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석의 문장 한국어 글쓰기 강좌 1
고종석 지음 / 알마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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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궐선거 결과를 보고 하도 열받아 '이 개 같은 나라에서'라고 제목을 썼다가 지웠다. 고종석이 그의 책 '문장'에서 자고로 글은 기품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 퍼뜩 생각났던 것이다. 읽지말 것을 그랬나? 이처럼 은근히 자기 검열을 하게 된다. 그래, 읽었다. 원래 글쓰기마저 이런저런 코치를 받아야 하나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관심이 없었는데 리뷰를 보니 하도 좋다는 말이 많길래 글 솜씨도 없고 귀도 한없이 얇은 나는 덥썩 집어들 수밖에 없었다. 고종석은 '왜 글을 쓰는가?'부터 시작한다. 아, 그 전에 고종석은 이름 뒤에 '씨'를 붙이는 게 좋다고 했는데 난 그냥 생략하련다. 마음이 무간지옥에 빠진 것처럼 착잡하니 그 한 자 쓰는 것도 귀찮아진다. 이러면 또 글의 기품이 없어지는데 아, 모르겠다! 내가 지금 와인 마시는 것도 아니고 소주병 까고 있는데 기품이 어디서 나온단 말인가? 쓰다가 자판 위로 그대로 쓰러져 잠들 지도 모른다. 그러면 알 수 없는 자음과 모음의 수열들이 길게 펼쳐질 것이다. 흐음, 글의 앞은 기품이 흐르는데 뒤는 의미 불명의 긴 뱀꼬리라. 이거, 딱 '용두사미'가 아닌가? 그럴 바에야 한결같은 수준을 유지하는 게 차라리 더 기품을 지니는 길일 것이다. 하여, 자기 검열 따위 던져버리고 내키는 대로 쓰겠다. 당신은 지금 취중 작문의 현장을 보고 있다.


 그런데 지금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중이더라? 아, 맞다. '왜 글을 쓰는가?'였지. 사실은 써 놓은 글을 다시 읽어봤다. 고종석은 조지 오웰이 말한 네 가지의 글쓰는 동기를 가지고 그것을 설명한다. 내 경우로 말하자면 순전한 이기심에서 정치 목적인 동기로 옮겨가는 중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온라인에 지속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이 물만두님 추모 1회 리뷰대회 때였으니까 벌써 몇 년 된 것 같다. 정확히 얼마 되었는 지는 모르겠다. 술기운 덕분인지 기억이 안난다. 처음엔 그저 내가 좋아서 글을 썼었다. 방문자도 별로 없었기 때문에 내가 좋은 쪽으로만 썼다. 누군가에게 읽힌다는 생각은 잘 들지 않았다. 그러다 차츰 방문자 수가 많아지면서 그래봐야 병아리 눈꼽만큼이지만 누군가 읽고 있구나 자각했던 것 같고 내 생각을 전달시키기 위한 쪽으로 글을 썼던 것 같다. 좋아서 쓸 때는 잘 쓰고 싶은 마음도 없었는데 누군가에게 읽히는 글을 쓰자 잘 쓰고 싶은 마음이 솟아나는 걸 어찌할 수가 없었다. 아마도 오래 고여 있었던 그 마음이 결정적으로 이 책을 손에 잡게 한 것 같다. 내가 비록 문외한이긴 해도 예전부터 고종석이 글을 그것도 참 잘 쓴다는 것을 풍문으로 들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던 것 같다.


 책은 이론과 실기의 이중나선처럼 되어 있다. 하나를 설명한 뒤 하나의 실전으로 들어간다. 나는 실전이 재밌었다. 그런데 예전 같으면 분명 나는 뒤에 '개인적으로' 썼을 것이다. 그런데 책의 실전 부분을 보니 '개인적으로'라는 말은 쓰지 말라고 하더라. '나는'을 이미 썼는데 왜 '개인적으로'를 또 쓰냐는 것이다. 그러면서 덧붙였다. '나'가 개인적으로 말하지 집단적으로 말하던가?'라고. 읽는 순간 화끈했다. 자주 그런 표현을 썼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니 맞는 말 같아서 앞으로는 그러지 않기로 작정했다. 이처럼 시시콜콜하게 지적해 주어 난 실전을 흥미롭게 읽었다. 의외로 고쳐야 할 습관이 많아서 지금까지 내 글을 읽은 얼굴 모르는 모두에게 아주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좋은 글 쓰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의성어도 많이 배우고 색깔을 표현하는 말들도 많이 배우겠습니다. 되도록 중언부언 하지 않고 접속사는 꼭 필요한 경우 아니면 생략해서 문장과 문장 사이가 긴장을 낳도록 하겠습니다. 일본어에서 유래된 '의','적' 표현도 가급적 삼가고 말이죠.


 이런. 하나하나 열거하다 보니 책을 글 쓸때마다 사전처럼 옆에 놓아두어야 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그만큼 실전의 시시콜콜은 유용하다는 의미다. 소주가 바닥났다. 새벽에 이게 뭐하는 짓이야? 자조가 든다. 랭보처럼 지옥에서 한 철을 보내고 있는 것 같다. 이런 상황에 글쓰기 따위가 다 무슨 소용이람 하는 생각도 든다. 위안도 희망도 안 된다. 그렇지 않은가? 오웰의 네 가지 동기는 하나만 빼고 다 헛소리인지도 모른다. 적어도 한 개인의 순수한 글쓰기에 있어서만큼은. 그 하나는 순전한 이기심이다. 결국은 제자리로 돌아온 것인가? 그래도 어쨌든 글은 남이 아니라 나를 위해서 쓰는 것 같다. 지금만큼은 이 지옥을 버티려고, 끝까지 버티려고 쓰는 것 같다. 다른 무언가로 뛰어들어서 이 짊어진 현실의 중력을 피하기 위해서 쓰는 것 같다. 정말로. 발 앞에 쓰러진 소주병처럼. 깨지지 않고 계속 뒹굴거리기 위해. 맞는 비유인건가? 여하튼 지금 내 생각은 그렇다. 사이먼과 가펑클은 험한 세상의 다리가 노래이길 바라고 나는 글이기를 바란다. 힘들면 힘들수록 많이 쓰길 바란다. 스티븐 킹이 말하길 글은 엉덩이로 쓴다고 했다. 이 참에 그 쪽 근육도 키워놓을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리뷰란 결국 한 문장을 위한 쓸데없는 군더더기의 집합인지도 모르겠다. 이 책이 좋다, 안 좋다를 말하는 그 한 문장. 이제와 깨닫는다. 그렇다면 여기서 수고를 줄여주고 싶다.


 딱 한 문장으로 말하겠다. 이 책은 좋다. 이것만 읽기를...


다행히 자판 위로 안 쓰러졌다. 신의 가호일까? 이 나라에도 좀 주세요,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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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평등의 킬링필드 - “나”와 “우리”와 “세계”를 관통하는 불평등의 모든 것
예란 테르보른 지음, 이경남 옮김 / 문예춘추사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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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 문장이 인상적이다. 불평등은 사람을 죽인다. 비유가 아니라 '팩트'다. 미국의 흑인들만 보아도 그렇다. 2008년에 인종과 교육이 결부된 불평등은 그 약자의 위치에 있는 흑인의 수명을 평균 12년 줄였다고 한다. 러시아는 자본주의가 되고 불평등이 심화될수록 사회주의일 때 비해서 사망률이 남자는 49%, 여자는 24% 증가했다고 한다. 물론 사회적 약자들의 수치다. 문자 그대로 불평등은 사람을 죽였다. 전 세계적으로 불평등 계수가 증가할수록 사망률도 늘어났다. 이런 면에서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사회학과 명예교수로 있는 예란 테르보른의 책 제목은 실로 의미심장하다. 그 책 제목처럼 정말로 이 세계는 '불평등의 킬링필드'이니까 말이다.



 이제 불평등을 막아야 하는 것은 단순히 잘 먹고 잘 살기 위한 것만은 아니다. 그 보다는 자기 목숨을 지키는 일인 것이다. 혹시 당신은 살만하다고 해서 해당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는가? 그렇지 않다. 1990년대에 영국의 역학자 리처드 윌킨슨은 생명을 위협하는 불평등이 가난하고 교육 수준이 낮은 사람 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 여유롭고 지체 높고 교육 수준이 높은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미친다고 발표했다. 불평등의 생명에 대한 위협은 계층의 고하를 가리지 않는다. 일례로 2005년에 아이즈너와 애번즈는 상대적 박탈감이 건강을 악화시키고 사망률을 높인다는 흥미로운 결과를 내놓았다. 근거로 오스카 상을 받은 배우들이 후보에 올랐다가 고배를 마신 배우들보다 평균 3년 더 오래 살았다는 것을 들었다. 노벨상 수상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수상자들이 그렇지 못한 자들 보다 평균 수명이 더 길었다. 사실 이런 예를 들 필요도 없다. 엄친아의 존재로 인해 고통받는 어린 학생들처럼 우리 역시도 상대적 박탈감이 가져다 주는 스트레스가 얼마나 심한 지는 경험으로도 잘 알고 있으니까.


 그런데 불평등의 폐해는 신체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마음에도 악영향을 미친다. 스트레스가 아니라 타인을 믿지 못하는 불신에 대한 것이다. 대체적으로 불평등이 심화될 수록 타인에 대한 불신 역시 커진다고 한다. 국민들의 행복 지수가 가장 높다는 것으로 알려진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의 국민들은 3분의 2가 타인을 믿을만하다고 여기지만 브라질 국민들은 겨우 3%만 그렇다고 생각한다. 불신의 정도가 불평등에 비례하는 것이다. 요즘 우리나라도 타인에 대한 불신이 매우 심해졌다. 이것이 또한 최근 더욱 극심화된 불평등의 효과인지도 모르겠다. 벤지만 디즈데일리는 '국민은 하나가 아니다. 사실은 부자와 빈자라는 두 개의 국민이 있다.'라고 말했다는데 과연 불평등이 그런 역할까지 한다. 불평등이 심할수록 사회 분열마저 가속화되는 것이다. 결국 불평등은 사회로 하여금 화합을 위한 엄청난 사회적 비용을 지불하게 만들어 사회에 위기를 초래한다. 그런데 그 사회적 비용의 대부분은 소수의 재력과 권력 엘리트를 제외한 사회 성원 대다수가 부담한다. 이래저래 불평등이 심화될 수록 '돈 없고 빽 없는' 이들은 물고 뜯기게 되는 것이다. 몸도 상하고 마음도 크게 상처입지만 누구도 돌아봐주지 않는다. 불평등이 심해지면 약자들도 더욱 무시되기 때문이다. 미국이 그렇다. 의원들은 결집도 못하고 로비력도 제로에 가까운 약자들을 자신들이 일해야 하는 대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가볍게 무시한다. 그들은 그저 표가 필요할 때만 의미있는 존재들이다. 분열로 인한 사회적 비용 부담이 증가하게 되면 약자들은 더욱 보호를 받을 수 없다. 거기에 쓸 자원을 사회가 마련하기 어려운 탓이다.


 불평등을 줄여야 할 당위는 이렇게 날로 커지고 있다. 그런데 불평등은 하나의 모습이 아니다. 저자에 따르면 불평등엔 모두 세 가지 모습이 있다고 한다. '생명력 불평등', '실존 불평등', '자원 불평등' 이렇게다. 생명력 불평등은 '사회 구조에 속한 인간 유기체가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기회의 불평등'을 의미하고 '실존 불평등'은 자율성, 존엄성, 자유의 정도, 존중받을 권리, 자아를 개발할 권리 등 인격과 관련해 개인이 받을 수 있는 배당의 불평등을 의미한다. 마지막 '자원의 불평등'은 '행위자로서 인간이 활동하는데 필요한 자원을 공평하게 제공받지 못하는 불평등'이다. 이것은 하나의 '퍼스펙티브'로 한 국가나 사회의 평등화 정도를 가늠할 수 있는 기준이기도 하지만 지향해야 할 지점을 말해주기도 한다. 저자에 따르면 이 불평등의 세 가지 모습은 상호 의존적으로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 관계에 있다고 한다. 이런 차원에서 결국 평등 문제는,


 발전하고 번성할 수 있는 인간이 능력에 대해 다차원적인 폭력을 휘두르고 인위적으로 방해하는 장치를 해결하는 데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p. 211)


 그러한 폭력 혹은 인위적 방해 장치를 저자는 불평등 매커니즘이라 하여 주로 네 가지 행위 범주로 구분하는데 그건 '거리두기','배제', '위계화' 그리고 '착취'다. 이렇게 특정 행위 중심으로 범주적 세분화를 하는 것은 차이와 차별 구별 문제와 같이 불평등을 논의하는데 있어 불평등과 그렇지 않은 것들 사이에 개념 혼동이 일어나고 그로 인해 오히려 불평등한 상황마저 그렇지 않은 것으로 흔히 치부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그는 역사적으로 불평등이 지나온 궤적과 지금 세계의 불평등한 실상을 드러내고 이 불평등을 완화시킬 가능한 대안적 세력과 방법을 탐구한다. 거기서 그는 마르크스가 말했듯이 더이상 산업노동자가 변화의 주축이 될 수 없는 현실임을 분명히 하고 계급적으로 동질한 이들의 연대가 아니라 '사회경제적으로 이질적인 사회적 연대'에 의해 평등의 미래가 좌우될 것이라 내다본다. 거기엔 제3세계의 도시 빈민과 변변한 자기 땅 한 뙈기 없는 농민들이 있으며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서비스업 분야 종사자들과 전문적인 중산층도 포함된다. 게다가 여성이나 소수민족 그리고 동성연애자들까지 저자는 중요한 평등화의 동력으로 생각한다. 아울러 그는 말한다. 예전에는 지배엘리트들도 두려움 때문에 스스로 평등화를 추진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불평등한 자들이 분노하여 폭동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과 그로 인해 국가 전체가 퇴보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러나 저자는 다시 또 이렇게 단언한다. 이제 그렇게 평등을 공급할 수 있었던 세력들은 공급량이 부족해졌다고. 즉 더이상 위로부터의 평등화 노력은 기대하기 어렵게 되었다는 말이다. 이제 남은 길은 단 하나 밖에 없다. 저 이질적인 평등화의 동력들이 연대해 아래로부터 평등화를 가져오는 것. 평등은 이제 투쟁이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인 것이다. 미래는 앞으로 불평등의 결전장이 될 가능성이 높다. 이를 위해 평등의 동력도 반평등의 저항 동력도 전열을 가다듬고 있는 중이다. 이합집산이 되지 않고 제대로 싸우기 위해서는 뭔가 구심점이 필요하다. 투쟁을 선도하고 일사불란하게 조직할 수 있는 세력 같은 것이.


 저자는 그 세력을 중산층으로 본다. 이제 자본주의의 핵심 영역에서 산업근로자의 세력이 쇠약해졌기 때문이다. 그는 말한다.


 당분간 평등의 기회는 노동운동의 힘과 리더십의 능력이 아니라 중산층의 방향 정립에 따라 좌우될 것이다.(p. 224)


 또한 이렇게 덧붙인다.


 이런 새로운 21세기 '중산층' 시대가 바로 평등주의자들이 활약할 무대가 되어야 한다. 중산층의 모호한 계급 개념이나 제각각인 규모를 평가하는 문제는 지금으로서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우리의 관심사는 근로자, 농부, 전문가 같은 지배적인 사회적 정체성을 갖지 않은, 가난하지도 부자도 아닌 계층의 사람들이다. 그들은 지금 지구를 소유하라는 요구를 받고 있다.(p. 226)


 예란 테르보른이 이렇게 중산층에 기대를 거는 것은 모호하고 어찌보면 텅 비어있는 것도 같은 정체성이지만 오히려 그래서 잘 연대할 수 있으리라 보기 때문인 듯 하다. 무색의 물이 하나로 잘 섞이듯이 말이다. 중산층에 대한 낙관론일 수도 있겠지만 달리 생각해 보면 지극히 현실적 방법론이기도 하다. 차라리 그 모호한 정체성을 디딤돌 삼아 세력을 만들어나가자는 것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작금은 중산층 붕괴의 시대. 세계 어느 나라 할 것 없이 중산층이 여지없이 내려앉고 있다. 과연 이러한 상황 속에서 어떻게 중산층에게 그 역할을 맡길 것인지 좀 더 생각해 보아야 한다. 어쩌면 이 위기 때문에 더욱 중산층이 자기 보호를 위해서라도 단단히 연대하리라 기대하는 것일까? 저자는 아직 여기까지는 나아가지 않았다. 사실 우리나라를 보면 불안한 예감이 든다. 중산층에게 닥친 위기가 오히려 반대의 결과를 낳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가 살고 있는 아파트 집값을 보전하기 위해 불평등을 조장하는 당에게 표를 주는 것으로. 또한 임대아파트와 같이 있는 아파트 주민들이 임대아파트 아이들이 자신의 단지로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학교로 가는 통학로 임에도 불구하고 억지로 문을 달아 막아버리듯 빈자들을 격리시키려 들고 자신의 안전을 위해 점점 게토화 되어가는 형편이니. 그러므로 더욱 생각해야 할 것은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평등화의 염원을 가지고 이성적 판단과 실천적 노력을 할 수 있는 중산층을 키워낼 것인가가 아닐까 싶다. 지금으로 봐선 조금의 희망도 보이지 않는 꽤나 어려운 문제다.


 '불평등의 킬링필드'는 이런 이야기다. 불평등의 전모를 밝혀주는 책이라고나 할까? 최근 프랑스의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의 '21세기 자본론'이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었다. 이 책이 초유의 관심을 받았던 것은 불평등한 현실을 상세한 경험적 연구를 통해 적나라하게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이제 불평등은 외면할 수 없는 화두가 되었다. 더구나 수명까지 줄어든다고 하지 않는가? 진지하게 살피고 고민해야 할 시점이 아닌가 싶다. 그를 위한 출발의 책으로 삼을 수 있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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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erennial Philosophy (Paperback)
Huxley, Aldous / Harper Perennial Modern Classics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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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차 대전이 서서히 끝나가던 1945년.
 '멋진 신세계'에서 현대 문명이 가열차게 추구하고 있는 물질주의가 가져오는 건 결국 인간 소외와 공허 밖에는 없다고 말했던 올더스 헉슬리는 한 권의 책을 발표합니다. 그것이 바로 '영원의 철학'이죠. 이 책이 일으킨 파장이 엄청났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우리가 흔히 '뉴에이지'라고 알고 있는 것들도 다 이 올더스 헉슬리의 '영원의 철학'에서 태어난 아이들이죠.

 원제는 'The Perennial Philosophy'. 책의 첫머리부터 올더스 헉슬리는 라이프니츠가 한 말이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만 사실 이 용어는 중세 때부터 있었습니다. 최초로 그 말을 쓴 것은 'Agostino Steuco'라고 합니다. 이탈리아인으로 주로 구약을 연구하던 학자였는데 당시 마르실리오 피치노가 주도하고 있던 신플라톤주의를 그는 '영원의 철학'이라고 불렀다는 군요. 피치노는 당대 신학의 주류를 이루고 있었던 '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 강한 반감을 갖고 있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주의'가 신앙을 약화시키고 있다고까지 생각했죠. 그래서 그는 플라톤에게로 기울었습니다. 플라톤의 사상을 이길 수 있는 건 오직 그리스도 사상 밖에는 없다고도 말했습니다. 그는 플라톤 철학을 '경건의 철학'이라고 불렀습니다. 바로 그 플라톤 철학을 자신이 신봉하는 그리스도 신학과 합치고자 했죠. Steuco는 '경건의 철학'이라는 말을 살짝 바꾸어 '영원의 철학'으로 부른 것입니다. 네, 실은 조금 경멸의 의미였죠. 그건 신학이 아니라 철학에 불과할 뿐이라고 말하고 있으니까요.

 어쨌든 '영원의 철학'은 그렇게 생겨났습니다.
 피치노는 플라톤의 실재주의를 경유해 무엇보다 영혼의 불멸성을 강조했습니다. 그 불멸하는 인간의 영혼을 중심으로 우주를 새롭게 구성했습니다. 플라톤처럼 가상인 우리의 현실과 이데아인 참 세계로 나누고 그것은 바로 인간의 영혼을 통해 결합된다고 보았습니다. 그렇게 인간 영혼의 목표는 초월적 존재이자 '이데아'인 신과의 합일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라 보았죠. 이것은 후일 우리가 'perennialism'이라고 부르는 것이 됩니다. 영속주의 혹은 항존주의라고도 부르는 것이죠. 다년생 식물을 뜻하는 'perennia'의 뜻처럼 영원히 결코 변하지 않는, 절대적인 가치가 있다고 믿는 것을 그렇게 부릅니다. 종교적 입장을 투영하자면 그 가치는 물론 신이 되겠죠. 피치노가 말했던 '신과의 합일'이 종교로서의 'perennialism'이 지향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길이 하나밖에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피치노처럼 기독교만이 유일의 통로라고 여기지 않는 것이죠. 'perennialism'의 근본 목적은 신과의 합일을 지향하는 동,서양의 모든 종교와 철학을 아우르는 것입니다. 그 모든 이론과 방법들을 하나도 허투르 보지 않고 다 의미가 있다고 여깁니다. 그리고 거기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것들을 골라내 진정한 신과의 합일로 나아가는 통로(흔히 '비전의 핵심'이라 이르는 것)들을 찾아내는 것. 바로 이것이'perennialism'입니다. 이 'perennialism'은 하나의 여파에서 태어났습니다. 그 최초의 거대한 파문을 일으킨 것이 바로  올더스 헉슬리의 '영원의 철학'입니다.

 올더스 헉슬리는 '멋진 신세계'에서 이미 물질문명만으로는 한계가 있음을 지적했습니다.
 당연히 물질문명은 참된 정신에 의해 인도되어지지 않으면 안됩니다. 더구나 바깥은 참된 정신으로 인도되지 않은 물질문명이 어떠한 비극을 초래하는가를 보여주기라도 하듯 세계 제2차 대전이 한창이었습니다. 올더스 헉슬리에게 절박감은 더욱 커졌을 것입니다. 36년에 나온 '가자에서 눈이 멀어'는 헉슬리의 그러한 심리를 잘 나타내 주고 있죠.  그는 위안으로서든, 구원으로서든 삶의 진정한 의미를 찾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기존의 기독교는 그에게 그걸 가져다 줄 수 없었습니다. 왜 그러했던가? 그 이유를 그는 이 책의 336페이지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종교와 형이상학에 관해 집필하는 대부분의 유럽 및 미국의 저자들은 유대인, 그리스인, 지중해 연안 지역과 서구 유럽 사람들만이 이 주제에 관해 생각해본 것처럼 쓰고 있다. 완전히 자의적이면서 고의적인 무지가 20세기에 와서야 이렇게 드러난 것은 어리석을 뿐만 아니라 불명예스럽기까지 하다. 게다가 사회적으로 위험하기까지 하다. 다른 형태의 제국주의와 마찬가지로 신학적 제국주의는 영원한 세계 평화의 위협이 되고 있다.(p. 336)

 '멋진 신세계'와 '가자에서 눈이 멀어'에서 이미 파시즘에 대한 공포와 환멸을 드러내고 있는 그입니다.
 그런 그에게 오로지 하나의 진리만 있다고 주장하며 다른 모든 것을 배척하는 서양의 신학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나치는 자신들의 전쟁을 '제2의 십자군'이라 부르기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길이 필요했습니다. 하나가 아닌 다양한 길이. 모든 경계를 초월하고 동시에 아우르는 길이. 그 보편을 향한 대화. 그리하여 그는 '영원의 철학'을 썼습니다. 그냥 책이 아니라 쓴다는 것이 동시에 자기 구원의 노력이기도 한 책을. '영원의 철학'은 그런 책입니다.

 모두 27장으로 되어 있는데 그건 올더스 헉슬리가 찾아낸 모든 종교가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요소가 27가지라는 뜻도 됩니다. 그는 이 책에서 그 요소 하나를 각기 한 장씩 할애하여 설명하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인지 내용은 정말 광범위합니다. 불교, 도교, 유교를 비롯하여 동,서양의 종교들이 거의 다 인용되고 있으니까요. 정말 읽다보면 어떻게 이걸 다 혼자의 힘으로 찾아내고 더구나 체계적으로 정리까지 했는지, 거기 투영된 신학적 제국주의를 벗어나고자 하는 올더스 헉슬리의 집념이 무서울 정도입니다. '과연, 듣던대로 대단하구나!' 느낄 수 밖에 없더군요. 아니나 다를까, 종교학자로 명망있는 오강남 교수는 이 책에 대해 단적으로 이렇게 말하더군요. 
'비교종교학을 전공한 나는 그가 쓴 수많은 책 중에 단연 이 '영원의 철학'이 가장 중요한 저작이라 단언하고 싶다.'

 저도 동의합니다. 물론 여파도 컸었지만 여기 들어간 그의 노고만으로도 그렇다고 인정해주고 싶어요. 내용도 그리 쉬운 편은 아니고 번역이 다소 불친절하여 읽는 속도가 좀 더딜 수 있을 것 같군요. 하지만 두 번, 세 번 읽고 곱씹으면 이해못할 부분은 없습니다. 또한 의외로 올더스 헉슬리 스스로 자신이 개진하고자 하는 '영원의 철학'을 꽤나 체계적으로 다져놓고 있기도 합니다. 개념정리, 구분과 계층화가 잘 되어 있다는 것이죠. 제가 그랬듯이 따로 노트를 준비하여 정리해가며 읽는 것도 이 책을 소화하기 위한 좋은 방법이 아닐까 싶습니다.

 말년에 올더스 헉슬리는 신비주의로 더욱 기울었습니다. 죽을 때는 아내가 두 번이나 LSD를 놓아 되도록 그가 바라는 상태에서 세상과 작별하도록 하기도 했었죠. 이처럼 그 역시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의 작가 켄 키지만큼이나 환각제가 깨달음을 위한 새로운 통로가 되어줄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것을 위해 그는 '인식의 문'이란 책을 썼는데 짐 모리슨은 거기에 감명을 받아 나중에 자신이 조직한 락밴드의 이름을 'DOORS'라 짓기도 했습니다. 소설만큼이나 올더스 헉슬리의 종교나 신비주의에 관한 책들도 영향을 많이 미쳤는데 거기에 관한 책들은 볼 수 없어 아쉬웠습니다. 그랬는데 이렇게 만나게 되었네요. 그것도 그 시기 가장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영원의 철학'을. 덕분에 그동안 가지고 있었던 헉슬리 후기 모습에 대한 궁금증을 제대로 풀 수 있었습니다. 아울러 다른 많은 종교에 대해서도 이해가 풍부해진 듯 합니다. 특히 종교에 대해서라면 그것에 대한 시각을 근본부터 다시 되짚어 보게된 것 같습니다. 종교를 보다 폭넓은 시야로 이해하고 싶다면 분명 좋은 동반자가 되어주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아직 책이 검색되지 않아 부득불 원서에다 리뷰를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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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의 철학자들 - 철학은 어떻게 정치의 도구로 변질되는가?
이본 셰라트 지음, 김민수 옮김 / 여름언덕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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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본 세라트의 '히틀러의 철학자들'은  철학책은 아니다. 엄밀히 말해 복원의 책이다. 논의 보다는 다큐멘터리에 가깝다. 형식은 일종의 파문과도 같다. 고요한 수면 위로 하나의 돌이 떨어지면 그것을 중심으로 동심원들이 퍼져 나간다. 가면 갈수록 동심원은 희미해진다. 중심의 동심원이 가장 뚜렷하다. 책은 이와 똑같다. 히틀러 시대의 철학자들을 다루고 있는데 그 시대 가장 정점에 섰던 히틀러에서 시작해 페이지 수가 늘어갈 수록 점점 그로 부터 멀리 떨어진 인물들을 배치시키는 것이다. 히틀러로 시작하여 그 뒤에는 히틀러 사상에 정당성을 주었거나 나치즘에 부역한 철학자들을 또 그 뒤에는 유대인이란 태생 때문에 또는 동조하지 않아서 망명하거나 유태인이 아니면서도 신념대로 행동하다가 죽은 철학자를 이야기 한다. 놀랍게도 이본 세라트는 나치즘을 낳게한 원흉으로 칸트와 헤겔까지 들먹이는데 여기서부터 이 책이 가진 문제점은 드러나고 만다.



 분명 나는 문제라 말했다. 솔직히 난 이 책이 한계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편협함의 산물이 아닐까도 싶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에 대해 이제 말하려 한다. 일단 칸트와 헤겔부터.


 그녀가 칸트와 헤겔을 부정적인 철학자로 본 것은 다른 이유가 있는 게 아니다. 딱 하나다. 유대교와 유대인을 폄하했기 때문이다.


 칸트는 기존의 편견을 몰아내는 대신 자신만의 또 다른 편견에 갇히고 말았다. 그는 미개하고 비합리적인 모든 것에 화를 참지 못했는데 특히 고대의 한 종교가 그의 표적이 되었다. 바로 유대교였다. 칸트는 유대교를 시대에 역행하는 종교로 여겼으며 유대인을 미신적이고 미개하며 비합리적인 민족으로 규정했다.(...) 종교가 이성에 근거해야 한다고 믿었던 칸트는 이성에 근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유대교를 종교로 인정하지 않았다. 종교적 이해에 관한 논문 '순수한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에서 칸트는 유대교는 사실상 종교가 아니라 한 부족민들로 이루어진 공동체에 불과했다.(P. 73)


 다음은 헤겔이다.


 헤겔은 유대인을 유럽에서 배제하는 것으로 모자라 그들을 인류 문명 바깥에 있는 열등한 존재로 분류했다.

 "유대인은 그들의 존재 이유가 사라진 지 한참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생존해 있다. 사실상 진정한 의미의 유대인 역사는 오래전에 사라졌다. 본질은 사라지고 단지 송장으로 존재하고 있을 뿐이다."

 유대인이 보통 이하의 열등한 존재인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이 모시는 신도 열등한 신이었다. 헤겔은 이렇게 썼다.

 "다른 신들을 용인할 수 없는 유일한 신은 오직 편협한 유대인들의 신뿐이다. 그들의 엄격하고 민족적인 신은 질투의 화신이다."(P. 77)


 이걸 나치를 낳은 악의 철학자로 칸트와 헤겔을 가져온 이유다. 하하하! 원, 이런!

 실상 그녀가 인용한 칸트의 말에서 난 틀린 점을 도저히 못 찾겠다. '순수이성비판'에서 신과 종교에 대해 말한 것을 보면 분명 그렇게 여겼으리라 본다. 유대교만 특별히 편견을 가지고 대한 것이 아니다. 그에겐 사실 그 어떤 종교든 비합리적이었다. 그런 칸트에게 유대인들이 유대교를 내세우는 것은(선민의식이 강한 그들은 유독 내세우지 않았던가?) 분명 시대를 역행하는 일로 보였을 것이다. 헤겔은 더 우스꽝스럽다. 헤겔이 그들이 모시는 신을 열등하다고 말하지 못할 까닭이 무엇이란 말인가? 질투의 화신이라고 부르지 못할 이유는 또 어디에 있단 말인가? 솔직히 구약을 읽으면 신에 대해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 당연하다. 구약의 신은 늘 믿음을 시험하고 오로지 자신만을 무조건 믿을 것을 강요하며 자신의 뜻을 따르지 않으면 도시나 세계를 한 순간에 멸망시켜 버린다. 이런 신을 두고 사랑과 평화의 신이라 운운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거기다 이것은 그저 헤겔이란 한 사람의 견해에 불과하다. 이런 말도 못하는가? 무조건 좋게 보아야 하는 것인가? 편견은 진실을 왜곡해서 보는 걸 이르는 것이지 그저 부정적 견해에 불과한 것을 두고 편견이라 말하지 않는다. 비판을 무조건 편견으로 치부하는 것이야 말로 이본 세라트가 그토록 증오하고 있는 나치즘의 철학과 닮은 꼴이다. 타자를 객관적인 잣대로 헤아리지 않는 그 유아독존적 아집 말이다.


 솔직히 말해 이 시대에 유대인에 대한 증오는 보편적이었다. 독일만이 아니었다. 전 유럽적 상황이었다. 이본 세라트는 욕하려면 세익스피어에게도 해야 했다. 그는 베니스의 상인에서 유대인을 더없는 속물에다 악덕 상인으로 묘사했으니까 말이다. 영국이 독일과 싸워서 면제부를 준 것인가? 프랑스에서 일어났던 드레퓌스 사건도 그렇다. 드레퓌스가 그토록 말도 안되는 누명을 썼던 것은 그가 유대인이었기 때문이다. 국민들은 드레퓌스가 유대인이란 사실 때문에 명확한 반대 증거들에도 불구하고 그의 처형을 지지했던 것이다. 그만큼 유대인들에 대한 증오가 깊었다. 왜 그랬을까? 유럽인들이 이유도 없이 그랬을 리는 없다. '베니스의 상인'에서 그 뿌리깊은 증오의 이유는 드러난다. 유대인들은 대부분 고리의 금융업자였다. 그들이 믿는 신은 아무런 노동없이 남에게서 뭔가 받는 것을 죄악으로 여겼고 똑같이 이자도 죄악의 과실로 여겼지만 그토록 신을 믿는다는 그들이 그것은 따르지 않았다. 오히려 더 높은 고리로 앞뒤 가리지 않고 자본을 모았다. 덕분에 거대한 부는 유대인들 손에 들어가는 경우가 많았다. 유럽인들에게 유대인들은 이민자에 불과했다. 비유하자면 우리나라에 체류한 동남아시아 노동자가 이건희가 된 것과 같았다.  토박이들 눈에 곱게 보일리 없었다. 거기다 유대인들이 정당하게 모은 것도, 그 부를 신이 명령한 대로 가난한 자들을 위해 쓰는 것도 아니었다. 악착같이 거머쥘 뿐이고 없는 이들을 무시할 뿐이었다. 단테도 그 희생양이었다. 그는 금융업자들을 가장 뜨거운 지옥에 떨어질 것이라 묘사했다. 증오는 아무 이유없이 태어나지 않는다. 분명 연기나게 한 뭔가가 있다. 그에 대한 자성없이 유대인들을 비난한다고 해서 편협하다 비판하는 건 그것이야말로 편견에 지나지 않는다. 이본 세라트는 편협하다. 정말 이 책 끝까지 그녀에게는 오로지 유대주의만 보이기 때문이다. 


 리뷰가 길어질 수 있기에 세세하게 다 말하지 못하는 게 유감이다. 한나 아렌트가 말한 '악의 평범성'에서 유대인들에게 그만한 비극을 안겼는데 어떻게 평범하다고 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학을 뗐다. 세라트는 정말 한나 아렌트가 무슨 이유로 그것을 말했는 지 모른단 말인가? 그렇다면 그녀야말로 자신이 말하는 것에 몰이해하고 있다고 말할 수 밖에 없다. 정답을 정해놓고 대상을 보고 있으니 편견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문체는 더욱 노골적이다. 부역한 철학자들에겐 더없이 신랄하지만 망명해야했거나 희생당한 철학자들은 무슨 신념에 따른 영웅인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 사실 벤야민과 아도르노는 안타까운 피해자 이상의 의미는 아니었다. 유대인인 그들이 독일에 어찌 남아있을 수 있단 말인가? 그들에겐 이미 철학자의 양심으로 선택할 기회마저 없었다. 그저 망명하는 것말고는 달리 방도가 없었던 것이다. 솔직히 이 책을 읽고 개인적으로 아도르노에게 좀 한심함을 느꼈다. 지금 자신의 조국 독일에선 자신과 같은 유대인들이 속절없이 죽어가는데 미국으로 망명한 그는 그레타 가르보를 만난 일 같은 것을 글로 쓰고 있으니. 발터 벤야민은 정말 불쌍했지만 아도르노의 미국 망명 생활은 그리 힘들지 않았다. 유대인 망명자들과 많은 교제도 가져 고독도 없었고 경제적인 어려움도 없었다. 여기서 이본 세라트는 또 웃긴 짓을 한다. 당시 얼마나 유명한 유대인들이 많았는지 언급하는 것이다. 또한 그들이 전쟁에도 불구하고 창조적인 작업을 지속해나갔다는 것도 콕 집어 넣는다. '알았다. 알았어. 너네들 정말 대단해. 이제 그만!'하고 싶을 정도다.


 분명 2차 대전에서 유대인들은 피해자였다. 그들의 학살은 정말 우리 인류가 두고두고 반성해야 한다. 하지만 그 때의 피해자가 유대인들만 있는 것도 아니고 그들이 가장 많이 희생된 것도 아니다. 사실 나치에 의해 가장 많이 희생된 것은 집시들이었다. 하지만 아무도 그들의 희생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유대인들이 당한 비극 때문에 문장마다 분노를 드러냈던 이본 세라트도 여기에 대해선 침묵이다. 그녀의 글을 읽고 있으면 마치 당한 이들은 유대인 밖에 없는 것 같다. 이왕 칸트와 헤겔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근대 자체에 배태되어 있던 인종 편견을 드러내려 작정했다면 반유대주의만 말할 것이 아니라 집시들이 당한 비극까지 말해야 했다. 나치가 유대인들을 멸하려 했던 건 그들이 외래적 존재였고 그만큼 약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하이데거 식으로 말해 동일자와 타자에서 유대인들은 타자였다. 어차피 경계 바깥의 존재였기에 쉽게 바깥으로 내버릴 수 잇는 존재였던 것이다. 나치즘의 해악은 거기에 있다. 동일하지 않은 존재들은 무조건 배제해 버린다는 것. 타자를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 거기에 유대인들과 집시는 똑같은 존재들이었다. 집시가 입은 피해가 여전히 '블랙아웃'인 것도 그만큼 그들의 지위가 열악하기 때문이다. 가장 약자는 누구도 돌아다보지 않는다. 정작 같은 피해를 입은 이들마저 마찬가지다.


 결국 그들도 그들이 왜 그런 비극을 겪어야 했는지 잊어버리고 같은 가해자가 되어 버렸다. 바로 얼마전에도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에 미사일을 쏘아 민간인들을 비롯 어린아이까지 죽게 만들지않았던가. 남의 영토를 억지로 빼앗아 살고 있으면서도 그들은 공존을 모르다. 공존을 인정하지 않는 이들로 부터 엄청난 피해를 받았으면서도 그들의 지금 모습은 나치와 그리 다르지 않다. 그들 스스로 그들의 희생을 욕되게 하고 있는 것이다. 이본 세라트는 그토록 나치에 부역한 철학자들을 비난하면서 왜 똑같은 일을 저지르는 현재의 이스라엘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것인지? 스스로 공정하다고 생각한다면 신랄한 비판의 칼날은 이스라엘을 향해서도 겨누어져야 한다.


 이 책은 분명 철학이 정치의 시녀가 되는 사태를 비관하여 그 반복을 막는 성찰을 위해서 쓰였을 것이다. 진정한 성찰은 부머랭이다. 결국은 나의 허물을 되돌아 보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본 세라트의 성찰은 돌아오지 않는 부머랭이다. 적의만 있다. 그녀 역시 유대주의의 시녀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기에 공감도 배움도 반쪽에 불과하다. 역사로부터 진정한 교훈을 이끌어 내려면 언제나 탐구하는 자 스스로도 객관적 중립의 위치에 서야 한다. 저자는 한 쪽에 너무 치우쳤다. 에필로그에서 말한 자신의 질문에 대한 해답을 제대로 찾고 싶다면 그녀 역시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시작하는 게 좋을 것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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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바꾼 만남 - 스승 정약용과 제자 황상 문학동네 우리 시대의 명강의 1
정민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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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겐 오래도록 마음에 남아있는 선생님이 한 분 계시다.

 초등학교 1학년 때 만난, 내 인생 최초의 선생님. 최초라서 그런 것은 아니다.

 그 때의 나는 학교가 끝난 뒤 가장 마지막으로 집에 가는 아이였다. 집에 가도 맞아주는 이가 없었고 텅 빈 집에 홀로 있는 것을 싫어했기에 되도록 학교에 남아 있으려 한 까닭이다. 텅 빈 스탠드의 계단을 위 아래로 뛰어 오르내리다 저물어가는 태양에 나무들의 그림자가 운동장 위로 제법 길어지면 책가방을 다시 둘러매고 집에 오고는 했다. 태양을 눈 뜨고 오래 바라보는 버릇도 그 때 생겼던 것 같다.


 학교에 들어와 처음으로 깨친 것은 한글이 아니라 무료함과 외로움이었다. 나는 언제나 눈이 반쯤 내려가 있고 윗입술이 아래입술을 살짝 덮은 뚱한 표정으로 있었다. 아이들과 수다를 떨기 보다는 창 밖에 보이는 나뭇가지에 새가 날아와 앉기를 기다렸다. 혼자였다.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고 누구도 날 신경쓰지 않는 줄 알았다. 나중에 알게 되었다. 그러던 날 내내 누군가 보고 있었음을. 바로 담임 선생님이었다. 


 하루는 날 부르셨다. 아이들이 모두 돌아간 뒤에도 여전히 교실에서 얼쩡거리던 나를 발견하고 부르신 것이었다. 선생님과 그렇게 가까이 있게 된 것은 처음이었는 지라 난 조금 겁먹은 표정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던 내 손바닥 위에 미소와 더불어 올려주신 박하사탕 하나. 작고 하얀 조약돌 같기만 했던 그것을 입 안에 머금었다. 입 안 가득 알싸하게 퍼지는 감각에 놀라고 있는데 갑자기 선생님이 물으셨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냐고.


 그림이라 대답했다. 그림이 좋았다. 쉽게 그리고 혼자서도 아주 오래도록 할 수 있는 유일한 놀이였으니까. 그래, 그림을 좋아하는구나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그리고 물으셨다. 좀 더 잘 그리고 싶은 마음은 없는지. 로봇 만화를 좋아했던 나는 늘 만화처럼 똑같이 로봇을 그리지 못하는 게 싫었다. 마당에 묶인 강아지도, 부엌에서 졸기만 하는 고양이도 마찬가지였다. 잘 그리고 싶었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끝나고 남아서 선생님이랑 같이 그림 배워보지 않을래 하셨다. 선생님은 뭐든 다 잘 하는 줄 알았던 나는 선생님에게 배우면 잘 그릴 수 있겠구나 싶었다. 어차피 방과 후의 나란 너무 심심하기도 했다. 그 때부터 선생님에게 그림을 배웠다. 하나하나, 차근차근. 선생님에게 시간이 허락될 때마다 매일을. 여름방학 동안에도.


 이야기도 많이 나누었던 것 같은데 기억나는 게 별로 없다. 대부분은 선생님이 하나의 주제를 정해주면 그걸 내 마음껏 그림으로 표현하고 다 그리면 대화하는 식이었다. 사실 별 거 없었는 지도 모른다. 그저 혹시나 사고라도 당할까봐 그림을 핑계로 보호해주신 것일 수도 있다. 그것만으로도 참 고마운 일이지만. 


 나중에 내가 변했다는 걸 알았다. 내 눈은 어느새 온전히 떠 있었고 윗입술도 더이상 내려오지 않았다. 창 밖보다 아이들을 더 많이 보고 있는 내가 되었다. 아주 뒤늦게 뜻밖의 사건 때문에 깨닫게 되었다. 그 때 내가 배운 건 그림만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나는 알았다. 누군가에게 관심을 받는다는 것. 누군가 날 지켜봐주고 있다는 것. 누군가에게 자신있게 내 의견을 말할 수 있다는 것. 사랑은 무엇보다 꾸준한 지속이며 삶은 누군가 함께 있어야 버틸 수 있다는 것.  바로 그런 것들을 선생님과 함께 하면서 배웠다는 것을.


 그런 깨달음은 불현듯 찾아왔다. 많은 시간이 지나 전혀 예기치 않은 계기로써. 어느 날 나는 버스를 타고 가다가 라디오에서 들었다. 선생님이 누군가의 칼에 찔려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모든 게 보도된 것은 아니었지만 이름과 직업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아니,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황망한 마음에 얼른 내려 동창들에게 전화했다. 확인은 이틀이 지나서야 얻을 수 있었다. 사실이었다.  선생님은 더이상 이 지상에 계시지 않으셨다. 졸업 후, 한 번 제대로 찾아뵙지도 못했는데. 수화기를 놓기도 전에 왈칵 눈물이 났다. 내가 경험한 최초의 죽음이 선생님이라니. 그러고 보니 제대로 살게 된 것도 선생님 덕분이었다. 부모님은 몸의 첫 숨을 주었지만 영혼의 첫 숨을 준 것은 선생님이었다. 그렇게 주고가셨다. 삶도, 죽음도.


 그 후로 스승이란 말을 들으면 참 아련하다. 진한 그리움도 애잔한 슬픔도 함께 배여든다. 누군가의 집에서 흘러나오는 저녁밥 짓는 냄새를 맡으며 아무도 없는 놀이터에서 홀로 그네를 타고 있는 것만 같다. 곧 누군가 저녁밥 먹으라고 따스하게 불러줄 것 같기도 하고 내내 그대로 어둠에 사위워가는 놀이터를 볼 것만 같기도 하다. 복잡한 심정이다. 하지만 묻어나는 따스함이 더 크다. 언젠가 꼭 누군가 와 줄 것만 같은 느낌이 더 강하다. 놓아버리려는 삶의 그네줄을 두 손 모두 힘있게 부여잡도록 한다. 지켜봐주었던 기억이, 사랑받았던 기억이 버티게 하는 것이다. 어둠속에 홀로라도.


 정민의 '삶을 바꾼 만남'은 다산 정약용과 평생을 두고 그를 스승으로 섬겼던 제자 황상의 이야기다. 다산의 강진 유배로부터 시작되어 황상이 죽을 때까지 계속된 사제지간의 인연을 다루고 있다. 담긴 세월이 길기에 깃든 이야기가 제법 된다. 그만큼 긴 시간을 벗한다. 거기다 스승과 제자 사이에 주고 받은 서간문까지 인용되어 있어 그들의 인연을 더욱 가까이서 음미하게 되었다. 적나라한 모습이랄까. 실감나게 가득 느낄 수 있는 인연이었다. 잘 삐치고 남의 눈이 무서워 유배지에서 맺었던 가족의 인연을 저버리기도 했던 다산이었지만 그래도 제자를 아끼는 마음만은 가득했던 스승이었다. 그 모습에 나도 그만 물들었던 것 같다. 물기어린 눈으로 선생님을 떠올리게 되었던 것은.


 제목처럼 좋은 스승과의 만남은 삶을 바꾼다. 경험으로 알고 있다. 점점 사제지간이 길연이 아니라 무연 혹은 악연이 되는 것 같아 안타깝다. 나는 누군가에게 어떤 기억으로 남게 될까 오래 생각하게 된다. 짙은 그리움을 부르는 좋은 사제의 인연이 많아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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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4-07-23 0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초등학교 1학년 때 만난 선생님 좋은 분이군요 아이를 잘 보는 분이었군요 그렇게 가시다니, 어쩌다가... 누구나 좋은 스승을 만나고 싶다고 생각하지만 그게 쉬운 일은 아닌 듯합니다 헤르메스 님은 기억할 선생님이 있어서 좋겠습니다 지금도 스승과 제자로 좋은 인연을 맺는 사람 있을 거예요 안 좋은 게 더 알려져서 그렇지...


희선

ICE-9 2014-07-23 13:59   좋아요 0 | URL
제가 세상을 비관적으로 보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되어주었죠. 그렇게 좋으신 분이 이렇게 비극적으로 가실 수 있다니... 절망과 부정의 먹구름에 참 오래도록 휩싸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지금와 생각해보면 좋은 분들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역시 가치있는 삶이란 타인들에게 얼마나 좋은 기억을 많이 남기느냐인 것 같아요. 분명, 그럴겁니다. 좋은 인연이 훨씬 많을 거에요. 더 많은 인연들이 봄날의 개나리꽃처럼 화사하게 만발하길 바랍니다. 진심으로. 희선님 말씀 감사드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