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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원하는 삶을 살 것인가 - 불멸의 인생 멘토 공자, 내 안의 지혜를 깨우다
우간린 지음, 임대근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4년 10월
평점 :
품절
2012년부터 시작된 논어 열풍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듯 합니다. 논어에 대한 책들이 지금도 많이 나오는 것을 보면 말이죠. 시작은 분명 중국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이전의 사회주의에서 자본주의로 넘어가면서 중국 역시 사회주의 몰락 후의 러시아와 똑같은 상황에 처해더랬죠. 즉 중국 내 소수 민족과 지역들의 분리 요구에 직면하게 된 것입니다. 영토가 크면 다양한 민족과 지역성이 존재하기 마련입니다. 그 때까지 중국은 러시아와 똑같이 사회주의라는 틀로 그들을 묶어두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것은 불가능해졌습니다. 자본주의는 연대보다는 경쟁을 강조하니까요. 우열이 생기고 차별이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로 인해 러시아는 우리가 알다시피 많은 대가를 치뤘었죠. 중국은 그런 비용을 치루고 싶지 않았습니다. 얼른 통합에 나서야 했죠. 하지만 어떤 틀로? 고민이 깊어질 수밖에 없었죠. 그 때 구원처럼 도래한 것이 민족주의였습니다. 한자동맹으로 나누어져던 독일이 같은 게르만 민족이라는 이름하에 통일했듯이 중국도 그렇게 한 것이죠. 그 때, 기틀이 되어주었던 사상이 바로 공자의 '논어'였습니다. 그렇게 논어는 위로부터의 필요에 의해 다시금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부활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왜냐하면 문화대혁명 시절, 논어는 대표적인 구습의 사상으로 공식적으로 매장되었으니까요.
그런데 왜 하필이면 논어일까? 왠지 호기심이 일더군요. 민족주의를 강조하기 위해 중국 고전 사상을 빌려와야 했다면 논어 외에도 도교의 노자나 장자의 책, 혹은 대표적인 현실주의적인 통치철학이라 할 수 있는 한비자도 있으니까요. 그러다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무래도 분위기 때문이 아닐까 하고 말이죠. 일단 민족주의라는 것으로 하나로 묶는데 있어 노자의 '도덕경'이나 장자의 '장자'는 탈락입니다. '무위'와 '소요유'를 강조하는 그런 철학은 개인에겐 환영받겠지만 통치자들에겐 아닙니다. 아무 것도 하지 말라고 하는데 어떤 통치자들이 허수아비가 되는 것을 원할까요? 더구나 정치 사상으로써 그 철학들은 아주 헐겁기까지 하죠. 그렇다고 백성을 '빡세게' 만드는 한비자를 가져오기도 힘들었을 것입니다. 한비자의 사상은 현실적인 유용성이야 많지만 일단 분위기가 너무 차갑잖아요. 그건 그대로 중국 사회주의의 분위기와 다를 바 없으니, 자본주의의 수용과 함께 이미지 변신을 꽤하는 중국에게 그건 별로 달가운 선택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전혀 다른 분위기를 가져다 주면서도 끈끈한 연대마저 놓치지 않는 '논어'를 선택한 것이 아닐까 생각되네요. 일단 '논어'는 따스함과 부드러움이 감도는 '인'을 강조하니까요. 아마도 지금 중국의 대중들이 논어에 몰려드는 이유도 그 때문일 것입니다. 오래도록 맡지 못했고 때문에 더욱 그리움이 깊어질 수밖에 없었던 인간적인 내음이 논어엔 가득 드리워져 있었으니까요.
그 인간학적 면모로 논어는 원래 정치철학적 성격이 강하지만 처세의 책으로도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는 것 같습니다. 이번에 나온 '어떻게 원하는 삶을 사는가?"도 실은 그러한 방면의 책입니다. 정치 철학이 아닌 처세에 보다 초점을 맞춘 책이라는 것이죠. 그건 제목에서 이미 드러나고 있는 것 같네요. 저자는 우간린으로 중국의 경제학자이자 인재 개발 컨설턴트라고 합니다. 저자의 약력을 보면 더욱 이 책이 초점을 어디다 두고 있는지 더욱 감이 오실 듯 합니다.
그런데 이 책은 여타 논어 책들과 다른 점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소설이라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간린은 논어의 이야기를 공자의 제자인 자공을 주인공으로 하여 하나의 소설처럼 일련된 이야기로 만들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어떻게 원하는 삶을 살 것인가'가 허다한 다른 논어 책들과 뚜렷하게 구별되는 점입니다. 물론 아무리 소설이라고 해도 지루할 수 있습니다. 사실 지루한 소설이 참 많기도 하지요. 그런데 우간린 이 사람, 참 맛깔나게 썼습니다. 평이한 문장으로 별다른 지루함을 느끼지 않게 공자의 이야기를 머리에 쏙쏙 들어오도록 잘 썼습니다. 한 마디로 꽤나 읽을만한 이야기라는 것이죠. 저는 우간린의 약력까지 의심하게 되더군요. 실은 경제학자가 아니라 소설가가 아닐까 하고 말이죠. 그런 면에서 논어를 깊이 이해하는 건 바라지 않고 그저 논어에 어떤 이야기들이 나오는지 알고 싶다면 이 책을 벗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물론 우간린이 그저 대중들에게 논어를 쉽게 이해시키자는 목적으로만 이 책을 쓴 것은 아닙니다. 그에겐 보다 더 큰 목적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공자의 이야기에서 지혜를 얻는 것입니다. 사실 공자의 삶은 순탄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오래도록 자신의 알아줄 이를 찾아 유랑 생활을 했지만 그런 자를 만나지 못했고 결국 세상에 자신의 뜻을 펴는 것을 포기하고 은둔의 삶으로 돌아가 하고 싶은 공부나 하면서 '주역'이나 '춘추' 같은 것을 쓰며 말년을 보냈습니다.
공자는 삶의 쓴 맛을 볼 대로 본 사람이라 할 수 있었습니다. 자신이 믿었던 군주와 제자의 배신, 반복된 꿈의 좌절. 공자는 거친 길 위에서 허기와 피로의 나날들을 보내며 차오르는 아픔을 삭여야 했습니다. 우간린의 책은 바로 그런 공자를 가져옵니다. 우리와 똑같이 삶에 산적한 많은 문제들로 고민하고 아파했던 공자를 말입니다. 우간린이 바라는 것은 거기서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공자가 겪은 문제는 비록 먼 과거의 일이라 해도 비단 공자만이 겪을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고 알고 보면 우리 역시도 겪을 수 있는 문제들의 보편적 형상과도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런 문제들로만 우간린은 이 책을 엮었습니다. 그리하여 거기서 공자가 찾아낸 현명한 해답으로 그와 비슷한 문제를 가진 우리 역시 출구를 찾게하려고 말이죠. '어떻게 원하는 삶을 살 것인가'는 그런 책입니다. 그냥 탁상공론이 아닌 실제 우리 삶에 뭔가 플러스적인 것을 주려는 책. 때문에 더욱 쉽게 대중들에게 들려줄 필요가 있었고 그리하여 이렇게 소설 형식으로 쓰인 것이죠.
덕분에 책은 꽤나 읽을만 합니다. 글마다 맨 앞엔 이 글의 출처가 되는 원래 논어에 나온 공자의 말씀을 적어놓았고 마지막에는 공자의 가르침이라 하여 글의 요지를 간략히 정리해 놓고 있습니다. 이렇게까지 짚어주는 건 너무 과잉된 친절이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말이죠.
그러고 보니 이 책에서 가장 인상깊게 다가온 부분이 있습니다. 앞서 공자의 말년을 잠깐 얘기했습니다만 바로 그것과 관련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공자는 어째서 공적인 정치 영역으로 나아가는 것을 포기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 계기가 있었습니다. 그건 다른 것도 아닌 어느 여성과의 만남 때문이었습니다.
어느 날 공자는 한 여인이 구슬피 곡을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찾아가 그 연유를 물어보니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자신의 집안은 사냥으로 먹고살았는데 태산에 호랑이와 이리가 날뛰어 걸핏 하면 사람을 다치거나 죽게 한다는 것이었다. 시아버지는 벌써 10년 전에 호랑이에게 잡아먹혀서 겨우 유골만 찾아왔다고 했다. 또 두 해전에는 남편이 호랑이에게 잡혀갔는데 이번에는뼈조차도 찾지 못했다고 했다. 그리고 바로 며칠 전 여덟아홉살난 아들마저 호랑이에게 잡아먹히고 말았다는 것이다. (p.314)
그러자 같이 간 제자 하나가 다시 여인에게 물었습니다. 산에 호랑이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왜 이 곳을 떠나지 않았느냐구요. 진작에 떠났다면 아들만이라도 지킬 수 있지 않았느냐구요. 그러자 여인은 이렇게 답했습니다.
원래는 산 아랫마을에 살았지요. 밭을 일구면서요. 그런데 탐관오리들이 어찌나 괴롭히는지 갈수록 말도 하지못할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정말로 더는 버틸 수가 없어서 이곳으로 옮겨온 것입니다. 이곳에 호랑이는 있지만 그래도 포악한 정치나 탐관오리는 없지 않습니까." (p. 314)
그걸 듣고 공자는 이렇게 탄식했다고 합니다.
"가혹한 정치가 호랑이보다 무섭구나! 호랑이가 있는 곳에서는 그래도 모두가 잡아먹히지 않지만 가혹한 정치 아래에서는 살아남을 사람이 없구나!(p. 315)
그리고 그 날로 벼슬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시와 음악을 고치고 '역경'과 예법을 바로 잡기 위한 연구에 전념했다고 합니다. 관직이라는 말을 입에 담는 일조차 없었다고 하는군요. 어쩌면 공자가 자신이 아무리 해도 변하지 않는 정치에 그만 환멸을 느낀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다시는 그런 여인이 없도록 정말 자기가 힘써야 할 것은 위로 부터의 변화가 아니라 아래부터 바꿔나가는 것이라고 깨달았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가호맹사성'이라는 공자의 말은 가슴의 현을 울립니다. 세월호의 수장된 아이들의 넋조차 제대로 위로하지 못하는 오늘의 현실 또한 그러한 탓이겠죠.
그러고 보니, 공자가 언급한 명재상이라 칭송받았던 관중의 일화도 생각납니다.
관중이 모시던 군주인 환공이 어느 날에 사냥을 나갔다가 한 노인을 만났습니다. 여기가 어디냐고 노인에게 물으니 노인은 '우공의 계곡'이라 답했다고 합니다. 왜 그렇게 불리냐고 했더니 노인은 그 우공이 바로 자신인데 말 새끼를 어리석게 빼앗긴 곳이라서 그렇다고 했답니다. 환공이 빼앗기게 된 경위를 물으니 노인은 자신이 기르던 암소가 새끼를 낳아 그 새끼를 팔아 말 새끼를 사왔는데 여기서 한 젊은이가 나타나서는 노인에게 "소가 말 새끼를 낳을 수 없느니 그 말 새끼는 분명 훔친 것이다." 말했다고 합니다. 결국 청년의 말재간을 당해낼 수 없었던 노인은 말새끼를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그 이웃이 그 이야기를 듣고는 노인이 정말 어리석다고 생각해 우공의 계곡으로 불렀다는 것입니다. 환공이 재미있어하면서 관중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주자 관중은 갑자기 사죄의 의미로 환공에게 두 번 큰 절을 올렸다고 합니다. "노인의 어리석음이 아닙니다. 바로 제 어리석음 때문입니다." 하면서요. 환공이 당황하며 그 연유를 묻자, 관중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제가 정치와 법률을 공명정대하게 운용되도록 만들었다면 어찌 노인이 그 말만 듣고 말 새끼를 청년에게 내주었겠습니까? 정치와 법률이 공명정대하지 못하다고 생각하니 자신에게 불리할 것이라 믿고 내 준 것이죠. 그러니 그렇게 만들지 못한 제 어리석음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관중을 공자는 진정한 군자라 칭송했습니다. 이런 혜안과 책임감을 가지는 인물이 참 그리워지는 요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