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소식 패트릭 멜로즈 소설 5부작
에드워드 세인트 오빈 지음, 공진호 옮김 / 현대문학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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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패트릭 멜로즈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이 나왔다. 제목은 '나쁜 소식'.

 소설이 시작되면 주인공 패트릭이 뉴욕에서 조지란 사람에게서 온 전화를 받는다. 그의 아버지 데이비드가 호텔에서 갑자기 죽었다는 것이다. 액면 그대로라면 이것이 나쁜 소식일 것이다. 그러나 전작 '괜찮아'에서 나왔던대로 다섯 살 때 처음 아버지에게 강간을 당한 뒤로 22살이 되는 지금까지 아버지와 단 둘이 있으면서 10분 이상 항문을 침범당하거나, 매 맞거나, 모욕당하지 않고 있어본 적이 없는 패트릭에게 과연 나쁜 소식인 걸까? 사실 그 소식을 듣고 난 뒤의 패트릭의 반응은 이러했다.


 그게 나쁜 소식이라고? 정신이라면, 거리에 나가 춤추지 않을 정신, 너무 표 나게 웃지 않을 정신이 필요하겠지.(p. 15)


 어쨌든 그는 아버지 유해를 가져오기 위해 뉴욕으로 떠난다. 이 뉴욕에서 벌어지는 이야기가 '나쁜 소식'의 전부를 차지한다. 뉴욕에 도착한 비행기에서 영국으로 떠나는 공항에 이르기까지의 하룻 동안의 여정이다. '괜찮아'가 단 하루를 담았던 것과 똑같다. 그런데 이런 의문이 들 수 있겠다. 그렇다면 '나쁜 소식'이란 제목은 틀린 게 아닌가? 패트릭의 반응을 보자면, '좋은 소식'이라고 해야 할 것 같은데 하고 말이다.




 합당한 의문이다. 그러나 이 소설의 제목엔 '나쁜 소식'이 더 잘 어울린다. 그는 나쁜 소식을 받는다. 그것은 결코 아버지가 죽었다는 소식이 아니다. 그 소식은 패트릭 외부에 관계된 것이 아니다. 내부에 관계된 것이다. 바로 아버지가 남긴 유산에서 자신이 결코 자유로워질 수 없다는 것. 여전히 그가 남긴 것과 동행해야 한다는 것. 그것이 바로 패트릭에게 정말 나쁜 소식이다. 뉴욕에서 겪는 그의 여정은 배반의 경험이다. 오랜 세월 그토록 아버지의 세계에서 벗어나고 싶어했는데, 여전히 거기에 속박되어 있다는 걸 절절하게 체득하니까 말이다. 어쩌면 소설 가득 펼쳐지는 마약 중독 이야기는 바로 그 절망에서 배태된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앞서 '괜찮아'의 리뷰에서 '패트릭 멜로즈'는 사실 위악과 절망 그리고 고통 밖에 물려줄 게 없는 기성 세대의 사상과 가치관을 자기 존재의 근거로 삼지 않고 젊은 세대 스스로 살아가야 할 이유와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해답을 찾아가는 이야기라고 했었다. 즉 섹스 피스톨즈가 자신의 데뷔 앨범에서 '거세된 숫소들은 신경쓰지 마!'라고 외쳤던 것과 마찬가지로 기성 세대의 모든 것을 'NEVER MIND' 해 버리고 자신만의 '레종 데트르'를 구현하는 것이다.


 그런데 '나쁜 소식'에서 패트릭은 그런 구현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절감한다. 자신이 구닥다리라고 생각했던 아버지 세대의 문화와 질서가 예의의 형태로 아직도 자신에게 끈질기게 남아있으며 자신이 바라는 대로 행할 수 없다는 것을 늘 자각하기 때문이다. 그는 아버지의 죽음을 언급하는 기성 세대를 만날 때마다 자신을 옥죄고 있는 족쇄를 느낀다. 마음은 탈피를 갈망하지만 자신의 정체성 일부를 이루고 있는 아버지의 세계가 가진 중력은 그를 쉽사리 놓아주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마약을 찾는다. '나쁜 소식'에서 우리가 가장 많이 접하는 것은 패트릭이 끊임없이 마약을 찾아 뉴욕의 거리를 헤매고 남의 집 화장실에서 그걸 흡입하는 장면이다. 그는 왜 그토록 마약을 찾아 다니는가? 단순히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아니다. 그게 바로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아버지 세계에 대한 저항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마약, 그것은 죄악으로 가득한 기성 세대의 대표 존재인 데이비드가 엄격하게 금지했던 것이기 때문이다. 패트릭은 그렇게 마약을 통해 아버지가 구획해 놓은 것을 위반한다. 다시 말해 패트릭은 아버지가 말끔히 소거된 자신만의 '레종 데트르'를 구현하는 것이다. 여기서 표지를 한 번 바라본다. 드라마에 나오는 한 장면을 따온 표지엔 주연인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옷을 입은 채로 물이 차 있는 욕조에 들어가 있다. '나쁜 소식'에 나오는 장면이기도 하다. 왜 그는 옷을 입고 욕조에 들어가는 것일까? 이유는 '괜찮아'에 나온다. 아버지로 상징되는 기성 세대의 사고 방식과 교양에선 옷을 입고 욕저에 들어가는 것이 명백하게 금지되어 있었다. 다섯 살의 패트릭은 아버지에게 저항하기 위해 일부러 옷을 입은 채로 물을 받아 놓은 욕조로 들어간다. 이 행위 자체가 저항인 것이다. 표지는 바로 그것을 나타낸다. 옷을 입고 욕조에 들어가는 것과 마약을 찾고 흡입하는 것은 결코 다르지 않다. 둘 모두 넌더리가 나는 기성 세대의 세계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몸부림이다.



 '나쁜 소식'의 여정은 어떻게 보면 뭘 얘기하고 싶은지도 모르겠고 기승전결이라는 게 딱히 없는 산만한 이야기로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게는 전하고 싶은 주제에 따라 아주 세부에 이르기까지 아주 정교하게 설계된 구조물로 보인다. 하필이면 소설의 배경을 뉴욕으로 정한 것도 그렇다. 영국이 경직된 문화라면 뉴욕은 자유분방한 문화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패트릭의 숨통은 뉴욕에욕서 좀 더 트였어야 한다. 그러나 질식할 것만 같은 대기는 여전한데, 그건 뉴욕의 기저를 이루고 있는 미국 문화가 실은 역사적으로 영국 문화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영국 문화가 아버지라면, 미국 문화는 아들이라 할 수 있다. 뉴욕, 그 곳은 혼재의 장소다. 옛 것의 사고 방식과 관습으로 거머쥐려는 힘이 있는 반면 맹렬하게 이탈하고자 하는 힘이 있다. 그런 두 힘이 마구 충돌하는 곳. 그 곳이 바로 뉴욕이다. 패트릭이 처음 찾았던 장례식장이 보여줬던 모습 그대로. 패트릭은 안내자가 층을 잘못 말해줘서 3층에 있는 엉뚱한 사람의 장례식장으로 간다. 그것은 유쾌한 파티가 떠들석하게 벌어지고 있다. 너무나 장례식답지 않은 분위기라 패트릭은 얼떨떨해 한다. 잘못 찾아왔다는 것을 안 패트릭은 다시 안내자에게로 가 원래 자신이 가야했던 2층으로 간다. 거기는 어둡고 쥐죽은 듯이 고요하다. 3층과 완전히 정반대의 모습이다. 거기에 아버지 시신이 있었다. 파티장과 같은 3층과 묘지와 다를 바 없는 2층. 우리는 이것이 무의식과 자아를 층으로 나누었던 프로이트와 닮았다는 걸 인지한다. 2층은 무의식, 3층은 자아. 그러나 제아무리 다른 3층이라 해도 2층에게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무의식이 그러하듯이. 다시 말해 소설 속 장례식장은 하나의 신체다. 그리고 그것은 정확하게 패트릭의 신체와 동일하다. 뉴욕이라는 공간 역시, 패트릭 신체의 확장판인 것이다.


 물론 나는 잘 알고 있다. 이 소설이 작가, 에드워드 세인트 오번의 자전적 이야기라는 것을. 그렇다고 해도 이 소설이 아주 정교한 세공품이라는 생각을 바꿀 마음은 없다. 오래만에 아주 많이 생각하고 이래저래 헤아려 보는 소설을 만난 것 같다. 적어도 소설만큼은 내게 전혀 '나쁜 소식'이 아니다. 다음 권인 '일말의 희망'을 간절히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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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어트랜드
서레이 워커 지음, 이은선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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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모든 일에 나 자신을 열외로 간주했었다. 남들이 떠들어대는 데이트와 애인과 성관계는 내게 딴 세상 이야기였다. 트리스탄이 나타나 내게 소속감을 느끼게 해주기 전까지는 내가 어느 정도로 배제되고 있는지도 알지 못했다. 나도 드디어 그들의 일원이 된 것이다.(p. 170)


 외모 때문에 평생 타인과 자기 사이에 넘을 수 없는 선이 있다고 생각한 여자가 있다. 자신은 늘 그 선 밖에 홀로 격리된 존재라고. 그의 이름은 플럼. 현재 135kg인 그녀는 뚱뚱한 자신의 몸을 싫어한다. 그녀를 계속 살게 하는 것은 딱 두 가지 뿐이다. 하나는 우울증 치료약인 Y. 다른 하나는 날씬한 여자로 만들어주는 수술이다. 오직 그 둘에 의지하여 플럼은 오늘도 '데이지 체인' 잡지의 편집장 키티를 대신하여 키티에게 메일로 외모와 연애에 대해 상담해 오는 십대 소녀들에게 키티인 척 하면서 답변을 해주고 있다. 그런데 최근 플럼을 미행하는 여자가 나타난다. 어디를 가든 족족 나타나 심기가 여간 불편한 게 아닌데, 어느 날 키티의 사무실에서 그 여자가 두고 간 책을 하나 발견한다. 바로 '다이어트 랜드 대모험'이란 책을.


 그 책의 발견을 계기로 플럼의 삶은 완전히 바뀐다. 자신이 전혀 모르고 있었던 세계가 갑자기 전면에 다가온 것이다. 그 세계를 만들고 이끌어 가는 사람은 베레나 뱁티스트라는 여성. 그런데 그녀의 존재는 플럼에겐 악몽이다. 플럼은 아주 어릴 때부터 시선의 공포를 느껴왔다. 어릴 때, 할머니 집에서 지낸 적이 있는데 하필이면 그 집이 1920년대의 무성 영화 시절 스타였던 머나 제이드가 살았던 집이라 그녀의 자취를 찾아 온 관광객들이 시시각각 나타나 플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카메라로 마구 찍어댔던 것이다. 날씬한 몸이 되어 그런 시선의 공포에서 자유롭고자 플럼은 실제로 자신처럼 뚱뚱한 몸에서 아주 날씬한 몸으로 변한 여성인 뱁티스트를 TV에서 보고 그녀가 운영하는 다이어트 식단으로 살을 빼도록 도와주는 뱁티스트 프로그램 회원이 된다. 그러나 갑자기 일어난 교통사고로 뱁티스트 부부가 죽고 그녀의 딸인 베레나는 전격적으로 프로그램을 취소하여 플럼이 가진 유일한 희망을 날려버린다. 그 충격으로 플럼은 폭식을 감행하게 되어 결국 오늘의 몸이 되고 말았다. 그러므로 베레나는 사실 현재의 고통을 가져다 준 장본인이었던 것이다. 그런 플럼에게 베레나는 부모의 프로그램은 윤리적으로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다고 하면서 그 때의 상처에 대해 사죄라도 할 겸, 2만 달러를 줄테니 자신이 하는 뉴 뱁티스트 프로그램을 받아 볼 것을 권한다. 그렇지 않아도 수술 비용이 부족했던 플럼은 베레나의 제의를 받아들이고, 날씬한 몸이 되면 플럼의 과거는 모조리 지워버리고 완전히 새롭개 살아야지 하는 마음으로 '얼리샤'라는 이름까지 새로이 지어 뉴 뱁티스트 프로그램에 참여한다. 한편, 미국은 여성을 성폭행한 남자들이 잔인하게 살해되고 여성을 성상품으로 만드는 기업의 고위층 자녀들이 연속적으로 납치되어 일대 혼란에 빠진다. 동일범의 소행이라 미국은 더욱 충격에 빠지는데, 사람들은 어느새 그 범인을 '제니퍼'라 부르게 된다. '제니퍼'가 처형하고 협박하는 대상은 오로지 여성의 권익을 무시하거나 방해하는 자들 뿐이었으므로 '제니퍼'는 기존 권력에 거센 추격을 받는 한편 많은 지지를 얻기도 한다. 플럼은 그러한 제니퍼의 활동을 보며 제니퍼가 혹시 자신을 베레나와 만나게 한 리타가 아닐까 의심한다.



 이처럼 원래는 여성 문제애 대해 많은 글을 썼던 칼럼니스트인 서레이 워커의 첫 소설, '다이어트 랜드'는 제목 때문에 다이어트에 관한 책이라고 생각하고 읽었다간 낭패를 볼 작품이다.

 이 소설은 다이어트에 대한 것은 하나도 알려주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정반대의 것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플럼이 받게 되는 뉴 뱁티스트 프로그램에서 선명하게 드러난다. 금단과 정면 대결 그리고 변신의 단계로 이루어진 '뉴 뱁티스트 프로그램'의 궁극적인 목적은 플럼의 소망과는 정반대로 플럼이 아니라 얼리샤를 지우는 데 있기 때문이다. 플럼에게 다이어트는 무리가 되고자 하는 갈망에서 나온 것이었다. 플럼은 비대한 몸 때문에 남들은 아무렇지 않게 하는 것마저 할 수 없는 자신을 많이 비관했었다. 다른 사람이 다 하는 행동을 하고 있을 뿐인데도 여기저기서 들려오거나 보여지는 자신을 비웃는 킥킥거리는 웃음, 조소어린 눈길을 받아야 했던 것이다. 아무 이유 없이 오직 뚱뚱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쏟아지는 조소와 경멸 속에서 플럼은 외롭고 두렵기만 했다. 다이어트는 거기서 벗어나고자 하는 몸부림이었다. 그러나 도대체 플럼에게 무슨 죄가 있단 말인가? 죄는 조소와 경멸을 보낸 이들에게 있었다. 그녀는 책임지지 않아도 좋을 책임 때문에 괴로워했고, 짓지 않은 죄 때문에 힘들어했다. '뉴 뱁티스트 프로그램'은 이를테면 시선 교정이다. 외롭고 두렵다면 외롭고 두려운 이유를 똑똑히 바라보라는 것이다. 그 원인은 결코 플럼에게 있지 않다. 플럼은 오로지 피해자일 뿐이며 부당하게 당하고 있을 뿐인 것이다. 이유가 플럼에게 있지 않은데 왜 자학하는가? 베레나는 플럼이 가져야 할 것은 공포가 아니라 분노라고 말한다. 그리고 외로워 할 필요도 없다고 말한다. 플럼이 일원이 되고자 갈망하는 그들은 절대 그럴만한 가치가 없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뉴 뱁티스트 프로그램을 생각한다면 왜 작가가 플럼과 '제니퍼' 사건을 병행시키는 지 어느 정도 납득이 된다. '제니퍼'는 사회를 바꾸려는 외적인 변화를, 플럼은 내적인 변화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사자가 된 생쥐가 여전히 생쥐의 의식을 버리지 못하고 고양이가 나타나면 달아나기 바쁜 옛 이야기처럼 양성 평등은 제도적 개선만으로 이뤄지진 않는다. 내적인 변화 역시 함께 이뤄질 때 그것은 보다 제대로 자리 잡는다. 하지만 소설에서 '제니퍼'의 부분이 제대로 매조지 되지 못하고 약간 흐지부지 된 감이 있어 아쉬움이 남는다. 아무래도 범죄라는 형식을 통해 진행된 것이라 그렇게 된 것 같은데, 그래도 좀 더 살을 더 붙여주었으면 좋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 재밌는 소설이었다. 개그 프로그램에서 너무나 쉽게 희화화 되는 뚱뚱한 여자가 정말 얼마나 커다란 문제를 가지고 있는지 제대로 알게 되었다. 그 고통을 너무나 적나라하고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기에 혹시 작가가 몸소 겪은 것을 투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다. 끝까지 흥미롭게 읽게 하면서도 말하고 싶은 주제마저 놓치지 않으니, 지(知)와 정(情) 모두에서 포만감을 주는 작품이다. 띠지에 보면, '시녀 이야기'를 쓴 마거릿 애트우드의 말이 나와있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와우, 맹렬하고 기막히게 재미있다.'


 나도 동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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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8-07-20 0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상에는 이런저런 사람이 있듯 몸도 마른 사람이 있고 살찐 사람이 있는 거겠지요 예전에는 살찐 걸 더 좋게 봤다고 하던데, 지금은 반대가 되다니... 어제 라디오 방송에서 그런 걸 잠깐 들었어요 예전에는 귀족이나 부자는 잘 먹어서 살찐 것을 자랑으로 여겼는데 누구나 잘 먹게 되고는 가난한 사람과 부자가 다른 게 없어져서 부자는 자신은 다르다는 걸 나타내려고 반대로 마른 걸 좋게 여기게 했다고 합니다 그 말 맞는 것 같아요 그게 지금까지 이어지지 않나 싶습니다

겉모습이 중요하지 않다 생각해도 그런 데서 자유로운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을 것 같기도 해요 저도 마찬가지예요 남보다 자신부터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다른 사람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좋겠네요


희선
 
베어타운 베어타운 3부작 1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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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베라는 남자'를 쓴 프레드릭 배크만의 신작 소설 '베어타운'은 세월호 참사 후, 1년 동안의 우리나라를 많이 생각나게 한다.

 이 소설은 우리와 결코 먼 얘기가 아니다. '오베라는 남자'를 읽었을 땐, 어쩌다 운이 좋아 원더 히트를 치게 된 작가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베어타운'은 그런 생각을 버리게 만든다. 그저 운이 좋아 성공한 게 아니었던 것이다. 그는 내공이 심후한 진짜 작가였다. '베어타운'이 그걸 증명하고 있다. 이야기와 문장 모두가 감탄스럽다. 집단이 온갖 이유와 논리를 내세워 한 개인의 불행을 철저히 무시하고 배척하는 이야기가 이토록 설득력 있고 깊이가 있다니.


 소설이 하나의 전선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바로 집단 대 개인의 전선이다. '베어타운'은 한 때 화려한 과거를 가졌으나 이제는 몰락한, 말하자면 겨울잠을 자는 곰 같은 형국의 마을이다. 불행과 절망, 무기력은 만연한데, 부활의 희망은 어디서도 찾을 수 없는 마을. 때문에 마을 사람들은 하키 팀에 전적으로 매달린다. 오직 그것만이 마을을 재활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키 팀에 마을의 사활을 걸다 보니 방해 혹은 장애가 되는 인물은 족족 버려진다. 대표적으로 하키 팀 코치 수네가 그렇고, 감독 페테르의 딸 마야가 그러하다.


 대도시의 시끄러운 새끼들은 절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정말 조그만 하키팀에서 정말로 재능 있는 선수를 키울 때의 기분을 말이다. 그건 마치 얼어붙은 마당에서 꽃을 피운 벚나무를 보는 느낌이다.(p. 51~52)


 수네, 그는 그렇게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던 페테를 발굴하여 세계적인 선수로 키웠으며 어디로 갈지몰라 방황하던 다비드에게 청소년 아이스하키팀 감독을 맡게했을 뿐만 아니라 열정 넘치는 케빈을 잘 조련시켜 마을의 미래마저 어깨에 짊어지고 있는 훌륭한 선수로 만들었다. 이처럼 그는 팀이 아니라 철저하게 개인에게 몰두한 사람이었다. 한 사람에게 열정과 관심을 기울여 제 몫의 삶을 충실히 채워가도록 한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집단의 이익에 쫓겨 오래도록 있었던 코치 자리에서 쫓겨난다. 집단이 개인에게 우선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베어타운'은 변했다. 삶을 충만하게 만드는 하나의 가능한 수단으로만 존재했던 하키가 그것이 없으면 삶조차 불가능한 유일하고도 절대적인 것이 되었다. 하키는 이제 단순히 팀 경기가 아니다. 마을 사람 전체의 삶을 주관한다. 그들 모두가 선수고, 한 팀이다. 다비드가 강조하듯, 승리를 위해 똘똘 뭉친다. 개인은 없다마야의 강간은 그렇게 변해버린 '베어타운'을 극명하게 드러낸 결정적인 계기였다.


 그 시합은 전부다 다름없다. 그 뿐이다.(p. 22)


 소설은 처음부터 마야가 하키에 시큰둥 하다는 걸 강조한다. 그는 기타 연주를 더 사랑한다. 기타, 홀로 칠 수밖에 없는 그 악기는 팀이 아니라 개인의 상징이다. 그런 마야가 청소년 하키 팀의 케빈에게 강간 당한다. 청소년 하키팀 감독 다비드는 언제나 팀의 승리를 위해 개인을 포기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런 다비드의 말에 충실했던 케빈이 마야를 강간했다. 개인에 대한 집단의 일격이다.


 마야의 부모인 페테르와 미라는 자식을 한 번 잃은 적이 있다. 그 일로 내내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으며 다시는 그런 일을 겪지 않으려 노심초사 한다. 그런 부부에게 또 한 번 커다란 비극이 닥친 것이다. 페테르와 미라 역시 개인의 영역에 서 있다. 페테르는 수네의 퇴출을 거세게 반대하고, 미라는 변호사로 개인의 권익을 위해 싸운다.(미라 역시 하키를 좋아하지 않는다. 다만 하키를 좋아하는 사람을 좋아할 뿐이다.(p. 23)) 무엇보다 그들이 가진 아픔이 집단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만든다.


 소설 초반은 페테르와 미아 부부 생활을 보여준다. 그런 가족의 모습은 여지없이 사랑스럽다. 가장 진정한 연대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다. 서로에 대한 상호 존중과 배려 그리고 가없는 책임이 사랑이라는 형태로 나타나는. 초반에 이런 가족의 모습이 나타나는 것은 마야의 강간 뒤 나타나는 케빈 가족의 모습과 대조되기 때문이다. 이제와 얘기지만, 소설은 다양한 인물을 담고 있고 저마다 목소리를 가지도록 허용한다. 그 어떤 인물도 함부로 폄하하지 않는다. 자신이 왜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해서 자신을 변호할 기회를 공정하게 부여한다. 판단은 독자에게 돌린다. 그 모든 인물들이 저마다 설득력을 가진다는 것, 이 소설의 훌륭한 점은 바로 여기에 있으며 그래서 배크만은 진짜 작가인 것이다.


 이 모든 파노라마에서 우리는 집단의 이익 때문에 쉽게 버려지는 불행한 개인을 본다. 그건 언뜻 벤담의 공리주의 같지만, 케빈 가족과 마을 유력자로 구성된 하키팀 이사회의 모습은 그들이 주장하는 공익이라는 게 사실은 사익의 집합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하키팀 응원단 '불곰'처럼 팀의 승리에 방해되는 이들에겐 폭력을 불사할 정도로 하나로 똘똘 뭉치는 마을 사람들조차 실은 저마다 사익을 추구하고 있을 뿐이란 게 드러난다.


 바로 이러한 모습 때문에 마을 전체에게 집단 괴롭힘을 당하는 마야는 세월호 참사로 보이고, 그 마야를 위해 마을과 맞서 싸우는 페테르와 미라는 유가족으로 보이는 것이다. 참사 후 1년 동안 우리나라 역시 '베어타운'의 마을 사람들과 똑같은 이유로 삼성이 준 돈으로 일베가 유가족 단식 현장 바로 옆에서 치킨과 피자 폭식 투쟁을 하는 등, 세월호 유가족들을 얼마나 무시하고 핍박했던가. 이것은 비단 특별한 케이스가 아니다. 공동체라면 어디나 빠질 수 있는 어둠이다. 그렇기에 그런 위험에 대해 사유의 시간을 가져오는 '베어타운'이 소중할 수밖에 없다. 하기사 작가가 있는 스웨덴도 이민자에 대한 차별을 공공연히 옹호하는 우익들이 널리 지지받고 있는 형편이 아니던가.


 공동체는 어려울수록 약한 존재를 배제해서 자신의 이익을 지키려는 경향이 있다. 현재 미국, 일본, 유럽 할 것 없이 횡행하고 있는 자신과 다른 이들에 대한 차별이 단적인 예다. 그러나 '베어타운'은 이처럼 약한 누군가를 배제해서 이뤄지는 연대란 그것이 제아무리 거창하고 아름다운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다만 지옥에 불과하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그것도 억지로 독자를 원하는 자리로 끌고 가지 않고 스스로 생각할 수 있도록 하면서 말이다. 이는 비단 공동체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역시 얼마든지 자신의 이익에 방해된다는 이유로 타인을 지옥으로 여길 수 있기 때문이다. '타인은 지옥이다'는 프랑스 철학자 사르트르의 말이었다. 그는 도움을 구하려 새벽에 홀로 찾아온 프란츠 파농을 오직 자신의 사생활이 침해된다는 이유로 문전박대했다. 실존주의는 개인의 자유에 천착한 철학이다. 그들은 세상의 모든 집단이 개인에게 가하는 중력을 없애버리려 했다. 그러나 사르트르의 이러한 모습은 자유의 추구의 이면엔 이기심이 있다는 걸 잘 보여준다.


 때문에 이 소설의 개인은 그런 개인으로 묘사되지 않는다. 그것이 소설이 페테르와 미라가 자식의 상실이라는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는 이유다. 또한 마야와 아난의 관계가 소설이 마지막에서 강조되는 까닭이기도 하다. 여기의 개인은 책임을 기반으로 한다. 책임이란 내 것을 내려놓고 타자를 떠맡는 모습이다. 페테르가 이제 막 아버지가 된 다비드 보다 훨씬 더 강하고, 그들의 가족과 마야와 아난의 관계가 마을 사람들이 이루는 집단 보다 훨씬 더 강했던 것 역시 책임이 반석이 된 연대였기 때문이다.


 결국 '베어타운'은 우리들에게 '무엇이 진짜 연대인가?'를 묻고 있다. 그러면서 스스로도 답하고 있다. 가장 강한 자를 위해 뭉치는 게 아니라 가장 약한 자를 위해 뭉치는 것, 그것이 바로 진정한 연대라고. 우리는 나만의 이익과 자유를 무리의 힘에 기생하여 타인에게 강요하고픈 유혹을 쉽게 받는다. 이렇게 하는 게 쉽고 덜 귀찮기 때문이다. 사랑은 힘들고 귀찮다. 내가 내려놓아야 할 이익과 자유가 많고 짊어져야 할 책임은 큰 까닭이다. 하지만 그런 유혹에 빠지지 말고 가장 약하고 보잘 것 없는 자의 아픔 또한 내 아픔과 다르지 않다고 여기고 그것을 치유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 그를 통한 연대야 말로 진짜 연대라는 것을 '베어타운'은 강조한다. 눈 위의 난 곰 발자국이 아니라 새 발자국처럼 조용하게...


 지난 4월 27일엔 역사적인 남북 정상회담이 있었다. 우리는 이제 더 큰 공동체를 바라고 그것을 목전에 두고 있다. 다시금 연대의 모습에 대하여 고민이 깊어지는 시기이다. 그 사유를 '베어타운'을 길잡이 삼아 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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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뉴욕의 맛
제시카 톰 지음, 노지양 옮김 / 다산책방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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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뉴욕의 유명 푸드 블로거이기도 한 제시카 톰의 첫 소설, '단지 뉴욕의 맛'의 원제는 무시무시하다. '음식 매춘부'인 것이다.

 어떤 때는 제목이 작품의 모든 것을 말해주기도 하는데, 바로 이 작품이 그러하다. 권력과 부가 가져다 주는 맛에 취해 그만 자신의 본 모습도, 원래 신념도 깡그리 잊어버린 여자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푸드 블로거 출신답게 뉴욕의 유명 레스토랑을 중심으로 음식 세계과 한가득 펼쳐진다. 곳곳마다 요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니, 허기질 때 읽으면 곤란한 책이다. 


 주인공의 이름은 티아.

 그녀는 대학생 때 그저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추억하며 썼던, 할아버지와 함께 했던 마지막 요리 시간에 대한 글이 예상 밖의 호응을 얻고 뉴욕타임즈에도 소개되며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요리 평론가인 헬렌의 칭찬까지 받게 되자 원래의 꿈을 바꿔 헬렌처럼 요리 평론가를 꿈꾸게 된다. 그는 뉴욕대학원 환영회장에 헬렌이 온다는 얘길 듣고 그녀에게 좋은 인상을 남기기 위하여 공들여 준비한 요리를 가지고 참석한다. 그러나 티아가 정작 만난 것은 헬렌이 아니라, 헬렌에 이어 뉴욕타임즈에 요리 칼럼을 쓰는 마이클 잘츠였으니. 첫 인상도 별로였고, 첫 만남도 좋지 않았던 티아는 마이클 잘츠가 자신을 알아봄에도 불구하고 자리를 피하려 했으나 자신이 헬렌을 만나게 해 줄테니 메일 주소를 알려달라는 말에 헬렌을 만나고 싶은 마음에 그만 알려주게 된다. 그 때는 티아가 대학원을 나와 진로를 결정해야 할 시기로, 헬렌의 인턴이 되는 것이 티아가 가장 바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달콤한 사탕이 충치를 부르듯, 귀에 달달한 유혹 역시 독을 품고 있게 마련이다.

 그녀는 헬렌의 인턴이 되기는 커녕 자신이 지원하지도 않았고 단 한 번도 원한 적이 없었던 유명 레스토랑의 휴대폰 보관실을 담당하는 인턴 자리로 가게 된다. 요리 평론가가 되고 싶은 그녀에겐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 경력이라 담당 교수를 찾아가 항의하지만, 뜻밖에도 자기가 거기에 지원한 걸로 나온다. 어찌된 영문인지 도통 모를 일이었지만 레스토랑에서 일하는 것도 평론을 쓸 때 아주 유용한 경험이 되어줄 것이라는 담당 교수의 말에 설득되어 티아는 결국 거기서 일을 한다. 그러다 그 레스토랑에서 다시 한 번 더 마이클 잘츠를 만나게 되는데, 그는 더 음험한 유혹의 손길을 뻗쳐 온다.

 자신이 지금 미각을 잃어 레스토랑을 평가하는 칼럼을 쓸 수 없으니 티아더러 대신 써달라고 하는.


 그렇지 않아도 아무도 몰래 레스토랑의 요리를 평가하러 온 마이클을 유일하게 알아봐, 정성껏 서빙한 것으로 레스토랑의 신임을 한껏 얻고, 또한 뉴욕의 레스토랑에 가장 영향력이 큰 마이클과 대등하게 요리에 대해 말한 경험 때문에, 누군가에게 영향력 즉 권력을 미친다는 것의 쾌감을 알아버린 티아는 마침내 그 요구를 받아들이게 되고 마이클 잘츠의 이름을 빌어 자신이 일했던 레스토랑마저 글로 몰락시키는 등, 점점 권력의 단맛에 취해 어둠의 길로 가게 된다.(이런 걸 전문 용어로 '흑화'라고 하던가?) 그렇게 요리가 정말 좋아 글을 써는 게 아니라, 자신의 권력을 행사하기 위해 글을 쓰는, 제목 그대로 '음식 매춘부'가 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커커스 리뷰'도 말했듯이, 영화 '악마가 프라다를 입는다'가 연상되는 것 같다. 그 영화 역시 패션 업계 최고 권력이 가지고 있는 힘과 화려함에 눈이 멀어 원래 자신의 모습을 차츰 잃어가는 이야기이니까. 하지만 굳이 커커스 리뷰의 말을 듣지 않아도 소설을 읽으면 절로 영화가 떠오를 것이다. 그 영화가 뉴욕 패션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알려주었듯 이 소설도 그 세계에 있지 않으면 잘 모를 수밖에 없는 뉴욕 레스토랑 세계에 대해 한껏 알려주고 있으니까. 다시 말해 주방이라는 뒷 세계에선 어떤 일이 벌어지고, 레스토랑이 얼마나 조직적으로 메뉴와 고객 관리를 하며 몰래 잠입하는 요리 평론가 사진을 미리 걸어놓고 대처하는 모습 등등. 적어도 뉴욕에선 유명 요리사가 요리 하는 모습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자리는 특정 고객에게만 할애된다는 것만은 이 소설이 아니면 볼 수 없는 장면이다.


 당연하게도 티아는 씁쓸한 경험을 한다. 권력을 얻는 대신 늘 자기 곁에서 힘이 되어 주었던 소중한 사람을 하나씩 잃어가는 것이다. 그렇게 티아는 소중한 교훈을 얻는다. 540페이지의 두툼한 분량이지만 전개가 빠르고 잘 모르던 뉴욕 레스토랑의 요리와 현장이 펼쳐지는 지라 읽는 건 순식간이다. 아마도 이 소설을 즐기지 못하게 만드는 단 하나가 있다면 그건 주인공이 아닐까 한다. 주인공이 소설에서 가지는 마음, 하는 선택과 행동이 그리 널리 공감을 얻긴 힘든 까닭이다. 하지만 그걸 삶의 소중한 깨달음을 얻기 위한 과정이라 생각한다면 그런 티아의 모습 쯤은 살짝 눈감아 줄 수 있지도 않을까 생각한다. 어쨌든 브루클린 출신답게 뉴욕적인 분위기가 가득하고, 여기저기 요리와 레스토랑에 대한 얘기가 넘쳐난다. 이런 분위기, 이런 소재를 원하시는 분들에게 이만한 먹음직스런 정찬도 또 없을 듯 하다. 군침이 도시는 분들은, 주문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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퐅랜, 무엇을 하든 어디로 가든 우린
이우일 지음 / 비채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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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른 이들은 봄이나 여름 혹은 가을에 여행서 읽는 것을 좋아하겠지만, 저는 겨울에 읽는 것을 더 좋아합니다. 어떤 이들에게 여행서는 다만 정보 취득이라는 실용의 목적 뿐이겠지만 저는 다른 목적으로 읽습니다. 굳이 내게 쓸만한 정보를 얻고자 함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이불 밖으로 발도 빼기 싫은 겨울에 여행서를 더 즐겨 보는 것입니다. 여행서란 내게 상상 속 세계로의 초대장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언제 그 곳으로 가기 위해 여행서를 읽지 않습니다. 공상을 위해서 입니다. 그 풍경 속에 있는 제 모습을 상상합니다. 글 속의 인물들을 내가 만나면 어떤 대화가 오가고 일들이 펼쳐질까 몽상합니다. 제겐 그것으로 족합니다. 그러므로 세세한 정보들이 가득 들어있는 여행서 보다 저자 자신이 겪고 경험한 여행 에세이 읽는 것을 선호합니다. 이를테면 무라카미 하루키의 '시드니' 같은 책 말이죠. 그 책 읽어보셨나요? 제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드는 여행에 대한 책이었습니다. 마라톤에게 도대체 무슨 매력이 있는지 모르겠다는 분은 '시드니'를 꼭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마라톤'이야 말로 세상에서 가장 전략적이고 흥미로운 스포츠라는 걸 물씬 느낄 수 있으실 겁니다. 저는 원래 여행 에세이도 잘 읽지 않았습니다만, '시드니'를 읽은 후로 바뀌었습니다. 다른 책의 리뷰인데, 자꾸만 '시드니'를 언급하는 것은 제게 여행 에세이의 재미를 처음으로 깨우쳐 준 책이기 때문입니다.


 이우일의 '퐅랜'도 그렇게 해서 읽게 된 책입니다. 네, 이 책도 여행 에세이입니다. 



 가족 모두가 2015년에 미국 포틀랜드로 훌쩍 떠나서 2년 간 살아온 경험이 한 권의 책으로 엮이어 나온 것입니다. '퐅랜'이란 제목은 아마도 '포틀랜드'의 원어 발음이 아닐까 싶습니다. 제게 '포틀랜드'하면 떠오르는 것은 구스 반 산트 영화 감독입니다. '포틀랜드'라는 곳을 그의 영화를 통해 처음 접했기 때문입니다. 구스 반 산트 감독 자신이 포틀랜드 출신이기도 합니다. 데뷔작 '말라 노체'를 비롯해서 '드럭스토어 카우보이', '나의 고향, 아이다호', '굿 윌 헌팅', '엘리펀트'를 다 포틀랜드에서 찍었습니다. 이게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재밌는 점이기도 합니다. 그의 작품 중 높은 평가를 받는 것은 꼭 '포틀랜드'에서 찍은 것이거든요. 뭔가 '포틀랜드의 힘' 같은 게 있는 걸까요? 그러나 토박이 구스 반 산트는 어쨌든 제겐 그런 힘이 있으리라고 잘 생각되지 않습니다. 구스 반 산트의 영화를 통해 제가 본 포틀랜드의 풍경은 참으로 쓸쓸하고 우울하며 절망적이었거든요. 특히 '나의 고향, 아이다호'는 정말...


 도대체 작가 이우일은 어디서 포틀랜드의 매력을 느꼈던 것일까요? 이렇게 책까지 낸 것을 보면 매력이 꽤나 큰 것 같습니다. 설마 주구장창 까기 위해서 책 한 권을 쓰진 않겠지요. 쓴다고 해도 누가 그런 것을 읽어줄까요? 그러니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읽게 되었습니다. 내가 미처 느끼지 못한 포틀랜드의 매력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일단 포틀랜드는 비가 참 많이 옵니다. 10월부터 다음 해 5월까지 우기가 계속된다고 합니다. 아, 가을과 겨울 그리고 봄 내내 비가 온다니... 상상만 해도 우울해질 것 같습니다. 그런 곳이 자전거 도시로 유명하다고 합니다. 포틀랜드는 '자전거의 도시'라는 별명답게 미국 최대 규모의 잘 정비된 자전거 도로가 있답니다. 그래서 미국에서 차가 없이도 살 수 있는 유일한 도시라고 하는군요. 이 점은 마음에 듭니다. 그리고 맛집도 상당히 많다고 합니다. 특히 요즘 유행하는 푸드 트럭이 아주 많다는군요. 비가 오지 않는 날에 자전거를 타고 돌아다니며 다양한 푸드 트럭에서 이것 저것 골라먹는 제 모습을 상상하니 어느새 입에 군침이 가득 고입니다. 작가는 말미에 포틀랜드의 맛집까지 소개해 놓았더군요. 그렇지 않아도 포틀랜드는 해마다 재즈 페스티벌이 열려 재즈의 도시로도 유명한데, 그런 맛집에서 재즈 밴드의 연주를 들으면서 먹는다는 상상을 하니 공복감이 더욱 치밀어 오릅니다. 아아... 이 허기를 어쩌란 말입니까? 


각 글마다 이런 부록이 들어가 있습니다. 이것은 '포틀랜드 맛집 소개' 란입니다.

 이우일 작가가 직접 그린 삽화 또한 많이 들어 있는 책 읽는 재미를 높입니다.


 그런데 그 허기 보다 더 큰 것이 또 저를 옥죄어 옵니다. 솔직히 저는 이우일 작가가 포틀랜드로 떠난 게 다른 거 다 집어치우고 바로 이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포틀랜드가 바로 수집가들의 천국이라는 사실 말입니다. 이우일 작가는 여러 가지 것을 수집하는 것으로 유명하죠. 그런 그에게 온갖 중고 물품이 넘치는 포틀랜드는 그야말로 매력적인 곳이 아니었을까요? 글에서도 그런 마음이 마구 묻어납니다. 자신이 원하는 물건을 구매할 때의 글은 글마저 저자 마음처럼 덩달아 신이 난 것 같거든요. 저도 못 말리는 수집 욕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런 글을 보노라니 허기 보다 더 큰 수집욕이 절 옥죄어 오더군요. 이처럼 여기 '퐅랜'엔 다른 여행서에는 잘 볼 수 없는, 오직 거기서 오래 산 자만이 쓸 수 있는 포틀랜드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그래서 다 읽고나면 굳이 직접 가지 않아도 이미 가 본 듯한 느낌마저 납니다. 후후.


 여행서에는 제가 만든 말이긴 합니다만 '이방인 버프'라는 게 있습니다. 현지인의 눈엔 별 거 아니고 오히려 나쁘게 보이는 것도 이방인의 눈에는 너무 좋게 보이고 매혹적으로 다가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걸 달리 말하면 '이국적'이란 것이겠지요. 경주 사람들에겐 심드렁한 기와 지붕이 외국인 눈엔 전혀 다르게 보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죠. 이우일의 '퐅랜' 또한 그런 게 없다고 말하긴 어려울 듯 합니다. 그래서 그 역시 프롤로그에서 '이것은 지극히 나만의 퐅랜 이야기다'라고 단서를 달아 놓았겠죠. 하지만 그걸 감안하고 봐도 이 책 속의 '포틀랜드'는 참 매력적입니다. 이우일이 결심했듯이 정말 한 번 가서 오래 살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한없이 이국적인 것과 조우할 때 오히려 자유를 느끼고 보다 더 참된 자신의 모습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고 말했는데, '포틀랜드'도 그런 것을 줄 것 같습니다.


책의 마지막엔 이렇게 이우일 작가가 직접 그린 포틀랜드 일러스트 지도가 부록으로 들어있습니다.


 겨울은 여행에 어울리지 않는 계절입니다. 그러나 꼭 몸이 움직여야 여행일까요? 머릿속의 움직임도 여행이라고 얼마든지 부를 수 있지 않을까요? 마음 먹기에 따라서 우리들은 얼마든지 책으로도 아주 흥미로운 여행을 떠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건 제가 여러 번 경험한 것이기에 자신있게 말할 수 있어요. '퐅랜'은 겨울이라는 이유로 굼뜨는 육체의 한계에서 자신을 해방하여 내면을 통해 멋진 여행을 마련해주는 책입니다. 여기엔 노자도, 다른 준비할 것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저 펼치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어느 순간 당신은 비 내리는 포틀랜드 어느 거리에서 우산 없이 쏘다니는 많은 행인들과 중고 매장에서 기쁜 마음으로 이런 저런 빈티지한 물건들을 고르고 있는 사람들을 만날 것입니다. 풍경은 그렇게 찾아오고 일상의 여백이 홀연히 생겨납니다. 그 여백 속에서 비록 지금 있는 곳이 좁은 이불 속이라 해도 낯선 것이 가져다 주는 자유를 가득 호흡할 것입니다. 감히 그런 책이라 말하고 싶습니다. '퐅랜'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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