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기종료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7-1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7
빈스 플린 지음, 김승욱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2월
평점 :
품절


 

 

 변상욱 기자의 '굿바이 MB'와 빈스 플린의 '임기종료'가 가지는 공통점이 있다면 하나는 모두 대통령이 임기종료를 1년 앞두고 있다는 사실이다. 둘은  어떻게든 권력을 유지시키기 위하여 온갖 정치적 공작과 약점을 잡아 협박과 회유를 하는 등의 정치적 뒷거래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셋은 그러면서도 겉으로는 도덕적인 정권인양, 민주적인 정권인양 한껏 포장하려 든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넷은 그러한 정치적 부패와 협잡 그리고 거짓말과 위선에 국민들의 환멸과 분노가 극에 달할대로 달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아직도 많은 분들이 가장 좋은 나라라고 생각하는 미국의 정치적 현실 역시도 우리나라와 다를바 없다. 한낱 스릴러가 하는 얘기를 곧이 곧대로 믿느냐고 반문하실 분도 있으시겠지만 '뉴스의 헤드라인을 뽑아내듯 오늘날 백악관의 모습에서 착안한 현실적인 캐릭터들'이라고 평한 플로리다 타임스 유니온이나 '워싱턴 정치 기밀의 내부 고발자가 된 것 같은 현실감을 느끼게 해 주는 작품'이라는  미네아폴리스 스타 트리뷴의 평가가 있는 것을 보면 이 소설의 내용이 단지 허튼 공상만은 아님을 알 수 있다. 그저 그 속사정이 제대로 투명하게 알려지지 않았을 뿐 미국의 정치나 한국의 정치나 이렇게 빈스 풀린의 '임기종료'가 나와야 했을 만큼 썩을 대로 썩었다는 건 마찬가지인 것이다. 게다가 이 작품은 5년간 60번이나 출판사로 부터 출판 거절을 받는 바람에 작가가 사비를 털어 출간했다. 그렇게 사비로 털어 만든 책이니 별다른 홍보가 있을리는 만무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전히 입소문만으로 이 책은 베스트셀러 1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이것은 무엇을 증명하는가? 물론 작품의 완성도가 그토록 매력적이라는 증거도 되겠지만 그만큼 미국 시민들 역시도 우리 나라만큼 기성 정치에 염증을 내고 있었다는 사실이 아니겠는가?

 

 근데 염증을 느끼고 있는지 어떻게 알 수 있냐고? 그건 빈스 플린이 '임기종료'에 담은 내용으로 알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 결정적으로 오늘의 한국과 빈스 플린이 꿈꾸는 미국의 차이이기도 하다. 오늘날의 한국은 그동안의 거짓과 위선 그리고 무능에 대한 환멸과 분노에도 아랑곳 않고 다시금 거짓말에 스스로 속아주는 것을 택했지만(어쩌면 한국인은 독일의 학자 에리히 프롬이 말했던 대로 매저키스트적 민족성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나치와 같은 파시즘을 양산시켰던 그러한 증후군을...) 빈스 플린의 '임기종료'는 그러지 않는다. 그는 오히려 이대로 방관할 수 있다면 진정한 국가의 주인인 국민이 스스로 심판해야 하지 않겠냐고 말한다. 그것도 그냥 외치거나 시위를 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 옛날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와네트를 단두대로 처형했던 프랑스 혁명처럼 무력으로 응징해야 한다고 말이다.

 

 소설은 그렇게 대통령 임기 종료를 1년 앞둔 시점에서 현재 미국 대통령 스티븐스가 재선을 위해 장차 재정적 부담으로 나라의 파산을 가져올지도 모른다는 우려에도 불구하고 선심성 정책을 법안화하느라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지지표를 모으고 있는 사이 당시 미국 정치에 있어서 가장 강력한 권력을 가졌으나 또한 그만큼 가장 부패로 악명 높았던 정치인 세 명이 정체불명의 자들에게 국민의 이름으로 처단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그들은 거기에 더하여 이것이 시작이며 앞으로 미국의 정치가 올바로 되지 않으면 계속 정치인들을 살해해 나갈 것이라 선언한다.

 

 1776년 미합중국의 건국자들은 영국 국왕에게 독립선언서를 보냈다. 이 선언서에서 토머스 제퍼슨은 이렇게 썼다. '어떤 형태의 정부든.. 파괴적인 영향을 미치게 될 때, 그 정부를 바꾸거나 없애고 새로운 정부를 세우는 것은 국민의 권리다.' 우리는 정부가 나아가는 방향을 바꾸기 위해 봉기할 이 권리를 행사하려 한다. 당신들은 미국이 나아가는 방향을 바로잡을 기회가 있었지만 그 일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

(...) 당신들은 지출을 줄일 시간과 기회가 있었지만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당신들은 개인적인 욕심과 자신이 속한 정당의 목표를 미국의 경제적 안정과 미래보다 더 중시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당신들의 이기적이고 무능한 지도력 때문에 현재 우리는 5조 달러가 넘는 국가채무를 짊어지게 되었다. (...)  이제 행동에 나서야 한다. 우리는 대통령에게 하원에 제출한 예산안을 철회할 것을 명령한다. (...) 만일 헌법 초안자들이 의도했던 제한된 권력만을 행사하는 정부형태를 회복할 능력이 없다면 당장 공직에서 사퇴할 것을 촉구한다.

 우리는 당신의 행동을 면밀히 주시할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마지막 경고다. 만약 당신들이 우리의 요구에 응하지 않는다면 목숨을 잃게 될 것이다. 당신들 중 어느 누구도 우리의 손을 벗어나지 못한다. 심지어 대통령도 마찬가지다.(P.79~80)

 

 

 하지만 물론 그들은 듣지 않는다. 해서 정체불명의 심판자들이 대통령이 헬기를 탔을 때 얼마든지 타격가능함을 보여 더욱 위협하지만 애시당초 국민에 대한 봉사 따위는 잊어버린지 오래인 그들은 오히려 그것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정적을 제거할 음모를 꾸민다. 한 마디로 지지리도 바뀌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빈스 풀린이 그려내는 민중의 무력 심판은 더욱 설득력을 가지게 된다.

 

"에릭 건전한 토론은 환영이네만, 다시는 나한테 그런 쓰레기 같은 말을 내뱉지 말게. 난 자네가 가르치던 순진한 학생이 아냐. 아첨을 일삼는 정치운동가도 아니고. 난 사람들이 죽는 걸 직접 봤네. 이 나라를 위해 복무하면서 직접 사람을 죽인 적도 있어. 자네의 그 이상적이고 철학적인 이론들이 의사당의 신성한 복도에서는 효과가 있는지 몰라도, 현실속에서는 안 그래. 폭력은 삶의 일부일세. 자기가 원하는 걸 얻으려고 기꺼이 폭력을 쓸 사람들이 쎄고 쌨어. 그런 사람들을 막으려면 역시 폭력을 동원하는 수 밖에. 전쟁이 일어날 위험이 없다면 히틀러나 스탈린 같은 사람이 이 세상을 다스릴 걸세. 그리고 자네는 '폭력은 폭력을 낳을 뿐'이라는 멍청한 말을 하며 돌아다닌 죄로 총살당하겠지" (P.317)

 

 

 주인공 오루크의 할아버지 시머스의 말이다. 비폭력을 주장하던 올슨이 이 말에 별다른 대꾸를 하지 못하는 모습을 묘사하는 것으로 봐서 이것이 바로 '임기종료'를 쓸 때의 빈스 풀린의 솔직한 심정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그렇다고 빈스 풀린이 무력 응징을 진심으로 믿는다고 생각하지는 말길 바란다. 그는 국민이 침묵하면 과연 이 나라가 어떻게 되는지 좀 과장해서 말하고 있을 뿐이다. 전쟁이 없으면 히틀러와 스탈린이  세상을 다스린다는 말에 그 진의가 드러난다. 히틀러와 스탈린이 그렇게 집권할 수 있었던 것은 광기와도 같은 전쟁의 선동과 혹독한 독재 앞에 국민들이 침묵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작품 속에서 언젠가 오루크가 중얼거렸던

 

 "이 사람들이(정치가들을 말한다.) 제대로 일을 하게 만들려면 도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라는 질문에 빈스 플린은 소설 전체를 통하여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다. '이 나라의 정치를 바꾸고 싶은가? 그러면 행동을 하라! 행동을 통한 현실적인 참여만이 그것의 근절을 가져올 것이다!'라고...

 

 

 

 개인적으로 정치에 대한 환멸을 무관심으로 대응하는 분들에게 제스 월터의 '시티즌 빈스(이 책을 읽으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투표권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감동적으로 깨닫게 될 것이다.)'와 더불어 권해드리고 싶다. 이번 총선의 낮은 투표율은 정말 실망스러웠다. 이번 야권연대의 충격적인 패배도 낮은 투표율 때문임이 출구조사 분석 결과 드러났다. 특히나 18대에 비해 30대의 참여율이 거의 12%나 낮다고 한다. 패배의 충격만큼이나  정책에 가장 민감하게 영향받을 수 밖에 없는  30대가 이렇게나 참여율이 저조하다니 정말 충격이 아닐 수 없다. 물론 투표하지 않을 권리도 보장해야 한다고 말들을 한다. 하지만 나는 그것도 상황을 봐 가면서 보장되어야 할 권리라고 생각된다. 만일 당신이 불타고 있는 집안에 사람이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해 보라. 물론 구해주지 않았다고 형법이 당신을 처벌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당신의 행동하지 않음을 무언으로나마 비난할 것이다. 거기에 대해 당신은 구해주지 않을 권리도 보장되어야 한다고 외치며 스스로를 당당하게 변호할 수 있을까? 아마 그러지 못할 것이다. 분명 당신 역시도 가책을 느끼고 있기 때문에. 물론 이 비유가 투표권의 비유로 적절하지 못하다고 나 역시 생각한다. 하지만 지금 우리나라의 상황이 불난 집과 다르다고 보기란 힘들다고 생각된다. 조금만 눈을 바깥으로 돌리고 살펴보면 마른 들판에 불길이 번지듯 활활 타들어가는 타인들의 고통이 보인다. 그것들 대부분이 자신들의 이권만 챙기는데 혈안이 된 정치적 부패와 그로 인한 정책적 무능 때문임을 모르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들을 바꿀 수 있는 길이 투표 밖에 없다는 것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니 이런 상황인데도 투표를 하지 않는 것은 그야말로 사람들이 안에 있는 활활 타오르는 집을 눈 앞에 두고도 가만히 있는 것과 같지 않을까? 물론 그 불은 그냥 거기서 타오르는 것으로만 그치지 않는다. 언제 어느때 자신의 집마저 옮겨 붙을 지 모른다. 삶이 가진 예측불가능성은 계층의 위 아래를 구분하지 않으니까.  그 때가서 창 밖으로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을 때 돌아오는 것인 차디찬 무관심 뿐이라면 어떡할 것인가? 미국의 시인인 프루스트는 무관심은 무관심만을 낳을 뿐이라고 했다. 그래서 세계는 아마도 얼음으로 종말을 맞이할 것이라고... 이이상 말을 하면 구구절절이 될 것 같아 이쯤에서 그만두려 한다. 그냥 한번쯤 이 책을 통해서나마 나의 정치적 무관심과 무행동을 되새길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으면 더 이상 바랄 게 없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검은 계단
루이스 베이어드 지음, 이성은 옮김 / 비채 / 2011년 4월
평점 :
절판


 

 '검은 계단'은 루이스 베이어드의 '미스터 티모시', '더 페일 블루 아이'에 이은 세번째 팩션이다. 세 소설 모두 19세기를 시대적 배경으로 하면서도 공간적 배경이 되는 나라는 다 다르다는 특색이 있다. '미스터 티모시'는 19세기의 영국을, '더 페일 블루 아이'는 19세기의 미국을 그리고 본 작품 '검은 계단'은 19세기의 프랑스를 각각 그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렇게 다른 나라들은,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또 그렇게 그 시대 그 나라의 대표적 작가의 분위기를 강하게 띠고 있는데, '미스터 티모시'가 '디킨스'의 분위기를(이 소설의 주인공 티모시는 이제는 자라서 성인이 된, 바로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캐롤'에 나오는 꼬마 팀이다.)  '더 페일 블루 아이'가 '에드가 알란 포'의 분위기를(에드가 알란 포가 아예 직접 등장한다. 이 소설은 포의 짧았던 미 육군생도시절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띠고 있다고 한다면 이 소설 '검은 계단'은 '알렉상드르 뒤마'의 분위기를 강하게 띠고 있다고 하겠다.(이 소설의 설정은 뒤마의 '철가면'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  세 작품의 미국판 표지들 -  

 

   때문에 이런 생각도 든다. 혹 이 세 작품들은 어떤 개인적인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나온 일련의 작품들이지 않을까 하는. 비슷한 시대를 배경으로 하면서도 나라를 달리하여 각 나라마다 가장 대표적이라 할 만한 작가들의 분위기로 직조되는 이 소설들엔 분명 아무래도 어떤 작가의 의도가 개입되어 있는 것 같다. 더구나 최근 발간된 후속작 '더 스쿨 오브 나이트'를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왜냐하면 그 소설은 현재의 미국에서 엘리자베스 시대의 영국을 보는, 그렇게 두 세기의 서로 다른 얘기들이 겹쳐진 그런 소설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렇게 보는 것도 무방할 것 같다. 그러니까 '미스터 티모시'에서 '검은 계단'까지 루이스 베이어드는 19세기를 19세기적 시선으로 바라보는 일종의 '퍼스펙티브 프로젝트'를 끝내었고 '더 스쿨 오브 나이트'에선 이제 하나의 새로운 전환점을 만들려한다고. 

  만일 이 가정이 맞다면 왜 루이스 베이어드가 하필 19세기적 퍼스펙티브에 따라서 일련의 세 작품을 완성했는지 이유가 보다 분명해진다. 그것은 소설이 배경으로 하고 있는 시대와 공간적 배경을 고려하면 보다 명확하다. 이 세 작품들은 모두 이른바 '근대'라는 것을 태동시켰던 가장 대표적인 움직임들의 휴유증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미스터 티모시'는 영국의 산업혁명 '더 페일 블루 아이'는 남북전쟁 마지막으로 '검은계단'은 프랑스 대혁명의 휴유증을 다루는 것이다. 결국 베이어드는 인류 역사상 가장 거대한 이념들이 인간의 영혼들을 마구 유린하던 시절, 그렇게 커다란 정신적 격변기라 할 수 있는 것을 소설에 담아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소설 속 시간들은 언제나 그 격변기로 부터 수십년이 지난 다음이다. 그러니까 베이어드의 관심은 현재 진행중인 격변기가 아니라 그 격변기가 지나간 후 어떠한 것들이 남았는가에 있는 것이다. 그렇게 베이어드가 소설을 통해 집중하는 것은 그 격변기가 인간의 영혼에 남긴 흔적 혹은 상처 같은 것들이다. 때문에 베이어드는 이 흔적 혹은 상처를 제대로 파헤치기 위하여 그것들을 모두 한 인간에다 집약시킨다. 바로 소설 초반에 나타나는 시체들은 그러한 집약된 형태가 드러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게 그것은 누군가의 눈에 밝혀져야 할 대상이 되어 상태와 상처가 관찰가능한 하나의 객체가 되고 나아가 추적을 발동시키는 단서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시대적 격변이 인간의 영혼에 남긴 생채기를 쫓고자 하는 베이어드의 의도는 결국 그의 소설들을 미스터리로 만들고 그의 눈은 검시관의 그것이 된다.

  시체를 꼼꼼하게 검시하는 검시관... 이것은 베이어드가 그 시대를 바라보는 시선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작품을 형상화하는데 있어서 하나의 예술가적 자의식이기도 하다. 때문에 베이어드의 팩션에는 늘 하나의 찬사가 따라 붙는다. 그것은 그 어떤 팩션들 보다도 아주 세밀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정확히 복원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찬사는 그야말로 베이어드가 검시관이 조그만 증거도 놓치지 않으려 꼼꼼하게 시체를 검시하듯 그렇게 자신의 작품 세계를 형상화했기에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시대적 격변이 남긴 흔적과 상처를 쫓는 검시관의 시선과 검시를 하듯 세부까지 꼼꼼한 인물과 시대상황의 복원을 가지고 궁극적으로 베이어드가 하고자 하는 것은 무얼까? 우리는 그걸 묻지 않을 수 없다. 그저 미스터리가 해결되는 쾌락 때문인가? 아니면 처음으로 경찰 기구가 만들어지는(일례로 '검은 계단'의 비독은 아시다시피 프랑스 경시청을 만들게 한 장본인이다.) 특정 시점에 집중하여 경찰력으로 상징되는 국가 권력이 형성되는 것을 보여주려 함인가? 이것도 저것도 물론 답이 아니다. 베이어드가 결국 보여주려 하는 것은 그 시대적 격변기에 처한 한 인간의 윤리적 갈등과 선택이다. 시대적 격변기는 거세한 노도와 같아서 인간을 마구 휘몰아쳐간다. 다른 많은 이념들을 가지고 사람들은 저마다 그 격변기에 뛰어들지만 언제나 꿈은 배신으로 희롱되기 마련이고 신념은 현실과 타협하기 마련이다. 그렇게 저마가 그 격변기의 흐름 앞에서 사람들은 윤리적 결단을 내려야 하는 순간들을 맞는 것이다. 과연 인간은 그 거대한 파도 처럼 몰려오는 시대적 요구 앞에서 자신의 개인적 신념에 따른 행동을 할 수 있을 것인가? 베이어드가 작품들을 통해 궁극적으로 묻고자 하는 것은 바로 그것이다. 바로 이 소설 '검은 계단'에서 루이 샤를의 존재 자체가 그러한 질문인 것이다. 

  '검은 계단'은 그렇게 미스터리를 넘어 궁극적으로는 독자에게 윤리적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다. 베이어드의 현실적이면서 풍부한 인물 묘사는 그 질문 앞에 선 개인의 고뇌를 생생하게 느끼게 해준다. 더하여 세밀하게 복원한 당시의 시대 상황은 현장성을 넘치게 해 슬그머니 독자 자신을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해야 하는 자리로 인도한다. 그 자리에 섰을 때, 과연 당신은 어떤 대답을 할까?  지금 나는 그 무엇보다도 그것이 궁금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폴로의 눈 바벨의 도서관 8
길버트 키스 체스터턴 지음, 최재경 옮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기획 / 바다출판사 / 2010년 12월
평점 :
품절


"이 책에 있는 이야기들은 1933년 부터 1934년에 씌여진 것들이다.  나는 그것들이 스티븐슨과 체스터튼, 폰 스턴버그의 초기 필름들로 부터 유래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이렇게 보르헤스의 첫 소설집 '불한당들의 세계사'의 제1판 서문에서도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길버트 키스 체스터튼은 보르헤스에게 많은 영향을 준 작가라고 할 수 있다. 말년에 그러니까 69세 때 했던 어떤 인터뷰에서도 그는 그 때까지 늘 자주 읽게되고 은혜를 느낀다는 작가로 체스터튼을 꼽기도 했다. 이렇듯 보르헤스에게 있어 체스터튼은 보르헤스의 삶에서 뗄레야 뗄 수 없는, 창작 활동에 있어서의 일종의 동반자 같은 존재였다. 보르헤스 소설의 주요한 특징이라 일컬어지는 '탐정소설 기법'은 바로 이 체스터튼에게서 이어받은 것이었다. 보르헤스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체스터튼으로 부터 플롯을 기하학적 도표로 축약시키는 방법과 범죄자는 창조적인 예술가지만 탐정은 단지 비평가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배웠다"라고.  

 보르헤스는 체스터튼의 '브라운 신부'가 등장하는 탐정소설들이 특히 사건들에 초자연적인 특성을 부여하고 있다는 데 주목했다. 체스터튼의 탐정소설에 등장하는 사건들은 얼른 인간의 이성으로 헤아리기 힘들 것 같은 초자연적이고 불가사의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체스터튼은 브라운 신부의 지혜와 기지로 결국은 그것들 모두가 이성적으로 해결 가능한 것임을 보여준다. 하지만 보르헤스에게 체스터턴이 펼쳐보이는 초자연적인 사건들은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그것은 이성의 가느다란 빛으로는 헤아리기 어려운 신비의 미로를 연상시켰고 그 내밀한 혼돈의 미로를 오로지 이성의 빛만 의지하고 탐색할 수 밖에 없는 게 인간이라는 것에 보르헤스는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생각했다. 이 세계 자체가 하나의 미로이고, 그 미로 속을 어딘가 존재하는 진실을 찾아 떠도는 것이 바로 삶이라고... 

 이렇게 체스터튼의 '사건의 초자연적인 성격'과 그 안에서 진실을 추구하는 과정으로서의 '탐정' 기법은 보르헤스에게 있어 소설의 근간을 이루게 되었다. 하지만 체스터튼이 결국 이성으로 모든 초자연적인 것들을 이해가능한 것으로 만들었던 것과는 달리 보르헤스는 그의 단편 '원형의 폐허들'에서 잘 드러나듯이 이성은 겹겹으로 이루어진 초현실 속에서 그저 헤메이는게 고작이며 어쩌다 찾은 출구도 또 하나의 미로로 들어가는 입구에 불과하고 그렇게 인간은 마치 그의 소설 '바벨의 도서관'에서 어딘가에 있다고 전해지는 전설의 책을 찾아 헤메이듯이 영원히 하나의 진실을 찾아 헤메일 운명이라고 봄으로서 체스터튼과는 차별성을 두었다. 

  보르헤스의 '바벨의 도서관'에 대한 오마쥬라 할 수있는 닥터 후 시리즈의 '도서관' 에피소드  中

  이렇듯, 그의 영감과 소설적 세계관의 근간을 이루는 체스터튼의 작품들을 그것도 보르헤스가 특별히 고르고 고른 작품들을 통해 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건 보르헤스의 영감의 원천을 탐색하는 소중한 기회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 '아폴로의 눈'을 읽는다는 것엔 이중의 이득이 있다. 하나는 보르헤스에게 영향을 주었던 체스터튼 소설의 특징들이 무엇인지 살펴 볼 수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것을 통해 보르헤스의 작품 세계가 어떤지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보르헤스가 특별히 꼽은 체스터튼의 단편들은 이것이다. 

계시록의 세 기병
이상한 발소리
이스라엘 가우의 명예
아폴로의 눈
이르수 박사의 결투 

 앞서 보르헤스가 체스터튼의 사건들이 모두 초현실적인 것에 주목했다고 했는데 이 단편들은 그야말로 그런 것에 충실하다. 첫째 단편, '계시록의 세 기병'은 왕국에게 위협이 되는 한 저항시인을 사형시키려는 장군이 그의 시를 사랑한 왕자가 시인을 사면하려고 전령을 파견하자 그 전령을 죽여서 사면을 막고자 한 병사를 급파한다. 그런데, 결국 그 전령을 죽이는데는 성공했지만 시인은 사면되어버리는 기이한 사건이 벌어진다.  둘째 단편 '이상한 발소리'는 이른바 VVIP만 들어갈 수 있는 폐쇄된 한 호텔에서 은식기가 모두 사라지는 사건이 벌어진다. 그런데 종업원 중 한 명이 우연히 그날 쓰러져 일을 못했으니 분명 한 명 부족했어야 할텐데, 종업원들이 그 날 다 있었다는게 드러나면서 미스터리가 된다. 셋째 단편 '이스라엘 가우의 명예'는 체스터튼의 이러한 초현실적 성격이 가장 많이 드러나는 작품으로 미스터리하게 사라진 영주를 찾기 위해 글렌가일 성으로 들어간 브라운 신부의 일행이 여기저기 굴러다니는 세팅되지 않은 보석들과 촛대없는 한 무더기의 양초들 그리고 가루째 쌓여있는 코담배 가루들, 찢겨져나간 성화들 등등의 성안의 기이한 현장을 보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넷째 단편 '아폴로의 눈'에서는 이단 종교에 빠져버린 한 여자의 미스터리한 추락사를 다룬다. 그녀는 누군가에 의해 엘리베이터 통로로 추락했는데 그 시간 모두의 알리바이가 입증되어 그녀는 거기 혼자 있었다는 게 밝혀진다. 하지만 자살은 아니다. 그럼 누가 대체 어떻게 한 것일까? 다섯째 단편은 '이르수 박사의 결투'는 공개적으로 이르수 박사에게 결투를 요청한 단단한 체구의 사나이가 결투 하루 전 날 미스터리하게 사라져버린 사건을 다룬다. 여기서 두 개의 단편은 사실 그 사건의 신비로움 보다 오히려 해결 방법 때문에 보르헤스의 주목을 끈 것이다. 그건 바로 '이상한 발소리'와 '이르수 박사의 결투'다. 이 정도의 차이는 있다고 해도 분명 이 단편집을 통해 우리는 보르헤스가 주목했던 체스터튼의 '사건의 초현실적인 특성'이 어떤 것인지 충분히 맛볼 수 있다. 

 앞서 체스터튼과 보르헤스의 비교를 들면서 체스터튼의 특징은 그러한 이성적으로는 얼른 파악하기 힘든 초현실적인 사건들을 브라운 신부의 기지로 이성적으로 해명하는 것에 있다고 말했다. 그대로 이 모든 사건들은 브라운 신부의 탁월한 추리로 다 파헤쳐지는데 그 단서가 되는 것들이 아주 소소한 것들이라 특히 주목을 끈다. 이러한 점이 분명히 드러나는 단편이 바로 '이상한 발소리'이다. 이 단편은 호텔에 우연히 쓰러져 사경을 헤메는 종업원을 위해 불려온 브라운 신부가 그에 대한 보고서를 쓰다가 우연히 바깥에서 듣게된 발소리로 사건의 전모를 파악해 나가는 이야기이다. 발소리 하나 만으로 사건의 전모를 파악해 나간다고 하니 얼른 해리 캐멀먼의 '9마일은 너무 멀다'라는 단편이 떠오른다. 해리 캐멀먼의 그 단편 역시 우연히 듣게 된, 제목이기도 한 '9마일은 너무 멀다'라는 한 문장만으로 벌어진 사건의 전모를 파악해 나간다. 이처럼 하나의 작은 단서가 큰 사건을 해결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은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의 유기적인 질서 속에 움직인다는 뉴튼식의 물리학적 세계관이 짙게 투영된 결과이겠지만 체스터튼이라면 얘기가 좀 다르다. 그에겐 다른 이유가 있다. 그건 바로 보르헤스가 서문에서도 말했듯이, 체스터튼이 무엇보다 '사물에 대해서 두려움을 느끼는 비밀스러운 사람(P. 7)'이었기 때문이다. 

 사물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은 아무래도 조그만 사물의 변화에도 민감할 수 밖에 없다. 그들의 예민한 감각은 보통 사람들 이상으로 주위의 사물들을 파악할 것이다. 브라운 신부의 해결 방식이 아주 사소한 단서로 시작된다는 것은 바로 그러한 체스터튼의 개인적 자질이 반영된 결과였다. 그리고 이 사물에 대한 예민한 감각은 그야말로 '혼돈 속을 정처없이 유랑하면서도 오로지 진실 추구의 열정으로 끝까지 걸음을 계속하는 탐색 과정속의 인간'을 자신의 소설 속 원형으로 삼았던 보르헤스의 주목을 끌 수 밖에 없었다. 출구를 찾아 미로를 헤매는 사람은 아무래도 자기가 지금 있는 그 곳의 주위 사물들이 어떠한 상태인지 예민하게 파악할 수 밖에 없을테니까 말이다. 그는 자기가 지금 서 있는 이 곳이 예전에 한 번 온 곳은 아닌지를 알기 위해 아주 미세한 부분까지도 관찰하고 대조할 것이다. 그처럼 주위 사물에 대한 예민한 감각은 '탐색 과정으로서의 문학'에 찬착하는 보르헤스에게 있어 하나의 주요한 방법이 된다. 결국 이것은 무수한 텍스트... 원전이 존재하지 않는 허구의 텍스트들일지라도 세심하게 파헤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의 소설들은 글들에 관한 글들이다. 그것은 그가 바라보는 세상이 그의 세계관을 특징짓는 말이기도 한 '바벨의 도서관' 처럼 오로지 '글'로만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보르헤스가 늘 가까이 하고 애착을 가졌던 체스터튼의 단편들 중에서 그가 특별히 고른 단편집 '아폴로의 눈'은 이렇게 보르헤스가 체스터튼에게 어떤 영향을 받았고 그것을 자신의 작품에서 어떻게 독자적으로 살려내었는지 살펴볼 수 있게 하는 유익한 시간을 갖게 한다. 체스터튼의 '브라운 신부' 단편들도 매력적이지만 보르헤스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관심있게 읽어볼 가치가 있는 사랑스러운 단편집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무덤의 침묵 블랙 캣(Black Cat) 11
아날두르 인드리다손 지음, 이미정 옮김 / 영림카디널 / 2006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아이슬란드... 

  이 책을 읽기전 '그래, 그런 나라도 있었지...'하는 생각을 했었다. 미국인들이 주로 휴가를 즐기는 나라중의 하나로 면적은 우리나라와 비슷한데, 인구는 30만명 정도 밖에 안된다. 

                       혹시 위치를 모르실 분들을 위해 지도를 펼쳐보자면 바로 여기에 있다. 

겨우 30만명이 조금 넘는 사람이 사는 나라의 범죄 소설이라...별다른 사건이 있을가 싶었다. 그런데 아마 나만 그런 생각을 한 것은 아닌 것 같다. 작가가 영국 '가디언지'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는 걸 보면... (인드리다손 소개할 때 흔히 인용되는 말이지만 다시 인용해 본다.)

 처음에는 아이슬란드에서 아무 일도 안 일어나기 때문에 쓸 소재가 없을 거란 얘기를 많이 들었다. 이 곳 사람들은 누구를 쏴 죽이거나 하지는 않는다. 여기는 LA가 아니니까. 하지만 글을 쓸 소재는 풍부하다는 게 밝혀졌다. 사람들은 범죄소설의 소재가 단순히 범죄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걸 모른다

 마지막 말이 가슴에 울렸다. 범죄소설의 소재가 단순히 범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라는 말에... 그래서 '저주받은 피'를 읽었다. 그런데 아뿔사! 나는 '저주받은 피'의 첫장을 넘긴 그 날, '저주받은 피' '무덤의 침묵' '목소리'까지 지금까지 우리나라에 나온 인드리다손의 책들을 한걸음에 모두 읽고 말았다. 아니, 읽을 수 밖에 없었다. 인드리다손의 소설들은 마치 나를 범죄 소설의 새로운 대륙으로 인도하고 있는 것 같았으니까! 인드리다손의 말 그대로였다. 범죄소설의 소재는 단순히 범죄에 국한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소설을 읽는 우리들 역시 범죄의 해결에서 오는 쾌감만을 찾는 건 아닐 것이다. 장르를 불문하고 문학을 읽는 이유는 단 한 가지. 문학을 통해 얻는 정신적 고양감 때문이 아닐까 한다. 그건 단순한 쾌락과는 다르고 고양되는 이유 또한 참 많이 다양하지만 분명한 건, 문학이 우리에게 그것을 준다는 것이다. 문학은 읽는 자를 보다 더 높은 차원으로 올려준다. 우리는 거기서 존재의 이유나 삶의 의미들을 스스로 체득하거나 아니면 정말 절실했던 위안들을 받을 수 있다. 우리가 문학에 고귀한 위치를 허락하는 건 그 때문이다. 그런데 장르 문학은 오로지 쾌감만 전해준다고 순수 문학은 늘 비웃곤 했다. '단순한 트릭 풀기. 범인 찾기가 뭐 그리 대수냐고!' 순수문학은 장르문학들을 질타했다. 어른들은 그렇게 장르문학에 빠진 아이들을 걱정했고 늘 사회문제적 범죄가 있을 때마다 그런 문학이 영혼들을 병들게 한다고 떠들었다. 고급문학과 저급문학으로 나눠 우월과 저열로 평가하는 건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아도르노가 자주 하던 것이었지만 그리고 뒤이은 포스트모더니즘으로 그런 차별이 부당하다며 비난도 많이 받았지만 (더구나 보르헤스는 탐정소설적 기법을 자신의 가장 중요한 소설 기법으로까지 삼고 있지 않은가!) 어느새 나도 그런 것에 길들여져 버렸는지 그만 장르문학을 읽을 때는 그런 것을 찾지 않게 되고 말았다. 그러다, 인드리다손의 책들을 만났다. 그저 흔한 범죄소설 정도로만 생각했었는데, 이렇게 한동안 그 여운에서 헤어나오지 못할 만큼 묵직한 정서적 충격을 받을 줄은 정말 예상 못했었다. 그래서 나는 마치 신대륙을 발견한듯한 기분이었다. '그래, 범죄소설도 이런 것이 가능하구나, 가능했어!'라고 몇 번을 감탄했는지... 

 인드리다손의 소설들은 앞서 순수문학이 장르문학에 행했던 비난에 대한 제대로 된 공박이 될 것이다. 인드리다손의 소설들은 조이스 캐롤 오츠의 소설과 그 격을 같이 한다. 만일 당신이 '멀베이니 가족'이나 '사토장이의 딸'을 읽고 '이게 문학이야!'라고 했다면 그와 똑같이 인드리다손의 '무덤의 침묵'을 읽고 외쳐될 게 틀림없다. 그만큼 인드리다손의 소설들은 장르성을 초월하여 순수 문학적 가치로도 인정받을 자격이 충분히 있는 소설이다. 

 인드리다손의 소설을 읽을 때 주의할 점이 있다. 그것은 발간 순서대로 꼭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나라에 발간된 책을 중심으로 말하자면, 반드시 저주받은 피, 무덤의 침묵, 목소리의 순서대로 읽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 모든 소설은 주인공인 수사관 에를렌두르의 자아의 성장 과정과 아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프랑스 감독 프랑수아 트뤼포가 만든 바 있었던 '앙트완 두아넬' 연작과도 같기 때문이다. '앙트완 두아넬' 연작은 트뤼포가 앙트완 두아넬이 실제 성장하는 과정에 맞추어 연속적으로 만든 영화들을 뜻한다. 데뷔작이기도 한 '400번의 구타'에서의 앙트완 두아넬이 청년이 되고 어른이 될 때마다 트뤼포는 그를 주인공으로 영화를 만들었고 각 나이대마다 가장 중요했을 삶의 모습들을 거기에 담았다. 이처럼 인드리다손의 소설들도 모두 에를렌두르 연작이라 할 만하다. 이 소설들은 한 마디로 정확히 어떤 한 시기 마다 에를렌두르에게 있어 가장 절실했던 물음들의 대답이라 할 만하다. 

 소설마다 우리의 주인공 에를렌두르는 언제나 고뇌에 빠진다. 그건 사건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딸 에바 때문이다. 그는 어릴 때 일어났던 사건 때문에 늘 한 겨울의 영혼을 가진 사람이다. 그의 내면엔 오로지 그 사건이 일어났을 때 처럼 가득 휘몰아치는 눈보라로 가득하다. 그렇게 그는 자신의 고통이 너무 컸던 나머지 타인을 받아들일 줄 몰랐다. 그래서 결혼은 불행했고 결국 이혼으로 막을 내렸다. 그 불행한 결혼에서 태어난 아이들이 둘 있었다. 애초부터 타인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에를렌두르는 아내 뿐만이 아니라 자식들과도 소원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아이들은 상처를 받았고 끝내는 자신의 인생을 망쳐버리는데까지 이르렀다. 에를렌두르는 에바가 그렇게 마약중독자에다 구제할 길 없는 실패한 인생을 사는 건 다 자기 책임이라고 느낀다. 하지만 그는 얼어붙은 영혼으로 인해 도대체 자기가 에바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른다. 에바에게 아버지로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에를렌두르에겐 그것이 늘 고민이다. 에바가 그저 평범한 인생으로 살아주었으면 좋으련만 저렇게 엉망인 삶을 살고있으니 에를렌두르의 고민이 깊어지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소설은 각 시기마다의 에를렌두르의 그 고민과 함께 한다. 

 그렇게 처음 작품 '저주받은 피'는 에바가 자기랑 같이 지내게 되고 거기다 아기까지 임신함으로서 새삼 깨닫게되는 아버지라는 존재의 의미와 아버지로서의 자각에 대응하는 작품이다. 두번째 이 소설 '무덤의 침묵'은 그 자각에서 이어지는 그러니까 아버지로서 가족에게 어떻게 행해야 하는지 그 '마음가짐'에 대한 대응이다. 마지막으로 '목소리' 역시 '무덤의 침묵'과 이어지는 이야기로 끝까지 가족을 지켜간다는 것이 무엇인지 체득하는 과정이다. 간단히 말해, '저주받은 피'가 아버지로서의 인식, 다시 말해 칸트식으로 해서 '순수이성비판'에 해당한다면, '무덤의 침묵'과 '목소리'는 아버지로서 마땅히 해야 할 도리, 그러니까 칸트식으로는 '실천이성비판'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겠다. 칸트의 3대 비판서 중 마지막 비판서, '판단력 비판'에 해당하는 작품 역시 나왔을지 모르지만 애석하게도 한국에선 더이상 인드리다손의 작품이 발간되지 않는다고 하니 확인해 볼 방법은 없을 것 같다. 

   '무덤의 침묵' 영어판 표지

'무덤의 침묵' 시작은 이렇다. 우연히 발견된 뼈 하나로 인해 공사장에서 아주 오래된 유골이 드러나게 되고 에를렌두르 수사반장은 이 유골을 조사하는 임무를 맡는다. 유골의 주인이 누구이고 어떻게 해서 그렇게 묻혀있는가를 밝혀내는 일이다. 그런데 유골이 드러남과 동시에 그는 딸 에바로 부터 제발 도와달라는 전화를 받는다. 

 이렇게 유골의 드러남과 도움을 요청하는 에바의 호소가 동시에 일어난다는 것은 에를렌두르에게 있어 두 사건이 전혀 별개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이 두 사건이 지금 에를렌두르에게 있어 가장 절박한 고민 즉, 에를렌두르가 앞으로 에바에게 어떻게 해야할지에 대한 나름의 성찰적 과정이 되리라는 것의 암시이다. 그는 아직도 에바를 대하는 게 서투르기 그지없을 뿐만 아니라 아버지라는 인식은 가졌지만 과연 그 아버지로서 어떻게 하는 것이 올바른 것인지 갈피도 못 잡고 있기 때문이다. 유골의 부름은 바로 그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이제 시작되었음을 뜻한다. 

 인드리다손의 소설 답게 이 유골 또한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것이다. '저주받은 피'에서 처럼 아주 오랜 세월 동안 묻혀져 있던 기억이 갑작스레 현실에 출현하는 것이다. '저주받은 피'에서는 그것이 오래전에 저지른 죄에 대한 처벌로 나타났다. 하지만 이 소설 '무덤의 침묵'에서는 과거의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게 만드려는 일종의 의지로 나타난다. 그래서인지 인드리다손은 전작 '저주받은 피'에서는 그나마 느슨하게라도 유지되고 있던 미스터리로서의 성격을 과감히 포기하고 처음부터 그 유골의 얘기를 병행해 나간다.

 때문에, 이 소설엔 과거와 현재라는 두 개의 시간이 존재한다. 유골에 의해 시작된 수사과정으로서의 현재와 그 유골이 간직한 기억이라는 과거이다. 

  유골이 간직한 기억은 고통스럽다. 여기엔 아주 오래도록 남편에게 구타를 비롯한 온갖 학대를 받아왔던 한 여자의 고통이 각인되어 있다. 그녀는 남편으로 부터 벗어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 했으나 결국 수포로 돌아가고 남편은 이제 그녀가 조금이라도 반항하면 자식들을 죽여버릴 것이라 협박한다. 그래서 그녀는 모든 저항을 포기하고 어떠한 남편의 학대도 묵묵히 참아낸다. 오로지 자기 자식들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서... 

 한편, 병행되는 현재의 시간은 에를렌두르를 중심으로 움직인다. 그는 유골이 누구이며 어떻게 거기에 묻혀있는가를 파헤치는 것과 동시에 에바도 보살펴야한다. 유골이 나타남과 동시에 에바가 에를렌두르에게 도움을 호소해왔기 때문이다. 에바를 겨우 찾아내었으나 임신중이었던 에바는 다시 마약을 복용하는 바람에 유산을 하고 그만 의식불명의 상태에 빠져버린다. 깨어나지 못하는 참혹한 상태의 에바 앞에서 에를렌두르는 그녀를 그렇게 만든 게 바로 자기 책임이라는 것을 비통하게 자각한다. 

 그런데 그 자각은 에를렌두르가 유골이 환기시킨 과거 속의 그녀가 아니라 바로 그녀를 학대한 남편과 별 반 다르지 않다라는 사실의 확인이다. 인드리다손은 그렇게 그녀를 마구잡이로 때리고 학대했던 그리무르와 에를렌두르가 사실은 같은 존재임을 바로 그리무르의 과거를 통해 드러낸다. 에를렌두르가 가족들에게 소원했던 이유는 어린 시절 눈보라 속에서 동생을 끝까지 지켜주지 못했던 죄책감 때문이었다. 그 죄책감은 타인을 자신의 내부로 들이는 것을 거부했고 그는 그것으로 동생을 포기한 죗값을 받는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자신을 벌하기 위해 했던 행동들은 오히려 더 큰 비극만을 낳고 말았다. 자신의 자식들이 모두 엉망인 인생을 살도록 만들어버렸기 때문이다. 특히나 그토록 원하던 아이마저 잃고 의식불명에 빠져버린 에바의 존재는 그에게 현재의 자신이 얼마나 추악한지 바라보게 만드는 거울과도 같다. 그가 에바를 바라볼 때 마다 비쳐지는 건 자신이 결국은 그리무르였구나 하는 뼈아픈 자각 뿐이다. 

 그리무르도 그랬다. 그가 그의 아내와 가족을 그토록 학대했던 이유는 그 역시 어린시절 그런 학대를 받고 자라났기 때문이었다. 그는 어릴 때 입양되었는데 그를 거둬들였던 부부는 그리 좋은 부부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는 가족이란 게 어떤 것인가를 그들의 학대를 통해 배웠다. 그 외 다른 것으로는 가족이란 걸 느껴보지 못했기에 그가 가족을 그렇게 학대한 것은 어쩌면 그가 아는 전부라서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그렇게 그는 과거의 상처로 괴물이 되어버렸다. 에를렌두르가  과거의 상처로 가정을 져버렸듯이... 

 과거의 상처로 빠져나오지 못한 자들로서 그리무르와 에를렌두르는 함께 서 있다. 하지만 에를렌두르는 과거속의 자신의 자식들을 지키기 위해 아무리 무서운 학대도 감내해야 했던 한 여자, 어머니의 존재를 알게된다. 그녀 역시 과거의 상처를 간직한 자였고, 현재 역시 어마어마한 고통을 당하고 있으나 그녀는 단 한번도 자식들을 포기하지 않았다. 미래 역시 전혀 희망이 없는데도 그녀는 오로지 자기 자식들을 지키는 것에 온 삶을 걸었다. 그녀 인생에 그녀는 아예 없었다. 오로지 자식들의 생명을 지키는 것. 그리무르의 폭력에서 아이들을 구하는 것 그것이 전부였다. 

 유골이 보여주는 과거의 존재는 이제 에를렌두르에게 있어 하나의 해답이 된다. 에를렌두르도 그녀처럼 에바를 끝까지 지켜줘야 한다는 해답이다. 그의 과거의 상처가 어떤 것이든 상관없이 지금 현재 그의 눈 앞에 도움을 전적으로 의지해 오고 있는 에바를 위해 헌신하라는 것이 바로 유골이 환기시킨 과거의 명령이었다. 소설의 마지막에 에를렌두르는 첫째 딸 미켈리나에게 그녀 어머니의 이름을 묻는다. 그녀의 이름을 묻는다는 것은 에를렌두르가 바로 그 명령을 따르겠다는 결심의 표출이기도 하다. 이것을 환기시키기라도 하는 것 처럼 그 이름을 듣게되는 순간 의식을 잃었던 에바가 깨어난다.

 소설 속에서 단 한번도 언급되지 않았던 그 이름은 소설을 내내 읽어가던 독자들에게 까지 큰 감동을 준다. 그렇게 이름 하나 없이 내내 자신이 아니라 타인을 위해서 살았던, 제목 그대로 '무덤의 침묵' 처럼 자신의 인생에 대해 그 무엇하나 주장하지 않고 오로지 타인을 지켜주기 위해 스스로 그림자가 되기로 작정한 그 영혼이 마치 처음으로 그 이름을 통해 존재를 드러내는 것 같은 기분에... 

  장 지오노의 '나무를 심는 사람'이 한 영혼이 얼마나 위대한 일을 할 수 있는지 보여줬던 것 처럼 인드리다손의 '무덤의 침묵'도 그만큼 영혼의 고결하고도 위대한 희생을 보여주고 있다. 에를렌두르는 여기서 그가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해답을 찾는다. 아니, 사실은 우리 모두가 다시금 내가 속한 가족에 대해 생각해 보고 내가 그 가족들에게 어떻게 해야 할 지에 대한 해답을 찾은 것이라 해야 할 것이다.  

 돌이켜 생각하면, 유골의 신원을 몰랐을 때 수사반이 거기에 붙인 별명이 흥미롭다. 처음 발견된 장소 때문에 붙여진 별명으로 그것은 바로 '밀레니엄 맨'이었다. 밀레니엄은 지나간 천년의 끝이자 새로운 천년의 시작을 뜻하기도 한다. 과거의 고통을 딛고 새로운 희망을 시작하는 에를렌두르와 혹 어쩌면 우리들 모두에게도 너무 잘 어울리는 이름이 아닌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신데렐라의 함정 동서 미스터리 북스 119
세바스티앙 자프리조 지음, 지정숙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9월
평점 :
품절


 '존 말코비치 되기'의 스파이크 존즈가 감독하고 역시 같은 영화의 각본가이자 '이터널 션사인'의 각본가로도 유명한 찰리 카우프만이 함께 만들었던 '어댑테이션' 이란 영화가 있다. 거기서 분명 찰리 카우프만 자신의 모습으로 보이는 영화 시나리오 작가를 꿈꾸는 동생 니콜라스 케이지가 자신에게 기막힌 아이디어가 있다면서 형에게 이런 얘기를 하는 장면이 나온다. 

 "일단 이건 스릴러인데, 사건이 일어나면 형사가 범죄자를 쫓지. 그런데 결국 형사와 범죄자가 동일 인물이라는 게 밝혀져. 형사는 사실 자신을 고발하기 위해 쫓고 있었던 거지..." 라는.

이 장면을 보고 있으면 슬그머니 그 초짜 시나리오 지망생인 동생에게 이렇게 비웃고 싶어진다. 

 "이봐요, 몽상가 양반. 꿈도 야무지시군. 겨우 그 정도를 가지고 아이디어라고 내밀다니. 당신보다 훨씬 이전에 한 프랑스 작가는 범죄자와 탐정 뿐만이 아니라 증인과 피해자 역할까지 모두 한 사람이 하는, 그야말로 1인 4역이라는 전무후무한 미스테리 소설을 이미 써 버렸단 말입니다." 하고. 

1인 4역? 

 범죄자와 형사 뿐만 아니라 증인과 피해자까지 모두 한 사람일 수 있는 게 과연 가능할까?  나도 처음엔 믿지 않았다. '뭔가 말도 안되는 트릭을 믿으라고 강요하겠지.' 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가능했다. 별다른 트릭도 없었다. 흔해 빠진 기억상실증 그게 다였다. 그런데도 소설이 끝날 때까지 흥미진진. 도대체 결말이 어떻게 될 지 궁금해서 페이지 넘기기를 그만두기가 어려웠다. 이게 가능할까? 오로지 한 인물에만 집중해서, 오로지 플롯의 기교로 독자를 작품의 세계에 가둬두는 게 가능할까? 그런데 가능했다는 거다. 놀라웠다. 

 혹자는 '기억상실증' 이라는 아주 편리한 방법을 썼다고, 트릭이 너무 진부하다고 혹평을 하기도했다. 비판 받았던 대로다. 이 소설은 아주 전형적인 트릭을 쓴다. 하지만 아무리 망가진 붓이라도 오언 장승업의 손에 들어가면 걸작을 그려내듯이, 아무리 전형적이고 진부한 트릭이라도 작가가 어떻게 능수능란하게 플롯을 엮어가느냐에 따라 놀라운 효과를 발휘하게 마련이다. 그러니 진부한 트릭이라는 것은 사실 이 소설에서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뻔한 트릭을 가지고도 무릎을 치게 만드는 플롯의 구성, 그리고 그것을 엮어내는 작가의 역량이 그것을 넘치도록 보완해주고 있기 때문에. 

 미스터리 소설에서 트릭은 중요하다. 아무래도 기발한 트릭은 독자들의 호기심을 자아내고 그 궁금증을 풀기 위해 소설을 끝까지 읽도록 만드는 동력이 된다. 그럼, 미스터리 소설에 있어서 트릭과 플롯은 어떤 관계를 가지는 것일까? 

 '트릭'이라는 것은 데리다가 말한 일종의 PARERGON 같은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PARERGON은 '장식'이란 의미로 데리다에 따르면 '작품'을 의미하는 ERGON에서 보자면 부차적인 것에 불과하다고 한다. (물론, 데리다는 장식을 부수적인 것으로 보는 서열의 매김이 본질 우위에 젖어있던 희랍 철학 이래의 부산물로 극복해야 한다고 하면서 오히려 '장식' 자체에 독자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있지만...)

 그렇게 미스터리 소설에서 만큼은, 트릭은 어디까지나 '장식적인 것'으로 아무래도 탄탄한 플롯이 뒷받침 되지 않는다면 어딘가 밋밋하고 앙꼬 없는 붕어빵 처럼 심심해져 버릴게 분명하다. 물론 내 개인적인 견해이지만. 트릭은 역시, 장식이 그 바탕이 되는 작품과 온전히 조화를 이루어야만 그 빛을 발하는 것처럼, 그렇게 작품의 주요한 뼈대가 되는 플롯과 유기적으로 조화를 이루어야만 진정한 빛을 발할 수 있는 것 같다. 뭐, 이런 내 생각조차 데리다는 유기체적 사고의 독단에 빠져있어서 그런거라고 한 소리 하겠지만서두... 

 물론, 미스터리 소설은 탁월한 트릭이 전부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트릭이 훌륭하면 플롯의 허술함이 어느정도 상쇄된다고 말이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물론 훌륭한 트릭도 중요하다. 하지만 아무리 훌륭한 트릭이라도 플롯의 허술함을 보완해 줄 수 없지않을까 싶다. 아니, 애초에 트릭이 '훌륭함'을 느끼려면 플롯이 탄탄히 바쳐주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 아닐까? 그러니까 진짜 문제는 트릭이 플롯에서 얼마나 적재적소에 있냐는 것이리라. 트릭이 자기 자리를 잘 차지하고 있을 때, 그렇게 장식이 작품에서 온전히 있어야 할 자리에 있을 때, 양쪽 모두가 더욱 더 빛을 발하는 일종의 플레시보 효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제 아무리 진부한 트릭이라도 플롯이 훌륭하면 문제가 되지 않지만 거꾸로라면 아무리 기발한 트릭도 허술한 플롯 탓에 원했던 효과를 독자에게 가져다주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조금은 급작스럽게, 트릭과 플롯의 관계를 말하는 것은 당신이 이 소설을 읽어야 하는 이유를 말하기 위함이다. 당신이 만일 미스터리 소설을 쓰는 것에 관심이 있다면, 아니 창작의 열정은 없다고 하더라도 '내가 왜 미스터리 장르물을 좋아하는가 혹은 매혹되는가?'에 대한 그 이유를 조금이라도 알고 싶다면 당장 이 소설을 읽는 것이 좋다. 

 탁월한 플롯이 얼마나 작품을 놀랍게 만드는지 확인할 수 있는 대표적인 작품이니까! 

 이 작품에 대해서는 단지 이 말을 하는 것 만으로도 충분하다. 

  자프리조의 '신데렐라의 함정' 불어판 표지. 

 하지만 미안하게도 당신은 이 책의 탁월함을 제대로 느끼지 못할 지도 모른다. 

그것은 번역 때문이다. 아시다시피 동서 미스터리 문고는 70년대 발간되었던 그대로 지금 발간되고 있기 때문에 시간적 간격에서 오는 어쩔 수 없는 차이로 인해 어색한 문장들이 많다. 거기다 일본어 중역이기 때문에 우리말 같지 않은 표현들이 이 소설의 매력을 맛보는 데 더욱 더 훼방을 놓는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이 책 후반에 실린 자프리조의 데뷔작이라고 할 수 있는 '살인급행 침대열차'이다. 이 소설 역시 꽤 매력적인 소설이지만 '신데렐라의 함정' 보다 더 번역이 엉망인지라 그 매력을 제대로 발산하지 못하고 있다. 미스터리 소설에서는 특히 번역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현장 상황을 제대로 독자가 알 수 있어야 나름의 범인 추적도 가능해지니까 말이다.  미스터리 소설이 여타 다른 장르 문학과 차별되는 점은 작품 스스로가 독자를 단지 지켜보는 관객이 아니라 마치 같이 경주라도 벌이려는 것 처럼 적극적으로 작품에 참여시키는데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를테면 그것은 벨라스케스가 그림 '시녀들'에서 그 그림을 바라보는 관객의 시선을 상정하고 그렸던 것과 같다. 

 그런데, 번역이 엉망이면 독자는 현장을 제대로 파악하기가 어렵다. 거기다 탐문과 심문으로 이루어지는 이러한 장르의 특성상 엉망인 번역은 독자들에게 그 의미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해 결국 독자를 소설의 흐름에서 소외되도록 만든다. 그래서 결국 미스터리 소설을 쓰면서 작가가 의도한 것과 정반대의 결과를 낳고 만다. 독자가 적극적 참여자가 되기는 커녕 구경꾼 노릇 조차 제대로 못하고 마는 것이다. 이만큼, 미스터리 소설에서 번역은 정말 중요하다. 미스터리 장르를 일종의 스포츠로 인식하고 독자와 공정한 게임을 벌여야 한다고 생각했던 작가 녹스는, 독자와 공정하게 게임하기 위해서 작가가 쓰면서 지켜야 할 10가지 규칙을 마련한 바 있는데, 아무래도 번역을 통해 미스터리 작품을 읽을 수 밖에 없는 우리들은 여기에 한 가지 규칙을 더 집어넣을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즉, '정확하고 올바른 번역이라야 독자와의 공정한 게임을 보장한다'고 말이다. 

  '살인급행 침대열차' 영화판 포스터. 

 이렇게 '살인급행 침대열차'는 영화(1965년작으로 감독은 무려 영화 'Z'로 유명한 코스타 가브라스 이다)까지 만들어질 만큼 평가가 좋았던 작품이지만 지금의 번역으로서는 그 매력을 느끼기가 아주 힘들다. 특히 후반의 범죄자와의 심문 부분은 많은 부분이 엉성해서 범죄자가 어떻게 그리고 무슨 이유로 그러한 범죄를 저질렀는지 도통 알아먹을 수가 없다. 프랑스의 미스터리 소설들은 -조르주 심농이 대표적이지만 - 범죄자들 역시 투철한 개인적 신념을 그린 매력적인 캐릭터로 그려내는 경향이 있어서 캐릭터를 형성하는데 있어서도 꽤 공을 들이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 소설의 범죄자 역시 심농의 그런 경향 속에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역시나 제대로 의미조차 전달하지 못하는 번역 때문에 그 매력이 빛을 많이 잃고 말았다.

 모처럼 플롯의 정점에 있는 미스터리 소설을 만났는데, 번역 때문에 그걸 제대로 느낄 수 없다니 실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제발, 제대로 된 번역으로 다시 발간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이 리뷰는 그것을 호소하는 심정으로 쓰여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