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 스님의 행복 - 행복해지고 싶지만 길을 몰라 헤매는 당신에게
법륜 지음, 최승미 그림 / 나무의마음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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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야흐로 행복 강박 시대다. 작년에 한 신문이 젊은층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는데 세 명 중 한 명(33.9%)이 기쁨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그들은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같은 SNS에 자신이 행복하다는 것을 과장해서 표현한 적이 있다고 했고 그 이유에 대해서는 남에게 뒤쳐지는 것이 싫어서라고 대답했다. 행복도 이제 경쟁 대상이다. 그만큼 과도하게 집착하게 되었다고 봐도 무방할 것 같다. 이러는 이유가 뭘까? ‘뒤쳐지기 싫다’는 말을 근거로 생각해 보면 아무래도 현실 도피 심리와 타인의 시선에 대한 두려움이 가져온 결과가 아닐까 싶다. 하지만 여기엔 개인적인 원인만은 아닌, 사회적인 원인도 있다. 학창시절, 나는 문제를 풀 때 내가 아는 것이 맞는지 틀린지 확실하지 않아서 불안한 문제일수록 빨리 정답을 확인하고 싶었었다. 해답을 향한 욕망의 크기는 내가 지금 느끼는 불안의 강도에 비례했다. 행복 강박도 동일하다. 불안할수록 집착하게 된다. 불안이 소멸된 상태로써의 행복에 대한 희구가 갈수록 절박해지는 탓이다.


 사실 많은 이들이 지금 우리 사회를 불안의 시대라 일컫는다. 북한은 연일 핵도발을 하고 있고 언제 해고될 지 모르는 비정규직 비율은 날로 높아지고 있으며 가계 부채 비율은 아주 심각한 상황이다. 다수의 경제 전문가들이 2017년에 우리나라에 커다란 위기가 닥쳐올 것이라 경고한다. 여기저기서 불길한 지표와 예언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 판이니 아무래도 가느다란 막대 위에서 위태롭게 돌고 있는 접시와도 같은 불안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러니 행복에 대한 천착도 높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어떤 행복이어야 할까? 너무도 불안한 우리는 그저 어서 빨리 안정을 얻고 싶은 마음에 어떻게 해야 내가 정말 행복할 수 있는지 따져 볼 여유가 없다. 역사적으로 인간의 자유를 제한하는 파시즘은 언제나 사회가 한창 불안할 때 도래했다. 그처럼 우리는 커다란 불안 앞에서 쉽게 자유를 포기하는 경향이 짙다. 선택에 뒤따르는 위험 보다는 모방을 통한 안정을 취하려든다. 때문에 막연히 남의 행복을 자신의 행복의 모델로 여기고 뒤쫓는다. 그것은 또한 타인의 인정을 쉽게 얻을 수 있는 길이기도 해서 더욱 견고해진다. 행복은 결국 기성품 같은 것이 된다. 치수는 미리 정해져있고 우리는 이제 자신의 기준을 그것에다 억지로 맞춰야 한다. 그런 우리들은 마네킹과 다를 바 없다. 사람들의 경탄을 자아내는 아무리 화려한 옷을 입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타인의 의지로 선택된 것이며 외모는 근사해 보일지라도 내면은 공허하다.


 우리는 성공에 대해 잘못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자기 인생을 타인의 기준에 맞추고 살아갑니다. 그러면 타인으로부터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을지는 몰라도 자기 삶이 피폐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나이가 들거나 병이 들었을 때 과거에 자신이 한 일이 보람 있었다고 느끼기 보다 허망함을 느끼는 것은 그런 까닭입니다.(p. 189)


 자전거를 탈 때, 우리 몸은 가만히 있지 않는다. 비록 우리가 스스로 느끼지는 못해도 흔들리는 자전거 위에서 계속 균형을 잡으려 애쓰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넘어지지 않는 것이다. 불안과 행복의 관계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불안할수록 우리가 정말 해야 할 것은 행복에 대한 맹목적인 집착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진정한 행복에 대한 숙고일 것이다. ‘법륜스님의 행복’은 그런 균형점을 찾아가는 여정이다. 30년간 법문을 강의한 내공으로 부드럽고 친절하게 행복의 기준을 어디에 두어야 하며 사회와 가족 내에서 만나는 모든 갈등에 있어서 내가 아니라 상대의 입장에서 먼저 관조하는 것이 왜 보다 현명한 방법이 되는지 그리고 현재에 충실할 것과 자신의 처지를 이성적으로 바라보는 법을 조언한다. 그런 조언들이 이 책엔 참으로 넉넉하다. 때문에 실제 자신이 가지고 있는 고민을 여기에 의탁해 풀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내게도 특별히 와닿는 조언이 있었다.

 

 자기 자신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의 마음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바탕에는 자신이 대단한 사람이라거나 아니면 대단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기대가 깔려 있어요. 또 이런 자기의 자아상에 집착해서 자기를 우월하게 여겨요. 그런데 현실의 자기가 그만큼 따라주지 않으니 답답해하는 것이지요.(p. 34)


 그런 것이었나? 내 부족함의 감각이 실은 내 우월함의 반영이었다니! 난 늘 자신을 겸손하다 여겼는데 실은 그것도 우월이 굴절된 잔상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닐까 궁금해졌다. 법륜스님의 조언이 균형점을 옮긴다는 말은 바로 이런 뜻이다. 이제까지 전혀 서보지 못했던 자리에서 나와 관계 그리고 삶을 응시토록 하는 것이다. 기성품화된 행복은 불안의 부정에 따른 반향으로써 성립한다. 품고 헤아리기 보다는 배척하기에 급급하다보니 행복마저 브랜드(brand)가 되어 버린다. 즐김이 아니라 소유의 대상일뿐이고 실체도 없는 기호. 유토피아란 인간 실존이 가진 부정성을 부정하려는 노력의 소산이라는 찰스 틸리히의 말을 믿는다면 유토피아란 브랜드화한 행복의 극대화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를 비롯하여 많은 유토피아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어디에서나 늘 폭력적인 배제와 억압이 항존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슬라보예 지젝은 나치의 유토피아에 대한 환상이 유태인을 생산했다고도 말한 바 있다. 즉 유토피아는 배제와 억압의 폭력으로 성립되고 지탱되는 것이다. 


 축소판인 맹목적 행복도 그러하다. 뒤쳐지기 싫어서 행복을 과장해서 표현했다고 많은 이들이 대답했듯이, 여기에도 서열을 매개로 한 배제는 그대로 통용되는 것이다. 그런데 법륜스님은 내 행복을 위해 희생된 타인을 먼저 고려하라고 말한다. 불안의 공포로 자신의 시야를 가리기 전에 함께 떨고 있는, 나보다 못한 타인을 먼저 보라고 하는 것이다. 외면이 아닌 직시, 배제가 아닌 배려의 요청이다. 그리고 참된 자유와 행복으로 나아가는 시작이다. 불안이 전염시킨 오늘날 행복의 행태를 볼 때, 이런 법륜스님의 ‘낯선 자리’로의 인도는 내게 적절해 보인다. 낯선 자리로 가는 것은 스스로를 다양한 삶의 맥락 속으로 삽입하는 것을 뜻한다. 자신을 산포하여 천변만화 하는 것이다. 어디든 서 있을 수 있는 이런 자에게 행복은 더 이상 어딘가에 있는 지점이 아닌, 지금이라도 당장 결심만 하면 되는 선택 사항일 것이다. 결과의 중시로 무시되었던 과정이 복원되고 미래 역시 현재 앞에 꼬리를 내릴 것이다. 이 비전을 법륜스님은 마지막에서 다음과 같은 한 문장으로 정리한다.


 ‘어떤 순간이라도 우리는 행복을 선택할 수 있다.’


 정녕 그렇게 될 수 있다면 좋겠다.  법륜스님의 조언 옆에 나를 놓고 비교해 보니 솎아낼 것도 많고 용기도 아주 많이 필요해 보인다. 그래도 지금 당장 나의 바깥으로 첫 발을 내밀어 보려 한다. 법륜스님이 '자꾸 “내일부터” “모레부터” 하면서 미루지 말라(p.25)'고도 하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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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6-03-13 2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행복 강박..... 그러게요. 진짜 그래요.

만나는 많은 분들의 목표가 행복한 삶이라고 하는데, 저는 굳이 행복해야 하나? 라고 반문하게 되더라구요.
그래서 전 이 책을 구매하지 않았어요, 제목에 행복이라고 쓰여있는 부분이 조금 불편했어요. 아하하.

행복한 기분이 즐거운 기분, 무엇인가 잘 되는 상태를 말한다면
그 반대의 균형점도 중요한 게 아닐가 싶었어요. 괴롭더라도 자신을 들여다 보는 것 말이죠.

헤르메스님, 그런데 균형이요, 너무 어려워요... ㅠㅠ

ICE-9 2016-03-13 23:22   좋아요 0 | URL
와아, 마녀고양이님 이게 얼마만입니까? 정말 반가워요^^ 마녀고양이님은 저랑 통하는 부분이 많은 것 같네요. 저 역시 행복해야 하는 것에 대해 반감이 있습니다. 실은 어떤 상태가 정말 행복한 것인지도 모르겠구요.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제가 이 책을 읽게 된 것은 행복 때문이 아니라 정청래 의원 때문이었습니다. 원래 리뷰도 사실 그것을 중심으로 썼었는데 너무 정치적이고 개인적인 것 같아 다시 썼어요. 저는 이 책, 정청래 의원 컷오프 되는 날 너무 상처를 받아 치유 용으로 찾아 읽었어요. 들끓는 내 마음을 달랠 수 있는 쉽고 차분한 어조가 필요했거든요. 원래 리뷰엔 정말 엄청 분노도 쏟아냈었는데^^ 어쨌든 지금 전 완전 절망 상태입니다. 더불어 민주당에 과연 미래가 있는지조차 의심할 정도로... 그런 가운데 행복을 생각해 보게 되었네요. 어떤 정해진 상태가 아니라 지금 현재 자체가 어떤 모습이든 얼마든지 행복이 될 수 있다는 법륜스님의 말을 믿고 싶어졌어요. 그거라도 있어야 견딜 수 있을 것 같아서... 아무튼 현재 저는 그러네요. 어쨌든 마녀고양이님 정말 정말 반갑습니다^^

마녀고양이 2016-03-14 21:14   좋아요 0 | URL
이렇게 격하게 반가와해주시다니! ^^

저도 정청래 의원 컷오프로 엄청나게 상심하고, 오늘 이해찬 의원 컷오프로 민주당을 계속 지지해야 하나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문재인 대표를 믿고 있고, 그 분이 가만히 지켜보고 있는 동안은 그냥 따르려고 합니다. 선거 때 보면 알겠지요.... 김종인 대표의 능력인지, 오만인지 여부를요.

2016-03-15 02: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3-16 14: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오래된 생각과의 대화 - 내 영혼에 조용한 기쁨을 선사해준
이하준 지음 / 책읽는수요일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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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 모임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 작년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책들에 대해 대화를 나눴다. 같이 온 이가 출판사에서 마케팅 업무를 맡고 있어 자연스럽게 나온 화제였다. 책들을 헤아리다 보니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모두 실은 우리 불안의 응답이라는 점이었다. 보다 자세히 말한다면, 책을 구매하려는 자가 이미 가지고 있는 불안을 긍정하게 만들고 정당화시켜 주는 책이 대부분 베스트셀러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 때, 우리는 주로 기시미 이치로와 고가 후미타케의 '미움받을 용기'를 떠올리고 있었다. 나는 그 책만이 가지고 있는 굉장한 내용이 있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고 보지 않는다. 그 보다는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가장 많이 가지고 있는 불안이며 현대 사회가 추구하는 경쟁의 고도화와 유연화로 관계가 파편화되고 개인이 점점 고립됨으로써 필연적으로 가질 수밖에 없었던 불안인, 바로 언제 어디서든 누구에게라도 미움받을 수 있다는 불안에 대해서 '미움받을 용기'가 그런 불안은 사회에서 당연하며 그러므로 부정의 경험이라기 보다는 당위적 체험이니 오히려 용기를 내어 당당하게 미움을 받으라고 말해주었기에 베스트셀러가 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즉 불안을 가진 이들 모두가 바라고 있던 대답, '넌 잘못된 것이 아니야, 넌 네 자신을 긍정해도 돼!'를 그 책이 쉽고 설득력있게 들려주었기에 사람들이 앞다투어 찾았던 것이 아닐까 싶다. 거듭 말하자면 나는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 우리들 대부분은 있는 그대로의 우리 자신을 오롯이 긍정해 줄 무언가를 간절히 원하고 있다고 말이다. 내가 모자르면 모자란 대로,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넌 아무렇지 않아 하고 말해주는 것을 말이다. 베스트셀러는 그 응답이었으며 그런 의미에서 치유는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이러한 자기 정당화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정말 물어야 하는 질문은 베스트셀러가 어떻게 되느냐 따위가 아니라 왜 우리는 이토록 자기 정당화를 필요로 하게 되었느냐에 있을 것이다. 왜 우리는 끊임없이 스스로를 비하하고 그것이 원인이 된 불안 속에 끊임없이 떨고 있냐고 말이다.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을 쓴 야마다 히로키에게 묻는다면 거대 이념의 종말 때문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거대 이념의 퇴조로 이제 모든 평가를 오롯이 개인이 감내하게 되었기 때문에 비하와 불안이 만연하게 되었다고 말이다. 미셀 푸코에 따르자면 이것은 자연스런 흐름이 아니라 거대 이념의 붕괴 이후 패권을 차지해버린 신자유주의가 명확히 의도한 결과다. 미셀 푸코는 신자유주의적 담론을 분석하면서 그것의 목적이 오로지 한 개인을 '1인 기업가'로 만드는 것에 있다고 밝혔다. 기업이 시장에서 당하는 결과에 대해 그것이 의도든 불운이든 사회가 전혀 책임지지 않듯이 그렇게 한 개인이 당하는 모든 위험을 개인에게 전적으로 부담시키며 또한 기업이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끊임없이 자신을 점검하고 능력 향상을 위해 노력해야 하듯 개인 역시 지속적인 자기 관리를 하도록 만드는데 있다고 말이다. 즉 개인은 이제 사회에게도, 노조에게도 기댈 수 없다. 자신이 당하는 것이 무엇이 되었든 오로지 홀로 파악하고 관리하며 이겨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경쟁은 필연적인 부산물일 뿐이다. 지금 우리의 현실을 둘러보면 이와 같은 푸코의 분석이 얼마나 정확했는지 잘 알 수 있다.


 이런 개인이 짊어져야 할 책임이 너무나 많아졌으므로 덩달아 불안도 커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이제 우리를 너무도 옥죄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나 자신을 긍정해 줄 무언가를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찾듯이 절박한 마음으로 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우리의 현실은 신자유주의란 담론이 설계한 것이다. 이처럼 언어는, 이론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추상적이거나 허약하지 않다. 생생한 힘으로 구체적이면서 물리적인 현실을 만들어낼 수도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인문 또는 그것을 주로 만나게 하는 통로인 고전을 읽는다는 것은 그저 호사가의 취미라든가 정보 축적만은 아니다. 인문학자라는 말을 낳은 중세 후기의 이탈리아 고대 문헌 학자가 그랬듯이 몇 백년간 지속된 중세의 어둠을 계몽의 빛으로 몰아낼 힘도 얼마든지 태동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안과 자기 정당화가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되어 상호 심화되는 이런 질곡이 힘겹다면 그 곳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우리가 기대야 할 것도 오로지 언어, 담론 밖에 없다. 언어가 불안과 절망을 가져왔으나 구원 역시도 거기서 찾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힘들수록 읽어야 한다. 그 언어들을 매개로 사유해야 한다. 진정한 해방을 위한 유일한 출구이기 때문이다. 이왕이면 지금의 현실을 전혀 다르게 바라볼 수 있도록 고전을 만나야 한다. 탈옥을 다루고 있는 유명한 미국 드라마 '프리즌 브레이크'에서는 주인공이 감옥 전체의 지도를 몸에 문신으로 새겨 들어간다. 이렇게 탈출에는 내가 지금 갇혀 있는 장소를 전체로 조감할 수 있는 지도가 반드시 필요하다. 바로 그것을 고전이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과 많이 다르거나 혹은 지금이 태동하던 시기의 사유인 지라 동시대의 담론들 보다 훨씬 더 내가 갇힌 이 시대의 외곽을 잘 드러내어 그 안에 담긴 전체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오래된 생각과의 대화'라는 책, 프롤로그에서 저자 이하준은 이렇게 말했다. '고전은 우리에게 자유 정신의 힘을 준다'라고. 그 자유의 힘이란 바로 현실이 가진 중력에서 자유롭게 만들어 바깥으로 데려가는 힘, 그리하여 객관적인 시야로 시대를 조망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이러한 테우리를 넘어서 나아감과 해방된 공간에서 홀로 던지는 시선이 이하준이 말하는 '대화'가 아닐까 여겨진다. 자유를 향한 월담과 해갈을 위한 대화를 체험해 보기에 '오래된 생각과의 대화'도 좋은 선택이라고 본다. 일단 구성을 살펴보면 이 책은 네 개의 파트로 이루어져 있다. '나'와 '사랑', '관계' 그리고 '삶'인데 조금 자세히 들여다보면 여기에 연속성이 있음을 찾을 수 있다. ''나'에서 나아가면 '타인'이 있고, 그 '타인과의 함께'가 '사랑'이며 그것을 통해 '관계'가 형성되고 그 관계의 연쇄와 집적으로 하나의 유기적인 '삶'이 형성되니까 말이다. 한 마디로 확장의 경로인 것이다.


 그 확장의 경로를 따라 철학자 한 사람씩을 분배하여 철학자의 담론에 저자 자신의 담론을 가필하는 것이 바로 이 책의 구성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철학자의 담론은 삶에서 우리가 가지거나 만날 수 있는 질문으로 형성되어 있고 그런 측면에서 이 책은 우리가 품을 수 있는 나와 존재의 의미 그리고 세계와 윤리에 대해 대부분의 의문을 망라하고 있다고 보아도 좋다. 그렇다고 현학적이진 않으며 담론이 추상적 차원에 갇히지 않도록 구체적인 현실 문제와 연계되도록 하고 철학자의 언어도 독자들에게 쉽게 받아들여질 수 있도록 가급적 일상적인 어투로 순화하고 있다. 초심자를 많이 배려하는 책이며 그러므로 시작하기에 좋은 책이다.


 그렇지만 입문에 그치진 않는다. 한 권의 책으로써의 완결성을 엄연히 지니고 있다. 저자는 이 책으로 고전의 대화가 어디로 데려갈 지 확실히 제시하고 있다. 그것을 우리는 이 책을 확장의 경로인 네 파트의 제목으로 알 수 있다. 일단 ''는 주체로 설 것을 주문하고 있다. 여기에 있는 쇼펜하우어의 '고독' 찬양은 고독의 향유를 통해 자신과의 대화를 즐겨 정신적으로도 정서적으로도 독립하게 만들기 위함이며, 뒤이은 니체의 '초인'은 초인의 의미를 '어린아이와 같이 되는 것'이라고 명확하게 밝혀 '어린아이는 스스로 완전히 새로운 것을 창조해내는 과정과 활동을 놀이처럼 즐기는 사람'으로 '자기 삶의 주인이 되는 존재'라고 하면서 이런 의미에서 초인은 무엇보다도 자신을 긍정하는 존재라고 제시한다. 그리하여 요즘 시대 우리 불안의 많은 부분이 타인과의 비교에서 엄습하는데 나보다 나은 타인에 대한 동경이 꼭 나쁜 것은 아니지만 무엇보다 자신을 강하게 긍정한 상태에서 동경을 가지는 것이 좋다고 권유한다. 이런 식으로 왜 먼저 내가 주체가 되어야 하는 지에 대해 데카르트의 '방법론적 의심', 밀의 '용기와 관용', 아리스토텔레스의 '습관', 에피쿠로스의 '외부의 자극에 쉽사리 동요하지 않는 내심의 평정' 마지막으로 몽테뉴의 '끊임없는 자기 숙고'를 하나하나 설명해 나간다.


 다음에 계속되는 '사랑'도 비슷한 형식으로 진행된다. 우리는 여기서 왜 먼저 주체가 되어야 하는 지, 그 이유를 보다 확실히 알 수 있는데 그것은 나와 다를 수밖에 없는 타인과의 관계 형성이 필연적일 수밖에 없는 우리 삶에서 무엇보다 나와 타인이 가지는 차이를 긍정하고 배려할 수 있게 만들기 위해서인 것이다. 바로 그것을 우리는 가장 먼저 나오는 프롬의 마조히즘과 사디즘 적 사랑의 정의에서 확인할 수 있다. 프롬이 양자의 사랑에 공통점이 있으며 그 공통점은 '주체'로서 자립할 수 없는 사람들의 '주체'로 서기 두려움에 기초하고 있으며 타자를 통해 그 두려움을 극복하려는 왜곡된 애착에 있다(P. 103)'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진정한 사랑은 온전한 주체가 되어야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뒤이은 칸트와 마지막 아도르노에게서도 확인되며 특히 울리히 벡 부부에 이르러서는 모든 관계를 파현화 시키는 지금 사회의 유연화 흐름을 고려해 볼 때 제대로 된 관계를 맺고자 한다면 꼭 필요한 태도라는 것을 알 게 된다. 때문에 저자는 독립된 주체의 성립을 우리들에게 우선적으로 요구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나와 타인이 가지는 차이의 긍정을 통해 자신을 먼저 내려 놓고 상호 이해와 협력을 한층 더 증진시키기 위해서다. 이러한 나 자신의 긍정과 타인에 대한 긍정은 '관계'와 '삶'까지 주욱 이어진다. 현실적인 관계 양상에서 그동안 부정적인 것으로 평가받던 것들이 거기에 과연 긍정적인 가능성은 없는 것인지 재검토되고 '삶'에 가서는 누구나 겪는 '내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 삶'과 '노년' 그리고 '죽음' 등 온갖 부정적인 경험들을 전복적으로 다시 의미 짓는다. 그리하여 경로 전체를 통해 온전히 절감하게 만든다. 지금 나로 하여금 그토록 나 자신을 정당화시켜줄 무언가를 찾게 만드는 이 불안을 잠재우고 싶다면 어디서부터 출발해야 하는 지를 말이다. 그 확고한 자리로 우리를 넌지시 데려간다.


 생각해보면 저자의 제안은 꽤 적절해 보인다. 왜냐하면 우리의 불안은 신자유주의 이후 가속화되었는데 푸코의 말에 따르면 신자유주의는 개인 스스로 항상 자신을 관리하게 만드는데 있고 그런 관리는 우리도 경험상 잘 알고 있듯이 많이 타인과의 비교를 통해 이뤄지기 때문이다. 베블렌이 '유한계급론'에서 자본주의의 소비는 어디까지나 과시를 위해 행해진다고 한 바 있듯이 실제 우리는 타인과 그들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에 민감하다. 그렇지 않아도 라캉이 말한 바에 따르면, 우리의 욕망조차 타인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것으로 형성되며 그것이 정말 내가 원하는 것인지, 아니면 타인이 원하는 것인지조차 모르는데 진정한 우리의 비극이 있다고 한다. 때문에 우리는 늘 타인과 견주어 날 볼 수밖에 없고 항상 나보다 뛰어난 존재들만 눈에 들어오는 법이니 내 모자람과 부족으로 인한 불안은 가실 길이 없다. 또한 이런 시선은 언제나 우열의 휘장을 두르기 마련이다. 나와의 높낮이에 따라 질시와 경멸의 시선이 왔다갔다 할 수도 있다. 신자유주의는 모든 개인에게서 사회적 보호막을 벗겨내어 만인에 대한 만인의 경쟁으로 이끌어가려 하는데 이런 개인의 '기업가화'는 그것이 원하는 바를 제대로 이뤄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자유주의가 강요한 시선에서 벗어나는 것, 그들의 눈이 아니라 온전한 내 눈으로 보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또한 그 층위에서의 나와 만나는 타인에 대한 차이의 긍정 또한 진정 불안을 해소하고 싶다면 기필코 결부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오래된 생각과의 대화'는 이런 태도와 노력의 당위성을 조용히 납득시키는 힘이 있다. 쉬운 내용과 평이한 서술 때문에 더욱 그런 것 같다.


 우리는 우리를 구해줄 감 같은 것이 떨어지길 바란다. 언제나 감처럼 부와 성공 같은 현실적이며 물리적인 것들이 우리를 불안에서 빠져나오게 할 수 있다고 여겼다. 그래서 나 자신 보다는 늘 외부에 눈과 귀를 기울였다. 그렇지만 그럴수록 우리는 외부에 종속되었고 점점 기울어진 중심으로 인해 더 불안해지기만 했다. 그러나 우리의 이 현실이 어떻게 형성되어졌는 지를 고찰한다면 언어가 오히려 현실과 물리적인 것들을 지배한다고 할 수 있다. 아니, 거기까지 나아갈 필요도 없이 지금 우리 생활의 뼈대를 이루고 있는 법만 봐도 자명하다. 지금 우리의 절망을 낳은 것도 기실은 언어고 구원을 위한 진정한 힘도 언어에 배태되어 있다. 그러므로 읽는 것은 전혀 무가치한 일이 아닌 것이다. 하물며 고전은 더욱 그러하다. 물론 저자도 말하듯이 고전이 만능 열쇠인 것은 아니다. 고전에 대한 무조건적 추종도 위험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입된 상식으로 식민지가 되어버린 나의 내면을 신선한 시야와 사유로 가득찬 처녀지로 바꾸는 데 있어 고전만큼 좋은 자극은 없는 것 같다. 고전과 나 사이에 가로놓인 시간과 시대상의 간격 때문이다. 토머스 쿤이 말하지 않았던가 아무리 과학적 진리라고 해도 실은 한 시대를 지배하는 패러다임이 형성한다는 것을. 간격은 그 패러다임의 막을 찢고 구멍을 만든다. 그리고 그리로 자유로운 상상의 바람을 불어 넣는다. '오래된 생각'은 그런 자유의 숨결을 품고 있다. 그러므로 대화는 계속되어야 한다. 자기 정당화를 향한 목마름을 진정 가시게 해 줄 우물은 그렇게 멀리 있지 않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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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분 - 세상을 마주하는 시간
김진혁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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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분'을 본 적은 없다. 하지만 김진혁 피디는 알고 있다. 그가 EBS에 있을 때 만들었던 '지식채널e'는 내가 사랑한 프로그램이었다. 특히 그가 만든 '미야자와 겐지'편은 그 때까지 그저 '은하철도 999'의 원작 동화 작가로만 알고 있었던 겐지를 전혀 다르게 보도록 만들었고 인간적인 매력마저 한없이 느끼도록 하였다. 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유투브를 뒤져 지난 방송분까지 다 찾아 보게 되었다. 그 정도로 내게 '지식채널e'는 각별했다. 몰랐던 것을 알게 하고 아는 것을 다른 방식으로 보게 했다. 앎의 범위가 넓어졌고 아는 것은 깊이가 더해졌다. 그러니 김진혁 pd가 광우병을 소재로 한 '17년 후'를 만들었다는 이유로 사측에 의해 보복성 인사를 당했을 때는 나도 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그가 다시 돌아와 '다큐프라임'을 연출할 때도 사측은 그에게 똑같이 어이없는 일을 저질렀다. 그 때 그는 '반민특위'에 관한 것을 만들고 있었는데 70%넘게 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이유 없이 제작을 중단 시켜버린 것이다. 그는 결국 11년간 일했던 EBS를 떠나게 된다. 권력의 눈치를 너무 보는 방송국에서 더이상 할 것이 없다는 판단이었다. 그런 그의 선택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지만 그의 손으로 빚어낸 프로그램을 다시 못보는 것은 안타까움이었다. 믿을만한 언론인이었기에 더욱 그랬다.


 사실 요즘엔 그런 언론인이 서울에서 반딧불을 보는 것만큼이나 희소하다. 언론을 권력의 시녀도 모자라서 그 시녀의 시종이라고 일컫는 게 요즘의 현실이다. 편파와 왜곡은 일상이고 진실보다는 선동에 더 주력한다. 지금의 정부가 들어서고나서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TV를 없애는 것이었다. 불공정하고 거짓된 말에 너무도 멀미와 피로를 느꼈던 것이다. 때문에 이렇게 김진혁 PD가 다시 돌아와 또 다른 형식으로 말을 걸고 있었다는 것도 몰랐다. 그것이 바로 '5분'이었다. 나는 그것을 책이 나오고나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난 이 책을 순전히 '김진혁'이라는 이름 때문에 읽게 된 것이다.



 대표적인 독립 언론 '뉴스타파'.

 '5분'은 거기서 만들어진다. 그래서일까? 책을 읽어봤는데 소재와 담론이 더욱 거침없어진 듯 하다. 책은 모두 '생각, 하다'와 '경계, 짓다'라는 두 개의 파트로 나누어 각각 9개의 꼭지를 담고 있는데 형식은 먼저 '5분'의 방송 내용을 수록하고 뒤에 그것에 관해 좀 더 상세히 설명하는 것으로 되어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소재를 꼭 한국의 현실과도 연결한다는 것으로 항상 꼭지의 마지막은 그것과 상관있는 한국의 현실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끝난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말하고자 하는 대상을 아주 입체적으로 바라보게 하고 그 대상이 다른 누구가 아닌 바로 내가 처한 현실이기에 사유하지 않을 수 없도록 이끈다. 더구나 여기에 실린 내용들은 오늘의 사회를 마주하노라면 꼭 한 번은 부딪혔을 문제들인지라 더욱 그렇다.


 홍준표 경남도지사의 의무급식 중단으로 다시 논쟁의 중심에 섰던 복지, 교학사의 친일적 역사 교과서 발간으로 더욱 관심을 불러일으킨 식민 사관의 극복, 젊은 시나리오 작가인 최고은씨의 아사로 불거진 열악한 영화판 종사자들의 문제, '안녕하십니까'의 대자보로 일깨운 이 모든 불의와 그로인한 아픔 앞에서 그저 나만 안녕하면 다냐는 문제 제기에다 정당한 파업권 행사임에도 불구하고 해고당한 노동자에게 47억을 배상하라는 거의 살인이나 다름없는 판결로 수많은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의 자살을 가져왔던 상황 앞에서 같은 노동자로서 느끼는 참담함 그리고 최근 어제 6030원으로 결정난 최저임금까지. 볼 때마다 한 번은 궁금했고 더러는 고민했던 주제들을 다루고 있으니 절로 사유로 참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렇게 지금 우리가 보아야 할 곳으로 데리고 가는 이 책 '5분'은 이 방송이 일종의 정신적 지주로 여기고 있는 미국의 언론인 에드워드 머로가 했던 방송 제목 그대로 'SEE IT NOW'라 할 수 있다.


이 책엔 '안녕들하십니까'란 대자보 전문이 실려 있는데 말미에 이런 말이 나온다.

 

 우리는 정치와 경제에 무관심한 것도, 모르는 것도 아닙니다. 단지 단 한 번이라도 그것들에 스스로 고민하고 목소리 내길 종용받지도, 허락받지도 않았기에 그렇게 살아도 별 탈 없으리라 믿어온 것 뿐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럴 수조차 없게 됐습니다. 앞서 말한 그 세상이 내가 사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다만 묻고 싶습니다. 안녕하시냐고요. 별 탈 없이 살고 계시냐고. 남의 일이라 외면해도 문제없으신가, 혹 정치적 무관심이라는 자기 합리화 뒤로 물러나 계신 건 아닌지 여쭐 뿐입니다. 만일 안녕하지 못하다면 소리쳐 외치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그것이 무슨 내용이든지 말입니다. 그래서 모두들 묻고 싶습니다. 모두 안녕들 하십니까.(P.93)


 당신의 대답은 무엇일까? 나는 결코 안녕하지 못하다. 나는 작년 세월호 이후로 눈물이 많아졌고 분노도 많아졌다. 사회를 바라볼수록 쌓이는 갈증을 해갈할 단비는 그 어디에서도 내리지 않고 오히려 상심으로 더욱 깊게 갈라지도록 하는 삽질만 가득하니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 한다는 말처럼 그저 이곳을 떠나야 하는 생각뿐이다. 보도를 보니 한국 국적을 포기하는 자가 한 해만 7천명이 넘는다고 한다. 젊은 세대의 70%는 한국을 떠나고 싶다고 답했다고도 한다. 이유는 사람의 가치를 전혀 귀하게 여기지 않기 때문이란다. 나와 닮은 자들이 많다. 그만큼 여기엔 희망이 없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5분'을 읽어보면 희망을 가지지 않는 것이 당연해 보인다.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의 이야기나 최저임금에 얽힌 이야기 그리고 영화판 종사자들의 이야기는 사람의 가치를 하찮게 본다는 젊은 세대의 성토가 사실이며 언젠가 내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마저 갖게 한다. 그런 우려를 불식시키려면 언론이라도 공정해야 할텐데 공영방송이라는 KBS 사장이 선출되는 과정을 보노라면 그리고 권력자를 비판하는 인터넷 댓글마저 명예훼손으로 걸고 넘어지겠다고 나서는 지금의 방통위를 보노라면 공정에 대한 기대는 어림도 없는 전망이라는 것을 확신케 한다. 더구나 지금은 마치 대처의 이중국민 정책을 그대로 가져온 것처럼 온갖 라벨링으로 연대해야 할 사람들을 사분오열시키고 국민마저 부화뇌동하고 있으니 더욱 어디서 희망의 끈을 찾을까 요원하기만 하다.


 이런 심정은 김진혁 PD도 다르지 않았으리라 본다. 무엇보다 그는 직접 경험까지 한 터이니까. 하지만 이 책은 울분의 토로가 아니다. 절망의 목록이 아니다. 이 책은 그럴수록 냉정한 눈으로 사태를 보려하며 정확히 문제를 짚으려 한다. 나는 그것을 특히 가난한 이들은 왜 보수적이 되는가'에서 느꼈는데 사실 누구나 알듯이 '국개론'이 유행하고 있다. 물론 여기서의 '국개론'은 이 책에 나오는 '국가개조론'의 준말이 아니다. 가난한 이들이 정작 자신을 위하는 사람은 뽑지 않고 오히려 해가 될 사람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서 지지하는, 그러니까 그들의 '계급배반투표'를 비아냥하는 말이 바로 '국개론'인 것이다. 실제로 2013년 대선 당시 저소득층의 60.5%가 박근혜 후보를 지지했는데이를 두고 유행한 말이었다. 하지만 이 책엔 좀 다른 시각이 있었다. 무엇보다 '대한민국 정치사회 지도'를 쓴 손낙구의 분석이 그랬다. 그는 2002년부터 2008년까지 있었던 네 번의 선거를 분석했고 거기서 계급배반투표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조사 결과 사람들은 이제껏 계급에 충실한 투표를 하고 있었다. 문제는 계급배반투표가 아니라 투표할 이유를 주지못하는 정치 또는 정당 체제에 있다"(P. 201)


 이걸 보고 내가 퍼뜩 한 생각은 과연 내가 무엇을 아느냐였다. 무엇인가를 제대로 알기도 전에 섣불리 단정부터 내린 것은 아닌가 그리고 그렇게 모든 문제를 바라보지는 않았나 하는 의심이 들었다. 너무 감정에만 치우쳐 냉정히 살펴보지 않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지식채널e'가 그랬듯이 '5분'도 은연중 내게 설령 아는 것이라 해도 좀 더 깊이 내려갈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 바닥까지 모조리 훑어본 뒤에 절망해도 늦지 않다면서...



 이로써 '5분'은 스스로의 존재가치를 내게 증명한 셈이나 마찬가지다. 꼭 생각해야 할 문제들을 짚어주는 데다 어떤  땐 그저 선입견이나 감정으로 대했던 문제들마저 냉정하고 차분하게 바라볼 수 있도록 인도하니까. 그렇게 보다 바른 판단으로 나아가게 하는 디딤돌이 되려는 책이 바로 '5분'이다. 이는 서문에 인용된 해직 언론인의 마음 그대로다.


 행복은 우리가 추구해야 할 목적이 아니라 순간순간 행복한 때가 있어서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행복한 순간들이 삶을 지탱해주는 거지, 그 자체가 삶의 목적은 아니다. 조금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분들이 있음에도 사회가 더 나은 방향으로 가는 건 아닌 듯 싶다. 행복은 그런 분들과 같은 건지도 모르겠다."(p. 7)


 이 말에 따라 김진혁pd는 이 '5분'을 어떤 의미로 만들었는 지를 밝힌다.


 어떤 대단한 목적이 아니라 그저, 지루하고 반복적인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문득 발걸음을 멈추는 5분을 마련해주고 싶었고, 동시에 나 자신에게도 그런 시간을 마련해주고 싶었다.P.8


 5분은 하루의 입장에서 보자면 별 것 아니다. 하지만 언론 기자의 말대로 우리의 행복이 완벽한 하루에서 오지는 않는다. 때로  하루의 아주 작은 순간도 하루 전체를 행복하게 물들일 수 있다. 사람의 추억이라는 것도 알고 보면 순간이다. 그 순간이 삶 전체를 '그래도 살만했어.'라고 여기는 만족감을 낳게 만들기도 한다. 그건 불과 5분일 수도 있다. 그러고 보면 우리의 행복이란 상황에서 오는 것은 아닌 것 같다. 그건 순간의 축적에서 비롯되는 게 아닐까. 내가 옳은 것을 선택하고 그것을 위해 용기를 내었던 순간, 아무런 계산 없이 타인을 돕고 그들을 위해 목소리를 내었던 순간, 그렇게 세상에 굴하지 않고 내 인간다움을 증명했던 순간. 바로 그것들이 모여 행복이라는 것을 만드는 것은 아닐런지.

 행복은 그런 순간들이 모인 모자이크일 것이다. 많이 모이면 모일수록 더 커지는.


 이 책은 보아야 할 지점들을 가리키고 좀 더 객관적이고 정확하게 사유하도록 인도하여 그런 순간들을 더 많이 가질 수 있게 도와준다. 행위란 앎이 수반되어야 나올 수 있다. 오로지 실용을 위해 취득한 설익은 앎은 우리가 지금 목도하는 허다한 지식인들처럼 굴종을 낳지만 그런 타산없이 진실을 알고자 하는 마음으로 다다른 앎은 옳은 것을 선택할 베짱을 줄 것이다. '5분'은 그런 베짱을 키우는데 좋은 조력자가 될 듯 하다.

 '5분'은 스스로 그런 베짱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즉 이 시대에 전혀 안녕하지 못한 자들을 위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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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이란 무엇인가 - 하버드대 최고의 심리학 명강의
브라이언 리틀 지음, 이창신 옮김 / 김영사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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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하버드대 성격심리학 교수인 브라이언 리틀의 '성격이란 무엇인가'는 성격에 대한 우리의 고정관념에 도전한다. 이 책은 모두 10개의 챕터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각각은 우리도 살면서 성격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한 번쯤 가졌봤을 질문으로 시작한다. 10개의 장은 모두 배턴을 주고받는 릴레이 경기처럼 앞 부분의 결론을 뒤에서 좀 더 확장해서 살펴보는 식으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데 처음의 첫인상부터 마지막의 자아성찰까지 여러가지 재밌는 심리 실험과 지금까지 쌓인 연구 결과를 토대로 성격에 대한 보편적 궁금증뿐 만 아니라 그것에 대해 우리가 미처 몰랐던 사실까지 유쾌하고(문자 그대로의 의미다. 브라이언 리틀은 스스로 내향적이라고 하는데 책에 무던히 박혀있는 유머와 위트를 보노라면 정말 내향적일까 의심마저 들 정도다.) 친절하게 알려준다. 한 마디로 성격에 대해 이것저것 알고 싶었다면 추천할만한 안내서라고 하겠다.



 책의 매력은 처음 첫인상을 이야기할 때부터 드러난다. 우리는 늘 첫인상이 중요하다는 말을 듣는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첫인상으로 상대의 많은 정보를 알 수 있다고 자신하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늘 상대의 첫인상을 헤아리고 이러저러한 사람이라 규정 짓는다. 하지만 리틀은 그건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일축한다. 첫인상에 대한 우리의 판단은 그저 추측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이 행동의 원인을 어디에서 찾는가에 대한 연구에서 많은 자료로 증명된 사실 하나는 사람들은 타인의 행동을 설명할 때 성격에서 원인을 찾는 반면 자신의 행동은 자신이 처한 상황으로 설명하려 한다는 점이다.(p. 17)


 읽고 무릎을 쳤다. 우리는 정말 이렇다. 사소한 행동이라 할 지라도 우리가 할 때는 모두 이유가 있음을 알리고 싶어하고 타인의 경우엔 성격 탓으로 돌리며 말도 안 되는 이유 달지말라고 나무란다. 내가 성격대로 행동하지 않음을 알면서 남들은 성격대로 행동한다고 믿는 것은 모순이다. 리틀은 그러한 우리의 첫인상을 성격에 대한 판단이 아니라 내 개인 구성 개념에 근거한 가정이라고 정의한다. 개인구성개념이란 성격심리학의 용어로 사람에 대한 부분적인 사례 관찰로 한 개인을 구성하는 우리의 행위를 가리킨다. 우리는 개인 구성 개념으로 타인을 바라보는데 그것은 나 자신에게도 해당된다. 첫인상이 드러내는 진실은 타인의 것이 아니라 바로 내 개인 구성 개념이다. 남을 판단할 때, 당신은 '이런 사람이구나'가 아니라 '나는 당신을 이렇게 파악하고 있구나'를 먼저 떠올려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개인 구성 개념은 사람마다 다르다. 타인을 좁은 스펙트럼으로 구성하는 사람도 있고 넓은 스펙트럼으로 구성하는 사람도 있다. 리틀은 이왕이면 보다 확장된 개인 구성 개념으로 타인을 보는 것이 좋다고 한다. '개인 구성 개념이 제한적일수록 일상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예측하고 대처하기가 어려워 불안은 커지고 자유는 줄어.(p. 23)'들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타인에 대한 적대감도 전혀 다르게 해석된다. 타인이 미운 이유가 사실은 바로 내게 있기 때문이다. 리틀은 적대감을 이렇게 정의한다.


 적대감은 스스로도 이미 부당하다고 판단한 구성 개념을 억지로 정당화하려는 시도다.(p. 23)


 리틀의 책은 이런 식으로 사고의 전환을 꾀한다. 우리가 판단하는 성격이라는 것이 우리의 수동적 관찰이 아니라 능동적 해석의 결과라는 것을 주지시키는 것이다. 우리가 타인과 세계에 능동적인 해석자로서 참여한다는 것을 우리 스스로 인식하는 게 리틀은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바로 그것이 우리가 향유할 수 있는 자유의 폭을 늘려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성격을 좀 더 자유를 증진하는 쪽으로 파악하려 한다. 예컨대, 2장에서는 과연 우리 대부분이 믿고 있는 대로 성격은 고정적인 것인가(이는 심리학의 아버지라 일컫는 윌리엄 제임스의 견해라고 한다.)를 묻는데, 거기에 대해 우리가 흔히 하는 생각과 달리 그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나는 사람들을 내향성 또는 외향성이라는, 윌리엄 제임스의 표현처럼 석고처럼 굳어진 특성으로 나눠 정해진 틀에 집어넣는 것을 결사반대하는 사람이다. 우리는 자신의 성격을 그날의 상황에 맞추고, 우리 관심사를 발전시키는 쪽으로 사회적 자아를 맞춰가는 능력이 있다고 나는 확신한다. 윌리엄 제임스의 말은 50퍼센트만 옳다(사실 우리 성격의 절반 정도는 유전적 영향을 많이 받고 나이가 들면서 굳어지는 경향이 있다는 게 연구로 밝혀졌다고 한다). 우리 인간은 본질적으로 절반만 굳어 있다.(p. 73)'


 이는 단순히 그의 신념이 아니고, 연구로 밝혀진 것이기도 하지만 성격의 본질 때문이기도 하다. 성격은 원래 하나가 아니라 내적 현실과 외적 현실이 공존(p. 79)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두 현실이 만나는 지점에서 성격은 만들어지고 도전받고 재구성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얼마든지 상황에 따라 내가 생각하는 내 성격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행동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성격 심리학에서는 일상에서 우리가 하는 행동의 동기가 모두 세 가지 차원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보고 있다. 하나는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던 기질(이를 생물 발생적 근원이라고 한다.)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화에 따른 결과(이를 사회 발생적 근원이라고 하는데 이는 다양한 상황에서 그것이 적절한 행동이라는 인식이 그 사람의 생애를 통틀어 굳어진 것이라 말할 수 있다.)이며 마지막은 내가 추구하는 목표(이를 특수 발생적 근원이라 부른다)이다. 즉 누구나 삶에는 이루고자 하는 목표가 있고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 때로는 전혀 나답지 않은 행동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리틀은 이 세 번째의 것을 특별히 자유 특성이라 부르는데, 그만큼 자유의지에 따른 선택이기 때문이다. 행동의 동기가 되는 성격을 이렇게 다양한 차원의 조합으로 이뤄지고 자유의 영역 또한 꽤나 큰 곳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타인을 쉽게 고정되거나 수동적인 존재로 여긴다. 오래 전 MBTI가 크게 유행한 적이 있다. 그 때는 정말 너나 할 것 없이 별점을 보듯 MBTI를 했던 것 같다. 그건 성격의 레이블링(labeling)과도 같아서 우리는 네개의 알파벳으로 이루어진 유형을 브랜드라도 되는 것처럼 걸고 다녔다. 그것으로 우리는 타인을 쉽게 규정했다. 설령 그가 유형에 맞지 않는 행동을 과도하게 하더라도 그에 대한 내 개념이 오류일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고 '너 왜 이래? 너답지 않아?'하고 도리어 나무랐다. 그러니 '나다운 게 도대체 뭔데?'하며 거센 반박을 받아도 쌌다.


 '성격이란 무엇인가'는 내게 무엇보다 우리가 얼마나 타인에게 나 자신만의 잣대를 들이대고 있는 지를 깨닫게 해 주는 책이었다. 거기에 더하여 나에 대해서도 얼마나 고정된 존재로만 생각하고 있는 지도.


 비록 유전적으로 성격이 어느 정도 고정되어 있다고 해도 우리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 상황에 따라 이런 저런 성격을 넘나들며 다양한 전략을 구사하는 능동적인 존재였다. 그러니 나를 한정된 시야로 바라볼 필요는 없었고 타인에 대해서도 고정 관념을 가질 이유는 없었다. 나 자신이 내 상황을 헤아리듯, 타인의 상황을 헤아리는 것이 먼저였다. 이는 특히 리더에게 필요한 자질인데 특히나 스스로 창조적이라고 여길수록 더욱 요구되는 태도였다.


 연구에 따르면 아무리 '스티브 잡스'처럼 창조적인 인물이라 하더라도 독불장군 같은 성격이라면 이룰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었다. 성공적인 업적을 이룬 창조적인 리더를 연구한 결과 그들이 결실을 맺었던 것이 바로 다음과 같은 특성 때문임이 드러났던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세계에서 가장 대담하고 혁신적인 성취는 단 한 사람의 창조적 영웅의 머리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그건 신화일 뿐이다. 이와 관련해 건축가 '대조군'의 특징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앞에 나온 이들의 성격 특성을 기억해 보라. 이들은 책임감 있고, 성실하고, 신뢰할 수 있고, 믿음직 하고, 생각이 명확하고, 관대하고, 이해심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사교적이며 착실하고, 세밀한 작업도 불편해하지 않았다. 창조적 목표가 결실을 맺으려면 반드시 필요한 특성이다.(p. 221)


 다시 말해, 아무리 창조성이 뛰어난 사람이라 하더라도 인성이 뒷받침 될 때 좋은 성과도 얻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인성이란 무엇보다 타인의 처지를 잘 이해하고 그들의 말을 잘 들어주는 데 있었다. 만일 그렇지 않은데도 성과를 낼 경우, 그건 그가 잘 나서라기 보다는 주변 타인들이 그의 그릇된 인성을 참고 잘 도와준 결과였다. 그들의 희생이 뒷받침 되어 나타난 성과였던 것이다. 연구에 따르면 실제로 자기 주장이 강한 창조적인 사람과 일을 할 경우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훨씬 더 불안하고 심리적 적응도 낮다고 한다.


 이렇게 보다 좋은 결과를 얻기 위해서라도 나를 좀 더 내려놓고 타인을 환대하는 게 필요했다. 미국의 회사들이 왜 창조적인 인재보다 협력 잘 되는 인재를 더 선호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브라이언 리틀의 '성격이란 무엇인가'는 이런 식으로 내 생각의 눈금과 타인에 대한 시선을 다시 조정하게끔 만드는 책이었다. 타인을 의식하는 정도가 삶에 미치는 영향이라든지, 성격과 장소의 관계라든지, 내 삶을 스스로 얼만큼 조절해야 하는지 등등 성격과 삶의 관계 전반에 대해 다루고 있어서 유용한 정보들이 꽤 많았다. 평소 성격에 대해 많이 알고 싶었다면 딱 적당한 안내서가 되어 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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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힘 - 절망의 시대, 시는 어떻게 인간을 구원하는가
서경식 지음, 서은혜 옮김 / 현암사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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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이방인이다. 일본에서 재일 조선인 2세로 태어나 죽 그렇게 살아왔다. 자신이 사는 곳에서 그는 외국인이었다.

 외국인. 그는 경계 위에 사는 자다. 아니, 그 자신이 바로 경계다. 그는 서 있는 그 곳에서 자신을 타자로 만드는 국가와 대립하고 있다. 개인과 국가의 정체성이 맞부딪힌다. 국가는 평평한 대지다. 고정되고 동일한 정체성이라는 롤러로 밀어버린 포장도로와 마찬가지다. 거기서 외국인은 언덕 혹은 구멍으로 존재한다. 내리누를 수도, 메울 수도 없는 빈틈이 되어 균질된 국가에 불균질을 가져온다. 그렇게 하여 국가가 하나의 인위적 구성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밝힌다. 외국인이 국가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외국인이란 존재로 인해 국가가 재정립 되기에 그렇다. 외국인의 정체성을 기입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정체성부터 파악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힘은 거꾸로 흐른다. 국가는 외국인에 대한 반정립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세공해 나간다. 외국인에겐 자기 정체성의 뿌리를 뽑도록 강제하면서 거꾸로 국가 자신은 뿌리를 더 깊이 내리려 한다. 자기 정체성의 부유함을 위해 외국인을 흡혈하는 것이다.



 그런 국가에게 외국인은 더이상 고유한 존재가 아니다. 그것은 다만 국가가 자신의 정체성을 더욱 굳건히 하기 위하여 그 반대 명제로써 차용해야 할 특수한 맥락으로만 존재할 뿐이다. 외국인이 가진 존재 본연의 모습이 어떤 지에 대해선 국가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누가 되었던 외국인은 국가에게 그저 백지다. 그저 필요에 따라 얼마든지 다시 쓰기가 가능한, 인위적으로 산출되는 텍스트에 지나지 않는다.

 한 마디로 외국인은 문학이다.


 그것은 외국인이라는 존재 규정이 주로 증언에 의해 이뤄진다는 점에서도 드러난다. 일본은 통신사의 증언으로, 미국은 유길준의 '서유견문'의 증언으로 우리에게 도래했다. 그와 똑같이 중국은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과 허다한 선교사들의 증언으로 유럽에 소개 되었다. 돌연한 외국인과의 첫 만남은 먼저 텍스트의 매개, 즉 문학을 통해 이뤄진 것이다. 지금도 다르지 않다. 우리에게 외국인은 문학으로 존재한다. 문학이 허구의 생산물이라고 한다면 외국인도 그러하다. 본질은 상관 없다.


 그런 외국인이었던 그는 고등학교 시절 처음으로 시를 썼다. 열 다섯의 나이였다. 자신의 조국이라 생각했던 곳을 방문한 뒤다. 고향의 실체를 움켜쥐고 싶어서 떠난 여정이었다. 거기는 일본에 의해 정체성이 강제적으로 규정되고 늘 뭔가 모자란 존재감을 자각할 수밖에 없었던 그가 충만한 존재감을 주리라 기대되던 곳이었다. 그것을 보고 그는 '증언자'가 되려 했다. 존재 본연의 모습을 헤아리려는 노력 없이 어디까지나 자기 중심적인 시각에서 단편의 인상만을 말할 뿐인 '목격자'들의 증언에 대항해 그들이 외국인으로 규정하는 타자 본연의 모습은 어떠한 지를 증언하려 했던 것이다. 문학에 문학으로 대항한 셈이다. 그의 시는 그렇게 나왔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시란 존재자에게 은폐된 존재가 자신을 드러내는 장소였다. 그것이 그의 시였다.


 시란 고유한 존재의 증명, 국가에 의해 탈취된 존재의 회복이었다. 그러한 시 앞에서 외국인을 만들고 그 경계가 있어야만 존속할 수 있는 국가는 더이상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게공선'으로 유명한 작가이자 일본의 대표적인 프롤레타리아 작가였던 고바야시 다키지가 1933년 2월 20일, 특별고등경찰에게 체포되어 잔혹한 고문을 당한 끝에 숨졌을 때 중국의 루쉰은 적국 일본의 사람이었던 그를 서슴없이 '동지'라 불렀다. 나카노 시게하루는 '루쉰 안내'란 책에서 루쉰이 이렇게 말했다고 증언했다.


 고바야시 다키기자 1933년 2월에 살해되었을 때, 루쉰은 일본어로 이렇게 말했다.

 "동지 고바야시 다키지의 죽음을 전해 듣고,

 일본과 지나의 대중은 원래부터 형제이다. 자산 계급은 대중을 속여 그 피로 경계를 그었으며, 또한 지금도 긋고 있다.

 그러나 무산 계급과 그 선구자들은 피로 그것을 씻어내고 있다.

 동지 고바야시의 죽음은 그 실증의 하나이다.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는 잊지 않는다. 우리는 견고히 동지 고바야시의 혈로를 따라 전진하여 손을 맞잡을 것이다. 루쉰"    (p. 100)


 루쉰에게 다키지는 일본인이 아니었다. 국적은 아무 의미 없었다. 있는 것은 다만 같은 신념으로 같은 길을 걸어가는 동지 뿐이었다. 루쉰에게도, 다키지에게도 시가 있었다. 그도 결국 김수영의 시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를 통해 자신이 싸워야 할 현장은 나라를 가리지 않고 어디에나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제 보편의 개념이 달라진다. 지금까지 우리가 보편으로 여겼던 것은 특정 체제와 국가가 중심이 된, 사실은 특수한 것이었다. 그것이 고통을 가져온다면 많은 이들을 억압하고 권력 아래 가둬둔다면 이제 우리는 다른 특수를 찾아야 하고 그 특수가 보편을 획득하도록 해야 한다.


 현대 세계를 글로벌 자본주의가 석권하고 있는 와중에 인간 해방을 위한 대안이 없다면 이러한 자본주의의 보편성에 저항하는 쪽의 세계적 보편성을 찾아야만 한다. 이는 반드시 존재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현대의 세계문학에 요구해야 할 보편성이다. (p. 166)


 사실 특수와 보편이 생각만큼 분명한 경계가 있는 것이 아니다. 외국인이란 존재가 자의적이듯, 보편과 특수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그 선이 분명하게 보였던 것은 누군가 명확히 금긋기를 하고 있던 탓이다. 그 금긋기가 국가를 만들었고 사람들은 이념이 아니라 국적 때문에 서로 타자가 되었다. 하지만 이제 그 선이 가없이 자의적임이 밝혀진 이상, 서로를 나와 다른 얼굴로 여길 필요는 없어졌다.


 재일 조선인인인 나, 한국에서 민주화를 위해서 싸우는 이들, 팔레스타인 사람.... 우리는 서로 이렇게나 멀리 떨어져 있다. 쉽게 만나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를 격려하고 있는 것이 근대 식민주의자들이 자의적으로 그어놓은 경계선인 이상, 식민지주의와의 부단한 투쟁 과정에서, 또한 그것을 통해서만 우리는 서로 만나고, 새로운 차원의 우리를 향해 자기 의식을 발전시킬 수 있다. 여기서 우리라는 말은 보편성이라고 바꿔 말할 수 있을 것이다.(p. 167)


 시는 국가를 분쇄한다. 그들이 나누는 인위적인 경계, 그리하여 디아스포라를 자유가 아니라 결핍으로 만드는 모든 획책을 허문다.

 시는 모두를 외국인으로 만든다. 국가가 포섭할 수 없는 불균질의 영토로, 그 자신이 저항의 거점이 되도록 호명한다.


 요즘들어 갑자기 애국이란 말이 유행하고 있다. 그런데 애국이란 말이 사용되는 것은 대부분 국가가 국민에게 뭔가 요구할 때이다. 최근엔 애국하기 위해서 노동자들에게 임금 피크제를 수용하라고 한다. 가뜩이나 경기가 어렵고 물가는 올라서 쓸 돈이 적은데 이제 노동자더러 보장되지 않는 정년과 갈수록 적어지는 임금을 받아들이라고 하는 것이다. 왜 애국은 늘 약하고 가진 것이 적은 사람에게만 강요되는 것일까? 왜 재벌에겐 애국으로 희생을 강요하지 않는 것일까? 애국이라는 게 이토록 일방적이라면 도대체 애국의 대상이 되는 국가는 무엇일까?


 미국 프리스턴 대학의 정치학 교수 마우리치오 비롤리는 패트리어티즘과 내셔널리즘을 구분해야 한다고 말한다. 패트리어티즘은 몇 세기에 걸쳐 하나의 집단 공동의 자유를 지탱하는 정치제도와 생활양식에 대한 사랑, 요컨대 공화정 전체에 대한 사랑을 강화하거나 환기할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내셔널리즘이라는 단어는 18세기 후반 유럽에서, 한 국민의 문화적, 언어적, 민족적 통일성과 동질성을 옹호하거나 강화할 목적으로 만들어 낸 것이다. 공화주의 패트리어티즘의 적이 폭정이나 독재정치, 억압과 부패였던 것에 반해 내셔널리즘의 적은 타문화에 의한 자문화 오염, 이종 잡교, 인종적 불순, 그리고 사회적, 정치적, 지적 불통일이다.(p. 257)


 그들의 애국은 패트리어티즘이 아니라 내셔널리즘이었다. 그것도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방편으로 이용된 것일 뿐이었다. 진정한 의미인 애국, 즉 패트리어티즘엔 보다시피 국가란 없다. 다수의 자유를 억압하고 소수의 기득권을 수호하는, 말하자면 마르크스가 말했던 부르조아의 집행위원회(최근 대법원의 한명숙 판결은 지금의 국가가 이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너무도 잘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으로써의 국가는 없는 것이다. 시는 바로 그러한 패트리어티즘으로 이끄는 손짓이다.


 시는 국가만이 전유하고 있던 문학적 쓰기에 수많은 가필로 그 언어와 용법을 해체하고 새로운 언어와 문법을 만들어 낸다. 그것은 저자가 어머니에게서 발견한 것과 같다. 그의 어머니는 문맹이다. 처음에 그는 그런 어머니를 부끄러워 했다. 하지만 시로 인해 현상이 아니라 상황을 볼 수 있게 된 그는 어머니의 문맹이 일본 식민지 시대적 상황으로 인한 개인으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결과였음을 받아들인다. '개인의 능력 문제가 아니라 커다란 역사나 사회구조의 반영'(p.182)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당시 어머니는 무려 네 개의 벽에 가로막혀 있었는데 그건 바로 젠더(가부장제), 경제(빈곤), 민족(식민지 지배), 정치였다. 장벽이 무려 네 개나 되었으니 그녀는 정말로 갇힌 존재였다. 하지만 그의 어머니는 굴하지 않는다. 설령 글을 모른다고 하더라도, 일본에서 외국인으로 산다고 하더라도, 두 아들이 민주화 운동을 하다 조국에서 수형자로 살고 있다 하더라도 조금도 승복하지 않고 탈주와 저항의 흐름을 만들어 낸다. 일본에는 '다노모시코'라는 재일 조선인만의 풀뿌리 네트워크가 일본 국가의 권력을 교란시키며 한국에서는 비전향범의 어머니라는 신분이 국가 권력과 맞서게 한다. 국가화의 산물인 언어는 몰랐지만 오히려 비언어가 줄 수 있는 더 큰 자유로 권력이 만든 모든 장벽을 초월한 어머니는 그로 하여금 이런 고백을 하도록 만든다.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든 어머니와 같은 존재(교육받지 못한 민중)의 목소리를 해석하고 언설화할 수밖에 없지만 그럼으로써 권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께름칙함에 시달리게 된다. 거꾸로 생각하자면 어머니는 이러한 뼈아픈 반성을 촉구하는 힘을 갖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교육받고 지식을 몸에 익힌 다음, 그 필터를 통해 해석하는 특권을 행사하는 상대에게, 특권을 지니고 있기에 갖게 된 권력을 자각하게 만들었달까. 나아가 그 특권을 지닌 인간이 있는 그대로를 겸허하게 응시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만드는 힘을 가진 어머니였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p. 194)


 아마도 그 겸허한 응시가 '시의 힘'이 최종적으로 가져오려는 것이 아닐까 싶다. 즉 그 힘은 우리 모두를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파리아'로 만드려 한다. 파리아는 원래 인도의 불가촉천민을 말하는 것이었으나 여기서는 어떤 사회, 제도에도 속하지 않는 존재를 가리킨다. 모두가 파리아가 되었을 때 비로소 진정한 평등이 찾아오지 않을까 싶다. 시의 힘은 그것을 갈구하며 그가 쓴 책, '시의 힘'은 그 갈구를 이 땅에 뿌리내리도록 하는 여정이다. 

 그리고 그의 이름은 서경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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