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더킨트
니콜라이 그로츠니 지음, 최민우 옮김 / 다산책방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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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더킨트(Wunderkind)놀라운 아이'라는 뜻의 독일어로 우리나라로 치면 신동을 뜻한다. 모차르트가 어린 나이에 놀라운 그의 재능을 발휘했을 때 사람들은 이렇게 불렀다고 한다. 그 때부터 주로 예술적 방면의 신동들을 흔히들 '분더킨트'라고 부르는 게 관례가 되었다. 불가리아 출신의 소설가 니콜라이 그로츠니의 첫 장편 소설 제목이 바로 '분더킨트'다. 소설의 배경은 아직 사회주의가 무너지기 전, 80년대 말의 불가리아. 당연히 사회주의 국가다. 개인의 자유보다 사회에 대한 의무를 중요시여겼던 그 곳에서 그보다 더욱 규율과 엄격한 훈련을 강조하는 음악원에서 공부해야 했던 아이들이 주인공이다. 콘스탄틴, 이리나, 알렉산더, 바딤. 남들과 다른 재능으로 일찍 다른 궤도의 삶을 걸어야 했던 이들의 이야기.

 영화 '스파이더맨'에서 주인공 찰리 파커는 말한다.

 '재능은 축복이자 저주다.'라고. 과연 그 말 그대로 파커는 범죄와 맞서 세상을 구할 재능을 얻었지만 결국 그로 인해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야만 하는 저주를 받았다. 모난 돌이 정을 맞듯이 남들과 다르기에 짊어져야 하는 굴레.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선 그걸 '카인의 표지'라 부른다. 남들과 다르다는 그 표식은 외적으로는 타인들의 경탄을 받아 우쭐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질시로 인해 고독을 무릅쓰게 되기도 한다. 반면 내적으로는 끝없는 갈망을 낳는다. 이만한 재능이 있는데 어찌 남들처럼 살 수 있단 말인가? 그는 낮은 울타리 속에 안주하는 평범한 이들을 깔보며 자기에겐 그와 다른 삶이 허락되어 있다고 여긴다. 더 높이 날아오르려 애를 쓰고 그럴 힘 역시 자기에게 있다고 확신한다. 하지만 그 비상은 오로지 소수에게만 허락되고 대부분은 밀납으로 만든 날개가 되어 결국 이카루스처럼 추락하고 만다.


 무당벌레가 내게 경고한 적 있었다. 경주에서 제일 먼저 탈락하는 건 재능 있는 아이이고, 두 번째로 떠나는 건 야망 있는 아이라고. 오직 로봇 같은 아이만 끝까지 버틴다고. 그게 대부분의 피아노 음반이 견딜 수 없이 형편없는 이유라고. 재능 있는 동시에 야망에 넘칠 수는 없다고. (p. 58)

 천재에 대한 이카루스의 비유는 적절하다.

 이카루스의 비행은 어리석음의 활공이 아니다. 사실은 주체성의 확장이다. 그건 세상이 가해오는 중력을 벗어나려는 몸부림이다. 자신을 장악하려는 세계로부터 멀리 탈주하여 온전한 주체가 되려는 '도주선'. 하지만 거기에는 저주가 뒤따른다. 세계가 나눠 받던 책임을 이제 스스로 온전히 도맡아야 하기 때문이다. 사회라는 울타리가 더욱 크고 유혹적으로 보이는 때는 언제나 그 울타리의 바깥에 있을 때다. 지금까지는 사회라는 비행기 꼬리 날개에 가만히 앉아서 비행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순수하게 자신의 두 날개로만 움직여야 한다. 광활한 하늘의 자유가 몽땅 자신이 짊어져야 하는 책임이 되는 것이다. 이카루스의 비행은 필연적으로 아틀라스적 책임으로 향하게 된다. 스파이더맨은 언제나 현명하다. 위대한 힘엔 반드시 커다란 책임이 뒤따른다. 온전한 주체가 되게 만드는 왕관을 쓰려면 그 무게를 견뎌야 한다.

 쉽지가 않다. 너무 곧은 대나무는 쉬이 부러진다. 이카루스는 가장 높이 떠올랐을 때 추락한다. 한껏 뻗어나간 주체성은 때로 제 자신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꺽어질 수 있다. 사실은 아슬아슬한 줄타기인 것이다. 자유와 책임 사이. 주체화와 공존 사이의.

 '분더킨트'의 아이들은 이카루스의 후예들이다.

  독립적이고 진정한 자신이 되어 보려 했으나, 그걸 이루어줄 수 있는 자유를 꿈꿨으나 결국 좌절된 이들의 이야기다. 소설의 주 무대가 몰락 이전의 사회주의 국가가 된 이유도 그 때문이다. 천재가 상징하는 한껏 뻗어나가려는 주체성과 그걸 가로막는 사회의 대립을 선명하게 강조하기 위해서다. 소설은 첫 문장부터 이것을 암시한다.


 소피아(불가리아의 수도)의 하늘은 화강암이다.(p. 11)

 도시는 돌의 이미지를 가지고 음악원은 감옥의 이미지를 가진다. 화자 콘스탄틴은 자신이 거주하는 공간과 활동하는 삶에 대해 내내 그런 이미지의 단어들을 남발한다. 학교가 시키는 교육을 그저 잘 따라가는 아이들은 모두 멍청한 로봇들이고 자신은 '자유의 조건적 본성을 이해하는 예외적 지혜를 타고난 실험실 쥐'다. 자신을 둘러싼 세상과 그것을 지배하는 어른들에 대한 콘스탄틴의 어조는 꽤나 신랄하다.


 아무리 노력해도 어른들은 녹턴을 연주할 수 없다. 그들의 연주를 따라해 보라. 루바토, 말문이 막히는 화성 해결. 거짓된 좌절, 연출된 신랄함. 토악질이 나온다.(p. 70)

 이건 투쟁이다. 자신의 주체성을 확보하기 위해 끝없이 달려드는 사회라는 가시 덤불을 헤쳐나가는! 450페이지에 이르는 '분더킨트'의 여정은 그 기록이다.

 그런데 발터 벤야민은 정말로 존재를 자유롭게 하는 진리를 잠자는 숲 속의 미녀에 비유했다. 그는 언젠가 지인 게르숌 숄렘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우화 하나를 추신으로 덧붙였다. 그게 바로 잠자는 숲 속의 미녀 이야기였다. 미녀가 진리고 가시 덤불을 헤쳐나가는 왕자는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미녀는 잠에서 깨어나지 않는다. 진리는 그저 발견되기만을 기다리는 수동의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진리는 어디까지나 적극적인 구애의 순간 끝에라야 간신히 눈을 뜨는 존재다. 깊은 잠에 빠진 미녀를 알랑한 키스 정도로 깨울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그런 잠든 자를 깨울 때 우리는 어떻게 하나? 양 어깨를 잡고 마구 뒤흔들거나 때리기도 한다. 그렇다. 발터 벤야민은 말한다. 진리는 때려서 자기 말을 듣게 해야 하는 존재라고.

 진리가 하이데거가 말했듯 존재가 드러나는 틈이라면 결국 주체가 온전한 주체가 되기 위해서는 이 소설의 이카루스 후예들이 걸었듯이 투쟁말고는 답이 없다. 헤겔이 말했듯이 노예가 계속 주인으로 있으려면 항구적인 노동 밖에는 없는 것이다. 사르트르는 말했다. 날아가는 새에게 죽음은 언제 오는가? 바로 그 날개 짓을 멈출 때라고. 결국 소설에서 그들의 추락은 무엇 때문이었던가? 그 싸움을 스스로 멈춘 때가 아니었던가? 사랑을 멈춘 때가 아니었던가?

 콘스탄틴이 모든 희망을 잃고 무덤과도 같은 지하로 잠적했을 때조차 역사는 계속 움직이고 투쟁하고 있었다.

 그리고 결국 90년, 사회주의의 몰락이라는 순간은 찾아오고 만다. 그 마지막 장에서 콘스탄틴의 자유를 뜻하는 쇼팽 에튀드 C단조는 찬란히 울려퍼진다. 이 소설이 남들이 말하듯이 실패의 기록인지는 잘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내게만은 이 소설은 부단한 투쟁만이 스스로를 구원하는 길이라는 걸 보여준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이 소설 장의 구분이 그렇다. 이 소설은 음악가로 장을 구분하고 있다. 1장은 라흐마니노프, 2장은 쇼팽 이렇게.

 음악가마다 상징하는 것이 다르다. 어떤 음악가는 세상이 가하는 억압을, 또 어떤 음악가는 절망을 상징한다. 가장 많이 나오는 작곡가는 쇼팽인데 그는 콘스탄틴의 자유(세상과 싸워 획득한다는 의미에서)를 상징하고 있다. 그가 자주 연습하는 쇼팽의 에튀드란 그야말로 자기 주체성의 상징인 것이다. 차례를 보면 쇼팽이 참 많이 나옴을 알 수 있다. 그건 단순하게 표현하자면 콘스탄틴이 그 숱한 사회의 위협과 억압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싸움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 소설은 읽는 순간, 어느새 내게 상황을 핑계대지 말고 억압에 굴하지도 말며 시대가 아무리 절망을 주더라도 희망을 잃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하여 '분더킨트'란, 신동이 아니라 원래 뜻 그대로 놀라운 아이로 보였다. 자신의 주체성을 지키기 위해 끝까지 싸우는, 그러한 놀라운 아이. 콘스탄틴.

 한 가지 이 소설을 말하는 데 있어 빠뜨리지 말아야 할 게 있다.

 소설의 문장이다. 문장이 참 좋다. 작가 자신이 원래 피아니스트 출신이라서 그런걸까? 문장들이 꽤나 감각적이다. 참신하며 독특한 표현들의 오케스트라 할까. 어쩐지 아슈케나지의 월광 소나타를 듣는 것도 같다. 그가 연탄하는 음 하나하나가 청자에게 모두 선명한 울림으로 다가오듯 니콜라이 그로츠니의 문장들도 그랬던 것이다. 일요일 오후 기제킹이 연주하는 드뷔시의 프렐류드라고 해도 괜찮을 것 같다. 정작 콘스탄틴은 드뷔시 같은 인상주의파를 끔찍이도 싫어했지만.

 콘스탄틴은 원래 작가의 자화상이라고 한다. 피아니스트가 되기 위해 불가리아 음악원을 다닐 당시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인 것이다. 동구권이 몰락했을 때 그는 이제까지 배운 것을 모조리 포기하고 재즈를 배운다며 미국으로 떠났다고 한다. 버클리 음대에 들어가 졸업을 코 앞에 두었을 때 이번에는 느닷없이 티벳과 인도로 떠나버렸다. 그러다 지금은 작가가 되었다. 콘스탄틴처럼 작가도 한 자리에 머무르지 않고 계속 뻗어온 것이다. 영화 '아비정전'에 나오는 발없는 새처럼. 결코 머무르지 않고 자기만의 비상을 계속하면서.

 즉 소설의 지향과 삶의 지향이 일치하고 있는 것이다. '분더킨트'는 그런 새의 첫 노래이다.

 다음은 어떤 노래일지 자못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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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 도종환 시화선집
도종환 지음, 송필용 그림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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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밤이 늦었다.
요즘은 쉬이 잠들지 못한다. 무더위 때문이 아니다. 어떤 여파다. 한동안 오래도록 새벽까지 일을 했는데 그게 끝난 지가 얼마되지 않는 탓이다. 관성이라는 게 생활 리듬에도 적용되는 모양이다. 시차 부적응 처럼. 밤만큼 시를 위한 시간은 없다. 불면의 밤엔 더더욱 그러하다. 낭독하노라면 밤이 가져다 주는 특유의 고독도 어느 정도는 씻을 수 있다. 원래는 사람 목소리가 있으면 좋겠다 싶어 라디오를 틀어놓곤 했는데 이제는 내 목소리로 공간을 채운다. 그렇게 읽었다. 도종환의 시를.


 새로이 모습을 바꾸고 다시 찾아왔다. 도종환 시인의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시집이 아니라 시화집이다. 고등학교 때, 축제가 오면 나는 참 바빴다. 문학 동아리의 시화를 부탁받곤 했던 것이다. 이런 경우 흔히 전문으로 하는 가게에 맡기지만 그럴 경우 뻔한 그림이 나올 확률이 높아서 그게 싫은 아이들은 연줄을 이용해 내게 의뢰해왔던 것이다. 여기서 연줄이란 거창한 게 아니고 여자친구를 말한다. 여하튼. 시화란 쉬운 것 같으면서도 어렵다. 언어의 조탁만큼이나 어려운 것이 그림의 조탁이다. 언어는 홀로 샘솟아 무언가에 어울려야 하는 제약이 없지만 그림은 언어에 어울려야 하는 제약이 따른다. 맞지 않으면 거들어주려 태어난 그림이 오히려 방해가 될 뿐이니 시보다 고민이 더 들어간다. 때문에 나는 꼭 먼저 시를 달라 청했고 그림을 그리기 전까지 시가 준비되지 않으면 거절하고 그랬다. 시화집을 볼 때 그 수고를 더 칭찬해야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그림을 그린 사람이다. 그러므로 이 시화집을 읽고 마음에 들었다면 그림을 그린 이도 꼭 기억해 두자. 그의 이름은 송필용이다. 슬프게도 날개에 사진 하나 없다. 소개글도 실리지 않았다. 시가 다 끝난 마지막에 추신처럼 붙어 있다. 흑, 왠지 내가 담당한 것처럼 조금 가슴 아프다.

그런데 원래 시를 위해서 그려진 그림이 아닌 모양이다. 몰랐는데 더 나중으로 가니 시화의 도판이 나와 있었다. 제작 연도가 다 다른 걸 보니 그림은 그냥 독립된 작품으로 시와 어울리는 것으로 가져와 배치한 것 같다. 흠, 이러면 별로 억울할 것도 없겠다. 도종환의 시야 감히 내가 뭐라 할 게재가 못된다. 시야, 어차피 시흥의 발현이고 이성 보다는 감성의 산물이니 어디까지나 주관적 취향의 대상일 뿐, 객관적 판단의 대상은 아니니까. 내게 그만한 깜냥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한 번 입에 시어를 머금기 시작하면 오래도록 음미하게 된다는 것만 얘기해 두자. 몰랐는데, 도종환의 시는 참 막걸리를 많이 부르게 하더라. 삶이 신산하고 사랑은 속절없으며 이별의 그늘 또한 짙어서 그저 외롭게 버텨가야할 인생이라고 시가 노래하고 있어서일까? 읽다보면 한 탁배기 생각이 간절했다. 거기다 총각김치 잘 생긴 놈으로 하나 골라서 한 입 크게 배어물면 좋을 것 같다. 시를 읽으면 취하고 싶다. 아프고 힘드니 뭐니 해도 살만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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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치도록 가렵다 자음과모음 청소년문학 44
김선영 지음 / 자음과모음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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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군가의 삶이 가진 부피는 관심의 크기에 따라 다르게 보이기 마련이다.

 무심한 눈으로 보자면 그의 삶이란 그저 얇은 평면에 지나지 않는다. 관심을 가지면 가질수록 저마다의 폭과 깊이가 있음이 드러나게 된다. 누군가의 삶이 평면으로 보이느냐 아니면 입체로 보이느냐는 어디까지나 우리가 얼마나 그를 이해하기를 원하는가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부모에게 있어 아이의 삶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오로지 아이가 얼마나 공부를 잘 하는지 그것만 관심있는 학부모의 눈으로 보면 아이의 삶은 공부 하나 밖에는 없는 얇은 평면일 것이나 사람이 성품이 아니라 성적으로만 평가받는 이런 교육 환경 속에서 과연 제대로 버텨나갈 수 있을까 염려하는 부모의 눈으로 보면 아이들의 삶이 저마다 가진 상처와 통증 그리고 고민들로 켜켜이 쌓여진 입체란 걸 알게 될 것이다. 공교육이 무너지고 있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수업 환경은 나빠져만 가고 학교 폭력은 심해져만 간다. 어제와 오늘의 일도 아니다. 오랜 시간 곪을 대로 곪은 문제다. 모두가 문제라고 입을 모은다. 하지만 쉬이 해결 되지 않는다. 교육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전세계적으로도 범접할 수 없을만큼 지대한데도 그렇다. 왜 이럴까? 우리 주위에도, 언론 지상에도 잇달아 나타나는 오늘날 교육의 희생자와도 같은 아이들을 보면 어쩔 수없이 이런 의문이 떠오르게 된다. 어쩌면 이 역시도 정말은 아이들이 아니라 어른인 우리에게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닐까? 오컴의 면도날처럼 '학생은 그저 공부만 하면 되는 거지.'라며 공부말고 다른 건 아이의 삶에서 모조리 뭉텅 잘라내어 무시의 늪 아래로 던져버렸기에 말이다.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아이들의 신음은 우리가 다른 건 보지 못하는 청맹과니라서 그런 지도 모른다. 아이도 나와 똑같은 엄연한 사람이라는 것을 말이다. 직장에서 업무 성과가 부족하다며 닥달을 당할 때마다 시어머니로부터 집안일을 두고 이런저런 야단을 맞을 때마다 혹 이런 생각이 들었던 적은 없을까? '아니, 다 사정이 있어서 그런 건데. 결과만 가지고 이렇게 나무라다니! 내가 무슨 일만 하는 기계야?" 아이들도 그렇게 보고 있는 건 아닐까? 우리가 원망했던 직장 상사의 눈이나 시어머니의 눈과 똑같이 기계로만. 그럴 때, 나에게는 원망이 생겼다. 그런데 왜 아이들은 당연하게 받아들여 주기를 바라는 것일까?


 기계가 아닌 사람으로서 아이들이 처한 오늘의 현실은 참 고달프다. 우리나라 청소년들의 행복 지수가 OECD 국가 중 최고로 낮단다. 왜 그렇지 않겠는가? 주당 학습 시간이 49시간으로 세계 1위인데. OECD 평균보다 무려 15시간이나 많다. 기계처럼 공부만 해야 하는 시간이다. 놀 시간도 없고 한창 삶을 즐겨야 하는 나이인데 즐길 여유도 없다. 몸 속에는 아드레날린이 솟구치는데 하루의 거의 대부분을 앉아 있어야만 한다. 기계도 이 정도로 굴리면 잡음이 나고 고장나기 마련이다. 하물며 사람이 어찌 멀쩡할 수 있을 것인가?


 그들에게 통증은 당연하다. 하지만 우리들은 보지 않는다. 그들의 통증은 내가 얼마나 힘든지 좀 보아달라는 것인데 우리들은 쓸데없는 투정이나 이유없는 반항으로 치부하고 듣거나 헤아리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가렵다고, 가려워서 미치겠다고 하고 있는데 그저 가만히 팔짱을 낀 채 나와 상관없다는 듯 무심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과 같다. 좀 긁어달라고 내민 아이들의 등에 오히려 세게 등짝을 내리치기도 한다.


 그간 그러했던 어른인 우리들의 모습을 아프게 되새기게 만드는 책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김선영 작가의 세번째 소설, '미치도록 가렵다'이다.


 '미치도록 가렵다'는 한 학교의 '독서회'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이야기다. '독서회'라고는 하지만 책을 좋아하는 아이들이 모인 게 아니다. 학교에서 아무도 받아주지 않기에 오게 된 아이들이다. 그렇지 않아도 중학교에서 일하는 선생님으로부터 들은 말이 있다. 학교에서 잘 적응하지 못하고 마음에 상처가 있는 아이들이 도서관으로 자주 온다고. 달리 갈 데가 없기에 그렇다는 것이다. 수인이 맡게된 독서회의 아이들도 별 반 다르지 않다. 상처가 있고 자신의 통증을 누군가 봐주었으면 하는 아이들이다. 소설의 '독서회'는 허구가 아닌 것이다. 어쩌면 바로 우리 주위에 있는 학교에서 볼 수 있을지도 모르는 현실이다. 사서인 수인은 그 독서회를 자신이 맡고 있는 도서관에서 지도한다. 아이들과의 첫 인상은 과히 좋지 않았다. 아이들은 별 관심도 없어 수인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이고 쓸데없는 질문으로 방해하거나 비아냥으로 선생님인 수인을 얕보는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어쩌면 그리도 수인이 도서관에서 받은 첫인상과 닮았는 지. 이제 막 부임해온 수인이 처음 도서관을 보았을 때 받은 느낌은 이랬다.


 천장까지 닿은 서고가 눈앞을 막았다. 역시나 머리 위부터 짓누르는 위압감이 드는 배치였다. 알 수 없는 어떤 힘이 이미 도서관을 점령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 안에 서면 주눅이 들어 누구든 저절로 움츠러들 것만 같았다.(p. 24)


 숨막힐 듯한 버거움. 그것이 도서관이 수인에게 준 느낌이었다. 아이들도 그랬다. 그 속에서 수인은 이름대로 정말 갇혀 있는 수인(人) 같았다. 아니, 정말 수인(人) 이었다. 수인이 햇살이 잘 들어오지 않아 늘 어둑하기만 한 도서관 위치를 이전시켜 줄 것을 학교에 건의했을 때 학교 역시도 도서관과 마찬가지로 숨막히는 버거움으로 무장한 곳이었다는 걸 똑똑히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학교는 '사서 주제에'라는 말로 진지하게 내놓은 그녀의 의견을 가볍게 묵살한다. 괜한 파장을 일으키지 말라고 으름장도 놓는다. 동료 교사들은 행여 그 불똥이 자기에게 튈까봐 그녀를 따돌린다. 그렇게 격리되었고 그녀는 도서관에 갇혔다. '독서회' 아이들과 같은 처지가 된 것이다. 소설은 '독서회'에 온 아이들의 사연과 그들을 맡아 가르치는 수인의 사연을 병치하고 있는데 얼른 보아서는 드러나지 않는 이들 사연의 병렬은 사실 동병상련으로 나아가고 있다. 즉 수인의 처지가 아이들의 처지와 같게 되면서 처음에는 그저 자신의 목을 조르는 것만 같았던 아이들을 자신만큼이나 상처받고 고뇌하는 '한 사람'으로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그제서야 우리는 왜 작가가 하필이면 소설의 주 무대로 도서관을 택했는 지도 깨닫게 된다. 다름아닌, 아이들이란 존재는 한 권의 책과도 같다는 것을 말이다.


 아이들은 책이다. 저마다의 생각, 고민 그리고 아픔으로 빼곡히 들어찬 책. 도범이 계속 써 온 일기와도 같다. 소설에서 도범의 일기가 나오는 것은 이렇게 아이들이 한 권의 책과도 같다는 것을 은연 중에 드러내기 위해서이리라. 아이들은 어른들이 펼쳐서 자신의 내면을 읽어주기를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어른들은 무정하게도 펼쳐 읽으려 들지 않는다. 그저 표제만 쓱 보고는 '넌 이런 아이야' 단정지어 버린다. 도범이 그렇다. 다른 무엇도 아니고 범죄자를 연상시키는 '강도범'이란 이름 때문에 그만 문제아까지 되고만 도범. 도범은 과거의 자신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정말 힘겨운 노력을 하고 있으나 어른들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그저 피하거나 사건이 터지면 다짜고짜 범인으로 취급할 뿐이다. 지금 자기의 내면이 어떤지 들여다 보지도 않고 이름이라는 또 과거의 행적이라는 표제만 보고 낙인을 찍는 어른들에게서 도범은 수인과 똑같은 숨학히는 버거움을 느낀다. 그러한 어른들의 편견 안에서 도범도 수인(人)이다. 어두운 서가에 그저 꽂혀있기만 한 책만큼 갇힌 존재도 또 없으니.


 아이들을 책에다 비유하는 것은 도리어 우리들에게로 향하는 질타가 된다. 일본에서 건너온 '중2병'이란 말이 우리들 사이에서도 유행이다. 일본이나 우리나 그만큼 어른들이 지금의 청소년들을 참 이해하기 어렵다고 공감하고 있는 탓이다. 하지만 난 그 말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 말을 들으면 이런 의문부터 든다. 과연 우리들이 이해하려고 제대로 노력이나 했을까? 그저 이런 말로 이해하려는 노력을 쉽게 포기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오히려 그 책임은 아이들에게 전가시키고서 말이다. 그래서 싫다. 또한 아이들은 전혀 몰이해의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책이 몰이해의 존재로 있는 것은 오직 들춰보지 않았을 때 뿐이다. 책을 펼쳐서 읽으려들면 책은 언제라도 자신의 내면을 술술 내보이기 마련이다.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노력이 부족한 탓이지 아이들이 우리의 이해를 넘어서 있기 때문이 아니다. 아이들이 마음의 벽을 굳건히 한 것도 아니다. 사실, 아이들은 자신이 겪고 있는 통증을 누군가 먼저 봐주기를 바라고 있다. 겉모습이 아닌 속마음의 진실을. 통증은 견디기 힘들고 벗어나기 위해선 누군가 도와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통증은 가려움이다. 가려운 것은 참기 어렵다. 손이 닿지 않는 곳이 가려울 때는 누군가 대신 긁어줘야 비로소 벗어날 수 있다.  


 그 애들이 지금 올매나 가렵겄냐. 너한테 투정 부리는 겨. 가렵다고 크느라고 가려워 죽겄다고 투정부리는데 아무도 안 받아주고, 안 알아주고 가려워서 제 몸도 못 가눌 정도로 몸부림치는 놈들한티, 대체 왜 그러냐고 면박이나 주고, 꼼짝없이 가둬놓기만 하는데 어떻게 견딜 수 있겠냐. (..) 가려운 곳을 긁어주지는 못해도 네가 어디가 가렵구나, 그래서 가렵구나 알아주기라도 해야 하는 거 아녀? 너라도 알아봐줘야 하는 거 아녀?"(p. 216 ~217)


 도범이 수인에게 마음의 빗장을 푼 것은 수인이 이십년 동안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가슴에 품었던 어렸을 때 겪은 손가락 염증에 대한 이야기 때문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 혼자 있게 되자 한 번 이별을 겪은 수인은 자신이 잘못해서 또 엄마와 이별하게 될까봐 손가락이 아픈 것을 숨겼다. 참고 또 참았지만 갈수록 통증은 격해졌고 손가락마저 시퍼렇게 섞어 들어갔다. 결국 그것을 본 엄마가 급히 병원에 데려가 의사가 손가락을 째고 고름을 빼주어 통증에서 겨우 벗어날 수 있었다. 그 때, 의사는 엄마를 마구 야단쳤다.


 "어떻게 아이가 이렇게 되도록 둘 수 있었냐고, 애가 제대로 잠이나 잤겠느냐고.(p. 169)


 아이들은 혼자서 치유될 수 없다. 그들에게는 가려운 곳을 긁어줄 수 있는 어른들의 손이, 손가락이 아플 때 자신의 손을 부여잡고 병원에 데려갈 어른들의 손이 필요한 것이다. '스스로 알아서 잘 하겠지'하는 것은 그저 어른들이 자신의 책임을 방기하기 위한 변명에 불과하다. 수인의 엄마는 야단치는 의사 앞에서 죄인처럼 군다. 그동안 자신이 힘든 것만 생각하느라 딸에게 너무 무심했다는 자책 탓이다. 우리 역시도 반항하고 거칠게 나오는 아이들의 태도에 '중2병'이란 라벨을 붙일 것이 아니라 먼저 내가 그동안 그 마음을 제대로 헤아려 들지 않았음을 반성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이 소설은 그렇게 우리에게 아이들을 공부만을 위한 기계라는 평면이 아니라 힘겨워하고 상처받기도 쉬운 입체의 존재로 보도록 만든다. 부피도, 내용도 있는 한 권의 책으로 말이다. 그 책 표지는 들기에 그리 무겁지 않다. 내용이 모르는 외국어로 된 것도 아니다. 우리의 수고를 많이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저 그 통증의 언어들을 읽어만 준다면, 헤아리려는 노력을 보여주기만 한다면 어느새 아이들도 다가와 스스로 환부를 내미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수인이 자신이 겪은 일로 인해 먼저 다가가 아이들 마음의 책을 펼쳐 읽기 시작하자 아이들도 바로 화답하듯 수인을 받아들였던 것처럼.


 엉킨 실타래처럼 풀기 어려워만 보이는 오늘의 교육 현실. 의외로 해답은 찾기 쉬운 곳에 있지 않을까 싶다. 아이들이 한 권의 책처럼 저마다 폭과 깊이를 가진 인간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어른들이 먼저 나서서 그 내면을 읽으려 노력한다면 조금은 아이들의 통증과 그로부터 비롯되는 신음과 비명을 줄여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어른들의 노력이 먼저 필요하다. 그런 노력을 위한 동기 부여를 위해서라도 이 소설의 '도서관'을 방문할 필요는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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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한 배달 자음과모음 청소년문학 27
김선영 지음 / 자음과모음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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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면서 한번쯤 과거로 되돌아갈 수 있었으면 하고 바랐던 경우가 있으실 겁니다. 저는 정말 많이 그랬습니다. 인생이 초콜릿 상자와 같다는 말이있죠. 처음에 맛있는 것만 쏙쏙 골라 먹으면 나중엔 맛 없는 것만 남아있다고. 제 경우엔 그게 좀 빨랐던 것 같습니다. 아주 오래전부터 제 인생의 맛있는 것은 이미 다 먹어버렸다고 생각했으니까요. 아무리 둘러봐도 지금 제게 남아 있는 건 맛없는 것들 뿐. 그렇게 맛없는 것들을 매일 먹어야 한다면 연어처럼 시간을 거슬러 가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인지상정이 아닐까요? 솔직히 김선영 작가의 '특별한 배달'을 읽으면서 놀랐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여주인공 슬하가 완전 제 모습의 판박이였기 때문입니다. 슬하는 매일을 치열한 경쟁 속에서 지내야 하는 현재의 삶이 너무도 고달파서 늘 지금과는 다른 삶이 가능하다는 것을 믿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그런 것에 대한 책들을 정말 닥치는 대로 찾아 읽습니다. 거기엔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의 '미오 나의 미오'와 같은 판타지도 있고 미치오 가쿠가 쓴 '다차원 우주론인 평행우주'와 같은 책도 있습니다. 슬하는 그런 책들을 통해 늘 기면증을 일으키는 힘겨운 현실을 버텨 나갈 희망을 얻습니다. 하지만 슬하에게 그 희망이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냥 상상이 아니라 꼭 현실로 이루어지길 바랐을만큼 절박한 것이었습니다. 바로 그 절박함이 슬하로 하여금 그 어려운 물리학 책까지 들여다 보게 한 것이었습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현실이 마치 물 밖으로 나온 물고기가 된 마냥 질식할 정도로 갑갑하게 느껴질 때마다 지금과는 다른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과거로 정말 많이 돌아가고 싶었습니다. 슬하가 그 구멍에 가고 싶었던 마음 그대로 저 역시 과거로 돌아갈 수 있으면 지금의 현실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것이 가능하다고 말해주는 책을 저 역시 닥치는대로 찾아 읽었습니다. 슬하가 읽었던 '미오 나의 미오'와 미치오 가쿠의 '평행우주'는 저 역시 읽은 책이었습니다. 그렇게 슬하와 저는 같은 꿈을 꾸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슬하가 현실에서 느끼는 아픔 역시도 어떤지 잘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 만큼 저에게 이 소설 '특별한 배달'은 특별한 책이었습니다.


 

 등장 인물 하나하나가, 그들의 이야기 하나하나가 저에겐 그리 남 얘기 같지 않았습니다. 떠나간 엄마를 원망하고 서열화된 사회를 원망하며 스스로를 잉여인간이라 부르며 목적도, 소망도 없이 사는 태봉의 모습 또한 언젠가의 제 모습이었습니다. 현실이 주는 결핍이 너무도 크면 차라리 먼저 그 현실을 거부하는 것이 생존 방법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니까 이솝이야기에 나오는, 포도를 아무리해도 따지 못하자 저건 그냥 신포도일 뿐이야 하고 외면해 버리는 여우처럼 말이죠. 더 이상 결핍으로부터 상처받지 않기 위하여 아예 무시해버리는 것입니다. 태봉이 잉여인간으로 자처했던 것도 그런 것이었겠죠. 사실은 더욱 제대로 살고 싶다는 절박한 바람의 또 다른 표현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태봉은 남편이 투명인간으로 되어가는 것이 안타까워 자신이 먼저 사라져 버리겠다며 떠나간 엄마를 모순일 뿐이라며 이해하려고도 용서하려고도 하지 않지만 사실 삶에는 얼마든지 그런 모순이 있게 마련입니다. 노래 가사에 흔히 나오는 사랑하기에 헤어진다는 말처럼 말이죠. 엄마의 행동이 모순이라면 태봉 자신의 행동 역시도 모순 입니다. 모순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기에 생기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건 단순히 지금 우리가 가진 이해의 범주 바깥에 있을 뿐입니다. 우리의 경험이 쌓이고 지식이 넓어지면 그 모순은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태봉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슬하는 이해할 수 있듯이 말이죠. 태봉에게 엄마의 사라짐은 그가 삶을 바라보는 시각 자체를 바꾼 중대한 사건이었습니다. 태봉은 그 엄마의 사라짐으로 세상을 원망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종종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모순은 우리의 원망을 낳습니다. 여우의 포도에 대한 태도는 여기서도 나타납니다. 이해할 수 없음에서 오는 상처를 미연에 막기 위해 덮어놓고 부정하고 원망하는 것입니다. 슬하도 그랬습니다. 슬하도 태봉과 똑같이 사랑하는 한 존재의 사라짐이 세상을 보는 시각을 완전히 바꾸게 만드는 계기를 낳았습니다. 그 존재는 바로 동생 상하였습니다. 상하와 슬하는 입양된 아이였습니다. 슬하는 자신이 입양된 아이라는 것을 엄마가 미리 알렸기 때문에 원래부터 알고는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부모와 자식으로 맺어진 관계인 이상 이대로 내내 지속되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만 그런 생각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게 됩니다. 그게 바로 상하의 파양이었습니다. 상하가 엄마의 통제를 자꾸만 벗어나자 더 이상 엄마의 자식이 아니게 되어버린 것입니다. 슬하는 바로 거기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슬하는 엄마가 왜 승하를 버렸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한 번 자식으로 여기며 키우겠다고 입양을 했으면 끝까지 책임을 져야지 자기 뜻에 맞지 않는다고 쉽게 내버리는 것은 모순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엄마를 원망합니다. 자신에게 이해할 수 없는 행위로 자꾸만 불안하게 만들고 힘들게 하니까요. 그리고 자기 역시도 그 상하처럼 엄마의 기대를 채우지 못할 경우 떨어져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하여 엄마를 그렇게 만들어버린 사회마저 원망하게 됩니다. 엄마로 부터 버림받지 않으려면 늘 치열한 경쟁을 뚫어야 하는데 그게 쉽지가 않고 또 설령 했다고 한들 그걸 내내 지속하기란 정말 어려우니까요. 그렇게 태봉과 슬하는 사실 하나입니다. 태봉의 잉여인간 자처나 슬하의 다른 가능성 꿈꾸기는 그들이 가진 원망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슬하와 똑같이 과거로 되돌아가고픈 욕망을 무던히도 가졌던 저 역시 세상을 향한 원망의 굴절된 표현이었던 것이구요. 우리는 그렇게 늘 바깥을 원망합니다. 내가 아니라 나를 둘러싼 세계가 바뀌어야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언제까지나 우리는 태봉이 엄마가 찾아와 주기를 바라듯이, 슬하가 엄마와 세상이 바뀌길 바라듯이 원망에 대한 치유 역시 바깥으로 부터 와야 한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특별한 배달'은 바로 그러한 우리의 생각이 이제 달라져야 한다고 말해주는 책입니다.

 

 문제는 시야입니다. 생각해보면 원망 역시 모순과 마찬가지로 이해의 부족에서 생겨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원망 역시도 다만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범위의 바깥에 머물러 있을 뿐인 것이죠. 태봉이 엄마가 떠난 이유를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면 그의 삶은 많이 달라졌을 것입니다. 또한 슬하가 자신이 어떻게 엄마에게 입양되었는지 또 상하가 어쩌다 파양되었는지 그 내력을 제대로 알고 이해할 수있었다면 슬하의 삶 역시도 많이 달라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 모두 그것을 볼 수 없었고 그래서 그들은 그 나름의 방법으로 세상을 원망하며 스스로의 존재 가치 또한 떨어뜨리고 맙니다. 이것을 통해 소설은 분명히 보여줍니다. 어쩌면 우리가 가지는 바깥에 대한 원망은 바로 그 시야의 좁음 때문이 아닐까 하고 말이죠. 아마도 후반에 태봉 아버지의 일기나 슬하 입양에 대한 엄마의 고백, 그리고 상하 파양에 대한 한 수녀의 증언으로 밝혀지는 모든 진실들은 다름아니라 바로 이것을 선명하게 보여주기 위함일 것입니다. 그 때 태봉과 슬하는 분명히 깨닫습니다. 자신은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는 것을. 더하여 저도 충격을 받았습니다. 태봉과 슬하만큼이나 저 역시 세상을 다 안다고 자부하고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과연 제가 아는 것이 무엇일까요? 제가 볼 수 있는 것까지만 알 수 있을 뿐인데 말이죠. 이런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하루살이 앞에서 메뚜기가 내일이라는 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루 밖에 살지 못하는 하루살이는 메뚜기의 이야기를 그저 공상이라고만 여깁니다. 마찬가지로 메뚜기에게 곰은 사계절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하지만 여름 한 철 밖에는 살지 못하는 메뚜기는 무려 계절이 네 개나 있다는 것을 믿지 못합니다. 그들이 볼 수 있는 시야의 한계를 자신이 알 수 있는 절대라고 생각한 탓이죠. 저도 그렇습니다. 하루살이, 메뚜기와 별 반 다를 바 없습니다. 내게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고 그것만 가지고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안다고 자부하고 있으니까요. 그렇게 교만합니다. 사실 바로 이게 아닐까요? 우리가 가지는 원망은 어쩌면 우리가 너무 오만하기에 나오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저는 그래서 이 소설에 슬하가 '웜홀'이라 부르는 구멍과 같이 다소 판타지적 소재가 들어간 것이 궁극적으로는 우리를 겸손하게 만들기 위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웜홀' 같은 것이 얼마든지 가능할 정도로 삶이란게 우리가 알 수 있는 것 이상으로 거대하다는 사실을 밝힘으로써 말이죠. 태봉에게도, 슬하에게도 그랬듯이 삶은 그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넓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더 넓게 볼 수 있게되자 자신과 세상에 대한 원망도 누그러지게 되었습니다. 분명 우리에게는 우리가 볼 수 없는 그 '너머'라는 것이 존재합니다. 하지만 왜 우리들은 그 '너머'를 그저 없는 것이라고만 생각할까요. 그 '너머'에 지금의 세상마저 전혀 다르게 볼 수 있는 다양하고도 풍부한 가능성이 존재할지도 모르는데 그저 없는 것으로 치부하고 좁은 내 시야를 내 전부로만 생각하고 살아갈까요? 그러므로 태봉과 슬하가 그리고 우리가 꿈꾸는 진정한 자유와 행복은 바깥으로 부터 올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좀 무리해서 말하면 그 것들은 원래부터 그 자리에 내내 존재해 왔습니다. 다만 우리의 시야가 닿지않는 그 '너머'에 있었고 보이지 않는다고 그 '너머'를 보려는 노력을 스스로 포기해 버리는 바람에 찾지 못한 것이었죠. 행복을 준다는 파랑새를 찾아 온 세상을 떠돌아다녔지만 정작 자기 집에서 그 새를 찾은 치루치루와 미치루 처럼 말이죠. 무엇보다 태봉 아버지가 태봉에게 선물한 금괴가 이것을 단적으로 나타낸다고 보여집니다. 그 금괴의 의미에 대해 아버지는 쪽지로 이렇게 설명하죠.

 

    아버지는 순도 100퍼센트의 금을 만들고 싶었다.

    100퍼센트는 연금술로도 극복할 수 없다고 하더라만,

    1퍼센트의 불순물, 그것은 허용할 수 밖에 없다고 한다.

    이 미니바에는 1퍼센트 이상의 불순물이 있을 수 있다.

    그건 네가 더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아빠는 버려진 것들 속에도 금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다.

 

 맞습니다. 버려진 것들 속에서도 얼마든지 금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너머'를 볼 수 없는 우리들은 쉽게 그 가능성을 버려버리고 난 안된다며 잉여를 자처하거나 과거 회귀만 꿈꾸기에 급급하죠. 그러므로 진정한 길은 이러한 가능성을 볼 수 있도록 우리의 시야를 더 넓게 만드는데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건 물론 바깥이 아니라 나 스스로를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그 길은 물론 소설에 다 나와 있습니다.먼저 오수의 자작시에 나오는 개망초 꽃처럼 더 이상 타인의 잣대로 자신을 재단하지 않고 스스로를 그대로 긍정하고 그러면서도 또한 내가 아는 것이 전부라는 생각을 버리고 보다 더 넓게 볼 수 있는 시야를 가지기 위해 나와 다른 생각들에게도 얼마든지 귀 기울여 듣는 것이죠. 김선영 작가의 '특별한 배달'은 바로 이러한 변화로 '나 자신'을 퀵으로 배달하는 작품입니다. 정말 제 자신이 태봉의 오토바이에 태워져 문득 전과는 다른 나로 도착한 느낌을 받았기에 얼마든지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슬하가 자유로워졌듯이 저도 이제 자꾸만 과거로 달아나고 싶었던 마음으로 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저 역시 얼마나 제 주위에 '웜홀'이 나타나길 바랐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제 그런 것을 꿈꾸지 않겠습니다. 진정한 자유와 행복은 세상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을 깨달았으니 그것을 꿈꾸기 보다 더 많이 더 넓게 볼 수 있도록 노력할 생각입니다. 소설의 끝은 '방방' 입니다. 높이 뛰어오를수록 더 많이 볼 수 있는 방방은 정말 결말에 어울리는 소재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슬하가 그 방방에서 뛰어오를때 어딘가에서 동생 상하의 이런 말이 들려옵니다.

 

 - 누나 떨어져도 무조건 받아주는 쿠션이 있잖아. 그냥 믿고 더 높이 뛰어올라. 겁먹지 말고.

 

 저에게도 이 책이 그럴 것 같네요. 안심하고 더 멀리 볼 수 있도록 더 높이 뛰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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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의 연인 1 - 제1회 퍼플로맨스 최우수상 수상작
임이슬 지음 / 네오픽션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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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성의 인연'이 아니다 '유성의 연인'이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과 혼동하지 말길. 이 소설은 제1회 퍼플 로맨스 소설 공모전에서 최우수상을 받은 작품이니까. 말인즉슨 로맨스 소설이다. 장르라면 가리지 않고 골고루 섭취하는 내가 그래도 인연이 먼 장르가 있다면 그건 단연 '로맨스'다. 혼동해서 읽었던 것은 아니다. 사실은 궁금증 때문이다. 최근 여기저기서 로맨스 소설 공모전을 보게 되었다. 저번에 네이버 웹소설 공모전에서도 대상 작품이 로맨스 소설인 걸로 알고 있다. 대상만이 아니다. 수상작이나 응모작 중에 로맨스 소설이 꽤 많았다. 어떤 공모전은 아예 로맨스 소설만을 뽑질 않나, 왜 이리도 유독 로맨스 소설인 것인지, 정말 인기가 있어서 그런 것인지, 그렇다면 왜 인기가 있는 것인지 궁금했다. 그래서 나온 김에 읽게 되었다. 간단히 줄거리를 소개하자면 시대적 배경은 조선 광해군 1년 1609년이다. 이렇게 하면 얼른 떠오르는 게 있을 것이다. 그렇다. 얼마전에 방영한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 그 때 도민준이 처음으로 UFO를 타고 조선에 온 때가 바로 그 해였다. 날짜는 8월 25일. 실록에 이르기를 그 날엔 강원도에서 동시다발적으로 기이한 물체가 하늘에 나타났다고 한다. 이 소설도 거기에 영감 받아 만들어졌다. 맞다. '별에서 온 그대'처럼 우주인과 지구인의 로맨스다. 설정이 비슷해서 표절인가 싶겠지만 소설이 드라마보다 먼저 나왔다. 1회 퍼플 로맨스 대회가 열렸던 것은 2012년이니까. 뭐, 어쨌든. 여기서 우주인은 남자가 아니라 여자다. 여성 우주인과 조선의 남성 선비의 연애담이다. 그들이 만나게 된 사연은 이렇다. 출중한 외모에 걸맞는 출중한 능력까지 겸비한 선비 정휘지는 뜻하지 않은 모함에 휘말려 강원도 양양에서 귀양 살이를 하고 있다. 어느날 모범생 선비답게 책방에 들렀다가 돌아가는 길에 행패를 당하고 있는 여자 무당을 도와주게 된다. 여자는 결초보은의 심정으로 그 도움에 어떻게든 보답하고 싶다면서 점을 보라고 한다. 정휘지는 처음엔 사양하다가 너무나 간곡히 부탁하는지라 점을 보게 되는데 그 여무당은 정휘지가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귀인'을 만나게 된다고 한다. 그리고 이런 당부를 덧붙인다.


 "반드지 잊지 마십시오. 가장 먼저 눈에 띈 물건을 몸에 지니고 그 누구에게도 뵈지도 주지도 말아야 할 것입니다. 선비님.(P. 15)


귀양 살이하는 처지에 그런 인연이 어찌 있을꼬 반신반의했던 정휘지였는데 귀양하던 거처에서 하나있던 하인을 심부름 보내는 바람에 직접 장작을 구하러 숲에 들어갔던 정휘지는 하늘에서 갑자기 유성이 떨어지는 것을 보게 된다. 그리고 거기서 하얀 살결에 푸른 눈을 한 여인을 만나게 되는데 정휘지는 선녀를 만나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바로 드러나듯이 이 소설은 우리가 너무 잘알고 있는 '선녀와 나무꾼'을 살짝 변형해서 만들어졌다. 여무당이 사슴이고 정휘지보고 절대 남에게 주지 말라고 했던 것은 선녀의 날개옷이며 정휘지는 나무꾼, 우주인은 선녀인 것이다. 정작 그 우주인은 성년을 맞이하여 비로소 원했던 대로 혼자 우주여행을 할 수 있게 되어 펜팔을 하던 2609년의 한국 친구를 만나러 지구로 온 것이지만 도중에 뜻하지 않은 사고로 그만 천년 전으로 슬립해 여기에 불시착 하고 만 것이다. 그런 그녀의 이름은 '용'을 뜻하는 미르.


 정휘지와 미르는 만나자마자 우리말로 술술 대화를 이어가는데 '이거 가능한 상황이야? '싶지만 미르가 원래 한국인과 펜팔 했다는 설정으로 잘 넘기고 있다. 그런데 미르가 지구의, 그것도 한국의, 거기다 천년전의 조선의 문화에 너무나 무리없이 잘 적응하고 있어 도대체가 우주인이라는 생각이 잘 들지 않는다. 소설 중반에 정휘지가 호랑이의 습격을 받아 죽을 고비에 처하고 또 정희지의 친구 수하가 고을에서 일어나는 미스터리한 살인 사건을 수사하던 도중 정체불명의 짐승에게 습격을 받아 죽을 위기에 처하게 되는데 그 때마다 미르는 자신이 가진 힘으로 그들을 완벽하게 치유한다. 그 때라야 가끔 '아! 얘. 우주인이었지.' 깨닫는 정도다. 일부러 주인공을 우주인으로 설정했다면 완벽한 타자로서 느껴지는 이질감과 문화적 격차에서 비롯되는 소외감과 갈등을 넣었음직도 한데 그것이 없어서 좀 아쉬웠다. 그냥 지구인, 조선 여자와 다를 바 없이 느껴지는데 그렇다면 왜 굳이 여자 우주인으로 설정했는지 약간 의문이다. 이야기가 단조로웠기에 그런 것들이라도 투영되었으면 이야기가 한결 더 풍성해졌을 것 같아 더욱 아쉬움이 남는다. 물론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느낌이다.


 로맨스 소설의 공식엔 충실하다. 정휘지를 사모하는 여인인 수연과의 삼각관계도 나오고 미르를 사모하는 도하의 삼각관계도 나온다. 둘 다 주인공과는 다르게 적극적인 성격인 것도 다른 로맨스 작품에서 흔히 보던 공식이다. 둘 다 사실은 주인공의 질투를 유발하여 더욱 둘이 가깝게 만드는 역할인 것도 마찬가지다. 공식에 충실함은 사실 양날의 검이다. 장르적 충성도를 기대하는 독자에게 만족감을 주기도 하지만 앞으로 어떻게 이야기가 전개될 것인지 훤히 내다보게 만들어 식상함을 주기도 한다. 장르의 공식에 충실하면서도 이야기의 신선도를 유지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것은 아슬아슬한 줄타기와도 같다. 하지만 자신의 작품을 독자의 뇌리에 인상 깊게 새기려면 반드시 해내야 하는 일이기도 하다. '유성의 연인'은 양양 고을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미스터리한 음모를 넣어 신선도를 높이려 했지만 제대로 세공하지 못했고 결말까지 흐지부지된 감이 없지 않아서 병살타에 그치고 말았다. 이왕 위기 상황을 만들었으면 정휘지와 미르가 함께 소동의 와중에 있고 해결하는 쪽으로 나아갔으면 좋았으리라 싶다. 미스터리가 본격적으로 불궈지는 중후반에서 정휘지만 그 수사에 뛰어드는 바람에 정휘지와 미르가 따로 노는 듯한 느낌이 강하다. 더하여 이런 상황으로 미르가 더욱 수동적인 존재로 전락하면서 우주인이 가지고 있는 어떤 신비한 정체성이 줄 수 있는 매력을 모조리 휘발시켜 버렸다. 여기서 미르는 그냥 조선 여인 같다. 더구나 이런 로맨스 소설은 사랑을 통한 성장을 말하기 마련인데 미르는 아무런 성장이 없다. 해프닝 정도의 사건들만 있고 고난이라고 할만한 것은 없으니 어쩌면 당연할 지도 모르겠다. 정휘지도 마찬가지다.


 대저 시공을 초월한 사랑이란 이별을 전제로 한 사랑이다. 무엇보다 도래한 그들 모두가 자의가 아니라 타의로 인해서였다는 게 이를 증명한다. 지구와 우주인 그리고 천년이라는 세월의 격차만이 아니다. 떠나온 세계에 엄연히 존재하는 사람들, 가족들 때문이다. 포기하면 다시는 돌아가지 못한다. 그것도 영원히. 즉 사랑 때문에 돌아가기를 포기하는 것은 그 세계를 포기하는 것이다. 넘어온 자의 어깨엔 떠나온 세계 전체가 얹혀있는 것이다. 육중하게도.


 사랑과 온 세계가 지금 맞부딪히고 있는 것이다. 사랑이 얼마나 큰 힘을 가지고 있는 지 모르지만 과연 그 세계 전부를 이길 수 있을까? 하여 이별은 예정된 것이라 말하는 거다. 사랑은 이길 수 없다. 선녀는 결국 하늘로 돌아갔다. 그 이후의 모든 시공을 초월한 사랑의 결말도 그랬다. 결국 이러한 이야기에서 사랑이란 이별을 제대로 하기 위한 사랑이다. 보내주기 위해서 사랑하는 것이다. 그 혹은 그녀가 포기해야 할 것이 얼마나 큰 것인지 사랑을 통해 알기에 보내줄 수 있는 것이다. 그건 성장이다. 마음의 그릇이 타인을 가득 담고도 넘칠만큼 커지는 것이다. 바로 사랑이 성장하게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들은 그들이 이별할 때 흐르는 눈물 속에서 더 크게 자라난 사랑을 보고는 감동하는 것이다. 성장이 없으면 감동이 없다. 헤어짐도 아프지 않다.


 아쉬운 것은 이것이다. 작가의 주안점이 성장에 있었으면 좋았을 것 같다. 그 성장의 이야기를 독자들이 충분히 공감할 수 있게끔 세부적으로 세공까지 했다면 더할나위 없었을 것이다. 이로써 나도 한 가지 배운다. 사랑이야기가 그저 알콩달콩한 사랑이야기로만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거기엔 뭔가 사랑으로 그 영혼이 더 커지게 만드는 것이 있어야 한다는 걸. 그것도 독자들이 감응할 수 있는. 그러고보니 예전에 산드라 블록이 주연했던 영화 '당신이 잠든 사이에'가 생각난다. 그 영화의 원작은 로맨스 소설이었다. 원작이 로맨스 소설의 대표적 존재라 할 수 있는 할리퀸 시리즈 중 하나였다.



 이 영화는 동경과 사랑이 어떻게 다른지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었다. 여주인공인 산드라 블록은 처음엔 동경을 사랑으로 알지만 뜻하지 않았던 사건과 이에 결부된 이런 저런 만남들을 통해 진짜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된다. 그녀로 하여금 진짜 사랑을 보게 한 것이 바로 성장이었다. 성장이 그녀에게 참된 사랑을 볼 수 있는 개안을 가져다 준 것이다. 그래서 그녀의 마지막 선택에 박수를 보내게 된다. 관객도 그만큼 덩달아 성장한다. 로맨스 소설이 의미 없지는 않다. 단순한 사랑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에게 로맨스 소설이 폄하되고 있는 것(어쩌면 이건 일반화의 오류일지도 모른다.)은 작가들의 책임일수도 있다. 로맨스 소설이 간직하고 있는 광채를 독자들에게 잘 전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미켈란젤로가 다비드상을 조각했을 때 그는 다만 원래 대리석 안에 깃들어 있던 것을 불필요한 부분을 깎아내어 드러나게 했을 뿐이라고 고백했다. 사랑은 원래 환하고 아름다우며 고귀한 것. 앞으로 로맨스 작가들이 소설이라는 정과 망치를 통해서 그 온전한 모습을 보다 잘 드러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사랑을 느끼는 일이 삶에 플러스가 되면 됐지 마이너스가 되지는 않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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