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소 충격적인 이번 미국 대선 결과는 결국 이제는 내수가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일깨워주는 듯하다.

 이번 미국 대선의 승패를 결정지은 것이 미국 백인 중산층인 것을 감안하면

 역시 이런저런 자유무역협정으로 해외에서 들여오는 값싼 수입품 때문에 미국 내 산업이 망한 것에 이유가 있지 않을까 싶다.

 갈수록 붕괴되어만 가는 중산층의 불만이 이번 대선을 계기로 결집해 폭발한 것이다.

 미국은 이제 보호무역주의로 나갈 것이다.

 더이상 우리나라가 고수했던 대기업 중심의 성장 주의도 큰 난관에 봉착할 수밖에 없다.

 경제정책을 근본부터 뒤집어 엎고 내수 진작 중심의 틀을 짜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나저나 이걸로 싸드는 이제 설치 되지 못할 것 같다. 트럼프는 먼로식의 고립 주의를 지향하므로

 중국이 아시아에서 뭘하든 별 관심이 없을 것이기에.

(이것 하나는 좋은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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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6-11-09 16: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미국은 어찌되었건 헤쳐나갈 잠재적인 힘이 있다고 생각해요.
문제는 우리나라의 지금 현재이지.
`하늘은 스스로 돕는자를 돕는다`는 옛 속담이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요?

에일로이 2016-11-09 16:25   좋아요 1 | URL
저도 격하게 동감합니다^^ 솔직히 무당이 수렴청정을 하고 온갖 신을 다 끌어들인 굿판을 벌이고 전봉준과 접신했다는 말을 하는 사람이 장관 후보에 오르는 나라에 살고 있는 우리가 미국을 걱정하는 것은 넌센스죠.^^
 
인민이란 무엇인가 컨템포러리 총서
알랭 바디우 외 지음, 서용순 외 옮김 / 현실문화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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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민간인이 대통령을 조종하고 마음껏 국정 농단을 행하고 있는 와중이다 보니 '국민주권'이란 의미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된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 민주주의의 위기와 관련하여 가장 많이 재검토 되고 있는 말이 '국민'이라는 말이다. 학술적인 측면에서는 '국민' 보다는 '인민'이라는 말이 더 보편적으로 쓰인다. 사실 역사적으로 국민주권이 기원이 되는 것이 바로 '프랑스 대혁명'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때 시에예스나 루소는 '인민 주권'이라고 말했다. '프랑스 대혁명'의 슬로건도 '우리는 인민의 의지에 의해 여기에 있다.'였다.


 원래는 국적을 초월한 개념이었는데, 우리에게선 국적에 한계지어진 개념이 된 것은 아무래도 지금 우리나라가 처한 분단 상황과 상관있을 것이다. 북쪽에 있는 정권이 공공연히 인민 정부라는 말을 운운했으니, 쓸 수 없었던 것이리라. 아무튼 알랭 바디우와 피에르 부르디외 그리고 주디스 버틀로와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 여기에 사드리 키아리와 자크 랑시에르까지 가세한 오늘날의 인민의 의미에 대하여 다시 생각해 보는 여섯 개의 논문이 모인 '인민이란 무엇인가'는 민주주의의 위기가 여기저기서 현실화되고 있는 요즘에 다시금 재검토되고 재확인되어야 할 인민의 의미에 대해 아주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드는 책이다.


 알랭 바디우는 역시 과정에 더 많은 의미를 부여하는 그답게 '인민'이란 결코 국적으로 제한 받아서도, 완성형의 의미로 받아들여서도 곤란하다고 말하며 인민이란 어디까지나 국제주의적이어야 하고 현재 있는 것이 아니라 도래할 그 무엇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바디우는 인민이 국가의 승인을 받고, 현재적 상태로 규정되어 그 자체로 인민 외부의 것에 대해 인민 자체가 폭력적인 상황이 되는 것을 피하려 한다. 이것은 그대로 주디스 버틀러의 논의와도 이어지는데, 그녀 역시 인민은 고정된 무엇이 아니라 수행을 통해 발현되는 것이라 본다. 그녀는 특히나 집회와 시위가 인민의 출현 장소로 보는데, 그렇게 모두가 함께 모여 육체적인 발화로서 스스로 인민을 말할 때 비로소 진정한 의미의 인민이 호출되는 것이라 말하고 있다. 버틀러의 말에 따르면, 우리가 거리에 나가 지금 잘못된 것에 대해 국가에게 구체적으로 말할 때 우리는 진짜 인민(우리나라 용어로 하자면 국민)이 된다. 여섯 개의 논문에서 반복적으로 주장하는 것은, 인민이 결코 국적으로 분리되지도 현재 상태로 고정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인민은 국적을 초월하며 더구나 현재 상태가 절대적이지도 않기 때문에 인민이라는 개념은 필요에 따라, 사정에 따라 얼마든지 확장될 수 있으며 근본적으로는 공존해야 할 모두가 결국엔 하나의 인민이 되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아마도 이러한 석학들의 인민에 대한 정의는 최근 시리아 난민 사태로 더욱 빚어지고 있는 유럽에서의 이주민 유입으로 인한 갈등에 중요한 성찰의 지점들을 제공할 것 같다. 영국은 과거 인민의 개념에 함몰되어 외부에서 유입되는 이주민들을 같은 인민으로 보지 않으려 했고 결국 브렉시트까지 감행하고 말았다. 이주민을 받아들이는 것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독일조차 내분의 반발로 메르켈 총리가 정치적 위기에 처해 있다고 한다. 프랑스 대혁명 시기 처음 등장한 인민은 원래 포용과 관용의 의미가 더 컸다. 그랬던 인민이 어쩌다 이렇게나 협소해져 버린 것일까? 여기에 대해 사드리 키아리는 이렇게 말한다.


 공화국의 그리고/또는 '국가정체성'의 '가치들'이 식민지 이민자 출신의 프랑스인들의 '문화들' 신앙들과 호환 불가능하다는 명목 아래, 밀려드는 이민자들을 통제하고 중단시키며, '프랑스인의' 일자리를 보존하고, 테러리즘이나 범조에 맞서 싸울 '필요성'이라는 명목 아래 인민 개념은 백인, 유럽인, 기독교인, 소위 '토박이 프랑스인'을 중심으로 좁혀졌다. 달리 말해, 이 정책은 프랑스 인민이라는 기운 빠진 개념을 가장 쉬운 곳에서,즉 비백인에 맞서 재건설하고자 하는 야심을 가진 것이다.(p. 158)


 이렇게 지금 우리가 널리 공유하는 국적에 기반한 인민, 즉 국민이라는 개념은 객관적 진리를 쫓아 창안된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뭔가에 반대하여, 누구를 배제할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개념 자체에 이미 배타적인 요소들이 들어가 있는 것이다. 실제 우리가 인민이라는 말이 아니라 국민이라는 말을 쓰게 된 것도 북측을 배제하려고 했던 것이 아니었던가. 이제 왜 여섯 명의 저자가 국적이 아닌 국제를, 현재가 아닌 미래를 인민에게 가져오려는지 이로써 조금은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시작은 순수했더라도 어떤 말이든 시간이 흐르는동안 오염이 일어나게 마련이다. 그 말을 가지고 사익을 추구하려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거기에 속고, 선동되어 오염된 언어를 받아들인 채 또 시간이 흐르게 되면 그것이 상식이 되고 진리로 되어버리기도 한다. 그래서 이제는 그것이 도리어 원래는 공존해야 할 사람들을 공격하는 무기가 되어 버린다. 그러므로 어떤 말이든, 무턱대고 받아들이고 쓰기 보다는 원래의 의미는 어떠한지, 그것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으로 채워져야 하는지 늘 살펴보고 성찰할 필요는 있는 것 같다. 그런 면에서, '인민이란 무엇인가'는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해서 잘 생각해 보지 않았던 인민(국민)이라는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고, 달리 생각해 보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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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6-11-04 0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많은 걸 생각하게 하는 좋은 책인데 많이 안 읽히는 거 같아 아쉬웠어요. 헤르메스님 리뷰로 오랜만에 다시 만나 반갑네요^^

에일로이 2016-11-04 16: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아갈마님은 이미 보셨군요. 말씀대로 인민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었던 좋은 책이었습니다.^^
 
낯선 이와 느린 춤을 - 아주 사적인 알츠하이머의 기록
메릴 코머 지음, 윤진 옮김 / Mid(엠아이디)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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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면서 사람은 이런저런 많은 타격을 받기 마련이지만, 치매는 그 중에서도 가장 둔중한 타격의 하나가 아닐까 한다. 한 때, 이런 생각을 해 보았다. 기억을 온전히 그대로 가진 채로 육신이 죽는 것과 육신은 비록 살아있더라도 자신을 포함하여 살면서 가진 모든 기억을 잊어버리는 것 중에 어느 게 더 나을까 하고. 문득 영화 '블레이드 러너'의 마지막 장면이 생각났다. 거기서 인위적으로 규정된 수명이 다해, 자신을 만든 사람을 찾아 수명을 늘리려 지구에 잠입한 안드로이드 룻거 하우어는 결국 그 일을 실패하고 수명이 다해 죽으면서 이런 말을 남긴다.


 나는 너희 인간들이 상상도 못할 것들을 봤어.

 오리온 좌의 어깨 위에서 불을 뿜던 공격함들.

 탄호이저 게이트 근처 암흑에서 명멸하던 C 광선 하며.

 하지만 이제 모두 사라지겠지.

 빗 속의 내 눈물처럼.

 죽을 시간이야.


 '블레이드 러너'에서 기억은 정체성을 의미한다. 영화는 초반부터 기억을 통해 안드로이드와 인간을 구별하는 장면을 통해 그것을 나타낸다. 기억을 잃는 것. 그것은 곧 자신을 잃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치매는 육신은 살았어도 정신적으론 이미 죽은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더구나 품위라는 게 있다. 노년의 품위란 살아온 모든 것이 어디에 이르렀나 하는 것을 보여주는 하나의 표식이다. 치매는 그것을 스스로 파괴시킨다. 정말 점잖고 반듯하게 살아와 누구에게나 존경받던 사람이 치매에 걸리자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쌍욕을 연거푸 내뱉고 주위 사람들에게 폭력을 서슴없이 휘두르는 등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지는 모습을 몇 번 목격한 나는 아무래도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솔직히 나는 죽더라도 지금 가지고 있는 기억을 가진 채로 죽고 싶다. 부디 내가 아닌 다른 나가 되어 죽지 않았으면 좋겠다. 하지만 늘 그렇듯이 운명은 사람의 뜻과는 상관없이 찾아온다.


 미국의 하비도 그 중 한 사람이다. 그는 저명한 과학자였고 미국국립보건원의 유능한 의사였다. 하지만 그에게도 미국에서 68초마다 한 명 생긴다는 알츠하이머가 찾아오고 말았다. 그것도 아직은 한창 일할 수 있는 나이인 56세라는 이른 나이에 그만 알츠하이머에 걸리고 만 것이다. 치매와 알츠하이머는 약간 다르다. 치매는 정신 질환만 있지만, 알츠하이머는 신체까지 영향 받는다. 몸을 거의 못 쓰게 되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알츠하이머는 치매의 하위 범주로 들어간다. 그토록 자신의 삶을 잘 통제하던 그가 알츠하이머에 걸리자마자 차츰 통제가 무너지고 주위 사람들에게도 잇단 폭언을 일삼는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자식의 결혼식 날, 축사를 읊는 자리에서 그것과 아무 상관도 없는 어린 시절의 기억을 주구장창 늘어놓아 하객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그렇게 자신의 사회적 평가를 스스로 무너뜨리는 행위가 계속되고 결국 직장에서도 밀려나 집에만 있게 된다. 그 후로 20년 동안 내내.


 그것을 곁에서 지켜보고 계속 돌본 사람이 있다. 바로 그의 아내, 메릴 코머다. 그녀로선 정말 청천벽력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더구나 하비가 알츠하이머에 걸렸을 때는 메릴이 그와 재혼한지(하비는 세 번째 결혼이었다.) 얼마 되지도 않았을 때였다. 그러나 그녀는 점점 '내가 사랑해서 결혼한 사람'이 아니게 되는 그를 헌신적으로 돌본다. 호전의 기미는 조금도 보이지 않고 내내 낯선 사람이 되는 그와 아주 오랜 시간을. 메릴 코머는 그 시간을 한 권의 수기로 발간했다. 그것이 바로 이 책 '낯선 이와 느린 춤을'이며, 제목은 그렇게 절로 지어지게 되었다.



 나도 치매 환자를 돌본 경험이 있기 때문에 하는 말이지만, 치매를 돌보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정보가 부족하다. 가족 중의 누군가가 치매에 걸린다는 것은 살면서 당하는 가장 낯설고 황망하기 그지 없는 경험이라 그렇지 않아도 어떻게 대처해야할지 쩔쩔매게 되는데, 더구나 치매의 증상도 사람마다 다 다르게 나타나기에 그것을 더욱 어렵게 만든다. 메릴 코머도 비슷했다. 그 심정을 다음과 같이 토로한다.


 내 서가에는 치매 환자 돌보기에 관한 책들이 잔뜩 꽂혀 있지만 정작 내게 필요한 정보는 항상 책에서 빠져 있다. 환자의 두뇌는 각자 다른 방식으로 얽혀 있고 각기 다른 특징이 있다. 나는 치매 환자를 돌볼 때 공통되게 적용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걸 일찌감치 깨달았다. (p. 16)


 그녀가 이 수기를 쓰게 된 이유도 아마 여기 있지 않을까 싶다. 그녀는 이 책에 하비가 알츠하이머에 걸린 순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거쳐온 모든 과정을 저널리스트 출신답게 상세하고 정확하고 기록했는데, 이것은 분명 치매 환자를 돌보는 미국의 1천 5백만 명의 보호자들 중 누군가는 자신의 수기에서 필요한 도움을 얻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솔직히 나도 정말 동의하는 것이지만, 메릴 코머의 말대로 보호자 역시 치매의 간접 희생자로, 사회적 보호의 대상으로 고려되어야 한다고 본다.


나이가 많든 적든 치매 환자를 돌보는 보호자는 뇌 질환, 충격에 따른 뇌 손상, 기억력 감퇴로 인한 만성 질환 등에 시달린다. 보호자는 치매 환자와 비슷한 입장에 놓여 있다.(p. 19)


 하지만 우리 사회는 치매 환자도, 그 보호자도 오로지 가족의 문제로 국한시키고만 있다. 그래서 짊어지게 되는 생계를 위협할 정도의 비용 부담, 가족 생활의 파괴와 해체에 대해선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도 치매 환자를 돌보는 이의 수기가 필요하다고 본다. 그 혹은 그녀가 받고 있는 돌봄으로 인한 고통을 사회에 환기시켜 그 보호를 위해 필요한 움직임을 불러 일으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내게는 개인적인 경험도 있어, 상당히 편치 않은 독서였다. 치매는 정말 무서운 병이다. 하지만 그 무서움을 옆에서 그걸 함께 지켜본 자만이 안다는 게 문제다. 지근 거리에서 치매 환자를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이에게 치매는 그저 남의 일일 뿐이다. 그러니 혼자 치매 환자를 돌보며 고생하는 이에게 '어쩌겠어, 그게 자식된 도리인 걸. 자네가 참아야지.'와 같은 말을 참 태연하게 할 수 있는 것이며, 그저 개인이 감수할 문제로 치환할 뿐, 사회적으로 널리 공론화 되지도 않는 것이다. 치매 환자가 갈수록 늘어나 이제는 정말 사회 차원에서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문제가 되었는 데도 말이다. 메릴 코머의 이런 말을 들으면 과연 언제까지 개인의 문제로만 남겨둘 것인가 묻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직장일과 간병을 곡예하듯 병행하다가, 경력을 포기하고 시간제 일자리를 찾고, 어쩔 수 없이 조기에 퇴직을 하고, 스스로의 노후 준비를 위험에 빠뜨린다. 우리 중 누구도 자기자신을 순교자나 이타적인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단지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 필요한 일을 할 뿐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무슨 일이 생기기라도 하면, 우리가 돌보고 있는 가족은 어떻게 될 것인가? (p. 245)


치매 환자도 문제지만 보호자가 당하는 고통과 삶의 위험을 일깨우기 위해서라도 나는 메릴 코머의 이 책이 사람들에게 읽힐 필요가 있다고 본다. 치매 환자를 돌본다는 것은 정말 한 개인이 짊어지기엔 너무나 큰 짐이다. 최근엔 민간 요양소도 많이 늘어났다지만, 여전히 그 곳에 보내는 게 부담이 되는 가정도 많다. 정보도 부족하고 늘 우왕좌왕 하다가 치매 증상이 악화되거나 보호자들의 고통과 희생이 잘 이해되거나 소통되지 않아서 아니 되었을 수도 있었던 가정 붕괴가 일어나는 경우도 잦다. 국가 차원에서 치매 환자의 관리와 보호자들의 보호가 정녕 시급한 시점이다. 이 책 때문에라도 많은 분들이 문제에 통감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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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의 민주주의
김종철.조기숙 외 지음 / 인간사랑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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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에게 참 안타까운 것이 좋은 것을 누리고 있는 그 순간엔 정작 좋은 것인지를 잘 모른다는 사실이다. 대부분은 지나고 나서야 혹은 놓치고 나서야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닫는다. 정부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지금 이재명 성남 시장의 표현에 따르면 근본도 알 수 없는 사람에 의해 국정이 함부로 유린된, 막장의 정점을 찍기 바쁜 현 정부의 모습을 보니 노무현 정부 시절이 얼마나 좋았었던 가를 반면교사처럼 거듭 되새기게 된다. '노무현의 민주주의'는 그런 마음으로 잡게 된 책이다. 한국미래발전연구원이란 데가 있는 모양이다. 서문에 자신들에 단체에 대해 소개하고 있는데, '2008년 한국 민주주의 현실에 대한 우려와 희망이 뒤섞인 어수선한 상황 가운데 노무현 대통령의 진보적 정치 철학을 계승하기 위한 싱크탱크로 구성'(p. 11)되었다고 한다. '노무현의 민주주의'는 그 단체가 '한국 민주주의 어디까지 왔나'(2012)에 이어 두 번째로 발간한 책이다.



 이 책의 재밌는 점은 노무현 대통령 집권 시절, 노무현 대통령이 가장 많은 비판을 받았던 사안들을 담고 있다는 점이다. 책은 모두 6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중 1장은 노무현 대통령을 탄핵 위기로 몰아갔던 '선거 중립 의무 위반'을 다루고 있으며, 2장은 대통령 권한을 너무 약화시키는 것으로 한국 현실에는 맞지 않다는 비판을 많이 받은 사정 기관을 비롯한 권력 기관 정상화 노력에 대해 다룬다. 이것을 읽으면 지금 박근혜 정부의 행태와 너무나 비교되지 않을 수 없는데, 그래서 어떻게 보면 그런 노무현 대통령의 신념이 너무 순진한 것 같기도 하고 또 어떻게 보면 진정 민주주의 구현을 위해 노력한 사람이었구나 생각되기도 한다. 3장은, 이 역시 현재 박근혜 대통령과 너무나 대조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인데, 바로 노무현 대통령의 '원포인트 개헌론'을 다룬다. 노무현 대통령 집권 시절 가장 많은 비판을 받았고, 가장 지지율을 떨어뜨린 사안이기도 하다. 지금의 박근혜 개헌론은 어디까지나 최순실 게이트를 덮기 위한 것이지만, 당시 노무현 대통령의 개헌론은 마침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가 20년만에 똑같은 해에 이루어져, 그 호기를 이용하여 대통령 단임제의 부작용(특히 정책을 꾸준하게 해 나갈 수 없다는)과 대통령과 국회의원의 선거 주기가 불일치하여 일어나게 되는 양당간의 극단적 대결 정치로 인한 국정의 불안과 비효율 그리고 책임 정치의 실현 곤란을 막고자 나온 것이었다. 그러나 잘 알다시피 노무현 대통령의 대통령 임기를 4년 중임을 골자로 한 '원포인트 개헌론'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4장은 노무현 대통령이 집권 시기 내내 중점적으로 추진했던 정부 혁신론을 다룬다. 이 정부 혁신의 초점은 어디까지나 조직 내에 민주적인 의사 결정 체제를 확립하는 것이었는데, 아마도 이런 노무현 정부의 혁신론이 지금까지 줄기차게 이어져 왔다면 오늘날처럼 많은 국민들의 뒷목을 잡게 만드는 최순실 게이트라든가, 문고리 3인방 혹은 우병우 사태 같은 것은 일어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4장을 읽으면서 새삼 노무현 대통령이 우리나라 권력 기관에 정말 무엇이 필요하고 그것을 위해 큰 그림을 그렸구나 하는 것을 다시 한 번 느끼게 되었다. 이 정부 혁신론은 당시에 최장집을 비롯 진보 지식인들에게서도 많은 비판을 받았는데, 지금 그들은 오늘날과 같은 사태를 보면서 과연 어떻게 입장 표명을 할까 참 궁금하기도 하다. 당시 국민들도 사정은 다르지 않았다. 노무현 대통령의 정부 혁신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 보다는 '약한 정부' 운운하는 반대편 공격에 더 지지를 보냈다. 아마도 이것은 노무현 대통령 스스로 2장에서 보듯 권력을 내려놓은 탓도 클 것이다. 그 때 국민들이 조금만 더 관심을 갖고 지지를 보태주었다면, 오늘날의 충격은 없지 않았을까 싶다. 어떻게 보면 자업자득인 셈이다. 5장 역시 노무현 대통령이 강하게 추진한 대통령의 당정 분리론을 다룬다.  그는 당정 분리가 되어 정당과 국회가 대통령의 그늘에서 벗어나 자율성이 강화되길 원했고 대통령과 대등한 존재가 되어 입법부와 행정부 간에 정책 중심의 대화가 되길 원했다. 그렇게 자율과 책임이 균형을 이루는 민주주의 시스템이 만들어지길 꿈꿨다. 이것도 지금 상황을 보면 절로 한숨이 나올만한 부분이다. 지금은 노무현 대통령이 추진했던 것과 완전 정반대의 상황이 펼쳐지고 있으니까 말이다. 지금 집권 정당은 대통령의 거수기가 된지 오래이며, 행정부와 국회가 불통으로 일관한지도 오래이다. 자율과 책임은 휴지조각이 되고 나라는 만인지상 일인지하로 굴러가고 있다. 더구나 그 일인마저 국민이 선출하지 않은, 그냥 일개 민간인이다. 개그라기 보다는 악몽에 가까운 현실이다.


 6장은 아마도 노무현 대통령 집권 동안 이것이야말로 가장 많은 역풍을 받은 것이라고 생각되는데, 바로 '대연정 제안'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이것을 발표했을 때, 정말 많은 사람들이 놀랐고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냐고 지탄을 늘어 놓았다. 대연정은 지금도 완강하게 남아 있는 지역주의를 타파하기 위해 내놓은 노무현 대통령의 고육책이었으나, 그 진의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다. 그 진의는 지금까지의 대립 구도에서 벗어나 포용과 상생의 정치를 도모하는데 있었다. 진심은 정당했으나 너무 이상에 치우친 감이 없지 않았다. 저자 역시 아직 국민이 그것을 받아들일만한 때가 아니라며 적극 반대했다고 한다. 하지만 노무현 대통령은 국민이 이제 그것을 학습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는 국민을 믿었다. 경험하게 되면 비록 시간이 걸리더라도 달라지리라 여겼던 것이다. 이런 식으로 이 책은 모두 6장에 걸쳐, 아직도 노무현 정부의 공과 과로 첨예하게 논쟁 중인 여섯 가지 사안들을 담는다. 하나하나가 사안을 철처히 분석하고 깊이있게 해석하고 있어, 입체적인 이해를 돕는다.


 전체적으로 노무현 대통령이 자신이 집권하는 동안 추구했던 것은 첫째, 제왕적 대통령의 탈피였고 둘째는 포용과 상생으로 가기 위한 설득과 협상의 정치였으며 셋째는 통치의 공정성과 운영의 투명성 보장이었다. 이 책에서 살펴보는 여섯 가지 사안을 두고 내내 노무현 대통령의 당리당략을 위한 음모라는 꼬리표가 붙어다녔지만, 이 책을 읽어보면 그런 게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대신 그저 어떻게든 제대로 된 민주주의를 우리나라에 빨리 뿌리내리게 하려는 그의 충심이 느껴질 뿐이다. 책에는 노무현 대통령의 사안과 관련한 생전 어록을 많이 담고 있는데, 무엇보다 바로 거기서 그런 게 느껴진다. 그것은 누구와 달리 녹화된 것도 아니며 누가 비밀리에 받아보고 수정한 것도 아니다. 그가 직접 말한 것이다. 이제는 대통령에게서 그런 허심탄회한 진심조차 들을 수 없는 시대가 되고보니, 노무현 대통령이 더욱 그리워진다.


 맞다. 이 책이 다루고 있는 여섯 가지 사안들은 어떤 의미로는 노무현 대통령의 실험이라 할 만하다. 아무래도 그는 대통령으로서의 자신의 역할을 무엇보다 아직은 연약한 묘목에 불과한 민주주의를 보다 튼튼한 나무로 육성시키는 데 있다고 본 것이 틀림없다. 적어도 그는 그 나무의 뿌리가 잘 내릴 수 있도록 땅을 다져주려 했으며, 보다 높이 자랄 수 있도록 그 세포가 될 국민 개개인들에게 민주주의가 정말 어떤 것인지 경험시키려 했다. 물론 이런 그의 마음이 누군가의 말마따나 너무 국민의 수준을 모르는 이상주의 놀음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 또 그런 현실과 유리된 이상주의 때문에 혼란만 가중시켰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말에 고개를 끄덕이기 전에 우리는 자신에게 한 번 솔직히 물어 볼 필요가 있는 것 같다. 과연 우리는 노무현 대통령이 하고자 했던 것에 대해 얼마나 잘 알고 있을까 하고 말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집권 시절 좌우 가릴 것 없이 많은 공격을 받았다. '사면초가'였다고 말해도 그리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대통령 당선되고 얼마지나지 않아, 그것도 자신의 정당인 민주당이 주도하여 탄핵 위기까지 겪었으니 말이다. 그는 어디서나 잘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였다. 그가 무슨 말을 해도 말투 때문에 조롱 받았고, 솔직한 표현 때문에 그 진의가 헤아려지기도 전에 공격부터 당했다. 이런 상황인지라 대통령으로서 그가 정말 무엇을 하고자 했는지 그 내막은 우리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우리는 그저 그를 비난하고 공격하기 위해 쏟아낸 말에 휘말려 정작 그의 진실한 초상은 놓쳐버렸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를 제대로 평가하기 위해서라도 한 번은 이렇게 무슨 연유에서 어떤 과정을 거쳐 그런 것들이 나왔는지, 그 온전한 내막과 해석을 차분히 살펴볼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이 책을 읽어보면 여기에 실린 제안들 하나하나가, 지금에 와서 더욱 절박해지는 민주주의의 확고한 정착을 위해 꼭 필요한 것들로 보인다. 오늘의 현실이 더없이 치욕적이고 분노를 일으킨다면, 그럴수록 우리는, 다시는 이런 일을 겪지 않기 위해서라도, 올바른 민주주의가 어떤 것인지 알아야 할 필요가 있지 않나 생각된다. 민주주의야 말로 무임승차로 이뤄지지 않는다. 그것은 노력과 실천 없이는 결코 거둬들일 수 없는 과실이다. 그런 우리에게 노무현 대통령의 실험은 중요한 유산이 되리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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五車書 2016-10-28 08: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약이 좋은 글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 예라고 생각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

에일로이 2016-10-28 12:08   좋아요 0 | URL
오거서님 말씀 감사합니다^^ 덕분에 기분 좋은 오후를 맞네요^^
 
거대한 신,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 - 신은 인간을 선하게 만드는가 악하는게 만드는가
아라 노렌자얀 지음, 홍지수 옮김, 오강남 해제 / 김영사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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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고 있는지? 종교에도 수명이 있다. 인류학자 리처드 소시스에 따르면 19세기에 종교적, 세속적 이상향을 꿈꾸던 종교 공동체가 무려 200개나 만들어졌는데, 그 평균 수명이 겨우 25년밖에 안된다고 한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기독교나 불교 혹은 이슬람교를 보면 종교의 생명이 이 세상 그 어떤 것보다 길고 질길 것 같은데 실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역사적으로 시간이 지남에 따라 종교가 문화적으로 도태되는 현상은 분명히 일어나고 있다. 그렇다면 불교나 기독교 그리고 이슬람교는 어떻게 그 오랜 세월 동안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어쩌면 우리 역시 한 번은 해 봤을지도 모를 그 질문에 본격적으로 천착하여 한 권의 책까지 쓴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이 바로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 대학교 심리학교 교수인 아라 노렌자얀이다. 그리고 그 책이 '거대한 신,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이다.



 그는 종교의 생명을 결정하는 요인이 종교 내부에만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에게 종교란 유전적 진화와 문화적 진화가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종교에 대해 진화론, 인지과학 그리고 사회과학적으로 접근한다. 그 방법을 통해 종교가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요인을, 무엇보다 문화적으로 밝혀낸다.


 터키 동남부에는 '괴베클리 테페'라는 유적지가 하나 있다. 원래는 중세의 공동묘지로 알려져 관심을 별로 받지 못했었다. 그러다 최근 고고학적 연구 결과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신전이라는 게 밝혀졌다. 무려 11,500년 전이라는 사실이 말이다. 영국의 유명한 고대 유적지인 스톤헨지보다 두 배는 더 오래된 신전이다. 이 사실이 더 충격적이었다.



 신전이라는 말은 이 때 종교 행위가 이뤄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신전이 있었던 시기는 놀랍게도 신석기 시대였다. 지금까지 종교는 농경 사회 이후에 만들어졌다고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괴베클리 테베'의 존재는 먼저 거대한(인간을 초월한 존재라는 의미에서) 신에 대한 믿음이 먼저고 그 믿음 때문에 농경 사회도 출현 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인류가 무리에서 사회로 전이해 가는데 이렇게 '신에 대한 믿음'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면 과연 종교의 무엇이 그렇게 만들었을까 궁금해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책의 전반부는 바로 그 의문을 푸는데 할애된다. 최근 진화론에 따르면 인간은 다른 육식 동물에 비해 부족한 체력적인 한계를 무엇보다 상호 협력을 통해 생존해왔다고 알려져 있다. 우리의 언어도, 윤리 감각도 그리고 어린이에 대한 보호도 알고보면 그런 협력을 통한 진화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종교도 마찬가지다. 바로 그런 협력을 원활하게 만들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협력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상대방의 신뢰다. 종교는 바로 그 신뢰를 구축하는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다. 설령 먼 이국의 이방인일지라도 신을 믿고 있다면 신뢰할만한 존재로 여기게끔 만들어준 것이다. 그렇게 해서 사회를 넘어 국가가 만들어지고, 먼 이국의 땅까지 교역이 이뤄져 오늘날과 같은 문명의 기틀이 다져지게 되었다는 것이 바로 이 책의 주장이다.


 그런데 그런 신뢰는 어떻게 보증될 수 있었을까? 이것이야말로 노렌자얀이 거대한 신에 대한 믿음이 우리들에게 존재하게 된 결정적인 원인으로 제시하는 것이기도 한데, 바로 신의 초자연적 감시자로써의 속성이다.


 

 생각해 보면, 모든 종교의 신에겐 결코 빠지지 않는 공통된 특성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신이 우리를 지켜보고 계신다. 우리가 신의 명령과 믿음을 져버리면 형벌을 받는다'라는 것이다. 오죽하면 산타클로스조차 1년 동안 우리가 착한 일을 하는지, 나쁜 일을 하는지 지켜본다는 관념이 남아있을까? 종교의 신은 이렇게 초자연적 감시자와 기독교의 십계명과도 같이 신이 말한 것을 따르지 않았을 경우 형벌을 내리는 것을 중점으로 하여 구축되었다. 왜나하면 바로 이것이 상호 협력을 위한 신뢰를 보장해주었기 때문이다. 초창기 사람들은 자신에게 익숙한 사회를 떠나 낯선 타국에서 무역을 할 때, 언제나 신을 믿는가 안 믿는가를 가장 중요하게 따졌다. 신을 믿으면, 그 역시 초자연적 감시자로부터 감시받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며 형벌을 받지 않기 위해 도덕적으로 행위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런 생각은 설령 같은 신을 믿지 않아도 이뤄졌다. 실제로 당시엔 서로 다른 신을 많이 믿었지만 이방인 사이에 교역이 이뤄지는 것엔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았다. 신을 믿는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족했던 것이다.


 이것을 보여주는 실제 사례가 있다. 바로 이슬람교 최대 성지 순례 행사인 '하지'다.



 사우디아라비아에 있는 메카로 성지 순례하는 하지는 이슬람교도라면 꼭 지켜야 할 5대 의무 중 하나이기도 해서 매년 수백만의 이슬람교도들이 이나라 저나라에서 찾아든다. 한 마디로 이슬람교에서 가장 대규모로 이뤄지는 국제행사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하지처럼 온갖 국적과 파들이 모이는 행사에 모이는 교도들이 그렇지 않은 교도들보다 더 타인에게 관용적인 태도를 보였던 것이다. 그들은 나라를 초월하고, 종교를 초월하여 존중과 배려를 보여주었다. 다시 말해, '폭넓게 다양한 사람들과 교류하는 종교적 체험이 도덕의 테두리를 확장시킨'(p. 304) 것이다. 이런 모습은 지금도 남아 있다. 재밌는 예 하나를 들자면, 9. 11 이후 미국에서 무신론자에 대한 반감이 훨씬 커졌다는 게 조사로 입증되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신을 믿지 않아서가 아니라, 신을 믿지 않기에 믿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미국의 상류층들은 자신의 아기들을 위한 보모를 고르기 위해 유타주에 주로 공고를 낸다고 한다. 거기는 몰몬교들이 많기에, 신을 믿는 그들이라면 자신의 아이를 잘 키워줄 것이라 여기기 때문이란다.


 다시 말해, 신은 인류에게 선험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인간이 상호 협력을 위한 증진 방안 중의 하나로써 인위적으로 구축된 산물이었다. 그리고 그 신이 이렇게 오랜 세월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도 그 신이 있어 인류가 좀 더 사회적이 되고 도덕적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실제 사람들을 대상으로 실험을 해 본 결과 입증되었다. 신에 대한 믿음의 유무에 따라 사람들이 도덕적으로 행위할 수 있는 빈도가 증감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실제 종교로 인한 많은 갈등을 보고 있다. IS는 코란을 읽지 않았다는 이유로 민간인을 사살하기도 한다. 그러나 노렌자얀은 그것이 전적으로 종교의 탓으로 볼수만은 없다고 말한다. 종교는 원래 이타주의적이 되도록 만들어졌는데, 그렇게 되기까지 영향력을 가지기 위해 소속감이 필요했다. 그 소속감을 주기 위해선 종교 나름의 성스런 가치의 강조가 필수적이었는데, 현재 일어나는 갈등의 양상 대부분은 바로 이 성스런 가치를 절대적 진리로 여기게 되는 바람에 생겨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노렌자얀은 그런 종교들간의 타협불가능한 성스런 가치들 역시 마땅히 타협 가능한 것으로 삼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이 종교 본연의 의미에 맞는 것이기도 하다.


 이제 정리하자면, 내게는 종교 본연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던 좋은 책이었다. 나 역시 종교를 가지고 있지만 생각해 보니 한 번도 사람들이 왜 종교를 가지게 되었고 그것이 어떻게 수 천 년간 지속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선 별로 생각해 보지 않은 것 같다. 문화진화론적 관점에서 종교를 살펴보는 것은 그래서 참 흥미로운 경험이었다. 예전에 필 주커면의 '신 없는 사회'를 읽은 적이 있다. 세계 최고의 복지 국가이자 행복 지수가 가장 높은 국가가 모여 있는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나라들을 중심으로 신 없이도 얼마든지 유토피아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책이었다.


 


 아라 노렌자얀 역시 이 책에서 그런 나라들에 대해서 말하고 있었다. 그런 나라들이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국민이 정부에 대해서 가지는 신뢰가 무척 크기 때문인데, 노렌자얀은 그것이 무에서 창출된 것이 아니라 바로 신에 대한 신실한 믿음이 정부에 대한 믿음으로 전이된 것으로 설명한다. 필 주커면도 여기에 대해선 그다지 반론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역시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 종교가 그냥 종교로서만이 아니라 일반 문화로 자리잡았기에(다시 말해 피에르 부르디외가 말한 것처럼 아비투스화 되어버렸기에) 가능해진 것이라 말하고 있으니까. 이 책은 무신론의 유혹이 깊어지는 시대에 종교의 효용이 그렇게 없지 않음을 역설하고 있다. 종교가 없는 것 보다는 있는 것이 훨씬 인류에게 도움이 된다는 것을 책 전체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무엇보다 종교에 대한 믿음은 사람을 보다 도덕적으로 만들고 내부의 문제를 정의롭게 해결하도록 이끈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지금 종교인으로 넘쳐나는 우리 나라가 이토록 살기가 어렵고 힘든 것은 우리가 종교의 진정한 의미는 생각지도 않고 서로 자신의 성스런 가치만 고집하고 때로는 그것을 탐욕의 수단으로 삼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국정마저 한 이상한 종교인(과연 종교인이라 부를 수 있는지조차 의문이지만) 때문에 파국이 되어버린 지금의 우리나라를 보면, 이제야말로 과연 종교라는 게 무엇인지 그 근본부터 생각해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한다. 노렌자얀이 누누이 강조하는 대로, 종교의 본질은 상호 신뢰를 증진하여 조화롭게 공존하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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