되는 것이다. 결국 불평등은 사회로 하여금 화합을 위한 엄청난 사회적 비용을 지불하게 만들어 사회에 위기를 초래한다. 그런데 그 사회적 비용의 대부분은 소수의 재력과 권력 엘리트를 제외한 사회 성원 대다수가 부담한다. 이래저래 불평등이 심화될 수록 '돈 없고 빽 없는' 이들은 물고 뜯기게 되는 것이다. 몸도 상하고 마음도 크게 상처입지만 누구도 돌아봐주지 않는다. 불평등이 심해지면 약자들도 더욱 무시되기 때문이다. 미국이 그렇다. 의원들은 결집도 못하고 로비력도 제로에 가까운 약자들을 자신들이 일해야 하는 대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가볍게 무시한다. 그들은 그저 표가 필요할 때만 의미있는 존재들이다. 분열로 인한 사회적 비용 부담이 증가하게 되면 약자들은 더욱 보호를 받을 수 없다. 거기에 쓸 자원을 사회가 마련하기 어려운 탓이다.
불평등을 줄여야 할 당위는 이렇게 날로 커지고 있다. 그런데 불평등은 하나의 모습이 아니다. 저자에 따르면 불평등엔 모두 세 가지 모습이 있다고 한다. '생명력 불평등', '실존 불평등', '자원 불평등' 이렇게다. 생명력 불평등은 '사회 구조에 속한 인간 유기체가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기회의 불평등'을 의미하고 '실존 불평등'은 자율성, 존엄성, 자유의 정도, 존중받을 권리, 자아를 개발할 권리 등 인격과 관련해 개인이 받을 수 있는 배당의 불평등을 의미한다. 마지막 '자원의 불평등'은 '행위자로서 인간이 활동하는데 필요한 자원을 공평하게 제공받지 못하는 불평등'이다. 이것은 하나의 '퍼스펙티브'로 한 국가나 사회의 평등화 정도를 가늠할 수 있는 기준이기도 하지만 지향해야 할 지점을 말해주기도 한다. 저자에 따르면 이 불평등의 세 가지 모습은 상호 의존적으로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 관계에 있다고 한다. 이런 차원에서 결국 평등 문제는,
발전하고 번성할 수 있는 인간이 능력에 대해 다차원적인 폭력을 휘두르고 인위적으로 방해하는 장치를 해결하는 데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p. 211)
그러한 폭력 혹은 인위적 방해 장치를 저자는 불평등 매커니즘이라 하여 주로 네 가지 행위 범주로 구분하는데 그건 '거리두기','배제', '위계화' 그리고 '착취'다. 이렇게 특정 행위 중심으로 범주적 세분화를 하는 것은 차이와 차별 구별 문제와 같이 불평등을 논의하는데 있어 불평등과 그렇지 않은 것들 사이에 개념 혼동이 일어나고 그로 인해 오히려 불평등한 상황마저 그렇지 않은 것으로 흔히 치부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그는 역사적으로 불평등이 지나온 궤적과 지금 세계의 불평등한 실상을 드러내고 이 불평등을 완화시킬 가능한 대안적 세력과 방법을 탐구한다. 거기서 그는 마르크스가 말했듯이 더이상 산업노동자가 변화의 주축이 될 수 없는 현실임을 분명히 하고 계급적으로 동질한 이들의 연대가 아니라 '사회경제적으로 이질적인 사회적 연대'에 의해 평등의 미래가 좌우될 것이라 내다본다. 거기엔 제3세계의 도시 빈민과 변변한 자기 땅 한 뙈기 없는 농민들이 있으며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서비스업 분야 종사자들과 전문적인 중산층도 포함된다. 게다가 여성이나 소수민족 그리고 동성연애자들까지 저자는 중요한 평등화의 동력으로 생각한다. 아울러 그는 말한다. 예전에는 지배엘리트들도 두려움 때문에 스스로 평등화를 추진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불평등한 자들이 분노하여 폭동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과 그로 인해 국가 전체가 퇴보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러나 저자는 다시 또 이렇게 단언한다. 이제 그렇게 평등을 공급할 수 있었던 세력들은 공급량이 부족해졌다고. 즉 더이상 위로부터의 평등화 노력은 기대하기 어렵게 되었다는 말이다. 이제 남은 길은 단 하나 밖에 없다. 저 이질적인 평등화의 동력들이 연대해 아래로부터 평등화를 가져오는 것. 평등은 이제 투쟁이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인 것이다. 미래는 앞으로 불평등의 결전장이 될 가능성이 높다. 이를 위해 평등의 동력도 반평등의 저항 동력도 전열을 가다듬고 있는 중이다. 이합집산이 되지 않고 제대로 싸우기 위해서는 뭔가 구심점이 필요하다. 투쟁을 선도하고 일사불란하게 조직할 수 있는 세력 같은 것이.
저자는 그 세력을 중산층으로 본다. 이제 자본주의의 핵심 영역에서 산업근로자의 세력이 쇠약해졌기 때문이다. 그는 말한다.
당분간 평등의 기회는 노동운동의 힘과 리더십의 능력이 아니라 중산층의 방향 정립에 따라 좌우될 것이다.(p. 224)
또한 이렇게 덧붙인다.
이런 새로운 21세기 '중산층' 시대가 바로 평등주의자들이 활약할 무대가 되어야 한다. 중산층의 모호한 계급 개념이나 제각각인 규모를 평가하는 문제는 지금으로서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우리의 관심사는 근로자, 농부, 전문가 같은 지배적인 사회적 정체성을 갖지 않은, 가난하지도 부자도 아닌 계층의 사람들이다. 그들은 지금 지구를 소유하라는 요구를 받고 있다.(p. 226)
예란 테르보른이 이렇게 중산층에 기대를 거는 것은 모호하고 어찌보면 텅 비어있는 것도 같은 정체성이지만 오히려 그래서 잘 연대할 수 있으리라 보기 때문인 듯 하다. 무색의 물이 하나로 잘 섞이듯이 말이다. 중산층에 대한 낙관론일 수도 있겠지만 달리 생각해 보면 지극히 현실적 방법론이기도 하다. 차라리 그 모호한 정체성을 디딤돌 삼아 세력을 만들어나가자는 것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작금은 중산층 붕괴의 시대. 세계 어느 나라 할 것 없이 중산층이 여지없이 내려앉고 있다. 과연 이러한 상황 속에서 어떻게 중산층에게 그 역할을 맡길 것인지 좀 더 생각해 보아야 한다. 어쩌면 이 위기 때문에 더욱 중산층이 자기 보호를 위해서라도 단단히 연대하리라 기대하는 것일까? 저자는 아직 여기까지는 나아가지 않았다. 사실 우리나라를 보면 불안한 예감이 든다. 중산층에게 닥친 위기가 오히려 반대의 결과를 낳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가 살고 있는 아파트 집값을 보전하기 위해 불평등을 조장하는 당에게 표를 주는 것으로. 또한 임대아파트와 같이 있는 아파트 주민들이 임대아파트 아이들이 자신의 단지로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학교로 가는 통학로 임에도 불구하고 억지로 문을 달아 막아버리듯 빈자들을 격리시키려 들고 자신의 안전을 위해 점점 게토화 되어가는 형편이니. 그러므로 더욱 생각해야 할 것은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평등화의 염원을 가지고 이성적 판단과 실천적 노력을 할 수 있는 중산층을 키워낼 것인가가 아닐까 싶다. 지금으로 봐선 조금의 희망도 보이지 않는 꽤나 어려운 문제다.
'불평등의 킬링필드'는 이런 이야기다. 불평등의 전모를 밝혀주는 책이라고나 할까? 최근 프랑스의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의 '21세기 자본론'이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었다. 이 책이 초유의 관심을 받았던 것은 불평등한 현실을 상세한 경험적 연구를 통해 적나라하게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이제 불평등은 외면할 수 없는 화두가 되었다. 더구나 수명까지 줄어든다고 하지 않는가? 진지하게 살피고 고민해야 할 시점이 아닌가 싶다. 그를 위한 출발의 책으로 삼을 수 있을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