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 래빗 전집
베아트릭스 포터 지음, 황소연 옮김 / 민음사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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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터 래빗. 참 익숙한 이름입니다. 모습도 아주 낯익네요. 어릴 때부터 많이 듣고 봤기 때문이겠죠. 그러나 그 작품을 실제 읽어본 적은 없습니다. 그런 거 있잖아요? 너무 익숙하면 읽지 않았는데도 왠지 다 아는 것 같아서 안 읽게 되는 거. 피터 래빗이 제겐 그랬던 것 같아요. 그래서 이번에 나온 전집이 참 반갑네요. 네, 나왔답니다. 피터 래빗 전집이. 애니메이션에게 감사해야겠네요. 이번에 피터 래빗 애니메이션이 제작되어 개봉되지 않았다면 이 전집을 만나보지 못했을테니까 말이죠. 오래된 작품입니다. 1902년에 나왔으니 백 년도 더 넘은 작품이죠. 어쨌든 저처럼 이름도, 모습도 익숙한데 정작 얘기는 읽어보지 못한 분이라면 정말 좋은 기회가 찾아온 게 아닐까 싶습니다.





 책이 참 예쁘게 나왔어요. 아, 제가 가지고 있는 것은 민음사 판입니다. 빨간 표지의 양장본인데, 빈티지 느낌이 나게 잘 만들었네요. 피터 래빗하면 역시 삽화죠. 베아트릭스 포터의 예쁘고 정겨운 동물 그림이야말로 피터 래빗이 오늘날까지 살아남은 이유이기도 하니까요. 민음사도 이 작품의 매력이 삽화에 있다는 걸 알았는지 고맙게도 대부분 컬러로 실었습니다. 베아트릭스 포터가 색깔도 정말 잘 쓰기 때문에 이건 정말 잘한 일로 봅니다. 덕분에 포터의 일러스트가 가진 매력을 제대로 맛보게 되네요. 일러스트가 너무 좋아서 그것만 봐도 될 것 같아요. 잠시 작가에 대해 말해보도록 할까요? 베아트릭스 포터는 1866년에 영국의 상류층 가정의 외동딸 태어났습니다. 아버지가 방적 공장을 소유하고 있었으니 경제적 어려움은 전혀 없었으나 자식이라고는 베아트릭스 포터 하나밖에 없었기 때문에 외로움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녀는 그 외로움을 동물과 책을 통해 해소했습니다. 그렇게 베아트릭스 포터는 동물과 문학을 사랑하는 소녀로 자라나게 되었죠. 그녀는 많은 동물을 길렀으나 토끼 두 마리를 유난히 귀여워했는데, 그것이 바로 '버터를 바른 토스트를 좋아하는 벤저민과 장기를 많이 부리는 피터(p. 715)'였습니다. 네, 피터 래빗 이야기에 나오는 피터와 벤저민은 모두 베아트릭스 포터가 기르는 토끼를 그대로 가져온 것이죠. 피터 래빗 이야기는 원래 출판으로 목적으로 만들어진 게 아니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그녀가 스코틀랜드 여행 중에 우연히 만들어졌습니다. 하루는 같이 다니던 가정교사의 아이가 아프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베아트릭스 포터는 아픈 아이를 위로해줘야겠다고 생각하고 그 때 같이 데리고 다니던 피터를 가지고 재밌는 이야기를 만들어 아이에게 들려주었습니다. 바로 그 이야기가 피터 래빗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한 아이의 아픔을 잊게해주고자 하는 상냥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었죠.




 피터 래빗 전집이라고 하지만 피터 래빗 이야기만 있는 건 아닙니다. 다람쥐나 고양이등, 다른 동물들 이야기도 많이 나와요. 그래도 피터 래빗 전집이니까, 피터 래빗을 잠깐 소개해 본다면, 피터는 막내 토끼입니다. 래빗네 근처엔 맥그리거 씨네 농장이 있는데, 그 곳에 가면 안 됩니다. 엄마가 아이들에게 단단히 주의를 줘요. 래빗네 아버지가 거기 갔다가 잡혀 파이가 되었기 때문이죠. 그런데 피터는 엄마의 경고를 잊고 맥그리거 씨네 농장에 들어가고 맙니다. 맛있는 상추와 강낭콩, 순무에 정신이 팔렸기 때문이죠. 그러다 맥그리거 씨에게 들켜 혼비백산 달아납니다. 결국 입고 갔던 옷을 모조리 거기에 벗어둔 채, 기진맥진한 상태로 집으로 돌아오죠. 거기서 첫 이야기는 끝이 납니다. 그리고 다른 동물 이야기가 좀 나왔다가 다시 사촌 벤저민이 등장하여 그 뒷 이야기가 진행됩니다. 사촌은 붉은 손수건으로 몸을 둘러싸고 있는 피터를 보고 왜 그러고 있느냐고 묻습니다. 피터는 맥그리거 씨네 농장에서 옷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용감한 벤저민은 자기가 그 옷을 되찾아주겠다고 하면서 피터와 함께 맥그리거 씨네 농장으로 갑니다. 일전의 경험으로 겁을 잔뜩 먹고 있는 피터와 달리 벤저민은 여유롭습니다. 자기는 아버지와 함께 상추 먹으로 자주 온다는 말까지 하면서 말이죠. 마침내 맥그리거 씨가 허수아비에 걸쳐 놓은 피터의 옷을 찾아 집으로 돌아오는데, 고양이를 만납니다. 벤저민과 피터는 고양이를 피해 엎어진 바구니 속으로 들어가 숨는데, 고양이가 그 위에 배를 깔고 앉는 바람에 나올 수가 없습니다. 결국 벤저민의 아버지가 아들을 찾다 그 곳까지 와 사정을 알고는 벤저민과 피터를 구해줍니다. 그렇게 아이들을 구한 벤저민의 아버지는 다시는 이렇게 위험한 일을 하지 않도록 교훈을 주기 위해 회초리를 듭니다. 회초리에 맞아 얼얼한 엉덩이를 쓰다듬으려 벤저민과 피터는 집으로 돌아갑니다.


 이런 이야기가 삽화와 함께 나오니 단순한데도 정말 재밌더군요. 왜 피터 래빗 이야기가 이토록 유명해졌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전집에 걸친 다양한 동물들의 이야기과 그들을 그린 모습을 보니 베아트릭스 포터가 왜 환경운동가가 되었는지도 알 수 있겠더군요. 동물과 식물에 대한 애정이 담뿍 담겨 있었으니까요. 저는 어른이 되어 이 책을 만났지만 아이일 때 만나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애초에 이 이야기가 아이를 위해 만들어졌기도 했으니까요. 거의 그림책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그림도 많고 페이지 당 글자 수도 적으니 아이들이 읽기에도 전혀 부담이 있을 것 같지 않습니다.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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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드 브레인 - 새대가리? 천만에! 조류의 지능에 대한 과학적 탐험
나단 에머리 지음, 이충환 옮김, 이정모 감수 / 동아엠앤비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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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에게는 대단히 실례되는 일이지만, 아주 멍청하다는 뜻으로 '새대가리 같다'는 말이 널리 쓰인다. 어쩌다 새는 이런 오명을 뒤집어 쓰게 된 것일까? 그 첫 시작은 아무래도 17세기 대항해 시대에 있었을 것이다. 그 때 인도양의 한 섬에서 그 어떤 포식자도 없이 한가로이 평화를 누리고 있던 도도새는 생애 처음으로 포식자를 만났다. 그것도 하필이면 정말 운이 없게도 포식자 중에서도 가장 상위이자 악랄한 유럽 선원들을 말이다. 자비도 없고 한계도 없는 그들에게, 사냥 당해 본 경험이 전무 했기에 어떻게 생존해야 하는지 그 기본적인 방법조차 가지고 있지 못한 도도새는 그저 속절없이 사냥 당하는 것 말고는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유럽 선원들은 "이런 멍청한 새를 다 보겠네." 하고 낄낄 웃었지만, 도도새는 그저 태어나서 처음 당해보는 것이라 대처를 못 하는 것 뿐이었다. 어쨌든 그러한 도도새의 대량 학살을 통해 새는 지능이 낮다는 오명을 뒤집어 쓰게 되었다. 여기에 19세기의 비교해부학자 루트비히 에딩거가 또 단단히 한 몫을 했다. 당시 아주 유명한 비교해부학자였던 그는 새의 뇌에는 생각을 책임지는 피질 같은 영역이 거의 없거나 아예 없으며 오직 본능에 따른 행동만 할 수 있는 선조체 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단언했다. '새에게 생각하는 능력은 허락되지 않았다'고. 루트비히 에딩거의 이 주장으로 도도새로 비롯된 새의 지능에 대한 폄하는 더욱 확고해졌다. 이 주장은 20세기까지도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졌다. 런던 퀸메리 대학이 인지생물학 부교수이자 까마귓과와 유인원, 앵무새의 사회 심리학적 행동 이해의 전문가인 나단 에머리는 50년대 이후 지금까지 다양하게 진행된 새의 두뇌에 대한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새의 두뇌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결코 멍청하지 않다는 것을 한 권의 책으로 증명한다. 그것이 바로 '버드 브레인'이다.



 새의 두뇌에 대한 시각의 결정적인 변화는 1990년대에 일어났다. 인간이나 유인원에게만 있다고 여겨졌던 행동을 새 역시도 하고 있다는 증거들이 학계에 쏙쏙 보고되었기 때문이다. 가빈 헌트는 뉴칼레도니아 까마귀들이 판다누스 잎과 고리형 나뭇가지를 가지고 두 가지 형태의 도구들을 만든다는 사실을 발견했다고 했으며 아이런 페퍼버그는 회색앵무새가 부리와 혀로 다양한 물건들을 탐색한 뒤, 어떤 물건을 지목하자 정확하게 '양털'이라고 대답했음을 알렸다. 이 발견들은 나중에 사실로 검증되었다. 새가 도구도 사용할 줄 알고, 언어 능력도 있다니! 이러한 발견들은 루트비히 에딩거가 형성한 새의 두뇌에 대한 인식 지평에 일대 파란을 일으켰다. 새의 두뇌에 대한 연구들이 활발해졌고 새의 지능이 알려진 것과 다르게 뒤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여기저기서 증명되었다. 이 책은 바로 그런 사실들을 충실히 담고 있다. 이해를 돕는 자세한 설명과 눈을 즐겁게 하는 많은 그림 자료들까지 더해서 말이다.


 책은 주로 이런 형식으로 되어 있다. 하나의 꼭지마다 이렇게 꼭 커다란 그림과 사진이 삽입되어 있다. 


 새의 두뇌에 대한 이러한 발견들은 한편으로 진화에 대한 시각까지 변화하게 만들었다. 지금까지 종의 진화는 직선적이었다. 어류에서 영장류까지 일련이 연속된 흐름으로 상정되었다. 그래서 인간이 진화의 최종 단계라는 생각에 인간을 가장 우월하게 여기는 인간 중심주의를 낳았다. 하지만 현재 새의 두뇌로 통해 알게된 사실들은 타고난 육체적 한계를 가지고 다양한 환경에 적응하느라 모든 종들이 저마다 다른 능력을 갖게 되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진화는 열등에서 우월로 나아가는 '직선'이 아니라 저마다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에 맞춰 최선을 다해 적응해 온, 비유하자면 여러 방향으로 뻗어 나가는 가지를 가진 관목에 가까웠던 것이다. 이런 면까지 더해 '버드 브레인'은 지금까지 오해로 점철된 새의 두뇌에 대해 올바른 지식을 알려줄 뿐만 아니라 진화가 과연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게 만드는 좋은 책이었다. 생물학, 특히 새에 관심 있다면 꼭 한 번 봐야하는 책이 아닐까 싶다.



  새의 두뇌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열등하지 않다는 것은 이렇게 조류가 장거리 여행이 가능한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책은 새가 어떻게 비행기에 있는 첨단 항법 장치도 없이 오로지 자신의 몸만으로 이런 여행이 가능한지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는데 놀라운 것들이 한 두가지가 아니다. 귀소 본능이 가장 강하다고 알려진 비둘기의 경우 자신의 집을 어떻게 찾느냐 하면 일단 집에서 출발할 때 커다란 지형 지물을 가지고 자신이 있는 공간의 전체적인 지도를 뇌의 해마 속에 코드화 한다고 한다. 더 긴 여행을 떠나거나 이용해야 할만한 지형 지물이 없을 경우엔 몸에 내장된 나침반을 사용한단다. 새의 몸 자체가 나침반이 되는 것으로 체내 시스템을 그런 나침반이 활용 가능하도록 아예 바꿔 버리는 것이다. 대양을 횡단해야 하는 철새의 경우엔 태양의 위치를 관측해서 비행한다고 한다. 태양의 위치가 확인 불가능한 밤에는 놀랍게도 옛 선원들이 그랬듯이 별자리를 이용한단다. 이렇게 되면 인간이나 다를 바 없어 보인다. 하지만 새는 이것만 있지 않다. 더 나아가 지구 자기장 자체마저 이용한다니, 정말 양파도 아닌 것이 까면 깔 수록 놀랄 것 투성이다. 어떤 존재를 판단할 때는 섣불리 단정하지 말고 먼저 그것에 대해 제대로 알아볼 필요가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끼게 된다. 이런 이유까지 더해 '버드 브레인'을 더욱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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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누나 속편 마스다 미리 만화 시리즈
마스다 미리 지음, 박정임 옮김 / 이봄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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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짱과 지하루. 확실히 둘은 다르다. 수짱은 마스다 미리의 대표적인 캐릭터고, 지하루는 스탠드 얼론이라 할 수 있는 '내 누나'에 나오는 누나 캐릭터다. 여러 면에서 둘은 차이가 난다. 수짱은 남자 하나 사귀는 것도 어려워하지만 지하루는 남자 친구가 있을 뿐만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남자를 거듭 만나며 그 날 기분에 따라 남자를 골라 만나기도 한다. 그래도 역시 가장 차이가 많이 나는 것은 원하는 것을 얻는 태도이지 싶다. 수짱은 수동적이지만 지하루는 능동적이다. 지하루는 마음에 드는 남자가 있으면 인연을 만들기 위해 의도적으로 계기를 만들기도 한다. 이렇게.



 그렇기에 질문이 많은 수짱과 달리 지하루는 그 어떤 질문이든 대답할 수 있는 지도 모른다. 수짱이라면 분명 쥰페이가 '다시 태어나면 남자와 여자 어느 쪽?'이라고 물었을 때 우물쭈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하루는 단호하게 '나!'라고 대답한다. 



 '내 누나'는 부모님이 모두 해외로 가버려 뜻하지 않게 둘만 있게 된 남매가 주로 일상을 끝내고 온 저녁 혹은 밤에 집에서 만나 이런 저런 대화를 하는 형식으로 이뤄져 있다. 그들은 보통 식사를 하는 테이블이나 거실의 소파에서 대화를 하는데 질문을 하는 것은 주로 남동생 준페이다. 누나 지하루에게 대놓고 '무난한 타입'이란 말을 듣는 쥰페이는 여자의 심리를 전혀 모르는 전형적인 남성이고 여성에게 인기도 별로 없어서 아직 연애도 제대로 못해 봤으며 거기다 이제 막 직장 생활을 시작한 사회 초년생이기도 하여 여자에 있어서나, 사랑에 있어서나, 일과 삶에 있어서나 모르는 것 투성이다. 아니 설령 알고 있는 게 있다고 해도 그게 또 어설퍼서 보완해야 할 게 잔뜩이다. 바로 그런 것에 지하루는 답을 준다. 쥰페이가 전혀 몰랐던 여자의 내면과 사랑의 방식 그리고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삶의 태도 같은 것들을.



 수짱의 정체성을 질문으로 규정할 수 있다면, 지하루의 정체성은 '대답'으로 정의할 수 있다. 이것은 얼마나 강한 주체성을 가지고 있느냐와 관련 있다. 수짱이 수짱이 질문을 통해 자신의 주체성을 형성해 나가고 있다고 한다면 언제나 대답을 가지고 있는 지하루는 이미 그 주체성을 확립하고 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수짱과 지하루를 연결해 볼 수 있고 그렇다면 지하루를 수짱의 종착역 같은 존재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것이 정말 마스다 미리의 의도였는지는 논외로 하고 말이다. 듣기에 수짱은 마스다 미리의 자전적 캐릭터라고 한다. 이게 맞다면 지하루는 마스다 미리가 되고 싶다고 바랐던 인물일 지도 모른다. 혹시 마스다 미리는 종종 꿈꾸지 않았을까? 연하의 귀여운 남자가 '누나' 하면서 찾아와 내 놓는 질문에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서는 '그건 말이지' 하며 단호하고 멋있게 말하는 자신의 모습을. 그만큼 독립적이며 확고한 주관성을. 이 그림과도 같은.



 그래서 이런 생각도 든다. 수짱이 수많은 질문을 통해 가져야 했던 자신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 바로 지하루를 통해 보여주는 것이라고. 혹은 이렇게도 생각하게 된다. 그토록 질문이 많았던 그녀이니만큼 아무래도 이런 저런 타인들에게도 질문했을 것이 틀림없고 그러다 연상 남자로부터 뻔한 정답만 말하는 '맨스플레인'을 너무나 많이 당해버려 그것에 대한 반감 혹은 울화로 만일 반대의 위치에서 '우먼스플레인'을 한다면 과연 그것은 어떤 것인지 보여주기 위해 지하루 캐릭터를 만들었을 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때문에 지하루의 '익스플레인'은 보편적인 정답이 아닌 지극히 개인적인 제안이며 때로는 맥락이 없고 톡톡 튀는 개성으로 중무장하고 있는 게 아닐런 지. 어디서도 들어볼 수 없는 대체 불가능의 '익스플레인'지라, 준페이가 그랬듯이 다 읽고 나서도 몇 번이고 계속해서 들춰보게 된다. 준페이가 늘 조금은 어이 없고 자존심 긁는 대답을 듣게 될 줄 알면서도 줄기차게 누나에게 이것 저것 질문을 하는 것은 분명 지하루가 초콜렛과 다라카츠카 공연에 중독된 것처럼 지하루의 대답에 중독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나도 그만 준페이처럼 중독되어 버린 것 같다. 그랬기에 이 책 마지막에서 지하루가 이제 부모님이 온다고 하면서 둘만의 시간이 끝난다는 것을 암시했을 때, '더 읽을 수 없는 거야?' 하면서 적잖이 아쉬웠겠지. 지하루의 부모님께는 죄송하지만 뭔가 또 다른 일이 생겨 귀국 시간이 하염없이 미뤄지면 좋겠다.



 지하루의 대답은 내게 여성은 이런 생각을 하는구나 보다는 사람은 참 다양한 결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새삼 다시금 깨닫게 만든다. 하나의 사물과 사건을 대하는 데도 같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얼마나 다를 수 있는지 하는 것도. 그러므로 타인에 대한 섣부른 단정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를 느끼게 만든다. 그래서 우리는 판단하기에 앞서 더 많이 물어보고 대화의 시간을 가져야 하는 것인 지도.

 정말로 '내 누나'가 수짱의 해답편 같은 것이라면 왜 '내 누나'의 주된 형식이 수짱의 그것과 다른 것인지 이해되는 것 같다. 수짱의 시간이 주로 독백의 시간이라면 '내 누나'의 시간은 주로 대화의 시간이다. 여기엔 언제나 더불어 언어와 생각을 나누는 시간이 존재한다. 바로 이런 시간들이 보다 강한 주체성을 형성하는데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게 아닐까 싶다. 어쩌면 내가 너무 바라는 시간들이라 더 그렇게 생각되는 지도 모르겠다만.


 일상에서 꾸미지 않고 진솔하게 내면에 있는 결들을 모두 드러낼 수 있는 대화의 시간을 가진다는 게 참 어렵다. 사람이 나이가 들면 스킵십 욕구가 많아진다고 한다. 그래서 나이가 들수록 반려동물을 기르게 되는 것이라고 하더라. 아마도 사람과 다르게 반려동물은 스킨십을 하기 전과 후에 질 수 있는 부담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내가 바라는 대화의 모습도 마찬가지다. 말을 꺼내기 전과 그 말을 내뱉고 난 뒤의 계산과 책임없이 그냥 툭 던지고 '이 말을 하면 이 사람이 날 어떻게 생각할까?', '말해 놓고 괜히 후회하는 건 아니겠지?' 하는 마음 없이 말을 나누고 싶다. 그러고 보면, 지하루가 그렇게 주체성 강한 여성이 될 수 있었던 것도 실은 준페이와의 대화 때문일 지도 모른다. 지하루가 준페이가 아닌 다른 사람들을 만날 때는 아주 작은 부분까지 세심하게 신경쓰면서 전략적으로 행동하기 때문이다.



 이 말을 하면 '뭐야, 그렇게나 남의 눈치를 살피다니? 그렇다면 주체성이 약한 거 아냐?'할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지하루가 그렇게 하는 것은 타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다. 데이트를 위해 열심히 꾸미고 남자와 만날 때 이런 저런 기교를 부리는 것은 어쩌면 다시는 이런 느낌, 경험을 할 수 없게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니까 말이다. 그 시간을 영위하는 지금의 자신이 너무나 소중해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지하루는 그토록 자신을 아끼는 존재다. 마스마 미리가 지하루를 통해 보여주고 싶은 것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게 아닐까 싶다.



 그런 지하루를 있게 한 것은 준페이와의 대화였다. 아무래도 그렇게 보인다. 제아무리 자신을 소중히 여겨서 그런다고는 해도 매일 그렇게 살기란 누구에게나 힘든 법이다. 하루 중 모든 것을 내려놓고 자신에게 솔직할 수 있는 준페이와의 대화 시간이 없었다면 지하루는 진작에 나가 떨어지지 않았을까 싶다. 지하루가 여전히 지금의 모습으로 남아 있을 수 있었던 것은 분명 부모님이 있을 때나 없을 때나 준페이와의 대화로 에너지를 계속 충전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지하루를 통해 다시 한 번 꾸밈 없는 진솔한 대화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고 '준페이, 이 녀석 정말 부러운 걸!' 하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러고 보니 나도 예전엔 이런 누나들이 있었는데 지금은 어디서 뭘하고 있을지 문득 그립네(원래 이 글은 그 누나들에 대한 추억으로 장황하게 쓰였다가 급 수정 당했다. 후후). 그 그리움 때문에 지하루와 준페이의 대화가 더욱 애틋하게 다가와 자꾸 뒤적이게 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것은 적극 공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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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시노그라퍼 - 1975-2015 공연.영화.전시 공간을 창조하는 사람들
뤼크 부크리스 외 지음, 권현정 옮김 / 미술문화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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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흔히 잊고 있는 것 하나는 연극 역시 영화와 마찬가지로 시각 예술이라는 사실이다. 우리가 연극이란 무대에서 보는 것은 배우와 연기만은 아니다. 그들이 말하과 움직이는 공간 역시 우리가 보는 것 중 하나다. 그들을 둘러싼 소품들, 장식들, 벽과 창문들 혹은 거리들 모두가 연극을 보는 우리의 눈으로 들어온다. 무대 공간은 그러나 우리 시야에서 쉽게 사라진다. 우리의 스포트라이트는 언제나 배우의 연기와 대사에만 머물 뿐, 실은 그것과 일체가 되어 드마라를 더욱 극적으로 만드는 의상이나 공간에는 그저 조연에 불과하다는 생각으로 잘 주목하지 않는 것이다. 시노그라퍼는 그렇게 우리 시야에서 쉽게 사라지는 것들을 만들어내는 사람을 가리킨다. 연출가를 도와 무대 장치를 만들고 무대 의상을 디자인하는 사람 전부를 전문 용어로 시노그라퍼라 부른다. 20세기 초만 해도 무대 장식가로 불렸던 그들은 1960년대 말부터 프랑스에서 의상이나 무대 공간의 연출이 연극 연출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인정받으면서 그들의 전문성을 존중하는 의미로 '시노그라퍼'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드디어 연극 또한 영화만큼 시각적 종합 예술의 영역이라는 게 받아들여진 것이다.



 '시노그라퍼'라는 말이 프랑스에서 처음 생겨난 것처럼, 프랑스는 그동안 시노그라퍼 영역에서 선도적인 지위를 가지고 있다. 70년대 공공연하게 '무대 혁명'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무대 연출이 연극 연출 못지 않게 독자적인 예술 가치를 얻게 된 것은 프랑스의 시노그라퍼들 덕분이었다. 현재 그로노블-알프스 대 연극학과 명예 교수로 시노그라퍼 유럽 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는 뤼크 부크리스를 비롯한 네 명의 시노그라퍼 전문가가 공저한 '프랑스 시노그라퍼'는 오늘의 시노그라퍼를 있게 한 프랑스 시노그라퍼의 50년 역사와 57명의 시노그라퍼의 예술을 담는다. 책은 시기에 따라 10년 단위로 하여 모두 네 부분으로 나뉜다. 처음은 무대 장식에서 시노그라퍼로 넘어가는, 그렇게 시노그라퍼 예술이 형성되는 1975년에서 1985년 까지의 개척기이고, 다음은 시노그라퍼 예술이 본격적으로 꽃을 피우는 1985년에서 1995년 까지의 시기이며 세 번째는 1995년에서 2005년 까지로 시노그라퍼 예술이 독자적 영역으로 단단히 뿌리내리는 시기이고 마지막은 2005년에서 2015년까지 새로운 상황에서 시노그라퍼 예술을 또 다시 새로운 예술로 도약시키는 시기로 1970년대에 태어난 차세대 시노그라퍼들을 다룬다. 한 마디로 시노그라퍼 역사에서 결코 무시할 수 없는 프랑스를 중심으로 태동에서 또 다른 단계로의 진입까지 한 눈에 살펴볼 수 있는 책이라고 하겠다. 책은 인물 중심이다. 앞서도 말했듯 모두 57명의 시노그라퍼를 각 시기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인물마다 그들의 대표작 무대를 중심으로 간결하게 설명하는 형식이다.


  말하자면, 이런 형식. 사진은 1943년생, 프랑스의 시노그라퍼 장기 르카에 대한 부분이다. 사진 속 무대 연출은 유명한 연극 연출가인 피터 브룩의 마하바라타 공연 장면이다. 1987년, 아비뇽 축제 때 상연된 것으로 무대 연출을 맡은 장기 르카는 채석장에다 무대를 만들었다. 마하바라타 연극 러닝 타임은 무려 12시간. 답답한 실내 공연이라면 인내심을 갖고 몰두하기가 힘들다. 그런 조건까지 감안하여 자연의 풍광을 즐길 수 있는 곳에다 무대를 마련한 것이다. 아예 연극 진행을 자연의 진행과 일치시키기도 했다. 관객의 뒤에서 태양이 떠올라 관객 앞에서 태양이 지도록 했으며 연기 방향 또한 태양의 방향에 따라 결정했다. 출입구 또한 바람의 방향에 따라 정해졌다. 한 마디로 자연과 일체가 된 무대였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이것만 봐도 시노그라퍼가 왜 독자적인 예술 영역으로 인정되어야 하는지 알 수 있다. 그 때 참여한 관객에겐 분명 남다른 경험이었으리라.


 1942년, 아테네 생 시노그라퍼 클로에 오볼렌스키의 작품들. 피터 브룩은 '마하바라타'에 이어 다시 한 번 채석장의 무대 위에 연극을 올렸는데 그 때 무대 연출을 맡은 사람이 바로 클로에 오볼렌스키다. 작품은 바로 유명한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태풍'. 원래 그리스에서 연극을 했던 그는 특히 그리스 신화의 무대를 연출하는데 남다른 재능을 보였는데 사진의 '디도와 에네아스'도 그 중 하나다. 이것은 영국의 작곡가 헨리 퍼셀이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를 각색한 오페라로 오볼렌스키는 퍼셀이 기숙학교 소년 소녀들을 위해 작곡했다고 전제하고 거기에 따라 무대를 만들었다. 무대 앞에 장식된 쇠시리와 꽃줄이 이채롭다. 양 쪽 사진을 비교해 보면 오볼렌스키는 원과 정사각형을 바탕으로 한 원초적인 기하학적 구성을 주로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신화가 가지고 있는 아르케타입, 즉 원형을 강조하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오볼렌스키는 극의 진행에 조명의 변화를 잘 이용하는 시노그라퍼인데, 그 효과를 더욱 극적으로 만들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1953년, 튀니지 생 시노그라퍼 아고스티노 파스의 작품들이다. 보는 방향에서 왼쪽은 장 주네의 '하녀들'의 무대이고, 오른쪽은 베르디의 오페라 '아이다'를 위한 무대이다. 프랑스의 변방인 튀니지 출신이라 그런지 무대 연출에 있어서도 이국적인 것을 적극 도입하는 게 그의 스타일인 것 같다. '하녀들'은 일본 공간 양식을 차용했고 '아이다'에선 중국의 그림자 인형극 양식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서양의 내용을 동양의 그릇으로 담는다. 그럴 때 자연스레 일어나는 긴장과 동요 그리고 융합을 관객에게 주려는 듯하다.


 1943년, 아르헨티나 생 시노그라퍼 리샤르 페두지의 작품들. 무대가 정말 이채롭지 않을 수 없다. 아마도 무대만 보고는 이것이 무엇을 위한 무대인지 얼른 짚어내기가 힘들 것이다. 역시 보는 방향에서 왼쪽의 무대는 셰익스피어의 유명한 희곡 '햄릿'을 위한 것이고 오른쪽 무대는 '전쟁 레퀴엠'으로 유명한 작곡가 벤저민 브리튼이 헨리 제임스의 '나사의 회전'으로 만든 오페라를 위한 것이다. 과연 이런 무대에서 어떻게 연극과 오페라가 연출될 지, 거기에 대한 호기심만으로도 연극과 오페라를 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게 만든다. 직접 보면 분명 이제까지 자신이 알던 것과 전혀 다른 낯선 '햄릿'과 '나사의 회전'의 세계로 인도될 것만 같은 느낌이다. 이런 것이 바로 시노그라퍼의 능력이 아닐지. 익숙한 것도 낯선 것으로 만들어 새로운 이면을 경험하게 만드는 것. 이렇게 독특한 세계를 구체적으로 구현해 내기에 시노그라퍼들의 작업에 더욱 관심을 기울이게 되는 듯하다.


컬러 사진 도판이 그들의 무대 연출에 대한 이해를 돕고 짤막하게 인용된 작가의 육성과 저자들의 설명이 거기에 가미된 작가의 철학을 헤아리게 만든다. 시노그라퍼라는 전문 영역에 대한 책이지만 말이 그렇게 어렵지 않기 때문에 무난하게 이해되는 수준이다. 구체적 무대 공간을 다루지만 그것이 바탕이 된 철학은 추상적인 것이므로 어쩔 수 없이 설명이 모호할 수 있는데 보통의 예술서를 이해할 수 있다면 그렇게 난해하지 않게 다가오리라 생각된다. 예전부터 무대 연출에 관심을 가졌던 사람에겐 더 할 나위 없는 책으로 보인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더 권해주고 싶은 이들은 이제 막 시노그라퍼의 존재를 알고 여기에 흥미를 가지게 된 사람들이다. 이 책을 읽으면 그 뒤부터 연극이든, 오페라든 정말 다르게 보일 것이라 자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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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7-04-16 0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피터 브룩 <마술피리>를 인상적으로 보고 동굴에서 했다는 <마하바라타> 공연 무척 궁금했는데 이 책 보면 더 자세히 볼 수 있겠군요. 피터 브룩 <살로메>는 살바도르 달리가 무대 연출을 했다고 하죠^^

ICE-9 2017-04-16 14:24   좋아요 0 | URL
사실 이 책으로 마하바라타 공연에 대한 자세한 얘기를 듣는 데는 다소 아쉬운 부분이 있을 것 같아요. 소개 글이 거의 반 페이지 정도에 불과한지라. 피터 브룩이 ‘빈공간의 예술가‘라고 불릴만큼 독특한 무대를 많이 만들어 유명했는데 지금까진 그것이 모두 피터 브룩의 공으로만 받아들여지고 있었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만큼 시노그라퍼들의 공헌이 무시되었던 것은 아닌지...
그건 그렇고 살바도르 달리가 무대 연출을 한 ‘살로메‘는 저도 꼭 한 번 보고 싶네요^^

2017-04-17 01: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4-18 15: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나의 우주는 아직 멀다 마스다 미리 만화 시리즈
마스다 미리 지음, 박정임 옮김 / 이봄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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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우주는 아직 멀다'의 쓰치다는 나와 그리 다르지 않은 사람이다. 현재 삶에 썩 만족하지는 않으나 특별히 비관하지도 않는다. 사람들이 뒤쫓는 성공이니 돈이니 하는 것엔 별로 관심 없는데 그래도 한 번 사는 인생이니 이왕이면 제대로 살고 싶을 뿐이다. 그런데 정작 제대로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 몰라 늘 갈팡질팡 한다. 이 정도면 제법 괜찮다 싶다가도 또 어느 순간 곱씹다 보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나도 그렇다. 나랑 비슷한 고민을 하는 후배랑 술 먹다가 '인생에 정답이 어디 있어?' 호쾌하게 부르짖을 때도 있지만 삶의 피로에 찌든 선배가 푸념을 푹푹 늘어놓으면, 나도 저렇게 되겠지 하는 위기감이 퍼뜩 들어 정답을 알려줄 것 같은 책을 찾아다니기도 한다. 분명 이 책을 한달음에 읽었던 것은 쓰치다가 자조와 자위 사이, 자기 최면과 결심 사이를 쉴 새 없이 오고가는 나와 많이 닮아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정적인 점에서 그는 나와 다르다. 바로 질문이 많다는 것이다. 쓰치다는 자신을 둘러싼 세계에 대해, 닥쳐 온 상황에 대해 그리고 만나는 사람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한다. 나와는 반대다. 나는 그러지 않는다. 나는 질문 대신 매뉴얼을 마련한다. 질문 보다는 대응 방법을 먼저 고민하고 잘 해결하려 빈틈없이 준비한다. 질문과 매뉴얼은 근본적으로 다른 삶의 방식이다. 질문은 타자에 대한 관심의 표명이고 그것을 통해 나를 변화시키려는 움직임이다. 타자에 대한 질문은 필연적으로 자신에 대한 질문으로 돌아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매뉴얼은 자기 안위를 굳건히 하려는 노력일 뿐이다. 물론 매뉴얼도 타자에 대한 관심이 지대하긴 하다. 그러나 그 기저에 깔린 마음은 너무도 다르다. 질문은 타자라는 존재 자체에 대한 관심을 가진다. 하지만 매뉴얼은 어디까지나 그것을 통해 무사히 넘어야 하는 장애물로서만 관심을 가진다. 해결과 극복에만 초점을 맞추기 때문에 타자 자체 보다는 그의 약점이나 내게 유리한 점을 중심으로 보게 된다. 결국 나도 변하지 않는다. 나를 고수하기 위하여 타자를 내게 맞출 뿐이다. 쓰치다를 보면서 내게 이런 모습이 있다는 것을 깊이 깨닫게 되었다.

 그런데 나도 원래는 이렇지 않았다. 어릴 때의 나는 어른들에게 '넌 왜 이렇게 질문이 많냐?'는 말을 참 많이 들었던 아이였다. 내가 좋아했던 책도 백과사전이었다. 세상과 존재에 대해 너무나 호기심이 많았던 내게 백과사전은 그런 갈증을 해갈시켜줄 유일한 우물이었다. 수 십 권의 백과사전을, 책 등이 갈라져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반복해서 읽었다. 사람 일은 모른다더니 그랬던 내가 지금은 이런 모습이다. 이제는 아무 것도 질문하지 않는다. 나 자신에게조차 그렇다. 사회에 나온 이후로 내내 별로 다를 것 없는 일상을 영위하고, 매뉴얼로 대충 수습하는 것에만 급급하다 보니 어느새 나에 대한 것들이 뒷전으로 밀려나 버렸다. 그것을 쓰치다의 모습을 보고 비로소 알게 되었다. 내가 큰 것을, 정말 잃어버리지 말아야 할 것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그것이 바로 나다. 지금의 나는 나에 대해 말하는 것이 너무나 어렵다. 내 취향도, 성향도, 생각도 마찬가지다. 다른 주제에 대해선 달변 인데도 나 자신이 주제가 되면 눌변이다. 말 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매뉴얼의 말로는 이렇다. 자아의 상실이다. 계속 나만 고수하다 보면 나를 잃어버린다. 그런데도 때로는 이만하면 괜찮지 않아 만족하고 있었다니! 화끈거린다.

 처음 읽을 때는 너무나 많은 질문들이 거슬렸다. 뭘 이런 것까지 묻나 싶었다. 시시콜콜과 소심이라고 쓴 말풍선이 내 머리 위로 뭉게뭉게 떠올랐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것들 모두가 타자와 자신에 대한 관심이었고 결국은 나다움을 향한 도정이었다. 그렇게 쓰치다는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자신만의 대륙을 만들고 있었다. 나는? 나는 세계에 나를 끼워 맞췄다. 질문을 갖기 전에 타협했고, 관심보다는 단정이 먼저였다. 그래서 나는 상식과 주류 그리고 보편의 식민지가 되었고 알맹이만 놓고 보면 세상에 허다한 그렇고 그런 사람들에 불과한 익명의 존재라고 말해도 무방했다. 

 그리고 그건 내 탓이었다. 나는 삶이 무빙워크가 되길 원했다. 별다른 갈등과 고민 없이. 조금은 수월하게 목적지로 날 데려다줬으면 했다. 그것을 위해 나를 억눌렀다.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날 맞추었고, 그런 나를 되돌아보지 않았다. 쇼윈도의 마네킹이 입혀주는 대로 입듯이. 그랬던 결과, 나는 얼굴을 잃어버렸다. 누구도 마네킹의 옷을 기억하지, 얼굴을 기억하지 않는다. 이제 내게 필요한 것이 질문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이 무빙워크에서 내려, 제대로 가고 있는 것인지, 그 누구의 눈도 아닌 바로 나 자신의 눈으로 가늠해 보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물론 그 방향은 잃어버린 내 얼굴을 되찾는데 맞춰져 있을 것이다. 앞으로는 매뉴얼 보다 질문의 목록을 훨씬 더 많이 늘려가리라. 지금 이 순간 감히 마음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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