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바꾸는 언어 - 민주주의로 가는 말과 글의 힘
양정철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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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블로그에 리뷰라는 걸 쓰면서 좋은 점이 하나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말의 무게를 느끼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어요. 아무 때나 아무 말을 별 생각없이 직설적으로 내뱉던 게 바로 저였습니다. 그만큼 지금 내가 내놓는 말이 상대방에게 어떻게 다가갈 것인지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이죠. 하지만 글을 계속 쓰다 보니 점점 이럴 때 이런 말을 써도 되나 하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되더군요. 한 문장, 한 단어를 세상에 내놓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구나 하는 것을 깊이 느꼈습니다. 그렇기에 이 책에 눈이 머물렀습니다. '세상을 바꾸는 언어'라는 책에 말이죠.


 이 책을 정작 손에 잡게 된 것은 저자 때문이었습니다. 지은이가 바로 양정철이었거든요. 문재인 대통령의 최측근 중 한 사람으로 그의 곁에서 오래도록 함께 정치 활동을 한 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 그가 문재인 정부가 자리를 잡자마자 문재인 정부에게 부담이 되기 싫다면서 모든 직책을 내려놓고 나라마저 홀연히 떠났습니다. 그것은 간다는 기별조차 없이 몰래 말이죠. 범인이라면 아주 어렸을 때부터 열심히 도와 모시는 주군이 드디어 군주의 자리에 올랐으면 마치 그간 고생한 것에 대한 보상이라도 찾으려는 것처럼 자신의 위상을 높이려 힘쓸 터인데 오히려 그런 자신이 정부에 부담이 될까 하여 모든 것을 내어놓고 몰래 사라지다니, 거기서 작가의 그릇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겠더군요. 그 때부터 양정철이란 사람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한 번 그의 목소리를 진중하게 듣고 싶었는데 마침 이렇게 그의 책이 나온 것이죠.




 '세상을 바꾸는 언어'는 말에 대한 책입니다. 그가 왜 이런 책을 쓰게 되었나에 대해 그는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밝힙니다. 그러니까 노무현 전 대통령이 아직 살아계실 때입니다. 정치에 관심이 있었던 그는 노무현 전 대통령을 찾아 그 뜻을 밝혔는데, 정작 노무현 전 대통령은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정치를 통해 세상을 바꿀 수도 있지만 더 중요한 민주주의적 진보를 이루려면 국민들 생각과 의식을 바꾸고 문화를 바꿔야 한다면서 정치를 하지는 말고 봉하 마을로 내려와 같이 좋은 책을 내자고 말이죠. 저자는 그 말에 큰 감화를 받아 정말 봉하 마을로 내려갔다고 합니다. 하지만 내려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하여 그 뜻을 이루진 못했습니다. 이 책은 그렇게 미완으로 남았던 계획이 드디어 결실이 되어 나온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의식과 문화를 구성하는 최소 단위는 말할 것도 없이 '말'입니다. 어떤 말을 어떻게 쓰느냐가 우리의 의식을 만들고 문화의 성격을 형성합니다. 또한 말은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가장 많이 하는 것입니다. 때와 장소에 따라 할 수 있는 말과 할 수 없는 말이 있듯이 삶에서 우리가 자주 쓰는 말도 우리를 이루는 중요한 한 부분입니다. 이런 까닭으로 그는 말에 대한 책을 낸 것입니다. 무엇보다 민주주의는 생활 속에서 시작되며 우리 생활 속 작은 일과 작은 생각 그리고 작은 언어부터 바꿔야 민주주의 역시 온전한 모습으로 자리 잡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책은 그렇게 5장에 걸쳐서 우리에게 아주 친숙한 언어들에 은밀히 깃든 정치적 의미와 타인의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잘못된 사용법들을 알려줍니다. 이를테면 미망인이나 여류 같은 단어들 말이죠. 우리 역시 무의식 중에 자주 쓰곤 하는 말인데, 혹시 그 의미를 아시고 계셨나요? 우리는 남편을 잃고 홀로 된 부인에게 미망인이라는 말을 자주 쓰는데요, 사실 미망인의 뜻은 '아직 따라 죽지 못한 사람' 입니다. 즉 '미망인'이란 말 속엔 '남편을 따라 빨리 죽지 왜 아직 살아 있느냐?'란 의미가 포함된 것입니다. 멀쩡하게 살아 있는 사람에게 오직 여자고, 아내라는 이유 만으로 죽음을 강요하다니, 이런 폭력적인 말도 또 없을 것 같네요. '여류'란 말도 그러합니다. 많이들 그런 말을 쓰는데, 사실 그 말의 본뜻은 '기생'이란 말입니다. 예술가들에게 자주 여류란 말을 붙인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어요. 조선 시대에는 예술을 하는 여인의 대부분이 기생이었으니까요. 한 마디로 비하하는 말인 것이죠.


 우리가 아무 생각없이 버릇처럼 자주 쓰는 말들엔 이렇게 아주 폭력적인 의미가 깃들어 있었습니다. 이 책엔 이렇게 평등 보다는 차별을, 존중 보다는 폭력을 은근히 조장하는 말들이 많이 나옵니다. 그것도 우리가 자주 쓰는 말로써 말이죠. 그렇지 않아도 글을 쓰면서 말의 무게를 진득하게 느끼는 중이었는데, 이 책마저 읽으니 한 마디의 말이라도 더욱 조심히 써야겠다는 생각이 아니 들 수 없더군요. 저자는 마지막에 참된 민주주의 문화를 토착화시키기 위해서 그렇다면 말은 어떻게 되어야 하나에 대해 이렇게 답하고 있습니다. 섬김의 언어, 겸손의 언어가 되어야 한다고 말이죠.


  막말과 암호 같은 말들('급식체' 같은 것들 말이죠)로 넘쳐나는 요즘을 보니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네요. 원래 말이란 소통을 위해서 태어났습니다. 너무나 서로 다른 우리가 서로의 마음을 내 마음 같이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말이란 걸 하게 된 겁니다. 그러나 지금 말은 자신의 가장 중요한 본분을 잊어가는 것 같습니다. 막말이나 암호 같은 말들은 소통이 아니라 오로지 자신을 더 많이 드러내기 위해서만 존재하니까요. 거기에는 타인에 대한 그 어떤 배려도 없습니다. 그저 자신과 다르면 가차없이 차별하고 배제하겠다는 폭력이 있을 뿐입니다. 이런 말이 더 많이 유행하고 인기를 얻는다는 게 어쩌면 우리 사회가 그만큼 이기주의적이고 폭력적이라는 걸 나타내는 것은 아닌지 걱정됩니다.


 지금부터라도 섬김과 겸손의 언어에 대해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것을 '세상을 바꾸는 언어'라는 책으로 시작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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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우시 왕 1세 네버랜드 클래식 50
야누쉬 코르착 지음, 크리스티나 립카-슈타르바워 그림, 이지원 옮김 / 시공주니어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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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제였더라?

 어쨌든 아주 오래 전에 친구와 어릴 때 읽었던 책들에 대해 얘기하다 친구가 '혹시 어린 애가 왕이 되는 이야기 읽어봤어? 나 그거 읽은 것 같은데 기억이 안나네.' 하고 말했다. 그러고 보니 나도 그 이야기를 읽은 기억이 났다. 왕이 되어 아이들은 어른 일을 하고 어른은 학교로 가서 공부하고 시험치는 이야기였는데, 아이라면 한번쯤 바랐던 일이 이야기에 그대로 나와있어 꽤 재밌게 읽었었다. 그러나 나도 이야기의 제목은 기억나지 않았다. 그 후, 시간이 제법 흘러 드디어 이야기 제목을 알게 되었다. 바로 '마치우시 왕 1세'였다. 작가는 아동 인권 보호를 역사적으로 가장 먼저 주장하고 평생을 바쳐 활동한, 폴란드 국적의 야누쉬 코르착. 요즘 뜨고 있는 비고츠키와도 입장이 비슷한 지라 아동 발달을 공부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기도 하다. 제목을 알게 된 건, 야누쉬 코르착의 삶을 다룬 영화 때문이었다. '재와 다이아몬드'와 '대리석 남자'로 유명한 안제이 바이다가 감독한 '코르착'이 바로 그 영화다. 



 1878년,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유태인으로 태어난 코르착(원래 이름은 '헨릭 골드슈미트'로 '야누쉬 코르착'은 공모전에 참여하려고 만든 필명이라고 한다.)은 의사와 작가로 살아가다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것을 계기로 아동 인권과 복지를 위해 자신의 삶을 바치기로 결심하게 된다. 참전 중에 전쟁 고아들의 비참한 모습을 너무나 많이 겪었기 때문이다. 그 결심 그대로 그는 전쟁이 끝난 후, 무려 30년 동안 고아들을 위한 고아원을 헌신적으로 운영했다. 하지만 1939년, 커다란 위기가 닥쳐온다. 독일 나치가 폴란드를 점령한 것이다. 유태인인 코르착은 곧 체포되어 게토에 갇힌다. 그러나 그런 상황에서도 코르착은 아이 돌보는 일을 쉬지 않았다. 이미 작가로, 아동 인권 운동가로 세계적으로 유명했기에 거기서 탈출하라고 여권과 은신처까지 제공하는 등 실제적으로 많은 도움의 손길이 다가왔으나 자신의 도움이 필요한 아이들을 버릴 수 없다면서 그 모두를 거부하고 결국 아이들과 함께 수용소로 끌려가 가스실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특히 그가 수용소로 끌려갈 때의 모습이 인상적인데, 그 때 코르착은 자신과 함께 수용소로 끌려가는 아이들이 공포와 불안에 젖을까봐 자신이 선두에 서서 소풍을 간다고 하면서 재밌게 행진하며 걸어갔다고 한다. 그 마지막 모습은 많은 이들에게 감명을 줘,  지금도 바르샤바에 가면 그 모습이 동상으로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로베르토 베니니의 유명한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도 바로 여기에 영감을 얻었다. 코르착은 그의 신념을 오롯이 실천한 사람으로 어떤 어른이 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둘도 없는 귀감이다. '마치우시 왕 1세'는 그런 그의 깨달음과 철학이 잘 드러난 작품이다.



 아버지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아홉 살이라는 왕위에 오른 마치우시는 모든 게 불안과 초조의 가시밭길이다. 국무총리나 장관처럼 자신을 보좌해야 할 관리들은 하나같이 '코흘리개'라고 무시만 할 뿐, 어떻게 통치해야 하는지에 대해선 도무지 알려주려 하지 않는다. 결국 마치우시는 혼자 힘으로 왕이 무엇이며 또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알아가는데, 거기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전쟁이다. 왕국 바깥에서 우연히 사귀게 된 친구, 펠렉에게서 전쟁을 지휘하는 사령관이 바보라는 말을 듣고 왕으로써 그대로 두면 안되겠다고 생각하여 따라간 그 전쟁에서 마치우시는 아무도 자신을 왕으로 봐주지 않는 가운데 보통의 아이가 되어 전쟁이 얼마나 비극적이며 어리석은 일인지 톡톡히 깨닫는다. 자신의 활약으로 세 나라와의 전쟁에 승리를 거둔 마치우시는 자신과 싸웠던 나라 중 '슬픈 왕'의 다음과 같은 충고를 듣고 전쟁 같은 어른들의 어리석은 짓을 반복하지 않기 위하여 아이들 중심의 체제로 나라를 개혁할 것을 마음 먹는다.


 "전쟁에서 이긴다는 건 아무 위험한 일이에요. 그때야말로, 왕이 왜 있는지 잊어버리기 십상이지요."

 마치우시는 순진한 얼굴로 물었다.

 "왕이 왜 있는데요?"

 "왕은 왕관이나 쓰라고 있는 게 아닙니다. 자기 나라 국민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 있는 것이지요. 하지만 어떻게 행복하게 할 수 있을까요? 여러가지 개혁을 해야만 합니다."(p. 142)



 그것을 위해 마치우시는 슬픈 왕의 나라를 본받아 아이들이 참여하는 국회도 만드는 등 이전과 다른 체제로 나아가는데, 그러나 뜻대로 쉽게 되진 않는다. 민주적인 운영을 위해 만든 국회가 다양한 이해관계와 잦은 토론 때문에 자기 정책의 발목을 잡는 일이 자꾸 생기는 것이다. 거기다 이웃 나라의 스파이까지 나타나 펠렉을 교묘하게 꼬드기는 바람에 펠렉의 주도로 국회는 결국 어른들을 학교에 보내 공부를 시키고, 아이들은 어른의 직책을 맡게 되는 법을 제정하고 만다. 그러나 어른의 일을 하게 된 아이들의 무책임함과 장난과 직업을 구별하지 못하는 행태 때문에 마치우시의 나라는 일대 혼란에 빠지고 그 틈을 노려 일전에 패배한 나라들이 다시 침공을 시작한다. 마치우시는 다시 찾아온 위기를 무사히 넘길 수 있을까?


 아이들이 다스리는 나라는 아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해 보는 공상이다. 이런 경우라면 보통 아이들이 나라를 맡아 다스려도 아무 문제 없으며 오히려 어른이 다스릴 때보다 더 행복해졌다는 이야기가 될 것 같은데 '마치우시 왕 1세'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어 흥미로웠다. 무책임과 방종 속에서 모처럼 아이 중심의 나라가 몰락하고 마는 것이다. 여기서 야누쉬 코르착의 아이 교육에 대한 철학이 나타나는 것 같다. 이 철학은 그대로 유즘 꽤 인기를 얻고 있는 비고츠키의 것과 비슷하다. 오래도록 한국 아동 교육의 지배적 패러다임이었던 피아제는 교육에 있어 아주 개인주의적, 주관주의적 관점이었다. 그러나 야누쉬 코르착과 비고츠키는 상호주의적 관점을 취한다. 특히 어른과 아이의 상호 관계다. 아이 교육에 있어 피아제에선 간과 되었던 어른의 적절한 역할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런 면이 '마치우시 왕 1세'에서 다양하게 나타난다. 아이들만의 나라가 어른들이 배제되자 완전히 무너지는 것이 그 가장 대표적인 것이지만 이외에도 슬픈 왕과 마치우시의 관계 역시 이 철학을 나타내고 있다. '슬픈 왕'은 현명한 어른의 이성적인 가르침은 아이 성장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드러내는 가장 뚜렷한 존재다. 어쩌면 당시 아이 교육에 대해 완전 무관심했던 어른들이 아이 교육에 관심을 가지도록 각성시키려 이렇게 썼는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어른 뜻대로 아이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아이의 자기 주도를 충분히 인정한 상태에서 그가 보다 제대로 성장할 수 있도록 어른이 조력자가 되어야 한다는 야누쉬 코르착의 말은 귀기울여 들을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는 것 같다. 어쨌든 추억 속의 책을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되어 너무나 반가웠다. 무엇보다 폴란드 어를 전공한 이의 번역이어서 작품을 더욱 제대로 즐긴듯한 느낌이다. 아동 인권과 교육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야누쉬 코르착의 존재를 논외로 하더라도 작품 자체만으로 어른과 아이 모두 꼭 읽어봐야 할 작품이라고 생각된다.



  '마치우시 왕1세' 이야기의 가장 처음엔 이렇게 작가의 아이일 적 모습이 사진으로 나와있다. 마치우시 왕의 이야기를 쓸 때의 사진보다 정말로 왕이 되고 싶었을 때의 자신의 모습을 담은 사진이 더 중요하다고 말이다. 다른 책은 처음부터 불완전하고 덜 현명했던 어린시절은 없었다는 듯 다 자란 어른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그런 것 보다는 이렇게 아이 사진을 보여주는 것이 아이들이 그것을 보며 자신도 이 작가처럼 장관이나 여행가 혹은 소설가가 될 수 있다는 꿈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란다. 어쩌면 이것은 아주 사소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이런 사소한 것마저 신경쓰는 데서 야누쉬 코르착의 인품이 스며나오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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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티모어의 서
조엘 디케르 지음, 임미경 옮김 / 밝은세상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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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살면서 한 번은 하게 마련인 질투. 질투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얼마 없습니다. 들뢰즈는 질투를 주체가 절대적 한계에 이르렀을 때 가지게 되는 감정이라 말했죠. 자기 힘으로 도저히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을 절감하게 되었을 때 우리는 질투를 하게 된다고 말이죠. 질투가 사랑에서 많이 나오는 이유도 그 때문일 겁니다. 사랑은 무엇보다 사람의 마음에 달린 일인데, 한 사람의 마음만큼 내 뜻대로 하기에 어려운 것도 또 없으니까요. 한 마디로 질투란 내가 가진 결핍과 그것을 스스로 어찌할 수 없는 한계에 대한 자각입니다. 그 결핍과 한계가 우월한 타자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닥쳐오는 것이죠. 거기서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 즉 결핍과 한계를 그대로 받아들이느냐 아니면 그것을 부정하고 어떻게든 내 힘으로 메우려 하느냐에 따라 삶은 전혀 다른 결말을 준비합니다. 


 셰익스피어였던가요? 질투가 겸허로 들어가는 문이라고 한 것은. 그렇게 결핍과 한계를 겸허하게 인정하면 질투는 더 나은 나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동력이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결핍을 메우고 한계를 없애는 것에만 집착하면 '오셀로'처럼 자신의 삶마저 깡그리 파괴되겠죠. 조금은 뜬금없게 질투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이번에 읽은 조엘 디케르의 '볼티모어의 서'가 바로 질투에 대한 소설이기 때문입니다.




 조엘 디케르는 이미 그의 이름을 가장 유명하게 만든 작품이기도 한 '해리 쿼버트 사건의 진실'로 우리나라에 소개된 적이 있죠. '볼티모어의 서'는 그에 뒤이은 작품으로 '해리 쿼버트'의 주인공 마커스 골드만이 그대로 등장합니다. 그렇다고 '해리 쿼버트'의 속편인 것은 아닙니다. 주인공만 같을 뿐 실은 전혀 다른 이야기이죠. 전작은 해리 쿼버트 교수와 관련한 사건이었지만 이번 소설은 마커스 골드만 자신과 관계있는 사건이니까요.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새로운 소설을 쓰기 위해 마커스는 플로리다에 있는 보카레이턴으로 갑니다. 거기서 하루는 집 잃은 개를 발견하여 주인을 찾아주는데, 뜻밖에도 예전의 연인이었던 알렉산드라인 겁니다. 8년 전, 마커스는 자신의 사촌인 힐렐 집안에 잇달아 닥쳐온 비극 때문에 알렉산드라를 떠났었죠. 비록 헤어졌지만 그녀에 대한 미련이 언제나 있었던 마커스는 알렉산드라와 재회한 김에 다시 사랑의 불길을 지필 수는 없을까 하여 자신이 찾아준 개를 빌미로 만남을 이어갑니다. 알렉산드라가 이미 다른 남자와 사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죠.


 알렉산드라를 통해 다시 한 번 그녀와 열렬하게 사랑했던 과거의 시간을 떠올린 마커스는 그 시절 알렉산드라 못지 않게 자신의 인생을 온통 지배했던 '골드만 갱단'에 대해 글을 써야겠다고 마음먹습니다. 그 시절 마커스는 비슷한 또래의 사촌 힐렐과 그의 아버지이자 마커스의 큰 아버지가 되는 사울이 거둬들여 키우게 된 우디와 늘 붙어 다녔는데 모두 형제가 없었던 지라 결속을 다진다는 의미에서 지어붙인 이름이 바로 '골드만 갱단'이었습니다. 거기에 힐렐의 이웃이 된 알렉산드라와 그의 오빠 스콧이 합류합니다. 마커스는 그때부터 알렉산드리아에 대한 사랑을 키워갔는데 힐렐 또한 그녀를 좋아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마커스는 '골드만 갱단'을 기준점으로 하여 과거의 이야기들을 하나 하나 풀어갑니다.


 소설은 현재와 과거를 오고 가며 전개됩니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보였고 만날 때마다 마커스의 가족을 주눅 들게 만들었던 큰아버지의 가족이 어떻게 점차 무너져 갔던가를 중심으로 해서 말이죠. 그 몰락의 중심에 바로 질투가 있었던 겁니다. 소설은 마커스 아버지와 힐렐의 아버지를 통하여 처음부터 그것을 보여줍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모두 누가 봐도 성공한 것으로 보이는 큰아버지에겐 살갑게 대하고 그렇지 못한 것으로 보이는 마커스 아버지는 냉정하게 대하는 것으로 말이죠. 그것을 통해 사회적 성공이야말로 타인의 인정을 받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는 것을 안 마커스는 사울을 자기 인생의 이상적 모델로 여깁니다. 힐렐은 변호사인 아버지와 의사인 어머니를 닮아 뛰어난 머리를 가졌지만, 몸이 왜소해 학교에서 집단 따돌림을 당합니다. 빈센트란 아이가 그것을 주도했는데 정말 엄청난 괴롭힘을 받습니다. 거기서 힐렐을 구해준 것이 우디였습니다. 원래 우디와 힐렐은 아무 관계 없었는데, 소년원에 있는 우디를 힐렐의 아버지 사울이 특별한 도움을 주었기 때문에 그에 보답하기 위해 정원 가꾸는 일이라도 하려고 왔다가 빈센트가 힐렐을 구타하려는 것을 보고 달려가 도와준 것이 인연이 되어 힐렐과 우디는 형제보다 더 친하게 지냅니다.


 소설은 한동은 마커스까지 가세한 '골드만 갱단'의 이런 저런 좋은 추억을 보여주다 무엇보다 아름답고 인자했던 큰어머니의 사고를 기점으로 어두운 색채를 늘려갑니다. 힐렐과 우디 그리고 큰아버지 사울 모두 소설이 진행될수록 가파른 경사의 몰락 아래로 굴러떨어집니다. 그것은 필연이 아니었습니다. 얼마든지 달리 비켜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몰락의 골짜기로 떨어져 버린 것은 질투 때문이었습니다. 사울은 자신을 무엇보다 이상적 모델이라 여기던 힐렐과 우디가 자신보다 이웃 패트릭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자 그 이유가 순전히 자기보다 부유하고 성공한 탓이라 생각하여 패트릭을 질투한 나머지 그만 삶의 의미를 잃어버립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아내가 아무리 애정을 갈구해도 모른 척 하고 말지요. 똑같은 실수를 마커스 역시 합니다. 스포일러가 되기에 자세히 말할 수는 없지만, 그것이 결국 알렉산드라와 결별까지 하게 만들었죠. 이처럼 소설 곳곳엔 질투가 있고 그 질투가 낳은 파국이 수놓아져 있습니다. '볼티모어의 서'를 한마디로 정리하라고 하면, 이렇게 말하겠습니다. '질투의 대장정'이라고.


 우리 눈앞을 스쳐 가는 소설 속 오셀로의 계승자들을 보노라면 아무래도 새삼 질투의 의미를 되새길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결국 무엇 때문에 질투하고 왜 거기서 쉽사리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일까 하고 말이죠. 그것이 바로 지독한 자기애의 산물이라는 것을 소설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며 문득 깨닫습니다. 그들이 자신만이 아니라 타인의 삶마저 붕괴시키는 어리석은 선택과 행동을 하는 것은 결국 자신을 너무 사랑하고 과신한 결과니까요. 질투의 순간은 내 한계를 절감하고 나를 새롭게 바꿔야 한다는 신호였지만 자기애에 깊이 빠져버린 이들에겐 그저 자신에 대한 무시이자 삶이 이유 없이 가한 공격일 뿐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사람에 대하여 내려놓기보다는 더 움켜쥐려 했고 그럴수록 자신이 힘껏 움켜쥔 것은 다른 사람의 마음이 아니라 자신의 심장이란 걸 깨달아야 했습니다. '볼티모어의 서'는 알고 보면 그런 '어리석음의 연대기'입니다. 오늘도 질투 때문에 눈물로 밤을 지새우는 분이 어딘가 계시겠죠? 그런 분 머리맡에 살짝 놓아드리고 싶은 책입니다. 우리 모두 익히 경험한 바이지만 질투한다고 해서 변하는 것은 없습니다. 억울과 분노의 질투는 자신만 더 나쁘게 만들 뿐입니다.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보다 좋은 변화의 계기로 삼는 게 더 현명한 방법일 것입니다. 문득 박찬옥 감독의 영화 '질투는 나의 힘'이 떠오르네요. 그 영화도 제목처럼 질투를 중심에 놓고 다루는 작품이었죠. 질투가 오로지 부정적인 경험인 것만은 아니며 그것을 타인과 자신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긍정하는 계기로 받아들인다면 더없는 자기 성장의 동력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영화는 잘 보여주었습니다. 


 '볼티모어의 서' 또한 이런 자각을 어느 순간 가져다줍니다. 648 페이지의 두툼한 분량이지만 일단 잡고 읽으면 그건 별문제가 아닐 겁니다. 몰입시키는 힘이 있으니까요. 질투로 혹독한 속앓이를 해 보신 분이 있으시다면 이 소설을 벗하며 그 질투가 과연 내게 무엇을 남겼나 헤아리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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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7-11-01 0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가끔 그런 생각해요 다른 사람이 나보다 나아서 좋아하겠지 하는... 그게 자기애일까요 자신한테 자신이 없는 것 같기도 한데... 자신을 먼저 좋아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누가 어떤지는 마음 쓰지 않을지도 모르죠 그런 생각을 하다가도 다시 나는 왜 이럴까 하는 생각에 빠지기도 합니다 많은 사람이 그런 건 아니겠습니다 다른 사람 마음은 다른 사람 거다 생각하면 좀 편해지기는 하겠지요


희선
 
콜럼바인
데이브 컬런 지음, 장호연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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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콜럼바인. 이 이름을 잊기란 어렵다. 아직도 1999년 4월 20일에 일어난 그 사건을 TV에서 보도하던 모습이 생생하다. 그때의 기억이 조금도 퇴색되지 않은 것은 두 가지 사실이 내게 매우 충격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는 대량 살상이 다른 데도 아닌, 그것과 거리가 너무나 멀어 보이는 고등학교에서 발생했다는 것. 다른 하나는 그런 학살을 자행한 범인이 테러리스트도 아니고 평범한 고등학생이었다는 것. 이 두 가지는 말 그대로 내 이성을 뒤흔들었다. 그 바로 얼마 전에 나는 고등학생이 연쇄 살인마로 나오는 웨스 크레이븐의 영화 '스크림'을 봤었다. 그걸 볼 때만 해도 고등학생이 사람을 무차별로 죽이고 다니는 것은 그저 영화 속에나 등장하는 일로만 알았다. 그랬는데, 그게 현실에서 벌어진 것이다. 충격이었다. 지금까지 살아온 경험과 가진 상식으로 도저히 헤아릴 수 없었다. 마치 우리 세계가 또 다른 새로운 시대로 접어든 느낌이었다. 누구나 괴물이 될 수 있고 그 어디도 안전할 수 없는 시대로 말이다.


 때는 곧 밀레니엄이었고 종말에 대한 요한계시록과 노스트라마무스의 불길한 예언들이 횡행하고 있었다. 내게 콜럼바인의 학살은 밀레니엄 버그(Y2K로도 알려진)만큼이나 그런 예언이 실현될지 모른다는 전조로 다가와 불안을 더욱 가중했다. 다행히 역사는 그 모든 걸 비껴갔지만 콜럼바인 사건이 우리가 새로운 시대로 접어들었다는 것의 신호라는 것만은 옳은 것으로 밝혀졌다. 2001년에는 세계무역센터에 여객기가 일부러 부딪치는, 이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사태가 일어났고 미국은 생화학 무기가 있다고 날조하여 이라크를 침공했다. 이처럼 바야흐로 폭력과 살육이 난무하는 시대가 열렸으니까 말이다. 그건 IS의 온갖 소프트 타깃 테러와 더불어 여전히 진행 중이다. 바로 최근만 해도 명절 연휴의 기분을 삽시간에 암울하게 만들어 버린 라스베이거스 학살 사건이 있지 않았던가. 한 노인의 총기 난사에 무려 58명이 희생당했다. 


 그 기원에 바로 콜럼바인이 있었다. 적어도 내겐 그렇게 보였다. 그래서 꼭 들여다보고 싶었다. 그 비극이 어떻게 하여 일어났으며 무엇을 남겼는가를. 상세하게. 하지만 알기 어려웠다. 콜럼바인 사건에 대해 알려주는 것은 구스 반 산트의 영화 '엘리펀트'마이클 무어의 다큐멘터리 '볼링 포 콜럼바인'말고는 만나기 힘들었다. 그 역시도 콜럼바인의 전과 후를 다 밝혀 총체적인 모습을 보여주기 보다는 사건이 발생한 당일의 모습만 담거나 총기 규제와 관련한 하나의 문제의식으로만 접근하고 있어 전모를 알기에는 엄연히 한계가 존재했다. 결국 단편적인 정보들을 가지고 자의적으로 소화한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이 책을 만났다. 데이브 컬런의 '콜럼바인'을 말이다. 10년 동안 사건을 취재하고 집필한 책이었다. 사건에 대한 것을 책으로 만나는 것은 처음이었고 사건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것 또한 늘 미진하다고 느꼈기에 당장 손에 잡았다. 읽어보니 사건의 전후뿐 아니라 범인과 희생자 그리고 가족까지 포함하여 일어났던 일과 그들의 말을 정확하게(책의 마지막에 실린 주(註)는 책에 인용된 관계자들의 말과 그들에 대한 기록이 모두 실제의 것이라는 걸 증명하고 있다.) 기록하고 있었다. 내가 원하던 바로 그 책이었다. 솔직하게 여태껏 장님이 코끼리 만지듯 한 기분이었는데 이 책을 통해 비로소 콜럼바인 사건이란 코끼리를 온전히 들여다본 것 같다.



 무엇보다 마음에 들었던 것은 이 책이 '콜럼바인 사건' 이후에 그것이 사람들에게 무엇을 남겼는지에 대해서도 아주 비중있게 다룬 점이었다. 그것을 보면서 특히 다시 일어나선 안 될 비극적인 사건의 경우 그것의 원인을 규명하는 것도 필요하고 중요한 일이지만 그 이후를 살펴보는 것도 그 못지 않게 필요하며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똑같은 비극을 겪었어도 사람들의 반응은 결코 같지 않았다. 그건 범죄로 피해를 입은 자나 그 때 범죄 현장에 있었던 자라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유독 인상 깊게 다가온 것은 진실을 알기 보단 자신이 믿고 싶은 쪽으로만 믿으려 했으며 그것에 위배되면 아무리 진실된 증언이라 해도 묵살하는 모습이었다. 죽음의 진실과 상관없이 순교자로 미화되어 신앙의 영웅이 되어버린 캐시 버넬은 그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었다. 비극은 저마다 가진 자의적 목적에 맞춰 멋대로 규정되었다.


 이런 왜곡된 정보가 마구 유포될 수밖에 없는 환경이기도 했다. 콜럼바인 사건은 미국 전역에서 가장 높은 관심을 받았지만 그 관심에 걸맞을 정도의 비극이 지닌 의미와 교훈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해 보려는 움직임은 없었던 것이다. 그것은 콜럼바인 사건을 일으킨 에릭 딜런의 삶을 그들이 남긴 기록을 통해 오래도록 끈질기게 추적했던 수사관 퓨질리어처럼 긴 시간을 들여 자세히 살펴보고 찬찬히 음미해야 하는 일이었지만 그러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그저 빠르고 편한 대답만을 원했다. 사이코패스로 밝혀진 에릭은 그렇다 치고 딜런 토마스라는 시인의 이름을 이어받았고 교양 있는 부모 밑에서 남부러울 것 없는 가정환경에서 자란 딜런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흔한 아이로 그런 아이가 아무런 개인적인 원한이 없는 학우와 선생님을 날려버리려 폭탄을 설치하고 거침없이 총격을 가하는 존재가 되었으면 분명 자신에게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 마땅히 진실에 대한 깊은 관심과 비극의 반복을 방지하기 위한 자성(自省)이 이뤄져야 할 텐데도 그저 '괴물'이란 딱지를 붙여 저만치 던져두고선 자신과 상관없는 일로 간주하는 것을 택했다. 그건 어떤 특정한 시간대에, 특별한 사람에게만 일어난 비극일 뿐이라는 식으로 말이다.


 '어쩌겠냐? 산 사람은 살아야지...'. 타인의 비극 앞에서 우리도 곧잘 가지는 마음을 그들도 가졌던 것이다. 


 한 언론인이 정상으로 돌아간 학교 모습을 취재하려고 들렀을 때 아이들은 당혹해했다. 따분한 학교에 왜 관심을 갖는 거지? 그들은 정말 몰랐다. 그가 도시에서 왔다고 하자 아이들 표정이 밝아졌다. 거기 클럽은 어때요? 콜팩스 거리에 가봤어요? 정말 스트립 클럽이랑 술꾼이랑 창녀들이 있나요? 아이들은 물론 비극을 기억했다. 그 끔찍한 날을 어떻게 잊겠는가. 초등학교가 전부 폐쇄되고 다들 두려움에 떤 그날을. 당시 형 누나가 고등학교에 갇혀 있었던 아이들도 있었다. 부모들은 몇 달 동안 안절부절못했다. 그래서 덴버는 어때요? (p. 594~5)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비정(非情)을 보여주는 그 마음을 말이다. 아마도 우리가 그런 냉혹한 가면을 쓰는 것은 정말로 냉혹해서라기 보다는 비록 개인적으로 연루되진 않았어도 그래도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써 뭔가 그런 비극이 일어나도록 방치한 것만 같은 죄책감과 그런 감정을 느끼면서도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에 더하여 당한 이에게 어떤 도움도 줄 수 없는 부끄러움을 얼른 털어내기 위해서일 것이다.


 한 마디로 우리 대부분은 비겁하기에 비정해진다. 윤성희 작가의 단편, '가볍게 하는 말'에서 주인공의 고모는 주인공의 아버지 칠순 잔치에서 세 오빠가 서로 얼싸 안으며 지금까지 잘 살았다면서 자화자찬하는 것을 보고 못 참겠다는 듯 일어나 이렇게 일갈한다. "부끄러운 게 뭔지도 몰라, 오빠들은." 고모가 왜 이렇게 말했는지는 나중에 가서 이렇게 밝혀진다.


 장례식장에서 고모는 넋을 놓고 우는 친구의 아들에게 말했다. "어떻게 하냐, 그래도 기운내라. 산 사람은 살아야지." 고모가 손자의 손을 잡았다. "그렇게 말해선 안된다는 걸 그때는 이 할미가 몰랐단다. 그건 부끄러운 말이란다. 그건 예의가 없는 말이란다."(윤성희, '베개를 베다'(p. 29))


 맞다. 우리의 이러한 태도는 비극을 당한 자에게 예의가 없는 일이다. 진정 우리가 그들에게 예의를 다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다만 침묵하고 그 비극으로 들어가야 한다. 비극에 처한 자들의 말들로 온전히 우리를 채우고 그걸 단단히 기억해 두어야 하는 것이다. 그들에게 걸맞은 예우란 오직 둘 뿐이다. 바로 용기와 기억다.


 그러고 보니 미국 드라마 '파고'에서 이런 장면이 있던 게 생각난다. 연쇄살인마가 조금 전에 살인을 하고 남의 차를 타고 돌아다니다 경찰에게 검문을 당한다. 경찰이 다가와 신분증과 차량등록증을 요구하자 연쇄살인마는 보여주는 것을 당당하게 거부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경관, 길 중엔 절대 가지 말아야 할 길이 있어요. 옛날 지도에는 그런 길을 여기 용이 있다고 적어 놓았었죠. 지금은 그러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용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경찰은 상대가 그렇지 않아도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풍기는데 그런 말까지 하자 두려움을 느끼고 그냥 보내준다. 용이 있는 길을 들어가지 않기로 작정한 것이다. 그러나 나중에 가서 그 선택이 더 큰 비극을 가져온 것을 알고는 엄청난 괴로움에 빠지고 결코 그 밤에 비겁했던 자신에게서 벗어나지 못한다. 비극적인 사건 앞에서도 마찬가지다. 안락을 위해 잠시 비겁하면 된다고 생각하고 얼른 망각을 선택하지만 바로 그 비겁이 족쇄가 되어 끝내 자신을 영원히 부끄러움 속에 결빙시킬 것이라는 건 예상하지 못하는 것 같다. 그 결빙이 언젠가 비극의 반복을 초래하리라는 것도. 저자는 에릭의 과거를 통해 여실히 보여주지 않았던가? 어제의 작은 방관과 망각이 오늘의 비극을 낳았다는 것을. 그러므로 내 삶에 콜럼바인 사건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길 바란다면 용기를 내야 한다. 바로 지금 용이 사는 곳으로 뛰어들어야 한다. 피한다고 해서 용은 없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번식을 통해 용이 있는 길만 많아질 뿐이다. 뛰어들어 정면으로 바라보면서 없애지 않으면 안된다. 비극 또한 그와 같다. 반복의 사슬을 끊는 것은 동참의 용기와 기억의 칼을 늘 벼려 두는 것뿐이다. 데이브 컬런도 같은 생각이었다고 믿는다. 그 생각이 콜럼바인의 비극으로 뛰어드는 것과 자그마치 10년 동안이나 그 비극 속에 머무를 수 있는 용기를 주었을 것이다. 거기에 이제 우리가 답할 차례다. 그가 기록한 콜럼바인의 전모를 오롯이 기억하는 것으로.


 톨스토이는 '안나 카레니나'에서 행복한 가정은 모두 고만고만하지만 무릇 불행한 가정은 나름나름으로 불행하다고 말했다지만 거대한 비극의 모습 또한 고만고만하지 않나 생각된다. 총을 맞은 콜럼바인의 교사 데이브 샌더스 실은 살 수 있었으나 경찰이 알고도 세 시간이나 방치하는 바람에 사망한 것에서 세월호 참사가 겹쳐지듯 말이다. 궁극적으로 비극에는 소유격이 없다. 모든 비극에 대해 우리가 예의를 갖춰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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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 독서 - 마음이 바닥에 떨어질 때, 곁에 다가온 문장들
가시라기 히로키 지음, 이지수 옮김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7년 6월
평점 :
절판


 가시라기 히로키의 '절망 독서'는 고정관념을 허무는 책입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독서란 마음의 여유가 있을 때 할 수 있는 것이라 여길 겁니다. 당연히 절망처럼 마음의 여유가 없을 때는 독서도 불가능하다고 말이지요. 그러나 가시라키 히로키는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절망하고 있을 때야말로  독서를 통해 견뎌나가야 한다고 말이죠.


 '인생 각본'이란 용어가 있다고 합니다. 심리학 용어라고 하는군요.

 사람들 대부분은 이미 어린 시절부터 무의식중에 자신의 미래 삶에 대한 각본을 쓰고 있다는 이론을 뜻하는 말입니다. 쉽게 말하면 우리는 모두 자신의 인생에 대해 이렇게 저렇게 살 거야 하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런 것이 바로 '인생 각본'이라는 겁니다. 한 마디로 스스로 설정하는 자신의 인생 전체에 대한 비전 같은 거죠. 그러나 우리네 삶이 예측과 통제가 불가능한 무수한 변수로 넘쳐나는 이상, 부득불 그 인생 각본을 수정해야 할 때가 옵니다. 자의로 수정하기도 하지만, 외부의 강요로 수정해야만 할 때도 있지요. 



 그런 순간을 맞이할 때, 우리는 무엇의 도움을 얻어 각본을 고칠까요?

 물론 스스로 잘 해낼 때도 있습니다만 어떻게 수정해야 할 지 도무지 막막하여 아무 것도 못할 때도 반드시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다른 사람들은 이럴 때 어떻게 하나 하고 타인의 각본을 들여다 봅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르네 지라르는 그러한 우리의 성향을 두고 '모델론'을 펼친 바 있죠. 자신이 가고자 하는 방향의 삶을 보여준 인물이 있다면 그것을 모델로 하여 그를 닮아 살아가는 것으로 닿고자 한다고 말이죠. 기독교의 예수가 바로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처럼 우리도 인생 각본을 어떻게 고쳐야 할 지 모를 때 타인의 각본을 모델로 하기 마련입니다. 그 때 어떤 타인의 각본을 보고 어떻게 수정하느냐에 따라 인생이 완전히 달라질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보다 현명하게 타인의 각본을 참조해야 하는데, 저자는 그것이 절망이라면 그 절망을 제대로 보여주는 독서를 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죠. 그래서 제목도 '절망 독서'입니다. 왜냐하면 공감이야 말로 가장 커다란 힘이 되기 때문입니다.


 공감은 그 자체만으로 큰 구원이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p. 55)


 이것은 그냥 하는 말이 아닙니다.

 저자 자신의 삶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말입니다. 가시라기 히로키는 좀 특별한 저자입니다. 왜냐하면 더없이 창창한 나이인 스무 살 때 의사로부터 평생 낳지 않는 병이란 말을 들은 난치병 환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로 인해 자신이 계획한 모든 미래가 사라졌습니다. 그야말로 난치병이라는 외부 요인 때문에 인생 각본을 급격히 수정하게 된 것입니다. 그는 많은 위로와 격려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자신에게 이롭지 않았습니다. 누군가 다정하게 격려를 하면 오히려 이제 자신에게 없는 그의 건강함만 더 부각되어 그를 더욱 힘들게 했습니다. 그가 위안을 얻은 곳은 오로지 같은 아픔을 겪고 같은 고뇌를 토로하는 쪽이었습니다. 무엇보다 똑같은 아픔에서 비롯된 경험들이 오늘의 자신을 인정하고 내일에 지속될 수 있는 힘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이처럼 공감의 힘은 그가 몸소 느낀, 누적된 삶의 경험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의 삶을 알고 나면 아무래도 다음과 같은 그의 말에 설득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절망했을 때는 그 기분에 다가와주는 음악이나 이야기와의 만남이 우리를 구해줍니다. 우선은 마주하고 있는 절망적인 기분에 푹 빠질 것. 빠질 때는 바닥까지 가라앉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극복을 위해 정말로 중요한 일입니다.(p. 61)


 독서가 그것을 도와줍니다.

 '절망 독서'가 말이지요. 그렇다고 해서 절망이 곧바로 극복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되어서도 안됩니다. 모두에게는 저마다 치유에 드는 시간들이 다르기 때문이죠. 아주 짧은 사람도, 아주 긴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의 길이를 미리 알 수는 없습니다. 한 개인에게 다가온 절망 역시 다양한 얼굴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변수가 존재하는 절망 속에서 적절한 치유의 시간을 아는 것은 단 하나, 억지로 치유하려 들지 않고 그냥 자신을 맡기는 것 뿐입니다. 바다 위의 표류물이 천천히 떠다니다 언젠가 해변에 닿듯이, 그렇게 언젠가 갈림길이 나타나 서로에게 작별을 고할 때까지 절망과 동행해야 합니다. 천천히, 산보 하듯이. 저자에 따르면 절망은 완만한 경사의 고원을 천천히 걷는 것처럼 극복해야 한다는군요. 그래서 독서입니다. 읽는 것은 무엇보다 느리고 꾸준한 행위니까요. 한없이 느리게 흐르면서 뚜렷한 변화도 없는 절망의 시간을 견뎌내기 위해서는 그만큼 느리면서 서서히 사유 속으로 침잠하게 만드는 독서만큼 어울리는 것도, 기댈만한 것도 없습니다. 하여 저자는 당당하게 말하는 것이죠. '절망의 시간일수록 책을 벗하라!'고.


 당신도 절망의 시간을 보내시고 계신가요?

 그렇다면 '절망 독서'의 문을 한 번 두드려 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차분하게 진행되는 꽤 설득력 있는 이야기들 속에서 뜻밖의 치유 방법을 얻게 될수도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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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7-09-07 06: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독설의 팡세>라는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에밀 시오랑의 글들이 제 절망을 대신 말해주고 있어서 많이 의지가 됐었죠. 책은 배움보다 제게 그런 의미가 더 컸어요. 지금은 배울 게 너무 많아 절망스러움요ㅎ;;;

ICE-9 2017-09-06 14:42   좋아요 1 | URL
배울게 많아 절망스럽다는 말엔 저도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되네요. 아, 알면 알수록 더 깊어지는 앎에 대한 허기라니. ㅠ ㅠ 그래서 식자우환이라고 하는 걸까요^^;
말씀하신 에밀 시오랑의 책은 아직 접해보지 못했는데 꼭 한 번 만나보고 싶네요.^^

ICE-9 2017-09-06 14:42   좋아요 0 | URL
배울게 많아 절망스럽다는 말엔 저도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되네요. 아, 알면 알수록 더 깊어지는 앎에 대한 허기라니. ㅠ ㅠ 그래서 식자우환이라고 하는 걸까요^^;
말씀하신 에밀 시오랑의 책은 아직 접해보지 못했는데 꼭 한 번 만나보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